느헤미야

홈 > 성경 > 성경주석구약 > 느헤미야
느헤미야
느헤미야 주석



성 경: [느1:1]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주); 하가라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 여기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이 없다고 해서 본서의 영감성을 의심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물론 예언서들의 초두에서 예언자들이 자신의 전언(傳言)이 신적인 기원을 갖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다(롑 1:2; 호 1:2; 암1:1). 그러나 그 예언서들은, 철저하게 예언적 특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의 전달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Schultz). 그러면 본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본서가 '느헤미야'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본절은, 본서가 에스라서의 속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만 느헤미야에 의해 독립적으로 구성된 책임을 암시한다. 한편, '하가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희귀한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분명치 않지만 '여호와의 흑암'으로 추측된다. 반면에 '느헤미야'는 포로 전후기를 막론하고 대단히 흔했던 이름으로서,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이다. 바로 이 이름의 축약형이 '나훔'이다(나 1:1).

(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 년. B.C. - 445년을 가리킨다.

(주);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 '기슬르월'은 태양력으로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에 해당되는 달(月)이 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당시 느헤미야가 머물러 있었던 '수산 궁'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르시아 왕들은 대개 겨울에는 '바벨론'을, 여름에는 메대의 '악메다'를 휴양지 삼아 거기서 통치하였으며, 봄이나 가을이 되어야 '수산 궁'로 돌아왔기 때문이다(스 6:2; 에 1:2). 느헤미야가 고국으로부터의 급박한 소식을 접하고서도(2, 3절) 즉시 왕에게 부탁하며 귀국할 수 없었던 원인도바로 여기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실제로 느헤미야가 자신의 괴로운 심정의 자초지종을 아뢰고서 귀환 허가를 받은 것은 '니산월'(2:1), 곧 B.C. 444년 3, 4월에 해당되는 때였다.

성 경: [느1:2]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주);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친동생인 것으로 추정된다(Fensham, Schultz, 7:1, 2). 나중에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느헤미야를 돕는 관리로 임명되었다(7: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셨다'이며, '하나니아'라는 이름의 추약형이다.

(주);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 이들이 '하나니'를 우두머리로 해서 '수산궁'에 온 것은, 예루살렘의 급박한 상황을 페르시아 왕궁의 고위직에 있었던 느헤미야에게 알리려는 의도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니'는 페르시아나 바벨론에 살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결국 이것은 '하나니'가 자신의 친형 느헤미야와 헤어져 에스라를 따라 B.C. 458년에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대열에 합류 했었음을 암시한다.

(주); 내가 형편을 물은즉 - 이처럼 느헤미야가,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것을 알리려고 급히 찾아온 동생의 일행이 보고를 하기도 전에 먼저 질문한 것은, 그가 고국의 소식에 매우 목말라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Fensham). 특히 여기의 '형편을 물은즉'(*, 솨알)은 '구걸하다', '간청하다', '질문하다' 등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간절하게 요구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출 3:22; 삿 5:25; 왕상 3:1; 렘 30:6 )

(주);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 이것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스 2:1). 유대인들에게 있어 포로 생활이란 커다란 수치였으므로, 성지(聖地)에로의 귀환은 곧 수치를 면한 것으로 이해되었다(스9:13 참조).

성 경: [느1:3]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의 안부를 묻는 느헤미야]

(주);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 이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숫자가 적고 무장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이방인들의 노략 대상이 되며, 지극히 가난하여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Batten). 한편, '그 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로 갈린다. (1) 유프라테스강 서편 지대를 가리킨다는 견해(Aharoni), (2)사마리아를 가리킨다고 보고 당시 유대는 페르시아의 행정 구역상 사마리아에 속했다고 이해하는 견해, (3) 유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유대가 고레스나 다리오 때에 이미 페르시아의 독립된 한 속령으로 인정받았다고 보며, 학개가 스룹바벨을 '유다 총독'으로 지칭한 사실을 그 증거 자료로 제시한다(학 1:1). 따라서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할 듯하다.

(주); 예루살렘 성은 훼파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 이 같은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1)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와(Feysgan, Rawlinson, Schultz),(2) 스 4:7 - 24에 기록된 르훔과 심새등의 훼방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Williamson, Kidner). 예루살렘 함락은 본문 시점로부터 무려 140여 년 이전에 발생한 오래된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본문의 정황은 최근에 발생한 충격적인 요소가 전달된 것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이견해는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다. (3) 에스라서와 본서 사이의 공백 기간인 12년 사이에 몇차례의 성벽 재건이 시도되었으나 그때마다 훼방당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시대 설정의 측면에서 비교적 무난하다고 이해된다.

성 경: [느1:4]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 울고 슬퍼하며 - 예루살렘 거민들이 성벽없이 살고 있음으로 해서 주변 민족들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괴로움을 당할 것을 염려한 느헤미야의 반응으로서, 유다 백성의 죄로 인하여 삼 주 동안 슬퍼했던 다니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단 10:2).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의 고관으로서 누리는 현세적 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광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민족의 환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신의 일처럼 고뇌하였다.

(주);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 여기의 '금식'은 '기도'와의 연결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에 4:1 - 3 주제 강해, '금식에 대하여' 참조). 즉, '금식'은 기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간절함을 표시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Brongers). 이 같은 '금식'과 '기도'의 밀접한 관련성은 에스라(스 10:6), 에스더(에 4:16), 다니엘(단 9:3), 사무엘(삼상 7:5, 6) 등에 의해서도 예증된다. 한편, '하늘의 하나님'은 페르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신 '오르무즈드'(Ormuzd)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느헤미야가 전통적인 여호와 신관(神觀)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그 당시 페르시아인들의 용어만 빌려 사용하였을 뿐, 실상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여호와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느1:5]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 여기서 '크고'(*, 가돌)는 '큰', '위대한', '힘센'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로서 인격에 적용될 때, 그 인격의 존귀성 혹은 다른 사물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가리킨다(시 57:10; 71:19; 76:1).

(주); 주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 - '주를 사랑하고'와 '계명을 지키는'은 본질상동일하다. 주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방식이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 문자적으로 '언약과 긍휼을 지키시는'이다. 여기서 '언약'(*, 베리트)은 언약 상대자에게 시여(施與)되는 '긍휼'(*, 헤세드)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구는 '언약적 사랑을 포기치 않으시는'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Fensham). 이 같은 사상은 신명기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신 5:10; 7:9).

(주); 주여 간구하나이다 - 여기의 '주'(*, 엘)는 강력한 능력의 소유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호칭이다. 따라서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존재들 위에 뛰어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Jack Scott). 한편, 본절의 기도는 단 9:4의 기도 내용과 내용상 유사하다. 아마 느헤미야는 B.C. 535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니엘서에 매우 익숙했던 것 같다.

성 경: [느1:6]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 -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신분에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주); 주야로 기도하오며 - 여기에는 원문에 있는 '하욤'(*), 즉 '지금' 혹은'오늘'이라는 단어가 탈락되어 있다. 그런데 이 '하욤'은 느헤미야가 그날 하루 동안만 기도했었음을 암시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느헤미야'가 그날부터 당장 기도에 돌입했음을 말해준다. 어떻든 그의 '주야'를 막론한 기도는, 그 당시 왕이 '수산궁'에 없었던 관계로 왕이 그곳으로 돌아올때까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관한 비보(悲報)를 접한 것이 양력으로 11월 중순 경(1절)이고, 아닥사스다왕이 바벨론의 휴양지에서 3월 중순 경에 돌아왔다고 한다면(1절) 느헤미야의 특별 기도는 약 4개월동안 계속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주);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 이것은 주로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의 범죄 행위와 관련이 있다(8, 9절). 한편, 여기의 '자복하오니'는 에스라가 그랬듯이(스 9:6, 7), 느헤미야도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인양 생각하는 등, 시공간(視空間)을 막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철저한 연대 의식을 소유했었음을 잘 보여준다.

(주); 주는 귀를 눈을 여시사 - 이 같은 신인동형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표현은, 솔로몬의 기도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즉, 솔로몬은 일찍이 만일 백성들이 범죄하여 타국 땅으로 끌려간다고 해도 그들이 회개하는 기도를 하면 그것을 응답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끔 해달라고 기도한 일이 있었다(왕상 8:46 - 53; 대하 6:36 - 40). 특히 솔로몬은 회개하는 백성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관련해서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소서'라고 했었다(왕상 8:52; 대하 6:40).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 하시기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 7:15)라고 하셨다는사실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애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느헤미야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마치 포로 시대의 상황으로 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느헤미야의 영적 판단은 (1) 당시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등지에서 여전히 귀환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2) 예루살렘도 포로로 끌려갔을 당시의 상황에서 대부분 회복되지 못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당연했다.

(주); 나의 아비집 -이것은 슐츠(Schultz)의 주장과는 달리 느혜미야가 다윗의 직계 후손이었음을 암시치 않는다(Joseph Blenkinsopp : Williamson). 이것은 다만 온 이스라엘과 함께 범죄의 자리에 동참했던 자들로서의 느헤미야의 조상을 가리킨다.

성 경: [느1:7]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 여기서 '계명'(미츠오트)과 '율례'(후킴) 그리고 '규례 '(미쉬파팀)는 동일하게 모세 율법을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 가능하다(시 119:15, 16). 이와 같은 동의어의 삼중적 반복(9:13, 14)은 본절 전반부의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와 뚜렷이 대비시키려는 저자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저자는 여기서 동의어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중의 죄를 범했던 것처럼 연중 암시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위의 세 단어가 모세 율법의 각기 다른 세가지 측면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기는 하다. 그래서 '계명'은 '언약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요구된 특별 조건'인 십계명으로(스7:11), '율례'는 '반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스 7:10)으로, 그리고 '규례'는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행동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케 해주는 기준'(스7:10)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 이 단어들이 철저하게 율법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2) 율법의 모든 국면들이 이 세가지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없다(Rawlinson)는 사실이다. 어쨌든 에스라서와 본서에서는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모세 율법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여준다(1:8; 8:1; 9:14; 10:29; 13:1; 스 3:2; 6:18; 7:6).

성 경: [느1:8]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주); 주의 종 -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대리자였음(신 18:15)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백성들에 의해서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다.

(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흩을 것이요 - 이 같은 말씀은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30:1 - 5을 해석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범죄하면'(*,마알 ) '배은 망덕'(背恩忘德)하게 행동하다' 혹은 '불충성하게 행동하다'의 뜻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은혜를 잊고 다른 신을 찾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는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국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일, (2)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멸망당하는 와중에서 또다른 제 삼국으로 피신한 일(왕하 25:26; 렘 42:10 - 22; 43:1 - 13)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열국'은 앗수르, 바벨론, 애굽 등을 가리킨다. 어쨌든 '흩을 것이요'라는 말의 주된 초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가 되게 하신 역사적 사실에 맞추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성 경: [느1:9]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애통]

본절의 내용은 레위기 26:27 - 45과 신명기 29:14 - 30:10까지의 기록을 축약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 돌아와서 지켜 행하면 - '돌아와서'(*, 슈브)는 죄악된 마음에서의 돌이킴, 곧 회개를 의미한다(시 7:12; 렘 8:6).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래의 축복된 상태로 회복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었다(신 4:30; 30:2; 왕상 8:33; 대하 6:24;욘 3:10).

(주);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 여기서 '쫓긴 자'(*, 니다하켐)는 양을 몰거나(신 22:1) 메뚜기떼를 쫓아내는 행동(욜 2:20)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는 동사 '나다흐'(*)의 수동형 분사로서, 불법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부터 멀리 추방된 사람을 가리킨다(삼하 14:13; 사 16:3; 렘30:17). 특히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중 에스라서에 특별히 많이 나오는 '사로잡힌 자'(스 2:1; 3:8; 4:1)와 동의어로서 사용된다. 따라서 회개할 때 다시 본토로 돌아갈 수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무리로 묘사되고 있다(사 27:13; 겔 34:4, 16: 미 4:6; 습 3:19). 한편, '하늘 끝'은 '가장 먼 곳'을 의미한다(NIV).

(주);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 - 이는 신 12:5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한편,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은 곧 한 인물의 전인격 그 자체를 의미했다고 하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한편, '두려고'(*,레솨켄)는 '임시로 거주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솨칸'(*)의 강조형 부정사이며, '거처로서'의 뜻(NIV, Williamson) 갖는다. '성막'(*, 미쉐칸)이라는 단어가 이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동족어이다. 또한 '택한'(바하르)은 대개 종교적인 목적에 따라 특별히 하나를 구별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며(민 17:5; 왕상 11:13; 시 105:26; 학 2:23), '곳'(마콤)은 성경에서는 대개 종교적인 이유 및 목적 때문에 구별된 경배 처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신 12:14; 수 9:27; 삼상 5:11; 왕상 8:7; 대상 15:1).

성 경: [느1:10]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간구]

(주); 주께서...구속(救贖)하신 주의 종...주의 백성이니 - '구속하신'(*, 파다)은대신 값을 지불하거나 그에 상당하는 대체물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던 한개인에 관한 소유권을 넘겨받는 것을 그 기본 의미로 갖는다(Harris). 한편, '주의 종'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종'이고, '주의 백성'도 '당신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주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같은 신분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신'때문이었다.

(주); 큰 권능과 강한 손 -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음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나온다(출 6:1;9:11; 신 3:24;4:34;5:15; 7:8;9:26,29). 느헤미야는 바로 이와 같은 문구의 사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다. 즉, 이것은 출애굽 때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이전의 형편으로 완전히 회복될 것에 대한 느헤미야의 간절한 염원을 반영한다. 사실 에스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암시했으며(스 1:11 주석 참조). 특히 훨씬 후기의 쿰란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단언하였다(F.M.Cross).

성 경: [느1:11]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배경]

주제2: [동족을 위한 간구]

(주);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 - 이들은 팔레스틴에서 느헤미야를 찾아온 '하나니' 일행을 가리킨다(Fensham , 2절). 느헤미야가 그들을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전달하기 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썼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온갖 위해(危害)요소가 도사리고 있었던(스 8:21, 22, 31) 약 1,400Km의 길을 자청해서 행(行)하여 느헤미야에게 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구가 팔레스틴 본토의 경건한 유대인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음도 배제치 말아야 할 것이다.

(주);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 이것의 구체적 내용은 이어지는 문구와 관련된다. 여기서 '형통하여'(*, 찰레아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시작한 일을 그 과정과 결과까지 성공적으로 이끄시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창 24:21, 40,56; 왕상22:12).이 단어는 성경에서 항상 그 주어가 '하나님'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 이는 (1) 느헤미야에게 왕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리고 소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스 4:11), (2) 느헤미야의 소청이 왕에 의해서 기꺼이 받아 들여지는 것(2:3 - 6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술 관원'이라는 특별한 지위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위의 두 가지 중 첫째의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느헤미야가 중요 직위에 있었으면서도 이 같은 염려를 한 까닭은, 그가 페르시아왕들의 변덕스러움, 즉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호의를 베풀다가도 곧 그 태도를 급변시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느헤미야는 (1) 자신이 왕에게 소청하러 나갔을 경우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왔음을 이유로 왕이 진노하는 것(에 4:11), (2) 자신이 왕에게 소청을 했을 경우 그것을 불쾌히 여겨서 심지어는 선대(先代)의 왕들이 내린 조서까지도 무효로 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이 사람'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왕에 대한 느헤미야의 시각을 잘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느헤미야는 세상 사람의 시각으로 볼 때는 피정복민들의 생과 사를 좌우할 수 있는등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을, 신앙적인 시각에 따라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으로서만 보고 있는 것이다(Fensham). 다시 말해서 이것은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 가고 못가고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달렸다고 보았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문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 그때에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느헤미야가 기도의 응답으로 '술 관원'의 지위에 오른 듯한 오해를 낳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적절치 못하다. 느헤미야는 이미 '술 관원'의 지위에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그때에 술 관원이었느니라'고 번역함이 타당하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여기서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1) 앞의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시사해주며, (2) 자신이 왕에게 소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Rawlinson). 아무튼 느헤미야가 '하나니' 일행이 팔레스틴으로부터 오기 전에 이미 '술 관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수산 궁'에 있었다는(1절) 점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술 관원'에대 한 자세한 내용은 본장 둘째 단락의 주제 강해, '왕의 술 관원으로서의 느헤미야'를 참조하라.

성 경: [느2:1]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아닥사스다 이십 년 니산 월 - '니산월'은 유대 종교력으로 정월에 해당된다. 그리고 '하나니'등이 페르시아에 도착했던 '기슬르 월' 9월이다(1:1). 그렇다면 1:1의'기슬르 월'이 '아닥사스다 제 이십 년'이었다고 할 경우, 본절의 '니산 월'은 '아닥사스다 이십 일 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본절에 '이십 년'이라고 표기된 까닭은, 그 당시 느헤미야가 왕의 재위 년수를, '디스리 월'(양력으로 9-10월)부터를 새해로 간주하는 유대 민간력을 좇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Fensham ). 따라서 '기슬르'(1:1)이나 본절의 '니산 월'은 동일한 년도에 속하는 셈이 된다.

(주);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 이것은 그당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문구이다(Williamson, Fensham ). 사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잔치를 매우 자주 베풀었었다(Fensham, 에 1:3; 5:6). 또한 이것은 고대 중근동 국가들의 일반적 관습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바벨론에서의 월동을 마치고, '니산 월'(양력으로 3-4 월), 즉 봄이 되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있던 '수산 궁'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1:1). 아무튼 왕이 베푼 잔치는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1:11). 한편, 느헤미야는 민족적 재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서 그토록 가슴 아파하면서도 결코 성급하게 서두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요청을 올릴 가장 적절한 기회를 찾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 왔음이 분명하다(Edwin Yamauchi).

(주);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 어떤 이들은 바사 왕실에 술 관원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술을 올릴 차례가 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주); 이 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愁色)이 없었더니 - 이것에 대해서는 (1) 여기의 '없었더니'(*, 로)를 '진실로'(*, 루)로 보고 '진실로 내가 그의 면전에서 근심했었다'라고 하는 해석(Myers, LXX), (2) '왕의 앞에서'(*, 레파나이우)를 '전에'(*, 레파님)로 보고 '내가 전에는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Rudolph), (3)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되 '왕의 앞에서'(레파나이우)의 '왕'을 비인칭으로 번역한 '그것'으로 보고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그 소식 앞에서 근심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해석(Fensham), (4) 맛소라 본문을 그대로 인정하여 개역성경의 번역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Williamson, Rawlinson, Schultz, Keil)등이 있다, 이처럼 (1) (2) (3)의 견해는 모두 맛소라 본문의 수정을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치 못한다는 점에서 (4)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그렇다면 여기의 이 문구는 느헤미야가 그 전에는 항상 밝은 얼굴로 자기의 소임을 다했음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느2:2]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왕이 이르시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의 기도(1:11)가 응답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사실 술 관원이 흥(興)을 최고조로 돋우어야 할 직책에 있으면서 도리어 연회장에서 슬픈 얼굴을 하고 다니는 것은, 한편으로생각하면 그것을 주최한 왕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왕이 느헤미야에게 연민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결과로밖에 볼수 없다.

(주); 근심(*, 로아으) - 이는 앞의 '수색'과 어근에 있어서는 동일하며, 전 7:3에서는 '슬픔'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주);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 본절은 느헤미야가 왜 이 같은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유는 (1) 왕이 연회장내에서 느헤미야가 슬픈 얼굴을 한 것으로 인해 진노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 (2) 왕이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오히려 진노하지 아니할까 하는 염려 등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Fensham). 그러나 느헤미야의 '수색'에 대한 왕의 반응이 사뭇 동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2)의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왜 자신의 간청에 대해서 아닥사스다가 진노할 것으로 염려했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벽 재건사업이 아닥사스다의 명령에 따라 그의 즉위 초기에 중단됐음을 느헤미야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스 4:11, 21). 따라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일로 예루살렘에 가겠노라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요구하는 일은, 곧 아닥사스다에게 그가 내렸던 이전의 명령을 번복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또한 이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라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 부담이 뒤따랐다.

성 경: [느2:3]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고대 중근동의 왕들에 대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찬사형의 인사이다(Rawlinson, Schultz, 왕상 1:31; 단 24:4; 3:9; 5:10; 6:6,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사에 왕의 호감을 사려는 느헤미야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주);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 - '열조의 묘실', 즉 '조상의 무덤'은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다. 특히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 같은 언급은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성읍' 곧 '예루살렘'을 외부의 침입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곳으로 간주토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닥사스다 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 따라 '예루살렘'(스 4:20 )이라는 고유 지명 대신 '성읍'이 사용되고 있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이전에 사마리아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성벽쌓는 일을 중지시켰던 사실을 쓸데없이 상기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을지도 모른다. 또한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그의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었음 암시해준다(1:6).

(주);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 '황무하고'(*, 하레바)는 '말라붙다' 혹은 '죽이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레브'(*)에서 온 형용사로서, 인간 혹은자연의 피조물 등이 특별한 원인에 의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시 106:9; 사 19:5; 34:10; 렘 26:9; 겔 6:6). 따라서 이것은 '하나니'가 예루살렘의 형편을 느헤미야에게 보고할 때(1:3) 사용한 단어, '훼파되고'(파라츠) 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있다. 또 '소화되었사오니'(* 에클루 바에쉬)는 문자적으로 '불에 의해서 먹혔다'의 뜻으로서 1:3의 '소화되었다'(니체투 바에쉬) 보다 강조적인 의미를 갖는다.

성 경: [느2:4]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갈다.

(주);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여기서 '묵도하고'(*, 에트팔렐)는 '간청하다' 혹은 '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성 경: [느2:5]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했던 것의 핵심적 내용이다. 다른 것들은 '성 중건'의 부차적 요소들일 뿐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성벽의 복구'를 뜻한다(3절).

성 경: [느2:6]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왕후도 곁에 앉았더라 -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왕이 국사(國事)와 관련된 귀빈을 맞이하고 있을 때는 '왕후'가 내전(內殿)에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자리였던 관계로 인하여 '왕후'도 왕과 함께 있었다(Rawlinson). 이런 때에 '왕후'는 관례적으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왕의 발(足)곁에서 왕의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 있었으며 왕과 왕비가 이런 자세로 있는 동안 신하들은 그 주변에 모여 서 있었던 것 같다(Schultz). 그런데 느헤미야가 본절에서 '왕후'가 함께 있었음을 특별히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세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1) 왕이 느헤미야에게 호의적 반응을 보인데는 '왕후'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Myers, Rudolph, Widengren), (2) 느헤미야가 왕으로부터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왕후'라는 장애물이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Batten), (3)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알린 곳은 연회장이 아닌 은밀한 장소에서 였음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Kidner)등이 있다. 그렇지만 첫째, '왕후'는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 왕과 함께 연회장에 참석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매우 보편적이었으며(Rawlinson, 에 1:11) 둘째, 아닥사스다 당시에는 여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으며(Fensham) 셋째, 느헤미야 항상 왕궁에 거하므로 왕의 처첩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넷째, 5절과 6절은 왕이 왕후가 있었을 내전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추측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등으로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한편, '왕후'(*, 쉐갈)에 대해서는 (1) 이와 동일한 아람어 단어가 왕의 첩들을 의미한다는 사실(단 5:23)에 근거하여 왕의 많은 첩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소유한 여인이라는 견해(Williamson, Batten). (2) 이 '히브리 단어가 시 45:9에서는 첩이 아닌 왕비를 가리키고 있음을 근거로 해서 아닥사스다 왕의 유일한 정비(正妃)였던 '다마스피아'(Damaspia)라는 견해(Myers, Fensham, Rawlinson, Schultz)등으로 그 해석이 갈라진다. 그러나 첫째, '쉐갈'이라는 히브리 단어의 시편에서의 용례 둘째, '다마스피아'라는 왕후가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해주는 문헌 등으로 미루어 볼때,위의 두 견해 중 (2)의 것이 더 타당하다.

(주);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즉,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 보내기를 아쉬워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문구는 동의적 대구법의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몇 날에 행할 길이며'와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소요되는 전(全)기간을 묻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러한 반복적 표현을 써서 느헤미야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 내가 기한을 정하고 - 이처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다시 올 날을 직접 정하지 않고, 느헤미야에게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은 느헤미야에 대한 세심한 배려임이 분명하다(본 단락 주제 강해, '에스라 느헤미야의 약사'참조).

성 경: [느2:7]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강 서편 총독들 - 여기의 '총독들'(*, 파하 우오트)은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를 가리킨다(스 8:36). 유프라테스 강 서편에는 이러한 관리들이 많았었던 것같다.

(주); 조서를 내게 주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 에스라의 경우 와는 달리 느헤미야는 다분히 정치적인 명목으로 귀환을 요청하고 있다(스 7:10과 비교). 따라서 그는 팔레스틴으로 가는 여행 길에 페르시아의 지방 관리, 특히 사마리아 관리로부터 적대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았다(Fensham).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자신에 대한 적대 행위를 피하기 위해서 필요 적절한 증표를 왕에게 요구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해된다.

성 경: [느2:8]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느헤미야를 돌아보는 아닥사스다]

(주); 왕의 삼림 감독 아삽 - 여기의 '삼림'(*,파르데스)에 대해서는 (1) 레바논의 삼림(Fensham, Myers, Patrick), (2) 예루살렘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페르시아 왕의 정원(Schultz, Rawlinson), (3) 유다 왕가의 왕실 재산(대상 27:28)이었던, 평지의 감람 나무 밭(Williamson, Keil) 등의 세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성전공사를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목재를 들여온 일이 있었으며(왕상 5:6; 스 3:7) 둘째,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새로이 복구하기 위해서(3절) 필요한 막대한 양의 목재는 레바논 산지를 제외하고는, 적당한 조달처가 없었으리라는 점 그리고 셋째, 건축용으로 적절한 나무는 오직 레바논 산지에서 벌목되는 백향목 뿐이라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1) 삼림 감독이었던 '아삽'이 히브리식 이름의 소유자라는 점, (2) '삼림'이라는 단어가 고대 아리안어에서 온 것으로서 자연림이 아닌 울타리나 담장 등으로 둘러 싸여 있는 숲이 울창한 공원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반론은 첫째, 페르시아 왕이 멀리 유다땅에 개인적인 공원을 두었을 가능성은 문헌적 입증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희박하며 둘째, '아삽'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말'(馬)을 뜻하는 폐르시아어 '아스파'에서 파생된 페르시아식 이름 '아스바다'(에 9:7)와 유사한 형태로도 볼수 있다(Schultz)는 사실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성이 약하다.

(주); 전에 속한 영문의 문 - 여기의 '영문'은 성전 북쪽에 위치 했었던 요새 혹은 망대이다(Fensham, Williamson, Rawlinson). '하나넬 망대'(3:1)는 바로 이것의 한 부분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성전의 보호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였다. 후대에 들어서서는, 바로 이 자리에 헤롯왕(Herod the Great)에 의해서 '안토니아 영문'(AntoniaFortress)이 세워졌었다(Williamson).

(주); 성곽 - 성곽 건축에 목재가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필요하였을 것이며 '성곽'에 속한 여러 '문'(門)을 세우는 데 필수 불가결하였을 것이다(3:3, 6). 아무튼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목재가 '성곽' 건축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고 하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R. Naumann, G. E. Wright).

(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가 들어 갈 수 있는 한집을 위하여'의 의미이다(Fensham). 그런데 '거할'(*, 보)이 특정한 임무의 수행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대상 12:17, 23, 38; 16:33; 19:3)에서 볼 때, 여기의 '집'은 총독의 관저로 사용할 처소를 의미하는 듯하다(Schultz).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새로이 지어질 '집'을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느헤미야는 자신의 형제 '하나니'(1:2)와 더블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됐을때 머무를 처소에 대해서도 상의를 하였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집을 수리해서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Williamson).

(주);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 느헤미야가 왕의 질문(4절)에 대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아닥사스다왕이 수산궁에 없는 동안(1:1) 하나님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해 기도를 했음(1:4 - 11)은 물론이고 그 성벽 재건을 위한 구체적 계획까지 세워 놓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Fensham).

성 경: [느2:9]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아닥사스다]

본절의 내용과 왕의 허락 사이에 어느 정도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무려 5년으로 잡는다(Ant. X i 5). 그러나 몇 달 간의 기도(2:1)와 안타까운 마음의 간청을 했던 느헤미야가 5년씩이나 참고 기다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극히 짧은 기간 내에 페르시아를 떠났다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주); 군대 장관과 마병을 나와 함께 하게 - 이 같은 모습은,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거절했던 에스라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대조된다(스 8:22) 그러나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 길에 폐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것은 그가 에스라보다 불신앙적이어서가 결코 아니었다. 다만 느헤미야의 역할이 에스라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즉,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이라는 자격(5:14)으로 예루살렘에 간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율법 교육을 목표로 했던 에스라의 신앙적 차원의 여행과는 표면적으로는 달랐다(스 7:10). 틀림없이 아닥사스다 왕은 (1) 느헤미야가 자신의 '술관원'이라는 특별한 신분의 소유자이며, (2) 유다 지역의 총독이라는 중대한 직분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을 십분 감안하여 호위병들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Fensham).

성 경: [느2:10]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느헤미야]

본절과 같은 이방인들의 반응은, 성전 재건 사업에의 참여 요청이 거부된 사건(스4:1-6)이 있은 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냉전 상태가 매우 심화되었음을 잘 보여 준다.

(주); 호론 사람 산발랏 - 애굽 남부 지역인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발굴된 문서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서 언급되며 또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다. 이 문서에 나타나는 두 아들의 이름에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뜻하는 어미(語尾)가 달려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대의 대제사장 가문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다는 점(13:28)에서, 이들은 나름대로 여호와를 섬겼던 자들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 이들의 종교는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에(스 4:1, 2)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지녔던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한편, 여기서 '호론'은 윗 벨호론과 아랫 벨호론(수 16:3, 5)중 어느 하나를 의미한다(Rawlinson, Myers). 이곳은 당시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산발랏'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신(月神)이 생명을 주신다'의 뜻이다.

(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 - 여기의 '종'(에베드)은 '신하' 혹은 '부하'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산발랏'의 휘하에 있던 인물이었던 셈이 된다(6:17, 18). 한편 '암몬 사람'은 반드시 '도비야'가 암몬 지역 출신이었거나 혹은 암몬 땅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치는 않는다. 왜냐하면 '도비야'는 (1) 대제사장과 친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자신을 여호와를 섬기는 자로 자처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며(13:4), (2) 암몬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유대식 '도비야'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도비야의 조상이 '암몬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겠다(Williamson, Fensham).

(주); 심히 근심하더라 - 사마리아 총독의 이같은 반응은 (1) 성벽재건의 방해 공작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에 따른 두려움, (2) 예루살렘의 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가 유다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따른 염려(Schultz) 때문이었다.

성 경: [느2:11]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주); 거한 지 삼 일에 - 이같이 예루살렘 도착 후 '삼 일'을 쉰 까닭은 (1) 오랜 여행에 따른 심신(心身)의 피로를 풀며, (2) 예루살렘의 정확한 상황을 청취하며, (3) 도모하려는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에스라에게서도 발견된다(스 8:15, 32).

성 경: [느2:12]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주); 내가 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의 성벽 재건 계획이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알려질 경우 그 사업이 미처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거나 그 대적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해 올 것을 염려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느헤미야가 심지어 자신의 동족에게 까지 말하지 아니한 까닭은, 그들의 상당수가 '산발랏' 및'도비야'와 결혼 등 이모 저모로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Schultz, 6:18; 13:28).

(주); 밤에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 간접적인 보고로만 들은 예루살렘의 형편을 직접 확인 파악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느헤미야가 밤에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의 이런 확인 활동이 '산발랏'과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던 유대인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의 '두어 사람'은 문자적으로 '소수'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느헤미야의 형제 '하나니'등을 가리킬 것이다(1:2).

(주);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 오직 '느헤미야'만이 '짐승'을 탄 것은, 최대한으로 대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짐승'(*, 베헤마)은 일반적으로는 '말'과 '나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은 콧소리를 심하게 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느헤미야가 탄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Fensham).

성 경: [느2:13]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주);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 여기의 '골짜기 문'은 예루살롑의 남서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한 문(門)이었다. 느헤미야가 하필 이 문을 택한 이유는 그 지경이 가장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 용정(龍井)으로 분문(糞門)에 이르는 동안 - 여기서 '용정으로'는 문자적으로 '용정의 앞쪽으로'이다. 이 '용정'은 힌놈의 꼴짜기와 기드론 계곡의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약 210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욥의 우물'(Jod's well)로 추측된다(Williamson). 한편, '분문'은 '골짜기 문'에서 약 450m, 즉 1천 규빗의 거리에 있었다(3:13).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의 최남단에 위치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나온 온갖 쓰레기, 심지어는 성전의 희생 제사 때 나온 짐승의 똥까지 이문을 통해서 힌놈의 골짜기에 버려졌었다(롑 7:31, 32).

(주); 성벽이 무너졌고, 성문은 소화되었더라 - 이같이 느헤미야가 직접 확인한 상황은 '하나니'의 보고 내용과 동일하다(1:3).

성 경: [느2:14]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주); 앞으로 행하여 - 우측, 즉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주);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는 - '샘문'은 '분문'에서 북쪽으로 대략 120m 정도에 위치했으며 그 바로 앞에는 '실로암못'이 있었다(서론 도표, '성벽 재건의 모형도' 참조). 한편 '왕의 못'은 3:15에서는 '셀라 못'으로 지칭되고 있는 '실로암 못'이다.

(주);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 이는 그곳이 무너져내린 성벽의 잔해및 온갖 쓰레기 등으로 메워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통하여 본절의 이 기록이 실제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였다.

성 경: [느2:15]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주); 시내를 쫓아 올라가서 - 느헤미야가 나귀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간 것을 가리킨다. 즉, 그가 걸음을 걸을 수 있는 기드론 시내 쪽으로 내려간 후 그 시내를 따라서 북쪽으로 향했음을 가리킨다.

(주);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서 돌아왔으나 - 이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북쪽으로 가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에는 생략되었으나 느헤미야가 성벽 탐사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다 돌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성벽의 북쪽과 북서쪽은그다지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절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느헤미야가 성벽의 북동쪽 모퉁이까지 살펴봄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무난하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북쪽 성벽 지역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느헤미야 일행이 눈에 뛸 가능성이 컸으리라는 추측 때문이다.

성 경: [느2:16]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벽을 시찰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의 조사 활동이 이처럼 비밀리에 진행 됐던 까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벽 재건 계획이 누설될 가능성이 매우 큰 때문이었다(12절 주석 참조).

(주); 방백들(*, 세가님) - 광범위하게 사용된 단어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그의미를 정의하기 곤란하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회중들에 의해서 선출된 백성의 대표들로 본다(Widengren, Fensham, Rawlinson). 그런데 이 단어는 스9:2에서는 '두목'이라 번역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의 '방백'(*, 사림)보다는 한 계급 낮은 신분으로 묘사된다(스 9:2). 한편, 이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주); 유다 사람 제사장 귀인 방백 - 이들은 당시 유다 공동체를 구성했던 대표적인 네 계층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의 '유다 사람'은 반드시 유다 지파 사람만을 의미치 않는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유다 지파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수에 있어서 가장 컸던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이처럼 표현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사장'은 포로 후 시대라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행정 및 경제의 측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분이었다(Williamson).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중 종교적 세력을 대표하는 신분으로 암시되는 듯하다. 한편 '귀인'(*, 호림)은 그 문자적 의미로는 '자유로운 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으며 또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를 알수 없다. 다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던 신분 정도로 추측될 뿐이다(Fensham). 또한 '방백'은 본절 초두의 '방백'과 동일하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행정 분야를 관장하던 신분이었던것 같다.

(주); 그 외에 일하는 자들 - 성벽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 자들을 가리킨다(PulpitCommentary).

성 경: [느2:17]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읍 중건을 촉구하는 느헤미야]

본절과 같은 느헤미야의 발언(發言)이 암행 탐사가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의 기간이 경과한 후에 행해졌는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후 삼일 간 숙고할 기회를 가졌었고(11절), 직접적인 자신의 조사 활동을 통해서 모든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암행 탐사 그 다음 날에 본절과 같은 발언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주); 우리의 당한 곤경 - 여기서 '우리'는, 귀환한지 3일밖에 되지 않은 느헤미야가 본토의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 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Fensham). 한편, '곤경'(*, 하라아)은 1:3에서는 '환난'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성벽을 갖고 있지 못했던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방인들의 상습적인 노략으로 인해 처하게 된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1:3).

(주);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수치를 받지 말자 - 유다의 다른 주요 성읍들은 나름대로의 방어용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Fensham). 그러나 오직 유다의 심장부이자, 신앙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만 방어용 성벽이 없어 노략을 계속 당한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주민 뿐 아니라 다른 곳에 사는 백성들에까지 수치일 수밖에 없었다.

성 경: [느2:18]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읍 중건을 촉구하는 느헤미야]

(주);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토륵 한 신앙적 원동력이 되었다(스 7:6).

(주); 왕이 내게 이른 말씀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벽 재건 사업에 참여케 한 정치적 원동력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을 주저하고 있었던 현실상의 이유는 (1) '산발랏'과 같은 사마리아 관리의 방해(스 4:7 - 16), (2) 사마리아 관리의 참소에 따른 아닥사스다 왕의 성벽재건 중지령(中止令 )등의 정치적인 것들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성벽 재건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느헤미야에 대해서 아닥사스다 왕이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은 상당한 용기를 불어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2-9절).

(주);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 이는 문자적으로 '선한 일을 위하여 자신들의 손을 스스로 강하게 했다'의 의미이다(삼하 2:7). 본절은 성벽 재건 사업이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해준다(JB).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성벽 재건을 시도했었다(스 4:12).

