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홈 > 성경 > 성경주석구약 > 시편2
시편2
시편2(76-150)



성 경: [시76:1]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승리의 하나님]

⭕ 유다에...이스라엘에 - 정치적으로는 솔로몬 사후(死後) 르호보암 시대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한 유다 왕국과 이를 제외한 10지파, 즉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계시하시고 관계를 맺으신 언약의 백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본절의 두 왕국은 종교적 일체감을 갖는 하나의 민족임을 암시한다.

성 경: [시76:2]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승리의 하나님]

⭕ 그 장막이 - '장막'은 텐트 형태의 이동할 수 있는 성소로서 종종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의 장소로 상징되었다(출 25:8). 그러나 원문상으로는 '장막'(*, 미쉬칸)이 아니라 '초막'(*, 수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초막'이란 나뭇가지나 풀로 엮어 만든 가옥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것을 '장막'이라 한 것은 이 단어가 간혹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곳을 일컬을 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27:5;31:20).

⭕ 살렘에...시온에 - '살렘'(*, 솰렘)은 예루살렘의 고대 명칭으로서 멜기세덱이 다스리던 성읍이었다(창 14:18;히 7:1, 2). 그후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정착시키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도시로 상징되었다. 또한 시온도 처음에는 다윗이 정복했던 예루살렘의 남동부 언덕 혹은 요새를 가리켰지만 다윗이 법궤를 이곳으로 옮긴(삼하 6;12-19) 후부터는 거룩한 산(2:6), 주의 거하시는 곳(9:11) 혹은 하나님의 산성이라 불리웠다. 본절에서 두 장소가 함께 언급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한 것이다.

성 경: [시76:3]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승리의 하나님]

⭕ 거기서 - 이 말의 정확한 원문은 '솨마'(*, 황폐한)가 아니라 '헤'(*)가 없는 '솽'(*, 그곳으로부터)으로 해야 한다. 이 '솽'에 대해 혹자는 '거기'라는 말대신 '거기로 가는 도중에'(on their way there)로 해석하여(Alexander) 본절을 '저가 화살과...거기로 가는 도중에 꺾으셨다'로 설명한다. 여기서 '거기'의 정확한 장소는 예루살렘에 아주 근접한 장소로 보는 것이 좋다(왕하 19:32, 33).

⭕ 화살 - 여기에는 번역상 '불'(*, 레쉐프)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원문대로 표현하자면 '불화살'이 정확한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의 해석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1) '불을 붙인 화살'(Harmond, Parkhurst), (2) '맹렬한 화살'(Walford), (3) 가나안 신화로부터 유래된 은유 형태로서 '번쩍이는 활'(NIV, EBC) 등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본문에서는 전쟁 무기를 암시하기 때문에 '적들의 신속하고도 맹렬한 공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 방패와...깨치시도다 - 본 구절은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전쟁을 언급하는데 그 시기에 관해서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다(본 시편 강해를 참조하라). 우리는, 히스기야 당시 앗수르의 산헤립 군대를 하나님의 사자가 전멸시켰던 때(왕하 19:35)로 보기로 한다(Hengstenberg, Alexander, Calvin). 이 견해를 따르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삽이 다윗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아삽의 후손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이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 근거로는, 70인역(LXX)에 본시의 제목이 '앗수르에 관해 지은 노래'(*, 오데 프로스 톤 앗수리온)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본 구절은 전쟁 무기를 통해 전쟁을 묘사한 환유법을 사용함으로 시적 분위기를 강하게 해준다.

성 경: [시76:4]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악탈한 산 - 이 말에 대해서는 (1) 원문의 '타레프'(*, 약탈한)를 근거로 하여 압제하는 세력으로서의 '약탈을 일삼는 나라'로 보기도 하며(Calvin), (2) 70인역(LXX)의 '아이오니온'(*, 영원한)이란 말을 근거로 '영원한 산'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두번째 견해는 '타레프'가 '아드'(*, 영원한, 약탈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후자의 견해를 따르는 자들은 시편 기자가 주의 '전능하심'을 '영원한 산'에 비유했고(Kraus), 궁극적으로는 주의 거처가된 시온 산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Hitzig). 그러나 3절의 '전쟁'과 2절의 '시온'에 관한 언급을 비교해 볼 때 두 견해를 종합하는 것이 나으리라 본다. 즉, 여호와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됨에 따라 결국 여호와께서 '약탈을 일삼는 나라에서' 혹은 '약탈한 시온 산에서'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76:5]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마음이 강한 자(*, 아비레이 레브) - '용감한 자', '마음이 완고한 자'란 뜻으로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좁은 의미로는 앗수르 왕의 완고한 마음(사 10:12-14)을 나타내나 더 나아가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던 앗수르 군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 탈취를 당하여(*, 에쉬톨렐루) - '약탈하다'란 뜻인 '솰랄'(*)의 재귀형(Hithpael)으로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성격을 갖는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해 학자들은 (1) '자신을 망하게 했다'로 해석하기도 하고(Harmond), (2) '강탈 당했다', '추방 당했다', '사라졌다'라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를 고려할 때, 본 절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이루어진 징벌로 말미암아 약탈자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대가로 그 자신들도 약탈자들이 그들의 악행에 대한 대가로 그 자신들도 약탈 당했음을 뜻한다.

⭕ 잠을 자고 - 단순한 수면 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강포한 자들의 죽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 말은 앗수르 군대가 천막에서 잠자고 있다가 185,000명이 죽임을 당해 패망했던 사실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사 37:36).

⭕ 자기 손을...못하도다 - 이 구절에 대해서 '그들의 손을 사용할 수 없었다'(Alexander)로 보기도 하고 '그들의 손을 찾지 못했다' 혹은 '손을 들 수 없었다'(Tyndale)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대적들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패퇴 당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된 상황을 나타낸다.

성 경: [시76:6]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병거와 말 - 문맥과 시의 배경을 고려할 때 '병거 탄 자와 말 탄 자'를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혹자는 '탄 자와 말'이라고도 해석하는데 이것이 더 정확한 의미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산헤립 군대에 내려졌던 독종으로 사람뿐 아니라 말까지 다 죽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76:7]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주 곧 주 - 대명사 '주'를 반복한 것은 그 의미에 대한 강조와 부연 설명으로서 '존귀한 자', '절대자'를 나타내며 '오직 하나뿐인 자'를 말한다.

⭕ 경외할 - 원문은 '두려워하다'이지만 그 의미는 (1) '심리적 두려움(공포)에 대한 반응'(신 5:5), (2) '존경심을 갖춘 경의', (3) '예식이 동반되는 종교적 숭배'(왕하 17:32-34)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2)의 의미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 서리이까 -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의미하지만 또한 의문문의 형태로서 감히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서 있는 자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한데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서려는 자들이다.

성 경: [시76:8]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 주권이 하나님께 있고 성패(成敗)가 그분의 손에 달렸기 때문에 이는 일방적인 종전(終戰) 선언이며 산헤립 군대를 전멸시킴으로 보여준 심판의 소식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산헤립 군대를 멸망시킬 때 우뢰를 동반했는데 이것이 판결의 선고로 비유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가 없다.

⭕ 땅(*, 에레츠) - 단순히 가나안에 한정된 영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earth, whole world)을 의미한다.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으로는 하나님이 산헤립 군대를 전멸시켰을 때 그 소식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서쪽 아시아의 여러 민족에게까지 알려진 사실이 있다(대하 32:22, 23).

성 경: [시76:9]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공의의 하나님]

⭕ 땅의 모든 온유한 자 - '온유한 자'란 '아느웨'(*, 낮은, 겸손한)로서 하나님에 대한 도덕적,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겸손하게 인내함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행 20:19)를 뜻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는 앗수르의 압제로 인한 피해자들과, 넓게는 세상의 모든 압제받는 자들을 암시하기도 한다.

⭕ 구원하시려고 - 8절의 배경이 되는 말로서 적들을 심판하신 근본적인 목적을 나타낸다. 그리고 구원하시려는 대상은 문자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과 압박받는 민족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앞 구절인 '땅의 겸손한 자들', 즉 영적인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온유한 자들' 즉 진정으로 경건한 유대인이나 이방인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성 경: [시76:10]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마땅히 경외할 자]

⭕ 사람의 노는...것이요 -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적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의해 정복당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모든 행위, 심지어 하나님께 대항하는 적들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 남은 노는...금하시리이다 - '남은 노'가 문자적으로는 '노한 사람의 나머지', '악인의 나머지'란 의미이지만 그 '노'를 (1) 사람의 노로 보았을 경우 '최고 극단의 노'(Luther), '최후의 노'(Flaminus), '남은 노력을 다 기울이는 노'로 해석되어, 본문은 '적들이 계속 노를 발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억제하신다'가 된다. 그러나 (2) 하나님의 노로 생각할 경우, 뒤에 나오는 '금하셨다'(*, 타흐고르)라는 말이 '허리에 두르는 것', '입는 것' 등의 의미를 갖고 대개 의복이나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45:3;사 59:17) 하나님이 허리를 동이시는, 즉 싸울 태세를 갖추시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남은 진노를 허리에 차실 것이다(혹은 예비하셨다)'로 해석된다. 특히 본문의 '주께서'라는 말을 연관시켜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적절하다.

성 경: [시76:11]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마땅히 경외할 자]

⭕ 서원하고(*, 니다루) - 일반적으로 '예물'을 의미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공적인 맹세'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서원에는 맹세한 것을 이루려는 강한 의지가 요구된다. 본시에서 기자가 '서원'을 강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구원받고 안전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망각하여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또다시 빠져들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 사방에 있는 모든 자 - 해석상 (1) 하나님을 섬기는 흩어진 이스라엘 민족, (2) 이스라엘에 근접해 있는 주변 나라들(Kimchi)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본 구절 뒤에 언급되는 '예물'(*, 솨)이란 말이 '피정복 나라들로부터 바쳐지는 공물(貢物)'을 의미하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성 경: [시76:12]

주제1: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주제2: [마땅히 경외할 자]

⭕ 심령을 꺾으시리니 - '꺾으시리니'(*, 이브초르)는 '잘라내다', '축소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심령'(*, 루아흐)은 학자에 따라 (1) 용기, 담대함, 교만(De Wette, Hupfeld), (2) 진노의 연기(Delitzsch), 진노의 숨(Hitzig), (3) 생명(Tyndale) 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이브초르'와 연관시켜 볼 때 (1)의 견해가 적절하며 더 나아가서 (3)의 견해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성 경:[시77:1]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 내 음성으로...부르짖으리니 - 본절은 반복법을 사용함으로 현실의 문제 상황이 심각하고 절박함을 강조한다. 특별히 '내 음성'이 강조된 것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갈망하는 가운데 '진실함'과 '간절함'을 호소하는 말이다. 여기서 혹자는 '부르짖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망의 외침이나 기도를 못들은 체하신 것에 대한 슬픔의 하소연이라고 하지만 하반절의 '귀를 기울이시리로다'가 저자의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의 말이라고 볼 때 그것은 부적절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기도 응답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성 경: [시77:2]

주제1: [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 [환난 중의 기도]

⭕ 환난날에 - 본 시의 중심이 되는 단어로서 배경을 암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저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었던 크나 큰 환난으로 보거나,(2) 국가적 차원의 환난으로 취급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국가적 환난에도 이견(異見)이 있다. 첫째는 바벨론 포로 시대 전후(前後)에 나타난 환난으로 보며(Ewald), 둘째로는 아직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고, 하박국 선지자가 이 시를 참조한 듯하기 때문에(합 3장) 요시야(B.C. 640-609년 재위) 이전 시대 곧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한 고통으로 본다(Delitzsch, Hengstenberg, Caspari).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저자가 국가적 환난에 직면하여 기도하면서 15절 이하의 구원에 대한 기사에 희망을 갖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배경을 밝히기란 어렵다. 물론 여기서 '환난'이란 저자의 개인적인 환난인 동시에 국가적 환난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 손을...아니하였으며 - 혹자는 '손'(*, 야드)을 '고통', '상처'로 보고 '들고'(*, 니그라)를 '흐르다'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고통과 상처로 인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로 본다. 그러나 본래 '야드'의 1차적인 의미는 본문대로 '손'이며 '니그라' 역시 '뻗다', '펼치다'는 뜻도 지니며 본절에서는 간청이나 애원을 할 때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몸짓으로서 손을 뻗치는 것을 묘사한 단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절의 내용과 본절 초두의 '주를 찾았으며' 그리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등과 같은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본구절은 계속적인 기도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내 영혼이...거절하였도다 - 진정한 위안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다른 어떤 위로의 말도 시인을 평화롭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거부했다는 의미이다(창37:35;렘 31:15). 또한 본문에서 위로를 거절했다는 것은 현재 기도의 응답이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비록 괴롭지만 감수하겠다는 뜻을 암시한다. 궁극적으로본 구절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성 경: [시77:3]

주제1: [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 [환난 중의 기도]

⭕ 하나님을 생각하고...근심하니 - '생각하고'(*, 에즈케라)라는 말은 '기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본 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저자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환난날에 위로를 얻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그를 불안케 했다는 것은 전에도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하고 또 한편으로 현재 자신의 환난과 국가의 환난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생각에 불안했던 것이다.

⭕ 심령이 상하도다 - 본문의 '심령'(*, 루히)은 '영혼'이라기보다는 '용기','마음', '기운' 등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하도다'(*, 티트아테프)는'쇠약해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외부적 환난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성 경:[시77:4]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 주께서...없나이다 -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아하제타)는 문자적으로 '지키다', '제지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본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저자가 잠들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며, 이것은 더 나아가 하반절에 언급된 기도의 말도 할 수조차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성 경:[시77:5]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 내가...생각하였사오며 - 3절이 현재의 환난에 대해서 불안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면, 본절은 6절의 '묵상'이란 말을 고려해 볼 때 과거에 용기를 주셔서 위로해 주시고 큰 역경 중에서 구원해 주심으로 잠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회상한다고 볼 수 있다(14-19절;3:4, 5).

성 경:[시77:6]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 밤에 한 나의 노래 - 여기서 '나의 노래'(*, 네기나티)를 많은 사람들이 70인역(LXX)에 기초하여(EBC) '나는 묵상한다'(*, 웨하기티)로 수정한다(Tyndale).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문은 '나의 과거 일들을 밤에 묵상하고'로 해야 한다. 본 시의 전반부(1-10절) 내용과 시인의 심적 상태나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음악적인 노래보다는 위에 언급된 해석이 타당성이 있다.

⭕ 심령이 궁구하기를 - '궁구하다'(*, 하페스)는 '찾다', '온갖 수단을 강구하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심령'(*, 루히)이 여성 명사이고 동사인 '궁구하기를'이 남성이라 하여 본문을 '그는 내 심령을 찾았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Tyndale) 히브리어의 성(性) 구별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 한편, 본 구절은 환난이 왜 닥쳤는가 하는 시인의 회의(懷疑)에 가득 찬 의혹이 아니라 환난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찾는 몸부림인 것이다.

성 경:[시77:7,8]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이 두 절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환난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과의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현 상황에 대해 부정적 질문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듯하다. 그 예로 7절의 '은혜를 베풀지'(*, 라차)는 '기쁘게 여기다', '용서하다', '받아들이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그 뒤에 언급되는 부정 의문문과 결합되어 문장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지만 저자의 의도 속에는 은혜를 바라는 면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8절에서도 반복되는데, 즉 '자비',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인자하심'(*, 헤세드)과 '약속하다'란 뜻으로 사용된 '허락'(*, 오메르)이란 두 단어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견주어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희망을 가지며 또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깨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으므로 절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본문은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하면 낙망할 수만은 없는 시인의 갈등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성 경:[시77:9]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환난 중의 기도]

⭕ 하나님이 -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호칭으로 '엘'(*)이 사용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엘'이란 호칭은 초자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7:11;85:8). 특별히 본문에 이것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시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위대성 혹은 권능에 의존하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시77:10]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본절은 본 시에서 상황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와는 달리 본절을 9절의 연장으로 해석하는데 약간 무리인 듯하다. 왜냐하면 고대 전승에서나, NIV, RSV 등도 9절과 본절을 '셀라'(*)로 구분하고 있고 또한 시의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 전개를 볼 때 마땅히 전환절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 나의 연약함이라 - '연약함이라'(*, 할로티)는 '쇠약하다', '병들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본 구절에서는 여러 의미로 해석되어 난해 구절에 속한다. 그 가운데 세 견해를 들어보면 (1) 믿음과 연관시켜 7-9절의 고뇌가 저자의 연약한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 (2) 실제 육체적인 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의 심령까지 쇠약하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Walford), (3) 현재의 환난이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고 이것이 저자의 '슬픔'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고통이나 슬픔'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1-9절까지의 시적 분위기나 시인의 심적 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2)와 (3)의 견해가 복합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고 11절 이하를 생각해 본다면 (1)의 견해가 적절하다.

⭕ 지존자 - 원어로는 '엘룐'(*, 가장 높은)이며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족장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 14:22). 원래 이 호칭은 '엘'(*)의 형용사형으로서 가나안인들의 신(神)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야웨'(*, 예화)라는 호칭과 거의 동일시하였다. 특별히 이 명칭은 주로 시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지칭한다(18:13).

⭕ 오른손의 해 -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을 나타낼 때(사 48:13), 혹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89:13;신 33:2)으로 쓰였다. 그런데 학자들은 본문에서의 의미를 '기도 응답의 손' 혹은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내는 손'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Tyndale), 두 해석 모두 적절하다. 또한 '해'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해'(*, 쉬노트)라는 말이 '솨나'(*)에서 유래했고 그 어원적인 뜻 가운데는 '변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을 '오른 손이 나의 고통을 변화시켰다'로 해석한다(Maurer, Hupfeld, Hitzig).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해'(year)로 보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해'를 묘사할 때 쓰는 '쉬노트'라는 단어가 계절의 변화 등을 일컫는 순환적인 성격을 내포하며(Calvin) 또한 5절에서 같은 어휘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절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면 문장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1) 본절에 '에즈코르'(*, 나는 기억할 것이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NIV, R.V., Cheyne), (2) 11절에 '에즈코르'와 동의어인 용어들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본절과 11절을 한 구절로 설명하는 견해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번역본들이 '에즈코르'를 삽입했으며 특히 본 시의 5절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성 경:[시77:11,12]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본 시의 전반부(1-9절)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시인의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은 4개의 동의어(옛적 기사, 행하신 일, 모든 일, 행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묵상하며 - '묵상'(*, 하가)이란 용어는 시편에서 주로 많이 언급되며 그 어원적 의미는 '중얼거림', '명상', '한숨', '속삭임', '신음' 등이다. 히브리인들은 묵상하는 것을 습관으로 여겼으며(19:14;창 24:63), 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 '묵상'은 단순한 침묵 훈련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주 내용은 (1) 율법(119:15), (2) 주의 증거(119:99), (3) 약속의 말씀(119:148), (4) 하나님의 권능과 업적, 기사(143:5;145:5) 등이 있다.

성 경:[시77:13]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주의 도 - '도'(*, 다르케카)는 원래 '밟다', '나아가다'를 의미하는 '다라크'(*)에서 유래한 것으로 행위 혹은 행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학자들에 따라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루시는 양식'으로 보기도 하고(Alexander),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셨던 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자는 너무 광범위하고 후자가 적절하다.

⭕ 거룩하시오니 - 원문에는 '코데쉬'(*)로 나오는데 이 말은 '거룩'이라는 뜻과 '거룩한 곳'이란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혹자는 '코데쉬'를 '거룩한 곳'으로 해석하여 본절 전반절을 '주의 도는 성소에 있사오니'로 보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문장이 다소 어색하다. 오히려 성소의 특징 중의 하나인 '거룩'으로 보는 것이 좋다. 또한 '주의 도'와 연관시켜 볼 때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암시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시77:14]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기사를 -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성을 전능한 기사를 통해 증명하려 한다.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기사'를 뜻하는 단수 형태이지만 본절에서는 집합적인 성격을 띤 복수의 의미를 갖는다. 이 기사는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일을 통해, 특히 언약 백성을 구속사의 대장정(大長程) 가운데 이끄시는 과정을 통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입증된 초자연적인 권능과 관련된다.

⭕ 민족들 중에...알리시고 - 하나님의 전능한 행위가 그의 선민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에게까지 목적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민족들 중에'라는 말은 '민족들 가운데', '민족들이 보는 가운데서'(Alexander)라는 뜻이다.

성 경:[시77:15]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주의 백성 -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관계를 맺으신 백성을 말한다. 시인은 이 말에서 언약 관계를 암시함으로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임을 나타내며 또한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도우실 것을 희망하며 찬양하고 있다.

⭕ 야곱과 요셉의 자손 - 야곱과 요셉이 특별하게 언급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구속받은 민족의 조상이고 또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야곱에서 나왔고 이들이 애굽에 있을 때 요셉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더 포괄적인 의미, 즉 택함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 구속 - 어원은 '가알'(*, 배상하다, 무르다, 구해 내다)이며 본래 '대가를 지불하고 되찾는 것'을 말한다(룻 3:6-13 강해, '기업 무를 자의 구속사적 의미' 참조). 본절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다루면서 구속 사상의 형태와 예표를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속 받을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롬 3:23-25;고후 5:15).

성 경:[시77:16]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하나님이여 물들이...진동하였고 -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사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기술한다. 그 비유 중에서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라는 표현은 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실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홍해 바다가 갈라진 모습을 의인화시킨 것이다(출 14:29). 또한 이것은 자연까지도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 경:[시77:17]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구름이...발하며 - 폭우와 천둥을 비유하는 이러한 시적 표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고(18:12-14), 또한 하나님이 분노를 내실 때 발생했던 상황이기도 하다(18:15). 그러나 본절에서는 애굽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주의 살도...나갔나이다 - 번개치는 현상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이방 대적들을 파하시는 하나님의 신속한 공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합 3:11).

성 경:[시77:18]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회리바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갈'(*)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른데, (1) 번개와 폭풍후에 수반되는 '회오리바람'으로 보는 견해(Tyndale, Hitzig), (2) 이 말이 '갈랄'(*, 구르다)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번개가 굴러감'(Maurer) 혹은 '번개가 급하게 번쩍이는 것'으로 보는 견해(Botoher, Hengstenberg), (3) '하늘'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고 또한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하늘의 상황으로 보아 본 구절을 '하늘에서'로 설명하는 견해(Alexander) 등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첫 번째 견해를 취하는데, 그 이유는 회오리바람이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 번째 견해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성 경:[시77:19]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주의 길이...있었으나 -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출애굽 사건에 대한 이해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행사를 고려할 때 동사를 모두 현재형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KJV).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 그 당시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항상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넌 후 물이 본래 상태로 되면서 뒤쫓던 애굽 사람들이 물에 덮여 길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성 경:[시77:20]

주제1:[환난 중에 받는 위로]

주제2:[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의 발견]

⭕ 주의 백성을...인도하셨나이다 -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영광 중에 인도하신 일들을 회상하고 지금도 권능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끝을 맺는다. 즉, 그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홍해의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현재 시인이 겪고 있는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시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 무리 양같이 - 전적으로 연약하고 무능하여 반드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말이다. 만일 목자가 없다면 제각기 흩어져 큰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켜줄 목자가 있어야 한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을 지켜주고 인도해 줄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성 경:[시78: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내 백성이여 -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는 말이다. 기자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 부름은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위임 권위로 이스라엘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가진 교사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하고자 하고 있다.

⭕ 내 교훈을 들으며 - 여기서 '교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어는 '토라'(*)로서 '야라'(*, 흐르다, 가리키다, 가르치다)에서 유래되었다. 흔히 구약 성경에서는 '율법'(19:7;레 26:46;신 1:5), '법'(105:45;민 5:29;6:21) 등의 의미를 지니며, 드물게 '교훈'(잠 13:14;사 42:21)으로도 번역되었다. 영역본 KJV에서는 '법'(law)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나 문맥상 한글 개역 성경처럼 '교훈'이란 의미로 보는 게 더 타당한 듯하다(Anderson). 한편 '들으며'(*, 아잔)는 '귀를 펴다', '귀를 기울이다'(incline your ears, KJV, RSV)의 뜻이다. 본문에서는 교사로서의 기자의 교훈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들으라고 촉구하는 의미이다. 이는 고대의 다양한 시들의 서두를 장식하는 말(창 4:23;삿 5:3) 또는 지혜로운 교사의 교훈을 들으라는 시작의 말(49:1;잠 7:24;사 28:23)로 자주 사용되었다.

성 경:[시78: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비유를 베풀어서 - '비유'의 히브리어 '마솰'(*)은 '지배하다', '같게 하다', '닮다' 등의 기본 의미를 지니는 말로 '우월성'의 뜻도 있으나 '유사함', '같음', '비교', '비유', '잠언' 등의 다양한 뜻을 갖는다(잠 1:1). 본문에서는 '비유'(comparison)의 의미로 사용되었다(Dahood). 저자는 본시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제시하고자 하고 있다.

⭕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 '비밀한 말'의 히브리어 기본형은 '히다'(*)이다. 이것은 '후드'(*, 매듭을 매다, 수수께끼를 풀다)에서 유래된 말로 '수수께끼'(삿 14:12, 13;겔 17:2)를 뜻한다. 그러나 히브리 사회에서 수수께끼란 단순히 말풀이나 어떤 놀이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위의 것들을 통하여 그 속에 내재된 진정한 지혜를 드러내는데 그 주목적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도 전도자가 말하는 바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한 지혜의 교훈을 전하고자 함을 암시한다 하겠다. 한편 '발표하리니'의 히브리어 '나바'(*)는 '용솟음쳐 나오다', '발하다'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도록 청산 유수처럼 지혜의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

성 경:[시78: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전한 바라 -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조상들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서 전혀 사실성이 없거나 근거가 결여된 허황된 것이 아님을 제시해 주는 말이다. 신약에서는 사도 요한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말을 했다(요일 1:1).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과거의 신앙적 교훈 또는 사건들을 그 후손에게 전함으로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여호와 신앙을 계속 유지하며 맥을 이었다(출 12:26, 27;수 4:6, 7).

성 경:[시78: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여호와의 영예와...기이한 사적 - '영예'의 히브리어 '테힐라'(*)는 '찬미', '찬양'을 뜻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복된 일들을 나타내신 결과 찬양받으실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영역본 NIV는 이를 '찬양받으실 만한 행동들'(the praiseworthy deeds)로 의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혹자는 이 단어가 '찬양'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행동'(the glorious deeds)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주장하여 후자와 같이 번역한 RSV를 선호하기도 한다(Anderson). 한편, '능력'(*, 에주주)이란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대적하시고 그들을 진멸하시는 힘,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VanGemeren). 또한 '기이한 사적'(*, 팔라)이란 '기적', '놀라운 일들'을 뜻한다(wonders, RSV, NIV). 이는 11절에서는 '기사'(wonders, KJV, NIV; miracles, RSV)로 번역되고 있다.

성 경:[시78: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증거를 야곱에게...법도를...정하시고 - '증거'(*, 에두트, 증언)나 '법도'(*, 토라, 율법, 법)는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말이다. 전자는 율법이 공의와 사랑의 법칙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쓰여진 말로 보인다(출 32:15;34:29;신 6:20). 그리고 후자는 율법이 사랑과 공의의 법칙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절). 한편 본문에서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야곱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의 아버지로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인데서 연유된 듯하며(창 29:31-30:24;32:28;35:10), 특히 이스라엘 족속이 열두 지파로 구성된 유기체적 존재 또는 야곱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전하게 함으로써 여호와의 신앙을 존속케 하셨다(신 4:9;6:7; 11:19; 32:46).

성 경:[시78: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이는 저희로...그 자손에게 일러서 -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대대 손손 하나님 말씀, 즉 율법을 전수하는 것은 그들 생애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였다. 이는 성막이나 성소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레 10:10, 11;신 31:9-13;말 2:7), 각 가정에서 부모들에 의해 자녀들에게 행해져야 할 일이었다(신 6:7;11:19).

성 경:[시78: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 '소망'의 히브리어 '케셀'(*)은 '허리'(레 3:4), '어리석음'(전 7:25), '확신', '신뢰', '소망'(욥 4:6;31:24) 등의 다양한 뜻으로 번역된다. 본문에서는 맨 마지막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증거'와 '법도'(5절)를 그 후손들에게 전하여 가르치는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언약의 하나님께 신뢰와 소망을 두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언약 신앙을 계속 유지 보존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믿음을 두는 삶은 그들의 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71:5;딤전 4:10).

⭕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 - 여기에서 '잊지 아니하고'란 단순히 어떤 사실, 사건을 머리 속에 간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어떤 사실, 사건 등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다시 나타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본문에서 이 말을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사, 즉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과 축복, 은총의 행위를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견고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출 12:26, 27;수 4:6, 7). 예수님은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내가..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고 하셨다.

⭕ 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 '계명'이란 히브리어로 '미츠와'(*)로서 '차와'(*, 지정하다, 명령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명령', '법령'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 이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로서의 율법을 지킨다는 이상의 의미, 즉 그분의 뜻을 순종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시78: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역사 전승의 목적]

⭕ 패역하여(*, 마라) - 문자적으로는 '쓰다', '반역하다' 등의 뜻이 있다(출 15:23).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열조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려 아프게 하고 반역한 것을 의미한다.

⭕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 '정직하지'에 해당하는 '쿤'(*)은 '세워지다', '준비되다', '확실하게 되다' 등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정직하지 못하며'란 '(견고하게) 세워지지 않은', '자리잡고 준비되어지지 않은'의 뜻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열조들의 마음이 언약의 하나님께 확고하게 의탁하여 온전한 믿음 가운데 거하지 못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이 말은 37절에서는 '정함이 없으며'란 말로 번역되었다.

⭕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 '충성치'란 히브리어로 '아만'(*)으로서 '세우다', '지탱하다', '신뢰하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충성치 아니한'이란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신실함 가운데 거하지 아니했음을 암시한다(not faithful, NIV, RSV). 사실 이스라엘 족속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듭 거역하고 시험했었다(민 14:22).

성 경:[시78: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에브라임 자손 - 에브라임은 야곱(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창 49:1-4) 대신에 장자의 명분을 얻은 요셉(대상 5:1, 2)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째 아들 므낫세보다 더 우선적인 축복을 받았다(창 48:17-22). 이런 에브라임 자손은 이후 야곱과 모세의 엄청난 축복을 받고(창 49:22-26;신 33:13-17), 향후 여호수아 시대 때부터 사울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속으로 거하였다(Allen). 본문에서도 이들은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VanGemeren).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스르므로 이후 축복 면에서 유다 족속에게 밀리게 되었다(9-11, 67, 68절).

⭕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 본문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느 시점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이스라엘이 블레셋 족속들의 침공을 받고 싸웠을 때 법궤를 빼앗기고 패퇴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mphell, VanGemeren). (2)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 넘어가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되는 길보아 전투의 사건을(삼상 31:1-13) 가리킨다고 한다(Weiser). (3) 에브라임 족속으로 대표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722년에 멸망당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한다(Haglund). (4) 에브라임 족속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거민들을 진멸시키는 일에 실패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Alexander). 이중 본문의 문맥과 그 내용으로 볼 때 (1)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시78:1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이란 모세의 시내 산 언약을 가리킨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을 준수할 경우 '내(하나님의)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출 19:5, 6)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피로 제정한 것으로서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출 24:1-11). 더욱이 하나님은 언약을 지킬 경우에는 축복이요, 거역할 경우에는 저주라는 약속을 하셨었다(레 26:15-20;신 29:9). 또한 언약은 하나님과 피로 맺은 약속인 바 이의 거역은 곧 하나님께 대한 불복을 뜻한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언약의 거역에 대한 심판은 당연하며 치명적인 것이라 하겠다.

⭕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지켜야 할 언약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율법을 이행하는 것 또한 구속력을 갖는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 내용으로서 이 율법을 준수할 경우에는 축복, 거역할 경우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언급하셨다(레 26:3-39;신 28:1-66).

성 경:[시78:1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여호와의 행하신 것...잊었도다 - '기사'의 히브리어는 '팔라'(*)로서 4절의 '기이한 사적'이란 말과 같다. 그리고 본문은 12-16절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애굽에서 기적을 행하시사 구원하시며 광야에서 갖가지 이적을 행하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은 것을 가리킨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여호와 신앙에 착념(着念)하는 것을 잊음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쇠진(衰盡)되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시78:1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애굽 땅 소안 들에서...행하셨으되 -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신 사실에 관한 언급이다(출 7:1-13:22). '소안'은 '저지'(低地)라는 뜻으로서 애굽의 나일 강 삼각주 북동부, 나일 강 동쪽 제2지류 바하르 모에즈(Bahr Moez) 연변의 한 성읍이다. 이 성읍은 애굽의 힉소스 왕조(Hyksos Dynasty, B.C. 1674-1514)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도시로서 당시 애굽의 수도로 존속한 것으로 짐작된다(사 19:11, 13;30:4;겔 30:14). 그리고 이는 후에 라암셋 2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수도로서 존속되었다고 한다(Anderson). 이 도시는 후에는 타니스(Tanis, Thanis)로도 불리웠다 한다(Clark).

성 경:[시78:1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 홍해 물을 갈라서 멈추게 하시고 그 물을 통로의 벽처럼 길 양쪽으로 서게 하신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출 15:8;수 3:13, VanGemeren).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상황하에서 홍해를 도하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그들이 하늘의 구름 아래와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침례를 받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고전 10:1, 2).

성 경:[시78:1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구름으로...화광(火光)으로 - 이는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사실을 가리킨다(105:39;출 13:21;민 9:16, 17). 여기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시78:1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 '쪼개시고'에 해당하는 '바카'(*)는 13절의 '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같다. 본문의 사건은 출 17:6에서 모세에 의해 반석이 쪼개어지고 이스라엘 족속들이 물을 공급받은 사실을 가리킨다(Anderson). 그리고 이는 영적으로는 신약에서 신령한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사 백성들에게 영적인 음료, 생명수를 마시게 한 사실을 암시한다(고전 10:4).

성 경:[시78:1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망각의 죄]

⭕ 또 반석에서 시내를...흐르게 하셨으나 - 이는 15절의 사건과는 또 달리 민 20:10, 11에 나타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Anderson, Alexander). 당시 모세는 출애굽 제40년, 광야 방황의 38년째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성화에 못 이겨 반석을 두 번 침으로 물을 솟아나게 하여, 백성들과 짐승들로 먹게 하였다. 한편 본문의 '반석'(*, 세라)은 15절의 '반석'(*, 추르)과는 히브리어 단어가 서로 다르나 상호 동의어인 것으로 본다(Anderson).

성 경:[시78:1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희는 계속하여...범죄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질 만한 하나님의 능력(12, 13절), 임재 및 인도하심(13절), 필요의 공급(14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범죄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무지함과 완악함을 엿보게 한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그 안에서 정죄되고 완고하게 되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렘 7:14),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 등의 성구에서 지적하는 존재, 즉 본성적으로 죄를 가진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 '지존자'란 히브리어로 '옐룐'(*)으로서 직역하면 '가장 높은'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로서 그분이 모든 존재보다 뛰어나시고 탁월하게 거하심을 가리키며, 특히 대적에 대해서는 그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으시는 초월적 능력자로서,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으로서 거하심을 나타낸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자'(9:2;21:7;46:4;73:11;민 24:16;신 32:8;사 14:14)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한편 본문의 '배반하였도다'의 '마라'(*, 쓰다, 반역하다)는 8절의 '패역하여'란 말과 같다. 결국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역하여 거스르었다는 뜻이다.

성 경:[시78:1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여 - '저희 탐욕대로'(*, 레나페솽)의 기본형 '네페쉬'(*)가 '영혼', '욕망(식욕)'등을 뜻하는 바,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혹은 '그들의 욕망(식욕)을 위하여'란 뜻으로 볼 수 있다(Anderson, Alexander). 특히 본문에서 '영혼'이란 지(知), 정(情), 의(意)를 포함한 인격 자체 또는 인간의 자아를 뜻하므로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의 자아를 위하여'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구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인생을 간구하되, 하나님을 시험하는 형태로 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필요로 해서 간구한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자아 욕구를 위해 간구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던 것이다.

⭕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 '시험하였으며'에 해당하는 '나사'(*)는 '시험하다'(test), '시도하다'(try)의 뜻이다. 이는 어떤 것을 하기를 시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순종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시기 위해 시험하는 것(26:2;창 22:1) 또는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뜻(출 17:2, 7;민 14:22)으로 사용된다(Anderson).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한낱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시험하려 했는데, 이는 성경에서 엄하게 금하는 바이다(마 4:7).

성 경:[시78:1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하나님이...식탁을 준비하시랴 -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서 '능력자'란 뜻이며, 히브리인들이 전능하고 위엄 있으신 하나님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이름 중 하나이다(68:19, 20;80:10;창 14:18-22;35:3, 11;49:25). 그런데 본문에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말을 한 것은, 심히 모순된 것으로서 그들의 완악함과 불신의 정도, 시험의 양태를 가히 짐작케 한다. 이스라엘 족속의 이런 태도는 23:5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히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 대한 회의와 신뢰의 대조적인 태도를 엿보게 해 준다.

성 경:[시78:2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가 반석을...떡을...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 여기에서 사용된 '반석'의 히브리어 '추르'(*)는 15절의 '반석'과 같은 말이다. '떡'과 '고기'란 '만나'(출 16:3, 31)와 '메추라기'(민 11:4, 31)를 뜻한다. '만나'는 하나님이 호렙 산 반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하시기 전에 베풀어 주셨다(출 16:1-31;17:1, 6). 그런데 본문에서는 반석에서 물을 공급해 주신 후에 '만나'를 주실 수 있느냐라고 묻는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호렙 산 물을 공급하신 이후에도 능히 계속적으로 만나를 베풀어 주실 수 있을 것인가라고 이스라엘 족속들이 의심한 것을 뜻할 수 있다. (2) 본문이 한편의 시인 바, 기자가 어떤 역사적인 연대 순서를 무시하고 시적인 형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혹과 불신을 언급하다 보니 본절처럼 되어진 것이다. 주석가 로린슨(Rawlinson)은 이중에서 (2)를 지지한다. 아무튼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전에 하나님의 초능력적인 이적을 몸소 체험했으면서도 또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불신의 태도를 보였다. 이것은 전문(前文)의 12-16절에서 갖가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과 임재, 인도하심 등을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계속하여 17절에서 범죄한 유형과 유사하다.

성 경:[시78:2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심이여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불경건한 말을(20절) 들으셨다는 것은 당신의 초월성 및 편재성(偏在性)과 전능성을 엿보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근본 영이시므로(요 4:24) 온 천지 어느 곳에나 계시며,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 우주의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아시며 모두 감찰하신다(출 16:7-9;민 11:1;12:2).

⭕ 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며 - 본문에서 '야곱'이란 후문의 '이스라엘'과 동의어이며, 특히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열두지파로 구성된 유기체적 공동체임을 잘 나타내준다(Anderson). '노가 맹렬하며'(*, 에쉬 니쉐카)는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불이 불붙다'(a fire was kindled, KJV, RSV)의 뜻이다. 여기에서 '불'이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파괴적이고 심판적인 진노를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진노를 나타나시되 크게 발하심을 암시한다.

⭕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가 올랐으니 - '노'란 히브리어로 '아프'(*)로서 '코', '콧김', '분노'란 뜻이며, 전문의 '노'와는 다른 말이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전문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서 상호 병행 구절이라 할 수 있겠다.

성 경:[시78:2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 '믿지'의 히브리어 기본형은 '아만'(*)으로서 '세우다', '지탱하다', '신뢰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이것은 본문에 표현된 믿음이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임을 뜻한다 하겠다. 테이트(Tate)는 이와 관련하여 믿는다는 것은 그 근본적인 사상이 '신뢰하는 것', '확신하는 것', '의뢰하는 것',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것 안으로의 믿음을 갖는 것(to have faith in someone or something)을 뜻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앤더슨(Anderson)은 이에 대하여 '구약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사상 면에서 표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숙연하게 그분의 명령과 약속들을 간직하고 대하는 자세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의 자세로 대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앤더슨은 구약의 믿음이 말씀과 언약에 기초하여 신뢰의 자세로써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밝혀주는 구절로서 119:66;창 15:6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런 믿음을 갖지 아니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시험하는 불경을 범하였던 것이다.

⭕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 '의지하지'의 '바타흐'(*)는 '(피난키 위해) 서둘러 가다', '신뢰하다', '의뢰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이 말은 전문(前文)의 '믿지'(*, 아만)와는 약간 그 어감이 다르다. '아만'이 하나님께로 들어가 신뢰함으로 하나님과 두터운 관계를 형성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본문의 '바타흐'는 하나님께 나아가 의뢰함으로 안전한 구원을 획득한다는 측면에서 언급되어진 것이다(Anderson).

성 경:[시78:2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궁창을 명하시며 - '궁창'의 히브리어 '솨하크'(*)는 동사 '솨하크'(*, 잘게 부수다, 가루로 만들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부숴진) 가루', '구름', '궁창' 등의 다양한 뜻으로 쓰인다. 이는 흔히 창세기에서 쓰여진 '궁창'(*, 라키아, 넓게 펴진 것, 창 1:6-8, 14, 15)과는 다른 말이다. 후자가 넓게 퍼져 덮고 있는 거대한 창공을 뜻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구름이 형성되어 있는 하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이 두 단어 모두 땅 위의 하늘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우주가 하늘과 땅 및 바다(또는 지하)로 형성되었다고 믿었는데, 이 궁창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하늘이란 뜻도 함축하고 있었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이 궁창에 명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하나님으로서 모든 만물들을 직접 주관하시고 역사하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심을 잘 나타낸다. 더불어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일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하기도 한다(33:6;147:18).

⭕ 하늘 문을 여시고 - '하늘 문'(*, 달티 솨마임, 하늘의 문들, the doors of heaven, KJV, RSV)은 구약 성경에서 본문에 한번 언급되어진다(Anderson). 창 28:17에 '하늘의 문'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는 '솨아라 하솨마임'(*, the gate of heaven, KJV, RSV)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말로 '하늘의 창들'(*, 아르비트 하솨마임, 창 7:11;8:2;왕하 7:2, 19)이라는 표현이 있기도 하다(욥기 서론, '히브리인의 우주관' 참조). 어쨌든 본문 역시 하나님이 이 하늘을 직접 주관하시고 역사하심을 잘 드러내는 시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시78:2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 '만나'(*, 만)는 '무엇이냐'란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출 16:15, 31을 참조하라. '비같이 내려'란 '마타르'(*)로서 '비가 내리다'란 뜻이며, 풍족히 흡족하게 내려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비는 이 땅의 모든 생물들이 자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이며, 자연의 식물들은 이 비를 흡수함으로 생명의 물을 공급받는다. 고대 가나안의 이방인들은 이런 점에서 그들의 우상 바알을 풍요의 신, 비와 바람을 주관하여 곡식을 풍요롭게 하는 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바알과 같은 거짓 우상 신이 아닌 참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만나를 풍요롭게 내리신 것이다.

⭕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 '양식'의 히브리어 '다간'(*)은 '곡물'(민 18:27;학 1:11), '곡식'(창 27:28;신 7:13;느 5:2) 등의 뜻이다(the grain, NIV, RSV;the corn, KJV). 이것은 만나가 곡식 낟알처럼 작고 둥글며 갓씨같이 생겼기 때문으로 짐작되어진다(출 16:14, 31). 이를 다른 곳에서는 '하늘 양식'(*, 레헴 솨밈, the bread of heaven, KJV, NIV)으로 표현하기도 했다(105:40;출 16:4). 아무튼 여기서 '하늘 양식'으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곡식 낟알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신약 성경에서 이는 하늘로부터 인간의 참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 6:31-51).

성 경:[시78:2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 '권세 있는 자'의 히브리어 기본형 '아비르'(*)는 '힘 있는', '힘 있는 자'를 뜻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비림'(*) 곧 '힘 있는 자들'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천사들'(angels, KJV, NIV, RSV)로 본다(Dahood, Alexander, VanGemeren). 그러나 성경에서 '아비르'(*)란 말은 '힘 있는 사람'(욥 24:22;34:20), '말과 같이 힘 있는 동물'(삿 5:22)을 지칭할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전능자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132:2, 5;사 1:24;49:26;60:16). 한편 본문에 대해 혹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유하고 높은 자들의 상에나 놓여질 수 있는 떡, 즉 가장 좋고 맛있는 떡을 먹은 것을 뜻한다고 하기도 한다(Clark). 그러나 그보다는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 곧 만나를 먹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시78:2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가 동풍으로...남풍을 인도하시고 -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바람을 일으키사 메추라기를 바다 쪽에서 시내 반도 광야의 이스라엘 족속에게 불려오게 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에 대하여 민 11:31은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동풍'과 '남풍'을 '남동풍'으로 보고, 본문에서는 저자가 단지 시적인 이유로 따로 구분해서 기술했다고 하기도 한다(Anderson).

성 경:[시78:2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희에게 고기를 티끌같이 내리시니 - '고기'란 시내 반도 광야 여행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이신 메추라기를 가리킨다(민 11:4, 18, 31, 32). 이 메추라기는 꿩과에 속하는 새로서 다갈색에 흑백의 반점이 있는 철새(migratory birds)이다. 이는 주로 아라비아나 아프리카에서 겨울을 보내는데 3-4월이면 아라비아나 아프리카 지방에서 북쪽 유럽 쪽으로 이동해 날아가며, 9-10월경에는 다시 북쪽 유럽 쪽에서 남쪽 아라비아나 아프리카 지방으로 날아간다 한다(Anderson). 그러므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였던 시내 반도 광야는 이 메추라기들이 통행하는 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거주 지역으로 떨어지게 하신 것은 하나의 자연적 현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이다. 한편 본문의 '내리시니'의 히브리어 '마타르'(*)는 24절의 '비같이 내려'에서와 동일한 히브리어이다.

⭕ 바다 모래 같은 - 무수한 숫자 또는 많은 양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이다(창 22:17;32:12).

성 경:[시78:2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그 진중에...거처에 둘리셨도다 - '진중'(*, 마하네)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데 모여 장막을 친 거대한 진영을 뜻하며(출 32:19;33:7;민 2:3, 9, 10), '거처'(*, 미쉬칸)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진영 가운데 천막을 쳐서 만든 거주지 또는 천막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바로 근처에 메추라기 떼를 떨어지게 하셨다는 뜻으로서 모세는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민 11:31)로 표현하였다.

성 경:[시78:2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하나님이 저희 소욕대로 주셨도다 - '소욕'의 히브리어 '타아와'(*)는 '아와'(*, 바라다, 사모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열망', '욕망'의 뜻을 갖는다. 이 말은 18절의 '탐욕'(*, 네페쉬)의 뜻과 유사하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자아 중심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음을 뜻한다. 더불어 이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주신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며 시험했던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명백히 보여 주사,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믿음 가운데로 인도하고자 하신 크신 사랑을 엿보게 한다.

성 경:[시78:3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희가 그 욕심에서...아니하고 - '욕심'의 히브리어 '아와'(*)는 29절의 '소욕'과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의 욕망 추구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한 결과에 따라(19, 20절) 하나님이 능력의 증표로서 이적적으로 메추라기를 주셨을 때 자신들의 잘못과 불경건을 회개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완악함으로 인해 여전히 욕심 가운데 거하여 심판받았다(31절).

⭕ 저희 식물이...있을 때에 - 모세는 이에 대하여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민 11:33)라고 묘사하였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메추라기의 주어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커녕 더욱 자신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시78:3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을 시험한 죄]

⭕ 저희 중 살진 자...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 '저희 중 살진 자'란 이스라엘 족속 중에 힘이 세고 건장한 자들을 가리킨다(Dahood). 그리고 '청년'에 해당하는 '바후르'(*)는 문자적으로 '택한 자'(the chosen men, KJV,민 11:28)를 뜻하며 여기서 '청년'(전 11:9)이란 말이 유추되었다.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와 관련하여 이 용어가 흔히 힘이 세며 나아가 한창인 젊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진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진멸하심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어떤 자라도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목도케 해 주셨다.

성 경:[시78:3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그럴지라도(*, 베칼 조트) - 직역하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all this, NIV, RSV)의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들과 심판을 보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아니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 '기사'에 대해서는 11절, '믿지 아니하였으므로'에 대해서는 22절을 각각 참조하라.

성 경:[시78:3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 '헛되이'란 히브리어로 '헤벧'(*)로서 '호흡', '수증기', '텅 빔' 등을 뜻하며, 이에서 '공허함', '덧없음', '허무함' 등의 의미가 유출된다. 이는 인생의 허무함을 증거하는 전도서에서는 '헛되다'(전 1:2)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본문의 '보내게 하시며'에 해당하는 '칼라'(*)는 '끝나다', '소모하다', '마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불신 가운데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허송 세월로 방황케 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 같다(민 14:26-35, Anderson, Alexander). 이스라엘 족속은 출애굽 후 수많은 하나님의 이적과 능력을 보았음에도 그분을 믿지 않고 시험함으로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는 심판을 받았다.

⭕ 저희 해를 두렵게...하셨도다 -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 40년 방황 세월 중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인해 온갖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지낸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두렵게'의 히브리어 '베할라'(*)는 '전율', '떪', '공포' 등을 의미하나 레 26:16에서는 '재앙'으로, 사 65:23에서는 '재난' 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성 경:[시78:3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이며 18절에 언급된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족속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며 불신하였다가 무서운 징벌을 당하자, 다시금 그 능력의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목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함이었을 뿐이며 상황이 호전되자 다시금 예전의 죄악을 반복해 나갔다.

성 경:[시78:3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 '반석'(*, 추르)은 15절의 '반석'과 같은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족속의 삶 또는 축복의 터전, 근원이 되심을 고백한 말이다.

⭕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 - '지존하신 하나님'(*, 엘 엘룐)이란 하나님의 복합 고유 이름이며, 같은 유형으로 '엘 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3). '엘 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창 17:1) 등이 있다. 이는 창 14:18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한편 '구속자'의 히브리어 '가알'(*)은 '무르다', '무르는 자', '복수자' 등의 뜻이 있다. 이는 원래 히브리인 사회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이 종으로 팔리거나 그의 토지가 다른 사람에게 팔렸을 경우, 그를 대신해서 그 종된 자나 토지를 다시 되돌려 속해 주는 친척을 가리킨다(레 25:25, 48, 49). 이 말은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고의적으로 피살된 친척을 대신 복수해 주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35:19, 24, 25). 만약 이 말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경우, 이는 당신의 백성들을 압박자로부터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뜻한다(19:14;잠 23:11). 본문의 경우는 제일 후자에 해당한다.

성 경:[시78:3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저희가...그에게 아첨하며 - '아첨하며'의 히브리어 '파타'(*)는 '열다', '속이다', '유혹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시련과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피상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찾았던 기만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영역본 KJV, NIV, RSV 등은 이를 '아첨하다'(flatter)로 번역하기도 했다.

성 경:[시78:3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 '정함'의 히브리어 '쿤'(*)은 '세워지다', '준비하다', '확실하게 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8절에서는 '정직하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나아갔으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온전히 견고하게 서 있지 못하고 죄성으로 인해 들떠 있으며 육신적 소욕에 따라 행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 '성실치'에 해당하는 '아만'(*)은 '세우다', '지탱하다', '신뢰하다', '신실하다'의 뜻으로서 8절에서는 '충성치'란 말로 쓰이기도 했다. 본문에서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신실치' 아니했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10절 참조).

성 경:[시78:3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 '자비하심'에 해당하는 '라훔'(*)은 '라함'(*, 귀여워하다, 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인정 많은', '동정심 많은'의 뜻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로서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103:8;116:5;145:8;출 34:6).

⭕ 죄악을 사하사 - '아온'(*, 죄악)이란 '아와'(*, 구부리다, 잘못을 저지르다)에서 유래된 말로 '악', '불의'(iniquity, KJV, RSV)를 뜻한다. 본문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왜곡되이 행한, 사악한 불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사하사'의 히브리어 '카파르'(*)는 원래 '덮다'를 뜻하며, 이에서 '속죄하다', '용서하다'라는 뜻이 유출되었다. 아마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죄의 근거 즉 희생 제물의 피나, 아니면 특히 본문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이는 모세 같은 중보자의 중보 속죄 기도등에 의해 죄악을 덮어 두고 용서하신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Rawlinson, 출 32:11-14;34:6-9).

성 경:[시78:3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거짓 회개의 죄]

⭕ 저희는 육체뿐이라 -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존재, 나아가서 죄의 결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제한적 존재임을 나타낸다(창 2:7). 이에 대해 다윗은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4)라고 표현한 바 있다.

⭕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 - 전문(前文)과 유사한 말로서 인간이 이 세상에 잠시 존재하나 곧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임을 암시한다(사 40:6, 7).

성 경:[시78:4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가...그를 반항하며 - '반항하며'의 히브리어 '마라'(*)는 '쓰다', '반역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8절에서는 '패역하여'라는 말로 쓰였다. 본문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 마음을 쓰라리게 한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시험하였다(민 14:22).

⭕ 그를 슬프시게 함 - 히브리어는 '아차브'(*)로서 '괴롭히다', '비탄케 하다', '슬프게 하다'(grieve, KJV, NIV, RSV)의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性論的)인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 족속의 망령된 행동으로 인해 크게 배반감을 느끼신 것을 나타낸다.

성 경:[시78:4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가...재삼 시험하며 - 이는 가데스에서의 불신 사건으로 광야 40년 동안에 출애굽 제1세대들이 죽고 난 후, 그들을 이은 제2세대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한 것을 가리킨다.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에 대해 "저자는 지금 젊은 세대(즉, 출애굽 제2세대)가 여호수아의 죽음 후(수 24:31) '저희 열조같이'(57절) 행한 것을 보여 주고 있다"라고 주해한다. 그들은 선조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과 같이(18절) 하나님을 시험하는 역사의 전철을 밟았던 것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 이는 이사야 선지자가 주로 쓰는 하나님의 고유 이름이다. 이사야는 이를 약 25회 가량 썼으며(사1:4;5:19, 24) 예레미야가 2회(렘 50:29;51:5), 기타 다른 제자가 여러 번 사용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을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별시켜 주는 이름, 즉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자존적(自存的)으로 모두 온전하신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Alexander).

⭕ 격동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타와'(*)는 '구획하다', '긋다', '긁다' 등의 뜻이 있다. 이는 드물게 사람의 이마에 표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겔 9:4).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의견이 아래와 같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시리아어의 어원에 따라 '슬프게 하다', '비탄케 하다'(grieve)로 보아야 한다(vexed, NIV, Anderson;provoked, RSV). (2) 이 말의 어원을 모세가 가나안 땅의 경계를 그을 때 사용한 것에서(민 34:7, 8)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한하다'(limited, KJV, Alexander)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중 (1)을 따를 경우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을 슬프게 한 것을 뜻하며, (2)를 따를 경우에는 이스라엘 족속이 감히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 것을 뜻한다. 이중 어떤 견해를 취하더라도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성 경:[시78:4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가 그의 권능을...아니하며 - '권능'(*, 야드)은 직역하면 '손'(hand, KJV)을 뜻한다. 이는 성경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인 동형동성론적(神人同性論的) 용법으로서 개역 성경 그대로 '권능'이나 '능력'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모세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권능(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주 사용한 말이기도 하다(출 7:5;신 7:8;겔 1:3;3:14, 22;8:1;37:1). 본문은 이스라엘의 제2세대, 즉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선조들에 의해 경험되어진 하나님의 권능을 기억지 않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선조들에 의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들었을 터인 바, 그 권능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뢰했어야 했다.

⭕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 - 현재 출애굽 제2세대들의 선조, 즉 출애굽 제1세대들이 애굽에서 출애굽하던 날을 가리킨다(VanGemeren, Tate).

성 경:[시78:4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소안 들 - 12절 참조.

⭕ 기사 - 이는 히브리어 '모페트'(*)로서 11, 32절의 '기사'(*, 팔라)와 다르나, 그 의미는 '이적'(출 4:21;대하 32:24), '기사'(출 11:9;렘 32:20), '표적'(신 28:46)으로 유사하다(12절 참조).

성 경:[시78:4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의 강(*, 예오레헴)은 직역하면 '저희의 강들'(their rivers, KJV, NIV, RSV)이다. 이는 혹자가 말한 대로 장엄 복수형으로 보아 '그들의 거대한 강'을 의미하는 말로서(Gunkel) 나일 강을 뜻할 수도 있으나, 이보다는 나일 강과 그 지류를 가리킬 수도 있다(Alexander, Anderson). 당시 나일 강에는 자연적으로 그 강에 물을 흘려 보내는 지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공적으로 그 주위 여러 지역에 물을 대기 위해 판 지류도 있었다 한다. 시내(*, 노젤리헴) 역시 '저희의 시내들'(their streams, NIV, RSV)이란 뜻으로 나일 강 외 애굽 각 지역의 개천들을 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애굽 전역의 '물들과 하수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를 피로 변하게 하셨다(출 7:17-25).

성 경:[시78:4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파리 떼를...물게 하시고 - '물게 하시고'의 히브리어 '아칼'(*)은 '먹다', '삼키다'(devoured, KJV, NIv, RSV) 등의 뜻이 있다. 이는 파리떼들이 애굽 사람들의 집과 땅에 가득해서 음식이나 기타 물질들을 먹어 치우고 삼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파리의 재앙은 출애굽 사건 당시 네 번째 재앙으로 애굽에 내려졌다(출 8:20-24).

⭕ 개구리를...해하게 하셨으며 - '해하게 하셨으며'에 해당하는 '솨하트'(*)는 '부패하다', '망하다', '파괴하다' 등의 뜻이다. 본문에서는 개구리가 애굽 사람들의 집과 침실, 음식 그릇 등에 올라와 그들을 해롭게 한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애굽에 내려진 두 번째 재앙이다(출 8:1-15).

성 경:[시78:4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의 토산물을...메뚜기에게 주셨으며 - '황충'의 히브리어 '하실'(*)은 '하살'(*, 먹어 치우다, 소모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흔히 '황충'으로 번역된다(왕상 8:37;대하 6:28;사 33:4;욜 1:4). 이는 메뚜기과의 곤충으로서 약 5cm 정도의 길이이며 풀무치와 비슷하고 떼를 지어 다니며 곡물들을 먹어 치운다. 그리고 '메뚜기'(*, 아르베)는 '라바'(*, 많다, 증가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성경에서 흔히 '메뚜기'로 번역되며 일부에서는 '황충'(105:34;렘 46:23)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본문에서 '황충'이나 '메뚜기'는 같은 종(種)의 곤충으로 언급된 듯하다. 이 재앙은 여덟 번째로 임한 것이다(출 10:4-15).

성 경:[시78:4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우박으로...서리로 죽이셨으며 - 여기서 '뽕나무'(*, 솨캄)는 흔히 '무화과 뽕나무'로 지칭되는데 이 나무는 뽕나무와 비슷하나 그 열매는 무화과와 유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주로 애굽이나 팔레스틴의 저지 평원이나 요단 평지에서 자라며 그 열매는 무화과 보다 약간 못하나 일반 서민의 식품으로 사용되었고(암 7:14), 그 나무는 가구나 관 등의 재목으로 쓰였다 한다(왕상 10:27;대상 27:28;사 9:10;암 7:14). 한편 '서리'(*, 하나말)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 한 군데에 나타나며(Anderson)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 본문의 우박 재앙은 일곱 번째로 내려졌다(출 9:18-26).

성 경:[시78:4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 가축을...번갯불에 붙이셨으며 - 이는 47절의 '우박'과 함께 하늘의 '뇌성'과 '불덩이'로 애굽 땅의 짐승들을 치사 죽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출 9:23, 24). 그러나 혹자는 본문의 '우박'(*, 바라드)을 '온역'(*, 데베르, pestilence, 출 9:3, 15)의 오기로 볼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Anderson). 이에 대한 근거로서 앤더슨(Anderson)은 일부 히브리어 사본과 심마쿠스(Symmachus) 역본을 예로 들며, 이와 함께 본문의 '번갯불'(*, 레쉐프)이 합 3:5에서는 '불덩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온역'과 병행 구절로 쓰여졌음을 증거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가 반게메랜(VanGemeren)도 본절의 사건을 출 9:1-7에서 가축들이 질병에 걸린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성 경:[시78:4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벌하는 사람들(*, 미쉴라하트 말라키 라아임) - 직역하면 '해(害)하는 천사들의 무리'로서 이는 곧 '해를 가하는 천사들의 무리'(a company of destroying angels, RSV)라는 뜻이다. 이 천사들은 아마 하나님이 출애굽 전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에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도록 보내신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출 12:23;히 11:28). 이 천사들은 후에 범죄한 다윗(삼하 24:16)에게와 유다를 공격한 앗수르 군대를 진멸하기 위해 히스기야 시대 때(왕하 19:35) 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성 경:[시78:5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치도하사(*, 예팔레스 나티브) - 직역하면 '그가 길을 평평케 하셨다(또는 예비하셨다)'의 뜻이다(made a way, KJV).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본문에서는 당신의 분노를 어떠한 거침돌이나 방해물이 없이 주권적 의지대로 내리셨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에 관하여 알렉산더(Alexander)는 "하나님은 그들(애굽 사람들)의 재산이나 가족을 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고 그들의 생명 자체에로 그의 치심을 확대해 가셨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성 경:[시78:5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함의 장막 - '함'(*, 함)은 '뜨겁다', '검은 피부'라는 뜻으로서 노아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다(창 6:10). 이는 이후 남아라비아, 에디오피아, 이집트, 붓(렘 46:9) 등의 종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 그 기력의 시작 - 이는 '장자'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Alexander). 여기서 '시작'(*, 레쉬트)은 다양하게 번역된다. 즉 '시작'(욥 8:7;잠 8:22;17:14;전 7:8)이란 말로 번역되기도 하나 또한 열매의 '첫 것'(출 23:19), '첫 열매'(겔 20:40), '첫 소산'(민 18:12) 등으로도 번역 된다. 따라서 본문은 '그 기력의 첫 소산'(the first issue of their strength, RSV) 혹은 '맏아들'(the firstfruits of manhood, NIV)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성 경:[시78:5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자기 백성을 양같이...내시고 - '자기 백성'이란 이스라엘 족속들이 이스라엘 족속들이 아브라함의 언약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존속해 왔음을 암시해 준다(창 17:2-14). 그리고 '양같이'는 일종의 수사학적인 표현으로서 하나님께서 목자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사 인도하여 내심을 나타낸다(23:1;28:9;80:1). 특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종종 목자와 양떼의 관계에 비유되고 있다(사 40:11;53:6;슥 10:3;요 10:2, 5).

⭕ 광야에서...지도하셨도다 - '지도하셨도다'에 해당하는 '나하그'(*)는 '몰다', '이끌다', '인도하다'의 뜻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도하(渡河) 전후에 광야에서 인도하셨음을 나타내는 말이다(Alexander).

성 경:[시78:5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감사치 않은 죄]

⭕ 저희를...두려움이 없었으나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로 건너가게 하신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앞에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인들이 쫓아오자 처음에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권고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안전히 홍해를 도하하였다(출 14:10-25).

성 경:[시78:5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그 성소의 지경(*, 게불 카데쇼) - 직역하면 '그의 거룩함(또는 거룩한 땅)의 경계'(the border of his holy land, NIV)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경'(*, 게불)이란 말은 '경계'(민 21:13, 15, 24;34:3, 6, 7, 9)란 뜻뿐만 아니라 '영토'(territory) 즉 경계에 의해 둘러싸인 땅을 뜻하기도 한다(삼하 21:5;왕상 1:3, Anderson). 따라서 본문의 말은 '그의 거룩함의 영역'(the territory of his holiness)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VenGemeren). 따라서 일반적으로 본문은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 이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기로 하신 약속의 땅, 거룩히 구별하신 땅이다(창 15:7-21;출 3:8;6:8).

⭕ 그의 오른손이 취하신 산 - 여기에서 '오른손'이란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인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42절 참조). 특히 히브리 사회에서는 오른쪽이 힘, 능력 등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바(89:13;118:16;출 15:6, 12), 이는 하나님의 강하신 권능을 뜻한다 하겠다. 그리고 본문의 '산'에 대해 혹자는 산악 지방으로서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고 하나(McCullough), 그보다는 일반적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 임재의 처소로 표현되어지는 시온 산을 뜻한다고 본다(2:6;48:2;65:1; 84:7;110:2;사 8:18, Anderson, Alexander, VanGemeren, Rawlinson).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거룩한 땅, 임재의 처소로 인도하시사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다스리시며 영광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 경:[시78:5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줄로 너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 '기업'의 히브리어 '나할라'(*)는 '나할'(*, 물려받다, 상속받다)에서 유래된 말로 '상속된 것', '상속 재산', '소유물'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그리고 '분배하시고'의 히브리어 '나팔'(*)은 '떨어지다', '떨어뜨리다'의 뜻으로 여기서 (주사위를 떨어뜨려 소유물 등을) '나누다', '분배하다'의 의미가 유출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지파의 종족 수에 비례하게 나누어 주신 것을 암시한다(민 26:52-56; 33:53-55). 이것은 기업으로서의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인 바 각 사람에게 은혜가 고루 미치게 함을 뜻한다.

⭕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 '그 장막에'(*, 베아할리헴)는 직역하면 '그들의 장막들에'(in their tents, KJV, RSV)의 뜻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족속보다는 가나안 이방 족속들의 장막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Rawlinson, Alexander). 결국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사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힘, 능력,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몰아내고 거기서 터전을 잡고 거하게 하셨음을 암시한다.

성 경:[시78:5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반항하여 - '지존하신 하나님'이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엘로힘 엘룐'(*)으로서 35절의 '지존하신 하나님'이란 말과 거의 유사하다. 여기서 '엘로힘'(*)이란 35절의 '엘'(*, 능력, 능력자)의 복수로서 흔히 히브리인 사이에서 전능하신 최고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 족속들이 시험하고 반항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Anderson). 그들은 온 우주에서 유일하시며 최고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였던 것이다. 본문의 '반항하여'(*, 마라)는 '쓰다', '거역하다'의 뜻이다(8, 40절).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을 쓰라리게 하며 거역하였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시78:5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저희 열조같이...빗가서 - '배반하고'(*, 수그)는 '되돌아가다', '물러서다'등의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가지 않고 오히려 돌이켜 물러서는 것, 헛된 길로 가기 위해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궤사를 향하여'의 히브리어 '바가드'(*)는 '덮다', '남몰래 행동하다', '속이다'등의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은밀히 범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족속들의 죄악된 행위는 그들의 열조, 즉 출애굽 제1세대들의 완악한 행위를 그대로 본딴 것이었다.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와 관련하여 언급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의 후손들은 여호수아시대 이후 더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패역된 길로 나아갔다고 적절히 주해하고있다(41절 참조).

성 경:[시78:5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자기 산당으로 - '산당'의 히브리어 '바마'(*)는 '높은 곳'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곳으로서(민 22:41;33:52) 산이나 높은 구릉 지대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설치한 장소 또는 집 등을 가리킨다(겔 6:3).

성 경:[시78:5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 '미워하사'에 해당하는 '마엔'(*)은 원래 '거절하다'(창 39:8;출 7:14;9:2;사 1:20)의 뜻이다. 특히 이는 단순히 거절하는 내적인 의향뿐만 아니라 그것의 외적인 표현까지도 함축하는 말이다(Alexander).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크게 진노하사 이에 상응하는 징벌의 행동을 취하심을 뜻한다.

성 경:[시78:6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실로의 성막...떠나시고 - '실로'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데 그 위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2km 지점, 즉 예루살렘에서 세겜으로 가는 길 동편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의 한 성읍이다(수 18:1-10). 이 성읍은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초기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여호수아 시대 때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이곳에 성막을 세웠으며(수 18:1), 이스라엘 족속들은 이곳에 모여 매년 절기를 지키기도 했었다(삿 18:31;삼상 1:9, 24;2:14;3:21;4:3, 4).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자 하나님이 이들을 떠나시고 이곳의 언약궤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했으며(삼상 4:5-11), 그 후로 언약궤는 다시 이곳에 안치되지 못했다(삼상 6:21;7:1, 2;삼하 6:2, 11, 17). 하나님께서 인간이 세운 실로 성막을 떠나심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형식적 신앙보다는 내적인, 내실있는 신앙을 원하시고 계심을 암시한다.

성 경:[시78:6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그 능력...자기 영광 - 이는 모두 당시 실로에 있다가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긴 언약궤를 가리킨다(Alexander, Anderson, Tate, VanGemeren). 여기에서 언약궤를 '그 능력'(*, 우조;his strength, KJV;his power, RSV)이라함은 이 언약궤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상징하는 것, 다시 말하면 연약궤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역사하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그리고 언약궤를 '자기 영광'(*, 티페아르토;his glory, KJV, RSV)이라 함은 그 언약궤가 하나님의 높고 존귀하신 영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Alexander). 이 언약궤는 블레셋인과의 전투 와중에 블레셋인들에게 빼앗겼다(삼상 4:1-11).

성 경:[시78:6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 '기업'(*, 나할라)은 55절의 '기업'이란 말과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는 하나님의 소유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의미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28:9;33:12;106:5, 40, Rawlinson, Anderson).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진노하셨음을 뜻한다.

성 경:[시78:63]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 여기서 '불'이란 전쟁의 참화를 가리키거나 또는 파괴적인 전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일 수 있다(민 21:28;암 1:4, 7, 10, 12, Alexander, Anderson).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블레셋인들과의) 전쟁에서 비참한 참상을 당한 것을 뜻한다.

⭕ 혼인 노래가 없으며(*, 훌랄루 라) - 여기서 '훌랄루'의 기본형인 '할랄'(*)은 '칭찬하다', '자랑하다' 외에 '며느리로 삼다'는 뜻도 지닌다. 본 문맥에서는 '혼인 때에 축가를 부르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도 결혼 예식은 커다란 축제요, 음악과 노래가 곁들여진 잔치였는데, 이 혼인 노래가 불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결혼식과 같은 즐겁고 평화로운 날이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본절 전반절과 연결시켜 보면,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전사(戰士)당함으로 인해 남은 처녀들이 배필을 맞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their maidens were not given to marriage, KJV).

성 경:[시78:64]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우상 숭배의 죄]

⭕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 이스라엘 족속과 블레셋인들과의 전쟁시, 당시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은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삼상 4:11, 17).

⭕ 저희 과부들은...못하였도다 -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제사장 비느하스의 아내가 그의 남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미처 애곡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죽은 사실을 가리킨다(삼상 4:19-22, Tate). (2)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후 남아 있는그 과부들에게도 심한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에 미처 남편들의 죽음을 애도할 여유가 없었음을 가리킨다(VanGemeren). (3) 죽은 자들의 시체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전쟁터에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애도할 수가 없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중에서는 (1)또는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성 경:[시78:65]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주께서 자다가 깬 자같이 -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아돈'(*, 주권자, 통제자, 주인)의 강세형이며, 흔히 '주', '주인'의 뜻으로 번역된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온 우주의 유일하면서도 절대적인 주권자,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한 말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고유 이름 대신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여(출 20:7;신 5:11) 주로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이 실제로 주무셨다가 일어나신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121:4;사 40:28).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사 보호 또는 구원하시기 위해 의분히 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행하심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일 뿐이다(35:23;44:23;59:4, 5). 하나님은 이전에는 이스라엘 족속들의 죄로 인해 그들을 심판 가운데 방치하셨으나, 이제는 일어나사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다.

성 경:[시78:66]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그 대적을...욕되게 하시고 -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 블레셋인들을 진멸하사 욕되게 하심을 가리킨다. 블레셋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사울과 다윗 시대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삼상 17:1-49).

성 경:[시78:67]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 요셉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장자의 지위를 박탈당하자 그를 대신해서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자였다(대상 5:1, 2). 따라서 그의 후손 특히 그중에서도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세력있는 지파로 활동해 왔으며(9절), 가나안 정복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도 에브라임 지파 내의 성읍인 실로에 안치해 두게 되었다(60절).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고 거절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싫어 버리시며'의 히브리어 '마엔'(*)은 '거절하다'의 뜻이며 59절의 '미워하사'와 같은 말이다. 한편 혹자는 본문의 '요셉의 장막'이 요셉 지파를 뜻하지 않고 실로의 장막, 즉 에브라임 지파 내에 있는 실로의 장막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Anderson).

⭕ 에브라임 지파를...아니하시고 - 하나님이 실로를 떠나 버리신 것처럼 에브라임 지파를 거절하시사 더 이상 이스라엘 내에 지도권을 행사하시지 못하게 하셨음을 뜻한다(Anderson).

성 경:[시78:68]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유다 지파 -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나 열두 아들 중에서 영적으로 큰 축복을 받은 자이다(창 49:8-12).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후손 가운데서 나시리라는 예언을 받았다(창 49:9). 그의 후손은 출애굽 후 광야 야영 때에도 맨 처음 언급된 선두 지파였으며(민 2:3, 4), 광야 여행 때에는 선봉 지파로서 진행했고(민 10:14), 여호수아의 죽음 후 제1선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면하고 영토를 정복하였다(삿 1:1-21).

⭕ 시온 산 - '시온'(*, 치온)은 '요새', '성채'란 뜻이다. 이는 근본 예루살렘의 남동쪽의 조그마한 구릉, 즉 기드온 골짜기와 튀로페온(Tyropeoean) 골짜기 사이의 구릉 지대로서 여부스 족속이 거하였던 요해지(要害地)였다. 이곳을 다윗이 점령하여 다윗 성이라 부르게 되었다(삼하 5:6-9). 그 후 이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고 이스라엘 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되었다(삼하 6:12-19). 그리고 이 시온은 이후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어진 곳을 포함하여 불리워지게 되었고(48:2;50:2),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읍을 전체적으로 대표하여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아 3:11;사 10:32;렘 4:5, 6;애 4:2;슥 1:17). 이 시온은 영적 의미로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주권자, 통치자로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처소의 의미를 담고 있다(2:6;9:11;50:2;99:2;사 8:18). 따라서 성경에서 거룩한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2:6;욜 2:1).

성 경:[시78:69]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 '산의 높음'의 히브리어 '라밈'(*)은 '높음','높은 것들'의 뜻이며 이에 대한 의미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1) 산들이나 언덕들과 같이 높은 곳을 뜻한다(Alexander). (2) 하늘과 같이 높은 곳을 가리킨다(VanGemeren, Anderson). 영역 본들의 경우를 보면, NIV는 the high mountains(높은 산들)라고 번역하여 (1)을, RSV는 the high heavens(높은 하늘들)로 번역하여 (2)를지지하고 있다. 특히 (2)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말이 본문의 성소가 높은 하늘과 같이 영구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튼 본문은 근본적으로 높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성소가 '실로'에서처럼 사라지는 일이 없이(60절) 견고하게영원히 존속하도록 한 것을 가리킴에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성소'란 가시적으로 지어진 솔로몬 성전만을 가리키지는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은 이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성전,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Alexander).

성 경:[시78:70]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그 종 다윗을...취하시며 - 이는 다윗이 양치는 목동으로 있었을 때 선택하신 것을 가리킨다(삼상 16:11-13).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시되 그의 외적인 능력과 신분의 존귀함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주권과 은혜에 따라 행하신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시78:71]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그 백성인 야곱...기르게 하셨더니 - 이스라엘 백성을 야곱이라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5, 21절을 참조하라. '기르게 하셨더니'에 해당하는 '라아'(*)는 '(가축)을 돌보다', '방목하다'의 뜻이며 이에 '다스리다'의 상징적 의미가 유추되었다. 이는 다윗이 전에는 들의 양들을 돌보며 먹였으나, 이제는 목자되신 여호와를 대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며 먹여야 할 위치에 있게 되었음을 잘 나타낸다.

성 경:[시78:72]

주제1:[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주제2:[하나님의 회복의 은총]

⭕ 마음의 성실함으로 - '성실함'의 히브리어 '톰'(*)은 '탐맘'(*, 완성하다, 완전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완전함', '온전함', '흠 없음'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르되,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모든 것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라 행하였음을 시사한다(왕상 9:4).

⭕ 그 손의 공교함으로 - '공교함'의 히브리어 '타분'(*)은 '빈'(*, 구별하다, 이해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분별', '이해', '통찰력'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그손으로 통치하되 특히 분별력 있게, 지혜롭게 치리하였음을 나타낸다.

성 경: [시79:1]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열방이 - '열방'의 히브리어 '고이'(*)는 의미가 다양하다. 이는 성경에서'나라'(83:4;창 10:5;민 14:12), '백성'(창 20:4;수 3:17;사 60:12), '이방' 또는 '이방인'(46:6;레 25:44;왕하 16:3;21:2;느 6:6;사 42:1;겔 38:16), '열방'(출 34:24;대하 32:13), '열국'(민 14:15;삼하 7:23;사 34:1)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는 드물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33:12;창 35:11;사1:4;26:2).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대 랍비(선생)들에게는 '이방인'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었다(59:5, Anderson). 따라서 본문에서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고임'(*)으로서 복수인 바, '이방인들'(the heathen, KJV, RSV) 또는 (이방인들이 사는) '나라들'(the nations, NIV)로 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는 6절에서와 같이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유다' 왕국을 침공한 바벨론을 중심한 이방 나라들을가리킨다.

⭕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 '기업'에 해당하는 '나할라'(*)는 '나할'(*,물려받다, 상속받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상속된 것', '상속 재산', '소유물' 등의 뜻이다. 이런 이미에서 본문의 '주의 기업'이란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74:2;출 34:9;신 4:20).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란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 보다 좁게는 예루살렘을 함축하고 있다(Tate). 따라서 본문은 전문(前文)과 연결해 볼 때 이방 나라들의 이스라엘 침공을 뜻한다 하겠다(왕하 25:1-7).

⭕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살륙을 행하며 성전의 기구들을 훼파한 것을 뜻하는 것 같다(74:6, 7;왕하 25:13-17;겔 9:7).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곳을 떠나신 결과 임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겔 5:11;8:6).

성 경: [시79:2]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주의 종들의 시체를...주며 - 이방 대적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시체가 장사되지 못하고 길에 방치되어 새들과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만 상황을 가리킨다. 유다의 생존자들은 너무도 창졸간에 침입을 당하였기에 그리고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미처 그들을 온전히 매장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Anderson, Tate).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을 커다란 불행, 저주로 생각했었다(신 21:23;사 14:18, 19). 한편 본문의 '성도'에 해당하는 '하시드'(*)는 '인사하다', '친절하다'는 뜻인 '하사드'(*)에서 유래되었으며 '인자한', '경건한 (자)', '선한 (자)' 등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한다(30:4, Anderson).

성 경: [시79:3]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그들의 피를...흘렸으며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피'란 육체의 생명과 직결된 것으로 간주되어진다(레 17:11, 14). 따라서 본문은 대적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성도들을 살륙하여 무참히 죽게 한 것을 나타낸다.

⭕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 2절 주석 참조.

성 경: [시79:4]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 여기서 '우리 이웃'이란 유다 또는 예루살렘 내의 이웃 거민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여러 민족들을 뜻한다. 그리고 '비방거리'에 해당하는 원어 '헤르파'(*)는 '벗다', '노출하다', '모욕하다'는 뜻인 '하라프'(*)에서 유래되었으며 '모욕', '치욕'등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는 이방 민족들이 그의 패망됨을 듣고 보고 그들을 모욕하고 수치스럽게 한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영광이 타민족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 처참하게 되어 오히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애 2:15, 16). 이런 표현은 44:14에서도 나타난다.

성 경: [시79:5]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 '진노'란 히브리어로 '키나'(*)로서 '질투'(민 25:11;신 29:20;습 1:18)를 뜻한다. 그리고 '주의 진노'(*, 키나헤크) 역시 직역하면 '당신의 질투'(thy jealousy, KJV;your jealousy, NIV)란 뜻이다. 물론 여기서 '당신의'란 본절 서두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질투'란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의 분노를 나타내는 한 표현인 바 '진노'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시79:6]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 - 성경에서 흔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을 뜻한다(4:1;17:6;20:9;31:17;50:15;사 26:13). 따라서 개역 성경은 본문과 같은 렘 10:25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베쉬므크 라 카라우)이라고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단순히 기도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창 12:7, 8;13:4). 이런 점에서 주석가 알렉산더(Alexander)나 앤더슨(Anderson)은 본문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자들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열국'이란 원어상 1, 6절의 '열방'이란 말과 다른 '맘라카'(*)로서 '말라크'(*, 다스리다, 통치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왕국', '땅','통치'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복수로서 제일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어졌다(thekingdoms, KJV, NIV, RSV).

성 경: [시79:8]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우리 열조의 죄악을...마옵소서 - '죄악'에 해당하는 '아온'(*)은 '아와'(*, 구부리다, 왜곡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왜곡됨', '사악함', '불의', '불법' 등을 뜻한다. 그리고 '기억하여'의 히브리어 '자카르'(*)는 '기억하다'란 의미뿐만 아니라 '...에 영향을 미치다'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Anderson).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열조의 죄악이 현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영향을 미쳐 불미스러운 비극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저자의 깊은 탄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 아울러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간구하는 말이기도 하다(VanGemeren).

⭕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 '천하게 되었사오니'에 해당하는 '달랄'(*)은 '연약하다', '낮게 되다'의 뜻인데, 이는 어떤 힘이나 지위의 측면 모두에 적용된다(Alexander). 원문에 의하면 본문은 '키 달로누 마드'(*, 왜냐하면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로서 본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으며 후문(後文), 즉 '주의 긍휼하심으로...영접하소서'의 원인을 나타낸다.

성 경: [시79:9]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구원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언약적 차원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언약적 호칭이다(18:46;88:1;사 17:10).

⭕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 '이름'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외적 호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또는 그분의 신격(神格)을 대변하는 것이다(창 25:19-26강해, '이름 짓기' 참조).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피조된 세상 만물의 존재 목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으며, 구속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문에는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이 표출되어 있다. 아울러 이 간주는 자신들에게는 도움이나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 사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파르'(*)는 '덮다'의 뜻이며, 여기서 '속죄하다'(레 9:7;신 21:8), '용서하다'(65:3;78:38)의 뜻이 유출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에 근거하여 죄를 덮으심으로 사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79:10]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피 흘림 당한 - 3절 주석 참조.

성 경: [시79:11]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갇힌 자의 탄식으로...하시며 - '갇힌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시르'(*)는 '매인 자', '포로'라는 뜻의 단수이다. 그러나 이는 단체를 단수로 취급한 집합명사이다(Anderson). 이들은 아마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의 탄식, 즉 포로 생활의 고난 가운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도록 간구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포로된 자들과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유기체적인 존재로서의 동질 의식을 갖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암시한다.

⭕ 죽이기로 정한 자를...보존하소서 - '죽이기로 정한 자'란 원문에 의하면 '베니 테무타'(*)로서 '죽은 자의 아들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말은 고대근동 지방에서 흔히 죽어가는 사람들 또는 죽이기로 정죄되거나 예정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관용어로 통용된다(Alexander). 여기서는 전문(前文)의 '갇힌 자'와 병행 구절로서 역시 포로되어 죽을 운명에 처해진 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능력'의 히브리어 '제로아'(*)는 기본적으로 '팥'(10:15;98:1;창 49:24;신33:20, 27;대하 32:8)이란 뜻이며, 여기서 비유적으로 '힘'(71:18), '권세'(욥 22:8)란 말들이 파생되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의미로 취해진 말이다. 특히 하나님의 '팔'을 '능력'으로 비유 표현한 것은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인 묘사법이다(겔 1:3).

성 경: [시79:12]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우리 이웃 - 4절 주석 참조.

⭕ 훼방한(*, 하라프) - '급히 벗다', '노출하다', '모욕하다' 등의 뜻이다. 이는 4절의 '비방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어원(語源)이다. 이로 볼 때 본문은 4절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 칠 배나 갚으소서 - 히브리 사상에서 7이라는 숫자가 완전을 뜻하는 수인 바(출 29:30, 37;레 12:2, 5;13:5;14:9) 철저한 보응을 암시한다. 그리고 '갚으소서'(*, 슈브)는 '되돌아가다', '되돌려 주다'란 뜻이다.

성 경: [시79:13]

주제1: [언약 백성의 탄식과 구원]

주제2: [갇힌 자의 탄식]

⭕ 주의 기르시는 양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양육을 받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목자와 양, 즉 의존받는 자와 의지하는 자와의 관계를 잘 표현해 주는 말로서 통치하는 자와 통치 받는 자, 즉 왕과 백성간의 관계를 암시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80:1, VanGemeren).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과 성도의 영적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하다(요 10:1-18).

⭕ 주의 영예(*, 테힐라테카) - 직역하면 '당신의 영예'이다. 여기서 '영예'란 히브리어로 '테힐라'(*)로서 '할랄'(*, 빛나다, 빚을 밝히다, 칭찬하다, 찬송하다, 대상 23:5;대하 5:13;20:19)에서 유래되었으며, '찬송', '찬미' 등을 뜻한다(thy praise, NIV).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 특히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 행하신 사역을 칭송하는 것을 가리킨다(Anderson).

성 경: [시80: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요셉 -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나, 야곱의 장남 르우벤이 크게 범죄한 이후 장자의 자격이 박탈당하자 대신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자이다(창 35:22;49:3, 4;대상 5:1, 2). 따라서 그는 야곱으로부터 지극히 큰 축복을 받았고(창 49:22-28), 그의 두 아들이 모두 축복을 받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씩 속하는 복을 누렸다(창 48:8-22). 이는 장자에게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몫의 축복을 하는 율법과 일맥 상통한다(신 21:15-17). 결과 요셉의 후손 특히 야곱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내에서 한동안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다(78:9). 이런 배경하에서 본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대두된다. (1)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말이다(Anderson). (2) 요셉의 후손, 즉 에브라임이나 므낫세 등을 중심으로 남 왕국 유다와 구별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킨다(Ridderbos, Briggs, Cohen). 이중에서 어느 것이 더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많은 경우에 (2)를 더 지지한다. 알렉산더(Alexander)도 (1)을 가정하면서도 (2)에 더 많은 개연성(蓋然性)을 두고 있다. 만약 본문이 (2)를 가리킨다면, 본절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을 배경으로 하여 구원을 부르짖은 기도가 될 것이다.

⭕ 이스라엘의 목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통치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23:1-3;78:52, 53;79:13, Tate).

⭕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 '그룹'(*, 케루브)이란 그 어원(語源)이나 뜻이 불분명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수종하는 영적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며 그분을 수종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곳에 나타나는 자들로 주로 묘사된다(출 25:19-22;겔 9:3).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내에 위치한 법궤 위 속죄소에 있는 그룹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그룹들 사이 속죄소의 윗부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출 25:19, 22;왕상 6:23-28).

⭕ 빛을 비취소서 -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크신 능력과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간구이다(3절 주석 참조).

성 경: [시80: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 이 세 지파들은 라헬의 후손들로서 열두 지파 중에서도 상호 단결력이 있었던 바 광야에서 같은 구역에 장막을 쳤으며(민 2:18-24), 광야 행군시에도 같은 부류로 진행하였다(민 10:21-24), 여기서 이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들로 여겨진다(Anderson, Dahood). 그러나 여기에 약간의 의문점이 있다. 위의 세 지파들 중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완전히 예속된 자들이었으나, 베냐민 지파는 많은 경우에 남 왕국 유다에 속하는 자들로 언급되기 때문이다(왕상 12:21, 23;대하 11:1, 3, 23). 그러나 이에 대해서 앤더슨(Anderson)은 베냐민 지파는 때로는 남 왕국 유다로 간주되었지만, 때로는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나 쿡(Cooke), 케인(Cheyne)은 베냐민 지파가 남 왕국 유다에 예속된 것은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주석가 알렉산더(Alexander)도 베냐민 지파가 유다 왕국에 예속된다는 것은 단지 그들 중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헹스텐버그의 견해와 이 세 지파들이 한 라헬의 후손인 바 상호 가까운 인척 관계라는 점을 들어 위의 사실을 지지한다.

⭕ 주의 용력(勇力)을 내사 - 여기에서 '주의 용력'이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게부라테카'(*)로서 직역하면 '당신의 힘'(thy strength, KJV;your might, NIV)이다. 그리고 '내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르'(*)는 '잠에서 깨다', '일어나다', '분별하다'(stir up, KJV, RSV) 등의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일어나시사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말이다.

성 경: [시80: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우리를 돌이키시고 - 탈굼역(Targum)은 이를 '우리를 우리들의 포로됨에서 돌이키소서'라는 뜻으로 취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도록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돌이키시사 새롭게 해 달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Anderson, Delitzsch).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고 그분의 뜻, 말씀을 저버림으로 심히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Turn us again to yourself, LB).

⭕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하에르 파네카) -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을 비취사'(make your face shine, NIV;let thy face shine, RSV)란 뜻이다. 성경에서 흔히 얼굴을 향하사 비췬다는 것은 두 가지 대조적인 뜻을 나타낸다. (1) 범죄한 죄인에 대해 공의의 진노를 나타내사 심판을 행하심을 뜻한다(34:16;51:9;벧전 3:12). (2)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은혜와 호의, 도우심 등을 베푸시는 것을 암시한다(27:9;42:5;105:4;민 6:25, 26). 본문에서는 (2)에 해당된다.

성 경: [시80: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여호와'란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여진 하나님의 고유 이름으로서 '스스로 계시는 자'란 뜻이다(출 3:14, 15). 이는 창 4:26에서도 나타나나, 특히 모세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름으로 사용되어졌다. 그리고 '만군'이란 히브리어로 '차바'(*)로서 '집결하다', '소집하다'라는 뜻의 '차바'(*)에서 유래되었으며 '집단', '무리', '군대'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되었으나(44:9;출 7:4;12:41), 많은 경우에는 하늘의 우상 숭배 대상을 뜻하는 것으로(신 4:19;17:3;왕하 17:16;습 1:5), 또는 하늘의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103:21;148:2;왕상 22:19;대하 18:18)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또한 본문의 '하나님'(*, 엘로힘)이란 복수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능력과 권세면에서 비교할 대상이 없는 유일 무이(唯一無二)하신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군의 하나님'이란 하늘의 모든 천체와 영적 존재들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Alexander) 또는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다 '여호와'라는 말씀을 덧붙여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짖음으로 특히 이스라엘과 언약하사 관계를 맺으신 능력의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 주의 백성의 기도에...노하시리이까 - '노하시리이까'에 해당하는 '아솬'(*)은 원래 '연기를 내다'의 뜻이며 상징적으로 '분노하다'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분노, 진노를 '불'로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일맥 상통한다(78:21). 한편으로 '아솬'은 분향단에서 나는 연기 곧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뜻으로도 쓰인다(141:2;레 16:13;계 5:8). 그렇다면 기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와 하나님의 계속되는 진노 사이의 일종의 긴장 상황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 같다(Alexander).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분노를 쏟으심을 암시한다. 이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아직 만족되지 않으셨거나 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가 안 되어서 인 것 같다.

성 경: [시80: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 '눈물 양식'(*, 레헴 디므아)이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42:3에도 나타난다. 본문은 눈물을 양식처럼 먹게 하신다는 비유적 표현으로서 심한 고난을 당케 하신다는 뜻이다. 앤더슨(Anderson)은 이를 후문(後文)과 연관시켜 고난이 양식과 음료처럼 백성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 '다량'(*, 솰리쉬)은 '세 번(째)', '삼중의', '삼분의 일'(민 15:6, 7;삼하 18:2) 등의 뜻을 지닌다. 본문에서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많은 양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 듯하다(in great measure, KJV). 결국 본문은 전문(前文)과 병행 구절로서 하나님께서 심한 고생을 당케 하셨음을 나타낸다.

성 경: [시80: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우리로...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 여기서 '다툼거리'란 히브리어로 '마돈'(*)으로서 '경쟁', '싸움', '다툼'을 뜻한다. 아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당하는 고난을 모독하고 더욱 악화시키기 위하여 그 이웃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다툰다는 것(Alexander) 또는 이스라엘 족속들로 하여금 더 심한 고난, 패망을 당하도록 그 이웃 이방 민족들이 애쓰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영역본 LB, RSV는 여기서 '다툼거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마노드'(*, 머리를 흔듦)로 보고 '경멸'(scorn)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Anderson).

⭕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과 전문(前文)은 종속 관계가 아니라 '와우'(*)로 연결된 대등 관계이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전문처럼 하신 결과 본문의 내용이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 '웃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기본어가 '라아그'(*)로서 '비웃다', '조소하다'의 뜻이며, 79:4의 '조소'의 어원(語源)이 된다(mock, NIV).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고난당하고 천하게 하신 결과 그 이웃 이방 족속들이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것을 가리킨다(79:4).

성 경: [시80: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만군의 하나님 - 4절 주석 참조.

⭕ 우리를 돌이키시고 - 3절 주석 참조.

⭕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 3절 주석 참조.

성 경: [시80: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가져다가 -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비유한 표현이다. 팔레스틴은 기후상으로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곳이어서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는 과실 중 주산물이기도 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성경에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렘 2:21;겔 15:2-8;17:6-8;호 10:1),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라는 의미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곧 극상품 포도 나무를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내신 후 축복 가운데 깊이 뿌리박고 번져 나갈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쓸모없는 들포도가 되고 말았다(사 5:1-7;렘 2:21).

⭕ 열방을...심으셨나이다 - '열방'(79:1)이란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 등을 가리킨다(신 7:1).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은 물론이고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물리적인 군사력 등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나타낸다.

성 경: [시80: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비유된 포도나무를 옮겨 심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신 것을 가리킨다. 특히 '준비하셨으므로'의 히브리어 '파나'(*)는 원래 '향하다', '대면하다' 등의 뜻이나 '제거하다', '방해물을 없애다', '길을 예비하다' 등의 의미도 있다(창 24:31;사 40:3;습 3:15). 본문에서는 어떤 방해물을 제거하고 깨끗이 하는 것을 암시한다(Alexander).

⭕ 땅에 편만하며 - '편만하며'의 히브리어 '마레'는 '채우다', '충만하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크게 번성한 것을 뜻한다.

성 경: [시80:10]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크게 번성하고 강하여져 가나안 땅을 장악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혹자는 후문(後文)이나 다음 절들이 북, 서, 동쪽 경계선을 암시한다고 보고 본문의 '산들'이 이스라엘 남부 지방의 산들을 가리킨다고 한다(Cheyne, Hengstenberg, Rawlinson).

⭕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 '백향목'은 소나무과의 상록수로서 높이 36m, 둘레 12m 정도까지 자랄 수 있는 곧고 웅장한 나무이다. 이는 건축 자재로 애용되었고 성경에서는 흔히 힘, 위엄, 번영 등을 상징하는 나무로 묘사된다(92:12;104:16;왕하 14:9). 이 나무는 보통 가나안 땅의 북쪽지역 레바논 땅에서 자라는데(왕상 4:33;5:6;사 2:13;호 14:5, 6), 아마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가나안 땅을 그 북쪽 경계선까지 점유하여 지배한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Rawlinson).

성 경: [시80:11]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그 가지가 바다까지...강까지 - 여기에서 '바다'란 가나안 땅 서쪽의 지중해를 가리키며, '강'이란 가나안 땅 동쪽의 유프라테스강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번성하여 가나안 땅의 동서쪽 지역에까지 영토를 확장, 지배한 것을 말한다. 신 11:24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를 '광야에서부터...서해까지라'고 했는데, 아마 저자는 이스라엘 왕국 역사에서 이곳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지배하였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삼하 8:3-8;왕상 4:24, 25;대상 18:3-8;대하 9:28, Anderson).

성 경: [시80:12]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께서...따게 하셨나이까 - 본문은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그 보호하시는 손길을 철회하시사 주위의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훼파하고 패망케 한 사실을 가리킨다. '담'(*, 가데르)은 '둘러쌈', '울타리'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여기서는 포도원을 외부 들짐승이나 침입자들로부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담이나 울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허셨다는 것은 그 포도원, 즉 이스라엘을 외부 침입자들에게 방치해 두신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시80:13]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수풀의 돼지 - 멧돼지를 가리키는 듯하다(boar, KJV, RSV). '돼지'는 모세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레 11:7;신 14:8),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민족들의 특성을 잘 예시해 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침입한 앗수르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왕하 15:29;17:19-33;18:9-12, Alexander, Rawlinson).

⭕ 들짐승들 - 이는 전반절에 언급된 이방 세력(수풀의 돼지)에 동조한 이방 동맹국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 경: [시80:14]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만군의 하나님 - 4절 주석 참조.

⭕ 구하옵나니(*, 나) - 직역하면 '제발', '부디'라는 뜻으로서 애원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불변사(不變詞)이다.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 하나님께서 당신의 처소인 하늘 높은 곳에서 땅의 낮은 곳을 내려다보신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암시한다(14:2).

⭕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 '권고하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보살피다'란 뜻이다(visit, KJV;Watch over, NIV).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로 오셔서 보살펴 달라는 구원의 간청이라 하겠다(3절).

성 경: [시80:15]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의 오른손으로...줄기요 - 히브리 사상에서 오른편(쪽)이 복, 힘, 권능 등을 뜻하는 바 '주의 오른손'이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암시한다(78:54;출 15:6, 12). 그러나 '줄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맛소라 사본(MT)상으로는 '카나'(*)로서 '줄기', '식물'(the stock, RSV)을 뜻한다. (2) 70인역(LXX)과 일부 주석가들은 이를 '견코케 하다'란 뜻의 동사로 취한다(Michaehs, Hupfeld, Cooke,Alexander). (1)을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그 크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안식케 하신 것을 뜻한다. 반면, (2)를 택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에 거주케 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 속에 두지 마시고 보호하사 강건케 해 달라는 간구의 뜻을 나타낸다(Protect what you yourself have planted, LB).

⭕ 가지(*, 벤) - 직역하면 '아들'(the son, NIV)이다.

성 경: [시80:16]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그것이 소화(燒火)되고...망하오니 -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민족들에 의해 침략당하고 훼멸됨을 뜻한다. 특히 본문의 '주의 면책'(*, 가아라트 파네카, 당신의 얼굴의 책망)이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말로서 구원을 암시하는 '주의 얼굴 빛'이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3, 7절).

성 경: [시80:17]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의 우편에 있는 자(*, 이쉬 예미네카) - 직역하면 '당신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the man of thy right hand, KJV, RSV)이다. 여기에서 '오른편'이란 힘, 권능 등을 상징하는 바, 본문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붙드신 자 또는 높이신 자를 뜻한다 하겠다. 그러나 이 자(者)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가리킨다(Clark). (2) 이스라엘을 뜻한다(Rawlinson). (3)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킨다(Anderson). 이중에서 문맥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을 뜻하는 (3)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110:1). 한편 겔스톤(Gelston)과 힐(Hill)은, 본문은 한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뜻하지 않고 왕을 가리키며 아울러 메시야를 암시할 수는 있다고 본다.

⭕ 인자의 위에...얹으소서 - 여기서 '인자'란 탈굼역(Targum)에서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나, 그보다는 이스라엘의 왕이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Anderson). 그리고 '손'이란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상징하는 바(겔 1:3) 이를 얹는다는 것은 곧 능력으로 힘을 북돋우는 것, 공급해 보살펴 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붙드사 힘주시는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시80:18]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 하나님을 떠나 신앙적 후퇴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특히 '물러가지'(*, 수그)는 신앙적인 배교(背敎)를 암시하는 말로도 쓰인다(53:3, 4, Alexander).

⭕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과 간구의 뜻을 암시하나 또한 경배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79:6).

성 경: [시80:19]

주제1: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염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기도]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4절 주석 참조.

⭕ 우리를 돌이키시고 - 3절 주석 참조.

⭕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 3절 주석 참조.

성 경: [시81:1]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 -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능력 그 자체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다. 또한 이는 우리의 보호자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말인데, 특히 본시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출애굽의 모티브가 주로 등장한다(5,10,12절). 한편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고백을 표한 자로는 모세(출15:2,3;신32:4), 다윗(16:5;18:1,2;23:1;27:1;삼하22:2,3,29,33), 요한(요1:1,14;14:6), 바울(고전1:30) 등을 들 수 있다.

⭕ 야곱의 하나님 -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아들로서 후에 이스라엘로 개명(改名)되었으며(창32:28;35:1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의 아버지가 되었다(창29:31-30:24;35:16-18). 이런 연유에서 그의 이름은 여러차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과 동의적 병행 구절로 사용되었으며(신33:10), 이 스라엘 백성(나라)을 직접 가리키는 의미로(78:5,21) 쓰이기도 했다. 본문에서도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로 구성된 유기체적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

성 경: [시81:2]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시를 읊으며 - 여기에서 '시'(*, 지므라)는 '찬양', '찬송', '시' 등을 뜻하며, '읊으며'(*, 나사)는 '높이 올리다', '들어 올리다' 등을 의미한다. 이런점에서 본문은 시(찬양)을 소리 높여 읊음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상달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구약에서는 찬양이 주로 시를 음악 가락에 곁들여 읊는 형태로 나타나는 바, 이는 곧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Begin a music, NIV;Raisea song, RSV).

⭕ 소고를 치고 - '소고'(*, 토프)란 흔히 타악기의 일종인 작은 북으로 알려진 악기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대중적이며 여성적인 악기로서 전승(戰勝) 축하나 축제시 춤추면서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출15:20;삿11:34),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도 잘 쓰인다(149:3;150:4). 그리고 본문의 '치고'(*, 나탄)란 직역하면 '주다'의 뜻인데, 이는 소고의 소리를 발하라는 의미이다(Alexander). 한편, 혹자는 성전에서 소고를 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바 본시의 1-3절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라는 시적인 표현이거나 성소 밖에서 행해지는 축제를 표현한 것일 것이라고 본다(Anderson). 68:25에는 성소로 향하는 과정에서 소고를 치는 여인들이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 아름다운 수금에...아우를지어다(* - ,키노르 나임 암 나벧) - 직역하면 '비파와 함께 즐거운 수금을'(the sweet lyre with the harp, RSV)의 뜻이다. 아마 이 본문의 동사는 전문(前文)의 '치고'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수금'(*, 키노르)이란 현악기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창4:21). 이는 구약 성경에서 약 35회 정도 언급되는데 음색이 곱고 맑아 슬플 때는 켜지 않고 기쁠 때 켰다 한다(137:2;창31:27;욥21:12;사24:8).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한 도구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거의 비파와 함께 사용되었다(33:2;대상15:16;25:1;느12:27). 한편, '비파'(*, 네벧)는 일종의 현악기로서 흔히 하프(harp)로 알려졌다. 현의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열두 현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일발적으로 거의 같이 연주되었던 수금(lyre)보다는 그 형체가 크며 그 음도 컸던 것으로 본다.

성 경: [시81:3]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월삭'(*, 호데쉬)은 히브리어 '하다쉬'(*, 새 것이 되다, 새롭게 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새 달', '달의 시작'의 뜻으로서 달의 첫날, 초하루를 암시한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이 날에는 제사를 드리며 제물 위에 나팔을 불어 기념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민28:11;29:6). 특히 본문에서는 문맥으로 볼 때 흔히 나팔절로 지켜졌던 7월 1일(종교력)을 뜻하는 것 같다(민29:1).

⭕ 월망(*, 케세) - 이는 직역하면 '충만', '만월'이란 뜻으로서 일반적으로 달의 15일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문맥상 장막절이 시작되었던 7월 15일을 암시하는 것 같다(Rswlinson, Anderson).

⭕ 절일(*, 하그) - 이는 흔히 '절기'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출12:14), 본문에서는 7월 15일부터 지켜지는 장막절을 뜻하는 것 같다(Anderson, Rawlinson). 성경에서는 이 장막절을 보통 절기라고 부른 곳이 여러 곳있다(민29:12;왕상8:2,65). 참조로, 이를 유월절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Alexander).

⭕ 나팔을 불지어다 - 여기서 '나팔'(*, 쇼파르)은 은나팔(*, 하초체라, 민10:2)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수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전쟁 신호(수6:4,8;삿3:27), 하나님께 대한 찬미(47:5;150:3) 등의 수단으로 불리워졌다. 본문에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의 날을 전하기 위해 불리워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대인들에게 있어 종교력 7월 1일은 민간력으로는 1월 1일이었다(레23:24;민29:1).

성 경: [시81:5]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애굽 땅을 치러 나가시던 때에 - 본문은 '치러'(*, 알)의 해석에 따라 크게 두가지 견해로 나뉜다. (1) 이를 '...위에', '...대하여'로 보아 하나님이 애굽 땅을 대항해 나아가신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Went out against Egypt, NIV;went outover the land of Egypt, RSV). (2) 이를 '...로부터'라는 뜻으로 보아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오신 것, 즉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출애굽하신 것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went out of Egypt, NEB). 이중에서 키드너(Kidner), 테이트(Tate) 등은 (1)을 지지하나 드라이버(Driver), 보에르(Boer), 알렉산더(Alexander), 로린슨(Rawlinson) 등은(2)를 지지하며(114:1), 70인역(LXX)과 시리아역도 (2)를 반영하고 있다. 어떤 견해를 취하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는 별차이가 없다.

⭕ 요셉 - 이는 이스라엘 전족속을 대표하는 또는 그와 동의어로 사용된 말로 볼 수있다(Anderson, Alexander, Hengstenberg).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와 관련하여 요셉이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시 뛰어난 역할를 한 데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창49:26;출1:8).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요셉이 르우벤 대신에 이스라엘(야곱)의 장자 명분을 얻어 후에 그 지파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위에 있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78:9,67;창49:3,4;대상5:1,2).

⭕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 '말씀'(*, 사파)을 직역하면 '입술'인데, 이는 일반적인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방언 또는 언어를 가리키는 관용구적 표현으로 쓰였다 한다(Alexander). 따라서 본문은 이 후에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시81:6]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내가 그 어깨에서...놓게 하였도다 -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와 고역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에 있었을 때 각종 건축과 농사일 등을 했었다(출1:11;5:6-14). 본문의 '광주리'(*, 두드)는 애굽에서 흔히 진흙이나 기타 건축 재료들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다(Anderson).

성 경: [시81:7]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네가 고난 중에...건졌고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고역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그 고역속에서 구원하신 사실을 가리킨다(출2:23-25;3:7).

⭕ 뇌성의 은은한 곳에서...응답하며 - '뇌성의 은은한 곳'(*, 베세테르 라암)은 직역하면 '천둥의 은밀한(또는 덮는) 곳'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 시내 산에서 임재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출19:18,19;20:18, VanGermeren, Alexander).

⭕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 하나님이 므리바에서 물이 없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사실을 가리킨다(출17:1-7;민20:2-13).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패역을 드러내었다(출17:7).