성 경: [느2:19]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읍 중건을 촉구하는 느헤미야]

(주); 산발랏 도비야 - 이들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라비아 사람 게셈 - '아라비아 사람'은 앗수르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단 동부 지역의 지배 계급이었다(본 단락 주제 강해, '아라비아 사람' 참조).한편 '게셈'이라는 이름은 애굽 땅에서 발견된 B. C. 5세기말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은 그릇에 그 아들 '카이누'(Qaynu)와 함께 여신 '한-일라트'(Han-'ilat)에게 헌신한 자로서 새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람어 비문에서는 '게달의 왕'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아라비아 사람 게셈'은 요단 동쪽 및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자였던 것 같다(Rawlinson). 이처럼 '게셈'이 '도바야'와는 달리 '산발랏'의 휘하에 있었던 한 관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6:2에서 이 '게셈'이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함께 느헤미야에게 대면(對面) 요청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주); 업신여기고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무기이다. 즉, 하나는 '조롱'이며 또 하나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업신여기고'(*, 얄라구)는 '조롱하다'등의 뜻이 있는 '라아그'(*)의 사역형으로서, 마땅히 귀중히 여겨져야 할 어떤 대상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가리킨다(대하 30:10; 22:7; 잠 17:5). 한편,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라는 질문은, 일찍이 아닥사스다 왕이 사마리아 관원들의 참소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복구사업을 중지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사업은 중지령을 내렸던 아닥사스다왕의 새로운 허락과 명령에 따라 시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느2:20]

주제1: [느헤미야의 귀환]

주제2: [성읍 중건을 촉구하는 느헤미야]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산발랏 등의 적대적 태도에도 블구하고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사항(7-9절)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태도는 인간의 어떠한 훼방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을 반영한다. 아울러 산발랏 일당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느헤미야에게 허락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느헤미야가 이미 간과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산발랏 일당은 도리어 왕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자 기를 썼던 셈이 된다.

(주);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 이 같은 느헤미야의 확신에 찬 응답은(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과 (2)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던 실제적 체험(1:11)에 근거하였다.

(주);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名錄)도 없다 -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할 하등의 명분이나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스 4:2, 3). 여기서 '기업'(*, 헬레크)은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관련해서 사용된 법정적 용어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자신의 반역 의사를 표명할 때도 사용되었다는 점에서(삼하20:1; 왕상 12:16) 볼 때, 여기의 '기업도 없고'는 산발랏 등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에 절대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문구라고 할 수 있다(Brockington). 한편, '권리'(*, 체다카)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유다에 대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는 법적 권리를 가리킨다(Williamson, Fensham). 앞의 '기업'이 시민권의 문제와 관련 있다면, 이것은 행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Williamson). 마지막으로 '명록'(*, 지카론)은 종교적 의식에의 참여권을 가리키는 듯하다(Fensham, Williamson).

성 경: [느3:1]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양문(羊門) 건축]

(주); 대제사장 엘리아십 - 이 사람은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팔레스틴에 귀환했던 대제사장 '예수아'의 손자이다(12:10). 그런데 나중에 그의 손자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했고(13:28), 또한 그는 이방인 도비야(2:10)에게 성전의 방을 내어줄(13:4, 7) 만큼산발랏 일당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다면 엘리아십이 처음에는 느헤미야를 도와 헌신적으로 재건 사업에 참여하다가 나중에 산발랏 일당에게 매수당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불온한 마음을 가진 채 단지 백성들의 눈을 의식하여 형식적으로 재건 사역에 참여하였을 뿐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어쨌든 보다 분명한 것은,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대제사장이 재건 사역에 협력하였음을 느헤미야가 부각시키려 했다는 사실이다.

(주); 그 형제 제사장들 - 이들을 '엘리아십'의 친형제들로 볼 수는 없다. 다만 '엘리아십'처럼 아론의 후손들로서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스 3:2).

(주);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聖別)하고 - '양문'은 예루살렘의 북동쪽 모퉁이에 위치했었다. 희생 제사에 소용되는 양과 염소들은 바로 이곳을 통해서 들어갔다. 이 '양문'을 통해 들어간 희생 제사용 짐승은 이 문옆의 못에서 씻겨진 후 성전으로 옮겨갔던 것같다. 요 5:2의 '양문'은 바로 이곳을 가리킨다. 한편, 혹자는 '성별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드슈후'(*)를 '들보를 얹다'는 뜻인 '케루후'(*)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본다(Rudolph). 그러나 굳이 그러한 견해를 취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재건 사역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보아 그들이 대표 자격으로 하나님께 바쳤음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Fensham, Kidner). 이것은 마치 이방 여인을 취한 사실로 인하여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명단을 제시하면서 그 중 유독 제사장들만이 속건제를 드린 사실을 언급한 것과 같다(스 10:18, 19).

(주); 성벽 함메아 망대에서 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 '함메아 망대'는 '양문'의 서쪽에, '하나넬 망대'는 '어문'(3절)의 서쪽에 각각 인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두 망대 사이에는 짧은 성벽과 그중간에 '어문'이 있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북쪽 성벽의 재건을 담당한 것은, 그곳이 그들의 활동 무대였던 성전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다.

성 경: [느3:2]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양문(羊門) 건축]

본절에서 부터 5절까지는 '하나넬 망대'의 서쪽 성벽 약 210m의 건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이 건축 - '그 다음'은 '엘리아십'(1절)을 위시한 제사장들이 건축한 성벽에 '연이어서'의 의미이다. 한편, 본절의 '여리고 사람'은 자신들의 조상이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여리고'에 살고 있었음은 알았으나, 자신들의 족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자들로 추측된다(Rudolph, 스 2:34).

(주); 이므리의 아들 삭굴 - 이 사람에 대해 별 달리 밝혀진 바는 없다. '삭굴'은 '염두에 두는'의 의미이다.

성 경: [느3:3]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어문(魚門) 건축]

(주); 어문(魚門)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 -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좌측에 위치한 문으로서, 갈릴리 바다 및 요단 강에서 잡힌 물고기들이 바로 이곳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Rawlinson). 이 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들은 본서 12:39과 대하 33:14 그리고 습 1:10 등이다. 한편, '하스나아'(*)는'스나아'라는 지명(地名) 앞에 정관사 '하'(*)가 붙은 것으로 봐야한다(Kidner , 스2:35 ). 따라서 '하스나아의 자손들'도 2절의 '여리고 사람들'처럼, 자신의 조상이 '스나아'라는 곳에 살고 있었음은 알았으나 그 족보를 밝히지 못함으로 인하여 조상의 이름 대신 지명을 통하여 구별되고 있다(스 2:35).

(주); 그 들보를 얹고 - 지붕을 올림으로써 건축을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한다(Fensham).

(주); 자물쇠와 빗장 - 여기서 '자물쇠'(*, 만울)는 오히려 '빗장'을 가리키며, '빗장'은 앞의 '빗장'을 물고 있는 '소켓'(sockets)을 뜻한다(Rawlinson).

성 경: [느3:4]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어문(魚門) 건축]

(주);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 '므레못'은 '말기야'(11절)와함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사역에 모두 관계되는 자로서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하면서 가져온 물품들을 인수했던 제사장이었다(스 8:33). 한편, '학고스'의 자손은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증거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스 2:59, 61).

(주);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슬람 - 이 사람은 자신의 딸을 '도비야'(2:10,19)에게 며느리로 주는 등 사마리아 사람들과 밀착된 관계를 맺었던(6:18) 제사장이다(30절). 그가 성벽 재건에 참여한 이유는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경우와 유사할 것이다(1절 주석 참조). 한편, '므술람'이라는 이름은 '동맹한'이란 뜻이다.

(주); 바아나의 아들 사독 - '사독'은 에스라가 제안한 언약문에 인친 자로만 알려졌을 뿐이다(10:21).

성 경: [느3:5]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어문(魚門) 건축]

(주);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 6절의 언급으로 미루어 볼 때, '드고아 사람들'의 작업 몫은 '옛 문'과 인접한 동쪽 성벽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한편, '드고아'는 예루살렘 동남쪽 약 14.5Km 지점의 불모지에 자리 잡았던 성읍으로서, '아라비아 사람 게셈'(2:19)에 의해서 공격받기 쉬웠던 입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드고아 사람들'은 출신지역에 따라 분류된 포로 귀환자 명단(스 2:20 - 35)에 나오지 않음을 볼 때, 자신들의 족보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아닌 듯하다. 느헤미야는 다만(1) '드고아'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공격을 쉽사이 받을 수 있는 지역이며, (2) 그곳의 귀족들은 오히려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아니했다는 등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조상의 이름을 통한 가족 분류 방식을 포기하고 이같이 동리의 이름을 통해 이들을 분류하고 있다고 본다.

(주);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擔負)치 아니하였으며 - 이것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목들을 자신들의 주(主)들의 역사에 가져오지 않았다'의 뜻으로서, 멍에 메기를 거절하는 황소의 모습에 빗대어서(렘 27:12) 성벽 재건 사역에 동참치 않은 귀족들을 암시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그 주'는 누구를 가리킬까? 본절의 '주'(*, 아도네이헴)가 복수라는 점에서 하나님으로 볼수 없으므로 느헤미야를 도와서 일을 하던 감독자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Kidner). 그 문자적 의미는 '높임을 받는자'이다. 한편, '귀족들'이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아니했던 이유는 (1) 이들이 '아라비아 사람 게셈'의 보복을 두려워했으며, (2) '게셈'과 상당히 깊숙한 밀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때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Fensham).

성 경: [느3:6]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본절에서부터 11절까지에서는 약 600m 가량의 성벽 재건 작업에 대해서 엄급한다.

(주); 옛문 - 왕하 14:13과 램 31:38의 '모퉁이 문'과 동일시 되며(Edwin Yamauchi) 예루살렘 북쪽 약 30Km 지점에 있던 '여사나'(대하 13:19)라는 곳으로 향하는 도로로 통하는 문이었다(Albright).

(주); 요야다 - '여호와께서 알고 계시다'의 뜻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주);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성 경: [느3:7]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기브온 사람 믈라댜 - 여기의 '기브온사람'은 출신 지역에 따라 분류된 포로 귀환자 명단(스 2:20 - 35)에 들어 있다(7:25). 이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쪽 약 9Km 지점에 위치했다. 한편, '믈라댜'는 여기서만 나오는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자유케 하셨다'의 뜻이다.

(주); 메로놋 사람 야돈 - '메로놋'은 '기브온 북동쪽약 5Km 지점이었을 것이다(M.Newman, 대상 27:30). 그리고 '야돈'은 '여호와께서 지배하신다'의 뜻이 있는 '여도니야'의 단축형이다.

(주);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미스바 사람들 -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1) 기브온과 미스바가 당시 강 서편 총독의 직접적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견해(Rawlinson, Keil, Schultz, Kidner). (2) 강 서편 총독이 유다를 방문할 때마다 임시로 머물던 곳이 미스바에 있었다는 견해(Willamson), (3) 유다 총독(5:14)이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머물던 곳이 미스바에 있었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여기의 '관할에 속한'(*, 키세)이라는 단어가 일차적으로 '좌석' 혹은 '보좌'를 의미하며 둘째, 유프라테스 강 서쪽 전부가 '강 서편 총독'의 영향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미스바'와 '기브온'만을 직접 관할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며 셋째, '강 서편 총독'이라는 말을 유다 총독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사실(2:7; 스 8:36) 등으로 미루어 위의 세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느3:8]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금장색(金匠色)..향품 장사...중수하되 - 7절에서는 가까운 지방 사람들끼리 힘을 합하는 모습이 언급된 데에 이어서, 여기서는 특별한 직업의 소유자들끼리 협력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는 '금장색'은 순금이나 금박으로 장신구와 우상등을 만드는 일에 주로 종사했었다(사 40:19; 41:7; 46:6; 렘 10:9, 14; 51:17). 그러나 포로 귀환후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우상 숭배가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문의 '금장색'은 장신구 등의 제조에만 관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본절과 31, 32절은 이 '금장색'들이 자신들끼리의 동업자 조합을 형성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짙게 풍기고 있다. 더구나 여기의 '금장색'(*, 초르핌)이라는 단어가 복수라는 사실은 그 가능성을 더욱 높게 한다. 한편, '향품 장사'는 애굽이나 인도 등지에서 완제품을 수입해서 팔거나 혹은 식물에서 '향품'을 직접 추출해내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런 직종에 종사했던 인물로 성경에 최초로 언급되는 자는 브사렐이다(출 37:1, 29). 이러한 '향품'은 '분말' 혹은 '액체'의 형태였고, 조그만 용기에 보관되어 여인들에 의해서 지참되었다(사 3:20). 이 같은 향품의 주된 용도는 몸의 냄새를 상쇄시키는 것이었고 장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무튼 '금장색'이나 '향품 장사'는 (1) 시간 할애가 용이하였으며, (2) 다른 직업의 소유자보다 수입이 많은 관계로 경제적으로 넉넉했기 때문에, 성벽 재건 사업에 적극적일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보통 중류 계급으로 분리되었다고 한다(Fensham).

(주); 저희가 예루살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 '넓은 성벽'은 B.C. 7세기 초에 히스기야왕에 의해 건축된 벽으로서 B.C. 722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된 이후 북이스라엘의 피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넓힌 것이다(M. Broshi). 1970, 71년에 아비갓(N. Avigad)은 성전 서쪽 방향 270m 정도 지점에서 6.7m 정도되는 두께의 성벽을 발굴한 바 있으며 이것은 본문의 '넓은 성벽'과 동일한 것으로 짐작된다.

성 경: [느3:9]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 여기서 '지방'(*, 펠레크)은 원래 '주위'나 혹은 '물레가락'의 뜻을 지니며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 주변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의 '예루살렘 지방'은 예루살렘 시내 지역이 아닌 예루살렘과 붙어있는 변두리 지역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Fensham, Rawlinson). 그리고 '다스리는 자'(*, 사르)는 본서에서 보통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로서(스 10:14) 그 당시의 유다 지역이 조그만 단위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본절은 해당 지역의 책임 관리자 혼자서만 재건 사역을 감당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의 주도하에 해당 지역내의 주민들이 이 일에 협력하였을 것이다.

성 경: [느3:10]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자기 집과 마주 대한 곳 - 이곳은 예루살렘 서쪽의 급경사지로 추측된다.

성 경: [느3:11]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하림의 아들 말기야 - '하림'은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한 가족의 조상이었다(스2:32). 따라서 여기의 '아들'(*, 벤)은 '자손'으로 번역됨이 타당하다. 한편, '말기야'는 '여호와는 왕이시다'의 의미를 가지는데 23절의 '베냐민'과 형제인듯하다(스 10:31, 32).

(주);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 - 본절의 '바핫모압'도 최초로 귀환했던 한 가족의 조상(스2:6)이다.

(주); 한 부분(*, 미다 쉐니트) - 이것은 문자적으로 '두번째 부분'으로서, 이미 배정됐던 몫 이외의 또 다른 부분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말기야'와 '핫숩'은 여기 이외에 다른 부분의 축성(築城)작업도 부여받았던 셈이다(23절).

(주); 풀무 망대 - 이는 12:38; 대하 26: 9등으로 볼때 '골짜기 문'과 '넓은 성벽'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던 곳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같은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곳에서 빵이 구워졌기 때문인 듯하다(Williamson).

성 경: [느3:12]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옛문 건축]

(주); 그 다음 - 이는 '풀무 망대'와 '골짜기문'(13절) 사이의 성벽 부분을 말한다. '일자형'(一字型)에 길이 약 450m 정도이다.

(주);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었던 지역의 한 부분을 다스리던 사람을 가리킨다(9절 주석 참조).

(주);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 딸들이 - '할로헤스'라는 이름은 '속삭이는자'(M. Newman). 혹은 '마술사'(Batten)라는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점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이름이 '사람의 이름' 곧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업명' 곧 보통명사라고 주장한다(M. Newman, Batten). 그러나 이와 동일한 이름이 에스라의 언약문에 인친 자들의 명단 중에 나온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구체적인 개인명임을 입증해준다(10:24). 한편, 여기의 '아들'(*, 벤)은 오히려 '자손'의 의미로 봐야할 필요가 있을것이다(Schultz). 그리고 '그 딸들'(*, 베노타이우)은 (1) '딸'이 큰 도시에 인접해서 성장하고 있는 성읍에 대한 일상적 용어로 사용된 사실(겔 16:53)에 근거해서 '마을 사람들'을 뜻할 것이라는 견해(Batten, Rawlinson, Fensham, Kidner), (2) 여자는 성벽 쌓는 일에 종사할 힘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 딸들'(베노타이우)은 '그 아들들'(베나이우)의 오기(誤記)라는 견해(JB, Vimcent), (3)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Williamson, Schultz, Keil)등으로 그 해석이 구분된다. 그러나 첫째, 고대 아테네에서는 무너진 성벽의 재건을 위해서 여자들도 동원됐으며 둘째, '딸'들은 남자 형제가 없을 경우 아버지의 이름과 재산을 상속받으며(민 36:8) 셋째, 본서의 3장은 성벽 재건에 대한 백성들의 열심을 강조하는(8절) 문맥적 특색을 갖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볼때,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있다.

성 경: [느3:13]

주제1: [성벽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하눈과 사노아 거민 - '하눈'은 30절에서는 '살랍의 여섯째 아들'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 이름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의 의미를 갖는 '하나니엘', 혹은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다'의 뜻을 갖는 '하나니야'의 단축형으로 짐작된다. 또한 '사노아'는 예루살렘 남서쪽 약 22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수 15:34).

(주); 분문까지 성벽 일천 규빗을 중수 - '일천 규빗'은 약 450m의 길이이다. 북쪽 성벽 약 200m 정도를 네 집단에서 담당했던 것(2-5절)과 비교해보면 매우 작은 성읍 '사노아'의 거민들이 이렇게 많은 분량을 담당하였다는 사실은 특이하게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1) 사노아 거민들이 큰 열심을 냈었다는 측면, (2) 그들이 담당했던 성벽의 파괴가 극심하지 않았었다는 측면 모두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느3:14]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말기야 - '벧학게렘 지방'은 '벧학게렘'이라는 성읍과 전혀 다르다. 여기서 '지방'은 어떤 성읍과 인접해 있는, 혹은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9절). 한편, '벧학게렘'은 예루살렘 남쪽 약 5Km 지점에 위치했다.

성 경: [느3:15]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샘문 - 이에 대해서는 2:14 주석을 참조하라.

(주); 미스바 지방 - 이것도 '미스바'와는 전혀 다르다(14절 주석 참조). 한편, '미스바'는 예루살렘 북쪽 약 12.8Km에 위치했다.

(주); 왕의 동산 근처 셀라 못가의 성벽 - 여기서 '왕의 동산'은 기드론 골짜기 남단, 즉 그 골짜기가 힌놈의 골짜기와 만나는 곳에 위치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벽 바깥에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IDB, 왕하 25:4; 렘 39:4; 52:7). 한편, '셀라못'은 '실로암못'과 동일시 되는 것으로서(사 8:6; 요 9:7). 그 물이 넘쳐 흘러서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가 마주치는 곳에 위치했던 '왕의 동산' 쪽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 '셀라 못'은 '왕의 동산'의 수원(水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못이 예루살렘 본성(本城)의 바깥 쪽에 위치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 못과 그 물을 이용하는 자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별도의 성벽이 쌓아졌었으므로 '셀라 못'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본 문구의 '성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루살렘의 동쪽 성벽의 가장 남쪽 부분 약 100m를 가리키며 '셀라 못'의 동쪽성벽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것은 '셀라 못가의 성벽'이라고 할 만하다.

(주); 다윗 성에서 내려오는 층계 - '다윗성'은 예루살렘의 동남쪽의 한 구릉지대로서, 기혼 샘의 북서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뻗어 있었다(삼하 5:7, 8). 그리고 '층계'는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었던 계단이었다.

성 경: [느3:16]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느헤미야 - '벧술 지방'은 예루살렘 남쪽 약 21Km지점에 위치한 '벧술'이라는 성읍(수15:58) 그 자체를 뜻하지 않고 다만 그 성읍의 인접 지역을 가리킬 뿐이다(9절). 한편, 본절의 '느헤미야'는 본서의 저자인 '느헤미야'와 동명 이인이다.

(주); 다윗의 묘실과 마주 대한 곳에 이르고 - '다윗의 묘실'은 '묘실'(*, 키브레이)이 복수라는 점에서 다윗 왕 한 사람만의 무덤이 아니라 다윗부터 시작해서 그 후예들의 공동 묘지였음이 분명하다(대하 28:27). 그 위치는 '다윗 성'(15절)의 남쪽곧 시온산 어디였을 것이다(Myers, 왕상 2:10).

(주); 파서 만든 못을 지나 용사의 집까지 -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에 의해서 포위됐을 때, 히스기야는 기혼의 샘 물을 막은 후 고랑을 파서 그 물이 다윗 성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해서 식수(食水) 문제를 해결했었다(왕하 20:20; 대하 32:3, 4). 그때 그 흘러 들어온 물이 한 곳에 모이도록 해놓은 시설이 곧 여기의 '파서 만든 못'이었다(사 22:9 - 11). 한편 '용사의 집'은 다윗의 충실한 부하들이었던 '용사들'(삼하 23:8; 대상11:10)이 사용했던 병사(兵舍)였다(Rawlinson).

성 경: [느3:17]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레위 사람 바니의 아들 르훔 - 이처럼 성전 봉사에 바빴을 '레위 사람'이 성벽 재건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는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운동에 대한 백성들의 호응이 적극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혹자는 본절의 '레위 사람'이 (1)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던 레위 사람의 후예이기 때문에 성전 봉사에 참여치 못했고 그래서 성벽 재건에 동참할 여유가 있었거나, (2) 포로 귀환후에는 레위인의 일부가 성읍의 행정에만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 재건에 동참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Williamson). 그러나 (1)의 견해는, 저자가 단순히 '레위 사람'이라고만 언급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반면 (2)의 견해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어느 정도 타당하다.

(주); 그일라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자 - '그일라 지방'은 예루살렘 서남쪽 약 24Km지점에 위치한(삼상23:1 - 13) '그일라'와는 전혀 다르다(9, 12, 14절).

(주); 하사뱌 - '여호와께서 참작하셨다'의 뜻이다.

(주); 그 지방을 대표하여 - 그곳 주민들을 통솔하는 등 그성벽 재건 공사의 주체(主體)가 된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역할은 한 지역을 다스리는 자로서 성벽 재건에 참여한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을 것이다(9절).

성 경: [느3:18]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그 형제..헤나닷의 아들 바왜 - 여기의 '바왜'(*)는 '빈누이'(*)의 오기(誤記)로 간주될 수 있다. 그 이유는 (1) '바왜'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이나 그밖의 문헌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2) 9절의 '한 부분'은' 이미 배당된 몫 이외의 또 다른 부분'(11절)을 가리키므로, 본장 어디에든 '빈누이'가 느헤미야로부터 할당받은 작업 몫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며, (3) 더구나 10:9에는 '빈누이'라는 레위 사람이 '헤나닷의 자손'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바왜' 를 '빈누이'로 고치고, 이 '빈누이'가 느헤미야로부터 두 몫의 성벽 공사를 할당받았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빈누이'는 에스라의 언약문에 인을 치기도 하였다(10:9).

성 경: [느3:19]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미스바를 다스리는 자...에셀 - '미스바'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했던 한 성읍 '미스바'를 가리킨다. 한편, '에셀'은 '도움' 혹은 '구원'의 뜻이다.

(주); 한부분 - 배당된 몫 이외에 또달리 배당된 별도의 작업 몫을 가리킨다(11절). 따라서 본절의 '에셀'은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작업 몫 이외에 이미 또 다른 부분을 배당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에셀'이라는 이름은 본장 어디에도 안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이 함께 한 재건 사역이 본문의 에셀이 감당한 또다른 한 부분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7절).

(주);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편 - 이것은 문자적으로 '모퉁이에 있는 군기고로 오르는 곳 앞'의 뜻이다(Schultz, Fensham). 여기서 '모퉁이'는 '성벽이 날카롭게 꺾어지는 곳'을 의미한다(대하 26:9). 본절에서 느헤미야가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라고 '군기고'를 한정적으로 표현한 까닭은 예루살렘에는 여러 군데에 군기고가 있었던 때문이었다(사 22:8).

성 경: [느3:20]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 '삽배'는 스 10:28에서 이방 여인을 취했다가 회개한 자로 언급된다. 그리고 '바룩'은 본서 10:6, 8을 볼 때, 제사장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여기의 '한 부분'에 대한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있다. 즉, '바룩'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성벽 재건에 동참했었고(1절) 이제 그와는 별도로 또 다른 '한 부분'을 맡아서 공사를 했던 것이다. 한편, '힘써'(*, 헤헤라)는 '맹렬하다', '타오르다' 혹은 '진노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하라'(*)의 사역형으로서 '뜨겁게 되다'(Fensham) 혹은 '열심을 품다'의 의미이다(Davidson). 이 같은 단어는 앞의 '한 부분'이라는 말과 매우 잘 조화된다. 즉, 그는 열심을 품어서 이미 자신에게 맡겨졌던 공사를 재빨리 완료하고, 또다시 새로운 부분에 대한 공사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주); 성 굽이에서부터...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 - '성 굽이'는 '군기고'가 있는 성의 모퉁이를 가리키며 '집문에'는 '집 문 맞은편'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Batten, 16, 19절). 만일 본절의 '집 문에'를 여자적(如字的)으로 받아들인다면, '엘리아십의 집'이 성벽과 붙어있었다는 오해를 낳게 될 것이다.

성 경: [느3:21]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학고스의 손자 우리야의 아들, 므레못 - '학고스'는 스 2:61에서 자신들의 계보를 증명치 못하여서 성전 봉사에 참여치 못했던 제사장 가문의 조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의 '손자'는 '자손'으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그리고 '므레못'은 스 8:33에서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가져온 물품을 인수했던 제사장으로 언급된다.

(주); 한 부분을 중수하여 - '므레못'도 20절의 '바룩'처럼 자신에게 맡겨졌던 최초의 작업 몫을 재빨리 마치고, 본절의 또 다른 성벽 공사에 뛰어들었음이 분명하다(20절).

(주); 엘리아십의 집 문에서부터...모퉁이에 이르렀고 - 이것은 (1)므레못의 공사량(工事量)이 비교적 적었다는 사실(Rawlinson, Batten), (2) 엘리아십의 집이 매우 컸다는 사실(Keil) 중 하나를 시사할 것이다. 그러나 첫째, 느헤미야 귀환 당시의 예루살렘은 그 경제 형편이 좋지 못했으며(1:3) 둘째, 대제사장 그 당시 행정적 측면을 관장했었던 총독보다 권한이 비교적 적었음(5:9)을 미루어 볼 때, 위의 두 가지 추측 중 전자가보다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므레못'이 이처럼 적은 몫 만을 담당했던 까닭은, 그 부근의 공사 조건이 심히 나빴기 때문일 것이다(Batten, 2:14). 아무튼 '므레못'이 대제사장 집 앞의 성벽 공사를 담당했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 당시 신실한 제사장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Scultz).

성 경: [느3:22]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골짜기 문, 분문(糞門), 샘문 건축]

(주);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 - '평지에 사는'(*, 안쉐이 키카르)은 문자적으로 '평지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한편, '평지'(키카르)는 (1) 예루살렘의 주변지역(Fensham, Williamson), (2) 요단강 유역의 여리고 지역(Keil, Rawlinson, Scultz, Batten) 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의 '평지'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요단강 유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첫째, 이것이 에브라임 산지에 대해서도 적용됐으며(삼하 18:23 ) 둘째, 특히 본서에서 예루살렘 주변을 나타내는 데 사용됐다(12:28)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1)의것이 보다 타당한 듯하다. 따라서 본절의 '평지에 사는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시내에 살며 성벽 재건에 최초로 나섰던 제사장들(1절)과는 분명히 구별된다(Williamson).

성 경: [느3:23]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베냐민과 핫숩 - '베냐민'은 '하림 자손'으로서 11절의 '말기야'와는 형제 혹은 근친인 듯하다(11절; 스 10:31, 32). 그리고 '핫숩'은 '바핫모압 자손'으로서 '베냐민'의 형제 '말기야'와 함께 '풀무 망대'를 재건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핫숩'은, 한 곳에서는 '하림 자손'의 '말기야'와 함께, 또 다른 곳에서는 그형제 '베냐민'과 함께 공사를 하는 등 두 몫을 담당했던 셈이다(11절).

(주); 아사랴가 자기 집에서 가까운 부분을 중수 - '가까운 부분'(*, 에첼)은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옆에' 혹은 '곁에'로 번역되는 단어(창 39:16; 삼상 5:2; 왕상10:19)이지만 문맥상 19절의 '맞은편'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아무튼 이 문구나 앞에 '자기집 맞은편 부분'이라는 문구는,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사업의 추진과 관련해서 공사 담당자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고려해주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할만하다. 한편, '아사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3:24]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헤나닷의 아들 빈누이가 한 부분을 중수 - '빈누이'는 18절에 나오는 '헤나닷의 아들 바왜'와 동일 인물이다(18절). 이 사람은 동쪽성벽의 남쪽 부분을 건축한 다음 여기서 또 다른한 부분의 성벽 건축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주); 아사랴의 집에서부터 - 이것은 '아사랴의 집 끝 모퉁이에서 부터'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사람의 집 근처, 곧 아사랴의 집 맞은편 쪽은 아사랴 자신이 직접 성벽 공사를 하였기 때문이다(23절).

(주); 성 굽이를 지나 성 모퉁이에 이르렀고 - '성굽이'는 '성벽의 처음 꺾여진 부분'을 뜻한다(19절). 한편, '모퉁이'(*, 피나)도 '굽이' 와 거의 같은 뜻으로서, 여기서는 성의 꺾여진 부분이 원래의 방향대로 다시 꺾여진 부분을 가리킨다.

성 경: [느3:25]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우새의 아들 발랄 - '발랄'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의 의미로서 구약 성경 중 본절에만 나오는 이름이다. '우새'도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주); 왕의 윗 궁에서 내어민 망대 - 여기의 '윗'은 '높은'의 의미로서 '왕궁'을 수식한다기보다는 '망대'를 수식한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Rawlinson). 한편, '왕의 궁'에 대해서는 (1) 솔로몬의 왕궁(Schultz), (2) 다윗의 왕궁(Rawlinson), (3)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왕의 임시 대피소(Fensham) 등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왕궁'이 이미 언급된 남쪽의 '다윗 성'(15절)과 다른 이름으로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1)과 (3)의 견해 중 (1)의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그리고 '내어민 망대'는 솔로몬의 왕궁 외곽을 경비하기 위하여 세워진 망대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주); 시위청에서 가까운 부분 - 이것은 시(市)외곽을 감싸는 성벽의 일부가 아니라 솔로몬 왕궁 외곽의 '내어민 망대'와 연결된 내성벽(內城壁)의 일부이다. 한편, '시위성'은 영역본 흠정역의 번역대로 '감옥'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12:39; 롑 32:2).

(주); 바로스의 아들 브다야 - '바로스'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한 가족의 조상이었다(스 2:3). 따라서 여기의 '아들'은 '자손'으로 고쳐야 한다. 한편, '브다야'는 '여호와께서 속량하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3:26]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때에(*, 웨) - '그리고' 혹은 '그런데'의 뜻이다.

(주);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여 - '느디님 사람'에 대해서는 스 2:43 주석을 참조하라.

(주); 동편 수문과 마주 대한 곳 - '수문'은 기혼 샘 반대편에 위치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문은 동쪽 성벽의 남쪽에서 북쪽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채 못미치는 곳에 해당될 것이다. 이 문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공중 집회시 이용되었다(8:1). 한편, '마주 대한 곳'은 '동편 수문'과 '내어민 망대' 사이의 성벽 부분이다.

성 경: [느3:27]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드고아 사람들이 한 부분을 중수 - '드고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방백의 협조나 지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쪽 성벽의 한부분에 대한 공사를 담당했었다(5절).

성 경: [느3:28]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마문 위로부터 - '마문'은 동쪽 성벽에 있었던 한 문으로서(롑 31:40), 말(馬) 혹은 말을 탄 사람들이 시내로 들어갈 때 이용됐었다. 아무튼 이 '마문'은 솔로몬의 옛왕궁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위'는 마문 북쪽성벽을 가리킨다.

(주);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 - 이것은 이미 북쪽 성벽공사에 참여했던 '므레못'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근처를 별도로 공사했었던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21절). 즉, 본절의 '제사장들'도 이미 '므레못'처럼 북쪽 성벽 공사에 참여했었고(1절), 다시 또 다른 몫의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느3:29]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임멜의 아들 사독 - '임멜'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족의 한 조상이었다(스 2:37). 따라서 본절의 '아들'은 '자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또한 '임멜'은 다윗이 세운 제사장 조직 중 '열 여섯째' 반차에 속한 사람이었다(대상 24:14).

(주); 동문 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 - 여기의 '동문'은 외성벽과는 상관 없이, 성전 건물에 속했던 문이었던 것 갈다(겔 40:6, 10). 그 문은 스룹바벨 성전 재건 때에 복구되지 못했다가 금번에 성벽의 한 부분으로서 복구된듯하다(Fensham). 이처럼 '동문'이 성전 건물에 속했다는 사실은, '동문 지기'가 레위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혹자는 본절의 '스마야'를 대상 3:22의 '스마야'로 보고, 그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성 경: [느3:30]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하나냐...한 부분을 중수 - '하나냐'는 8절에서 '향품 장사'로 묘사되는 '하나냐'와 동일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즉, 본절의 '한부분'은 '하나냐'가 다른 부분의 성벽 공사도 담당했었음을 시사하며(11절), 이것은 곧 여기의 '하나냐'가 8절의 '하나냐'와 동일 인물임을 입증한다.

(주); 살랍의 여섯째 아들 하눈 - '여섯째 아들'이라는 수식 문구는 '살랍'의 많은 아들중에서 오직 말째에 가까왔을 한 아들인 '하눈' 만이 성벽 재건에 참여했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인 듯하다.

(주);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 - 4절의 '므술람'과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절의 '므술람'도 두 곳의 성벽을 재건한 셈이다.

(주);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 - '침방'(*, 니쉬카토)은 일반적인 의미의 '방'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특별하게는 성전에 속한 여러 방들에 대해 적용되는 단어이다(Fensham, 12:44; 13:7). 따라서 본절의 '자기 침방'은 '므술람'이 제사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기 침방과 마주 대한 부분'은 성전과 가까운 성벽을 가리킨다.

성 경: [느3:31]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주); 금장색 말기야 - 본절의 '금장색'(*, 초르피)은 8절의 '금장색'과는 달리 단수이다.

(주);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 - '함밉갓 문'(*, 솨아르 하미프카드)의 '하미프카드'는 삼하 24:9에서는 '인구 조사'의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의 '함밉갓 문'은 히브리 단어의 음역을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차라리 의미적으로 번역해서 '소집문'(RSV, the Muster gate ; the Inspection gate)으로 옮겨질 수 있다(Fensham, Williamson). 이는 백성들이 특별한 일이 발생했을 경우에 그 문 앞으로 소집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의 위치는 '동편 수문'과 연결된 성벽에서 북쪽으로 약 90m 지점이다. 따라서 이 '함밉갓문'의 '마주 대한 부분'은 동쪽 외성벽의 거의 북쪽 끝부분이 되는 셈이다.

(주);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 - '느디님 사람의 집'은 그들이 성전 봉사를 하는 동안에만 사용했던 거처로 받아들여야 한다(Fensham, Williamson). '느디님 사람'의 집은'오벨' 근처에 있었다(26절). 한편, '상고들'(*, 라칼림)은 '돌아다니다'의 뜻을 갖는 동사 '라칼'(*)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활동 반경이 상당히 넓은 상인을 가리킨다. 아들은 먼 곳에서 물건을 구입해서 팔거나 혹은 자기의 고향 물건을 먼 곳까지 가져가서 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금장색'이나 '향품장사'처럼 동업 조합(guild)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의 '라칼림'이라는 복수명사는 이들이 동업 조합을 구성하고 있었으리라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주); 성 모퉁이 누(樓) - 성벽의 북동쪽 부분에 있었던 '다락방' 종류였던 것 같다. 마치 망대와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

성 경: [느3:32]

주제1: [성벽 재건에 참여한 자들]

주제2: [마문(馬門) 건축]

성벽 공사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특수한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열심을 강조하고 있다(8절).

(주); 양문 - 제사장들에 의해 복구된 바 있다(1절).

성 경: [느4:1]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신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주);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 '산발랏'이 성벽 재건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일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사전에 이미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3:1, 4 주석 참조). 그런데 본절에서 '산발랏'만이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은, 그가 유대 백성을 훼방하는 일에 선동자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견해는 여러명의 훼방자가 동시에 언급될 때도, 그 이름이 항상 그들 중 첫번째에 위치한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해진다(7절 ; 2:10, 19 ; 6:1, 2, 5). 한편, '산발랏'이라는 이름은 '달신(月神)이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라는 말인 바벨론어에서 유래되었다. 2:10에 '호론 사람'이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 지역인 '벧호론'(Beth-horon)에서 출생한 듯하다. 그리고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은 이 산발랏에 의해 건립되었고 산발랏은 자기 사위를 이 성전의 대제사장으로 세웠다고 하나 그 사실성 여부는 분명치 않다. 한편, '크게 분노하며', '비웃는' 산발랏의 반응은, 2:19에서 보다 한층 강렬한 것이며 6:2에 가서는 느헤미야를 살해하려고까지 하는 것으로 발전된다.

성 경: [느4:2]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주); 자기 형제들 - 이들은 의논 대상이 될만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도비야'도 포함될 것이다(3절).