성 경: [시81:8]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내 백성이여 들으라(*, 솨마 아미) - 원문 그대로는 '들으라 내 백성이여'(Hear, o my people, KJV, NIV, RSV)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부르시는 표현으로서 신명기에서 잘 나타난다(신4:1;5:1;6:4;9:1). 특히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듣고 그대로 따르라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암 티쉬마 리) - 이는 직역하면 '네가 내게 듣기를 원한다면'(if thou wilt hearken unto me, KJV, if you would but listen to me, RSV)이다(Alexander).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간청하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명령의 뜻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하겠다(Anderson).

성 경: [시81:9]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다른 신을 두지 말며 - 이는 십계명 중 첫계명과 관련된 말로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상기시킨다(출20:3;신5:7).

⭕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 십계명 중 제2계명과 관련된 것이다(출20:4,5;신5:8,9).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절대성을 암시하며, 우상 숭배의 배교(背敎)를 엄격히 금지하는 조항이다.

성 경: [시81:10]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나는...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 '여호와'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80:4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의 '여호와 네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언급하실 때에도 표명하셨던 말씀인데(출20:2), 특히 율법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것이 언약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권능과 자비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묘사되어진다. 또한 본문은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십계명(율법)을 지켜야 할 당위성이 있음을 나타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리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여기서는 음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요구 사항과 필요들을 대신하여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켰을 뿐만 아니라 광야 여정과 가나안 정복 및 정착 과정에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적시(適時)에 공급해 주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오직 하나님만 의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Alexander). 언약 백성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순종에는 축복을 그리고 불순종에는 징벌이라고 하는 매우 선명하고도 알기쉬운 역사적 체험에 근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순종을 거듭하는 데로 나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성 경: [시81:11]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내 백성이 - 이 말 속에는 일종의 역설적 실망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역을 도모했던 것이다(사1:3). 한편,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대조를 나타내는 등 위 접속사 '와우'(*, 그러나, But, KJV, RSV)가 언급되어 있다.

성 경: [시81:12]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내가...버려 두어 - 마음을 완악한 대로 방치해 두사 범죄의 길로 가는 것을 허용하신 것을 암시한다(롬1:24,25,28-32).

⭕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 여기서 '임의'는 히브리어로 '모에차'(*)로서 이는 '야아츠'(*, 충고하다, 조언하다, 숙소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회의', '꾀'(5:10), '모략'(잠22:20), '계책'(호11:6) 등을 뜻한다. 즉, 본문은 하나님이 강퍅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헛되고 죄악된 뜻과 생각대로 행하게끔 방치하셨음을 나타낸다.

성 경: [시81:13]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내 백성이...원하노라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루(*)라는 조건불변사가 있다. 백성들의 거듭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영광스러운 미래에의 회복을 일깨우는데(14-16절), 그러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본절에 언급된 바 회개와 순종이다(VanGemeren).

성 경: [시81:14]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제어하며(*, 카나) - 직역하면 '무릎을 굽히다', '늦추다', '복종케 하다'의 뜻이며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이스라엘 앞에 굴복케 하신다는 의미이다.

⭕ 내 손을 돌려...치리니 - '손'이란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인 표현으로서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한다(78:42;겔1:3).

성 경: [시81:15]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여호와를 한(恨)하는 자 - '한하는'에 해당하는 '사네'(*)는 '증오하다', '미워하다'의 뜻이다(hate, NIV, RSV).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결국에는 그분께 대한 반역적인 미움의 감정을 갖게 되는 자를 암시한다.

⭕ 저에게 복종하는 체 할지라도(*, 예카하슈로) - '복종하는 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형은 '카하쉬'(*)로서 '거짓되다', '거짓되이 가장하다', '굽실굽실하다' 등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 거짓되이 가장하며 순종하는 체하는 것을 가리킨다.

⭕ 저희 시대는...계속하리라 - '저희 시대'란 말이 누구를 지칭하며 어떤 상태를 가리키고 나아가 본문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이스라엘의 축복된 상태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Briggs). (2)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종속됨 혹은 파멸의 시대가 계속될 것임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Anderson, Van-Gemeren). (3)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속 상태가 계속될 것임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Alexander)이다. 이중에서 (1)과 (3)은 거의 동일한 입장에 있으며, 본문이 본절 상반절과 직접 연결되는 내용임을 감안하여 (2)의 견해를 취함이 보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their punishment would last forever, JIV).

성 경: [시81:16]

주제1: [축제의 선포]

주제2: [회개 촉구에 대한 절기 노래]

⭕ 밀의 아름다운 것(*, 메헬레브 히타) - 직역하면 '밀의 살진 것'이란 뜻으로서 최상품을 가리킨다(the finest of the wheat, KJV, RSV, 147:14;민18:12). 본문에서는 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육적, 영적 은혜 모두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 반석에서 나오는 꿀 - 이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딸 수 있는 들꿀을 가리키는 듯하다(삼상14:25-29,43). 본문의 의미도 전문(前文)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성 경: [시82:1]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하나님(*, 엘로힘) - 80:4 주석 참조. 하나님의 회 - 본문의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은 바로 앞의 '하나님'(히, 엘로힘)과는 달리 단수형으로서 '강한 자', '능력자'의 뜻이며 절대적이고 초월절인 권능를 지니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창 35:11; 48:3; 출 6:3; 민 12; 13). 그리고 '회'(*, 에다)란 '회중'(출 16:9; 34:31; 35:1,4,20), '총회'(민 16:2) 등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군중, 회중, 무리를 뜻하는데, 구약에서는 흔히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서 유기체적 집단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란 말과 어울려져 '하나님의 회'란 말로 표현되었는데, 혹자는 이를 가나안 신화에서 빌려온 말이라 한다. 가나안 땅에서 '엘'(*, 하나님)이란 모든 신들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신성한 회의에 그곳 신들을 회집해 그들을 관장하였다 한다(Dahood, Vangemeren, Pope, Driver). 그러나 본 시편 기자가 가나안 신화를 모방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단지 본절의 상.하반절이 병행 대구를 이룬다고 이해하여 '하나님의 회'가 재판장들의 모임을 뜻한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대신 집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표현이 별로 어색하지 않다(Alexander).

⭕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 '재판장들'(*, 엘로힘)이란 문자적으로는 '신들'(tne gods, JKJV, NIV, RSV)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천사들로 보기도 하나(Bleek, Hupfeld), 그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가지고 공의로운 심판을 수행하는 자들, 즉 재판관들을 지칭한다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이들 가운데 임하셔서 그들을 판단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신 1:17) 공정하게 사람들을 판단하며 재판해야 했다.

성 경: [시82:2]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 재판의 본질은 공정성에 있다. 그리고 재판의 공정성은 모든 권위와 공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서 기인된다(신 1:17; 롬 13:1-7). 그런데 이들 재판장들은 이 공정성을 왜곡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격이 되었다.

⭕ 악인의 낯 보기를 - '보기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는 '높이 들다', '세워주다'의 뜻이다. 이는 히브리 사회에서 특별하게 통용되는 관용구적 표현 중의 하나로서 어떤 한 사람(즉, 재판장이 뇌물 등을 받고 불공정하게 보아주기로 정한 사람)의 편을 들어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Alexander). 이는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사항이다(신 10:17; 16:19).

성 경: [시82:3]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가난한 자와 고아를...판단하며 - '가난한 자'(*, 달)란 육체적인 힘이나 재산, 물질 등의 면에서 결핍된 자, 부족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Alexander). 율법에서는 이런 가난한 자의 고아를 위하여 공정하게 편벽됨이 없이 재판할 것을 엄정히 명시하고 있다(출 23:3,6; 신 24:17; 27:19). 이것은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 곤란한 자와...공의를 베풀지며 - '곤란한 자'(*, 아니)란 '억압받는 자', '고통받는 자'(the afflicted, KJV, RSV)란 뜻이 있으나, 이를 '가난한 자'(출 22:25; 레 19:10; 23:22)로 변역하기도 했다. 본문도 전발절과 대구를 이루어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성 경: [시82:4]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가난한 자와...건질지니라 - '구원하여'의 히브리어 '팔라트'(*)는 '몰래 나오게 하다', '탈출하게 하다'의 뜻이다. 그리고 '악인들의 손'이란 '손'이 힘, 능력 등을 상징하는 바(겔 1:3),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악인들의 힘이나 권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건질지니라'(*, 나찰)는 '움켜 빼앗다',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하다'의 뜻이 있다.

성 경: [시82:5]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저희는 무지무각(無知無覺)하여(*, 로 야데우 웰로야비누) - 직역하면 '그들은 알지 못했고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가 된다. 이는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뜻과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음을 암시한다.

⭕ 흑암 중에 왕래하니 - 여기서 '흑암'이란 무지(無知)나 불의(Alexander), 또는 도덕적인 어두움(VanGemeren, McCullough)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 '땅의 모든 터'란 하나님께서 세우신 땅의 기초를 뜻하는 말로서(잠 8:29; 사 40:21) 이는 곧 이 세상에서의 도덕적 질서를 암시하는 말인것 같다(Anderson). 그러나 혹자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보기도 한다(VanGemeren). 아무튼 본문은 공으로워야 할 재판장들이 흑암의 불의 가운데서 행함으로 이 땅의 모든 도덕적 질서와 의가 왜곡되고 혼란스럽게 된 것을 뜻한다.

성 경: [시82:6]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너희는 신들이며 - '신들'(*, 엘로힘)은 1절의 '재판장들'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본문도 1절에서와 같이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받은 자들임을 암시한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 지존자의 아들들 - '지존자'(*, 엘룐)에 대해서는 78:17,35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 역시 전문(前文)의 의미와 유사한 것으로서 높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 위임하시사 당신을 대변하고 대신 권위를 발하도록 하신 자들(재판장들)을 뜻한다.

성 경: [시82:7]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너희는 범인(凡人)같이...엎더지리로다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불변하사 '아켄'(*)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영역본들은 이를 역접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로(But, KJV, NIV; nevertheless, RSV)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Alexander)는 이를 강한 확언을 나타내는 불변화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certainly, assuredly). 어쨌든 본문은 재판장들이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받은 자들로서 아주 특출한 위치에 있으나 하나님 앞에 무지와 불의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총의 대상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불의의 참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엎더지리로다'는 갑작스런 파멸이나 비참한 죽음을 시사하는 말로 종종 쓰인다(20:8; 렘 8:12).

성 경: [시82:8]

주제1: [불의한 재판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주제2: [공의의 실현 촉구]

⭕ 하나님이여...판단하소서 - 이는 저자가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를 기원하는, 본시의 결론 부분이다. 기자는 하나님의 위임 권위를 부여받았으나 잘못 활용한 재판장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온 땅까지 공의대로 심판 받기를 기원하고 있다.

⭕ 모든 열방이...되겠음이니이다(*, 키 아타 티느할 베탈 하고임) - 직역하면 '왜냐하면 당신이 모든 나라들을 상속할 것이기때문이다'(for thou shalt inherit all nations, KJV)이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0,13)라는 구절을 생각케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종국에 가서는 온 세상 나라들을 다 소유하시어 통치하실 것이라는 뜻으로서 전문(前文)의 '판단하소서'라는 기원의 근거를 제공한다.

성 경: [시83:1]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침묵치 마소서(*, 알다미 라크) - 직역하면 '당신(자신)에게 침묵치 마소서'라는 뜻으로서 강조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침묵치'의 히브리어 '데미'(*)는 '다마'(*, 조용하다, 침묵하다, 쉬다)에서 유래된 말로 '멈춤, 쉼, 조용히 함, 휴식' 등의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무관심이나 행동의 중지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이 사62:7에서는 '쉬지'(rest, KJV, NIV, RSV)로 애3:49절에서는 '그치지'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정적을 깨뜨리시고 말씀하시며 또 적극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라는 간구로 볼 수 있다.

⭕ 잠잠치 말고 - '잠잠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쉬'(*)의 원래 뜻은 '새기다, 쟁기질하다'이며 이에서 '침묵하다, 벙어리가 되다'의 의미가 나왔다. 이는 전반절의 '침묵치 마소서'라는 말에 비해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좀더 강조점을 둔 표현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무반응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28:1; 39:12)

⭕ 고요치 마소서 - '고요치'의 히브리어 '솨카트'(*)는 '쉬게 하다, 진정하다, 조용히 하다'의 뜻으로서 앞의 '잠잠치'와 마찬가지로 행동의 측명에 주안점을 둔 말이다.(Alexander) 한편 본절에서는 '마소서' '말고' '마소서' 등 3회에 걸친 부정 불변사 '알'(*)이 사용됨으로써,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83:1]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침묵치 마소서(*, 알다미 라크)- 직역하면 '당신(자신)에게 침묵치마소서'라는 뜻으로서 강조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침묵치'의 히브리어 '데미'(*)는 '다마'(*, 조용하다, 침묵하다, 쉬다)에서 유래된 말로 '멈춤', '쉼', '조용히 함', '휴식' 등의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무관심이나 행동의 중지 등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이 사 62:7에서는 '쉬지'(rest,KJV,NIV,RSV)로, 애 3:49 에서는 '그치지'로 번역되기도 한다.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일어나 정적을 깨뜨리시고 말씀하시며 또 적극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시라는 간구로 볼 수 있다.

⭕ 잠잠치 말고- '잠잠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라쉬'(*)의 원래 뜻은 '새기다', '쟁기질하다'이며, 이에서 '침묵하다','벙어리가 되다'의 의미가 나왔다. 이는 전반절의 '침묵치 마소서'라는 말에 비해 하나님의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좀더 강조점을 둔 표현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무반응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28:1;39:12).

⭕ 고요치 마소서-'고요치'의 히브리어 '솨카트'(*)는 '쉬게하다','진정하다','조용히 하다'의 뜻으로서의 앞의 '잠잠치'와 마찬가지로 행동의 측면에 주안점을 둔 말이다 (Alexander). 한편 본절에서는 '마소서','말고','마소서' 등 3회에 걸친 부정 불변사 '알'(*)이 사용됨으로써, 하나님의 신속한 응답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83:2]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주의 원수(*, 오예베카) - 직역하면 '당신의 원수들'(thy enemies,RSV)이란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이스엘 백성을 침략하고 괴롭힌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의 대적들올 '당신의 원수'로 표현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인 바 그들을 대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 훤화하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마(*)는 '시끄럽게 말하다', '소요(騷擾)하다'의 뜻이다. 43:3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치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기자에게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모여든 이방인들의 모습이 바다의 파도가 흉용하는 모양으로 비춰졌는지도 모른다(사 17:12; 렘 6:23,Anderson).

⭕ 주를 한(恨)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 '한하는'(*,사네)이란 '미워하는'(hate,KJV,RSV) 의 뜻이다(81:15). '머리'가 권세 또는 권위의 뜻올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바(고전 11:3, 10) 본문은 주틀 미워하는 자, 즉 '주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권세)를 내세우며 거만하게 행동함욜 암시한다. 한편 미디안 족속이 기드온의 군대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라고 묘사된 바 있다(삿 8:28).

성 경: [시83:3]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호소]

⭕ 주의 숨긴 자 - 심마쿠스역(Symmachus)과 제름역(Jerome)은 이를 단수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보고(寶庫)로서의 성소(성전)를 암시할 수 있다는 여운을 준다. 그러나 맛소라 사본에 의하면 복수로서(*, 체푸네카) 하나님에 의해 감추어져 보호되어진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7:5 ;31:20).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분의 무한하신 자비와 능력에 의해 보호받아 왔다(91편).

성 경: [시83:4]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이스라엘의 이름으로...못하게 하자 - '이스라엘'이란 원래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란 뜻이나, 후에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다','하나님께서 이기신다' 등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또한 이는 원래 야곱의 개명(改名)된 이름이었으나(창 32:28;35:10), 나중에는 이스라엘 전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창 32:32; 출 32:4; 신 4:1;27:9).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야곱(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름'이란 단순히 어떤 사람이나 존재의 외적인 호칭의 의미를 넘어 그 사람의 인격 또는 어떤 존재의 실체 자체를 대변했다(79:9).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이스라엘 자체를 존재치 못하게 하자는, 즉 멸망시키자는 뜻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 또는 국가이며 하나님께서 이들을 통해서 당신의 섭리와 뜻을 이루시기로 작정된 자들인 바 물리적인 군사력만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되어 그분의 심판을 초래할 뿐이다.

성 경: [시83:5]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주를 대적하여(*, 알레크)- 직역하면 '당신을 대항하여'(against thee, KJV,RSV)란 뜻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다(2, 4절 주석 참조).

성 경: [시83:7]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호소]

⭕ 그발 - 혹자는 두로의 북쪽 약 65Km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고대 베니게의 항구 도시로 간주한다(수 13:5; 왕상 5:18; 겔 27:9, Dahood, Rawlinson). 이곳은 당시 상업적으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그리스인들은 '뷔블로스'(*)로 불렀다 한다. 그러나 다른 많은 주석가들은 그리스인들이 '게발레네'(*)로 부른 지역으로서 사해 남방의 에돔 북부 지역에 위치한 산악 지대로 보기도 한다(Anderson,Alexander,Kidner).

⭕ 암몬 -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둘쨋딸에 의해 부정으로 낳은 자의 후손들로서(창 19:38) 요단 강 동부 지역에 남으로 모압과 경게하여 거주하였다.

⭕ 아말렉 - 야곱(이스라엘)의 육신적 형 후예들 중 한조속으로서(창 36:12, 15, 16) 흔히 유다의 남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지낸 자들로 알려진다.(삼상 30:1,2).

⭕ 블레셋 -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후예들로서 이스라엘의 남부 지역 지중해 연안에 거주하였다.(창 10:13,14;출 13:17; 삼상 4:1).

⭕ 두로 거민 - 팔레스틴의 북부 지중해 연안 시돈의 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대 베니게의 항구 도시 거민들을 가르킨다. 시돈과 함께 해양을 발판으로 무역업(상업)이 크게 번성하였다.(겔 28:1-19).

성 경: [시83:8]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앗수르 - 이는 셈의 후예들로 구성된 거대한 민족적 집단으로서(창 10:22) 한때 고대 근동 지방을 다스리는 패권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B.C.722년경에는 북 왕극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였으나 B.C.612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하유 제로아 리브네 로트). - 이것은 '롯의 자손의 팔이 되었다'(are the strong arm of the children of Lot,RSV)란 뜻이다. 여기서 '롯 자손'이란 모압(6절)과 암몬(7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앗수르인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과 힘올 합쳐 이스라엘을 괴릅혔음을 뜻한다.

성 경: [시83:9]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같이 - 미디안인은 아브라함의 첩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의 후예들로서 북서부 아라비아 지방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지역에서 유목 또는 무역업을 하며 장막 생활을 했던 족속들이다(창 25:1, 2 ; 출 2:15 ; 민 25:17;31:2). 본문은 하나님이 사사시대 때 기드온올통해 이스라엘을 압제한 그들을 격파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삿 6:1-24, 33-7:23).

⭕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 하나님이 사사 시대 때 드보라와 바락을 앞세워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진멸한 사실을 가리킨다(삿 4장).

성 경: [시83:10]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 '엔돌'이란 '주거(지)의 샘'이란 뜻으로서 수 17:11에서는 다아낙과 므깃도 등과 함께 언급되는데 이들과 가까운 인접 지역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아낙과 므깃도는 시스라와 야빈이 패한 곳인데(삿 5:19), 본문은 시스라와 야빈이 엔돌에서도 크게 패하였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83:11]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저희 귀인 - '귀인'의 히브리어 '나디브'(*)는 '자발적인', '관대한','아량 있는' 등의 뜻이며 명사로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며, 다른 사람을 통치하는 자로서 '귀인'(민 21:18), '귀족'(삼상 2:8), '방백'(107:40 ; 113:8), '존귀한 자'(잠 8: 16) 등으로 번역된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들의 지도급 인사들올 가리킨다.

⭕ 오렙과 스엡 - 기드온 사사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 족속의 두 방백이다(삿7:25).

⭕ 방백(*, 네시크) - '나사크'(*, 붓다, 기름붓다)에서 유래된 말로 어휘 면에서는 87:7의 '방백'과 다르나 의미 면에서는 '(기름부음 받아 위임된) 방백','귀족'이란 뜻으로서 유사하다 하겠다.

⭕ 세바와 살문나 - 기드온 사사에게 죽임올 당한 미디안 족속의 왕들을 가리킨다(삿 8:5-21).

성 경: [시83:12]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하나님의 목장을...취하자 - 70 인역(LXX)은 '하나님의 목장'을 '하나님의 제단'으로, 탈굼역에(Targum)과 제롬역(Jerome)은 성전을 암시하는 듯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흔히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으로 묘사되어지는 바(74:1;79:13) 그들을 안주케 하여 먹이시고 양육하시는 터전, 즉 이스라엘의 영토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Anderson).

성 경: [시83:13]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굴러가는 검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갈'(*)은 '갈랄'(*,구르다)에서 유래된 말로 '수레바퀴'(사 5:28;렘 47:3)를 뜻하나 본문에서는 가볍게 날리듯이 굴러가는 어떤 것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엉겅퀴과의 아티초크(artichoke)의 수레바퀴처럼 생긴 꽃잎(Tate) 또는 아티초크와 유사한 식물(VanGemeren)이라고 보기도 한다.

바람에 날리는 초개 - '초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쉬'(*)는 '카라쉬'(*,시들다)에서 유래된 말로 '(마른)덤불', '그루터기' 등을 뜻한다 (1:4;사 17:13;29:5;40:24;41:2;렘 13:24).

성 경: [시83:14]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불과...화염같이 -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낸다. 특히 온 삼림을 살라버리는 거대한 산불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성 경: [시83:15]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주의 광풍으로 ...주의 폭풍으로 - '광풍'이나 '폭풍'은 13절의 '바람에 날리는 초개 같게'라는 말과 연관시켜 볼 때 역시 악인들, 즉 주의 대적들을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를 상징한다 하겠다(욥 21:18;사 17:13; 29:6).

성 경: [시83:16]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 '이름'이란 단순히 외적인 칭호의 차원을 넘어서 그 이름으로 불리우는 대상의 실체 혹은 존재 자체를 표현하는 말인 바(4절 주석 참조), 본문은 곧 이방 대적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문이 이방인들의 참된 회개를 가리키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로 나뉜다. (1)이방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수치를 당하고 난뒤에 진실로 돌아와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는 것을 가리킨다. (2)이방인들이 마음 깊은 데서 변화되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객관적으로 하나님을 '지존자'(18절)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많은 주석가들은 (1)을 지지한다(VanGemren,Rawlinson,Anderson). 그러나 반즈(Barnes)는 본문의 이방 대적들이 헛되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여 (2)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맥적인 흐름으로 볼 때, 이방 대적들이 하나님에 의해 수치를 당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유일하고 참된 '지존자'(18절)로서 인정할 뿐 아니라 참된 회개를 통해 주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일말의 동정심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성 경: [시83:17]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수치를 당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어는 '부쉬'(*)로서 16절의 '수치'(*,칼론, 모욕, 치욕)라는 말과는 달리 '창백하다','부끄러움을 당하다'.'당황케 되다' 등의 뜻을 갖는다.

⭕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 '낭패를 당케 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페르'(*)는 '얼굴을 붉히다', '수치를 당하다', '부끄러움을 당하다' 등의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멸망을 당케 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바드'(*)의 기본 의미는 '길을 잃다','헤매다'인데. 여기서 '멸망하다', '파멸하다'의 뜻이 유출되었다.

성 경: [시83:18]

주제1: [대적들의 심판에 대한 간구]

주제2: [위기 속에서의 전능자의 개입 호소]

⭕ 여호와라 이름하신...알게 하소서 - '여호와'와 '지존자'에 대해서는 각각 80:4;78:17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은 이방 대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 ,즉 온 세계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자, 최고의 권위(권세)자이심을 알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주의 원수'(2절)로 하여금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부복(俯伏)하게 해 달라는 뜻까지 함축하고 있다.

성 경: [시84:1]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 -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만군의 여호와 - 하늘과 땅의 모든 세력들을 다스리시는 무소 불위(무소불위)의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칭호이다(3, 8, 12절;80:4).

⭕ 주의 장막이...사랑스러운지요 - '주의 장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케노테카'(*)로서 '당신의 장막들'(thy tabernacles, KJV)이라는 복수이다.여기서 '장막'(*, 미쉬칸)이란 '주거', '막사'란 뜻을 가진 말로서 흔히 '성막'이란 말로 번역되기도 했다(78:60;출 40:2, 35, 36, 38;민 9:15, 17, 18). 본문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한 장막이나(삼하 6:17),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왕상 6:1-8)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본문에서 이를 복수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또는 성막)의 세분화된 건물이나 부속 건물들을 포함하는 의미에서이거나(Alexander), 혹은 하나님의 성전(또는 성막)에 대한 강조적 표현에서(Anderson)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저자가 하나님의 장막을 극히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여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전의 지성소 내에 안치된 법궤 위의 속죄소 위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통치하시고 그들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출 25:18-22; 왕상 8:13, 29).

성 경: [시84:2]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내 영혼 - '영혼'(*, 네페쉬)이란 영혼, 산 것, 생명, 자아, 인간, 욕구, 감정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서 이 단어 자체만으로 인간을 가리킬 수 있으나 본문에서는 하반절의 '내 마음과 육체'란 말과 함께 인간의 전존재를 암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할 수 있다(VanGemeren, Anderson).

⭕ 여호와의 궁정(宮庭)을 사모하여 - '궁정'이란 히브리어로 '하초체르'(*)로서 '마당', '뜰'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뜰'로 번역되었다(65:4;출27:9, 12, 13, 17;40:8, 33;대상 23:28;28:12).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성전(또는 성막)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대한 경외심이 가득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전 뜰에 이르러 그분을 경배하고 경외코자 소원하고 있다. 순례자들은 성전을 방문할 때 성전 뜰에서 거하였다 한다(65:4, Anderson).

⭕ 내 마음 - '마음'(*,레브)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약 850번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의 지적이며(83:5), 의지적인(141:4) 측면에 강조점이 두어진 인격의 좌소(seat) 또는 인간의 전인격을(27:3;77:6;102:4, Anderson)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는 전문(前文)의 '내 영혼'과 후문(後文)의 '육체'란 말과 함께 인간의 전존재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 육체(*, 바사르) - '바사르'(* 신선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살', '몸'등을 뜻한다. 이는 사람과 동물들이 만들어지게 된 육체적인 질료(물질)를 뜻하기도 하며(창 40:19) 인간의 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이나(79:2;109:24), 인간 또는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136:25;145:21;창 6:12;사 40:5).

성 경: [시84:3]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 이는 저자가 하나님을 절대적 권능자와 통치자로서 갈망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말이다. 특히 '나의 왕'이란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지만 참된 왕, 통치자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다. 한편, 히브리 원문상으로 본문은 본절 끝에 나온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후대의 첨가 구절로 보지만(Kraus, Wanke) 고대 역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24:10;68:24 참조).

⭕ 주의 제단에서(*, 에트 미즈베호테카) - 직역하면 '당신의 제단들에서'(at thy altars, RSV)로서 복수이다. 따라서 '주의 제단들'이란 성전(또는성막)의 번제단(출 27:1-8)과 분향단(출 30:1-6)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들은 각각 하나님의 성소의 앞뜰(출 40:6, 29)과 지성소의 맞은편 성소 안(출 30:6;40:5)에 놓여졌었다. 그런데 본절 내용에 대해 혹자는 '제단들 안에서'(in the alters) 혹은 '제단에서'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말로 이해하나(Kissane),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왜냐하면이 제단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한 것들로 외부 존재들이 함부로 드나들거나 취급할수 없었기 때문이다(출 30:25-29;민 1:51;3:5-10). 오히려 이는 그 근접 구역, 즉 성전 건물들의 벽 주위(처마 같은 곳)에서 집과 보금자리를 얻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Anderson). 한편, 본문에서 주의 제단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는 희생 제물의 대속 및 기도라 하겠다(Alexander).

⭕ 참새...제비 - 참새는 구약 성경에서 본절에 언급된 횟수를 합쳐 3번 언급되는데(102:7;잠 26:2), 신약 성경에서 보면 싼값에 팔려지는 것으로서(마 10:29, 31;눅12:6, 7) 하찮은 존재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럴 경우 본문은 하찮은 참새도 주의 제단에서 제집을 얻는다는 비유로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기자의 간절한 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제비 또한 참새와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시84:4]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주의 집에 거하는 자 - 하나님의 성전(성막)에 거하여 하나님께 봉사하는 제사장들이나 찬송하는 레위인들 또는 특히 고라 자손이 참여했던 문지기들을 뜻할 수 있다(대상 23:5;25, 26장, Rawlinson). 그러나 이외에도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권을 지닌 모든 자들을 뜻할 수도 있다(Anderson).

⭕ 복이 있나이다(*, 아쉬레이) - 이는 복수의 표현으로서 행복의 충만함, 다양함 등의 뜻을 암시할 수도 있다(1:1, Alexander).

성 경: [시84:5]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시온의 대로'란 '메실라'(*)로서 '시온'이란 말이 없고 단지 '대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쌓아 올리다'란 뜻인 '살랄(*)에서 유래되었음을 볼 때, 자연적으로 다져진 길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길을 뜻한다 하겠다(Alexander). 문맥상 하나님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암시하는 것으로서(Mowinckel), 그 마음에 이런 길이 있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자를 지칭하는 것같다.

성 경: [시84:6]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 '눈물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베아메크 하바카'(*)로서 '바카의 골짜기'(the valley of Baca, KJV, NIV, RSV)란 뜻이다.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영역본 LB, RV는'바카'(*)를 '베카'(*, 울음)로 보고 '울음의 골짜기'(the valley of Weeping)로 번역하고 있으며(Anderson), 70인역(LXX), 탈굼역(Targum), 시리아역, 벌게이트역(Vulgate) 등도 이와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바카'를 '울다', '통곡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로 보는 데서 연유한다. (2) 혹자는 이를 삿 2:4, 5의 '보김'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여 '눈물의 골짜기'를 뜻하는 의미로 본다(Clarke). (3) 또 다른 이는 '바카'가 건조 지대에서 자라는 발삼나무(balsam tree)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Kidner). 이 나무는 건조 지대에서 자라나 나무 자체에서 눈물과 같은 물을 떨어뜨린다 한다. 이중에서 어느 한 견해롤 배타적으로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들 모두 나름대로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봄이 나을 것이다. 즉, 본문은 이곳이 거칠고 물이 크게 부족한 곳임을 나타내줌과(the thirsty valley, NEB, Anderson, Calvin) 아울러 고통스러운 곳을 상징한다(Alexander, VanGemeren) 하겠다. 하나님의 전(殿)을 사모하는 자들은 이런 곳도 은혜 가운데 무사히 통과하여 간다는 것이다.

⭕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 전문(前文)의 거칠고 황무한 곳(또는 고통스러운 곳)에 웅덩이를 파 빗물을 받는 곳을 만든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곳이 비로 인해물 웅덩이의 곳이 된다는 뜻인지, 또는 그곳에서 물 웅덩이를 발견하게 된다는 뜻인지 정확한 의미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5절의 '마음에 대로가 있는 자'는 어렵고 힘든(삭막한) 상황도 기쁨과 생기가 넘치는 상황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 '이른 비'(*, 모레)는 경우에 따라서 '교사'(잠 5 : 13 ; 사 30 : 20) 또는 '이른 비'(욜 2 : 23)를 뜻할 수 있으며, '은택' (*,베라카)이란 모음에 따라 '축복'과 '못'(저수지)을 의미할 수 있는 바, 본문은 대개 다음 세 가지로 해석되어 진다. (1) 비가 또한 못들을 덮는다. (2) 교사가 축복으로 옷입혀진다(Alexander, Clarke). (3) 비가 축복으로 그것(눈물 골짜기)을 덮는다. 이중에서 (3)이 가장 무난할 듯하다. '이른 비'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10-11월에 내리는 비로서 밭의 파종과 경작을 가능케 하며 흔히 하나님의 은택으로 상징된다(신 11:14;약 5:17). 본문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복된 삶을 살게 됨을 암시한다.

성 경: [시84:7]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힘을 얻고 더 얻어(*, 메하일 알 하일) - 직역하면 '힘으로부터 힘에로'(from strength to strength, KJV, RSV)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힘을 얻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 시온 - 78:68 주석 참조.

성 경: [시84:8]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야곱의 하나님 - 본절에서부터는 기자의 간절한 간구가 시작 된다. 이 간구는 앞에서 언급한 복, 곧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누리는 축복에 근거를 둔 것이다. 또한 여기 나오는 하나님의 칭호들 또한 이러한 간구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칭호들은 하나님의 영원성, 자존성(自存性), 절대 주권, 언약에의 신실성 등을 암시한다.

성 경: [시84:9]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 마기네누 레아 엘로힘) - 직역하면 '우리의 방패, 보소서, 하나님'의 뜻이다. 혹자는 '우리의 방패'를 '보소서'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후문(後文)의 병행 구절로 보기도 하지만(Behold our shield, God, RSV, VanGemeren, Tate, Anderson), 이는 하나님을 비유하는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11절, Alexander, Rawlinson). AV, RV 등도 70인역(LXX)과 탈굼역(Targum) 등을 따라 이를 하나님과 동격인 호격으로 취하고 있으며, 11절에도 하나님을 방패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을 '우리 방패'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분이 되심을 나타낸다. 특히 이 말이 본절에서 맨 앞에 언급된 것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 주의 기름 부으신 자...살펴보옵소서 - '주의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혹자는 다윗왕을 지칭한다고 본다(Calvin, Alexander). 그러나 굳이 다윗 왕으로만 국한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며, 이스라엘 왕을 가리킨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Anderson, Rawlinson, Tate). 따라서 본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을 형통케 해주십사하는 간구이다.

성 경: [시84:10]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내 하나님 문지기 ( *, 히세토페프 베베트 알로히) - 직역하면 '내 하나님의 집의 입구에 서는 것'(the standing at the entrance of the house of my God)을 뜻한다(Anderson). 이는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 직무자를 뜻하기보다는(왕하 12:9;23:4;렘 35:4)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또는 성막) 입구에 서서 들어가기를 간구하는 자를 뜻하는 것 같다(Anderson). 키드너(Kidner)도 본문과 관련하여 언급하기를 '문지기'란 대상 26:1, 12 등에 공식적으로 위임된 직임인 문지기와는 다르며, 이 말은 동사로서 '문지방에 서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성 경: [시84:11]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원인을 나타내는 불변사 '키'(*, 왜냐하면, For, KJV, RSV)가 언급되어 잇다. 따라서 본절은 저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리기를 갈망하는(10절)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한편, 본문의 '해와 방패'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활력을 베푸시는 분이 되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9절). 성경에서는 이외에도 그리스도를 해로 비유한 적이 있다(말 4:2).

⭕ 영화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보드'(*)로서 '무거움', '풍성함', '찬란함' 등을 뜻한다. 이말은 흔히 아름다우신 속성 중 하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여지는데(출 24:16, 17;33:18-23;겔 1:28),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결과들 또는 그 결과의 외적 표현들을 뜻하는 것 같다(Alexander).

성 경: [시84:12]

주제1: [하나님의 전(殿)에 대한 사모]

주제2: [최상의 복 받을 자-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자]

⭕ 만군의 여호와 - 80:4 주석 참조.

⭕ 의지하는 - 이는 히브리어로 '바타흐'(*)로서 근본 뜻은 '(피난하기 위해) 서둘러 가다'이며, 이에서 상징적으로 '신뢰하다', '의뢰하다'의 뜻이 유출된다. 이는 어려움과 환난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또는 곤핍한 상황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함축한다.

성 경: [시85:1]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주의 은총에 대한 감사]

⭕ 주의 땅(*, 아르체카) - 직역하면 '당신의 땅'(thy land, KJV, RSV)으로서 전문(前文)의 '여호와'(*, 예화)를 나타내는 2인칭 대명사가 딸린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거주하였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는데, 이를 본문처럼 표현한 것은 모든 만물 특히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소유인데(24:1; 89:11; 레25:23), 이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창12:7; 15:7-21; 민34:2-12)

⭕ 은혜를 베푸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차'(*)는 '...을 기쁘게 여기다, 받아 들이다, 호의를 가지다'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단순히 친절한 말 이상의 의미로서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존재를 받아 들인다는 뜻을 나타내며 특히 속죄의 문맥에서 종종 쓰인다.(렘14:10,12, Kidner) 이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푸시사 그들을 용서하시고 호의로 대하심을 뜻한다.

⭕ 야곱의 포로된 자 - '야곱'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인 바(81:1), 과거 바벨론에 포로되어 끌려갔다가 이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것 같다.(14:7, Anderson, Calvin, Clarke) 그러나 혹자는 본문의 '포로된 자'를 대적들에 의해 다른 나라 또는 열악한 상황에로 끌려간 자를 뜻하지 않고 단순히 고통과 고난 가운데 처한 자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Alexan-der)

성 경: [시85:2]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주의 은총에 대한 감사]

⭕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 '죄악'의 히브리어 '아온'(*)은 '아와' (*, 구부리다, 왜곡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악', '사악함' 등을 뜻하는데,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그릇되게 행동한 불의들을 가리킨다(the iniquity,KJV,RSV). 한편 '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나사'(*)로서 '들어올리다', '받아들이다', '감당(담당)하다' (출 28:38;레 10:17;민 18:1,23;30:15) 등의 뜻을 갖는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죄 제물의 희생에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감당하신다는 뜻으로서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이다.

⭕ 덮으셨나이다(*, 카사) - 이는 '(눈을 해치는 것을) 덮는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Kissane). 이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외 희생 제물의 구속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온전히 가리우시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에 의해 죄 를 온전히 제거하시사 기억조차 아니하시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히 9:12 ;10 :11-18).

성 경: [시85:3]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주의 은총에 대한 감사]

⭕ 거두시며 (*, 아사프) - 기본 의미는 '모으다'이며 (삼상 14:19,Anderson) ,이에서 '가져오다', '취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헤쉬보트 메하론 아페카) - 직역하면 '당신이 당신의 진노의 열로부터 돌이키셨다'(thou didst turn from thy hot anger,RSV)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한 진노를 멈추시사 돌이키시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본문에서 '진노의 열(또는 뜨거움)'(*,에하론 아페카)이란 흔히 불이 하나님 의 심판의 진노를 상징하는 바(겔 10:1,7;15:7;히 12:29), 하나님의 진노의 매섭고 혹독함을 암시한다.

성 경: [시85:4]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우리 구원의 하나님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적 차원에서 구원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79:9).

⭕ 우리를 돌이키시고(*, 슈베누) - 이에 대해서 혹자는 '우리에게 돌이키소서"(Return back to us,NEB,RV)라는 뜻을 취하여(Kissane,Alexander), 그 크신 자비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찾아오시라는 뜻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를 '우리를 돌이키소서', 즉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우리를 돌이키소서', 즉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Restore us again, RSV)의 뜻으로 본다(Ander-son,Calvin,Clarke). 이중에서 본 시의 문맥 특히 5-7절의 내용의 흐름을 볼 때 후자가 더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 분노(*, 카아스) - 3절의 '분노'(*, 에브라, 감정의 분출, 격노)와는 원어상 다른 말로서 '괴롭힘', '슬픔' 등 다양한 뜻을 암시하는데, 혹자는 본문에서 비탄서 비탄(grief)과 의분(indignation)의 감정이 혼합된 것을 나타낸다 한다(Alexander).

성 경: [시85:5]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영원히(*, 할르올람)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 언급되어 있는어 있는 데, 이는 그 의미를 강조하는 측면에서인 듯하다. 이 말은 후문(後文)의 '대대에'(*, 레도르 와도르, 세대와 세대에, to generation and generation)와 병행을 이룬다.

성 경: [시85:6]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우리를 다시 살리사(*, 아타 타슈브 테하예누) - 직역하면 '당신이 돌이키시사'(you will turn), '당신이 우리를 소생시키사'(you will revive)의 뜻이다. 앤더슨(Anderson)은 언급하기를 원문상의 두 동사는 상호 동격적 표현인데 주된 사상은 두데 주된 사상은 두 번째 동사(소생시키시사)에 의해 표출된다고 한다. 따라서 본문은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각한 역경과 침체의 상황 가운데서 생명으로 소생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다.

성 경: [시85:7]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주의 인자하심 - '인자하심'(*, 헤세드)은 '하사드'(*,인사하다. 친절하다.친절하다, 자비를 베풀다)에서 유래된 말로 '친절함, '자비', '인자함'등의 뜻을 갖는다. 특히 구약 성경에서 이는 자기 백성과의 언약에 신실하사 끝까지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크고 불변하는는 하나님의 크고 불변하는 사랑을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창 19:19;출 34:6;대하 7:3;렘 31:3 등).

⭕ 구원(*, 예솨) - 이는 '야솨'(*, 열려 있다,넓 다, 해방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구원', '해방' 등을 뜻한다. 이는 신학적 또는 비신학적인 용어로도 쓰이는데(창 47:25; 수 6:25; 삼상 23:5), 흔히 성경에서는 신학적 용어로 많이 쓰여지며,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대적 또는 역경으로부터 구출하신다는 뜻으로 쓰여진다.

성 경: [시85:8]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대저...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키 예다베르 솰롬) -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가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for he will speak peace,KJV, RSV)이다. 이것은 원인절로서 전문(前文)에서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한 데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화평을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현재의 모든 억압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신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런 점에서 구원의 복음을 '평화를 공포하는 것'(사 52:7), '화평의 복음'(행 10:36)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 망령된(*, 케실라). - 이는 '카살'(*, 살지다, 어리석다)에서 유래된 말로 '어리석음'(folly, KJV,NIV)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영적인 몽매함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길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85:9]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그의 구원이...가까우니 - 하나님의 구원이 곧 임하여진다는 뜻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사 46:13;51:5;56:1;마 3:2).

⭕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 - 혹자는 본문의 '영광'을 8절의 '화평'과 동등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Kissane).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임재(Anderson), 또는 하나님의 신성한 은혜의 외적표현(또는 결과, Alexander)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우리 땅'이란 1절의 '주의 땅'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저자가 이를 '우리 땅'이라 한 것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 때문이다(출 6:8). 결국 본문은 하나님이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사 시시 때때로 필요한 모든 것을 은혜롭게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나타낸다.

성 경: [시85:10]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 '긍휼'(*, 헤세드)이란 7절의 '인자하심'과 같은말이다. 그리고 '진리'(*,에메트)란 '아만'(*,세우다, 지탱하다, 신뢰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안정성', '확실함', '진실' 등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이는 언약이나 기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뜻하는 말로서 앞의 '긍휼'과 함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Alexander, Anderson, Tate, VanGemeren). 그러나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실함, 즉 하나님의 '긍휼'에 반응하는 것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진실함으로 보기도 한다(Kissane). 이중에서 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된 반응을 보이는 것, 즉 신앙적인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이들 두 하나님의 속성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보내진 사자(종)들처럼 서로 만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온전하고 복되게 살도록 그 땅을 복스럽게 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테이트(Tate)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긍휼, 진리, 의와 화평은 그 땅 가나안 땅)에 선함과 풍요로움올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의 사역의 살아있는 대리인들로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 일반적 으로 많은 사람들은 '의'와 '화평'을 전문(前文)의 '궁휼'과 '진리'처럼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본다(Alexander,Anderson,VanGemeren,Tate). 그러나 혹자는 전문과 같은 경우로 '의'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적 삶)이며, '화평'이란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보기도 한다(Kissane). 만약 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음으로써 화평하고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내리시고 이 땅에 의와 화평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축복을 조성하신다는 뜻을 함축한다 하겠다.

성 경: [시85:11]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진리는 땅에서... 하감하였도다 - 혹자는 이를 10절의 경우와 같이 이 땅의 인생들이 진리대로 살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의 뜻에 따라 구원하시는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뜻으로 본다(Kissane,Davies,Cohen). 그러나 본문은 10절의 반복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도우심이 조화롭게 임하심을 암시한다는 뜻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Alexander,Anderson,Tate).

성 경: [시85:12]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여호와께서...산물을 내리로다 - 이는 10,11절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긍휼, 진리, 의, 화평 등을 주심으로 그 결과 가나안 땅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뜻이다. 혹자는 '좋은 것'을 비(Dahood) 혹은 땅의 산물 등으로 보기도 하나, 그보다는 인생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 일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긍휼, 진리, 의, 화평 등)를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

성 경: [시85:13]

주제1: [이스라엘에 임한 온전한 구원]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간구와 소망]

⭕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삼으리로다 - '행하며'(*, 할라크)란 '걷다' ,'가다'의 뜻을 나타내는 강한 시적인 표현이라 한다(Alexander). 이로 볼 때 본문은 '의가 여호와 앞에 간다'는 극히 시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어 함께하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의 상태를 의롭게 변화시키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바 불의 가운데는 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 혹자는 본문의 '삼으리로다'에 해당하는 '야셈'(*)이 '솰롬(*)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해석하여 '화평'(10절)이 여호와(의 행적)를 뒤따라갈 것이라는 의미로 본다(Anderson). 그런가 하면 의가 주께서 가야 할 길을 준비하리라는 뜻으로도 이해한다(Righteousness ...prepares the way for his steps,NIV). 우리는 전반절의 주해의 연장선상에서 본문을 '(의가) 우리로 하여금 주의 행적을 따르도록 해준다'(shall set us in the way of his steps,NIV)는 의미 정도로 이해하고자 한다.

성 경: [시86:1]

주제1: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 중의 부르짖음]

⭕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키 아니 웨에비온 아니)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은 본절 맨 후반부에 언급되는 말로서 직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곤고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다'(for I am poor and needy, KJV, RSV)이다. 본 시편 기자가 직면한 구체적인 위기 상황이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 고백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낮추고 있다( VanGemeren ). 또한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고난 당하는 신실한 자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이기도하다(35:10; 37:14; 40:17; 70:5; 10 9:16, 22). 한편 '곤고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아나'(*, 억압하다, 낮추다)에서 유래된 말로 '억압받는', '고통받는'등의 뜻이며, 본문에서는 크게 침체되고 압박받는 상태를 암시한다. 또한 '궁핍하오니'(*, 에브온)는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된 것을 나타내는 말이나(112:9; 113:7; 132:15; 신 15:7; 삼상 2:8), 본문에서는 비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 귀를 기울여 - 기도나 간구를 들어주십사 하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공식적(公式的) 표현이다(71:2; 88:2; 102:2; 왕하 19:16; 사 37:17; 단 9:18).

성 경: [시86:2]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나는 경건하오니(*, 키 하시드 아니) - 직역하면 '왜냐하면 나는 경건하기 때문이다'(for I am godly, RSV)의 뜻으로서 후문의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는 말의 원인절 역할을 한다. 여기서 '경건하오니'(*, 하시드)는 85:7의 '인자하심'(*, 헤세드)의 어원과 같은 '하사드'(*, 인사하다, 친절하다, 자비를 베풀다)에서 유래된 말로 근본 의미는 '인자한'의 뜻이나 이에서 '경건한', '선한' 등의 의미가 유출되었다. 아마 이런 점에서 볼 때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사람 또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함으로 그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다. 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경건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쏨에 그만큼 순종하겠다는 뜻까지 함축하는 듯하다.

⭕ 의지하는 - 78:22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86:3]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주(*, 아도나이) - '아돈'(*, 주인. 주권자, 소유자)의 강세형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노예의 주인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쓰여지기도 하나(창 45:8; 룻 2: 13), 대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69:6; 73:28; 창 15:2; 신 3:24; 수 7:7; 사 7:7). 히브리인들은 '여호와'라는 칭호를 부르는 것을 두렵고 송구스럽게 여겨 이 말로 대신 불렀다 한다.

⭕ 긍휼히 여기소서(*, 하난) - 이는 원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몸을 굽히다' 등의 뜻인데, 본문에서는 높으신 하나님께서 땅의 낮은 인간에게 호의와 자비를 베푸신다는 뜻으로서 그분의 크신 사랑을 잘 나타내 준다.

성 경: [시86:4]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주여...우러러 보오니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은 본절 하반부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 서두에는 1, 2, 3절에서처럼 원인 블변사 '키'(*, 왜냐하면, KJV, RSV)가 언급되어 전문(前文)의 기도에 대한 원인절 역할을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되 그에 합당한 근거를 응답 요인으로 제시함으로써 응답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보다 효과적인 기도의 패턴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성 경: [시86:5]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주는 선하사...후하심이니이다 - 본문에서 '선하사'와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인자하심이 후하심'등은 모두 등위 접속사 '와우'(*)에 의해 연결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속성을 고백함으로, 거기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사유하기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살라흐'(*)는 성경에 여기 단 한 곳에만 나오는 형용사이다(hapax legomenon). 그러나 동사 형태로는 103:3 등에도 언급되며, 그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시다.

성 경: [시86:6]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귀를 기울이시고(*, 이잔) - 이는 1절의 '귀'(*, 오젠)와 같은 어원으로서 역시 하나님께서 기도나 간구를 들어주십사 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17:1; 55:1; 80:1; 140:6; 141:1).

⭕ 간구(*, 타하눈). - 이는 3절의 '긍휼히 여기소서'(*, 하난)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 '간청', '탄원'을 의미하는데, 특히 호의를 구하는 탄원(Anderson) 또는 기도(Alexander)를 암시한다. 본문에서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거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응답을 받으려 하고 있다.

성 경: [시86:7]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고난중의 부르짖음]

⭕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에는 본 시의 다른 많은 구절에서처럼(1, 2, 3, 4절) 그 서두에 원인 불변사 '키'(*)가 언급되어 있다. 이 역시 본문이 전문(前文)의 기도의 원인 역할을 해주는 구절이 됨을 암시한다. 즉 저자는 다른 구절에서처럼 어떤 원인에 근거하여 기도함으로 확실한 응답올 얻으려 하고 있는데,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시리라고 하는 강한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성 경: [시86:8]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신들 중에...없사오며 - 여기서 '신들'(*, 엘로힘)이란 80:4의 '하나님'이란 말과 같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섬기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 않는다. 혹자는 이에 대해 이방인들의 우상 신들(Davies) 또는 그보다는 여호와를 섬기는 하늘의 영적 존재들, 즉 천사들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한다(Anderson).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자를 더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Calvin, Clarke, Rawlinson), 저자는 여기에서 다른 어떤 이방 우상 신과도 견줄 수조차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탁월성, 전능성을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다.

성 경: [시86:9]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 - '열방'에 대해서는 79:1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은 한편로는 이 새상의 모든 이방 족속들이 하나님의 창조된 자들인 바 주께 돌아와 그분을 섬겨야 할 당위성이 있음을 보여주며, 또 한편으로는 칼빈(Calvin)이 암시한 것처럼 장차 이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을 경배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당시 저자의 시대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와 경배하는 어느 한 날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듯하다(Alexander). 실제로 다윗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이방인들의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모티브가 흔히 등장한다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22:27이하).

성 경: [시86:10]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대저 주는...행하시오니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가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의 '광대하사 기사를 행하시오니'(*, 가돌...웨아세 니플라오트)란 전문(前文)과 후문(後文)이 종속 관계가 아닌 동등 관계로서 등위 접속사 '그리고'(and, KJV, RSV)에 의해 연결되어진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광대하시고 기사를 행하시기 때문에'라는 말이 된다. 이는 본절 후문의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말이라 하고다. 한편, '기사'(*, 니플라오트)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지칭하는 용어로 종종 쓰인다(78:4, 11, 32, Kidner).

성 경: [시86:11]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나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 '경외하게'란 히브리어로 '야레'(*)로서 기본 의미는 '두려워하다'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단순히 공포를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 영화로우심, 거룩하심에 대해 공경(경배)의 마음과 함께 두려움을 갖는 것, 즉 경외심을 갖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시86:12]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전심으로(* 베칼 레바비) - '모든 마음으로'(with all my heart, KJV, NIV)으로서 곧 '온전히 신실함으로'(119:2; 신 6:5; 10:12, Anderson) 또는 '전인격을 다하여'라는 뜻을 함축한다.

성 경: [시86:13]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주의 권능 찬양]

⭕ 이는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가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은 12절에 대한 원인절 역할을 한다.

⭕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 - 혹자는 '향하신'(*, 알)을 '...위에'라는 뜻으로 보며, 위에서 내려온다는 뜻을 암시한다고 한다(Alexander). 이럴 때 본문은 하늘의 높으신 하나님께서 땅의 낮은 인생에게 크신 인자를 부여해 주셨다는 뜻을 나타낸다.

⭕ 내 영혼을...건지셨음이니이다 - '음부'(*, 쉐올)란 그 의미가 불분명하나,히브리인들은 이를 죽은 자들이 가는 사후(死後)세계로서 지하에 있다고 믿었다(31:17; 창37:35; 민 16:30 , 33; 사 38:10; 겔 31:17). 그들은 이 온 우주가 하늘과 땅, 땅 아래로 구성되었다고 믿었는데 그중 음부가 이 땅 아래 세계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음부는 지하 깊은 곳에 있으며(사 57:9; 암 9:2), 흑암한 곳이며(143:3; 애 3:6), 잊음(망각)의 땅(88:12)으로 알려졌다(삼상 2:1-10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陰府) 개념' 참조). 이런 점에서 이는 '땅 깊은 곳'(63:9)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본문의 '깊은 음부'(the lowest hell, KJV) 또는 '음부의 깊은 곳'(the depths of Sheol, RSV)이라는 말도 음부가 지하 세계, 땅속 깊은 곳에 있음을 암시하는 뜻으로 쓰여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음부는 흔히 높은 하늘과 대조된 곳으로 표현된다(139:8; 욥 11:8; 사 7:11; 암 9:2). 혹자는 이와 관련하여 '음부'란 산자의 세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온전한 분리를 암시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한다(Barth).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문은 영혼을 죽음의 음지에서 건지셨다는 상징적인 뜻으로서 곧 영혼을 마치 사망과도 같은 암울하고 고통스런 상황으로부터 건지셨음을 나타낸 말이다.

성 경: [시86:14]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위협으로부터의 구원 호소]

⭕ 강포한 자(*, 아리침) - 이는 '아라츠'(*, 두려운 마음을 일게 하다, 괴롭히다)에서 유래된 말로 '두렵게 하는 자', '맹렬하고 사납게 달려드는 자'(Calvin)를 뜻한다.

성 경: [시86:15]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위협으로부터의 구원 호소]

⭕ 주는(*, 아타) - 직역하면 '당신은'(thou, KJV, RSV)인데 전문(前文)의 '주' (*, 아도나이)를 지칭하는 2인칭 대명사로서 강조적 용범으로 쓰인 듯하다.

⭕ 긍휼히 여기시며(*, 라훔) - 이는 원어상 3절의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다르며. '라함'(*, 귀여워하다, 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에서 유래된 말로 '인정 많은', '자비로운' 등의 뜻을 갖는다. 이는 부모나 형이 자식이나 동생 등에 대해 느끼는 사랑이나 연민과 같은 뜻을 함축한다. 이와 같은 것은 이어지는 내용과 함께 하나님의 속성들을 잘 나타낸다.

⭕ 은혜를 베푸시며(*, 하눈) - 이는 3절의 '긍휼히 여기소서'(*, 하난)에서 유래되었으며 '은혜로운', '자비로운', '친절한' 등의 다양한 뜻을 갖는다.

⭕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 인간의 죄나 불의에 대해(곧바로 진노하시지 않고) 진노를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가리킨다(롬 2:4). 인자 - 85:7 주석을 참조하라.

⭕ 진실 - 85:10의 '진리'와 같은 말이다(85:10 주석 참조).

성 경: [시86:16]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위협으로부터의 구원 호소]

⭕ 내게로 돌이키사 - '돌이키사'(*, 파나)란 '향하다', '대면하다" 등의 뜻으로서, 이는 단순히 방향 전환의 뜻만이 아니라 얼굴을 그 방향으로 돌이키는 뜻을 함축하는 말이다(Alexander). 따라서 본문은 80:3, 7, 19등에 암시된 바와 같이 '은혜, 호의, 도움 등을 베푸소서'라는 의미이다.

⭕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 3절 주석 참조.

⭕ 주의 여종의 아들 - 이는 한편으로 다윗이 하나님께 헌신된 어머니에게서 난 자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으나. 주된 뜻은 다윗이 상속적으로 하나님의 종된 자임읕 나타내는 표현이다. 고대 히브리인의 율법에서는 상전이 그의 종된 자에게 아내를 주어 자식이 태어날 경우, 그 아내와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하여 계속 종된 상태로 거하였다(출 21:4; 23:12). 따라서 여기서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86:17]

주제1: [고난중에 드리는 기도]

주제2: [위협으로부터의 구원 호소]

⭕ 은총의 표증을 내게 보이소서 - 여기서 '은총'이란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 헨, 창 47:25; 왕상 8:23), '자비'(*, 헤세드, 창 32:10; 삼하 9:1) 등을 뜻하지 않고, 히브리어로 '토브(*)로서 '좋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등의 의미이다(창 1:31). 혹자는 이것이 물질적인 번영, 안녕, 행복 등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Alexander). 아무튼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저자에게 내리시는 그 원수들이 보고 놀랄 만큼 크고 좋은 그 어떤 호의로운 것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와 관련하여 '은총의 표증'이란 실질적인 구출을 뜻한다고 하여 저자가 열악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Anderson).

성 경: [시87:1]

⭕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 기지란 히브리어로 예수다 (*)로서 기초( foundation. KJV. NIV)를 뜻한다. 혹자는 이를 하나님이 세우신 어떤 것 곧 그분의 성소와 신정(神政)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Alexander). 그러나 이보다는 예루살렘을 암시하는 것 같으며, 저자가 그의 마음속에 예루살렘에 건설된 하나님의 성전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Anderson, Clarke). 나아가 본시의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질 교회를 암시한다 하겠다. 그리고 성산 (*, 베하르레 코데쉬)이란 직역하면 거룩함의 산(또는 언덕)들 이라는 복수이다. 이로 볼 때 본문은 예루살렘의 여러 산들 위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에 대해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예루살렘이 시온과 모리아의 산들(또는 언덕들)위에 세워졌다고 언급한다.

성 경: [시87:2]

⭕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 야곱이란 유기체적 민족 집단, 즉 열두 지파로 구성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78:5,21). 이로 볼 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의 모든 거주지들보다 라는 뜻을 암시한다.

⭕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 시온은 원래 예루살렘 성읍의 남동부 지역의 조그마한 구릉인데,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읍을 대표하여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78:68). 따라서 시온의 문들 이란 곧 예루살렘 성읍의 문들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거나 또는 동일한 뜻의 표현이다. 그런데 (성읍의) 문이란 고대 히브리인들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회적, 법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재판하는 곳인 바(69:12;룻4:1-6). 당시 성읍의 사회,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곧 모든 성읍을 대표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122:2,Anderson). 이런 점에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거주지들보다 예루살렘 성읍을 더욱 사랑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다른 곳보다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심은 이곳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최초로 안치된 곳이며(삼하 6:12-19), 이후 성읍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어(왕상 6장)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87:3]

⭕ 하나님의 성이여 - 예루살렘 성읍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성이기 때문에 불리워진 이름이다. 하나님은 성전 지성소의 언약궤 위, 속죄소 위에 임재하시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통치하시고 그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셨다(출 25:18-22; 왕상 8:13, 29).

⭕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 - 영광스럽다 (*, 카바드)란 무겁다, 풍부하다, 찬란하다, 영화롭다 등의 다양한 뜻을 갖는다. 이는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과 연관되어 언급될 때에는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이 외적으로 표현된 현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출 33:17-23;겔 1:28). 이는 또한 하나님의 내적인 아름다움에 근거한 호의를 외적으로 베푸시는 현상 또는 그 결과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84:11). 이런 점에서 본문은 그 의미가 명백하다 하겠다. 즉,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에 임재 거주하시는 바 그 아름다우신 영광이 외적으로 표현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아름다우심을 호의로 나타내 부여하신 결과, 그 성읍 또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는 현재의 상태뿐만 미래의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저자에 의해 선지자적인 약속 또는 예언으로 언급되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Alexander, Anderson).

성 경: [시87:4]

⭕ 라합 - 이는 오만 또는 맹렬함 (폭풍우)이란 뜻으로서 바다 속의 불분명한 괴물체를 가리키는 듯하며(욥 9:13;26:12; 사 51:9), 본문에서는 애굽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으로 쓰인 것 같다(89:10; 사 30:7). 이들이 후문(後文)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하나을 아는 중에 있다는 것은 곧 구원받는다는 뜻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구원을 예언한 것인 듯하다.

⭕ 바벨론 - 니므롯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왕국으로서 한때 고대 근동 지방을 제패하였으며 남 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자들이다(창 10:8-10; 왕하 25:1-7).

⭕ 나를 아는 자 - 단순히 일반적 지식으로 알 뿐 아니라 영적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섭리를 깨달아 구원받은 자를 암시한다(요 17:3).

⭕ 블레셋 - 함의 후손으로서 가나안 땅 남서부 지중해 연안에 살았다(87:3; 창 10:13, 14).

⭕ 두로 - 가나안 땅 북서부 지중해 연안에 거주했던 자들이다(83:7).

⭕ 구스 - 함의 후예로서 애굽의 남방 땅에 거하는 에디오피아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6 8:31; 창 10:6-9).

⭕ 이도 거기서 났다 - 이는 위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임재 처소 예루살렘 성에서 났다는 뜻으로서 이들이 예루살렘 시민임을 암시하며(Anderson), 이는 곧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자녀들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신약 시대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구원에로 인도함받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갈 4:26)

성 경: [시87:5]

⭕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 지존자에 대해서는 78:17,35 주석을 참조하라. 본문은 절대적인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시온을 세우리라는 뜻으로서 곧 하나님께서 그곳 시온 백성들을 돌보시며 나아가서 3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특히 본절에서 시인을 시온을 신실한 자들의 모성(母城)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 성은 지상의 시온을 넘어 성도들의 궁극적 처소가 되는 하나님의 도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사 49:20,21;54:1,2;65:18-24; 슥 8:2-13; 갈 4:26 등 참조). 그곳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6절 ;69:28; 출 32:32; 단 12:1; 말 3:16,VanGemeren).

성 경: [시87:6]

⭕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 등록하실 (*, 카타브)이란 문자적으로는 새기다, 기록하다란 뜻으로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 즉 구원받은 이방 족속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계수, 기록하시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출 30:11-16)

성 경: [시87:7]

⭕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 - 혹자는 춤추는 자 (*,홀렐림)를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the players on instruments, KJV)로 보기도 한다(Calvin). 아무튼 여기서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로 여겨진다(68:25;149 :3; 출 15:20; 삼하 6:16).

⭕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 근원 (*, 마얀)이란 문자적으로는 샘, 원천이란 뜻이다. 본문은 이방 족속들이 시온으로부터 비롯된 구원에 동참하게 된 것을 뜻함과 아울러 그에 따르는 기쁨과 행복 등의 의미도 함축하는 것 같다.

성 경: [시87:8]

⭕ 엄위하시오며...두려워할 자시니이다 - 엄위하시오며의 기본어는 아라츠 (*)로서 두렵게 하다, 떨게 하다 의 뜻이다. 이는 후문의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라는 말과 함께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분이시며 나아가 경외를 받으실 분이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6절에서 언급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이어 두렵과 경외받으실 하나님을 선포하는 말로서 그분이야말로 유일한 찬양의 대상이 되심을 암시한다.

성 경: [시88:1]

⭕ 내 구원의 하나님 -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사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호칭이다(85:4). 저자가 서두에서 하나님께 이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짖는 것은 그가 처한 깊은 어려움과 비통함을 엿보게 해주며, 아울러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영역본 RSV는 본문을 후문과 연관시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 도움을 요청하나이다(my God, I call for help by day)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문을 내가 당신 앞에서 밤에도 부르짖나이다(I cry out in night before thee)라고 개역하여, 전문과 이 후문이 상호 병행 구절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NEB도 이와 유사하게 번역한다. 그러나 이는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아마 저자는 맛소라 사본 그대로 본문에서는 구원의 근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 구원의 빛을 갈망하는 내용으로 본시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는 듯하다.

⭕ 내가 주야로...부르짖었사오니(*, 욤차크티 발릴라 네그데카). - 이를 맛소라 사본 그대로 직역하면 낮에 내가 부르짖고, 밤에 당신앞에(있나이다)이다. 일부 영역본(RSV, NEB)은 앞에서 본 것처럼 본문을 개역하여 전·후문이 상호 병행 구절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어떻게 번역하든지 간에 본문은 저자가 그를 구원하실 하나님께 대하여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나타낸다(느 1:6; 눅 18:7; 딤후 1:3). 그는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으로 인해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88:2]

⭕ 나의 기도로...달하게 하시며 - 달하게 (*, 보)란 오다(또는 가다)의 뜻이며, 본문은 저자의 간구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해 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반절은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몸을 굽히시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청취해 주십사 하는 소원을 피력한다(Alex- ander).

성 경: [시88:3]

⭕ 대저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 (*, 왜냐하면; For, KJV, RSV)가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기자는 본절(이하)의 원인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 영혼 (*, 네페쉬)이란 저자 자신의 자아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84:2). 또한 곤란 이란 히브리어로 라 (*)로서 악(한) (신 19:15, 19; 왕상 16:7,19,25), 해(로운) (23:4;35:26; 전 2:21)등의 뜻인데, 특히 유익을 주지 못하고 해악을 끼치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 볼 때 본문은 저자의 자아 곧 존재 자체가 큰 파멸에 처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졌음을 나타낸다.

⭕ 나의 생명은...가까왔사오니 - 음부란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를 뜻한다(86:13). 이런 연유로 볼 때 기자는 자신에게 닥친 곤경으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88:4]

⭕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 여기서 무덤 이란 히브리어로 보르 (*)로서 구덩이 (창 37:20,22,24; 출 21:33,34) 또는 웅덩이 (레 11:36)를 뜻하며 5절에서와 같이 흔히 말하는 무덤 (*, 케베르, 민 19:16; 겔 37:12)과는 어휘적으로 다르다. 이는 사 14:15에서는 음부와 같은 뜻으로 쓰였고, 30:3; 잠 1:12 등에서는 음부의 병행구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지하 세계로서의 음부와 같은 의미로 묘사되었거나 아니면 음부로 내려가는 입구의 뜻으로 사용되어졌을 수도 있다(Anderson).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전문과 병행 구절로서 특히 생명력을 상실한 자 곧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뜻이다.

성 경: [시88:5]

⭕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바메팀 하페쉬). - 직역하면 사망자들 가운데 자유로운 (Free among the dead, KJV)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 하페쉬)이란 흔히 구약 율법에서 종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기다가 7년째에는 자유롭게 된다는 뜻의 말로 사용되었다(출 21:2,5). 그러나 이는 어떤 고통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귀하고 가치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뜻도 나타낸다고 한다(Anderson). 이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방치되어 살아 있었을 때 누리던 어떤 축복, 은총등으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시88:6]

⭕ 깊은 웅덩이...두셨사오며 - 깊은 웅덩이나 어두운 곳, 음침한데란 3절의 음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이다. 음부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곳이 땅 깊은 지하 세계에 있으며(86:13), 햇빛이 통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88:12;143:3; 욥 10:21,22; 애 3:6). 한편 본문의 음침한데 (*, 비므촐로트)란 명사로서 깊은 데 (in the deeps, KJV)를 뜻하며, 바다의 깊은 데를 암시하는 것 같다(출 15:5, Anderson).

성 경: [시88:7]

⭕ 주의 모든 파도로...하셨나이다 - 여기서 파도란 하나님의 분노 또는 그 분노로 인한 시련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이며, 어원학적으로 산산이 부서지다, 파괴하다는 뜻과 관계 있다. 그리고 괴롭게 하셨나이다 (*, 아나)의 원래 뜻은 누르다(압박하다) , 또는 (압박함으로) 괴롭히다 (overwhelm, NIV, RSV)의 뜻이다. 이 동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억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 바 있다(창 15:13; 출 1:12).

성 경: [시88:8]

⭕ 나의 아는 자로...떠나게 하시고 - 나의 아는 자 란 그 기본어가 야다 (*)로서 알다 또는 아는 자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자를 말하지 않고 아주 가까운 친구를 뜻한다(Anderson). 성경에서는 친구들이 떠나는 이런 일은 어떤 자가 큰 비통함, 시련을 당한 결과 발생되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31:11;38:11;69:8). 이런 사실은 저자가 커다란 비통함, 어려움을 당한 사실을 엿보게 해준다.

⭕ 나로...하셨사오니 - 가증되게 란 히브리어로 토에바 (*)로서 혐오스러운 (것), 미워하는 (것) 등을 뜻한다(abomination, KJV). 따라서 본문은 시인이 가까운 친구들로부터조차 마치 혐오스러운 물건처럼 기피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음을 뜻한다(욥 4:1-11:8:1-6). 어쩌면 시인은 이스라엘이 애굽 체류시에 애굽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역사적 암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창 43:32;46:34, Alexander).

⭕ 나는 갇혀서...되었나이다 - 이는 저자가 어떤 환경에 격리된 것(레 13:4, 46) 또는 감옥에 감금된 것(렘 32:2)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 등으로 감싸여 헤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 듯하다(Calvin).

성 경: [시88:9]

⭕ 곤란으로...쇠하였나이다 - 여기서 곤란(*, 오니)이 란 3절의 곤란과는 달리 아나(*, 누르다, 괴롭히다)에서 유래된 말로서 억압, 괴롭힘, 고통 등을 뜻한다. 그리고 눈 이란 흔히 사람의 마음 또는 몸의 상태의 창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마 6:22), 혹자는 행복과 불행을 나타내는 거울로서 이해하기도 한다(6:7;31:9; 욥17:7, Anderson).이로 볼 때 본문은 저자가 심각한 억압과 고통 등으로 인하여 그의 상태가 심히 피폐해져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3-8절의 상태와 일맥 상통한다.

⭕ 주를 향하여...들었나이다 - 들었나이다 란 기본어가 솨타흐 (*)로서 뻗다, 뻗치다 의 뜻이며, 히브리어 원문상 이 문구는 구약 성경에서 단지 이곳에만 나온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기도의 한 형태로서 손을 드는(*, 솰라흐, 내놓다, 뻗다)것과 같다(Anderson). 흔히 히브리인들은 간절한 기도의 유형으로서 하늘을 향해서(왕상 8:22; 애 2:19), 또는 하나님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을 향해서(5:7;134:2; 왕상 8:35,38,42) 그 손을 들고 기도했는데 본문도 같은 형태이다. 특히 여기서는 고통의 심저(深低)에서 높으신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2절).

성 경: [시88:10]

⭕ 주께서...보이시겠나이까 - 본절로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질문 형식을 띠기는 하지만 차라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간구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곧 죽을 것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 기자를 구원하시지 않을 경우, 기자는 죽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 후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 유혼이...찬송하리이까 - 유혼(*, 레파임)이란 그 어원이 불분명하다, 혹자는 가라앉다, 풀어지다 에서 유래된 말로 그 명사는 가라앉은 힘없는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보고(BOB), 또 다른 사람은 고치다, 연합되다에서 유래된 말로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집단으로서의 죽은 자들을 암시한다고 한다(R. C. Driver). 또 아무튼 그 어원이 어쨌든 본문에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음부에 사는 자들을 뜻한다. 한편, 이 말은 성경에서 가나안이 옛 종족 중 한 족속(르바 족속)을 가리키는 말과 같다(창 14:5;15:20; 신 3:11; 수 12:4).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와 관련하여 유혼은 가나안의 한 거인 족속의 이름인데, 이는 시적으로 죽은 자들의 거대한 무덤 또는 영혼들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성 경: [시88:11]

⭕ 주의 인자하심을...있으리이까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또는 그 속성들을 살아 생전에 증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로서 곧 저자로 하여금 소생, 회복할 수 있도록 구원해 달라는 간구의 뜻을 암시한다. 본문의 성실하심 이란 그 기본어가 에무나 (*)로서 아만 (*, 세우다, 신실하게 하다, 신뢰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확고함, 신실함, 진실함 등을 뜻한다. 한편 아만은 85:10,11의 진리의 어원이기도 하다.

성 경: [시88:12]

⭕ 흑암 중에서...알 수 있으리이까 - 사람이 죽어서 가는 음부에서는 하나님과 단절된 곳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를 경험할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사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여기에는 11절의 의미와 같이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할 때 하나님의 역사와 의로우신 행위를 체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흑암 중 이나 잊음의 땅 이란 음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인데 이는 음부의 특성 즉 그곳이 어두운 곳이며(욥 10:21,22;29:3), 그곳에 사는 자들이 곧 잊어버림을 당하고 그들 자신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31:12; 전9:5) 히브리인들의 사상에 기인된 것이다.

성 경: [시88:13]

어휘 면에서는 다르다. 그러나 그 의미 면에서는 앞서다, 앞에 오다(가다)의 뜻으로서 어떤 사람 앞에 나아오게 하는 것을 암시하는 말로서(Alexander) 유사하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침 일찍부터 정성을 모아 드리는 기로를 더욱 귀하게 여기사 잘 응답하여 주신다는 생각에 기인한 고백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의 내용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5:3;17:15;46:5;9: 14;143:8). 혹자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의 기도 습성처럼 아침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 즉 아침에 (1) 태양이 떠오름, (2)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됨, (3) 공의가 실행되어짐(삼하 15:2), (4) 새벽여명에 큰 구원을 경험함(출 14:30; 사 37:36)등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라고 한다(J.Ziegler). 아침(또는 새벽)은 밤에 잠을 자고, 안식하고 난 후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처음 시간이라는 점에서 귀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성 경: [시88:14]

⭕ 여호와여...버리시며 - 버리시며 (*, 자나흐)란 밀어 젖히다, 거절하다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서 단순히 지나쳐 포기하는 것 이상의 의미, 즉 거절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알렉산더(Alexander)는 혐오감으로 거절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여기서 그 원인릉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비탄과 고난, 슬픔 가운데 방치하사 보살피지 않으심을 탄원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저자가 자신의 구원을 강력히 청원하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혼 (*, 네페쉬)이란 저자 자신의 전 인격과 존재를 대변하는 의미에서 언급되어진 말로 볼 수 있다(84:2).

⭕ 주의 얼굴을...숨기시나이까 - 흔히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긍정적으로는 그분의 은혜, 도우심, 호의, 구원, 능력 등을 부여해 주심을(27:9;31:16;42: 5;105:4; 대상 16:11; 대하 6:42), 부정적으로는 그 분의 공의, 분노 등을(34:16;51:9 ;90:8; 벧전 3:12) 암시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의미는 전자를 뜻한다. 기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사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심을 탄원하고 있다.

성 경: [시88:15]

⭕ 소시부터(*, 미노아르) - 이는 젊었을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의 뜻이다. 아마 기자는 젊었을 때 이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비탄과 고통 가운데 지내왔던 것 같다. 기자가 어렸을 때부터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도가 그만큼 더욱 간절하였음은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본문이 저자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일 수 있으며 또는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호 11:1)에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Alexander).

⭕ 곤란을 당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어는 아니 (*)로서 아나 (*, 누르다, 괴롭히다)에서 유래된 말로 억압받는, 고통받는의 뜻이다(9절).

⭕ 황망하였나이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기본어가 푼 (*)으로서

성 경: [시88:16]

⭕ 주의 진노(*, 하로네카) - 이는 당신의 진노들 이라는 복수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강조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VanGem- eren, Anderson). 특히 진노에 해당하는 하론 (*)의 근본 뜻은 열, 타오름 이며, 이에서 격렬함, 분노, 진노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이것은 78:21에서 하나님의 노를 불 (*, 에쉬)로서 표현한 것과 유사한 묘사이며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 12:29)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공의, 질투의 불을 발하시며 심판하시고 태우신다는 뜻을 나타낸다.

성 경: [시88:17]

⭕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 이는 16절과 연관시켜볼 때 7절과 유사한 표현이며, 거대한 양의 물이 넘쳐 흐를 때 모든 존재를 덮치며 휩쓸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의 막강한 파괴력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창 7:10-8:13). 그리고 성경에서는 종종 물의 이런 특성상 이 물이 사람(의 영혼)을 사망케 하는 존재 또는 곤란하게 하고 압박하는 존재로서 비유적으로 종종 묘사되고 있다(18:4;32:6;69:1,2,1 4,15;90:5).

성 경: [시88:18]

⭕ 주께서...떠나게 하시며 - 이는 8절 전반절을 반복하는 내용으로 보인다(Anderson,Al exander). 다시 말하면 현재 고난과 비통함을 당하는 저자에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마저 떠나 그를 위로하는 자가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자신이 더욱 처량하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나의 아는 자를...두셨나이다(*, 메유디아 마호솨크) -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나의 아는 자를(는) 흑암(에) 라는 뜻이다. 이는 본시 중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를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중에 사라져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즉 음부라는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석가 알렌(Allen)은 어두움이 나의 남아있는 한 동료이다 (Darkness is my one companion left)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하며 후자를 지지한다. 영역본 중에서 KJV는 가능한 원문 그대로 번역하려 하여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속으로 (mine acquaintance into darkness)로 했으나, NIV는 어두움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the darkness in my closest friend)로 옮겨 후자를, 그리고 RSV는 나의 동료들이 어두움 속에 있다 (my companions are in dark ness)로 번역하여 전자를 각각 지지하고 있다. 만약 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저자의 아는 자들이 흑암 중에 사라져가고 혈혈 단신으로 겪게 되는 가중된 고통과 외로움을 강조하는 의미가 되며, 후자를 취할 경우는 자신이 처한 암담한 좌절 상태 자체에 주안점을 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을 취하든 간에, 저자는 그의 막중한 고난의 처지를 언급하면서 한편으로 그 이면에는 구원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성 경: [시89:1]

⭕ 여호와의 인자하심을...노래하며 - 인자하심의 히브리어 헤세드 (*)는 하사드 (*, 인사하다, 친절하다, 자비를 보이다)에서 유래된 말로 특히 언약적 관계를 맺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적 관계 안에서 다윗에게 보이신 사랑과 자비를 나타낸다. 또한 영원히 (*, 올람)란 부사적 의미로 쓰인 명사이다(Alexander, Anderson). 성경에서 이 말은 하나님께 적용되어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시간을 암시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나(90:2;93:2). 때로는 본문에서처럼 문맥적인 제한을 받아 단순히 살아 있는 동안 또는 긴 인생 등의 의미처럼 긴 시간, 오랜 세월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신 15:17; 왕상 1:31, Anderson). 여기서 저자는 본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오래도록 노래하리라고 고백함으로써 다윗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셨던 도우심의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을 은연중 간구하고 있다.

⭕ 주의 성실하심을...알게 하리이다 - 성실하심 (*, 에무나)이란 확고함, 신실함, 진실함 등의 뜻으로서 85:10,11의 진리와 어원을 같이한다. 본 문맥에서는 역시 전문의 인자하심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신 것을 뜻한다. 그리고 대대로는 전문의 영원히란 말고 병행 구절이다(85:5).

성 경: [시89:2]

⭕ 내가 말하기를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 (*)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본절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1절) 대한 동기 또는 이유를 설명해 줌을 암시한다(Anderson).

⭕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올람 헤세드 이바네) - 직역하면 인자하심이 영원히 세워지리라 (merey shall be build up forever, Anderson)의 뜻이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쉬운 인간과는 달리, 정하신 뜻을 이루기까지 베풀기로 하신 인자(仁慈)를 결단코 망각하거나 거둬들이시지 않는다(Calvin).

⭕ 주의 성실하심을...하시리라 - 맛소라 사본에 의하면 본문의 견고히 하시리라는 타칸 (*)으로서 당신이 세우셨다 (you established)라는 뜻이나, 70인역(LXX)과 심마쿠스역(Symmachus), 벌게이트역(Vulagte)등에 의하면 티콘 (*)으로서 세워지다 (is established) 로 되어 있다. 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의 주어는 1절의 여호와를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 당신이가 되나, 후자를 취할 경우에는 주의 성실하심 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하늘에서 견고하게 세워지니라 (또는 주께서 견고케 하시리라)는 뜻으로서 곧 주의 성실하심의 견고함, 확고 부동함을 나타내며 나아가서 이 성실하심이 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되리라는 저자의 믿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시89:3]

⭕ 나의 택한 자 - 문맥상 다윗을 가리킨다.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대행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Anderson). 이런 점에서 본문은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선택받은 다윗의 특별한 관계, 즉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낸다 하겠다(VanGermeren).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택함받은 자로 언급되어지고 있다(행 13:22).

⭕ 언약을 맺으며 - 언약 (*,베리트)이란 그 어원이 불확실하나 정하다, 매다, 자르다의 뜻을 갖는다(신 29:16-26 강해, 언약의 어원적(語源的) 고찰 참조). 이 언약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져야 할 약속으로 체결되어지기도 했으나(창 31:43-55), 본문을 위시해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뜻한다. 본문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의 가계(家系)에 왕위가 끊이지 않고 후손에 의해 계속 이어지리라 언약하신 것을 가리키며(삼하 7:5-16), 후에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졌다(눅 1:32,33).

⭕ 내 종 다윗 - 전문(前文)의 나의 택한 자 와 병행 구절이다. 특히 다윗을 종으로 호칭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대리자임을 암시한다. 반게메렌(VanGemeren)은 이와 관련하여 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여호와의 대리자가 되는 (다윗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한 말이라 한다.

성 경: [시89:4]

⭕ 네 자손을...견고히 하며 - 이는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궁극적으로는 후문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다윗의 왕위를 계승케 하시리라는 언약이다(삼하 7:8-16). 이는 영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졌다(마 1:1; 눅 1:32, 33).

⭕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 다윗의 왕통이 끊이지 않고 계속 지속될 것을 뜻하는 말로서 궁극적으로 전문에서 암시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졌다.

성 경: [시89:5]

⭕ 여호와여...찬양할 것이요 - 본문은 언약에 관련된 3,4절 내용과는 달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로운 전환 국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내용 면에서는 전문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전문의 언약의 하나님을, 그 하나님의 기사(奇事)를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본시의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적 인자하심을 기억하시기를 염원하는 바램 또는 그것에 대한 확신에 대한 표시이기도 하다. 한편 본문의 기사에 대해서는 (1) 다윗 언약을 맺으심(Ahistron), (2) 가나안에 정착케 하신 일(Kissane) 혹은 (3)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기사들(Boy- lan)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으나, 우리는 (3)의 견해를 포함하여 창조와 구속 역사 전체에서 드러나 하나님의 권능을 포괄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 성실에 대해서는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거룩한 자의 회중 (*, 비케할 케도쉼, the assembly of the holy ones, RSV)이란 전문의 하늘이란 말과 병행구로서(Alexander) 하늘의 영적 존재들(Anderson) 즉 일단의 천사들의 무리들(Rawilinson)을 가리킨다. 본문의 찬양도 다윗에게 베푸신 언약을 기억하시사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 또는 확신의 뜻으로 언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시89:6]

⭕ 궁창에서...비교할 자 누구며 - 궁창 (*, 솨하크)이란 가루로 만들다 의 뜻인 솨하크 (*)에서 유래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부숴진)가루, 티끌 (사 40:15)을 뜻하며, 복수로서 구름 (욥 38:37)을 의미하며, 여기에서 거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의미인 궁창, 하늘 (68:34)등의 뜻이 유출되었다. 본문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의문문으로서 감히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특히 본문에서 궁창을 언급한 것은 하늘의 영적 존재들이 거하는 곳을 나타내는 뜻에서인 듯하다.

⭕ 권능 있는 자(*, 베네 엘림) - 직역하면 신들의 아들들이다. 여기서 신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림 (*)은 엘(*, 하나님, 42:8;52:5: 창 43:14; 삼상 2:3; 삼하 22:31,33)의 복수이다. 이 말은 숫자상의 복수로서 많은 신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표현 기법상 엘 (*, 전능자)에 대한 강조적 용법으로 쓰인 장엄 복수이거나 또는 엘 엘림 (*, 신들의 신)의 생략형으로서(단 11:36) 최고의 신, 즉 하나님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따라서 권능 있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킨다(욥 38:7).

성 경: [시89:7]

⭕ 엄위하시오며...두려워할 자시니이다 - 엄위하시오며의 기본어는 아라츠 (*)로서 두렵게 하다, 떨게 하다의 뜻이다. 이는 후문의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라는 말과 함께 거룩하고 높으신 하나님,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분이시며 나아가 경외를 받으실 분이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6절에서 언급한 전능하신 하나님에 이어 두렵고 경외받으실 하나님을 선포하는 말로서 그분이야말로 유일한 찬양의 대상이 되심을 암시한다.

성 경: [시89:8]

⭕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 80:4 주석 참조.

⭕ 주와 같이...누구리이까 - 6절과 같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강한 역설적 질문이다.

⭕ 주의 성실하심이...둘렀나이다 -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1,2절).

성 경: [시89:9]

⭕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 6,8절에 암시된 하나님이 전능하심이 바다를 다스리신다는 표현으로서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대 근동의 우가릿 신화에서 바다는 바알(Baal)의 대적자로서 이 둘은 왕권을 두고 싸웠다 한다. 그러나 바다는 바알에 예속되어 그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한다(Anderson, VanGemeren, 46:2;74:13). 그런데 기자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신화를 언급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흔히 바다는 거칠게 일어난 대적하는 악한 세력으로 비유되고, 하나님은 이들 세력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24:2;65:5-7 ;104:6-9). 본문에서도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 주권적 통치를 나타내기 위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칼빈(Calvin)은 본절을 다음의 10절과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신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로 보기도 한다.

성 경: [시89:10]

⭕ 주께서 라합을...흩으셨나이다 - 라합이란 바다 속에 사는 흉포(凶暴)한 신화적 동물로서 흔히 애굽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는데(87:4), 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 애굽 사람들을 홍해 바다에 매몰시키시고 그들의 파하신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출 14:15-31).

성 경: [시89:11]

⭕ 하늘이 주의 것이요...것이라 - 9,10절에서 적대 세력을 다스리시고 파하신 예를 들어 하나님의 능하심을 언급한 데 이어, 본절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밝혀 그 분의 위대하심, 능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천지란 온 우주를 함축하는 말로 볼 수 있다.

⭕ 세계와...건설하셨나이다 - 세계 (*,테벨)는 땅 (*, 에레츠)이란 말과 시적인 동의어로 쓰이는데, 많은 경우에 전자는 후자보다 더 우주적인(즉 포괄적인) 뜻을 함축한다. 그리고 땅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사는 부분(9:8) 또는 경작된 땅(사 14:17)을 암시한다(24:1, Anderson). 알렉산더(Alexander)는 이를 황량하고 비생산적인 바다와는 대조적으로 경작되도 생산적인 땅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건설하셨나이다 의 기본형은 야사드 (*)는 세우다, 기초를 두다 의 뜻이며, 87:1의 기지의 어원이기다 하다. 혹자는 이것이 창조와 지탱의 뜻을 암시한다고 한다(Alexander).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계와 그중에 충만한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되어지도록 붙드신다는 것이다.

성 경: [시89:12]

⭕ 남북을...창조하셨으니 - 남북이란 이 세상의 지정학적인 방향을 가리키는 말로서 후문의 요단 강 동서편에 있는 두 산 다볼과 헤르몬 이라는 말과 함께 세상의 동서남북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Rawlinson, Alexander). 이럴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뜻하는 구절로 이해된다. 그러나 앤더슨(Anderson)이 말한 바, 북은 헤르몬과 동의어이며 남은 지정학적으로 헤르몬의 남쪽에 있는 다볼을 말한다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취하든 본문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암시한다.

⭕ 다볼과 헤르몬 - 다볼 산은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 약 20km, 나사렛 남동 약 10 km 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약 555m에 이른다. 이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이스라엘 내에서는 갈멜 산(렘 46:18), 헤르몬 산(수 12:1)등과 함께 유명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헤르몬 산은 팔레스틴 북부, 고대 수리아의 안티 레바논(Anti-Lebanon)의 남쪽 산맥에 있는 거대한 산이다. 이는 높이가 약 2,800m인데, 그 정상에는 거의 1년 내내 흰눈이 덮여 있다 한다. 이 산을 아모리 사람들은 스닐, 시돈 사람들은 시룐(3:9)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바알 헤르몬(삿 3:3)이라고도 불리웠다.

성 경: [시89:13]

⭕ 주의 팔에...높으시니이다 -여기서는 팔과 손, 오른손 이라는 말을 빌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서로 다른 묘사로 표현한 구절이다(10절, Anderson).

성 경: [시89:14]

바름, 깨끗하고 의로움을 뜻한다. 그리고 공의란 히브리어로 미쉬파트 (*)로서 문자적으로는 (법적으로 선언된) 판결, 언도, 법 등을 뜻한다. 이런 본문의 보좌가 통치자로서의 위치, 권위 등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바, 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통치의 기본 원칙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는 어떤 불의나 죄악의 모습이 전혀 상상 되어질 수 없음을 암시해 준다(97:2; 잠 16:12).

⭕ 인자함과 진실함이...행하나이다 - 인자함에 대해서는 85:7 주석을 참조하라.

⭕ 진실함(*, 에메트)은 85:10의 진리와 같다(86:15). 이 두 말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같이 언급되어진다(25:10;40:10, 11;57:3;61:7;115:1;138:2). 그리고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 예카드무 파네카)란 직역하면 당신의 얼굴에 앞서다 또는 당신의 얼굴 앞에 가다 (go before thy face, KJV)의 뜻이다. 인자함과 진실함이 하나님을 수종하는 천사들처럼(Anderson) 또는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종과 같이(Calvin) 하나님이 가시고자 하는 방향 앞으로 먼저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인자함과 진실함 가운데 행하신다는 뜻으로서 그분의 은혜로우신 속성을 암시한다.

성 경: [시89:15]

⭕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 - 즐거운 소리 (*, 테루아)란 떠들석함, 환호, 환성 등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음으로 기뻐 외치는 소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기쁨의 즐거운 소리를 외칠 줄 아는, 즉 은혜와 축복 등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포함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환성을 터뜨릴 줄 아는 백성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

⭕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하나님의) 얼굴 빛 이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돌이키시사 호의로 베푸시는 은혜, 축복, 도우심 등을 암시하는 바(80:3), 본문은 곧 주님의 은혜, 도우심 가운데 범사를 행하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성 경: [시89:16]

⭕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 여기서 이름 이란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칭호 이상의 의미로서 하나님 자신 또는 그분의 신격(神格) 자체를 함축하는 말인 바, 본문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암시한다. 혹자는 본문의 기뻐하며를 기뻐 외치는 것이나 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Anderson).

⭕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 하나님의 백성이 구분의 은혜로 복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근본 아담 안에서 죄인인 반면에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시며 그분의 판결은 공의로워 절대적인 바, 인간 자아의 노력이나 의, 힘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오로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존귀한 자태를 회복할 수 있다(롬 3:23,24).

성 경: [시89:17]

⭕ 주는...영광이심이라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 (*, 왜냐하면;For, KJV, RSV)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본절이 16절의 원인절 역할을 해줌을 나타낸다. 즉, 백성들이 기뻐하고 높아지는 것은(16절) 근본 하나님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영광 (*,티프아라)이란 반짝이다, 아름답게 하다의 뜻인 파아르 (*)에서 유래된 말이며, 84:11의 영화나 85:9의 영광이란 말과 다른 말로서 장식(품), 아름다움 이란 뜻을 함축한다. 이로 볼 때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 또는 그 백성들의 힘의 본질 자체가 됨을 암시한다.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18:1)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 우리 뿔이...높아지오니니 -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한다(75:10;112:9, Anderson, Tate). 따라서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은혜로 영육간에 강건해짐을 뜻한다.

성 경: [시89:18]

⭕ 우리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도 불변사 키 (*)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원인을 나타내는 말(For, KJV, RSV)로, 또는 강조를 표현하는 말(Indeed, NIV)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어진다. (1)한글 개역 성경처럼 우리 방패 란 이스라엘의 왕, 즉 다윗 왕가의 왕을 뜻하며, 본문은 다윗 왕가의 왕이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힘, 축복, 은총을 받음을 암시한다(Briggs, Calvin). (2) 우리 방패는 여호와이다 또는 여호와는 우리 방패이다 (the Lord is our defencd, KJV)의 뜻으로 해석한다. 이럴 경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방패가 되사 그들을 친히 다스리신다는 내용이 된다(Anderson). 이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어느 것을 취해도 하나님께서 저자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점을 나타낸다.

⭕ 우리 왕은...속하였음이니이다 - 이에 대한 해석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 (our king to the Holy One of Isr- ael, RSV)로 보는 견해(Oesterley, Kissane, Cohen, Kraus), (2)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우리의 왕이다로 번역하는 견해(Anderson). 본문의 의미 역시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두 견해 중 어떤 것을 취하든 별다른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다.

성 경: [시89:19]

⭕ 주께서 이상(異像) 중에...말씀하시기를 - 이는 성전을 짓고자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을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삼하 7:4-17). 여기서 이상 (*, 하존)의 본래 뜻은 보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에서 환상, 이상 등의 뜻이 유출된다. 그리고 주의 성도란 문자적으로는 라하시데카 (*)로서 당신의 인자한(또는 경건한) 자들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나단이나 다윗 중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으나, 고대 번역본들과 유력한 주석가들이 이를 복수로 취하는데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한다(Alexander). (2)단수로서 다윗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Anderson, Dahood). (3)나단과 사무엘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Briggs, Kidner). (4)나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Rawlinson). 이중에서는 문맥상 (4)의 견해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 능력 있는 자...택한 자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사 강하게 하신 다윗을 가리킨다(3절).

성 경: [시89:20]

⭕ 내 종 다윗 -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기 전부터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였다(3절; 삼상 16:11-13;17:31-54).

⭕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에게 기름부은 사실을 가리킨다(삼상 16:11-13). 한편 거룩한 기름 이란 구약 성경 가운데 본문에만 언급되는데, 같은 의미가 출 30:22-33절에 암시된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몰약 오백 세겔, 육계(育桂) 이백 오십 세겔, 창포 이백 오십 세겔, 계피 오백 세겔과 감람 기름한 힌을 섞어 만든 향유이다.

성 경: [시89:21]

⭕ 내 손...내 팔 - 이는 상호 병행구로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might and power, And- erson)을 상징적으로 비유하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인 표현이다.

성 경: [시89:22]

⭕ 원수가...강탈치 못하며 - 강탈치의 히브리어 기본형은 나솨 (*)로서 그 본뜻은 (돈을) 빌려주다, (빚을) 독촉하다의 의미로서 특히 채권자가 빚진 자를 괴롭히거나 학대하는 의미를 함축한다(Alexander). 이런 점으로 볼 때 본문은 다윗 왕국이 어느 대적자에 의해 서든지 굴복당함이 없이 견고케 될 것임을 암시한다.

⭕ 악한 자가...못하리로다 - 곤고케 (*, 아나)란 문자적으로는 누르다, 괴롭히다의 뜻이다. 상반절과 대구를 이르는 본문은 악인이 다윗을 억압하며 괴롭히는 일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로서 곧 그의 왕국의 견고함을 약속하신 내용이다(삼하 7:10).

성 경: [시89:23]

⭕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 여기서 한하는 자 (*, 메사네아유란 미워하는 자들 (those who hate, RSV)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대적들을 진멸하신다는 뜻으로서 22절과 유사하게 다윗의 대적들이 그의 왕국을 넘보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이다(삼하 7:9).

성 경: [시89:24]

⭕ 나의 성실함...함께 하리니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따라 자비로써 다윗을 보호하고 축복해 주실 것임을 암시한다(1절). 이는 저자가 1,2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고백하고 찬양한 이유를 생각케 한다.

⭕ 내 이름을 인하여...높아지리로다 - 내 이름 이란 곧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며(16절), 뿔 이란 힘(능력) 을 상징하는 바(17절), 본문은 곧 하나님으로 인해 다윗의 왕권이 강해지고 그 위세가 높아짐을 뜻한다.

성 경: [시89:25]

⭕ 그 손을 바다 위에...세우리니 - 본문의 바다와 강들에 대해 혹자는 각각 지중해와 유프라테스 강 및 그 지류들을 의미한다고 하나(137:1; 왕상 4:21,24, Rawlinson), 총체적으로는 어떤 지역 전체를 비유하는 것으로 보인다(Alexander). 또한 손 이 능력, 또는 통치권을 상징한다 할 수 있으므로(21절), 본문은 다윗의 힘, 통치권이 팔레스틴 온 지역을 통괄하여 지배하리라는 뜻으로 역사적 사실로 성취되어졌다(삼하 8:1-18; 대하 18:1-19:11).

성 경: [시89:26]

⭕ 주는...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 다윗이 언약적 관계에 있는 하나님께 대하여 신앙 고백적으로 선언한 내용이다. 또 이는 언약의 하나님께서 다윗을 친밀한 관계로 대해 주심을 고백한 것으로서 같은 형식이 다윗의 시에 자주 나타난다(18:1,2;23:1;27:1). 특히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하시사 새롭게 하신 분, 그를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또 그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최고의 능력자 및 그를 구원하시는 견고한 터전이 되시는 분으로 고백한 것이다.

성 경: [시89:27]

⭕ 장자를 삼고 - 아들은 아버지를 표현하는 자로 여겨졌는데, 장자는 그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으로서(창 49:3) 다른 아들들보다 배의 축복을 받았다(신 21:15-17). 이로 볼 때 본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당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하사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축복을 받게 하신 자로 삼으셨음을 암시한다. 이외에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장자로 표현된 자들로는 이스라엘 백성(출 4:22), 에브라임(렘 31:9), 예수 그리스도(히 1:6)등이 있다.

⭕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 으뜸 (*, 엘른)이란 하나님께 대한 칭호로서 흔히 쓰이는데(18:13;46:4;47:2), 문자적으로는 더 높은 자 (higher, KJV) 또는 가장 높은 자 (the highest, RSV)의 뜻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의해 다윗 왕이 세계 모든 왕보다 더 높아 세계 만방에 위엄을 떨치는 자로 존재케 됨을 암시한다.

성 경: [시89:28]

⭕ 저를 위하여...굳게 세우며 -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언약을 지키사 그의 왕국을 견고케 하시리라는 약속이다. 이는 24절과 유사한 말씀으로서 역시 저자가 1,2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선언하고 찬양한 원인을 생각케 한다.

성 경: [시89:29]

⭕ 그 후손을...하리로다 - 이는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말한 것과 유사한 내용으로서(삼하 7:12,13) 당대로 말하자면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또는 나아가서 그의 후예들)을 견고히 세워 다윗 왕위를 지속케 하리라는 뜻을 암시한다. 한편, 궁극적으로는 육신상으로 다윗의 왕위를 이어 그 왕권을 영원히 지속시키실 것임을 뜻한다(4절; 눅 1:32,33; 계 20:4,5). 본문은 하늘의 날 이란 자연의 지속성을 빗대어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Alexander). 이런 뜻의 후에 나오는 해 (36절), 달 (37절)이라는 말에서도 엿보여진다.

성 경: [시89:30]

⭕ 내 법을 버리며 - 법의 히브리어는 토라 (*)로서 흔히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을 가리킨다(출 24:12; 레 26:46; 신 1:5;4:8,44). 본절은 31,32절과 함께 다윗의 왕위를 이은 자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경우에는 분명히 징계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 규례(*, 미쉬파트) - 문자적으로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선고, 법 등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특히 법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율법의 또 다른 측면을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 [시89:31]

⭕ 율례(*, 후카) - 하카크 (*, 새기다, 규정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제정된) 관습, 규례 등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이런 측면으로서의 율법을 말한다.

⭕ 계명(*, 미츠와) - 차와 (*, 명령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명령, 법령 등을 뜻하며, 율법을 가리킨다.

성 경: [시89:32]

⭕ 내가 지팡이로...다스리며 -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바 삼하 7: 14과 유사하다. 본문의 지팡이 (*, 쉬베트)는 삼하 7:14에서는 막대기로 번역되었는데(욥 9:34; 잠 26:3; 사 9:4), 흔히 권위의 상징으로서 왕들이 가지는 홀 (scepter)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창 49:10; 민 24:17). 그러나 본문에서는 후자보다는 전자로서 때리기 위한 막대기의 뜻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한 다스리며 (*, 파카드)란 방문하다 (visit, KJV), 감독하다, 벌주다 (publish, RSV)등의 뜻이 있다.

⭕ 채찍으로...징책하리로다 - 채찍 (*, 네가)의 문자적인 뜻은 타격, 때림인데, 이에서 역병, 채찍 등이 유래되었다. 혹자는 이 말을 타격 (blows) 또는 습격 (ass- aults)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낫다고 보기도 한다(VanGemeren). 아무튼 본문은 전문(前文)처럼 다윗의 후손이 범죄할 경우 친히 징계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성 경: [시89:33]

⭕ 나의 인자함을...폐하지 아니하며 - 다윗에게 약속하신 바 그의 후손들에게 베푸시기로 하셨던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지속적으로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이다(1, 28절). 이는 곧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끊기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서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28절). 한편 거두지 (*, 푸르)란 문자적으로는 깨뜨리다, 부숴뜨리다의 뜻인데, 이는...로부터 (from)라는 전치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약정된 계약 등을 철회함으로써 파기한다는 뜻을 함축한다(Alexander).

성 경: [시89:34]

⭕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 이는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깨뜨리지 않고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말씀이다.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실행은 33절에 암시된 바와 같이 당신의 성품 중 성실하심의 속성에 기인한다(1절)

⭕ 내 입술에서...아니하리로다 - 이는 전문과 병행 구절로 보인다. 내 입술에서 낸 것 이란 상황에 따라 구두(口頭)적인 맹세(민 30:12)나 서원(신 23:23)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본문에서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 내용을 가리킨다.

성 경: [시89:35]

⭕ 나의 거룩함으로...맹세하였은즉 - 하나님의 거룩하심 (*, 코데쉬, 분리, 구별)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죄나 불의, 부정 등으로부터 분리되신 분으로서 온전하시고 흠이 없으시며, 나아가 의로운 분이심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은 맹세의 확실성, 불변성을 암시한다.

⭕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것인데(히6:18), 이것 또한 그분의 거룩하신 속성에 기인한다.

성 경: [시89:36]

이는 29절과 유사한 반복적 표현이다.

⭕ 그 위는 해같이...있으며 - 이는 전문처럼 29절과 유사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해같이란 29절의 하늘의 날과 같게 란 말과 같이 오랜 세월을 상징하는 말이다.

성 경: [시89:37]

⭕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 궁창에 대해서는 6절을 참조하라. 본문에서 달을 증인 이라 한 것은 달이 땅에 활동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잠을 자며 안식하는 저녁에 떠 땅위에 빛을 환히 비춰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달같이란 역시 36절의 해같이 라는 말과 같이 끝없는, 오랜 세월을 상징한다(29절).

성 경: [시89:38]

⭕ 주께서...물리쳐 버리셨으며 - 주의 기름 부음받은 자 란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먹이고 다스리는 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세워졌다(왕상 1:39; 왕하 9:6).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을 버리셨다는 말은 마치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깨뜨리시는 것 같다고 느낀 저자의 하소연이다.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의 처한 상황이 그만큼 비참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 경: [시89:39]

⭕ 주의 종의 언약 -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가리킨다(3절).

⭕ 그 관을...욕되게 하셨으며 - 관 (*, 네제르)이란 나실인 (*, 나자르, 민 6:2)의 어원이 되는 나자르 (*, 구별하다, 헌신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구별된 것, 왕관을 뜻한다. 이 관은 왕들이나 제사장이 쓰는 관으로 여겨지는데(132: 18; 삼하 1:10;12:30; 대하 23:11), 이는 쓴 자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 직임의 신성함을 암시한 듯하다(Anderson).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결국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의 왕권을 피하시고 그 왕위를 손상케 하셨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89:40]

⭕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 여기서 울타리 (*, 게데라)란 흔히 포도원을 둘러싼 울이나(민 22:24; 사 5:5) 집의 담(겔 42:12)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인데,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영토의 방어물을 비유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왕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자인바, 위의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땅이 전복되는 것(Anderson), 또는 대적에 의해 침략 당한 것을 암시한다.

⭕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 보장의 히브리어 기본형은 미브차르 (*)로서 요새, 요새화된 성을 뜻하며 전문의 울타리와 병행을 이룬다.

성 경: [시89:41]

⭕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당하며 -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침입하여 약탈한 것을 암시한다.

성 경: [시89:42]

⭕ 저의 대적의...높이시고 - 오른손이란 흔히 성경에서 힘, 능력을 상징하는 바(13절; 겔 1:3),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능력있게 하셨음을 뜻한다.

성 경: [시89:43]

⭕ 저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 칼날 (*, 추르 하르보)이란 직역하면 그의 칼의 바위란 뜻이다(Anderson, Alexander, Hengstenberg). 이에 대해 혹자는 당시 부싯돌 칼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된 것이라 하며(Eerdmans), 다른 사람은 바위 (*, 추르)란 불꽃을 내다 라는 아카드어와 연관되는 바, 그의 번쩍이는 칼 로 번역하여야 한다고 말한다(G.R.Driver). 반면 알렉산더(Alexander)는 칼의 견고함, 즉 견고한 칼의 뜻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어떤 주석가들은 바위가 히브리인들의 용법상 강함을 상징하는 바, 칼의 강함 즉 강한 칼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본문은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칼을 말하며, 문맥상 전쟁 수행능력 또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을 비유한다 하겠다. 그리고 둔하게 의 기본형은 슈브 (*)로서 돌이키다, 물려가다 (has turned back, RSV)의 뜻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의 의미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의 칼을 쓸모없게 만들었다는 뜻보다는 이스라엘 왕의 전쟁 수행 능력, 즉 그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무기력하게 하셨음을 암시한다 하겠다(Anderson).

⭕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 싸울 능력이 없으므로 감히 전쟁터에 나아가지 못함을 뜻한다.

성 경: [시89:44]

⭕ 저의 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 영광에 해당하는 토하르 (*)는 17절의 영광이나 85:9의 영광과는 다르다. 이는 본래 밝음 이라는 뜻이나 이외에도 탁월함, 명성, 유명함, 영광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Alexander). 아마 본문에서는 왕으로서 지니는 존귀, 명성의 뜻을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시89:45]

⭕ 그 소년의 날을 단축케 하시고 - 이는 아마 이스라엘 왕의 젊은 힘과 정력을 고갈시키사 속히 늙게 하심을 뜻하거나 아니면 젊은 날에 그의 생명을 당실케 하심을 암시한다(Anderson). 유대 주석가들 중 일부는 본문의 주인공을 여호야긴 왕으로 본다. 여호야긴 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랐다가 3개월 동안 통치한 다음 바벨론으로 잡혀갔다(왕하 24:8-17). 그러나 칼빈(Calvin)은 소년을 이스라엘 왕국에 비유하여 그 왕국이 온전히 성숙하여 번성하지 못하고 일찍 쇠퇴함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중에서 두 번째 견해가 더 무난할 것이다.

성 경: [시89:46]

⭕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 38-45절에서 이스라엘(왕)의 비참한 상태를 언급하며 탄식하던 저자가 본절에서부터는 하나님께 그 상황에 대해 간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저자가 다윗과 언약하신 하나님 및 그분의 언약 내용에 대해 불신하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 본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하나님의 속성 곧 그 인자하심과 성실(진실)하심을(1,2,8,14,24,33절) 감추신다는 뜻이다.

성 경: [시89:47]

⭕ 나의 때가...기억하소서 - 38-46절에서는 현재 비참하게 된 대상을 다윗 왕가의 이스라엘 왕으로 언급함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맺으신 언약에 근거하여 구원해 달라는 암시를 했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대상을 1인칭으로 언급하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직접 호소한다. 이와 같은 전환은 그 간구의 긴박성과 절실함을 더욱 현실감있게 나타낸다 하겠다. 특히 본절은 저자 자신의 생명의 때가 그리 길지 아니한 바 지금 당장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면 자신은 그냥 사라지고 만다는 말로서 그 간구와 절박성을 잘 드러낸다.

성 경: [시89:48]

⭕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 저자가 47절에서 인간의 허무성을 언급하게 된 이유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또 한편 이는 47절의 전반부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필연성을 은연중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즉 인간은 그대로 두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은혜를 베푸시어 구원해 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그 영혼을...건지리이까 - 여기서 영혼 (*, 네페쉬)이란 생명을 뜻하는 말로 보인다(84:2). 그리고 음부 (*, 쉐올)란 구약에서 모든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하 세계로 인식되어졌다(88:3). 또한 권세란 히브리어로 야드 (*)로서 손을 뜻하는데, 이는 힘, 권능 등을 상징하는 말이다(78:42 겔 1:3). 이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은 역시 전문과 병행 구절로서 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사는 한 죽음의 권세에서 제외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하겠다.

성 경: [시89:49]

⭕ 주여...어디 있나이까 - 저자는 다윗에게 향하신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다시금 언급함으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 즉 그의 후손을 영구케 하고 그의 왕위를 지속케 하신다는 약속을 언급하며 간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암울한 처지에 빠진 이스라엘을 돌보아 달라는 뜻이다.

성 경: [시89:50]

⭕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 여기서 주의 종들에 대해 일부 역본들과 시리아역(Syric)은 단수로서 취하는데, 이런 경우 이는 아마 이스라엘의 한 왕을 가리키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브리어 맛소라 사본과 70인역(LXX), 제롬역(Jerome) 등은 한글 개역 성경처럼 복수로 취한다. 이럴 경우 이가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Cohen, Rawlinson), (2)한 사람 왕을 표시하되 그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장엄 복수로 언급되었다고 보는 견해(Dahood). 이중에서 어느 것이 타당한지 설정하기가 애매하다. 한편 본문의 훼방은 히브리어로 헤르파 (*)로서 하라프 (*, 벗다, 노출하다, 모욕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모욕, 치욕 등을 뜻한다.

성 경: [시89:51]

⭕ 주의 원수가...훼방한 것이로소이다 - 저자가 이스라엘(의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주의 원수라 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바 그들을 대적함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동 (*, 아케보트)이란 문자적으로 발꿈치, 발자국 (the foosteps, KJV, RSV)을 뜻하는 바, 본문의 의미는 주의 이스라엘의 대적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이스라엘의 왕(38절)이 행하는 모든 일들을 방해하거나 경멸하는 것을 뜻한다(Alexander).

성 경: [시89:52]

⭕ 여호와를...아멘 아멘 - 일반적으로 이를 본시의 맨 후반절로 보지 않고 시편의 제 3권 전체를 결론짓는 송영가(doxology)로 본다(Anderson, Rawlinson, Alexander). 반면에 칼빈(Calvin)은 본문을 저자가 앞 부분에서 나타낸 슬픔의 비통함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찬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성 경: [시90:1]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대대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도르 와도르'(*)의 문자적인 뜻은 '세대와 세대에'이다. 신 32:7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계속되는 세대에 있어서 동일한 분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을 암시한다(히 13:8).

거처(*, 마온) - 문자 그대로 처소, 거주지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26:8), 하늘(68:5) 혹은 들짐승이 거처하는 동굴(렘 9:11; 나 2; 12)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처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처소를 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대목인 신 33:27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집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리저리 행진하는 도중에 잠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우물 곁 혹은 사막의 종려 나무 아래 같은 곳이 머물 처소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그들은 그곳에서 집과 같은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 되셨나이다 - 이 말은 문맥상 '스스로를 입증하셨다'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는 조상 때부터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현재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다는 진술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확정된 거처가 없이 나그네처럼 지내던 시절에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동일한 처신을 기대하며 자신도 나그네와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

성 경: [시90:2]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산이 생기기 전...하나님이시니이다 - 시인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관심과 배려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출생 메타포(metaphor)를 산들의 기원에 적용시키고 있다(욥 38:8; 잠 8:22 이하). 특히 '조성하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흘렐'(*)은 흔히 아기의 출생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하는데(51:5; 사 26:17; 45:10; 51:2) 본절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신 32:18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겨나게 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그 유사한 묘사를 세계 창조에 적용시키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분절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주 창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피조세계보다 선재(先在)하시며 그 피조물들로서는 그 놀라운 위엄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신 영원한 하나님께 맞춰져 있다.

성 경: [시90:3]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사람(*, 에노쉬) - 본 문액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서 한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8:4; 103:15).

⭕ 티끌로(*, 아드다카) - '먼지로' 혹은 '멸망으로'로 번역이 가능하나, 전자가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사람(욥 4:19)은 흙으로 부터 왔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창 3:19).

⭕ 돌아가라(*, 슈부)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티끌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고(Rashi), 또 하나는 새로운 세대의 발흥, 즉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Westermann). 전자로 볼 경우 본절은 동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고 후자로 볼 경우는 반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는데, 계속되는 내용이 인간의 유한성, 일시성, 덧없음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전자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성 경: [시90:4]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천 년 - 창세기 5장에 나오는 구약의 조상들의 평균 수명인 천 년이 하나님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 인간 수명 70년(10절)은 얼마나 무상(無商)한 것이겠는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천년은 인간에게 있어서 밤의 한 경점(벧후 3:8)과 같다. 경점이란 밤을 네 등분한 것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시간으로는 네 시간인데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경점'이란 용어 때문에 굳이 파수꾼의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A.A.Anderson).

성 경: [시90:5]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 '제람탐'(*)을 직역하면 '당신이 그들을 쓸어버리십니다'이다. '쓸어버리다'로 번역되는 용어로서 문맥상 지위 고하(高下), 나이 등을 상관하지 않고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쓸어가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구절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는 동의적 구절로 보아 '저의는 죽은 존재와 같으며'로 번역할 수 있다.

⭕ 아침에 - 어떤 랍비들의 설명처럼 이 구절을 '젊은 시절에'로 볼 수 없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이 구절은 '인간은 아침에 신선하게 피어나는 풀과 같은 존재이다'라는 뜻으로서 단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본절 상반절 뒤와 6절 앞부분에 놓인 것이다. 근동에서 한밤중의 폭우는 마술을 부린듯 일련의 큰 변화를 만든다고 한다. 저녁 무렵 마치 사막처럼 타버린 듯한 마른 들이 아침에는 초록 풀로 가득한 그린 필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태울듯 더운 바람이 불다가도 마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판은 추운 땅이 되고 만다고 한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풀의 이미지를 빌어 표현하고 있다. 풀은 잠시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가도 곧 시들어 버리기 마련이다(사 40:6; 벧전 1:24).

성 경: [시90:6]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저녁에는 벤 바 되어 - '벤 바 되어'(*, 예몰렐)는 수동태로 쓰일 수도 있고 능동태로 쓰일 수도 있는데 각 경우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우선 전자로 쓰일 경우는 개역 셩경의 번역처럼 (제 삼자에 의하여) '베어짐을 당하다'를 의미하게 되고, 후자로 쓰일 경우에는 '말라버리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원문상의 구두점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후자가 더 타당한 것 같다(Ewald, Hupfeld). 본 용어의 원형인 '물'(*)이 '말라버린'이란 뜻으로 사용된 또 다른 용례인 신 23:27은 이 같은 주장의 객관적 지지 구절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아침에는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녁 무렵에 맹렬한 태양의 열기로 인하여 타버린 풀의 꽃을 묘사한다.

성 경: [시90:7]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키 칼리누 베아페카) -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분노에 의하여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이다. 서두의 '키'(*)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바로 앞 문맥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여 멸망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에 빠질 때 이스라엘은 참으로 허망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에 대한 포괄절인 진술이 아니다. 특히 1인칭과 과거 시제의 사용은 기자가 자기민족의 역사와 자기 자신의 실제적 체험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성 경: [시90:8]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우리의 은밀한 죄(*, 알루메누) - 직역하면 '우리의 비밀'이다. 이것은 인간의 속에 있는 재적 실태(요 2:25)로서 자기 동료들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숨겨져 있는 오염과 죄책을 가리키므로 '우리의 비밀스러운 죄'로 번역해도 무방하며 이 경우 분절은 동의적 평행구가 되겠다. 결국 본문은 인간 생명의 유한성 곧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의 진노는 죄 때문임을 시사한다(창 2:17; 롬 5; 12).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의 본성은 타인은 물론 심지어는 자신까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벌거벗은 것 같이 모두 드러날 수밖에 없다(렘 16:17; 히 4; 14).

⭕ 빛(*, 마오르) - 시편에서는 이곳과 74:16에서만 나오는 히브리어이다. 대개 성경에서 '빛'이라는 뜻으로는 거의 '오르'(*)가 쓰인다(27:1; 창 1:3; 삼하 23:4; 욥 3; 16; 잠 6; 23; 전 11:7 등). 여기서는 어두운 수렁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서 그곳에 숨겨진 죄악을 끄집어내어 청산하기 위한 하나님 얼굴의 빛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유리한 평행구적 표현이 잠 15:30에 나타난다.

성 경: [시90:9]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 '지나가며'(*, 파누)는 '쇠퇴하다'를 뜻하므로(렘 6:4) 본 구절은 인생의 사는 날들이 스올의 암흑을 향하여 쇠퇴해 가는 것과 같음을 뜻한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생은 스올로 내려가 그 육신의 몸이 한번은 썩음을 당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생이 에덴 동산에서 범했던, 우리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징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일식간에(*, 케모헤게) - 직역하면 '일순간의 생각(혹은 한숨)이다. 이 문구에 대해 영역본들은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예컨대, KJV는 '한마디 이야기처럼'(as a tale that is told), NIV는 '외마디 신음으로써'(with a moan), LB는 '한숨으로써'(whith sighing) 그리고 RSV는 '한숨과 같이'(like a sigh)등으로 번역한다. 욥 37:2; 겔 2:10 등을 참조할 때 '한숨(혹은 소리)과 같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무튼 본 구절은 '짧막한 한마디 말', '금방 귀에서 사라져 버리는 한마디 소리', '한번 내쉬는 숨'처럼 빨리 지나가는 덧없는 인생을 묘사하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성 경: [시90:10]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 '년수의 자랑'이란 바로 앞 구절 '강건하면 팔십'이란 구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천부적인 힘과 정력을 지녔거나 혹은 건강의 법칙을 이해하고 준수해왔기 때문에 평균 수명 칠십을 넘어 팔십을 살고 있는 노인들의 자부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고'에 해당하는 '아말'(*)은 '지키게하는 노고'를 뜻한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평균 수명을 넘어 팔십 대를 넘었다고 할지라도 노인은 노인이기 때문에 그 힘이 점점 고잘되어 늘 지치고 피곤해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나타낸다. '슬픔'에 해당하는 '아웬'(*)은 '슬픔', 이외에 '무익함', '헛됨'(사 41:29; 슥 10:2), '고통' 등의 뜻도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상의 주해를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이 주는 의미는, 비록 남달리 오래 사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를 자랑할 이유가 없는데 그것은 계속 몸이 쇠약해가는 관계로 살아 있으나 안락함을 느낄 수 없고 결국 무익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성 경: [시90:11]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 문맥상 본 구절은 인간이 천상적으로 하나님의 분노의 위력과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구절이라 하겠으며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 질문을 사용하고 있다(전 2; 19; 3:21). 굳이 신학적인 논쟁을 거치지 않고 실제적인 인간의 생활사, 인간의 성품 등만을 보아도 인간의 존재가 불행으로 가득찬 이유는 죄성 때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요약해 주는 글귀가 있다. '인간은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과 궁극적으로 죄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멋대로 악을 행하고 있다'(Weiser).

성 경: [시90:12]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약한 인간]

⭕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 그리고 짧음들을 깊이 숙고하고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를 배우게 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하면 되겠다(Delitzsch). 특히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원성에 비교할 때, 이러한 자각은 더욱 심화되기 마련이다(VanGemeren).

⭕ 지혜의 마음을 얻게하소서 - 인생의 허망함과 짧음을 깨달은 자는 영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품안에서 자족함을 누리고자 하는 바, 이것이 곧 지혜인 것이다. 여기서 '얻게 하소서'에 해당하는 '나비'(*)는 추수 때에 땅의 열매를 거두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삼하 9:10; 학 1:6). 결국 지혜의 마음, 곧 지혜로운 마음은 신령한 가르침을 통해 얻는 영적 열매와 같다. 이 지혜의 마음은 주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지혜롭기를 원하는 자는 매순간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

성 경: [시90:13]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 본절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선행된 묵상의 풍부한 근원으로부터 나오게 된 기도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일시적이며 죄악되다. 인간은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그 위에 있을 때에도 그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인생에게는 그의 죄성과 그 존재의 덧없음을 알게 할 신령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이렇게 묵상을 마친 모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실체(實體)가 그러함을 묵상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까이에 계속 계셔 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안식처가 되심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분임과 동시에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와 그의 백성이 신령한 지혜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요청할 뿐 아니라 그들을 징계하셨던 하나님이 그의 인애(仁愛)로 그들을 방문하심으로써 슬픔의 밤이 물러가고 기쁨의 새벽이 시작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된 땅에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임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의 인격적 현시, 그리고 축복을 모세는 기원하고 있다. 영적으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사함을 받고 땅 위에서의 순례자의 삶을 종결하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겸손한 기도롤 볼 수도 있다. '돌아오소서'는 출 32:12과 유사한 의미로 보면 되겠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성 경: [시90:14]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아침에 - 아마도 시인은 고통, 슬픔을 '밤'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기쁨을 '아침'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다(alexander, Barnes).

⭕ 주의 인자(*, 하스데카) - 이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은 불변적인 것이어서, 그 언약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의무를 다하는 성도는 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된다. 기자는 그 기쁨이 평생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성 경: [시90:15]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 문자 그대로 곤고와 화를 당한 일수만큼 기쁨의 날들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즉, 그 민족이 오랫동안 수고했고 고통을 당했으니 지속적인 축복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7-10절). 이것은 일종의 보상을 원하는 기도인 바 그들이 부당하게 이방 군대들에 의하여 억압을 당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Kissane).

성 경: [시90:16]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주의 행사(*, 파알레카) - 이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와(사 5:12) 구원(77:12) 혹은 심판(64:9)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혹자는 이 단어의 복합성을 고려하여 복수형으로 번역하지만(your deeds, NIV; your miracles, LB) 시편 기자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단수였던 사실을 감안할 때(77:12; 92:4; 95:9; 합 3:2), 여기서도 단수형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thy work, KJV, RSV). 본 문맥에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진입, 곧 약속된 유업의 계승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한편 이 용어는 신 32:4을 제외하고는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

⭕ 주의 영광(*, 하다레카) - 이는 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암시하는 용어인데(96:6; 104:1; 111:3)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진입 및 정복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그의 능력 및 은혜를 가리킨다.

성 경: [시90:17]

주제1: [인생의 영원한 거처, 야웨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간구]

⭕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 여기서 '은총'(*, 노암)의 뜻은 '아름다움' 혹은 '즐겁게 하는 것'인데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이것을'광채'로 번역하거 있다. '아름다움', '광채', 그리고 '즐겁게 하는 것' 등은 이스라엘을 향한 주의 은혜와 관심이 가시화 되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화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 입성을 앞에 두고 그들의 진입이 눈에 현저(顯著)한 하나님의 개입 가운데 무난히 진행되기를 원했던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현저한 그리고 가시적인 개입을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 민족과 동행하심을 분명히 알기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 문자적인 뜻은 '우리 손의 일들을 이루소서'이다. 본 시편이 가나안 땅 입성을 목표로 하는 광야 여정 속에서 기록된 것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일들을 이루소서'란 이제 광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소원이라 볼 수 있다. 그 소원의 정도가 강렬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는 동일한 내의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성 경: [시91:1]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지존자(*, 엘레온) - 직역하면 '가장 높은'이며,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이 숭고하고 탁월하신 분인 하나님을 지칭한다. 하나님은 그의 대적이 아무리 악한 음모를 실행에 옮기고 그 성취를 위해 날뛴다고 할지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 - '은밀한 곳'(*, 세테르)의 문자적인 뜻은 '비밀 장소'로서 누구에게 함부로 공개되지 않는 곳인 성전의 지성소를 암시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그 '어떤 영향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문맥상 어울리는 것 같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통하는 자, 곧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자는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난관에 비착해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거하는'에 해당하는 '야솨브'(*)를 '왕좌에 앉다'는 뜻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Dahood) 문맥상 피난처 되시는(14:6; 46:1; 렘 17:17; 욜 3:16) 여호와의 품에 '거한다'는 의미가 더 낫다.

⭕ 전능하신 자 - '여호와'라는 호칭이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본 호칭은 그의 능력 앞에 아무도 설 수 없는 권능의 하나님을 강조한다(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 그늘 -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날개로 덮는 어미 새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말이다(4절; 17:8; 36:7; 57:1; 63:7).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굳이 이곳이 사후(死後)의 영원한 안식처를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과 연결되어 있는 동사 '거하리로다'(*, 이틀로난)는 함축적으로 '영원히 머무르다'는 뜻도 지니지만 대체로 '밤을 새우다', '숙박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Perowne). 따라서 이 말은 낮의 무더위나 밤의 혹한은 대적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해 쉼을 얻을 수 있는 현실적 피난처 혹은 안식처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절 상, 하반절에는 하나님께 대한 서로 다른 호칭, 그리고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은 처소의 개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절을 서로 다른 신(神)의 존재 및 그에 따른 서로 다른 상황을 묘사하는 구절로 보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다. 도리어 다양한 능력을 갖고 계신 유일한 참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자에 대한 묘사를 보여주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특히 여기서 기자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자의 완전한 안전을 강조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학, 특히 히브리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대구법을 사용하였다.

성 경: [시91:2]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 - 여기서 '나의'는 종속 개념을 담고 있는 말로서 하나님이 피예배자에게 복속되는 신들 중의 하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이방 종교의 피예배자들은 흔히 신이 자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곧 자신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 거꾸로 피예배자가 그분께 전적으로 복속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성도들뿐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이기도 하시다.

성 경: [시91:3]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이는 저가(*, 키 후) - 이것은 대명사 앞에 접속사가 놓인 형태인데 이와같이 접속사 뒤에 오는 대명사인 경우 강조사가 된다(148:5). 여기서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urely he..., KJV, NIV).

⭕ 사냥군의 올무 - 이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간이 계획한 음모, 위협 따위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124:7; 141:9; 잠 6:5; 호 9:8).

⭕ 극한 염병(*, 데베르 후오트) - 직역하면 '치명적인 염병'인데 70인역(LXX), 심마커스역(Symmachus Versions), 시리아역(Syriac Versions) 등은 본 용어를 '파괴적인 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염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베르'를 '말'을 뜻하는 '다바르'로 읽는 데서 비롯된다. 시편 기자가 주로 중상, 모략, 음모. 거짓 고소 등으로 곤욕을 치르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이같은 번역은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성 경: [시91:4]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 본 묘사는 분명한 비유인데 저자가 여호와를 날개가 달린 분으로 상상했으리라고 보는 것은 무모한 해석이다(Oesterley). 성경이 하나님을 그 어린 새끼를 보호하는 독수리에 비유한 곳은 있다(신 32:11). 천사의 날개 역시 보호의 상징이었다(Kraus). 그러나 본절의 회화적 묘사는 익히 알려져 있는, 새끼들을 돌보는 어미 새의 모습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사 31:5; 마 23:34).

⭕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 '극의 진실함'(*, 아미토)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대한 그분 자신의 신실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손 방패' (*, 소헤라)는 구약 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용어이며 '담으로 둘러삼'을 뜻하는 시리아어 '사하르타'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굼역(Targum) 등에 의하여 '둥근 방패'로 번역되고 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우리 성도를 일생동안 방패로 지키듯이 보호하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에 연유한다.

성 경: [시91:5]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밤에 놀램(*, 파하드 라옐라) - '밤에 의한 폭력(공포)'이 그 문자적인 뜻이다. 기드온의 공격과 같은(삿 7장) 갑자기 이뤄지는 야간 기습 공격을 연상시키기도 하며, 어두운 밤길을 가며 흔히 갖게 되는 사단의 존재의 의식으로 인한 공포 따위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특정한 위험이나 재난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공포나 위협의 요인은 캄캄한 밤중에 닥칠수록 더 강화된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Alexander). 한편, 여호와의 주권과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주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121:6). 낮에 흐르는 살(*, 메헤츠 야우프 요맘) - 직역하면 '낮에 날으는 화살'인데 문자 그대로 대적들의 화살 공격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낮에 비치는 태양의 광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무난할 것 같다(Anderson). 이것은 한낮에 발생하는 일사병 같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사막 지대에서는 강한 햇빛 때문에 일사병 외에도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고 한다.

성 경: [시91:6]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 - 여기서 '흑암중에'는 '캄캄한 가운데'라는 뜻보다 '갑자기'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염병'은 문자 그대로 보면 고대 근동에서 흔히 발생하였던 온역이나 전염병 따위가 되겠다. 그러나 근접 문맥인 8절에서 악인이 보응을 받는다는 개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대적'혹은 그 대적의 '살의를 품은 독설'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백주(白晝)에 황폐케 하는 파멸 - 대낮에 초래되는 파멸, 곧 가시적이고 공개적으로 발생하는 파멸을 가리킨다. 또한 파멸(*, 케테브)은 '휩쓸어 버리는 것', '잘라 버리는 것'등을 뜻하며(사 28:2), 폭풍, 전쟁, 온역 혹은 기근 따위와 같이 일정한 대상을 완전히 휩쓸어버려 멸망시키는 세력을 가리킨다. 요컨대 본절은 언제 어떤 형태로 재앙 및 대적이 밀어닥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자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으로 강변하고 있다.

성 경: [시91:7]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천인(千人)이 네 곁에서, 만인(萬人)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가까이 못하리로다 - 이 표현은 출애굽 기사의 몇몇 구절들의 반복으로 보이기도 하고(출 12:23; 14:30), 전쟁 용어들로부터 그 용어들을 빌려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삼상 18:7), 본 비유 배경이 전쟁터인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닥쳐오는 재앙이나 불행의 크기에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자가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잠 12:21).

성 경: [시91:8]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 말하자면 악인이 보응받는 것, 징벌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사악한 기쁨에 들떠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명백히 나타내실 것을 강조하듯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이 악인의 보응에대한 언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 역사 동안 모든 악인이 반드시 현실적 징벌을 받지는 않으나 징벌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악인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공의가 엄존(儼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방편이 된다. 또한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이 입증되는 것을 목격하면, 성도는 더 큰 믿음과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게 된다. 이제 모든 악인이 반드시 징벌을 받을 때가 오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이다(마 24:44).

성 경: [시91:9,10]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본 두 절에서도 시인은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는 자의 안전함에 대해 거듭 확언하고 있다. 물론 신실한 성도에게도 '화'(禍)나 '재앙'의 위협이(10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한 그 어떤 위협 요소들도 성도를 상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롬 8 : 28, Kidner).

⭕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 마치 아버지의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듯이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동행하기를 선택하였다는 뜻이다.

⭕ 장막 - 유목의 생활 환경을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말 2 : 12). 이는 목초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자들의 거처일 뿐 아니라 유목민의 제반가산(possessions)을 뜻하기도 하는 용어이다.

성 경: [시91:11]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사자들(*, 믈라킴). - '보내다'의 뜻을 가진 '라카흐'(*)에서 유래했으며 동사형은 구약 성경에는 나오지 않으나 히브리어 동족어인 아라비아어, 우가릿어 등의 문서에는 나온다(Eichrodt).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수 7:22) 혹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출 23:20)이나 대언자(학 1:13) 등을 뜻할 때 사용된다. 본 시편에서는 신실한 자들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마 4:11; 눅 22:43).

성 경: [시91:12]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 각별한 돌보심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이며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출 19:4);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 63:9).

⭕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 번영과 안전을 암시하는 표현이다(37:31; 잠 2:23, Alexander). 한편, 본절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에 의해 인용된 말이다(마 4:5, 6).

성 경: [시91:13]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는 자의 안전함]

⭕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 '사자'와 '독사'는 모든 실제적인 그리고 잠재적인 대적들 및 위험들의 상징이다. 따라서 '사자'와 '독사'를 밟는다는 것은 대적 및 위험들을 물리치고 제거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이 표현을 마치 사자의 분노를 잠재우듯이 그래서 순한 양처럼 만들듯이 혹은 독사의 해독성 치아를 뽑아버리듯이 위험 가운데서도 안전함을 뜻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Barnes). 여기서 '사자'에 해당하는 '솨할'(*)은 성경상으로 산문에서는 볼 수 없고 운문에서만 나타나는 용어이다(욥 4:10; 10:16; 28:8; 잠 26:13; 호 5:14; 13:7).

⭕ 젊은 사자(*, 케피르) - 특히 용감하거나 사납고 폭력적인 존재를 언급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17:12; 삼하 17:10).

⭕ 뱀(*, 타닌) - 출 7:9, 10, 12에서는 '뱀'으로, 창 1:21에서는 '큰 물고기'로, 74:13; 148:7; 사 27:1; 51:9; 렘 51:34에서는 '용'으로, 애 4:3에서는 '들개'로 각각 번역되고 있는데 '뱀'으로 번역 가능한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과 상반절은 평행구를 이루고있다 하겠다.

성 경: [시91:14]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 저가 나를 사랑한즉 - '사랑한즉'에 해당하는 '하솨크'(*)는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용어로서 한 사람의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창 34:8; 신 21:11),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신 7:7; 10:15) 혹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헌신)'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진실하신 성품을 체험하고 깨닫는것 곧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하반절)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9:10) 이 두 표현은 공히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순종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성 경: [시91:15]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결과의 하나로 하나님은 그의 성도가 올린 기도에 응답하사 그의 필요를 채우실 뿐 아니라 환난 중에서도 그와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의 친밀한 관계를 지속시키신다는 것, 곧 그를 자신의 친구처럼 대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높으신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영화로운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Barnes)?

성 경: [시91:16]

주제1: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

주제2: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 장수(長壽)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이었던 장수는 일반적으로 신적(神的) 은총의 외형적 표시로 간주되었을뿐 아니라(21:4; 신 30:20; 잠 3:2)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간주되었다(출 20:12; 23:26).

⭕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의 그 '구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맥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그 약속에 순종하여 땅위에서의 축복인 장수를 약속받은 자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원'이란 현실을 살아가면서 당하게 될 무수한 곤경들로부터의 구원 혹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종국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까지 인도되는 영원한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그는 땅 위에서 하나님과 친구로서 영화롭게 살아갈 뿐 아니라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는 축복 상태로까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시92:1-3]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 찬양하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메르'(*)는 '악기(특히 현악기)를 '연주하다' 혹은 '(그러한 악기를 동반하여) 노래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원문상으로는 '십현금, 비파, 수금' 등이 1-3절의 끝에 위치해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 여기에 삽입한 까닭은 바로 이 용어의 성격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 아침에...밤마다 - 이스라엘의 구전법(oral law)인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본 시편은 안석일 아침에 부르도록 정해져 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 시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날 아침 이 시편을 부르면서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는 먼저 어린양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께 드리는 존제(尊祭)로서 포도주를 부었다(민 28장). 반면, 저녁 제사 때에는 출 15:1-18과 민 21:17-20 중의 하나를 노래했다. 그리고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 동안 성전에서 불렀던 노래로서는 첫째날 24편, 둘째날 48편, 셋째날 82편, 넷째날 94편, 다섯째날 81편, 여섯째날 93편 등이었다고 한다.

⭕ 좋으니이다(*, 토브) - 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으므로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 때 피조 세계가 그의 의도와 목적에 부합됨을 보고 이를 '좋게'(*, 토브) 여기셨다(창 1:4, 10, 12).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지존자이신 그분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33:1). 한편, 시편 기자의 정서적 측면으로 보면, 찬양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확신에 따른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진정한 기쁨의 표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Perowne). 본절에 나오는 악기들에 관해서는 서론 '시편과 음악'을 참조하라.

성 경: [시92:4]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 여호와여...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 원문에 보면 본 구절 서두에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1-3절에 언급된 바,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분(14, 15절)의 서론격에 헤당하는 샘이다.

⭕ 주의 손의 행사 - 혹자는 본 시편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인 사실을 강조하여 이를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본 구절의 용례를 볼 때(28:5 ;사 5:12) 그리고 본절 하반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볼 때, 기자는 본 구절을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민족 전체의 구원 혹은 그 구원을 가져온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7-11절)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92:5]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및 우주 통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성, 인간의 이해를 넘는 그 계획의 방대함, 그리고 지혜의 깊이 등을 인식함과 아울러, 그 사실에 대한 인간의 망각을 탄식하는 심정이 함께 곁들어져 있다. '인간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사역을 잊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깊이를 헤아려 보는 일을 중단하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위대성을 헤아려 보기를 포기하는가'(Barnes) !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으로는 106:2; 112:2 등이 있다.

⭕ 주의 생각 -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들 그리고 그 방법들을 뜻한다. 과거에 기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인간의 지혜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분이라는사실을 깨닫고 있다(Anderson). 한편 주의 행사의 위대하심과 그 생각의 깊고 오묘함에 대해서는 다윗(40:5), 이사야(사 55:9), 바울(롬 11:23)등도 찬탄한 바 있다.

성 경: [시92:6]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에 대한 찬양]

⭕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 '우준한 자'의 히브리어는 '이쉬 바아르'(*)이며, '바아르' 그 자체만은 49:10; 73:22; 잠 12:1; 30:2 등에 나오지만 '이쉬 바아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바아르'가 집합적 개념으로 쓰이고 '잔인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아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역본 KJV는 '이쉬 바아르'를 맹수처럼 '사나운 사람들'(brutish man)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기질적으로 사나운 사람에 관해서 혹은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단순히 아이큐가 낮은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호와 경외에 뿌리를 두는 참다운 지혜를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잠 1:7). 여호와 경외가 없어 참다운 지혜가 없는 자란,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자를 뜻한다.

⭕ 무지한 자(*, 케실) - 본 용어의 의미는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다른 시편의 문맥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성 경: [시92:7]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

⭕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 '풀'(*,에세브)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풀'이지만 창조시의 푸른 식물 곧 모든 수목들 그리고 각종 꽃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우기(雨期) 때 한차례 비가 내리고 나면 온 들이 푸른 나무들과 각종 꽃들로 아름다운 정원올 이루게 되는데, 본 기자는 바로 그 장면을 염두에 두고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악인도 일시적으로는 비내린 뒤의 들의 상황과 같이 번성하여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과의 차이점은 그 시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10:4)라고 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나는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10:6)라고 교만을 부린다는 사실이다.

⭕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 이미 기자가 상반절에서 악인의 땅위에서의 번영 가능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표현을 악인이 땅위에서 다시 망하리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숨어있는 표현으로 보면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여기에는 종말론적 성격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악인이 땅 위에서 번영하여 행복을 누리나 그 행복이 이생을 마친후에도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악인도 이 땅 위에서 번영할 수 있다. 그 번영의 정도는 의인이 시험에 빠질 정도로 대단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번영은 이 땅 위에서 뿐이요 결국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의인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3편).

성 경: [시92:8]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

⭕ 지존하시니이다 - 여기서의 '지존'(*, 마롬)을 직역하면 '높은 곳에'인데,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함에 있어서 이처럼 부사를 사용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70인역(LXX)은 '마롬'의 일상적인 용례와 같이 '높은 곳에'가 아닌 '높은 분'으로 번역하여 '높은 곳에 계시나이다'가 아니라 '높은 분이십니다'로 번역하였다. 본절은 비록 짧지만 시편에 담긴 모든 교리가 의존하는 위대한 중심 진리를 말하고 있다. '영원히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대들보가 된다(Calvin).

성 경: [시92:9]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

⭕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다 흩어지리이다 - 직역하면 '보십시오, 여호와여 당신의 대적들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대적들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행자들이 흩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이 같은 표현은 우가릿 본문(Ugaritic texts)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오 바알신이여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당신이 쪼개버릴 것입니다. 보소서 당신은 당신의 대적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Dott). 시편 기자가 이 같은 가나안 예식서에 대해 익숙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예식서의 내용을 빌어왔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기자의 관심은 이방 신 바알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진정한 능력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악행자들이 멸망당하고 말 사실일 뿐이다.

성 경: [시92:10]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 성경에서 '들소의 뿔'이란 가공할 만한 힘을 상징한다(22:21; 욥 39:9). 따라서 하나님이 시인의 뿔을 높이셨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활력, 힘을 공급하셨음을 뜻한다. 대비가 되는 바로 앞절에 악인의 멸망 사실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은 시인의 번영, 명예 회복 등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 여기서 '신선한 기름'(*, 쉐멘 라아난)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기름'인데 이것은 최고 품질의 기름을 뜻한다. 원래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대제사장이나 왕으로 선택한 사실을 대중 앞에서 공개하는 의식 중의 중요한 순서이다(출 29:7; 삼상 10:1; Eaton). 그러나 문맥상 여기서는 시인이 기쁨으로 충만했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에서 축제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양질의 기름을 서로 머리에 붓는 것은 잘 알려진 관습이다(23:5).

성 경: [시92:11]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 '원수'에 해당하는 '슈르'(*)는 구약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 유사한 분사형으로 민 35:32; 렘 17:13; 미 2:8 등에 나타나는 '피한 자', '(여호와를) 떠나는 자',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 등의 의미를 고려할 때, 상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숨어서 기다리는 자'로 번역하면 되겠다. '눈으로 보며'는 대적의 멸망을 분명히 목격한다는 것인데 숨어있던 대적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멸망당한다는 사실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본절의 의미를 강조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절은 대적의 징벌당하는 장면을 득의 양양하게 비웃으며 감상한다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공의가 아주 명백하게 집행되는 것을 바라본다는 데에 그 초점이 있다.

성 경: [시92:12]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종려나무...백향목 - 저자는 악인의 멸망과 대비를 이루는 의인의 승리를 말하기 위하여 이 두 나무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두 나무의 특성과 같은 축복은 당시뿐 아니라 기자와 동일한 믿음에 참여하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혜택이다. 이 두 나무는 푸르름, 무성한 생산력, 다함이 없는 왕성한 힘 및 영원성 등과 같은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두 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뿐만 아니라 겨울의 냉기속에서도 종려나무는 연중 내내 그 푸르름을 유지한다. 그리고 백향목은 연수로 그 나이를 세지 않는다. 백향목은 세기(century)로 그 나이를 센다'(Tholuck). 기자는 늘 푸르고 늘 과실을 맺는 종려나무를 의인에 비유한 반면, 곧 시들고 말 풀을 악인에 비유한 바 있다(7절). 이외에 구약 성경에서 종려나무를 다른 무엇에 비유한 구절은 단 두 군데뿐인데 아 7:7은 '키가 훤칠한 신부에', 대조적으로 렘 10:5은 '꼿꼿하게 서 있는 우상'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시92:13]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 52:8에도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바, 의인이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그리고 궁전 경내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집에서 받은 축복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축복과도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었다(욥 42:12). 한편, 본절의 묘사가 실제로 성전 뜰 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으로부터 따온 것인지를 규명하기란 어렵다. 어떤 학자는 본절의 묘사와 애굽 의식중 신상 앞에 나무가 심겨져 있었던 사실을 연관시키려 한다(Kraus).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성 경: [시92:14]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늙어도 결실하며 -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장수하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망하였는데, 그 최고의 모범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모세였다(신 34:7). 그와 유사하게 여겨진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은 다윗이었다(대상 29:28). 저자는 여기서 경건한 자는 늙어서까지도 원기와 생산력이 있는 삶을 살 것을 암시하고 있는 바,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는 모세와 다윗이라는 표본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 익으면 개당 평균 무게가 100kg, 최대로는 200kg까지 나가는 종려나무 열매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다(Perowne).

성 경: [시92:15]

주제1: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

주제2: [의인의 영원한 흥왕(興旺)]

⭕ 여호와의 정직하심 - '정직하심'에해당하는 '야솨르'(*)는 다른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서 공평한 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기본적인 뜻은 '평평하다', '곧다'이며 기자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가 공평하고 의로울 것을 밝힘으로써 본 시편을 끝맺고 있다. 범죄하는 악인의 융성은 잠시뿐이나(7, 9, 11절) 의인의 기쁨과 번영은 영원할 것인데, 그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공평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자가 하나님을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로 삼고 그분을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시인은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부정의 부정을 사용하여 본 시편을 맺는다. (119:3).

성 경: [시93:1]

주제1: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과 통치]

⭕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예화 말라크)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왕이 되신다'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왕의 대관식 장면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삼하 15:10; 왕상 1:11; 왕하 9:13).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지만 이제 그의 왕국이 가시적으로 확립되고 그의 능력과 위엄이 충분히 현시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계 11:15).

⭕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 고대 왕들은 흔히 그들의 찬란한 복장으로 때로는 고급 향수 냄새로(45:8) 범인(凡人)들과 구별됨을 나타내었는데 본구절은 하나님께서 그 탁월한 '권위'로 범인들과 구별되심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권위'는 문맥상 온 땅과 만유의 왕으로서 그 권좌에 오르시는 하나님의 권위로 보면 되겠다. 본절 중반절은 하나님이 권위를 입으셨다는 사실, 곧 그가 왕이시라는 사실을 반복하되 특히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왕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력'이란 표현을 끌어오고 있다. '능력을 입으시며'라는 표현은 종종 전쟁과 관련된 개념을 암시한다(18:39; 삼하22:40).

⭕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 세계 창조와 그 섭리적 통치뿐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을 향한 공의의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는 표현(96:10)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성 경: [시93:2]

주제1: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과 통치]

⭕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 '예로부터'에 해당하는 '메아즈'(*)의 문자적인 뜻은 '오래 전부터'이며 하반절의 '영원부터'(*, 마올람)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기자가 이말을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존재성과 대비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문맥상 이 말 역시 영원성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본 구절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은 인간이 알수 없었던 곧 창조 사역이 시작되던 바로 그 옛날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시93:3]

주제1: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과 통치]

⭕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 여기서 '큰 물', '물결' 등은 그 문자적인 뜻이 '물줄기', '강들'이나 시적인 평행법에서는 '바다'를 뜻하기도 한다(24:2; 렘 46:7, 8; 욘 2:3). 그리고 강이나 바다의 파도 혹은 그 소리는 적대 세력의 대항을 암시한다(Prowne). 그런데 기자는 그와 같은 세력의 행동을 묘사함에 있어서 계속해서 두 번은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마지막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개역 성경을 보아도 드러난다('높였고'...'높였고'...'높이나이다'). 문맥의 흐름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악한 세력은 그 통치권에 대항하는 악한 세력을 암시한다. 바로 이 악한 세력이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되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계속 그 악한 도모를 일삼고 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기자는 이와 같은 시제변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93:4]

주제1: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과 통치]

⭕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 - 3절에서 주석했듯이 전자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대적의 세력을 암시하고, 후자는 '미쉬베레 얌 아디림'(*)으로 그 문자적인 뜻이 강력한 바다의 파괴자들이며 이스라엘의 행보를 가로막았던 홍해를 암시한다(합 3:10). 홍해와 같은 자연 세력을 포함한 모든 대적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들의 대적 행위를 물리치며 그들을 정복하실 수있다(65:7; 욥 38:11).

성 경: [시93:5]

주제1: [여호와의 견고한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영원하신 주권과 통치]

⭕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에도테카 네엠누 메오드 레베이트카 나아와 코데쉬 예화 르오레크 야밈) - 직역하면 '당신의 약속(증거)들은 매우 신실합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의 집도 마땅히 거룩합니다. 영원히'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맥은 급박히 변하고 있다. 인간의 세력을 포함한 자연계의 통치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위엄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자애로운 은혜와 예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실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즉, 세계를 통치할 뿐 아니라 당신의 왕국을 설립하고 능력과 권세로 그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확실하고 신실한 말씀을 통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다스리겠다고 약속하시고 또 직접 그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이처럼 약간은 장황한 내용을 간략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본절의 내용 파악은 쉽지 않다.

성 경: [시94:1]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보수(報讐)하시는 하나님 - 여기서 '보수'는 단수가 아닌 복수형 '네카모트'(*)가 쓰였는데 이것은 '완전한 복수'를 의미하는 강조사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피억압 자를 구원하시고 억압자는 완전한 복수, 곧 철저한 형벌로 징벌하시는 분이시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그분의 복수하심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신 32:35, 이외에도 사 35:4;겔 25:15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시94:2]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일어나사(*, 힌나세) - 문자적인 뜻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이다. 마치 앉아계신 하나님에게 일어나기를 요청하는 듯한 이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은 악인에게 심판 내리기릍 소원하는 의인의 절박한 요청 의사를 반영하고 있다(76:9;사3:13). 그러한 요청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땅의 심판자'(창 18:25)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문맥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표현으로는 '쿠마'(*), '우라'(*) 따위가 있다(7:6).

⭕ 교만한 자(*, 게임) - '일어 서다','쳐들다'는 의미의 가아'(*)와 연관을 맺고 있는 이 용어는 하나님에 대항하며 자신을 쳐드는 자들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123:4;욥 40:11,12;사 2:12;렘 48:29). 이들의 죄의 내용은 헛된 교만뿐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완악한 태도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할 때 그들의 대인 관계는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뜻이나 이웃의 사정과 관계없이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계획을 짜고 그것을 진헹시키려고 온갖 술수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성 경: [시95:3]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 여기서 '대저'는 '키'(*)로서 1,2절에 언급된 기쁜 마음과 큰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크신'에 해당하는 '가돌'(*)은 일반적으로 '위대한'을 뜻하지만 이상 신들이 대비되고 천지 창조(4, 5절) 및 목자 개념(7절)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일한 참신 및 창조주 그리고 그의 백성의 목자되시는 자애롭고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형용사로 보면 되겠다.

⭕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 이방 민족이 섬기는 모든 헛된 우상들보다 크신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출 15:11;18:11). 주의할 점은 본 구절을 표면적으로 이해하여 기자가 이방 신을 어떤 실제적인 힘을 지닌 실재(實在)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기자는 '이방신들도 어느 정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더 힘이 세다'라는 식의 상대적 비교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시94:4]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저희가 지꺼리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야비우 예다베루 아타크) - 두 동사 '예다베루'(*), '야비우'(*)가 한 목적어 '아타크'(*)를 갖고 있는 형태이니, 정확히 직역하면 '그들은 교만한 것들을 내쏟고 말하였다'이다. '내쏟다'는 샘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샘이 그 속에 가득한 물을 내쏟듯이 그 속에 가득한 교만을 독설로 내쏟는 악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두 동사는 교만한 자가 거침없이 그 교만을 말로 토해내는 모습을 묘사할 때 흔히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 2:3).

성 경: [시94:5]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 '파쇄 하며'에 해당하는 '다카'(*)는 흔히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욥이 그의 친구들의 말로 눌림을 당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고(욥 19:2), 연약한 자가 왜곡된 판결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고통 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잠 22:22). 본절에서는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 곧 악인들의 부당한 법집행으로 인해 억압 당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143:3).

성 경: [시94:6]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 하며 - 법 집행 관리들의 대내적인 폭정의 한 예를 고발하는 대목이다. 약자 보호는 강한 자 그리고 법 집행 관리의 의무였다. 특히 과부, 나그네, 고아 등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82:3) 그들을 향한 학정이야말로 배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같은 학정은 특정한 한 시대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전 역사 속에 일반화되어 있었다(사 1:15;렘 7:5;겔 22:7;미 3:1-4;말 3:5 등). 여기에서 '죽이며', '살해하며' 등의 서술적 표현들은 악한 관리들이 과부, 나그네, 고아로부터 생명과 같은 그들의 생필품을 늑탈하거나 문자 그대로 그들의 생명을 해하기까지 한 것을 뜻한다. 즉, 힘없는 계층인 사회적 약자들이 가진 소량의 소유마저 빼앗기 위하여 살상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악행자들의 비열하고 잔혹한 실상에 대한 암시로 보면 적절하겠다.

성 경: [시94:7]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의 죄악에 대한 고발]

⭕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선과 악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이다(10:11;73:11;욥 22:13). 이 같은 해석은 당시 이스라엘의 악한 관리 및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었던 것으로 간주케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믿음이 없었던 이유와 아울러 악행에 대한 보응을 즉각적으로 받지 않은 이유로 인하여 악행을 행하고 이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 고백은 무신론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선행을 하기보다는 가증한 소행을 일삼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이것을 간접 지지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성 경: [시94:8]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 '우준한 자들'(*, 보아림)은 '동물처럼 잔인하게 되다'는 뜻인 '바아르'(*)의 분사형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여 재번역하면 이렇다. '네 민족들 가운데서 마치 동물들처럼 잔인하게 행동하였던 자들이여'. 몇몇 영역본들은 '보아림'을 '(가장) 잔인한 자들'(ye brutish, KJV) 혹은 '가장 미련한 자들'(dullest, RSV)로 번역하고 있다. '백성'으로 번역된 '암'(*)을 항상 이스라엘로 국한할 필요는 없으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 '모든 지혜의 근원인 바 여호와 경외하기를 언제나 배우겠느냐'는 뜻으로 이해된다(19:9;25:12). '언제나'로 번역된 '마타'(*)는 어떤 상태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음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악인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잊고 악행한 기간이 몹시 길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시94:9]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 하나님 자신이 그 같은 기능을 소유하지 않으신 채 듣는 기관을 창조하거나 보는 기관을 창조하실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인간과 유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도리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며, 따라서 그 어떤 악행도 하나님의 목전에서 속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 하나님은 악인의 공개적인 악행뿐 아니라 숨겨진 악행 및 속삭이는 음모까지도 보고 들으신다.

성 경: [시94:10]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 열방을 징벌하는 자...징치(懲治)하지 아니하시랴 -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임의적으로 평행적 대구를 만들기 위하여 본절을 두개의 의문문으로 나누고 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그가 알지 못하시랴? '라는 구절을 후미에 삽입하고 있다(He that chastiseth the heathen, shall not he correct? he that teacheth man knowledge, shall not he know? , KJV;Does he who disciplines nations not punish? Does he who teaches man lack knowledge?, NIV). 그러나 굳이 이러한 변형을 시도하기보다는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원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본 번역을 좀더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위대한 교육가, 곧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온갖 지식을 부여하신 자가 그들을 징책하고, 바로잡고 훈계할 권리가 없겠느냐? '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도덕적 징치를 암시하는 말이다.

성 경: [시94:11]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

⭕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 원문상 본절은 '왜냐하면'의 뜻을 지닌 접속사 '키'(*)를 첫 단어로 하는 하반절과 그 앞의 상반절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상반절을 번역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들을 아신다'이다. 그 뜻은 동물처럼 잔인한 악인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처럼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모르시거나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며 잠시 동안 그 행위를 징벌하지 않고 두시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가장 은밀한 생각들까지 읽고 계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본 구절을 고전3:20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하반절은 모호한 듯하지만 명사 및 대명사의 성(性)을 분명히 알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하반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헛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대명사 '그들'은 '생각들'이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명사 '그들'의 성(性)은 남성이어서 이 대명사가 가리키는 명사 역시 남성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생각들'은 원문상 여성으로 되어 있고 '인간'은 남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수이고 '인간'이 단수인 문제는 '인간'을 대표 단수로 보면 풀린다. 따라서 하반절의 적절한 번역은 '왜냐하면 인간들은 헛되기 때문이다'가 되겠다. 특히 여기서 '헛됨'으로 번역된 '하벧'(*)은 '호흡', '연약함' 따위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을 재종합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면 이렇다. '인간은 호흡처럼 연약하고 그 능력이 제한된 존재이다. 심지어 그의 생각까지 제한되어 있고 빈약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유한한 생각들을 아시고 헤아리신다'. 결국 본절은 9,10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변에 해당한다(Anderson).

성 경: [시94:12]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의인에게 내리는 복]

⭕ 주의 징벌을 당하며(*, 테야스레누) - 원형인 '야사르'(*)는 '가르치다', '교훈하다' 혹은 '징책하다'의 두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전자의 의미로 볼 때 상반절은 하반절과 동의적 평행구를 이루게 된다. 후자의 의미로 볼 때도 무리는 없는데 이것은 단기간의 징책은 신적(神的) 교훈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8-11절에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의 행위의 우매함올 비난한 저자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징책을 받고 있든 받지 않고 있든 간에 하나님의 법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복된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신 8:5;욥 5:17).

성 경: [시94:13]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의인에게 내리는 복]

⭕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 나게 하사...평안을 주시리이다 - 원문을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악인을 위한 구덩이가 다 파질 때까지, 역경의 날들로부터 그에게 평안을 주신다'. 보통 '구덩이'(*, 사하트)는 짐승을 잡기 위한 구덩이 혹은 지하 세계(음부)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상징적 의미인 '완전한 보복' 혹은 '완전한 멸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49:9, Anderson). 또한 '역경의 날들 동안'이란 하나님이 악인의 행위를 아직 심판하지 않으셔서 악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시기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본절은 비록 악인이 완전한 심판을 받는, 완전한 멸망의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아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자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성 경: [시94:14]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의인에게 내리는 복]

⭕ 여호와께서는...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 여기에는 5절의 탄원에 대한 응답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일시적인 삶의 어려움은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그 영원한 유산을 잃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배신하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택한 것을 기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택한 하나님 자신의 명예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너회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성 경: [시94:15]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의인에게 내리는 복]

⭕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아드 체데크 야슈브 미쉬파트) - 직역하면 '판결이 의에게로 귀결될 것이다'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판결은 결국에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백히 드러내는 내용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좀더 포괄적인 범주에서 이 의미를 풀면 인간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의 편에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영향력 때문에 죄로 인해 오염되긴 했지만 세상 속에는 의의 형태들이 존속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생의 행위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마는 것이다.

⭕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 - '마음이 정직한 자'란 하나님께 정직하며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공평한 자를 가리키나 문맥상으로는 '의로운 자'가 되겠다(7:10;119:7). 한편 '의로운 자'가 좇아야 할 대상은 생략되어 있으나 '의'인 것이 분명하다. '의로운 자'가 '의'틀 좇아야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의의 편에 계셔서 '의'의 손을 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 경: [시94:16]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누가 나를 위하여...치며...칠꼬 - 기자는 본 시편 앞부분에서 악인이 그의 땅에 침입해와서 누구의 저지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유산을 유린했던 사실을 상기한 바 있는데(3-6절) 바로 그 시점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 일어나서 그 대적을 물리쳐 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같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적시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강조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이다.

성 경: [시94:17]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키므아트 솨크나 두마) - 직역하면 '곧 침묵 속에 거하였올 것이다'이다. 여기에서 '침묵'은 문맥을 고려하고 또 본 용어가 '스올' 혹은 '무덤' 따위로 번역된 115:17 등을 참조할 때 '무덤'으로 번역해도 무난하겠다.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70인역(LXX)도 '음부' 혹은 '지옥'으로 번역하고 있다. 흔히 성경은 무덤을 '조용한 곳', '침묵의 땅'으로 묘사한다(암 8:3 참조).

성 경: [시94:18]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 이것은 갑자기 당한 상황이 아닌 점진적으로 되어온 최악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뗬 위험한 일을 갑자기 당하여 지르는 탄성이 아니라 인내로 견디어 오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태에 이르러서 내뱉은 절망적 탄성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거의 무덤 앞에 이른 듯한 상황'이라고 해도 되겠다(Barnes).

⭕ 주의 인자하심(*, 하스데카) - '당신의 견고한 사랑'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확실히 와 닿는다. 원형 '헤세드'(*)는 언약적 용어이다. 즉,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배려와 사랑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때에 고통당하는 그의 백성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까닭은 바로 이 언약 때문이다(20:3;41:3 ;119:117).

성 경: [시94:19]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베로브 사르아파 베키르베) - 직역하면 '나의 안에 나누인, 혹은 수많은 생각들이 있는 가운데'이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근심스럽고 짐이 되는 많은 일들 때문에 헛되고 무익할 뿐 아니라 목적이나 방향도 없는 무수히 많은 공상과 잡념이 오고 가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욥 4:13;20:2).

⭕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 여기서 '위안'으로 번역된 '탄후메이카'(*)의 원형 '탄후밈'(*)은 강조 복수 명사로서 하나님(욥 15:11)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급된 위안(욥 21:2;사 66:11;렘 16:7)을 말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가득 차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당신께서 직접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그 혼란을 제거하시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 경: [시94:20]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요체르 아말 알래호크) - 직역하면 '율법에 의하여 해악을 꾸미는'이다. 율법의 그늘 속에 그 불의를 숨긴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율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체하면서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할 때 본구절은 '율법을 대항하여 해악을 도모하는'으로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

⭕ 악한 재판장(*, 키세 하우오트) - 여기서 '악한'으로 번역된 '하우오트'(*)는 '파멸', '멸망이란 뜻도 내포한다. '입을 쩍 벌리고 있다'(5:9)는 의미로도 번역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용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삼킬듯이 달려드는, 그래서 그 상대를 삼켜 멸망시키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묘사를할 때 사옹되는 용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재판장'으로 번역된 '키세'(*)는 원래 '심판의 좌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문맥상 이 용어는 거짓된 정의의 가면을 쓰고 그 가진 권력을 남용하여 예배 공동체를 압박하는 악한 지도자를 묘사하는 용어로 보면 되겠다. 그 가진 권력을 남용하며 예배 공동체를 억압 멸망시키려는 악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큰 진노률 유발시키기 마련이다(사 10:1-4).

성 경: [시94:21]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저희가 모여...치려 하며 - 이에 해당하는 '야고두'(*)는 전쟁 용어인 '공격하다', '치다' 등의 뜻인 '가다드'(*)에서 유래된 단어이다(렘 5:17; 미 4:13). 그러나 본 구절은 전쟁에 대한 암시를 준다기보다는 기자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 대적들이 마치 전쟁을 일으키듯 소란을 피우며 덤벼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구절로 보면 되겠다(Barnes).

⭕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려야 하나(*, 담 나키 야르쉬우) - 문자적인 뜻은 '결백한 피를 정죄하다'이다. 이것은 악한 재판장이 이득을 얻기 위하여 무죄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가리킨다(왕상 21: 8-16;마 27:4).

성 경: [시94:22]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이시요 - '예히'(*)는 흔히 '...가 되시며'로 번역되며 완벽한 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절의 경우 그런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확실히...가 되시며'가 정확한 번역이다.

성 경: [시94:23]

주제1: [하나님의 공의와 세상의 불의]

주제2: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 끊으시리니...끊으시리로다 - 70인역(LXX)에서는 동일한 이 두 동사 중 하나를 생략한다. 아마 70인역 역자는 맛소라 본문(MT)이 중복 오사(誤寫)된 것으로 본 듯하다. 그러나 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철저한 보응이 기필코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복법을 통해 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다 하겠다(7:16 등).

성 경: [시95: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우리 구원의 반석 - '반석'(*, 추르)은 하나님의 별칭으로 잘 알려진 용어이다(18:2,31,46;19:14;28:1;78:35;89:26;사 2:8;합 1:3).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 및 안전성을 시사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본 구절은 '그 반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즐거이 부르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인 '루아'(*)는 '즐거운 소리를 내다', '개가를 올리다'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신복의 예틀 표하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사울의 대관식 때에 그 백성의 층성의 외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이기 때문이다(47:1;삼상 10:24;습 3:14;슥 9:9).

성 경: [시95:2]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그 앞에 나아가며 - '나아가며'에 해당하는 동사 '네카마드'(*)는 '앞을 향하여 재촉하며 민첩하게 나아가다' 혹은 '만나다'는 의미를 지니며, 본문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곳은 미 6:6이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민첩하게 나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세라 하겠다(Perowne)

⭕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 여기서 '즐거이 부르자'는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시'를 '나팔'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다(70인역). 그렇다면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뜻이 되겠는데 큰 무리는 없는 번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시'에 해당하는 '지므라트'(*)는 '노래', '찬양' 외에도 '기악'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대다수 영역본들은 개역 성경과 유사한 번역을 취한다(psalms, KJV; songs of praise, RSV).

성 경: [시95:4]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아쉐르 베야도 메흐케레 아레츠) - 직역하면 '그의 손들 안에 땅의 깊은 처소들이 있으며'이다. 여기서 '손들 안'이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를 뜻한다. 그리고 '찾다', '탐색하다'의 뜻을 지닌 '하카르'(*)에서 온 '메흐케레이'(*), 곧'깊은 처소'란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고 파보아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땅 속 가장 깊은 곳 따위를 가리킨다. 결국 본 구절은 인간의 일상적인 관측 능력 밖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 경: [시95:5]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 여호와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그가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이 그것의 주인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 경: [시95:6]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오라(*, 보우) -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임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기자는 가장 겸손한 부복(俯伏)과 예배에로의 초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던 사실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오셰누). 직역하면 '우리의 조성자'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인격적 언약 관계롤 암시하는 표현이다. 모세의 다음과 같은 꾸지람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들 간의 언약 관계를 망각한 사실을 겨냥하고 있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롤 내신(조성하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신 32:18).

⭕ 무릎을 꿇자 - '굽혀', '경배하며'와 의미상의 동의어로서 여호와를 향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Anderson).

성 경: [시95:7]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예배와 찬양에로의 초청]

⭕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 문자적인 뜻은 '우리는 그의 목장의 백성이요 그의 손의 양이라'(we are the people of his pasture, and the sheep of his hand, KJV)이지만, 문자적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조금 어색하므로 다음과 같이 고쳐 번역함이 좋겠다. '우리는 그의 손의 백성이요 그의 목장의 양이라.' 본 구절의 원문은 비유와 상징의 대상이 서로 혼합되어 있는 경우라 하겠다.

⭕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 외관상 본 구절은 다음 절과 연결시켜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전후 문맥과의 관계를 고려한 본 구절의 의미 규정에 관한 견해는 몇 가지로 나뇐다. (1) 문자 그대로 보아서 본 구절올 일종의 소원,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는 소원을 뜻하는 구절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경우는 '그리하면 네가 잘되리라' 정도의 의미가 생략된 것을 가정한다. (2)본 구절을 '만일 네가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면'을 뜻하는 조건절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경우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는 귀결절이 되겠다(70인역, 제롬 등).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신약 성경의 구절로는 히 3:7, 8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3)'대저...양이라'를 삽입구로 처리하고 본 구절을 6절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여호와 앞에 무릎올 꿇자. 만일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면.'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 그 어느 견해를 취하더라도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본 구절에는 성전 예배의 기쁨과 즐거움이 계속되던 분위기를 깨는 경고와 교훈조의 엄숙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 목적 때문에 본 구절을 포함한 본 시편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예배 공동체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감사와 헌신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다른하나는 가르치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본 시편은 대부분의 시편처럼 일종의 예식서일 뿐 아니라 한 편의 설교인 것이다. 한편 예언서적인 특성도 두드러지고 있다. 모든 진실된 설교자들처럼 기자는 그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말하는, 하늘로부터 온 대사와 같은 모습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오늘날 - 이 표현에 관해 어떤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이 썼다. '본 용어는 예를 들면 이어지는 절들에 암시된 바, 광야 시대 동안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하고 거역하였었던 시대를 연상케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Bleek). 그러나 본 용어는 특정한 역사상의 위기뿐만 아니라 본 시편이 공예배에서 사용되는 모든 순간들에 적용될 수 있다(히 3:7,Alford). 한 마디로 본 용어는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진 시대와 같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현재의 상황 혹은 본 시편이 작성되었던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아울러 염두에 둔 표현으로 이해된다(Perowne).

성 경: [시95:8]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역사적 교훈을 통한 경계]

⭕ 므리바 - 원어상의 뜻은 '다툼(혹은 겨룸)의 장소'틀 의미하며, 출 17:1 이하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혹함으로써 하나님을 격노케 한 후 모세가 그 장소에 붙였던 이름이다(106:32;출 17:7). 출 17:7을 근거로 하여 혹자는 '므리바'와 '맛사'는 한 지역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이 두 곳은 서로 다론 곳이라고 주장하지만(North),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적어도 '므리바'는 시온 광야 안에 있던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민 27:14;신 32:51;겔 47:19;48:28).

⭕ 광야 - 물이 고갈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두 번째로 불평했던 가데스 인근 지역인 신 광야를 뜻한다(민20:1, Perowne).

⭕ 맛사(*, 마사) - '시험하다', '입증하다'를 뜻하는 '나사'(*)에서 유래된 용어로 '시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Johnson). 70인역(LXX)은 '유혹'으로 번역하고 있다(신 6:16).

성 경: [시95:9]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역사적 교훈을 통한 경계]

⭕ 나를 시험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지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지를 의심하여 하나님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광야 시대의 한 사건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출 17:1;민 20:1). 그 후 세대들은 이 사건을 불신의 전형으로 보았다(78:18,41,56)

⭕ 나의 행사 - 기적 같은 구원, 심판 따위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을 유지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행동들로 보아야 한다(Perowne, Anderson). 광야에서 물을 선물로 준 한 사실로만 국한시키는 학자도 있으나(Boylan) 그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사'에 해당하는 '파알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78편).

성 경: [시95:10]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역사적 교훈을 통한 경계]

⭕ 내가 사십 년을 - 히 3:9에 본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본 구절과 앞절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 앞에는 의미상 '그러므로'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 근심하여(*, 아쿠트) - 혐오, 구역질 따위의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강한 표현이다.

⭕ 마음이 미혹된(*, 토예 레바브) - 직역하면 '그 마음이 헤매이고 있는'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그들의 내적 방황에 따르는 필연적인 징벌 때문이었음을 반영한다. 동일한 표현을 107: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적 방황'이란 다름아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됨으로 인해 스스로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상태를 가리킨다.

⭕ 내 도를 알지 못한다 -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의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 구절 앞에는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도'(*,데레크)의 문자적 의미는 '길', '도로'이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쏨을 퉁해 계시된 지침 혹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곧고 평탄한 한 길 곧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것, 그것이 바로 구불구불한 길과 같은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이다.

성 경: [시95:11]

주제1: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과 불신에 대한 경고]

주제2: [역사적 교훈을 통한 경계]

⭕ 내 안식 들어오지 못하리라(*, 임 예보운 엘 메누하티) - 여기서 '임'(*)은 부정사(not...) 역할도 지니는 말이나 조건문을 이끄는 접속사(if...)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본문을 조건문으로 번역해 보면,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면'이 된다. 히브리 어법에서 그 맹세의 일부 내용이 생략된 이 같은 조건문은 강한 부정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Alexander).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될 수 있겠다.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으로 들어올 수 없으리라.' 또한 '메누하티킥'(*). 곧 '나의 안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처소를 뜻하지만(132:8,14) 문맥상으로는 광야에서 방황 이후 있을 안식의 터전으로서 약속된 땅, 가나안이 적절한 의미이다(신 12:9). 약속된 가나안 땅은, 영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결코 그 안식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본절의 경고는 주님 재림 때까지 오고 가는 모든 세대 중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를 겨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임에 분명하지만, 이와 아울러 여호와의 메시지를 경청하여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도록 이스라엘 회중에서 권면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M. A. Tate).

성 경: [시96:1]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새 노래 - '새로 지은 노래' 라는 뜻보다는 '날로 새롭게 북받쳐 오르는 노래','다함 없이 늘 새로운 노래'를 뜻한다 하겠다(33:3;98:1;144:9;사 42:10 참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끊임없고 아침마다 새롭듯이(애 3:22,23), 하나님께 대한 찬양도 늘 새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Anderson). 한편, 온 땅(*, 칼 하아레츠)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나 여기서는 시인이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3, 10절 참조).

성 경: [시96:2]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그 이름을 송축하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이란 그 존재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 참조). 따라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라는 깃은 그분의 속성을 알고 그분께 찬양을 돌리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밝혀주는 대표적 이름으로는 '엘로힘'(*)이 있는데 이것은 만물의 창조주와 보존자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고, 또 다른 이름 '엘 솨다이'(*) 는 자연을 은혜로 복속시키는 능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화'(*)는 언약에 신실하신 은혜로운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그리고 '체바오트 예화' (*)는 조직화된 천군 천사들에게 옹위되시어 전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하신 이로서의 하나님을 각각 지칭한다. 이외에도 하나님의 이름들 및 그에 따르는 의미들은 풍성한데 이러한 것들을 더 풍성히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그 내용이 더 풍성하고 깊고 올바른 찬양이 될 것이다(출 3:7-15강해, '하나님의 이롬' 참조). 특히 본 문맥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다.

⭕ 구원(*, 예슈아토)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구원'이다. 본 용어는 원래 위험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할 때 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좀더 근본적 의미의 구원,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까지 암시한다. 따라서 본절이 하나님 찬양을 위해 초청하는 대상은 그 구원의 혜택을 받게 되는 모든 성도가 되겠다(Barnes).

성 경: [시96:3]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영광(*, 카보드) - 본 용어는 뒤에 나오는 '기이한 행적'과 평행을 이루는 용어로 사용되었다(9:1). 이 두 용어는 여호와의 창조사역(136:4 이하)과 그의 구원 사역(2절)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66:2). 본절에서 저자는 여호와의 구원 사역 및 창조 사역의 경험을 세상 온 백성과 함께 나누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청하고 있다(사:66:18).

성 경: [시96:4]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광대하시니'에 해당하는 '가돌'(*)은 주로 '크다'로 번역되며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묘사하는 말로도 많이 사용되었다(창 45:7;출 14:31;32:11;신 9:29;삿 2:7 등). 문맥상 하나님의 창조 사역 및 구원 사역, 바로 그것이 위대하다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 이 같은 표현은 본 시편 기자가 다른 이방 신들의 존재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헛것이었음이 분명하다(5절). 이방 신들의 허탄함과 무용성에 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 절대적 무용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사41, 44장이다. 한편, 다신교적 배경을 안고 있는 이방 문서들 속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이 다른 신들보다 우월함을 인정하는 글귀가 발견된다(Kraus).그러나 본 시편 기자가 그 문서들을 참조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비교가 아닌, 절대 참신이신 하나님을 강조적로 증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다른 문서를 참조했다면 대상 16:25이 그 출처일 것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성 경: [시96:5]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 열방의 신들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 비해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의 능력과 위엄을 온 세상에 드러내신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본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 비교는 절대적이요 극한적 차이를 부각시킨다(Alexander).

성 경: [시96:6]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

⭕ 존귀와 위엄(*, 호드 웨하다르) - 이 한 쌍의 용어들은 왕적 권위를 묘사할 때 사용되곤 한다(21:5;45:3104:1;111:3).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두 용어를 세상의 왕을 수종드는 신하들처럼 왕 되신 하나님을 수종드는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보다 더 분명한 것은 존귀와 위엄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이다(Anderson). 다시 말해서 존귀와 영광의 진정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 들을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관한 묘사로 보기도 한다(Weiser).

⭕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이곳 저곳을 방황하다가 드디어 다윗 성에 안착한 직후의 다윗의 찬양을 기록하고 있는 대목인 대상 16:27과 유사한 구절이다. 여기서 '능력'으로 번역된 '오즈'(*)는 역대 상의 기록과 동일하며,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티프에레트'(*)는 그곳에서 '헤드와'(*), 곧 '즐거움'으로, 그리고 여기서 '성소'로 번역된 '미크다쉬'(*)는 그곳에서 '마콤'(*), 곧 '처소'로 각각 되어 있다. 이러한 약간의 변형은 본 시편 기자가 자신이 현재의 시편을 쓰는 시점의 상황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역대상의 내용을 바꾸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며, 그가 본 시편을 쓴 시점의 상황은 역대상의 기록 시점과 유사한 포로 귀환 이후의 성전의 재봉헌 무렵이라는 것 역시 추론케 한다. 여기에서 '능력'은 하나님의 처소가 능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아름다움'은 성전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곳임을 각각 암시한다(Barnes).

성 경: [시96:7]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

⭕ 만방의 족속들 - '족속들'에 해당하는 '미쉬페호트'(*)는 원래 혈연적 유대로 하나가 된 친족을 가리킨다. 이 사실을 고려해 보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예배가 서로 관계없이 이곳 저곳에서 모인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애정을 나눈 가족처럼 강한 일치감을 갖는 자들에 의하여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호칭은 천상적 존재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29:1).

성 경: [시96:8]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

⭕ 예물을 가지고 - 성전 예배 장면으로부터 취한 표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자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걸맞는 예우(禮遇)와 자세로써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물을 동반하는 것은 동방의 풍속을 반영해 준다. 동방에서는 왕에게 나아갈 자격을 얻었을 때 반드시 예물(선물)을 지참하도록 되어 있었다(45:12;68:29;72:10).

⭕ 그 궁정에(*, 레하츠로타이우) - 직역하면 '그의 궁정들에'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뜰이 있었으며 특히 헤릇 성전의 경우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그리고 제사장들의 뜰 등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이제 기자는 이 모든 뜰을 개방하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이방인의 뜰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이 함께 뜰에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Davies). 아마도 이러한 복수형 사용을 통하여 저자는 미래에 있을 이방인의 복음 참여를 암시했는지도 모른다.

성 경: [시96:10]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

⭕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 새 시대가 열려서 참통치자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시작할 때 초래될 현상 중의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즉, 본절의 상,하반절을 통해 짐작하건대 본문은 다분히 종말론적 성격까지 내포하는 바, 의와 공평으로 특징지워질(9:8;17:2;58:1;75:2;98:9;99:4 참조) 여호와의 완전한 통치를 암시한다(Kidner). 아울러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 우주 만물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굳게 서 있게 된 사실을 찬양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성 경: [시96:11]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

⭕ 하늘...땅...바다 - 태고 이래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 곧 이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시대를 위한 찬양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본문은 히브리 시 특유의 웅장함을 더해 주는 의인법적 표현이다(12절;사35:1;42:10;44:23;45:8;49:13). 여호와 시대의 도래 및 그의 왕국의 확립은 손상된 모든 피조 세계의 조화까지도 회복시킬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 위대한 완성을 고대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苦待)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맡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룻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성 경: [시96:12]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

⭕ 밭과...즐거워할지로다 - 지구 위의 많은 땅 가운데 특히 인간에 의하여 경작되고 있는 부분이 찬양대의 일원으로 초대되고 있다. 밭이 찬양할 내응은 그 소출의 풍성함, 아름다음 등이 될 것이다.

⭕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즐거이 노래하리니 - 밭이 즐거이 노래할 때 나무들이 노래한다는 것은, 밭과 나무가 마치 성가대가 서로 화답하는 찬양을 드리듯이 노래한다는 의미이다. 그 가지, 열매, 줄기, 잎사귀 등은 아름다움, 풍성함, 웅장함, 섬세함 등을 인하여 노래할 것이다.

성 경: [시96:13]

주제1: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찬양]

⭕ 임하시되(*, 바) - 직역하면 '임하고 계시다'이다. 이와같이 현재 진행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표현한 까닭은 마치 현재 그 눈앞에 나타나시듯 여호와의 도래를 좀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래는 심판을 위한 도래이나 동시에 구원을 주기 위한 도래이기도 하다. 의와 신실의 심판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평화는 사 11:1-9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성 경: [시97:1]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 본 시편의 주제인 여호와의 도래 및 그의 온 세상을 향한 통치를 한마디로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바로 앞 시편에서는 여호와의 통치의 날이 가까왔음을 말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통치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었는데 이제 본 시편에서는 바로 그 통치의 날이 시작된 듯이 묘사하고 있다.

⭕ 허다한 섬 - 여기서 '섬들'이란 일차적으로 지중해 연안의 섬들 및 그 해안가를 뜻하지만(72:10의 경우처럼), 문맥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 후반부의 경우들처럼(사41:1,5;4:4;49:1;59:18 등) 좀더 포괄적인 의미인 '이방 나라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Perowne).

성 경: [시97:2]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구름과 흑암 -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에게 나타난 최초의 경우는 구름이 빽빽했던 시내 산에서였다(신 4:11). 이후에 후기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은 여호와의 도래를 묘사할 때 바로 시내 산 현현으로부터 그 이미지를 빌어오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한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에 관한 후대의 묘사에서도 나타난다(욜 2:2;습 1:15;계 11:5). 또 시편의 다른 구절들에서는 이 구름과 흑암으로부터 우박과 숯불 혹은 화살이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3절 ;18:12,13;50:3;77:17;106:18 등). 여기서는 불의의 세력에 대해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또한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초월성에 대한 경외와 신비를 암시하기 위해서 이러한 묘사가 나오고 있다(왕상 8:12;대하 6:1; 욥 22:13,Kidner).

⭕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 - '기초'(*,메콘)는 어떤 물체를 떠받들고 있는 버팀목, 기둥 따위를 가리킨다. 고대 므깃도에서는 왕이 앉는 보좌가 스핑크스들에 의하여 떠받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ANEP). 아무튼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공평이 그 특징임을 암시해 준다(89:14).

성 경: [시97:3]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불 - 하나님의 현현 묘사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데(50:3;출 19:18; 24:17;신 5:4;9:10,15;18:16). 본 비유의 이미지는 화산의 활동보다는 천둥, 번개의 모습으로부터 따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단순한 '불'(출 19:18)뿐 아니라 '삼키는 불'(신 4:24) 가운데 나타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본절에서는 그 불 이 사면의 대적을 사른다고 했으니 이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합 3:5).

성 경: [시97:4]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떨었도다 -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뇌우(雷雨)는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현상이었는데, 특히 성경에서 천둥은 여호와의 음성에(29:3;104:7), 번개는 그의 화살과 창에(144:6;합 3:11) 비유되곤 했다. 여호와의 번개는 그 현현의 급작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밝혀(77:18) 모든 은밀한 악행들까지도 낱낱이 밝혀 내심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 경: [시97:5]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산들이...녹았도다 - 안정의 상징인 산들이(30:7) 여호와의 임재 앞에 녹았다는 것은 여호와의 위용을 짐작케 하는 표현이다. 즉, 악인들이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의지처라고 믿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Kidner)

⭕ 온 땅의 주(*, 아돈 콜 하아레츠). - 본 호칭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고 하였을 때 단지 한 지역 혹은 한 나라의 이방 신들로부터 자신들의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하여 강조적으로 법궤를 '온 땅의 구주 여호와의 법궤'로 불렀던 수 3:11,13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후 본 호칭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여호와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는데(미 4:13;슥 4:14;6:5), 본 문맥에서도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시97:6]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하나님의 임재]

⭕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 이것이 하나님의 오심의 종국이자 목표이다(50:6).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하는 날, 그 철저한 심판 행위는 온 세상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77:14;79:10;98:3). 본 구절과 동일한 용어가 바벨론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었는데(사 35:2;40:5; 52:10 ;66:18), 이것을 보면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 곧 귀환 사건은 하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은 종국적 심판의 모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성 경: [시97:7]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악인의 수치]

본절에서 시인은 유일하고 참된 신이 신 여호와께만 예배드릴 것을 만백성에게 권고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우상 숭배를 계속 고집한다면 수치와 파멸을 당하게 될 뿐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임하시는 날에는 우상들의 허구성과 무익성이 밝혀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전혀 구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25:3;37:20; 사 1:29;미 3:7).

⭕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히쉬타하우 로 칼 엘로힘) - 문자적인 뜻은 '모든 신들아 그에게 경배하라'이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나오는 본 구절, 특히 여호와를 경배할 대상이 이방 신들이라는 문자적 의미는 해석자들을 당황케 만든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신들'이 우상 혹은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어떻게 보든 본문 해석에는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Anderson, VanGemeren 등). 그런가 하면 시리아역(SyriacVersions). 70인역(LXX) 등은 여호와께 경배한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신들 '을 '앙겔로이'(*, 천사들)로 바꾸어 번역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의 경우 본 구절이 신약의 한 부분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고 '신들'이 '천사들'로 번역된 사실을 더 발전시킨다(Delitzsch). 히 1:6에는 본 구절과 동일한 구절이 있는데 그곳의 문맥은 종말론적 재림의 때에 있을 천사들의 찬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독생자 예수께서 심판자로 재림하실 때 모든 천사들이 그에게 찬양하고 경배하여야 할 것을 말하는 대목에서 본문과 동일한 구절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본문의 '신들'은 '천사들'이며 '그에게'의 '그'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본 구절의 자체 해석이라는 면으로만 볼 때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문맥을 고려할 때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없어진다. 본 구절을 제대로 해석하는 출발점은 문멕에 대한 고려이다. 우선 본 시편 전체의 믄맥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이며, 본절 상반절은 참 예배 대상에 대한 예배자의 혼란을 다루고, 다음절은 참 예배 대상을 바로 택한 백성의 기쁨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배 대상에 대한 혼란을 멈추고 참 예배 대상을 찾아 권고적 명령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모든 이방 예배자들이 혼돈에 빠져 있으므로 이제 그들의 모든 예배 대상을 엎어버리고(마치 여호와의 법궤 앞에 다곤 신상이 넘어져버렸듯이) 온 우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 부복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다소 역설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라 하겠다.

성 경: [시97:8]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의인의 자세]

⭕ 듣고 기뻐하며 - 4절의 '땅이 보고 떨었도다'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여호와의 도래는 경외와 두려움이 가득한 이미지들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여기서처럼 뛸듯이 기쁜 즐거움으로 기꺼이 환영하는 광경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믿지 않던 자들은 주의 재림의 때를 두려움과 고통으로 맞게 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그때가 바로 구원의 때임을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올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 21:27,28).

성 경: [시97:9]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의인의 자세]

⭕ 주는 지존하시고(*, 아타...엘레온) - 여기서 '엘레온'(*)은 형용사로 '높은', '가장 높은'을 뜻하거나 하나님의 호칭으로서 '지존자'를 뜻한다. 이런 양자 택일의 가능성 때문에 본문은 '당신은 지존자이십니다' 혹은 '당신은 높으시고(지존하시고)'로 번역되고 있는데, 하반절 '당신은 매우 뛰어납니다'와의 평행을 고려할 때 후자의 번역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성 경: [시97:10]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의인의 자세]

⭕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 왕이자 심판자이신 여호와의 도래가 가까왔음을 골자로 하는 선포를 해오던 기자는 이제 그 도래의 긴장 속에서 본 시편의 독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악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악을 미워함으로써 여호와께 대한 사랑을 입증해 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악은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해야 하며 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참 하나님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본 구절만큼 명확이 밝히고 있는 곳도 드물다(사 1:16-20;요일 1:6, 7과 비교하라).

⭕ 성도의 영혼을...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 성경 여러 곳에서 이같이 말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에는 이 말씀이 항상 진리인 것 같지는 않을 때가 많다. 말하자면 성도는 악인으로 인하여 자주 핍박을 당하고 손해를 입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의미에서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이다. 즉, 이제 하나님은 심판자로 이 세상에 임하실 터인데 그 심판 뒤에 성도는 영원히 악인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구원 이후 악인은 성도를 다시 핍박하거나 손해를 주지 못한다.

성 경: [시97:11]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의인의 자세]

⭕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기쁨을 뿌렸도다 - 여기에서 '뿌리고'(*,자레아)는 문자 그대로 '흩다', '분산시키다'를 뜻하며,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을 연상시키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흔히 '심은대로 거두는' 법칙을 암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의를 뿌린다거나(잠 11:18), 죄를 뿌린다거나(잠 22:8), 해악을 뿌리고(욥 4:8),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거둔다는 식의 언급 속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본절은 빛과 기쁨을 뿌리고 그 적절한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심판주로 임하시기 전까지는 의인의 삶의 환경이 암흑과 같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린 씨앗이 당장은 눈에 안 보여도 열매를 맺기 위해 자라가듯이, 이미 빛과 기쁨의 씨앗이 뿌리워졌으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열매도 자라가고 있으며 따라서 이런 암흑은 기쁨을 맞기 전에 잠시 맛보는 암흑일 뿐이다. 현재 의인에게 혹 재앙과 환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평화와 숭리가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빛'은 종종 구원(27:1;사 9:2) 혹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축복(118:27;사 58:8,10;60:1 참조)을 상징한다(Anderson).

성 경: [시97:12]

주제1: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주제2: [의인의 자세]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 본 시편은 서두와 같이 기쁨에로의 초청으로 끝맺고 있다.

⭕ 그 거룩한 기념(*, 레제케르코데쇼) - 본 문맥에서 이 용어는 분명히 그 거룩한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을 가리킨다(135:13;출 3:15). 그분의 모든 것, 그분의 인간을 향한 계획 등을 상기케 하는 이름, 그 이름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본절 상반절은 32:11 상반절과 거의 유사하며, 하반절은 30:4과 동일하다.

성 경: [시98:1]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새 노래 - 96:1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 시편의 저작 시기에 관한 견해로는 바벨론 포로 이후와 출애굽 이후가 있다. 후자의 경우 70인역(LXX)이 본 시편의 표제어를 '다윗의 시편'으로 붙이고 있는 사실과 시리아역(Syriac Versions)이 역시 그 표제어를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사실에 관하여'로 붙이고 있는 사실에 그 주장의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자의 경우는 후자에 비해 그 근거가 더 불확실하다(Kissane). 그렇다면 '새 노래'란 출애굽의 구원 사실, 곧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숭리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물론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승리를 회상하는 시점은 츨애굽 직후이거나 그보다는 멀리 떨어진 다윗 시대일 수 있겠다.

⭕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키 니플라오트 아사) -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가 기적 같은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찬양을 받으셔야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를 말하고 있다. '기적 같은 일'이란 언약 백성을 구원하신 과정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 여호와의 승리로 2,3절에 묘사되어 있다(9:1; 78:11).

성 경: [시98:2]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구원을 알게 하시며 - 실제적으로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알게 하셨다는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알았다는 표현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어떤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실제로 구원을 체험한 것에 근거한 앎을 말한다.

⭕ 그 의를...명백히 나타내셨도다 - 본문은 본절 전반절과 평행을 이룬다. 따라서 본문의 '의'는 '구원'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면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은총이 임하는 것이다. 특히 사 40-55장은 본 시편과 유사한 구절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이 두부분(사 46:13;51:5,6,8)은 그 내용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의'와 '구원'을 서로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 여호와의 구원 사실을 단순한 소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의 현장에 있음으로 해서 열방이 명백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 본구절의 강조하는 바이다(사40:5;52:10).

성 경: [시98:3]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인자와 성실 - '인자'(*, 하스도), '성실'(*, 에무나토)이라고 하는 이 두 단어는 언약 용어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 후 그들의 반응과 성실성의 여부에 관계없이 그 약속을 철저하게 수행해 나가시는 사실을 암시하는 용어인 것이다(26:3;36:5; 51:1;89:1).그렇다면 본절의 '이스라엘 집'도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호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15:12;135:19). 한편,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70인역(LXX)은 '인자와' 뒤에 '야곱을 향하신'을 삽입하여 본절 상반절을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언약적 성실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구절로 만들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야곱을 향하신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이다.

⭕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 이스라엘의 구속이 열방, 곧 온세계로 하여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기회를 갖게 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사45:22).

성 경: [시98:4]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온 땅이여 -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세계 만방에 알려진 사실을 거듭 강조한 바 있다(2,3절). 따라서 이제 만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찬양을 돌릴 것을 촉구한다(VanGemeren).

⭕ 소리를 발하여(*, 파차흐) - 이는 '큰소리를 내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다'등을 뜻하는데 문맥상 어떤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을 만큼의 큰 나팔 소리, 기쁨의 소리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 외에 사 14:7;44:23;49: 13;52:9;54:1;55:12 등에도 이 같은 표현이 나오는데 공히 억누를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의 소리를 뜻한다.

성 경: [시98:5]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수금 - 그 모양이 오늘날의 하아프와 같은 것으로서 대개 열 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라고 한다(Josephus). 이 악기는 세속적인, 그리고 종료적인 용도에 모두 쓰였다(43:4;사 23:16).

⭕ 음성(*, 콜 지메라) - 문자적인 뜻은 '시편(악보)의 소리'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악기뿐만 아니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의 가사를 동반한 음성도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내용의 가사가 읊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의 진심이 곁들여져야 할 것이다.

성 경: [시98:6]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나팔(*, 하초체로트) - 그 모양은 직선형으로서 은이나 기타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민 10:2). 주로 예배를 위한 대중 집회 소집이나 전쟁을 위한 군대 모집을 위하여 사용되었는데 축제 행렬의 흥을 돕기 위해서도 사용되곤 하였다(왕하 11:14). 그 소리는 마치 가죽 부대가 터질 때 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 호각(*, 쇼파르) -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악기 중의 하나로서 약 70회 가량 언급되고 있다. 대체로 양의 뿔로 만들었으나 후대에는 야생 염소 따위의 뿔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 악기는 '클라리언'(clarion)과 같은 악기의 소리, 즉 맑으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난다고 한다(Barnes).

성 경: [시98:7]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바다...외칠지어다(*, 이르암 하얌) - 직역하면 '바다여 천둥치는 소리를 내어라'이다. 한편, 천둥치는 소리를 내는 바다를 고분고분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피조물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Anderson). 또한 짐승이 포효(咆哮)하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도 묘사되는 파도가 하나님의 대적처럼 여겨지는 시편도 있기는 하다(93:3). 그러나 여기서 시인이 바다까지도 찬양의 대열에 초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세계(*, 테벧). - 일반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세계', '세상'을 뜻하나, 바로 앞에 바다가 언급되고 있으니 그와 대비를 이루는 세계인 인간이 거주할 만한 온 땅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본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바다 및 온 땅까지도 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열에 참예하게 될 사실을 강조하는 듯하다.

성 경: [시98:8]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큰 물이 박수하며 - '큰 물'에 해당하는 '네하로트'(*)는 일반적으로 땅 위에 흐르는 '강들'을 가리키는데 어떤 역본들은 '홍수'로 번역하기도 한다 '네하로트'를 '홍수'로 번역하는 역본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경우, 이 말이 창세 전 혼돈 상태에 있었던 물들을 상기시킨다고 주장한다. 어쨌거나 본절은 무생물인 그것이 손뼉을 친다고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 손뼉치는 행위는 왕에 대한 환호의 한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는데(왕하 11:12), 결국 이 행위는 왕을 향한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47:1;사 55:12). 물론 이 동작이 악의적인 기쁨을 암시하고 있는 구절도 있다(겔 25:6;나 3:19).

⭕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 바다와 육지(땅)가 그랬듯이(7절) 강들과 산악도 전체 피조 세계에 대한 일종의 시적인 묘사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98:9]

주제1: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통치]

주제2: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권고]

⭕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키 바 리쉬포트 하아레츠) - 직역하면 '그가 땅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이다. 본문은 지금까지 본 시편 전체를 통하여 표현된 사실, 곧 하나님께서 이방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 그리고 땅 위에 호흡하고 사는 모든 인생들 및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표현해 주고 있다.그 이유는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기 위하여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 강림은 최종적 대구원, 최종적 승리를 거두기 위한 종말론적 주님의 재림을 다분히 암시한다.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 구원을 통하여 그 실체가 이미 조금은 소개되었다. 즉, 주님의 재림의 때에 주의 백성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이요 주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터인데, 특히 본절은 주의 백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날 하나님의 심판은 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쁨을 기대케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심판은 의와 공평으로 특징지어지는 심판으로서 모든 그릇뒨 우려를 추방시킬 것이기 때문이다(67:4). 본절은 96:13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보여준다.

성 경: [시99:1]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 93:1 주석을 참조하라. 본 시편은 왕이신 여호와의 도래를 축하하는 일련의 시편들(93-99편) 중의 마지막 시편이다. 이 시편들은 '여호와는 왕이시다'로 시작되었는데(93:1) 이제 그 종결 시편도 '여호와는 왕이시다'로 시작되고 있다.

⭕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 이 이미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였던 언약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VanGemeren). 언약궤의 뚜껑은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 그룹 둘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서있었다(출 25:10-22). 특히 언약궤 위에 연결된 그룹들의 날개와 궤 뚜껑이 만드는 속죄소는 종종 하나님의 강림의 장소로 언급되었다(레 16:2; 민 7:89). 한편, '좌정하시니'(*, 요쉐브)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대한 좀더 자세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조용히 예배자들의 경배를 받고 계신 분일 뿐 아니라, 그위 성전에 임재하셔서 직접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99:2]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통치에 있어서 땅 위의 중심지는 시온이라는 것이다(48:2; 65:1). 시온을 천상적(天上的) 시온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 시편 전체 내용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성전과 법궤가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Rad).

성 경: [시99:3]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 히브리어 원문상 본문의 주어는 2절의 '모든 민족'이다(Alexander). 따라서 이스라엘 중에 알려진 하나님의 위대하고 경외로운 이름(신 10:17)이, 온 세상 중에서도 역시 영화로워지기를 소원하는 저자의 마음을 잘 읽게 해주는 표현이라 하겠다(Perowne).

성 경: [시99:4]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 여기서 '왕'은 1절에 언급된 왕, 즉 여호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능력'이란 세상 독재자들의 그것과 같은 전횡적(專橫的)인 폭력이 아니라, 공정한 심판을 사랑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그의 이 능력은 의로움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부의 위대하고 영원한 법, 그의 통치의 내적 원리인 공평을 세우셨고, 그의 모든 사역들을 통하여 그 공평을 명백히 드러내셨다.

성 경: [시99:5]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우리 하나님을 높여 -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분이시므로(사 57:15) 그를 높이고 그를 모든 것보다 월등한 분으로 인식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하다. 한편,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언약 관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113:5; 출20:2; 수 24:17,18,24; 느 9:32).

⭕ 발등상(*, 하돔 라글라) - 왕의 보좌 그 자체를 받치고 있는 '보좌의 아랫 부분' 혹은 '보좌 아래의 발판'이 적절한 의미이겠으나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로도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어 132:7에서는 '지성소'의 의미로 언급되고 있으며, 대상 28:2에서는 언약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애 2:1에서는 '거룩한 도성'(혹은 성전)을, 사 66:1에서는(마 5:35과 비교하라) 온 땅을 각각 가리키고 있다. 이상의 용례들을 종합 비교 검토한 학자들은 대체로 '지성소'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용례들을 굳이 배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Anderson).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자는 그분이 살아 역사하시는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온 정성을 다해 경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성 경: [시99:6]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본절은 주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 흘러오던 어떤 사상의 흐름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키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본절에 대한 대표적인 주해는 본절 말미에 나오는 '간구'의 개념을 중시하여 구약에 나오는 영웅적 중보 기도자들인 모세, 아론, 사무엘을 소개하는 구절로 보는 견해라 할 수 있다(Rosenmuller).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대표적 중보 기도자들이(출 14:15; 17:11 이하; 32:11 이하; 민 12:13; 14:13 이하; 16:44-48; 삼상 7:8 이하 등을 참조하라)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본 시편 전체의 문맥, 특히 1-5절의 내용에 주안점을 두는 견해도 있다. 즉, 본절 이후는 제외하고라도 1-4절을 살펴보면 찬양의 주제, 곧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주제가 본 시편 내용의 주된 흐름이며, 따라서 본절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배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그분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지성소에서든 아니면 법궤에서든지 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곳에 머리를 숙여 경배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 특히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거룩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런데 그 거룩한 예배를 드렸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본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 사람이며,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알고 거룩한 예배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용서하심'과 '응답하심'으로(8절) 그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이 본절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견해가 문맥상 보다 자연스럽지만 전자의 견해도 배타적으로 제외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그 제사장 주에는 모세와 아론...사무엘 - 언약의 피를 뿌리는 것(출 24:6-8)과 성결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행했던 지성소 봉사(출 40:22-27) 이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성결케 하기 위한 모든 예식 등 제사장적 직무(레 8장)는 모세가 담당하였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백성을 위한 중재 사역을 감당하는 '제사장'으로 불리움을 받았다(출 17:11, 12; 32:30-32 ; 민 12:13). 사무엘 역시 여기서는 제사장 계급으로 분류되지는 않고 있지만 모세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모세처럼 백성을 위해 중재한 자로서 위대한 기도자의 표본으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가 라마 고지(高地)에서 희생 제사를 드린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백성들로부터 그의 독보적 제사장적 위치를 인정받아 백성 중 그 누구도 그가 축복하기 전까지는 희생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실 역시 알고 있다(삼상 9:12,13). 또한 우리는 그가 전쟁시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며(삼상 7:9), 동시에 그의 제사장적 사역을 대신하려 했던 사울을 그가 엄히 꾸짖었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삼상 13:11-13). 모세와 아론 및 사무엘의 제사장적 사역에 따라 드려진 이 같은 예배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졌다.

성 경: [시99:7]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구름 기둥에서 -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모세와(출 33:9) 아론에게만(민 12:5) 적용되며,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구름 기둥에서 말씀하셨다는 직접적 언급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직인 표현이라 하겠다(출13:21 이하; 14:19 이하; 민 14:14; 신 31:15 등).

⭕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와 아론, 사무엘 등의 신실성을 증명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는 증거는 그분에게 주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 경: [시99:8]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긴 것,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그들'이란 직접적으로는 모세, 아론, 사무엘을 가리키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그들 외에 그들의 기도의 혜택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부수적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엘 노세 하이타 라헴 웨노켐 알 알릴로탐) - 본 원문의 어순을 고려하여 직역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용서를 주셨다. 물론 그들의 행위들에 대해 복수하시지만'이다. 갑자기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복수하신다는 표현이 나온 것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그들'이란 앞에 언급된 모세, 아론, 사무엘, 이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패역한 이스라엘 공동체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하겠다(물론 출 32:1 이하; 민 20:12; 삼상 8:1 이하에 이들 세 사람의 불신앙 혹은 과오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는 한다). 그리고 개역 성경과는 달리 원문에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사실이 앞에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복수하심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강조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무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신바 있다(출 32:35).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셔서 결국엔 가나안 땅에 입성케 하셨다.

성 경: [시99:9]

주제1: [거룩하신 주의 왕권에 대한 찬양]

주제2: [거룩하신 주의 통치]

5절에 이어 본절에서는 '거룩'에 대한 주제가 재차 강조되고 있다. 5절과의 차이점은 '발등상'이 '성산'으로 바뀐 점이며 이 두 구절에서는 공히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부각시킨다(Alexander).

⭕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히쉬타하우 레하르 코데쇼) - 직역하면 '그의 거룩한 산 앞에서 무릎을 꿇라'이다. 여기에서 '산'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시온 산'을 뜻하는 것 같은데(2:6; 3:4; 15:1; 43:3; 48:2; 단 9:16). 그 산을 거룩하다고 묘사한 까닭은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였기 때문이다.

성 경: [시100:1]

주제1: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노래]

주제2: [영원한 찬양에의 초청]

⭕ 온 땅이여 - 93-99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자의 소망은 자기 민족, 자기 백성이라는 제한을 훨씬 넘어선 영역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는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고서 온 이방, 온 세계도 구습을 타파하고 회개함으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 앞에 나와 기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즐거이 부를지어다(*,하리우) - '크게 외치다' 혹은 '개가를 올리다'는 뜻인 본 용어는 수도성에 입성하는 왕을 환영할 때 혹은 왕의 행렬을 맞이할 때 만백성과 신하들이 그에 대한 복종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66:1;98:4, 6). 비록 '여호와는 왕이시다'로 시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 시편은 그 내용상 여호와의 왕권과 통치를 노래하는 일련의 이전 시편들, 곧 93-99편을 끝맺는 송영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성 경: [시100:2]

주제1: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노래]

주제2: [영원한 찬양에의 초청]

⭕ 기쁨으로 -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일은 종교적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행해져서는 안 되며 받은 바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여 벅찬 감격 속에서 자발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나타낸다(95 : 1 ; 사 51 : 11).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배를 '거룩한 산 제 사'라고 표현했다(름 12 : 1).

⭕ 여호와를 섬기며 - 이것은 언약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광범위한 관계성(수 24:14 )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본절 하반절에 비추어 보건대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배를 암시하는 것 같다(출 3 : 12 ; 사 19 : 21).

⭕ 노래하면서 - 이 노래의 주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계속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과 은총이 될것이다(107 : 22).

성 경: [시100:3]

주제1: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노래]

주제2: [영원한 찬양에의 초청]

⭕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 예화 후 엘로힘) - 직역하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이다. 이 표현은 모든 다른 신들을 부인하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한 분에게만 충성을 다짐할 때 사용되는 잘 알려진 예식 용어이다(신 4 :35 ; 수 24 : 18; 왕상 18 :39).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론(唯一神論)에 대한 확신을 엿보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Barr).

⭕ 알지어다(*, 데우) - 원형인 '야다'(*)는 단순한 지적인 경험 그이상을 의미한다. 특히 본 문맥에서는 오직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 그리고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고백에 따르는 모든 요구들 및 의무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키라는 의미이다(신 4 : 39 ; 사 43 : 10 ;렘 3 : 13 ; 14 : 20).

⭕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 이것은 인간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게 된것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사 43 : 1,21 ; 44 : 2 ; 60 : 21).

⭕ 우리는 그의 것이니 - 원문상으로 본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로 읽히기도 한다. 영역 성경 KJV는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ste)을 따라 '우리 자신이 아니라'(not we ourselves)로 옮겼고, NIV, RSV, 탈굼역(Targum)등은 개역 성경과 같이 옮겼다(we are his). KJV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를 만드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요 결코 우리 스스로 된 것이 아니다'는 의미가 된다.

⭕ 그의 기르시는 양(*, 촌 마리이토) - 직역하면 '그의 목장의 양'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된다(롑 23:2). 목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비유는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눅 15 : 3-6 ;요 10 : 1-18) 구약 성경에도 자주 나온다(23 : 1 ; 74 : 1 ; 79 : 13 ; 95 : 7 ; 사 40 : 11 ; 겔 34 : 31).

성 경: [시100:4]

주제1: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노래]

주제2: [영원한 찬양에의 초청]

⭕ 그 문에 들어가며...들어가서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상속자로 그리고 그의 목장의 양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다른 민족은 그 동일한 특권의 혜택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모든 나라 백성은 언약 백성의 본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그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드리도록 초청되고있다. 예언적 기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 2:2,3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 같은 사실, 곧 이방인의 초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종말론적 실제에 대한 묘사이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여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 의전에 이르자...." 하나님의 전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으므로 합당한 요건만 구비하면 누구나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기대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자비가 무한하시고 그의 인애와 진실은 다함이 없고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Delitzsch).

성 경: [시100:5]

주제1: [기쁨과 감사와 찬양의 노래]

주제2: [영원한 찬양에의 초청]

본 시편의 서두는 광대한 비전으로 시작되었거니와(1절) 이제 장구한 기대와 소망으로 끝을 맺는다(Kidner).

⭕ 대저(*, 키) - '왜냐하면'을 뜻하는 본 접속사는 기자가 말하는 바 만백성이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먼저 '선하시니'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크신 능력과 대비를 이루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를 암시한다. 또한 '인자'는 인간의 죄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대비를 이루는 하나님의 '긍휼', '연민'을 암시하는데 이럴 경우 앞의 '선하심'과 본 '인자'는 그 의미가 유사한듯 보이나 그 대비를 이루는 내용들(각각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공의')이 다르다는 면에서 좀더 뚜렷이 구별된다. 또한 '성실하심'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를 베푸신다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이미 이 '성실하심'이 언약적 용어임을 주목한 바 있다.

성 경: [시101:1]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인자와 공의 - 물론 이 둘은 다윗의 찬양의 주제가 되는 하나님의 고귀하신 속성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 원리를 본따서 그 자신의 통치와 그의 왕국의 틀을 형성하려는 왕으로서 그와 같은 속성들을 노래의 주제로 삼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묵상하여 그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자신의 통치 가운데서도 드러나게끔 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탁월하신 통치 원리가 자신의 삶과 통치 속으로 이전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찰 때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의를 묵상할 것이다. 이런 의미를 중시할 때 여기서의 '찬송하겠나이다'는 '기도하겠나이다' 혹은 '묵상하겠나이다'로 바꾸어 보아도 무난하리라 여겨진다.

성 경: [시101:2]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아스킬라 베데레크 타밈) - 여기서 동사 '아스킬라'(*)는 '헤아리다'(사 41:20), '가르치다'(32:7), '지혜롭게 행하다'(2:10), '형통하다'(사 52:13), '깨닫다'(106:7) 등을 뜻하는데 뒤에 나오는 '타밈'(*)이 어떤 '고결한(흠없는)행동'을 뜻하는 명사임을 고려할 때 '지혜롭게 행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겠다.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해 재번역하면 '나는 온전한 행동 방식의 표본을 따라 지혜롭게 행하겠습니다'가 되겠다(I will myself wisely in a perfect way, KJV). 결국 본 구절은 도덕적으로 고결하며 흠이 없는 통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다윗의 각오를 포괄적으로 밝히는 내용인 것이다. 절대 권력을 소유한 자는 너무도 흔히 자기 기만과 부패에 빠져 버릴 수 있다. 절대 권력을 쥐어서 모든 속박 내지는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재자들은 흔히 자기 감정 혹은 어리석음을 따라 불의하고 불공평한 통치를 일삼기 마련이다(Perowne). 그러나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로 이끌어가고자 했던 경건한 지도자 다윗은 남다른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 바로 앞 구절을 연결시켜 본문을 번역하면 이렇다 : '당신이 내게 임하실 때 나는 온전한 행동 방식의 표본을 따라 지혜롭게 행하겠나이다.' 이것은 고결한 정치의 길 걷기를 각오하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되고 자극되어 표출된 강한 신앙심의 표현이다. 부패하고 연약한 인생이 자력으로 어찌 주의 법도를 따라 고결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기자는 그 일을 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서 정직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법궤가 시온으로 옮겨진 이후 다윗의 통치 조직이 공고해 지던 때에 되어진 언급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일부를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성 경: [시101:3]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비루(卑陋)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 '비루한 것' (*, 데바르 벧리야알)의 문자적인 뜻은 '벧리야알의 말(혹은 행동)'이다. '벧리야알'(*)은 '...이 없이'를 뜻하는 부정사 '벧리' (*)와 '유익한 것' 혹은 '가치있는 것'을 뜻하는 '야알'(*)이 합쳐진 합성 대명사이다. 따라서 '벧리야알'은 '무익한(무가치한)것'이 되며 '데바르 벧리야알'은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 행동'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그 눈앞에 두지 않겠다는 것은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무익하거나 무가치한 말이나 행동은 고결한 통치를 해나가는데 저해가 되는 언행을 뜻한다. 바로 앞절 말미에 '제 집안'이란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는 자기 집안에서부터 그 같은 결심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 것 같다.

⭕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 '배도자들의 행위'(*, 아소 세팀)를 직역하면 '벗어난 행위'인데 결국 이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그릇된 행위를 뜻한다. 저자는 그와 같은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그는 진리와 고결(순결)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의 일탈(逸脫)의 유혹이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물론 일탈을 꾀하게끔 하는 온갖 유혹이 그를 에워쌀 수 있다. 예컨대 '정치를 하다보면 다 그럴 수 있다. 기묘한 술책을 계속해서 짜내야 한다. 권력은 사용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왕은 율법을 초월해 있다'등등과 같은 유혹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속삭임에 귀기울이기를 거절한다.

성 경: [시101:4]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 레바브 이케쉬 야수르 밈멘니 라 로 에다) - 직역하면 '구부러진 마음을 가진 자는 나로부터 멀어질 것이며 악한 자를 나는 알지 않을 것이다'이다. 먼저 다윗은 자신이 따르게 될 규칙을 강조한 후 그가 일국(一國)의 왕으로서 행할 때 구체적으로 만나게 될 인사 경영에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그의 왕국과 가정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자의 성격을 개괄적으로 '그 마음이 구부러진 자', '악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속절에서 그 성격을 좀더 세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시101:5]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 멜라오쉬니 바세테르 레에후) - 직역하면 '몰래 그의 이웃을 중상하는 자'이다. 왕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아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같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간신배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다.

⭕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 - '눈이 높고'에 해당하는 '게바 예나임' (*)은 구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나 18:27의 '교만한 눈'을 가진 자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Anderson). 또 '마음이 교만한 자'에 해당하는 '레하브 레바브'(*)는 그 문자적인 뜻이 '마음이 넓은 자'이지만 문맥상 '탐욕, 욕심이 그 마음에 가득한 자'가 맞겠다. 어떤 학자는 본 용어를 '욕심으로 그 마음이 부푼 자'로 번역하고 있다(Perowne).

성 경: [시101:6]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 왕 다윗이 선택한 신하의 자격은 고상한 가문 출신이나 재력, 재능, 업적, 아첨하는 입술, 비굴할 정도의 고분고분함 등이 아니라 변함 없는 충성심이 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물론 여기 '충성'이란 말에는 그 왕에 대한 충성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이 함축되어 있다.

성 경: [시101:7]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본절은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기자의 굳은 각오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여기서 거짓을 도모하는 자는 결코 중용(重用)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실수로 기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내 쫓겨나게 되고 말 것을 피력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내 집안에'라는 표현은 2절과 그리고 '내 목전에'는 3절과 각각 대응을 이루어 시적 기교를 더해 준다(Alexander).

성 경: [시101:8]

주제1: [통치자의 결의]

주제2: [공의로운 통치자의 자세]

⭕ 아침마다...멸하리니 - 악이 암흑의 그늘에서 그 싹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빛과 같은 공의의 광성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침에 재판건을 처리하던 고대의 풍속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렘 21:12);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습 3:5).

성 경: [시102:1]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 여기서 '부르짖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기도'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특별히 소리를 내어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즉 외적인 표현이 두드러지는 것이 그 특징인, 간절한 기도라 할 수 있다(5:2; 18:6, 41; 30:2; 72:12; 욥 35:9; 36:19). 그리고 '상달케 하소서'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평소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에 무관심하셨다는 뜻이 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를,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고통으로 시달린 기도자가 그 고통의 기간의 종결을 호소하는 것에 그 강조점을 둔 표현으로 보고 있다(Anderson).