(주); 사마리아 군대 - 페르시아 정부가 파견한 수비대라기 보다는 해당 지역별로 조직된 부대인 듯하다(스4 : 23). 산발랏은 이 '군대'를 이용해서 유대백성을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서라도 괴롭힐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8절). 사실 페르시아 정부의 지배력이 제국 내의 곳곳에 직접적으로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산발랏의 이같은 사악한 생각은 실천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Rawlinson).

(주); 미약한 유다 사람들 - '미약한'(*, 아말렐림)은 '쇠퇴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나무가 시들어 말라 비틀어지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사 16:8 ; 24:17). 특히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주로 소망이 없는 암울한 상태를 가리킨다(사 19:8 ; 호 4:3).

(주); 제사를 드리려는가 - 이 문구에 대해서는, (1) 이'제사'를 성벽 재건사업이 마쳐질 때에 드려지는 감사의 제사로 보고 유대 백성이 성벽 재건을 완료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2)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초자연적인 힘으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가'라는 식의 빈정댐으로 볼 수도 있다(Williamson).

(주);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 이것도, 유다 백성들을 무능한 자들 이라고 하는 조롱이다.

(주); 소화된 돌을...다시 일으키려는가 -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사용할 석재(石材)를 확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롱이다(Rawlinson, Fensham).

성 경: [느4:3]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

(주);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 '도비야'가 산발랏의 측근 혹은 직속 참모였음을 보여준다.

(주);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 '여우'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알'(*) 구약에서 7회 나오며(삿 15:4 ; 시 63:10 ; 아 2:15 ; 애5:18 ; 겔 13:4) '쟈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쟈칼이 주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반면 여우는 대개 혼자 다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문에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여우'로 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도비야는 한 마리의 여우가 밟아도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성벽은 훌륭한 공성(攻城) 무기로 오랫동안 공격한 후에야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과장된 조롱임이 분명하다.

성 경: [느4:4, 5]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느헤미야의 기도]

본절과 같은 탄원적 기도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분의 뜻대로,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수행하는 사업이 원수들에 의해서 멸시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드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시의(時宜) 적절 하다고 할 수 있다(5:19 ; 9, 14 ; 13:14, 22, 29, 31 ;시 69:22-28 ; 79:12 ; 109:6-20).

(주); 우리가 업신여김을...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 '업신여김을'(*, 부자)은'조롱하다' 혹은 '모욕하다'의 의미이며 '노략거리'(*, 비자)는 '전리품'을 뜻한다. 여기서 본저자 느헤미야는 이처럼 발음이 매우 유사한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말의 유희(Word play)를 살리고 있다. 즉, 느헤미야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부자'라는 행동, 즉 그 원인으로 말미암아 '비자'라는 불행, 즉 그 결과에 도달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Fensham).

(주);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 이것은 고대 중근동 민족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환난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민족이다(스4:9, 10).

(주);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 여기의 '덮어두지'(*, 카사)는 죄의 용서를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렘 18:23 에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느헤미야가 예레미야서를 인용한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예레미야 시대나 느헤미야 시대에 공히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Fensham).

성 경: [느4:6]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느헤미야의 기도]

(주);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聯絡)되고 - 이것은 예루살렘의 성벽에 의해서 완전히 둘러싸여 졌음을 뜻한다.

(주); 고가 절반에 - 원문상으로는 단지 '절반까지' 혹은 '중간까지'라는 뜻만 있으므로, 이 말은 성벽의 길이나 넓이에도 적용될수 있으나 높이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 즉, 성벽이 원래 계획했던 것의 반정도의 높이로 쌓여졌었음을 가리킨다(Rawlinson, Fensham).

(주);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 문자적으로는 '역사할 마음이 있었다'의 뜻으로서, 참여자들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 자세가 성벽 재건 사업이 크게 진척될 수 있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느4:7]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적대감이 점증되고 있었듯이(1절), 적대감을 품고 있던 이방인들의 숫자도 급격히 많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이방 세력에 대해서는 본장 강해의 지도, '성벽 재건을 방해한 네 민족들'을 참조하라.

(주); 산발랏과 도비야 - 이에 대해서는 2:10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라비아 사람들 - 이들은 페르시아가 중동을 제패했을 무렵에 팔레스틴의 동부인 요단 동편과 남부인 네게브 지방을 거주지로 삼기 시작했었다. 바로 이 족속의 한 분파를 다스리던 자가 '게셈'이었다(2:19).

(주); 암몬 사람 - 이들은 그 당시 요단의 동쪽 지역 및 심지어는 요단의 서쪽 강변에서도 살던 민족이었다.

(주); 아스돗 사람-이들은 블레셋 족속들이 거주했던 지역 전반에 걸쳐서 살고 있었다.

(주);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 본절의 '중수되어' (*, 아루카)는, 그 어근 '아라크'(*)의 뜻이 '연기하다' 혹은 '참다'인 것과는 달리 '상처의 치유' 혹은'상처 위로 새 살이 돋아나는 것'을 가리킨다(사 58:8 ; 렘 8:22 ; 30:17 ; 33:6). 건축과 관련한 이러한 표현은 대하 24:13에서도 나타나는 바, 이는 일반적으로 두루쓰인 관용적 문구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에는 예루살렘의 번영을 기원하는 느헤미야의 각별한 염원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느4:8]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애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주); 다 함께 꾀하기를 - 여기서 '꾀하기를(*, 카솨르)은 '묶다' 혹은 '음모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로서, 어떤 질서 체계를 깨뜨리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망하게 할 목적으로 집단적인 이기심에 따라 배반하는 행위를 가리킬때 많이 사용되었다(삼상 22:8 ; 왕상 16:16 ; 대하 25:27). 요란하게 하자(*, 라아소트 로 토아)는 문자적으로 '그것(혹은 그)에게 상처를 입히다'의 의미이다. 여기서 '그에게'(*, 로)의 '그'는 남성 단수라는 점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 사업을 주도하고 있던 느헤미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만일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면 '그'는 여성 단수가 되어야 한다. 한편, 산발랏은 당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으므로 느헤미야의 귀한을 허락하는 왕의 조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성벽 재건 금지령만(스 4:21-23) 내세우며 심지어 무력행사까지 감행하려 했다(2절). 이러한 독자적인 무력 행사는 명백한 불법 행위였으며 더구나 느헤미야가 합법적 절차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는 산발랏 일당의 조급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시사하며 또한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의 한계를 보여 준다.

성 경: [느4:9]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사태의 해결을 부탁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방책을 강구한다.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최선을 다해 활용하고자 하는 느헤미야의 신앙적 자세는 본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데, '하늘의 하나님께 목도하고 왕에게 고하여'(2:4, 5),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며'(4-6절), '주를 기억하고...싸우라'(14절)등이 그러하다(Kidner).

성 경: [느4:10]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본절에서와 같은 백성들의 낙심은 산발랏 일파의 협박(8절) 때문임이 분명하다.

(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 '흙 무더기'는 바벨론 군대의 공격 때에 파괴된 성벽과 그 밖의 것들의 잔해를 뜻한다. 이것들은 성벽이 재건되고 있거나 혹은 재건되어져야 할 곳에 높이 쌓여 있었던 것 같다.

(주); 담부(擔負)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 이것은 성벽 재건에 참여한 백성들의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된 것은 (1)이스라엘 백성의 상당수가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않았음에 따라 참여한 소수의 작업량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고, (2)일꾼 중에서 파수꾼으로 차출된 사람이 있었으며, (3)게다가 산발랏을 위시한 대적자들의 위협이 날로 심해져 갔기 때문이다.

(주);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 본절과 6절 내용과의 조화를 위해, 어떤 학자들은 원문상으로 본장 6절까지가 3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7절 이하의 내용이 6절 내용보다 시간상 앞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적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거의 절반에 달하는 정도의 공사를 이룩했지만(6절)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살벌해지자(8절) 큰 불안과 낙담에 빠져버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무난하다.

성 경: [느4:11, 12]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이 부분은 느헤미야가 파수대를 더 보강할 수밖에 없었던(13절) 절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주);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 -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북쪽으로는 산발랏을 위시한 사마리아 사람들, 동쪽으로는 암몬 사람들,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람들, 또한 서쪽으로는 아스돗 사람들이라는 대적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7절). 따라서 본절의 '유다 사람들'은 유다 땅의 외곽 지역에 거주하던 백성들이다.

(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 유다 땅의 변경에 살던 벡성들 중 성벽 재건에 참여치 아니한 사람들은 산발랏 등의 군사적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그들의 공세를 방어할 요량으로,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데려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산발랏 일당의 계략이었다. 즉, 대적들은 유다 변경에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성벽 재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게 해서 성벽 재건을 중단케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느4:13]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주); 성 뒤 낮고 넓은 곳에...서게 하고 - 이같이 한 이유는 '성 뒤 낮고 넓은 곳'은 비록 성벽이 일부 쌓여있기는 했지만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취약 지점이었던 때문이다. 또한 유다 백성들을 노출된 곳에 세움으로써, 산발랏 일당에게 일전 불사(一戰不辭)의 군사적 대응 능력을 보여 주려는 것도 또 다른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서 '낮고'(*, 미타흐티요트 라마콤)는 문자적으로 '가장 낮은 장소 쪽에' 의 뜻이다. 그리고 '넓은 곳'(*, 체히힘)은 헐벗은 언덕이나, 평탄하고 장애물이 없이 노출된 장소를 뜻한다(EdwinYamauchi, Keil). 또한 '성 뒤 '는 성벽의 예루살렘 성읍 쪽을 가리킨다. 그리고'서게 하고'(*, 아아미드)는 '모시다' 혹은 '서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아마드'(*)의 사역형으로서, 특정한 직책을 수행케 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 혹은 지위에 있게 하는 것을 주로 가리킨다(9절 ; 삿 20:28 ; 왕상 12:6 ; 왕하 9:17 ;슥4:14).

(주); 종족을 따라 - 이것은 군사 조직 내의 효율성을 증대케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종족' 혹은 '씨족' 끼리는 협조가 더욱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겠기 때문이다.

(주); 칼과 창과 활 - '칼'은 이스라엘 역사상, 근접전(近接戰)이 벌어졌을 때 가장 많이 사용됐던 중요한 무기였다(Fensham). 또한 '창' 은 가까이 있는 적을 찌르는 데 사용됐으며 '활' 은 약 600m의 사정 거리를 갖는 강궁(强弓)과 약 270m에서 360m 정도의 사정 거리를 갖는 경궁(經弓) 모두를 가리킨다(Y. Yadin, R. Go-nen).

성 경: [느4:14]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들의 훼방]

(주); 내가 돌아본 후에 - '돌아본'에 대해서는 (1)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염려를 살폈다는 견해(Fensham, Schultz), (2) 느헤미야가 산발랏등의 동정을 알기 위해 그 주변을 살폈다는 견해(Rawlinson), 혹은 (3)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무장 상태를 살폈다는 견해(Keil)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첫째, 본절의 '돌아본' (*, 라아)은 단순히 '쳐다보다'의 뜻이며(Fensham) 둘째, 본문맥에 이어서 '두려워 말고' 라는 느헤미야의 당부가 나온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위의 세 견해 중 (1)의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

(주);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 - '귀인'(*, 호림 )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어느 정도의 권세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2:16 ; 5:7 ; 13:17). 한편, '민장'(*, 세가님)은 다른 곳에서는 '방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2:16 주석 참조). 그리고 '남은 백성'은 앞의 '귀인'과 '민장'계층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을 뜻한다.

(주);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 '지극히 크고'(*, 가돌)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달리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강조하는 형용사로 사용되었다(출 18:11 ; 대상 16:25 ; 5 시 76:1 ; 86:10). 한편, '두려우신'(*, 노라)은 '두렵다' 혹은' 두려워하다'의 뜻이 있는 '야라'(*)의 수동형분사로서, 많은 경우에서 종말론적으로 악인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한다(시 1456:6 ; 욜 2:11 ; 습 2:11: 말 4:5). 따라서 본 문구는 모든 악한 자들을 권능의 하나님께서 대신 벌하여 주실 것을 믿고 백성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뜻이다(민 14:9 ; 신 1:29, 30 ; 삼하 10:12). 느헤미야는 옛 선조들이 믿음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대적들과 용감하게 싸웠던 사실, 특히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들을 위해 대신 싸우사 승리를 가져다 주신 엄연한 역사적 사실(출 14:13, 14등)을 믿음의 눈으로 확고히 돌아보았을 것이다. 비록 당시의 성벽 파수대는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했고 실전 경험도 없는 군대였으며 그 무기 또한 상대적으로 열세하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확신이었다고 이해된다(Williamson).

(주); 너희 형제와의...집을 위하여 싸우라 - 이미 느헤미야는 파수대를 종족 단위로 편성한 바 있다(13절). 자신의 가족과 친척을 위해 싸운다는 비장한 각오야말로 숫적인 열세를 메꾸어 주는 큰 활력이 되었을 것이다.

성 경: [느4:15]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주);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휘 하에 무장을 한 채 조직적으로 파수하는 등 철저한 방어 체계를 갖췄다는 사실을 대적이 첩자들을 통해 들었다는 뜻이다(13, 14절). 대적들의 계획은 기습 공격으로 단숨에 살륙을 감행하거나(11절) 무력의 과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벽 재건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주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강하게 무장하여 적극적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대적들의 계획은 오히려 무산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무장한 병사들이 강한 정신력으로 지키는 성읍을 공약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며, 더욱이 전투가 장기화되면그 분쟁의 소문이 아닥사스다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고 결국 산발랏 일당은 왕명을 거스린 죄과까지 치뤄야할 터였으므로 그들은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들의 계획을 부수셨다' 의 뜻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표현이 스 4:5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거기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원수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획이 좌절됐음을 말한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에스라서에서 사용된 독특한 표현을 여기서도 다시 사용한 까닭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느4:16]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비록 산발랏이 쳐들어오려고 했던 긴박한 상황은 지나갔지만, 그래도 느헤미야는 여전히 잔존했었던 일말(一抹 )의 공격 가능성으로 인하여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 그때로부터 - '그 때'는 문자적으로 '바로 그 날'의 의미로서, (1)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음모를 감지하여 백성들을 무장시킨 그 날(9, 13절), (2)산발랏이 자신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계획을 포기한 '그 날'(15절) 모두를 뜻한다.

(주); 내 종자(*, 네아라이) - '내 종자'는 (1)느헤미야처럼 유다 출신들로서 느헤미야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던 특별한 집단(Myers, Keil, Rawlinson), (2)총독 신분으로서의 느헤미야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유다 백성들(Fensham)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본절의 '종자'(*, 나이르)라는 단어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하인을 가리키며(출 21:27 ; 삼상14:6 ; 25:5 ; 삼하1:5 ; 왕상19:3) 둘째, 느헤미야가 비록 총독이기는 했지만 백성들을 하인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며 셋째, '종자'와 '성을 건축하는 자'가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음을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전자가 보다 타당하다.

(주);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 활을 가졌고 - 이처럼 느헤미야가 자신의 종자들에게 파수 의무를 보다 많이 맡긴 까닭은 (1) 그들이 다른 백성들보다 훈련이 많이 되어 있었고, (2) 그들이 보다 훌륭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주); 민장(民長)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 본절의 '민장'(*, 솨림)은 군사적 조직체로서의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였다(Willamson, 신 9:9 ) 그런데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항상 지파 내지는 씨족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13절 ; 민 2:1-34), 여기의 '민장'는 한 씨족의 지도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했을 것이며 유사시에는 백성들을 재건 체제로 즉각 전환시키는 책임을 맡은 자들로 짐작된다(Wllamson).

성 경: [느4:17, 18]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일반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종자와는 달리 성벽 재건에 전념하되 유사시에는 적을 물리치는 데 동원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주); 성을 건축하는 자 - 원문상 16절의 '유다 온 족속' 을 수식하는 문구로 봐야 한다(NIV, Williamson, Fensham).

(주); 담부하는 자 - 이들은 자재(資材)를 운반하거나 흙과 무너졌던 성벽의 잔해를 치우는( 10절)등의 조역(助役)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다(Rawlinson). 이들은 자재 운반등의 일을 위해서 성밖에서도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작업 환경은 '건축하는 자'에 비해서 보다 열악(劣惡) 했을 것이 뻔하다(FEN-SHAM).

(주); 각각...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 히브리 원문에는 '각각'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그런데 '담부하는 자'가 이처럼 한 까닭은 (1)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의 성격상 성 밖에서도 일을 해야만 했던관계로 호신(護身)을 위한 노력이 필요했으며, (2)또 그 일의 성격상 한 손에 병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Fensham, Rawlinson). 한편, '병기'( , 솰라흐)는 우가릿 문서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오래된 것으로서, (1) 멀리 던질 수 있는 창, (2) 돌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무기를 모두 의미한다. 특히 본절의 '담부하는 자'들이 주로 흙이나 무너진 성벽의 잔해 위에서 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2)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Fensham, Williamson).

(주);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 '건축하는 자'는 앞의 '담부하는 자'와는 달리 성벽을 쌓는 일을 담당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만 하는 일의 성격때문에 '칼'을 허리에 찰 수밖에 없었다.

(주); 나팔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 이것은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그것을 예루살렘 외곽에 흩어져서 성을 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이다(19, 20 절). 이같이 나팔을 불어서 위급함을 알리는 연락체계는 고대국가들에서는 꽤 보편적으로 이용되었다.

성 경: [느4:19, 20]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느헤미야가 나팔 부는 자를 자신의 곁에 세워둔(18절) 이유가 언급되고 있다.

(주); 귀인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 - 14절 ; 2:16 주석을 참조하라.

(주); 이 역사는 크고 넓으므로 -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가 성읍의 둘레 전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

(주); 우리가 성에서 나뉘어 상거(相距)가 먼즉 - 이것은 차라리 '우리가 성벽을 따라서 각 사람들로부터 나뉘어져 있다'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이다(Fensham). 결국 이는 백성들이 분산되어 있기때문에 어느 한 쪽으로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져 올 때 거기에 대응할 수 없음을 염려하는 문구이다.

(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니라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도구로 삼아서 원수와 싸우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시는 이유는, 거룩한 성이 방어되고 또한 당신의 백성이 안전하게 사는 것이 철저하게 당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싸우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 곧 성전(聖戰)일 수밖에 없다(수5:13-5 주제 강해, '성전(聖戰)' 참조). 그리고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있어도,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하기 마련이다(Kidner).

성 경: [느4:21]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16절의 내용이 약간 다른 모양으로 다시 언급되고 었다.

(주); 무리 - 16절의 '종자'와 동일할 것이다.

(주);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노역을 감당했었음을 강조하는 시적(時的) 표현이다. 아울러 이는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느4:22]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주); 사람마다...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 느헤미야가 이와같이 명령을 한 것은, 아마 외지(外地)에서 공사를 위해 온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저녁에 일이 마쳐지면 자기의 집으로 가서 자려는 경향이 있었던 때문으로 짐작된다. 만일 백성들의 뜻대로 방치할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점들이란 (1) 백성들이 고향에 왕래하는 도중 적의 기습을 받을 가능성, (2)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의 작업장으로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 (3)아침마다 집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야기되는 혼란과 공정(工程)의 답보(踏步)현상, (4)고향이 멀어서 저녁마다 갈 수 없는 사람과 가까운 데 고향이 있어서 저녁마다 집으로갈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위화감이 생길 가능성, (5) 밤마다 발생할 예루살렘 시내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으로 인해 적의 야간 습격이 있을 가능성, (6) 위의 모든 문제들로 인해 성벽 재건 공정이 늦어질 가능성 등을 들을 수 있다.

(주); 그 종자 - 이들은 16절의 '종자'와는 다르다. 만일 느헤미야가 여기서 자신의 '종자'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16절에서 처럼 '내 종자'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그 종자'는 백성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데리고 온 '노예'일 것이다(Rawlinson). 실제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백성들에게는 여섯 명당 한 명씩의 노예가 있었다(스2:64, 65).

성 경: [느4:23]

주제1: [대적들의 준동과 그에 대한 대응]

주제2: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본절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산발랏 일당의 공격에 대한 경계 태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주); 내 형제들 - 이는 느헤미야의 친 형제들일 가능성이 많다(1:2 ; 7:2). 종자들 (*, 네아라이). 문자적으로 '나의 종자들'이므로 16절에서 언급된 느헤미야의 직속 부하들을 가리킨다.

(주);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 - . '나를 좇아'(*, 아하라이)는 주종(主從)의 관계에 대해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다(삼하 7:8 ; 왕상 11:6 ; 16:22 ; 렘 7:6 ).따라서 '파수하는 사람들'은 '종자들' 이외에 느헤미야를 전심으로 추종하던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주);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 이것은 다급한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서는 백성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주);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문구(*, 이쉬쉴호 하마임)가 잘못됐다고 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거기에는 (1) 여기의 '물'(*, 하마임)이 '오른 손'(*, 하야민)의 오류로 보고 '그의 무기는 그의 오른 손에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Fensham, Williamson, Keil). (2)이 불완전한 문구를 오류로 보지 않고 무리하지만 '물로 각자의 병기틀 씻었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Rawlin-son), (3)어떠한 단어가 탈락된 것으로 보고 '각 사람이 물을 먹으러 갈 때에도 자기의 무기를 가졌다'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NIV), (4) 이 문구를 앞의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의 종속절로 보고, 또한 '기계'가 '그릇'을 뜻한다고 보아 '비록 각 사람이 자신의 물 그릇을 가졌지만'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J. P. Green), (5)역시 이 문구를 바로 앞 구절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고, '씻기 위해 옷을 벗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으로 해석하는 견해(KJV)등이 있다. 그러나 이같이 다양한 견해 중에서 첫째, 맛소라 본문에 최대한 근거하려고 한다는 점 둘째, 그 문맥을 고려해보건대, (1)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성 경: [느5:1]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원망]

외부적으로 산발랏 일당의 방해 공작이 점점 거세어지는 와중에,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다. 본장은 이렇듯 심각한 사회, 경제적 내우(內憂)를 느헤미야의 과단성 있는 결단과 주도하에 극복해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주);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 '차아카트 게돌라'(*), 즉 '큰 부르짖음'은 성경에서 대개 극한적인 고통의 결과로서 나타난다(창18:21;27:34;출 11:6;12:30). 따라서 본 문구는 일부 백성들이 심각한 환난 가운데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본절에서 여자가 부르짖음의 주체(主體)로 나오고 있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백성의 환난이 한 가정의 생계문제와 직결된 절박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왕하 4:1;6:26;8:3).

(주);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 '원망하는데'(*, 엘)는 '...에 대해서' 혹은 '...을 대항하여'의 뜻으로서 앞의 '백성'과 '그 아내'가 '형제 유다 사람'을 향하여 부르짖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본절의 '형제 유다 사람'은 구체적으로, 가난한 백성을 상대해서 고리 대금(高利貸金)을 한 사람들을 가리킨다(7절). 여기서 느헤미야가 그들을 굳이 '형제 유다 사람'이라고 한 까닭은, 그 고리 대금업자들이 피해자와 동족들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서 그들의 몰인정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때문이었다. 사실 동족들에 대해서 고리대금을 하는 일은 율법도 금하는 일이었으며(레 25:35-37;신 23:19), 또한 상식적 판단으로도 지탄을 받아 마땅했다.

성 경: [느5:2]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원망]

2-4절에 나오는 불평은 모두 심각한 빚 문제와 연관된 것이며, 이러한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유나 배경은 세 가지 유형으로 달리 나타난다. 문맥상으로 볼 때 여기서 열거되는 불평들은 몇몇 개인의 사례들이라기 보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루 퍼져 있었던 일반적인 문제를 대표한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Williamson). 본절은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들의 첫 번째 유형이다. 그들은 '가족수(家族數)'가 많음으로 인하여 빚을 지게 되었다.

(주);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 빈민들이 반드시 돈만을 빌린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들은 돈 뿐만 아니라 '곡식'과 '새 포도주', '기름'도 빌렸었다(11절).

성 경: [느5:3]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원망]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들의 두번째 유형이다. 본절에 빚의 원인으로서 언급된 '흉년'은 사실 첫 번째 유형(2절)과 세 번째 유형(4절)의 빈민들이 빚을 지게 된 근본적 혹은 간접적 원인이 됐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흉년의 시기에 도탄에 빠지는 자들은 대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반면에 부요한 자들은 창고에 저장된 곡식이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흉년에도 버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서 그것을 고액에 팔아 넘겨 폭리를 취하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결국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게되었다.

(주); 밭과 포도원과 집 - 이 세 가지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 만큼이나 귀중히 여겨지던 전재산(全財産)이었을 것이다.

(주); 흉년을 위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 흉년 동안에'이다. 따라서 본절의 '흉년'은 로린슨(Rawlinson)이 주장하듯이 과거의 흉년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에 진행되던 흉년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팔레스틴에 큰 흉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학1:6, 9-11). 아무튼 페르시아 시대에 흉년이 잦았다는 사실은 너무도 분명하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팔레스틴, 특히 기브온 지역은 이스라엘 초기 시대만 해도 엄청난 포도의 생산이 있었으나 페르시아 시대에 들어서서는 그 생산량이 급강하했었다고 한다(Fensham). 분명 이와같은 현상은 포도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느5:4]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원망]

고리 대금업자를 원망한 빈민의 세 번째 유형으로서 그 원인을 '세금'으로 언급하고 있다.

(주);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 문자적으로는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을 위하여 돈을 꾸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개역 성경의 번역은 약간 잘못이 있다. 한편, '밭과 포도원에 대한 왕의 세금'은 그 땅에서의 평균 산출량에 근거해서 거둬 들였던 토지세의 일종이었다(Fensham, Williamson). 이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페르시아 정부에게 또다른 세금들을 바쳤다(스 4: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보다 세금 부담이 더 과중했기 때문에 곤경에 처했다고는 볼 수 없다(Rawlinson).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납세 문제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스라엘 사회의 경제적 형편이 극도로 피폐했던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제적 형편에 처하게 된 것은 흉년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3절). 물론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 동원되어 농사를 짓는 일 등의 경제 활동을 영위치 못한 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공사가 불과 '오십이 일'만에 끝났음을 감안한다면(6:15) 성벽 재건 사업은 이스라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결코 아니었다.

성 경: [느5:5]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원망]

본절의 내용은 위의 세 가지 유형의 빈민들(2-4절)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될 것이다. 즉, 본절은 이들이 빚을 갚지 못함으로써 다다르게 된 극단의 상황인 것이다.

(주);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 이것은 채무자나 체권자 모두 동족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결국 이같은 말을 통해서 가난한 채무자들은 채권자들의 무자비함을 확연히 드러내려고 한다(1절).

(주);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 사실 채권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가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율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는 동족의 자녀를 노예로 데려올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을 경우 유대인들은 가족 구성원을 담보로 삼아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 경우에 돈을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채무자의 딸이나 아들, 그의 아내, 심지어 채무자 자신이 채권자의 종으로 봉사해야 했으며(레 25:39, 40), 제 7년째 되는 해에는 다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신 15:12-18). 따라서 만일 채권자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그들이 가난한 자들로부터 고리(高利)를 취했다는 것일게다(7절).

(주);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 본절에서 '종 된 자가 있으나'는 문자적으로 '종으로 복속됐으나'의 뜻이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크바쇼트)가 '성적(性的)으로 정복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에서(에 7:8) 이는(1) 채권자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한 대상이 되는 일(Williamson). (2) 채권자의 첩이 되는 일(Fensham)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빚 때문에 팔려간 여종은 남종과는 달리 성적(性的)인 문제에 있어서 채권자의 처분을 따라야 했다(출 21:7 이하). 한편,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채무자의 자녀들이 채권자의 노예가 된 것이, 빚을 갚지 못해서 소유물을 빼앗긴 다음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즉,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일차적으로는 토지 등의 재산을, 그 다음에는 자녀들까지 채권자에게 빼았겼던 것이다.

성 경: [느5:6]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책망]

(주); 이런 말 - 이것은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제적 가혹 행위, 즉 고리 대금을 통한 재산 및 자녀들의 탈취 사실을 뜻한다.

(주); 크게 노하여 - 이것은 산발랏 일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쌓는 일에 대해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감정이다(4:1, 7). 결국 이것은 온유한 인물 느헤미야가, 그 어느 때보다 일치 단합이 요구되는 때에 그것을 깨뜨리는 부자(富者)들의 횡포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성 경: [느5:7]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책망]

(주); 중심에 계획하고 - '계획하고'(*, 말라크)는 '심사 숙고하다'의 의미가 있는 아랍어에서 온 단어로서, 여기서는 느헤미야가 (1) 가난한 유대인들의 불쌍한 형편을 반전(反轉)시킬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하는 일, (2) 고리 대금을 한 유력한 자들을 거기서 돌이키게 할 방법을 연구하는 일 등을 가리킨다(Fensham). 본절은 경제적 횡포를 자행하는 부자들을 향해 분노의 감정이 솟구 치는 중에서도 차분하게 사태의 해결책을 강구하는 느헤미야의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주);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 본절의 '꾸짖어'(*, 리브)는 '다투다', '뒤흔들다', '꾸짖다' 혹은 '변론하다'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고소하다'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NIV, Fensham). 사실 (1) 이 단어가 칠십인역에서는 상당수 사법적 의미를 함축한 '크리노'(*)로 번역된다는 점, (2) 본절이 '귀인과 민장'의 죄를 거론하는 문맥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리브'라는 단어를 '고소하다'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귀인과 민장'은 앞에서는 '그 형제 유다 사람'으로 언급된 자들이다(1절).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치부(致富)하였고, 또한 그 부(富)를 이용해서 자기의 재물을 늘려간 자들이다.

(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取利)를 하는도다 - '취리를 하는도다'(*, 마솨 노쉬임)에 대해서는 (1) '짐을 지우다'(Fensham, Myers, JB), (2) '빚쟁이 노릇을 하다'(Williamson), (3) '이자를 거두다'(RSV, Rawlinson), (4) '이자를 강요하다'(NIV) 등의 여러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이같이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 까닭은 위의 두 히브리 단어들의 의미가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첫째, 뒤의 '노쉬임'이라는 단어가 결과적으로 타인과 원한 관계를 형성케 하는 행동을 주로 나타낸다는 점과(Kidner, 삼상 22:2) 둘째, '마솨'는 '이자'를 뜻한다는 점(BDB)등으로 볼 때 (4)의 견해가 가장 적절한 듯하다.

(주);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 이것은 느헤미야의 일차적 '꾸짖음'이 '귀인과 민장'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음을 암시한다(Rawlinson). 이에 따라 느헤미야는 공개적인 모임에서 그들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마 18:15-17). 한편, '대회'의 '회'(*, 케힐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약공동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신 33:4) '카할'(*)과 동일한 의미이다(스 2:64;10:8). 한편, '저희를 쳐서'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을 향하여' 혹은 '그들을 대항하여'의 뜻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귀인과 민장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책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느5:8]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책망]

(주); 우리는...유다 사람들을...속량하였거늘 - 이에 대한 언급은 에스라 및 느헤미야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었을 때 이루어졌던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동토 중 가난한 사람이 그 땅의 이방인에게 노예로 팔렸을 경우 율법의 명령에 따라(레 25:47-49) 그 속전을 지불하고 거기서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속량하였거늘'(*, 카나)은 '바로 세우다', '획득하다', '소유하다'.'사다'등과 같은 여러 의미를 지니며 특히 돈이나 기타의 대가를 주고 무엇을 되사는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창 25:10;삼하 12:3;전 2:7;렘 13:1).

(주);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 등이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동족을 노예 생활 중에서 속량한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야만적 행위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동족의 종살이를 했던 히브리인들도 제7년 째 되는 해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으며(레 25:40, 41), 동족인 히브리인을 이방인에게 노예로 파는 일은 율법상으로 엄금되었다(출 21:8). 결국 본문과 같은 물음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귀인과 민장'(7절)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시도하고 있다.

(주);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 이것은 고리 대금을 한 귀인과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논리에 설복되었음을 암시해 준다(Rawlinson). 사실 그들의 죄악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아무런 변명의 여지도 없이 다만 침묵했을 것이다(요 8:7-10).

성 경: [느5:9]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아의 책망]

앞절에서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해서 귀인과 민장들의 악행을 간접적으로 책망한데 이어,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책망한다.

(주); 내가 또 이르기를 - 귀인과 민장들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소극적 인식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악행에서 손떼게하기에 심히 미흡하였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처럼 자신의 책망을 계속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Rawlinson).

(주);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의 부도덕 혹은 무자비함에 대해서 이방인들의 비방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준다(롬 2:23, 24).

(주);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나 - 이것은 곧 최소한 노예에 관한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일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성 경: [느5:10]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아의 책망]

(주); 내 형제와 종자들 - '형제'는 느헤미야의 친 형제들을 뜻할 것이다(1:2;4:23;7:2). 그리고 '종자들'은 느헤미야의 측근 혹은 그의 직계 부하들을 의미한다(4:16).

(주); 우리가 그 이식받기를 그치자 - 이것은 순수한 동기, 즉 동족들을 도우려는 동기에서 돈 등을 꾸어줄 것을 강조하는 권면이다. 여기서 '우리'는 느헤미야가 자신도 백성들을 향한 선한 일에 적극 참여할 당위성을 절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출 22:25;레 25:36;신 23:19) 누구보다 뼈저리게 인식하고, 또한 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솔선하여 이행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권면은 더욱 큰 호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재물을 꾸어주고 그에 따른 정당한 이자를 받는 일 자체는 정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는 탐욕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책망한다(시 119:36;사56:9-12;57:17;렘 6:13;8:10;22:13-19;겔 22:12-14;33:31). 특히 본문과 같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는 아예 이자를 기대하지 말고 꾸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아테네의 위대한 개혁자인 솔론(Solon)도 B.C. 594년경 이와 유사한 정책을 채택한 사례가 있다(Edwin Yamauchi).

성 경: [느5:11]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책망]

10절의 권면을 구체화 시킨 실천 방법이다.

(주);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 - 이것들은 본래 가난한 채무자들의 것이었으나, 그들이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에게 넘어간 담보물이었다. 그런데 '감람원'은, 백성들이 채권자에게 빼앗겼다고 한 것들(3, 5)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감람', 즉 올리브가 그 당시 유대 지방에서 중요한 농산물 중의 하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감람원'도 채권자들에게 필요시 능히 제공될 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주); 취한 바돈이나...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 '취한바 돈이나...기름'은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받아낸 이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백분지 일'은 그 당시 채권자가 자기들이 준 빚에 대해서 적용했던 월리(月利)였던 것 같다. 이 같은 금리는 사실상 당시 페르시아의 금리가 연 20% 이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별로 높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illiamson). 그러나 (1)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에게서 이자를 취하는 일을 율법으로 금했으며(출 22:25;레 25:36). 그 당시에는 흉년과 성벽 재건하는 일로 백성들의 경제 형편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월 1%, 즉 연 12%라는 금리는 매우 가난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백성들에게는 과중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돌려 보내라'는 '밭'과 같은 담보물에 대해서는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곡식'등의 '이자'에 관련해서는, 이미 받은 것은 돌려보내며 또한 앞으로 받을 것은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12절).

성 경: [느5:12]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순복]

본절은 느헤미야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주); 돌려 보내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 '돌려 보내고'는 채권자들이 채무자들로부터 빼앗은 담보물과 이미 부당하게 취했던 이자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이며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는 앞으로 받을 이자의 포기를 뜻한다.

(주); 제사장들을 불러...맹세를 시키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채권자들의 결단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결단을 번복치 못하게끔 하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 사실 공중 앞에서의 결단은 체면이나 분위기 등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었으므로 다시 번복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어쨌든 채권자들은 제사장 앞에서 신앙적 차원의 서원을 했던 관계로, 그 서원이 신실하게 이행될 때까지 제사장의 감독을 받아야만 했다(룻 3:6-13 주제 강해, '맹세에 대한 바른 이해' 참조).

성 경: [느5:13]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백성들의 순복]

(주);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 여기의 '옷자락'은 물건을 나를 때 흔히 사용되는, 마치 앞치마와 같이 생긴 겉옷의 무릎 부분을 가리킨다(Keil). 한편, '떨치며'(*, 나아르)는 '흔들어 비우다'의 뜻으로서 무엇을 운반하고자 옷자락의 아랫 부분을 손으로 쥐었다가 그것을 뿌리치듯이 세게 놔버리는 행동을 가리킨다(Keil). 이렇게 할 경우그 옷자락에 담긴 것은 땅에 쏟아져 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절의 다음부분이 시사하듯이 저주를 선포하는 상징적 행동임이 분명하다(마 10:14;행 18:6). 한편,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예언의 메시지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백성들에게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왕상 1130-32;렘 13:1-11;27:2-11;겔 4:1-17 등).

(주); 하나님이...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 - 하나님께서 고리 대금을 하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소유물을 거둬가시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집과 산업'은 그 고리 대금을 한사람이 자랑으로 여기던 그의 전재산을 뜻한다.

(주); 여호와를 찬송하고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불미스럽다(9절)고 할 수밖에 없는 고리 대금 및 그에 따른 노예의 양산(量産) 사건이 말끔히 해결되기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Fensham).

성 경: [느5:14]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여기서부터 본장의 마지막부분(19절)까지는 느헤미야가 자칫 잘못하면 이스라엘의 상류 계급층과 충돌을 빚을 소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앞부분(6-13절)에서와 같이 사회,경제적 개혁을 도모할 수 있었고 또한 성공할 수 있었던 근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 근저는 곧 그의 청렴결백이었다.

(주);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 느헤미야 자신이 페르시아 왕에 의해 임명된 총독임이 처음 밝혀지고 있다. 물론 그에게 상당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다(2:9). 그런데 본절의 '총독'(*, 페함)은 '페하'(*)의 오류임이 분명하다(Fensham, 학 1:1, 14). 이 같은 단정은 18절의 '총독'이 '페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해질 것이다.

(주);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 이것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를 떠났던 때로서, B.C. 444년이었다.

(주); 삼십 이 년까지 - '삼십 이 년'은 B.C. 433년이다. 느헤미야는 이 '삼십 이 년'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페르시아 왕실의 주관(酒官) 역할을 하다가 B.C. 432년경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하였다(13:6).

(주);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것은 백성들의 경제적 형편이 너무도 비참했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게 백성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사도 바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기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봉사하였다(고전 9장:살후 3:8). 한편, 페르시아 제국 내의 지방 총독들은 중앙 정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몫을 위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한다(Frye). 본절에서 '내 형제'(*, 아하이)는 문자적로는 '내 형제들'로서 느헤미야와 함께 총독부의 일을 맡아 수행했던 관리들 전체를 가리킬것이다(Fensham, Rawlinson). 물론 여기에 느헤미야의 친동생 하나니가 포함된 것은 자명하다(1:2;7:2). 한편, '총독의 녹' 중 '녹'(*, 레헴)은 문자적으로는 '떡'의 의미로서 총독에게 마땅히 돌아갈 생활비 전체를 의미한다.

성 경: [느5:15]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주);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討索)하여 - 에스라서를 통해 느헤미야가 귀환하기 전에는 스룹바벨(세스바살)이 유일하게 유대 총독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스 1:8;3:8;4:2;학 1:1). 어떤 학자들은 실제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의 사이에는 유대에 다른 총독이 파견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Alt, Rudolph, Galling). 반면에 아비갓(N. Avigad)이라는 학자는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이 두 총독 사이에 엘나단(Elmathan), 예호에셀(Yehoezer), 아자이(Ahzai) 등의 총독이 있었고 느헤미야 이후에는 바고히(Bagohi), 에헤즈키야(Yehezgiah) 등의 총독이 부임했다고 주장한다. 이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고집할 만한 확정적인 증거는 다소 희박하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행정적 한계를 고려하건데 유대 땅에 일시적으로 총독 부재 현상이 있었다고 해서 큰 의문점을 남기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하면, 본문의 '이전 총독들'이란 유대 지방에까지 행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마리아 총독들을 가리킨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사실 산발랏만 하더라도(2:10) 느헤미야가 유다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곳 백성들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런 영향력의 행사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은, 그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하지 못했었다(스4:21). 한편, '토색하여'(*, 히크비두)는 '무겁다' 혹은 '누르다' 등의 뜻이 있는 동사 '카베드'(*)의 사역형으로서, 세금 징수나 노역등의 많은 짐을 지우거나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가리킨다(왕상 12:10, 11;사 9:1).

(주);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 '양식'은 음료로 사용됐던 포도주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18절의 '소'와 '양'과 기타 곡식을 뜻할 것이다. '또'(*, 아하르)는 '...워에도' 혹은 '...에 덧붙여서'(besides)의 의미이다. 결국 본 문구는 '은 사십 세겔'이 먼저 기본적으로 징수되었고 여기에 더해서 '양식과 포도주'가 각 개인의 밭이나 포도원 등의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서 별도로 징수되었음을 뜻한다(Fensham). 그런데 본절의 '은 사십 세겔'은, 한 세겔이 보통 노동자의 나흘치 품삯이었으므로 무려 석달여의 품삯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였다. 그리고 이토록 많은 액수에 해당하는 '은'과 '양식과 포도주' 등은, 본절의 '토색하여'와 '하나님을 경외하여'라는 문구들을 통해서 볼때, 징수되어 총독 자신의 개인적 용도로 사용됐음이 분명하다. 한편, 이것들은 한 가정에서 매년 징수됐던 것이라기 보다는, 전 백성들로부터 사사로이 징수됐던 것들의 하루 평균 분량일 것이다(Rawlinson).

(주);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 본절의 '압제하였으나'(*)는 원래 '통치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상전 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가리킨다(시 109:16;전 8:9).

(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 이것은 느헤미야가 전임 총독들과는 달리 폭정(暴政)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으뜸되는 원동력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짐을 지울수 없었던 것이다. 그 두 번째 이유는 곤궁에 처한 백성들에 대한 형제애 때문이었다(18절). 결국 느헤미야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가장 크고 귀한 두 계명(마 22:37-40)을 나름대로 실천하고자 애썼던 셈이다(Kidner).

(주);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사리 사욕을 취하는 등의 폭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부하 관리들의 월권 행사를 금지시킨 것까지를 말한다.

성 경: [느5:16]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주);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 이 같은 모습은 (1) 이전 총독들이 '성 역사'를 적극 방해한 것(스 4:17-20), (2)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 역사'에 참여치 아니한 것(3:5)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사실 느헤미야는 '이 성 역사'를 위하여 (1) 페르시아왕의 술관원이라는 편안하고 영화로운 자리(2:1)를 포기하고 그 먼 곳 예루살렘까지 왔으며,(2) 그 일을 시행하는 동안 옷도 못벗고 감독과 경비를 하는 등 수고를 하였으며(4:23), (3) 심지어는 그 일을 방해하는 무리로부터 죽음의 위협까지도 받았다(6:2).

(주);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고리 대금을하여 그들로부터 땅을 빼앗지 않았던 사실을 가리킨다(10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으며, 그것을 상실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조차 파기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민 27:1-11 주제 강해, '토지의 사유 재산과 세습 제도' 참조). 따라서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토지 몰수 사례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이었는지가 자명해진다.

(주);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 이것은 앞에 언급된 총독의 '종자들'이 백성들의 상전 노릇을 한 것과 너무도 대조된다(15절). 사실 느헤미야의 종자들은'성 역사'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성 역사에 참여하고 있던 백성들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다(4:16, 23).

성 경: [느5:17]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주); 내 상에는...일백 오십 인이 있고 - 통치자가 자신의 참모나 신하를 부양하는 것은 고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풍습이었다(왕하 25:29). 따라서 느헤미야가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하였다.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은 오히려 '유다 사람들 즉 민장들'(KJV, the jews and rulers; LB, Jewishofficials)로 이해된다(Rawlinson, Williamson). 사실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반적 구성원으로서의 '유다 사람들'을 자신의 상에서 먹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 - 여기에 대해서는 (1) 계속 이방 땅에 살다가 새로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이라는 견해(Keil, Rawlinson,Batten, 박윤선), (2) 특별한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 들린 이방인 외교관이라는 견해(Fensham, Williamson)등의 두 가지 해석이있다. 그러나 첫째, 본절의 '우리 사면'이라는 말은 그 당시에 귀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로 바벨론 지역에서 살았음을 감안한다면 새로 귀환한 유대인으로 보기 곤란하며 둘째, 만일 해외에서 귀환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포로기 이전 조상의 연고지로 가서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보아 위의 두 해석중 나중의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사실 페르시아정부에 의해 임명된 총독 느헤미야가 (1)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는 페르시아 외교 관리나, (2) 페르시아 중앙 정부를 목적지로 하는 애굽 등지(等地)의 외교 관리가 업무차왔거나 잠깐 경유하여 쉬었다가 가려고 할 때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Fensham).

성 경: [느5:18]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사실 본절에 언급되고 있는 음식의 양은 그 밖의 보조적 음식을 더할 경우 4, 5백명은 능히 먹일 만한 것이었다. 느헤미야는 이 많은 양의 음식을 대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로부터는 합법적인 돈일지라도 받지 아니하였다.

(주); 살진 양 - 여기서 '살진'(*, 베루로트)은 '깨끗이 하다', '선택하다'의의미를 갖는 동사 '바라르'(*)에서 온 단어로 '선택한' 혹은 '손으로 뽑은'이란뜻이다.

(주); 닭(*,치포림) - 이것은 가금류(家禽類)로서의 '닭'이 아닌 들새 종류를 가리킨다(Fensham, 신 4:17;시 8:8).

(주); 열흘에 한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 이것은 포도주를 마실 기회가 열흘에 한 번씩 주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포도주는 중근동 사회에서는 일종의 음료였음을 볼 때, 항상 식탁 위에 올려졌을 것이다. 다만 총독부가 그것을 열흘에 한 번씩 한꺼번에 준비하였음이 분명하다. '각종 포도주'(*, 베콜 아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1) 여기의 '베콜'이 포도주의 용기(用器)를 가리키는 '네벨'(*)의 오류로 보고 '포도주 여러 부대'라는 해석(Fensham,Rudolph, Myers), (2) 맛소라 본문에 근거하여 여기처럼 '각종 포도주'라고 해야 한다는 해석(Rawlinson, Williamso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분명한 증거도 없이 맛소라 본문을 고치는 것은 무모하며 둘째, 개역 성경의 번역에는 생략됐지만 '각종 포도주' 다음에는 별도의 수량을 표시하는 단어(*, 레하르베, '많이'의 의미)가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두 견해 중 두 번째의 것이 보다 타당한 듯하다. 여기의 포도주의 종류에 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를 참고하라.

(주);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 - 이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합법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로부터 거둔 세금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사재(私財)로 충당했음을 뜻한다(14절).

(주);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 이것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치 않았던 중요한 이유였다. 느헤미야는 15절에서 이같이 한 이유를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한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부역'(*, 아보다)은 구약 성경에서 '봉사' 혹은 '노동'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창 29:27;민8:11;28:18). 따라서 여기의 '부역'은 백성들이 성벽 재건에 동원되서 애쓰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를 좀더 넓게 문맥적으로 보면 (1) 성벽 재건에 따른 백성들의 수고 뿐만 아니라, (2) 페르시아 왕실에 바쳐지던 각종 세금(4절;스 4:13)등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Fensham).

성 경: [느5:19]

주제1: [직면한 사회 문제 해결]

주제2: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느헤미야는 이 기도를 통해서 (1)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과(Rawlinson), (2)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실을 옹호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Schultz).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선행을 근거로 보상을 간구하고 있지는 않다. 4:4, 5과 13:22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하나님의 용서와 축복이 오직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영적 자각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Williamson).

성 경: [느6:1]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전장에서 대내적인 문제를 타개한 느헤미야는 이제 본장에서 또다시 외부의 적들의 음모와(1-4절) 모함(5-9절) 및 공갈, 협박(10-14절)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대대적인 기습공격의 무용성을 깨달은 산발랏 일당은 성벽 재건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마지막 계교를 짜내었는데, 그것은 성벽 재건의 주동자요 책임자인 느헤미야를 암살하는 방법이었다.

(주); 산발랏과 도비야와...게셈 - 이들에 대해서는 2:10 주석 및2:19 주석을 참조하라.

(주); 나머지 우리의 대적 - 이들은 '산발랏'에 동조하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던 또 다른 자들이다. 구체적으로는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을 가리킨다(4:7).

(주);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 보통 '문짝'은 건축 공사를 할 때에 마지막으로 달게 된다는 점에서 볼 때, 본 문구는 성벽 공사가 전반적으로 완료되기 일보 직전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느6:2]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본절에 '도비야'라는 인물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은 본절의 두 인물이 '총독'혹은 '족장'(2:19)인데 비해 도비야는 다만 그 총독의 막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2:10).

(주); 오노 평지 한 촌에서 - '오노 평지'의 '평지'(*, 비크아트)는 '나누다' 혹은 '쪼개다'의 뜻을 갖는 동사 '바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오히려 '계곡'으로 번역해야 적당하다(Fensham). 한편, '오노'는 예루살렘 북서쪽 약 32.4km 지점에 위치했다. 이곳은 그 당시로서는 사마리아와 아스돗 사이의 중립 지대로서(A.Alt), 완전한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다. 바로 이 같은 점을 감안한다면, 산발랏 일당이 '오노'를 느헤미야와의 면담 장소로 택한 것이 느헤미야를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꾀어내어 살해하려는 음모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촌에서'(*, 바크피림)에 대해서는 (1) 본절의 '바크피림'을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 '베'(*)와 고유한 지명 '하크피림'(*)의 합성어로 보고 '하크피림에서'라는 견해(Williamson, Myers, Rawlinson, Kidner, Schultz, Fensham), (2)'바크피림'을 전치사 '베'(*)와 '마을'을 뜻하는 명사 '카파르'(*)의 복수가 합쳐진 것로 보고 '여러 마을들 중의 하나에서'라는 견해(Keil), (3) '바크피림'을 전치사 '베'(*), 즉 '...와 함께'와 '케피림'(*), 즉 '사자들'의 합성어로 보고 '사자들'이란 말로 암시된 '방백들과 함께'(겔 19:1-6)라고 해석하는 견해(Schirmann)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첫째, 산발랏 등이 '여러 마을들 중의 하나에서' 만나자고 함으로써 느헤미야로 하여금 그 마을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할 경우 그로부터 의심을 덜받을 수 있으며 둘째, 본문에서 짐승의 이름과 방백들을 굳이 연관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볼 때, 두 번째의 견해가 보다 타당할 것이다.

(주);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 고대 사회에서는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안심시켜서 제3의 장소로 불러 내어 거기서 죽이는 일이 흔했던것 같다(창 4:8;렘 41:1-3). 바로 이러한 습속을 아는 느헤미야는, 외딴 곳으로 자신을 나오라는 대적들의 제안에 어떤 혹막이 숨겨져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느혜미야가 이처럼 재빨리 그 음모를 눈치 챈 것은, 느헤미야도 나름대로의 첩보망을 갖고 있었던 때문일 가능성도 크다(Fensham).

성 경: [느6:3]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음모섞인 대적들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일 때문에 가지 못하겠노라 한 것 자체도 거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성벽 재건이 크게 진척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문을 달아서 작업을 마무리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시급했기 때문이다(1절).

(주); 어찌하여...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 본 문구를 통해 우리는(1) '오노'가 예루살렘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였다는 점과,(2) '오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들의 땅과 인근해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낮추어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느6:4]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대적들의 반복된 메시지의 전달은 그들이 성벽 재건의 방해를 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Myers).

성 경: [느6:5]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주); 종자(*,나아르) - 이것은 산발랏의 하급 신하를 뜻할 것이다(4:16).

(주); 봉하지 않은 편지 - 고대의 공식 문서는 양피지 등에 기록된 뒤 끈으로 묶여 인장으로 날인되어 봉해졌었다. 이는 작성된 내용의 변조를 막아서 그 문서의 신빙성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발랏 일당이 인봉치 않은 편지를 보낸 까닭은, 편지의 내용을 백성들도 알게 해서 놀라게 하며, 느헤미야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나오게끔 촉구하려는 데 있었다.

성 경: [느6:6,7]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여기서는 산발랏의 다섯 번째 편지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실에 대해 모반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 이방 -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을 가리킨다(4:7).

(주); 가스무도 말하기를 - 이것은 '가스무'가 이방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느헤미야의 모반 사실을 확증했다는 뜻이다(Fensham). '가스무'는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게셈'으로 불리워지던 인물의 아라비아식 이름이다.

(주); 네가...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 느헤미야가 '성을 건축'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그 안에살던 백성들을 의적의 칩입으로부터 보호하려는데 있었다(1:3). 따라서 느헤미야가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은 말할 나위도 없이 대적들이 지어내어 퍼뜨린 완전한 허위였음이 분명하다. 휠씬 이전에 있었던 성벽 재건의 시도도 바로 이와같은 허위 보고가 페르시아 왕실에 올려짐으로써 좌절되었었다(스 4:11-23).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던 산발랏은 금번에도 그와 유사한 헛 소문을 퍼뜨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벽 재건을 중지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주); 네가 선지자를 세워...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 이것도 산발랏의 거짓말이다. 사실 왕족도 아닌 느헤미야가(2:3), 스룹바벨과 같은 직계 왕족도(스 2:2) 왕에 오를 수 없었던 포로 후 시대의 상황에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여기에서 '네가 선지자를 세워'는 스룹바벨 시절에 생긴 건축 사역의 재개를 위하여 활약했었던 학개 및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언(학 2:22,23;슥 9:)을 알고 있었던 산발랏의 거짓말이다. 즉, 산발랏은 거의 1세기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의 메시아 예언을 왜곡시켜서, 느헤미야가 그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 왕에 오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헛된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주);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 이에 관해서는 본 단락 주제 강해, '왕의 즉위와 관련된 선지자의 역할'을 참조하라.

(주);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 본절에서 산발랏은, 자신이 느헤미야를 모반 혐의로 고소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시사함으로써 그를 협박하고 있다. 사실 (1)아닥사스다 왕 시대에는 페르시아 정복지 전역에 걸쳐서 모반이 끊이지 아니했었으며, (2) 특히 많은 권력을 쥐고 있었던 술 관원들의 모반이 잦았었다(Fensham)는 점 등에서, 술 관원 출신이었던(1:11) 느헤미야가 모반을 하고 있다는 고소는 비록 그것이 무고(誣告)이기는 했지만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서 진실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산발랏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해서 느헤미야를 협박하려 드는 것이다.

성 경: [느6:8]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단 몇 마디의 말로써 산발랏의 장황한 참소(6, 7절)를 기각시켜 버리고 있다. 만일 산발랏의 무고가 아닥사스다왕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경우 느헤미야가 곤란한 문제들에 직면할 가능성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한 때문이었다(9절).

(주); 지어낸 것이라 - '지어낸'(*, 바다)은 구약성경 중 본절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나타나는 왕상 12:33에서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소견에 옳은대로 어떤 계획을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그 밖의 성경 외적 문헌에서도 이 단어는 '거짓을 꾸미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Fensham). 따라서 여기서 이 단어는 '타인을 해롭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교묘히 왜곡시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느6:9]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대적들의 궤계]

(주);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랏 일당의 집요한 심리전에 의해서 낙심에 빠졌었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4:4). 이제 다시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회유. 협박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재차 얻으려고 했었다. 사실 이것은 성벽 재건을 신속히 추진하려고 애쓰던 느헤미야에게 큰 장애 요소였음에 분명하다.

(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즉, (1) 개역 성경처럼 하나님께 담대한 마음을 허락해 주실 것을 소원하는 기도로 봐야 한다는 견해(Fensham, Rawlinson, Schultz, Keil, Battem, Kidner, NIV), (2)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지 않음을 근거로 해서 느헤미야 자신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먹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Williamson, Myers, JB, 공동번역) 등이 있다. 그러나 본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느헤미야의 기도는 특별한 형식없이 필요한 상황에서 드려졌었다는 사실(2:4;4:4,5;5:19)등으로 미루어 위의 두 견해 중 첫 번째의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다.

성 경: [느6:10]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스마야의 거짓 예언]

본절에서부터 19절까지에서는 산발랏 일당의 또 다른 음모가 언급된다. 그런데 이 음모에는 느헤미야 진영에 있는 사람, 더욱이 선지자가 가담하였다는 점에서 가히 충격적이다.

(주);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 - 이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는 성전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신분의 소유자라는 본절의 암시로 볼때 제사장이었으리라 짐작된다(Bowman). 또한 그는 그 당시에 선지자 행세를 하기도 했었다(12절).

(주); 두문 불출(杜門不出)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 본절의 '두문 불출'에 대해서는(1) 그 당시에 스마야가 부정(不淨)한 상태에 있었던 관계로 성전 봉사에 참여치 못했었음을 뜻한다는 견해(Rawlinson),(2)서원 이행을 위하여 근신하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견해(Schultz). (3) 스마야 자신처럼 은둔하지 않으면 느헤미야가 암살을 당할 위험이있음을 암시하려는 술수였다는 견해(Keil), (4)마치 슬픈 사건을 예견한 선지자가 그것으로 인해 비탄에 빠져있었던 것처럼 행동함으로써(사 20:2;겔 4:1-8). 느헤미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끔 하려는 술수였다는 견해(Rudolph,illiamson), (5)마치 감금되어 있었던 것처럼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느헤미야로 하여금 스마야 자신을 찾아 헤매도록 하려고 한 술수였다는 견해(Myers)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첫째, 스마야가 만일 부정한 상태에 있었거나 서원 이행을 위해 근신하고 있었다면 성전으로 가자는 제안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과 둘째, 위의 '아추르'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비탄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여러 견해 중 (3)이나 (5)의 것이 가장 타당할것이다.

(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 이것은 산발랏 일당이 보낸 자객들이 느헤미야를 암살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부터 올 것이라는 뜻이다. 대규모 공격은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에 의해서 쉽게 눈에 띄어(4:9, 22) 실패할 가능성이 많았던 반면, 느헤미야 개인에 대한 스마야의 암살 협박은 느헤미야에게 대단한 두려움을 안겨줄만 한 것이었다.

(주);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外所)안에 있고 - 이것은 산발랏 일당의 암살을 모면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피신하자는 스마야의 제안이다. 사실 살해 위협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도망가서 제단 뿔을 잡는 것은, 모세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다(출 21:12,13;왕상 1:50-53;2:28). 따라서 본절과 같은 스마야의 제안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음흉한 함정이 깔려 있었다(12절 주석 참조). 한편, '외소'(*,토크)는 '...의 중앙'을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성소'를 가리킨다(겔48:21). 즉, 성전 현관과 지성소의 사이이다(Rawlinson).

(주); 그 문 - '성소'와 성전의 현관 사이의 잣나무로 만들어진 문이다(왕상 6:34).

(주);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 느헤미야의 공포심을 가중시키기 위한 반복이다. 스마야는 이미 자신의 경고 서두에서 '죽이러 올터이니'라고 말한 바 있다.

성 경: [느6:11]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스마야의 거짓 예언]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서 성전으로 피신하라는 스마야의 음모적인 권고를 거절한다.

(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 이것은 느헤미야가 성전으로의 피신을 거절한 첫째 이유이다. 즉, 그는 페르시아 왕실로부터 임명된 총독의 신분으로서 생명의 위협이있다고 해도 몸을 숨기는 것은 타당치 않음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느헤미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련을 앞장서서 극복해야 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죽음이 눈앞에 닥쳐왔다 하더라도 초연함으로써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다(Rawlinson).

(주); 나 같은 몸이면...생명을 보존하겠느냐 - 성전으로의 피신을 거절한 두 번째 이유이다. 사실 모세 율법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자에게는 성전으로서의 피신을 허용하였다(출 21:12, 13). 그러나 그러한 피신은 특정한 경우에 제한되었으며, 외국인 특히 이방 군대에 의한 경우는 포함되지 않았다(Fensham). 따라서 이 같은 상황에서의 성전으로의 피신은 제사장 이외의 사람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행위였다, 율법은 이러한 범법자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선언한다(민 18:7).

성 경: [느6:12]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스마야의 거짓 예언]

(주); 깨달은즉 - 느헤미야의 이러한 깨달음은 '스마야'의 음모섞인 권고를 듣는 즉시 있었을 것이다. 즉,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자신에게 범법행위를 권하는 그 사실을 통해서 그 즉시 그가 하나님의 참 선지자가 아님을 발견했던 것이다(Williamson). 참선지자의 여부는 그의 메시지 및 행실를 통해서 분별될 수 있음(마 7:15-20)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 '뇌물을 받고'(*, 세카로)는 원래 '고용하다' 혹은 '보답하다'는 의미로서 어떤 악한 일을 애써 해주는 대신 그에 대한 삯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신 23:4;삿 9:4;왕하 7:6). 그런데 혹자는 이 동사가 3인칭 단수인 점과 산발랏이 도비야 다음에 언급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본 문구에 나오는 두 사람 중 뒤의 '산발랏'은 필사자의 실수로 기록됐다고 보고 그 이름을 탈락시켜야 할 것을 주장한다(Rudolph). 그러나 주어를 두 사람 언급하면서 단수 어미의 동사를 사용한 것은, 두 사람 중 먼저 언급된 사람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느헤미야의 의도때문인 듯하다(Fensham). 그렇다면 도비야는 거짓 선지자 스마야를 매수하는데 있어서계획부터 실행 과정까지 직접 담당했으며, 산발랏은 그것을 후원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느6:13]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스마야의 거짓 예언]

느헤미야가 분석한 바, 곧 도비야가 스마야를 매수한 삼중적인 이유이다.

(주); 나를 두렵게 하고 - 도비야가 스마야를 매수하여 느헤미야에게 거짓 예언을 하게끔 한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산발랏이 보낸 자객이 밤 중에 느헤미야를 암살할 것이라는 경고는, 느헤미야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넉넉했다.

(주);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 이에 대해서는 1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 이 같은 비방은, 만일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공갈에 심약(心弱)해져서 성전으로 피신하는 잘못을 범했을 경우 이루어졌을 것이다.

성 경: [느6:14]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스마야의 거짓 예언]

이러한 기도는 느헤미야가 얼마나 신앙적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이 기도를 통해서 (1)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겸손한 마음을 보여주며, (2) 원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 손에 넘기라는 율법의 정신을(신 32:35;시 94:1;롬 12:19) 이행하고자 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한편, 느헤미야에게 이처럼 많은 대적들이 있었던 까닭은(1) 산발랏이 일찍이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놓았고,(2) 또한 느헤미야가 상류층에 대해 엄격한 정책(5장)을 편 때문이었다(Fensham).

(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 이들이 누구이며 느헤미야에 대해 어떤 일을 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들은 본절의 언급처럼 '스마야'와 함께 느헤미야를 대적했던 무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도록 특별히 부르심 받은 선지자들이 오히려 그뜻을 정면으로 거스린 일에 대해,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기를 기도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한편, 느헤미야가 이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고 '스마야'의 행위에 대해서만 특별히 다른 까닭은, 스마야의 경우 그 대적 행위가 너무도 교활하고 사악하여 나머지 악한 선지자들의 계교를 대표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Williamson).

성 경: [느6:15]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성벽 건축 완공]

(주); 성 역사가 오십 이 일 만에...끝나매 -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데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으리라고 보고 그 공사 기간을 '팔백 사십 일'이라고 주장한다(Ant. X i 5). 에발드(Ewald)같은 학자도 이러한 견해를 좆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다수 학자들은 (1) 성벽이 없어서 예루살렘 거민이 당했던 참상을 잘 알고 있던(1:3;2:17) 느헤미야가 성벽 공사를 급히 서둘렀을 것이 뻔하며, (2) 맛소라 본문의 기록을 고쳐야 할 사본학상의 근거나 이유가 전혀 없으며, (3) 요세푸스(A.D. 37-95)도 느헤미야 당시로부터 무려 500년 이후의 사람이어서 느헤미야 당시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했을 것이며. (4)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사업과 거의 동시대에 이뤄졌던 아테네의 성벽 공사도 단 한 달 만에 끝났었다(Vischer, Problem Bibical Theology, p. 606)는 점 등에 근거해서 본절의 '오십 이 일'을 맞는 것으로 본다.

(주); 엘룰월 이십오 일 - '엘룰월'은 양력으로는 8월,9월이지만 유대 민간력으로 12월이었다. 따라서 민간력으로 계산할 경우, 성벽 재건 공사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B.C.444년 그 해에 완공된 셈이 된다. 특히 이 공사는 민간력으로는 압월(11월)사일부터 엘룰월(12월)까지, 양력으로는 7월중순 경 부터 9월 중순까지의 덥기는 하나 비가 오지 않는 건기(乾期)에 시행된 고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성 경: [느6:16]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성벽 건축 완공]

(주); 우리 모든 대적 - 보다 구체적으로는 산발랏을 비롯한 이방 민족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2:19).

(주); 사면 이방 사람들 - 그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본서에 언급되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 암몬 사람, 아라비아 사람. 아스돗 사람(4:7) 이외에, 베니게 사람과 수리아 사람 등도 포함될 것이다(Rawlinson).

(주); 두려워 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나팔 베에이네이헴)- 이는 문자적으로 '그들의 눈 앞에서 넘어졌다'의 뜻이며, 그 구체적 의미는 '자신감을 상실했다'(NIV), '자존심을 손상당했다'(Williamson, Myers)이다. 수많은 장애 요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빠른 시기에 재건 공사가 완공된 것이 그들의 눈에 가히 기적으로 보여졌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이 같은 그들의 반응은, 끊임없이 느헤미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렵게 하려고' 했던 그들의 시도(9, 13, 14)에 걸맞지 않다. 사실 대적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협박하여 재건 사업을 중단하게 만들려고 획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로 더 큰 두려움을 그 대적들에게 임하도록 역사하셨다. 이는 곧 4:4에 기록된 느헤미야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의 극적인 전환은 대적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증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느6:17]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도비야의 위협]

본절에서부터 19절까지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선지자들(14절) 이외에도 느헤미야에 대한 또 다른 적대 세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느헤미야는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성벽 공사가 단시간에 끝날 수 있었던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강조하고있다.

(주); 유다의 귀인들이...도비야에게 편지하였고 - 본절은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이 느헤미야의 대적들과 내통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귀인들'(5:7)은 느헤미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여러 방식으로 탐지하여 그것을 도비야에게 신속하게 넘겼을 것이다.

(주); 도비야의 편지도...이르렀으니 - 이 편지의 내용은 (1)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에서 손을 떼게끔 내부 공작을 꾸미는 것, (2)느헤미야 개인 및 성벽 재건 상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게끔 지령을 내리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19절).

성 경: [느6:18]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도비야의 위협]

본절은 도비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와 얼마나 깊이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켰던 에스라의 개혁(스 9,10장)이 이들에게 잊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 아라의 아들 스가냐의 사위가 되었고 - 본절의 '아라'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어떤 가족의 조상이다(7:10;스 2:5). 따라서 '아라의 아들'은 '아라의 자손'로 번역되어야 적절하다. 한편, '스가냐'는 3:29에서는 '동문지기'로 언급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은 성벽 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3:29). 바로 그런 점에서, 스가냐 일가는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상류층으로 분류됐을 것이 분명하다. 도비야는 바로 이 같은 유력한 가문과 정략적으로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중대시키려고 하였다.

(주); 도비야의 아들...므술람의 딸을 취하였으므로 - 도비야가 이스라엘 백성 중 유력한 사람의 사위가 된 데이어서, 또한 유력한 사람과 사돈 관계를 맺었음을 말해준다. 본절의 '므술람'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서 두 몫을 맡아 담당했던 제사장이었다(3:4, 30).

(주); 여호하난 -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의 뜻이다.

(주); 유다에서 저와 동맹한 자가 많음이라 - 본 문구는 히브리 원문에는 본절의 초두에 놓여 있다. 특히 원문에는 '왜냐하면'의 뜻을 갖는 접속사 '키'(*)가 있어서, 본 문구가 17절의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동맹한'(*, 바알레이 쉐부아)의 '바알레이'는 '주인이 되다' 혹은 '지배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바알'(*)에서 파생된 명사이고, '쉐부아'는 '맹세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쉬바으'(*)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므로 본절의 '동맹한'이라는 말은 '...을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맹세'를 뜻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유다 사람들 상당수가 도비야를 섬기기로 하는 서약을 했다는 뜻임이 분명하다(NIV, Kohlenberger). 추측컨대, 도비야가 유다 사람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동맹을 맺은 것은, 그가 산발랏의 고위 행정관으로서 예루살렘에 머물던 시절의 일이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총독의 자격으로 오기 전까지는 산발랏이 유다 땅에 자신의 부하 도비야를 파견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듯하다(5:15 주석 참조).

성 경: [느6:19]

주제1: [계속된 음모와 완공된 성벽]

주제2: [도비야의 위협]

(주);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 말하고 - 유력한 유대인들 중 도비야와 내통하고 있었던 자들이 도비야와 느헤미야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력으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고자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대적들은 이제 음해(陰害)의 방향을 수정하여 외면적으로 우호와 친선을 가장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계속 교란책을 펴나갔다. 한편, '선행'이란 내통자들이 도비야의 좋은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중에는 도비야의 스마야에 대한 재화(財貨) 증여(12절)가 뇌물이 아니고 자선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도 포함될 것이다(Rawlinson). 그들이 이같이 거짓말을 한 까닭은, 느헤미야로 하여금 도비야에 대한 경계심을 풀도록 하여 도비야의 성전 재건 방해 운동을 성공케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주); 나의 말도 저에게 전하매 - 이것은 내통자들이 느헤미야의 일거수 일투족을 탐지하여 도비야에게 보고했다는 뜻이다.

성 경: [느7:1]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본절은 연대기적으로 6장 15, 16절과 직접 연결된다. 문짝까지 달게 됨으로써 성벽 재건 사업이 마침내 최종 마무리되자 이제 이 귀한 성벽을 계속적으로 파수할 사람들을 물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 '문지기'와 '노래하는자' 그리고 '레위 사람'은 모두 레위 지파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만 그 역할의 차이로 인하여 이처럼 셋으로 구분되었다(43절;스 2:40-42). 원래 성전 봉사를 주 임무로 하는그들에게 성벽 파수를 맡긴 이유는(1) 예루살렘의 주민이 얼마되지 않았던 관계로 그들의 동원이 불가피 하였다는 점(4절), (2) 성벽 문의 파수가 곧 성전문의 파수와 직결된다는 점(대상 9:17-22; 26:12-19) 등일 것이다. 그러나 성벽 파수의 직무를 레위 사람들이 전담하지는 않았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의 '세운'(*, 파카드)이라는 동사가 책임자를 임명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이다(창 39:5;왕상 14:27;왕하 25:23;대하 12:10). 따라서 우리는 그때에 백성들도 성벽파수 직무를 위해 동원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은 그 직무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3절).

성 경: [느7:2]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주); 내 아우 하나니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친동생으로 추정되며, 페르시아 왕실에서 술맡은 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참담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1:2).

(주); 영문(營門)의 관원 하나냐 - '영문'에 해당하는 '비라'(*)가 '궁전', '성채' 혹은 '요새'를 뜻하며, '관원'에 해당하는 '사르'(*)가 군대 조직 등의 책임자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하나냐는 예루살렘 성벽 중간 중간에 있는 망대(3:1, 11,25, 27)에 배치된 파수꾼들의 총책임자였을 것이다. 한편 '하나냐'는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시다'의 뜻이다.

(주);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 이것은 예루살렘을 반분(半分)하여 각각 다스리게 하였거나 혹은 공동으로 협력하여 전체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음을 뜻하는것 같다. 그러나 3:9,12의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렸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예루살렘 지방'은 예루살렘 시(市) 자체가 아니라 거기의 주변 지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처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별도의 행정관을 둔 것은 (1) 일의 배분을 통해 보다 효율적이고 자발적인 행정 처리를 도모하기 위함이었고, (2) 느헤미야 자신은 대적들의 비난과 같이(6:6) 왕이 되고자 하는 정치적 야욕이 추호도 없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3) 페르시아에 다녀오기 위한(B.C. 433-432) 준비의 하나였던 것 같다(Schultz).

(주);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 - 바로 앞의 문구와 함께, 느헤미야가 '하나냐'를 고위직에 등용한 이유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본서에서 곧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연결된다(5:15). 따라서 느헤미야가 하나냐의 성품 중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특별히 언급한 까닭은 그가 마치 자신 처럼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성 경: [느7:3]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본절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경비하는 요령을 하나니와 하나냐에게 가르치고 있다.

(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 여기서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은 문자적으로 '해가 뜨거워지기까지'의 의미이다. 아무튼 이것은 당시 처지가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비상 상황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고대 중근동 지역의 성문은 해가 뜸과 동시에 열려졌기 때문이다(Rawlinson). 결국 느헤미야가 이 같은 지침을 하달한 까닭은, 비록 해가 떴다고 해도 이른 아침에는 백성들의 활동이 시작되지 않는 시간인 관계로 적의 침공이 있다고 한다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의 '해가 높이 뜬 시간'은 (1) 통상적으로 성문을 여는 시간과 정오의 중간(Rawlinson). (2)백성들의 일과(日課)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간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주);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 여기의 이 문구는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은 문들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이것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는 절대로 경비 태세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성문을 열기 전까지의 근무에 대한 지침이다.

(주); 예루살렘 거민으로 각각 반차를 따라 파수하되 - 예루살렘 주민들 스스로가 예루살렘 시(市)를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순번을 정해 놓고 며칠에 한 번씩 차례에 따라 경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책임자는 레위 사람들이었다(1절). 그런데 여기의 '반차를 따라'(*, 베미쉬마로)는 문자적으로 '그의 보초 장소'를 뜻한다(Williamson). 그렇다면 본 문구는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특별한 장소에 파수꾼을 세워야 한다는 언급으로 이해됨이 무난하다(Fensham). 그런 점에서 다음의 문구와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주);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 앞에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공동으로 파수를 서야함을 언급했으며. 여기서는 자신의 집 근처는 자신이 서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같은 원리는 각 개인이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성벽의 공사를 담당했던 것과 잘 조화된다(3:23).

성 경: [느7:4]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본절은 개역 성경을 따를 경우 마치 3절의 이유인듯 느껴진다. 그리고 카우프만(Kaufmann)같은 학자는, 본절을 1-3절에 기록된 긴급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 5절이하의 인구조사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킨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10장)와 관련시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절과 5절 이하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본절은 느헤미야가 5절 이하에서 인구 조사하게 된 이유에 해당된다(Williamson, Fensham, Myers). 즉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거민의 수효가 극히 적었던 관계로 전체 귀환자의 현황을 조사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주 시킴으로써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11:-36).

성 경: [느7:5]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바벨론 귀환자들]

(주);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 문자적으로는 '내 하나님이 그것을 내 마음 속에 넣어 주시사'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인구 조사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셨음을 뜻한다.

(주);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 '귀인' 과 '민장' 그리고 '백성'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던 세 계층이었다(4:14). 따라서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대회(大會)를 소집했었음을 가리킨다. 사실 여기의 '모아'(*, 카바츠)는 국민을 대규모적으로 소집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삼상 7:5;28:4;대하 15:9,10).

(주);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 이것은 원문상으로는 '족보에 등록하다'의 의미'야하스'(*)라는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그러나 족보에 등록한다는 것과 곧 인구조사를 하는 것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일임을(Rawlinson, 민 1:17-47;대상 21:5,6;스 2:3-62) 감안한다면, 개역 성경의 이 같은 번역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대상7:5,40;스 8:1).