성 경: [시102: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본절에 나타난 표현들은 다른 시편들에서도 볼 수 있는 관용구와 같은 것들이다.예를 들어 '나의 괴로운 날에'는 59:16에서,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는27:9에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는 18:6; 31:2에서, '내가 부르짖는 날에'는 61:2에서,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는 69:17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각각의 용례들을 문맥 속에서 연구 종합해 보면 이 표현들 저변에는, 과거의 경험에 입각하여 그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하시리라는 기자의 확신이 깔려 있다. 결국 본절은 기자의 부정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소망의 자세, 곧 하나님은 그어떤 고통으로부터도 자신을 구하실 분이라는 확신의 자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2:3]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 여기서 '연기같이'는 갑작스럽게 소멸되고 마는 인생의 연약함과 무상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비유이다(37:20). 말하자면 저자가 당했던 고통의 기간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부질없고 낭비적인 무익한 기간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는 시련 중에 있는 자가 흔히 느끼는 감정이다(Barnes).

⭕ 내 뼈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 '냉과리'라고 번역된 본 구절의 난제는 '모케드'(*)인데 사 33:14및 레 6:9등에서 '타는 것', '석쇠'등의 의미로 사용되고있는 사실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Snaith).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고 앞서 언급된 용례를 참조할 때 '맹렬히 타는 열기', '불'등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영역 성경 KJV는 '난로'(hearth)로, RSV는 '용광로'(furnace)로 각각 번역했다. 어쨌든 기자는 회화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처한 고통의 크기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 뼈'는 신체의 뼈대(6:2) 혹은 전인(全人, 35:10)을 가리킨다. 기자가 상투적인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혹은 하나님의 무응답으로 인한고통스러운 내면 상태를 묘사하기 위한 회화적 표현인지는 가려내기 쉽지 않다(Anderson). 하지만 극심한 염려와 근심은 실제로 뼈를 쇠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잠 17:22).

성 경: [시102: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원문상 본절에는 접속사 '키'(*)가 나오는데 이 접속사는 대체로 원인절 앞에 붙어 이유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나 본절에서는 결과절 앞에 붙어 결과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보는 것이 좋겠다(Anderson, Barnes). 이 사실을 토대로 본절을 재번역하면 이렇다 : '나의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의 빵을 먹는 일도 잊었읍니다.' 시련으로 인한 시달림이 너무커서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 조건인 식사에 주의를 기울일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슬픔으로 인한 고통은 식욕을 빼앗아 가버린다. 모든 것을 잊게 할 정도였다는 사실에서 시인이 당한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성 경: [시102:5]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도브카 아츠미 리브사리) - 직역하면 '나의 뼈가 나의 살에 붙었나이다'이다. 여기서 '나의 뼈'(*, 아츠미)는 단수로 되어 있으나 집합적 의미의 단수로 보아 몸의 뼈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문은 극단적인 쇠약함으로 인해 피골이 상접한 상태를 시사하는데, 좀더 자연스러운 표현은 애 4:8에 있는 것처럼 '그 가죽이 뼈에 붙어'가 될 것이다. 욥 19:20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하여 몸의 각 뼈들이 완전히 힘을 잃어 극한의 연약성과 이완을 보이는 상태를 좀더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성 경: [시102:6]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당아새(*, 카아트) - 본 용어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70인역(LXX)이 '펠리컨'으로 번역한 후 대부분의 역본들이 그것을 따르고 있다(pelican,KJV). '펠리컨'은 게걸스럽게 먹고(펠리컨은 주로 조개류를 잡아먹고 산다) 그것을 입으로 토해내기도 하는데 바로 그 모습에 그 이름의 기원이 두어져 있다. 부정한 새로도 알려져 있는 이 새는(레 11:13-18) 물가에 군거(群居)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이유때문에 '카아트'를 '펠리컨'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반박하는 학자도 있다(Anderson). 그 우는 소리에서 그 이름의 기원을 찾아 '사막 올빼미'(desertowl, NIV)로 보는 학자도 있다(Driver). 분명한 것은 '광야'가 이 새를 꾸미고 있음을 볼 때 기자는 자신의 외로움, 비애를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사 34:11; 습 2:14).

⭕ 부엉이(*, 코스) - 부정한 새로 분류되고 있는(레 11:17; 신 14:16) 올빼미류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본절의 묘사는 고통자가 자신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과 그이 상황이 외로움과 고독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이 같은 묘사는 죽음에 거의 다다른 존재에 관한 묘사이기도 하다(88:5). 한편 올빼미는 아라비아어로 '폐허의 어머니'란 뜻을 갖고 있다.

성 경: [시102:7]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깨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붕 위에 외로운 한 마리 참새와 같다'이다. 참새는 그 짝을 잃었을 때 여러 날 동안 외롭게 지붕 위에 앉아서 짝을 잃은 슬픔을 달랜다고 한다. 기자는 그 누구도 위로하는 사람 없는 가운데 철저하게 원수로부터 핍박을 당했던 자신의 모습을 짝을 잃고 외로워하는 참새에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시102:8]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종일 나를 훼방하며(*, 칼 하욤 헤레푸니) - 문자적인 뜻은 '하루 내내 나를 조롱하며'이다. 이것은 기자의 대적들이 본 기자의 고통이당연한 것이며 또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놀려댔던 것을가리킨다. 이는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등등의 표현을 연상시킨다(22:7; 42:10; 44:13등).

⭕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비 니쉬바우) - 문자적인 뜻은'나를 통하여 저주하나이다'이다. 분문에 대해 70인역(LXX)은 '(예전에는) 나를 칭송했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그런가 하면 영역본 KJV는 '나를 향해(저주의) 맹세를 하다'(are sworn against me)의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본문의 히브리어 전치사 '베드'(*) '...로 말미암아' 혹은 '...에 의해'로 옮기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이경우 본문은, 시편 기자의 대적들이 어떤 사람을 저주할 때 시편 기자를 하나의 표본으로 삼았던 것을 가리킨다(use my name for a curse, RSV). 족장 시대 때 야곱은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다음과 같이 각별히 축복했었다 :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창 48:20). 이 축복이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사람을 축복할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축복받았던 것을 기억하며 '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축복받으라'는 식으로 그 사람을 축복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의 정반대 상황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Anderson). 기자의 대적들은 누구를 향해 저주할 때 불행의 표본인 본 기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저주했다는 말이다.

성 경: [시102:9]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 여기서 '재'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페르'(*)는 애도 및 슬픔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된다(에 4:1; 욥 2:8; 애 3:16).그리고 가끔 수치와 회개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욥 42:6; 단 9:3). 실제적으로 시편기자가 재를 먹었을 가능성은 적다. 고통과 비애가 그의 음식과 음료가 되었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큰 고통과 슬픔이 있는 자는 흔히 욥처럼재 위에 앉아 울거나(욥 2:8; 렘 6:26; 욘 3:6). 다말처럼 그 머리를 재에 박았다(삼하 13:19). 특히 본 문맥에서는 마치 재를 먹는 듯한 인상을 주는 후자의 자세가 어울릴 것 같다.

성 경: [시102:10]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이는 주의 분과 노를 인함이라 - 기자는 그의 불행이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리하여 징벌을 초래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세도 그의 시편에서 이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90:7-9). 어떤 극심한 병고나 대적들의 핍박에 직면하여 현상 그 자체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은밀한 죄악까지도 먼저 돌아보고자 하는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시인의 예민한 영적 감수성을 반영한다.

⭕ 주께서 나를 드셨다가 던지셨나이다 - 마치 강한 태풍이 휩쓸어가듯이 하나님의 분과 노가 그를 낚아 채어 잡아 올려 그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지경에 던져 놓았다는 뜻이다(렘 23:19). 이는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사 22:18). 혹은 "동풍이 그를 날려 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욥 27:21)등의 표현을 연상시킨다.

성 경: [시102:11]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망국민(亡國民)의 비애]

⭕ 기울어지는(*, 나투이) - 본 용어는 한 날이 다 저물어가는 것(삿 19:9) 혹은 지는 태양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잠시 후에 완전한 흑암에 의해 삼키움을 당할, 길게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109:23; 144:4; 욥 8:9; 14:2; 렘 6:4). 물론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절박감을 나타내고 있다(Perowne).

성 경: [시102:1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여호와여(*, 웨아타 예화) -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이지만 '웨아타'(*)를 중심으로 앞부분에 서술된 내용과 그 뒷 부분에 서술된 내용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같이 '웨아타'는 강조사로서 선행구와 두드러진 대비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 주는 영원히 계시고(*, 레올람 테쉐브) -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이 문자적인 뜻이다. 이 사실은 슬픔을 초월케 하고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연약한 한 인생인 시편 기자는 소멸하여도 시온의 소망은 그의 영원한 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너무 자주 혹은 급하게 변하여서 잠시 동안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원한 왕으로서 변치 않는 분이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영원 불변하시는 하니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욱 웃음거리가 되어가는 듯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주신 약속들, 특히 그 위대한 언약적 약속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출 25:8). 이 약속에 의존하여 그는 비록 현재의 상황이 불행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 천상적(天上的)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의 약속과 언약 역시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뻗치고 계신 하늘 보좌를 눈을 들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시102:13]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 이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7:6) 시온 성을 재건케 하신다는 뜻이다(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시온 성벽 재건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내신 언약에 신실하기 위하여 범죄한 그의 백성을 회복시켜 다시 평강과 안녕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 여기서 '정한 기한'은 1차적으로 사 40:2이하; 렘25:11, 12; 29:10; 30:18; 슥 1:12-17 등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같은 특정한 때로 이해할 수 있다 :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렘 25:11, 12). 정한 기한이 지나 새로 도래할 시대의 특징은 죄사함과 회개, 언약 갱신 및 시온 재건 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VanGemeren). 아울러 궁극적으로 보면 이는 영적 이스라엘의 안녕이 성취되는 때로도 볼 수 있다(Perowne).

성 경: [시102:1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憐恤)히 여기나이다 - 과거 그 찬란한 자태를 뽐내던 멸망 전 시대뿐만 아니라 멸망을 받아 폐허가 되어 버린 지금도 시온은남은 자들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멸망 후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티끌들을 자신의 몸에 뿌림으로써 그 성(城)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고 한다(Perowne). 결국 본문은 시온 성 재건을 열망하는 남은 자들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 시온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아 할 것을 교훈한다. 즉, 거룩한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더욱 그 교회를 사랑해야 하며 좀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 돌들...티끌 - 어떤 학자는 이 둘을 새로운 도성 건축을 위한 재료들로 이해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Luther). 그보다는 멸망당한 시온 tjd의 황폐한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느 4:2; Alexander).

성 경: [시102:15]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둘로 되어 있으나('경외하다'), 원문에는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야라'(*)로서 '두려워하다'를 뜻할 뿐 아니라 '존경, 경외하다'를 뜻하기도 하며, 그 대상은 부모(레 19:3), 백성의 지도자들(수 4:14) 그리고 종종 하나님(15:4;22:25; 31:19)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의 성취일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기도 한 그 백성의 구속 및 회복을 통하여 드러날 하나님 영광의 현시(顯示)로 인하여 이제 이방 세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세계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되어가는 분기점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Delitzsch, Kirkpatrick).

성 경: [시102:16]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건설하시고...나타나셨음이라 - 이 두 동사는 각가 '바나'(*)와 '니르아'(*)로서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17절에서도 계속되는 이러한 표현은 미래에 있을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법을 예언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s)이라고 한다.

성 경: [시102:17]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빈궁한 자(*, 아르아르) - 이곳과 렘 17:6에만 나오는 본 용어는 '히드'(개역 성경의 렘 17:6은 '떨기나무'로 번역하고 있음)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히드'란 황야에 무성하는 관목이다(Barnes). 어원적으로 볼 때 '발가벗음'을 뜻하는 본 용어는 매우 결핍된 상태에 있는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문맥에서 그 존재란 계속해서 고통을 토로해 왔던 기자 자신(1-11절)으로 볼 수 있으나,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할 경우 일련의 고통받는 무리,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볼 수도 있겠다. 물론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고통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다(13절 참조).

성 경: [시102:18]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기록되리니 - 시편 중에서 위대한 구원 사건의 기억을 기록체로 보존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구원 사건의 전승을 언급하고 있는 유사 구절로 22:30;44:1; 78:2 등이 있으나 이곳들에서는 구두(口頭)전달만을 말할 뿐이다.

⭕ 창조함을 받을 백성 - '장차 날 백성'(22:31)이라는 표현을 연상시키는 구절로 백성의 새 피조 사실과 이스라엘의 현재의 멸망상태 사이의 대조적 상태를 암시하기 위해 동원된 구절인 것 같다(Calvin). 사실 포로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제 2의 탄생과도 같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탄생을 새로운 피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같은 견해를 근거로 한 학자는 본문이 오늘을 사는 성도에게 주는 교훈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 '본 구절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교회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이제 우리는 결단코 자포 자기하지 말고 도리어 무(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신 그분께서 역시 그의 교회를 죽음의 흑암으로부터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진리에 확실히 안주할 수 있어야 하겠다'(Cicero).

성 경: [시102:19]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그 높은 성소에서(*, 밈므롬 코드쇼) - 직역하면 '그의 거룩한 높은 곳으로부터'이다. 어떤 영역본들은 '그의 성소의 높은 곳으로부터'로 번역하고 있으나(from the height of his sanctuary, KJV), 평범하게 '하늘로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14:2; 33:13; 사 63:15). 그것은 '높은 곳'으로 번역된 '마롬'(*)이 하반절의 '하늘'과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유사 구절로는 신26:15이 있다 :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성 경: [시102:20]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갇힌 자(*, 아시르) - 집합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포로 시대를암시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압박받는 자들을 총체적으로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 죽이기로 정한 자(*, 베네 테무타) - 문자적인 의미는 '죽음의아들들'이다. 본 구절은 이곳과 79:11에만 나오는데 '죽을 운명에 처한 자(those whowere doomed to die, RSV)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표현 역시 포로민의 비참상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특정한 시대가 아닌 오고 가는 모든 시대에 사는, 영적 사망의 굴레를 쓴 모든 자들을 포함시켜 이해할 수 있겠다.

성 경: [시102:21]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본절은 19, 20절에서처럼 하나님의 행사(行事) 자체를 묘사한다기보다는 본절의 내용처럼 되어지기를 바라는 일종의 기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Alexander).한편, 여호와의 이름과 영예를 선포한다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기린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성 경: [시102:22]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굳은 신념]

⭕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 시온이 회복될 때 모든 나라의 백성들은 그곳에 모여 여호와께 존경을 표하며 경배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소망의 성취가 될 것이다(47:9; 사 2:2; 60:3-7; 미 7:12; 슥14:16). 한편, 예언적 비전을 담고 있는 본문은 포로 귀환의 지평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에로까지 그 시야를 확장하고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이 대개 그러하듯이,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영감을 받은 시인은 그보다 더 먼장래의 일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말미암을 완성의 단계로까지 비전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Calvin, VanGemeren).

성 경: [시102:23]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저가 내 힘을...쇠약케 하시며 - 이어지는 내용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이 표현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자의 힘을 빼앗았다는 데 있다기보다는 기자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고백하는 데 있다. 기자는 본절에서 지금까지의 논조를 갑자기 바꾸고 인간수명의 짧음 및 그의 연약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암시적으로 하나님의 영원성, 무변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24절 이하).

⭕ 중도에(*, 베데레크) - 주로 일련의 무리의 여정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출 18:8; 민 20:14), 여기서는 기자 개인의 인생 여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본 시편에서 기자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무리, 곧 민족에게 주는 교훈으로까지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28절).

⭕ 내 날을 단촉케 하셨도다 - 수명을 줄였다는 뜻이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의 강도가 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시102:24]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 시편은 일정한 정형을 갖고 있기 마련인데 개역 성경상으로 봐도 그 정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기자가 정형을 무너뜨려가면서 토로하고 있는 이 내용은 정해진 수명에도 이르기 전에 갑자기 죽음을 당케 하지 말아 달라는 간구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같은 간구는 삶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사38:10, 11의 히스기야의 경우와 같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하여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는 강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한편으로 그의 연약성을 절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영원한 팔되신 그분께 대한 의존감을 피력한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은 소멸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후손들은 결코 좌절될 수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기를 소원하고 있었을런지 모른다(28절).

성 경: [시102:25]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 이 구절은 천지 창조 사실 자체에 핵심이 있지 않고 그 피조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유한한 것이라는 사실에 핵심이 있다. 시작이 있는 피조 세계는 그 종말이 있으니 유한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사 51:6). 물론 이는 역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존(永存)하심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 경: [시102:26]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 하늘과 땅은 영원하고 지속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흔히 간주되고 있지만(78:69; 104:5; 119:90; 148:6), 하나님과 비교될 때에는 곧 낡아 없어져 버릴 의복과 같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사 34:4;51:6).

성 경: [시102:27]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주는 여상하시고(*, 아타 후)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그이시다'. 이는 24절 하반절로부터 26절 상반절까지에 묘사된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뜻이다. '...내가 곧 그니라'의 사 41:4 외에 신 32:39 등이 그 유사 구절이다. 아무튼 히브리어 '후'(*)는 여호와의 유일성을 강조하려 할 때 사용된다.

성 경: [시102:28]

주제1: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갈망]

주제2: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 기원]

⭕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 문자적으로는 '당신의 종들의 자녀들이 계속 거할 것이다'이다. 이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백성들이 약속받은 땅에서 계속 거하며 살 것에 대한 저자의 소망을 반영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37:29;69:36). 물론 기자의 이 같은 소망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성 경: [시103:1]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이것은 여호와 찬양을 위한 자기 권고적 표현일 뿐 아니라(104:1) 기자에게 기꺼이 하나님 찬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Anderson).

⭕ 내 속에 있는 것들 - 모든 사상, 온갖 감정이 작동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의지, 양심, 이성, 정서 따위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전인적 실체들을 가리킨다. 기자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를 거론하는 대목에서 이 같은 전인적 실체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외형적인,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를 배격하기 위함이다. 물론 천상에서나 그 완전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겠으나, 이 같은 전인적 실체를 동원한 예배를 드리겠다는 결심이 있다면 어느 정도 훌륭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성 경: [시103:2]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여기서 '은택'이란 3절 이하에 열거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잊지'에 해당하는 '솨카흐'(*)는 단순히 기억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의 선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119:16). 이렇게 볼때 본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를 경고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유사한 경고를 담고 있는 구절로는 신 4:9; 8:11-14 등이 있다. 또 실제적으로 히스기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무시함에 따라 그 교만과 배은 망덕(背恩忘德)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저와 유다에 임했던 역사적 전철(前轍)이 있다(대하 32:25).

성 경: [시103:3]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 기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독백하듯 선포한 후 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을 하나하나 열거하기시작하는데(3-5절), 열거 내용 중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유(赦宥)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 중 가장 큰 것은 죄 용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둘러싸여 사는데 그중에서도 죄 용서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사실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명한 교부(敎父)인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년)이 명확히 갈파한 바이다 : '우리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은총이란 없을 것이다'.

⭕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기서 '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타할루아임'(*)인데 동일 용어가 사용된 신 29:22; 대하 21:19; 렘 14:18; 16:4등의 문맥을 고려할 때 육체적 질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있는 것을 중시할때 '모든 육체적 질병'으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 저자는 자신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과거를 기억하며 이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다(Barnes).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의 위대한 치유 능력에 대해서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 '죄 용서함 받은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신체를 이끌고 다녀야 한다...죽음(사망)이 완전히 삼키움을 당하지 않은 까닭에 육체는 아직도 불완전에서 해방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 육체에 거하는 영혼은 유혹과 시험으로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완전히 치유될수 있다. 우리는 질병들을 너무 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되신 하나님은 그 질병보다 더 중한 (큰) 분이시다. 전능하신 그 의사에게 못고칠 질병이란 없다. 그의 손을 뿌리치지 말라. 인간의사는 때때로 실수를 범한다. 왜? 그것은 인간 의사는 자신이 치료를 수행하고 있는 그 환자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만드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였던 자를 재창조하는 법을 아신다. 그는 자신이 형성하였던 자를 재형성하실 수 있다. 그 의사의 손 아래 너 자신을 맡기라...그의 손을 의지하라. 모든 그의 은택들을 잊지 않음으로 그분을 송축하라. 그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시103:5]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하마스비아 바토브 에드예크) - 직역하면 '좋은 것들로 너의 입을 만족케 하시는'이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따르면 본 구절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를 나타내는 내용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본문 해석의 초점은 '너의 입'이 아니라 '좋은 것들'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 '네 소원'으로 번역된 '에드예크'(*)는 '너의 노년'(갈대아역), '너의 소원'(아라비아역, 70인역,벌게이트역), '너의 몸'(시리아역)등의 유력한 다른 번역들이 있어서 원문의 핵심적 의미를 규정하기 힘든 반면, '좋은 것들'로 번역된 '토브'(*)는 그 근원인 하나님의 은택을 강조하는 용어로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Perowne). '우리의 영혼은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좋은 것이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가장 좋은 것, 그것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한 분만을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기자는 본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좋은 것'이란 기자가 과거의 역사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무엇이며, 그 경험은 하나님으로 인해 되어졌다.

⭕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이 비유는 사 40:31의 표현을 연상시키며 그 소재는 독수리의 신속한 날개짓에서 취하여진 바 힘과 활력을 나타낸다(신 28:49; 삼하1:23; 렘 4:13).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만을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독수리의 날개침 같은 힘과 활력을 부여 받게 될 것이다.

성 경: [시103:6]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의로운 일...판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체다코트'(*),'미쉬파팀'(*)인데 어미의 형태를 보아 알 수 있듯이(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어미가 (*) 혹은 (*)으로 되어 있음) 두 단어 모두 복수형이다. 이 복수형은 (1) 그 단수형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하여, 혹은 (2) 그것을 통하여 여호와하나님이 그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셨던 '수많은 행사들'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된것이 분명한데, 문맥상으로는 후자가 좀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압박당하는 모든 자 - 일차적으로는 고통당했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가리키지만, 좀더 넓게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환난과 핍박을 받았던 교회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였던 기자는 (1-5절) 본절에서부터 언약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6-18절). 즉,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언약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온 이스라엘에 미치는 거대한 은총의 범주의 일부에 불과하다.

성 경: [시103:7]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크신 축복]

⭕ 행위(*, 데라키) - 본 용어 자체는 '어떤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나 의도'(18:21; 25:4, 9; 37:34), '도덕적 성향, 성품'(39:1; 50:23) 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가 그 후에 땅 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규례들, 개인을 포함한 민족, 교회 공동체를 향한 전 포괄적인 하나님의 경륜등을 뜻한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성 경: [시103:8]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본절 전체는 출 34:6에서 따온 것같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특히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부분은 신 4-10장; 27-31장이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103:9]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 '경책지'에 해당하는 '라야브'(*)는 '다투다','겨루다', '법정으로 가다'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정한 율법에 따라 행위를 계속해서 추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하여 그 백성을 판단하신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죄사함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드러내시는데 그 까닭은 죄악된 그 백성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율법의 규례에 따라 철저히 그 행위를 따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

⭕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품지'로 번역된 '이토르'(*)는 절대적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Alexander) '기필코 ...을 계속해서 유지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노를 결코 계속해서 갖고 계시지 않으신다. 레 19:18에 동일한 동사가 사용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말며...."

성 경: [시103:10]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죄...죄악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헤트'(*)와 '아온'(*)이다. 우선 '헤트'는 어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표적을 벗어남', '실수'등을 뜻하며 (욥 5:24; 잠 8:36; 19:2). 함축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그의자의적인 선택을 따라 표적을 벗어나 길을 잃는 것까지도 포함한다(Smith). 또한 '아온'은 '구부러지다', '비틀리다' 혹은 '실수하다', '방황하다' 등을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따라서 이 명사는 '구부러짐', '왜곡됨' 혹은 '실수', '바른 길에서의 이탈'등이 되겠다. 많은 학자들이 후자의 의미를 더 선호한다(Anderson). 그러나 전자로 보든지 후자로 보든지 강조점은 그 같은 행위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라는 사실에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헤트'와 '아온'은 약간의 의미상의 차이는 있지만 주체의 의도성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동일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의도성을 띤 죄악을 용납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징벌의 동기는 그 범법자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범법으로부터 돌이키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조차도 그의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시103:11]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36:5)와 유사한 표현이다. 하늘과 땅의 거리는 인간의 측량기로 잴 수 없을 만큼 무한하고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그분 자신만큼이나 무한하고 끝이 없다. 물론 여기의 자비와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를 둔 것이다(26:3).

성 경: [시103:12]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죄과를...멀리 옮기셨으며 - 여기서 '죄과'란 '폐솨'(*)로서 어원적으로는 신적(神的) 권위에 대항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결과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문은 그 같은 심각한 죄악을 저지른 자라도 진정 회개하면 하나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사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는데, 유사 사상을 지닌 표현이 미 7:19에 나타나고 있다 :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성 경: [시103:13]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불쌍히 여기시나니 - 자신이 숭배하는 신(神)을 아버지로 보는 개념은 고대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근동 민족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일례로 우가릿(Ugarit)에서는 '엘'(El)이 신들의 아비였을 뿐 아니라 인류의 시조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단순한 혈통적 관계보다는 순종하는 자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Gray). 시편에 있어서도 부자(父子)관계는 혈통상, 민족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순종의 문제에 역점이 두어져 있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을 경외하여그 뜻대로 살아가는 자인 것이다(11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성을 언급하고 있는 곳으로는 출 4:22; 신 14:1; 32:6; 사 1:2; 45:11; 63:16; 64:8; 렘 3:4, 19;31:9; 호 11:1; 말 1:6; 2:10; 3:17 등이 있다(Eichrodt, Ringgren).

성 경: [시103:14]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체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츠레누'(*)로서 '구조', '형태'등을 뜻하는데 특히 이는 인간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창 2:7에서 사용된 동사 '야차르'(*)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부서지기 쉬움, 연약성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욥 7:5). 이를 달리 말하자면, 티끌과 진흙으로써 지음받은 연약한 인생은(욥 4:19; 34:15; 전 3:20;12:7)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써만 진정한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78:38).

성 경: [시103:15]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인생(*, 에노쉬) - 히브리어 성경은 인간을 가리킬 때 '에노쉬'와 '벤아담'(*)을 사용하는데(68:18; 신 32:26; 잠 23:28; 욜 1:12), 특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한번은 죽는 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을 뜻할 때 주로 '에노쉬'을 사용한다. 한편, '에노쉬'를 '최선의 상태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Davies).

⭕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본 회화적 묘사는 인간 존재 본질의 일시성을 강조한다. 유사 표현으로는 90:5; 욥 14:2; 사 40:6, 7; 51:12등이 있다.

⭕ 꽃과 같도다 -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 특징인 꽃이 인생의 영화(榮華)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꽃'은 '치이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빛나는 것' 혹은 '반짝이는 무엇'이며 봄철에 침울한 광경을 밝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들에 핀 꽃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성 경: [시103:16]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은 들판의 화초들을 순식간에 말려버린다고 한다. 기자는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이러한 열풍에 사그러지고 마는 화초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Anderson).

성 경: [시103:17]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 하나님의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몰라 그분을 경외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도 베푸는 일반적 차원의 사랑이다 :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각별한 사랑인데 본 구절의 '인자'가 바로 그 사랑을 가리킨다. 그 사랑의 내용은 자자 손손(子子孫孫)에 미치는 사랑이요, 영생을 베푸시는 사랑이다. '인자'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언약적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의거해서 당신의 주도적이고도 신실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신실하게 사랑하심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26:3 등).

⭕ 의(*, 체데크) - 이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심한 두 상대의 관계성을암시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쓰인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 용어는 '건져냄(구원)'(22:31; 40:9; 51:14; 65:5; 69:27). '승리'(사 41:2), '변호'(103:6), '의로운 도움'(71:24) 그리고 '상급'(106:31) 등과 관련한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악인에게 내리는 징벌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한다(119:75). 그리고 본절의 문맥에서는 언약에 명기된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3:18]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 - 본절에서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성을 좀더 자세히 정의하고 있는데 그는 곧 언약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이다(55:20). 단순히 말씀을 아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라고 기자는 분명히 그 한계를 긋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후손이 그 조상과 마찬가지로 의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비결 또한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일이다.

성 경: [시103:19]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 촉구]

⭕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 '보좌'의 히브리어 '케세'(*)는문자적으로 왕이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현왕(賢王) 솔로몬의 왕좌는 잘 장식되어지고 키가 높은 등받이가 달려 있었다(왕상 10:18). 그러나 여기서는 세상 만물과 인생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처소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라고 하는 가시적(可視的) 처소를 통해 표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법궤는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보좌였던 것이다(Davies). 한편, 본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하는 보좌가 하늘에 세워졌다는 것은 결코 요동함이나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보좌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 왕의 보좌는 사망에 의하여 그리고 반란과 혁명에 의하여 그주인이 바뀐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결코 그 주인이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굳게 고정된 보좌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자자손손 영원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여된다는 확신의 토대는 바로 영원히 굳게 고정된 하나님의 보좌에 근거하고 있다(11:4).

성 경: [시103:20]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 촉구]

⭕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 말라카 깁보레 코아흐 오세 데바로 리쉬모아 베콜 데바로) - 이것을 직역하면 '그의 말씀의 소리에 순종하여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힘의 용사들'이다. 이것은 하늘 보좌를 둘러싸고 서서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그 명령을 수행하는 다양한 계급의 천사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힘의 용사들'로 번역이 된 '말라카 깁보레'(*)는 구약 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용어이므로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으나, 사해 사본 등에 나오는 유사 용어 연구를 통해 볼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강력히 수행하는 '천사들'로 봄이 합당하다. 기자는 모든 축복과 영예와 능력이 하늘 보좌에 앉은 그분에게서 나왔음을 찬양하는 대열에 먼저 그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을 부르고 있다.

성 경: [시103:21]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 촉구]

⭕ 천군(*, 체바아) - 원래 이 말은 천상적(天上的) 존재인 천사들의 군사적 성격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데 본 문맥에서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는 '별들'(148:3).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천상적 존재'등이 있다. 그러나 본절이 서술하고 있는 '체바아이우'의 성격을 볼 때 그것은 앞절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하다면 '체바아'는 앞절에서 그 의미가 명확히 규정된 대로 '천사들'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기자는 찬양 대열에로의 천사들의 초청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103:22]

주제1: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 촉구]

⭕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여기서 '너희'는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함축하는 말이다. 기자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찬양에로 초대한 후 서두처럼 자신의 하나님 찬양으로 돌아와 본 시편을 끝맺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점에서 출발한 선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다시 그 점으로 돌아오는 그림을 연상하면서 어떤 문학적 정형성을 염두에 둔 본 시편 기자의 의중을 읽게 된다.

성 경: [시104:1]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창조주의 엄위(嚴威)하신 모습]

⭕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 존귀와 위엄의 상징인 어복(御服)을 입은 왕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왕되신 하나님을 암시한다(93:1).

성 경: [시104:2]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창조주의 엄위(嚴威)하신 모습]

⭕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 본 시편은 온 우주에 생명력과 기쁨을 쏟아붓고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케 하기 위하여 먼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의 내용을 자기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빛을 입으시며'에 해당하는 '오테 오르'(*)의 문자적인 뜻은 '빛으로 두르고 있는'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의 첫쨋날에 빛을 있게 하신 사실을 연상 시킨다. 일단 빛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셨는데 이 사실을 기자는 '하나님이 빛으로 두르시고 계시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의해 생겨난 그 빛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 유지, 보존시키심을 반영한다. 이 사실에 대한 근거는 '입으시며'의 히브리어 '오테'(*)가 분사형으로서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낸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빛되신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빛이시다(요 1:4-9; 요일 1:5). 한편 '옷을 입음같이'는 '카살마'(*)로서 문자적인 뜻은 '옷처럼'인데 빛을 옷에 비유한 본 대목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기자는 빛과 옷의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비가시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본질적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접근이 불가한 빛 가운데 계시는 분임이 사실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마치 의복을 입고 그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영광을 온 세계에 비추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위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아름다운 우주 만물에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하며 위험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그분의 본성의 신비를 파고 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휘장같이 하늘을 펼치십니다'이다. 사 40:22에도 동일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창 1:6-8에 나오는 창조 사역 둘째날 행사의 약술(略述)이다. 하늘이란 아래, 위의 물을 구분하며 널리 퍼져 있는 공간인 궁창을 뜻한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여기서의 '휘장같이'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처소로서의 하늘을 강조하는 견해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쉽게 하늘을 만드신 것을 강조하는 견해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을 비롯한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따르고 있다.

성 경: [시104:3]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창조주의 엄위(嚴威)하신 모습]

⭕ 물에 - 창 1:7에 따르자면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리킨다.

⭕ 누각(*, 알리오타이우) - 문자적인 뜻은 '그 위층의 방들'이다.몇 개의 층들로 되어 있는 건물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은 커다란 집의 위층에 있는 방,혹은 지붕이 평평한 집의 지붕 위에 있는 방을 암시할 때 자주 사용된다(왕상 17:19;왕하 1:2; 4:10). 본절에서는 마치 여호와의 궁전이 궁창 위에 있는 물들 위에 기초를 두고 세워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 들보를 얹으시며 - 이 같은 비유적 표현을 감상하며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비롯한 그의 피조 세계는 그의 솜씨를 나타내며 그 영광을 간접적으로 계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찾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가장 확실한 일은 오직 오랜 역사를 통해 계시된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본 시편을 감상하며 지속적으로 염두에 둘 것이 바로 이 점이다(Calvin). 천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뭔가를 첨가하셨다는 식으로 상상해서는 안된다. 치장하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셨을 뿐이다.

⭕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 하나님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며(사 19;1; 단 7:13; 마 24:30) '날개 달린 말'과 같이 바람을 타고 다니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Gunkel).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모든 자연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아래 있다는 사실이다(148:7-14).

성 경: [시104:4]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창조주의 엄위(嚴威)하신 모습]

⭕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 본절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바람이나 불과 같은 형태를 띠도록 만드셨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바람이나 불과 같은 강함, 민첩함, 오묘함 등으로 그의 사자들을 옷입히듯 하셨음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LXX,Briggs). (2)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은 온갖 형태의 바람과 천둥, 불 따위의 조정을 떠맡은 비밀스러운 중재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우리 주위에서 느끼고 볼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자연력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천사들의 사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람과 물,티끌과 불 등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본절은 이 모든 경이로운 조화가 천사들의 활약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흔히 우연이라고 말하는 기후, 계절 따위를, 바람을 움직이고 불을 일으키는 사역을 그의 사역자들(천사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삼라 만상(森羅萬象)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결과들을 볼 때마다 그 사역자들을 통해 그 같은 현상과 결과들을 낳게 하신 자비롭고 거룩하신 분 하나님을 상기 해야만 할 것이다'(Newman). (3) 하나님이 바람, 구름, 천둥, 번개 등과 같은 자연 현상들을 마치 천사들을 부리시듯이 마음대로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이다(VanGemeren). 이 같은 세 견해 중에서 본 문맥이 피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지혜와 영광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성 경: [시104:5]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 여기서 '땅의 기초를 두사'(*, 야사드 에레츠 알 메코네하)의 문자적인 뜻은 '그가 그 기초들 위에 땅을 세우셨다'이다. 마치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존재함을 연상시키는 본 표현 때문에 어떤 학자는 아예 '그가 지구 그 자체를 세우셨다'로 번역하기도 한다(Mendelssohn).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본 구절의 원문적 의미와 유사한 뜻을 암시하고 있는데(욥 38:4-6; 잠 8:29) 본문의 핵심은 지구를 떠받치는 기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땅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한편, '영원히 요동치 않게'라는 표현은 지동설을 반대하던 학자 산체스(Sanchez)가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와 논쟁을 벌일때 강력하게 의존하였던 표현이라고 한다(Perowne). 성경은 오히려 지동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을 갖고 있는데 그 구절은 욥 26:7이다 :'땅을 공간에 다시며'. 이것은 땅이 공중에서 내려온 어떤 줄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라 땅이 공중에 떠 있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104:6]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 여기서 기자는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듯한데 그 대상은 원시적 혼돈이다(창 1:2). 이방적 개념의 혼돈이란 땅과 물이 서로 뒤섞인 혼잡의 덩어리이다. 그러나 기자는 땅은 이미 형성되었고 그 형성된 모양을 물이 완전히 덮고 있는 상태를 혼돈으로 보고 있다.

성 경: [시104:7]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 외관상 본절의 문장 구조는 불완전한데 그것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원문상 바로 앞절 후반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앞절의 주어를 본절의 주어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주어는 물이다(70인역, 제롬역). 물이 하나님의 견책을 받고 우뢰 소리 같은 그분의 명령을 듣는다는 식의 표현은 무생물의 반(半)의인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한 위치로 내려가고 그에 따라 수면 아래 있던 땅이 그 자태를 드러낸 창조 기사의 일부를 생생하고 박진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04:8]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 야알루 하림 예르두 베카오트) - 6절 하반절, 7절에서 계속적으로 주어로 인정되고 있는 '물'을 넣어 번역하면 '물들은 산들 위로 올라가며 골짜기들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이다. 이 번역은 대부분의 영역본들이 취하고 있는 것으로(they flowed over themountains, they went down into the valleys, NIV) 문법적으로 수용할 만하며 땅을 덮고 있어서 혼돈 상태를 지속시켰던 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로 향하고 있음을 묘사하던 선행절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 번역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이 번역은 6-9절의 주제와 연결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이 번역은 107:26의 유사 문장 구조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성 경: [시104:9]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물의 경계를 정하여 - 태고적 혼돈 상태의 물이 '정해진 지역에 함께 모아져서'(창1:9) 땅과 바다가 분명하게 분리되었다는 말이다(욥 26:10; 38:10, 11; 잠 8:29; 렘5:22).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홍수 발생 중지에 대한 포고령이 아니다. 즉,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홍수가 전혀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본 구절은 창조 때 처음으로 설정되었고 그후 노아 언약(창9:9-16)을 통하여 확증된 일반적인 의미의 땅과 바다 사이의 경계를 암시할 뿐이다.

성 경: [시104:10]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함솰레하 마아야님 바네할림) - 문자적인 뜻은 '샘물을 격류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보내시는 분'이다. '골짜기'에 해당하는 '나할림'(*)은 격류가 흐르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알고 있는 사막의 와디(wadi)를 연상하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통념에 있어서 샘물의 근원은 천지 창조 전의 혼돈과 같은 심연(深淵)이었다고 한다(Anderson). 마치 이러한 통념을 바꾸어 놓기라도 하는 듯이 기자는 그 샘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104:11]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타나는 구절인데 '들나귀들'로 번역된 '페라임'(*)은 '야생 나귀'(the asses, KJV; the wilddonkeys, NIV)를 뜻하나 동의적 평행을 고려할 때 상반절의 주어에 해당하는 모든 들짐승을 대표하는 말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접근을 피하는 것이 그 특징인 들짐승에게도 그 필요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끊이지 않는다.

성 경: [시104:12]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 '공중의 새들'은 창 1:30; 2:19에서 자주 언급된 '공중의 모든 새', '공중의 각종 새'를 연상케 한다. 한편, '그 가'란 10절에서'골짜기'로 번역된 '나할림'(*), 곧 잎사귀들이 풍성한 나무들로 가득찬 물이 흐르는 냇가 및 골짜기 양 옆의 '둑 위'를 가리킨다. 지켜주는 파수꾼도 없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도 없는 날짐승까지도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셔서 그것들로 하여금 기쁜 노래까지 부르게 하신다.

성 경: [시104:13]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 3절에서 '누각'(*, 알리오타)은 궁창 위의 물 위에 세워진 것처럼 묘사된 하나님의 처소를 가리키나, 여기서는차라리 '구름들'로 봄이 더 무난하겠다. 시인은 마치 하나님이 구름으로부터 혹은 구름 위로부터 물을 내리시고 계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산'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 위에 구름이 있고 산들에서부터 강줄기가 발전되기 때문이다."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신 11:11, 애굽은 이와는 달리 나일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팔레스틴은 주로 하늘로부터 그리고 땅 속에서 먹을 물을 공급받았다(창자 49:25).

⭕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미프리 마아세카 티스바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땅이 당신의 일의 열매로 만족해하다'(the earth is satisfied with the fruit of the works, KJF)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여기서 '당신의 일의 열매'란 땅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그럴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신 결과 온 땅에 풍성한 결실이 거두어짐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해된다(Kirkpatrick).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동의적 평행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 '당신의 일의 열매'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된다. 이렇게 해석해도 본절 이후 후속절에서 비로 인한 땅의 소산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Briggs, Davies).

성 경: [시104:14]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레호치 레헴민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그가 땅으로부터 떡을 가져오시고'이다. 여기서 '떡'이란 후속절에 나오는 토지의 주요 3대 산물을 총칭하는 바 사람들의 양식을 뜻한다. 이같이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것 같은 양식은 사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인 것이다.

성 경: [시104:15]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 - '기름'(*, 솨멘)은 식용(민 11:8), 약(막 6:13), 향료(전 10:1), 등유(출 25:6), 화장품(룻 3:3)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특히 얼굴을 윤택케 한다고 표현한 것은 기름을 사용한 후의 그 기쁨의 광휘(光輝)가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기자의 시각은 귀한 비로 인한 땅의 만족으로부터 땅의 소산으로 인한 인간의 만족으로 바뀌고 있다.

성 경: [시104:16]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여호와의 나무 - 이것을 '강한 나무' 혹은 '태고 원시림의 나무'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Kissane) 인간의 보살핌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야생 수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즉, 인간의 경작 및 관리하에 있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따위와는 대비를 이루는 산야(山野)에서 자생하는 나무들로 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적절한 견해인 근거는 하반절이 그 나무를 산야에서 자생하는 백향목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인역(LXX)은 '평지의 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시104:17]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 여기서 '학'(*, 하시다)은 '경건한(애정있는) 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문맥상 보통 새보다 몸통이 큰 새라는 면에 그 강조점이 있다. 반면 12절과 본문의 '새들'이란 나뭇가지 위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몸집이 작은 새이다(Alexander, Perowne). 그리고 '잣나무'로 번역된 '로쉼'(*)은 레바논에서 서식하는 노간주나무의 일종이거나 가나안이 원산지인 전나무일 것이다(IDB). 요컨대 본 구절은 하나님이 주신 비를 받아 잘 자란 수목 속에서 그 보금자리를 두고 사는 크고 작은 새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 경: [시104:18]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바위(*, 셀라임 마하세) - 여기서 '슬라임'은 '울퉁불퉁한 바위' 혹은 상징적으로 '요새'를 뜻하며, '마하세'는 '피난처'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바위'는 험한 바위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나무들이 새들이 깃드는 안식처이듯이 험준한 바위산은 야생 들짐승들이 안전히 쉴 수 있는 안식처라 할 수 있겠다(the crags are a refuge for the coneys, NIV).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실 뿐 아니라 처소도 마련하신다.

⭕ 너구리(*, 솨파님) - 바위 너구리(coneys, NIV), 오소리(badgers,RSV)등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히 어떤 짐승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되새김질하는 네발 달린 짐승인 것은 분명하다.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레 11:5; 신 14:7 등이 그 증거이다.

성 경: [시104:19]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 기자는 제 4일째의 창조 사역을 언급함에 있어서 밤을 주관하는 달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있어서 밤은 낮에 선행(先行)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의 저녁과 아침의 서술 배열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러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등). 뿐만 아니라 본 시편 후반부에서도 먼저 밤의 광경이 서술되고(20, 21절), 후에 낮의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22, 23절). 한편 여기서의 '절기'를 문자 그대로 거룩한 절기, 혹은 대축제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그 근거는 외경인 시락서 (the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 43:7에 두고 있다 : '달로부터 절기들의 신호를 찾노라.' 그러나 이곳 외에 동일한 암시를 주는 곳은 없다. 따라서 '절기'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절기 대축제일로 못박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75:2에서는 동일 용어가 '정한 기약'(특정한 때) 정도로만 번역되어 있다.

⭕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 석양에 대한 본 언급은 후속절에서 이어질 밤의 광경에 대한 묘사의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고 있다(욥 38:12; 렘 8:7).

성 경: [시104:20]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기어 나오나이다 - 이에 해당하는 '라마스'(*)는 파충류나 어류의 움직임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창 1:21과 69:34의 동사형 그리고 25절의 명사형 '움직이는 것'(개역 성경에는 '생물'로 번역됨) 등도 바다 속의 피조물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창 1:24, 25의 명사형은 땅위의 '기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숲속의 짐승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먹이를 찾거나 쫓기 위하여 짐승들이 살금살금 움직이는 모습이나 창 7:21의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에서와 같이 기타 여러 종류의 동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성 경: [시104:21]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젊은 사자 - 이를 모든 들짐승의 대표로 해석하는 견해(Anderson)와 독자의 시선을 끌 만치 잘 알려진 짐승으로 해석하는 견해(Barnes)가 있는데 그 어떤 견해를 취해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핵심은 숲속의 들짐승들도 그 생명 보존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린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성 경: [시104:22]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물러가서 그 굴혈(窟穴)에 눕고 - 여기서 '물러가서'는 '예아세푼'(*)으로서 직역하면 '그들 스스로 함께 모여'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단순히 본능으로만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게 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즉, 밤새 먹이를 찾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던 짐승들이 인솔자를 앞세우기나 한 듯 한 무리를 지어 안식처인 동굴 따위로 가서 가지런히 눕는 모습에서 우리는 저급한 동물의 본능이 아니라 자상한 하나님의 섭리, 간섭을 진하게 느끼게 되는것이다.

성 경: [시104:23]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 -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하여 밤새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제 빛이 있는 하루 온종일 짐승들과는 대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 연결되고 있다. 땅 위의 피조물들은 밤과 낮 할 것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의 전존재를 의탁할 뿐 아니라 노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성 경: [시104:24]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여호와의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모든 피조물의 왕관 격인 인간에 대한 언급을 하고 나서 창조 사역 제 6일째 후의 안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기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다양성과 오묘함의 놀라운 경지를 토로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해온 천지 창조에 대한 묘사를 잠시 쉬고 있다. 즉, 기자는 본절을 기점으로 하여 지금까지 계속해온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 대한 기술로부터 그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신 그분에 대한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있다.

⭕ 부요(*, 킨야네카)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소유물'이다. 이것은'피조물'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your creatures, NIV).

성 경: [시104:25]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대소 생물이 무수(無數)하니이다 - 여기서 '무수하다'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innumerable, KJV; beyond number, NIV). 기자는 하나님의 피조세계 중에는 그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곧 알 수 없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바다는 땅에 비해 매우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로 인식되었다(Anderson). 깊고 낮은 해연(海淵)들, 고래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산호들이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바닷속, 인간은 그 깊은 심연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성 경: [시104:26]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악어(*, 리웨야탄) - 우가릿 문학에서는 바알의 원수로 알려진 동물이며,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용'으로 번역하고 있고, 몇몇 영역본들은 리워야단(the leviathan, KJV, NIV, RSV) 또는 고래(the whale)로 번역하였다. 그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몸집이 거대한 '미지의 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동물도 분명히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74:14).

성 경: [시104:27]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이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바라나이다(*, 사바르) - 아랍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본 용어는 일용할 양식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145:15의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성 경: [시104:28]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취하며(*, 일르코툰) - 직역하면 '모으며'이다. 이 용어는 원래 돌멩이, 꽃, 이삭, 포도, 나무 따위를 '땅바닥으로부터 집어든다'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짐승이 먹을 양식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 만나의 수확에 대한 암시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Hengstenberg) 그 근거가 전혀 없다.

성 경: [시104:29]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 문자적으로는 주시하던 방향으로부터 시선을 전환시킨다는 뜻이나, 문맥상의 의미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이 중단됨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분노 혹은 불쾌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22:24; 102:2; 신 31:17, 18; 사 64:7 등).

⭕ 저희가 떨고 - 원문상 동일한 표현을 30:7에서 볼 수 있다 :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이외에 욥 23:15을 참조하라).

⭕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 '호흡'의 그 문자적인 뜻은 '영' 혹은 '생명의 호흡'(창 2:7)이다. '영'은 하나님께로 왔으니 결국 그분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전12:7). 육체 또한 생명의 호흡으로 말미암는 생기가 없을때 맨 처음 왔던 곳인 티끌로 돌아가기 마련이다(146:4; 창 3:19). 한편, '호흡을 취하신즉'은 '토세프 루함'(*)인데 이와 유사한 구절이 노아 홍수 기사에 나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창 6:17; 7:22) 본절과 노아 홍수 사건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성 경: [시104:30]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하나님의 만물 창조와 통치 사역]

⭕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 본 구절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사를 적고있는 창 2:7에만 국한된 지엽적인 언급이 아니라 전체 창조에 있어서 위대한 생기 부여자로서의 성령을 묘사하고 있는 창 1:2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생명 주입의 보편적 사역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문맥은 생명체의 소멸을, 그리고 후 문맥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명체를 땅 위에 두시어 정한 기한까지 기식하며 살게 하시고 그 생명을 거두시고 또 다른 생명을 땅 위에 두시고 다시 거두시는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들로 지면에 존속케 하신다. 세대에서 세대에로의 새로운 전환을 거듭함으로 땅은 새로움과 신선함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성 경: [시104:31]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찬양에의 서원과 확산]

⭕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 '영광'은 여호와의 현현(顯現)의 묘사로 흔히 사용된다(출 16:7, 10; 24:16, 17; 40:34, 35). 말하자면 그의 임재의 현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다. 특히 본 문맥에서 저자는 창조사역 때 드러났던 하나님 임재의 영광이 영원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 임재의 영광의 영원성을 바라보는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바는 순종이다. 결국 기자는 피조물의 복종, 순종을 끌어내기 위하여 임재 영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자기 생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 이것은 창조 사역을 마친 후 그 피조된 세계를 보고 선포하신 말씀인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를 연상시킨다.

성 경: [시104:32]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찬양에의 서원과 확신]

계속해서 기자는 그의 영광 중의 엄위로우신 하나님께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가 한번 쳐다보면 땅은 떨 것이며 그가 한번 손을 대면 산들은 타버릴 것이며 그가 원하시면 이 순간에 그가 만든 피조 세계는(無)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여호와의 능력, 그의 피조 세계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을 암시한다.

성 경: [시104:33]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찬양에의 서원과 확신]

⭕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 '나의 평생'이란 육(肉)을 입고 있는 동안, 곧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를 뜻한다. 본문과 같은 표현은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115:17, 이외에 6:5을 참조하라)라고 하는 당시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한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주어진 시한 동안만이라도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기자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속에서 그의 기쁨을 발견하시고 역으로 사유가 가능한 피조물, 곧 인간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깝고 고상한 창조의 조화이다.

성 경: [시104:34]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찬양에의 서원과 확신]

⭕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예에라브 알라이우시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묵상이 그에게 달기를(즐겁기를)', 혹은 '그에 관한나의 묵상이 달기를'로 볼 수 있는데, '여호와 앞에서 내가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분명히 견지하고 있는 하반절과의 동의적 평행을 중시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그에 관한 나의 묵상이 달기를'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사역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기쁨을 발견하기 원한다는 말이다. 참 경건한 자의 성품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단 규칙적인 시간을 정했으면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아무리 바쁜 일과 속에서도 그 시간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진정한 기쁨,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죄인은 그렇지 않다. 묵상의 시간도 없고 그분을 기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사 30;11).

성 경: [시104:35]

주제1: [창조와 보존의 하나님]

주제2: [찬양에의 서원과 확신]

⭕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 진정한 의미의 가장 고상한 창조의 조화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시고 사유 가능한 그의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조화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마치 전파 방해로 인하여 채널의 주파수를 맞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죄가 세계에 무질서 불협화음을 가져온 것이다. 죄는 질서(cosmos)를 무질서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있던 기자는 이제 선지적 소망을 가지고 죄인은 소멸되고 말 것이며 그리고 죄인이 없으므로 이 땅은 정결하게 되고 그 조화가 다시 회복될 것을,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한번 더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선포하실 때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 속에서 기자는 자신의 영혼이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여호와를 기리며 찬양할 것을 권하면서 본 시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성 경: [시105:1]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여호와께 감사하며 - 78편, 106편과 함께 본 시편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그 민족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경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세 편의 시편들은 동일 주제를 지향하지만 그 주제를 지향하는 의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78편은 교훈적이다. 즉, 그 의도는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는 것인데 가르쳐 현재를 위한 경고를 삼기 위하여 과거를 회상한다. 106편은 참회적 고백을 의도하고 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주로 죄악의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반면, 본 시편은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적절한 주제인 바 미래의 순종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토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여명기에 그 민족을 위해 행하신 여호와의 능력의 역사를 진술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는 특히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 본 표현은 그 다양한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애가(哀歌)의 문맥의 경우는 고통자가 구원을 바라며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되겠고(116:4), 찬양시의 경우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며 즐거워하는 것이 되겠다(104:35, Anderson). 아무튼 본절 전체는 사 12:4과 유사하다.

성 경: [시105:2]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그를 찬양하며(*, 잠루로) - '자마르'(*)의 본래 의미는 악기의 현 따위를 '만지다', '연주하다'이며 여기서는 '어떤 일정한 리듬을 동반해서 노래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핵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그저 노래할것이 아니라 일정한 음악적 정형을 갖추고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노래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엄위로운, 인간과는 구별된 신(神)이시기 때문에 찬양에도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 바침이 마땅하다.

성 경: [시105:3]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그 성호를 자랑하라(*, 히트할루 베쉠 코드쇼) -문자적인 뜻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이다. 요점은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점을 좀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 찬양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그분이 택하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이름이란 곧 여호와 자신이요(Anderson).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다름아니다(Davies). (2) 찬양과 기뻐함의 주제는 그의 마음이 거룩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빛이 빛을 좋아하듯이 거룩함을 지향하는 자만이 그 사실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 위에 하나님만큼 완전히 거룩한 자는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거룩해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성 경: [시105:4]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디르슈 예화 웨우조)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와 그의 힘을 구하라'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구한다는것은 그의 전능한 힘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새로운 힘을 얻게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때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의 의역,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하면 강해지리라'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 줄거리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났던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문맥은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초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본구절은 '강하신 여호와...'로 의역함이 더 타당하겠다.

성 경: [시105:5,6]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아브라함의 후손 - 대상 16:12, 13에는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언약의 시조라는 면에 강조점이 있고, 역대상의 경우는 언약의 후손들이라는 면이 강조되어 있다. 시편에서는 47:9외에 본 시편 9, 42절에서만 '아브라함'이란 호칭을 볼수 있다.

⭕ 택하신 야곱의 자손(*, 베네 야아코브 베히라)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들로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이며, 언약과 약속들의 상속자들인 야곱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 조부(祖父)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듯이 말이다(8절).

⭕ 그 입의 판단 -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바로와 그 백성 위에 내린 징벌을 암시하는 것 같다(14절; 출 6:6; 7:4; 12:12).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사건을 비롯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했던 바로의 군병들을 물 속에 수장시키심으로써, 모세를 통해 실행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해방을 무시한 애굽을 징벌하셨다. 본문 앞에 언급된 '기사'와 '이적'은 이와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동일한 의미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의 애굽 징벌 종류의 다양성 및 강조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 같다.

성 경: [시105:7]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권면]

⭕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 여기서 '우리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헤누(*)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품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본절로부터 본 시편의 끝절까지 계속되는 찬양의 핵심은,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언약의 수여자로 언급하신 사실은 출20:2에도 나타난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 '판다'의 히브리어 '쉐페트'(*)는 일반적으로 '재판', '판결'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에 따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 나라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 경: [시105:8]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천 대에 명하신 말씀 -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신 7:9)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의 '천 대'는 한계가 없는 기한 곧 '영원'을 뜻한다. '명하신'은 '치와'(*)로서 동일한 단어가 민 27:19에도 나오는데 그곳에는 '세우다'로 되어있다. 이러한 용례는 10절의 '세우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결국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받아 지켜서 그것을 든든히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 기억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카르'(*)로서 본 문맥에서는 그 세우신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다. 즉, '자카르'는 한번 맺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이다(74:2; 79:8). 한편, 본 용어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도 언약에 대하여 신실할 것을 명령하는 대목에서도 사용된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대상 16:15)

성 경: [시105:9]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아쉐르 카라트 에트아브라함) - 직역하면 '그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잘랐던 그것'이다. 문자적으로 '언약'이라는 말이 원문에 없으나 본 구절 자체에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카라트'(*)는 고대에 언약 체결 당시 언약 쌍방이 그 사이로 지나갔던 두 부분으로 '자른' 짐승을 연상시키는 표현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국가에서는 일정의 계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잡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쌍방이 그 자른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그 행위 속에는 만일 체결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잘라진 양편의 고깃덩이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렘 34:18-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실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다(창 15:9,10). 그러나 일반의 경우와 달리 아브라함은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사이를 통과하신 것이다. 성경은 타는 횃불이 그사이를 지나갔다고 하였는데 이 횃불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창 15:17).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택한 후손에게 계속 전승될 약속은 자신의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그 의식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것이다. 물론 본 의식(儀式)을 통하여 우리는 먼 훗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그리스도,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생명을 걸어가면서까지 하신 약속, 그 약속을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삭에게 하신 맹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카라트'(*)로 표현 했던 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쉐부아트'(*)로 표기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에 주었던 약속에 대한 확증이라는 측면에 그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창 22:16;26:3). 대(代)를 이어 전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약속한 땅, 가나안의 수여가 그 핵심이다.

성 경: [시105:10]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크'(*)인데 주로 복수형인 '후킴'(*)이 자주 쓰인다(119:5등). 율법의 외형적 성격을 암시할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한번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문자화된 형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다(18:22; 147:19). 여기서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등에게 이미 주었었기 때문에 이제는 글로 써서 종이에 간직한 바 된 듯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 이스라엘에게 하신 - 얍복 강 씨름 사건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되는데(창 32:24-32)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단순한 개명(改名)을 뜻하지 않고 한 국가의 탄생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야곱이 한 국가의 시조가 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 국가의 구성원은 야곱의 아들들을 근간으로 형성되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한 개인 야곱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따라서 야곱에게 준 약속은 곧 이스라엘에 주신 약속이기도 하다.

성 경: [시105:11]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너희 기업의 지경 - 여기서 '지경'은 '헤벧'(*)로서 그 문자적인 뜻이 '줄', '로우프', '길이를 측정하는 자'등이다. 본절에서는 어떤 대상, 곧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기 위한 그 크기가 분명히 정해진 일정의 토지를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시105:12]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매우 영성(零星)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 '매우 영성하며'는 '키므아트'(*)인데 '한 웅큼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풀어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숫자가 매우 적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관계로 당시 이스라엘은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는 나그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시105:13]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족속...민족 - 전자는 '고이'(*), 후자는 '암'(*)인데 전자는 주로 동일한 기원을 갖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련의 공동체를 뜻하고 후자는 한 정부 아래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성 경: [시105:14]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 여기서 '열왕'이란 애굽의 바로(창 12:17), 그랄의 왕 아비멜렉(창 20:2) 등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5:15]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나의 기름 부은 자(*, 마쉬아흐) - 문자적인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 혹은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케 한 자'이다. 기자는 특정인에게 기름을 실제적으로 부은 적이 없었던 족장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다윗시대와 같은 왕국 시대에서나 왕,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었었다(왕상19:16).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께서 족장,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같은 이를 선지자로 부르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참선지자, 특별히 구별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창 20:7). 나의 선지자(*, 네비아) - '나의 선지자들'이란 뜻이다. 족장들 중에 실제로 '선지자'로 칭함 받은 자는 아브라함뿐이다(창 20:7).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과 야곱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은 자들이요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했던 자들이라른 점에서 선지자로 지칭되고 있는 듯하다(Alexander). 한편,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는 아카드어 '나부'('부르다', '지명하다'란 뜻) 혹은 아랍어 '나바아'('선포하다', '언급하다'는 뜻)와도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Anderson).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대변자'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된다. 한편, 늦은 시기에 있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령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에 있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 그같은 공적(公的) 기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노아 같은 사람은 '의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의 가족(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을 가르쳤던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창 18:19에 의하면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말, 환상, 꿈 혹은 내적 음성을 수단으로 대화하였던 상대였다(민 12:6-8).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족장들을 선지자들로 묘사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근접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냐"(창 18:17). 뿐만 아니라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준 맹세에서도 동일한 근접을 찾아볼 수 있다(창18:22-33). 이 두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선지자'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뜻의) 중개자'라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의 친구'란 호칭도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성 경: [시105:16]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그가 또 기근을 불러 - 여기서의 '불러'의 원형은 '카라'(*)인데 문자적인 뜻은 '소환하다', '청하다'이며 그 화자(話者)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절로부터 38절까지에는 그 약속의 성취 한 단계 한 단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다.

성 경: [시105:17]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팔렸도다 - 요셉이 종으로 팔린 기사를 아비의 편애에 의한 형제간의 갈등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단서가되는 구절이다. 그 기사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이라는 점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 경: [시105:18]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그 발이 착고(着錮)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 본 기사를 싣고 있는 창 39:20-23보다 더 혹독하게 요셉의 투옥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이 전옥(典獄)에게 신임을 얻기 전 투옥 초기 때의 모습이거나 전체 투옥 시절에 대한 강한 시적인 묘사로 추측되어진다.

성 경: [시105:19]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여호와의 말씀(*, 데바로) - '그의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란 (1) 요셉으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던 꿈의 해석, 곧 투옥 중이던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한 것(창 40:5-15 : 41:12)을 뜻하거나, (2) 요셉의 꿈을 통해 예언되었고 훗날 요셉의 영화(榮華)를 통하여 성취되었던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창 37:5-11)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문맥을 중시할때 전자가 옳다 하겠다. 그 자신이 꿈들을 해석하기 전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본 구절의 강조점이다.

⭕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임라트 예화체라파트후) - 70인역(LXX)이 '주의 말씀'으로 번역하고 있는 '임라트 예화'(*)는 상반절의 '그의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꿈 해석이 아니라 요셉의 꿈들을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었던 그의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창 37:5-11)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약속'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하나님의 말씀 '임라트'(*)는 살아있는 실제적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119:50). 이 사실은 약속과 그 성취 사이 기간인 요셉의 고통과 투옥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시험하심을 통하여 진리임이 입증되었다.

성 경: [시105:20]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열방의 통치자(*, 모쉘 얌밈) - 직역하면 '민족들의 통치자'이다. 이것은 요셉을 옥에서 자유케 하였던 애굽 왕 바로는 애굽의 왕(창 41:14, 39,40, 44)이었을 뿐 아니라 타민족까지 지배하였음을 암시한다. 당시 바로는 조공을 바치는 많은 나라들의 왕이었다.

성 경: [시105:21]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그 집의 주관자 - 요셉은 애굽의 국가 제반 사무를 책임진 국무총리가 되었다(창41:41). 이 같은 관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었다(왕상 16:9; 18:3; 왕하18:18, 37). 이 신분에 있던 자를 흔히 '집의 주관자' 혹은 '궁전의 주인'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성 경: [시105:22]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임의(*, 나프쇼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영혼'으로 여기서는 요셉의 정신 작용에 의하여 외부로 표출되는 그의 말, 명령등을 가리킨다(창 41:40).

⭕ 제어하며(*, 레소르) - 문자적인 뜻은 '묶으며'이다. 영역본들은 '묶다'(bind, KJV), '훈육(징계)하다'(discipline, NIV), '투옥하다'(imprison, LB), '교훈(지시)하다'(instruct, RSV)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을 종합해 볼 때 여기서는 '통제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 이 통제 능력은 권위의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상과 벌을 결정하는 권위가 본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Phillips). 요셉의 통제력은 창 41:40, 44에 잘 드러나 있다.

⭕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정치론 따위를 강의하였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가 요셉의 7년 흉년 대책을 듣고 감동하였던 기사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 39).

성 경: [시105:23]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전 상황]

⭕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 성경은 애굽 땅을 흔히 함 땅으로 부르고 있는데(78:51;106:22등) 그 이유는 애굽의 시조가 함이기 때문이다(창 10:6).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임시적으로 살 거처로 가기 위하여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성 경: [시105:24]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본절부터 38절까지는 출애굽기 처음 열두 장들에 나타난 역사, 특히 재앙들이 내려진 역사의 요약이다(출 1:7; 신 26:5과 비교하라). 여기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재앙은 함께 생략되어 있고 흑암의 재앙이 처음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엄밀한 순서에 따라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만을 충실히 전달하고자 시적인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5:25]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미워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미워하도록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애굽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애굽인의 증오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놓고 학자들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그 증오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로 번역하고 '하나님'이라는 주어는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갈대아역, 아랍역).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수의 증가로 야기된 그 대적들의 증오심의 발동을 하나님이 괴로워하셨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Grotius). 그러나 출애굽 기사 중의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식의 본 구절과 동일한 의미의 구절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이 난제로 대두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증오나 죄의 원인자인듯이 묘사되고 있다(사 6:9, 10; 막 4:12; 요 12:39, 40; 롬 11:8).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분이 죄의 원인자이신 듯 묘사하는 곳이 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조직 신학적 용어가 바로 '허용적 간과'이다.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의 구원 역사 속에서 죄의 작동을 허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본 난제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출애굽 기사 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생겨난 애굽인의 증오를 간과하심으로써 그분 중심적인 출애굽 사건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레히트나켈) - 문자적인 뜻은 '세밀하게 의논하였다'이다. 문맥적으로 이스라엘의 증가를 보고 염려한 애굽인의 의논임을 생각할 때 '세밀하게 음모를 꾸몄다'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겠다. 이것은 출 1:10에 기록된 애굽인의 음모를 연상케 한다. "오라 우리가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자"(원문 직역). 애굽인이 꾸민 이스라엘의 증가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죽이는 것이었다(출 1:15, 16).

성 경: [시105:26]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모세...아론 - 시편에서 이 '모세'라는 호칭이 나오는 곳은 77:20; 103:7; 106:16,23, 32 그리고 90편 표제 등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웠고(출 14:31) 아론은 '택하신 자'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종'과 '택하신 자'는 5, 6절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을 위한 도구 역활을 담당했다(VanGemeren).

성 경: [시105:27]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사무 밤 디브레 오토타)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그들 중에 그의 표적의 말들을 놓았다'이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대언자, 곧 선지자임을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 사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말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을 전하고 그분의 이적을 대행했을 뿐이다. 한편, 여기서 두 번째로 나오는 '그들'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 및 그 신하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뿐아니라 바로의 궁(宮)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였다(출 4:28, 30;7:9, 10).

성 경: [시105:28]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 아홉번째 재앙(출 10:21-29)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어떤 학자는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처음 재앙부터 마지막 재앙 때까지 애굽은 흑암에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본구절이 암시한다고 해석한다(Hengstenberg). 한편, 출애굽 재앙 기사와 본 시편 재앙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는 십계명 기사와 주님이 인용한 십계명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마 19:18, 19; 막 10:19; 눅 18:20).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본시편 기자는 기사 내용의 순서보다는 그 전체 내용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 개역 성경이 생략한 주어 부분 '마루'(*)를 넣어 재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지않았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Theyfollowed his instruction and..., LB). 70인역(LXX), 시리아역, 아랍역, 에디오피아역 등은 '않았다'로 번역된 부정사를 생략하여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는데(they rebelled against his words, RSV). 이 경우라면 '그들'은 애굽인들이 되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맛소라 원본(M.T.)과 배치되는 견해이다. 따라서 취할 수 없다. 본절이 모세와 아론의 순종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의 사역 초기 곧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그리고 그의 사역 후기 바위에서 물을 내었을 때 각각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사실과 대비를 시키기 위함인것 같다.(출 4:10,11; 민 20:24; 27:14 등).

성 경: [시105:29]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 첫번째 재앙을 말한다(출 7:14-25).

성 경: [시105:30]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개구리가 번성하여 - 두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8:1-15).

⭕ 왕의 궁실(*, 베하드레 말케이헴) - 직역하면 '그들 통치자들의 방들에'이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이 표현은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 고관들의 처소를 가리킨다. 왕의 처소뿐 아니라 그 신하들의 처소에도 개구리가 들끓었다.

성 경: [시105:31]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파리 떼가 오며 - 출 8:20-24에 나오는 네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

⭕ 이가 생겼도다 - 출 8:16-19에 나오는 세 번째 재앙을 가리키는데 '이'란 '키님'(*)으로 오늘날의 '모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본절에서도 출애굽기에서와 달리 셋째 재앙과 넷째 재앙이 그 순서가 바뀐 채 언급되고 있다.

성 경: [시105:32]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우박...화염(火焰) - 이는 일곱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9:22-26). 여기서 '화염'은 원어로 '에쉬 레하보트'(*)로서 '불타는 불'인데 이것은 천둥이 칠 때 동반되는 뇌성을 가리킨다(출 9:23).

성 경: [시105:33]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포도나무...무화과나무 - 하늘에서 우박과 벼락이 내릴 때 애굽의 대표적 나무였던 이 두 나무를 비롯한 모든 수목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성 경: [시105:34]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황충...메뚜기 - 히브리어로 각각 '아르베'(*), '옐레크'(*)이다. 여덟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출 10:1-20에는 전자인 '아르베'만 나오지만여기서는 '옐레크'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메뚜기의 일종인데 날개가 달렸다는특징이 있다(나 3:16).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인 78:46에서는 또 다른 용어 '하실'(*)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다른 용어로 메뚜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여덟 번째 재앙 때 나타났던 메뚜기는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 최소한 세 종류는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시105:35]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의 열매를 먹었도다 - 여러 종류의 메뚜기들은 우박으로 망가져 버리지 않은 채 남아있던 식물들을 갉아먹어 버림으로 황폐화의 정도를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성 경: [시105:36]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은 생략되고 재앙 기사는 마지막 재앙으로 끝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78:51과 거의 유사하다.

성 경: [시105:37]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 이것은 출 12:35과 관계 있는 표현이다. 출 12:35 번역에 있어서 주요 영역본인 KJV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은금을 비롯하여 의복까지를 애굽으로부터 '빌린'(borrowed)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옳은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개념에 있어서 빌린다는 것은 다시 갚는 것을 전제로하는 것인데 애굽에서 나온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가지고 나온 것을 다시 갚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게 사기를 친것이 되기 때문이다. KJV가 '빌린'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솨알'(*)인데 사실 본 용어가 '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성경에 있기는 하다(출 22:14; 왕하 4:3 등). 그러나 여기서는 '구하다', '요구하다'등의 의미로 번역됨이 더 무난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구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NIV, RSV 혹은 개역 성경 등은 바람직하다. 이스라엘은 빌리지 않고 당당히 달라고 요구하여 당시에 귀히 쓰는 은, 금 등을 받아 애굽을 나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본 구절의 핵심이다. 은금은 고대에도 주요 귀중 금속이었다. 이 둘은 장식용으로, 보물로 그리고 상거래의 저당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은은 금보다 귀하였다. 그래서 여기서도 은이 금보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 원기, 활력을 묘사하는 사 5:27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약한 자'란 '코쉘'(*)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다리를 저는 자'이지만 '보행에 불편을 심하게 느끼는 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본문은 여호와의 완벽하신 인도하에 출애굽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하겠다(신 8:4).

성 경: [시105:38]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 애굽은 많은 재앙들로 큰 고통을 받았으며 그 땅도 거의 황폐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심한 재앙이 내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떠난다고 하자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구한 귀중한 물건 은, 금까지도 기꺼이 주어가며 이스라엘이 떠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아니라 그들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성 경: [시105:39]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 여기서 '구름'은 출 14:19의 경우와 같은 대적들로부터의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태양 광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를 보호함이 그목적이다(Barnes). 물론 78:14; 출 13:21의 경우, 구름은 이스라엘의 안내자로도 나타나고 있다.

⭕ 불로 밝히셨으며 - 밤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함이다(출 13:21).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메타포(metaphor)는 활화산의 관측으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으나 인정할 수 없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실제적이지 않은 현상 묘사의 소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가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105:40]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개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메추라기로' 앞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그가'가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기자는 선행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하는 소리를 생략한 채 여호와께서 주도적으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리셨던 사실을 강조적으로 적고 있다. 하늘 양식은 만나를 가리키는데 78:25의 경우는 이것을 '권세 있는 자(천사)의 떡'으로 부르고 있다.

성 경: [시105:41]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생존케 하시기 위하여 베푼 이적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데스(민 20:2-13)와 르비딤(출 17:1-7)에서 행하신,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신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 속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소고(小考)해 볼 필요가 있다. 반석-물이라는 주제는 특히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78:15, 16, 20과 본절 및 42절에 근거해 보면 이 두 시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원 역사를 서술하여 그분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두 기자는 공통적으로 민 20:2-13과 출 17:1-7의 주제를 발전시켜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해 강같이 흘러 넘치는 풍부한 물을 내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살리시며 그들을 만족케 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시편 기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42절). 한편, 사 43:14-21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루실 크신 구원의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일을 가리켜 '새 일'(사 43:19)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에 비교가 되는 '옛적 일'(이전 일)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신다. 이 같은 '새 일', 즉 새로운 구원 사역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은 바로 본절에 나타난 '반석과 물' 주제를 크게 확대시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할 것임이라"(사 43:19, 20). 이 말씀 안에 '반석'이란 단어는 그대로 나타나진 않지만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 사역인 출애굽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물들을 내시겠다'는 표현은 본절의 주제와 격리 시킬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문맥은 사 48:17-22이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평강'과 '바위에서 나온 물'을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면서 야곱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사야서의 두 문맥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바는 둘 다 과거의 출애굽 사건보다 월등히 탁월한 구원 사역, 즉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서는 내다보시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가져올 무한한 축복을 '반석과 물'이라는 주제를 발전시켜 나타내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전 10:4의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는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요컨대 본절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을 먹은 사건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으나 더 멀리는 진정한 음료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구절이다.

성 경: [시105:42]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약속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 출애굽 사건 역시 그 약속 성취의 일부이다(출 2:24; 신 7:8). 39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서는 애굽으로부터의 출발과 약속된 땅으로의 입성(入城) 사이의 기간을 요약하는 광야에서의 주요한 세 가지 기적들을 다룬 후, 그 기적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첨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제인 홍해 도하(渡河)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 경: [시105:43]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그 백성으로 즐거이...노래하며 - 42절 주석에서 39-42절에서는 광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적 중의 하나인 홍해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후에 부른 승리의 노래(출 14:26-15:21)를 암시하는 구절이 바로 본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면 본 구절은 주의 재림 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을 예언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35:10). 후자를 취할 경우 본 시편이 저변에 깔고 있는 시대와 본절이 암시하는 시대는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후자보다는 전자가 적절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성 경: [시105:44]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열방의 땅 - 본 시편 전체의 문맥을 중시할 때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8:55; 신 6:10).

⭕ 민족들의 수고한 것 - 이것은 가나안 민족이 수고하여 일구어 놓은 경작지뿐 아니라 그들이 세운 도시들, 그들이 소유하였던 귀중품까지도 말한다.

성 경: [시105:45]

주제1: [신실한 역사의 주관자]

주제2: [출애굽 이후 상황]

⭕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 42-45절의 결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따라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셨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유 속에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세상을 대표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여 결국은 온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삼으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의중이 담겨 있다.

성 경: [시106: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 할렐루야 - 본 시편은 그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으므로 소위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리고 있는 일련의 시편들, 곧 111-113편, 117편, 135편, 146-150편들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하겠다.

⭕ 여호와께 감사하라 -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자주 사용되었으며(렘 33:10, 11), 그외의 여러 곳에서도 흔히 사용되고 있는 예배 의식적 문구이다(107:1; 118:1; 136:1;수 3:11 등). 한편, 대상 16:34이 본 구절을 인용하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타당성은 희박하다.

⭕ 그는 선하시며 - '선하시며'의 원어는 '토브'(*)인데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하나님이 정하신 실제적, 도덕적 혹은 신앙적 기준에 일치하는 대상에게 적용된다(Hempel). 뿐만 아니라 총체적 의미의 하나님의 품성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관심과 관여를 암시한다.

성 경: [시106: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 뉘 능히...전파하며(*, 미예말렐) - 직역하며 '누가...을 말하겠는가?'이다. 이 수사학적 의문은 아무도 여호와를 적절히 찬양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동일한 의문법이 창 21:7; 욥 8:2; 33:3 등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것을 여호와께 대한 찬양을 아무도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역으로 그만큼 하나님은 큰 찬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사실의 암시로 해석해야 한다.

⭕ 능하신 사적(*, 게부로트) - 단수형은 '게부라'(*)로서 여호와의 능력(21:13; 54:1; 65:6) 혹은 인간이나(잠 8:14) 짐승들(147:10; 욥39:19)의 힘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주로 하나님의 강한 역사, 특히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의미한다(20:6; 71:16; 145:4, 12; 150:2).

⭕ 영예 - 하나님이 가시화하신 그래서 인간들의 찬양이 요구되는 그의 모든 영광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6: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 공의를 지키는 자들(*, 쉬므레이 미쉬파트) - 문자적인 의미는 '정의(공정)를 수호하는 자'이다. 말하자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본받아 범사에 공의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자들을 가리킨다(15:2). 여호와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공의를 지키도록 기대하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존재 원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15:1-5; 99:4; 사 11:3-5; 33:15-17, VanGemeren).

⭕ 복이 있도다(*, 아쉬레) - 이것은 주로 한 인간이나 단체의 바른 행실을 치하할 때, 혹은 그것을 장려할 목적으로 권고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그 사용 목적이 다르다. 기자는 의로움의 치하나 단순한 권고를 위하여 본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선하심이 구체적으로 현시(顯示)되었음을 먼저 인정한 후(1, 2절), 그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백성들이 누릴 특권을 구하기에(4절 이하) 앞서 그 같은 특권을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은 선민(選民)으로서 올바른 행위를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역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본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6: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 이것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공동체를 위하여 행하셨던 역사를 목도한 경험을 묵상하고 참행복과 평안은 참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기자가 외치는 일종의 경건한 절규이다. '권고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visit, KJV). 이는 곧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임재를 바라는 말인 것이다. 한편, 본절과 5절은 아주 독특하게 '테카'(*)라는 동일 접미사로 끝나고 있다.

성 경: [시106: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권고]

⭕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구원을 베푸신다면 자신도 택하신 자가 누리는 동일한 은총과 행복을 소유하고 기뻐하겠다는 뜻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행복과 형통을 사모하는 마음은 참경건한 자만이 갖는 특성이다.

⭕ 주의 나라(*, 고예카) - 원형은 '고이'(*)이다. 복수형인'고임'(*)으로 쓰이면 대체로 '이방 나라들'을 뜻하는 본 용어는, 단수형으로 사용되면 때때로 이스라엘을 뜻하는데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있다. '고이'가 이스라엘 혹은 유다에 적용되면 그 경우에는 반드시 그 민족의 죄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Oesterley),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단적인 예로서, 출 19:6 그리고 본절 같은 경우, '고이'는 이스라엘의 죄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레히트할렐임 나할라테카) - 이는 '당신의 기업으로 자랑하게 하소서'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이 기억하고 구원 하시면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영광에 자신도 참예할 수 있다는것이다. 여기서 '기업'으로 번역된 '나할라테카'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말하자면 기자는 다른 영예, 영광, 구별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영예, 영광, 구별됨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부귀, 영화 따위의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영광'을 기자는 갈망하고 있다.

성 경: [시106: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 여기서 '열조'란 '애굽에서 살던 조상들'(7절)뿐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살던 조상들'까지도 의미한다(34-36절). 그러나 넓게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 기자는 자기와 동(同)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 조상들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범죄하여'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 나타나는 세 동사를 비롯한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왕상 8:47의 솔로몬의 기도의 일부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여기서 '지었나이다'로 번역된 '히르솨누'(*)가 대체로 후대 문서, 즉 포로 후 시대 문서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포로 후 시대로 본다.

성 경: [시106: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아보테누 베미츠라임)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뒤에 나오는 문장과 별도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문상 '베미츠라임' 뒤에 아래 위로 내려쳐진 선이 있는데 이 선 앞에 있는 단어는 뒤에 이어지는 문장 전체에 영향력을 미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미츠라임'(*)은 본절 문장 전체와 연관이 있다. 말하자면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한 것뿐 아니라 많은 인자를 그 조상들이 기억 못한 것은 '베미츠라임'(*) 곧 애굽에서의 일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사'는 애굽에서 일어났었던 하나님의 기사를 말하는데 그 기사의 발생으로 인한 충격 및 감격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 감격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마음에서 곧 사라져버렸다. 그 감격은 그들이 홍해 바닷가에 섰을 때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터뜨렸다(출 14:10-13). 이것은 기자가 고백하는 첫번째 죄악의 내용이다.

성 경: [시106: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자기 이름을 위하여 - 이는 '자기 품성에 걸맞게' 혹은 '그의 명성(평판)을 위하여'(for his name's sake, KJV, RSV, 25:11; 31:3; 사 48:9; 렘 14:7)로 번역할 수도 있다. 출 14:18은 하나님이 쫓아오는 바로 군병들로 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신 것은 애굽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함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에 자신의 엄위로우심을 밝히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성 경: [시106: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홍해를 꾸짖으시니 - 여기 '꾸짖으시니'(*, 이그아르)는 잘못된 짓을한 사람에게 화내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가로막았던 홍해를 하나님이 가르신 사실을 마치 말귀를 알아듣는 대상에게 호통치시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 광야를 지남 같게 - 여기서 '광야'(*, 미드바르)는 모래로 된 황무지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여기서는 풀이 가득한 초지를 암시한다. 이 이미지가 의미하는바는 목자가 길이 잘 나있는 목초지로 그의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홍해를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이다(나 1:4).

성 경: [시106:1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구속하셨고(*, 가알) - 상반절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동사로 '야솨'(*)가 쓰였지만, 하반절에서는 이처럼 '가알'이 쓰이고 있다. '야솨'는 일반적인 의미의 구원 사역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반면 '가알'은 일반적으로 피의 복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경우에 사용된다. 즉, 어떤 대가가 지불되는 구원 사역을 뜻할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애굽 군사들의 피값(수장된 것을 가리킴)으로 이스라엘을 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구원했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본 용어가 사용되었다.

성 경: [시106:1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 기자는 여기서 바로의 군대가 철저히 잔멸당한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여호와의 주도적이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부가시킴과 아울러 본절의 전후에서 언급되는 바 이스라엘의 완악성과 불순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Alexander).

성 경: [시106:1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거역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건지신 하나님]

⭕ 저희가...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 분명히 출 14:31; 15:1에 대한 언급이다."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여기서 이스라엘이 드러낸 신앙과 그들이 부른 노래는 뿌리깊은 신앙과 그 신앙에서 우러나온 찬양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구원의 섭리에 따라 어떤 이적적 현상이 초래되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이슬과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정도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어떤 설교가는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다 : '이스라엘의 찬양과 이스라엘의 범죄 사이는 오십 보 백 보이다'(Spurgeon). 이스라엘의 신앙과 찬양에 대한 이러한 판단의 진실성은 문맥이 증명한다.

성 경: [시106:1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미하루 솨크후마아사) -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은 서둘렀다. 그들은 그의 행사들을 잊었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과 홍해에서 경험하였던 여호와의 기적적 구원 사역을 너무 빨리 망각하였던 것을 고발하는 말이다. 이와같이 패역된 망각은 음식에 대한 욕심 때문에 터져 나왔던 그들의 불평 기사를 통해 처음 나타난다(출 15:22-24; 17:2,3). 본절로부터 33절까지에는 광야에서 저질렀던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고백이 실려있다.

⭕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인내의 연습을 도모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반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목겨하고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방식대로 그의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것을 기다리고 신뢰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망각의 병폐, 인내하지 못함에 대해 신명기 기자도 이미 암시한 바 있다(신 4:9, 23; 6:12; 9:7).

성 경: [시106:1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욕심을 크게 발하며(*, 이트아우 타아와) - 직역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욕망을 품었고'이다. 이는 만나를 먹은 후에 이스라엘이 다른 종류의 음식을 갈망했던 것을 가리킨다 : "이스라엘 중에 섞여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민11:4). 이 대목 중에 이스라엘이 고기를 먹고 싶어했던 욕망 자체를 죄악으로 단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음식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광야에서 음식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문제는 섞여 사는 이방인들에 의해 야기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 이스라엘 내에 급속히 확산되어갔다는 점이다. 그 불신은 의혹을 가져왔고 결국에는 배반을 낳았다.

성 경: [시106:1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 요구한 것을 주셨다는 것은 상당한 양의 메추라기를 공급하셨던 것을 가리킨다(민 11:31, 32). 한편'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의 해석 관건은 '파리'인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라존'(*)으로 '야위게 하다', '황폐해지다' 등을 뜻하는 '라자'(*)에서 온 명사이다. 본문의 핵심은, 그들의 영혼이 황폐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메추라기를 원했던 그 욕망이 그들의 영혼을 황폐케 하고 야위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과 식욕의 만족만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고 골몰할 때 인간의 영혼은 항상 공허해지고 말라버리기 마련이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일시적인 성공과 번영 따위에만 몰두할 때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잊기 쉽다. 즉, 영적 축복과 특권의 가치를 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육체를 입고 살기 때문에 육체가 필요로 하는 필수품을 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도외시한 채 육적 필요만 구한다면 그는 결국 영적 패망을 보고 말 것이다.

성 경: [시106:1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여호와의 성도 아론(*, 아하론 케도쉬 예화) - 직역하면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이다. 아론이 이렇게 불리웠던 것은 그의 제사장직때문이었다. 레위 족속들이 이렇게 불리웠고(대하 35:3), 엘리사가 이렇게 불리웠고(왕하 4:9), 나실인 역시 이렇게 불리웠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드려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론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분적 특권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는데 이 배타적인 특권이 고라와 그의 무리들의 공격을 낳았다. 그들은 온 회중이 '거룩하다'는 기치를 들고 아론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었다(민 16:3, 5, 7).

성 경: [시106:1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 - 거룩하다는 기치를 들고 아론의 독보적 대제사장직에 항거했던 자들은 고라와 다른 레위인들 그리고 르우벤 족속이었던 다단과 아비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 기자는 다단과 아비람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고라 족속은 성전 성가대를 이루는 족속으로 유명하였는데 성가대에 관심이 많았던 본 시편 기자가 그 족속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생략했다고 주장한다(Rowley, Anderson).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론의 제사장직에 대한 항거로 죽은 자들의 명단에 고라 자손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무리와 고라를 삼키매 그들이 죽었고 당시에 불이 이백 오십 명을 삼켜 징계가 되게 하였으나 그러나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아니하였더라":(민 26:10, 11). 그리고 고라를 제외한 채 다단과 아비람만이 항거의 주역인양 묘사하고 있다 :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단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민 16:27).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비록 그 이름이 항거자의 명단에 들어가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고라는 항거의 실세(實勢)가 아니였으며 따라서 본 시편 기자도 그를 제외한 다단과 아비람만을 적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라는 그 반역 음모에 가담한 대가로 죽었다. 성경은 그것을 밝히 말한다.

성 경: [시106:1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 바로 앞절의 징벌과는 또 다른 징벌을 가리킨다. 이 징벌은 회중 총회의 뽑힘을 받은 250인이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다가 위에서 떨어진 불로 몰살했던 것을 말한다(민 16:2, 35).

⭕ 악인 - 민 16:26의 표현을 그대로 따왔다 : '...이 악인들의 장막에서 떠나고.'

성 경: [시106:1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범죄를 말한다. '호렙'이란 호칭이 나왔는데 그것을 보아 본 기자는 이스라엘의 송아지 숭배 사건을 그리고 있는 출 32장을 인용 묘사하고 있다기보다는 모세가 특히 '호렙'이란 지명을 들먹이며 이스라엘에게 연설하였던 신 9:8-12을 인용 묘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호렙'이란 지명은 신명기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름이다(신 1:2, 6, 19; 4:10, 15; 5:2;9:8; 18:16 등).

성 경: [시106:2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자기 영광 -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영광'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여호와(3:3) 곧 그들 가운데 명백히 제시했었던 하나님 자신의 현시를 가리킨다. 본절의 가장 근접한 평행구로서 렘 2:11이 있다 :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 여기서 기자가 '풀 먹는'이란 구절을 첨가한 것은 이스라엘의 소 형상 숭배의 우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도움을 필요치 않으시고 도리어 모든 필요 공급의 근원이 되시는 자족적(自足的) 존재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타인으로부터 필요를 공급받되 공급이 끊어지면 곧 죽고 말 생물을 숭배하고 의존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비난을 받았던 좀더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만들기는 송아지를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분명히 그들은 '출애굽을 이룬 하나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송아지를 만들었다(출 32:4). 즉, 생각 속의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형상화한 까닭에 그들의 죄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분명 하나님은 예배할 목적으로 우상을 형상화하는 것을 금하셨다(출 20:4, 5).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크게 초월하는 분이시다. 인간은 그분을 그려낼 수 없다. 만일 땅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동물, 무생물 따위의 모습을 그리면서(혹은 빚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인간 세계를 넘어계시는 분을 인간 세계의 그 무엇으로 축소, 전락시킨 것이 된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존적 실체인 송아지로 전락시킨 죄를 범한 것이다.

성 경: [시106:2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구원자 하나님을 저희가 잊었나니 - 모세를 통하여 주셨던 경고를 이스라엘이 어겼던 것을 가리킨다 :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2). 여기서 '구원자'(*, 모쉬아)는 신명기 저자와 이사야서 저자가 여호와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다(사 43:3, 11; 45:15,21; 49:26).

성 경: [시106:2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기사...놀랄 일 - 각각의 원어는 '니플라오트'(*), '노라오트'(*)이다. 이 둘은 동의어이며 함 땅에서 있었던 재앙들과 홍해에서의 구원 역사를 각각 가리킨다. '함 땅'을 '함의 장막'으로 지칭한 경우도 있다(78:51).

성 경: [시106:2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하셨으나(*, 요메르) - 일반적으로 '말하였다'로 번역되나 본 용어가 나오는 배경 기사가 실린 신 9:13, 14을 고려하면 '결심하였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반역의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을 멸절시키려고 하셨다(신 9:25). 그러나 모세의 중보 기도는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의 변경이라는 각도에서 조명하면 안되고, 단지 이스라엘 반역의 극심함을 지적하는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결렬된 중에서(*, 바페레츠) - 문자적인 뜻은 '벌어진 틈 사이에서'이다. 모세의 중보 기도는 요새 성벽의 갈라진 틈을 그 몸으로 막고 있는 용감한 지도자의 행위에 비유되고 있다. 유사 비유가 겔 22:30에 나온다 :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성 경: [시106:2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낙토 -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유사 구절로는 렘 3:19; 슥 7:14등이 있는데 개역 성경 슥 7:14의 경우 '아름다운 땅'으로 번역하고 있다. 정탐꾼들의 과장된 보고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인간의 의견을 더 신뢰한 백성들의 마음을 낙담시켰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애굽으로의 귀환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민 14:4).

성 경: [시106:2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원망하며 - 신 1:27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이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일종의 원망이 아니라 출애굽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불신앙적 시각의 표출이다.

⭕ 여호와의 말씀 - 그 내용은 신 1:21에 요약되어 있다 :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성 경: [시106:2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저가 맹세하기를(*, 이사 야도 라헴) - 직역하면 '그가 그들에게 그의 손을 쳐들었다'이다. 이는 언약 맹세의 일반적인 제스처이다(창 14:22;민 14:30; 겔 20:23). 단 12:7의 경우 양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다는 식으로, 계10:5, 6의 경우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06:2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 이것은 열방에게로 이스라엘을 흩으실 것을 암시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불신앙의 사건을 직접 기록하고 있는 민 14장엔 나오지 않는다. 이말씀은 레 26장, 신 28장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포로 운명은 이스라엘 자체가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훨씬 전인 광야 시대 때 이미 예언되었다. 포로 시대이후 선지자인 에스겔은 그의 선지서 20:23에서 본절의 예언을 회상하고 있다. "또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하였었나니."

성 경: [시106:2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이차메두 레바알 페오르)- 직역하면 '그들이 바알브올의 멍에를 메었다'이다. 이것은 민 25장에 기록된 범죄를 가리킨다. 바알브올 숭배 예식에 동반되었던 음란 행위를 언급하는 대목인 민25:3, 5에서 본문에 사용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멍에를 메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음란 행위에 가담하였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 되겠다. 한편 70인역(LXX)은 본 구절을 '그들이 바알브올의 회에 가입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 이것은 일차적으로 '산 하나님'에 대비되는 죽은 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는 제사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본 행위는 신과 예배자의 상호 유대 관계 지속을 위해 행해졌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죽은 실체인 우상의 재물을 먹음에 있어서 그 예배자들도 그 행위를 통하여 그 죽은 신(神)과의 교제를 원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구절에서, 죽은 영과의 교제를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강신술적(降神術的) 예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신 18:11; 사 8:19). 이스라엘의 죄는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는 데에 있지 않고 생명이 없는 물체인 우상을 살아있는, 그래서 뭔가 교훈을 전해주는 실체로 의식했다는 데에 있다. 바울도 문제가 되는 것은 희생 제사에 드린 예물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자의 양심이라고 밝히고 있다(고전 10:28, 29).

성 경: [시106:2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재앙 - 본 용어는 대체로 신적(神的)징벌, 좀더 자세하게는 질병을 뜻할 때 사용되지만 해당 사건의 본문인 민 25:8, 9, 18을 고려할 때 비느하스 등에 의해 수행되었던 '살륙'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 유행하였도다(*, 티프라츠) - 직역하면 '깨뜨렸도다', 혹은 '갈라진 틈을 만들었도다'이다. 이것은 살륙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됨으로써 전체 공동체 구성원에 큰 공백이 생겼던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성 경: [시106:3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이 일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 - 비느하스의 행위를 의로운 행위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상급을 내렸음을 말한다. 의에 대한 상급이란 그의 가계를 통한 영원한 제사장직의 계승이었다(민 25:12, 13).

성 경: [시106:3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 이는 광야 여정 사십 년째 되던 때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거역했던 사건의 핵심을 짚어주는 구절이다. 말하자면 본문은 모세가 약속의 땅 입성(入城)을 거절당하였던 이유를 해당 사건의 기사 대목에서보다 더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다. 사건 당시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침으로써 그의 인내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이같이 모세로 하여금 약속의 땅 입성을 막았던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된 궁극적 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분노케 한 것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세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이었다. 요컨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민 20:2-13).

성 경: [시106:3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광야에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1) '그 심령'을 모세의 심령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은 모세의 영(마음)을 자극하였다'로 번역된다. 이 해석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거역하다'로 번역된 '힘루'(*)를 '자극하다'로 번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2) 본문을 하나님(그의 영)께 대한 반역으로 이해한다. 유사 구절로는 사 63:10이 있다.(3) (2)의 해석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동사의 주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다고 본다. 물론 주어, 곧 주의 영을 근심케 한 주인공을 모세와 아론으로 볼 수 있다(민 20:24; 27:14).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백성들을 주어로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성 경: [시106:3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실행하도록 명령받은 사실을 이행치 않은 죄를 지적하고 있다. 곧 가나안 민족들을 뿌리 채 뽑지 않은 죄(삿 1:21, 27-35), 그들의 우상 숭배를 용인한 죄(살 3:7) 등이 그것이다.

성 경: [시106:3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열방과 섞여서 - 가나안의 이방 족속과 결혼하고 그들의 타락한 악습을 좇아 행한 것을 말한다.

⭕ 그 행위를 배우며 - 가나안의 생활방식 및 종교 양식을 수용한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6:3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올무가 되었도다 - 이것은 출 23:33; 34:12; 신 7:16 등에서 계속되었던 경고를 무시함으로 이방의 혐오스러운 것, 곧 몰렉 숭배때에 행해졌던 인신(人身)제사 따위가 이스라엘 가운데 행해졌던 것을 특별히 암시한다.

성 경: [시106:3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사신(*, 쉐딤) -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이 '마귀'(demons)로 번역한이후 대체로 '마귀'(혹은 악마)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는 본 용어는 복수형으로만 나오며, 이곳과 신 32:17에서 '우상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타락한 천사인 사단의 세력, 곧 귀신들로 본다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고전 10:20).

성 경: [시106:3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무죄한 피 곧 저희 자녀의 피를 흘려 - 범죄하지 않은 자, 피를 흘릴 만한 일을 행하지 않은 자의 피를 흘린 것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우상 숭배의 악습을 좇아 결백한 자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것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그 같은 제사를 바쳤던 것은 결백한 자의 피가 자신들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까지 우상에게 바칠 정도로 열광적이었다(레 18:21;신 12:31; 왕하 16:3; 21:6; 23:10; 렘 7:31; 겔 16:20, 21). 정해진 율례를 범한자를 위하여서는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원칙은 희생 제물로 양을 바치던 제사의 원칙과 흡사하다. 이 원칙을 따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양처럼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러나 가나안에 두루 퍼져 있었던 인신 제사는 모세 율법에 제시된 희생 제사와근본적으로 다르다. 인신 제사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제사이므로 용납될 수 없다. 또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여 희생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존재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다. 가나안에서 비롯된 인신 제사는 왕국 시대 이후에 살인을 합법화하는 제사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왕하 21:16; 사 1:15; 렘 22:3).

⭕ 그 땅이 피에 더러웠도다 - '더러웠도다'의 '테헤나프'(*)는 어떤 원인으로 되어진 결과가 극악의 상태임을 암시하는 강동사로 '크게 오염되었도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동사는 민 35:33에서 따온 것이며, 사 24:5에서도 볼 수 있다. 인신제사로 말미암아 그 땅에 거주하는 거민들뿐 아니라 토양 자체도 심히 오염되고 저주를 받았다.

성 경: [시106:3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그 행동이 음탕하도다(*, 이즈누 베마알레헴)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행위로 그들은 매춘부가 되었다'이다. 여기서 '이즈누'의 원형 '자나'(*)는 일반적인 혹은 예식적인 매춘 행위에 가담하는 여인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매춘 음란 행위는 고대 근동의 셈족들에게 잘 알려진 생활이자 종교의식의 일부였다(Anderson). '매춘'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 왜곡을 의미하는 비유의 소재로 구약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음녀와 같은 생활하기를 택하였지만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결혼 관계로 종종 묘사된다(사1:21; 50:1; 57:7-13; 호 2, 3장). 한편 하나님이 음란 행위를 엄하게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매춘이 이스라엘 중에 묵시적으로 허용된 듯하지만(창 38:15,16; 레 19:29; 수 2:1; 왕상 3:16; 암 7:17), 일단 결혼한 여자가 혼외 정사를 갖는 일은 분명히 죄로 간주되었다.

성 경: [시106:4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이하르 아프 예화 베아모) - 직역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그의 백성을 향하여 불탔으며'이다. 어떤 사람이 정열로 타올랐다고 묘사하듯이 기자는 하나님께서 불과 같은 진노를 품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자주 나타난다(79:5; 89:46; 에 1:12; 렘 4:4; 애 2:3). 불타는 듯한 진노로 범죄한 그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읽을 수있다.

⭕ 자기 기업을 미워하사 - '미워하사'로 번역된 '예타에브'(*)의 정확한 뜻은 '싫어하다'이다. 본 구절의 의미는 범죄한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마치 싫어하는 물건을 대하듯 하셨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물건을 멀리 내던지듯이 팽개침으로써 그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을 받게 하셨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이 같은 묘사가 너무 인간적이고 유치하다는 견해에 대하여 한 주석가는 이렇게 맞서고 있다. '본 기자 보다 더 솔직하고 정직한 작가가 있겠는가? 그의 표현속에는 그 민족을 옹호하려는 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범죄를 숨기려는 기색도 없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 묘사에 있어서 부드럽게 해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행위는 혐오스러웠다. 그들은 하나님의 싫어함을 받아 마땅하였다. 그들은 감사하지도 않았고 악하고 반역적이었다. 경건한 주석가들이라면 기자가 기술한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Barnes).

성 경: [시106:4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열방의 손에 -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고 우상을 섬겼던 이방 압제자들, 예를 들면 가나안, 모압, 미디안, 블레셋과 같은 나라들의 통제 속에 이스라엘을 두셨던 것을 가리킨다. 기자는 지금 가깝게는 사사 시대를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왕국을 형성한 후 포로로 잡혀가기까지의 역사에 관한 회상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성 경: [시106:4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복종케 되었도다 - 사실 이 같은 사항은 한때 이방 대적들이 이스라엘에게 취한 행위였었다 :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삿 3:30),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패하게 하신지라'(삿 4:23).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살 8:28),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삿 11: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우상 숭배와 인신 제사로 그 땅을 더럽힌 후 그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복종케 되었다는 말은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이다. 이스라엘은 비참하게도 하나님께만 숙여 절하여야 할 머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을 향하여 절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성 경: [시106:4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끝없는 반역, 징벌, 회개 그리고 구원의 연속이었다. 반역-징벌-회개-구원의 사이클은 옷니엘-에훗-삼갈-드보라 등으로 이어지는 사사 시대 초기 역사 속에서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삿 1-5장).

⭕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이 만든 계획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르지 않았던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목적대로 따를 것을 계속 권유하다가 듣지 아니하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81:11, 12).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큰 고통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당한 자이다(롬 1:24, 26, 28).

⭕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암쿠) - 이는 '가난해지다', '약해지다', '낮아지다' 등을 뜻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본문 외에 두 군데밖에 나오지 않는데 각각 '낮아져서'(욥 24:24). '퇴락하고'(전 10:18)로 번역되었다. 본 문맥에서는 범죄로 인한 징벌로 이스라엘의 국력(國力)이 고갈되고 쇠약해졌던 것을 의미한다.

성 경: [시106:4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 고통을 권고하시며 - '권고하시며'(*, 야레)의 문자적인 뜻은 '머리를 돌려 주시하다', '보다'등이다. 여기서 기자는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통 중에 부르짖는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백성에게 불 같은 분노만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그들을 주시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신다. '부르짖음'(*, 리나탐)은 주로 '기쁨의 노래'를 뜻할 때 사용되나 여기서와 같이 고통의 울부짖음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왕상 8:28).

성 경: [시106:4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돌아보시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단순한 인간적인 감상, 연민 때문이 아니라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비록 그 백성은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 여기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 뜻을 돌이키사 - 마치 그의 마음이 바뀌기나 한 듯이,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후회하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위에 내리려던 징벌을 중단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표현에서 하나님의 가변성(可變性)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후회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민 23:19). 기자가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하나님의 인애가 큰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그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분의 속성, 계획이 변경된 듯 보일 정도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한 인애(仁愛)를 나타내신다. 많은 역본들이 이 같은 이유때문에 '뜻을 돌이키사' 대신 '자비를 베푸사'로 번역하고 있다(repented, KJV; relented, NIV, RSV, LB; 출 32:14; 렘 18:8; 욘 3:10 등을 참조하라).

성 경: [시106:4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와 긍휼]

⭕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은 이방 지도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편케 하고 결국은 놓임을 얻게 하셨다는 뜻이다. 왕상 8:50; 단 1:9 등을 보면 이방 나라가 포로된 이스라엘을 관대하게 대하는 표현을 읽을 수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같은 마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었다.

성 경: [시106:4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구원에 대한 간구와 찬양]

⭕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 진술하여 왔던, 이미 그의 백성을 향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열방 중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모아 다시 한 국가를 이루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언어들, 특히 본 구절의 용어들은 본 시편이 포로 시대 중에 기록되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있다. 기자는 아직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올리고 있다. 한편, 본절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 대상 16:35에도 언급되어 있다.그런데 대상 16:35은 언약궤를 다윗 성에 안치하고 난 후에 지은 다윗의 찬양시의 일부에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는, 본 시편 구절에 익숙했던 역대기 기자의 문체가 대상16:35에 반영되었을 것이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 여기서는 동사 '히쉬타베아흐'(*)는, 본 시편에서는 유일하게 상호 재귀형(힛파엘)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본문의 정확한 원문 직역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서로서로 찬양하게 하소서'가 되겠다. 기자는 흩어졌던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있다.

성 경: [시106:4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자비]

주제2: [구원에 대한 간구와 찬양]

이 마지막 절은 본 시편이 작성된후 시편 제 4권의 종결을 표시하기 위하여 첨가한 송영과 같은 것이다. 본절 첫행은 약간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제 2권을 마감하는 구절72:19의 첫행과 거의 유사하다. 본절을 인용하고 있는 역대기 기자는 미래형의 소원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를 역사적 완료형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로 바꾸고 있다(대상 16:36). 역대기 기자는 자신의 시적인 글에 본 구절을 포함시켜 놓고 있는데 이 사실은 이미 그 시대에도 시편이 현재와 같은 형태의 여러 권의 책들로 구분되었고 송영은 본 시편의 전체를 구성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부분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성 경: [시107:1]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촉구]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식 때 낭송하던 송영구이다. 렘 33:11에 근거하면 본 송영구는 포로로부터 귀환한 자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 나오는 접속사이자 강조사인 '그는' 앞의 '키'(*)를 살려서 실감나게 본절을 재번역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참으로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참으로 영원히 인자하시기 때문이다'이다. 송영 시(時) 사회자가 '여호와께 감사하라'를 읽으면 회중은 '왜냐하면' 이하를 읽었다고 한다. 본 시편과 106편은 동일하게 본 송영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두 시편의 연관성을 연구한다.

성 경: [시107:2]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촉구]

⭕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 - 동일한 표현이 사 62:12에 나타나는데 그곳의 역사적 배경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본 구절을 근거로 하여 본시의 작시 연대를 포로 귀환 이후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전반적으로 본시가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는 벅찬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것 같다.

⭕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 여기서 '대적'이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이 되겠으나 추상적 영향력인 '근성'따위도 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 자체가 '대적'이란 뜻 외에 '슬픔', '곤경'등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6, 13, 19, 28절 등에서 계속 '근심'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의 '차르'는 '근심'을 의인화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Alexander).

성 경: [시107:3]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촉구]

⭕ 남(*, 미얌) - 문자적인 뜻은 '바다로부터'이다. 구약에서 이 용어는 서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팔레스틴 땅의 서쪽 경계선은 바다인 지중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 '서'라고 하는 명사가 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남쪽'과 '바다'의 개념을 연결시킨다면 남쪽 지방에 있는 '아라비아 해' 정도가 연상된다.

성 경: [시107:4]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 본문은 사막에서 그 갈 길을 잃은 대상(隊商)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주어 '저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쉽지 않은데 '저희'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1) '저희'를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와 연결시키는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은 또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본 시편을 특정 역사와 연관시키는 견해로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를 예루살렘 함락 후 갈대아인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친 유대인으로 보고 있다(렘 43장). 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사막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로 보기도 하고 포로지 자체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부류는 특정 역사와 연관짓지 않고 '저희'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는데, 곧 바벨론 포로가 아니라 이방 여행의 위험과 역경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2) '저희'와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와의 무관성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이 견해를 따라 혹자는 이스라엘을 그 선조들의 땅으로 귀환시킨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함으로 본 시편을 시작하였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명백히 드러났던 또 다른 예들에 관하여 계속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자들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에 관한 언급을 위해 첨가된 서두의 세 구절은 그 뒤에 나오는 좀더 넓은 범위의 주제와 연결시키기 위한 서론적 구실을 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견해들이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시편이 다양한 인생사를 묘사하고 있으며 포로 귀환 후의 감격적 상황을 노래한 것으로 추측하기는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닥치는 위험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경험한 모든 자들이 그것을 감사함으로 인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저희'를 역사 속의 특정한 무리에 굳이 고정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 거할 성(*, 이르 모솨브) - 문자적인 뜻은 '거주의 성'이다.이는 다소 예루살렘이 의도되기는 했으나, 특정한 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거주할 곳이 못 되는 광야와 대비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그 어떤 도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7, 36절).

성 경: [시107:5]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피곤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티트아타프'(*)로서 원형인 '아타프'(*)는 의복 따위로 '덮다'(65:13; 73:6), '자신을 숨기다', '어둠이 덮다'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재앙, 고통, 슬픔 따위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드리워진 상태를 가리킨다. 음식과 음료의 고갈로 인해서도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겠다.

성 경: [시107:6]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부르짖으매 - 궁핍 상태를 절실하게 느낄 때일수록 인간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기도는 의인의 자원일 뿐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자의 자원이다. 그리고 건지시고에 해당하는 '이칠렘'(*)은 '나찰'(*)의 사역형(히필형)으로서 하나님이 당면한 모든 종류의 환난들로부터 구원하셨음을 뜻한다.

성 경: [시107:7]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바른 길로 인도하사(*, 야드리켐 베데레크 예솨라) - 문자적인 뜻은 '그는 그들에게 곧바로 길을 만들어 주셨다'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찾고 의뢰하는 백성에게 그들이 거하게 될 땅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지름길로 인도하셨다는 뜻이다.

성 경: [시107:8]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본절에서 찬송하도록 권고받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거할 성에 이르게 된 자들(7절), 혹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그리고 나아가 양자(兩者) 모두를 가리킬수 있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체험된 개별적 구원의 경험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 체험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Anderson).

성 경: [시107:9]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본절은 렘 31:25을 상기케 한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급할 수 있는 분이시다. 여기서 '사모하는'은 5절의 '목마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사 29:8).

성 경: [시107:10]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흑암 - 이것은 일차적으로 감옥에 갇힌 자의 침울하고 암담한 상태를 가리키나(사42:7; 49:9) 절망, 비참,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사 5:30; 8:22; 9:2 등).

⭕ 곤고와 쇠사슬 - 본 구절에 함축된 내용을 좀더 충분히 공개하는 구절로는 욥 36:8이 있다 :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한편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내용에 대해 탈굼역(Talgum)은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지에서 당한 일로 번역하며, 반즈(Barnes)같은 주석가는 바벨론 포로민들의 불행과 구원에 관련짓는다. 이 구절들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확정짓기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있기까지 흑암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레 24:12; 민 15:34 참조).

성 경: [시107:11]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말씀...뜻 - 후자는 '아차트'(*)로서 '권고'가 적절한 의미이다. 이 두 용어는 율법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들과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그의 권고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본절 전체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염두에 두는 대상은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에 기록된 법, 내적 계시를 통해 준 교훈(16:7)을 무작정 배제해 버릴 이유는 굳이 없겠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을 돕는 단서로는 '멸시 함이라'가 신정적(神政的) 차원 내에서의 신성 모독을 가리킬 때 (민14:11, 23; 16:30; 신 31:20) 뿐만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곧 지혜로운 권고의 거절을 가리킬 때(잠 1:30; 5:12; 15:5)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성 경: [시107:12]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수고로(*, 베아말) - '아말'(*)은 수고뿐 아니라 골칫거리, 고통, 실망, 패배, 슬픔 따위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창 41:51; 신 26:7; 욥 3:10;16:2).

⭕ 저희 마음 - 그들의 자만심, 자기 만족성 등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모든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경험이나 자원들을 의존하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헛됨을 보이시기 위해 그들을 비참케 만드셨다.

성 경: [시107:13]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본 시편은 크게 네 부분(1-9절; 10-22절; 23-32절;33-43절)으로 구분되는데 본절과 같은 내용이 10-22절에 또 한 차례 반복되는 것(19절)을 비롯하여 두 부분에 한 차례씩 반복되고 있다(6, 28절). 이러한 유사 구절의 적지 않은 반복을 통해 우리는 본 시편이 인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뿐 아니라 인간들의 탄원 및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강조하는 시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107:14]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 이것은 감옥수의 해방을 그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0절의 주해를 근거로 할 때 이 표현은 영적인 의미 혹은 실제적인 의미, 둘 모두로 해석될 수 있다.

성 경: [시107:15]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문장 구조를 살필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커다란 하나의 절(節)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본절에 와서야 전체 구분을 대표하는 동사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10절의 '사람이...앉으며'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를 분사적 주어로 볼 때 그 동사는 본절의 '찬송할지로다'가 되겠다. 이렇게 보면 11-14절은 하나의 삽입구가 되겠는데 이 삽입구를 좀더 분해해보면 11, 12절은 주어의 이유를, 13, 14절은 분사적 주어에게 당면되어진 징벌 상태 이후의 일들을 각각 담고 있다. 이상의 주해를 놓고 볼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서 강조하는 바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았던 자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그처럼 부정적인 상황에 있었다가 그 상황으로부터 회복된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장 구조를 살필 때(10-15절) 보다 중요한 것, 보다 강조되고 있는 바는 그가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본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환난과 곤고로부터 새로이 구출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일은 너무도 마땅하고 중요한 일임을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다.

성 경: [시107:16]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 성경에서 '놋'은 강함과 견고함(렘1:18; 15:20), 목이 곧고 패역함(사 48:4), 로마 제국(단 2:32, 39), 바벨론 제국(렘15:12) 등을 상징한다. 여기서 '놋문'이 깨뜨려졌다는 말은 바벨론이 멸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이 멸망했으므로 그 나라에 포로되었던 민족이 해방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 본문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바벨론 멸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바 있다 :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사 45:2). 이는 고레스를 사용하여 바벨론의 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아마 본 시편 기자는 그 냉용에 익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바벨론 성벽에는 실제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문이 무려 100개 가량이나 있었다고 한다.

성 경: [시107:17]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미련한 자(*, 에월림) - 육신적인 탐욕에만 몰두하는 자를 흔히 이렇게 부른다. 그는 경고에 귀가 멀고 훈계를 멸시하는 세상적이고, 육욕적이며, 이기적인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잠 1:7; 12:15).

⭕ 범과(*, 데레크 피쉬암) - 직역하면 '범죄의 길'이다. 이 표현은 어떤 악한 행실의 과정, 어그러진 생활 습관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 곤난을 당하매(*, 이트아누) -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스스로 그들에게 고난을 가져오고 있다'이다. 이는 미련한 자가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표현법이다. 그 의미사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동일한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구절로는 왕상 2:26을 들 수 있다. 한편, 원문에는 현재를 나타내는 미완료형의 시제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미련한 자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좀더 강력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성 경: [시107:19]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이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시107:20]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고치사 - 마치 병중에 있던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기쁨의 소식, 즉 '완쾌된다'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처럼(왕하 20:4;사 38:4)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하여 낫게 하시거나, 직접 말씀하사 낫게도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신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될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적 치유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곳으로는 105:19; 147:15, 18 그리고사 9:8; 55:11 등이 있는데 이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교리(요 1:1)의 구약적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참조로, 어떤 학자는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데베르'(*, 역병)로 읽어, 본절을 '그가 역병을 보내셨으나, 그들을 고치시고 악성 종기들로부터 구해내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나(Dahood)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

⭕ 위경에서(*, 미쉬히토탐) - 영역본 NIV는 '무덤으로부터'(fromthe grave)로 번역하고 있는데 문맥이 죽음에 가까이 있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 같다(18절). 그리고 KJV나 RSV 등은 '파멸로부터'(fromdestruction)라 번역한다. 어떤 구약 학자는 고통받고 있는 자가 빠져 있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 '구덩이들'로 이해하고 있다(Delitzsch).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그들이 고통받는 까닭은 결국 범죄 때문이므로 '죄악들'로 번역하기도 한다(Hitzing).

성 경: [시107:21]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그를 찬송할지로다 (*, 요두) - 거의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던 자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목의 글이므로 감정을 넣어 '오! 그분을 찬송하라'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Barnes). 이 같은 번역은 생명을 위협하던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뒤 부른 히스기야의 찬양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 38:20).

성 경: [시107:22]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감사제(*, 제바흐) - 교제 혹은 나눔의 제사를 뜻한다. 본 제사의 특징은 제물의 일부분, 예를 들면 기름 덩어리만 번제단 위에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린 몫을 제외 하고는 예배에 참석한 대중이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데에 있다. 희생 제물은 암수 관계없이 소, 양 혹은 염소 등에서 취했다. 문맥상 본 제사가 기록된 핵심은 '나눔'에 있다. 죽음의 지경에까지 갔었으나 회복된 자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것이 아니라 예배 공동체와 함께 고기를 나누며 자신이 경험한 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07:23]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 - 본 시편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사막에서 방황하는 자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본절로부터는 깊고큰 바다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인의 모습으로 바뀐다. 저자는 본절에서부터 32절까지에서 해상 무역상들의 경험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약 당시에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서 바닷가와 접하고 있었던 땅은 서쪽이었는데, 이 해안 지대의 상당 부분은 블레셋 및 가나안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산간 지대나 트랜스 요르단 지역이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 중에 해상 무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방인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 등이었다. 그러므로 23-32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문자 그대로의 해상 무역인들로 볼 경우 이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볼 경우 그 해석은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28절).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본 구절들이 특정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자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23-32절은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의 위험 및 구원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 경: [시107:24]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 - 파도로 하여금 하늘에 닿을 듯 뛰어오르게 하는 강풍과 그 파도를 봄날의 부드러운 공기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미풍을 주관하시는, 자연계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성 경: [시107:25]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묘사하고 있는 창 1장에서 흔히 볼수 있는 표현이다. 105:31, 34에서도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 바다 물결을(*, 갈라) - 문자적인 의미는 '그곳으로부터 온 파도들을'이다. '그곳으로부터 온'의 히브리어 대명사적 접미사는 좀 떨어진 23절에 있는 명사 '바다'를 가리키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같은 예는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니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예로 111:10을 들 수 있는데 그곳에서 '그 계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복수 대명사는 111:7에 있는 '법도'를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본절의 대명사적 접미사는 24절에 있는 명사 '깊음'(개역 성경에는 '바다'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깊음'으로 되어 있다)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성 경: [시107:26]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저희가 - 이것은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는 배에 탄 선원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본절 말미의 주어가 '그 영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깊은 곳에 내리니 - 원어상으로 24절의 '바다'(*, 메촐라)와는 다른 '깊은 곳'(*, 테호모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의미하는바는 동일하다. 바다 혹은 대양은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문은, 인간이 마치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 속으로 가라앉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위험과 고통의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 '녹는도다'에 해당하는 '무그'(*)는 '녹아 내리다', '부드러워지다'등을 뜻하며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그 용기와 활력을 잃은 마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바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15:15; 수 2:9, 24; 나 1:5).

성 경: [시107:27]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이리저리 구르며(*, 야호구) - 문자적인 뜻은 '빙빙 돌며'로서 하나의 원 주위를 계혹 맴돌며 춤을 추는 모습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 지각이 혼돈하도다.(*, 칼 하크마탐 티트발라) - 문자적인 뜻은 '모든 그들의 지혜는 바닥이 났다'이다. 말하자면 항해사들의 배를 조종하는 모든 기술이 무익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이다. 항해사들은 지식적으로 배운 항해술과 바다를 항해해 본 경험을 가지고 능숙하게 배를 조종하기 마련인데 이제 그 능력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파도 앞에 항새사들의 보잘것없는 지식 및 경험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도를 명령하는 자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뿐이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스스로 쌓은 지식과 경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위경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성 경: [시107:28]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근심 중에서...부르짖으매 -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할때 인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건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의존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나 본절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만 하나님을 의존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기서 위경으로부터의 탈출에서 분명히 목격한 하나님을 순탄할 때에도 의존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이 위경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좀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 그와의 동행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주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73편 등).

성 경: [시107:29]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광풍을 평정히 하사 -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마 8:26). 말씀 한마디로 거칠게 뛰놀던 폭풍을 잠잠케 하는 능력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입증하는 것도 드물다 하겠다.

⭕ 물결(*, 갈레헴) -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의 파도들'이다. '그들'을 '바다'로 본다면 그 '바다'란 23절의 '큰 물'을 말하며, '선원들'로 본다면 '파도들'이란 선원들을 그 위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내던지며 위협하던 그 파도들을 말한다.

성 경: [시107:30]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평온함(*, 솨타크) - 폭풍 후의 바다의 고요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지만(욘 1:11, 12) 다툼의 종식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잠 26:20).

⭕ 소원의 항구 - '항구'로 번역된 '메호즈'(*)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본문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원'으로 번역된 '헤프참'(*)이 '소망하는 대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본 구절 전체는 '바라던 그 목적지'등으로 보면 되겠다. 바라던 목적지로는 기업, 태어난 고향,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 처자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다. 본문의 항해를 일종이 인생 여정으로 보는 어떤 학자는 이것을 '죽음'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다소 어색하다. 아무튼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배운 인생들을 그들의 바라던 곳,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있는 목적지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성 경: [시107:31]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기이한 일 - 이것은 바다의 위험 가운데서 인도하신 일을 말한다(8, 15, 21절과 비교).

성 경: [시107:32]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구체적 이유]

⭕ 백성의 회에서 -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개인적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공개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개자가 경험한 일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자들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 여기서 '장로들'(*, 제케님)은 수염이 난 모든 성인(成人)들, 좀더 명확하게는 가정의 가장들을 의미하기도 하며(삿 20:2; 렘 26:17) 한 종족이나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Kraus). 본절에서는 전반절에 '백성의 회'가 나오므로, 일반 백성들과 구분하여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성 경: [시107:33]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 '강'(*, 네하로트)은 일반적으로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긴 하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수를 물 한방울 없는 바짝 마른 광야로 바꾸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연계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시107:34]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거민의 악을 인하여 - 뒤에 이어질 불행한 결과의 원인이 제시되고 있는데, 불행한 결과를 묘사하는 대목에 '염밭'이란 용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도성을 녹여버렸던 징벌 사건을 회상할 수 있다(창 19장; 신 29:23; 사 1:9).

⭕ 옥토(*, 에레츠 페리) - 문자적인 뜻은 '열매의 땅'이다. 말하자면 수확거리를 풍성히 내는 땅을 가리킨다. '수확거리'란 특정 품종을 말하는 것이아니라 땅이 낼 수 있는 모든 품종을 말한다. '염밭'(*, 멜레하)은 '소금기가 많은 습지'를 뜻한다. 아마도 '열매의 땅'과 대비를 이루는, 산성이 많아 쓸모가 없는 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사해 부근에는 이런 종류의 땅이 많다고 한다. 본절은 그 땅 거민의 악행을 두고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시107:35]

주제1: [하나님이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본절을 형성하고 있는 용어들은 사 41:18, 19 내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 33, 34절은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로 황량해진 본토를 묘사하는 것이며 본절은 그들의 귀환으로 변경된 본토의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 이들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대들 같이 돌리소서" 라고 읊고 있는 126:4을 들고 있다. 이러한 견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절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고만 볼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크신은총을 나타낸다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이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성 경: [시107:36]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 굶주린 자들이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번영을 누리며 도시를 건설케 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특히 팔레스틴과 같은 곳에서는 식수나 용수(用水)가 잘 조달되고 토지가 비옥한 지역에 인구가 번성하기 마련이며 도시가 번창하기 마련이었다(VanGemeren).

성 경: [시107:37]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소산을 취케 하시며 - 정직하게 땀흘려 열심히 일하는 자는 과거의 굶주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인 땅의 산물을 얻게 될 것이다(사 49:19; 54:1; 겔 36:30,33-36).

성 경: [시107:38]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 당시 자식의 수가 느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증거로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자주 족장들에게 하셨다(창 13:16;22:17; 26:4; 32:12).

성 경: [시107:39]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다시...저희로 감소하여(*, 얌아투) - 문자적인 뜻은 '저희들은 그 수가 줄어짐을 당하여'이다. 수동적 의미가 강한 용어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지시하신다. 번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것이요,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아래서 되어진 일이다. 인간은 항상 번영할 수 없다. 그의 인생 여정에는 변화와 불행과 실망과 슬픔이 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징계의 목적으로, 때로는 연단의 목적으로 환난을 허용하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류에게 항상 번영만을 주실 경우, 인간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을 잊고 결국엔 하나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에까지 이르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의 간섭과 통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생들로 하나님만 전적 의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번영을 주기도 하시고 역경을 허락하기도하신다. 본절을 40절의 조건절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그럴 경우 원문상 서로 다른 주어를 취하고 있는 이 두 절의 호응 관계는 어색해진다. 따라서 본절을 조건절로 보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본 시편 기자가 자주 취하고 있는 대조법의 구도 속에서 본절을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저자는 33, 34절을 그리고 38절과 본절을 그리고 40절과 41절을 대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시107:40]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분사적 문장들의 일부인 욥 12:21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후속절에 대한 직접적 대조를 형성하기 위함뿐 아니라 36절에 대한 대조를 암시하기 위하여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방백'(*, 네디빔)은 귀인(貴人) 곧 지도층 인사로 보면 무난하겠으나, 본 문맥상으로는 특히 유다의 마지막 두왕 곧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를 연상하게 만든다(왕하 24:8-20). 하나님은 사회적 신분이 높은 방백들에게도 차별없이 동일한 대우를 하시며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를 동시에 그의 통치권 아래 두시고 있다.

⭕ 길 없는 황야(*, 토후 로 다레크) - 여기서 '토후'(*)는 창조 전 '혼돈'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창 1:2; 렘 4:23). 그렇다면 본 구절은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비유할 수 있는 인생 여정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하겠다.

성 경: [시107:41]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 '높이 드시고'는 '예사게브'(*)로'높게 되다'(20:1; 69:29)를 뜻하나 본절에서처럼 강의형(피엘) 동사가 쓰이면 흔히 '보호하다', '지키다' 등을 뜻하게 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을 계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방백으로 멸시를 당케 하고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난관에 넣으셨던 하나님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계속되는 빈곤으로부터 보호하신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적 섭리가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성 경: [시107:42]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 정직한 자는...기뻐하며 모든 악인은...입을 봉하리로다 -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항상 이렇듯 두 부류의 대조적인 반응을 낳기 마련이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 역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에 두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성 경: [시107:43]

주제1: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찬양의 필연성]

개역 성경에는 생략된 원문 초두에 있는 의문사 '미'(*)를 넣어 본절을 제대로 직역하면 이렇다 :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인애를 이해할 지혜자가 누구이겠는가?' 이 같은 결구적 의문문은 호세아 선지가 그의 선지서를 마감하면서 던진 말을 상기케 한다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저자는 자신이 본 시편에서 밝힌 바, 온 인류의 삶을 통치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자가 많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듯한 의문형의 결구(結句)를 사용함으로써 역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일에 전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성 경: [시108:1]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의 확신에 대한 찬양]

⭕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 57:7에는 이 구절이 두 번 반복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번만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심령으로 감사 찬양을 드리겠노라고 하는 시인의 신념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 맛소라 본문(MT)을 보면 본절의 '내 심령'이나 57:8의 '내 영광'이 동일한 히브리어 '케보디'(*)로 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문맥에서 나타나 있다. 여기 '카보드'(*)는 '영광' 또는 '심령'의 뜻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한 사람의 인격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찬양으로 감사제를 드릴 것에 대한 시인의 확신에 찬 신념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고 57:8에서는 찬양에 대한 계속적인 촉구의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성 경: [시108:2]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의 확신에 대한 찬양]

⭕ 새벽을 깨우리로다 - 새벽은 하루를 새롭게 여는 가장 신선한 시간이다. 이런 새벽 시간에는 심령이 더욱 정결하고 경건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이같이 고귀한 마음 상태로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앙 자세가 어떠함을 짐작케 된다. 즉, 그는 여호와가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전인격의 중심(카보드)으로 찬양을 드려 마땅한 분임을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8:3]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의 확신에 대한 찬양]

⭕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 57:9에서는 '여호와여'(*, 예화)가 아니라 '주여'(*, 아도나이)를 쓰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만민중에서' 찬양할 것을 다짐하는 말은 9, 10절에 비추어 해석해 볼 때 종말론적으로 여호와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 경: [시108:4]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의 확신에 대한 찬양]

⭕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 '주의 인자'(헤세드)는 6, 12절에 언급되는 바 구원의 근거가 된다. 57:10에는 '...에 마치고'라는 뜻의 '아드'(*)가 쓰였으나 여기에는 후기 히브리어에서 주로 사용되는 '...위에' 라는 뜻의 '메알'(*)이 쓰였다.

성 경: [시108:5]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의 확신에 대한 찬양]

⭕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 여기에 다시 '영광'(*, 케보드)이 언급되고 있는데 1절의 케보드('심령'으로 번역됨)와는 달리 하나님의 위엄과 고귀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온 세계 위에'는 만방 위에 뛰어날 이스라엘의 영광을 암시한다고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성 경: [시108:6]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 이는 60:5과 동일하다. 그러나 본시에서는 '주의 사랑하는 자'가 1절의 '심령으로 찬양하는 자'와 연관이 있으나 60편에서는 다른 문맥에서 연결되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은 '주의 인자하심'(4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의 영원한 인자와 언약에 대한 성실하심 때문인 것이다.

성 경: [시108:7]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 여기서 '거룩하심'이란 만유 위에 뛰어나신 주의 초월성과 온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주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한편 NIV에서는 이 구절을 '그의 성소로부터 말씀하시되'(has spoken from hissanctuary)로 번역하고 있는데 성소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이 비롯되는 곳을 상징하는 초소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번역도 의미가 깊다.

⭕ 내가 뛰놀리라 - 대부분의 영역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I will rejoice, KJV; with exultation. RSV). 그리고 혹자는 특별히 이 단어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은 기쁨을 나타낸다고 한다(Dahood). 9절의 '내가 외치리라'도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내가 그곳으로(성소로) 올라갈 것이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C.R. North), NEB 성경도 같은 견해이다.

성 경: [시108:8]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길르앗...므낫세...에브라임...유다 - 이 네 도시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인데 본절은 다윗에 의해 통일된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에서 번영되기를 원하는 시인의 소망을 담고 있음과 아울러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원형으로서 이스라엘이 소개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 나의 홀이며 - '홀'(笏)은 왕의 권위(에 4:11), 지도자(창 49:10), 약속된 메시야(민 24:17), 그리스도의 통치(히 1:8) 등을 상징한다. 이로 볼 때 본문은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권한을 대리하여 이스라엘을 주도해 나갈 것을 뜻하며, 아울러 예표적인 측면에서는 유다 가문을 통해 오실 메시야(마 1:1)의 구원 사역을 암시한다.

성 경: [시108:9]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 60:8에는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 시의 수집자가 블레셋에 대한 승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수정하였을 것으로 본다(Rawlinson). 한편, 본래 60:8은 약간의 풍자를 띤 구절로서 블레셋이 여호와로 인하여 두려워 외치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도 이해 가능하다(Delitzsch).

성 경: [시108:10]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 맛소라 본문(MT)을 보면 60:9의 '견고한'이란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마초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위로 된'이란 뜻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미브차르'(*)가 쓰였고 이는'요새화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미브차르'가 더 자주 쓰이며, 창 36:42에 언급된 에돔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이 '밉살'(*)이다. 따라서 여기서 '견고한 성'은 곧 '에돔의 성'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8:11]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이는 60:10과 완전히 일치한다. 7-10절에서 보여 주었던 승리의 확신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접전(接戰)중에서 느끼는 시인의 당혹감과 여호와의 도우심에 대한 절실한 요청이 잘 나타나 있다.

성 경: [시108:12]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 11절에서 보여 주었던 당혹감은 본절에서 간절한 기도로 승화되었다.

⭕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 이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청으로서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의 손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함을 시사한다.

성 경: [시108:13]

주제1: [승리에 대한 확신]

주제2: [승리에의 담대한 간구]

⭕ 저는...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 시인의 이러한 확신은 '주의 인자하심'(4절)에 기초한 것으로서 60편과 약간 다른 각도에서 해석된다.

성 경: [시109:1]

주제1: [비탄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의 행악에 대한 고발]

⭕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 본시의 주제가 환난에 대한 탄원이기 때문에 '찬양의 노래'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음조를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불평과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히 찬송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성도의 바른 자세를 더욱 고무시키며 성도의 눈물마저도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하겠다.

⭕ 잠잠하지 마옵소서 - 자신을 해하려고 덤비는 대적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 말고 막아 달라는, 즉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호소하는 탄원이다. 이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 하나님은 눈을 떼지 않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대적들로부터 이유없이 비방을 받고 악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무죄를 아시고 판단해 주신다면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앙의 면모를 엿보게한다.

성 경: [시109:2]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의 행악에 대한 고발]

⭕ 대저 - 히브리어 '키'(*)에 해당되는 말로서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 악한 입과 궤사(詭詐)한 입 - 30절에는 시인이 입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본절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는 구체적인 악행을 나타내며 허망한 풍설(風說)을 전하거나 무함(誣陷)하는 증인인 악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출 23:1). 그리고 '궤사한'의 히브리어 '미르마'(*)는 다분히 추상적인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 '속삭이다', '기만하다'(beguile, deal treacherously with)는 뜻의 '라마'(*)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중에 거짓 제물로 무게를 속이는 내용을 언급하는데, 저울의 눈금을 속인다는 것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쓰였다(암 8:5). 구상 명사와 추상 명사가 이렇게 균형있게 쓰인 것은 다윗 시에 흔히 등장하는 시적 기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들이 의인을 괴롭힐 때 우선 무고한 말이나 속이는 말로 중상 모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과 시므이 등으로부터이러한 비방과 저주를 받았던 바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상에 있을 때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저주를 받은 바 있으며,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한다는 말까지 들은적이 있다(마 9:34).

⭕ 입을 열어(*, 파타흐) - 이 말은 야수(野獸)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애 3:46).

⭕ 거짓된 혀 - 혀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 중에 야고보의 지적이 아마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비방과 중상을 세 차례에 걸쳐 각기 다른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바, 대적들의 독설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VanGemeren).

성 경: [시109:3]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의 행악에 대한 고발]

⭕ 미워하는 말로(*, 다바르 시네아) - 앞 구절의 '거짓된 혀로'와 대구를 이룬다. 시편은 특히 대구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대구에 주의를두고 읽을 때 한층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워하다'란 뜻의 '사네'(*)에서 파생된 '시네아'는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살인을 부를 정도의 심각한 증오심을 가리키며 관념이나 생각으로서의 증오심을 넘어 실체적이고 행동적인 미움을 뜻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모습을 이 단어로 묘사한 바 있다(신 1:27). 그리고 민 35:20에서는 살인의 원인을 미움으로 언급하고 있다.

⭕ 나를 두르고(*, 세바부니) - 22:16에서 이 말은 개들이 먹이를 두고 다투는 상황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성 경: [시109:4]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의 행악에 대한 고발]

⭕ 나는 사랑하나 - 이는 다윗이 핍박자에게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다윗의 원수로 자처하며 다윗을 공격하고 미워하였다. 다윗은 그들의 친구로 지내왔으며 단순히 그들에게 악을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비를 행하였던 것이다.

⭕ 나를 대적하니 - 이 말 속에는 '나를, 도리어 나를 비방하니'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을 베푼 결과, 주어진 것이 너무나도 뜻밖에 적대감이라는 데 대한 당혹감이 곁들여져 있다 하겠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악으로 갚은 것은 분명 사단의 장난이다. 즉,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도리어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 나는 기도할 뿐이라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인 '와아니 테필라'는 '그러나 나로 말하면 기도뿐이라'는 뜻이다. 영역 성경 중 KJV나 NIV는 원문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다(but I give myself unto prayer, KJV). 반면, 어떤 학자들은 '나는 사랑하나'를 '나를 대적하니'란 말에 연결시켜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even as I make prayer for them, RSV)가 된다. 다윗은 온갖 거짓과 교활한 말로 공격당할 때 악을 악으로 갚는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오히려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같다. 우리가 때로는 이유없이 손해를 보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이를 보복하려고 하기 쉬우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자세임을 깨닫게 해준다(롬 12:21).

성 경: [시109:5]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의 행악에 대한 고발]

⭕ 저희는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 악인들의 배은 망덕(背恩忘德)하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다(35:12; 38:20; 렘 18:20; 요 10:32; 15:25).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시무'(*)는 '야시무'(*)에 대한 '와우'(*) 강조 요법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시인의 원수들은 마귀의 상용 수단인 선을 악으로 갚는 방법으로 시인을 저주하였다. 이런 자들에게는 기도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진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7절 참조).

성 경: [시109:6]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악인 - '라솨'(*)는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킨다(145:20; 잠 24:20; 합 1:4). 이사야는 이러한 악인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 본문은 다소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게데스(Geddes)의 경우에는 이를 '저가 악한 심판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로 번역하여, 법정에서 재판받는 광경을 염두에 두었다. 하반절과의 대구적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악한 심판관이 과연 악인들의 악행에 합당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절 전반절의 히브리어 일부를 수정하려고 히도한다. 예컨대 '라솨'를 '레솨'(*)로 바꾸어 전반절을 '죄악이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며'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 따위이다. 그러나 게데스의 입장을 따르더라도 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의 강조점은, 악인들이 무고하게 의인들을핍박한 것처럼 그들 또한 무지막지한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다윗의 저주를 보고 무작정 이를 모방하며 분별없이 남을 저주하거나 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악인으로부터 받은 고난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고 보복심에 불타올라 악인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 대적으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탄'(*)인데 영역본 KJV는 이를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 마귀 곧 사단(Satan)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1)이 말이 4,20, 29절 등에서도 동사형이나 명사형으로 나오되 신의 적대자들로 언급되고 있고, (2) 본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대적들이 도리어 그 악한 꾀에 버금가는 곤경에 빠질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 또한 (3) 본절의 상.하반절이 대구를 이룬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이 히브리어는 시인의 대적들을 도리어 대항하는 악한 세력(an accuser, NIV)혹은 불의한 재판관(an unfair judge, LB)을 뜻한다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

⭕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 재판정에서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고소자의 입장에 선다는 말과 같다(Anderson, Kidner). 한편, 스가랴는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슥 3:1). 스가랴서에도 분명히 나타나있는 바와 같이 대적이 오른편에 서는 것은 고소하고 대적하기 위함인 것이다. 반면에 시인은 31절에서 대적의 위치인 오른편에 대신 여호와께서 서서 심판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것을 간구한다.

성 경: [시109:7]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 이에 대해서는 (1) 사후(死後)의 심판이라는 견해와, (2)지상에서의 심판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현실상의 모든 법적 판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믿었고(출 18:13-27; 신1:17),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판단을 묻는 방식이 시행되기도 했다는 점에서(출28:15), (2)의 견해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문과도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 이것은 어떠한 자비도 없는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즉, 악인들의 죄는 너무나 분명해서 정의의 집행을 모면할 방도가 없으며 용서를 구해도 허락하지 말아 달라는 무서운 저주의 기도인 것이다. 악인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자를 정죄하며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들이 그토록 심한 죄를 범했고 또 유죄로 판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위배된다고 시인은 판단한 것 같다. 네로나 갈리굴라 같은 대박해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용서받게 된다는 것은 정말온당치 못한 처사일 것이다.

⭕ 그 기도가 죄로 변케하시며 - 악한 마음을 품고 악행을 저질러온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면 얼마나 가증스럽게 보이겠는가? 따라서 이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말고 오히려 그의 호소가 죄를 덧붙이는 결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도 오히려 기도하는 것이다.

성 경: [시109:8]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그 연수를 단축케 하시며 - 세상을 괴롭히며 혼란스럽게 하는 악인보다는 미친개가 오래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은 곧 세상의 평화를 앞당기는 지름길이다. 본문에서 '연수'(*, 야마)는 부사로 쓰이고 있지만 명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배반자나 사악한 자들에게 적용시키곤 하였으며 베드로는 유다의 급속한 죽음을 보고 이 말씀의 성취로 보았다. 즉, 갑작스러운 죽음은 구약에서 현저한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여겨졌던 것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55:23; 잠10:27; 전 7:17). 반면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는 자비가 주어진다.

⭕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 이후 그의 자리에 맛디아가 임명된 사건을 두고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이를 인용하였다(행 1:20,26). 악한 인간은 좋은 직분조차도 나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 말씀은 더욱 확장되어 유대 민족에게 맡겨졌던 계시의 보고(寶庫)가 기독교 교회로 이전된 것으로 확대적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직분'에 해당하는 '페쿠다'(*)는 '직원(職員)'(대하 23:18) 혹은 '쌓은 재물'(사 15:7) 등 두가지 뜻을 모두 지니지만, 대다수 최근의 주석가들은 '직분'(office)으로 이해한다(Deissler, Eaton, Kraus). 왜냐하면 재물에 관한 이야기는 11절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성 경: [시109:9]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고아가 되고...과부가 되며 - 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 자녀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강조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즉, 사악한 자의 최후는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보호아래 호의 호식하던 처자식에게까지 심한 타격을 끼치고 말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과부나 고아는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로 거론되고있는데,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도 큰 불행이 닥치게 될 것이다. 모든 고아와 과부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만그 아비의 행위가 악독했을 때는 그들에 대한 동정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한들,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었다한들 슬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우리가 임의대로 해석하여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판사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사심(私心)을 두지 않고 정의를 선언해야 하듯이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공의를 요청하고 있다.

성 경: [시109:10]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본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빌어먹게 하시고, 그들로 저희가 거하는 그 황폐한 곳에서 쫓겨나게 하소서'(Horsley). 이것은 썩고 무너진 건물의 폐허 가운데서 한 가닥의 피난처를 이리저리 찾아다녔으나 그런 곳에서조차도 거할 곳이 없는 가련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렘 18:21참조).

⭕ 유리 구걸 - 조상의 죄가 자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자손이 당하는 경제적 빈곤을 가리킨다.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다레슈 메하르보테헴) - '떠나'에 해당하는 '다라쉬'(*)는 '밟다', '쫓아내다'는 뜻 외에도 '찾다', '구하다', '조사하다' 등의 의미도 지닌다. 혹자는 본문에서 이 단어를 '조사하다'는 뜻의 수동형으로 해석하고 이 어구를 '그들의 집들이 평가인에 의해 조사되게 하시며'라고 옮겼다. 그러나 이 번역은 문맥의 흐름에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 따라서 그보다는 '그들의 폐허가 된 집에서 양식을 찾게 하소서'(let them seek their bread alsoout of heir desolate places, KJV), 혹은 '그들의 황폐한 집에서 쫓겨나게 하소서'(may they he driven from their ruined homes, NIV)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성 경: [시109:11]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고리대금하는 자 - 원문인 '노쉐'(*)를 번역한 말로서 채권자를 가리킨다. 히브리어 '나솨'(*)는 동사로 쓰이면 '빌려주다', '강요하다'는 뜻이 되고, 명사로 쓰일 경우는 '채권자', '강탈자'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빚을 미끼로 가난한 채무자의 남은 소유마저 철저히 빼앗아 가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느 5:1-5). 어느 선지자의 생도가 죽자 그 아내가 채주에게 두 아이를 종으로 빼앗기게 되었다고 엘리사에게 호소한 사실도 이것을 잘 입증해 준다(왕하 4:1).

⭕ 취하게 하시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카쉬'(*)는 원래 '덫을 놓아붙잡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고리대금업자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그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가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 저의 수고한 것을 - 이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하였다가 그 자녀들에게 남겨준 재산을 가리킨다.

성 경: [시109:12]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은혜를 계속할 자 - '은혜'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변함없는 사랑과 인자(仁慈)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창 19:19; 출 34:6; 대하7:3; 렘 3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친족이나 이웃의 친절과 자비를 뜻한다.

⭕ 연휼(憐恤)할 자 - 히브리어 '호넨'(*)은 '아랫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 '은혜를 베풀다'는 뜻의 히브리어 '하난'(*)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비록 과거에 큰 해악을 끼친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오랫동안 불행한 나날을 보내게 되면 그의 과거의 악행을 잊어버리고 불쌍하게 생각하게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정(常情)이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악행을 결코 잊지 말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다윗의 잔인성을 나타낸다고 오해할지 모르나 악인들의 범과가 너무도 엄청났다는 사실과 악인들이 긍휼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신 2:30; 수 11:20) 상기한다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성 경: [시109:13]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자손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손이 끊긴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요 저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축복(창 12:2;22:17)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한편, '후사'에 해당하는 '아하리토'(*)는 '후손'이라는 뜻 외에도 '끝' 혹은 '미래'라는 개념도 내포하는 말이다. 일례로 민 23:10에는 이것이 한 개인의 종말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의 유대인 주석가인 나마니데스(Nahmanides)는 '아하리토'란 개념속에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본문은 악인의 영원한 파멸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 후대에 - '베드로 아헤르'(*)를 번역한 말로서 앞 어구의 '아하리토'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본절은 69:28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란 어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M. Dahood).

성 경: [시109:14]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그 열조의 죄악을 - 여기 '열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보타'(*)는복수로서 원수의 지위가 상당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의 부친을 가리킬 때는 이와 같은 장엄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8절 참조). 장엄 복수에 대해서는 사 14:21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 "너희는 그들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여...."

⭕ 기억하시며 - 히브리어 '자카르'(*)는 원래 '표시하다', '(대출 장부에)기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문구에는 죄악을 행한바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 그 어미의 죄를 - '어미'는 히브리어로 '임모'(*)인데 단수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복수로 표현된 앞 어구의 '아보타이우'도 그 의미상 단수임을 충분히 알수 있다.

⭕ 도말하지 마시고 -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천 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반면 악인에게는 삼사대까지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셨다(출 34:7). 따라서 시인의 저주는 가혹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상벌 원리에 일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모의 죄가 그 자손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죄악된 길로 행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심각한 죄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며, 특히 언약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부모의 패역한 행위의 악영향은 그 후손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환난을 초래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왕하 24:3; 렘 15:4). 그렇지만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겔 18:20)라는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죄의 형벌이란 본인에게 달린 것이다.

성 경: [시109:15]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 양피지나 토판(土版) 등에 기록하여 항상 기억되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인 90: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죄악이란 하나도 없고 또 지은 죄로 말미암은 심각한 악영향이 후대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성 경: [시109:16]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는 말씀속에 요약되어 있는 바, 이는 언약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뜻이다(Anderson). 무죄하고 가련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정상적인 사람이면 이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것이다. 또한 시기와 질투는 대부분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나 본문의 악인은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비참한 자를 핍박하고 마음이 상한자를 도리어 멸시하였다.

성 경: [시109:17]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 본절에서 18절까지 동사 앞에 접속사 '와우'(*)가 다섯개나 쓰이고 있다. 이를 단순히 순접 관계의 접속사로 보면 이 두 절은 시인의 현재적 바램을 나열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이 동사들이 19절의'...하소서'(*, 테히)에 연결된다고 보는 데서 찾아진다(Dahood). 반면에 다섯 개의 '와우'(*)중 일부를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보면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날 때 다윗을 저주한 바 있다(삼하 16:5-13).

⭕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 욥 22:21의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어구와 표현 형태가 유사하다.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했으나 솔로몬 왕 때 왕명을 어기고 참수형을 받고 죽은 바 있다(왕상 2:36-46).

성 경: [시109:18]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 값진 옷 입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저주하기를 즐겨했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저주가 고질적인 질병처럼 몸에 배여 저주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 같은 형국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에스겔은 심판날에 이스라엘이 당할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겔 7:27).

⭕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 이는 민수기에 언급된 '증거의 쓴 물'을 연상시킨다(Anderson). 민 5:16-31에 보면 부정한 여인을 판단하기 위해 쓴 물을 마시게 하는 기록이 있다. 깨끗한 여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해(害)가 되지 않으나 부정한 여인에게는 독이 되어 넓적다리가 떨어져 나가게끔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저주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수 자신이 그 저주에 버금가는 큰 해를 당했음을 시사한다.

성 경: [시109:19]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저주가...띠와 같게 하소서 - 본절은 18절 상반절의 단순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할 저주의 계속성과 영속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이다. 특히 '항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미드'(*)가 '계속적인', '영존하는'등의 뜻을 지닌 말임을 고려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Alexander). 한편, 본문의 명사 '띠'(*, 메자흐)와 동사인 '띠는'(*, 하가르)은 히브리어 원어상 그 어근이 서로 다른 말이다.

성 경: [시109:20]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대적에 대한 저주 및 멸망의 간구]

⭕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 -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즉각적인 보응을 지적함으로써 어떠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극심한 고통 중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면서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고 하였다.

성 경: [시109:21]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여기서부터는 저주를 그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시작된다.

⭕ 주의 이름을 인하여 -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나님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VanGemeren). 본 문맥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한다는 것은 특히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간구드린다는 뜻이다.

⭕ 주의 인자하심이 -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구약의 사상을 잘나타내주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의 원어는 '헤세드'(*)인데 자비나 사랑, 인애, 인자하심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까닭에 하나님의 사랑에도 변함이 없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는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들과 함께계신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개념인 것이다(44:23-26 강해, '하나님의 인자하심' 참조).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헤세드에 호소하고 있다.

성 경: [시109:22]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 외적인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신실한 성도는 더욱 겸손해지기 바련이다. 그러나 이런 환난을 받고도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환난에서 아무런 대가도 얻지 못한다. 한편 '상함이니이다'의 히브리어 '할랄'(*)은 16절의 '상한'에 해당하는 '나케'(*)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관통당한' 혹은 '찔려 죽은'등의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Alexander). 시인은 원수의 참혹한 적대 행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더 겸손해졌음을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세로 자신의 겸손하고 가난한 상태를 고백하는 자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인 것이다.

성 경: [시109:23]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불려 가오며 -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석양 그림자에 비유하고 있다. 어스름 황혼의 희미한 그림자는 일몰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이는 바로 앞일도 예측할 수 없는 시인의 불안한 심정이 잘 드러난 비유이다. 또한 본문은 사람의 생명이 극히 짧으며 풀과 같이 쇠잔한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102:11).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메뚜기로 비유한다. 메뚜기가 거센 바람을 만나 휩쓸려 가버리듯이(출 10:19; 나 3:17) 시인도 끊임없는 핍박으로 도망다녀야 했으며 평안히 쉬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성 경: [시109:24]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 혹자는 다윗이 극도의 상심과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식욕을 잃고 만 것이라고 본다(Barnes).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환난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간구하며 또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음식을 멀리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69:10).

성 경: [시109:25]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저희의 훼방거리라 - 대적들은 다윗의 곤고한 처지를 보고서 쾌재를 부르며 비웃었다. 아울러 본문은 대적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한 다윗의 겸손한 태도마저 위선으로 단정하고 조롱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Alexander). 한편 22:6, 7에서 다윗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 사람들이 시인을 보고 조소하는 광경을 표현한 말이다(22:7; 44: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다가 그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호소한 바 있다(렘 20:7).

성 경: [시109:26]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 사람들로부터 비록 비방을 받고 있으나(22-25절)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를 기필코 구원하시며 또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21절에 이어 다시 하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한다.

⭕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 '구원하다'의 히브리어 '야솨'(*)의 본래 의미는 '열려 있다', '넓다' 혹은 '의롭다'로서 그 명사형인 '예솨'(*)와 마찬가지로 택한 백성을 위경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묘사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삼하 22:3; 사 17:10; 슥 9:9 등).

성 경: [시109:27]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 원수의 핍박에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주시라는 뜻이다. 이를 좀더 확대해서 이해하면 시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행 9:4).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받기를 소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또한 바라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09:28]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본절에는 대적들의 어떠한 비방이나 핍박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자 하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이 연속되는 두개의 대조 구문을 통해 뚜럿이 부각되어있다.

⭕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 이 말씀은 원수들의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시인의 신앙적 투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는 원수의 비난과 핍박을 이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라 - '복을 주소서'란 앞의 어구가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선취적 신앙에 근거한 일종의 찬양이란 사실이 여기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는 한 원수의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집요하다 할지라도 구원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09:29]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연약 토로와 하나님의 도우심 간구]

⭕ 욕을 옷 입듯하게 하시며 - 18, 19절과 유사한 직유 형태이며 본문에서 '욕'은 히브리어 '켈림마'(*)를 번역한 것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당하게 될 수치와 부끄러움을 이 말로 지적하였다(사 45:16). 그리고 잠언 기자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의 박해가 참으로 어리석어서 자승자박(自繩自縛) 꼴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다.

성 경: [시109:30]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응답의 확신과 감사 찬송]

⭕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 입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다윗은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다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 경: [시109:31]

주제1: [비탄 속에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

주제2: [응답의 확신과 감사 찬송]

⭕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 히브리어 본문에는 앞 구절의 원인을 설명하는 접속사 '키'(*)가 문두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궁핍한 자'의 히브리어는 '에비욘'(*)이란 형용사인데 영어에서와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형용사가 명사로 흔히 쓰인다. 이말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주로 가리킨다(출 23:6; 신15:4). 그리고 '우편'의 원어는 '야민'(*)으로서 원래적 의미는 (좀더 강하거나 재주있는 것으로서의) '오른손'(혹은 '오른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붙드시사 그를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사 41:10). 또 에스겔은 그룹들이 성전 우편에 선 것을 보았다(겔 10:3). 이 경우에 있어 '우편'은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6절 주석과 비교하라).

성 경: [시110:1]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여호와께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 히브리어 성경 원문에 '다윗의 시'란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 주'는 히브리어 '아도니'(*)를 번역한 것으로서 앞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비록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우월하신 분으로서 천사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이시다(히1:13, 14).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지적하기 위해 본 시 서두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왜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칭하였는지 질문하셨다(마 22:44). 그리고 베드로는 삼천 명을 회심시키는 설교에서 본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곧 이 말씀의 성취임을 지적한다(행 2:34, 35).

⭕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본 구절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든 원수가 결국 패배할 것이며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부려도 왕국은 결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대적들이 멸망할 것임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발등상'의 히브리어 '하돔'(*)은 '짓밟다'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호수아는 태양이 멈추기를 기도한후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을 붙잡아 군장들에게 그들의 목을 발로 밟도록 한 바 있다(수 10:22-24). 한편, 다윗은 성전이 하나님의 발등상인 언약궤를 봉안(奉安)하는 곳이라고 말하였으며(대상 28:2). 이사야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하였다(사66:1).

⭕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임금의 우편은 그 당시 임금 다음으로 높은 자만이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비유는 바로 그 당시의 이전 관습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은 천사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우편은 모든 천사들보다 훨씬 높은 자만이 앉을 수 있고 이 자리에 앉는 자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높임을 받는 자인 것이다. 나아가 이는 메시야가 여호와의 보좌에 같이 앉아 세상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는 표현이다(Anderson).

성 경: [시110:2]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 혹자는 여기서의 '홀'(*, 마테)을 단순히 징계하기 위한 '막대기'라는 정도의 뜻으로 해석한다(Alexander). 왜냐하면 왕의 홀을 가리키는 말로는 주로 '쉐베트'(*)가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5:6; 민 24:17; 사 14:5; 겔 19:11; 21:10; 암 1:5; 슥 10:11 등). 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마테'를 '홀'로 번역해도 무방하겠다(scepter, NIV, RSV). 이 '홀'은 여기서 메시야의 권세와 권능을 상징한다. 결국 본문은 메시야의 권세와 권능은 여호아께로부터 직접 수여된 것임을 나타낸다(45:6; 히 1:8).

⭕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 본문을 하나님이 메시야께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견해와 다윗이 메시야에 대해 한 말이란 견해가 있으나, 개역 성경은 일반적 견해에 따라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서는 메시야의 통치가 대적들을 쳐서 굴복시키는 측면에서 언급되는 반면, 3절에서는 주의 백성의 자발적인 헌신을 유발시키는 측면에서 언급된다(계 17:14 참조).

성 경: [시110:3]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주의 권능의 날에 - (*, 베욤 헬레카) - 본문의 해석에 대하여서는 학자들간에 견해가 분분하다. 먼저 영역본을 살펴보면 KJV는 '당신의 권능의 날에'(in thy day of the power)로, RSV는 '당신의 군대를 인도하여 낼 때'(on theday you lead your host)로, 그리고 NIV는 '당신의 전투의 날에'(on your day ofbatttle) 등으로 번역했다. 그런가 하면 이를 '당신의 대관식 날에'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Anderson). 그러나 '권능'의 히브리어 '하일'(*)이 '힘', '권력'또는 '군대'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본절이 문맥상 5절과 연관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NIV, RSV의 번역이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된다(Kidner, VanGemeren).

⭕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 (*, 베하드레이 코데쉬) 이 구절 역시 상당히 난해하다. (1) 몇몇 고대 사본들과 심마쿠스역(Symmachus)에서는 '거룩한 산들 위에'(upon the holy mountains, RSV)로 옮겼다. (2) 맛소라 본문은 '거룩한 영예(위엄)중에'(in the beauties of holiness, KJV; Arrayed in holymajesty, NIV)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의 경우에는레 16:4에서 처럼 제사장의 복장을 입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ressed in holyaltar robes, LB). 우리는 문맥을 고려하여 대적들과의 전투시에 주의 백성들이 성전(聖戰)에 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춘 거룩하고 위엄있는 모습에 대한 설명으로 보고자 한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주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이 의와 옳은 행실로 단장하는 광경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한편, '거룩한'에 해당하는 '코데쉬'(*)는 원래 분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을 보고 가까이 가려고 하자 하나님은 그곳이 거룩한 땅이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다(출 3:1-5).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초소인 하늘은 땅과 분리되어 있어 거룩한 곳으로 언급된다(신 26:15).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받고 구별된 교회는 그들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거룩해져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새벽의 자궁으로부터 이슬 같은 당신의 청년들이 당신께로 (나옵니다)'가 된다. 본 구절의 해석에 열쇠가 되는 단어는 '이슬'로서,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헌신적으로 메시야를 따르는 젊은 전사(戰士)들의 수효가 많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라고 본다(삼하 17:12 참조, Van Gemeren). (2) 이를 수효의 많음을 강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여기며, 오히려 거룩하게 장식한 청년들의 아름다움이나 광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본다. (3) 아무도 모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역사(役事) 혹은 메시야의 역동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본다(Anderson). (4) 이슬이 매일 새벽마다 새롭게 맺히듯이 메시야 왕국의 백성들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번영과 행복을 누림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으로 본다. 이중에서 우리는 문맥을 고려하여 (1)의 견해를 취하되, 보다 영적, 궁극적 의미에서 본문이 주께 헌신하는 성도들의 신선하고도 생기있는 모습을 암시한다는 측면에서 (2), (4)의 견해 또한 수용하기로 한다.

성 경: [시110:4]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 '맹세하다'에 해당하는 '니쉐바'(*)는 '만족시키다'의 뜻인 '쇼브아'(*)의 니팔형 완료 시제이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욥 3:31)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배부르다'는 말이 본문의 '맹세하다'는 말과 같은 히브리어이다. 그리고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호4:10). 이상과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은 일단 만족하신 사안(私案)에 대해서는 이를 결코 변경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彷佛)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었다(히 7:3). 따라서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 추측 이상의 결실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이었다고 주장하며 초대 교회의 교부인 오리겐(Origen)은 그가 천사였다고 말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 더중요한 사항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고 있다는 사실과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제사장 임명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 영원한 제사장이라 - 이 세상의 제사장은 몇년 동안이나 또는 일생 동안만 그 역할을 감당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의 사역은 영원하므로 현재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우리 구원의 성취 여부의 관건이 되는 지극히 중요한 사안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중보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서 '영원한'의 히브리어 '레올람'(*)은 아브라함이 '영생하시는' 곧 영원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창 21:33의 기록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존(永存)하시는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성 경: [시110:5]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 앞의 '주'는 메시야를, 뒤의 '주'(*, 아도나이)는 성부(聖父) 하나님을 각기 지칭한다. 그리고 '우편'은 16:8; 109:31; 121:5등에서 알 수 있듯이 보호와 조력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여호와께서 대적들을 파하기 위해 싸우시는 메시야를 혼연 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도우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메시야 혹은 하나님 중 누가 우편에 계시느냐 하는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1절 주석 참조). 이 두 분은 그본적으로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 그 노하시는 날에(* - , 베욤 아포) - 문자적 의미는 '그의 분노의 날에'이다. 이는 현실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극적이고도 결정적인 개입을 암시하는 날을 의미한다(2:5; 21:9; 사 13:9; 습 2:3). 이 날에는 주께서 열방을 심판하실 것이다(2:9; 7:8; 9:8; 76:9; 계 19:11-21). 현실에 관영하는 죄악과 모순을 제거하고 남은 자들의 구원을 확정할 이 날은 다분히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 날은 무조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는 구원을, 이방에게는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 아니다. 오직 참다운 영적 이스라엘에게만 구원이 선포되고 다른 자들에게는 심판이 선언될 것이다.

성 경: [시110:6]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말레 게이오트) - 문자적으로는 '시체를 채우다(쌓다)'이다(heaping up the dead, NIV). 영역본 KJV는 여기에 '그곳'(the places)이라는 말을 첨가했으며, 어떤 학자들은 '게이오트'위에 '골짜기'를 뜻하는 '가이'(*)가 중음(重音) 탈락(haplography)된 것으로 본다. 그런가하면제롬(Jerome)은 '시체'대신 '골짜기'를 넣어 읽었다. 어쨌든 본문은 메시야의 심판의 철저성과 엄정성을 엿보게 한다.

⭕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 '머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쉬'(*)는 집합 명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를 단수로 보고 여러 민족을 통괄하는제국의 왕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여러 민족의 열왕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야의 심판이 우주적이어서 지상의 모든 나라들에게까지 임한다는 사실이다(Alexander).

성 경: [시110:7]

주제1: [왕과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

주제2: [메시야의 통치와 심판]

⭕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 어떤 주석가는 살륙으로 인한 피가 시내를 이루자 정복자 되신 그리스도가 이를 만족하게 마신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것이 비유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피를 먹지 말라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적절한 것이 못 된다. 또 어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을 당할 것임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문맥상 이것 역시 적절치 않다. 이 말씀은 원수들을 추적하되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철저히 파하기 위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도 않고 흐르는시냇물에 잠깐 목을 축이고는 곧장 적(敵)을 쳐부수는 내용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겠다.

성 경: [시111:1]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할렐루야 - 주지하다시피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의 히브리어이다. 이것은 이 시의 한 구성 부분이 아니라 표제어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본 시편은 각 행의 머리 글자가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는 답관체(踏冠體) 형식의 시인데 '할렐루야'의 서두 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상 다섯 번째이기 때문이다.

⭕ 내가...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 이 부분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자인 '알렙'(*)으로 시작되고 있다. '감사하리로다'로 번역된 '오데'(*)는 '찬송하라'로도 번역할 수 있다(Calvin). 다윗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감사, 찬송할 뿐만 아니라 회중에서 공적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해야할 것을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고 있다.

⭕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 이 부분은 히브리어 문자 '베트'(*)로 시작된다. 여기서 '회'에 해당하는 '소드'(*)는 다소 규모가 작은 사적인 회중을 가리키며, 공회에 해당하는 '에다'(*)는 보다 규모가 큰 공적인 모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동일한 개념이 두 번 반복된 것이며 의미상 '소드'가 이방 족속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회중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둘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거룩한 회중이 소집된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찬송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Calvin).

⭕ 전심으로 - 히브리어로 '베칼 레바브'(*)인데 '온 마음으로'란 뜻이다(with my whole heart, KJV, RSV). '마음'에 해당하는 '레브'(*)는 인간의 지(知), 정(情), 의(意)를 포함하는 전 인격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홍수후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 하나님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여럿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하셨다.

성 경: [시111:2]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 여기서 '여호와의 행사'란 세상 만물의 창조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아울러 지칭하는 말이다. 한편,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크시니'에 해당하는 '게돌림'(*)으로 시작되어 히브리어 세번째 알파벳 '깃멜'(*)이 문두에 놓였다. '게돌림'의 원형 '가달'(*)은 '강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잠언에는 사자가 가장 강하다고 말한다(잠 30:30). 이것은 또한 '용사'란 말로도 쓰인다(습 1:14).

⭕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 도다 - 이 구절은 네 번째 문자인 '달렛'(*)으로 시작된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행사를 갈망하는(즐거워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추구된다'는 의미가 된다. 즉, 이는 여호와의 행사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기쁨을 지닌 자들은 향후로도 동일한 은혜 받기를 갈망하여 그것을 탐구하며 묵상한다는 것이다. '즐거워하는'에 해당하는 '하페츠'(*)가 '(쾌락을)즐기다'란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자신들의 쾌락을 구하는'으로 번역하나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그리고 '연구하는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라쉬'(*)는 '추구하다', '연구하다', '조사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행사를 체험하기를 소원하며 지나간 행사들을 연구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후기 히브리어에서는 '다라쉬'가 성경을 해석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미드라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하였다(Anderson).

성 경: [시111:3]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그 행사가 존귀하고 엄위하며 - 이 구절은 다섯 번째 히브리어 문자인 '헤'(*)로 시작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는 영광스러운 위엄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존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드'(*)는 '찬란함', '장중함', '활력'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모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줄 것을 명령하였다(민 27:20). 그리고 엄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르'(*)는 '명예로운 것', '찬란한 것', '영예'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하달', 즉 호화로운 생활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5:14).

⭕ 그 의가 영원히 있도다 - 이 어구는 여섯 번째 문자인 '와우'(*)로 시작되며 하나님의 존귀와 엄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공의를 통해서 그 찬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에 대해 영원토록 신실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은 부당하게 압제받는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며 반대로 불의한 압제자들에게는 심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한편, '의'에 해당하는 '체데크'(*)는 기본적으로 '정상적이고 바른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신명기에는 저울 추를 속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공정함'으로 번역되었다(신 25:15). 한편, 이 단어와 같은 어근을 취하는 아람어 '치드카'(*)는 '긍휼'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는 바 하나님의 공의의 이면에 있는 자비를 엿보게 한다.

성 경: [시111:4]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그 기이한 일을 사람으로 기억케 하셨으니 - 이 말씀은 일곱 번째 문자인 '자인'(*)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직역하면 '그가 만들어 주신 기억은 기이한 일들을 위함이다'로서 하나님께서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즉 영원토록 명성을 떨칠 만한 일을 행하사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도 동일한 구언에 참여하게끔 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기이한 일'을 유월절(Passover)과만 연결시키나(Luther, Hupfeld,Notscher), 구속사를 통해 드러난 여호와의 모든 행사들이라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한편 '기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케르'(*)는 출17:14에도 등장하는데 70인역(LXX)은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오노마'(*), 즉'이름'으로 번역하였다.

⭕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도다 - 이는 여덟 번째 문자인 '헤드'(*)로 시작되며 '기이한 일을...기억케'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여기서 '은혜로우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눈'(*)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인다. 일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 둘을 다시 만들게 하신 후 그에게 나타나사 율법을 반포하시면서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셨다(출 34:6).

성 경: [시111:5]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 이 구절은 아홉 번째 문자인 '테드'(*)로 시작한다. 여기서 '양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레프'(*)는 흔히'먹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아마 답관체 형식상 '테드'에 맞추기 위해 굳이 이 단어를 택한 듯하다. 물론 이 단어가 '양식'을 의미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잠 31:15;말3:10).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출 16장;민 11장). 그런데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거역하였다고 봄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은 진심으로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돌보신다는 진리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22:25;25:14; 33:18;34:9; 85:9; 103:11 ;145:19) 본문을 노래한 것이라고 본다.

⭕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 열 번째 문자인 '요드'(*)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앞 구절에 대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언약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를 얻고 있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언약에 기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1:6]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저가...그 행사의 능(能)을 저희에게 보이셨도다 - 이 구절은 열한 번째 문자인 '카프'(*)로 시작된다. 한글 개역 성경은 본절 전체를 뒤에서 해석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나, 원문상으로는 '저가...기업으로 주사'를 결과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즉, '저가 그 행사의 능을 저희에게 보이사 그들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셨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He hath shown his people the power of his works, that he maygive them the heritage of the heathen, KJV).

⭕ 자기 백성에게 열방을 기업으로 주사 - 이 구절은 '라메드'(*)로 시작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정복하는 내용을 암시한다. 그들이 거룩한 땅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힘에 의해서 얻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적적인 개입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성 경: [시111:7]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그 손의 행사는 진실과 공의며 - 이 어구는 13번째 문자인 '멤'(*)으로 시작되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그 무엇이나 다 의롭고 진실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진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확실함', '신실함'등의 뜻도 가지고 있는 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확실하고 바른 길이어서 신뢰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서 리브가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창 24:48).

⭕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 14번째 문자인 '눈'(*)으로 시작된다. '확실하다'는 말과 '진실하다'는 말은 원어상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법도는 진실하고 바르기 때문에 그것을 따라야 마땅하며 그 법도를 따를 때 축복이, 따르지 않을 때는 징벌이 임함을 암시한다. '법도'의 히브리어 '피쿠드'(*)는 '지정되어진'이라는 본래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의) 명령', '계명', 특히 집합적으로는 '율법'을 뜻한다.

성 경: [시111:8]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 15번째 문자인 '싸멕'(*)으로 시작되며, 직역하면 '영원히 영원히 확실하게 서 있고'란 뜻이다.

⭕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 16번째 문자인 '아인'(*)으로 시작되며 직역하면 '진리와 공평함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1:9]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구속을 베푸시며 - 본절과 10절은 각각 세 개의 어구로 이루어져 있다. 본 구절은 17번째 문자인 '페'(*)로 시작되며, 이 어구의 문두에 놓여 '구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두트'(*)는 '몸값을 받고 석방하다'의 뜻인 '파다'(*)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구별', '구속', '구원' 등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의 술객은 하나님의 재앙에 대해 바로에게 설명하면서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사람 간에 차별적으로 임하는 것이므로 굴복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이를 '권능'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출 8:19). 또 이사야는 이 말을 본절에서처럼 '구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사 50:2)

⭕ 그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 이 문구는 18번째 문자인 '차데'(*)로 시작된다. 언약은 '맺다'는 표현으로는 주로 '자르다'는 뜻인 '카라트'(*)가 쓰인다(89:3). 그런데 여기서는 '명령하다'는 의미인 '차와'(*)가 사용되었다. 이는 본시의 특징인 답관체 형식에 맞추기 위한 시인의 의도를 읽게 함과 아울러,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언약이 주종 관계의 측면을 내포한다는 암시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즉,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언약을 세우사 호의를 나타내시지만 그것을 어기는자에게는 징벌을 가하신다는 의미이다(anderson).

⭕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 이것은 19번째 문자인 '코프'(*)로 시작된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두려우시도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1:10]

주제1: [위대한 하나님의 행사]

주제2: [찬양받으실 지존자]

⭕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 20번째 문자인 '레쉬'(*)로 시작되며 동일한 표현이 잠 1:7;9:10에도 나온다. '경외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레'(*)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내포하나(창 19:30;렘 26:21) 여기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며 오직 그분께 순종하고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Anderson). 시인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 그 계명들을 통해 드러난 당신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언급한 후, 이제 이에 대한 성도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즉, 하나님을 진실되이 섬기고자 하는 자는 그분께 경외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하며 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마감해야 한다는 것이다(VanGemeren).

⭕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 이 문구는 21번째 문자인 '신'(*)으로 시작된다. '지각'이란 뜻의 히브리어 '세켈'(*)은 '신중함', '통찰력'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잠언 기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곧 '슬기'라고 말하고 있으며(잠 19:11). '지혜'있는 자의 교훈을 생명의 샘에 비유한(잠 13:14).

⭕ 여호와를 찬송함이 영원히 있으리로다 - 이 문구는 히브리어 마지막 문자인 '타우'(*)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송받을 것이며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는 것보다 더 유익된 것은 없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라 !

성 경: [시112:1]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본 시는 111편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있으며 히브리어 문자 '알렙'(*)에서 '타우'(*)까지 22문자가 문두에 놓여 한 행씩 배열되는 답관체 형식의 시인 것이다. 111편이 하나님의 영광과 행사를 찬양하라는 내용인 반면 본 시는 인생이 필히 추구해야 할 영적 지혜를 교훈하고 있는 지혜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 여호와를 경외하며...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알렙'(*)과 '베트'(*)로 시작되는 두 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악을 행하고 불의한 방법으로나마 어떤 이익을 얻게 된다면 대단히 기뻐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의를 통해서는 결코 복을 얻지 못할 것임을 시인은 여기서 분명히 지적한다. 설사 불의한 방법으로 어떤 유익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휠씬 차원 높고 풍성한 유익을 주실 것이다. 한편 이구절을 원인-결과절로 보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그 계명을 크게 기뻐할 것이라'(Calvin)고 번역해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111편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상의 진전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111:10) 더 나아가 참된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시112:2]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 이 문구는 세 번째 문자인 '깃멜'(*)로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당대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미침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고 말씀하셨다. 한편 창 6:4에는 네 피림이 등장하는데 그들을 가리켜 용사라고 하였던 바, 본문의 '강성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깁보르'(*)가 거기서는 '용사'란 의미로 쓰였다(수 1:14;삿 5:13;삼상 2:4;잠 16:32;렘 5:16;20:11;슥 9:13 등 참조).

⭕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 네 번째 문자인 '달렛'(*)으로 시작되는 이 구절 역시 자손에게 임할 축복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는 설령 당대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무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복을 주시게 됨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악한 자들은 세상에서 헛된 권세를 누리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비록 빈궁하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훗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만한 놀라운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성 경: [시112:3]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 알파벳 다섯 번째 문자인 '헤'(*)로 시작되고 있으며, 의인이 받게 될 현실상의 축복을 나타낸다. 물질적인 부요함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음에 분명하다(왕상 3:13;잠 3:9, 10, 16;13:18;22:4 등).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인도 때로는 배고픔을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의 영광보다는 영적 영광이 그들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부요'(*, 혼)와 '제물'(*, 오쉐르)은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다만 전자는 '만족함'에 그리고 후자는 '풍부함'에 보다 강조점을 두는 말이다.

⭕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 여섯 번째 무자인 '와우'(*)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의'에 해당하는 '체데크'(*)는 '공정함', '의로움', '바르게 함' 등의 뜻을 내포한다. 이 말이 111:3에서는 여호와의 성품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재판의 공정성을 명령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성 경: [시112:4]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 이 문구는 일곱 번째 문자인 '자인'(*)으로 시작되고 있다. 앞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을 현실상의 축복을 언급하였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죄악이 창궐하는 현실에 대해 눈을 돌리고 있다. 설령 흑암, 곧 온갖 역경이 가로막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항상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는이 확신이야말로 높은 신앙의 경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빛'의 주체가 여호와이신지, 정직한 자 자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빛'이 축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말이라는 점이다(VanGemeren, 27:1;36:9;56:13;tk 9:2;10:17). 혹자는 본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에 하나님의 재앙으로 애굽 전역이 흑암으로 뒤덮였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빛이 비추었던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Horsley).

⭕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 여덟 번째 문자인 '헤드'(*)로 시작되는 문구로서 정직한 자의 성질을 묘사한다. '어질고 자비하고 의롭다'란 말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수식할 때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111:4 주석 참조).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임을 지적하고자 한 것 같다.

성 경: [시112:5]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 아홉 번째 문자인 '테드'(*)로 시작되는 문구이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을 좇아 행하는 자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들고자 한다. 본절과 9절에서는 한마디로 '관용'의 성품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있다. 이러한 주제는 이미 4절 하반절에서도 암시된 바이다. 특히 본문은 부요한 자에게서 흔히 드러나는 병폐를 역으로 경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재물이 갖는 힘은 흔히그것을 남용하도록 유혹하는 법이다(Kidner). 여기서 '잘 되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좋다', '보기에 좋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좋게' 보셨다(창 1:4, 10). 그리고 렘 33:11;애 3:25 등에서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 이 문구는 열번째 문자인 '요드'(*)로 시작되는데 직역하면 '그의 공의로 그의 일들을 처리할 것이다'이다. 이것은 의인이 공정한 분별력을 가지고 자기의 일들을 처리해가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억압하거나 속이지 않고 스스로도 낭비하거나 사치하는 일 없이 매사에 검소하게 살아나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드바리'(*)는 그 의미가 다소 불명확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를 '말'에 해당하는 '다바르'(*)의 복수로 해석하여서 이 어구를 '심판대에서 그의 말들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고대의 몇몇 역본에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해석에 따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의인이 자기의 일을 형통하게 처리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앞의 어구와 문맥상 잘 어울린다.

성 경: [시112:6]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 11번째 문자인 '카프'(*)로 시작된다. 문두의'키'(*)에 대해서는 (1) 원인을 설명하는 접속사로 보고 본문을 5절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For the righteous..., RSV) (2) '분명히', '확실히'라는 뜻의 강조사로 보는 견해(Surely..., KJV, NIV) 등이 있으나 문맥상 굳이 원인과 결과의 구문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와 겸손한 자를 지켜주시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혼란이 와도 이들은 요동치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요동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모트'(*)는 '모트'(*)의 미완료형인데 66:9에서 '모트'는 '실족하다'란 뜻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민 4:10에는 명사로 쓰여 '틀'이란 뜻으로 번역되었다.

⭕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 12번째 문자인 '라메드'(*)로 시작되며, 직역하면 '기념을 위하여 의인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가 된다. 의인은 사후(死後)에도 그의 가족이나 그에게 도움을 입은 자들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기억케 하셨다는 111:4 내용과 적절한 평형을 보여준다(Anderson).

성 경: [시112:7]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 이것은 13번째 문자인 '멤'(*)으로 시작된다. 의인이라고 해서 인간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무제나 시련들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대한 반응은 판이하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소한 비난에도 두려워 떨지만(잠 10:24) 의인은 어떠한 중상 모략으로 자신을 모함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의 헛된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이다.

⭕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 14번째 문자인 '눈'(*)으로 시작되는 구절로서 앞 문구에 대한 원인을 설명한다. 하나님만을 의뢰할 때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직역하면 '그의 마음이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가 되며 '의뢰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타흐'(*)에서 파생된 '바투호트'(*)가 '담대함', '안전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면 이 동사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담대하고 안전한 상태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면서 그들이 '평안히'(*,바타흐) 거할 것이라고 하였다(겔 28:26). 여기서도 '평안히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을 뜻한다.

성 경: [시112:8]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그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 15번째 문자인 '싸멕'(*)으로 시작되며 마음이 정하여져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함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견고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무크'(*)는 '단단히 세우다', '버티다', '기대다' 등의 뜻을 가진 '사마트'(*)의 칼 분사형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는 구절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마음이 견고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뜻하며 마음이 견고한 자는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그 대적의 받는 보응을 필경 보리로다 - 이것은 16번째 문자인 '아인'(*)으로 시작되며 문자적으로는 '그 대적을 마침내 보리로다'가 된다. 여기서 '라아 베'(*, ...을 본다)라는 관용구는 흔히 대적들에 대한 승리를 뜻한다(54:7;59:10;91:8;118:7). 따라서 영역본 NIV처럼 'in triumph'(승리 가운데)를 첨가해도 무방하다(Vangemeren).

성 경: [시112:9]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 9절과 10절은 각각 세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구는 17번째 문자인 '페'(*)로 시작되는데 의인의 선한 행위와 너그러운 마음을 노래한다. 의인은 재물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궁핍한 자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과감하게 나누어 주는 용기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재하여서는 허영으로 탕진하고 만다. 한편 가난한 자에 대한자선과 구제의 의무는 성경의 중요한 명령으로서 신.구약 성경에 자주 언급된다(레25:35;신 15:7, 8;눅 11:41).

⭕ 그 의가 영원히 있고 - 이 문구는 18번째 문자인 '차데'(*)로 시작되는데 의인의 선한 행위에 대한 열매와 보상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 - 19번째 문자인 '코프'(*)로 시작되고 있다. '뿔'(*, 케렌)은 '힘', '능력' 또는 '자존심'을 상징한다. 자신의 뿔을 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만심과 교만에 사로잡힌 상태를 가리킨다(75:4). 그러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의인의 자비로운 행위를 기쁘게 보시고 그들의 위치를 더욱 높여서 권세와 영광으로 보상하신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2:10]

주제1: [의인의 복]

주제2: [의인이 누릴 지복한 삶]

⭕ 악인은 이를 보고 한하여 - 이 시편의 서두를 의인에게 임할 축복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한 시인은 이제 악인의 비참한 최후에 관한 묘사로써 마감하고 있다. 역경에 처한 의인에 대해 이를 갈며 덤벼드는 것은 악인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이다(35:16;37:12).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의인에게 닥친 역경이 축복과 번영으로 바뀌게 되면, 악인들은 증오와 시기에 사로잡혀 이를 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끝내는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VanGameren). 한편 본문은 20번째 문자인 '레쉬'(*)로 시작한다.

⭕ 이를 갈면서 소멸하리니 - 21번째 문자인 '신'(*)으로 시작되는데 '소멸하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마스'(*)는 '녹아 없어지다'는 뜻으로서 악인이 쇠가 녹듯 녹아져서 완전하게 파멸되는 것을 가리킨다.

⭕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 -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문자인 '타우'(*)로 시작된다. 악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찾지만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여기서 악인의 소욕은 의로운 자의 멸망을 바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성 경: [시113:1]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 '여호와의 종들'(*, 아브데 예화)이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을 뜻할 수도 있으나(134:1), 보다 넓게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34:22;69:36). 본문에서 '여호와의 종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 선 그들의 의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의 놀라운 특권 또한 강조하는 것이다(Anderson).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 이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음 받았으나 인간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그 영광을 경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찬양하라는 권고가 반복되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라는 의도에서 다시한번 찬송을 촉구하였다.

성 경: [시113:2]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 이는 어떠한 상황에 봉착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생애가 비록 긴 것 같으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 사실이므로 전생애에 걸쳐 하나님만을 찬송한다고 하더라도 극히 부족한 것이다. 우리가 이곳 장막 집을 떠나 새로운 집에 거하여 영원히 살게될 때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의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고도 이렇게 찬양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성 경: [시113:3]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찬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66:1, 4).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이 유대 민족이라는 특정 집단에게만 찬양받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행사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고 또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충한 제사장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 의해서만 분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성 경: [시113:4]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 하나님의 영광의 높으심에 대한 노래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찬란한 영광을 찬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불경건한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왜 그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는가하는 책망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에 등한히 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성 경: [시113:5]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 이 수사 의문문은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35:10;출 15:11;신 3:24;사 40:18, 25;46:5). 천상 천하(天上天下)에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유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무한히 크심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 인자하심 또한 무한함을 노래한다.

성 경: [시113:6]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 하늘 위에 초월해 계신 영광의 하나님이 연약하고 미천한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같은 관심으로 그들을 돌보시고 계심을 뜻한다.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돌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즉시로 혼란과 무질서, 범죄와 악으로 파멸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성 경: [시113:7]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 여기서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은 '허약한', '파리한', '가난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부당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출 23:3). 그리고 '진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는 흙이나 먼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비천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땅과 티끌에 비유한 바 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사 47:1)

⭕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그러했으며,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또한 그러하였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사건들을 접했을 때 우리는 이를 단순히 우연으로 돌려버려서는 안 된다. 자기 백성을 위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마땅한 것이다. 여기서 궁핍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비욘'(*)은 '부족한', '가난한' 등의 뜻으로서 앞어구의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과 비슷한 말이다. 그리고 '거름 무더기'에 해당하는 '아쉐포트'(*)는 '싹쓸어내다'란 뜻의 히브리어 '솨파'(*)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잿더미', '쓰레기 더미'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는 시온의 멸망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애 4:5).

성 경: [시113:8]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 미천한 처지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최고의 권세의 자리에 앉게 됨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우리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놀라운 변화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할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비천한 자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언젠가는 지배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방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느디빔'(*)은 '관대한', '귀족'이란 뜻을 가진 '나디브'(*)의 복수 형태이다. 한나의 기도에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시키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앉게 하시며"(삼상 2:8)란 내용이 있다.

성 경: [시113:9]

주제1: [영광의 찬송]

주제2: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 아마도 시인은 한나의 기도를 염두에 둔 것 같다(삼상 2:5).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무자(無子)함을 흔히 수치 혹은 심지어는 하나님의 저주로까지 여겨졌다(창 16:2;20:18;삼상 1:5;눅 1:24, 25).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바이트'(*)는 '가정'이나 '가족'을 뜻할 수도 있다(home, NIV, RSV).

⭕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 부귀 영화나 쾌락보다 자손을 갖는 것이 더 귀한 일이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과 같이 잉태치 못한 여자를 어미가 되게도 하신다. 여기서 '즐거운'에 해당하는 '세메하'(*)는 '기쁨', 특히(종교적인) '환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사야는 전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빛을 받고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9:3).

성 경: [시114:1]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 70인역(LXX)은 이 부분을 '엔 엑소도 이스라엘'(*)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뜻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시에'가 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출애굽과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쌍벽을 이루는 주요한 사건으로서 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전인류의 구속을 예표한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은 구약 신학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편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는 출애굽을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까지 한다(Kirkpatrick).

⭕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 전반절과 대구를 이루는 이 어구(語句) 역시 출애굽을 가리킨다. 여기서 '야곱의 집'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적 표현으로서 흔히 '이스라엘 집'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방언 다른 민족'으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암 로에즈'(*)는 번역된 우리말 대로라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을 뜻하지만, 칼빈(Calvin)은 이를 '야만적인 백성'으로 번역하고 있다. 칠십인역(LXX)은 이를 '바르바루'(*)로 번역하여 칼빈의 번역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애굽은 당시 최고로 번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애굽인들의 가혹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 같다(Parkhurst).그러나 어원적으로 따져볼 때 '로에즈'란 말이 후기 히브리어로 '외국어를 말하다'란뜻의 '라아즈'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더 정당한 것 같다. 타방언을 말하는 민족이란 성경에서 가끔 적대적인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사 28:11;렘 5:15). 참고로 '아즈'(*)란 형용사는 '강한', '잔인한', '야만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사야 25:3에는 이것이 '강한'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대구를 이루는 말이 '포학한'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말에는 '야만적'이란 개념도 포함되어있는 것 같다.

성 경: [시114:2]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 어떤이는 이곳의 유다가 솔로몬 사후(死後) 분열된 남쪽 유다 왕국을 가리키고, 다음 어구의 이스라엘의 북쪽 이스라엘 왕궁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출애굽 사건을 노래하고 있으므로 약 300년후에 일어날 사건과 이것을 결부시킨다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부적절한 해석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 당시 유다 지파가 하나님 섬기는 일을 위임받았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어구가 다음 어구인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란 말씀과 대구를 이루며 같은 개념을 반복 표현한 내용이란 점에서 이곳의 유다를 유다 지파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한 해석이다. 이는 솔로몬 이후의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켜 '에브라임'이라고 지칭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 당시 유다는 모든 지파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 또 가장 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유다 지파의 지역에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과 신약적 관점에서 메시야가유다 지파에서 나온다는 점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한다(Phillips). 한편 '성소'를 뜻하는 '카데쉬'(*)는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사물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인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족속으로 삼아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하셨음을 뜻한다(Anderson, Mowinckel).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 때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휘장을 만들어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도록 명령하셨다(출26:31-37). 그리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 불리웠다(사 52:1).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흔히 가리키는 바, 108:7에는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란 말씀이 있는데 이는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다를 하나님의 성소로 삼는다는 것에는 오래 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4:3]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하얌 라아 와야노스) - 직역하면 '그 바다는 보았고 그리고 달아났다'이다. 여기서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는데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에 해당하는 '라아'는 직접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여기에 대명사 접미어를 첨가하여 이를 '라아후'(*)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임재를 내포하는 언약궤나 여호와의 권능 등의 개념이 목적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 요단은 물러갔으며 - 1절의 두 평행 어구와 2절의 두 평행 어구가 동일한 내용을재차 반복하여 표현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전반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런 점을 들어 앞 문구의 '바다'가 사해 바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ahood). 수 3:14-16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상세히 밝히면서 '바다'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수 3:16). 그러나 홍해를 건넌 사건과 요단을 건넌 사건은 둘 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또한 가나안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이 둘이 대구를 이룰 만한 동일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바다를 오히려 홍해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성 경: [시114:4]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 이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질 때 일어난 지진(출 19:18)을 시적인 기교로 묘사한 것이다(Alexander). 여기서 '뛰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카드'(*)는 짐승이 '깡총깡총 뛰다', '춤추다'라는 의미이다(사 13:21).

⭕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 이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는 산들도 떨면서 굴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작은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브아'(*)는 '언덕'이란 뜻으로서 작은 도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시114:5]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 3절과 4절에 '바다-산'의 비유가 쓰였던 것과 똑같이 본절과 6절에 다시 '바다-산'의 비유가 나타난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보고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비록 이 시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명령 없이 요단 강의 물이 저절로 물러설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재촉하는 노래인 것이다.

성 경: [시114:6]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어찜인고 - 4절 내용의 반복이다. 기자가 이렇듯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유는 구속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권능을 강조하여 언급함으로써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경배케 하기 위함이다.

성 경: [시114:7]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 앞 두 구절에서 시인은 산과 바다의 동요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질문하였다. 그리고 본절에 와서 그는 땅을 의인화시켜서 자신의 질문에 대해 답한다. 한편 '떨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훌리'(*)인데 어떤 주석가들은 고대 역본의 예를 들어 이를 과거 완료형으로 보고 '땅이 떨었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 완료형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명령형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내용상 '떤다'는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임하심을 감당할 수 없이 떤다는 의미이다(계 20:11 참조). 영역본 NEB의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와 강림을 땅이 즐거워한다는의미에서 '춤추다'(dance)로 번역하였다. 물론 히브리어 '훌'(*)은 '춤추다'는의미도 지닌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오히려 '떨다'가 무난하다(Tremble, KJV, NIV,RSV). 한편 여기에는 하나님을 '주' 곧 '아돈'(*)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땅의 소유주이며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뜻한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널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아돈'이란 말로 호칭되었다(수3:11, 13).

성 경: [시114:8]

주제1: [이스라엘 역사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주제2: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

⭕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 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이적을 찬양하는 부분이다(출 17:6).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였다.

⭕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 이것은 돌이 물로 변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돌에서 물이 나왔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차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할라미쉬'(*)인데, 신명기에서는 '굳은 반석'으로 번역되었다(신 8:15;32:13).

성 경: [시115:1]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주께만 돌릴 영광]

⭕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이 말씀은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강렬한 호소이다.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며, 따라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기 위해서는 주의 백성이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보드'(*)는 원래 '풍부함', '부유함', '영예로움', '영광'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욥은 자신의 재물과 지위가 하루아침에 박탈당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욥 19:9). 또한 웃시야 왕이 여호와의 전에서 분향하려고 했을 때 제사장 아사랴는 그의 교만된 행동을 이렇게 책망하였다.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 한편, 모든 영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앞 문구의 반어법적인 비탄의 호소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호소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택한 이상 결코 버리시는 일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이며 모든 간구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쉠'(*)은 '명성'(창 11:4)이나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실체'(사 60:9)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 경: [시115:2]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주께만 돌릴 영광]

⭕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저희들의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왜 열방들이 말합니까 ?'이다.그러나 '어찌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는 헬라어 '메포테'(*)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는 '...하지 않도록'(lest)에 가까운 뜻을가진다. 창 27:45에는 에서를 속이고 야곱이 축복받은 후 리브가가 야곱에게 하는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여기서 '어찌'에 해당하는 '라마'가 70인역(LXX)에서는 '메포테'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하루에 너희 둘을 잃지 않도록하기 위해 네 형을 피해 라반의 집에 가 있으라'는 의미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라마'도 '메포테'로 번역하면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으냐고 말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은 '민족', '백성'이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때도 쓰이나(렘5:9) 주로 이방 백성들을 가리킬 때 쓰인다(대상 14:17).

성 경: [시115:3]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주께만 돌릴 영광]

⭕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 이는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는 이방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켜 지역신으로 본다거나 하나님의 무한성을 반대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다음 문구에서도 분명히 제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처럼 어떤 틀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시며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을 나타내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하나님은 주권적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심판도 행하시며 구원도 베푸신다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손길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이 경우마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전격적으로 뒤바꿔버릴 수 있는 분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가장 적절한 시기까지 침묵하기도 하신다(Calvin).

성 경: [시115:4]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우상의 무능함]

⭕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 여기서 '우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차빔'(*)은 '제작하다', '만들다'의 뜻인 '아차브'(*)의 복수로서 항상 복수로만쓰인다.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만든 것을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임을 물론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히 불경스러운 일이다. 한편, 본절 이하에 묘사된 우상에 관한 설명들은 135:15-18;사44:9-20;46:6, 7;렘 10:1-9;합 2:18, 19 등의 내용과 유사하다.

⭕ 사람의 수공물이라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손의 작품'이란 뜻이다(thework of men's hands, KJV, RSV).

성 경: [시115:5]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우상의 무능함]

⭕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최소한의 신성(神性) 지각 능력조차 갖추고 있지 못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비록 사람들이 금과 은을 귀중한 금속으로 여기고 있긴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신(神)이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시인은 이들 귀금속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서 존경심과 어떤 능력을 찾는 사람들의 어리석과 완악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이 말씀은 앞 문구와 같이 우상의 무능을 지적한 것으로서 그 당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우상에 각 지체를 만들어 놓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렘 10:5).

성 경: [시115:6]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우상의 무능함]

⭕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이같이 허황된 물건을 만들어 놓고서는 거기에 어떤 도움을 구하고 복을 빌지만 이는 다 헛된 것이다. 모든 생명과 능력 그리고 길흉 화복(吉凶禍福)은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을 뿐이다.

⭕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주술적 의식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즉, 이방인들은 의식(儀式)을 통해 우상이 신(神)과 영적으로 결합되며 생명을 부여받아 신의 특성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에는 라반이 달아난 야곱을 뒤쫓아와서 '자기의 신'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창 31:30).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방황할 때에 백성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외쳤던 일이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의 행위로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다.

성 경: [시115:7]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우상의 무능함]

⭕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하나님께는 우리를 도와줄 인자와 능력이 풍성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걷지도 못하며 감각도 없는 지극히 무기력한 무생물에 불과한 형상들에게 자신의 부족한 것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하반국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나무더러 깨라 하면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 19).

⭕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 5절에는 우상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소리의 종류가 본문의 다른 것이었던 것 같다. 즉,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단어를 구사하여 의사 소통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본문의 목구멍으로 소리를 낸다는 말은 애증(愛憎)이라든지 기쁨이나 슬픔의 기본적인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단순한 소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최소한 짐승이라도 낼수 있는 최소한의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이방신들의 허황된 모습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D. N. Freedman).

성 경: [시115:8]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우상의 무능함]

⭕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 이는 우상을 섬기는 자는 그들이 섬기는 나무 기둥이나 돌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무기력하고 우매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 최소한 생물과 무생물정도는 누구라도 구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 우상 숭배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제품을 하나님으로 섬길 정도로 미련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 것이다.

성 경: [시115:9]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라]

⭕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에즈람 우마기남) -이는 '그들의 도움과 그들의 방패'라는 뜻으로서 본절 전반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을향하여 직접 권명하다가, 하반절에 와서는 갑작스럽게 3인칭 복수형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있다. 아마도 전반절에서는 큰소리로 이스라엘을 향해 말한 반면, 하반절에서는 자그마한 소리의 독백투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Alexander).

성 경: [시115:10]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라]

⭕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 앞 구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촉구하였으며, 여기서는 아론의 집을 향하여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이런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특별하게 구별하사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으며, 그중에서 아론의 집은 제사장으로 세우사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똑같은 말이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방패'에 해다하는 히브리어 '마기남'(*)은 '마겐'(*)의 복수형으로서 창 15:1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보호자임을 약속하실 때 이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는데, 아브람이 롯을 구한 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성 경: [시115:11]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여호와를 의지하라]

⭕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 이 말의 문자적 번역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여호와를 의지하라'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이긴 하지만 전후 문맥상 이것은 각 개체나 소그룹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점층법을 사요하여 9절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언급하였고, 10절에서는 그 일부인 특수 계층을 지칭하는듯 하기 때문이다(Alexander). 한편 '경외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에'(*)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란 뜻의 동사 '야레'(*)에서 출(34:29, 30;렘 3:8) 파생된 명사이다.

⭕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내세웠으나 그들은 조상들의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하나님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였다(마 3:9).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무조건적인 도움과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 경: [시115:12]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기원]

⭕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 여기서부터는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기를 기원하고 또 확신하는 내용이 시작된다(15절까지).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구를 과거(혹은 현재 완료) 시제로 해석하여 지난 날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이적과 자비를 회고하며 앞으로 동일한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고 본다(The Lord hath been mindful of us,KJV). 그리고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시편에서 빈번히등장하는 말로서 사람을 주어로 가질 때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람을 마음속에 다시 떠올린다'는 뜻이다(욥 11:16). 그리고 이 동사가 하나님을 주어로 취할 경우는 흔히'고난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본다'는 의미로 쓰인다(애 3:19).

⭕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트'(*)는 거처로서의 집뿐만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가문이나 가족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돔 성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公道)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베트'는 '권속'으로 번역되었다.

성 경: [시115:13]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기원]

⭕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라면 가장 연약하고 멸시를 당하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간과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므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낮고 천함이나 부하고 존귀함이 은혜받는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작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톤'(*)은 '보잘것 없는 자', '중요하지 않은 사물'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아모스 선지자는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뜯어 먹어 버리는 이상을 보고서 이스라엘 족속이 보잘것 없는 연약한 민족임을 호소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암 7:2). 그리고 '큰 자'에 해당하는 '가돌'(*)은 숫적. 양적으로 많은 것이나 위대한 인물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창 4:13;삼상 25:2).

성 경: [시115:14]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기원]

⭕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너희 위에 그리고 너희 아들들 위에 더하시리라'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은 숫적인 증가나 재산과 명예의 증가외에 영적인 축복도 포함한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가 증가하며 은혜와 기쁨도 증가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후손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질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성 경: [시115:15]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기원]

⭕ 너희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란 사실이다. 예수께서도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 10:26 이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든 만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떨게 된다(잠 28:1). 그리고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는 부러워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 사용된 동사는 '아사'(*)인데, 창 1:1의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였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냄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이는 반면, 본문의 '아사'는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에 대해 주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효 적절하게 운영해 나가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규례와 명령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그 이유로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서도 '아사'가 쓰였다. "너희가 여호와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목도하였느니라"(신 11:7). 하나님은 천하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이를 당신의 뜻대로 운영해가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는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며, 설령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그에게는 궁극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성 경: [시115:16]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이스라엘에 대한 기원]

⭕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하솨마임 솨마임리화)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 하늘들, 하늘들은 여호와께 속했다'이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두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첫째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하늘은 여호와께 속한 하늘이다'(The heavens are the Lord's heavens, RSV)란 뜻과, 둘째 '하늘의 하늘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The highest heavens belong to the Lord, NIV)란 뜻이 그것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등 많은 고대 역본들은 이를 두 번째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148:4의 '쉬메이 하솨마임'이 '하늘의 하늘'로 번역된 것과 비교했을 때도 후자의 번역은 타당성이 있다. 이런 번역을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처소가 참으로 무한하고 광대함을 노래한 것이다(3절 주석 참조).

⭕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 하늘이 하나님의 것이고 땅은 사람의 것으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인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과 행복은 인간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공로와 노력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감사 찬송의 동기가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어떤 주석가는 '주셨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탄'(*)을 '맡기셨다', '위임하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신 10:14의 말씀이 제시되고 있다. 거기서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따라서 사람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참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위해 땅을 관리, 보관할 책임과 권리를 위임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나탄'에 내포된 '위임'의 개념을 더 설명하자면 창 39:4의 말씀을 들 수 있다. 거기서는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이 가사 일을 요셉에게 위임하는 내용이 이 용어로써 묘사되어 있다.

성 경: [시115:17]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찬양의 서원]

⭕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 이것은 죽은 이후에는 영적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생명을 주신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찬양하라는 권고인 것이다.

⭕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침묵으로 내려가는 자 모두도 못한다'이다. 여기서 '침묵'은 말할 것도 없이 '음부' 곧 '스올'을 가리킨다. 따라서 산 자는 살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우리의 해야 할 바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적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두마'(*)로서 '침묵', '정적', 또는 상징적으로 '죽음'을 뜻한다. 한편, 이사야 21:11에는 '두마에 관한 경고'란 말이 등장한다. 이때 '두마'는 에돔의 다른 이름인 듯하나, 이어서 계속되는 에돔에 관한 경고의 예언을 살펴보면 '두마'가 고통과 암울함을 암시하는 밤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시115:18]

주제1: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

주제2: [찬양의 서원]

⭕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건재(健在)할 것임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영원히 송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7절).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삶은 설령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멸망할 사람들 틈에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면 이 세상은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 가운데서 노아를 구원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인류 보존과 생육.번성의 축복을 다시 주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이와같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6: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 이 문구의 무자적 번역은 '여호와께서 목소리 나의 호소를 들으시기 때문에'인데, 여기서 '목소리 나의 호소'는 히브리어 원문상 '이트 콜리 타하누나'(*)로서 다소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다. 전통적으로는 '콜리'(*)를 '나의 음성'으로 해석하는데 이는 끝 어미 '이'(*)를 1인칭 소유격인 '나의'(my)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여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으나 그다지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타하누나' 역시 이와 같은 어미를 가지고 있는데, 원문상 '콜리'와 '타하누나'에는 접속사 '와우'(*)가 없으므로 이를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따라서 '콜리'의 어미는 목적 소유격(the objective genitive)으로보는 것이 원문의 의미를 좀더 살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어구는 '여호와께서 자비를 요청하는 나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타하누나'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단어는 '호의를 보이다', '은혜롭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하난'(*)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일차적으로 '호의 또는 은혜를 요청하는 간구'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다니엘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속을 간구하는 기도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단 9:18). 여기서도 알 수 있다시피 시인의 간구는 단순히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일방적인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한 간구인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도 무조건 자신의 요구 사항만 하나님께 나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요구 사항을 하나님께 제시해야 할것이다.

⭕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임을 보여준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떠한 존재로부터도 기쁨을 누리거나 안식을 얻을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한편, 본문의 히브리어는 '아하브티'(*)인데 어떤 이는 이 말의 어미를 3인칭 단수 목적 소유격 어미로 해석하여 '그의 사랑'(his love)으로 이해한다. 이럴 경우 본절 전체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 안에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사 63:9의 내용이 제시되는데 이곳의 '베아하바토...후 게알람'(*)은 '그 사랑으로...구속하셨다'라고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다음가 같은 성경 구절에도 이와 유사한 어구가 등장한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그러나 이런 해석이 가능하긴하나 여기에는 맛소라 사본의 모음에 대한 변경을 요청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맛소라 사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성 경: [시116: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 본절 서두에는 이유나 시간 등의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접속사 '키'(*)가 쓰이고 있는데 영어로는 'that', 'for', 'when' 등으로 번역된다. 본절외에 1절에서도 이 접속사는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의미로 쓰였는데 둘다 강조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진실로'라고 번역하는데 타당성 있는 주장인 것 같다(M. Dahood). 참조로 칼빈(Calvin)은 이를 시간의 접속사(when)로 보아 '...할 때'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구할 바를 당신에게 아뢸 것을 명령하셨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50:15)고 약속하셨다.

⭕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베야마 에크라'(*)로서 문자적 의미는 '그리고 나의 날들 동안에 내가 부르리라'이다. 여기서 '에크라'는 '부르다', '선언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카라'(*)의 미래형인데 '카라'는 '소리쳐 부르짖다', '큰소리로 읽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처는 요셉을 모합하면서 자신이 소리쳐 보르는 것에 놀라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다가 도망하였다고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으며(창 39:14), 예레미야는 유다의 심판을 경고하는 중에 이 말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렘 3:4). 한편, 칼빈은 여기에 '카라'의 미래형이 쓰인 것을 두고 1절의 '들으시므로'라는 동사와 연결시켜 이 둘이 시간의 전후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즉, 1절의 동사는 과거 시제로 해석하고 본절은 그에 대한 결과로서 미래 시제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 두 동사 모두가 미래 시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관용적 표현으로서 흔히 이렇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16: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사망의 줄이 - 히브리어 원문은 '헤블레 마웨트'(*)인데 여기서'줄'로 번역된 '헤블레'는 '줄'뿐만 아니라 '집단', '무리'란 뜻도 가지고 있다. 사물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난 후 그가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삼상 10:5). 그러나 이보다는 속박이나 구속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 더 보편적인 용례이다(사 5:18). 그리고 이 단어의 어근인 '하발'(*)은 '묶다'란 뜻의 동사인데 피엘(Piel)형은 '고통을 주다'란 뜻을 가진다. 여기에 근거해서 이 단어를 살펴보면 욥 39:3에서의 번역과 같이 '고통', '괴로움'의 뜻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거기서는 하나님이 욥의 무지를 지적하면서 사슴의 산고(産苦)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헤벧르'가 바로 그런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 '사망의 줄'이란 제물을 묶어 죽이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 나를 두르고 - 이 말의 원어는 '아파푸니'(*)로서 고통이 주기적으로반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시인을 괴롭히는 사망의 줄이 시시 각각 그를 죄어오면서 그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음부의 고통이 - 이는 '사망의 줄'과 대구를 이루는 말로서 원문은 '우메차레 쉐올'(*)이다. 어떤 학자는 '고통'에 해당하는 '메차레'를 '사자'(messenger)와 관련있는 말로 보고 사망이 사자를 보내 그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그 근거로서 그는 잠 16:14을 들고 있다:"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또한 어떤 학자는 이 '메차레'를 '그물'로 보고 구약에서는 그물이 사망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Fry). 이 어구는 또한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아 좁은 길로 몰아넣어 도망치지 못하게하는 비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다의 멸망을 슬퍼하는 중에 예레미야는 비유로 이렇게 노래하였다:"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애 1:3). 이렇게 볼 때 시인은 사망이라는 사냥꾼에게 쫓겨 이제 더 이상 사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게 미치므로 - 이 문구의 히브리어는 '므차우니'(*)로서 '나를 찾아 만났다'는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욥의 한탄에는 무덤을 찾아 얻으면 기뻐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욥 3:22),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성 경: [시116: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 이는 기도뿐만 아니라 찬양의 노래에도 흔히 등장하는 공식적 문구이다. 3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극심한 환난에 직면한 시인은 유일한 돌파구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고자 했다. 오직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라봄으로써 문제 해결의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시인의 믿음과 열망을 본 시편에서 거듭반복되는 내용이다(2, 13, 17절등).

⭕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 '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애곡하다', '슬퍼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 19:8에는 애굽의 심판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으며 거기서 '아나'는 '탄식하다'란 말로 번역되고 있다. "어부들은 탄식하며 무릇 나일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는 슬퍼하며 물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 '영혼'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는 '살아있는 실체', '생명', '자아', '인격', '소망', '감정'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욥 14:22에는 '네페쉬'가 인간의 내적인 존재란 의미로 쓰이면서 '마음'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레 11:46에는 이것이 '생물'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를 영적인 측면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성 경: [시116: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 '은혜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눈'(*)은 성경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킬 때를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이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채무자의 부르짖음을 듣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서, 신자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가리킬 때 쓰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성품을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34:6). 그리고 '의로우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디크'(*)는 '정당한', '바른'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정당한 행동이나 올바른 처신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는데 창 38:26에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잉태한 것을 두고 유다가 그녀의 항변을 듣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세의 마지막 노래 중에는 하나님의 이 같은 정당하고 올바른 통치가 언급되고 있다(신 32:4). 따라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은 평화와 안식의 나라이며 불만과 불평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세상의 불의와 정직하지 못한 것을 타파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 '자비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훔'(*)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심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merciful,KJV;full of compassion, NIV).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레헴'(*)이란 명사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며, '라함'(*)이란 동사는 '사랑하다', '동정심을 갖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을 감안하면 이 '라훔'이란 말은 어머니가 자기 자식의 희노 애락에 함께 공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해 세심한 애정을 베푸시는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오엘 선지자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할 것을 촉구하며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욜 2:13). 한편, 우리는 여기서 누구를 기도대상으로 섬기고 따라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자녀가 자기 부모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부르짖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제쳐 두고 다른 어떤 것에 기도드린다는 것은 참람(僭濫)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도의 대상은 은혜로우사 기도에 귀기울여 주는 분이 되어야 하며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 되어야 하고 또 자비로우사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한다. 이런 자격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

성 경: [시116: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 '어리석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티'(*)는 '마음이 열려 있는 자', '단순한 자', '무슨 말이든 믿는 자'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는 경험이 부족하며 무력한 자라는 뜻을 암시한다(Anderson). 따라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완고한 어리석은 자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보존하다'에 해당하는 '솨마르'(*)는 '지키다', '지켜 보다', '보존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창 37:11에는 이것이 '마음에 간직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을 어리석고 어린 자라고 묘사하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악한 자들의 계략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을 지켜 주실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자아를 포기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을 때 발휘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다.

⭕ 내가 낮게 될 때에 - '낮게 되다'의 히브리어 '달랄'(*)에는 이외에 '연약하다', '비틀거리다', '실패하다', '매달리다'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욥은 광산의 갱내에서 광부들이 매달려 흔들거리는 모습을 이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욥28:4). 따라서 이는 불안정하고 위험하며 모든 것이 고갈되어 버린 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나를 구원하셨도다 - 이는 시인이 극한 상황에서 건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언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리석고 보잘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안전하며 결국 그들에게는 승리가 주어질 것이다.

성 경: [시116:7]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 시인은 여기서 대화의 대상을 자기 영혼에게로 돌린다. '평안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메누하'(*)는 '휴식'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미가 선지자는 동족(同族)의 재산을 빼앗고 교만하게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쉴 곳'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떠나라고 말한다(미 2:10). 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할 곳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땅임을 말하고 있다(신 12:10). '메누하'는 또한 평화와 태평 성대(太平聖代)를 뜻하기도 하는데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를 마치고 백성들을 축복하며 '태평'에 대해 언급하였다(왕상 8:56). 이상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평안함'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안식과 평화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평안함'이란 것이 이 세상에서의 부귀나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평화도 포함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 이 구절은 접속사 '키'(*)에 의해 인도되는 원인절로 볼 수 있는데,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후대하심으로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후대하다'의 히브리어 '가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관대하다', '젖을 떼다', '무르익다' 등으로 해석된다.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사울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삼상 24:18). 모세의 마지막 노래에는 이것이 '보답하다'는 뜻으로 쓰였다(신 32:6). 시인은 배은 망덕(背恩忘德)한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함께해 주심과 구원 베풀어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

성 경: [시116:8]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 '사망'에 해다하는 히브리어 '마웨트'(*)는 자연사(自然死) 또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키며 죽음의 상태나 죽음의 장소도 뜻한다. 시인이 어떤 종류의 난관에 처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좌우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위기로부터 벗어났음에 분명하다.

⭕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 이는 하나님이 시인을 후대해 주신 내용이며 시인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평안함에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사망에서 그를 구해 주셨고 더 나아가 큰 은혜를 베푸사 슬픔의 원인을 제거해 주셨으며 그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지켜 주사 넘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는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구원과 후대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어야 하겠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망각하고 항상 불만과 원망 속에 물질적인 것만 찾아 다니기 때문이다.

성 경: [시116:9]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내가 생존 세계에서 - '생존 세계'는 '산 자의 땅'으로 버역할 수도 있겠다. '생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인데 하나님을 수식할 때에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사신 분을 뜻한다(수 3:10). '생존세계'를 이러한 뜻과 결부시키면 아마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시인은 사망의 세계에서 건짐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그의 장래의 삶을 하늘에 계신 여호와의 면전에서 살아가고자 다짐하였던 것이다.

⭕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 '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 동사인 '할라크'(*)는 구약 성경에 매우 자주 언급되는 말들 중 하나이다. 이것은 '걷다', '행동하다', '연습하다', '돌아다니다'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본문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성 경: [시116:10]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 히브리어상으로 볼 때 영역본 중 RSV의 번역이 가장 원문에 가까운 것 같다(l kept my faith, even when I said..., ...라고 말할 때조차도 나는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 즉, 기자는 심각한 역경 중에서도 진정한 믿음의 교훈을 굳게 부여잡았던 관계로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VanGemeren), KJV는 70인역(LXX)의 해석과 동일하게 '나는 믿었으며, 따라서 ...라고말했다'(l believed, therefore have l spoken)라고 옮겼다. 한편, 사도 바울 역시 본문을 70인역에 근거하여 인용한 바 있다(고후 4:13). '믿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은 '세우다', '진실하다', '신뢰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아멘'이란 말도 '아만'에서 파생된 부사로서 '확증적으로', '진실로'란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가 히필(Hiphil)형으로 쓰이면 주로 '굳게 서다', '신뢰하다','믿다'의 뜻으로 쓰인다(신 1;32;사 7:9). 본문에서 시인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결과, 이를 토대로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 이 문구의 히브리어는 '아니 아니티 메오드'(*)로서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크게 고난을 당하였다'란 의미와 '내가 재난에 의해 유린되었다'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큰'으로 번역된 '메오드'는 '많음', '풍부함'이란 뜻을 가진 남성 명사인데 부사로도 쓰이는 말이다(창1:31). 그런데 어떤 학자는 '메오드'가 히브리어 전치사 '멤'(*)과 재난이나 곤경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드'(*)가 결합된 것으로 보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18:18에는 '욤 에디'란 말이 나오는데 개역 성경은 이를 '재앙의 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이 어구는 시인이 사경(死境)을 헤매었던 위기의 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상의 난제는 없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 보아야 할점은 시인이 비록 과거의 고난을 재차 회상하고 있긴 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이 당한 고난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람들이 엄청난 불안과 쓰라린 고통을 자기에게 안겨 주었긴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건져주셨고 이로 인해 시인은 더욱 굳건한 신앙관을 확립하고서 자신의 고난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시116:11]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응답]

⭕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 - '거짓말장이'에 해당하는 '코제브'(*)는 '거짓말하다'란 뜻의 '카자브'(*)에서 나온 말로서 '위증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우상'을 가리키기도 하며(암 2:4), 주로 '식언(食言)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민 23:19). 한편, 혹자는 시인이 여기서 모든 사람을 가리켜 거짓말장이라고 한 것을 다소 냉소주의적인 자세로 세상을 비관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아마도 그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고 또 큰 고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다소 왜곡된 태도를 취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 근거로서 본절 서두의 '경겁 중에'라는 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본문은 당황하는 중에 잘못 발설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고백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나을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온갖 시련과 두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인생의 도움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시116:12]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 문자적 해석은 '나에 대한 그의 모든 유익한 것들을'이다. '은혜'에 해당하는 '타그물로히'(*)는 '적절하게 대우하다', '선대하다' 등의 뜻을 가진 '가말'(*)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유익한 것','수여된 것'이란 뜻으로 쓰인다. 이 단어의 어미 '히'(*)는 순수한 아람어 어미이지만 시적인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시에서 가끔 쓰인다. 산문체에서는 이 말 대신에 여성형인 '게물라'(*)가 많이 쓰이는데 이는 주로 '보응', '보복'의 뜻으로 번역된다(렘 51:56). 한편, 하나님이 시인에게 허락하신 유익한 것들의 내용은 죽음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으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영적인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무엇으로 보답할꼬 - 문자적으로는 '내가 무엇을(어떻게) 여호와께 돌려드러야 할까 ?'로 번역된다. 여기서 '무엇'(어떻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가 의문 부사로 쓰이게 될 경우, 이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나타낸다. 이렇게 의문부사로 해석하면 이 어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유다는 그의 동생 요셉에게,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잔이 발견된 사실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내 주께 '무슨'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창 44:16). 그리고 '보답할꼬'에 해당하는 '아쉬브'(*)는 '되돌아가다'란 뜻의 '슈브'(*)에서 나온 말이다.