(주);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 여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는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사람들(스2:3-62)의 등록부이다. 느헤미야에게 이 같은 '보계'가 필요했던 까닭은 자신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곳에 살지 않고 다른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가려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마땅히 예루살렘에 살아야 될 백성들 중 상당수가 대적들의 노략질 및 앞으로의 그럴 가능성(1:3) 때문에 성벽이 없었던 예루살렘을 떠나서 보다 안전한 다른 지역으로 가서 거주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그 면적에 비하여 주민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어서, 성(城) 경비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느헤미야는 포로 전에 조상들이 예루살렘에 살았었고, 그래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직후에도 예루살렘에 정착한(6절;스 2:1, 70) 사람들의 후손 중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제는 성벽이 재건된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한 객관적 자료가 바로 여기의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였다. 따라서 느헤미야가 만든 여기의 보계는 희생을 각오하고 팔레스틴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훌륭한 신앙을 강조하기 위해 에스라에 의하여 만들어진 보계(스 2장 강해)와는 그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

성 경: [느7:6]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바벨론 귀환자들]

본절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기 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고장에 각각 정착하였음을 시사해준다. 본절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스 2:1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느7:7]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바벨론 귀환자들]

본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을 주도했던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다(스2:2). 이 명단 중 스 2:2의 그것과 다른 점은, '나하마니'라는 이름이 추가된 점과 몇 사람('아사랴', '라아먀', '미스베렛', '느훔')의 이름 철자가 약간 다르다는 점 등이다.

성 경: [느7:8-24]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바벨론의 귀환자들]

이 부분은 평신도 귀환자들 중 공인된 가문 등록부 (대상 5:7-9,22)를 잃어버리지 않고 보존함으로써 자신들의 혈통을 입증한 사람들의 명부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문의 재산 등에 관한 권리는 가문 등록부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었다(Myers). 따라서 백성들은 지방 관헌들에 의해서 기록 보관되는 가문 등록부(대상5:17)나 가문에서 보관하는 가문 등록부 둘 중 최소한 그 하나에 의해서 그 혈통을 확인받아야 자신이 어떤 가문에 속했으며 또한 그 가문에서 할당한 권리가 무엇인지를 입증할 수 있었다.

성 경: [느7:25-38]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바벨론 귀환자들]

이 부분은 평신도 귀환자 중 가문 등록부를 분실함으로써 자신들이 이스라엘 혈통임을 입증치 못한 사람들의 명부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포로 시대 이전에 살았던 지방을 앎으로써, 자신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34-38절에 수록된 자들은 가문별로 분류된 것인지 아니면 거주 지역별로 분류된 것인지 다소 애매하다.

성 경: [느7:39,40,41,42]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들]

제사장 계급의 명부이다(스2:36-39).

성 경: [느7:43,44,45]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제사장 레위인들]

세 종류의 레위 사람들에 대한 명부이다(스 2:40-42).

성 경: [느7:46-56]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느디님인과 솔로몬 신복 자들]

본래는 이방인이었으나 이스라엘에 포로로 끌려온 후 성전의 막일을 부과받은 자들의 명부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어느 정도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졌었다. 따라서 이들은 오히려 바벨론에서의 생활이 육신적으로 볼 때는 더 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였다(스2:43-54).

성 경: [느7:57,58,59,60]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느디님인과 솔로몬 신복 자손들]

이 부분은 원래 이방인이었다가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 왕궁의 경비 등에 종사하도록 된 자들의 명부이다. 이들도 '느디님 사람'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천민 계급으로 분류되었다(스 2:55-58).

성 경: [느7:61,62]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혈통 불명인들]

평신도 귀환자 중 가문 등록부를 분실했거나 조상들이 살던 지방도 알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이 이스라엘 혈통임을 입증치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언약 공동체의 '회중'(스 2:59,60)에 편입될 수 없었다.

성 경: [느7:63, 64, 65]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혈통 불명인들]

귀환한 제사장 중 가문 등록부의 분실로 자신들이 제사장의 후손들임을 입증치 못한 경우가 언급되고 있다(스 2:61-63).

성 경: [느7:66, 67, 68, 69]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귀환자의 총수와 재산 목록]

이스라엘 회중과 그들의 모든 소유물들의 총계이다(스 2:64-67).

성 경: [느7:70, 71, 72]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성벽 건축을 위한 헌물]

여기서는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신앙적 행위가 묘사되고 있다(스 2:68, 69).

성 경: [느7:73]

주제1: [성벽 완공 후의 문제와 그 해결]

주제2: [성벽 건축을 위한 헌물]

본절은 팔레스틴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포로 시대 이전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으로 돌아갔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방인들의 침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갔었다.

(주); 본성에 거하였느니라 - '본성'(*, 아레이헴)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성읍'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조상 때부터 살아 왔던, 그래서 귀환자들이 각기 거주해야 할 성읍을 가리킨다.

성 경: [느8:1]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본장에서부터 에스라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에스라는 에스라 10장의 사건 이후에 모습을 감춘 후 무려 14년 후에 다시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에스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문제로 온 나라가 법석이었으며 또한 고리대금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했는데도 성경의 무대에 일절 나타나지 않은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느헤미야가 B.C.435년에 팔레스틴의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 페르시아 왕실의 소환으로 거기에 약 1년간(B.C.433) 다녀온 것처럼(13:6), 에스라도 에스라서 10장 사건이 마무리 지어진(B.C. 458) 후의 어느 시점에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B.C.444년경에 다시 돌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 칠 월에 이르러 - 여기의 '칠 월'은 종교력으로서의 '칠 월'이며, 민간력으로는 일월이고. 태양력으로는 구 월 혹은 시 월이다.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양서(兩棲)를 막론하고 거의 민간력만을 사용하다가 여기서 특별히 종교력을 쓴 까닭은, 본장이 초막절 절기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9, 11, 14, 16, 18).

(주); 모든 백성이...모여 -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인 것은 나팔절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레23:23-25;민 10:120;29:1-6). 이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어 이 날을 기렸다. 이 날을 기리는 목적은 먼저 종교력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의 달인 일곱 번째 달을 맞아 봉헌하기 위함이었고. 또한 민간력의 관점에서는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 첫날을 드리기 위함이었다.

(주); 수문 앞 광장 - 이것은 성전 동문과 성벽 사이의 공터를 가리키며 스 10:9의 '하나님의 전 앞 광장'과 동일한 곳으로 짐작된다(Edwin Yamauchi, Raqlinson). 그리고 이 '수문'은 기혼 샘(the Gihon Spring)과 연결되었다. 종교적 행사가 주목적인 백성들이 성전과 가까운 곳에 모였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주); 학사(學士) 에스라에게...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 이것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각한 영적 기갈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준다(삼상 7:2).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는 바로 이같이 백성들의 영적상태가 극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오자마자 백성들은 그로부터 율법의 가르침을 듣기 원했던 것이다. '모세의 율법책'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법률 자료 모음집(R. Kittel, M.Noth, G. von Rad), (2) 제사 법전 (W.H. Kosters, A.Kuenen, A.Lods, E. Meyer, B.Stade), (3)신명기 율법들(R. Bowman, B. Brownw, W. Scott), (4) 모세 오경(W.F.Albright, J. Bright, F. Cross, S.Mowinchel, W.Rudolph, J.Wellhausen). 이 중 본절에서는 (4)항의 견해가 가장 무난할 듯하다(Bruce, Edwin Yamauchi).

성 경: [느8:2]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주); 제사장 에스라 - 이 같은 표현은 에스라가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의 소유자임을 암시한다. 그가 실력적으로도 자격자임을 암시하는 표현은 1절의 '학사 에스라'일 것이다.

(주);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이를 제외한 이스라엘 사람 모두, 즉 많은 사람들이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들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강조적 표현이다(신 31:11).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의식(意識)들에 내포된 의의 등을 통해 지혜와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출 12:26, 27;신 4:6;6:6이하;31:12, 13). 영적 이해가 결여된 미신이나 맹신은 이교의 특징이었고(사 44:18, 19), 이스라엘의 멸망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호4:6).

성 경: [느8:3]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주); 새벽부터 오정까지...귀를 기울였는데 - 이것은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때 거기에 모인 백성들은 무려 6시간 이상 말씀을 듣고 있었던 셈이다(행19:9;20:7). 이같이 오랜 시간 동안 말씀을 받는 일에 열중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날이 밝자마자 모였다는 것도 그들의 열심을 잘 드러내준다.

성 경: [느8:4]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주); 에스라가...나무 강단에 서매 - 여기의 '강단'(*, 믹달)은 구약 성경에서 항상 '망대' 혹은 '성곽'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창11:4;삿 8:9;왕하 9:17;대하26:9). 따라서 본 문구는 그 때 에스라가 특별히 마련된 매우 높은 단(檀) 위에서 율법을 가르쳤음을 말해준다. 에스라가 이같이 높은 곳에서 율법을 가르쳐야 했던 이유는그 때 그의 가르침을 들으러 온 사람의 수효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었다(2절). 즉 그렇게 높은 곳에서 가르쳐야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한 그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Fensham).

(주); 우편에 선 자...좌편에 선 자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장들로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안식일 날 회당에서 몇몇 사람이 율법을 번갈아가며 봉독하였듯이, 본문의 13인도 에스라 곁에서 차례로 율법 내용들을 읽었으리라 생각된다(Kidner).

성 경: [느8:5]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주);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이와 같은 백성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외적인 표현이며(Fensham, 삿 3:20;욥 29:8;겔 2:1). 아울러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성 경: [느8:6]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주); 본절의 내용은 율법을 가르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주); 에스라가...여호와를 송축하매 - 유다인들의 회당 예배시에도 성경 말씀을 봉독하기 전에 여호와를 송축하는 절차가 있었다(Edwin Yamauchi). 이러한 절차가 에스라 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된 것이라 보여진다.

(주); 광대하신 하나님 - 구약 성경 중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되기는 하지만(9:32;신 10:17;렘 32:18), 동일한 것은 없다. 그러나 아람어나 페르시아어의 고대 문헌에서는 이와 동일한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표현이 바벨론적 기원을 갖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Bowman). 사실 본서를 기록했던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성장했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하나님의 능력이 크며, 또한 그분의 통치권이 온 세상에 미침을 뜻한다.

(주);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경배하였느니라 - 이것은 에스라의 송축에 대한 백성들의 삼중적 응답이다. 그 중 '손을 들고'는 '광대하신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을 만큼 부족함을 시인하는 외적 표현이다(Williamson, 스 9;5;시 28;2;134;2). 백성들은 잠시 후 에스라에 의하여 들려질 율법 말씀을 통하여 영적 기갈이라는 부족을 채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멘 아멘 응답하고'는 하나님이 광대하시다는 에스라의 말에 백성들이 온전히 동감했었음을 말해준다(Williamson, 5:13). '아멘'이라는 표현이 집회시 회중들의 응답으로 사용된 예는 다윗 시대 때부터 발견된다(대상16:36). 후에 이것은 회당에서도 사용되었고 신약 시대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고전 14:16). '몸을 굽혀...경배하였느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의 외적인 표현이다(대하7:3).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끝난 후에는 다시 일어나서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한편 '몸을 굽혀'에 해당하는 단어는(*, 카다드) 구약 성경에 15회 등장하며. 항상 '경배하다'는 말과 함께 언급된다(창24:26, 48;43:28;출 4:31;12:27등).

성 경: [느8:7, 8]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율법책 낭독]

에스라 등이 강단 위에서 율법책의 한 부분을 낭독하고 나면, 회중들의 중간 중간에 끼어있던 레위 사람들이 그 주변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다시 낭독한 후 그 의미를 가르쳐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주); 예수아...블라야와 레위 사람들 - 이것은 '예수아...블라야와 그 밖의 레위 사람들'로 번역함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의 '예수아...블라야'도 레위 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아'는 '그가 구원하실 것이다'의 뜻이며 '블라야'는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의미이다.

(주); 바니 - '세워진'의 뜻으로 '르흠'의 부친이다(3:17).

(주); 세레뱌 -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했던 사람이다(스 8:1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열(熱)을 보내셨다'이다.

(주); 야민 - '오른 손'의 의미이다.

(주); 악굽 - '교활한'의 의미이다.

(주); 사브대 - 알려진 바가 없다.

(주); 호디야 - 느헤미야의 언약서에 인친 두 명의 레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10:10, 13). 그 의미는 '유대인 여자'이다.

(주); 마아세야 - 4절의 '마아세야'와 동일인 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의미는 '여호와의 일'이다.

(주); 그리다 -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가 다시 내보냈던 사람이다(스 10:23). 그 의미는 '불구가 됨'이다.

(주); 아사랴 -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의 뜻이다.

(주); 요사밧 - 에스라가 귀환하면서 함께 가져온 물품들을 인수한 사람으로 그의 부친은 '예수아'이다(스 8:33). 본서 11:16에서는 하나님의 전 바깥 일을 맡은 자로서 언급된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이다.

(주); 하난 - '은총'의 의미이다.

(주); 해석하여(*, 메포라쉬) - 이것은 '분명히 하다'혹은 '쪼개다'의 뜻이 있는 동사 '파라쉬'(*)의 강조형이다. 한편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오래했던 사람들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의 '그 뜻을 해석하여'가 '해설'의 의미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고. 히브리어로 기록된 모세 오경을 아람어로 구술 번역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이해된다.

성 경: [느8:9]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백성들의 통회(痛悔)]

(주);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어떤 학자들은 신년절 행사 절차 중 하나에 우는 것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F.F. Hcidberg, J.C. de Moor, Mowinckel, N.H.Snaith).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단서가 없으며 또한 본문에서 저자는 신년절의 구체적인 행사 절차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술 의도나 주제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보다는 백성들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의미에서 (대하 34:19;롬 3:20) 눈물을 흘린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Williamson).

(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兼)학사 에스라 - 이같이 두 사람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 두사람이 동시대 인물이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 두 사람에게 각기 적용된 직함 곧 '총독'과 '제사장 겸 학사'는 그들의 사역이 성격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한 사람은 정치적 행정적 사역을, 또 한 사람은 종교적 사역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두 사람은 상호 보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한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의 '총독'(*, 티르솨타)이 본서에서 느헤미야가 자신을 가리킬 때 적용한 '총독'(*, 페하) 보다는 높은 직책이라고 보고서, '티르솨타'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부분(10:1)인 8-10장은 느헤미야가 기록하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강 서편 전체를 통할하는 총독을 가리키는 3:7에서도 (이 점에 대해서도 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페하'가 사용된 점 등으로 미루어, 히브리어 직함만으로 위의 주장을 고집하기는 무리일 것이라 본다.

(주); 이르기를(*, 요메르) - 이것은 '말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마르'(*)의 3인칭 단수형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 이 동사의 주어인 '느헤미야'. '에스라'. '레위 사람들' 중에서 '느헤미야'와 '레위 사람들'을 탈락시키거나(Rudolph), (2) '느헤미야'만 놔두고 나머지 둘을 탈락시켜야 한다고(M.Noth) 주장한다. 그러나 첫째, 히브리 어법상 단수 동사에 복수 주어가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둘째, 사본학적인 충분한 입증없이 본문을 고치는 일은 위험하며 셋째, 여기와 병행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드라상 5:40과 칠십인역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무리라 하겠다(Fensham).

(주); 오늘은...울지 말라 - 나팔절은 그 성격상 마땅히 기뻐하며 즐거워 해야 할 절기였다(레 23:24, 25;민 29:1-6;신 12:7, 12).

성 경: [느8:10]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백성들의 통회(痛悔)]

(주);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 '살진 것'(*, 마쉬마님)은 짐승의 가장 먹기 좋은 부분을 가리킨다(Fensham). 따라서 이것은 레위기에서 먹지 말도록 금지하고 있는 기름 부위와는 전혀 다르다(Kidner, Williamson). 한편 '단 것'은 포도즙에 물을 섞은 음료를 가리키는 듯하다. 사실 고대 증근동 사회에서는 이러한 음료가 잘 알려져 있었다(Fensham). 그러므로 본 문구는 잔치 분위기가 충분히 날 수 있도록 흥을 돋울만한 진미(珍味)들을 먹으라는 명령으로 볼 수 있다(Kidner).

(주);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 여기의 '예비치 못한 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먹고 마실 수 없는 자들을 뜻한다. 아마 여기에는 주로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들이 포함될 것이다(LXX, Fensham, 신 16:14). 유대인들에게는 즐거운 날에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들을 돌아보아 필요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함께 즐거움에 동참토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삼하 6:19;에 9:22). 이와같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랑을 베푸는 일은 이 축제를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Kidner). 즉, 백성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풂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힘'(*, 마우제크)은 '산꼭대기' 혹 '방파제'의 의미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방파제 혹은 보호자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이 비록 통회해야 할(9절) 죄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고뇌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회개 후에 오직 여호와를 의지함으로써, 그들은 방파제가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Fensham, Williamson). 바로 그런 점에서 백성들은 울지 말고 성일을 지킴으로써 여호와를 기뻐해야만 했다. '사람의 제일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만을 영원토록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제1번).

성 경: [느8:11]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백성들의 통회(痛悔)]

본절에서 언급되는 레위 사람들의 행동은 마치 단순한 반복 내지는 불필요한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한 것을 회중들 틈의 레위 사람들이 다시 읽어주고 해석해 주었듯이(7, 8절) 의사 소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레위인들의 중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Willlamson).

성 경: [느8:12]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백성들의 통회(痛悔)]

본절의 강조점은 백성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그대로 준수했다는 데 있다. 특히 우리는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에스라의 율법 해석의 권위와 그 효력이 강조되고 있음에 유의해 볼 수 있다. 처음 율법이 수여된 이래로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삶의 양상이나 민족적 상황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율법 자체가 상징적인 권위를 지니고는 있지만 실제적인 면에서는 마치 골동품처럼 여겨졌을 수가 있다. 따라서 에스라의 율법 해석을 통해 비로소 그 율법 조항들은 실천적인 생명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속에 적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Williamson).

성 경: [느8:13]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본절은 에스라의 말씀 운동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 그 이튿날 - 1-12절의 사건이 있은 그 다음 날이다. 종교력으로는 7월 2일. 민간력으로는 1월 2일이었다.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은 계속 에스라 곁에 남아서 말씀을 보다 확실히 배우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고(신 6:6, 7) 여타 백성들을 지도하고 교육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율법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10, 12절).

(주); 백성의 족장들...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 '백성의 족장'은 한 가문의 우두머리를 가리킬 것이다(7:8). 한편 '밝히 알고자 하여'(*, 레하스킬)는 원래 '이해하다' 혹은 '가르치다'등의 뜻이 있는 동사 '사칼(*)의 사역형으로서, 배움을 통하여 어떤 지식에 통달하고 그 결과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가리킬때 자주 사용된다(삼상 18:14;대하 30:22;시 32:8).

(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 이들은 성전 봉사 이외에도 백성들을 가르치는 책임도 있었다(레 10:11;대하 17:8, 9;렘 8:7-9;호 4:6;말 2:7, 8).

(주); 학사 에스라의 곳에 - 문자적로는 '학사 에스라의 주변에'이다.

성 경: [느8:14]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본절은 에스라가 족장 및 종교 지도자들(13절)과 함께 율법 말씀을 연구하던 중 초막절에 관한 가르침을 발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팔절과 초막절 사이에 있는 절기인 대속죄일(7월 10일)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일부 학자들은(1) 에스라 시대에는 대속죄일이 없었다거나. (2) 에스라가 당시의 대제사장을 신임하지 못하여 대속죄일을 지키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거나, 혹은 (3) 9장에 백성들이 회개에 관한 사실이 보도되고 있듯이, 굳이 대속죄일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등의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러한 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본문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차라리 우리는 율법의 낭독, 해설 및 여호와의 은혜를 찬양하는 즐거운분위기 등과 관련된 본문의 문맥에 근거하여 대속죄일 행사에 관한 기록을 생략하였을 뿐이라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Williamson).

(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 - 이것은 레 23:34;민 29:12;신16:13에 대한 자유스런 인용이다. 따라서 여기의 '칠월 절기'는 '초막절'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초막절의 준수 목적은 (1)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인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기억하며, (2) 토지 소산의 추수를 마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기념하는 데에 있었다.

성 경: [느8:15]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특히 초막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언급이다. 본절에 언급된 나무들 중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 이외의 것들은 레 23:40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레 23:40에는 본절에 없는 '버들'이 나온다.

(주); 감람나무 - 지중해 연안국들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신 8:8에 의하면 가나안 정복 이전의 시기부터 가나안 땅에도 있었다.

(주); 들 감람나무 - 왕상 6:23, 31, 32에 따르면 이 나무가 목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나무에서는 감람유는 거의 산출되지 않았다.

(주); 화석류 - 나무의 둥치가 없는 관목(灌木)의 하나로서 잎이 무성한 상록수이다(사41:19;55:13;슥 1:8, 10, 11).

(주); 종려나무 - 팔레스틴의 '종려 나무'는 그 높이가 성인 신장의 약2-3배 정도이며 잎이 많이 달린 줄기 하나의 길이도 성인의 신장 만큼은 된다(출 15:27;레 23:40;민33:9;시 92:12;아 7:8).

(주); 기타 무성한 나무 -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잎이 넓어서 그늘을 만들기에 적절한 나무일 것이다(NIV, shade trees).

성 경: [느8:16]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본절은 초막을 지었던 장소들에 대한 언급이다.

(주); 지붕 위에 - 중근동 지역의 가옥들은 그 지붕이 평평하여 초막을 세우기에 적절하였다(수 2:6;삼상 9:25).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집 '지붕 위에' 초막을 지었을 것이다.

(주); 뜰 안에 - 여기에 초막을 지은 사람들도 예루살렘 주민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주); 하나님의 전 뜰에 - 다음의 두 곳과 함께 타지역 백성들의 초막을 짓는 장소로 사용됐을 것이다.

(주); 수문(水門) 광장에 -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에브라임 문 광장 - '에브라임 문'은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했었다(12:39;왕하14:13). 따라서 '에브라임 문 광장'은 예루살렘의 북쪽에 있던 성전과는 가까왔었다.

성 경: [느8:17]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주); 사로 잡혔다가 돌아온 회(會) 무리 - 이같은 명칭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이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즉 이 같은 명칭은 비록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들이지만 제2의 출애굽 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계속 바벨론에 머물고 있었던 사람들과 온갖 희생을 각오하고(스 2장 강해) 귀환한 사람들을 예리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스 3:8;4:1;6:19-21).

(주); 눈의 아들 여호수아때 -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최초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주); 그 날까지...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 이는 초막절 절기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그 당시까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낱낱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초막절을 지켰을 것이며, 그 이후에 초막절을 지킨 사실에 대해서도 성경이 증거한다(삿 21:19;왕상 8:2, 65;왕하23:22;대하 30:26;35:18). 특히 최초의 귀환 직후에도 지켜졌다(스 3:4). 따라서 본 문구는 여기의 초막절 행사가 모세 율법이 말하는 근본 정신에 매우 합당하게 지켜졌음을 뜻할 것이다(Fensham).

성 경: [느8:18]

주제1: [율법에 의한 이스라엘의 회복]

주제2: [초막절 준수]

(주); 에스라는...율법책을 낭독하고 - 이는 초막절 절기가 모세 율법의 가르침대로 지켜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신 31:11).

(주); 무리가 칠 일 동안 절기를 지키고 - 본문은 백성들의 절기 지키는 일이 결코 유야무야(有耶無耶)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즉 백성들은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절기를 지켰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 동안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레23:35, 36) 가난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께서 풍성한 수확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하였을 것이다(레 23:39;신 16:13). 백성들이 그 초막 생활을 통해서 선조들의 광야 생활을 상기했을 것임은 물론이다(레 23:43).

(주); 제 팔일에...성회를 열었느니라 - 여기서 '성회'(*, 아체레트)는 '마치다'를 뜻하는 동사 '아차르(*)에서 온 명사로서 어떤 행사의 엄숙한 종결(Keil) 혹은 그와 관련한 의식을 가리킨다(왕하 10:20;사 1:13;욜 1:14;암 5:21). 아무튼 본 문구도 초막절 절기가 율법대로 시행됐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느9:1]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운동]

(주); 그 달 이십 사 일에...다 모여 - '이십사 일'은 초막절 행사가 완전히 끝난 22일의 이틀 후였다. 따라서 여기 언급되는 백성들의 회집(會集)은 초막절 행사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백성들이 다시 모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그들이 칠월 초하루날에 죄를 인하여 슬피 울기는 했지만(8:9), 나팔절과 초막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없었다(8:9, 10). 따라서 에스라는 중요한 절기들이 지난 한날을 택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철저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주); 금식...굵은 베...티끌 - 이것은 죄의 자각(自覺)으로 인한 애통한 마음의 외적인 표시이다(Fensham). 죄의 회개와 관련하여 금식만 언급되는 부분은 삼상 7:6, 굵은 베옷을 입고 우는 경우는 창 37:34과 왕상 21:27, 그리고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는 것은 삼상 4:12등이다.

성 경: [느9:2]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운동]

(주);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다. 거기에는 (1)본장이 에스라 10장 다음에 놓여져야 한다고 보고 여기의 '절교'가 이방 여인들과의 집단적 이혼 사실(스 9, 10장)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Rudolph, Myers), (2)여기에는 상세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본절의 '절교'는 그때에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을 내어 보냄으로써 실제로 이루어졌었다고 보는 견해(Keil), (3)통혼(通婚)으로 인한 문제와는 무리한 것으로 보고, 여기의 '절교'는 사업상으로 친교를 갖던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기로 헌신, 결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Rawlinson, Schultz, Kidner), (4)그 당시에 자격이 없는 이방인들이 초막절 행사 등에 참여했었던 것으로 보고. 본절의 '절교'는 백성들이 '금식...굵은 베...티끌 등을 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고 하는 견해(Batten)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성경의 한 부분을 충분한 증거가 없이 떼어내어 다른 부분과 연결시키는 것은 극히 위험하며 둘째, 이방 여인을 내어보내는 일이 단 하루 혹은 2, 3일 만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며 셋째,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사업상 상주하던 이방인들이 있었다(13:16)는 점 등으로 볼 때, 위의 네 견해 중 세번째의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주);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 - 이와같이 죄에 대한 책임의 연대 의식은 구약에서 종종 발견된다(시 106:6). 이러한 연대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그리고 실제로 본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의 죄로 인한 고통을 여전히 받고있었다(1:3). 이 같은 사실은, 조상들의 죄가 후손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긍극적 책임은 엄연히 각 개인에게 있다(겔 18장 주제 강해,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의 연대성과 개별성' 참조). 한편, 본장 내용 중 '자기의 죄'는 33-37절에 그리고 '열조의 허물'은 16-7절에 각각 언급된다.

성 경: [느9:3]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운동]

(주); 낮 사분지 일 - 고대 유대인들은 하루를 밤과 낮의 각 사등분씩 팔등분(八等分)했다. 본절의 '낮 사분지 일'은 오전 6시부터 9시까지를 가리킨다.

(주); 그 처소에 서서...율법책을 낭독하고 - 본절의 '처소'는 사역자의 자리와 구별되어 백성들에게 지정된 자리를 뜻한다(Rawlinson, 8:7). 한편, '율법책을 낭독하고'는 백성들이 직접 '율법책'을 읽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에스라가 높은 강단 위에서 낭독하면(8:3, 4) 백성들 중간중간에 위치했던 레위인들이 백성들의 상용어인 아람어로 번역해주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8:7, 8).

(주);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려 - 여기의 '낮 사분지 일'은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결과이다(8:9;행2:37).

성 경: [느9:4]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운동]

(주); 레위 사람 예수아...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 한편, 본절에 열거되는 사람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고 그들의 맡은 역할 또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본 문구를 '예수아...그나니는 레위 사람의 대에 올라서서'로 번역함이 더 낫다(Rawlinson)는 점에 근거해 볼 때(KJV, the stairs of the Levites ; RSV, the stairs of Levites) 이들을 모두 레위인 출신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LB, NIV)). 한편, '예수아'는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었던 레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8:7).

(주); 큰 소리로...여호와께 부르짖고 - 여기서 '부르짖고'(*, 자아크)는 고난을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소리내어 간구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삿 6:7;삼상 8:18;대상 5:20;시 22:5). 따라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의 죄 문제 해결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동으로 보면 적절할 것이다.

성 경: [느9:5]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백성들의 회개 운동]

본절에 등장하는 사람들 또한 4절에서의 '대'에 올라 있었던 자들로 짐작된다. 그 근거로서 4절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은' 레위 사람중 세 사람이 본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주); 갓미엘 - '하나님의 존전'의 의미이다. 이 사람은 10:9의 '갓미엘'과 동일인일 것이다.

(주); 하삽느야 - '여호와께서 생각하심'의 의미이다.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하사뱌'(10:11)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주); 호디야 - 8:7주석을 참조하라.

(주); 스바냐 - '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뜻이다.

(주); 브다히야 - '여호와께서 여셨다'의 의미이다.

(주);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 하나님의 초월적 속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주); 너희 하나님 여호와 - 이것은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신뢰의 대상이 될 만하며, 또한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강조한다(습 3:17).

(주);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 -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성경 전반의 한결같은 명령이다(Rawlinson, 출 20:7;시 72:19;계 15:4). 여호와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의 송축으로 그 부족을 채우시려는 분이 결코 아니다(행 17:25). 하지만 사람을 만드신 목적 중 하나가 사람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또 사람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함인 것은 분명하다(사 43:21). 따라서 우리가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은 의무이자 영광스러운 특권이기도 하다. 한편, '이름'은 히브리적 사고를 통해서 볼 때 '인격'과 동일하다(창 25:19-26 주제 강해, '이름 짓기' 참조).

성 경: [느9:6]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여기서부터 본장의 마지막 부분인 38절까지는 백성들의 회개 기도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기도를 인도한 것은 일단의 레위인들이었고(5절) 에스라는 이들의 배후에서 교육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듯하다. 이 기도문을 가리켜 혹자는 시편 밖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예배 기도문들 중의 하나라고 평한다(Michaeli). 백성들의 거듭되는 배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 기도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 창조에 있어(6절), (2) 예굽과 홍해에서(9-11절), (3)광야와 시내에서(12-21절), (4)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22-25절), (5) 사사들을 통해서(26-28절), (6)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7) 현재의 상황을 통해(32-37절).

(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 '여호와'는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이라는 문구(5절)와 매우 잘 어울린다.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이방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심을 강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시86:10).

(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 '하늘'은 대기권 혹은 궁창(창 1:8)을, '하늘들의 하늘'은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늘, 즉 우주를 가리킨다(신 10:14;왕상 8:27;시 148:4).

(주); 일월성신 - 문자적으로는 '모든 군대들'의 뜻으로서, 주로 '천사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본절에서 '천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체바'와 동일한 단어임).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별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창 1:16, 17;시 95:4, 5;104편;136:5-9). 한편, 이 천사들이나 별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면에서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시 148:3;사 6:1-4;계4:8, 9).

(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 - 지구와 (창1:1, 9, 10), 지구에서 살도록 창조된 모든 동식물과 사람을 가리킨다(창 1:20-30).

(주); 지으시고(*, 아사) - '만들다'의 의미이다. 여기에는 창조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창 1:16).

(주); 보존하시오니(*, 하야) - '생명을 주어보존하다'의 뜻이다(Keil). 이것은 하나님께서 (1)자연 세계를 만드시고 그것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섭리하시는것(벧후 3:7) (2) 생물을 지시고 그 생명을 계속 연장시켜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시 36:6). 따라서 일단 창조된 피조물은 스스로 자기 보존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Rawlinson).

성 경: [느9:7]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본절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 중 오직 '아브람'만을 택하신 사실로 인하여 영광을 돌리고 있다.

(주);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 히브리 원문은 본 문구가 관계 대명사 '아쉐르'(*)에 이끌리는 그 다음 문구들에 의하여 수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우상을 섬기던 아브람(수 24:2)에게 영광 중에 임하여서(행 7:2)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신 사실을 가리킨다(창 11:31;12:1;행 7:3).

(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 우상을 섬기던 아브람을 본토에서 떠나게 한 것은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요 그야말로 찬양받을 만한일이었다. 그런데 '갈대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가리킨다. 한편,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 페르시아 만에서 약 250km쯤 떨어진 남부에 위치했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닙불'은 우르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 하나님이 아브람과 더불어 후손에 관한 언약을 맺으면서 그에게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을 뜻한다(창 17:1-8).

성 경: [느9:8]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주); 그 마음이...충성됨을 보시고...언약을 세우사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어떤 선행이나 공로 때문에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을 때(창 15:6; 롬 4:1-1)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 하셨고, 그 의(義) 때문에 그는 언약 백성의 조상이 되었다. 그의 믿음 조차도 그의 공로가 될수 없는 것은(롬 4:2). 그것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기 때문이다(행 7:2, 3;엡2:8,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외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기꺼이 바치고자 했던 실천적 신앙 또한 간과될 수는 없을 것이다(창 22장).

(주); 가나안 족속과...기르가스 족속의 땅을...주리라 -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기로 약속하신 사실을 가리킨다(창 15:7, 18-21). 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약속이 있은 지430년이 지난 후였다(출 12:40;갈 3:17). 즉, 그 약속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그 땅을 정복함으로써 성취된 것이다. 한편, 가나안 정복 당시 가나안 땅에 거주했던 대표적인 일곱 족속 중에는 본문의 아모리 족속 대신 히위 족속과 블레셋 족속이 들어간다(수 9:1, 2 주제 강해, '가나안의 일곱 족속 참조).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의 가나안 땅에는 초기 원주민들, 곧 르바, 엡, 호리, 수스, 아낙 족속 등이 거주하였다.

(주);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 본 문구 앞에는 개역 성경에서 번역치 아니한 접속사 '키'(*)가 있다. 따라서 본문 '왜냐하면 당신은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느9:9]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여기서부터 12절까지에서는, 출애굽시에 하나님이 그 크신 권능으로 백성들을 구출하신 사실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성경 저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구원 사건으로 간주되었다(시 78:12;105:27-37; 106:7; 135:8,9;136:10).

(주);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출 1:8) 중한 노역에 동원되는 등 핍박을 받았던 사실을 말한다(출1:11). 이러한 일이 있을 때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출2:23). 한편, '감찰하시며'(*, 라아)는 원래 '보다' 혹은 '알다'의 뜻으로서, 자세히 살펴서 실제적 사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24:15;왕상 10:7;왕하 7:13).

(주);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 이 '부르짖음'이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는 탈출했으나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고 더구나 애굽의 추격군이 바싹 다가왔을 때였다(출 14:10). 그때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홍해가 갈라지도록 역사하셨다(출 14:21, 22). 한편, '부르짖음'(*, 자아크)은 4절의 '부르짖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하지만 부르짖음의 이유는 다르다(4절). 그런데 여기서 본서의 저자가 시간상 10절의 내용보다 뒤지는 사건을 먼저 언급한 것은 '고난을 감찰하신 사건'과 '부르짖음을 들으신 사건'을 함께 묶어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부각시키고자 함이었다.

성 경: [느9:10]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주);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 여기서 '이적'(*, 오트)은 성경에서 주로 '징조'및 '표적'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직접적으로는 초자연적인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지만 그 사건에 담겨있는 의미를 더 강조한다(출 7:3;왕하 19:29;시 105:27). 따라서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표적'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세메이온'(*)과 거의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요 2:18). 한편, '기사'(*, 모페트)는 특별히 놀라운 사건 그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이다(렘 32:20, 21). 따라서 이것은 복음서 등에서 흔히 '기사'나 '기적'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테라스'(*)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마 24:24;막 13:22;요 4:48;행 2:19;살후 2:9).

(주); 바로와...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 문자적으로는 '바로에 대하여...그리고 그 나라 온 백성에 대하여'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누구에게 베푸셨는지 그 대상을 말해주는 문구이다.

(주); 이는...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및 애굽 백성들에게 '이적과 기사'를 보이신 이유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교만이 행함' (*, 주드)은 '끓어오르다', '거만(오만)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맞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출 18:11;신 1:43;17:13; 18:20;렘 50:29).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한 노역을 부과하고 아들이 태어날 경우는 죽이는 악행을 범한 것을 가리킨다(출 1:11, 22). 그리고 '아셨음이라'(*)는 남녀가 성관계를 통해서 상대를 알듯이 어떤 사물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는 것을 가리킨다(창 4:1;출1:8).

(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 출애굽 당시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권능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명성이 오늘날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NIV, You made a namefor yoursself, which remains to this day). 실제로 애굽에 대해 베푸신 기적과 기사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셨다(출 9:16;14:17; 15:14-16;수 2:10).

성 경: [느9:11]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출 14:9-31 내용의 요약이다.

(주); 돌을 큰 물에 던짐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 하나님께서 갈라졌던 물을 합치심으로써 그 가운데 있던 애굽 군대를 수몰(水沒)시키신 것을 가리킨다 (출 15:10, 11).

성 경: [느9:12]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주); 낮에는 구름 기둥...밤에는 불기둥 -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별개의 두 기둥이 아니다. 다만 한 기둥이 낮과 밤에 따라 이중적인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출 14:24). 이 두 기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적 임재의 표상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성들 중에 임재하셔서, 낮에는 서늘한 구름기둥으로 사막의 뜨거운 햇빛과 열기로부터, 밤에는 찬란한 불이 되어(민 9:15, 16) 사막성 혹한(酷寒)이나 동물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셨던 것이다.

성 경: [느9:13]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본절은 14절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 산 언약, 즉 모세 언약을 주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주);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 하나님이 모세에게 시내 산 언약을 주시기 위해서 우뢰. 번개. 구름. 나팔 소리와 함께 불가운데에 임재하신 것을 가리킨다(출 19:16-18). 이때 백성들은 두려움 중에 자신들을 성결케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렸었다(출19:10).