성 경: [시116:13]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 '구원의 잔'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1) 감사제의 일부로서 드려졌던 전제(奠祭, 민 28:7). (2) 구원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 이 경우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잔과 대조된다(사 51:17;렘 25:15). (3) 어떤 특정한 시련과 연관되는 잔(민 5:16-28 참조). (4) 감사제의 식사 때에 사용하는 포도주 잔. 이중에서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 잔은 감사의 표현으로서 여호와께 드려지는 그 무엇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Anderson).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우베쉠 에화 에크라) - 분자적으로는 '그리고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것은 공중집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며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로 쓰이는 공식적 어구인 '카라 베쉠 예화'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 같다. 한편, 본 구절은 앞 구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의 내용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보답이란 것은 극히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점을 잘 알고 계시므로 은혜에 보답하려는 인간의 최대한의 노력과 성실한 자세를 보시는 것이다. 우리의 감사 예배가 하나님께 어떤 큰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와 찬송을 기꺼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감사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6:14]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앞에서'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그다-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원래 '...앞에서'란 전치사는 '네게드'(*)인데 여기에 '아'(*)와 '나'(*)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아'는 전치사 '네게드'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나타내는 접미사인 것으로 보이며, '나'는 이중전치사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가나안 셈계 북서부 방언에는 이런 이중 전치사가 흔히 등장하는데 이 방언에 따르면 전치사 '베'(*)는 '벤'(*)으로, '라멕'(*)은 '렌'(*)으로, 쓰였다고 한다. 즉, 이중 전치사란 단순형 전치사와 여기에'눈'(*)을 덧붙인 강조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전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드려야 했기 때문에 이 같은 강조형을 사용한 것으로보인다.

⭕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 '서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데르'(*)는 원래 '이렇게 해 주시면 저렇게 하겠다'는 형식의 약속을 뜻한다(삼하 15:7, 8).한편 서원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민 30:1-8 강해, '서원(誓願)과 맹세에 대하여'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갚다'에 해당하는 '솰렘'(*)은 '완수하다', '끝맺다','보답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왕상 7:51;렘 51:56). 한편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위급한 순간에 시인이 하나님께 서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모습에서 지난 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망각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신앙 자태를 배울 수 있다.

성 경: [시116:15]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이 구절의 문자적 번역은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의 눈에 귀중하다'이다. '성도'에 해다하는 히브리어는 '친절한', '경건한', '자비로운'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 '하시드'(*)의 복수형인데, '하시드'란 말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나타내는 '헤세드'(*)란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성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성품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삼하 22:26). 그리고 '귀중히'에 해당하는 '야카르'(*)는 '값이나 가치가 높은', '영광스럽고 찬란한', '영향력 있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욥 31:26). 요컨대,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생명은 불신자들의 생명처럼 무가치한 것이 아니므로 결코 아무런 가치없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있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성도의 생명이 때로는 사악한 자들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는 일이 있어도,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성도의 생명이 때로 무참하게 또 아무런 영광도 없이 훼파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성도의 생명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성도의 사후(死後) 세계가 하나님의 면전에 펼쳐질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동사가 없는 것에 착안하여 '야카르'란 형용사를 이 말의 동사형인 '야카르'의 피엘형으로 보기도 하나 해석상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죽음'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마웨타'(*)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주로 '마웨트'(*)로 기록된다. 이것은 아마 '마웨트'의 감상적인 표현이거나 아니면 운율을 맞추기 위한 소유격 어미 '헤'(*)가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시116:16]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 시인은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나 예화'(*)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나'(*)는 '아나'(*)로도 표현되는 일종의 감탄사인데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아 !','이제 !', '당신께 간구하오니 !' 등으로 번역된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하라"(창 50:17). 시인은 4절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면서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란 어구 앞에는 시간, 이유 등의 뜻을 담은 접속사 '키'(*)가 쓰이고 있으므로 이 구절은 '내가 주의 종인 까닭에 기도하옵나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 '여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마테카'(*)인데 이것은 '아마'(*)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으로 주로 여종 자신이자기를 칠할 때 쓰이는 말이다(룻 3:9).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신앙심 깊은 어머니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종의 아들'에 해당하는 '벤-아마테카'(*)를 어떤 주석가는 '당신의 신실함의 아들'(Dahood, NIV 난하주)로 해석하여 10절의 '내가 믿는 고로'란 말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아마테카'를 시인의 모친으로 해석한다. 이는 시인이 출생 전 곧 어머니의 태(胎)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주의 종으로 택함받았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 이 말의 히브리어는 '피타흐타 레모세라'(*)이며 '풀다'에 해당하는 '피타흐타'는 전통적으로 완료형인 것으로 해석되는데 어떤 주석가는 4절의 경우에서와 같이 감탄사 '아나'(*) 다음이기때문에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나의 결박을 푸소서'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결박'은 3절에 언급된 '사망의 줄'과 연결되는 말이다.

성 경: [시116:17]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 본절과 18절은 13, 14절과 평행을 이루며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한편 '감하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제바흐 토다'(*)인데 '제바흐'는 '희생', '제사'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감사'에 해당하는 '토다'는 원래 '손을 펼침'이란 의미인데 함축적으로 '자복', '경배' 혹은 '감사(제)' 등을 뜻하는 말이다. 율법에는 감사제가 화목제에 포함되어 드려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레 7:13, 14).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그 서원을 갚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형식의 서원이 물고기 뱃속의 요나 입에서도 나온다:"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성 경: [시116:18]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내가...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 이 구절은 원문상 14절과 똑같은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서원을 갚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밀한 곳에서도 감사하고 찬송을 드려야 하지만 또한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6:19]

주제1: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

주제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

⭕ 네 가운데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토케키'(*)에서 어미 '키'(*)는 강조 접미사로 흔히 설명된다. 따라서 '베토케키'는 '...안에'란 뜻의 전치사 '베'(*)와 '사이', '중간'의 뜻을 가진 명사 '타웨크'(*), 그리고 강조 접미사 '키'로 구성되어 있다.

⭕ 여호와의 전(殿) 정(庭)에서 - 직역하면 '여호와의 집의 마당들에서'이다. '정'에 해당하는 '하체르'(*)는 '둘러싸인 곳', '울타리', '궁정', '왕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성막 뜰' 혹은 '성전 뜰'을 가리키기도 한다(출 27:9). 혹자는 이를 성전 뜰을 가리킨다고 보고 여기서 이 시의 작시 연대가 포로 귀환자들에 의한 성전 재건 이후라는 근거를 삼고자 한다. 그러나 스 3:8에 의하면 이 성전 재건 이전에도 '하나님의 전'이라고 표현한 바 있으므로, 이 근거로서는 불충분하다 하겠다(Alexander).

성 경: [시117:1]

주제1: [만민을 향한 찬양의 권고]

주제2: [찬양에의 초대]

⭕ 너희 모든 나라들아...너희 모든 백성들아 - 이것은 이방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모든 민족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롬 15장에는 이방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믿음으로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내용이있는데 그러한 사상이 본문에서도 엿보여지고 있다 하겠다. 한편, '백성들'로 번역된히 브리어 '우밈'(*)은 '종족', '백성'에 해당하는 '우마'(*)의 복수형인민 25:15에는 '우모트'(*)로 표기되어 있다는 데에 근거하여 어떤 주석가는 '우밈'을 '우마'의 복수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우밈'이란 말은 이곳 외에는 쓰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이방신들을 가리키는 '에밈'으로보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이 부분에 있어서 그는 히브리어 원문을 무리하게 고친 것이 틀림 없다.

⭕ 여호와를 찬양하며...저를 칭송할지어다 - '찬양하며'에 해당하는 '할랄'(*)은 칼형으로 쓰이면 '자랑스럽게 여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로 피엘형으로 쓰여 '찬양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칭송하다'에 해당하는 '솨바흐'(*)는 '할랄'과 거의 같은 뜻의 동의어이다. 전 8:15에는 '솨바흐'가 '칭찬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성 경: [시117:2]

주제1: [만민을 향한 찬양의 권고]

주제2: [찬양에의 초대]

⭕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 본절은 1절에 대한 이유, 즉 여호와를 찬양하며 칭송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인자하심'(*, 헤세드)은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말로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가리킨다. '강하다'에 해당하는 '가바르'(*)는 '이기다', '우세하다'란 의미도 내포하며 피엘형으로 쓰이면 '강하게 하다'란 뜻을 가진다(출 17:11). 한편, 어떤 주석가는 1절과 본절 사이의 논리적 연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절의 원인을 제공하는 본절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인데 어떻게 그것이 다른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망각했기 때문이며 또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 '진실하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확증하다', '지지하다' 등의 뜻인 '아만'(*)이란 동사에서 파생된말로서 '확고함', '인정됨', '신실함'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에서는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같은 의미로 쓰인 용례를 들자면 이삭의 배우자 선택을 위해 보냄 받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제시할 수 있다: "가로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창 24:27).

성 경: [시118:1]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인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 여호와께 감사하라 - '감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두'(*)는 '야다'(*)의 히필형으로서 '감사하다', '고백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행위가 수반된 감사와 고백을 가리킨다. 사 12:4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적을 선포하는 행위'와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죄악을 자복하고 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왕상 8:35).

⭕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 어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인정해야 할 이유를 나타낸다. 여기서 '선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동사, 형용사, 명사 등으로 쓰이는데 '기뻐하다', '만족하다' 그리고 '유쾌한', '즐거운', '좋은'(민 24:5) 그리고 '행복', '좋은 것'(신 26:11)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란 어구는 4절까지 각 구절 끝에 연속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에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깊고 깊은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신자는 자발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8:2]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인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영원하다 할지로다 -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에 한정시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재차 언급되고 있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가 다시 스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가 다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하는 말 앞에는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다짐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나'(*)인데 '청컨대'나 '오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말이다. 어떤 주석가는(Horsley) 이 말이 2인칭 직설법에 쓰일 경우는 한글 개역 성경 본문의 경우와 같이 '이제'와 '청컨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창 13:9). 반면에 '나'가 본문과 같이 3인칭과 함께 쓰일 때는 감탄 접속사로 해석하여 '오 !'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본다(삼상 9:6).

성 경: [시118:3]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인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 시인은 여기서 대상을 더욱 한정시켜 아론의 집을 지칭하고 있다. 아론의 집은 제사장 직분을 맡았던 가문으로서 찬송을 지휘할 특권을 가졌다.

성 경: [시118:4]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인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아론의 집'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일 수 있으나 한 개인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나 아론의 집보다 더 한정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행 10:22). 이방인 개종자를 흔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불렀다는 점에서 시인은 여기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8:5]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 여기서 '고통'에 해당하는 '하메차르'(*)는 '가두다', '제한하다', '속박하다'란 뜻의 동사 '추르'(*)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이는데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에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의전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한정 할 수밖에 없다. 10-14절과 17, 18절에서 시인은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고려하면 '메차르'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을 나타낸다 하겠다(Dahood). 한편, 시인은 지난날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사 구원해 주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중 앞에 그 사실을 분명히 증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해 버리는 현대인에게 크나 큰 교훈이 될 것이다(Weiser).

⭕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아나니 바메레하브 야)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넓은 곳에서 내게 응답하셨다'이다. NIV는 '그가 날 자유롭게 하심으로 응답하셨다'(he answered by setting mefree)로 번역하고 있고, KJV는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두셨다'로 번역한다(the Lord answered me, and set me in a large place). '광활한 곳'에 해당하는 '메레하브'는 흔히 지상의 광활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31:8에서는 다음과 같은 용례를 보여준다.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이것은 앞 어구의 '메차르'와 대조를 이루는 '자유로운 곳'을 가리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상의 속박된 처지와 대조를 이루는 하늘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Dahood).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 백성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엿볼 수있으며 성도가 고난받는 때가 오히려 기도에 더욱 적합한 시기이며 하나님께 응답받는 때임을 배울 수 있다.

성 경: [시118:6]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예화 리'(*)로서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니'(The Lord is with me, NIV)란 뜻이다. 56:9에는 이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이를 '나는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우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가장 든든한 확신을 갖게 한다.

⭕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창 3:10). 요컨대 두려움이란 것은 죄의 결과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멀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원문은 '마 야아세 리 아담'(*)으로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란 뜻인데, LB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무능함을 강조하기 위해 '보잘 것없는 인간이...'(...mere man...)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으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라고 외친 것처럼 담대할 수 있다.

성 경: [시118:7]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란 말은, 앞 구절과 같은 '예화 리'이다. '돕는 자 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오제라'(*)인데 한글 개역 성경은 '베'(*)를 '...중에'(among)로 해석하여 전치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엄 복수가 뒤따를 경우에 쓰이는 강세형 '베트'(*)로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그리고 다음 어구의 '나를 미워하는 자'(my enemies)가복수형으로 쓰여 '베손아'(*)로 표기된 것과 운율을 맞추기 위하여 '베오제라'는 복수형으로 쓰였지만 의미상 단수인 장엄 복수인 것이다. 따라서 NIV는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며 그는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번역하며(The Lord is with me;heis my helper), RSV는 '여호와께서 나를 돕기 위해 내 곁에 계시도다'라고 번역하고있다(The Lord is on my side to help me).

⭕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 '내가 보리로다'에 해당하는 '에르에'(*)는 6절의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이라'(*)와 음가가 비슷한 언어 유희적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네아'(*)로서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사네'(*)에서 파생된 말로서 '나의 원수들'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my enemies, NIV).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축소되지만,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의 도움에 의지할 때 그 의지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 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성 경: [시118:8]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 본절과 9절은 마치 잠언과 같은 형식인데 시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에 근거하여 일반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흔들림없이 확실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 곁이란 뜻이다. 참신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나 지상의 권력, 즉 일시적인 권력 수단을 추종하는 것을 중단하면서부터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 도움에 연연해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살아있는 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Weiser). 한편, '피함'에 해당하는 '라하소트'(*)는 '피신처를 찾다'란 뜻을 가진 '하사'(*)의 부정사형인데 사 14:32에는 하나님의 백성 중 곤고한 자들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시온에 피난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잠 14:32에는 의인은 죽음 가운데서 피신처를 찾을 수있다는 용례가 나오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소망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 또한 칼빈(Calvin)은 이를 하나님으로 만족을 누리고, 땅에서 어떠한 도움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살 소망을 가진다는 의미로 주해하였다.

성 경: [시118:9]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 '방백들'은 원어로 '네디빔'(*)인데 8절의 '사람'과 대구를 이루는 말이다. 카일-델리취(Keil &Delitzsch)는 이 내용이 바벨론 포로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감행했던 성전 재건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이 경험하게 된 것으로 설명하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한편, 바이저(Weiser)는 이 다음에 이어지는 10-18절에서 8절과 본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된다고 보았다. 즉, 10-14절에서는 엄청난 위험과 하나님의 능력있는 도우심,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언급되어 있고, 15, 16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내용이 그리고 17,18절에서는 구원받은 자의 희망찬 삶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8:10]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 이는 시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으로서 수많은 무리에 의해 에워쌈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처지였음을 고백한다.

⭕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 '이름으로'란 말과 '저희를'이란 말사이에는 원문상 '키'(*)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접속사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를 가진 부사로서 '분명히', '정말'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것은 또한 문장 끝에 놓여 동사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한다(Dahood). 그리고 '저희를 끊으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밀람'(*)은 '할례하다'란 뜻의 히브리어'물'(*)의 히필형으로서 '그들로 할례받게 하겠다'는 의미인데, 이 동사의 시제는 문맥상 미래보다는 과거 시제가 더 적합하리라 본다.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사울 왕에게 주고 왕의 사위가 된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삼상 18:25-27).

성 경: [시118:11]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저희를 끊으리로다 - 10-12절은 상반된 두 개념 즉 적들이 자신을 에워쌌다는 것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물리치겠다는 말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아름다운 운율을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인은 생사(生死)가 걸린 역경에처했으나 자신의 배후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특히'여호와의 이름으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위기에서 헤쳐 나올 수가 없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성 경: [시118:12]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 대적들의 맹렬한 공격과 분노가 '벌'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대적들의 수효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시인에게 큰 위기와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뜻한다.

⭕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 가시덤불의 불은 삽시간에 타오르지만 곧 꺼져버리고 마는 것으로서 대적들의 위세가 마치 온 천지를 삼킬듯이 맹렬하였지만 금방 사그라지고 마는 것을 뜻한다. 한편, '소멸되다'에 해당하는 '도아쿠'(*)는 여기서 자동사로 쓰이고 있는데, 어떤 주석가는 이를 '태우다'는 뜻의 타동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타동사로 볼 경우 이 어구는 '가시덤불의 불같이 타올라'로 해석되며 그 다음에 '곧 꺼져버린다'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자동사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갈대아인들을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신 사실을 선포하였는데 거기서도 이 말이 자동사의 의미로 쓰였다(사 43:17).

⭕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적들의 에워쌈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됨을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성 경: [시118:13]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 '네가 나를 밀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호 데히타니 린폴'(*)은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호'의 원형인 '다하'(*)는 '밀다', '떠밀다'(push, thrust)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데히타니'의 원형 역시 '다하'이다. 이렇게 같은 동사가 이중적으로 쓰인 것은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데, 앞의 '다호'는 절대형 부정사이며, 뒤의 '데히타니'는 칼 2인칭 남성 단수 완료형이기 때문에 이 동사의 주어는 '다호'가 될 수 없다. 내용상 주어는 '사망'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Dahood). 그리고 '넘어뜨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린폴'(*)은 '떨어지다', '눕다', '죽다' 등의 뜻을 가진 '나팔'(*)에서 나온 말로서 어떤 학자는 이를 동명사형으로 보기도 한다(Hammond). 아무튼 이 어구는 대적의 공격으로 시인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 사망과의 투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본 시의 '나'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출 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와 본 시를 연관시킨다.

성 경: [시118:14]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 이 구절은 출 15:2에서 인용된 부분이며 사12:2에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Keil & Delitzsch). '능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지'(*)의 원형은 '강한', '튼튼한'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 '아즈'(*)인데, 데베스의 성중(城中)에 있는 망대를 "'견고한' 망대"로 묘사할 때 쓰였다(삿 9:51). 따라서 이는 시인이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피난처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찬송'에 해당하는 '지므라트'(*)는 악기가 동원된 '멜로디'나 '노래'를 가리키기도 한다. 암 5:23에는 노래 소리와 비파소리가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다:"네 노래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성 경: [시118:15]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 '의인의 장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할레 차디킴'(*)인데 문맥상 '차디킴'으르 '승리자들'로 번역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리자들의 장막' 또는 '개선의 장막'으로 번역된다.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가 왕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면서 불렀던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하는 슥 9:9의 말씀 중에는 이 '차디크'가 '의롭다'로 번역되어 있으나 내용상 승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 '여호와의 오른손'은 16절에 2번 더 쓰이고있는데 이런 삼중적 표현은 10-12절의 대적들의 포위를 나타내는 삼중적 표현과 대응되고 있다.

성 경: [시118:16]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상징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리고 높이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났으며 그래서 그 광채가 밝히 드러났다는 뜻으로 쓰였다.

⭕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 이는 '여호와의 손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도다'란 의미로도 번역된다(Weiser). '권능'에 해당하는 '하일'(*)은 '힘', '효율성', '부'(富), '군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이...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삼상 17:20).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것을 충고하며 이 단어를 '재덕'(才德)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출 18:21).

성 경: [시118:17]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 이 어구를 좀더 분명하게 해석하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고 살 것이며 여호와의 일을 말한 것이다'가 되는데, 시인이 여기서 '죽지 않고'라고 한 것은 사망의 위협 속에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그는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순히 그들의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행사'에 해당하는 '마아세'(*)는 '만들다', '행하다' 등의 뜻을 가진 '아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출 18:20에서는 '(마땅히) 할 일'로 번역되었고 창 46:33에서는 직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가리킨다.

성 경: [시118:18]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서...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시인을 죽음에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를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시련을 주셨다는 고백이다(Weiser). 한편 '나를 경책하셨어도'에 해당하는 '이스라니'(*)의 원형 동사인 '야사르'(*)는 '훈련시키다', '권고하다', '경고하다', '벌주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사 8:11;렘 31:18;호 10:10).

성 경: [시118:19]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 '의의 문'은 성전 문을 뜻할 수 있다. 성전 문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상호 교통하는 장소에로 인도하는 입구이므로 의의 문이라 불리우는것이 마땅하다(Keil & Delitzsch). 그러나 어떤 주석가는 '의'에 해당하는 '체데크'(*)가 원래 '승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개선문'으로 번역하면서 성전 문보다는 예루살렘 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Dahood). 그리고 여기서의 문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잇는 반면에 20절에 다시 등장하는 문은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복수형으로 표기된 문들은 예루살렘 문을 가리키고, 20절의 문은 성전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 이는 원수에게 쫓기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동안 시인은 대적들에게 쫓기면서 성소에나아갈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생명의 위협을 시시 각각 느끼는 소망없는 삶을 살았으나 이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 경: [시118:20]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 가리로다 - '여호와의 문'은 성전 현관 출입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의인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통행권이 있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8:21]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 본절의 강조점은 '구원'에 주어져 있으며, 이는 여호와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8, 9절) 또 여호와의 이름에 의존하는 자들에게(10-12절)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롭고도 완벽한 구원에 관한 주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성 경: [시118:22]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여기서부터 27절까지는 대화의 주체가 '우리'로 변경된다. 이는 이 시가 회중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뜻한다.이 구절은 '건축자의 버린 돌과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그 유명한 비유를 담고 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네모로 다듬어진 것으로서 건물의 중력을 양(兩) 방향에서 받기 때문에 특별히 재질이 좋은 것으로 선택되어야 했다. 이 비유는 전격적인 상황의 변화를 체험한 구원받은 자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예롭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기 유대교는 이 비유를 메시야에게 적용시켰으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이 비유를 자신에게 적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하였다(행 4:11;벧전 2:7, Weiser). 한편, 어떤 주석가는 '건축자의 버린 돌'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대제국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하찮은 나라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하고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Dahood). 또 어떤 이는 이 구절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여 솔로몬 성전 건축에서 쓸데없다고 버려진 돌이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모퉁잇돌이 된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Michaelis).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배척당하였으나 날로 증가하는 교회의 초석이 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성 경: [시118:23]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 이 구절은 시인에게 일어난 일이 사람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회중이 고백하게끔 유도하는 내용이다. 한편 '기이한 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플라트'(*)는 '놀랍다', '이상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팔라'(*)에서 나온 말로서 '놀라운 행위'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구원이나 심판 등 초자연적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 3:20).

성 경: [시118:24]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 대부분 영역 성경들은 이를 '이 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그러나 '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는 '만들다'(make)는 뜻 외에 '행하다'(do, act)란 뜻도 가지고 있다(창 30:31). 본문의 '아사'는 '행하다'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문구는 '이 날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날이라'가 되며 22:31과 말 4:3의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이 날에'에 해당하는 '보'(*)는 원문상 '그 안에서'라고 해석된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Dahood). 또 칼빈(Calvin)은 이 날을 다윗이 왕이 되어 사무엘의 기름 부음을 받는 복되고 즐거운 날이라고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이 날은 하나님의 승리를 기뻐하고 축하하는 축제일로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해 주신 '여호와의 날'로도 해석하기도 한다(Weiser). 어쨌든 시인은 기나긴 세월을 흑암속에서 고통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의 날을 맞이했으므로 이 날을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의 날'로 불러도 마땅한 것이다.

성 경: [시118:25]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 이는 미래 사건에 대한 호소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과거에 이스라엘 군대를 승리로 인도하신 주께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다(Weiser, Dahood).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나'(*)가 이 어구 끝에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이제'와 같은 시간 부사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구하옵나니'에 해당하는 '아나'(*)와 상관적 의미로 쓰이는 간구 형식으로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Calvin, 창 33:14 참조). 칼빈(Calvin)은 '나'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전형적인 기도문 형식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 형통케 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하첼리하'(*)는 '전진하다', '번영하다'란 뜻을 가진 '찰라흐'(*)의 히필형인데 '번영케 하다', '성공으로 인도하다'란 의미로도 쓰인다. 한 예로서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이삭의 배우자를 선택하러 간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과정에서 이 말이 '평탄한 길을 주다'란 의미로 쓰인 바 있다(창 24:21).

성 경: [시118:26]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바 베쉠 예화'(*)인데 '오다'에 해당하는 '보'(*)는 때때로 '통치자로 행동하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출입하다'라고 번역된 '보'는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통치자인 왕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막 11:9;눅 13:35;19:38).

⭕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 이 구절은 성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의 축복 인사로서 표현된 것으로 보이며 이 구절과 다음의 27절의 화자(話者) 역시 그들인 것 같다(Weiser). 제사장들의 의무 중 하나는 이처럼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인데 민 6:24-26에는 축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내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영호와의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성 경: [시118:27]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 예화'(*)로서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복합 칭호로도 볼 수 있으나 이 말 다음에 오는 '와우'(*)가 강조 접사가 아니라 접속사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로 보아서 한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비취셨으니'에 해당하는 '와야에르 라누'(*)는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빛을 주셨도다'가 된다. 여기서 '빛'은 왕과 그 군대에게 있어 적들을 물리치는 승리의 영광을 말한다(Dahood). 한편,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인자하심과 자유 그리고 기쁨 등을 허락하사 그들에게 빛을 주심으로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했다고 설명하는데 이 또한 가능한 해석이다.

⭕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 '희생'으로 번역된 '하그'(*)는 '희생 제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거룩한 절기'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이 단어의 어근 '하가그'(*)도 '절기를 지키다', '기념하다', '춤추다' 등의 뜻이다. 더구나 희생 제물을 제단 뿔에 줄로 매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단어를 '(절기의) 진행 과정' 혹은 '절기 때 추는 춤'으로 해석한다. 미쉬나(Mishnah)의 기록에 의하면, 장막절에 예배자들은 제단 주위에 모여 종려 나무등의 가지나 꽃다발로 제단을 덮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본문을, 축제시에 예배자들이 제단 주위에 모여 종려나뭇가지나 축제 꽃다발들을 제단에 장식하며 때로는 춤을 추었던 것에 대한 묘사로 해석하고자 한다(With boughs in hand, join in thefestal procession up to the horns of the altar, NIV;Bind the festal processionwith branches, up to the horns of the altar, RSV).

성 경: [시118:28]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 축제의 진행 과정이 절정에 올랐다가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것을 나타내며 시인이 드린 제사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뒤쫓아 홍해를 건너다가 멸망당한 사건에 이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내용은 본문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15:2).

성 경: [시118:29]

주제1: [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주제2: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 구절은 1절과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역경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인 것으로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과 은혜를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자(*, 테미메 다레크 하홀킴 베토라트 예화)- 직역하면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 길에 완전한 자'이다. 이 같은 원문의 구문을 중시할 때 '길에 완전한 자'란 여호와의 법을 행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길에 완전한 자'란 먼 길을 가는 것에 비유되기도 하는 인생살이에 있어서 완전한 자인데 '완전한'(*, 타밈)이 '비난받을 것이 없는', '오염되지 않은' 등을 뜻하는 것을고려할 때(70인역, Luther) '길에 완전한 자'란 인생을 살 때 비난 받을 죄악된 행실에 오염되지 않은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력이나 수양으로만은 불가능하며 자신의 행실을 여호와의 법에 합당하게 쳐서 복종시키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이 본절의 주장이다. '법'(*, 토라트)은 '던지다', '가르치다' 등을 뜻하는 '야다'(*)에서 온 명사로 '길을 보임', '방향','지침', '지시', 등을 뜻한다. 좀더 세부적으로는 특정한 경우에 행하여야 할 바를 가르쳐 주는 지침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Vriezen). 물론 이 지침은 제사장이나 선지자 혹은 지혜 선생(잠 13:14) 등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라트'의 근원은 여호와 자신이시다. 여호와의 이같은 지침, 가르침은 후대를 위하여 법전과 같은 형태로 성문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되어진 것이 바로 모세 오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여호와의 법, '토라트'(이는 흔히 알고 있는 '토라'의 복수형이다)를 모세 오경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모세 오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자, 그가 길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자만이 진정 행복한 자라고 본절은 말하고 있다. 한편 본시에서는 몇몇 절을(84, 90, 122, 132절 등) 제외하고는 각 절마다 '율법'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등장한다. 이러한 의미로서 나오는 동의어들은 원어상 9개인데, 이들의 의미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엄격히 구별짓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르지만 의미상의 차이를 대략적으로 파악하여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용어

}}

{{

원어

}}

{{

내용

}}

{{

율법

}}

{{

토라

}}

{{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법도

}}

{{

증거

}}

{{

에두트

}}

{{

하나님이 친히 선포하시고 확증하신다는 측면을 강조

}}

{{

판단(규례)

}}

{{

미쉬파트

}}

{{

법정적, 선고적 측면을 강조

}}

{{

율례

}}

{{

호크

}}

{{

하나님이 제정하신 입법이라는 측면을 강조

}}

{{

말씀

}}

{{

다바르

}}

{{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임을 강조

}}

{{

법도

}}

{{

피쿠드

}}

{{

인간 행동에 대한 규제의 측면을 강조

}}

{{

계명

}}

{{

미츠와

}}

{{

준수해야 할 책임성을 강조

}}

{{

약속

}}

{{

미므라

}}

{{

약속, 말씀 등 여러 의미로 사용

}}

{{

}}

{{

데레크

}}

{{

행동 영역을 강조

}}

{{

}}

성 경: [시119: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증거(*, 에두트) - '알다'를 뜻하는 '야다'(*)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본 용어는 하나님의 증거와 선포를 통해 만들어진 두 돌비를 가리킬 때(출31:18) 혹은 '여호와의 법궤'를 가리킬 때도(출 25:21;렘 3:16) 사용되고 있다. 또한25:10;132:12 등에서는 하나님이 그 입으로 선포하신 것을 강조하는 의미의 '언약들'로 본 용어가 번역되고 있다.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1절과 본절은 동일하게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하지만 1절은 법의 존재 형태라는 측면, 즉 성문화된 여호와의 법을 강조하는 반면 본절은 여호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측면의 여호와의 법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겠다.

⭕ 전심으로 - 신명기적 표현으로서 본 시편의 중요한 특성의 일부를 형성하는 용어이기도 하다(10, 34, 58, 69, 145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간절히 여호와를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신 4:29;렘 29:13).

성 경: [시119: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불의(*, 아웰라) - 본 용어는 일반적인 잘못, 악 혹은 법정적인 의미의 불의를 의미한다(64:6;대하 19:7;미 3:10). 그러나 사본상의 용례들을 중시할 때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악한 원리로 보는 것이 좋겠다.

⭕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길들 가운데로 걸어가는도다'이다. 이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할 정도로 계속적으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진정 여호와의 법을 따라 사는 자는 이론상으로만 정직하거나 곧은 자가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경건한 자이다.

성 경: [시119: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주의 법도(*, 피쿠데카) - 시편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다. 103:18에서는 '언약'으로 번역되어 있고, 111:7에서는 '하나님의 손의 일들'(말하자면 그의 자기 계시)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번역 실태를 감안할 때 본 용어는 문맥에 따라 그 번역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듯하다. 본 문맥에서 이 용어는 '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여기서 '법'은 다름아닌 그 법을 받은 자가 꼭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법을 말한다.

⭕ 근실히(*, 메오드) - 문자적인 뜻은 '매우'이나 문맥상 '신실하게', '끊이지 않고'로 번역되거나 '주의하여'로 번역될 수 있겠다(신 24:8). 여호와의 법은 날마다 주의 깊게 묵상하고 살펴서 그 깨달은 바를 정리해야 하며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그 깨달은 바를 신실하게, 지속적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9: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 원문을 직역하면 '오! 나의 길들은 당신의 법을 지키도록 설정되었습니다'이다. 자신의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이 가슴에서 계속 메아리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경건한 자가 아니다. 여기에서 '아할라'(*)는 강한 의지 및 소원을 뜻하는 감탄사인데 이 감탄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법에 합한 삶을 살기 위한 저자의 의지, 소원은 매우 강렬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왕하 5:3). 하나님께 절대 의존하고 있는 자만이 이런 류의 의지나 소원을 가질 수 있다.

⭕ 율례(*, 후케카) - 원형은 '호크'(*)인데 이 용어는 여호와의 특별 포고령(2:7) 혹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148:6)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어떤 조건과 그에 따르는 약속이라는 면의 언약(50:16;105:10)과 평행적 의미로 가장 가깝다고 하겠다. 저자가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소원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그내용은 명확지 않으나 그러한 삶에 따른 결과적 약속을 암시하는 특정한 언약을 이미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성 경: [시119: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주의 모든 계명 - 여기서 '계명'은 '미츠오트'(*)로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주었던 명령과 같이 권위있는 자가 내린 명령들이나 포고령 따위를 의미하다(왕상2:43). 유사한 의미로 꼭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 혹은 금지령 등을 '미츠오트'라 부를 수 있다. 이 용어의 원형은 '미츠와'(*)인데 신명기에서 '율법'을 지칭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 주의할 때에는 - 문자적인 뜻은 '주시하다'인데 이것은 계명을 삶의 법칙으로 삼기 위하여 그것을 주의 깊게 묵상하고 계속적으로 의식한다는 뜻이다.

⭕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 계명 수행자가 자신의 삶과 율법의 요구를 비교해 보고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명을 주의 깊게 묵상하며 계속적으로 의식하고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거나 징벌을 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즉, 심리학적인 측면에서의 수치보다는 종말론적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시119: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판단을 배울 때에는...감사하리이다 - 여기에서 '판단'은 '미쉬페테'(*)인데 본 용어는 이곳뿐 아니라 본 시편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 혹은 판단자이시며 율법 수여자되신 하나님이 내리신 말씀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이 유사 용례는 출 21:1;24:3;레 18:4, 5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배운다'는 말은 율법을 지킨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율법을 계속해서 배운다는 뜻이며 그 배움은 자의적 연구를 통해서보다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감동을 통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동반되어 있다(73절). 결국 저자는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배우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율법 준수에의 결단]

⭕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 버리지 말아달라는 표현은 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27:9;71:9, 18). 그렇다면 본 구절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태에 계속해서 놔두지 말아달라는 기도가 되겠다. 혹은 기자가, 주의 도우심 없이는 주의 율례를 지킬 수도 없고 결과적으로 파멸 가운데 처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Alexander).

성 경: [시119: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청년 - 본 단어를 근거로 본 시편 저자를 청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절 전체에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은 자신의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청년의 순결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불특정 다수의 청년들에게 교훈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다고 이해 가능하다. 이 사실은 나이가 지긋하고 경험이 많은 자로서 지혜롭고 친근한 충고를 주고 있는 전 12:1을 상기케 한다:"너는 청년의때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그러나 본 시편의 저자가 나이 많은 노인이 아님은 자신의 지혜가 노인의 그것보다 승하다고 비교하는 대목을 통해 읽을 수 있다(99, 100절). 이 같은 사실들을 종합할 때 본 시편 저자는 젊은 청년이나 노인이 아니며 적어도 인생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인생 중년에 이른 자라고 봄이 더 나을 것 같다.

⭕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 어떻게 하면 인생 여정이 순결하고 바른 것이 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 같은 표현은 이미 지은 죄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미래의 삶을 바라보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그 아래 자신을 묶어두어서 그의 미래의 여정이 정직하고 영예롭고, 바른 것이 될 수 있는, 그가 채택할 행동 원칙들은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묻고 대답하는 본절과 같은 형태는 지혜서의 서술 형태를 연상시킨다(25:12;34:12;잠 23:29).

성 경: [시119:1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떠나지 말게 하소서(*, 알 타쉬게니). - 직역하면 '나로 방황하지 말게 하소서'이다.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의 원형인 '솨가'(*)는 강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강동사이다(신 27:18).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 순종하기를 중단할 때 인간의 전 삶의 영역은 흔들리고 방황하기 시작하므로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중단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잠 19:27).

성 경: [시119:1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동사 '차판'(*)은 비밀로 하기 위하여, 누군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숨기다'의 뜻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돈이나 보석 따위를 숨겨두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17:14;욥 20:26). 또한 이 동사는 비밀스럽고 접근할 수 없는 장소인 마음에 무엇인가를 쌓아둔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사상, 의도, 목적 따위를 숨기거나 지혜나 지식 따위를 보물처럼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연상케 한다(욥 10:13;잠2:1;7:1).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인 양 기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물처럼 쌓아두었다는 것이다.

⭕ 말씀(*, 에메르) - 이는 9절에 나오는 '다바르'(*)와 시적 동의어이다. 본 시편에서 이 용어는 보편적 의미의 하나님의 법 혹은 특별한 의미의 그분의 약속들도 뜻할 수 있다.

성 경: [시119:1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바루크 아타 예화). - 직역하면 '여호와 당신은 경배를 받으소서'로서 송영의 일종이다. 본 송영은 인생을 선하고 거룩하게 지도하고 인도하기에 적절한 율법에 대한 깨달음에서 흘러나온 것이다(28:6).

성 경: [시119:1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모든 규례(*, 콜 미쉬페테) - 직역하면 '모든 판결들'이지만 문맥상 성문화된 법전 혹은 율법 등으로 해석해도 되겠다.

⭕ 선포하였으며(*, 시파르티) - 원형 '사파르'(*)는 '계산하다','반복하다', '낭송하다' 그리고 '선포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들을 감안하고 본 동사 앞에 부사 '입술로'가 있음을 고려할 때 본절은 저자가 하나님의 율법, 그 구체적인 조항들을 반복 낭송함으로써 그것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였던 것을 뜻한다 하겠다.

성 경: [시119:1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 본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좀더 부각시키려면 이렇게 번역해야 옳다. '모든 재물을 즐거워하는 그 이상으로.' 72절과 127절에 의하면이 같은 번역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뜻이 물질적인 것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고도 신령한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잠 2:4). 본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의 가치를 말하고 있는 잠언의 구절들을 연상시킨다(잠 3:13-15;8:10, 11, 19;16:16;22:1 이외에 욥 28:15-19을 참조하라).

성 경: [시119:1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묵상하며(*, 아시하). - 이 말은 단순히 읽거나 낭송하는 수준을 넘어그 깊은 의미를 깨달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맛보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 주의 도에 주의하며 - 계속적으로 율법의 명령을 인생의 안내자로 마음에 두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시119:1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법도를 즐거워함]

⭕ 잊지 아니하리이다(*, 에쉬카흐) - 원형 '솨카흐'(*)는 한 인간의 기억력뿐 아니라 그의 고의적 의지 행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동사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망각지 않는 의지적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을 보이고 있다(13:1;44:24;74:19;77:9). 구약에서 하나님의 존재 혹은 그 말씀을 망각한다는 것은 기억불능 그 이상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의도적 범죄(106:13, 21), 하나님 언약에 대한 불순종(44:17), 심지어는 우상 숭배(44:20) 등으로도 묘사될 수 있다.

성 경: [시119:1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후대하여(*, 게몰) - 이 동사는 어떤 상대에게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을,혹은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은총을 베풀어 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13:6;116:7;142:7).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자신의 어떤 공로에 근거하여 그 같은 요구나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총, 그분과의 교제, 그분의 간섭을 간청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시고 그분과의 교제가 계속될 때 그리고 시시 때때로 그분이 간섭하실 때 땅위에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믿음이다.

성 경: [시119:1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기이한 것 - 일반적인 시야로부터 숨겨진, 비밀스러운 것으로서 신령한 의미를 가리킨다. 일단 그것이 밝혀지면 놀라움과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주의 법은 명령 조항을 모아놓은 세상 법 같은 것과는 상이하게 다르다. 그 속에는 인생의 궁극적 지침을 담은 깊고 신령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영적 시야를 가질 때에만 파악이 가능하다.

성 경: [시119:1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 '객'이란 주지하다시피 그 고향이 다른 곳에 있고 일시적으로 이방 땅에 체류하는 자를 가리킨다. 물론 시인이 실제적으로 타향에서 나그네와 같은 신세로 처량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러한 실제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마치 고향과 친척을 등지고 떠돌아다니는 외인(外人)과도 같은 험난한 인생살이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러한 자각이 있었기에 주의 계명을 향한 열정은 더욱 강렬해졌던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의 깊은 의미와 참된 적용을 가르쳐 주셔야만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 성도는 성도답게 살수 있다(39:12).

성 경: [시119:2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 '상하나이다'에 해당하는 '가르사'(*)는 계속 문지르거나 두들겨서 결국에는 조각조각이 나거나 부서지는 모습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영혼이 거의 기진하고 고갈된 상태에 놓였는데 그 이유는 날마다 하나님의 규례를 좀더 알기를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규례를 사모하는 시인의 열정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전폭적이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영혼을 소생케 하시며(23:3) 새로운 힘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신다(사 40:27-31).

성 경: [시119:2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본절을 원문에 입각하여 재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당신의 계명들로부터 떠나 방황하는, 저주를 받은 교만한 자를 꾸짖으셨나이다.' 재번역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본절은 동일한 한 사람의 특성을 서로 다른 세 가지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먼저 그사람은 의도적으로 계명에 대하여 태만한 자이며(118절;삼상 26:21),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낙인 찍힌 자이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시편 저자를 조롱하고(51절) 거짓 증거하고(69절 상반절) 압박하고(122절 하반절) 함정을 판(85절) 자라는 의미에서 교만한자이다. 이 같은 자는 하나님께 꾸짖음을 받았는데 이 꾸짖음이란 말로만 하는 책망이아니라 심판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적인 징벌이다(9:5).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자의 잘못의 근본 원인은 계명에 대한 의도적인 태만인데 아마도 저자는 자신은 계명을 파수하고 순종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그 대적의 불순종 사실을 역설적으로 묘사하고있는 것 같다.

성 경: [시119:2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떠나게 하소서(*, 갈) - 문자적인 뜻은 '벗기소서'이다. 수치는 흔히 어떤 사람을 덮고 있는 외투나 망토로 비유되곤 하는데 그같은 수치를 벗는 의미를 나타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수 5:9 참조).

성 경: [시119:2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방백들(* 사림) - 이는 '통치자들' 혹은 '지도자들'을 뜻할 때 사용되는가장 일반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다. 이 용어는 족장들(스 8:29), 장로들(욥 29:9) 혹은 지휘관들이나(왕상 9:22;왕하 1:14) 왕의 관리들(105:22;왕상 4:2;렘 26:10) 등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특정 계층의 우두머리, 장들을 뜻하기도 하며(창 40:2;대상 15:22), 보편적으로 위엄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45:16;82:7;사 23:8). 본절에서는 어떤 공동체의 관리들 혹은 영향력 있는 대표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 훼방하였사오나(*, 니드바루) - 문자적인 뜻은 '말하였다'인데 수동형을 취한 상호 재귀형 동사임을 고려할 때 좀더 자세하게 '그들이 서로서로 말하였다'로 번역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시편 저자의 대적들이었던, 공동체 내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저자를 망하게 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위하여 서로 머리를 맞대듯이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성 경: [시119:2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하나님의 관용을 구함]

⭕ 주의 증거는...나의 모사니이다 - '나의 모사'(*, 아차티)의 문자적인 뜻은 '나의 조언자'이다. 문맥상 조언의 내용은 대적들의 음모를 좌절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겠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적용해 보면, 대적들의 음모를 알아챘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음모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행위같으나 대적의 음모를 이길 진정한 비결은 바로 거기에 있다.

성 경: [시119:2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내 영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 - 본 구절을 해석하는 관건은 '진토'이다. '진토'는 우선 지하 세계, 저승, 지옥의 상징어로 볼 수 있다(22:15, 29;44:25;사26:19). 그럴 경우 본 구절은 저자의 영혼이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통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 또 한편으로 '진토'는 문자 그대로 땅으로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본 구절은 고통의 상태를 아뢰기 위하여 땅 위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 고통의 상태 자체에 대한 호소가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수단이 되지 못하며 기도만이 그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후자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견해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는 본문이 극도의 쇠약함이나 좌절상태를 묘사하는 말로 이해된다(28,50,67,71,75,83,92,107,143,153절;7:5;22:15,29; 44:25 등 참조). 이와같이 암담한 상황은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더 여호와께 간절히 매어달리게 하는 동인(動因) 역할을 하였다(Van Gemeren).

성 경: [시119:2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 여기서 '행위'란 문맥상 과거 저자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통과 좌절을 비롯한 모든 인생의 체험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자신의 모든 경험들, 특히 그를 아프게 하였던 고통들을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그 문제들을 해결 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저자가 죽음에 가까운 고통 중에 있는 지금 과거의 그 같은 경험들을 다시 아뢰는 까닭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이 고통도 해결받기 위해서이다. 고통 중에 있는 시편 저자들은 흔히 과거 사실에 근거하여 현재의 난제(難題)해결을 위한 기도를 아뢰었다(22:4).

성 경: [시119:2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 현재의 고통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시되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에 입각한 방도를 알게 해주시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당장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그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 여기서 '기사'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을 뜻한다. 그리고 '묵상하리이다'(*, 아시하)는 많은 사람 앞에서 그 목도하고 깨달은 바를 선포하고 알린다는 것을 뜻한다(Barnes). 결국 저자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 앞에서 그 되어진 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사역을 알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2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눌림(*, 투가) - 이곳과 잠 10:1;14:13;17:21 등에서만 발견되는 용어인데 대체로 '비통', '슬픔', '고통' 등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통으로 인한 슬픔으로 오랫동안 그 가슴이 눌려온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런 점에서 개역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

⭕ 녹사오니(*, 달르파) - 원형 '달라프'(*)는 원래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연상케 하는 바 '스며 나오다', '떨어지다' 등의 뜻이다(전 10:18).그러나 한편으로는 '울다'를 뜻하기도 한다(욥 16:20).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 영혼이 마치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 용어는 많은 양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걸쳐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그것이 다 모이면 많은 양이 흘러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을 통하여 저자는 그 가슴을 누르는 심한 고통, 지속되는 고통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마음의 눈물을 흘려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오랫동안 눈물을 흘려왔사오니'로 번역함이 더욱 정확하다.

⭕ 나를 세우소서(*, 카이메니) - 직역하면 '나를 다시 힘있게 하소서'이다. 이것은 본 시편에서 자주 반복되는 '소성케 하소서'와 그 의미가 거의 같다. 이같은 간구를 하면서 저자는 그 성취가 하나님의 말씀(약속)대로 되어질 것을 부연(敷衍)함으로써 오랫동안 고통당하고 있다는 현실 속에서도 그가 삶의 기준으로 놓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성 경: [시119:2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거짓 행위 -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속임수'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비신실성'을 가리킨다. 저자는 계속되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회의심을 나타낼 수 있는 우려의 상황 속에서 그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기를 소원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계속되는 혹은 특정한 범죄 따위의 이유로 인한 고통 속에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의 법을 공평하게 적용해 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정당하게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애원이라 볼 수 있다. 보기 드물게 본구절은 이중 여격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중 여격이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성경 구절로는 창 33:5을 들 수 있다:"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성 경: [시119:3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성실한 길(*, 데레크 에무나) - 문자적인 뜻은 '신실의 길'이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길이며(25:12) 또 믿고 따라가기에 합당한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신실성을 강조하는 본 구절은 앞절의 '거짓 행위'와 반의적 평행구를 이루고 있다.

⭕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 하나님의 법에 동의한다는 혹은 하나님의 법을 행동의 안내자로 삼는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9:3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 자기의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묘사하는 25절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 '다바크'(*)가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아교를 바른 어떤 물건이 또 다른 물건에 딱 달라붙듯이 하나님의 율법에 딱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그 율법과 굳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떼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상태를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신 30:20), 그를 섬기는 것(신 10:20;13:4) 그리고 그의 길을 걷는 것(신 11:22) 등과 연관시키고 있는 신명기를 연상케한다. 한편, '다바크'는 하나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에서 그것이 드러난다(창 2:24). 그렇다면 이어지는 내용, 곧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는 간청은 자신을 고통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 자신이 수치를 당케 되신다는 암시를 포함하고 있는 간청으로 볼 수도 있다.

성 경: [시119:3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의 위로에 대한 간구]

⭕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 원문에 있는 이유 접속사 '키'(*)를 포함하여 바로 번역하면 '내 마음을 넓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이렇게 보면 본 구절은 조건을 붙이는 조건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확신을 표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예 '당신은 내 마음을 넓히셨나이다'로 번역하는 원본도 있다(NEB). 본 구절이 묘사하는 '넓은 마음'은 흔히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한다(사 60:5;고후 6:11, 13). 저자는 고통의 상태에서 미래에 맛볼 기쁨과 행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것을 이미 성취한 양 확신있게 묘사하고 있다.

⭕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 달려간다는 말은 목표를 앞에 둔 자가 그것을 향하여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모습은 그 계명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특별히 달려간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좀더 민첩하게,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계명을 지키며 살겠다는 결심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성 경: [시119:3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에츠레나 에케브) - 여기서 '에케브'(*)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종말'인데 이 의미를 취할 경우 본 구절은 인생의 종말을 맞을 때까지 주의 법을 지키겠다는 고백이된다. 또 다른 하나는 '상급'인데 이 의미를 취할 경우 본문은 상급으로서의 주의 법을 지키겠다는 고백이 된다. 후자의 경우는 먼 문맥인 19:11;40:15; 70:3 등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곳들에서는 주의 법을 지키는 것과 상급을 받는 사실의 밀접한 관계성을 암시하고 있다. 주의 법을 준수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상급이라고도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가까운 문맥의 지지는 받지 못한다. 가까운 문맥(34-40절)은 분명히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종말론적 사고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이 가까운 문맥을 중시할 때 후자보다는 사는 날 동안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 법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인 전자를 취하는 것이 더 무난하겠다.

성 경: [시119:3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깨닫게 하소서(*, 하비네니) - 직역하면 '이해를 주소서'이다. 율법의 특성 및 그 의무 조항 등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해달라는 뜻이다. 27절 상반절의 반복으로 볼 수 있다.

⭕ 전심으로 - '갈라진 두 마음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이는 율법만을 인생의 안내자로 삼겠다는 고백으로 볼 수도 있다.

성 경: [시119:3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주의 계명의 첩경(*, 빈티브 미초테카) - 문자적인 의미는 '당신의 계명들의 길'이다. 문자적인 뜻을 보아 알수 있듯이 '첩경' 곧 '지름길'의 개념은 찾을 수 없다. 여기 사용된 '길'이란 구불구불하지 않은 곧바른 길을 말하는데, 이 '길'을 다시 한번 언급한 것은 좌로나 우로 치우지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만을 지키겠다는 소신을 재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개역성경은 '첩경'이라고 번역한 것 같다.

⭕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 같은 태도는 동일한 말씀을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그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했던, 귀를 할례받지 못한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상반된 것이다(렘 6:10)

성 경: [시119:3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차원으로써만은 불가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요청된다(신5:29). 한편, 금지된 욕망을 그 마음에 불일듯 일어나게 하는 기관으로 익히 알려진 다음 절의 '눈'은 본절의 이 '마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 탐욕(*, 바차) - '부당히 얻은 소득'이라는 뜻이다. 70인역(LXX)은 이것을 '플레오녀시안'(*)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우상 숭배 때 동반되었던 음란, 호색 행위를 뜻하는 '플레오녀시아'(*)와 그 철자가거의 유사한 사실에 근거하여 '바차'(*)를 우상 숭배, 혹은 음란, 호색으로 번역하는 학자가 있다(Stanley). 물론 고전 5:10에서는 음란한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의연관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히브리어 '바차'가 '강제로 빼앗다', '부당하게 얻다' 등의 의미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는 일과 부당한 소득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일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본절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시119:3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허탄한 것(*, 솨우) - 이 용어는 물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 혹은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것을 가리킬 때 쓰인다. 실체가 아닐 뿐 아니라 거짓된 것이 그 본질인 우상을 묘사할 때 이 용어가 자주 쓰인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24:4;31:6;렘18:15). 아마도 저자는 '우상'을 염두에 두고서 이 용어를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는 일을 경제적 탐욕에 빠지지 않는 것과 연관시켰던 저자는(36절) 이제 여기서는 종교적 악(惡)에 빠지지 않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성 경: [시119:3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 아쉐르 레이르아테카)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경외를 위한 것(약속)'이다. 이 구절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진 말씀에 강조가 두어진 표현으로 읽을 수 있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경외감을 가지고서 그것을 지키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 어떤 표현으로 읽어도 큰 차이는 없겠다.

성 경: [시119:3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 여기서 '훼방'은 가까운 문맥에서 '훼방하는 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교만스럽게 떠들면서 저자를 위협하는 대적들로 볼 수도 있다(42절). 그러나 저자가 계속 밑에 깔고 있는 문맥의 사상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철저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지키는 것임을 고려하고 또 본절 하반절이 하나님의 계명들은 갑갑한 올무와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지키는 자에게 좋고, 아름답고 축복이 되는 어떤 것임을 밝히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훼방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 곧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맛본 바 있는 저자는, 고통의 현실속에서도 그 계명지키는 일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성 경: [시119:4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진리의 추구]

⭕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 고통이 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속에서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법도'로 번역된 '피쿠데카'(*)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고통당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보는 것이 낫겠다. 이 같은 주장은 본절 하반절의 '의'가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통해 지지를 받는다.

성 경: [시119:4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주의 인자하심...내게 임하게 하소서(*, 이보우니 하사데카)-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모음 형태는 주어(명사)의 모음 형태와 수(단수 혹은 복수)에있어서 일치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본 구절의 경우 주어(명사)에 복수를 뜻하는'요오드'(*)가 생략되어 있어 단수를 나타내면서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이 같은 경우의 동사를 결어적 동사(혹은 결어 동사)라고 부른다. 이때 주어를 구성하는 명사 '하사데카'(*)는 복수형으로 해석해야 한다. '헤세드'(*)의 복수형 '하사데카'(*)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이것은 언약 관계가 유지되는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수한 자비 행위를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앞의 '말씀' 또한 하나님과 저자 사이의 언약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이다.

⭕ 주의 구원(*, 테슈아트카) - '당신의 구원'이란 뜻이다. 본 시편을 통하여 저자가 분명히 밝히는 사실 중의 하나는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이다(123, 166, 174절). 구원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33:16;60:12;108:13).

성 경: [시119:4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대답할 말 -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대적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리어 이것은 대적들의 확신에 대한 반박으로 보는 것이 좋다. 아마도 저자의 대적들은 하나님이 저자를 돕지도 구원하지도 않으신다고 믿고 조롱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그를 구원하실 때 대적들의 확신은 꺾이게 될 것이다. 이런 미래를 기대할 때 신실한 자는 대적의 조롱이 가득한 고통의 현실을 잠시 침묵하며 참아야 할 것이다(3:2).

성 경: [시119:4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소망을 두고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는 저자의 간청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믿었기에 그것을 떠나서는 한시라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05절). 한편, 본문의 문맥은 분명히 대적과의 대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의미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긍정문으로 바꾸어 재번역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신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게 주십시오.'

⭕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키레미쉬파테카 이할레티) - 직역하면 '당신의 판단만을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이다. 저자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만을 기다려왔다고 고백한다. 이 공의의 판단이 시행될때, 모든 불의와 교만의 세력들이 꺾이움을 당하고 자신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굳게 믿고 있다.

성 경: [시119:4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 저자의 인생관이 다시 한번 강조 요약되고 있다. 그는 금생에서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율법 준수를 그의 존재 목적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인생관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보인 태도와 완전한 대비를 이룬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렘 16:11).

성 경: [시119:4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 원문상의 본 구절 서두에 있는 이유 접속사 '키'(*)를 살려 재번역하면 이렇다:'왜냐하면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반절이 묘사하는 상황의 근거를 이루는 내용이다. 법도를 구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 자유롭게 행보(行步)할 것이오며 - '자유롭게'(*, 바르하바)의 문자적인 뜻은 '넓은 공간에서'이다. '넓은 공간'이란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거나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리키는데, 이 같은 사실은 118:5을 연상시킨다:"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이제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법만을 연구하고 그 깨달은 바대로 삶을 살았던 저자는 고통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누구의 억제도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성경은 대적의 영향력이나 압박이 없는 약속된 땅을 때때로 이와같이 묘사하고 있다:"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8),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느 9:35). 요컨대 진리를 아는 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성 경: [시119:4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 - 여기서 '열왕'은 '멜라킴'(*)으로 '왕들'을 뜻하는데 이 용어는 본 시편의 저작 연대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된다. 본 용어를 '이방의 왕들'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본 시편은 이방의 통치 특히 페르시아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Perowne). 그러나 '멜라킴'을 반드시 이방 왕들로 해석해야 할 근거는 없다. 문맥상 본 구절은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담대히 말하겠다는 뜻을 담은 내용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며, 그 경우 '왕들'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성 경: [시119:4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나의 사랑하는 바 - 70인역(LXX)은 '몹시'라는 부사를 첨가하고 있다. '사랑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아하브'(*)인데, 이 용어는 인간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둘 모두에 적용된다.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에 적용될 때 이것은 감정적인 만족을 뜻할 뿐 아니라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는 순종적 삶 역시 뜻한다.

성 경: [시119:4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 안에 거하는 자의 담대함]

⭕ 내 손을 들고 - 성경에서 손을 드는 행위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데, 축복(레9:22), 기도(28:2;63:4;134:2;141:2;애 2:19), 맹세(106:26;창 14:22;신 32:40), 어떤 일에 가담하는 것(10:12;창 41:44) 등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기도 혹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사랑을 나타낸다 하겠다.

성 경: [시119:4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말씀을 기억하소서 - 여기서 '말씀'은 오랫동안 고통에 머물러 왔지만 저자로 하여금 새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였던 약속의 말씀을 뜻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온갖 어려움이 막아서고 사방에 절망의 벽이 가로놓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는 시인의 모습은 성숙된 신앙 인격의 전형적인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성 경: [시119:5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 무(無)로부터 만유(萬有)를 창조하시며(창 1장) 모든 약한 것을 치유하시는(107:20)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시인으로 하여금 고통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다. 여기의 '네하마티'(*)는 욥 6:10에서만 한 번 더 나온다:"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본 유사 어구를 참조했을 때, 본 구절의 의미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즉 말씀이 저자의 기쁨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 살리셨음이니이다 - 이는 본 시편에서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고통'을 말하는 문맥에서 다시 나온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용어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의미보다는 '마음이 새롭게 됨', '새 용기를 부여받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것이다.

성 경: [시119:5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나를...조롱하였어도 - 본절 하반절과 연결시켜 이해할 때, 역으로 하반절이 본문의 이유를 나타낸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저자의 대적들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그를 괴롭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이해의 근거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떠난 사람 곧 '악인'과 '조롱하는 자'라는 명사가 본절의 '조롱하였다'라는 동사'제딤'(*)과 그 어원이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와 신앙심이 없는 악인, 혹은 조롱하는 자는 서로 동일한 상태에 있는 자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1:1에 나오는 '악인', '오만한 자' 역시 한 부류이다.

성 경: [시119:5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옛 규례 - 여기서 '규례'(*, 미쉬파테카)는 문맥상 '판결들'로 번역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용어는 여기서 율법대로 실제로 세계를 판단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용어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役事)를 상기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옛'(*, 메올람)의 문자적인 뜻은 '영원한'이며, 여기서는 우주를 다스리는 신적(神的) 통치 원리의 지속성 및 항구성을 암시하는 용어로 보면 되겠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들이 항상 동일하였다는 것 곧 하나님의 율법이 그러하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원리를 따라 항상 그 구체적 시행이 뒤따랐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위로를 얻었다.

성 경: [시119:5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악인들(*, 레솨임) - 시편의 기자들의 대적들을 일컫는 특징적인 호칭중의 하나이다(3:7;26:5;37:14;58:3;92:7등).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시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다(53절).

⭕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 '맹령한 노'의 히브리어는 '잘르아파'(*)인데 이 명사는 '더워지다', '타오르다', '(바람으로 인해 불 따위가) 크게 번지다'등을 뜻하는 동사에서 왔다. 이것은 악인의 태도에 대한 의인인 시편 기자의 반응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즉, 그의 동료들 그리고 악인들이 율법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시편 기자의 마음속에는 불 같은 것이 타올랐다는 말이다. 이 표현은 역으로 시편 기자의 율법을 사랑하는 정도를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성 경: [시119:5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나그네 된 집 - 이것은 '땅'을 말한다(19절). 저자는 자신을 마치 길가의 여관에 유숙하는 지나가는 손님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창 47:9).

⭕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 '노래'는 찬양의 노래로 보기보다는 기쁨, 행복, 위안, 힘 등으로 이해해야 문맥적이다. 외롭고 고통 당할 때 주의 율법을 깊이 묵상하는 일은 경건한 성도에게 기쁨과 위안을 가져다 준다.

성 경: [시119:5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품성 혹은 약속하신 바를 역사 속에서 행하신 것을 묵상하고 추억한다는 뜻이다. '밤'은 문자 그대로 시간대로서의 밤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통과 근심의 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저변에 깔린 상황이 고통의 때임을 중시하고 후기 유대주의 문학에 있어서 밤이 사단이 활동하는 때로 여겨졌던 사실 등을 고려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좀더 낫겠다.

성 경: [시119:5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규례를 기억하고 위로함]

개역 성경에서 본절은 원문과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내가 가졌던 이것은 내가 당신의 법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것'이란 50-55절에 있는 내용, 곧 저자에게 발생하였던 일들을 가리킨다. 그 일들이란 곤란 중에서도 위로를 얻었던 것(50절), 교만한 자가 조롱할 때에도 주의 법에 굳게 설 수있었던 것(51절), 율법 묵상을 통해 위안을 얻었던 것(52절), 악인들 때문에 맹렬한 분노에 휩싸였던 것(53절), 순례자와 같은 삶에서 평안을 누렸던 것(54절) 그리고 그많은 고통의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였던 것(55절) 등을 가리킨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율법 준수에 따르는 적절한 열매이자 결과이다.

성 경: [시119:5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본절의 어순(語順) 배열은 베어 사본(Baer's text)을 따른 것인데 '하였나이다' 때문에 절 전체가 어색하다. 따라서 '하였나이다'를 삽입구로 처리하면 절 전체의 의미 파악은 한결 쉬워진다. 즉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므로 나는 그의 말씀을 지키리라'로 이해할 수 있다. 변형시킨 본 구절과 문형상으로 유사성을 보이는 구절로는 애 3:24이 있다:"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시편 저자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부(富), 명예, 기쁨, 그 이상의 것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전부였다. 그러므로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당연하기까지 했다. 시편이 취하고 있는 특별한 성격 중의 하나는 여호와를이스라엘 전체의 분깃일 뿐 아니라 개인의 분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때때로 여호와의 분깃 혹은 그분 자신의 소유로 묘사된다(신 32:9).

성 경: [시119:5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 말라기 선지자 시대 때 백성들은 본절의 내용과 흡사한 탄원을 드린 바 있다(말 1:9). 그러나 지금 시편 기자가 드리는 탄원과 당시 백성들의 탄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편 기자는 신실한, 갈라지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탄원하였던 반면(2, 10, 34절),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무례에 가까운, 마지못해 하는 정신으로 탄원하였던 것이다.

성 경: [시119:5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 본절은 평이한 듯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특히 하반절의 해석은 쉽지 않다. '돌이켰다'는 표현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본절이 이전에 지은 저자의 죄악을 전제로 하고있다고 본다. 그들은 본절을 저자가 이전에 지은 죄를 회개한 사실을 강조하는 절로 단정한다. 먼 문맥 67절을 고려할 때 이 같은 단정이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본절을 저자의 회심 강조 구절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견해가 다양할 경우 우리는 가까운 문맥에 유의하는 것이 요구된다. 가까운 문맥은 일관성 있는 율법 준수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난관 속에서도 율법 준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절은 매순간마다 작은 행동 하나를 옮길 때마다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를 애썼던 저자의 율법 중심적인 삶을 강조하는 절로 보는 것이 낫겠다. 이 경우 '행위를 생각하고'는 행동의 순간 순간들을 가리키고 '주의 증거로 발을 돌이켰다'는 것은 매순간의 삶을 대처하기 위하여 주의 법으로 나아가 그것을 묵상 적용했다는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순간 순간의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이신 것을 기자는 확신하였음에 분명하다(잠 16:9).

성 경: [시119:6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 본문은 상반된 내용의 잠언 구절을 상기케 한다 :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잠 6:18). 저자는 순간순간마다 적용하여야 할 말씀이 떠오르면 지체치 않고 그 말씀을 따랐다. 그 까닭은 율법 준수는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상의 문제, 곧 그의 실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일임을 그가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시119:6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악인의 줄 - 시편 기자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그의 대적들이 사용한 온갖 수단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의 일종 혹은 시편 기자를 둘러싸고 있는 대적의 무리로 볼 수도 있다. 대적들은 흔히 짐승을 잡기 위하여 그물이나 덫을 설치하는 사냥꾼들로 묘사되기도 한다(140:5;욥 36:8). 그러나 이와 동일한 묘사가 죽음을 가리키거나(18:4,5;116:3), 죄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잠 5:22). 악인이 그를 둘러싸고 그를 넘어뜨릴 음모를 진행 중인 당시,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여길 수도있는 순간에도 저자는 하나님께 의혹을 품거나 그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다.

성 경: [시119:6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밤중에 일어나 - 55절에 이어 두번째로 '밤'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고난의 때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였던 55절과는 달리 본절의 '밤'은 문자 그대로 밤, 곧 일반적으로 잠에 빠져드는 안식의 시간으로 보는 것이 낫겠다. 왜냐하면 '일어난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남들이 깊이 잠에 빠져든 시간에도 일어나서 말씀을 묵상하고 감사할 정도로 말씀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주님께서도 날이 밝기 전 한적한 곳으로 가 기도하기 위하여 일어나셨으며(막 1:35),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며 기도하기도 하셨다(눅 6:12), 진정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말씀 묵상하기를 좋아하는 자이다(1:2). 한편, 쿰란 공동체 회원들은 날마다 밤 시간의 삼분의 일을 율법을 읽고 공부하는 데 투자했다고 한다.

성 경: [시119:6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동무(*, 하베르) - 본 용어는 후기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공동체 및 그 회합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그와 같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본 용어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법을 준수하는 자들을 마음에 두고서 그들과 자신을 동질화시키는 의미에서 이 표현을 썼을 것이다.

성 경: [시119:6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말씀에 대한 순종에의 다짐]

⭕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 감탄사 '여호와여'를 고려할 때 본 구절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는 저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을 충분히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일이다. 이같은 논조에 근거할 때 여기서 '땅'이란 약속된 땅만을 뜻하지 않고 온 세상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성 경: [시119:6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주의 말씀대로 - '하나님의 약속들', 혹은 '말씀의 원리들에 의거하여'라는 뜻이다. 문맥상, 본 시편 기자에게 임했던 선한 일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적용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키 위해 본 구절이 언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 말씀의 원리들은 그것을 신뢰하고 준수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계획 되었으며 결국 선한 결과만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 안녕등의 선(善)이 확대되는 것은 진리의 말씀과 약속이 퍼져 나가는 것에 비례한다고 할수 있다.

⭕ 선대(善待)하셨나이다 - 이것은 여호와의 신실하심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여호와의 말씀과 약속에 의거하여 종의 편에서 충성을 다하면, 여호와 편에서는 축복과 은총을 베푸신다. 이 같은 구도 밑에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이 깔려 있다.

성 경: [시119:6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명철(*, 타암) - 원래는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등의 맛의 종류를 분별해내는 '미각'을 뜻한다(출 16:31;렘 48:11). 그러나 이 용어는 분별력이나 이해력을 뜻하기도 하며, 어떤 사물의 도덕적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 곧 옳고 그름이나 지혜롭거나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 용어가 적용된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총명'이란 말과 '지식'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 지식 - 사람들, 사물들뿐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특별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정통(精通)하는 것을 말한다. 즉, 단순한 정보뿐 아니라 그 정보를 앎에 따른 책임을 관계성 속에서 능숙히 지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이 요구하는 만큼의 합당한 바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과의 교제'(Vriezen),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전인적인 반응'(Porteous)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 경: [시119:6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고난 당하기 전에는 - 본문은 시편 기자의 현재 상황을 분명히 밝혀준다.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 등의 본문 번역은 현재 시편 기자가 처한 상태를 '비천해지기 전에는'이라고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이 고난이 단순히 대적들의 적대감 때문에 임했는지 아니면 그 고난이 이웃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낳는 어떤 특정한 불행을 뜻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 그릇 행하였더니(*, 쇼게그) - 이는 '방황하다', '실수하다', '범죄하다'등을 뜻하는데, '범죄하다'를 뜻할 경우 의도성이 없는 죄를 대체로 가리킨다. 여기서는 그 의무를 잊음으로써 비롯된 죄 정도를 가리킬 수 있다. 그는 말씀 파수의 의무를 잊음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의 경우 의도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 인하여 말씀 파수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극적인 범죄쪽으로 기울어지고 만다.

성 경: [시119:6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선을 행하시오니 - 하나님의 선하심의 특성을 고백하고 있는 이 표현은 저자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역동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기술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감상적(感傷的)이거나 형이상학적,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와 그 가운데 사는 인간의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깨달아질 수 있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동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의 발견은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는 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저자는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속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우려할 만한 것은 극단적인 하나님 체험의 노력이다. 그 같은 노력 자체가잘못되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不在)한 곳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자세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성경 아닌 곳에서의 하나님 체험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사단은 자신이 베풀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베푼 것처럼 영적 체험을 경험케 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감정에 약한 인간을 유혹하여 결국엔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고 있다.

성 경: [시119:6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교만한 자 - 21, 51절 등에서 언급되었던 동일한 명사 '제딤'(*)이 다시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대적의 지나치고 포악한 억압을 암시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는 것 같다.

⭕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 여기서 '치려'는 원래 여러 조각들을 '한데 깁다'를 뜻하는데 주로 한 사람을 겨냥하여 여러 고소들이 걸리는 경우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저자의 대적들은 있지도 않은 거짓을 모아 저자를 고소하였다. 78절과 86절은 본절과 유사한 내용을 전달하는 구절들이다.

성 경: [시119:7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저희 마음은 살져 지방(脂肪) 같으나 - 여기서 '살져'는 '타파쉬'(*)로서하팍스 레고메논(구약에 1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으나 '지방' 곧 '헬레브'(*)의 용례가 그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사 6:10은 익히 알려진 구절인데 그곳에 이런 표현이 있다:"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그런데 탈굼역(Targum)은 본 표현 중 '둔하게'를 '기름지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뿐 아니라 17:10;63:5;사 6:10 등을 고찰해 본 결과 '기름지다'라는 뜻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경우는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저자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감각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를 음해(陰害)하려는 대적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즐거워하고 있다.

성 경: [시119:7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 '유익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문자적인 뜻은 '선하니라'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통을 신적(神的) 은총의 표식 혹은 부성애적(父性愛的) 교정(交情)의 한 방편으로 고백하는 이 말은 보기드문 신앙의 확신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유사한 표현이 94:12에서 등장한다:"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이외에도욥 5:17;잠 3:11 등을 참조하라). 기자는 고통을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좀더 배우도록 박차를 가하는 신적 교육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성 경: [시119:7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고난 중의 깨달음]

⭕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 일반적으로 금이나 은은 '세겔' 혹은 '개' 등의 단위로 그 수량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없는 무한대의 양을 암시할 때 사용하는 '천천'이란 형용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자는 그 수가 무한대인 금은을 말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서 귀히 사용하는 금은, 그것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양의 금은, 그것보다 주의 율법이 좋다고 말할 정도로 저자는 말씀 중심의 사람이었다.

성 경: [시119:7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 '만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수니'(*)는 시편에서 하늘(96:5), 달(104:19), 하늘과 땅(146:6), 바다(95:5), 그리고 그 안에있는 모든 것(146:6)의 창조뿐 아니라 인간 창조(95:6;100:3;138:8)를 언급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일반적인 의미의 창조를 말하는 본 용어 후에 '세우셨사오니'로 번역된 '예콘누니'(*)를 등장시키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직접 인간을 빚으신 것을 가리킨다.

⭕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사실을 고백한 후에 주의 계명을 배우겠다고 말한 이 소원은 의미가 깊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특유의 존재로서 태어난다. 첫사람 아담이 갖추었던 외양 자체도 여타의 짐승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러나 외관(外觀)만 갖추었다고 해서 온전한 인간은 아니다. 그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창조시의 목적에 합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첫사람의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본 소원의 의미이다.

성 경: [시119:7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 여기서 주를 경외하는 자가 시편 기자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는 단순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서의 저자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그들이 저자를 친구처럼 맞고 환영한다는 의미를 첨가할 수 있겠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시편 기자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사실을 함께 나누고 따라서 기뻐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 경우 저자의 현실이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아니므로 본절은 미래에 있는 일에 대한 확신도 포함하는 구절이 된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적절한 견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후 문맥의 주제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75-80절). 상반절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할 때 후반절의 '말씀'은 일반적인 의미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구원 약속에 관한 말씀이 되겠다. 여기서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신적(神的) 약속 혹은 판단하고 치유하는 역동적인 말씀을 흔히 의미한다(107:20;147:15).

성 경: [시119:7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 하나님의 도우심과 징벌의 시행은 전횡적(專橫的)이지 않고 완벽한 공의에 입각한 것이라는 뜻이다(40절).

⭕ 성실하심으로(*, 에무나) - 언약 용어로서 그의 말씀 혹은 특정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징벌을 내리시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하는 일을 일관성있게 시행하신다. 저자는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을 고백한다. 즉, 그는 그의 고통은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정당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7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신 공의의 원칙 때문에 그의 백성이 범죄할 경우 징벌을 내리시지만 무제한 징벌의 고통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는데 그 탈출 장치가 바로 그분의 인자하심에의 호소이다. 아마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과거에 체험하고서 거기에 근거하여 현재의 호소를 드리고 있는지도 모른다(94:17이하 참조).

성 경: [시119:7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긍휼히 여기심 - 하나님은 불의의 세력으로 인해 고통에 처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69:17, 18;79:8), 특별히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한 자들에게 각별한 긍휼을 베푸신다(103:13;106:45, 46;사 14:1; 30:18). 하나님의 자비가 그의 백성으로부터 거두어진다면 그들에겐 죽음밖에 없을 것이다(렘 16:5).

⭕ 살게 하소서 - 고통이 없는 삶, 더 나아가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말이다.

성 경: [시119:7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 악인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잘 알려진 시편의 소재들 중의 하나이다(35:4, 26;83:17 등). 이 경우 우리는 악행자 자신에 대한 적개심이 아닌 죄 자체에 대한 적개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즉, 이러한 기도문에서 기도자들은 죄를 지은 사람보다는 그 죄 자체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7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 교만한 자가 수치를 당하고 난 후에, 시편 기장의 결백성 여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어서 고통 중에 있는 그로부터 멀어졌던 경건한 동료들을 자기에게 모아달라는 간청이다.

⭕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 - 여기서 '저희'란 그에게 모여든 경건한 동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고통받던 의인의 상황을 뒤바꿔 놓으셨을 때 경건한 그의 동료들은 그에 대한 오해를 풀 뿐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서로 나누게 될 것이다.

성 경: [시119:8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범사를 의탁함]

⭕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 '완전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밈'(*)의 문자적인 뜻은 '순전한', '갈라지지 않은' 등이다. 결국 저자는 일심으로 율법만을 바라보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결코 수치가운데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성 경: [시119:8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칼레타 리트쇼아테카 나프쉬) - 직역하면 '나의 영혼은 당신의 구원 때문에약해졌습니다'이다. 여기서 '약해졌습니다'에 해당하는 '칼르타'(*)는 73:26에서 '쇠잔하나'로 번역되고 있다. 기자는 극도로 쇠약하고 곤핍해질 정도로 구원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가졌다. 한편, 본절의 이면에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능력으로써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교훈이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다(33:16; 60:11; 108:12;146:3).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실 때만 얻을 수 있다(37:39;62:2;144:10;사 45:17; 렘 3:23).

성 경: [시119:8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 여기서 '언제나'로 번역된 '마타'(*)는 의문 대명사인데, 당하고 있는 고통의 기간이 너무 길다고 하소연하기 위하여 시편 기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관용구로서, '얼마나 오랫 동안', '언제'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관용구는 오늘날의 성도들도 흔히 사용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하여 마치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에 개입하지 않으실 듯이 고난의 기간을 연장하시곤 한다.

⭕ 내 눈이...피곤하니이다 - 오랫동안 약속의 성취, 곧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느라고 지쳐 있는 상태를 암시하는 본 구절은, 동일한 상태에 대한 보다 회화적인 묘사인 사 38:14을 연상케 한다:"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中保)가 되옵소서."

성 경: [시119:8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연기 중의 가죽병 - 본 이미지의 출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 하나는 텐트 안에 걸려 있는 가죽병이다. 팔레스틴 유목민들은 텐트 생활을 하였는데 텐트안에는 음료로 마시는 포도주를 담은 가죽병이 걸려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텐트 안에서 불을 지필 경우 연기는 빠져 나가지 못하고 공중에 달려있는 가죽병을 까맣게 그을려 놓는다고 한다. 이때 여러 차례 연기에 그을려진 가죽병은 역경으로 인한 고통, 슬픔 등의 상징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연기 위에 달려 있는 가죽병이다. 고대의 관습 중의 하나는 포도주를 익히기 위하여 연기를 피우고 그 위에 포도주를 담은 가죽병을 달아 매단다. 그러나 이 경우는 앞의 경우와는 달리 고통을 통한 품성의 연단을 상징할 때 사용되는 이미지이다. 본절의 경우는 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문맥이 연단을 위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기보다는 고통 자체, 고통의 정도에 대한 묘사에 기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랜 고통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영육간의 형편을 연기에 찌든 가죽병에 비유하고 있다.

성 경: [시119:8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 이제 환난의 짐에 너무 눌려서 오래 살기를 희망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가 그의 대적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빨리 개입해 주시라는 간청을 담고 있다. 시편 기자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특히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의 신속한 구원중재를 요청할 때 바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 -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를 핍박하는 자를 언제 심판하실 것입니까'이다. 문자적 표현 그대로 원수가 심판받을 날을 묻는 내용이 아니라 그 심판의 때가 지연되고 있음을 하소연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나는 원수 심판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반드시 행하실 것이면 이제 빠른 시간 안에 행하십시오.' 결국 이 하반절도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빠른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119:8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교만한 자(*, 제딤) - 이것은 사회적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탈법적인 행위를 일삼는 비윤리적인 폭군형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나 본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저자를 모해(謀害)하는 상류 계급을 뜻하고 있다(21, 51절).

⭕ 웅덩이를 팠나이다 - 성경은 흔히 의인의 대적을, 무고한 희생물을 잡기 위하여 덫을 놓는 사냥꾼에 비유하고 있다(35:7;57:6;렘 18:22). 아마도 본절이 의도하고 있는 저자의 대적은 그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고도로 은밀한 그리고 외관상 합법적인 것으로 보이는 음모를 짰을 것이다.

성 경: [시119:8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 하나님의 계명은 진리이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때가 차면 계명이 명시하고 있는 축복과 저주는 분명한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저자는 감당할 수 없는 누적된 고통의 상황 속에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계명 내용을 신뢰하려고 하고 있다. 그는 결코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 무고히(*, 쉐케르) - 문자적인 뜻은 '거짓, 속임수'이다. 말하자면 대적들의 핍박의 근거는 거짓, 속임수라는 것이다. 그들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저자를 비방하고 모함하였다.

⭕ 나를 도우소서(*, 아제레니) - 이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와 같은 자가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하다(10:14).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저자가 얼마나 외로운 상태에 있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성 경: [시119:8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거의 멸하였으나 - '멸하였으나'의 원어는 81절에서는 '피곤하오나'로 번역된 것이다. 본절의 의미는, 대적의 핍박은 너무 가혹하고 또한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기때문에 저자의 기력은 거의 고갈되었고 이제는 기진하여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 죽음에 가까운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에 더욱 집착하였다는 말이다. 핍박의 결과는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기는 커녕 더욱 가까이 가게 하였다는 이 고백을 통하여 대적들의 핍박 목적이 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고 역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의 말씀에 착념하는 이러한 태도는 재앙이나 고통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의 법을 잊었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태도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렘 16:10, 11).

성 경: [시119:8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구원에 대한 간구]

⭕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 저자 자신의 어떤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적 품성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간구이다. 앞의 문맥은 저자가 장기간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뢰해 온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같은 태도를 근거로 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공적 따위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적 품성에 의거해서 저자는 도우심을 기다리고있다.

⭕ 주의 입의 증거 - 아마도 하나님의 법 전체를 의미하는 말인 것 같다. 저자는 하나님의 자비적 품성에 근거한 도움을 요청한 후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어떤 조건부가 아니다.

성 경: [시119:8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주의 말씀(*, 데바르카) - 원래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뜻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후대에 들어서는 기록된 말씀까지도 이 용어에 포함되고 있다.

⭕ 하늘에 - 하나님의 목적과 뜻, 그리고 성문화된 성경 말씀의 불변성, 영원성을 암시하기 위하여 본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89:2). 하나님이 율법으로 명하신 것은 항상 율법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가 확증한 진리는 항상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가 약속한 것은 영원히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말씀의 불변성, 영원성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사 40:8;벧전 1:24, 25 등).

성 경: [시119:90]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 시대는 바뀌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 태양이 계속 돌고 산이 그대로 있고 시내가 변함없이 흐르듯이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세대에 적용된다.

⭕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 천지 창조 때 형성된 것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강, 시내 그리고 물의 근원, 땅이 내는 과실과 화초들, 부드러운 공기, 따가운 햇살, 땅 속의 금, 은, 그외의 진귀한 광물들, 그리고 물 속의 각종 어류들, 비록 부패되기도 하고 고갈되기도 하지만 땅이 존재하는 한 천지 창조 때 형성된 이와 같은 것들은 계속 존재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베푼 은혜로운 약속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고 적용된다.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신실성 및 영구성을 효과적으로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천지 창조 및 그 보존 사역을 덧붙이고 있다.

성 경: [시119:91]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레미쉬파테카 암두 하옴) - 직역을 하면 '당신의 규례들로 인해 그것들은 이날 굳건히 서 있습니다'이다. 여기서 '규례들'이란 어떤 명령 형태로 주어지고 그에 따라 판결하는 하나님의 율법,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굳건히 서 있다'라는 동사의 주어가생략되어 있는데 문맥상 '하늘과 땅'(89, 90절)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여 본 구절을 의역하면 이렇다:'하늘과 땅, 곧 온 우주 만물은 당신의 율법에 의거해서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습니다.' 말하자면 온 우주는 하나님 통치의 견고성, 지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 만물이 안정성(견고성), 지속성을 유지하게 되는 까닭은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이며 그분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 경: [시119:92]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율법은 본 시편 기자의 즐거움이었다(24절). 그는 그것을 행함으로써 기쁨을 누렸다. 만일 그가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고 율법을 멀리했다면 그는 고통 주에 절망하며 재기 불능의 처지로 전락했을 것이다(73:27). 그러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고난 중에 진통제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사실에 있기보다는 율법을 멀리하는 자는 결국망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9:93]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 이것은 영적인 삶, 곧 회심에 따르는 영생으로 볼 수 있고(약 1:18) 말씀 순종에 따르는 풍성한 삶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당장 겪고 있는 고통을 넉넉히 이겨내는 능력있는 삶으로 보는 것이 보다 문맥적이다(94, 95절). 저자는 주의 법을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첩경임을 알고 있었다.

성 경: [시119:94]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나는 주의 것이오니 -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실을 강조하는 저자의 이 확신은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근거가 된다:"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143:12).

성 경: [시119:95]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엿보오나(*, 키우우) - 원래 '숨어서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것은 시편 저자를 멸할 구체적인 음모를 가지고 그의 대적들이 그것을 실행할 기회만 찾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 생각하겠나이다(*, 에트보난) - 일반적으로 '지키다', '준수하다'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집착하다', '고수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본절이 그려내고있는 대비적 긴장감과 조화를 이룬다. 자신을 멸하려고 하는 대적의 무서운 음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결코 흔들림이 없이 주의 율법만을 고수하고 거기에 집착하고자 다짐하고 있다.

성 경: [시119:96]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주의 계명의 영원 불변함]

⭕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 여기서 '완전'으로 번역된 '티클라'(*)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지만 동일 어근 '타클리트'(*)가 여러곳에서 나오므로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욥 26:10에서는 '경계'로 번역되고있고, 욥 11:7에서는 '온전'으로 각각 번역되고 있다. 한편, '끝'은 어떤 사물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본문이 암시하는 바는, 인간이 만든 모든 완전하다고 하는 사물 따위는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하고 탐색해 들어가면 인간적 산물의 뿌리, 근거는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만든, 완전하다고 하는 사물은 모두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성과 결함은 이어지는 하반절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 심히 넓으니이다 - 완전하다는 인간적 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율법)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그 진정한 근원적 특성은 간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흔히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율법의 범위 및 영성(靈性)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완전한 기준을 갖고 있어서 그 기준에 합하는 행동을 한 후에는 자신들은 완전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보다 고상한, 아니 참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자신들의 행위를 비춰볼 경우 자신들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인데 그 뿌리가 분명히 보이는 세상적 기준과는 달리 하나님의 율법의 참본질, 기준은 가히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어떤 기준을 따라 살면서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면서 나는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욥 9:10). 이것이 본절이 말하는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 저자의 겸손을 읽을 수 있다. 계속해서 저자는 자신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것에 집착하며 산다고 고백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머리로써는 완전히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는 하나님 율법 중심적인 삶과 아울러 완전한 율법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는 자각에 따른 겸손을 잃지 않고 있다.

성 경: [시119:97]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최상의 지혜]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그 강도에 스스로 놀라서 이 같은 감탄문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가 이토록 강렬하게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것임을 절감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1:2). 그에게 있어 율법은 억지로 지켜야 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라 가까이할수록 평강과 즐거움이 풍성해지는 지속적인 사랑과 묵상의 대상이었다(Alexander). 이 사실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귀중한 모본을 제시한다. 신앙의 본질적 깊이를 맛보지 못한 사람은 흔히 단순한 의무감 내지는 습관적 매너리즘에 사로잡혀 별다른 감동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성 경: [시119:98]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최상의 지혜]

⭕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 주의 계명은 원수들이 가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혜를 가르쳐서 저자로 하여금 원수들의 모든 모략과 술수를 능히 극복할수 있게 해준다는 고백이다. 물론 이 지혜란 정략적이고 교묘한 혹은 인간적인 지혜를 뜻하지 않는다. 이제 그 지혜로 말미암아 저자는 그의 대적보다 지혜로울 뿐 아니라그의 스승들보다도 지혜롭고(99절), 노인보다 지혜로울 것이다(100절). 또한 이 지혜는 학술적인, 혹은 기술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근본적인 목적과 삶의 지침을 깨닫게 하는 지혜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지혜이며, 또한 그로 하여금 모든 악(惡)을 피하게 하는 지혜이다(101절). 본절의 주어로서 '주의 계명'으로 번역된 '미초테카'(*)는 복수형이지만, 동사인 '테하크메니'(*)는 단수로 되어 있다. 히브리어에서는 주어와 동사의 수가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70인역(LXX) 같은 경우는 '주의 계명' 대신 '당신'이란 단수로 바꿔 번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수정은 원문적이지 않다. 우리는 '미초테카'를 모든 계명들을 의미하는 대표 단수격의 용어로 보면 되겠다(19:7).

성 경: [시119:99]

주제1: [여호와의 율법]

주제2: [최상의 지혜]

⭕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 여기서 시편 기자는 개인적인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혜의 두 근원을 대조하고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혜 선생들로부터 온 가르침과 여호와의 법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을 대조시키고 있다. 세상 지혜 선생들이 가르칠 수 없는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혜와 하나님이 인애(仁愛)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분인 것을 깨닫게 하는 지혜이다. 특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을 공평히 대하시는 분임을 경험했고 다시 그 경험을 기대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3, 24). 시편 저자는 이 같은 지혜를 말씀 묵상을 통해 얻었노라고 고백했다.

성 경: [시119:100]

⭕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 시편 기자가 깨달았던 또 한가지의 사실은, 참지혜는 오랜 인생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경험에서 온다는 것이다.(4절) 바로 이 사실을 본절에서 밝히고 있다. 말씀 순종에 앞서 갖추어야 할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경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기고,말씀에 순종할 때 참 지혜를 얻게 된다(잠1:7)

성 경: [시119:101]

⭕ 발을 금하여 - 신앙의 정도를 걷고자 하는 저자의 강한 의지적 노력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즉, 저자는 악의 길을 아예 피하였고 죄악된 삶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같은 의지적 노력은 말씀을 파수하려는 마음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길(* 오라흐). 시가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데 이 용어는' (의인의) 길'을 가르킬 때도 쓰이는 것으로서(잠4:18) 어떤 특정한 행위, '생활' ,'삶'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 경: [시119:102]

⭕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 선행절(99,100절)에 나타난 저자의 모든 자랑의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그의 지혜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그분만이 그의 백성에게 참생명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가르칠 유일한 분이시다.

⭕ 내가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 전형적인 신명기적 표현이다(신9:16;17:11,20;28:14). 하나님의 규례에서 떠난다는 말은 그 규례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말3:7)

성 경: [시119:103]

⭕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묵상을 통하여 깨달아진 말씀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 것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본문의 강한 감탄문은 최상급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꿀(* 데바쉬). 일반적으로 들꿀이나 양봉꿀을 가리키는 말이지만(대하31:5), 단맛을 내는 데 사용하였던 포도시럽을 가리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원적으로 볼 때 아라비아어닌 '디브쉬'는 '포도 시럽'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가서는 가정 단 것, 맛있는 것을 말할 때 '꿀'을 자주 들고 있다(잠16:24; 겔3:3)

성 경: [시119:104]

⭕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 하나님과 자신, 인간의 특성과 운명, 구원 방법 등 등에 관한 바른 견해를 철학적 탐구나 인간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 곧 율법을 통해서 얻었다는 것이다.

⭕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 이것은 율법에 명시된 하나님의 목적들을 이해한 결과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8:13)

성 경: [시119:105]

⭕ 내 발에 등이요 -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횃불이나 등잔불과도 같다는 말이다. 밤의 횃불이나 등잔불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가파른 언덕에서 구르는 것을 방지해 줄 뿐 아니라 위험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데 인생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상반절과 동일한 개념이 반복되고 있다. 빛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비춰서 그로 하여금 그 길을 바로 보고 그 길 가운데 있는 웅덩이 따위의 위험물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인해 어둠 속을 헤매는(23:4) 인생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이다(요1:4). 그러나 죄로 인해 영적 소경이된 자들(마6:23; 요3:19)은 이 빛을 눈으로 보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한다(요1:5).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는 사람은 항상 바른 길을 가게 된다.

성 경: [시119:106]

⭕ 맹세하고 - 저자는 굳은 결심의 뜻을 나타내고 싶어하는데 그 의지의 강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법정적 용어인 '서약','맹세'라는 뜻을 지닌 '니쉬바티'(*)를 사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서 그분 앞에서, 심령을 분별하시는 그분 앞에서 결심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유, 보통 공개적 맹세는 하나님의 집, 곧 성젼에서, 심령을 분별하시는 그분 앞에서 행하였다. 그러나 본 시편 저자는 가정 제단에서, 아니면 하나님과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아마도 이 맹세를 하였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표현을 성전 입장 때 행하였던 예식적 서약에 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하지만 본 시편 전체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로 보아 개인 고백적 맹세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 굳게 정하였나이다(*아카예마) - 문자적인 뜻은'견고하게 세웠다'이다, 말하자면 말로만 정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할 것을 단단히 각오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앞의 '맹세하고'와 그 의미가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역본은 본 구절을 '엄히 약속을 세웠다'로 번역함으로써 '맹세하고' 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성 경: [시119:107]

⭕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나아네티 아드 메오드) - 직역하면 '나는 극도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이다. 고통의 강도를 이처럼 세계 묘사한 곳도 드물다. 따라서 어떤 학자는 본문의 고통을 지옥에 가까운 고통이라고 주석한다. 이 고통으로 인하여 그의 기력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따라서 저자는 하나님께 소생시켜줄 것을 탄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극도의 고통 가운데서도 그는 말씀 중심의 인생관을 놓치지 않고 있다(하반절)

성 경: [시119:108]

⭕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 여기서 '구하오니' 에 해당하는 '나'(*)는 '제발', '탄원합니다' 등의 뜻을 지닌 감탄사로 '간절히 원합니다' 정도로 번역하면 원문에 가깝겠다. '낙헌제' (* 니드보트)는 억제나 강요가 없이 자원하여 드린다는 것이 그 특징인 제사로서 '자원제' 라고도 불리운다. 보통 고운 가루나 곡식 혹은 과일, 그외의 어떤 종류든지 소유하고 있는 것을 그 예물로 드리던 제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입의 낙헌제'라고 하는 것을 보아 본절의 '낙헌제'란 드린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구약 시대 때 주로 드리던 낙헌제의 제물이 곡식, 고운가루, 과일 따위의 산물이었다면 신약 시대 때 드리는 낙헌제의 제물이란 주로 찬양이 되겠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저자는 찬양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받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성 경: [시119:109]

⭕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나프쉬 베카피 타미드) - 직역하면 '나의 영혼이 계속적으로 나의 손안에 있사오나' 이다. 70인역(LXX)은 본 구절을 '나의 영혼은 항상 당신 손에 있습니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나의' 대신 '당신' 이란 접미사로 바꿀 만한 원문상의 근거가 없고, 이차적으로는 이러한 번역을 위할 경우 본문과 하반절의 내용은 원인과 결과의 내용으로 보아야 하는데 원문상 원인과 결과절을 뒷받침할만한 접속사가 없기 때문이다. 원문 직역이 밝히고 있는 바 저자의 영혼이 계속적으로 저자 자신의 손안에 있다는 말의 뜻은 그의 영혼, 곧 생명이 항상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금언적 표현의 일종이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먕이 없노라" (욥 13:14,15). 말하자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노출된 손 위에 놓인 것은 갑자기 낚아챔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속담이나 금언식으로 말할 때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는 말이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금언적 표현을 통하여 자신이 계속적으로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왔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삿 12:3;삼상 19:5 등을 원문적으로 살펴보가). 이상의 주석을 고려할 때 그 출처를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개역 성경의 번역은 극히 원문적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19:110]

⭕ 악인 - 이들은 희생을 잡기 위하여 올무를 놓는 사냥꾼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러한 비유법은 시편뿐 아니라(9:15; 35:7; 38:12) 선지서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사 8:14; 24:17; 렘18:22; 호9:8; 암3:5).

⭕ 올무(*,파흐) - 바닥에서 갑자기 솟아올라 희생을 덮치도록 되어 있는 밑받침과 두 개의 그물로 구성된 새잡이 덫 혹은 들새류를 잡는 올무를 가리키는 말이다(암3:5).

성 경: [시119:111]

⭕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 원뭉을 살려 번역하면 '

당신의 증거들을 나는 영원한 기업으로 취하였습니다 ' 가 된다.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증거들'이란 하나님의 율법, 무엇이 진리이고 참인지를 엄히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 뜻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업'으로 번역된 '나할' (*) 은 '수유로 받다' , '상속하다' , '얻다' 등을 뜻하는 동사로, 일반적으로 상속물鱁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진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적용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본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영원한 소유물로 취하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여원한 소유물로 준 가나안 땅 그 자체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더욱 진정한 영원의 소유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한편, 16:5, 6에서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겠다고 소원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 여기서 '즐거움이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즐거움이 된다는 말이다. 저자가 하나님의 율법을 영원한 소유물로 삼는 이유는 그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맛볼 수 있는 기쁨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다(1:2).

성 경: [시119:112]

⭕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 '길이 끝까지'란 '항상, 심지어 인생 종말에 이를 때까지'를 뜻한다. 율법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상황이나 기분을 따라 이랬다 저랬다는 하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경건한 자라고 할 수 없다.

⭕ 기울였나이다(*,나티티) - 일반적으로 팔 따위를 '뻗치다' , '내밀다' (출8:6,17), '수그러지다' , '절하다'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마음의 방향을 어느 한쪽으로 정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각오했다' , '작정했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평생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기 위하여 굳게 각오 하였다. 마음은 의지의 좌소이다. 의지의 내용이 결정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려는 의지와 그에 수반되는 실행이 구체적으로 뒤따를 때 신앙은 빛을 발하게 된다.

성 경: [시119:113]

⭕ 두 마음 품는 자(*,세아핌) - 구약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는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다. 70인역(LXX)과 시리아역은 각각 '범법자들' 그리고 '헛된 생각들을 하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많은 영역본들이 둘 중의 하나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본 용어를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다른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아합의 거짓 선지자들을 멸하기 전 갈멜산의 엘리야가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나 바알 둘 중의 하나를 쫓으라고 도전을 주는 대목이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 18:21). 여기서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원문적으로 '두 의견들 사이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지체하느냐'인데 이중에서도 '두 의견들'이 본문의 용어와 정관사 '하'(*) 하나에서만 외형상의 차이를 보이는 '하스이핌'(*) 이다. 본 용어는 악 1:8의 '두 마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 결정적인 단서를 중시할 때 본 용어를 '범법자들' 혹은 '헛된 생각들을 하는 자들' 대신 '두 마음을 가지 자들'로 번역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루터(Luther)의 경우도 이것을 지지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신뢰심을 갖지 못한 자들인 '두 마음을 가진 자들'을 미워한다고 표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임을 강조하려 하고 있다.

성 경: [시119:114]

⭕ 은신처 - 문자 그대로는 몬을 숨기는 곳이란 뜻이지만 문맥상 완전한 보호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해석해야 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대적이나 죄 및 그 결과가 미치지 못하는 곳을 암시하고 있다.

⭕ 방패 - 여호와를 그의 백성의 방패로 묘사한 것은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바이다(28:7;33:20;84:11;115:9). 뿐만 아니라 시편 전에 모세 오경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방패로 묘사했었다(창15:1; 신33:29). 방패는 일번적으로 수비용 무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본졀에서는 그곳에 '신뢰'를 두는 대상이라는 사실에 그 초점이 두어지고 있다(5:2).

성 경: [시119:115]

⭕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따라사는 일을 방해하거나 저해하지 못한다는 강한 의지를 암시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대로 살기 원하는 경건한 자는 부도덕한 자들의 공동체와 분리되기 위하여 애써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9:116]

⭕ 주의 말씀(*, 이므라트카) - 11,172절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

⭕ 붙들어 - 원형은 '사마크' (*) 인데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위험으로부터의 구원, 축복 따위의 적극적인 의미를 뜻하기도 하지만 본절에서는 시험과 유혹 중에서 본연의 신앙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끔 하심을 뜻한다. 시험과 유혹에 직면한 저자는 그것들과 싸워 그것들 속으로 가라 앉거나,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낼 수 있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 문자적인 뜻은 소망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는,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켜지지 않고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 약속에 대한 의심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소망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성 경: [시119:117]

⭕ 나를 붙드소서(*,세아데니) - 삶의 시험과 유혹들에게로 빠지지 않도록 지키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베풀어 달라는 쓰을 지닌 용어이다. 원래 본 용어는, '기둥이 되어주다', '지지하다', '지원하다' 등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붙들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 내가 구원을 얻고(*,아와쉐아) - 이는 강동사로서 이 사실을 고려할 때 '나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로 번역해야 뜻이 더욱 살아난다. 단기적 구원이든 영원한 구원이든 간에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강한 확신이 엿보인다.

성 경: [시119:118]

⭕ 떠나는 자 - 의도적으로 율법을 떠나 방황하는 자라는 뜻이다.

⭕ 멸시하셨으니(*,살리타) - 무게를 다는 데 사용하는 용어로서 원문 직역은 '가볍게 하다',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다' 가 된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멸시하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이 이 번역을 위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율법에서 떠난 자들을 하찮은 존재로, 무가치한 물건 따위로,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리는 껍데기 정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1:4; 35:5:욥 21:18; 사17:13).

⭕ 허무함(*,쉐케르) - 이는 문자적으로 '자기 기만' 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난 자의 속임수는 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신도 혼돈으로 빠뜨려 결국엔 파멸로 몰고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성 경: [시119:119]

⭕ 찌끼같이 버리시니 - 여기서 '찌끼'(*,시김)는 용광로에서 나오는 광물의 찌끼인 '쇠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나님은 악인을 용광로의 찌끼 '쇠똥'처럼 버리실 것인데 그 일은 맹렬한 심판을 통해 행해진다(렘6:28-30; 겔22:18-20;말3:2,3).

⭕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 말하자면 율법이 죄를 징벌하는 공의의 법인 점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땅 위에는 완전한 공의를 세울 수 있는 법이란 하나님의 법밖에 없다.

성 경: [시119:120]

⭕ 떨며(*,사마르) - 공포 분위기 속에서 빳빳하게 서는 머리털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욥4:15). 율법의 준수를 갈망해 왔지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실패할 경우를 상상하고 전율하면서 새롭게 율법 준수를 다짐하는 모습을 묘사해 주는 표현이다.

성 경: [시119:121]

⭕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 '공과 의'란 각각 '미쉬파느'(*)와 '체데크'(*) 인데 이들은 공히 율법과 연관성이 있는 용어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율법을 지키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 그에게 그릇되이 행하고 그를 멸망시키려는 자들에게 남겨 놓지 말라는 말이다.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버을 순종해왔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 같은 간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한 요구의 차원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에 대한 요구를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 도움을 베푸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그리고 인생이 죄악된 세상에서 경건과 믿음을 지킬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발견되어 질 수 있다는 겸허한 확신에 근거하여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성 경: [시119:122]

⭕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라로브 아브데카레토브) - 문자 그대로 보아 본 구절을 132절과 더불어 본 시편 중에서 율법에 대한 암시가 없는 구절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문맥을 중시하는 성경 전체의 특성을 중시할 때 176절 중 단 두 절만 율법이란 문맥에서 예외적이라고 굳이 볼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본 구절을 율법이란 문맥에서 주석해야 할 것이다. 우선 '아로브'(*)는 다른 사람의 채무에 대하여 합법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로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보증하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창43:9; 잠6:1; 11:15:17:18;20:16). 그리고 '복을 얻게' 에 해당하는 '레토브'(*)는 문자적으로 '선을 위하여'가 된다. 그러나 율법 준수가 저자의 선이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는 앞절을 중시할 때 추상 명사 '선'은 '율법 준수'로 의역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본 구절은 저자가 자신의 율법 준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달라고 구하는 내용이 되겠다. 즉 본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율법 준수를 인정하셔서 핍박자가 자신을 압박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졀과 앞절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강조 구절들인 셈이다.

성 경: [시119:123]

⭕ 주의 의로운 말씀 - 이 경우 '말씀'으로 번역된 '이므라트'(*)는 하나님의 의로운 목적을 성취하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 피곤하니이다(*,칼루) - 어떤 능력이 고갈되었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동사이다. 교통 수단(예를 들면 당시의 배), 혹은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의 만남 혹은 위험 중의 도움 따위를 기다리다 지칠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구원 약속을 강렬하게 기다리다 지칠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 경: [시119:124]

⭕ 인자하신 대로 행하사 - 원문적인 뜻은 '인자에 의거하여 취급해 주소서'이다. 여기서 '인자'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뜻한다. 모두 죄인인 인생들 중에 엄한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에 의거하여 자신을 취급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자란 없다. 우리 성도들은 신실한 그의 언약에 입각한 하나님의 광대하고 무한한 자비에 의거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성 경: [시119:125]

⭕ 나는 주의 종이오니 - 여기서 '종' 이란 용어는 저자의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뿐만 아니라 언약에 기초한 인격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 - 여기서 '증거'란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서 저자 자신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을 뜻하는데 본 기도문 자체는 기도자의 강렬한 자발성을 암시하고 있다. 언약에 기초한 인격적인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자는 먼저 기꺼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들을 사모하기 마련이다.

성 경: [시119:126]

⭕ 본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지금은 여호와께서 행동하실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의 율법을 파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다. 상반절의 동사는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단호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동일한 동사가 렘18:23에 사용되었는데 개역 성경은 '행하옵소서'로 번역하고 있다. 저자는 상반절에서 빠른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같은 요청을 하는 이유는 그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파기하였기 때문이다. 파기하였다는 말은 율법의 권위는 인정하되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의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던 대적들에게 심판이 임하기를 간구한 것이다.

성 경: [시119:127]

⭕ 그러므로 - 원문에는 없으나 앞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역본들이 삽입한 접속사이다. 이 접속사는 대적들이 주의 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앞절 내용을 받는 구실를 한다. 말하자면 대적들이 주의 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나 저자는 주의 법을 가치있는 것으로 사랑하였다는 대비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 접속사를 삽입한 것이다. 시가서 저자들은 하나님의 지혜, 말씀의 무한한 가치를 이야기할 때 말씀과 금은 따위와의 비교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욥22:25; 28:15; 잠3:14;8:10,19:16:16등).

성 경: [시119:128]

⭕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칼피쿠데 콜 이솨레티) - 직역하면 '나는 모든 것에 관한 모든 당신의 법들이 옳음을 존중합니다'이다. 저자는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 관계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 명령들을 정당하고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고백이다.

⭕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 문맥상 '모든 거짓 행위'란 참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은 모든 행위들을 뜻한다. 율법만이 참진리에 근거한 가르침을 제시할 수 있다.

성 경: [시119:129]

⭕ 기이하므로 - 그것을 묵상할 때 묵상하는 자로 하여금 경탄에 빠지게 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로서의 율법을 설명하는 말이다. 율법의 지혜 및 그 선하심, 깊이를 알 수 없는 내용들은 율법을 대하는 자들의 경외감을 자아낸다.

성 경: [시119:130]

⭕ 주의 말씀을 열므로(*,페타흐 데바레카 야이르) - 직역하면 '당신의 말씀의 문은 빛을 줍니다'이다. 본절 해석의 핵심은 '페타흐'(*)인데 본 용어는 문자적으로 장막이나 성전의 '출입구'(창18:1;왕상6:8) 혹은 일반 가정이나 도시의 '대문'이나 '성문'을 뜻한다(수 20:4;삿9:35;사3:26).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서 보이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문이 열리면 우리가 그 집안이나 성안으로 들어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면 우리는 말씀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본다. 하나님이 말씀의 문을 여실 때에야만 우리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 우둔한 자(*,페타임) - 문자적인 의미는 '왜곡됨에 그 마음을 여는 자'이다. 말하자면 남의 이야기에 쉽게 빨려 들어가 그것을 믿는 자를 뜻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곳도 있다(116:6). 본절에서도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교만하여 말씀의 의미가 밝혀질 때 마음을 닫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마음을 기울이고 어린아이처럼 받는 자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19:131]

⭕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 타는 듯한 열기로 찌들리면서 한줄기 시원한 물을 갈망하는 혹은 한 번 부는 서늘한 바람을 고대하는 사람의 경우와 같이 강한 열망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욥29:23)

성 경: [시119:132]

⭕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케미쉬 파트 레오하베 쉐메카) - 문자적인 의미는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던 판결을 따라서'이다. 여기서 '미쉬파트'(*)는 흔히 판결, 재판, 재판관 등으로 번역되는 용어이다. 본절에서는 자신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의미를 고려하여 본 구절을 의역하면 '주의 이름을 사랑하느 자들에게 은혜를 내리시던 경우처럼'이 되겠다. 이와 유사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시편으로는 106:4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권고하사."

성 경: [시119:133]

⭕ 굳게 세우시고(*,하켄) - 계속 유지케 해달라는 뜻이며 '인도해 주시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

⭕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 저자는 자기 자신의 불순종의 가능성보다는 그의 대적들로 말미암은 재난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른 시편기자 중에 자신이 고의로 죄 범하는 것을 막아 달라고 기도한 자도 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19:13)

성 경: [시119:134]

⭕ 구속하소서 - 본 동사의 원형 '파다'(*)는 노예나 포로의 해방(출21:8) 뿐 아니라 대리자 혹은 금전 지불을 통해 사람이나 짐승을 죽음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을 암시한다(출13:13,15;민18:15). 또한 이 용어는 각종의 고통이나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상징적 묘사 때 사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대적의 억압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는 저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도래할 평안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135]

⭕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본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시편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아마도 저자들은 구름 속으로 숨었다가는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에서 그 이미지를 빌어왔을 것이다. 동일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본 시편 저자는 마치 태양이 구름 속으로 숨듯이 오랫동안 은혜 베풀기를 중단하고 계신 듯한 하나님께 다시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광야 시대, 모세는 민족적 축복을 선포할 때 이와 유사한 표현을 하고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기기를 원하노라" (민 6:24-26).

성 경: [시119:136]

⭕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팔게 마임 야레두 에나) - 직역을 하면 '나의 눈은 물들의 강을 타고 내려갑니다'이다. 이것은 커다란 슬픔으로 인하여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암시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다(애3:48). 기자가 이처럼 큰 슬픔을 가졌던 까닭은 그 동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순종, 그 어리석음, 패역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것은 본 시편 기자뿐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러셨고(눅19:41), 비록 눈물을 흘렸다는 문자적 표현은 없으나 바울 역시 그와 유사한 정서를 표현한 바 있다(롬 9:1-3).

성 경: [시119:137]

⭕ 주는 의로우시고 - '의로움'은 하나님의 주요 품성 중의 하나인데 이 품성은 의인에게 상 주시고 악인은 징벌하시는 그의 행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11:6; 느9:33). 분만 아니라 이 품성은 궁핍한 자나 억울한 자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도우심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116:5; 145:17). 한편, 법정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품성은 하나님이 인간의 판단을 넘어서 계신 분이며 아무도 그를 송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욥34:10-30;렘12:1).

⭕ 판단 - 문맥상 이 용어는 흔히 뜻하는 바 '심판' , '징벌' 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 같다.

성 경: [시119:138]

⭕ 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치위타 체데크 에도테카 웨오무나 메오드) - 직역하면 '당신은 의로움과 월등한 신실함으로 당신의 증거들을 명령했습니다'이다. 이것은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인 율법의 특성을 밝히는 것인데 그 특성은 의롭고 확신을 둘 만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반드시 성취될 약속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전폭적으로 신뢰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율법의 특성은 불의한 자가 포고한 불의한 법령의 특성과 대조를 이룬다(사10:1; 렘8:8)/

성 경: [시119:139]

⭕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 저자가 대적에게 분노를 금치 못한 까닭은 그를 파멸시키려는 악한 노력 자체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하나님고 율법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 '열성'으로 번역된 '킨아티'(*) 는 예후의 경우처럼 지나치면 광신주의로까지 나갈 수 있는(왕하 10:16) 정열적인 것, 배타적인 헌신(왕상19:14) 등을 암시하는 용어로서 이곳에서는 거룩한 열심, 정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멸하였나이다'로 번역된 '침타트니'(*)는 '자르다'(54:5' 88:16' 94:23' 101:5' 욥23:17; 애 3:53) 혹은 '파괴되다'(18:40; 69:4 ;73:27; 101:8; 삼하22:41)를 뜻하지만 '힘의 고갈'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하나님 말씀의 영예를 유지시키려는 열심을 크게 낸 나머지 그 힘이 고갈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 경: [시119:140

⭕ 심히 정미 하므로(*, 체루파 메오드) - 여기서 '체루파'는 용광로에 있는 금속과 관련된 용어로 '제련된' '정제된' 등을 뜻한다.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찌끼와 불순물이 다 제거된 값비싼 금속과도 같이 순수하고 진실하다.

⭕ 이를 사랑하나이다 - 자신을 구하는 도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성격 자체가 너무도 순결하고 진실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 약속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성도가 가져야 할 말씀에 대한 태도이다.

성 경: [시119:141]

⭕ 미천하여(*,차이르) - 이 단어는 그 수가 적음을 나타낼 때 (사 60:22 ; 미 5:2) 혹은 나이가 어림을 나타낼 때 (창19:31), 신분 따위가 낮음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 받은 자가 자신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다(68:27 ; 삿 6:15 ;삼상 9:21). 여기서는 기자 자신이 대적들에 의해서 비난과 조롱을 당하는 형편에 있음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 멸시를 당하나 - 문자 그대로 주목의 가치도 없는 존재로 위급 당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기자가 이 같은 취급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려고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도 인간들의 멸시를 받으셨고 사도들도 그랬다. 그리고 오고 가는 모든 시대의 위대한 신앙가들이 대부분 그랬다(고전 4:13 ; 히11:36-38).

성 경: [시119:142]

⭕ 주의 의는 영원한 의 - 문맥상 여기서 '의'는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및 지속적 보호 행위를 뜻한다. 이 행위는 언약이라는 배경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시행 범위 및 대상은 오고 가는 모든 세대 그리고 모든 곳에 사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 모두이다.

⭕ 주의 법은 진리 - 여기서 '진리'란 말은 도덕적 관점의 참과 거짓 중의 참이 아니라 인생의 궁극적 의의와 지침을 전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 그 자체를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깨닫는 자는 참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 경: [시119:143]

⭕ 환난과 우환 - 전자는 각종의 육체적 고통을 뜻하고, 후자는 억압적이고 긴박한 상황으로 말미암은 각종 심적 고통을 뜻한다. 아마도 이것은 피할 곳이 없는 진퇴 양난의 상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성 경: [시119:144]

⭕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 이 부분은 138, 142절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증거' 는 참진리이며 공의롭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효력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 증거 곧 율법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져야 살겠다는 뜻이다. 율법을 바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보람된 생을 살 수 없고, 육신은 살았으되 실상은 죽은 자와 같은 죄악과 파멸의 삶을 살게 된다.

성 경: [시119:145]

⭕ 전심으로(*,베칼 레브) - 문자적인 뜻은 '모든 마음으로' 이다. 이것은 '전인격으로'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며, 나뉘지 않은 마음을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한다.

⭕ 부르짖었사오니(*,카라티) - 이 용어는 개인적 슬픔을 나타낼 때 이란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지만(17:6 ; 31:17; 88:9), 여기서는 전폭적이고 전인적인 기도를 뜻하고 있다. 최고의 전인적인 기도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드리신 기도이다.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시며 인간이지만 죄가 없으셨던 주님께서는 다가올 십자가 고통을 100% 받으실 분이었고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 엄청난 시련을 앞두고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하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히5:7).

⭕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리이다 - 상반절에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가 나와 있기 때문에 본절을 일종의 조건문으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말하자면 저자는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율례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 조건을 붙이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관계없이 율법 준수의 삶을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본절 원문에는 상반절과 본 하반절의 관계성을 밝히는 접속사가 없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이 저자를 구원하시는 일과 저자가 율법 준수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분적 관계에 있으되 조건부적 관계는 아닌 것이다.

성 경: [시119:146]

⭕ 본절은 145절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145절의 경우와 달리 하반절, 곧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 앞에 상관 접속사 '와우'(*) 가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구원하시면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본 하반절을 통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전혀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본 시편 전체를 볼 때 저자는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왔던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 자에게도 때때로 고통을 주시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로 하여금 좀더 성숙된 신앙 생활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성 경: [시119:147]

⭕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키담티 바네쉐프 와아솨웨아) - 문자적인 뜻은 '내가 이전부터 어스름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대했습니다'이다. 이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과 대화 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뜻한다. 신약 시대에도 그랬지만 구약 시대에도 새벽 동트기 전 아직 어둠이 깔려 있는 때는 기도하기 좋은 시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성 경: [시119:148]

⭕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키드무에나 아쉬무로트) - 직역을 하면 '내 눈이 밤의 경점들을 앞질렀나이다'이다. 히브리 개념에 있어서 밤은 여러 개의 구분들로 나누인다(90:4 ; 삿 7:19 삼상 11:11 ; 애2:19). 특히 후기 유대 사회는 밤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이른 밤, 한밤중, 그리고 새벽녘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간대에 잠을 잤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잠을 자고 있어야 할 그 시간대에 잠을 자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본절이 말하고 있는 바이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잠을 자야 할 시갼에 잠을 자지 않고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 하였다. 심히 배가 고픈 사람이 일상적인 식사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듯이 말씀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시편 기자는 일상적인 시간대를 무시하고 일찍 일어났던 것이다.

성 경: [시119:149]

⭕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 '언약에 입각한 견고한 주의 사랑에 의거해서'라는 뜻이다. 저자는 기도의 열정 따위의 인간편의 공로가 아닌 언약적 성실과 같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 주의 규례(*, 미쉬파테카) - 재판, 재판관 등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용어지만 여기서는 '선례'로 해석할 수 있겠다. 즉, 저자는 과거에 되어졌던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도움의 선례들에 의존하여 지금 또 다른 도움을 요헝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19:150]

⭕ 악을 좇는 자(*, 로데페 지마) - 문자적인 의미는 '해악을 따르는 자'이다. 이는 저자에게 해를 끼치는 자, 곧 그를 멸망시킬 음모를 실행하고 있는 자이다. 그래서 70인역(LXX), 심마커스역(Symmachus)등은 '나를 박해하는자' , '해를 주는 핍박자들'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대적들이 기자를 악행으로 핍박하는 이유가 본 시편 속에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멀리 떠난 불경건한 자들이기 때문이었음에 분명하다.

⭕ 가까이 왔사오니 - 이것은 가까이 접근했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심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성 경: [시119:151]

⭕ 가까이 계시오니 - 본 구절과 150절의 '가까이 왔사오니'는 외관상의 대비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대적이 계속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은 저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근접 사실은 구원과 보호를 뜻하기 때문이다(69:18 ; 3:28 ; 사50:8).

성 경: [시119:152]

⭕ 본절을 원문대로 재번역하면 '오래 전부터 당신의 증거들로부터 알았습니다. 그것들은 영원적이라는 사실을'이다. 오래 전부터 알았다는 말은 장기간의 연구와 체험을 전제한다. 저자는 장기간의 연구와 구체적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증거들은 영원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으며 하나님의 증거들이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닌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확신의 삶의 시련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 확신의 주인공을 든든히 세워줄 것이다.

성 경: [시119:153]

⭕ 나의 고난을 보시고 - 지금 저자는 다만 자신의 형편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외치고 있다. 이 같은 유형은 비탄조의 시편 내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9:13 ; 25:18). 있는 형편 그대로를 보아달라고 외칠 때 하나님은 외면치 않고, 사소한 일로 넘겨버리지 않고, 관심을 기울여 돌아보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신다. 출애굽 직전 이스라엘의 문제에 개입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유사한 반응을 나타내셨다(출 3:7). 고통 중에 있을 때 성도가 취해야할 태도는 많은 양의 기도를 자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형편 그대로를 하나님께 겸허하게 내어놓고 하나님의 개입을 호소하는 일이다.

성 경: [시119:154]

⭕ 나의 원한을 펴시고(*, 리바 리비) - 재판정을 연상케 하는 용어들로서 직역하면 '나의 소송건의 변호사가 되어주십시오'이다. 말하자면 현재 당하고 있는 모든 억울한 일들을 자세히 살펴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해결해 달라는 간구이다.

성 경: [시119:155]

⭕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짐은 -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 본 구절의 의미 규정은 어렵다. 문자 그대로 본다면 악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니 자동적으로 구원을 알지도 못하며 따라서 영적 구원과는 거리가 먼자들이란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와같이 해석의 추점을 문자 그대로 악인에게 두면 문맥속에서 본 구절은 외톨이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문맥은 저자의 구원 호소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구절을 문맥적으로 다루려면 해석의 초점을 악인에 둘 것이 아니라 의인인 저자에게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본절을 악인의 구원이 멀어졌다는 역설적 표현으로 의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 경: [시119:156]

⭕ 주의 긍휼이 크오니 - '크오니'(*, 라빔) 의 문자적인 뜻은 '다수' , '많음'으로 막연한 실체가 아닌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나님의 긍휼은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연약자와 고통당하고 있는 자에게 분명히 나타나고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 실체이다(69:16 ; 103:13 ; 106:46 ; 14:1 ; 30:18). 분명 저자는 과거에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긍휴을 접했을 것이다. 그 경험에 의존해서 지금 구하고 있다.

성 경: [시119:157]

⭕ 많으나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 본절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대적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다. 대적이 하나일 경우 그를 저지한다거나 그로 말미암은 영향력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적이 많을 경우 더구나 그들이 조직적인 박해를 꾀할 때 자신이 가진 소신을 굽히지 않고 그 악영향력으로부터 건재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의 많은 대적들이 조직적 박해를 꾀한 것은 진리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성취되지 않았다.

성 경: [시119:158]

⭕ 궤사한 자(*, 복딤) - 문자적인 뜻은 '믿음이 없는 자' 이다. 특히 이 자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신분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악행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렘 5:11 ; 말2:10). 본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대적들 중에 하나님을 아는 자들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슬퍼하였나이다(*, 에트코타나) - 본 용어는 '메스꺼워하다' , '구역질하다' , '싫어하다' , '병들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도리어 다른 믿는 자를 괴롭히고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는 자는 구역질 나게 하고 혐오감을 갖게 만든다.

성 경: [시119:159]

⭕ 보옵소서(*, 레에) - 차근차근 자세히 관찰해본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율법에 집착하고 있는 증거를 보시라는 말이다. 이것은 진정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자가 내놓을 수 있는 확신에 찬 청원으로서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께 드렸던 고백을 연상시킨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21:17).

성 경: [시119:160]

⭕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 여기서 '강령'(*,로쉬)의 문자적인 뜻은 '머리'이다. 70인역(LXX) 과 제롬역(Jrrom)은 '개요', '요약' 등으로 번역하고 있고, '본질', '실체' 로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번역들은 원문적 근거가 없다. 이럴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선 문맥을 살피는 것이 보통인데 문맥을 살피기 전 관찰해야 할 곳은 본절 자체이다.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본절의 상반절과 하반절을 연결시켜주는 순접 접속사 '와우'(*)이다. 하반절은 주의 말씀의 영원성을 묘사하고 있다. 순접 접속사가 있고 하반절이 말씀의 영원성을 묘사하고 있다면 상반절, 곧 '로쉬'가 포하된 상반절도 말씀의 영원성을 묘사하는 구절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즈음에서 문제 해결을 돕는 사실은 '로쉬'가 '머리' 라는 뜻 외에 '시작' , '태초' 의 뜻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창1:1). '로쉬'를 '머리' , '본질' 대신에 '태초부터'(상형 문자인 히브리어의 겅우, 품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명사 '머리'를 부사 '태초부터'로 바구어도 문맥만 손상되지 않으면 문제가 안된다)로 볼 경우, 본 구절은 이렇게 번역된다: '태초부터 주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 본 번역은 본절의 상.하반절을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나 '영원하리이다'는 둘 다 시간성을 반영하는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소고를 근거로 '로쉬'는 '태초부터'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성 경: [시119:161]

⭕ 방백들이 나를 핍박하오나 - '방백들'은 당시 사회를 대표하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킨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본 기자를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법에서 떠난 자들, 혹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는 사실을 볼 때 아마도 그들이 법 집행 따위에 있어서 공정하지 못한 점을 저자가 지적하고 책망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했을 때 하반절의 '말씀' 곧 저자가 경외한 '말씀' 이란 사회 공의를 지탱시켜 주는 근간으로서의 말씀, 곧 공법으로서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성 경: [시119:162]

⭕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 생략된 부분을 첨가하면 본 구절의 이해는 쉬워진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으면 즐거워 하는 것처럼 여기서 '탈취물'(*, 솰랄)은 대체적으로 전쟁 포획물을 뜻하는데, 성경에서는 사단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맛보게 될 기쁨을 전쟁 승리 후 얻은 포획물을 나눌 때 맛보는 기쁨에 비유하고 있다(사 9:3).

성 경: [시119:163]

⭕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 이 같은 기자의 성향과 대조를 이루는 한 성향이 아모스에 의해 잘 묘사되고 있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암5:10). 이같은 성향은 시편기자 시대 당시의 지배 계급의 성향임이 분명한데 그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을 암시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지배 계급을 암시하는 '방백들' 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한 저자를 싫어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같은 사실의 결정적 단서이다(161절).

성 경: [시119:164]

⭕ 일곱 번씩 - 문자 그대로의 '일곱' 이라는 숫자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일하게 '일곱'이란 숫자가 등장하는 성경의 다른 곳을 볼 때 '일곱'이란 숫자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욥5:19 ; 잠24:16).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 본 용어는 '자주', '여러 번씩'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성 경: [시119:165]

⭕ 평안(*,솰롬) - 어떤 학자는 이것을 저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주는 안정감 따위와 같은 외적 제도 장치로 말미암는 평화 상태로 이해한다(Von Rad). 그러나 인간적 제도가 강제적으로 조성하는 그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평안을 가져다 준다고 확신할 수 없다. 외적으로는 안정감이 있어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평안'은 말씀 사랑을 통한 커다란 내적 평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 이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가 누리는 양심의 평안을 가리키는 말로 보면 된다.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내적 시야가 열려서 인간이 행할 의무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므로 양심이 평안하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적 시야가 닫혀서 마땅히 행할 바도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므로 파멸에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성 경: [시119:166]

⭕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 외관상 창49:18과 동일하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그러나 창49:18의 경우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야곱의 소망의 피려이었던 반면, 본 구절은 시편 기자 개인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소망 피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간구라기보다는 강력한 확신의 표명인데 그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슴에 대한 성실성(의존성) 때문이었다.

성 경: [시119:167]

⭕ 내 심령(*, 나프쉬) - 원형 '네페쉬'(*)는 구약 성경에서 755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용례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는 생명력, 활력, 생명, 자체를 의미하고(107:5), 둘째는 물리적인 의미, 곧 육신을 위미하고, 셋째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 상태들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특이하게 '목구멍' 혹은 '목' (69:1 ; 105:18 ; 106:15 ; 사 5:14 ; 욘 2:5), '탐욕' (27:12 ; 41:2), '식욕' (78:18), '소망'(35:25), '용기'(107:26) 그리고 심지어 '시신' (레 19:28 ; 21:1 ; 만 6:6) 등과도 그 의미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인적 인격체로서의 기자 자신을 뜻한다.

성 경: [시119:168]

⭕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 법도와 증거를 지켜왔던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되어졌다는 것, 쉽게 말하면 그의 삶의 내용들을 하나님이 낱낱이 아신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신실한 성도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하기를 바라는 속뜻도 포함되어 있다(욥31:4).

성 경: [시119:169]

⭕ 부르짖음(*, 리나티) - 이 용어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본 시편 기자는 비록 제물을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제물을 드리는 심정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키드바르카 하비네니) - 직역하면 '당신의 말씀에 의거한 이해를 내게 주소서'이다. 이것은 말씀이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바로 이해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이 같은 소원은 본 시편에서 벌써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는데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바른 말씀 이해를 위한 저자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성 경: [시119:170]

⭕ 나의 간구(*, 테히나티) - 문자적으로는 '은총', '자비' , '긍휼'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비,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가리킨다(6:9 ; 55:1). 결국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현재 당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구하고 있다.

성 경: [시119:171]

⭕ 사용된 용어들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7절과 거의 유사하며, 율법을 배워가는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질과 양도 증가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좀더 알아갈수록 그를 더욱 찬양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받은 만큼 준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요한 찬양의 원칙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찬양은 하나님을 안 만큼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좋은 목소리와 비싼 악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이 원칙을 새겨두어야 한다.

성 경: [시119:172]

⭕ 내 혀가 - 이것은 '나' 라는 인칭 대명사를 뜻하는 완곡한 표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들은 자신들의 전인격적인 찬양을 묘사할 때 흔히 이 같은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35:28 ; 51:14).

⭕ 노래할지니이다(*, 타안) - '찬양하다'라는 뜻 외에 '반복하다' , '되풀이하다'의 뜻이 있다. 문맥상 되풀이해서 찬양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깊은 경험을 통하여 모든 하나님의 계명들이 의로운 것을 깨달은 저자는 되풀이 반복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성 경: [시119:173]

⭕ 택하였사오니 - 이 동사는 백성들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하신 광야 시대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30:19). 양자 택일 식의 이 명령 후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사망과 저주의 길로 달려갔다. 그러나 본 기자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정한 길을 순종하기를 택함으로써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요청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 주의 손(*, 야드카) - 궁핍한 자를 돕거나(80:17 ; 139:10), 악한 자를 징벌하시는(32:4 ; 사 5:25) 하나님의 개입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때에 따라 '능력'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신32:36).

성 경: [시119:174]

⭕ 본절 원문에는 접속사'와우'(*)가 있는데 이 접속사는 상반절과 하반절 내용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저자가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는 것과 그가 주의 율법을 기뻐하는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성취된 것처럼 구원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말이다.

성 경: [시119:175]

⭕ 내 혼을 찬송하리이다 - 원문을 살려 재번역하면 '나의 영혼을 살리시고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이다. 어떤 역본은 '내 영혼을 남겨 두시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본 구절은 저자가 살기를 원하는 주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과연 당신은 왜 살기를 원하는가'라고 말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찬양하기 위함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움과 같이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115:17),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88:10).

성 경: [시119:176]

⭕ 히브리어 문장은 액센트가 중요한데 본절 상반절을 액센트를 고려하겨 재번역하면 '내가 유리하였나이다. 잃은 양과 같은 당신의 종을 찾으소서'이다.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반복적으로 외쳤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지켜왔노라고 주장하였던 저자의 이같은 고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저자는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 이미지를 눅15장에 나오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이 주는 이미지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주의 계명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이미지는 보호자도 없이 적에게 노출된 채 헤매고 있는, 어디가 안식처이고 평안한 곳인지 알지 못하는 저자의 상황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보호막이 없는 상황을 묘사할 때 잃은 양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사 53:6 ; 렘 50:6 ; 겔34:4,16). 그러나 '내가 유리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은 의심의 여지없이 죄 의식을 반영한다(19:12-14,Porowne). 그렇다면 본절은 범죄함으로 시작된 대적의 핍박 이후 하나님의 계명을 잊지 않고 살면서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구하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20:1]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부르짖었더니...응답하셨도다(*, 카라티 야아네니) - 영역본들은 이 두 동사를 과거형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cried...heard, KJV) 현재형으로 번역하는가 하면(call...answer, NIV) 또 '야아네니'를 미래적 현재형으로 기원의 측면에서 옮기기도 한다(I cry...that he may answer, RSV). 그러나 원문상을 볼 때 '카라티'는 완료형이며 '야아네니'는 미완료형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동사를 특정한 시제에만 한정시키기보다는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현재와 장래에도 계속 체험하기를 바라고 또 확신하는 기자의 고백으로 봄이 나을 것 같다.

성 경: [시120:2]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궤사(詭詐)한 혀(*, 라숀 레미야) - 문자적인 뜻은 '속이는 혀'이며 속임수와 이중성이 가득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앞의'거짓된 입술'과 동의어적으로 쓰였다.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 용어를 생략하거나 중시하지 않는데(Gunkel, Oesterley) 맛소라 사본의 한 구절, 한 글자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로서는 그들을 따를 수 없다. 오히려 동의적 내용의 반복은 강조로 본다. 다윗은 흔히 이런 식의 고통을 털어놓는데 특히,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시련을 묘사할 때 '속이는 혀'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Barnes). 한편,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혀가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어 있는 바이다(34:13;잠 13:3;21:23;약 1:26;3:6;4:11;벧전 2:1;3:10).

성 경: [시120:3]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너 궤사한 혀여...주며...더 할꼬 - 본 구절의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즉,'저의 위에 쌓여질 재앙은 무엇일까? 네가 도대체 어떤 징벌을 받게 될까?'이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저주의 글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겠다.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3:17;20:13). 문법상으로는 본문의 동사들의 주격을 반드시 여호와로 간주하는 일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궤사한 혀에 대한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Alexander).

성 경: [시120:4]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장사의...숯불이리로다 - 본절의 표현은 (1)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의 57:4이나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의 64:3과 같은 반역적인 혀에 대한 묘사이거나, (2) 그러한 죄악된 성향에 적합한 징벌, 즉 혀에 대한 징벌로 볼 수 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혀는 날카로운 검, 혹은 날카로운 화살과 같으며 지옥의 불을 쌓는 것 같아서(약 3:6) 그러한 식으로 혀를 사용하는 자는 전능자 하나님의 불과 화살에 의해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저희 입술의 해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140:9,10). 우선 자신은 인애를 베풀지만 대적과 반역을 만날 뿐인 상황을 불평하듯 호소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할 때는 전자의 해석이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는 바로 그러한 반역적 이웃의 머리에 하나님의 징벌이 임하기를 소원하는 내용이 되는데, 본 문맥에서는 궤사한 혀를 놀리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무서운 형벌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 로뎀나무 - 제롬(Jerome)이 노간주나무(juniper)로 칭했던 이 나무의 학명은 제니스타 모노스페르마(아랍어로는 레템)이며 저명 학자에 따르면 이 나무의 뿌리는 사막에서 연료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일단 불을 붙이면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열기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Burckhardt). 동일 수목이 왕상 19:4과 욥 30:4에도 언급되어 있다. 후반절은 이 나무의 뿌리가 양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사실 그 뿌리는 몹시 써서 양식으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오히려 몸을 덥히기 위하여 연료로 사용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사 44:15과 비교하라). 제롬은 이 나무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한 무리의 여행객들은 바로 이 나무로 불을 때서 식사를 하였는데 그곳을 떠난 지 일년후 동일한 장소에 다시 와보니 그때까지 꺼지지 않은 불씨를 잔화(殘火)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De mansion-ibus Israel ad Fabiolam 15장). 숯불은 불태우는 듯한, 삼킬 듯한 혀에 대한 혹은 그 같은 혀에 대한 징벌을 묘사하기 위한 이미지이다.

성 경: [시120:5]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메섹 - 이는 '두발'과 함께 거명되었던 인물의 이름인데(창 10:2;겔 27:13) 여기서는 그의 후손으로서 흑해와 아락시스 사이에 위치한 코카사스의 남동쪽에 거주했던 야만족을 가리킨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으로서(창 25:13) 아라비안 반도를 누비며 약탈을 일삼던 무리들이다. 이 두 족속들은 각각 팔레스틴의 북쪽과 남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자는 본 시편 저작 당시 자신을 둘러 싸고 있던 자들의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성격을 드러내려고 이 두 민족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 특히 '메섹'은 겔 38:2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이방 연합군의 지도자들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 유하며(*, 가르티) - 이 단어는 영구적인 거주가 아니라 마치 여행객이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것과 같은 일시적인 체류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메섹, 게달과 같은 야만 이방족 사이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여행자처럼 잠시 머물고 있는 형편이라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바벨론 포로 이후로 보고 있으나 다윗이 황망히 피난 다니던 시절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성 경: [시120:6]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화평을 미워하는 자(*, 소네 솰롬) - 여기서 '소네'는 단수형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고려할 때 의미는 복수형으로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대표단수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70인역, 시리아역 등은 복수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시120:7]

주제1: [평화를 구하는 마음]

주제2: [화평을 위한 간구]

⭕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아니 솰롬) - 문자적인 뜻은 '나는 평화'이다. 유사한 예로 개역 성경 109:4에서는 '나는 기도'를 '나는 기도할 뿐이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 공히 대명사 '아니'(*)는 강조형으로 쓰였다.

성 경: [시121:1]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산을 향하여 - 여기의 '산'의 정체를 결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다만 이 산이 '헤하림'(*)으로서 단수가 아닌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어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또 87:1;133:3 등에서도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헤하림'(*)은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시온의 산들'을 의미하고 있다. 본절의 '산'을 바로 이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무난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맥이 시온으로부터 임하는 도움에 대한 대망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온으로부터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은 14:7;20:2; 등에 잘나타나 있다. 한편, 혹자는 이 '산'을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여행도중 넘어가야 할 난관으로서의 산들을 가리킨다고 보는가 하면(Anderson), 이를 이방 성소들을 포함한 예배 처소들로 보고 기자가 여기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기에 합당한 장소가 과연 어디인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E. H.Blakeney) 그 근거는 불확실하다.

성 경: [시121:2]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 하나님께 대한 이 호칭은 본 순례자 송시(頌詩)와115:15;124:8;134:3;146:6과 같은 다른 시편들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방신들의 헛됨과 대비가 되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과 위엄은 특히, 포로시대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램10:11,12에 그 점이 잘 표현되어 있다."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성 경: [시121:3,4]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여기서 기자는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 독백투의 확신에 찬 설교를 시작한다.먼저 그는 하나님의 지켜보시는 돌봄이 자기에게 까지 확장되리라는 확신과 소원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의 선조들을 도우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지 않으리라는 확신 또한 피력하고 있다(132:4; 왕상 18:27; 욥 7:20; 사 5:27참조).

⭕ 않게 하시며...아니하시리로다(* ... ,알...알) - 문자적인 뜻은 '분명히...하지 않으리라'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개역 성경 번역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은 단순한 소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기자의 강한 확신을 드러내는 일종의 기원적(祈願的)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한편, 본 시편에서 기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를 보다 효과적으로 나타내기위해 부정문과(3, 4, 6절) 긍정문을(5, 7, 8절)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특히 기자는 부정어 사용에 있어 세심한 주의를 보이는데, 3절에서는 '알'(*)을 2회 썼고, 4절에서는 '로'(*)를 2회 사용했으며, 또한 6절에서는 '로'(*)를 1회만 쓰고 한 번은 생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 경: [시121:4]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졸지도...주무시지도 - 한 순간도 어김없이 성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감찰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배려를 의인화하여 나타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이 예상하는 것과 같이 이 두 단어 중 어느 한단어가 강조되어 있지 않다. 어원적으로 전자가 좀더 강한 의미의 단어인데 이 단어는 죽음의 잠을 뜻할 때도 사용되었다(76:5). 그러나 본절의 경우 둘 사이에 서로 유별나게 구별되는 점은 없으며 야간의 진지(陣地), 그리고 대상(隊商) 파수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단어들로 볼 수 있겠다.

성 경: [시121:5]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그늘 - 여호와의 보호를 마치 태양의 타는 듯한 광선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그늘에다 비유하고 있다(91:1;사 25:4;32:2). 이는 일종의 은유법인데 이 같은 기법은 열대지방 태양 광선의 열기를 알고 있는 자들에게 매우 의미 심장하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렘 48:45; 애 4:20).

성 경: [시121:6]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낮의 해 - 팔레스탄에서 무서운 위력을 나타내는 태양의 열기를 강조하는 말이다. 왕하 4:18-20; 욘 4:8 등과 같은 구절들에서 태양의 열기는 살상 무기와 같이 강렬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 밤의 달 - 해와 마찬가지로 달도 인간 신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근동의 생활을 연구하는 학자들 세계에서 그 같은 의견은 보편적인 것이다(Anderson, De Wette). 또 다른 학자에 의하면 근동 지역의 노천(露天)에서 달빛을 맞으면서 잠을 잔 사람의 경우 심한 현기증을 느끼게 되고 좀더 심하면 정신 이상에 까지 이르며 종국엔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한다(Delitzsch). 우리는 정신 이상자를 'lunatich'이라 표현하는데 이 단어의 어원이 '달'을 의미하는 바, 이 사실은 '달'과 '미친 사람'의 관계를 밀접한 관계로 보았다는 심증(心證)을 추론케 한다.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달로 인한 피해는 달빛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한낮의 강렬한 열기 뒤에 밀려오는 서늘한 냉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어느 주장이 옳든 간에 본 구절은 주야를 막론하고 압축하여 표현한 것임에 분명하다.

성 경: [시121:7]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아쉬마르카 미칼 라) - 문자적인 뜻은 '모든 해악들로 부터 보존하시리라'이다. 이는 단순히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탄탄 대로만을 가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면서 두려워 하거나 낙망치 않고 종내 승리하고 만다는 적극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23편). 한편 본절의 상, 하반절은 하나님의 지극히 세심하신 배려 및 성도의 궁극적 승리를 언급한 눅 21:18,19을 연상시킨다(Kidner). 요컨대,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성 경: [시121:8]

주제1: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 너의 출입을...지키시리로다 - '너의 출입'(*, 체트카 보에카)은 직역하면 '너의 들어오는 것, 너의 나가는 것'인데 신 28:6;31:2; 삼상 29:6등의 유사구절에 의하면 '한 인간의 땅 위에서의 모든 삶 그리고 그의 일들'이라고 할수 있겠다. '지키시리로다'의 '이쉬모르'(*)는 7절과 본절에 반복적으로 세 번 등장하는데 이 삼중 반복적 표현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일들에게까지 확대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완전성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성 경: [시122:1]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 이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가 가까웠을 때 시편 기자의 친구들 중의 하나가 그를 찾아와 예루살렘을 방문할 것을 권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해 세 차례에 걸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는데 그 때를 기억하며 지은 시들을 '순례자의 노래' 중의 하나임을 입증하는 구절이 바로 본 구절이다.

⭕ 여호와의 집 - 기자를 벅찬 감격과 기쁨에 겨웁게 했던 것은 그가 그곳, 즉 '여호와의 면전에서'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출 23:17).

성 경: [시122:2]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섰도다(*, 오므도트하우) - 이것은 분사+완료형의 복합 시제이다. 이 복합 시제는 '서 있었다', '서 있고 했다'와 같은 완료 혹은 '서 있어 왔고 지금도 서 있다'와 같은 미완료로 볼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는 현재 시제로도 이해될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하우'(*)의 원형인 '하이'(*)가 앞에 분사가 놓였을 때 어떤 시제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먼저 분사와 함께 있을 경우 '하이'는 완료 시제를 나타내는 데 이 때의 '하이'는 삿 1:7의 "70명의 왕들이나의 상 아래서 먹기 위하여 모여들고 있었다"(이 참고 구절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한 것이므로 개역성경의 그것과는 달라 보일 수 있다)의 경우에서와 같은 습관을 의미하는 '하이'이거나 욥 1:14의 '그 소떼는 밭을 갈고 있었다'의 경우에서와 같은 계속되어온 단순한 과거적 동작을 의미하는 '하이'이다. 또한 분사와 함께 있을 경우 '하이'는 미완료 시제가 되기도 하는데 그 예인 사 59:2을 해석해 보면 '너의 범죄들이 분리되어 왔다', 즉 '분리되었고 지금도 분리되고 있다'로 되겠다. 사 30:20,21에서 동일한 문형이 예언적 미래(prophetic future), 즉 완료형이 미래형으로 변형된 시제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이 경우 완료형 문장 뒤에 미래형 문장이 따르고 있다: "너의눈은 보아왔다...그리고 너의 귀는 들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근거로 할때 '섰도다'는 여전히 지금도 서 있는 것을 함축하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함이 바람직하다(have been standing, RSV). 이러한 형태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의 일종이라 할 수있다. 즉 절기적 기쁨이 가득한 날, 많은 예배자들의 무리와 섞여 예배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하나로서의 선민(選民) 의식을 충만히 만끽하며 그 자리에 서 있게된 자로서 갖는 만족감 및 기쁨에 대한 기자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인 것이다. 그는 과거에도 만족감과 기쁨을 느꼈고 지금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22:3]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식으로 설명되어 오고 있다. (1) 이 성이 오늘날의 도시와 같이 그 건물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성이라는 것, (2) 이 성은 안정감있게 잘 지어진 성이라는 것, (3) 이 표현은 그 성이 포로 시대 이후 재건되었던 사실을(느 4:6 참조)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라는 것 등이다. 이 세 번째 설명이 옳다면 본 시편은 포로 이후 시대에 저작되었다는 것을 동시에 인정하는 셈이 된다. 세 설명 중에 결정적은 근거를 갖고 있는 설명은 없고 다만 두 번째 설명을 지지할 경우는 그 용례적 지지가 없고 세 번째 견해의 경우는 본시의 다윗 저작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우므로 첫 번째 설명을 택하는 것이 그 중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성 경: [시122:4]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여호와의 지파들 - 드물게 사용되는 '이스라엘 지파들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혹자는 이 용어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후기, 즉 포로 시대 이후로 보게 하는 용어라고 주장하나 정확한 근거를 대기 힘들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파들'에 관한 언급은 본 시가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의 통일 왕국 시기에 지어졌음을 암시한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Alexander).

⭕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에두트 레이스라엘) - 문자적인 뜻은 '이스라엘에게 준 증거'이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시대 때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부과하셨던 규례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81:4,5; 출 23;17; 34:23; 신 16:16). 그규례의 내용은 1년에 3번 모든 이스라엘 남성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 엄숙한 약속이 언급되는 이유는 에루살렘 거류민에게 주어졌던 특별한 권리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 과거에 하나님이 부과하셨던 약속과 규례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순례 여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선하신 은혜를 상기하며 그분께 충성을 다짐하였을 것이다. 즉, 시편 기자는 이 곳 그리고 다음 절에서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이며 여호와의 처소로서 1년에 3번 큰 절기 때 그곳으로 모든 거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일 뿐 아니라 다윗 왕가의 정부의 소재지였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성 경: [시122:5]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판단의 보좌 - 여기서 '보좌'란 공의를 집행하는 자리를 뜻한다. 즉 일반적으로 '보좌'는 왕의 좌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심판관, 재판관이 앉는 자리를 뜻한다. 문맥상, 예루살렘이 모든 백성에게 공정한 법의 혜택을 베푸어 주던 공의의 도시였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다시 한번 그곳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 다윗 집의 보좌 - 법을 집행하였던 다윗 가문으로서는 다윗 가문이 그 같은 일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재판관들은 공의의 재판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또 공의의 재판이 시행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귀한 역할을 감당하는 셈이 되었다(사 9:7; 11:3-5). 향편 이 직무를 위임받지 않았던 압살롬은 그 일하기를 사모했고 결국 그가 반역을 도모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을지 모른다(삼하 15:3,4).

성 경: [시122:6]

주제1: [거룩한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예루살렘...평안 - '평안'의 히브리어 '솰롬'(*)인데,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 3번 등장하고 있다. '예루살렘'(*, 예루솰람) 속에도 '솰롬'(*)과 동일 어원인 '솰람'(*)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부터 8절까지에서는 일종의 언어 유희(play of words)가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Perowne, Anderson).

성 경: [시122:7]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성 안에는(*, 베헬레크) - 문자적인 뜻은 '성벽들 안에는'인데 '성벽들'이란 많은 숫자의 군사들이 들어 있는 요새, 특히 성벽을 따라 그 밑을 빙 돌아가며 낮게 판 참호를 가리키기도 한다. 결국 여기서 '성벽들'이란 예루살렘의 요새적, 방어적 상태를 총체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성 경: [시122:8]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내가 내 형제와 붕우(朋友)를 위하여 - 본절을 포함한 후반부인 네 개의 구절들(6-9절) 속에서 우리는 극도로 고상한 이타적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본 시편 기자는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형제들, 즉 총체적 의미의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평안을 원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성의 평안을 소원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품었을 때 예루살렘 성의 안녕을 원하는 애틋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22:9]

주제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영광]

주제2: [예루살렘의 영광]

⭕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아바크솨 토브 라크) - 문자적인 뜻은 '내가 너의 선함을 찾을 것이다'이며 '내가 너의 유익을 위하여 중보 기도할 것이다'(40:16). 혹은 '내가 너의 안녕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신 23:6)로 해석하면 무난하겠다. 렘 29:7에서 우리는 유사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성 경: [시123:1]

주제1: [멸시받는 자의 호소]

주제2: [긍휼을 구하는 기도]

⭕ 하늘에 계신(*, 하이쉬비 봐솨마임) - 직역하면 '하늘에 좌정해 계시는'이며,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표현이다(2:4; 11:4;115:3).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19:1) 이것은 '옛적부터'(93:2) 존재했었다. 이 사실은 법궤 혹은 예루살렘 자체가 여호와의 보좌로 불리웠던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데(렘 3:16), 그 이유는 이것들은 하나의 모형으로서 하늘 보좌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성 경: [시123:2]

주제1: [멸시받는 자의 호소]

주제2: [긍휼을 구하는 기도]

⭕ 종의 눈 - 그 주인의 자그마한 동작, 그 의지를 나타내는 아주 작은 증표를 주시하며 어떤 혜택을 고대하는 종의 눈을 가리킨다. 이는 절대적인의 존성을 표현해 주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한 학자의 종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종들은 그들의 손을 가슴에 댄 채 그 주인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 있다. 그눈을 그 주인에게 고정시킨 채 그들은 그 주인이 어떤 바램을 들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Savary). 본문에서 이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갈망한다고 보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호소하고 있다고 이해하는가 하면 징벌이 그만 멈추기를 원하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어떤 측정한 한 가지 견해에 국한시키기보다는 보다 폭넓게 여호와께 대한 시인의 신뢰와 경의를 표현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겠다(Alexander). 또한 시편에서 하나님의 손을 향하고 있는 눈이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인내하면서 바라보고 고대하는 눈이다. 이 눈은 어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순종하겠다고 하는 순종의 눈이기도 한 것이다.

성 경: [시123:3]

주제1: [멸시받는 자의 호소]

주제2: [긍휼을 구하는 기도]

⭕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키 라브 사바누 브즈) -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멸시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이다. 여기서 '사바누'(*)는 재귀형 동사인데, 특히 재귀형 동사가 그 내적상태의 심각성을 나타내려고 할 때 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기자가 속한 공동체가 당하고 있던 모욕의 정도는 엄청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의 분량을 따라 심한 시련에 노출되어 왔던 그들이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호소하는 본절 전반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성 경: [시123:4]

주제1: [멸시받는 자의 호소]

주제2: [긍휼을 구하는 기도]

⭕ 평안한 자(*, 하솨아난님) - 문자적인 뜻은 '부유한 자'인데 명사적으로 쓰일 때 흔히 이 단어는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을 전혀 갖지 않는자를 가리킨다(사 32:9,11; 암 6;1).

⭕ 교만한 자(*, 게예오님) - 이는 사회 공동체 내의 힘없는 약자들의 권리를 무시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권위마저도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nderson).

성 경: [시124:1]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쪽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이다. 2절에서 동일한 반복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중복어구가 아니라 강조를 위한 표현 기교의 일종이다(129:1,2). 즉, 이 중복적 어구를 통해 저자는 건국 초기 때부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켜 보아 오셨던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표현은 야곱의 외침을 회상시키기도 한다(창 31:42). 아울러 동일하게 반복되는 2절의 표현과 별도로 생각하면, 본문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한번 맡겨본다는 식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성 경: [시124:2]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 문자 그대로 어떤 무리가 싸움을 걸어오는 것을 가리킨다(3:1; 54:3). 여기서 '사람들'((*, 아담)은 집합명사인데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온 인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맥상 이것 다윗 당시의 사방 대적들을 지칭하며보다 확대해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 자들 모두'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스라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더라도 그 백성은 수많은 대적들과의 싸움을 치르어야만 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전쟁을 민족이나 인간 상호간의 전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완악한 '인간들'과의 전쟁으로 이해했다(VanGEmeren).

성 경: [시124:3]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 대적이 돌연한 파멸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한 사실에 대한 묘사일 것은 분명하나(민 16:30) 이 비유법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은 대적을 끔찍스러운 태고적 괴물들(렘 51:34) 혹은 새로운 희생물을 항상 찾아 해매는 만족될 수 없는 탐욕을 의미하는 '스올'로 묘사하고 있다(55:15; 잠 1:12). 그러나 대적의 이같은 이미지를 굳이 본 구절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대적의 갑작스러운 침입 사실에 강조점을 두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무난하겠다. 다만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심판 폭우 뒤에 갑자기 불어난 와디(wadi) 혹은 홍수난 강 등에서 착안하였을 것으로 보인다(anderson).

성 경: [시124:4]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시내 - 잔잔히 흐르는 문자 그대로의 시냇물이 아니라 봄에 크게 내린 비와 눈 녹은 물이 합쳐서 형성된 골짜기의 격류(급류)를 의미한다. 이와 유사한 비유법은 18:16; 69:1,2; 144:7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본절 전체의 평행법과 거의 유사한 평행법은 사 8:7,8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절이 마치 하나님의 백성과 물과의 전투를 연상케하기 때문에(93:3) 본절의 출처를 태고적 물과 여호와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이방 신화에 두는 경향이 있으나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성 경: [시124:5]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넘치는 물(*, 하마임 하제도님) - 문자적으로는 '거만한 물들'을 뜻한다. 무론 여기서 '제돈'(*)은 '하팍스 레고메논'(성경에서 한 번만 등장하는 단어)이나 그 유사한 표현은 몇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89:9; 욥38:11). 여기서 '게돈'은 마치 자기 중심적이고 오만 방자한 인간처럼 솟구치거나, 빙빙 돌거나 구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듯 소동하는, 즉 교만한 인간의 방자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격류의 위용(威容)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용어이다. 바위에 달려와 부서지고 해안을 향해 돌진하는 파도와 같은 격류는 개인 혹은 무리, 예를 들면 군대, 군중과 같은 다수가 품는 인간적 격정의 상징이다(65:7). 그렇다면 본절은 3,4절에서 시작된, 공격하는 대적의 이미지를 발전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24:6]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우리를 저희 이에 주어 씹히지 않게 하신 - 동일 개념이 지속되고 있으나 비유의 내용은 바뀌었다. 본문이 다루는 이미지는 몰아치며 다가온 격류 못지않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사나운 야수(野獸)로 말미암아 멸망에 관한 것이다. 이 같은 이미지의 변화는 시편 및 성경의 다른 시가서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계속 지향하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내용은 시시각각의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 '찬송할지로다'의 히브리어 '바루크'(*)는 동사'바라크'(*)에서 유래하였는데, '바라크'는 '(하나님을) 송축하다' 혹은 '(사람을) 은혜로 복주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여호와만이 최고의 찬양을 받으실만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28:6). 이 표현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최고의 감사를 응축시킨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시편 전체는 위대한 구원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경외의 마음을 싣고 있다.

성 경: [시124:7]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우리 혼이...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 여기서 '혼'은 인칭대명사의 대체어로 사용되었다(33:19). '새' 직유는 그 유일한 소망을 하나님께만 둘 수밖에 없는 자들을 적절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11:1; 애 3:52).

⭕ 올무가 끊어지므로 - 본 묘사는 한 마리의 새가 올무에 걸려 있던 것은 이미 과거지사(過去之事)임을 지시하게 한다. 물론 이 올무가 끊어지게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본절 전체에는 승리에 대한 암시가 가득하다. 이는 여기서 '벗어났다'는 말이 2회 반복된 것과 '올무의 끊어짐'을 감격조로 노래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한편 본문을 역으로 이해하면, 여호와께서 도움을 주지 아니하시면 그 백성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을 찾아볼 수 있다.

성 경: [시124:8]

주제1: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

주제2: [극적 구원의 회상]

⭕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 본절은 1,2절뿐 아니라 6절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그 주제란, 너무 놀라웁고 기대를 넘어서는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1,2,6절이 말하지 않은, 본절만이 새롭게 덧붙이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그의 천지 창조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골 1:13-17).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통찰하 수 있는데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이미 인간 구원 사역까지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먼저 예정하셨고 그리고 나서 창조사역을 시작하셨다(엡 1:4).

성 경: [시125:1]

주제1: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의 안전한 삶]

주제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안전]

⭕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 산은 견고함 및 안정성의 전형(典型)이다. 따라서 산을 요동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의도된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산'이라고 하지 않고 특정한 산인 '시온산'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온산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외부적 공격이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견고하고 요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내용으롤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성 경: [시125:2]

주제1: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의 안전한 삶]

주제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안전]

⭕ 신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아 - 예루살렘은 산들 혹은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다. 즉 동쪽에는 올리브 산(the Mount of Olves), 복쪽에는 스코퍼스 산(Mount Scopus) 그리고 남쪽과 서쪽에는 다른 높은 언덕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대적들이 섣불리 침입하지 못하는 천연적인 방어망이 구축된 곳이다(VanGemeren).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은 시온, 모리아, 벱세다, 아크라와 같은 언덕 위에 세워진 산성도시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이 도시가 서있는 언덕보다 더 높은 언덕이나 산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 그 백성을...두르시리로다 -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성벽이 둘린 요새와 같이 높은 산들의 두름을 받은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은 그의 보호하심 아래 있게 된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슥 2:4,5).

성 경: [시125:3]

주제1: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의 안전한 삶]

주제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안전]

⭕ 악인의 권세(*, 쉐베트 하레솨) - 문잗적인 뜻은 '악인의 막대기'이다. 여기서 '막대기'는 '지팡이', '홀'(笏), '(징벌이나 고문하기 위한) 도구' 등의 일차적인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악인이 휘두르는 강력한 권력, 세력 등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혹자는 이 권력을 사마리아인의 적극적 동조 아래 자행되었던 페르시아의 유대 통치를 가리킨다고 본다. 사마리아의 비호 아래 페르시아는 유대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려고 애썼고 유대의 영향력 있는 지역 대부분을 그 수하에 넣고 다스렸다. 그러나 본시의 시대적 배경을 포로 귀환 이후롤 본다면 본문은 사마리아인들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주변 족속들의 횡포를 가리킨다(느 6:9).

⭕ 의인의 업(業) - 16:5,6에 따르면 이것은 거룩한 땅 그 자체이다. 그런데 악인의 억압적 통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러한 상황은 정당화가 될 것이고 그 결과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거룩한 땅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차츰 잊게 될 것인데 하반절은 이 사실을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댄다'로 표현하고 있다.(37:7,8; 49:13; 73:13,14; 욥 15:14).

⭕ 미치지(*, 야누아흐) - 직역하면 '무겁게 놓다'이다. 사 25:10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계속되는 억압 상태'를 가리킨다.

성 경: [시125:4]

주제1: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의 안전한 삶]

주제2: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 선인 -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와 그 마음이 정직한 자는(7:10;119:7)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잠 2:21; 마 5:1-12).

⭕ 선을 행하소서 - 하나님의 의를 명백히 보여주고 그의 약속들을 이뤄달라는 간구이다(수 24:20; 삿 17:13; 사 57:13;60:21;65:9). 기자는 본절과 5절을 통해 의로운 보응을 구하는 확신에 찬 기원으로 본 시편을 끝맺고 있는데 먼저 본절에서는 간구의 형식을, 5절에서는 기원적인 발언을 통해 그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간구 및 기원은 공히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뿌리를 둔 동일한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성 경: [시125:5]

주제1: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의 안전한 삶]

주제2: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의 안전]

⭕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 - 합법적이고 허락된 길을 떠나 금지된 길에서 방황하는 악인을 가리킨다. 여기서 '굽은 길'은 히브리어로 '아칼칼로탐'(*)인데 이 용어는 사람의 왕래가 드문 길, 좁고 구불구불한 길, 대로(大路)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길 등을 의미하는'소로'(小路)로 번역된 삿 5:6에서 한번 더 나올 뿐이다. 이곳의 문맥상 본 용어는 4절의 '마음이 정직한 자'와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서 '죄의 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 자'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욜리켐 예화 에트 포알레 하아웬) -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범죄자들과 함께 그들을 사라지게 만드실 것이다'이다. 한마디로 멸망시키시겠다는 뜻이다(the Lord will banish with the evildoers, NIV). 58:8에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된 예를 비교해 보라. 마음이 구부러지고, 이중적이고 속임수로 가득한 자와 걷기 시작한 자는 그 악인과 모든 악한 일을 함께 꾀하며 다니다가 필경 멸망당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공개적이며 노골적으로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보복의 법에 따라 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성 경: [시126:1]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 포로 귀환 사건은 예기치 못한 경이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실제 그 일이 도래했을 때 맛보았던 기쁨은 엄청났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이 감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을 연상하면 어느 정도 이해될 것이다.

성 경: [시126:2]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웃음이 가득하고 - 완전한 행복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욥 8:21).

⭕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 열방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대적 혹은 이스라엘을 섬기는 하나님께 대한 회의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79:10; 115:2). 그러나 이 경우 그들 역시 이스라엘 회복에 큰 감동을 받았고 따라서 그 입을 모아 포로 귀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을 삼자적 입장에서 증거해 주었다는 것이다(98:2; 사 52:10; 겔 36:36).

성 경: [시126:3]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여호와께서...대사를 행하셨으니 - 앞절 후반부 내용의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나 여기서는 이방의 증언 내용을 재복창하는 시온 공동체의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성 경: [시126:4]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포로를...돌리소서 - 문자 그대로 포로 상태로부터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이다. 이 표현으로 보아 아직 포로 귀환이 완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이 시편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포로 귀환의 감격을 그렸던 사실(1절)을 미루어 보아 포로 귀환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라는 사실도 동시에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본문을 '포로를 다시...돌리소서'라고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 남방 시내들 같이 - 남방은 유다의 한 불모지로 유명한 네게브(Negeb) 사막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사막은 평소에는 바짝 마른 상태로 있다가 가을이나 겨울철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게 되면 일순간에 흙탕물이 가득한 격류로 변하는 특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었다가 기자가 의도한 이미지는 갑작스러운 완전한 변화일 것 같다. 이제 기자는 일전에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순간에 남은 포로 백성들을 귀한시켜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26:5]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 씨를 뿌리는 때는 고통과 근심의 때이나 씨를 뿌린 자는 추수 때의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포로민들은 많은 시련을 당하였으나 그들 앞에는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수고, 고통, 압제 및 낙심, 기다림의 때를 믿음으로 극복하는 자는 결코 그 상급을 잃지 않는다. 눈물 흘림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씨뿌림과 거둠 사이의 대비는 학 2:3-9, 17-19을 참조하라.

성 경: [시126:6]

주제1: [구원으로 인한 환희와 감격]

주제2: [해방의 감격과 기쁨]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 할로크 옐레크 우바코 노세메쉐트 하자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씨주머니를 들고 울면서 나가는 자'이다. 우선 '할로크 옐레크'(*)는 이중 부정사인데 이것은 어떤 동작의 계속됨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그렇다면 '할로크 엘레크', 즉 '울면서 간다'는 것은 단회적인 동작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동작임을 알수 잇다. 본 이중 부정사를 의미의 강조로 보아서 '울지 않고는 그의 발걸음을 옮겨 놓지 않는 자'라고 강하게 번역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노세 메쉐크 하자라'(*, 그의 씨주머니를 들고)는 구체적으로 곡식 종자 창고에서 종자를 덜어내어 자루에 담고 나오는 장면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다(암 9:13). 정리하면 본 구절은 '그 일이 너무 단조로우면서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씨종자를 덜어내 와서 밭에 뿌리는 자'를 묘사한다.

성 경: [시127:1]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집에 관해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굳이 성전 건축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집을 세우다'는 표현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는 한 가정이 형성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정 구성원이 거주할 건물적 의미의 처소를 짓는 것이다. 사라(창 16:2)와 라헬(창 30:3)은 그들의 하녀들을 통하여 자녀들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세운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있고, 신 25:9은 가계(家計)를 잇기 위해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집을 세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출 1:21; 룻 4:11; 삼상 2:35; 삼하 7:27).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집을 세우는 일이나 성을 지키는 일과 같은 일상적이고 필수적인 매일의 삶이 보다 더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 본 구절은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즉, 세상 만물은 진정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 및 그 행사는 하나님 없이 번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막론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지 않는다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되고 만다는 의미이다.

성 경: [시127:2]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움(*, 마쉬키메이 쿰 마아하레 쉐베트) - 두개의 동사 '마쉬케메', '마아하레'가 히필형 분사임을 감안하여 직역하면 '일어나는 것은 이른 것으로 만들고 앉는 것을 늦은 것으로 만들며'이다. '만들며'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은 한 인간이 주체적이며, 의도적으로 아침 일찍 수고의 터로 가고 저녁 늦게 안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본문은 지금이라도 일을 더 많이 하기위해 휴식 시간이나 수면 시간까지 줄이면서 애쓰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수고의 떡을 먹음'은 '오클레 레헴 하아차빔'(*)으로 직역하면 '피곤에 지친 노력의 떡을 먹는다'인데 바로 앞 구절과 연관시켜보면 본문은 인간 중심적(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노력으로 얻은 떡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강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인간 중심적인 노력으로 얻은 양식은 그것을 얻기 위해 지칠 정도로 수고를 했더라도 결국엔 그와 그의 가정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사 사상을 담고 있는 잠 5:10을 원문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너의 피곤에 지친 노력들은 낯선 자의 가정에 있게 될 것이다'.

⭕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 하나님의 주체성과 그분의 섭리를 강조하는 1절과 본 구절을 연결하여 쉽게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집을 세우시고 또한 그 도성을 지키시므로 하나님의 섭리 없는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며 그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평안하고 활력을 제공하는 수면을 허락하신다'. 물론 이 구절의 내용이 정직한 수고의 무용성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경계하는 것은 인간적인 수고 그 자체가 성공을 부를 수가 있다고 믿고 쓸데없는 염려, 불과 같은 열정과 땀을 쏟아내는 어리석음이다. 유사 사상을 싣고 있는 잠 10:22을 원문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축복은 부를 만드나, 수고는 거기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동일한 가르침을 주님은 산상 수훈에서 베푸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34; 눅 10:41; 벧전 5:7).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해서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위대한 수고의 법칙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고한 후 그분의 지혜및 선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결과를 그분의 손에 맡길 때 수고의 쏘는 것, 고통을 제거될 것이다.

성 경: [시127:3]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힌네 나할라트 예화 바님) - 직역하면 '보라! 아들은 여호와로부터 온 유산이다'이다. 여기서의 '힌테'는 어떤 특별한 사물이나 인물을 주목시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문맥에 따르면 여기서 아들은 한 집의 혈통을 이어갈, 즉 그 집의 존재를 유지시킬 존재로서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한 가족의 존속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성 경: [시127:4]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 여기 '젊은 자의 자식'이란 일찍 결혼하여 얻은 아들(잠 5:18; 사 54:6의 '젊은자의 아내'란 한 남자가 어릴 때 결혼하여 얻은 여인임을 밝히고 있다)을 가리킨다. 젊어서 난 그들은 그의 부모가 나이들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들을 돕고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가정에 물리적인 힘이 요구되는 위기가 달했을때 그 위기를 해결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한 일종의 전방의 군사와 같은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들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이라고 불리운다(애 3:13).

성 경: [시127:5]

주제1: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주제2: [축복의 근원]

⭕ 저희가 - 이 대명사는 젊은 자의 자식들 즉 한 아버지의 아들들로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문맥상으로는, 구체적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어떤 위기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 아들들의 도움과 옹호를 받아야 할 대상은 그 아들들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본 대명사가 아버지와 아들들 양측 모두를 의미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대명사를 아버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봄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편,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본 대명사가 단수('그 사랑하시는 자', '그의 상급')에서 복수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난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동일 대상을 의미하면서도 그 대상을 단수로 썼다가 복수로 바귀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례 구절인 107:43을 원문대로 변역하면 이렇다. '지혜있는 그는 이일을 목도하고...그들은...을 이해하라'.

⭕ 성문에서 - 성경에서 이곳은 모든 공적인 행사의 장소일뿐 아니라 재판의 처소로 불리우고 있다(신 21:19; 사 29:21; 암 5:12). 문맥적으로 볼 때 자식들 둔 아버지는 비록 부당하게 고소를 당하여 볼의한 재판관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재판에 패소할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잘 키운 건강하고 용감한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도록 그냥 관망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 원수와 말한다'는 것은 재판 때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수 20:4; 삼하 19:30; 렘 12:1 참조).

성 경: [시128:1]

주제1: [노동과 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그 도에 행햐는 자 -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119:3). 본절은 의로운 사람의 주요 특징을 간략히 묘사해 주고 있다.

성 경: [시128:2]

주제1: [노동과 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 이것은 하나님의 도를 행하는 자가 받을 축복의 첫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서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의 도를 행하지 않는 자는 손으로 수고하여도 먹지 못하게 된다는 진리이다. 성경은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씨 뿌리는 수고가 헛될 것인데 그것은 그 원수가 그 수확을 먹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레 26:15,16; 신 28:30; 암 5:11).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며 산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보응하는 풍성한 수확을 불로 소득으로 얻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늘 감사하며 사는 이는 자신이 땀 흘려 수고한 그 이상의 풍성한 소득을 축복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이 주는 교훈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노동이 더 이상 고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축복으로 이해될 것이다.

성 경: [시128:3]

주제1: [노동과 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내실(內室)에 있는(*, 베아르케테) - 직역하면 '구석에 있는'이다(암 6; 10).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가정의 경우 아내용 방이 구석지고 은밀한 곳에 있었던 사실을 일차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이차적으로는 어느 정도는 비밀에 속한 가정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주부의 특성뿐만 아니라 집의 가장과는 달리 그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행해졌던 내실 마님의 속성을 가리키고 있다(Perowne).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의 유대 사회에서 여전히 그 독특한 특성으로 남아있다.

⭕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 포도나무는 흔히 이스라엘의 상징이나(80:8), 본 구절에서는 아내의 건강한 출산 능력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 어린 감람나무 - 본절에서 '감람나무'란 '결실한 포도나무' 비유의 평행이 아니라 '신선함과 활력, 건강하고 유쾌한 삶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anderson). 감람나무는 설령 베어진다고 해도 베어진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싹이 자라 나온다. 이와 유사하게 한 가정은 비록 그 부모들이 나이 들어 죽어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그 자손들이 새롭게 자라나 그 가정의 혈통을 유지하므로 그 가정은 계속 존립하게 된다.

성 경: [시128:4]

주제1: [노동과 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여호와를...얻으리로다 - 원문에 보면 본 구절 앞에는 '보라!'를 뜻하는 용어인 '힌네'(*)가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을 복을 언급한 기자가 그 내용을 정리하듯 독자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가 묘사한 내용은 극히 회화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사진 몇 장을 들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 볼 수도 있겠다. '여러분 여기 이 사진을 보십시오. 농부가 그의 밭을 경작하고 이제 가을이 되어 그의 수고한 열매를 즐기고 있는 차분하고도 경건한 분위기가 가득한 그의 식탁을 보십시오. 자식들도 많고, 유쾌하고 사랑이 가득하며, 계속해서 그 가문이 번성되고 유지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제 만일 여러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의 가정도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 경: [시128:5]

주제1: [노동과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 후 저자는 가정의 가장을 향하여 다시 한번 복을 빌면서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즉, '시온'은 하나님의 지상 처소로 알려져 있는데(20:2; 65:1; 134:3) 바로 그곳에서 복이 온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결국 그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한다는 것을 마음에 심고 있는 것이다(Anderson, Perowne).

⭕ 예루살렘의 복(*, 토브 예루솰람) - 문자적인 뜻은 '예루살렘의 좋은 것'이나, 문맥상 '예루살렘의 번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the prosperity of Jerusalem, NIV). 여기서 우리는 기자의 애국자적인 정서를 엿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자녀 및 손자를 보며 오래 살기를 바랄 뿐 아니라 그가 속한 도시 예루살렘의 번영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새롭게 얻는 시야는 한 개인 및 그 가정의 운영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번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역도 동일한 사실이다. 한 국가의 안녕은 한 가정의 건강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 보며(*, 레에) - 명령형이므로 '보라'가 정확한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어가 지시하는 본절의 내용을 기자가 막연히 기대하는 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를 기원을 넘어선 강한 성취를 내다보는 일종의 약속으로 해석해야 한다. 37:3에도 동일한 예가 나온다.

성 경: [시128:6]

주제1: [노동과 가정에 대한 축복]

주제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축복]

⭕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 말하자면 '네가 장수하리라는 것'(창 50:22)이며 '너의 생명이 손산되지 않은 성공과 행복으로 특징 지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후손은 한 가정의 힘일 뿐 아니라 그 가정의 미래를 보장하는 희망이기도 하다.

⭕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 본 시편의 주요 부분인 이 부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 사람의 미래는 그사람이 속한 공동체 전체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한 가정의 미래에 관해 논해 오던 기자가 결론적으로 공동체 이스라엘의 미래를 축복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성 경: [시129:1]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요마르 나 이스라엘) - 직역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려 한다'인데, 이 표현은 과거를 회상하는 문맥의 시작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118:2; 124:1). 본 시편은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로 부터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의 모든 기억들, 고통의 기억 및 반복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으로 간주된다.

⭕ 나의 소시부터(*, 미누라) -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시절 곧 유년기란 대체로 출애굽 및 광야 방황시기를 가리킨다(렘 2:2; 호 2:15; 11:1).

성 경: [시129:2]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여러 번...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 대적들의 공격은 수도 없이 여러번 이루어졌었지만 이스라엘은 멸절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 왕조들, 블레셋, 아람,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의 압제자들로부터 결국엔 벗어났었다. 대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본 시편의 요점이다. 본문의 신약 평행구는 고후 4:8-10인데 사실 기독 교회전 역사는 바로 본 구절의 복창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 경: [시129:3]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밭 가는 자 - 잔혹한 압제자에대한 비유적 묘사인데 특히 이 용어는 밭고랑처럼 푹패인 자국들을 남기게 하는 채찍을 휘두르는 자를 연상시킨다(Anderson).

⭕ 고랑 - 노예의 등에 채찍질하여 난 것과 같은 깊은 상처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 1:6이나 51:23의 표현은 외관상 본 구절과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나 사실은 동일하다. 이사야는 도시의 거리에서 벌어졌던 압제 행위를 묘하함에 있어 동일한 뜻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는니라"(사 51:23). 반면 본 시편 기자는 농촌의 모습인 골이 깊은 밭고랑을 보고 동일한 이미지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Perowne).

⭕ 길게 지었도다 - 이에 해당하는 '아라크'(*)의 문자적인 뜻은 '길게 하다', '연장하다', '선을 곧바르게 하다'이고 공간적 혹은 시간적인 연장을 가리킬 때 쓰인다. 여기서는 공간적, 시간적인 개념 둘 다를 적용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전자는 등에 고랑을 내었다는 표현에서 후자는 여러 번 괴롭혔다는 표현에서(1절) 각각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열방 압제자들에게 받았던 고통은 그 상처가 깊고 혹독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계속 되어온 것이었다.

성 경: [시129:4]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예화 차디크) - 어떤 학자는 본 구절을 '의로우신 여호와'(7:9)를 뜻하는 강조 문구로 간주하고(Kraus), 또 다른 학자는 여기서의 '차다크'를 '여호와'와 병치, 즉 동격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말하자면 '의로운 자이신 여호와'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119:137, Gunkel). 양자 중 어떤 번역을 취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명백한데, 여호와께서는 그의 약속에 신실하셔서 그의 백성을 구하시고 그들의 압제자들을 징벌하신다는 것이다.

⭕ 악인의 줄(*, 아보트 레솨임) - '아보트'의 문자적인 의미는 '밧줄'로서 악인의 압제 혹은 멍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2:3; 레 26:13; 사 9:4; 겔 34:27). 이 회화적 표현에서 이스라엘은 멍에를 메고서 밭갈기 위해 애쓰는 동물로 묘사되고 있는 듯하다(욥 39:10). 그리고 좀더 현실적, 역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포로 상태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2:3).

성 경: [시129:5]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시온을 미워하는 자(*, 소네에 치온) - 이 표현은 '하팍스 레고메논'(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표현)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용어를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적용시킨다. 이방 국가들의 침입이 시편 및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소네에 치온'을 시온의 주장, 즉 하나님의 요구를 배격하였던 특정 영향력 있는 이스라엘 무리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Weiser). 그렇다면 본 구절을 통해 시편 기자가 지적하는 바는 과거에 있었던 외국 압제자들의 적대감이 사라지게 되엇던 사실뿐 아니라 국내의 패역한 무리들이 수치를 당하였던 사실까지 포함한다 하겠다(25:2; 119:22).

성 경: [시129:6]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지붕의 풀 - 쉽게 자라지만 뿌리가 없어 곧 말라버리는 특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고대 근동 가옥들의 평평한 지붕들은 회반죽, 타르, 재, 모래 등을 반죽하여 바르는데 흔히 그 갈라진 틈 사이로 풀들이 자라났다. 가난한 자들의 가옥의 경우 진흙과 볏짚으로 지었는데 이 경우 잡초는 더욱 무성하게 자라난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농촌 생활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를 보아서도 본 시편 기자가 거주하던 데가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그 같은 잡초는 지붕에 있어서 직접 햇빛을 받기 때문에 미처 자라나기도 전에 말라버리고 마는데 저자는 이스라엘 대적들의 운명이 바로 그와 같을 것임을 지금 확신하고 있다(사 37:27).

성 경: [시129:7]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베는 자의 줌 - '베는 자의 손'을 뜻한다. 추수꾼들은 대체로익은 곡식의 줄기를 한움큼 잡아챈 뒤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벼의 이삭을 잘라낸다(욥 24:24). 잘려진 줄기들은 옆에 세워둔 후 결국엔 불태워버리지만 모아진 이삭들은 단으로 묶여져서 타작마당으로 보내졌다. 본 문맥에서 '베는 자의 손'은 이삭을 잘라낼 목적으로 벼의 줄기를 움켜쥐던 추수꾼의 손을가리킨다. 아울러 이 손은 알곡으로부터 쭉정이를 골라내는 손을 동시에 가리킨다(마 13:30,40). 본절은 쭉정이와 같은 지붕 위 잡초의 무익성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결국 이것은 사악한 자의 삶의 주요한 특성들 가운데 하나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129:8]

주제1: [시온을 미워하는 자의 최후]

주제2: [이스라엘의 고통과 소망]

⭕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지 아니하느니라 - 추수가 진행 중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동행자는 추수자가 풍성한하수확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축하를 표현한다. 여기서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오늘날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인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처럼 선한 소원, 경건한 축하, 성공과 번영의 소원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었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같은 용어는 지붕 위에 자라는 잡초에 대한 언급으로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잡초처럼 말라가고 있는 혹은 이미 말라버린 것을 손에 들고 있는 자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해주는 것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도리어 조롱하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시130:1]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깊은 데서(*, 미마아마킴) - 직역하면 '깊음으로부터'인데 여기서 '깊음'은 그 바닥을 헤아리 수 없는 깊고 신비한 해연(海淵), 혹은 골짜기를 가리킨다(69:2,14; 사 51:10; 겔 27:34). 그러나 문맥상 이 곳에서는 심한 고통, 압박감 등을 의미하고 있다.

⭕ 부르짖었나이다(*, 크라아티카) - 본 구절의 시제는 완료형인데 히브리어에서 완료형은 현재 순간까지 계속되어온 오랫동안의 경험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 기자는 깊은 고통 중에 오랜 세월(시간) 동안 하나님께 부르짖어 왔음에 분명하다.

성 경: [시130:2]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귀를 기울이소서(*, 티흐예나 아제네카 카쉐보트) - 직역하면 '당신의 귀들이 집중력있게 하소서'이다. 원어상으로 귀를 복수형 '귀들'로 쓴 것은 최대한 집중력을 모아 달라는 저자의 청원을 엿보게 해준다(대하 6:40).

성 경: [시130:3]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감찰하실진대(*, 티쉬마르) - 문자적인 뜻은 '키키다' 혹은 '주시하다'이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볼 때는 '계속해서 관찰해 보다'(90:8과 욥 10:4; 14:16 등의 의미를 대조해 보라)라고 하는 발전된 의미가 깃들어 있고, 좀더 발전된 의미로 볼 때는 징벌하기 위하여 계속 기억 속에 넣어 두다'가 된다(렘 3; 5; 암 1:11).

⭕ 누가 서리이까(*, 미야아모드) - 이는 부정적인 대답 '아무도 설 수 없다'를 기대하는 의문문이다. 여기에는 죄가 없는 자란 하나도 없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143:2; 왕상 8:46; 잠20:9). 한편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적극적인 특권인다(anderson).

성 경: [시130:4]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그러나(*, 키) - 일반적인 뜻은 '왜냐하면'인데 본 문맥에서도 바로 이 의미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앞선 절에 함축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본 접속사를 활용하여 3절 뒷부분과 본절 상반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만일 당신이 계속해서 죄를 지적하시고 그것을 마음에 두시면 아무도 당신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죄를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용서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이다.

⭕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 '사유하심'(*, 하슬리하)의 명사형은 느 9:17; 단 9:9에서만, 그리고 형용사형은 85:5에서만 나오지만 동사형은 모세 오경 및 그 이후 책들에서 자주 나오고 있다. 한편, 본분은 주께 죄를 용서를 비는 일종의 간구라고도 볼 수 있다.

⭕ 주를 경외하심이니이다(*, 레마안 티와레) - '티와레'의 원형은 '아레'(*)이며, 본절에서는 나팔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보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야레'는 대부분의 경우 재귀형 분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레'의 이 드문 용례로 인하여 '레마안 티와레'에 대한 번역은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선 70인역(LXX)은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로, 빌게이트역(Vulgate)은 '당신의 율법 때문에'로 각각 번역하지만 맛소라 사본(MT)의 '당신이 더욱 경외를 받으실만한 분인 것은'이란 직역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까닭은 인생이 그 용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게 되고 따라서 그분에게 경외를 나타내고 존경을 표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성경은 흔히 '그의 이름을 인하여',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다(25:11; 79:9). 부연컨대,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값없이 주는 선물과 같다. 그러나 용서하심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경외하는 일과 밀법한 관계가 있다. 만일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호와께 대한 진정한 경외가 없는 곳에는 죄의 용서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호와 경외는기독교 교리의 본질, 실체라고도 할 수 있다. 여호와 경외가 이토록 중요하고 용서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자는 사유하심, 즉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관한 언급 뒤에 여호와 경외를 덧붙인 것이다.

성 경: [시130:5]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키위티 예화 키우타 나프쉬) -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렸다. 나의 영혼이 기다렸다'이다. 여기 '내가'와 '나의 영혼이 기다렸다'이다. 역 '내가'와 '나의영혼'은 동일하게 시편 기자의 전인(全人)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내용을 재차 반복한 것은 그가 기다림에 투자한 노력이 얼마나 철저한 것이었는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기다렸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이다.

⭕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리드바로 호할티) - 문자적인 뜻은 '내가 그의 말씀 안에 소망을 두었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약속들에 근거하여서 필요한 모든 자비와 은혜를 소망하였다는 것이다. 약속들에 근거한 이 같은 기다림, 소망의 자세야말로 참된 신앙적 자세요, 결코 쉽게 낙망하지 않는 자세일 것이다(Perowne). 이는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라는 간절함을 내표한 자세이기도 하다.

성 경: [시130:6]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파숫군 - 이것은 아마도 임무 교대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던 야간 성전 파수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나 진지(陳\地)를 지키는 보초뿐만 아니라 그 원이야 무엇이든간에 깨어 지키는 의무를 지닌 모든 사람에게 이 용어를 적용시킬 수 있겠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날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영혼의 갈망이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도 드물 것이다(Perowne).

⭕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나프쉬 라아도나 ) - 직역하면 '나의 영혼은 주께 향하고 있다'(143:6)이다. 파수꾼이 밤중 내내 아침을 알리는 일출을 간절히 고대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한다는 뜻이다. 본문을 강해함에 있어 델리취(Delitzsch)는 임종시 침상 위에서 한 성도가 그의 눈을 뜨고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외쳤던 다음과 같은 유언을 인용하고 있다: '나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득하도다. 나의 전 영혼은 하나님께 향하고 있다'.

성 경: [시130:7]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이스라엘아...있음이라 - 저자는 그의 소망을 끝내 포기하지 않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명할 수 있었다. 본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서 가장 현실감있고 정감이 넘치는 해석을 소개하면 이렇다: '기자는 시시각각으로 압박해 오는 재난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믿음의 내용들이 결국 그를 자포 자기라는 파멸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기자는 우리를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떠나는 일을 경고하면서, 그 굳건한 믿음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자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내 속에는 분노만이, 악마에게는 미움만이, 세상 속에는 극단적인 노여움과 미친 짓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나는 주님께 나를 맡기리라. 그 분에게는 자비가 있고 풍성한 구속이 있기 때문이다'(Luther).

⭕ 풍성한 구속 - 인간의 마음의 가변성, 소망의 빈약성, 믿음의 연약성에 비추어 볼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축복은 인간이 감당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성 경: [시130:8]

주제1: [하나님을 기다리는 영혼의 갈망]

주제2: [주를 기다리며 회개하는 기도]

⭕ 저가(*, 후) - 아무도 할 수 없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강조사이다.

⭕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 '그 모든 죄악'은 단순히 당면하고 있는 징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구속'은 죄의 용서, 죄의 권세 및 억압적 지배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죄가 낳은 모든 결과들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성 경: [시131:1]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

⭕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 모든 미덕들이 한 몸을 이룬다면 그 몸의 머리는 겸손일 것인데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겸손에 관해 감히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선 겸손은 자포자기의 체념적인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가 겸손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다(사 57:15). 또한 이것은 바라세인의 기도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자신을 세리와 비교하며 자신이 그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였는데(눅 18:9-14).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시인은 자신의 덕목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인한 내적 상태를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전반절은 다른 사람을 업신 여기는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았음을, 그리고 하반절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주제넘게 행동하지 않았음을 각각 나타낸다(Kidner).

⭕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 빅돌로트 베니플라오트) - 여기서 전자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 과중하여 그것을 맡을수 없는 임무나 의무들'을 , 후자는 '너무 신비롭고 어려워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리킨다.

⭕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로 힐라크티) - 문자적인 뜻은 '내가 내 자신을 걷게하지 않았다'이다. 여기서 '걷는다'는 것은 삶, 혹은 어떤 행동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스스로의 야망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무모하게 앞서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다윗의 모습을 통치자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성 경: [시131:2]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

⭕ 젖 뗀 아리가 그 어미품에 있음 같게 - 이것은 인생의 온갖 우여곡적을 신앙으로 극복해 낸 한 영혼의 겸손에 대한 아름답고 순수하고 또한 감동적인 비유적 표현이다. 대체로 젖 떼는 나이를 세 살 가량으로 본다면, 그 나이가 지나도 여전히 젖을 떼지 못한 아이는 모유의 양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 아이는 젖이 복족하여 안달하고 우는 때가 많을 것이다. 반면에 적절한 때에 자연스럽게 젖을 떼었다는 것은 만족스럽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Anderson). 또한 이 표현은, 아이가 젖을 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요구되어지는 바, 젖 뗀 후의 편안함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 및 그가 얻은 평안함의 순수성과 비이기성(unselfishness)을 읽게 한다. 젖 뗀 아이는 젖 떼기 전처럼 더 이상 안달하거나 짜증스러워하지 않고 어머니의 가슴을 바라며 그것에 기대어 만족해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모든 불만족스러운 생각들, 땅의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다가 생기는 모든 안달하는 마음들로부터 벗어나고 나면 조용히 하나님만을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 속에서 만족을 찾으며 그의 팔 안에서 평화롭게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1절과 연관시켜 볼 때, 젖을 뗀다는 것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요 4:34; Kidner).

성 경: [시131:3]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

⭕ 이스라엘아...바랄지어다 - 바로앞 시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개인의 경험이 만족의 경험이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로 본 시편을 끝맺고 있다.

성 경: [시132:1]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열심과 서원]

⭕ 다윗을 위하여 - 지어진 성전은 그것이 솔로몬의 손으로 건축되기 전에 다윗의 마음속에 있었다. 따라서 솔로몬은 자신의 노고가 열납되기를 구하지 않고 그의 아버지의 헌신이 기억되기를 소원하였는데(대하 6:42), 바로 이 사실을 본절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32:2]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열심과 서원]

⭕ 야곱의 전능자 - 5절에서 반복되는 하나님의 본 호칭은 임종을 맞은 야곱의 입을 통하여 언급된 창 49:24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외에는 사 1:24; 49:26; 60:16 등 세 군데에서만 발견된다. 여기서 야곱이 언급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그가 하나님의 전(殿)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고(창 28:22) 둘째는 그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최초로 기둥을 세웠었기 때문이다(Perowne).

성 경: [시132:3]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열심과 서원]

⭕ 나의 거하는 장막(*, 오헬 베티) - 직역하면 '나의 집인 텐트'이다. 이와 유사하게 '내 침상'도 직역하면 '나의 침실인 침상'이다. 이것은 텐트가 집이었고 침상이 침실이었던 고대 족장 시대의 주거 생활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32:4]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열심과 서원]

⭕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 이것은 일종의 잠언적 표현으로 여겨지는데 사실 잠 6:4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안식하지 않으리라'는 뜻을 강조적으로 나타낸 어법이다.

성 경: [시132:5]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다윗의 열심과 서원]

⭕ 성막(*, 쉬카노트) - 문자적인 뜻은 '처소', '머무는 곳'이다. 본절은 (1) 삼하 7장에 나타난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의도와 삼하 24장에 나타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의 예비적 정결, 혹은 (2) 많은 방황을 겪은 뒤 법궤를 시온의 고정된 처소에 두었던 사실(78:68,69)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을 고려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성 경: [시132:6]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성전 건축 및 법궤 이전]

⭕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 이는 법궤를 가럇여아림으로부터 운반하는 기사를 상기케 하는 구절이다(삼상 7:1; 삼하 6:2; 대상 13:5). '에브라다'는 아마도 다윗의 고향이거나(룻 4:11; 미 5:2)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의 혈족의 고향이었던 것 같다(Gray). 바로 이 사실은 법궤의 소재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에브라다에 있었다는 추측들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번역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에브라다에서 들었다.' 이것은 원어로 '쉬마아누하 베에페라타'(*)인데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바로 앞에 제시한 수정 번역을 지지하고 있다(we heard of it at Ephratah. KJV). '에브라다'는 기럇여아림 지경 내의 한 지역의 지명으로 짐작된다(Delitzsch).

⭕ 나무 밭(*, 세데 야아르) - 여기에서 '세데'(*)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의 원형, 곧 단수형도 '세데'(*)이다. 70인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은 이 원형을 중시하여 단수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데'는 단수로 쓰일 경우 대체로 막연한 어떤 지역이 아닌 특정 지명을 가리킨다. 그러하다면 '세데 야아르'는 어떤 특정 지역의 이름으로 보아야 하는데 문맥을 고려할 때 그 특정 지역이란 가럇여아림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데 야아르'를 기럇여아림의 시적인 지명으로 해석하고 있다(Johnson).

성 경: [시132:7]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성전 건축 및 법궤 이전]

⭕ 성막(*, 미쉬케노타) - 문자적인 뜻은 '처소'이며 삼하 7:2에서 다윗이 '휘장'이라 불렀던 집으로서 5절에 이어 의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 그 발등상 - 아마도 법궤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경은 법궤 자체를 여호와 보좌의 발등상으로 간주하면서(대상 28:2) 여호와를 천사들 위에 좌정해 계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99:1). 본절은 유일하고 참된 신(神)이시며 왕이신 여호와 앞에 드리는 충성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왕권에 대한 충성을 암시한다.

성 경: [시132:8]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성전 건축 및 법궤 이전]

⭕ 여호와여...들어가소서 - 7절에서는 다윗 시대의 회중적 정서를 읽을 수 있었고, 본 절에서는 솔로몬 시대의 민족적 정서로 그 정서가 바뀌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편 저자의 사고 체계 속에 회중은 하나이며 두 시대 민족의 정서도 하나이다. 그는 법궤가 시온으로 옮겨졌을 때 제창되었던 찬양을 그 법궤가 다시 시온으로부터 마지막 안식의 처소인 성전으로 옮겨졌을 때 불리웠던 찬양과 함께 뒤섞고 있다(대하 5:2-5).

⭕ 여호와여 일어나사(*, 쿠마 예화) - 직역하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이다. 이것은 고대 시대에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함성에서 따온 표현이며(민 10:35), 법궤를 들어 올렸을 때에도 제사장이 이와같이 외쳤다. 이떤 학자는 법궤가 이미 성전에 있었기 때문에 법궤 운반이 진행 중이었다는 암시를 본절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바, 7절에 의하면 이같은 견해는 신빙성이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Weiser).

⭕ 권능의 궤(*, 아론 우제카)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강한 법궤'이다. 법궤는 신적(神的) 능력의 상정,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강한 힘이 그곳을 두르고 있는 무엇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표현은 그 대적과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있을 때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 및 보호의 상징이었던 사실로부터 추론된 것 같다(삼상 4:3). 시편에서 법궤가 언급된 곳은 이곳뿐이다.

성 경: [시132:9]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성전 건축 및 법궤 이전]

⭕ 의를 입고 - 이 표현은 제사장이 의로움으로 특징지어짐을 암시한다(사 11:5; 61:10). 뿐만 아니라 신적(神的) 축복의 통로로서의 제사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여기서의 '의'는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하리니'라는 평행구(16절)를 존중할 때 '구원'이란 뜻도 내포함이 분명하다. 종합하건데 본 구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인 구원을 계시를 통해 전달하는 자로서의 제사장의 특징을 보여준다 하겠다(대하 6:41).

⭕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 이 구절을 포함한 본절 전체는 오늘날 서양의 규범적 기도문의 일부를 연상케 하는데 사실 그것은 본절로부터 따온 것이다(Perowne): '목회자들을 의로 옷입히소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로 기뻐하게 하소서'.

성 경: [시132:10]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주의 기름 받은 자 - 이 기름받은 자가 다윗이 될 수는 없다(Hupfeld, Hengstenberg).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몹시 어색하기 때문이다. '다윗을 위하여 다윗의 기도를 거절하지 마소서'. 따라서 여기서 기름 받은 자는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의탁한 솔로몬(혹은 다윗의 후손들 중의 하나)이 되어야만 한다. 대하 6:42에 근거하면 본절은 다음과 같이 약간은 변형된 그러나 그 의미가 좀더 명확한 구절이 되겠다. '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시오. 곧 당신의 종 다윗의 인애를 기억하옵소서'. 이와 같이 볼 때 본절은 약속의 성취를 구하는 기도문의 일종이다. 그 약속의 내용은 11,12절에 인용되어 있다.

성 경: [시132:11]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여호와께서 다윗에게...맹세하셨으니 - 여기서 시편 기자는 삼하 7:12-16에서 언급된 바, 다윗에게 주셨던 여호와의 약속을 암시하고 있다. 본 구절에는 불변하는 신적(神的) 약속의 특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다윗의 후손이 항상 그의 권좌를 잇겠다는 것, 곧 다윗 왕조는 결코 바뀌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조건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윗의 왕조가 결코 바뀌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러나 그 약속의 조건으로 준 언약과 교훈의 불이행,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마 1:20,21).

성 경: [시132:12]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내 언약, 교훈 - 각각 '베리티'(*), '에디티'(*)인데 이들은 동의어이지만 성경 본문이 다른 용어를 사용한 취지를 존중하여 그 의미를 세분화해 보면 전자는 공동체의 의무와 책임을 개락해 놓은 시내 산 언약, 후자는 왕의 의무와책임을 개략해 놓은 다윗 언약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문맥상 이 둘 중 하나만을 택한다면 후자가 좀더 타당하겠으나 저자 역시 부당하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왕 또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Anderson)

성 경: [시132:13]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 원문상에는 본절 서두에 '키'(*)라고 하는 접속사가 있으며 이것은 '왜냐하면'을 뜻하는데, 이 접속사는 다윗을 왕으로 택정하셨다고 하는 앞절의 내용과 본절의 내용, 즉 시온을 성소로 택정한 사실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암시해준다. 정리하면, 시온을 지성소의 자리로 택한 사실과 다윗을 왕으로 택한 사실, 더 나아가서 유다를 하나님의 통치 민족으로 택한 사실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관 내용은 어렇다: '여호와께서는 다윗과 다윗의 집에 통치권을 부여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구분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이 사실은 122:4,5에 명확히 나와 있다.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과 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78:67-71).

성 경: [시132:14]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영원히 쉴 곳 - 본 절 전체는 8절의 탄원에 대한 응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머물기로 예정되었던 곳은 실로인데 실로는 그 특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얼마 동안 법궤는 벧엘에 있었고(삿 20:26,27) 미스바에 잠시 머물렀다가(삿 21; 5) 가럇여아림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20년간 머루르게 되었다(삼상 7:2). 그 후 다시 그곳에서 옮겨져 오벧에돔의 집에서 석달을 체류했고 마침내 마지막 안식의 처소인 시온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의하면 법궤는 마치 인간 편의 상황에 따라 그 처소가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실은 그 모든 과정과 결국 영원한 처소로 시온을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 섭리에 의하여 되어졌다는 것을 본절 후반부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 경: [시132:15]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상기]

⭕ 내가 이 성의 식표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체다 바레크 아바레크) - 동사 '바레크'(*)의 첫 자음 '베드'(*)에는 원문상 점이 찍혀 있는데 이것은 본 구절을 말하는 화자(話者)의 강한 의지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본문에 대한 좀더 원문적인 번역은 이렇다: '내가 분명히 그 성을 풍족한 식료품으로 복을 주고.' 또한 여기서 '식료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체다'(*)인데 이 번역은 쉽지 않지만 78:25에서 본 용어를 '식물'(양식)로 번역하고 있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식물'은 일차적으로 여행지를 위한 음식을 뜻하지만 모든 종류의 음식(양식)에도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체이다'는 사냥을 하여 얻은 수확물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25:28; 욥 38:41).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번역 '식료품'은 무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32:16]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 - 9절에 언급된 탄원에 대한 응답이다. 다만 9절에서의 '의'가 본절에서는 '구원'으로 바뀌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대하 6:41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 중 한 구절에서 비롯된 내용이라 하겠다. 여기서 제사장들을 구원으로 입힌다는 것은 제사장을 하나의 통로, 수단으로 사용하여 예배 공동체에 구원 사실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사항은 단수히 인간의 탄원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4절부터 계속되는 내용, 곧 시온을 거처로 정하시는 것, 그곳 백성에게 풍성한 양식을 주시는 것 등은 하나님의 주도적 섭리에 의하여 되어진다는 사실이며(특히 14절의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따라서 그 문맥에 충실하게 본 구절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 섭리의 산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시132:17]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 성경에서 뿔은 대체로 힘, 권능, 번영(89:17,24; 92:10; 삼상 2;1,10)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 왕조의 권세가 더욱 막강해져서 그 어떤 대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다면 그 토대를 든든히 유지하여 나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같은 결과는 다윗 왕조 구성원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내가...할 것이라).

⭕ 등 - 이 비유는 성전 안을 비추기 위하여 계속 타고 있었던 성전 등불로부터 그 이미지를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 비유는 다윗에게 적용된 바도 있지만(삼하 21;17) 본 시편에서는 다윗의 후손, 즉 다윗 계열의 왕들을 표현하는 비유로 사용된 것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킬 것을 다시 한번 밝히시는 데 그렇다면 본구절은 동일한 내용의 두 대구가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본절 전반부 역시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계속 유지시키며 강성케 하실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 구절은 10절의 탄원에 답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성 경: [시132:18]

주제1: [여호와의 성소에 대한 축복과 약속]

주제2: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상기]

⭕ 저의 원수에게는 수치로 입히고 - 9절 및 16절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는 35:26; 109:29; 욥 8:22 등을 들 수 있다. 원수에 대한 언급이 본 시편에서 전혀 나오지 않았던 점을 주시할 때 본문은 그 자체에 어떤 깊은 의미가 있지 않고 이어지는 구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사용된 표현으로 보면 되겠다.

⭕ 저에게는 면류관이 빛나게 하리라 - 여기서 '빛나게 하리라'(*, 야치츠)의 문자적인 뜻은 '꽃(싹)을 틔우리라'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시는 표시로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신 사실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민 17:8). 여기서는 하나님이 다윗의 왕권을 견고하고도 영화롭게 하신다는 의미로 쓰였다.

성 경: [시133:1]

주제1: [형제 사랑에 대한 찬양]

주제2: [형제 연합의 선함과 아름다움]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 쉐베트 아힘 감 야하드) - 문자적인 뜻은 '형제가 함께 거처하다'이다. 따라서 '연합하여'라는 말이 원문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의 삽입이 원문의 의미를 번경시키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형제'는 동일한 정신으로 충만한 가운데 상호 관용과 동일 목적을 추구하는 운명 공동체요,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동일 민족 및 동일 혈족을 가리킨다(Perowne). 한편 신 25:5 내용과 평행을 이룬다는 점에 근거하여 혹자는 본절을 신명기에 언급된 사회 유형을 회복, 보존하기 원하는 기원으로 이해한다. 또는 '시온'이라는 표현에 강조점을 둔 3절에 근거하여, 본절을 민족적 대절기 때마다 순례자들이 모여 형제들의 연합, 동거가 가능케 된 데 대한 찬양으로 보기도 한다.

성 경: [시133:2]

주제1: [형제 사랑에 대한 찬양]

주제2: [형제 연합의 선함과 아름다움]

⭕ 머리에 있는...흘러서...내림 같고 - 본절의 비유는 대제사장의 성직 수임식 때 그의 머리에 부어졌던 기름으로부터 따온 것이다(출 29:7; 레 8:12; 21;10). 그런데 본절의 초점이 그 기름이 비싸다는 사실에 있는가, 아니면 바로 그 앞절에 언급된 형제 공동체의 전체적 성별 사실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견해 중에 후자의 견해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관건은 바로 본 구절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다. 즉, 머리에 부은 기름이 값비싼 기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경우 본 구절은 단순히 형제의 동거함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의미만 나타낼 분이다. 그러나 머리에 부은 기름을 형제 공동체의 전체적 성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로 볼 경우에는 본절 전체의 영적 의미가 풍성히 드러나게 된다. 그 영적 의미란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하여 귀한 기름과 같은 사랑과 우애를 나누게 될 것이라는 데에 있다.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의 내용을 중시하였을 때 본절은 영적 공동체 전원이 동일한 축복에 참여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고전 12장).

⭕ 보배로운 기름(*, 쉐멘 하토브) - 직역하면 '좋은 기름'이다. 이것은 거룩한 용도에 쓰일 물건이나 사람을 성별(聖別)할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준비된 거룩한 기름을 가리킨다(출 30:22,23). 결국 이 구절은 바로 앞절의 '형제'공동체가 한몸과 같은 공동체라는 사실뿐 아니라 성별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 아론 -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기름 부음받은 제사장을 대표하기 때문에 거명되었다(출 28:41; 41:30; 40:13).

성 경: [시133:3]

주제1: [형제 사랑에 대한 찬양]

주제2: [형제 연합의 선함과 아름다움]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케탈 헤레몬 쉐이레드 알 하르레 치온) - 직역하면 '시온 산들 위에 내린 헐몬의 이슬같이'이다. 직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본문의 초점은 '이슬'에 있다. 저자는 형제적 화합의 축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슬로부터 그 이미지를 빌리고 있다. 본 이미지가 강조하는 바는 이슬의 새롭게 만드는 특성이나 부드럽게 스며들어 풍요롭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뿐만 아니라, 높고 고상한 산 헐몬 위에 내리는 동일한 이슬이 낮고 작은 시온에도 내린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 형제적 화합이다(헐몬 산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즉, 사회적 신분 등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형제 공동체 일원은 동일한 활력을 마시게 된다는 사실을 본 이미지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Kidner, Perowne). 아울러 본 비유는, 시온이 비록 외관상으로는 낮고 보잘것 없게 보이나 특별히 성별(聖別)된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 귀하고 복되다는 사실도 암시한다.

⭕ 거기서 - 시온에서 형제 화합의 축복된 열매를 볼 수 있는데, 그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곳을 모든 축복과 모든 생명의 중심지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성 경: [시134:1]

주제1: [찬양의 요청과 축복]

주제2: [찬양과 축복의 대화]

⭕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 - 이스라엘에는 밤에도 찬양을 통하여 성전에서 봉사를 했었던 일련의 노래하는 자들이 있었다. 중세의 많은 수도원들에서 그랬었듯이 그당시 성가대원들은 밤새 계속해서 찬양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물론 정규적인 야간 성가대 회집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 밤에도 성가대들은 성전에서 찬양을 하곤 했었다: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을 하지 아니하였더라"(대상 9:33). 그런데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자들을 밤에도 찬양했던 레위인들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여호와의 모든 종들'이란 호칭이 나오는데 이 호칭은 135:2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레위인뿐 아니라 제사장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본절은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자들에게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성 경: [시134:2]

주제1: [찬양의 요청과 축복의 기원]

주제2: [찬양과 축복의 대화]

⭕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 '성소'에 해당하는 '코데쉬'(*)는 '거룩함', '거룩한 장소', 혹은 '거룩한 물건' 등 다양한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부사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혹자는 이를 '거룩함으로'(in holiness, LB)라고 번역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손'과 연결시켜 '거룩한 (손)'으로 이해한다 (딤전 2:8). 그러나 대부분은 '성소에서'(in the sanctuary, KJV, NIV)혹은 '성소에서'(to the holy place, RSV)라고 번역한다. 또한 손을 든다는 표현은 기도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좀더 포괄적으로는 '찬양하다' 혹은 '예배하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일상적 업무인, 백성들을 위한 예배에 대한 명령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34:3]

주제1: [찬양의 요청과 축복의 기원]

주제2: [찬양과 축복의 대화]

⭕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송축이 주제였으나 본절의 주제는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인 반면에, 인생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인생을 변화시키고 인생에게 없는 것을 은혜로 베푸신다는 뜻이다(Kidner).

성 경: [시135:1]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촉구]

113:1과 거의 동일한 구절이다.

성 경: [시135:2]

주제1: [역사의 주관자시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촉구]

⭕ 전 정에(*, 베하츠트) - 직역하면 '뜰에' 이다. 여기서 '뜰에'라는 표현만으로 본 시편의 수신인이 제사장들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포함된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시편의 전체 분위기와 19,20절 내용 등으로부터 그 같은 증거를 추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요컨대 본 시편의 수신인은 일차적으로 시편을 노래하며 여러가지 악기들을 연주하였던 레위인들과 트럼펫을 불고 의식적(儀式的) 기도문과 축복을 반복했던 제사장들이지만, 경건한 이스라엘 회중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겠다(Alexander).

성 경: [시135:3]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촉구]

⭕ 여호와...여호와 - 여기서 '여호와'란 호칭이 반복되고 있는데 본절을 포함한 1-6절에서 계속되고 있는 여호와의 호칭의 반복은 광야 시대 때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축복할 경우 여호와의 이름을 반복하였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는 제사장이 세 차례에 걸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동일하게 그이름을 세 차례 반복하여 화답하곤 하였는데, 이같은 예식은 바로 민 6:22-27에 그 근거를 두었다고 한다(Perowne).

⭕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키나임) - 직역하면 '(이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이다'이다 . 평행법을 따르면 '이것'이란 여호와의 이름 혹은 여호와 자신을 가리킬수 있겠는데 이 경우 본 구절의 번역은 '하나님의 이름(혹은 하나님)은 아름답기 때문이다'가 되겠다. 그러나 본문의 유사 구절인 147:1에 의하면 '이것'이란 '찬양함'이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본 시편은 대부분 그 자료를 다른 시편(134, 136, 147편 등)에서 빌리고 있다는 학자들의견해를 중시할 때 '이것'을 '찬양함'으로 보고 본절 처음부터 '아름다우니'까지를 재번역하면 이렇다: '찬양하라 여호와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시편으로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찬양은 사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135:4]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야곱 - 시편에서 본 용어는 '이스라엘'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 1-3절의 찬양의 이유들 중 첫 번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사실을 들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치는 그 민족의 숫자나 부강함 등 외적인 상태에서 발견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들을 택하셨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Driver, Greenberg).

성 경: [시135:5]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내가 알거니와(*, 아니 야다티) - 여기서 대명사 '아니'(*)는 강조사로서 본문이 저자의 강한 개인적 확신을 담은 구절임을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탁월성과 지고성(至高性)에 대해 세상이 도무지 째닫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만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체험에 의거하여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Alexander).

성 경: [시135:6]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 - 자연계의 모든 힘과 현상들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우월성은 본 시편 15-18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이방신들의 무익성에 관한 언급과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며, 이러한 대조적인 묘사는 115:3 이하에서도 발견된다.

⭕ 천지와...다 행하셨도다 - 여기서 '천지'는 문자 그대로 땅과 하늘 등의 온 우주를 가리키는데 그 우주 구석구석, 특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까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다(Barnes). 결론적으로 본절은 자신이 만든 피조 세계의 주인이 되셔서 그 속의 모든 현상, 힘까지도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시135:7]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 6절에서 여호와의 통치가 우주 만물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면, 본절에서는 그의 권능의 산물로서의 몇몇 자연 현상들이 언급되고 있다. '땅 끝'은 '케체 하아레츠'(*)로서 기체 따위가 그 위에 모여드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 수평선 혹은 바다를 가리킨다. 그리고 '안개'에 해당하는 '네사임'(*)을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 영역본 NIV, RSV 등은 '구름'으로 보고 있고, KJV의 경우는 '수증기'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네사임'의 정체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자연 질서 속에서 그가 원하시는 무엇을(그것이 안개이든 수증기이든 구름이든 간에) 일으키시는 능력과 지혜가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이다(욥 26:8; 38:25-38).

⭕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 이것은 자연 현상의 근원을 깨닫게 해준다. 즉, 인간은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는 것에 대해 그 이유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자연계의 한 현상으로만 알고 있는데 바로 그 현상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사10:13; 51:16).

⭕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 하나님께서 마치 바람을 저장소에 넣어두고 때에 따라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표현의 핵심도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에 두어져 있다(욥 38:22).

성 경: [시135:8]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치셨도다 - 이것은 애굽 위에 내렸던 최종적인 그리고 가장 큰 재앙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녀들을 기꺼이 가도록 허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그래서 이스라엘로 자유를 확보하게 해주었던 중요한 심판이었다. 애굽 위에 내렸던 모든 재앙들를 열거하는 대신 이러한 심판이 이곳에서 선택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의 대적을 심판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시135:9]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징조와 기사 - '징조'에 해당하는 '오토트'(*)는 신적(神的) 능력의 증표 혹은 증거들을, '기사'에 해당하는 '모프팀'(*)은 경감을 불러 일으키는 놀라운 일을 각각 의미한다. 물론 이것들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바 애굽 위에 내린 재앙을 암시한다(105:27-36).

⭕ 바로(*, 파르오) - 이는 '커다란 집'을 뜻하는 애굽어 '프르'로부터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 용어는 왕궁을 가리키는 용어들 중의 하나였는데 후대에 가서 이 용어는 왕의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IDB, HDB).

성 경: [시135:10]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많은 나라(*, 고임) - '고임'의 단수형은 '이방'(*)이다. 어떤 학자는 '고이'가 이스라엘 혹은 유다를 가리킬 때는 반드시 범죄한 이스라엘(혹은 유다)를 뜻한다고 주장한다(신 32:28; 삿 20:20; 사 1:4; 10:6, Oesterley).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사실이 출 19:6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너희가 네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여기서 '거룩한 백성'의 '백성'은 '고이'인데 분명 여기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수 3:17; 4:1). 한편, '고임'은 대부분의 경우 11절에 언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방인 국가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성 경: [시135:11]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시혼(민 21:21; 신 2:30-32)과 옥(민 21:33; 신 3;1-6)은 후일 이스라엘 12지파가 정착했던 지역에 속한 원주민들 중 최초로 이스라엘에게 패퇴하였던 원주민들의 왕들인데, 그이유 때문에 그때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가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요단 강 동편 지역은 하나님 백성들의 전승 속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Aharoni).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정복하였던 모든 나라의 왕들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열방들과 그 왕들을 복속시킨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찬양의 기초가 되고 있다(Anderson).

성 경: [시135:12]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기업(*, 나할라) - 일반적으로 일종의 분깃(몫)으로 지파, 혹은 개인에게 배분되었던 땅, 곧 상속되는 재산 혹은 가족의 소유물을 뜻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흔히 여호와의 기업으로 묘사되고 있다(28:9). 본절에서는 '기업'이란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시적인 표현으로서 가나안 땅이 이전까지는 이방 족속들의 거주지였다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차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135:13]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주의 이름(*, 쉼카) - '쉼카'는 우선 '구원의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한다(20:1). 이런 의미에서 '쉼카'는 '계시 속에 드러난 그의 활동성(운동력)을 대변하는 상징'과 같다(Eichrodt). '쉼카'는 흔히 여호와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Johnson), 때때로 여호와 당신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68:4). 그러나 본문의 '쉼카'는 무엇보다도 문맥 속에서 그 의미가 규정되어야 한다. 본 문맥이 이방 국가들에 대한 여호와의 위대한 승리들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쉼카'는 '여호와의 명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반절의 '기념'의 히브리어는 '자케르'(*)로 '선포된 내용의 실행으로 인한 평판'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상.하반절에 나타나는 '쉼카'와 제케르'는 평행적 용어로 보아도 무난하다(출 3;15).