(주); 정직한 규례..계명을... 주시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같이 '규례' 등을 주신 까닭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삶의 기준으로 삼게 하여 당신의 백성답게 살게끔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레 9:2;마 5:48;벧전 1:15).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통하여 당신의 형상 혹은 성품을 만민 중에 드러내려고 하셨던 것이다(마5:16). 바로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한 존재들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신 7:6). 여기의 '규례'(*, 미쉬파트)는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행동의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케 해주는 삶의 기준(레 18:4;시103:6)을 가리킨다(8:18). 이 '규례'는 원래는 백성들 간의 시비를 가리는 일상적 법률이었을 것이나, 시내 산 언약이 백성들에게 주어지면서 거룩한 율법을 가리키는 표현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정직한'(*, 야솨아르)은 '곧 바르다' 혹은 '곧바르게 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솨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백성의 삶을 바르게 해주는 '규례'의 탁월성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아무튼 본서 기자는 본절에서 이같은 수식적인 형용사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찬(禮讚)을 아끼지 않고 있다(Rawlinson). 이와 비슷한 경우는 시편 119편에서 능히 발견된다. 그밖에 하나님의 율법의 또 다른 명칭인 '계명'(*, 미츠오트)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지시하신 명령을 가리킨다.

(주); 진정한 율법 - '율법'(*, 토라)은 구약성경에서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므로, 함부로 그 뜻을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이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뜻을 수록한 '법전'(法典)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한편, '진정한'(*, 에메트)은 '확실한', '참된', '신실한'등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으리만큼 참된'의 뜻으로 쓰였다(수 24:14;삿 9:16;대하 18:15).

(주); 율례(*, 후킴) - 넓은 의미에서는 율법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으로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신 의무와 그에 부속된 약속까지를 가리킨다.

성 경: [느9:14]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13절이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주셨음을 강조한다면, 본절은 하나님이 그 말씀을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주셨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실, 13절과 14절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이다. 저자는 유사한 내용의 반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신 일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주); 거룩한 안식일...알리시며 - 이처럼 '안식일'이 본절의 초두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출20:8-11;23:12). 오랜 포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고 지엄하신, 안식일 준수에 관한 계명이 철저하게 이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랍비들은 '안식일의 규례는 모든 계명들보다 중요하다'고까지 하였다(Edwin Yamauchi). 이러한 안식일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즉 (1) 가나안 칠 족속의 정복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예표적 안식(히 4:8), (2) 믿음을 통한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영적 안식(마 11:28; 히 4:3), (3) 주님의 재림을 통한 모든 성도들의 신천 신지(新天新地)에서의 완전한 안식(계21:4)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느9:15]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을 권념하시던 하나님]

본절부터 21절까지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거역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주);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뜻한다(출 16:12;민 11:6). 물론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메추라기' 고기를 먹이기도 하셨지만 (1) 메추라기는 계속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며, (2) 백성들의 탐욕에 따라 징벌의 성격으로 주어진 것(민 11:4, 31-45)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하늘 양식'(시78:24;105:40)으로 보기는 힘들다.

(주);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리고 - (1) 르비딤에서(출 17:1-7)와 신 광야에서(민 20:2-13)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반석을 지팡이로 침으로써 거기서 마실 물을 낸 것을 가리킨다(시 78:24;105:41;사 48:21).

(주); 주께서...주마 하신 땅을...명하셨사오나 - '주께서'...주마 하신'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뜻한다(창15:18-21; 26:3 ;28:13). 그리고 '차지하라 명하셨사오나'는 출애굽 직전에 모세에게 (출 3:8), 출애굽 후 모세를 포함한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가리킨다(출 23:31;민 34:2-12;신 11:24).

성 경: [느9:16]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 '저희와 우리 열조'의 접속사 '...와'(*, 웨)를 해석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차라리 '저희 곧 우리 열조'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Rawlinson).

(주); 목을 굳게 하여 - 이 표현은 말을 듣지 않고 뻗대는 완고한 황소의 모습에서 빌어온 것으로서(출 32:9;신 10:16;왕하 17:14;대하 36:13;렘 7:26) 하나님의 뜻을 거듭하여 거스리는 백성들의 불순종을 나타낸다.

성 경: [느9:17]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거역하며(*, 마엔) - '거절하다'혹은 '싫어하다'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어떤 일의 실행을 극력 기피하는 것을 가리킨다(출 7:14;신 25:7;삼상 8:19;시77:2).

(주); 행하신 기사(奇事)를 생각지 아니하고 - 율법 준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때만 가능하다(출20:2).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과 다름없다. 한편, '기사'(*, 니플로트)는 '기이한 일을 행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라'(*)의 수동형 분사로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현상을 가리킨다(삼하 1:26대상 16:9;욥 37:5;시 75:1).

(주); 한 두목을 세우고...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 이 같은 생각은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자들 중 상당수로부터 비관적인 소식을 전해들은 낙심한 백성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었다(민 14:4). 물론 그러한 생각이 구체화되지는 않았으나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신에 기인한 만큼 커다란 범죄임에 분명하였다.

(주); 더디 노(怒)하시며 -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의 구체적 국면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기도를 들으사 백성들에 대해 형벌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민 14:13, 19).

성 경: [느9:18]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본절의 사건은 앞절의 사건보다 분명히 시간적으로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언급한 것은, 본절의 사건이 그 범죄의 질에 있어서 보다 사악하기 때문이다. 앞절의 사건은 생각에 그쳤지만, 본절의 사건은 생각을 거쳐 행위로 구체화 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죄의 강도가 더 높아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비를 베푸셨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 이 같은 범죄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가 있는 동안 행해졌었다. 즉,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오른 지 40일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출 24:18), 그가 죽었을 것으로 보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출 32:1-4). 이 같은 범죄의 주요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불만과 불신앙이었다. 특히 이 범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이 두드러진다(출 20:1-6).

(주); 이는...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 그 당시 백성들의 범죄는 우상을 만들었다는 데 있었지 다른 신을 섬겼다는 데 있지는 않았다.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백성들이 여전히 여호와를 섬길 의향을 갖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백성들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분이 여호와인 것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주); 설만하게(*, 네아초트) - '업신여기다' 혹은 '멸시하다' 등의 뜻을 갖는동사 '나아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극한적 행동을 통하여 어떤 대상을 능욕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74:8;겔 35:12).

성 경: [느9:19]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크신 긍휼 때문에' 의 의미다(NIV). 한편 '긍휼'의 히브리어 '라함(*)은 '자궁'을 뜻하는 '레헴'과 같은 어원을 가진 말로서, 사랑스러운 자 혹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에게 깊은 관심과 연민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Edwin yamauchi).

성 경: [느9:20]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장로와 유사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언을 하게 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Schultz, Edwin Yamauchi, 민 11:17, 25). 혹자는 여기의 '선한 신'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악한 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려고 한다(Volz). 즉, 이들은 포로 후기 시대의 신(神)개념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분명히 잘못이다. 이스라엘에서 휠씬 이전에 벌써 '여호와의 신' (삼상 16:14), '악신'(삼상 16:14). '거짓말하는 영'(왕상 22:23) 등의 용어가 사용됐다는 것은, 본절의 '선한 신'이 페르시아의 영향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이다(Fensham).

(주); 만나로...끊어지지 않게 하시고...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느9:21]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본절은 신명기 2:7;8:4;29:5의 인용인 듯하다.

(주); 사십 년 -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의 기간이다(행 13:18).

(주); 기르시되(*, 쿨) - '유지시키다' 혹은 '먹을 것을 주다'의 의미이다(Davids-on, 삼하 20:3;왕상 18:13).

성 경: [느9:22]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본절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여호수아의 활약상을 굳이 부각시키려고 하지는 않는다(Fensham).

(주);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 이것은 차라리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붙이셨고, 그것들을 나누어 주셨다'로 번역해야 보다 적절하다. 이같이 번역해야 할 기본적 이유는 우선 '주시매'(*, 나탄)가 원문상 '나누어'(*, 할라크)보다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주시매'는 성전(聖戰)의 차원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특정한 대적들을 진멸하시고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주시는 것을 가리킨다(수 10:30;11:8;삿 1:4). 그리고 '나누어'는 정복된 가나안 땅을 백성들에게 기업으로 분배해주는 일을 나타내는 이 사용된 단어이다(수 13:7;18:5, 10).

(주); 시혼의 땅...차지하였나이다 - 이 언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부의 땅을 정복한 것에 해당된다. 요단 서쪽의 가나안 땅 정복에 관한언급은 24, 25절에 있다. 아무튼 이 문구는 하나님께서 여러 족속들에게 '나누어 주신' 결과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지경의 땅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실 작정을 하셨고. 그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가 백성들에 의해 성취되었던 것이다. 한편, '시혼'은 아모리 족속의 일과를 다스리던 왕이었다.

(주); 헤스본 왕의 땅 - '헤스본'은 '시혼'이 다스리던 땅의 수도였다. 따라서 '헤스본 왕'은 '시혼'을 의미한다. 그 땅의 위치는 모압 땅의 북쪽이며, 사해 북단에서 북동쪽으로 약 25km 지점에 해당한다. 이 땅은 르우벤 지파에게 정복됐었다.

(주); 바산 왕 옥의 땅 - 이것은 '시혼의 땅' 북쪽 지역으로서, 므낫세 반 지파에 의해 정복되었다(민 21:33). 한편, '바산'은 '비옥하고 돌이 없는 평지'의 뜻으로서, 그 범위가 북으로는 헤르몬 산, 동으로는 예벨 드루즈, 서로는 갈릴리 바다 동쪽의 산지(山地), 남으로는 야르묵 이남 약 10km 지점까지였다. 그 지명이 의미하듯이, 이 지역은 해발 480-690m에 이르는 고원 지대로서 밀재배와 목축에 적당했고(시 22:12) 상수리 숲으로도(사 2:13;겔 27:6) 유명했다(S Cohen).

성 경: [느9:23]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그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 이와 관련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주어졌었다(창 12:2;13:16;15:5). 이러한 약속은 성취되어 출애굽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숫자로 불어나 있었다(출 1:7). 출애굽 직후의 인구 조사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정만 육십만 명이 넘었다(민 1:46).

성 경: [느9:24]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22절이 요단 동쪽 땅의 정복 사실을 다루고 있는 반면, 본절은 요단 서쪽, 즉 가나안 땅의 정복을 언급하고있다.

(주); 가나안 거민 - 가나안 땅에 살던 여러 족속들을 가리킨다(8절;출 3:8).

성 경: [느9:25]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견고한 성들 - '가데스'를 출발한 이스라엘의 열 두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하기 곤란할 만큼 요새화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민 13:28). 실제로 여리고(수 2:5), 아이(수 7:2), 립나(수 10:29,30), 라기스(수10:31,32), 하솔(수 11:1-13)등 가나안 땅 대부분의 성읍들이 요새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바로 이와 같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주); 기름진 땅 -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될 만큼 비옥하였다(민14:7,8;신 8:7-9;삼상 14:25-27;왕하 18:32).

(주);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 - 이것은 문자적 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풍족한 삶과 물질적 축복을 회화적(繪畵的)으로 표현한 것으로 봄이 무난하다(신 6:11).

(주); 파서 만든 우물 - 팔레스틴 땅에서는 연중 강우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각 가정마다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으며, 비가 올 때에 빗물을 저장할 물탱크도 필요하였다(왕하18:31;잠 5:15).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B.C.1200년 경에 방수 처리된 물탱크 제조기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주); 포도원...감람원...허다한 과목 - '포도원'과 '감람원'은 팔레스틴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과일 산출 근거였다. 한편, '허다한 과목'은 무화과 나무, 모과 나무, 사과 나무, 편도(扁桃)나무, 호두 나무, 살구 나무, 뽕나무 등을 가리킨다(Rawlinson).

(주); 배불리 먹어 살지고 - 항상 전반적으로 양식이 부족했던 고대 사회에서 이 같은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축을 받았었는지를 밝혀 말해준다.

(주);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큰 복 안에서 먹고 마시며 즐겼다'의 의미이다. 한편, 칠십인역은 '주의 큰 복 안에서 마음이 뺐겼다'로 번역하였다(Rawlinson).

성 경: [느9:26]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 순종치 아니하고(*, 마라) - 이 단어는 개역 성경과 같은 소극적 의미로보다는 보다 적극적 의미인 '배반하여' 혹은 '거역하며'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시78:17;106:7;호13:16).

(주); 거역하며(*, 마라드) - 이 단어는 앞의 '마라'와 거의 비슷한 뜻이지만, 그보다 더 적극적 반역의 행위를 가리킨다(왕하 18:20;대하 36:3;단 9:5).

(주); 율법을 등 뒤에 두고 -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50:17).

(주); 선지자들을 죽여 -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거의 대부분 백성들의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부르짖는 내용이었다(삼상 7:3). 따라서 이러한 그들의 사역의 성격상 많은 핍박이 뒤따랐다. 유대인들의 전승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가 백성들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밝힌다(Rawlinson). 이 밖에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선지자도 적지 않았다(왕상 18:4). 심지어 유다의 요아스왕은 자신의 은인이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기까지 했다(대하 24:22;마 23:37;눅11:47).

(주); 크게 설만(褻慢)하게 행하였나이다 - 선지자들을 죽인 일 자체가 하나님을 욕보인 것이라는 뜻이다(18절). 왜냐하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같이 선지자를 해하는 일은 곧 하나님을 해하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성 경: [느9:27]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이스라엘의 불순종]

25절까지의 내용이 출애굽 사건부터 여호수아의 사망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본절에서부터는 사사 시대 이후의 내용이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26절에 언급되는 백성들의 패역은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전 역사 기간을 포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겠다.

(주); 대적의 손에 붙이사 - 여호수아의 사후(死後).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변의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여 압제케 하신 일을 가리킨다(삿 3:7,8).

(주); 부르짖을(*, 차아크) -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그것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하여 애타게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26:7;삿 4:3).

(주); 구원자들을 주어...구원하셨거늘 - 여기의 '구원자들'(*, 모쉬임)은'구하다' 혹은 '구원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솨'(*)의 사역형 분사형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사사들'을 가리킨다(삿 2:16;3:9).

성 경: [느9:28]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의 긍휼]

(주);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 -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로부터 구원을 받은 후 태평 시대를 맞이했었다(삿 3:11,30). 그러나 사실상 이 기간은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기간이었다. 즉, 이 기간 동안 백성들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지 안 섬기는지를 시험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만일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겼다면,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까닭이 전혀 없었다.

(주);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태평 기간동안 백성들이 다시 우상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치 못했던 것을 가리킨다(삿 3:11,12).

(주);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범죄-환난-회개-구원이라는 악순환이 수 차례 되풀이됐음을 말해준다. 사사의 특징이 백성들을 외적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필요성이 있을 때마다 세우심 받은데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사사 시대 동안 이스라엘에 사사가 최소한 열 명이 넘었다는 것은 곧 위와 같은 악순환이 계속적으로 반복됐음을 뜻한다.

성 경: [느9:29]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의 긍휼]

본절과 다음 절은 굳이 시대적으로 구별할 경우, 왕정 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주); 경계하셨으나(*, 우드) - '증인'을 의미하는 '에드'(*)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동사로서, '증인이 되다' 혹은 '경고하다'의 뜻이다. 특별히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경고의 메시지 자체, 혹은 여러 가지 것들을 증거로 삼으면서 악행자에게는 반드시 그에 따른 형벌이 있게 됨을 알리는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신 4:26;8:19;32:46;왕상 21:13;렘 11:7;32:10,25,44).

(주); 준행하면...삶을 얻는...계명 - 이 구절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삶은 주께서 베푸신 계명들에 근거하여 전심으로 그 법도를 따르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본문을 협의적으로 이해하면, 율법을 지켜 외적 부정(不淨)에서 벗어남으로 인하여 성전 출입의 자격을 얻는 것을 말한다고도 볼 수 있다(레 18:5;겔 20:11).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만큼 더 가치있는 삶의 국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Fensham). 이렇게 볼 경우에 여기의 '계명'(*, 미초트)은 레위기적 의식법을 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 이 비유는 (1) 짐을 실은 짐승이 앞으로 가게 하려는 주인의 의사를 거스려 그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으려 취하는 몸짓(Rawlinson), 혹은 (2)황소가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뒤로 버팅기는 것(Keil)등과 관련이 있다(호 4:16;슥7:11).

성 경: [느9:30]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의 긍휼]

(주);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과 앗수르에 붙이시기 전까지는 그들에 대해서 특별한 징벌을 하지 않으신 것을 가리킨다(Rawlinosn, Keil). 북국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적극적 반역(왕상 12:25-29)에도 불구하고 무려 200여 년을 참으셨다. 그리고 남국 유다에 대해서는 북국에 대해서 보다도 약 135년을 더 인내하셨다.

(주);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 북국 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에, 남국 유다는 B.C. 568년 바벨론에 각각 끌려가게 하신 것을 말한다(왕하 17:23;25:21;사 42:24).

성 경: [느9:31]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의 긍휼]

본절에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셨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강조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스 1:1-3;렘 4:27).

성 경: [느9:32]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여기서부터는, 과거 역사의 회고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의 모색으로 내용이 전환된다.

(주); 능하시고(*, 기보르) - 이 단어는 (1) 하나님의 전능성(신 10:17;사9:6), (2)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원수들과 대신 싸우시는 측면(출15:6;삼상 14:6;시 24:8,사 42:13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주);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 '앗수르 열왕'은 하나님의 도구가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했으며(사 10:5) 이들의 뒤를 이어 바벨론 왕들이 또 징벌의 도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에스라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 왕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 한편, 징계의 도구로 쓰였던 '앗수르 열왕'에는 '불'(왕하 15:19,20), '디글랏빌레셋 3세'(왕하15:29;16:7;대상 5:6,26;대하 28:20), '살만에셀' (왕하 17:3), '사르곤 5세'(사20:1), '산헤립'(왕하 18:13-16), '앗술 바니팔'(대하 33:11)등이 포함된다.

성 경: [느9:33]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주); 모든 일에 주로 공의로우시니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취하신 하나님의 모든 조치가 정당하다는 뜻이다(단 9:14;롬 3:5,6). 이어지는 문구에서 그 이유가 설명된다.

성 경: [느9:34,35]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이 부분은 앞절의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에 대한 부연 설명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 3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행위가 전 역사를 통해 모든 계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등 대단히 보편적이었음을 지적하며, 35절은 이스라엘의 범죄가 배은 망덕(背恩忘德)의 성격을 띄고 있는 지극히 사악한 것임을 말해준다.

(주); 나라(*, 말리쿠트) - 이것은 독립된 국가를 말한다(Keil). 바벨론 포로기나 포로 귀환기의 민족적 예속 상태와 대조된다.

(주); 넓고 기름진 땅 - 여기의 '넓고'는 (1)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고센'의 삼각주(창 47:27)보다 팔레스틴이 더 넓다는 사실, (2) 팔레스틴은 경작 가능 지역의 비율이 애굽보다 높다는 사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팔레스틴 이외의 땅도 정복할 수 있게 (왕상 4:21) 약속되었다는 사실(출 3:8) 등과 관련시켜 이해될 수 있다(Rawlinson). 한편, '기름진'(*, 하쉬메나)은 '살지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솨만'(*) 의 사역형이므로 '기름지게 한'으로 번역되어야 타당하다(Schultz). 결국 이것은 모든 훌륭한 자연적 조건도 철저하게 하나님으로 부터 말미암은 축복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신 11:14;시 147:8).

성 경: [느9:36]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본절과 다음 절에서 포로에서 돌아온 시대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여전히 종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사실, 그들은 비록 바벨론땅에서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예전의 주권(主權)을 되찾지 못한 상황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페르시아의 '종'이었음이 분명했다.

(주); 실과를 먹고...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 -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시대 이래 살기 시작하여 바벨론 땅으로부터 귀환해서도 살고 있었던 팔레스틴 땅을 가리킨다(24,25,35절).

성 경: [느9:37]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주); 이방 열왕이...많은 소산을 얻고 - 이것은 페르시아 정부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여갔음을 시사한다(스 4:13). 그 당시 페르시아 정부가 유대인들로부터 징수해 간 세금 액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동일하게 페르시아의 피정복지였던 수리아의 세금 납부액이 일 년에 은 삼백 달란트였다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역사 기록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awlinson).

(주); 저희가...몸과 육축을...관할하오니 - 이것은 전쟁과 관련한 '징병'(徵兵)이나 '징발'(徵發)을 뜻한다. 즉, 페르시아 정부는 외국과의 전쟁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병사(兵士)로 뽑아갔거나, 필요한 물자를 거두어갔던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아닥사스다 왕의 고관이었던 에스라(혹은 느헤미야)가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을 비방하는 투의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기도는 반역을 기도하려는 내용이나 페르시아의 잔학상을 고발하려는 내용이 아니며, 단지 언약에 불충실한 백성들에게 닥칠 수밖에 없었던 환난을 표현하고자 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Kidner).

성 경: [느9:38]

주제1: [백성들의 회개]

주제2: [하나님께 대한 탄원]

본절은 9장과 10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하며 내용상으로 10장의 첫절로 이해될 수도 있다.

(주); 견고한 언약을 세워 - 문자적으로는 '견고함을 잘라'이다. 이는 '언약'이라는 용어의 기원을 밝혀준다. 즉,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의무를 다짐하기 위해, 그리고 언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상징적 의식으로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갠 후 그 사이를 지나면서 엄숙히 선서하던 고대 사회의 계약 체결 관습에서 유래하여 '메리트'가 '언약'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주); 방백들...레위 사람들...제사장들 - 이들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다. 여기서 지도자들이 먼저 죄악에서 떠나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암시되고 있다.

(주); 인을 치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도장 위에 있나이다'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진흙에 새겨 구워 만든 도장을 언약문(言約文)에 찍는 행위를 가리킨다.

성 경: [느10:1]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 - 총독 느헤미야를 가리킨다. 이처럼 총독 느헤미야가 언약서에 인친 자의 명단 초두에 나오는 것은, 그가 금번과 같은 신앙 운동의 주도자였음을 시사한다. '하가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1: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방백'(*, 티르솨타)은 8:9에서는 '총독'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주); 시드기야 - 본절의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사이에는 접속사 '와우'(*)가 있다. 그러나 '시드기야'와 2절 초두의 '스라야' 사이 부터에는 접속사가 사용되지 않는다. 결국 이는 본절의 두 사람, 즉 '느헤미야'와 '시드기야'가 2-8절의 인물들과 구별된 자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즉, 2-8절의 인물들이 제사장 곧 종교 지도자들이었던데 반하여 본절의 두 사람은 정치적 권세를 가졌던 지도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의 '시드기야'는 총독 느헤미야의 서기관이었던 '사독'(13:13)과 동일 인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이름이 모두 '의롭다'를 뜻하는 '차다크'(*)라는 어근에서 파생됐다는 점도 이 같은 추측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성 경: [느10:2]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여기서부터 8절까지에 나열된 21명의 제사장 명단 중 적어도 열 다섯은 개인 이름이 아닌 가계명(家系名)이다. 12장에 기록된 1차 귀환자들의 명단에 또다시 여기 기록된 이름들이 나온다는 점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 예로 스라야, 예레미야, 아나랴 등을 들 수 있다(12:1-7). 이 같은 점에서 볼 때 당시 종교계의 으뜸가는 지도자였던(8:1,13) 에스라의 이름이 본 명단에서 누락된 사실도 이해될 수 었다. 즉, 에스라는 그가 속했던 가문의 우두머리가 인을 침으로써 개인적으로 인을 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Kidner).

(주); 스라야 - 스 2:2의 '스라야'이다(7:7;12:1;스 2:2). 따라서 이것은 느헤미야 당시의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니라 한 가문의 이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에스라'는 바로 이 가문에 속했었다(스 7:1).

(주); 아사랴 - 이것도 제사장 개인 이름이 아닌 가문명(家門名)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이다.

(주); 예레미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다.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일어나실 것이다'이다.

성 경: [느10:3]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바스홀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家系名)이다(스 2:38).

(주); 아마랴 - 스룹바벨과 같이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으로서(12: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이다.

(주); 말기야 - '여호와는 왕'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성 경: [느10:4]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핫두스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대적자' 의 의미이다.

(주); 스바냐 - '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의미이다. 이것 역시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이다(12:14).

(주); 말룩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으로서(12:2), '통치하는'의 의미이다.

성 경: [느10:5]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하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이다(스 2:39).

(주); 므레못 - 제사장 가문의 가계명인 듯하다(12:15). '높은 곳들'의 뜻이다.

(주); 오바댜 - '여호와를 섬김'의 의미이다(12:4).

성 경: [느10:6]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다니엘 - 본 문맥이 제사장 직분의 가문명을 나열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에서 에스라와 함께 귀환했던 이다말 자손의 제사장일 가능성은 희박하다(스 8:2). '하나님의 재판관'의 의미이다.

(주); 긴느돈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긴느도이'와 동일한 가문인 듯하다(12:4). '정원사'의 뜻이다.

(주); 바룩 - '복된'이란 뜻이다.

성 경: [느10:7]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주); 아비야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제사장 가문이다(12:17). '아버지는 여호와'의 뜻이다.

(주); 미야민 - 최초로 귀환한 제사장 가족의 하나로서(12:5), '운이 좋은'의 의미이다.

성 경: [느10:8]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마아시야 - '여호와는 피난처이시다' 의 뜻이다. 이것은 12:5의 '마아댜'의 오기인 듯하다(Rawlinson).

(주); 빌개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제사장 가문의 이름 '빌가'(12:5,18)와 동일하다. '그침'의 뜻이다.

(주); 스마야 - 제사장 가문의 가문명이다(12:18).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0:9]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여기서부터 13절까지는 레위 사람들의 명단이다. 그러나 제사장의 경우와는 달리 가계명(家系名)이 아닌 개인명(個人名)이다. 이와같이 봐야 할 까닭은, 여기에 나열되는 이름들이 8장과 9장에서 대부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Fensham).

(주);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 9:4의 '예수아'인 뜻하다.

(주);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 9:4의 '바니'이다(3:18;9:4). 한편, '헤나닷'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레위 사람들의 조상이다(스 3:9).

(주); 갓미엘 - 9:4,5을 참조하라.

성 경: [느10:10]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스바냐 - 9:4,5에서도 여기처럼 '갓미엘'과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주); 호디야 - 9:5을 참조하라.

(주); 그리다 -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8:7;스 10:23). '불구가 됨'의 의미이다.

(주); 블라야 - 에스라를 도와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 사람(8:7). '여호와께서 구별하셨다'의 뜻이다.

(주); 하난 - 이 사람도 백성들에게 율법을 해석해 주는 이로써 에스라를 도왔다(8:7). '은총'이란 뜻이다.

성 경: [느10:11]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미가 - 여기서만 언급되는 인물이다.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이다.

(주); 르홉 - '넓이'의 뜻이다.

(주); 하사뱌 -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인물이다(스 8:19).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0:12]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삭굴 - '염두에 두는'의 의미이다.

(주); 세레뱌 -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였고, 그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우쳐 준 인물이다(8:7;스 8:18).

(주); 스바냐 - 9:4을 참조하라. '여호와께서 숨기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0:13]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호디야 - 9:5의 '호디야'나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깨닫게 한 사람(8:7)중 하나일 것이다.

(주); 바니 - 9:4을 참조하라. 에스라를 도와서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사람들과도 동일인일 것이다(8:7).

(주); 브니누 - 오직 여기서만 나오는 이름으로서 '우리의 아들'이란 뜻이다.

성 경: [느10:14]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여기서부터 27절까지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가문명(家門名)이 나열되고 있다. 14-19절의 이름들이 대부분 에스라 2장의 귀환 가족의 이름과 중복된다는 점은 그 사실을 능히 증명할만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Fensham). 그런데 20-27절의 가계명(家系名)은 느 3장의 성벽 재건자들의 명단에 일부가 언급될 뿐 최초 귀환 가족의 명단중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 낯선 이름들을 마이어스(Myers)는 (1)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았던 무리, (2) 바벨론의 공격이 있었을 때 은신했다가 나중에 백성들에게 나타난 무리 등으로 본다. 하지만 그 같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1)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들의 인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인구가 많은 가문이 나뉘어져 여러 개의 가문으로 되었으며 또한 (2) 지명으로 자신의 가계를 표시했던 무리들이 인명으로 그것을 표시하기 시작했다고 봄이 가장 무난하다(Fensham). 본문 당시는 첫 번째 포로 귀환이 있은 후 약 100년이 경과되었던 때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주); 바로스 - 스 2:3을 참조하라.

(주); 바핫모압 - 스 2:6을 참조하라.

(주); 엘람 - 스 2:7을 참조하라.

(주); 삿두 - 스 2:8을 참조하라.

(주); 바니 - 스 2:10을 참조하라.

성 경: [느10:15]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분니 - 포로에서 돌아온 후 새로 생긴 가문일 것이다.

(주); 아스갓 - 스 2:12을 참조하라.

(주); 베배 - 스 2:11의 '브배'와 동일하다.

성 경: [느10:16]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아도니야 - 새로 생긴 가문으로 짐작된다. '여호와는 주님이시다'의 뜻이다.

(주); 비그왜 - 스 2:14을 참조하라.

(주); 아딘 - 스 2:15을 참조하라.

성 경: [느10:17]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아델 - 스 2:16을 참조하라.

(주); 히스기야 - '아델 자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새로운 가문인 듯하다(7:21). '여호와로 인해 강해짐'의 뜻이다.

(주); 앗술 - 새로운 형성된 가문일 것이다. '도움이 되는'의 의미이다.

성 경: [느10:18]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호디야 - 새로 생긴 가문인 듯하다.

(주); 하숨 - 스 2:19을 참조하라.

(주); 베새 - 스 2:17을 참조하라.

성 경: [느10:19]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하립 - 새로 생긴 가문이다.

(주); 아나돗 - '아나돗 자손'은 자신들의 보계를 입증치 못하여 그 조상이 살던 지방을 확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정되었었다(스 2:23). 아마 그들은 그 지명을 자신들의 가문명으로 삼았을 것이다.

(주); 노배 - 이것은 '느보'를 가리킬 것이다(스 2:29). 그렇다면 이것도 지명이 가계명으로 된 경우 중의 하나이다.

성 경: [느10:20]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막비아스 - 새로 형성된 가문임이 분명하다. '멸종자'의 뜻이다.

(주);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주); 헤실 - '보호된'의 뜻이다.

성 경: [느10:21]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므세사벨 - '하나님께 구출된'의 뜻이다.

(주); 사독 - '의로움'의 뜻이다.

(주); 앗두아 - '알고 있는'의 뜻이다.

성 경: [느10:22]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블라댜 - '여호와께서 원하셨다'의 뜻이다.

(주); 하난 -'은총'의 뜻이다.

(주); 아나야 -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0:23]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호세아 -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의 뜻이다.

(주); 하나냐 -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이다.

(주); 핫숩 - '명철한'의 뜻이다.

성 경: [느10:24]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할르헤스 - '복술자'의 뜻이다.

(주); 빌하 - '겁이 많은'의 뜻이다.

(주); 소벡 - '떠남'의 의미이다.

성 경: [느10:25]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르훔 - '인정 많은'의 뜻이다.

(주); 하삽나 - '여호와께서 나를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주); 마아세나 - '여호와의 일'의 의미이다.

성 경: [느10:26]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아히야 - '여호와의 형제'의 뜻이다.

(주); 하난 - '은총'의 뜻이다.

(주); 아난 - '구름'의 뜻이다.

성 경: [느10:27]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언약 갱신의 참여자들]

(주); 말룩 - '통치하는'의 뜻이다.

(주); 하림 - 5절의 '하림'과는 동명 이인임이 분명하다.

(주); 바아나 - '고통 가운데의'라는 뜻이다.

성 경: [느10:28]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 이하에서는 언약 문서에 인친 백성들이 맹세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그 언약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다짐하는 내용이 전개된다.

(주); 그 남은 백성 - 직접 서명을 하지 않은 서민들을 가리킨다. 직접 서명을 한 사람은 한 가문의 대표적 지도자만이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대표가 서명했기 때문에 마치 본인이 한 것과 다름없었다. 한편, 본장의 1-17절에서 인을 친 것은 각 가문의 대표였다는 점에 근거하여, 여기의 '그 남은'이라는 말은 다음의 '제사장' 등을 모두 수식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 - 이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로 크게는 레위 사람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협의적으로 이들은 성전 제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역을 수행했던 '레위 사람'과는 구별됐었다(스 2:40-42). 어떻든 '레위 사람'이 이들을 대표하여(9-13절)언약서에 서명을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주); 느디님 사람들 - 이들은 혈통적으로 볼 때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으나 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스 2:43), '레위 사람'을 도와 성전 봉사의 직무를 수행했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이 이들을 대표하여 언약서에 인을 쳤을 것이다.

(주);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 -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구성하던 또 다른 계층이었다. 즉, 이들은 원래는 이방인이 었으나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에 가입한(스 6:21) 무리였다(Rawlinson). 이들은 자신들의 본처(本處)를 떠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로 이주(移住)한 후, 할례를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창 17:12,13).

(주);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 - 8:2,3의 표현을 빌면 '알아들을 만한 회중'이다. 따라서 이들은 언약 및 언약서에 인을 치는 것이 무엇인지릍 이해하는 정상적인 지각을 지닌 사람(Rawlinson)을 말한 것이지 특별한 지식의 소유자들을 말함이 아니다.

성 경: [느10:29]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주); 그 형제 귀인들 - 언약 문서에 인을 친 족장 및 그 밖의 지도자들을 뜻한다.

(주);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 '좇아'( ,마하지킴)는 원래 '견고하게 하다' 혹은 '붙잡다'(사 41:13)의 뜻이지만,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마치 남자가 여성을 강간하려고 달려들듯이 굳게 붙잡는 행위를 가리킨다(잠 7:13). 그렇다면 이 단어는 결국 나머지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인을 친 행위 혹은 그 근본적인 뜻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을 의미한다. 한편, '저주로 맹세하기를'은, 언약이나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지키지 않은 당사자 자신에게 '저주'가 내려져도 달게 받겠다는 공언(公言)과 함께 이루어지는 언약 방식이다(민 5:21).

성 경: [느10:30]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과 관련된 에스라의 개혁 조치(스 9,10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그 같은 악습이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에스라의 개혁으로 통혼의 문제는 얼마 동안 거의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라가 페르시아 궁전으로 소환되어 오랜 기간 그곳에 있었고(8:1), 느헤미야도 에스라가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온터라, 이방인과의 통혼 악습은 되살아났음이 분명하다.(13:23).

성 경: [느10:31]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은 백성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킬 것을 다짐하는 내용이다.

(주);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팔려 할지라도 - 이와 같은 사실은 본서 13:16에서 발견되어진다. 당시에 이 같은 일은 비일 비재했던 것 같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산출물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그 부족을 어차피 이방 사람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채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이방인 상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출입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안식일에까지 상행위를 하였다.

(주);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 '안식일이나 성일'은 차라리 '안식일 곧 성일'로 봄이 적절하다(Fensham). 즉, 본문은 동일한 뜻의 말을 반복함으로써 안식일의 귀중한 의의와 안식일 준수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출 20:8-11;신 5:12-15).

(주); 제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치 말고 놀려야만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이 있다(출 23:10,11;레 25:2-7). 이러한 안식년 규례는 안식일 규례보다 더욱 안 지켜졌던 것 같다.

(주);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 이것은 안식년에는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치 말고 1년 연기해 주어야 한다는 율법 규정과 관련된다(신 15:1-3). 그러나 본 문구는 1년 연기가 아닌 '완전한 면제'를 뜻한다. 이처럼 백성들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그 이상의 선행을 결심한 까닭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가난한 자들의 부채 문제로 인하여 심각한 홍역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1-13). 사실 그 문제는 진작 해결되어져야만 했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에스라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대각성 운동으로 백성들이 새로워지기를 원하면서 골치거리로 남아있던 그 문제의 해결을 자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이러한 자발적 결단은 일회적인 것으로 이해됨이 무난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매안식년마다 빚이 완전히 탕감되어 진다면, 백성들은 빚을 주지도 않을 것이고, 반드시 꾸어쓸 필요가 있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심각한 어려움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성 경: [느10:32]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과 같은 결정은 그 당시의 독특한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이 독립 국가로 있을 때는 막대한 왕의 수입(收入)중 일부가 성전 재정을 위해 보태졌었으나, 페르시아의 피정복 상태 하에 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재정난으로 성전의 효과적 운영이 심히 어려웠다.

(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 출 30:11-16에는 이십 세 이상된 모든 백성들이 생명의 속전으로서 반 세겔씩 바쳤고 이 돈은 성막 건물을 제작하는 비용으로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 조사가 있었을 때에 특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이어서 정기적인 성전세의 개념으로 보기는 힘들다. 아마 후대에 가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세 명목으로 일정한 액수가 납세되었던 것 같으며, 예수 당시의 성전세는 매년 반 세겔이었다(마 17:24). 고레스, 다리오 및 아닥사스다등의 조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위해 공적 기금이 사용되도록 허락되었지만(스6:8-10), 그러한 기금은 언제 중단될지 몰랐고 더욱이 성전운영이 이방의 재원(財源)에 의존된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했다(Brockington). 따라서 비록 백성들의 생활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성전세를 삼분 일 세겔씩 납부키로 자원하여 결단을 내린 것이다.

성 경: [느10:33]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은 '성전세'가 거두어져서 구체적으로 어디에 쓰여질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개인이 자신의 제물을 가져와서 드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는 성전 자체에서 제물을 조달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다.

(주); 진설병 - 성소의 떡상 위에 두 줄로 여섯 개씩 그래서 모두 열 두개가 놓여졌던 떡이었다(레 24:6). 안식일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했고(레 24:8). 물려낸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다(레 24:9). 이것은 크기가 작아 만드는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이라는 그 중요성 때문에, 성전세 용도(用途)의 첫부분에 나온다(Rawlinson).

(주); 항상 드리는 소제 - 항상 드리는 '번제'와 함께 성전에서 매일 드렸던 제사이다. 약 2.2ℓ의 밀가루에 약 0.9ℓ의 기름을 섞어서 만든 떡이 그 제물이었다(민 28:3).

(주); 항상 드리는 번제 - 이것은 아침과 저녁 하루 2회씩 드려졌던 희생 제사이다. 흠없는 어린 수양이 그 제물이었다(민 28:3).

(주);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 - '안식일'에는 평일에 드려지던 상번제와는 달리 일 년된 어린 수양 두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다(민 28:9). 그리고 '초하루', 즉 '월삭'(민 28:11)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수양 한마리 그리고 어린 수양 일곱 마리가 소제와 함께 제물로 드려졌었다(민 28:11-14). 여기에 포도주를 제물로 한 전제(奠祭)도 드려져야 했다(민 28:14). 한편, '정한 절기'는 3대 절기인 유월절(민 28:16-25), 맥추절(민 28:26-31), 초막절(민 29:7-11)등을 가리킨다. 이때는 엄청난 양의 제물이 바쳐져야 했었다.

(주); 성물 - 이것은 속건제의 제물을 의미하는 듯하다(레 6:17).

(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 - 이것은 개인적 죄의 용서를 위한 속죄제(레 4:27-31)가 아닌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이다(레 4:13-21).

(주);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 - 이것은 (1) 성전의 유지를 위한 수선(修繕)작업(Fensham), (2)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구 및 비품을 충당.보존하는 일(Rawlinson)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느10:34]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의 새로운 규정은, 희생 제사때에 사용되는 많은 양의 화목(火木)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제정되었다. 레위기에도 이와 유사한 규정이 언급되기는 한다(레6:12). 그러나 거기서는 화목의 조달을 위해 각 '종족'에게 물량을 할당하는 것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 시대에 들어와서는 황폐해진 연고로 화목(火木)의 확보가 곤란해서 본절과 같은 특별한 규정을 제정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Rawlinson).

(주); 정한 기한에...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채집한 나무를 성전에 드린 날(13:31)이 압월, 즉 종교력으로는 5월, 민간력으로는 11월, 양력으로는 7-8월의 14일이라고 하였다(Rawlison). 이 날은 유대인들에게 거의 축제일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주); 율법에 기록한대로...단에 사르게 하였고 - 본절의 '율법'은 상번제를 드리기 위한 제단의 불을 항상 피워야 한다는 레 6:12의 내용이다. 한편, 이 '단'은 사방 6m의 넓이였으니(A.Noordtzij) 여기에 불이 계속 타도록 하는데 소용되는 나무의 양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이처럼 그 '단'에 항상 불이 타오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빌 3:13,14).

성 경: [느10:35]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본절과 같은 명령은 모세 율법에 명시된 것이다(출 34:26;레 19:24;신 2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했던 이유는, 별다른 기업없이 다만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만 살아야 했던 레위 사람들의 생활유지를 위해서 꼭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산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정신을 갖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음도 분명하다.

성 경: [느10:36]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주); 생축(牲畜)의 처음 난 것...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 이것은 백성들의 맏아들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과 동일하다(출 34:19). 이같이 사람을 포함한 모든 초태생(初胎生)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던 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기억케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특히 장자를 대속하게했던 것은 백성 전체가 몸과 마음을 거룩히 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헌신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한편, 이렇듯 장자를 하나님께 돌리게 된 기원은 출애굽 직전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초태생은 죽이지 않으셨던 데서 유래한다(출 13:13-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속전(贖錢)을 대신 지불함으로써 그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는 셈이 되도록 하셨다. 반면 짐승의 초태생은 대속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져야만 했다(출 13:15).

성 경: [느10:37]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36절까지가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를 위하여 바쳐진 것들인 반면, 본절의 것은 제사장의 생활을 위하여 바쳐진 예물들이었다(Batten).

(주); 처음 익은 밀의 가루 - 여기의 '처음'(*,레쉬트)은 순서상의 처음 혹은 질적으로서의 으뜸 등의 뜻이 있다. 펜샴(Fensham)이나 윌리엄슨(Williamson)등은 후자의 의미를 타당히 여겨서 본 문구를 '가장 좋은 가루 떡'으로 이해했다(민 15:18-21).

(주); 거제물(擧祭物) -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제물 중 제사장 몫을 의미하는 듯하다(39절 ;레 7:32).

(주); 하나님의 전 골방 - 성전 건물 안에 있던 부속실(附屬室)이었다(13:4,5).

(주); 물산의 십일조 - 이것은 다른 지파들처럼 자신들의 기업을 갖고 있지 않았던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민 18:21).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의 몫으로 주어야 했다(민 18:26). 여기서 이처럼 십일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당시 별다른 기업이 없어서 오직 십일조만으로 생활을 해야 했던 레위 사람의 많은 수가 십일조가 걷히지 않음으로써 큰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성전을 떠나버렸던 그 당시 상황 때문이었다(39절 ; 13:10). 말라기에서도 바로 이같은 강조가 나타나고 있는데(말 3:6-15). 이러한 사태는 거의 동시대 사람인 느헤미야와 말라기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느10:38]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주); 십일조를 받을 때...제사장...함께 있을 것이요 - 이것도 세금 징수자에게 감독자를 붙였던 페르시아의 방식과 유사하다(Fensham). 느헤미야는 이같이 함으로써 그 십일조 중의 제사장 몫이 확실히 파악될 수 있도록 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제사장과 레위 사람간의 십일조 분배 문제로 인한 오해 및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자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같은 느헤미야의 조치는 레위 사람을 의심한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다.

(주); 십일조의 십분 일 - 제사자의 몫이다(민 18:26).

성 경: [느10:39]

주제1: [백성들의 새로운 다짐]

주제2: [백성들의 맹세]

여기에 언급되는 물품(物品)들은 37,38절의 것들이다.

(주); 골방에 둘 것이라 - 레위인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성읍에서 십일조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수입을 확보하였으나, 제사장들은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가져오는 것을 직접받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성전 봉사에만 더욱 정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Rawlinson).

(주);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 문자적으로는 '우리가...하나님의 전을 거절하지 아니하리라'의 뜻이다. 아무튼 본 문구는 그 당시 레위 사람들의 성전 봉사로부터의 이탈 현상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회개 기도를 인도했고(9:5-38). 또한 언약서에 인치는 일을 주도했던(9:4,5)을 가리킨다.

성 경: [느11:1]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자들]

여기서부터는 예루살렘의 거민 수를 늘리기 위한 조치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예루살렘의 거민 수를 증가시키기 위한 최초의 노력이 언급되고 있는 7장, 특히 그 장의 4절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주);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 이에 대해서는 (1) 그 즈음 '두목들'이 솔선 수범하여 먼저 예루살렘에 정착했다는 견해(Rudolph), (2) 포로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두목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는 견해(Fensham, Rawlinson, Myers)등 두 가지 해석이있다. 이처럼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여기의 '머물렀고'(*, 야솨브)가 그런 두 가지의 해석을 가느케 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 도착 전에 이미 상류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언급이 있음(2:16)을 볼때, 대다수의 '두목들'은 애당초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이번의 언약 갱신을 계기로 타지역으로 가서 살았던 일부 두목들까지 일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봄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한편, '두목'(*, 사르)은 다른 곳에서 '방백'(스 10:14), '귀인'(6:17), '족장'(7:70;스 2:68)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주); 제비뽑아 -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잠 16:33)는 믿음에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민 26:55,56,;수 7:16-18;삼상 10:19-21; 대상 24:5;25:8; 행 1:26).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민 26:52-56의 주제 강해, '제비 뽑기'를 참조하라.

(주); 십분의 일은...예루살렘에...거하게 하고 -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살던 백성들의 10%를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킨 것을 가리킨다. 이때 가족 전체가 이주했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 조치로 인하여 이산(離散)가족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 거룩한 성 - 이는 후기에 기록된 구약 성경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18절;사48:2;52:1;단 9:24). 그런데 이 같은 어구로 예루살렘을 수식한 까닭은, 예루살렘이 비록 이방 대적들의 위협이 가장 많았던 곳이긴 하지만 예배의 중심지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의 거주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암시하려는 저자의 의도 때문인 듯하다(시 122:6,9).

성 경: [느11:2]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자들]

(주); 자원하는 자 - 여기에 대해서는 (1) 제비뽑혀서 본의 아니게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된 백성 이외의 사람 중 그들과 함께 이주하여 살기를 자청한 사람들로 보는 견해(Rawlinson, Schultz, Myers), (2) 제비뽑혀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백성 중 기쁜 마음으로 가는 자들로 보는 견해(Williamson, Fensham, 박윤선) 등 두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그러나 첫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할 숫자를 십분의 일로 못박았고(1절) 둘째, 여기의 '자원하는'(*, 나다브)이라는 단어는 대개 재귀형으로만 사용되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를 기꺼이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삿 5:2;대상 29:6;대하 17:16;스 3:5)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위의 두 해석 중 후자가 보다 타당하다.

성 경: [느11:3]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본절은 솔선 수범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았던 지도자들을 언급하는 4절 이하 내용의 서론의 형식을 띠면서 여전히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그밖의 사람들을 대조시키고 있다(Fensham, Myers).

(주); 이스라엘 - 평민 혹은 서민들을 가리킨다.

(주); 느디님 사람 - 7:46 주석을 참조하라.

(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 - 7:57 주석을 참조하라.

(주); 도(*, 메디나) -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단어이다.

(주); 두목들(*, 로쉬) - 이 단어는 '두령'(수 24:1) 혹은 '족장'(대상 23:8;대하1:2)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한 가문의 지도자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1절의 '두목'(사르)과 본질적 의미상 동일하다(1절).

성 경: [느11:4]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여기서부터 9절까지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평민 지도자들의 명단이 나오고 있다.

(주);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 명 -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백성들 중에는 여기의 두 지파 이외의 출신도 분명히 있었다. 즉,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출신 및 심지어는 아셀 지파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대상 9:3;눅 2:36). 다만 그 당시 유다 지파와 베냐민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구성하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이처럼 두 지파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주); 베레스 자손 아다야 - '베레스'는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았던 쌍동이 형제 중의 형이었다(창 38:24-30). 그의 후손 중에는 다윗과 그리스도가 포함된다(마 1:3,6,16).이 '베레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균열'이다. 한편, '아다야'은 대상 9:4에서 '우대'로 나와 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장식하셨다'이다.

(주); 웃시야의 아들 - 여기의 '아들'(*,벤)은 (1)흔히 '자손'의 의미로도 쓰이며, (2)대상 9:4에서는 '우대'가 '암미훗의 아들'로 묘사된다는 점 등으로 볼때, '후손'의 의미이다. 이는 '스가랴의 손자', '아마랴의 증손'등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 경: [느11:5]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여기서는 유다 지파 자손 중의 또 한사람의 지도자가 언급된다.

(주); 마아세야 - 대상 9:5에서는 '아사야'로 되어 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일'이다.

(주); 바룩의 아들 - 여기의 '아들'도 '자손'의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

(주); 골호세 - 3장15절에서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자(者)의 아버지로 묘사되는 '골호세'와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 이름의 뜻은 '모든 선견자'이다.

(주); 실로 사람 - 여기의 '실로 사람'은 유다의 막내 아들이었던 '셀라'의 후예들을 가리킨다.

성 경: [느11:6]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본절은 내용상으로 볼 때 베레스 가문 출신의 지도자에 대해 언급하는 4절과 연결된다.

(주); 용사이었느니라 - '용사'(*, 아느쉐이 하일)에서 '하일'은 (1) 군사적 능력, (2) 재정적 능력 모두를 뜻하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방비를 위한 인구 정책에 대해서 다루는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전자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성 경: [느11:7]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앞 부분(4-6절)에서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들의 시조(始祖)가 누구인지를 밝혔으나, 여기서는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의 시조를 언급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의 경우 사사 시대에 다른 지파들에 의해서 몰살됐었던 관계로 그 당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조를 잘 몰랐을지도 모른다(Fensham).

(주); 살루 - '무게를 단'의 의미이다(대상 9:7).

성 경: [느11:8]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주); 구백 이십 팔 명 - 여기와의 평행 구절인 대상 9:9에 '구백 오십 육 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결코 중요한 문제는되지 못한다. 사본상의 오류이거나 혹은 역대기에서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들이 포함되었을 수도있다. 아무튼 이 숫자는 '갑배'와 '살래'처럼 '살루'(7절)의 지휘 아래 있었던 용사들의 합계로 짐작된다.

성 경: [느11:9]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두목들]

(주); 요엘이 그 감독이 되었고 - '요엘'이 예루살렘 방비의 총책임자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물론 그는 느헤미야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혹은 이 문구를 '요엘'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직분자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Rawlinson, 왕하 25:19).

(주); 유다는 버금이 되어...다스렸느니라 - 본문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1)개역 성경이나 KJV, RSV등에서 처럼, 유다가 서열상 요엘 다음가는 행정 책임자로서 예루살렘을 다스렸다고 보는 견해, (2) NIV에서처럼 유다가 예루살렘의 '두 번째 구역'(the Second District of the city)의 책임자였음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1)의 견해를 더 지지하고 있다(Edwin Yamauchi, Kedner, Schultz). (2)의 견해를 취할 경우, '두 번째 구역'이란 성전 서쪽 지역으로 확장된 지경를 가리키는 듯하다. 마자르(B.Mazar)나 아비갓(N. Avigasd)에 의하면, B.C. 8세기 후반 무렵에 예루살렘 성이 그 방향으로 확충되었다고 한다.

성 경: [느11:10]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대상 9:10-13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역대상의 기록을 보다더 정확한 것으로 보고, 그것에 준해서 본절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리라 생각한다(Rawlinson). 본문에는 필사자의 오류가 어느 정도 나타나고있는 듯하다.

(주); 요야립의 아들 여다야와 야긴 - 이것은 역대상의 기록에 따라 '여다야와 여호야립과 야긴'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다 다윗 시대의 24 반열 중 세 반열의 두목들이다(대상 24:7,17). 따라서 여기서는 제사장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이 언급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떤 명단을 나열하면서 개인 이름이 아닌가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는 꽤 혼하다(10:2).

성 경: [느11:11]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하나님의 전을 맡은 자 스라야 - 여기의 '스라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에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다(대상 6:14). 바로 이 사람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가문 이름을 '스라야 가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10:2).

(주); 힐기야의 아들 - 대상 6:13,14에 따르면, '스라야'는 '힐기야'의 손자이지 아들이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벤'(*)의 번역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주); 술람의 손자 - 여기의 '손자'도 다만 '자손'으로 번역해야 한다.

(주); 사독의 증손 - 이것도 '사독의자손'으로 번역해야 한다. 한편, '사독'은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이었다(삼하 20:25;왕상 1:32-45;2:35).

(주); 므라욧의 현손 - '현손'도 다만 '자손'을 뜻한다.

성 경: [느11:12]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전에서 일하는 그 형제 - 이것은 대제사장들을 도와서 성전 봉사를 했던 22반차(12:1-7)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원래는 24반차로 나뉘었으나 느헤미야 당시에는 22반차로 나뉘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가문명(家門名)을 갖고있었다(12:1-7).

(주); 아다야 - 이러한 가문명을 소유했던 제사장의 무리들은 가르치는 일에 주로 종사했었던 것 같다. 반면 앞에 언급됐던 스라야 가문은 성전 봉사를 주임무로 했었다(Kidner).

성 경: [느11:13]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그 형제의 족장된 자 -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던(12절) 제사장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1,3절).

(주); 아맛새 - 이 '아맛새'라는 가문명을 갖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을 경비하는 일에 종사하였다(Kidner).

성 경: [느11:14]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그 형제의 큰 용사니 - 이것은 앞의 '아맛새'라는 이름을 가진 제사장 가문이 어떤 일에 종사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의 '큰용사'(*, 기보르 하일)는 (1) 하나님의 전에서의 봉사와 관련된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Rawlinson).(2) 군사적 능력을 소유하고있는 사람(Kidner)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아맛새' 가문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의 방비에 종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문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13절 주석 참조) (2)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주); 삽디엘 - '하나님의 선물'의 뜻이다.

성 경: [느11:15]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여기서부터 18절까지에서는 레위 사람 중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세 가문에 대해 소개한다.

(주); 스마야 - 레위의 막내 아들인 므라리의 후손이었다(창 46:11;대상 9:14).'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의 뜻이다.

(주); 핫숩 - 3:11을 참조하라.

성 경: [느11:16]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삽브대 - 에스라를 도와서 개혁 운동을 추진했던 '삽브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많다(8:7,8;스10:15). 그 이름의 의미는 '휴식을 주는' 이다.

(주); 요사밧 - 추측컨대 에스라를 도와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해준 '요사밧'과 동일인 인듯하다(8:7).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판단하셨다'이다.

(주); 하나님의 전 바깥 일 - 이것은 레위 사람들의 전형적 직무인 성전 제사와 관계된 일 이외의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1) 성전세 및 십일조를 거두는 일(10:37-39), (2)백성을 다스리는 일(대상 26:29), (3) 성전의 유지 보수와 관계된 일(Rudolph) 등이 포함된다.

성 경: [느11:17]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본절에는 레위 사람의 또다른 가문이 언급된다. '아삽 자손'의 레위 사람으로 분류된 것은 다소 특이하다. 왜냐하면 본서와 에스라서의 다른 곳에서는 항상 성전 제사에 관여하는 레위인들을 '레위 사람'으로, 아삽의 자손들은 '노래하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7:44;스 2:41). 그러나 '노래하는 자들', 즉 아삽 자손도 레위 지파에 속했다는 점에서, 이와같은 분류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한 사람이다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선물'이다.

(주);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 - 여기의 '말씀'(*, 테힐라)은 당연히 '찬송' 혹은 '찬양'으로 번역되어야 한다(출 15:11;신 10:21;시 22:3). 한편, '인도하는'(*, 예호데)은 '인정하다' 혹은 '감사하다' 그리고 '찬송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야다'(*)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찬송하게 하다'의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기도할때에 감사의 찬양을 부르게 하는 지도자'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맛다냐'라는 아삽 자손이 오늘날로 치면 성가대의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말해준다.

(주); 형제 중에 박부갸가 버금이 되었으며 - 찬양하는 일에 있어서 '박부갸'가 맛다냐에 이어 두 번째의 지도자였다는 뜻이다. 한편, '박부갸'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던지는 자'의 의미로 추정된다(J. M. Ward).

(주); 여두둔의 증손 - 이는 '여두둔의 자손'으로 번역해야 한다(15절). '여두둔'은 다윗 왕때에 성막에서 찬양과 연주를 맡아하던 인물이다(대상 16:41,42;대하 35:15).

(주); 삼무아의 아들 압다 - '압다'의 의미는 '하나님의 종'이다.

성 경: [느11:18]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예루살렘에 거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거룩한성 - 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레위 사람의 도합이 이백 팔십 사 명 - 이 같은 레위 사람들의 숫자는 다른 지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적다. 이처럼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적게 살았던 것은 그들의 봉사 직무가 힘에 겨웠던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느11:19]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기타 봉사자들]

(주); 성 문지기는 악굽과 달몬 - 이 '성문지기'는 문자적으로 다만 '문지기'일 뿐이다. 한편, '악굽'과 '달몬' 모두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사람들의 일파인 성전 문지기 가문들의 명단에서 발견된다(스 2:42). 따라서 여기의 '성 문지기'는 오히려 '성전 문지기' 혹은 그냥 '문지기'로 번역해야 한다.

(주); 그 형제 - 여기에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문지기 가문들의 대부분이 포함될 것이다(스 2:42).

성 경: [느11:20]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기타 봉사자들]

본절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칭송하기 위한 느헤미야의 삽입 구절이다. 즉, 여기서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이 일신의 평안을 위해 예루살렘을 마다하고 각 지방에 정착했었다는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본 전후 문맥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거주자들의 헌신적 자세를 높이 사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느11:21]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기타 봉사자들]

(주);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하니 - '느디님 사람'은 원래 이방 혈통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이스라엘에 포로로 잡혀온 후 개종하여 이스라엘 총회에 가입되었다(스 2:43). '오벨'은 성전이 세워져 있던 구릉 지대가 뻗쳐져 있는 예루살렘의 동남부였다(3:26).

(주); 시하와 기스바가 그 두목이 되었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시하와 기스바가 느디님 사람들의 위에 있었다' 이다 '시하'라는 이름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느디님 사람들의 가문명 중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기스바'라는 이름은 거기서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본절의 두 이름을 가문명으로 보다는 개인의 이름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성 경: [느11:22,23]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기타 봉사자들]

17절에서는 아삽 자손의 가문명만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그 가문의 우두머리가 느헤미야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진술한다.

(주); 웃시 - '힘센'의 의미이다.

(주);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 - 여기에는 느디님 사람들에 대한 감독권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Schultz).

(주); 하나님의 전(殿) 일 - 문맥상 찬양을 인도하는 직무를 가리킨다.

(주); 왕의 명대로....양식을 정하여 주는 것 - 여기의 '왕'은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던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을 가리킨다. 이처럼 아닥사스다왕이 레위 사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그들에게 '양식' 곧 '봉급'을 주게 했던 것은, 성전 제사가 원활히 드려져야만 왕 자신과 왕자들을 위한 기도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질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다(스 6:10). 이러한 배려는 레위 사람들이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신들에게 부여된 본연의 직무에 힘쓸 수 있게끔 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이다(10:39).

성 경: [느11:24]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기타 봉사자들]

본절은 23절에서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의 레위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중요한 원인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본절은, 헌신적 자세로써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마당에 전혀 성격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것이다.

(주); 유다의 아들 세라 -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두 아들 곧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었다(창 38:11-30).

(주); 브다히야는 왕의 수하에서 백성의 일을 다스렸느니라 - 문자적으로 '브다히야는 백성들의 모든 일과 관련해서 왕 곁에 있었다'이다. 따라서 '브다히야'는 마치 에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서서 아닥사스다 왕에 대한 조언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Fensham). 그래서 NIV는 본 문구를 '브다히야는 백성들과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있어서의 중개자였다'(...was the king's agent in all affairsrelating to the people)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페르시아 황실에 '브다히야'와 같은 대변인이 있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또한 레위 사람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명령을 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느11:25]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본서의 저자는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여러 계층 사람들의 지도자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마치고, 여기서 부터는 당시 백성들이 어떤 곳에서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주); 향리와 들 - 엄밀히 말하여 '들이 딸린 향리'로 번역된다. 여기서 '향리'(*, 하체르)는 '울로 둘러싸인 구내'(區內)를 의미한다(Wigram). 그리고 '들'(*,사데)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경작지를 뜻한다(창 2:5;24:63;수 8:24).

(주); 유다 자손 -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이들은 팔레스틴 땅의 남부 지역을 기업으로 할당받았었다. 그래서 30절까지 언급되는 이 유다 자손의 거주지도 모두 남부에 위치한 성읍들이다.

(주); 기럇 아바 - 히브리 원문대로 한다면 '기럇 아르바'로서 헤브론(수 14:15)과 동일한 지명이다. 이 성읍은 예루살렘 남방으로 30여Km 지점에 위치하였고 아브라함을 위시한 여러 족장들이 묻힌 유서깊은 곳이다.

(주); 그 촌(*, 베노테이하) - 중심되는 성읍의 주변에 위치한 독립 마을을 가리킨다(3:12).

(주); 디본 - 수 15:22의 '디모나'이다.

(주); 여갑스엘 - 수 15:21의 '갑스엘'이다.

(주); 그 동네(*, 하체레이하) - 본절 초두의 '향리'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앞의 '촌'보다는 휠씬 작은 '정착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Fensham).

성 경: [느11:26]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예수아 - 수 15:26의 '세마'로 추정된다(Schultz).

(주); 몰라다 - 수 15:26에 언급되고 있는 유다의 남부 성읍이다.

(주); 벧벨렛 - 수 15:27을 참조하라.

성 경: [느11:27]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하살수알과 브엘세바 - '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이며 '하살수알'은 여호수아에서도 '브엘세바'와 함께 언급되는(수 15:28) 것으로 보아, '브엘세바'와 인근한 성읍이었을 것이다(Rawlinson).

성 경: [느11:28]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시글락 - 원래는 시므온 지파에게 분배된 성읍이었으나(수 19:1,5), 그들이 탈환치 못함으로써 사울 시대까지 블레셋 족속의 차지가 되었었다. 그러다가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왕에게 망명을 했던 다윗이 그 왕으로부터 빌리면서 계속 이스라엘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삼상 27:6). 그 위치는 헤브론 즉, 기럇 아바(25절)에서 남동쪽으로 약 45Km 지점이다.

(주); 므고나 - 수 15:31의 '맛만나'와 동일한 듯하다(Schultz).

성 경: [느11:29]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에느림몬 - '림몬의 샘'의 뜻이다. 바로 이 같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읍은 수 15:32의 '아인'과 '림몬'을 합한 것인 듯하다(Rawlinson).

(주); 소라 - 원래 유다 지파에게 분배됐었으나 한 때는 단 지파가 거주했었다(수 19:40,41). 단 지파였던 삼손의 출생지도 이곳이다(삿 13:24,25).

(주); 야르뭇 - 가나안 족의 한 왕인 비람 왕의 성읍이었다(수 10:3). 여호수아는 바로 이곳에서 전투를 벌여 비람 왕을 죽였다(수 10:3-27). '높은 곳'의 뜻이다.

성 경: [느11:30]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사노아와 아둘람 - '사노아'는 수 15:34에서 언급된다. 한편, '아둘람'은 한 때 자체내에 왕이 있을 정도로 큰 성읍이었다 (수 12:15). 그 후에 르호보암 왕은 이곳을 요새화하여 유다 땅의 방비를 강화하기도 하였다(대하 11:5,7).

(주); 라기스 - 여호수아가 '야비아'라는 가나안 족속의 한 왕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수 10:3,3`1,32). 그 '야비아'왕의 성읍이 바로 이 '라기스'였었다. 또한 이곳은 르호보암 왕에 의 하여 요새화됐던 곳이었던 관계로 후대의 앗수왕 산헤립은 자신의 전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격 목표로 삼았었다(대하 32:9).

(주); 아세가 - 이곳도 르호보암 왕에 의해서 요새화된 적이 있었다(대하 11:9).

(주); 브엘세바에서부터 흰놈의 골짜기까지 장막을 쳤으며 - 느헤미야 당시 유다 자손들이 거주했던 지역적 범위를 말해주는 문구이다.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역사상 그 영토의 최남단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었다(삼상 3:20).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는 일반적으로 와디 엘라바비로 간주되며, 예루살렘의 서쪽 성벽 밑을 남북으로 가로 질러가다가 예루살렘 남동쪽의 기드론 시내 쪽으로 구부러져 만난다(2:13). 이 골짜기는 베냐민 지파의 땅과 유다 지파의 땅을 나누는 경계로서 인식되었었다(수 15:8;18:16). 바로 이 같은 경계에 따라 '힌놈의 골짜기' 북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분류된 바 있다(수 18:28). 한편, '장막을 쳤으며'(*, 하나)는 군대가 상대편을 공격할 거점으로 삼기 위하여 어느 지역에 일시 머무는 것을 가리킬 때사용되는 군사적 용어이다(Williamson, 민 1:52;삼상 4:1;삼하 17:26;왕상 16:15). 그러나 포로 후기에 가서는 다만 일시 머무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의미가 변한듯 하다(스 8:15). 그럴지라도 여기서 느헤미야가 바로 이 갈은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1) 당시 시골에 정착한 사람들의 일부도 그 두목들처럼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야 했던 상황을 암시하며(1절), (2)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주가 빈번했었음을 암시하기 위한(Myers)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느11:31]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베냐민 자손 - 이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팔레스틴에 들어온 후에 유다 지파가 분배 받았던 기업의 바로 북부 지역을 그 기업으로 받았다. 즉, 예루살렘부터 그 북쪽이 그들의 기업이었다(30절 주석 참조).

(주); 게바 - 예루살렘 북쪽 약 25.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유다의 아사왕이 북국 이스라엘이 라마에 요새를 세우기 위해 가져다 놓은 재료를 빼앗아서 요새를 세운 곳이기도 하였다(왕상 15:22). '반석'의 의미이다.

(주); 믹마스 - 게바 동북쪽 약 2.4km 지점이다. 사울의 군대와 불레셋 군대 간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삼상 13:2,5-16;14:1-18). '감추어진'의 뜻이다.

(주); 아야와 벧엘 - '아야'는 사 10:28,29의 언급을 통해 볼 때, 앞의 '믹마스'와 인근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벧엘'은 '믹마스' 서북쪽 약 6.7km 지점이며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창 28:10-19).

성 경: [느11:32]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아나돗 - 게바와 예루살렘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이기도 하다(렘 1:1). '대답들'이란 뜻의 지명이다.

(주); 놉 - 예루살렘과 아나돗의 거의 중간 지점이며, 그곳에서 예루살렘이 보일 정도로 예루살렘과 가까이 위치했었다(사 10:32). 실로가 블레셋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됨으로써, 이곳은 한때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었다(삼상 21:1). '열매'의 의미이다.

(주); 아나냐 -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함께 언급되고 있는 성읍들과 인접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호와께서 덮으셨다'의 의미이다.

성 경: [느11:33]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하솔 - 그 위치는 잘 알려겨 있지 않다. '마을'의 의미이다.

(주); 라마 - 예루살렘 북쪽 약 9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사무엘의 고향으로서 그가 사사 및 선지자로서 활동했던 곳이다(삼상 7:15, 17). '높은 곳'의 의미이다.

(주); 깃다임 - 베냐민 지파의 브에롯 사람들이 도망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다(삼하4:3). 그 지명의 의미는 '이증 포도즙 틀'이다.

성 경: [느11:34]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하딧 - 예루살렘 북서쪽 약 4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스 2:33). '날카로운'의 의미이다.

(주); 스보임 - 믹마스 동편의 저지대에 위치했었던 것 같다(Rawlinson, 삼상 13:18). '무늬있는 새들'의 뜻이다.

(주); 느발랏 - 어디에 위치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리석은'의 의미이다.

성 경: [느11:35]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주); 로드 - 예루살렘 북서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하덧'으로부터는 남서 서쪽로 6km 정도 떨어졌었다(스 2:33).

(주); 오노와 공장 골짜기 - 예루살렘 북서쪽 약 5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베냐민 지파의 땅 중 가장 외딴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그곳으로 유인하여 거기서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었다(6:2). '강한'의 의미이다. 한편, '공장 골짜기'는 개역성경을 따를 경우 마치 '오노'와 별개의 지명인듯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는 앞의 '오노'와 '공장 골짜기' 사이에 '그리고' 혹은'...와'의 뜻을 갖는 접속사 '와우'(*)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오노'와 '공장 골짜기'는 동격(同格)인 셈이다(KJV, LB, RSV).

성 경: [느11:36]

주제1: [인구 재배치 사업]

주제2: [향촌(鄕村)에 거한 자들]

본절은 레위 사람들의 일부가 느헤미야 시대에 유다 땅에서 베냐민 땅으로 이주했었음을 말해준다. 레위 사람들의 이 같은 이주는 십일조의 원활한 수납(收納)을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Fensham, 10:39).

성 경: [느12:1]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느헤미야는 인구 재정착 작업을 마친후 (11장),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한다.

(주);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 - 이들은 바벨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다(스 2:2). 따라서 본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제사장 가문은 모두 최초의 귀환 대열에 속했었다. 한편,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 제사장 목록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차이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세 가지 제사장 계보 명단 비교'를 참조하라.

(주); 스라야 - 대상 9:11에는 '아사랴'로 나온다.

(주); 예레미야 - 이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주); 에스라 -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자들은 이 '에스라'가 10:2의 '아사랴'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한다(Kidner).

성 경: [느12:2]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아마랴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이다.

(주); 말룩 - 14절의 '말루기'와 동일한 듯하다. '통치하는'의 뜻이다.

(주); 핫두스 - '대적자'의 뜻이다.

성 경: [느12:3]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스가랴 - 14절 및 10:4과 같이 '스바냐'로 고쳐야 할 것이다(Rawlinson).

(주); 르훔(*) - '하림'(*)의 오류로 추정된다(Rawlinson, Kidner, 10:5;스2:39).

(주); 므레못(*) - 15절의 '므라욧'(*)의 바른 이름이다. '높은 곳들'의 의미이다.

성 경: [느12:4]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잇도(*) - 10:5의 '오바댜'(*)의 바른 이름이다. 보다 후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12-21절)에도 '잇도'(16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오바댜'는 필사자의 잘못인것 같다(Rawlinson).

(주); 긴느도이(*) - '긴느돈'(*)의 오류인 듯하다(Rawlinson, 16절;10:6).

(주); 아비야 -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바로 이 제사장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다(눅 1:5).

성 경: [느12:5]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미야민 - '운이 좋은'의 뜻이다. 마아댜(*) - 이것은 17절의 '모아댜'(*)와 동일한 듯하다(10:8). '여호와의 장식품'의 뜻이다.

(주); 빌가 - 10:8의 '빌개'와 동일하다.

성 경: [느12:6]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스마야 - 18절과 10:8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주); 요야립 - 이 '요야립' 앞에만 '그리고'의 의미를 갖는 접속사 '와우'(*)가 있다. 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스마야'까지와 여기의 '요야립'부터를 확연히 구분하려고 시도한다(19절). 추측컨대 이는 '요야립' 가문부터,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언약에 인을 치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다(Rawlinson). 이와 같은 주장은, '요야립'이하의 가문명들이 10장의 인친 가문의 명단 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한편, '요야립'은 '여호와께서 아심'의 뜻이다.

(주); 여다야 - '여다야'라고 불리워지던 대제사장 가문의 일족(一族)이다(스 2:36). '여호와께서 알고 계시다'의 의미이다.

성 경: [느12:7]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살루 - 20절의 '살래'와 동일한 듯하다. '무게를 단'의 의미이다.

(주); 아목 - 20절에서도 다시 언급된다. '깊은'의 의미이다.

(주); 힐기야 - '여호와의 분깃'의 뜻이다.

(주); 여다야 - 6절의 '여다야'처럼 대제사장 가문 출신일 것이다. 한편, 다윗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24반차로 구분되어 번갈아가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된 바 있으나(대상 24:1-19), 1-7절에 열거된 제사장들의 수효는 22명이다. 그렇다고 느헤미야 시대에와서 22반차로 의도적으로 재구성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1-7절에서는 24반차 중 2개의 명단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성 경: [느12:8, 9]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본절의 명단들은 가계명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귀환 당시에는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밖에 없었지만(스 2:40) (1)약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 사람들의 인구가 증가하였고, (2)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바벨론에서 데려왔기(스 8:15-20) 때문에 이처럼 가문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성 경: [느12:10]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본절과 다음 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의 계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 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대제사장 족보의 연장이다. 물론 포로 기간, 즉 B.C. 586년부터 B.C. 538년까지는 대제사장이 없었다.

(주); 예수아 -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인물이다(스 2:2). 그는 B.C. 520년 경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참여했음이 분명하다(스 5:2). 그러나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살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스 8:15-18).

(주); 요야김 -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했다(12, 26절).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것이다'의 뜻이다.

(주); 엘리아십 - 이 사람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해인 B.C.458년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 되어 있었다(스 10:6).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내통하는 등의 이적(利敵) 행위를 하기도 했다(13:4, 5, 28).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이다'이다.

(주); 요야다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후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됐었다(13;2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이다. 한편,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월절 기략'(thePaschal Chronicle)이라는 유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재직 기간은 삼십 육 년으로 되어있다(Rawlinson).

성 경: [느12:11]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귀환한 제사장과 레위인들]

(주); 요나단 - 22, 23절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하난'이 페르시아 총독 바고아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동생 예수아를 살해하였던 인물이라고 말한다(Rawlinson, Fensham). 또한 '요하난'은 애굽에서 발견된 B.C. 410년 경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그 이름이 언급된다(Fensham).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총애하심'이다.

(주); 얏두아 -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얏두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당시의 대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입성이 B.C.332년이었으므로, 본서가 B.C.5세기 후반 (421-400년 경)에 기록됐었다는 입장은 손상을 입게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 11절의 족보가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해 가필(加筆)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성 경: [느12:12]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여기서부터 21절까지에서는 제사장 21반열의 이름 각각과 그 각각의 우두머리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 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성전 제사가 엄정히 드려졌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Rawlinson). 사실 요야김이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기는, 성전이 재건된(B.C. 516년) 직후였으므로 당연히 성전 제사가 철저히 드려졌을 것이다.

(주); 요야김 때 - 에스라나 느혜미야가 귀환하기 얼마 전의 시기를 가리킬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아의 대제사장 재직이 B.C. 490년까지였다면(B.T. Dahlbaerg). 요야김은 에스라의 도착(B. C. 458년)직전까지 대제사장에 있었을 것이다.

(주); 스라야 족속 - 1절의 '스라야'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주); 므라야 - '모반'의 뜻이다.

(주); 예레미야 족속 - 알려진 바가 없다.

(주); 하나냐 -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2:13]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에스라 족속 - 1절의 '에스라'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주);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주); 아마랴 족속 - 2절 주석 참조하라.

(주); 여호하난 -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의 뜻이다.

성 경: [느12:14]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말루기 족속 - 2절의 '말룩'과 동일하다.

(주); 요나단 -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이다.

(주); 스바냐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요셉 - '그가 더할 것이다'의 뜻이다.

성 경: [느12:15]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하림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드나 - '즐거움'의 뜻이다.

(주); 므라욧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헬개 - '할당된'의 뜻이다.

성 경: [느12:16]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잇도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스가랴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뜻이다.

(주); 긴느돈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느12:17]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아비야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시그리 - '기억할만한'의 뜻이다.

(주);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 - 이 두 이름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아마 필사자의 오류로 '미냐민 족속'의 우두머리 이름이 누락됐을 것이다(5절). 한편 '모아댜 족속'에 대해서는 5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빌대 - '구출된'의 뜻이다.

성 경: [느12:18]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빌가 족속 - 5절의 '빌가'와 동일하다.

(주); 삼무아 - '소문' 혹은 '풍문'의 뜻이다.

(주); 스마야 족속 - 6절을 참조하라.

(주); 여호나단 -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이다.

성 경: [느12:19]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요야립 족속 - 본 제사장 가문 명단중 유일하게 이 앞에만 '그리고'의 뜻인 접속사 '와우'(*)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맛드내 - '자유로운'의 뜻이다.

(주); 여다야 족속 - 6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웃시 - '힘센'의 뜻이다.

성 경: [느12:20]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살래 족속 - 7절의 '살루'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주); 갈래 -'경솔한'의 뜻이다.

(주); 아목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에벨 - '건너편'의 뜻이다.

성 경: [느12:21]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의 족장 된 자들]

(주); 힐기야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하사뱌 -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주); 여다야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느다넬 -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이다.

성 경: [느12:22]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레위인이 족장 된 자들]

본절과 23절도 10, 11절처럼 후대의 삽입인 듯하다.

(주); 엘리아십...요야다...요하난...얏두아 - 10, 11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바사 왕 다리오 -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페르시아 역사상 세 명 등장한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다리오는 유다의 대제사장 '얏두아'와 동시대 사람인 다리오 3세(B.C. 335-331년)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성 경: [느12:23]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레위인이 족장 된 자들]

(주); 역대 지략 - 여러 가지 명단과 기록을담은 공식적인 성전 연대기로 추측된다(EdwinYamauchi). 한편, 성경에 언급된 자료나 문서들에 관해서는 대하 35:26, 27의 도표를 참조하라. 요하난은 약B.C.400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도 바로 이시대에 활동했었다.

성 경: [느12:24]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레위인이 족장 된 자들]

본절과 다음 절의 레위 사람들의 명단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주); 하사뱌 - 포로 귀환 후 생긴 레위 사람의 가문일 것이다(8, 21절).

(주); 세레뱌 - '하사뱌'와 마찬가지이다.

(주);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 - '아들'(*, 벤)은 '빈누'(*)의 오류임이 분명하다(Kidner, 8절).

(주); 그 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 레위 성가대가 교송(交頌) 형식으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한다(9절;스 3:11). 즉, 두 파트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며 찬양하였던 셈이다.

(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찬양하며 감사하고 -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이 신정 왕국 이라엘의 예배 체계를 신실하게 확립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용어인 듯하다(대하 8:14). 다윗이 노래하는 자들의 반차를 정한 것은 대상 25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성 경: [느12:25]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레위인이 족장 된 자들]

'노래하는 자'(11:17)들이 '문지기기'의 역활도 병행했었다는 추측은 불필요한 듯하다(Fensham). 따라서 우리는 '오바댜' 까지의 세 사람을 24절의 후미에 붙여야 할 것이다(Kidner). 그렇게 할 경우, '맛다냐'와 '박부갸' 사이에만 유일하게 있는 접속사 '와우'(*)를 '오바댜'와 '므술람' 사이로 옮기면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사이의 구별이 뚜렸 해진다. 6절의 '요야립'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면, 이 같은 구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 - '므술람'(*)은 대상 9:17절 및 스 2:42 등을 볼때, '살룸'(*)의 오류임이 분명하다(Schultz).

(주); 문 안의 곳간 - '문지기'들이 지켰던 '곳간'은 성전에 부속되어 있던 '곳간'들을 가리킨다(Schults, 10:38, 39).

성 경: [느12:26]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레위인이 족장 된 자들]

(주); 모든 사람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 - '요사닥'은 바벨론에 붙들려간 '여호사닥'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며(대상 6:15), '예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대제사장(스2:2)이다.

(주); 요야김과...느헤미야와...에스라때 - 이것은 여기의 세 사람이 모두 동시대(同時代)의 사람들임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의 '요야김'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B.C.458년 이전에 죽었을 것이다. 즉,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야김'의 아들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의 직책에 올라 있었다(스 10:6).

성 경: [느12:27]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바는,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 성곽 공사가 준공된 직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udolph), (2)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Fensham, Keil, Myers), (3)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직후인 B.C.432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awlinson) 등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스 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주);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落成)되니. - 6:15에서 언급되고 있다.

(주); 각처에서 레위 사람을 찾아 -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11:36의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다(대하 23:2).

(주);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봉헌식을 행하려 -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이다(대하 5:12, 13). '제금'(*, 메칠타임)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하다.

(주); 비파(*, 네벨) - 요세푸스는 이 악기의 현(絃)이 열 둘임을 중언하고 있다(Ant.VLL, xii, 3).

(주); 수금(*, 키누르) - 현이 셋 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열 둘 되는 것까지 다양했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 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앞의 비파 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성 경: [느12:28]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예루살렘 사방 들 - 여기의'들'(*, 키카르)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들'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 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Myers).

(주); 느도바 사람의 동네 -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다(Fensham, schults).

성 경: [느12:29]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벧길갈 -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

(주); 게바 - 11:31 주석을 참조하라.

(주); 아스마뛕 들 -예루살렘 북동쪽 약 8km지점 베냐민 지경(스 2:24)을 말한다.

(주); 노래하는 자들은...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 '노래하는 자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다(Rawlinson). 아무튼 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절과 본절의 전반부 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성 경: [느12:30]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 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는 내용이다. '정결케 하다'의 뜻인 히브리어 '타헤르'(*)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 하여사용된다. 특히 부정했던 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레 22:4-7).

(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하고 -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 속죄제를 드리는것 등을 가리킨다.

(주); 백성...정결케 하니라 -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출 19:10, 14), 목욕 및 물을 뿌림(민 8:7;19:12) 등을 통해 정결케했을 것이다.

(주); 성문과 성 - 이것들 또한 '정결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Myers, 신 23:14). 그것들을 정결케 하는 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레 14:49-53).

성 경: [느12:31]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서쪽 성곽의 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Rawlinson). 이같이 볼 수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 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이다(Schultz).

(주);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 레위 사람들 중 아삽 자손들을 가리킨다(27-29절;11:17).

(주);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 이러한 독특한 의식적(儀式的)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되었음을 감사 및 고백하는 데(27절)그 목적이 있었다(Kidner, 시 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주);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糞門)을 향하여 가게 하니 -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서론의 '성벽모형도' 참조). 이 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고(36절).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다.

성 경: [느12:32]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 - '호세야'가 '유다 방백'의 선두에 섰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Schultz), 한편, 여기의 유다 방백'은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이다.

성 경: [느12:33]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 이들을 방백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Schultz),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Rawlinson).

성 경: [느12:34]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유다와 베냐민 - 이것은 평민들의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스마야와 예레미야 - 두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다(12, 18절).

성 경: [느12:35]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뤼지던 악기였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 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다(삼하 6:15;대하 7:6;29:26-28). 한편,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 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케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하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 '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 '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다(Rawlinson, Myers, Williamson).

(주);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지파의 아삽 자손이었다(11:17).

(주); 아삽의 육 대 손 스가랴 -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다(대상 16:4-7;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육 대 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다.

성 경: [느12:36]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그 형제 -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주); 아사렐 -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뜻이다.

(주); 밀랄래 - '말이 많은'의 의미이다.

(주); 느다넬 -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이다.

(주); 하나니 - '은혜로움'의 뜻이다.

(주); 다윗의 악기 - 레위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킨다(27절;대상 15:16, 19-21).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를 '다윗의 악기'라고 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다(대상 15:16).

(주);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준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8:1-12).

성 경: [느12:37]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음을 전제로 한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 '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성벽에서 일단 내려왔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주);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 이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다. 바로 이 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Schultz).

(주); 다윗의 궁 윗 길 - 여기의 '길'(*, 호마)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호마'는 '성벽'의 뜻이 있을 뿐이다(출 14:22;신 3:5;렘 1:18).

(주); 동향(東向)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 이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 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수문이 느헤미야 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1) 느헤미야가 포로 이전 시대의 수문과는 별도의 수문을 만들었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3장에 나오지 않으며 또 3:26의 수문과 본문의 수문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2) 에스라 일행이 새로 재건된 성벽을 벗어나 그 바깥쪽으로 돌았으리라는 견해. 하지만 에스라 일행은 특별한 경우만 성벽 안쪽으로 돈 것을 제외하면 줄곧 성벽 위로 돌았음에 분명하다. (3) 본문의 '수문'을 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 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 여러 측면에서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Will-iamson).

성 경: [느12:38]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저희들 마주 진행하는데 - 여기의 '마주'(*, 레모올)는 '반대로'의 의미이다(NIV). 따라서 이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는(36절)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측으로 돈 데 반해, 또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킨다.

(주);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 비록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은 '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이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사이에는 '경유하여'(*, 메알)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한다. '성 넓은 곳'에 대해서는 3:8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느12:39]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에브라임 문 -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와 '함메아 망대 '사이의 '문'이다.

(주); 옛 문 - 3:6절 주석을 참조하라.

(주); 어문 - 3:3 주석을 참조하라.

(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양문 - 3:1 주석을 참조하라.

(주); 감옥문 - 이것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 지점에 위치했을 것이다(Rawlinson).

성 경: [느12:40]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본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나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나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 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Fensham). 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주); 민장 -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이다(Rawlinson).

성 경: [느12:41]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본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본절에 언급되는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Rawlinson).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있어야 했을 것이다(12-11절;10:2-8).

(주); 나팔를 잡았고 - 3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느12:42]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마아세야...에셀이 함께 있으며 -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 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하다(Fensham).

(주);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 이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6절). 따라서 이 봉헌식에는 (1) 느헤미야가 인도하던 대열만이 참여하였고, (2) 그래서 악기를 사용하는 레위인들은 없고 다만 '노래하는 자들'만이 있었다는 롤린슨(Rawlinson)의 주장은 결코 타당치 못하다.

(주);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 이 '예스라히야'는 '노래하는 자'와 '악기를 잡은 자' 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다.

성 경: [느12:43]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

(주);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제사'(*, 제바힘)는 주로 감사의 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4:5;29:28;레 3:3;7:20;민 6:17;왕상 8:63).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레 3:11). 그 나머지의 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레 7:29-34),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신 12:17,18).

(주);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가리킨다.

(주); 부녀와 어린아이도 줄거워하였으므로 -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삿 11:40;렘 31:15;49:3;욜 1:8),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 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Rawlinson).

(주);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 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다(스3:13).

성 경: [느12:44]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應食)]

본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다.

(주); 그 날에 -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주);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10:38).

(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 돌려졌었다(민 18:26).

(주); 거제물(擧祭物)과 처음 익은 것 - 10:35-47을 참조하라.

(주); 유다 사람이...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 이것은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연고일 것이다. 한편,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킨다.

성 경: [느12:45]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應食)]

본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말할 나위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 - '섬기는 일'(*, 미쉬메레트)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諸般事)를 가리킨다(민 3:7;대상 23:32;대하 7:6;겔44:8).

(주); 결례(潔禮)의 일 - '결례'(*, 타하라)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킨다(Myers, 대하 30:19;겔 44:26). 자신 뿐만 아니라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대상 23:28).

(주);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좇아 -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뿐만 아니라 앞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이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봉사도 '다윗'과 '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이다.

성 경: [느12:46]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應食)]

본절은 '노래하는 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하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 뜻인 접속사 '키'(*)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이다.

(주); 노래하는 자의 두목 - '두목'(*, 라쉐이)은 복수이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아삽'을 포함한 세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된다(대상 6:33,39,44;15:17). 그 나머지 둘은 '헤만'과 '에단'이었다.

(주); 찬송...감사하는 노래 - '찬송'과 '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 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이다.

성 경: [느12:47]

주제1: [성벽 낙성식]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의 응식(應食)]

본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주);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 - 이것은 곧 포로 귀환 시대 전(全)기간을 가리킨다.

(주); 날마다 쓸 것...그 구별한 것 -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주); 노래하는 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 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자들'과 '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다.

(주); 레위 사람들은...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준 것을 가리킨다(10:38;민 18:26).

성 경: [느13:1]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 축출 운동]

(주); 그 날(*,하욤 하후) - 12:44의 '그날'과 동일한 날로 봄이 무난하겠다. 성벽 봉헌시 뜨겁게 달아 올랐던 감격과 헌신의 마음 자세가 식기 전인 성벽 봉헌 직후에 계속 정화 운동을 전개했을 것이다(Kidner). 특히 12:44부터 본장 3절까지는 3인칭 시점으로 기술된 데 반해 4절 이후부터는 1인칭 시점으로 바뀐다는 점 또한 본절의 '그 날'과 12:44의 '그 날' 의 동일성을 뒷받침해준다.

(주);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 '모세의 책'은 주로 모세 율법, 즉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어 전개되는 정화 운동이 철저히 성경 말씀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주); 암몬 사람...하나님의 회(會)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 이것은 신 23:3의 요약이다. 한편 '하나님의 회'(*,카할 하엘로힘)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표현이다. 즉, 여기의 '카할'은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항상 '여호와'와 함께 사용된 것이다(레 4:13;민 16:3;20:4). 일반적로 '여호와의 회'는 (1) 언약 공동체로서의 백성들의 모임(민 20:4;신 23:1), (2) 성전(聖戰) 수행을 위해 모인 백성들의 집합, 혹은 (3)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제의적(祭儀的) 의미에서의 회중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 23:3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된 이 '하나님의 회'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총회'(카할)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에 분명하다.

성 경: [느13:2]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 축출 운동]

본절은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금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신 23:4,5의 요약이다.

(주); 저희가...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 '암몬'과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해야 했던 이유는, 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적으로 한 뿌리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다(창 19-3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절대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다(신 2:9,19).

(주); 양식과 물 -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두 가지였다(신 2:6,7).

(주); 발람에게...저주하게 하였음이라 - 이것은 모압 왕 발락이 주동이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에 살던 복술가(卜術家)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처럼 행동했던 까닭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까지 격파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군사 행동을 취할까 염려해서 였다(민 22:2,3).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염려는 어처구니없는 기우(杞憂)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신 2:9,19). 이에 따라 그들은 다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는 길만 비켜주고(신 2:27,28), (2) 먹을 양식과 먹을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주면 그만이었다(신 2:6).

(주); 뇌물을 주어(*, 사카르) - '품삯을주고 고용하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다'의 뜻(창 30:28;민 18:31;전 4:9;9:5).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대가로 발람에게 많은 은금(銀金)을 주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2:18;24:13).

(주);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 비록 발람이 모압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마음을 가졌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에 따라 그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4장).

성 경: [느13:3]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 축출 운동]

백성들의 이 같은 즉각적인 반응은, 그들이 칠칠절 절기 이래 계속적으로 에스라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은(8:1,13;9장) 결과였다.

(주); 섞인 무리를...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 여기의 '섞인 무리'(*, 에레브)는 '함께 사귀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아라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함께 있는 사람'의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머물면서 성전 의식에 참여하는 등 이스라엘 사람 행세를 했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Fensham). 이 히브리어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했던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 바 있다(출 12:38). 그러나 거기서는 그들이 아무런 무리없이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반면에 본문의 이방인들은 실제적으로 여호와 신앙에 바로 서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악습을 끌어들여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해칠 위험이 있는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분리케 하였느니라'(*, 얍딜루)는 '구분하다' 혹은 '나누다'의 뜻인 '바달'(*)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강제적으로 이방인들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바달'이라는 동사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두 개체를 각기 위치해야 할 곳으로 완전히 갈라놓는 것을 가리킨다(창 1:14;출 26:33;레 10:10;스 6:21).

(주); 이스라엘 가운에서 - 혹자는 전통적으로 진정한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스라엘 사회내에 받아들여졌으며 또 당시 팔레스틴에 이방인 거주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본문을 '종교적 모임으로부터의' 축출로 이해한다(Barren, Myers, Williamson). 그러나 당시 이방인들로 말미암은 문제의 심각성을 고려하건대, 보다 단호한 조치가 취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Fensham).

성 경: [느13:4]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주); 이전에(*, 리프네이 미제) -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다시 돌아가기 전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6절).

(주); 우리 하나님의 전 - 여기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만이 들어갈 수있는'의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표현은 암몬사람인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주었던 제사장 엘리아십의 조처가 대단히 잘못된 일임을 보여준다.

(주);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 - 본절의 '엘리아십'은 (1) 대제사장 엘리아십(Raw-linson, Schultz, Kidner, Keil). (2) 동명(同名)의 또 다른 제사장(Fensham, Myers,Williamson) 등으로 추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첫째, 대제사장은 성전의 사소한 부분에 대한 감독권까지 갖고 있었으며 둘째, 본절의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다는 사실과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라는 28절의 내용이 잘 부합되며 셋째, 대제사장에게는 다만 '제사장'이라는 직함이 적용되는 경우도 허다하다(대하 24:2;스 2:63)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이 있다.

(주);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 '도비야'는 암몬 출신으로서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주구(走拘)였다(2:10). 그는 비록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여호와 종교의 예배자는 아니었다. 한편, '연락이 있므로'(*, 카로브)는 (장소, 혈연 또는 시간등에 있어서) '매우 가깝다'는 뜻으로서 각별한 친근 관계를 가리킨다(Rawlinson).

성 경: [느13:5]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특별한 밀착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느헤미야의 귀환 전, 곧 오래 전부터였겠지만, 본절과 같은 시혜(施惠)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일시 돌아갔었던 B.C. 433-432년 동안에 이루어졌었다.

(주);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 엘리아십이 여러 개의 곳간을 헐어서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들어 도비야에게 주었음을 뜻한다(Rawlinson).

(주); 그 방은...곳이라(*, 하이우) - 원문상으로는 '그것들은...이다'의 뜻이다. 이처럼 본 동사(*, 하야)의 주어 어미가 3인칭 복수라는 사실은,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준 '한 큰 방'이 여러 개의 작은 방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임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주); 소제물 - 고은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섞어서 만든 일종의 무교병(레 2:1)으로서 상번제와 안식일 제사 그리고 대부분의 희생 제사와 함께 드려졌던 예물이다(민15:3:10).

(주); 유향 -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등의 향품을 동일한 비율로 섞어 증거궤 앞에 놓았던 제물이다(출 30:34).

(주); 기명 - 성전 제사 때에 사용되던 여러 가지 그릇들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최초의 포로 귀환때 바벨론에서 가져온 것들임이 분명하다(스 1:6-11).

(주); 레위 사람...노래하는 자...문지기 - 세 종류의 레위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레위 지파에 속하였지만, 그 직임에 따라 이와같이 세 종류로 분류되었었다(스 2:40-42).

성 경: [느13:6]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주); 그 때에는 - 문자적으로는 '이 모든 동안'이다. 구체적으로 도비야가 엘리아십의 호의에 따라 성전에 속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기간을 말한다.

(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 - B.C. 433년을 가리킨다. 한편, '바벨론왕 아닥사스다'라는 표현은 페르시아 왕들이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전통과 관련이 있다(스 5:13).

(주);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은 (1) 그가 아닥사스다에게 약속했던 기간이 다 됐거나, (2)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의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 '며칠후에'(*, 레케츠 야밈)는 문자적으로 '날들의 끝에'의 뜻이다. 추측컨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다시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을 의미하는 듯하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우리는 느헤미야가 B.C. 433년에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정확히 1년만에 팔레스틴으로 귀환했으리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성 경: [느13:7]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주);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 이처럼 느헤미야가 팔레스틴으로 다시 돌아온 까닭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러 가지 개혁이 완결되지 않았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일시 돌아갔던 것도 분명히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주); 하나님의 전 뜰 - 스룹바벨 성전에는 두 개의 뜰이 있었다(사 62:9;슥 3:7). B.C.4세기 헬라 사가(史家)인 헤카테우스(Hecataeus of Avdera)에 의하면 그 성전의 안뜰의 길이가 500규빗이요 광이 100규빗이었다고 한다(Edwin Yamauchi).

성 경: [느13:8]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주); 내가 심히 근심하여 - 여기의 '근심하여'(*, 야레)는, 산발랏 일당의 군사적공격 가능성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사용했던 단어이다(4:14). 그렇게 본다면, 느헤미야는 도비야가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호의에 따라 성전의 한 방을 차지한 사실을 산발랏 일당의 군사 공격만큼 두려운 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백성의 최고 지도자였던 그는, 도비야라는 이방인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방 문화및 이방 종교의 침투를 심각하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느13:9]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청결 운동]

(주); 그 방을 정결케 하고 - 추측컨대 그 방은 물이나 피를 뿌리는 등의 정결 의식을 통하여(레 14:52) '정결케'되었을 것이다.

성 경: [느13:10]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직무 정비]

(주);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 - 레위 사람들의 유일한 수입원(收入源)이었던 십일조를 가리킨다(10:37).

(주);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 느헤미야는 십일조의 원활한 징수를 위하여 레위 사람들을각 성읍에 주재시켰었다(10: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불과 1년 가량의 기간 동안 성전 제사의 절대적 필요성을 무시할 만큼 영적으로 침체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받은 바 신령한 은혜를 계속 보존하기란 이렇듯 힘들다.

(주); 레위 사람들...그 전리(田里)로 도망하였기로 - 성벽 봉헌식 이전에도 레위 사람들의 상당수는 여러 촌(村)에 흩어져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다(12:27).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성실히 내겠다는 백성들의 다짐(10:37-39)을 믿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십일조 납부가 중단되자 다시 생업 유지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도망하였기로(*, 바라흐)는 생명의 보존을 위한 자구책(自球策)으로서 위험한 곳으로부터 떠나는 일을 가리킨다(삼상 19:18;대하 10:2;사 48:20).

성 경: [느13:11]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직무 정비]

(주); 민장을 꾸짖어 - '민장'(*, 세가님)은 백성들 중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유력한 귀인(貴人)들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독려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할 책무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있어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 레위 사람들이 성전을 떠나 촌으로 흩어짐으로써 성전의 본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그들이 모두 떠나버림으로써 희생 제사와 관계된 일들이 제대로 거행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버린 바 되었느냐'(*, 네에자브)는 '배반하다' 혹은 '모반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아자브'(*)의 수동형이다.

성 경: [느13:12]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직무 정비]

(주); 십일조를...곳간에 들이므로 - 백성들이 직접 십일조를 갖고 성전까지 왔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레위 사람들에 의하여 징수되도록 했던 느헤미야의 십일조 규정(10:37)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직접 성전까지 십일조를 가져온 것은 느헤미야의 호되면서도 충정어린 책망을 백성들이 달게 받아들였음을 암시한다.

성 경: [느13:13]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직무 정비]

느헤미야의 이러한 조처는, 백성의 십일조 납부가 재개되어 성전의 곳간에 재물이 많아진 그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시의적절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느헤미야가 재물의 효율적 관리, 특히 분배 문제로 말미암는 불화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하여(10:38) '고지기'로서 각계 각층의 세 사람을 세웠다는 사실이다(고후 8:18-21).

(주); 제사장 셀레먀 - 성벽재건에 참여했던 하나냐의 아버지 '셀레먀'일 가능성도 있다(3:30). '여호와의 친구'의 뜻이다.

(주); 서기관 사독 - 느헤미야의 부하 관리였던'시드기야'일 가능성이 크다(Rawlinson).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1)'시드기야'(여호와는 나의 의이시다)와 '사독'(의로운)은 모두 '의롭다'의 의미를 갖는 동일한 어근 '차다크'(*)에서 왔으며, (2) '서기관'은 성전 운영의 국고를 담당하기도 했다는(왕하 12:10) 점 등이다.

(주); 레위 사람 브다야 - 이 사람은 에스라의 율법 낭독시 그의 곁에 있었던 레위 사람 '브다야'일 가능성도 많다(8:4).

(주);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 '버금을 삼았나니'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손에 두었다'이며, 하난이 위의 세 사람을 도와 고지기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뜻이다(NIV, madeHanan...their assistant). 한편, 위의 세 고지기가 각각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하난은 평민 출신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Edwin Yamauchi).

(주);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 고지기라는 중책이 맡겨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여기서 '충직한 자'(*, 네에마님)는 '든든히 세우다'(삼상 25:28), '확실하게 하다'(왕상 8:26), '신실하다'(사 49:7) 등의 뜻이 있는 동사 '아만'(*)의 분사로서, '신뢰할 만한 자' 혹은 '신임을 받는 자' 등의 의미이다(삼상 22:14;잠25:13;사8:2;렘 42:5 등 참조).

성 경: [느13:14]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성전 직무 정비]

느헤미야의 이 짧은 기도는 이기심에서 나온 자고(自高)의 표현이 아니다(5:19).

(주); 선한 일 (*,헤세드) - 이것은 일반적으로 (1) 하나님의 은혜, 자비(시 5:8;36), (2) 사람들 사이의 인자, 긍휼(창 21:23;욥 6:14), (3) 하나님을 향한 경건(사57:1)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전 제사 유지를 위한 느헤미야 자신의 신실한 노력을 뜻한다.

성 경: [느13:15]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주); 그 때 -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재 귀환한 직후일 것이다(Fensham).

(주); 내가 본즉 -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민정(民情)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특히 '본즉'(*, 라아)은 세밀한 조사 관찰 행동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창 6:12;22:13;왕하 7:13;대하 24:22).

(주); 안식일에 술 틀을 밟고...식물을 팔기로 -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들은 성벽 재건 직후 언약을 갱신하면서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기로 결단한 바있다. 그들은 그때 자신들과 이방인을 분명히 구별케 해주는 안식일을 온전히 지킴으로써, 종교적, 문화적 순수성 유지를 도모하려고 했었다(10:31).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과의 빈번한 경제적 접촉의 결과로, 오히려 안식일 개명을 경시하는 두려운 상황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아무튼 이같은 안식일 계명의 경시는, 그 날에 소용되는 양식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출16:19-22)는 분명한 약속을 망각하고 또한 믿지 않은 결과였다. 한편, '술틀을 밟고'에 대해서는 5:14-19 주제 강해, '포도주 제조 과정'을 참조하라(욥 24:11;사 63:2,3).

성 경: [느13:16]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15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안식일을 범했던 사실에 대해 다룬다. 한편, '두로 사람'은 고대 중근동 뿐만 아니라 지중해 지역 전체에 그 명성을 날렸던 페니키아 상인(본 단락 주제 강해, '페니키아 상인' 참조)들을 가리킨다(겔 27:12-36;28:16).

(주); 예루살렘에 거하며 - 이방인들의 이 같은 행위 자체는 결코 불법이 아니었다. 다윗 시대에도 여부스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대상 21:15).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당시에도 유대인들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했었다.

(주);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안식일에...팔기로 - '물고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매우 애호되던 식품이었다(레 11:9;민 11:5;신 14:9;마 14:17). '두로 사람'들은 이 '물고기'를 자신들이 살고 있던 지중해 연안에서 잡았거나, 혹은 갈릴리 바다에서 다른 사람들이 잡은 것을 사와서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고기'는 '어문'을 통해서 예루살렘 안으로 반입됐을 것이다(3:3).

성 경: [느13:17]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느헤미야의 귀인들에 대한 이러한 책망은, 귀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일에 오히려 앞장 섰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남용하여 자신들의 식탐(食貪)과 물욕(物慾) 충족을 위하여 안식일을 범하기 일쑤였을 것이다.

(주); 악을 행하여 -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1) 십계명 중 제4계명을 범하는 것이었다는 점, (2) 그래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다시 초래케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18절;렘17:27;겔 20:12,13)에서 분명히 심각한 '악행'이었다.

성 경: [느13:18]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주);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 - 본절의 '이 성읍'은 단수라는 점에서 예루살렘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음로써 그 형벌로 수도 예루살렘이 완전히 훼파당하는 사태를 맞이했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렘 17:27).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건을 가리킴도 물론이다.

성 경: [느13:19]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본절부터 22절까지에서는 안식일을 보다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한 시책이 언급된다.

(주);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성문을 닫고 -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는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문에 그림자가 드리워 질 때'의 뜻이다(NIV, Fensham). 따라서 이것은 밤이 되기 얼마 전의 시간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본 문구는, 느헤미야가 일몰 시간이면 닫았던 성문을 보다 이른 시간에 닫도록 했었음을 뜻한다(Rawlinson).

(주); 내 종자...성문마다 세워서 - 일상적으로는 예루살렘 주민 중 그날의 당번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성문을 지켰을 것이다(7:3).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이 어떤 대가를 보장받고 장사꾼들을 예루살렘 시내로 들여놓을 가능성을 염려하여 자신의 심복들을 성문마다 배치하였다.

성 경: [느13:20]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주); 장사들...성밖에서 자므로 -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상품을 들여와 팔기 위한 장삿속 때문이었다. 장사꾼들이 성밖에서 군거(群居)하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매우 요란했을 것이며, 또 백성들이 성벽 아래의 물건들을 구경하기 위해 성문 혹은 성벽 쪽으로 몰려들어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다(Rawlinson).

성 경: [느13:21]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주);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 느헤미야는 유다 지역의 합법적 총독이었기 때문에(5:14), 그 지역 내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방인들도 유다 땅에서는 유대법, 즉 하나님의 율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8절). 비록 유다가 페르시아의 속국이긴 했지만, 유다는 페르시아의 회유 정책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의 법률로 삼을 수 있는 자치권을 허용받았었다(스 7:14,25,26).

성 경: [느13:22]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안식일 준수 명령]

(주); 레위 사람들...몸을 정결케 하고 - (1) '성문'을 지키는 일은 성전을 지키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이며(대상 9:17-22;26:12-19), (2) 성문 파수가 안식일 준수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성격이었다는 점 등에서, 레위인들은 정결 의식을 거쳐야 했다.

(주);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 성문에는 이미 평민들과 느헤미야의 종자(19절)가 성문 파수를 위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시 레위 사람까지 배치한 까닭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아는 그들을 통해 성문 파수가 완전히 이루어질수 있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물론 레위 사람들은 성벽 파수의 직무를 부여받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벽 파수의 감독 직무였을 뿐이다(7:1). 느헤미야는 금번에 그들을 감독의 자격이 아닌 직접적인 성문 파수 담당자로 발령한 것이다.

(주); 나의 하나님...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 이것은 느헤미야가 비록 자신이 선한 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에는 지극히 미흡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이는 그의 겸손이 잘 드러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문자적 의미는 '나의 하나님 큰 사랑을 베푸시옵소서'이다. 한편, 여기의 '은혜'(*, 헤세드)는 신적인 언약에 근거한 불변적 사랑을 뜻한다.

성 경: [느13:23]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금지]

본절과 같은 문제는 에스라의 개혁조치가 있었던 B.C. 458년 이후에는 크게 노출된적이 없었다. 물론 그 같은 풍조가 간간이 있기는 했었지만(6:18; 10:30), 그 풍조가 사회 문제화된 것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왔던(6절) 그 이후였다.

(주); 그때에 - 느헤미야의 귀환 직후이다(15절).

(주);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 '아스돗'은 블레셋의 일파로서 유다 땅 서쪽에 위치했었으며(4:7) '암몬과 모압'은 모두 유다 땅 동쪽에 위치했었다. 이들 모두 유다 땅과 인근 지역이었던 까닭에 쉽사리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혼(通婚)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느13:24]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금지]

통혼의 심각한 결과가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 남성과 결혼한 이방 여인들이 그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모국어를 가르침으로써 야기된 현상이었다.

(주); 아스돗 방언...유다 방언은 못하니 - 히브리어 원문상으로 해석이 애매한 부분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많으나, 통혼한 이들의 자녀들 중 절반 가량은 아스돗 방언이나 기타 이방 언어로는 말할 수 있어도 유다 방언은 제대로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NIV, Half of their children spoke the language pf Ashdod orthe language of one of the other peoples, and did not know how to speak thelanguage of Judah). 언어는 한 민족을 공통적인 유대 관계로 맺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더구나 히브리어가 종교 의식상의 언어였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민족언어의 상실은 곧 하나님 말씀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지는 불과 1년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해서 통혼이 진행됐고 또한 태어난 여러 자녀들이 이방 언어에 그토록 깊이 젖어들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바로 이 같은 의문 때문에 혹자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있었던 기간을 1년이 아닌 휠씬 더 오래동안으로 잡는다. 그러나 개혁의 미진함을 절감하며 떠났던 느헤미야가 오랫동안 페르시아에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는, (1) 이와 같은 통혼과 그에 따른 이방 언어 사용의 문제가 이방 민족들이 살던 지역과 인접한 변방(邊方)에서 주로 야기되었고, (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비록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가기 전부터 통혼이 간간이 진행됐지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Keil).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부터 재귀환한 후에야 변방 지역의 순시를 통하여 백성들의 통혼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느13:25]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금지]

본절에서의 느헤미야의 행동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認識)한 결과에 따른 경고적 성격의 것이었다.

(주); 책망하고(*, 리브) - 11,17절에서도 사용된 단어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5:7 주석을 참조하라.

(주); 저주하며 - 이것은 종교적 선포의 성격을 갖는다. 즉, 느헤미야는 통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리라는 사실을 선포하였을것이다(Fensham).

(주); 두어 사람을 때리고 그 머리털을 뽑고 - 느헤미야는 총독의 자격(5:14)으로 중한 체벌(體罰)이나 가산 적몰(스 7:26)의 징계를 통혼자들에게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문의 행동은 체벌이라기 보다는 느헤미야 자신의 극단적 불쾌감과 격노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된다. 머리털을 뽑는 것은 진노를 나타내거나 모욕이나 경멸을 표현하는 행위이다(삼하 10:4;사 50:6).

(주); 너희는...맹세하라 - 10:29,30을 참조하라.

성 경: [느13:26]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금지]

(주); 솔로몬이...범죄하지 아니하였느냐 - 솔로몬이 이방 후궁들의 꾀임에 빠져 이방신들을 섬겼던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왕상 11:4-8).

(주); 저는...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 - 솔로몬이(1) 하나님으로부터 큰 지혜를 받았고(왕상 4:29),(2)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한 국가를 이룰 수 있었으며(왕상 4:20,21;9:26-28),(3) 그 결과 이방인들로 부터도 칭송을 받았던 사실(왕상 10:1-9)등을 가리킨다.

(주); 하나님이 저로 왕을 삼아 - (1) 압살롬과 아도니야 등 이복 형들의 잇단 왕위 승계투쟁이 있었던 사실(삼하 15:7-12;왕상 1:5),(2) 솔로몬은 다윗이 부정하게 취한 여인 밧세바의 소생이었다는 사실(삼하 12:24,25) 등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만하다.

(주); 이방 여인 - 솔로몬에게는 이방 출신의 후궁이 약 천 명이나 있었다(왕상 11:3).

성 경: [느13:27]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이방인과의 통혼(通婚)금지]

통혼자들이 이방 여인들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내용이다.

성 경: [느13:28]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 구별]

(주);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 - 이것은 '엘리아십의 아들 요야다의 아들 하나'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12:10). 느헤미야가 산발랏의 사위가 된 '요야다'의 아들을 다만 '하나'라고 하여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이 특이하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그의 이름도 명부에서 도말됐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느헤미야는 그 같은 이름을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 문맥에 기록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아십'은(1) 느헤미야가 귀환했던 B.C. 444년, 즉 13년 전에 이미 대제사장이었으며(3:1),(2) 그의 손자가 결혼 적령기가 됐다는점 등으로 볼 때 그 당시 꽤 연로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요야다'는 '엘리아십'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에 올랐었을 것이다(12:10).

(주); 호론 사람 산발랏 - 이같은 표현은, 산발랏의 가문이 결코 이스라엘 백성 특히 대제사장 가문과는 결혼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해준다. '호론 사람'에 대해서는 2:19주석을 참조하라.

(주); 쫓아내어...떠나게 하였느니라 - 이것은 '요야다'의 아들 부부가 함께 사마리아로 쫓겨났음을 의미한다(Williamson). 이처럼 느헤미야가 강경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요야다의 아들이 산발랏의 딸과 이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인 듯하다(Rawlinson).

성 경: [느13:29]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 구별]

(주);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민 중에서 구별되어 선택되었었다(신 7:6).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제사장을 특별히 성별하여 그 직분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을 드러내기 원하셨었다(레 21:4,6). 따라서 그 같은 제사장이 율법이 엄히 금하는 이방 여인과 통혼했다는 사실은 곧 그 거룩한 직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주); 제사장...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 - 이것에 대해서는 (1) 구약의 율법이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 곧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평민들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공통 인식으로 보는 견해(Rawlinson), (2) '제사장'이 이방 여인과 통혼해서는 안된다는 레 21:14의 말씀으로 보는 견해(Fensham), (3)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서 범법자들을 처단했던 그 정신(출 32:26-29;민 25:10-13)을 계승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거룩성 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언약(말 2:4-8)으로 보는 견해(Williamson, Keil) 등으로 그 해석이 나뉜다. 그러나 첫째, 본절은레위 사람의 통혼을 책망하는 문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위 사람'까지를 거론하고 있으며 둘째, 레 21:14은 오직 제사장의 통혼 금지 규정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위의 세 견해 중(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느13:30]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 구별]

(주); 떠나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 느헤미야가 제사장들을 권면하여 그들과 함께 살던 이방 여인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한 것을 가리킨다(스 10:18,19).

(주); 반열을 세워 각각 그 일을 맡게 하고 - 문자적으로는 다만 '각각 그 일을 맡겼다'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페르시아 여행 기간 동안 일부 와해된 반차 조직을 재정비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Fensham).

성 경: [느13:31]

주제1: [느헤미야의 마지막 노력]

주제2: [제사장과 레위인 구별]

(주);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 '나무'는 상번제 등에 계속적으로 소용됐던 화목(火木)을 가리킨다(10:34). '처음 익은 것'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생계 유지에 필요했던 여러 헌물 중의 대표적인 것이었다(10:35).

(주);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 5:19 주석을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