성 경: [시135:14]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역사 속에 나타난 위엄과 섭리]

⭕ 여호와께서...여기시리로다 - 원문에는 본 구절 앞에 '이유'를 의미하는 접속사 '키'(*)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 즉 명성이 영원할 것에 대한 근거를 암시한다. 그분의 명성이 영원할 이유는 과거에 그랬듯이 미래에도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의 의미를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신 32:36이 힌트가 되고 있다. 신 32:36은 광야를 통과하고 아모리와 바산의 왕들을 진멸하고 결국 약속의 땅 접경 지대에 다달았을 때 모세가 부른 찬양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지켜 보호하신 사실에 감격하여 지은 찬양에 나오는 가사가 바로 그 구절이라면 본절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사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로 해석하는 일은 가능하겠다. 더군다나 여기서 '판단하다'는 히브리어는 '단'(*)인데 그 뜻 중에 '옹호하다', '구원하다'등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해석이 견강 부회적(牽强附會的)인 해석이 아니라는 확증이 되어 준다.

성 경: [시135:15]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우상의 무력함]

⭕ 사람의 수공물이라 - 시편 기자는 분명히 여기 우상들을 이방 나라의 신들과 동일시 하고 있고 그 신상들을 신(神)으로 섬기는 것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잇다. 이와같이 일차적으로 시편 기자는 조잡한 형상의 우상을 비난하고 있으며, 특히 유일신론적 관점에서 우상 숭배의 무익성을 아울러 분명히 밝히고 있다(Mowinckel).

성 경: [시135:16]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우상의 무력함]

⭕ 입이 있어도...눈이 있어도 - 우상은 대체로 인간의 그것과 모양새가 동일한 입, 눈 그리고 코,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능은 전혀 살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상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을 만든 인간에게도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이러한 우상의 특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그 우상과 능력과 위엄의 여호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증하기 위함이다.

성 경: [시135:17]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우상의 무력함]

⭕ 아무...없나니 - 여기서 '아무'의 히브리어는 '예쉬'(*)로서 고유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용어가 사용되면 이 용어가 꾸미는 말은 그 의미의 강도가 세어지게 된다. '예쉬'가 꾸미는 말은 '없나니'인데 그렇다면 '전혀...없나니'로 해석하면 '예쉬'의 효과가 드러난 것이 되겠다(삼상 21:9).

성 경: [시135:18]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우상의 무력함]

⭕ 그것을 만든 자와...같으리로다 - 그 외적인 모습뿐 아니라 내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우상과 그 예배자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 숭배자의 우상 숭배 행위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얼마나 큰 신성 모독 죄를 짓는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우상 숭배자는 인간이나 짐승의 모습을 띤 조각을 만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 조각을 만들 때 나름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며 그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자기 자신이나 짐승, 즉 하나의 피조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행위이다. 우상 숭배자가 우상을 제작하는 행위가 가증스러운 이유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행위는 엄천난 신성 모독적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행위를 하는 숭배자야 말로 그 내적 상태가 우매하기 짝이 없는 우상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성 경: [시135:19]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최종적인 찬양의 권고]

⭕ 아론의 족속(*, 베트 아하론) - 직역하면 '아론의 집'으로 종교 지도자를 배출하던 아론의 가문을 가리킨다. 아론의 가문에 속한 자손들은 다양한 성소 봉사를 위하여 성별된 자들이었다(115:10-12). 그들이 성별된 것은 성소 봉사라는 목적을 위해서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를 송축하는 일이다.

성 경: [시135:20]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최종적인 찬양의 권고]

⭕ 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115:9; 118:2에 19절과 본절과 같은 유사한 명령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던 한 부류가 바로 레위 족속이다. 여기 '레위 족속'은 '베트 할레위'(*)인데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임무를 맡던 레위 가문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제사장들(혹은 아론 가문)이 성전의 모든 중요한 임무들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고 한다(Rowley). 19절과 본절은 성전의 지도자들, 지도자들의 명령을 받는 관리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드릴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는 인간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실제 살아계셔서 그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8-12절).

성 경: [시135:21]

주제1: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

주제2: [최종적인 찬양의 권고]

⭕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바루크 예화 미치온) - 직역하면 '시온으로부터 여호와를 송축하라'이다. 이것은 '시온에서 여호와께 찬양하라'는 뜻이다(Perowne). 128:5; 134:3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축복하신다고 선포하였던 반면, 본절은 시온에서 그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온이 여호와께 예배 드렸던 곳으로 그 백성들이 그를 만나는 장소였고, 그분뿐 아니라 그 백성들이 함께 거하는 장소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사 10:24). 이제 그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찬양 소리는 전세계를 향해 펴져 나갈 것이다.

성 경: [시136:1]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위대하심]

⭕ 여호와께 감사하라(*, 호두 라이화) - 이 구절은 시편의 제5권에서 뿐 아니라 역대기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송영의 한 형태이다(106:1;대상 16:34).

⭕ 그는 선하시며(*, 키 토브) - 직역하면 '선하시기 때문이다'이다. 여기서 '토브'(*)는 '도덕적, 영적 혹은 실제적 삶의 기준에 일치하는 행위를 하는 존재'를 암시한다(Hempel). 여기서 시편 기자는 먼저 하나님이 찬양받으시고 우리가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란 그가 우선 우리의 도덕적, 영적, 실제적(삶의 영역을 의미함) 표준이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 구절은 의식 용어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106:1; 107:1 ;118:1).

⭕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키 레올람 하스도) - 여기서 '하스도'(*)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또한 '레올람'(*)은 '영원히'란 뜻을 지닌다. 그리고 '키'(*)는 '이유'를 뜻하는 강조 접속사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상반절에 선포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명령의 근거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여호와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그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영원히 성실히 이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한편 '키 레올람 하스도'는 본 시편을 구성하고 있는 스물 여섯절 각각의 후렴구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같은 외형적 특성 때문에 본 시편은 '위대한 할렐'(great Hallel)로 불리운다(학자에 따라서는 120-136편 혹은 135, 136편 혹은 본 시편만을 'great Hallel'로 인정한다). '위대한 할렐'외에 '할렐 시편'도 있는데(113-118편), 전통적으로 이와 같은 시편들은 유월절을 포함한 중요한 연중 절기마다 사용되었다(Anderson). 그 절기 때 본 시편 각각의 상반절과 같은 내용의 주제가 낭송되면 그때마다 후렴구와도 같이 '키 레올람 하스도'가 제창되었다. 주제 선창은 레위인들이 하였고 후렴구 제창은 성가대원 혹은 회중 전체가 하였다.

성 경: [시136:2]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위대하심]

⭕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 엘로헤 하엘로힘) - 직역하면 '신들 중의 하나님'이다. 이 구절은 신 10:17을 회상케 한다:"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본 표현은 다신론적(多神論的) 배경 속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하나(Kraus), 현 문맥 속에서는 '진정한 신, 참신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무난하겠다(Henton Davies).

성 경: [시136:3]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위대하심]

⭕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 아도네이 하아도님) - 직역하면 '주들 중의 주'이다. 여기서 '주들'이란 땅 위의 모든 권력자들을 뜻한다. 예를 들면 왕들, 군주들, 통치자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권력자들보다 월등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본문의 강조하는 바이다. 이것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한 칭호이기도 하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칭호이기도 하다(계 19:16).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 '주'를 '온 땅의 주'로 부르고 있다(97:5).

성 경: [시136:4]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 여기서의 '기사'는 '니플라오트'(*)로서 구약 성경 전체에서 45번, 그중 시편에서만 27번 등장하는 용어인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창조사역, 그분의 심판 및 구속(26:7;71:17;75:1;78:4, 11)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본 문맥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만이 창조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계속되고 있는 주제인 바 피조 세계의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월등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증거가 된다(Anderson).

성 경: [시136:5]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 - 이는 잠 3:19 하반절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렘 10:12). 지혜(*, 테부나)는 특별히 창조 사역 가운데 드러난 신적(神的) 속성 중의 하나이다(104:24;욥 9:10). 하늘(*, 솨마임)은 '땅의 덮개' 혹은 '창공'(150:1)이라 불리우는 영역을 뜻한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 '창공'(궁창)은 금속을 부어 만든 틀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욥 37:18). 여기서 거울은 흔히 윤기나는 청동으로 만들었다(출 38:8). 또한 신 28:23에서 하늘은 '놋'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솨마임'은 하나님과 천상적 존재들의 거처를 암시하는 말이다(123:1). 한편 '솨마임'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사역을 찬양하는 인격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19:1;89:5).

성 경: [시136:6]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땅을 물 위에 펴신 이 - 여기서 '펴신'은 '로카'(*)로서 '두들기다' 혹은 '두들겨 펴다'를 뜻하는데 본절에서 땅은 마치 얇은 금속 물체를 물 위에 펼친 무엇과 같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었다(사 42:5;44:24).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따르면 땅은 동시에 산의 기초가 되기도 하는 기둥들에 의하여 지탱되면서 거대한 대양의 물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창 7:11;49:25;출 20:4;신 33:13;삼상 2:8;욥 26:10;잠 8:29;욘 2:6).

성 경: [시136:7]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큰 빛들(*, 오림 게돌림) - 구약 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인데 이것은 막연한 광선이 아니라 발광체, 즉 빛을 내는 물체를 뜻한다(창 1:14-16). 여기서는 해, 달, 별 등과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반즈(Barnes)는 다음과 같이 빛들에 대한 감흥을 적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안의 모든 아름다움, 모든 생명체인 식물계와 동물계에 드러난 미(美)와 활기, 거기에 진정한 생명력과 행복이 넘쳐나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암흑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행복의 상징, 기쁨의 근원, 제공자, 미의 계시자, 그것이 바로 빛이다. 이러한 빛의 특성을 생각하는 자로서 그 빛의 창조자를 찬양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

성 경: [시136:8]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해(*, 쉐메쉬) - 고대인들은 '쉐메쉬'를 매우 중요한 신(神)으로 간주하였는데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는 이 사실에 관한 상당히 많은 근거들이 있다(Kraus).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양신 솨마쉬는 공평과 정의의 지탱자로 간주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을 포함하고 있는 비문을 새긴 석기둥 위에는 솨마쉬가 함무라비에게 법을 준 자로 묘사되어 있다(ANET). 반면 구약에서 '쉐메쉬'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모든 경배는 창조주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장막을 펴신다는 식으로 표현한 곳이 있는데 이것은 비유법의 일종으로 해가 움직이는 길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하겠다(19:4).

성 경: [시136:9]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천지의 창조]

⭕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 여기서 '별들'에 해당하는 '코카빔'(*)은 흔히 운율를 맞추려는 주석가들의 노력 때문에 삭제된다. 창 1:16에도 '별들'은 생략되고 달만이 밤을 주관하는 발광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반즈(Barnes)의 다음과 같은 주해처럼 본문은 별들을 포함한 밤의 주관자, 달의 영향력을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됨이 마땅하다:'그 움직임에 있어서조화와 질서를 드러내는, 밤을 덜 혐오스럽게 덜 공포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밤에 의해 숨겨진 수많은 하늘의 실체들을 드러내 주는, 뿐만 아니라 밤바다를 향해하는 항해자들의 길을 밝혀주는 달과 별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게 한다.

성 경: [시136:10]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 여기서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레마케 미추라임 비브코리헴)는 직역하면 '그들의 장자 안에서 애굽을 치신 이에게'이다. 단어의 배열 구성을 보면 '애굽'에 해당하는 '미츠라임'(*)이 '장자들'을 뜻하는 '베코리헴'(*) 보다 앞에 나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치신 것은 일차적으로는 '장자들'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애굽 국가 그 자체였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신 것은 그의 백성을 향한 자비의 발로였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애굽을 치신 행위는 속박으로 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뜻한다. 애굽을 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종살이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 하나님의 사역을 출애굽이 인류 구원의 모형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Barnes).

성 경: [시136:11]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을 가리킨다(출18:1;20:2;신1:27;4:20;5:15).

성 경: [시136:12]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강한 손 - 이 표현은 신명기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신 4:34;5:15;7:19; 11:2;26:8), 문자적으로는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휘어잡거나 진압할 수 있는 손을 뜻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억눌린 백성들을 구원하고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항거할 수 없는 힘을 가리킨다.

⭕ 펴신 팔로 - 적을 치기 위하여 팔을 뻗듯이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출 6:6;신 4:34;5:15;7:19;26:8;렘 32:21).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그 능력을 사용하신 일이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인 까닭에 대해 어떤 학자는 그 구원의 지속성을 으뜸으로 내세운다. 사실 이 사건 이래로 세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중단된 적은 없었다. 이제 그 구원 사역은 주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Barnes).

성 경: [시136:13]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홍해를 가르신(*, 고제르 얌 수프) - 여기서 '얌 수프'(*)의 문자적인 뜻은 '갈대의 바다'인데 진보적인 학자들은 '갈대'에 초점을 맞추어 '얌 수프'가 바다가 아니라고 강변(强辯)한다. 그들은 아카바만이나 수에즈만에는 갈대가 없으며 따라서 '얌 수프'는 수에즈만 북방의 습기가 많은 지역 혹은 익명의 내륙지방을 가리킨다고 전제한 수 따라서 모세가 가른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습기가 많은 지역에 서식하는 갈대들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홍해 기적 사건을 부인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본문과 같은 표현은 혼돈으로 가득한 신화적 배경에 근거를 둔 비유법의 일종일 뿐이라고 덧붙인다(93:3, Deissler). 이 같은 진보주의 학자들에게 논리적 서술로 홍해 사건을 납득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 기사를 믿지 않는전제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해 사건을 증명함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리고 그들에게 제시할 만한 문법적 근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제르'(*)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고제르'의 문자적인 의미는 '두 부분으로 나누다'이다. 그런데 이 '나눔'은 결코 쪼갤 수 없는 한 물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를 중시할 때 우리는 모세가 나눈 것, 그래서 그와 그 백성이 그 두 부분 사이로 건너간 것은 '갈대들'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눌수 없는 바닷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본절에서는 바닷물을 나눈 주체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은 능히 홍해 바다를 가르실 수 있었다(출 14;21, 22).

성 경: [시136:14]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 여기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내용은, 양쪽으로 갈라져 벽처럼 서 있는 파도가 되돌아와서 덮치지 않도록 막으신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주밀(周密)하신 자비이다(출 14:19).

성 경: [시136:15]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 여기서 '엎드러뜨리신'은 '니에르'(*)로서 문자적인 뜻은 '흔들어버리다'이다. 이 단어는 그 잎사귀들을 떨구기 위하여 나무를 안고 흔들 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사 33:9). 동일한 용어가 출 14;27에서 사용되고 있다:"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흔들어 바닷속으로 넣으시니"(개역 성경에는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성 경: [시136:16]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한 주제는 구약 성경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신 8:15;렘 2:6). '인도하여'란 구체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위한 모든 물건들을 공급하신 일, 모든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신 일 그리고 주시기로 약속한 땅에 그들을 안착케 하신 일 등을 가리킨다.

성 경: [시136:17]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 본절에서부터 22절까지에는 135:10-12과 거의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나는 것은 이곳 각 절들은 후렴구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절에서 22절까지의 핵심은 강한 열방의 왕들을 죽이고 그들 소유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겨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의 증거라는 것이다.

성 경: [시136:18]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 본 구절은 17절과 평행구를 이루고 있는데, 말을 바꾸면 17절과 본절에는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복은 강조를 위함인데 강조할 만한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수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 경: [시136:19]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레시혼 멜레크 하에모리) -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본절은 서두에 전치사 '레'가 목적어 앞에 놓여 있다. 목적어 앞에 전치사가 놓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인데 그 이유는 본 시편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는 목적어가 아닌 하나님의 품성 혹은 그분의 사역을 나타내는 동사와 관련하여 전치사 '레'가 놓였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절에서는 '여호와께' 앞에, 4절에서는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앞에, 5절에서는 '하늘은 지으신 이에게' 앞에, 그리고 6,7, 10, 13, 16절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레'가 놓였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본절에서부터 감사해야 할 주체인 하나님 혹은 그분의 사역이 아닌 감사의 객체 곧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인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부각시킴으로 좀더 폭넓게 감사의 이유를 깨닫게 하고 있다.

성 경: [시136:20]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바산왕 옥을 죽이신 - 바산 왕 옥은 강대국의 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이 거론되기까지 하는 이유는, 그는 모세 영도하에 광야 여정의 막바지에 이른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한 최초의 왕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패퇴시킨 후 이스라엘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을 얻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전승은 가나안 진입 직전의 이스라엘에 패퇴한 최초의 이방 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바산 왕 옥의 이름을 기록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들의 소유 트랜스요르단을 빼앗은 사실을 중요한 기사로 기록하고 있다(참조, 민 21:33;신 3:1-6).

성 경: [시136:21]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 이것은 아모리, 바산과 같은 이방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던 땅이 이스라엘의 유산으로 돌아갔던 사실을 가리킨다(수 12장). 한 나라 백성이 차지했던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그 주권을 빼앗아야만 한다. 원래 그 땅에는 악한 이방 족속들이 살았으나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그 땅도 거룩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문맥에 입각해서 세밀하게 영적으로 주해하고 있는 학자의 글을 보자:'본절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되 그가 악한 자들을 제거하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소유지를 더 선하게 사용할 자들에게 넘겨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제 시혼, 옥의 소유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옮겨졌으며 피흘림, 야욕, 범죄, 오염 그리고 우상숭배의 터전으로 사용되었던 그 땅은 예배와 의의 실천 도장으로 바뀌어졌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악한 자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탐욕과 부정직으로 축적한 사악한 자의 부(富)가 그것을 선하게 사용할 자녀들의 손으로 옮겨지게 하신다'(Barnes). 물론 이 주석의 내용을 목전의 현실 속에서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직도 탐욕과 부정직의 사람들이 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우리는 영적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인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이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은 확장되어가고 있다. 이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의 재림 때 100%의 완전한 확장을 볼 것이다. 그때 땅에는, 악은 없고 선만 가득하게 된다. 현재적으로도 그 나라의 모습을 일부 맛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앞에 나온 한 주석가의 주석 내용을 부분적으로 성취하실 것이다.

성 경: [시136:22]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선민 구원 및 축복]

⭕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 21절의 평행구이다. 여기서 '종 이스라엘'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해지는데 본 문맥에서는 '그 차지한 땅을 자손에게 물려줄 상속자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사야서에서는 주로 이방 나라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즉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는 자로서의 종 이스라엘을 뜻한다(사 42:1-7;43:8-12;48:17-22).

성 경: [시136:23]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쉐브쉬플레누 자카르라누) - 문자적인 뜻인 '낮은 토지에 있는 우리를 기억하신'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께서 사사 시대와 같이 그 수도 적고 분명한 민족성도 형성되지 않아 국가적개념으로 볼 때 아주 유약한 상태에 있었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을 지키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Barnes).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낮은 토지에 있는'이란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시대 때에 이스라엘이 받았던 고통을 특별히 상기시키는 구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Kirkpatrick, Deissler). 어쨌든 본문은 이스라엘이 고통스럽고 유약한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던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되겠다.

성 경: [시136:24]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 건지신 - 여기서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페르케누 미차레누)은 직역하면 '대적들로부터 자유케 하신'이다. 직역을고려한 학자들은 본 구절이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 귀환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eissler 등).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방으로부터 자유케 된 경우는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 사건뿐만은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문을 하나님의 많은 구원 사역에 대한 일반적인 암시로 본다.

성 경: [시136:25]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 '모든 육체'(*, 칼 바사르)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가 의도한 대상은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온 인류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38:3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물질들을 내려 주신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땅 위에서 생명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다(마 5:45).

성 경: [시136:26]

주제1: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와 사랑]

주제2: [여호와의 인자하심]

⭕ 하늘의 하나님(*, 엘 하솨마임) - 본 구절은 시편 중 이곳에서만 등장한다. 후대에 기록된 성경들은 본 용어를 약간 변형시켜 자주 사용하고 있다(스 1:2;5:12;6:9;느 1:4;2:4;욘 1:9). 본 시편에서는 저자는 주로 하나님의 땅 위의 사역을 다루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그곳에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었다.

성 경: [시137:1]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바벨론의 여러 강변(*, 나하로트 바벨) - 문자적인 뜻은 '바벨론의 강들'이다. 바벨론에는 강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강이 바로 유프라테스 강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다마스커스와 같이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끌어온 많은 수로(水路)들이 있었고 그 수로를 통해 각 도시로 물이 공급되었는데 이 여러 수로들을 암시하기 위하여 '강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것 같다. 한편, 여기서 '바벨'은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론어 '바빌리아'에서 따온 것이다(IDB).

⭕ 거기 앉아서(*, 솽 야솽누) - 여기서 동사 '야솨브'(*)는 어는 곳에 '잠시 앉다'는 뜻도 있지만 한곳에 '정착하다', '거주하다'의 뜻도 있다. 후자의 뜻을 중시하여 본 구절이 함께 슬픔을 나누고 기도하기 위하여 포로지의 한 지역에 많은 이스라엘 포로들이 모여 정착했던 사실을 암시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Ewald, Kraus), 큰 무리가 없는 견해인 것 같다(애 2:10, 18;3:49). 그러나 바벨론 포로지에 어떤 회당이 조성되었음을 의미한다(Rowley)고까지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성 경: [시137:2]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버드나무에...수금을 걸었나니 - 여기서 '버드나무'는 '아라빔'(*)으로서 그 잎사귀가 하얗고 은빛이 나기 때문에 '오시에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가지가 가늘고 길어 잘 흔들리는 나무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고대 바벨론의 인근 국가에선 주로 야자(종려) 나무가 서식했을 뿐 버드나무가 서식하지는 않았으므로, '버드나무'가 포함된 본 구절은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깊은 슬픔을 암시하는 은유적 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Anderson).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대부분의 보수적인 학자들은 본문이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 특히 반즈(Barnes)는 고대 때 바벨론으로부터 운송되어 온 것을 증명하는, '바벨론 산'이라는 라벧이 붙은 거대한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런던의 한 공원에서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면서 위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시편에는 비유적 표현이 많다. 그러나 본 시편에 언급된 바벨론도 아닌 그 인근 국가에 문제가 되는 버드나무가 없다고 해서 성경이 묘사한 내용을 실제적 사실이 아닌 비유적 표현으로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편, '수금'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포로 백성들은 피곤을 잊고 포로 생활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것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연주하기를 중단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연주를 중단한 이유는 다음절에 나온다.

성 경: [시137:3]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노래를 청하며 - 여기서 '노래'는 '디브레 쉬르'(*)로서 문자적인 뜻은 '노래의 말들'이다. 이것은 바벨론 사람들이 단순히 음악 듣기를 요청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익숙하게 사용했던 찬양의 말들을 듣기를 원했던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바벨론 사람들은 조롱조로 '불멸의 예루살렘과 소위 전능한 하나님을 노래해 보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 같은 심정을 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포로들은 노래하기를 중단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깊은 비애와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 황폐케 한 자(*, 톨라리누) - 구약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된 이 용어의 뜻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큰소리를 지르는 자'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큰소리를 지르게 하는 자'이며 다른 하나는 '고문하는 사람' 혹은 '남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다른 사람을 유인하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종합하면 여기서 '톨라리누'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겠다. 개역 성경은 70인역과 발게이트역의 번역, '다른 사람을 유인하는 자'를 문맥에 맞추어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고간 자'로 해석한 후 좀더 강한 용어 '황폐'를 넣어 '우리를 황폐케 한 자'로 번역한 것 같다.

성 경: [시137:4]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 여기서 '이방'은 '아드마트 네카르'(*)로서 문자적인 뜻은 '낯선 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이방의 낯선 땅이란 근본적으로 불결한 땅(암 7:17), 심지어 그곳의 음식까지도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호 9:3). 바로 그같이 불결한 땅에서 더구나 불결한 민족들 앞에서 거룩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과 성전이 폐허가 됐는데 어찌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반문은 느헤미야의 경우를 연상시킨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느 2:2,3).

성 경: [시137:5]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 문맥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의미는, 주권을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는 포로 생활의 상황 속에서 기쁘게 노래하는 일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린 행위요, 그 민족의 포로 상태에 대하여 무심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라는 것이다.

⭕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티쉬카흐 예미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오른손이 잊게 될 것이다'이다. 문자적인 뜻만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다. 따라서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하는데 문맥은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암담한 포로 상태에 처하여 바벨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하거나 연주를 하는 것은 마치 매국적인 행위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문맥에 유의해 볼 때 본문은 오른손을 사용하여 어떤 악기를 연주해 본다고 해도 아름다운 연주가 나올 수 없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개역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역본들은 '오른손' 뒤에 '재주'라는 목적어를 삽입하고 있는데 문맥을 고려하고 원문을 손상치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이 같은 삽입은 간과할 만하다. 이 경우 '재주'란 악기를 다룰 때 요구되는 재능, 기술을 의미한다 하겠다.

성 경: [시137:6]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 강변의 슬픔]

⭕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임-로 아 알레 에트 에루솰람 알 로쉬 심하티) - 직역하면 '만일 내가 나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지 않는다면'이다. 여기서 '머리'는 신체의 으뜸이 되는 기관인데 '기쁨의 머리'란 기쁨 중의 으뜸이 되는 기쁨, 즉 가장 큰 기쁨을 말한다. 예루살렘을 가장 큰 기쁨에 놓는다는 것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조건들 중에서 예루살렘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저자는 이 의도를 부정적 조건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조국을 사랑하는 저자의 신앙에 입각한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 혀를 사용하지 못하는 관계로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겔 3:26). 부연하면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무익한 목적에 혀를 사용할 경우, 그의 혀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강도가 높은 결의적 고백이다.

성 경: [시137:7]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저주]

⭕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제코르 예화 립네 에돔 에트 욤 예루솰람) - 직역하면 '여호와여 예루살렘의 날에 에돔 자녀들을 기억하소서'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날을 과거의 날로 볼 것이냐 혹은 미래의 날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의견들이 있는데 이 문제의 해결은 '예루살렘의 날'을 꾸미고 있는 수식절의 시제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수식절은 '하옴림 아루 아루 아드 하이소드 바'(*)로서 그 의미는 "`멸망시켜라, 멸망시켜라, 그 기초까지 멸망시켜라'라고 하였던 자들"인데 여기서 '하였던'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본 수식절의 시제는 '과거'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날'이란 과거의 날, 곧 포로 시대를 기준으로 했을 때 과거의 날인 예루살렘 멸망의 날임이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형제의 후손들이었던(창 25:25;말 1:2-4) 에돔과 이스라엘(혹은 유다)은 상호 적대감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그 적대감은 에돔 족속이 방어력을 상실한 예루살렘 성을 마음껏 노략했을 뿐 아니라 도망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했던(사 63:1-4;애 4:21, 22;겔 25:12;35:5;옵 1:11-14) 예루살렘 멸망의 때에 절정에 달했었다. 이후 에돔은 신약에서 이두메아로 알려진, 그리고 해롯 대왕의 고향이었던 유다 남부 지방을 차지하였다. 바로 이 같은 불행의 날을 여호와께서 기억해 주실 것을 저자는 호소하고 있는데 이 호소에서 우리는 원수에 대한 저자의 적대감, 복수를 핵심으로 찾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기대 혹은 그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 애국심의 발로 등을 그 핵심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성 경: [시137:8]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저주]

⭕ 여자같은 멸망한 바벨론아(*, 바트 바벨 하쉬두다) - 문자적인 뜻은 '멸망하게 될 바벨의 딸', 말하자면 '멸망하게 될 것으로 운명지워진 바벨의 딸'(O daughter of Babylon, who art to be destroyed, KJV)이다. 이것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한 바벨론의 멸망을 암시한다. 사 47:1-9에는 바벨론의 전복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되갚으심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바벨론은 여성에 비유되곤 하는데, 특히 바벨론 국가 자체는 '어머니'에, 바벨론 국민들은 '딸'에 비유된다(45:12).

⭕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아쉬레 쉐이솰렘 라크 에트 게물레크 쉐가말트 라누) - 직역하면 '네가 우리에게 복수한 그대로 복수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이다. 동해 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출 21:23-25;레 24:17-21;신 19:21). 문자 그대로 보면 여기서 기자는 복수심에 불타는 한이 맺힌 사람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그 '복수'의 주체를 누구로 보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기자는 복수의 주체를 자신으로 보고 있지 않다. 생략되어 있지만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표현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그 주체는 시인 외의 그 누구이며 궁극적으로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본절에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환케 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다.

성 경: [시137:9]

주제1: [이스라엘의 슬픈 기도]

주제2: [바벨론에 대한 저주]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 여기서 '어린 것들'은 '올라이크'(*)로서 '젖먹이들'이다. 젖먹이들을 돌을 향해 내던지는 것과 같은 야만스러운 잔혹성은 특히 전쟁시에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이 같은 행위는 이방 나라의 역사뿐 아니라 성경 역사 속에서도 발견된다(왕하 8:12;사 13:16;호 10:14; 13:16;나 3:10). 본절 내용은 잔혹한 보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앞절의 핵심을 고려할 때 본절의 핵심은 하나님 편에서의 철저한 공의 집행 심판이 되어야 한다. 사랑 그 자체이시지만 아울러 철저하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비록 그들은 잠시나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의 잔혹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암 1, 2장). 비록 그들은 잠시나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자들이었지만 말이다.

성 경: [시138:1]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오드카 베칼 리비) - 직역하면 '내가 나의 모든 마음으로 당신에게 감사하며'이다. 직역에도 나타나듯이 원문에는 감사 대상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며 4절에 가서야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온다. 그런데 70인역(LXX)이 처음으로 '당신에게' 대신 '큐리에'(*, 주님)란 호칭을 삽입하였으며, 이후 벌게이트역(Vulagate) 그리고 몇몇 영역본들이(NIV, RSV, LB) 이것을 따랐고, 개역 성경도 이 추세를 좇아 '주께'라는 호칭을 삽입한 것 같다. 그러나 본 호칭의 부재(不在)는 도리어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 '나의 모든 마음'이란 직역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비록 그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저자의 찬양의 대상이신 그분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계심이 분명하다.

⭕ 신들 앞에서 - '신들'의 정체(正體)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루터(Luther), 칼빈(Calvin) 등이 따르고 있는 70인역의 해석으로 '천사들'로 보는 견해이다. 천사들이 하나님이 찬양하는 일에 불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 그 어느 곳에서도 천사들을 인간 찬양의 증인들 혹은 인생들과 함께 찬양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없다. (2) 갈대아역, 시리아역, 그리고 유대 랍비들뿐만 아니라 최근 해석가들이 내놓는 견해로 '왕들' 혹은 '재판관들'로 보는 견해인데 이들은 근거 구절로 82편을 제시한다. 그러나 '신들'을 '왕들' 혹은 '재판관들'로 보려면 몇 개의 논리 고리가 더 필요하다. (3) 에발트(Ewald) 등이 내놓는 견해로 '신들'을 '법궤' 혹은 '지성소'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법궤' 혹은 '지성소'는 하나님 당신의 임재를 상징하므로, 이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라는 번역이 되므로 너무 어색하다 하겠다. (4) 거짓된 이방 신들, 곧 이방 제사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경우 저자는 예배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는 이방 예배자들 앞에서 참예배의 대상, 유일한 하나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나머지 견해들보다 훨씬 타당한 견해로 보여 지는데 이는 원문의 문자적인 뜻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맥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또한 성경 다른 곳의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95:3;96:4, 5;115:3-8).

성 경: [시138:2]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주의 성전을 향하여 -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 시편 저자가 지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추측할 필요는 없다(왕상 8:48;단 6:10) 왜냐하면 여기서의 '향하여'는 '엘'(*)로서 '...앞에서'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저자는 성전 뜰에 부복하고 성전 주 건물을 향한 상태일 수 있다는 말이다.

⭕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는 영혼들에게 그가 주신 약속은 너무 귀하고 강한 소망의 근거가 되어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진실하심을 압도할 정도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존함의 우열을 비교하는 잘못된 구절로 본다(Hupfeld). 그들은 하나님의 존함이 그의 말씀보다 열등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은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의 소치라 보여진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존함과 말씀의 우열을 가리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구절일 뿐이다.

성 경: [시138:3]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내가 간구하는 날에 - 이 날은 고통의 전환점이었던 어떤 날을 가리키는데 이 날을 문자 그대로의 '특정한 날'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다. 고통당하는 개인(혹은 공동체)이 진실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17:6;사 40:29).

⭕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타르히베니 베나프쉬 오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영혼에 힘을 주어 강하게 하셨다'이다. 말하자면 힘을 주어 용기있고 담대한 자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즉, 어떤 위험을 만나도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상황은 대적으로 인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던 때라고 짐작된다.

성 경: [시138:4]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 여기에서 '땅의 열왕'은 히브리어로 '칼 말르케 아레츠'(*)로서 문자적인 뜻은 '모든 땅의 왕들'이다. 각 나라를 통치하는 왕, 그들 모두를 가리키니 결국 이 표현은 온 세상이 여호와께 감사할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68:32;96:1, 3, 7;97:1;98:4;100:1). 한편, 이 예언은 솔로몬 왕 시대에 시바 여왕을 비롯한 많은 열왕들이 그 앞에 나아와 그를 칭송하고 하나님을 높인 것에서 부분적으로 실현 되었으며(대하 9:1-8, 22-28),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세계적인 복음 전파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하겠다.

성 경: [시138:5]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야쉬루 베다르케 예화)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여호와의 길들을 노래할 것이다'이다. 앞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온 세상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능력의 행사를 기쁨으로 노래하고 축하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103:7에 의하면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의 행사(역사)'와 평행구를 이룬다.

성 경: [시138:6]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지만, 당신의 피조물의 가장 미천한 것을 돌아보며, 도우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113:4-8;사 57:15;66:2).

⭕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그 다양한 해석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1) 139:2의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깊이 이해하시오며)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비록 교만한 자가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그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멀리에 놓고 관계하신다는 의미, 곧 그와의 친밀한 교제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낮은 자'(겸손한 자)를 보시는 것처럼 그들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3) 일정의 거리를 둔 관계로서만 그들을 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4) 마치 낮은 자들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듯이 멀리서 교만한 자를 보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높이'와 '멀리서도'는 평행구로 간주되어 진다.

성 경: [시138:7]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환난 중에 - 여기서 저자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환난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 않은데 이것을 포로 시대 초기의 역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본 시편의 표제어는 이 시편의 저자가 다윗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을 통하여 기자 다윗이 밝히고 있는 바는 비록 그가 역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시고 용기와 활력을 주신다는 확신이다.

⭕ 주의 손을 펴사 - 이것은 돕거나 징벌하기 위한 여호와의 간섭을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이다(144:7). 여기서 '손'은 '야드'(*)로서 오른손, 왼손을 구별하지 않는 일반적인 의미의 손을 의미하는데 어떤 학자는 뒤이어 나오는 '오른손'과 균형을 잡는 뜻에서 본 '손'을 '왼손'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을 '왼손'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점을 고려할 때, 여기서의 '손'을 특별히 오른손 혹은 왼손으로 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 경: [시138:8]

주제1: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

주제2: [만물 위에 뛰어난 주의 위엄]

⭕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시작하신 사역은 필히 완성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기자의 소신이 엿보인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시작하신 구원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이루신다:"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마아세 야데카) - 문자적인 의미는 '당신의 손의 일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모든 행위의 과정, 혹은 당신의 백성을 언급하는 말이다(사 60:21;64:8).

⭕ 버리지 마옵소서(*, 알 테레프) - 직역하면 '잊지마소서', 혹은 '느슨치 마소서'이다. 이것은 앞서 확신있게 표현했었던 기도로 다시 관심을 옮기게 하는 표현이다. 기자는 본 시편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잊거나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느슨한 마음을 갖지 않으시기를 결론적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39:1]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감찰하시고(*, 하카르타니) - 직역하면 '당신은 나를 찾으셨다'인데 여기서 '찾으셨다'는 말은 원래 물줄기나 금속을 찾기 위하여 땅을 파거나 뚫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욥 28:3).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땅을 파헤치고 드러내듯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인생의 마음을 살펴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 아셨나이다 - 앞의 감찰의 결과로서, 자세한 조사의 결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논리를 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을 확장하기도 하고 적용하기도 한다.

성 경: [시139:2]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주께서(*, 아타) - 직역하면 '당신은'인데 주로 강조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대명사임을 고려하여 '당신만이'라고 번역하면 문맥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나게 할 것이다.

⭕ 앉고 일어섬 - 인간 삶의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이 표현은 127:2;신 6:7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나의 생각을(*, 레레이) - 이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과 17절에서만 등장한다. 특히 '레레이'(*)는 전치사 '레'(*)와 '생각'이란 뜻의 '레아'(*), 그리고 1인칭 소유격 '요드'(*)가 연결되어진 용어로서 전치사 '레'(*)의 의미를 살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하고 있는 바를 넉넉히 알고 계신다.

성 경: [시139:3]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 여기서 '길과 눕는 것'이란 인간 전체 삶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감찰하신다'에 해당하는 '자라'(*)의 문자적인 뜻은 '흩어 버리다' 혹은 타락한 벼를 바람에 쏘이듯이 '알곡을 고르기 위하여 쭉정이를 바람에 쏘이다(골라내다)'(룻 3:2;사 30:24;렘 4:11)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껍데기들, 무가치한 것들을 흩어버리고 실제적인 것, 본질적인 것만을 붙들고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의 삶의 껍질이 아무리 치장되고 복잡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 우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 즉 우리의 진심을 바라보고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시139:4]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키 에인 밀라 빌르쇼니 헨 예화 야다아타 쿨라) - 직역하면 '한마디의 말도 아직 내 혀에 없을 때에 조차, 오 !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Before a word is on my tongue you know it completely, O Lord, NIV)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omniscience)을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제적 측면에서 묘사한 표현으로서, 언급된 말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신다는 뜻이다.

성 경: [시139:5]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 여기서 '두르시며'에 해당하는 '추르'(*)의 일반적인 뜻은 '밀다', '압축하다', '누르다'이다. 이 용어는 대체적으로 성(城)의 포위, 혹은 일정 군대의 포위 혹은 포위당한 결과 피할 길이 없이 막혀버린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버린 상황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시편 저자는 이 용어을 사용하여 앞뒤, 좌우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편재성(comnipresence)을 말하고 있다.

⭕ 안수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축복(창 48:14, 17), 보호하심(출 33:22)을 뜻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행동, 사역 전체가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을 뿐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욥 13:21;33:7). 아무리 인간이 자유롭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단지 하나님의 크고 빈틈없는 계획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행 17:28).

성 경: [시139:6]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아시는 하나님]

⭕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저자는 그 지식은 자신에게 너무도 놀라운 것이라고 탄성을 지르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종류의 정서는 17, 18절; 롬 11:33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성 경: [시139:7]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신 - 본절에서 '신'(*, 루아흐)은 '(주의) 앞' (주의 면전)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권능 가운데 임재해 계신 여호와 당신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이 표현은 요나를 연상시킨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욘 1:3). 그러나 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기쁨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성 경: [시139:8]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 '아마르나 편지'(Amarna Letters)에 보면 편지 발송자가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가든지 자기의 목숨은 바로(Pharaoh)의 손에 달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 사실 때문에 위의 편지의 저자와 본 시편 기자는 단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권능이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잘 알려진 비유적 화술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Anderson). 그러나 본문을 굳이 아마르나 서신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본 구절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88:6) 혹은 언약적 사랑이(6:5;30:9) 미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는 음부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야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욥 26:6-9;잠 15:11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 경: [시139:9]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새벽 날개를 치며(*, 에사 칸페 솨하르) - 문자적인 의미는 '내가 아침 날개들을 갖는다면'(If I take the wings of the moring, KJV)이다. 여기서 '아침 날개'는 해가 동편에서 솟아오를 때 날개처럼 비쭉비쭉 하늘을 찌를듯 뻗치는 빛 줄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에 관해 말할 때 바로 이 빛 줄기를 사용하여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을 해가 뜰 때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뻗치는 빛 줄기로 보았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을 빌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줄기를 타고 신속하게 멀리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도 지키고 계실 정도로 편재(偏在)해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 시편 기자가 살던 팔레스틴 세계에 있어서 '바다'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지중해를 가리키며 이 지중해의 끝이란 지구 끝을 의미하였다. 이 지구 끝에 가되 가장 빠른 아침 빛 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가서 그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는 것이다.

성 경: [시139:10]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원래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돌보심을 뜻한다(23:3;27:11;73:24). 또한 문맥상 하나님의 편재성에 관한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성 경: [시139:11]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 '덮고'에 해당하는 '슈프'(*)의 본래 의미는 '입을 크게 벌리다', '물어 뜯다'이며, 상징적으로 '압도하다', '깨뜨리다', '덮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이 용어는 창 3:15에서는 '상하게 하다'로 번역되었고, 욥 9:17에서는 '꺾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흑암'은 역경이나 위험(138:7)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Alexander).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로 가든지(10절) 또 어떠한 역경에 처하든지(11, 12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성 경: [시139:12]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감 호쉐크 로 야흐쉬이크 미메카) - 직역하면 '심지어 흑암까지도 그에게 있어서는 흑암이 될 수 없다'이다. 인생에게 닥치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지키고 감찰하시는 눈길을 막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흑암이 우리를 어둡게 만들어도 하나님께는 그렇게 못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낙담, 이별, 고통, 손실 따위가 우리에게는 어둡게 보여도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떠한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뿐이다(롬 8:28).

성 경: [시139:13]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장부(*, 킬르요타이) - 문자적인 듯은 '신장'(콩팥)인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킬 때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성경은 인간의 지각, 감정 부분을 의미할 때는 본 용어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해부학적 뼈대 부분, 즉 골격을 의미할 때는 '뼈들'이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다. 본 문맥에서 '킬르요타이'는 감각 혹은 감정의 좌소를 의미한다(7:9;19:27;렘 11:20).

⭕ 지으시며(*, 카니타) -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창조 사역(활동)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가 두 개 있는데, 그 하나는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는 '바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나'(*)이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적게 사용되고 있다. '카나'(*)는 '소유하다', '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 파생어가 땅 위에 세워진 '막대기', '갈대', 따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세우다', '소유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창조하다'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카나'가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연관 구절 혹은 평해구로는 창 14:19;신 32:6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자의 감정의 처소 곧 열망, 열정, 애정 등의 처소를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의 눈(다른 인간)으로부터는 가리워진 그 마음의 깊은 곳까지라도 그곳을 지으신 그분께서는 면밀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테수케니) - 문자적인 뜻은 '보호하다', '짜다'(조립하다) 등이다. 전자는 밀폐된 공간에 넣듯이 보호한다는 의미를 말할 때 사용되며 후자는 여러 가지 물질, 재료를 사용하여 한 가지 물건을 지을 때, 특히 실 따위로 어떤 천을 짜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문맥에 적합하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기자를 만드셨다는 것, 특히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모습, 골격 따위를 형상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이해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의미를 볼 때 본절은 두 개의 동의적 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하겠다.

성 경: [시139:14]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 여기서 '감사하옴'은 '오드카'(*)로서 이것은 어떤 놀랍고 위대한 일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드러난 지혜, 거룩, 선하심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 나를...신묘 막측하심이라(*, 노라 오트 니플레티)- 여기서 '노라오트'(*)는 두려움 혹은 경외심을 낳기에 적합한 '경외로운 것들'을 의미한다. 또한 '니플레이티'(*)는 '구별되다'(출 8:23) 혹은 '분리되다'를 뜻한다. 이 같은 문자적인 의미들을 정리하면 본 구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나는 경이로운 것에 의하여 구별되었다.' 말하자면 기자 자신은 하나님이 피조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피조 상태가 너무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된, 각별한 경외감을 표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l am fearfully ...made, KJV, NIV). 한편 영역본 RSV의 경우는 70인역(LXX), 시리아역(Syriac) 그리고 제롬역(Jerome)을 좇아 '당신은 놀랍고 ...인 분입니다'(thou art fearful..., RSV)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시139:15]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 여기서 '은밀한 데'는 비밀스러운 곳, 인간의 눈으로 부터 숨겨진 곳인 '자궁 속'을 뜻한다.

⭕ 땅의 깊은 곳에서 - 여기서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단어는 '땅'이 아니라 '깊은 곳'이다. '깊은 곳'은 '어둡고, 모호한 곳'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관측 능력으로는 그 정확한 형태나 상태를 알수가 없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은밀한 데'와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동일한 개념이 반복되었으니 이것은 강한 강조의 의미를 나타낸다.

⭕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라캄) - 문자적인 뜻은 '수놓아진'이지만 좀더 분명한 의미는 '색으로 치장하다', '얼룩덜룩하게 하다'이다. 이것은 여러 색깔의 실들로 천을 짜거나 직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힘줄, 신경들, 혈관들, 근육 등이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직조 기술을 통하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성 경: [시139:16]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내 형질(形質)이 이루기 전에(*, 골렘) - 영역본들 중 KJV는 '내 형질이 불완전할 때'(yet being unperfect)로, NIV는 '채 형성되지 않은 나의 몸'(my unformed body)으로 번역하고 있다. '골렘'(*)은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왕하 2:8에서 '돌돌 말린 망토'를 가리킬 때 그 동사형이 사용되고 있어서 의미 추론을 가능케한다. 이러한 용례와 본 문맥에서 '골렘'을 통해 어떤 존재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할 때 여기서 '골렘'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그 모양을 동그랗게 유지한 채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태아'(보통 임신 8주까지의 아이)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겠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 어떤 형태나 모습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인 태아의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형태나 모습을 아셨다고 말함으로써 시편 기자는 인간 생명의 시작 때부터 피조물인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있다.

⭕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알 시프레카 쿨람 이카테부 야밈 유차루웰로 에하드 바헴) - 직역하면 '명령은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들 모두가 당신의 책에 기록되었다'이다. 여기서 '책'이란 원래 건축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작업의 방향과 계획 따위를 그려놓은 책을 말하지만, '그의 책' 곧 하나님의 책이라고 한 사실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자라갈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또한 '날들'이란 한사람, 곧 '시편 기자의 전 인생 기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자의 모든 형질, 형태가 아직 발달되기도 전 아직 태아 상태에 있었을 때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셔서 그의 형질과 형태에 관한 것의 수명, 그의 인생에 관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성 경: [시139:17]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주의 생각 - 여기서 '생각'이란 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그 형질이 조성되고 그 형태가 이루어지고 신비하게 영양을 공급받아 태아로 자라나 보호받고 더 성숙하여 완전한 아이로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 보배로우신지요(*, 야크루) - 문자적인 뜻은 '무겁다'이다. 말하자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인데 이 단어는 '측량치 못할 것이며'란 의미를 지닌 헬라어 '아녀세류네타'(*)와 동의어이다.

⭕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여기서 '수'란 생각들의 숫자, 즉 한 생명체가 완전한 형질로 자라기까지 동원되는 하나님의 경륜 내용의 다양성을 뜻한다. 이처럼 성도 개개인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보배롭고 다양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인자하신 섭리와 계획들을 다 인식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해 감사, 찬양하는 것뿐이다(40;5;사 55:8,9).

성 경: [시139:18]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나를 지으신 하나님]

⭕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 잠에서 깰 때마다 그렇게 자주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생각들에 다시 압도당하게 되고 또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한 새로운 경이와 찬양을 새롭게 묵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걸을 때나 잠잘 때, 낮이나 밤이나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생각의 끊임없는 깊이와 다함이 없는 충만함을 동일하게 느끼게 되노라.'

성 경: [시139:19]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에 관한 묵상으로부터 의로운 복수가 악인 위에 임하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그 내용이 급전되고 있는 부분이다. 얼핏 보기에 이 부분은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데, 그 까닭은 그 내용이 신약의 정신, 곧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타적 사상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은 63편인데 그곳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곳에서 저자 다윗의 감정은 좀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다윗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던 대적들에게 포위당하여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때 반역에 의하여 왕좌로부터 쫓겨난 그는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예상하였었다. 물론 그때에도 다윗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대적들에 대한 증오심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앞섰었다. 그러나 본 구절의 경우 악인의 전복을 위한 그의 기도는 그와 같은 개인적 위험으로부터 야기된 것이 아니라 악(惡) 자체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터져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맥상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깊은 마음과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사실, 하나님이 그 어떤 인간의 마음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는 악한 자에게로 생각이 옮겨갔고 그 악한 자의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간증적 기도,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온, 악의 멸절의 소원을 밝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성 경: [시139:20]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 여기서 악인이 멸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악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악하게 말한다는 것은 하반절에 그 의미가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칭하는 것, 곧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뜻한다(Barnes).

성 경: [시139:21]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할로 메사네이카 예화 에스나) - 여기 본절의 '할로'(*)는 외형상으로는 부정 의문사이나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내가 진실로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가 되겠다. 어떤 영역본은 '얼마나 내가 ...를 미워하는지 !'로 번역하고 있다(NEB). 한편 혹자는 여기 '미워하다'에서 어떤 교제의 단절 개념을 유추하여 본 구절을 저자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과의 교제 단절, 그들과는 분리된 자신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저자 자신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대적 관계임을 밝히는 내용이 된다. 이 같은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대적들은 또한 하나님의 대적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6:5;119:113).

⭕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 여기서 '한한다'는 것은 '비통해 한다'는 듯인데 이 '비통해 함'은 앞의 '미워함'과 무관한, 별도로 이해해야 할 용어가 아니다. '미워함' 뒤에 '비통함'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워함'과 '비통함'은 동시에 수반되는 정서라는 것이다. 주님도 이 같은 정서를 표출하신 바 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성 경: [시139:22]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타클리트 시느아 시네아팀) - 직역하면 '완벽하게 내가 저희를 미워하니'이다. 악인의 행위 그 어느 것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악에 대해서는 눈꼽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변명은 한마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 '내가 그들을 나의 원수들로 간주하나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I count them mine enemies, KJV). 이것은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나의 원수라는 뜻이다. 즉 시편 기자의 증오심은 시편 기자의 독선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본 결과로 나온 상대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말이다(Anderson).

성 경: [시139:23]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하크레니 엘) - 직역하면 '오 하나님이여 나를 면밀히 살펴보십시오'이다. 여기서 면밀히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어떤 사물을 샅샅이 조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바로 그러한 판단 앞에 과감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저자가 조금은 교만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간구는 자신의 무지나 교만한 마음의 증거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일 뿐이다. 좀더 명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본 구절 앞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기자는 자신과 악인의 전적 분리를 선포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분리가 단지 외적인 분리가 아니라 내적인 분리, 즉 전능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인정해 줄만한 분리, 그것을 시편 기자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39:24]

주제1: [인생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주제2: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

⭕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 여기서 '악한 행위'는 '데레크 오체브'(*)인데 이런 형태의 구절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 규정은 쉽지 않다. 일차적으로 '오체브'(*)는 '형상', '우상'(사 48:5)을 의미하지만, '고통'(대상 4:9;사 14:3)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어떤 학자는 '데레크 오체브'를 '우상 숭배'로 번역하며(Gesenius), 또 다른 학자는 '고통의 길'로 번역하기도 한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범죄의 길'로 번역하고 있고, 시리아역은 '거짓된 길'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역본들의 번역을 종합할 때 본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 나타난 기자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살펴보셔서 자신에게 우상 숭배에 참여한 흔적이 있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분노케 한 적이 있는지 보시라는 것이다.

⭕ 영원한 길로 - 혹자는 렘 6:16에서처럼 이를 '옛적 길'(in the ancient way)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RSV 난하주).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고 있다(in the way everlasting, KJV, NIV, RSV). 이 '영원한 길'은 창졸간에 멸망하고 마는 악인의 길(1:6)과 대조된다(잠 4:18).

성 경: [시140:1]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의 강포 탄원]

⭕ 악인(*, 아담 라) - 단수이지만 복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집합적 단수 명사이다. 이것은 다음절에 있는 복수형과 조화를 이룬다 하겠다.

⭕ 나를 건지시며(*, 할르체니) - 이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고통으로 인해 탄식하는 상황을 암시한다. 이 사실 때문에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학적 양식을 중시하는 비평가들은 본 시편을 '개인적 비탄시'(indivisual lament)로 분류하고 있다(Anderson). 그러나 본시의 전체적 분위기나 내용은 오히려 저주시에 가깝다.

⭕ 강포한 자(*, 이쉬 하마심) - 문자적인 뜻은 '폭력의 사람'(삼하 22:49)인데, 이 호칭은 반복적으로 범법을 일삼고 악행을 되풀이하는 사람, 그래서 악행이 하나의 성품처럼 되어버린 사람에게 붙여주는 별명과 같은 것이다. 다윗 시대에 그 같은 별명에 걸맞는 사람으로는 사울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 많은 학자들은 본절의 '강포한 자'를 사울 혹은 사울 일행으로 본다(Barnes).

성 경: [시140:2]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의 강포 탄원]

⭕ 저희가 중심에 해하기를 꾀하고(*, 아쉐르 하쉬부 라오트 벧레브) - 직역하면 '그 마음들 속에 해로운 악들을 상상하였던(자들)'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바로 앞절의 악인을 수식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울은 때로 겉으로는 다윗에게 친절을 베푸는 척했으나 그 근본 동기는 다윗을 해하는 데 있었다(삼상 18:17). 또한 '저희'라고 하는 복수형은 한 중심 인물인 사울 아래 여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악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방안들을 모의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칼 욤 야구루 밀르 하모트) - 어순(語順) 그대로 직역하면 '모든 날들에 그들이 전쟁을 위하여 모이며'이다. 여기서 '모든 날들'이란 '날마다', '계속적으로'를 의미하고, '모이며'는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하여 여러 날 동안 함께 체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재번역하면 '계속적으로 악인들은 전쟁할 목적으로 여러 날 동안 함께 체류하며'가 되겠다. 물론 여기서 '전쟁'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문맥상 한 대상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로 보는 것이 낫겠다.

성 경: [시140:3]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의 강포 탄원]

⭕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 여기서 뱀의 이미지가 사용된 것은 우선 피부를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뱀의 혀 때문인 것 같다(58:4;64:3). 그러나 오늘날 익히 알려진 사실대로, 뱀에게 물리는 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 뿌리(근원)에 작은 독주머니가 달려 있는 뱀의 이빨 때문이다. 뱀이 어떤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이빨 속에 나있는 작은 관을 통해 독이 그 사람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본절이 강조하는 대상은 뱀의 독과 같은, 악인의 입에서 뱉어진 악한 말이 되겠다.

성 경: [시140:4]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의 강포 탄원]

⭕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 외관상의 변화는 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 1절의 반복으로 보여지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서 '악인'은 원문상으로는 1절의 '아담 라와'(*)와는 다른 '라솨'(*)가 쓰였다. '라솨'(1:1;28:3;92:7)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란 실존적 의미가 없는,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죄란 한두 행위가 아닌 삶 그 자체가 죄인 자를 주로 가리킨다(Rengstorf).

⭕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아쉐르 하쉬부 리드호트 페아마) - 직역하면 '나의 발걸음들을 옆으로 밀치려는 목적을 가졌던 (자들)'이다. 이는 앞의 '악인'을 수식하는 구절이다. 한마디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118:13은 동일한 구절을 '나의 발걸음을 뒤집어 엎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시140:5]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의 강포 탄원]

⭕ 교만한 자(*, 게임) - '모르다', '치솟다' 등을 뜻하는 '가아'(*)로부터 유래한 '게임'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자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123:4;욥 40:11, 12;사 2:12;렘 48:29). 이들의 죄의 특징은 단순한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이들의 대인 관계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인 계획만을 실천하려고 애쓰게 된다. 시편 기자가 본절에서 '게임'을 사용한 까닭은 그 대적들이 단순히 자신에게 해로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만을 관철하려는 자들인 것을 고발하기 위함인 것 같다. 성경에서 이러한 자들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하여 덫을 놓고 그물을 치는(9:15;31:4 ;119:110) 사냥꾼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시편 기자들은 한 개인에 대한 다수의 대적들을 묘사할 때 이 같은 비유적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9:15;31:4;35:7;64:5;141:9;142:3).

성 경: [시140:6]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하였나이다 - 대적인 교만한 자들의 음모를 고발한 후에 터진 이 고백은 대적의 음모로 인한 위험 속에서 하나님에게만 피난처를 찾으려는 신앙 고백으로 볼 수도 있으나, 바로 앞절에서 살펴본 대적의 특성과 대비되는 시편 저자의 특성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여호와를 여호와로 인정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본절은 여호와에 대한 저자의 충성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주는 나의 하나님 - 이는 7절의 '주 여호와'와 평행을 이루는 표현이다. 시인인 보호를 요청한 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신 '주'요,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요 또한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셨다(VanGemeren).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와 변호를 요청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언약 관계 때문이다. 우리는 언약 관계를 상기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경우를 시편 곳곳에서 볼 수 있다(16:2;31:14;52:5; 113:5).

성 경: [시140:7]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 '주'는 만물을 주재하는 초월적인 통치자를 뜻하는데 기자는 바로 하나님의 그와 같은 속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구원의 힘'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오는 호칭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고통당하는 자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

⭕ 전쟁의 날(*, 욤 나쉐크) - 문자적인 뜻은 '무기(혹은 권투)의 날'이다. 이는 성경에 한번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으나(Kraus), 문맥을 고려하여 '전쟁의 날'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왕하 10:2;겔 39:9, 10).

⭕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 하나님은 흔히 위경(危境)에 처한 자의 머리를 방패나 투구 등으로 보호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3:3;사 59:17;엡 6:17;살전 5:8).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 곧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성 경: [시140:8]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 말하자면 시편 기자를 파멸시키려는 악인의 계획들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악하고 교만한 자의 악한 음모를 좌절시키는 분이시다. 사악한 자들이 거만한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갖 악행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만,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그들로 말미암은 혼란 상태를 오래도록 방치하지는 않으신다는 확신이 이 간구에 깔려 있다.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시인은 간구의 정도를 넘어 담대히 저주를 선포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9-11절).

⭕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 '악한 꾀를 이루다'는 '제마모 알타페크'(*)이며 '악한 계획을 증진시키다'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가 원하는 바는 개역 성경의 문자적인 뜻처럼 악한 계획이 실천에 옮겨져 성공을 거두는 것을 막아 달라는 뜻 뿐만 아니라 악한 계획 자체가 더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발전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도 아울러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시140:9]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나를 에우는 자가 그 머리를 들 때에 - 원문상 본문은 '나를 에워싼 이들의 머리'(*, 로쉬 메시바)라는 뜻인데, 70인역(LXX)과 제롬역(Jerome), 그외 대다수의 현대 주석가들을 좇아 개역 성경은 앞절 마지막 부분의 '그들이 쳐들었다'(*, 야루무, 개역 성경은 '저희가 자고할까'로 옮김)를 본 구절 앞에도 붙여서 이같이 번역한 것 같다. 기자를 둘러싼 대적들이 그 머리를 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계획한 음모를 구체적인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는 시편 기자를 대항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행위였다(5절 주석 참조).

⭕ 저희 입술의 해(害)가 저희를 덮게 하소서 - 기자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계획되었던 대적들의 악한 계교가 그들 자신에게 임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다. 그 해악을 '입술의 해'라고 한 것은 저자를 파멸키 위한 모든 계획은 모든 대적들의 입을 통해 의논되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시140:10]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뜨거운 숯불(*, 게할림 바에쉬) - 문자적인 뜻은 '불 속에 있는 숯불', 말하자면 맹렬히 타고 있는 숯불을 가리킨다(그리스 사본, 제롬역, 대부분의 영역본). 본절 상반절은 시편 기자가 소돔과 고모라 기사로부터 추론한(창 19장) 신적(神的) 징벌의 상징적 묘사로 볼 수도 있겠다.

⭕ 깊은 웅덩이(*, 마하모로트) - 구약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단어로 그 의미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BDB(Hebrew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by F. Brown, S. R. Driver and C. A. Briggs, 1907) 사전은 심마커스역, 탈굼역, 제롬역 등의 지지를 받는 '홍수'로 번역하고 있고, 우가릿역은 지하 세계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진흙탕'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다훗(Dahood)은 우가릿역과 유사하게 '진흙 투성이의 깊은 곳'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상의 번역들은 히브리어가 속한 어군(語群)인 셈족어군에서 유사 개념을 찾으려고 하는 동일 어군 중시적 접근의 소산인데 이 같은 접근보다는 성경 다른 곳에서 유사 개념을 찾는 성경 중심적 접근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본 용어가 포함된 하반절의 의미를 고려할 때 이 용어는 고라와 그 왕이 빠졌던(민 16:32), 혹은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의 추종자들이 빠져 몰사하였던(창 14:10) 구덩이를 연상케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기 위하여 본 기자가 창 14:10 혹은 민 16:3 등에서 따온 용어가 아닌가 여겨진다.

성 경: [시140:11]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악인에 대한 보응 간구]

⭕ 악담하는 자(*, 이쉬 라숀) - 문자적인 뜻은 '입술(혀)의 사람'인데 여기서는 욥 11:2에서와 같이 '말이 많은 사람'의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3절에서와 같이 '비난이나 중상 모략을 잘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조로 '라숀'(*)은 '혀를 날름거리다', '핥다', '헐뜯다'는 뜻인 '라솬'(*)에서 유래된 명사이다.

성 경: [시140:12]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과 감사]

⭕ 내가 알거니와(*, 야다티) - 화자(話者)의 확신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6절의 '내가...말하기를'이란 표현과 병행을 이룬다. 저자는 비탄을 거쳐(1-5절) 여호와의 보호하심에 관한 담대한 확신을 피력한 바 있거니와(6-8절), 이제 또다시 대적들을 향한 강조 높은 저주를 거쳐(9-11절) 여호와의 섭리에 관한 더욱 강한 확신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VanGemeren). 이 확신은 그의 백성을 위해 이전에 베푸신 여호와의 구원의 은총에 관한 지식에 근거한다(20:6;56:9).

성 경: [시140:13]

주제1: [악인의 위협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

주제2: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과 감사]

⭕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 - '주의 앞에 거한다'는 말은 주의 보호 아래 있게 된다는 뜻이고 그의 축복과 은총을 받게 된다는 뜻이며(11:7;31:20), 또한 악한 자와는 대조적으로 여호와를 예배하고 종국엔 그분의 땅에 거하게 된다는 뜻이다(11절). 문맥상 '정직한 자'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고 악인들에게 불법적인 박해를 받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므로 대인 관계가 곧바르고 성실한 자를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자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받고 그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1:1]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 속히 내게 임하소서(*, 후솨 리) - 문자적인 뜻은 '내게 오기를 서두르소서'이다(70:5). 이는 시편 기자의 조급함이나 인내치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절박성을 강조하는 표현인데 동일한 의미를 지닌 좀더 빈번하게 사용되는 표현은 '속히 나를 도우소서'이다(22:19;38:22; 40:13; 70:1; 71:12). 한편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같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 두 개의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복적 표현 또한 상황의 긴박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 경: [시141:2]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티콘 테필라티 케토레트 레파네카) - 직역하면 '나의 기도가 당신 앞에서 향기처럼 보이게 하소서'이다. '보이게 하소서'로 번역된 '티콘'(*)은 '...을 직접 향하다', '적합하다', '굳건히 서다', '설정하다' 등을 뜻한다. 또한 '향기'로 번역된 '케토레트'(*)는 번제와 같은 제사를 드릴 때 나는 향기 혹은 연기를 뜻하는데(66:15;출 25:6;30:7), 이 향기는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증표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Barnes). 이 같은 의미들을 종합할 때 여기서 시편 기자가 원하는 바는 그의 기도가 연약하고 쉽게 사라져버리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 확실하게 전달되는 그 무엇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계 5:8;8:3).

⭕ 나의 손 드는 것 -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시리아역, Ewald, Hengstenberg), 그보다는 평행법을 생각할 때 '기도'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저녁 제사 - 문자적으로 여기서 '제사'는 제단 위에서 불태워졌던, 기름과 향료를 섞은 고운 가루로 혹은 기름을 섞고 누룩을 넣지 않은 떡으로 드린 제사를 의미한다(레 2:1-11). 그러나 이 '제사'란 '향기'와 같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양을 드렸던 번제에 더해 드린 그 무엇이기도 하였다(출 29:38-42;민 28:3-8). 그렇다면 '향기'와 '고운 가루 제물'은 아침과 저녁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그럴 경우 하반절이 의미하는 바는 '나의 매일의 기도가 당신이 작정하신 매일의 희생 제사처럼 당신이 받아들이실 만한 것이 되게 하십시오'가 되겠다. 왕상 18:29, 36에서는 저녁 제사로, 왕하 3:20에서는 아침 제사로, 고운 가루로써 드리는 소제(素祭)가 언급되고 있다. '향기'가 기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상반절에서 살펴본 바 있다.

성 경: [시141:3]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 파숫군을 세우시고 - 시편 기자들과 지혜서 저자들은 혀의 남용이 초래하는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바로 그 남용으로 인한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존해달라고 저자는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 기자가 그의 대적들을 대항하여서 비열한 말을 터뜨리는 혹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려드는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 경: [시141:4]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말게 하시며 - 이는 유혹당할 만한 그 어떤 환경 속에 내버려 두시지 말아달라는, 자기 혼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말라는, 혹은 그 어떤 악한 영향력으로 인해 방황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라는 주기도문의 의미와 유사하다. 한편, 죄악에 빠지지 않기를 소원하는 저자의 기도는 본절에 와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하게 된다(Kidner). 즉, 입술뿐만 아니라(3절) 마음과 뜻 및 거기서부터 표출되어 나오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죄악으로 물들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진수(珍羞)를 먹지 말게 하소서 - 여기서 '진수'는 '만아메헴'(*)으로 '그들의 맛좋은 것들'이 그 문자적인 뜻이다. 우선 어떤 주석가들은 잠 5:3의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라는 구절을 예로 들면서 이 단어를 경건치 못한 자의 '아첨하는 말'로 해석하고자 한다(Anderson). 그러나 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너무 벗어난 해석이다. 또 다른 주석가들은 시편 기자가 이방 족속에게 포위당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고 이 단어를 그들의 '우상 숭배적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Ross). 이 해석 역시 문맥을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문자적인 의미를 중시하여 '안락하고, 호화스럽고 육감적인 의식주 생활'로 해석하는 부류의 학자들이 있는데, 이 해석이 가장 무난한 것 같다(Barnes, Perowne). 악인들이 악을 도모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육체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경이 암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빌 3:19). 또한 '진수'를 먹지 말게 해달라는 표현 앞에는 악인과 함께 악을 도모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다. 이 사실을 중시할 때 이 표현은 악인들의 악한 생활에 동참치 않게 해달라는 간구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성 경: [시141:5]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예헬르메니 차디크 헤세드) - 직역하면 '의인이 나를 치게 하소서 그것은 호의가 될 것입니다'이다. 여기 '예헬르메니'(*)의 원형 '할람'(*)은 '부수다'(삿 5;26), '두들기다'(잠 23:35), '두들겨 부수다'(74:6)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무기 따위로 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로 책망하여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와 같은 책망을 기꺼이 원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그것을 '호의'로 받겠다는 표현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책망 혹은 충고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라도 그것을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저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진실되고 바른 삶을 추구하는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를 엿보게 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잠 9:8의 일부분을 상기케 된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 동방에서는 귀하고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 최고의 예우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었다. 그런데 책망을 그와 같은 기름으로 여기겠다는 것은 자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표로 간주하겠다는 뜻이다.

⭕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 여기서 '저희'를 저자의 대적자들로 볼 경우, 본문의 의미는 '심지어 그들의 악행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계속적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가 되겠다. 그렇다면 본문은 사악한 자들을 대항하는 저자의 무기가 기도임을 강조하는 구절이 된다. 그러나 이 경우 본 구절과 본절 상.중반절 내용이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의인의 책망에 대해 논하다가 갑자기 악인을 대항한 기도를 논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희'는 '대적자들'이 아니라 상.중반절의 주체인 '의인'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이럴 경우 본문은 '의인, 그들이 불행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의 기도는 계속될 것입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본문은, 자신에게 선한 책망을 해준 의인을 위하여 그들이 재난이나 불행 가운데 있을 때 기도하겠다는 저자의 심중을 드러내는 내용이 되겠다. 4절에서 저자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악인들에 의해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지 않기를,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의 악하고 사치스러운 삶에 동참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었다. 그리고 이제 초점을 바꿔서 그 내용이 아무리 혹독하고 거칠다고 할지라도 의인이 주는 책망을 기꺼이 환영하겠으며, 심지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로운 친구가 준 상처는 대적의 입맞춤보다 훨씬 가치 있다.

성 경: [시141:6]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범죄로부터의 보호 간구]

본절 전체는 그 자체의 내용이 어려울 뿐 아니라 전후 문맥과의 연결이 다소 애매하기 때문에 그 해석이 더욱 어려우며 따라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 저희의 관장들이 바위 곁에 내려 던지웠도다 - 여기서 '저희의 관장들'에 해당하는 '쇼프테이헴'(*)의 원형 '솨파트'(*)는 '통치자', '방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악한 통지자(혹은 방백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저희'란 악한 방백들(혹은 통치자들)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또한 '내려 던지웠다'는 것은 그들에게 징벌이 가해졌다는 의미인데, 특히 바위 산 꼭대기 같은 곳에서 밀쳐 떨어뜨림으로 형(形)을 집행했던 것을 암시한다(대하 25:12). '바위 곁에' 내려 던졌다는 것은 바위가 많은 곳, 바위가 많은 길가(140:5) 혹은 길 양편에서 그 형을 집행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은 바위를 향해 내던져 죽였다는 주장이다(137:9). 한마디로 본문은 악한 방백들이 참혹한 징벌을 받았던 것을 묘사하고 있다.

⭕ 내 말이 달므로 무리가 들으리로다(*, 솽우 아마라 키 나에무) - 여기에서 접속사 '키'는 보통 '왜냐하면'으로 번역되나 문맥상 그 이하를 설명하는 관계 대명사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 번역하면 '그들이 달콤한 나의말들을 들을 것이다'이다. 여기서 '그들'이란 '방백들'이 아니라 방백들의 악한 영향을 받아 뜻없이 방황하고 이용당하던 그들의 '추종자들' 혹은 일반 '대중'을 가리킨다. 만일 시편 기자가 압살롬의 반역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혹은 그와 유사한 경우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사악한 통치자(방백들)가 극형을 받고난 후 그의 추종자들은 진정한 왕 다윗에게 돌아와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그들이 달콤한 나의 말들을 들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거역했던 통치자로부터 선포된 자비로운 면책을 감지덕지하며 받아 들이는 모습을 시사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사울의 핍박 당시 다윗이 관대함을 보였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삼상 24장), 본문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편히 가게 한후 사울 일행을 향하여 외쳤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삼상 24:8-11)이라는 말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본 시편 전체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후자의 입장을 택하고자 한다.

성 경: [시141:7]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대적의 박해로부터 보호 간구]

⭕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스러뜨림같이 - 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찾기가 앞절만큼이나 까다롭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 경향은 본절 하반절 내용과 어떻게 연관시키느냐에 따라 두 가지 견해로 압축된다. 즉, 뼈들의 분산이 (1) 쟁기질을 통하여 부스러진 흙덩이에 비유되었다고 보는 견해, (2) 쟁기질을 통하여 부드러워진 땅 위에 뿌려진 씨앗에 비유되었다고 보는 견해 등이다. 둘 중 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대하 25:12은 만 명의 에돔 사람들이 바위 꼭대기에서 밀쳐 떨어뜨림을 당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멸망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때 사용된 동사가 바로 쟁기질을 통해 흙덩어리가 부서짐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한 이곳의 동사 '보케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자보다는 전자가 멸망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풍긴다는 것이다.

⭕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 니프제루 아차메누 레피 쉐올) - 직역하면 '우리의 뼈들이 무덤의 입을 위하여 흩어졌도다'이다. '무덤의 입을 위하여 흩어졌다'는 말은 무덤에 의하여 삼키움을 다했다는 뜻인데 이는 곧 큰 멸망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26:19;겔 37장 등 참조). 이 의미는 관장들이 바위 곁에 내던져졌다는 6절의 표현과 의미상으로 연결된다고 보여진다. 즉, 본 구절은 대적들의 멸망을 암시하는 내용이 되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인칭 대명사 '우리' 혹은 '그들'로 바뀌어야 한다. 원문상 '우리'혹은 '그들' 중의 하나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다행히도 고대 역본들, 그외의 유려한 역본들(시리아역, 아랍역, 에디오피아역)이 '우리'가 아닌 '그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우리'를 '그들'로 바꿔 번역하는 일은 가능하며 따라서 난해한 본절은 기자의 대적들의 완전한 멸망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로 볼 수 있겠다(so shall their bones be..., RSV). 한편, 영역본 NIV는 본문을 직접 화법으로 처리하고 서두에 '그들이 말하기를'(They will say)이라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 경: [시141:8]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대적의 박해로부터 보호 간구]

⭕ 주 여호와여 - 원문에는 서두에 '키'(*)라는 접속사가 있다. 이 접속사는 일반적으로 접속사가 갖는 속성인, 바로 앞 내용과의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이 접속사는 4, 5절에서 언급된 내용 혹은 본 시편 전반부 전체의 내용을 종합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알 테아르 나프쉬) - 문자적인 뜻은 '나의 영혼을 쏟아 붓지 마소서'이다. 이는 나의 생명을 멸망에 넘겨주지 말라는 뜻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사 53:12에서 동일한 동사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저자는 악인의 유혹을 따르게 될 경우 그 길은 곧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성 경: [시141:9]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대적의 박해로부터 보호 간구]

⭕ 올무와...함정에서 -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개의 세력에서'(22:20), '칼 권세에서'(욥 5:20), '불꽃의 세력에서'(사 47:14).

⭕ 행악자의 함정(*, 케쇼트 포알레 아웬) - '행악자'에 해당하는 '포알레 아웬'(*)은 '파멸을 꾀하는 자'를 가리키며, '함정'인 '케쇼트'(*)는 새나 들짐승을 잡기 위하여 놓는 '덫'이나 '올무'를 뜻한다. 이외에 18:5;64:5;69:22 ;106:36;140:5 등에서도 동일한 용어가 등장한다.

성 경: [시141:10]

주제1: [시험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

주제2: [대적의 박해로부터 보호 간구]

⭕ 자기 그물에(*, 베마크모라이우) - 이곳의 대명사는 배분사(영어의 each, every 따위)의 의미를 지니는 단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재번역해 보면 '그들 각각이 그 자신의 그물에...'이다. 7:15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그물'에 해당하는 '마크모르'(*)는 구약 성경에 단 한번 등장하는데 동일 어원의 명사형은 고기잡는 그물(합 1:15), 혹은 동물을 잡기 위한 그물(사 51:20)을 의미한다.

성 경: [시142:1]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 여기 사용된 동사는 3:4의 그것과 동일하다. 혼자였지만 다윗은 큰 목소리, 여러 사람이 들을 만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것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그의 소원을 알리기 위한 간절한 외침이었다.

⭕ 간구하는도다(*, 에트하난) - 이 동사의 원형은 '하난'(*)인데 이것이 강동사로 쓰이면 '자비스러워지다'를 뜻하지만 상호 재귀형으로 쓰이면 '(인간 혹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다', '간절히 부탁하다'를 의미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상호 재귀형으로 되어 있다(30:8;왕상 8:59;욥 8:5).

성 경: [시142:2]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 '원통함'에 해당하는 '시아흐'(*)는 '불평', '묵상', '기도' 등을 뜻한다. 본문은 어떤 원한을 쏟아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묵상과 기도를 통해 축적된 생각을 큰소리로 간구할 때 쏟아놓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강조점은 하나님이나 인간에 대해 불평한다는 의미보다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깊이 묵상했다는 사실에 두어져야 한다. 충분히 염려와 근심을 했고 이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고민했던 바를 그분께 마음껏 쏟아놓는다는 것이다.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ate) 등은 개역 성경의 '원통함'을 '기도'로 번역하고 있다.

성 경: [시142:3]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 여기서 동사 '아타프'(*)는 '옷감 따위로 덮다', '어두운 것으로 뒤집어씌우다', '고통하다', '슬퍼하다', '탄식하다', '연약해지다' 등을 의미한다(77:3;107:5). 여기서의 의미는 고통 속에서 시편 기자가 활력과 생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당면한 고통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그것을 위해 노력할 마음조차 생겨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루터(Luther)는 본 구절을 '나의 영혼이 절망 가운데 있을 때'로 해석하고 있다.

⭕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 여기서 '주께서'는 '아타'(*)인데 강조 대명사인 본 용어는 저자가 절망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던 사실을 시사한다. 또한 '길'에 해당하는 '네티바'(*)는 한 사람의 인생 여정 혹은 도덕적 성향을 가리키기 위하여 은유적으로 사용되는데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가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시142:4]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 여기서 '우편'은 법정에서 증인이 서는 자리를 암시하며 시편 기자들이 구원자를 찾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는 방향이다(16:8;109:6, 31;110:5;121:5).

성 경: [시142:5]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나의 분깃 -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는 표현은 레위 족속에게 주어진 약속을 상기케 한다. 그들의 유산은 약속된 땅의 어떤 일부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신 10:9). 그래서 그들은 생계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토지의 경작이 아닌 하나님 그분 자체를 의지하였다(민 18:20). 그렇다고 해서 시편 기자가 레위 족속 출신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본문은 레위 족속의 특권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여서,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되 대적들로부터 고통받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베풀어짐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Kraus).

성 경: [시142:6]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키 달로티 메오드) - 문자적인 뜻은 '나는 매우 낮은 곳으로 가져감을 당하였나이다'이다. 즉,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되었으며 또한 물질적으로 궁핍해졌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한때는 좋은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지금은 위험하고 가난하고 모든 것이 결핍된 환경 가운데 처해 있는 사람에게 적용시킬 때 사용된다.

성 경: [시142:7]

주제1: [피난처이신 여호와]

주제2: [구원의 호소]

⭕ 옥에서 이끌어 내사 - 여기서 '옥'은 비참한 상태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거나 실제적인 옥살이 혹은 구금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레 24:12:민 15:34). 문맥이 지향하는 주도적 의미와 유사 평행구가 또 다른 시편들에 있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107:10;143:11).

성 경: [시143:1]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암담한 현실 토로]

⭕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 '진실과 의'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보여주신 그분 자신의 품성이다(89:19-37). 이것은 죄인된 우리가 응답받기 위하여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고백하고 인정해야 할 덕목이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 자신의 어떤 상황이 아니라 그분의 이 품성에 호소하는 일, 그것이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취한 것과 동일한 근거이다:"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

성 경: [시143:2]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암담한 현실 토로]

⭕ 심판을 행치 마소서(*, 알 타보 베미쉬파트) - 직역하면 '심판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이다. 시편 저자는 그의 회개를 촉구키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징계의 몽둥이 곧 대적들의 사악함을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다.

⭕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 이와 유사한 부분들에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불의함에 대한 깊은 자각을 드러낸 바 있는데(욥 42:1-3), 시편 기자도 지금 그것과 유사한 자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언약을 근거로 자신과 그의 박해자들 사이에서 판단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다(10-12절). 말하자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비추어 볼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없고 다 멸망받아 마땅하지만(14:2;130:3;욥 4:17;9:2;15:14;25:4;롬 3:20),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기준에 놓고 보았을 때에는 자신과 그의 대적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이제 그들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Anderson). 시편 기자는 자신의 불의의 대가로 자신이 고통으로부터 놓여지기를 언약 관계를 의지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진술은 다윗의 몇몇 다른 시편들에서 엿볼 수 있는 자신의 결백함에 대한 고백과 일견 배치되는 듯이 보인다(7:3-5). 그러나 결백함에 관한 고백은 신앙의 정도(正道)를 좇아 살아가던 중 악인들로부터 부당하게 핍박받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인 반면에, 본문의 경우는 자신 또한 어쩔 수 없이 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연약한 인생임을 절감한 상황에서 한 말이라는 점에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VanGemeren).

성 경: [시143:3]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암담한 현실 토로]

⭕ 원수가...(*, 키 라다프) - '왜냐하면 원수가...'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내용과의 문맥을 고려하건대, 본절은 대적들의 강포스러운 핍박 자체에 대한 고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기보다는 저자가 그토록 간절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이유가 철저한 죄의식의 자각 때문임을 밝히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즉 외적인 고통, 박해, 징벌이 그에게 밀어닥쳤을 때 시편 기자는 영의 눈을 뜨게 되었고 냉정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본 후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죄악을 깨달았으며, 그 결과 그는 깊은 죄의식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이다. 본 구절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이 범죄로 말미암은 징벌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구절, 즉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2절)에 부속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디카 라아레츠 하야티) - 여기서 동사 '디카'(*)는 그 의미가 '굴로 만들어버리다', '잘게 부수다' 등이다(72:4;89:10;욥 6:9).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의 강도는 개역 성경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보다 훨씬 세다 하겠다. 저자는 마치 땅 위에 내던져진 후 그 몸이 부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함으로써 당시 자신의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 시편 기자는 흑암, 곧 지옥과 같은 곳에 자신이 버려진 것과 같은 처참함을 느꼈다. 성경은 흔히 지옥, 스올, 지하 세계를 우울한 곳, 어두운 곳으로 묘사한다(88:6;미 7:8). 또한 본문은, 시인이 일국(一國)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전에 그 이름이 잊혀진 자와 같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졌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다윗이 만년에 직면했던 압살롬의 반란을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성 경: [시143:4]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암담한 현실 토로]

⭕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 '상하며'의 히브리어 '아타프'(*)는 '쇠약해지다', '압도당하다', '졸도할'는 뜻이다. 107:5;142:3 등에서 동일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 본문의 의미는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 놓였다는 것이다. 본 구절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유익한 주해를 적고 있다: '그의 외적인 고통을 말하고 난 후 저자는 이제 그의 영혼이 극도로 쇠약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감정은 슬픔으로 인하여 거의 졸도할 지경에 놓였던 반면, 그는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아 절망으로 추락하지 않고 재기할 의욕을 찾게 된다.' 즉, 그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과거 하나님의 행사를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5, 6절).

⭕ 참담하니이다(*, 이쉬토멤) - 문자적인 뜻은 '소스라치게 놀라다' 혹은 '마비를 일으키다'이다. 아마도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놀라움(혹은 당혹감)을 심장 마비에 비유하여 맹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my heart within me is desolate, KJV; I am paralyzed with fer, LB).

성 경: [시143:5]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주의 도우심 호소]

⭕ 옛날 - 본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개인을 위해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은 물론이고 민족 구원사도 포함된다 하겠다.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저자의 가슴에 영적 소용돌이, 격동을 일게 했고, 그 사실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과거의 그 하나님께서는 현재에도 강하고 신실하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새롭게 확신케 만들었다. '개인적 경험은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근거는 민족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역이다'(Rodd).

성 경: [시143:6]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주의 도우심 호소]

⭕ 손을 펴고 - 기도하면서 손을 뻗친다는 것은 탄원자의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을 나타낸다(28:2). 그 손은 평안한 안식을 얻기 위하여 어머니의 젖가슴 위에 뻗치는 연약한 아이의 손을 연상케 한다(Perowne).

⭕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나프쉬 케에레츠 아예파 레카 셀라) - 히브리어 단어 배열을 보면 독특하게도 '나프쉬'(*), '케에레츠 아예파'(*)라는 명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동사는 없다. 그렇다면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이 경우 두 명사 중 어느 명사에 그 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 까닭은 동사가 없는 경우 형용사의 꾸밈을 받는 명사가 강조된 것이고 그것이 주어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살펴보니 본 구절에서는 '아레츠'(*), 곧 '땅'이 형용사 '아예파'(*)의 꾸밈을 받고 있다. 여기 '아예파'(*)의 뜻은 '지친', '갈망하는' 등이다(사 32:2). 그러나 문맥상 '땅'이 주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땅, 특히 지치고 메마르며 무엇을 갈망하는 땅, 그러한 특성의 땅이 강조되고 있음을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주체(주어)는 '내 영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이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지친 상태, 영혼의 절박한 상태, 그것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 본 구절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맹렬한 열기 속에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를 요청하기 위하여 그 입을 벌린 듯 금이 가고 갈라져 있는 땅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Calvin).

성 경: [시143:7]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주의 도우심 호소]

⭕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칼타 루히) - 이 같은 표현은 (원문상의)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지만, 84:2의 '내 영혼이...쇠약함이여'와 유사하며 그 의미는 문맥상 '나의 기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나이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본 시편 하반부의 많은 표현들은 앞선 시편들로부터 인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본절의 기도 양식도 27:9;69:17 등과 비교하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성 경: [시143:8]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주의 도우심 호소]

⭕ 아침에 - 시편을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예배 공동체가 예배 의식을 진행할 때 사용한 의식서로 보는 진보주의 학자들은 성정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구원에 관한 신탁이 동틀 무렵에 선포되었던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본 구절이라고 주장한다(Ringgren). 물론 시편 다른 곳에 문자 그대로 동틀 무렵에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기도하는 대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46:5). 그러나 문맥을 볼 때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되도록 일찍 듣기를 원하는 저자의 소원을 암시하는 구절로 보는 것이 낫다. 아침에 첫광선이 비취자마자, 일찍 그는 구원의 음성을 듣고 싶어했던 것이다(46:5).

성 경: [시143:9]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원수들에 대한 심판 촉구]

⭕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 엘레카 키시티) - 직역하면 '당신에게 나 자신을 숨겼습니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다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자신을 두었다는, 혹은 하나님은 안전한 처소이니 그분께 숨은 자신은 안전하다는 의미이다(17:8;27:5;31:20).

성 경: [시143:10]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원수들에 대한 심판 촉구]

⭕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 여기서 주의 '뜻'은 히브리어로 '라촌'(*)으로 구약 성경에서 56회 정도 나오는데 인간의 감정, 태도와 연관되어 사용된 경우는 16회 정도뿐이고 40회 정도가 하나님의 의지, 은총 혹은 그를 기쁘시게 하는 무엇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무엇'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103:21). 문맥상 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무엇을 행하게 해달라는 것은 현재 처한 다급한 상황에서 그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긴 하되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을 따라 해결하는,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책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역경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 방법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 주의 신이 선하시니(*, 루하카 토바) - 직역하면 '당신의 선한 신'이다. 여기서의 '선한 신'을 수호 천사로 보는 학자들은 본절 하반절을 천사를 통해 인도함 받기 원하는 저자의 심정을 드러낸 구절로 본다(Ringgren). 그러나 구약 성경에 나타난 '루아흐'(*)에 대한 용례들을 종합 분석해 볼 때 '천사'보다는 '여화와의 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느 9:20).

⭕ 공평한 땅(*, 에레츠 미쇼르) - 문자적인 뜻은 '평평한 땅', '평지'(27:11;신 3:10;4:43;수 13:9, 16, 17, 21;왕상 20:23, 25;렘 21:13;48:8, 21;슥 4:7)이다. 이 땅은 울퉁불퉁한 그래서 자칫하면 넘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의 땅과 대비를 이룬다. 오랫동안 잠복된 위험 속에 시달려 온 저자는 이제 더 이상 위험이 없는, 마치 평평한 땅 위를 밝는 것과 같은 삶을 동경하고 그 성취를 위한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43:11]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원수들에 대한 심판 촉구]

⭕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 여기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레마안 쉼카)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말하자면 '당신의 영예를 위해서'란 듯이다(단 9:17, 18). 시편 기자를 살리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 곧 영예와 결부되어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주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기필코 구원하실 것이라는 기자의 확신을 반영한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시려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출 14:18).

성 경: [시143:12]

주제1: [구원을 바라는 참회의 기도]

주제2: [원수들에 대한 심판 촉구]

⭕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의 원수들을 끊으시고 - 본 구절을 통해 저자 다윗은 악인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취하실 방법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로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증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의 백성과 백성의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심판은 동반되기 마련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손을 펼치실 때 동시에 하나님은 대적들을 향하여 의분의 천둥을 발하시는 것이다(Calvin).

성 경: [시144:1]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 찬송]

⭕ 나의 반석 여호와 - 여기서 '반석'은 '추르'(*)로서 안전과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별칭이다(28:1;42:9).

⭕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치게 - 여기서 '싸우게'(*, 케라브)와 '치게'(*, 밀하마)는 둘 다 '전쟁'을 뜻하는 용어로, 전자는 아람어에서 온 용어로 구약 성경에서 9번 나오고 후자는 전형적인 히브리어로 319번 사용되고 있다(BDB). 동일한 의미를 나타냄에 있어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한 것은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강조하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기법의 일종이다. 본절에서 저자는 외형은 다르나 내용은 동일한 표현을 통하여 성전(聖戰)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사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특히 '손', '손가락'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손가락을 사용하여 그 줄을 당기는 활쏘기를 구체적으로 암시하는 것 같다(Barnes).

성 경: [시144:2]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 찬송]

⭕ 나를 건지는 자(*, 메 팔르티 리) - 직역하면 '나를 위한 나의 구원자'로서, 유사한 표현이 18편;삼하 22:2 등에 나타난다. 한편, 본절에서 하나님에 관한 호칭이 여럿 나오는 사실에 대하여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해하고 있다: '이것은 별 의도없이 그저 나열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든든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련의 바람이 몰아쳐 올 때 그 마음이 쉽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자꾸 넘어지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인자(仁慈)를 망각할 때 우리는 거의 낙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하나님에 관한 특성들을 나열하며 외치는 것은 굳건한 믿음을 도와준다.'

⭕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자시로다 - 여기서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 하로데트 아미 타흐타)은 직역하면 '나의 백성을 내 아래 굴복케 하시는'이다. 특히 이중에서 '굴복케 하시는'은 무력으로 폭동, 반란 따위를 진압하는 것을 뜻할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한 반역자를 중심으로 결탁되었던 반역꾼들을 저자가 다시 평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구절로 본다(Anderson). 또한 어떤 역본들(시리아역, 갈대아역, 사해 사본)은 여기 '백성'을 복수 '백성들'로 수정함으로써 본 구절을 하나님이 열방들을 다윗 왕의 통치 아래 두었던 것을 암시하는 구절로 여기기도 한다(peoples, NIV, RSV). 한편 또 다른 학자들은 본 구절을,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그러나 왕좌에 오르기 전에 말했던 것으로 간주한다(Calvin, Delitzsch).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두 번째 견해를 존중하고 구체적으로는 '백성들'이 암몬을 위시한 연합군을 가리키는 것으로(삼하 10장) 이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성 경: [시144:3]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 찬송]

⭕ 사람이 무엇이관대...저를 생각하시나이까 - 8:4;욥 7:17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본 수사학적 질문은 하나님의 위대성 및 위엄과 대비를 이루는 탄원자의 미약한 신분을 강조한다. 그리고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덕분임을 노래하는 내용이다(VanGemeren).

성 경: [시144:4]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 찬송]

⭕ 사람은 헛 것 같고(*, 아담 라헤벧 다마) - 문자적인 뜻은 '인간은 한번의 호흡(공기) 같다'이다. 인간은 지극히 유한하고 일시적인 존재라는 말인데, 39:5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그림자가 실체는 아니면 해가 뜨면 생겼다가 지면 없어져 버리듯이 인생은 단조로운 주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존재라는 것이다(Barnes). 인간 생명의 일시성에 대한 사상은 지혜 문학의 한 주제가 되고 있다(102:11;109:23;욥 8:9; 14:2;전 6:12;8:13). 앞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저자는 인간의 연약성을 내세워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시144:5]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예화 하트 솨메카) - 직역하면 '당신의 하늘들을 구부리소서'이다. 과거 모세가 시내산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여호와의 임재의 현현을 간구하는 내용이 마치 하늘이 유연한 물체여서 하나님이 그 아랫자락을 밑으로 내리고 그속에서 나오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또한 18:9, 14-16에도 나오는 이 표현은, 폭풍이 불 때 짙은 구름이 땅에 낮게 드리워져서 언덕과 산을 가림으로 인해 마치 하늘과 땅이 함께 섞인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암시하기도 하는 바, 결국 이는 그의 대적들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강림하시며(*, 테레드) - 원형은 '야레드'(*)로서 하나님의 겸비(謙卑)하심을 뜻하는 기술적 용어이다(창 11:5;18:21;출 3:8;19:11, 18;34:5;사 64:1).

⭕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 발하게 - 출 19:18;20:18에 대한 암시인 것 같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결국 본 구절은 하나님의 현현에 따르는 경외로운 현상을 암시한다.

성 경: [시144:6]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번개를 번득이사 - 이를 겨울 폭풍의 경험으로부터 따온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을 번개에 비유한 예는 두물지 않다(계 8:5;16:18). 한편 18:14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지만, 여기 사용된 동사 '번득이다'의 히브리어 '바라크'(*)는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본 시편은 다른 시편으로부터 유사하거나 동일한 구절, 단어 등을 다수 도입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저자의 독특성을 엿보게 함을 알 수 있다 하겠다(Perowne).

⭕ 흩으시며(*, 테피쳄) - 직역하면 '그것들을 흩으시며'이다.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이, 번개가 번쩍이는 것임을 고려할 때 '그것들'이란 '번개들'을 가리키는 것 같으나 '대적들'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겠다. 이 견해를 여러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Kirkpatrick, Davies, Cohen).

⭕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 '주의 살'이란 문맥상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를 가리킨다. 그리고 '파하소서'의 히브리어 '하맘'(*)은 '파괴하다', '괴롭히다', '초조하게 하다' 등의 뜻을 지닌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갑작스런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고 놀라 이리저리 우왕좌앙하는 대적들의 모습을 연상케 된다. 혼란과 공포는 흔히 성전(聖戰)에서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기도 하다(Toombs).

성 경: [시144:7]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큰 물(*, 마임 라빔) - 문자적인 뜻은 '많은 물'이며, '많은 물'이란 대적의 세력을 상징하는데 스올의 세력을 암시하기도 한다(18:4). 여기서는 전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방인의 손 - 히브리어 '네카르'(*)는 '이방의' 혹은 '낯설은'을 뜻하지만 '대적의' 혹은 '깨끗지 못한'을 암시하기도 한다(느 9:2;겔 44:9).

성 경: [시144:8]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궤사를 말하며(*, 디베르 솨우) - 직역하면 '헛된 것을 말하다'이다. 여기서 '헛된 것'이란 거짓된 것을 말한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구체적으로 이는 아람 족속이 연합군을 모으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해 온갖 거짓된 유언 비어와 모함을 퍼뜨린 사실을 가리킬 수 있다.

⭕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 대적들이 거짓되이 맹세하고 그 맹세한 바를 파기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맹세를 다짐하는 제스처였다(창 14:22;신 32:40).

성 경: [시144:9]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하나님이여(*, 엘로힘) -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엘로힘'이 사용된 것은 108편에서 1번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90-150편 가운데서는 드물게 이곳에서 사용되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 대한 호칭으로는 주로 '예화'(*)가 사용되었다. 좀 멀리 57편과 60편에서 엘로힘식 시편(Elohistic Psalms)이 나타난 바 있는데 사이가 떨어지긴 했지만 108편과 본 시편에서 다시 '엘로힘'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떤 학자들은 57편과 60편에 이어 한쌍의 엘로힘식 시편이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Anderson, Delitzsch).

⭕ 새 노래(*, 쉬르 하다쉬) - 이 노래를 종말론적 성격의 노래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기대해마지 않았던 구원에 대한 감사가 그 내용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새 노래'란 '새로 지을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33:3;96:1).

성 경: [시144:10]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 여기서 '구원'이란 '대적으로부터의 구출' 혹은 '승리'를 뜻한다(33:16;35:3). 그런데 그 승리가 '왕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볼 때 본 구절은 다윗 가문의 왕들의 통치를 통해 예증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 구하시는 - 바로 앞 구절을 중시할 때 본문은 모든 이스라엘 왕들 그리고 지도자들의 표본 중의 하나로서의 다윗을 언급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오실 다윗, 곧 메시야에 대한 암시도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 경우 본문은 18:50과 연결된다.

성 경: [시144:11]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

⭕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 7, 8절의 용어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구원을 바라는 기도는, 그 모든 응답에 대한 기대를 하나님 한 분께만 의존하는 믿음의 피력으로(9, 10절) 잠시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다시 구원의 요청은 반복되고 있다.

성 경: [시144:12]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

혹자는 본절에서부터 15절까지를 앞 부분인 1-11절의 경우와는 달리 본 시편의 저자가 창작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인즉 1-11절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중요한 동사적 연결에 있어 일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자가 다른 시편의 한 부분(조각)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원본은 다윗 혹은 솔로몬 치하의 전성기에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같은 내용의 시편 조각을 1-11절 뒤에 베껴서 부착한 이유는 포로 시대 이후 그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할 당시 충만한 보상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케 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전을 주고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망이 어디 있는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Perowne).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확실한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혹의 여지가 남는다. 따라서 그보다는 본절 이하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본 시의 결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 같으며(*, 킨티임 메구달림 비느우레헴) - 문자적인 뜻은 '그들의 젊은 시절에 다 자란 나무와 같으며'이다. 이것은 전쟁이나 위험 따위에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려 깊게 보살핌을 받고 양분을 공급받은 나무처럼, 풍족함 가운데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 전성기의 이스라엘의 위용을 암시한다.

⭕ 모퉁이 돌과 같으며 - 여기서 '모퉁이 돌'은 '자위이트'(*)로서 형태가 복수형이다. 이것은 궁전 따위의 기둥들이 여럿임을 반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잘 다듬어진 궁전 기둥들에 비유한 본문은 그 키 혹은 곧바름보다는 아름다움과 위용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본 구절은 전쟁이나 위험 따위를 겪지 않은 전성기의 이스라엘의 손상받지 않은 국가의 위용 그리고 힘 따위를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시144:13]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

⭕ 백곡(*, 미잔 엘 잔) - 직역하면 '종류로부터 종류까지'이다. 이 부사는 인간과 동물의 필요를 따라 공급할 물건 혹은 곡식의 종류가 다양함을 뜻하는데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대하 16:14에서 한번 더 등장하며 페르시아 방언에서 빌어온 용어로 생각된다(Myers).

⭕ 들에서(*, 베후초테누) - 욥 5:10;잠 8:26 등에 이어 이곳에 등장하는 본 용어를 EV, KJV 등은 '거리들'(in our streets)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본 용어는 '어느 도시의 바깥 장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역본 NIV, RSV 등의 번역처럼 '들에서'(in our fields)가 적합하다.

성 경: [시144:14]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

⭕ 무겁게 실었으며(*, 메수발림) - 본 용어에 대한 번역은 다양한데 대표적인 것으로 '짐들을 질 수 있는'(be strong to labour, KJV), '출산력이 있는'(be heavy with young, RSV) 등이 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가축을 묘사하고 있는 바로 앞절 하반절을 중시할 때 후자의 번역이 더 나을 것 같다.

⭕ 침로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에인 페레츠 우에인 요체트) - 직역하면 '파괴와 나아가는 일이 없으며'이다. 여기서 '파괴'란 대적이 성벽 따위를 꿰뚫고 들어오는 것을 가리키며, '나아가는 일'이란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은 성벽 밖에 적이 포위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언제 그 적이 성벽을 돌파하고 들어올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그리고 많은 군장을 꾸리고 소동 가운데 적을 향해 출정하는 일이 없는 충만한 평화의 시대를 자연스럽게 묘사해준다 하겠다. 이어지고 있는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라는 표현은 이 같은 해석과 조화를 이룬다.

성 경: [시144:15]

주제1: [구원을 향한 기대와 찬양]

주제2: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

⭕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 즉, 12-14절에 묘사된 상황 가운데 사는 백성은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여호와를 예배하고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14절에 자세히 언급된 번영과 평화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봉사의 결과로 나타난다. 도처에 있는 평화, 질서, 풍성함, 민족의 번영을 위한 최고의 안전 장치는 하나님 예배이다. 하나님 예배의 핵심은 단순한 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인정하고 그의 율례를 지키는 데 있다(Barnes).

성 경: [시145:1]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왕이신 -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멜레크'(*)인데, 하나님을 이러한 별칭으로 칭한 사례는 시편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5:2;68:24;84:3). 본 시편에서는 한 나라의 통치자처럼 영원히 온 세상, 온 세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본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11-13절).

⭕ 영원히 -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 그리고 다함 없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 하나님 찬양을 멈출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짐이 당연하다. 시편 여러 곳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사후(死後)에도 계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16, 49, 73편 등). 그러나 본 시편이 사후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사후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부활 사상과 직결된다. 즉, 사후의 찬양을 암시하는 시편들은 곧 구약 시대에도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존속하고 있는 한, 찬양을 끊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성 경: [시145:2]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니(애 3:23) 우리가 날마다 그분께 감사를 돌려드리는 것은 당연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인생들을 향하신 목적이 변함없이 항상 동일하시므로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는 일은 당연하다. 본절을 통해 우리는 분명한 교훈을 얻는데 그 하나는, 참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일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참성도의 고정된 목적이라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하루 세번씩 본 시편을 낭송했다고 한다(Desterley).

성 경: [시145:3]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측량치 못하리로다(*, 에인 헤케르) - '찾아낼 수 없다'가 그 문자적인 뜻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능력의 범주는 인간의 이해 밖에 있다(욥 5:9;9:10;사 40;28).

성 경: [시145:4]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 하나님의 행하신 사역은 땅 위에서 항상 찬양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19:2;사 38:19). 이제 한 세대는 당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행사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며, 이와 같은 식의 하나님 사역에 대한 지식의 전달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 찬양은 이 세상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 후 온전히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본 시편은 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찬양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상의 주해는 '대대로'(*, 도르 레도르)의 문자적인 뜻이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인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도르 레도르'의 경우 그 유사한 의미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19:4;22;31), 문자 그대로의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한다.

성 경: [시145:5]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 - 여기 '존귀', '영광', '위엄' 드은 하나님의 풍성을 나타내는 용어들이다. 이 같은 용어들이 함께 모여 있는 사실은 시편 저자의 마음이 단 한 가지 주제, 곧 하나님 찬양에 몰두해 있음을 보여준다. '존귀', '영광', '위엄'은 서로 다른 특성이기도 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속성이기도 하다.

⭕ 묵상하리이다(*, 아시하) - 문자적인 뜻은 '되풀이하다', '자세히 이야기하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부끄럼없이 공개적으로 그분의 존재, 그분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 등에 관한 믿음을 깊이 상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선포하고 자세히 말하겠다는 것이다. '아시하'는 산문에서는 주로 '묵상하다'를 뜻하고, 시적인 글에서는 대개 '자세히 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I will speak of..., KJV).

성 경: [시145:6]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 에주즈 노레오테카) - 직역하면 '공포를 자아내는 당신의 사역의 위력'이다. 한마디로 두려워 떨게 하는 주의 크신 권능의 사역이라는 뜻이다. 4-7절에서 시편 저자는 창조와 구원 역사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하여 일련의 유사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관상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본문의 용어들도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본 구절은 하나님의 사역을 목격한 이방인들의 처음 반응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다.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그분의 백성의 눈으로 볼 때는 은혜와 감격의 사역이지만 이방인이 볼 때는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 사역일 수밖에 없다(men shall speak of the might of thy terrible acts, KJV). 또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7절의 '저희'가 본절의 '사람들'을 받는 대명사인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공포는 단순한 공포 자체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5:7]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모든 인간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제케르 라브 투브카 야비우) - 문자적인 뜻은 '그의 풍성한 선하심의 기억을 말하며'이지만 '선하심의 기억을 풍성하게 말하며'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하나님의 선하심이 풍성하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게 되겠고, 후자의 뜻을 취할 경우 과거 하나님의 베푸신 선하심에 관한 기억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마치 물이 가득한 샘에서 쉴새없이 작은 물줄기가 흘러 넘쳐 나오듯이 그 선하심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지겠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견해를 취해도 원문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성 경: [시145:8]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은혜로우시며...노하기를 더디하시며 -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죄악의 세력들에게 심판의 형태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일'에 관해 언급한 후(6절), 기자는 이제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관해 증거하고자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악 자체는 철저히 미워하고 징계하시지만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분은 거역하는 자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느 9:30;롬 9: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완악성과 사악성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초래된다(삼하 3:39;욥 20:5;전 8:13;살전 5:3).

성 경: [시145:9]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토브 예화 라콜)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은 모든 것에 선하시다'이다. 몇몇 헬라어 역본들은 여기 '모든 것'을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평행구인 본절 하반절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하반절을 중시하여 '모든 피조 세계' 곧 '그가 만드신 모든 것'(103:19)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피조계 역시 규칙적이고 변동이 없는 우주 현상계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자비를 만끽한다(Eichrodt).

⭕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속에는 그분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말하는 증거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며, 우주 도처에 이것 저것들을 배열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또한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기도 하다. 그분은 연약한 자, 실수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쫓아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으로부터 떠나 방황하던 자들을 기꺼이 다시 맞으신다. 그리고 그들의 배역(背逆)을 용서하시고 슬픔의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씻어 내신다.

성 경: [시145:10]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주의 성도 - '성도'(*, 하시딤)은 언약적 충성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자이다(30:4;86:2).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돌보심의 수혜자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 이 같은 용례는 대체로 신약의 '성도'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성 경: [시145:11]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 사람은 대체로 관심있는 것, 기쁨을 느끼는 일, 바로 깨달은 바, 그리고 몹시 어려웠으나 해결을 본 난제를 이야기하기 원한다. 성도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앞에 진술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원한다. 그러한 바람은 성도의 특징 중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 나라(*, 말레쿠트) - 본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정치적인 나라를 뜻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삼상 20:31;왕상 2:12;대하 36:22 등).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나라', '통치' 혹은 '왕권'을 뜻한다. 한편, 여호와의 통치라는 개념의 더 깊은 의미는 신약에 가서 드러난다(Rad, Evans).

⭕ 주의 능 -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는데 이 능력이란 어느 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을 시사한다. 창조 사역, 섭리, 죄인들의 회심, 세계 도처에서 드러나는 말씀의 진리성, 죽어가는 자가 평화를 얻는 것 등 이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이것이 바로 '주의 능'이다(Barnes).

성 경: [시145:12]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인생(*, 베네 하아담) - 성경에서 '베네 하아담'은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뜻하고 '베네 이쉬'(*)는 '신분이 높은 자', '고상한 자'를 뜻한다(4:2;49:2;62:9;애 3:33). 따라서 '베네 하아담'과 '베네 이쉬'가 함께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땅 위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게 된다(49:2). 그런데 본절에서는 '베네 하아담'이 쓰였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본절은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신분이 낮고 비천한 자라고만 고집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 문맥은 어색해진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아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베네 하아담'은 단순히 신분이 낮고 천한 자가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는 '어린아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가시화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 나라의 임재, 곧 그 나라에 관한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의 자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나고 있다(눅 10:21).

성 경: [시145:13]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 이 와 유사한 구절이 단 4:3, 34 등에도 나오는데 아마도 다니엘 저자가 본절을 참조했던 것 같다. 주의 통치는 공간적으로 그 어느 곳에나 미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궁토록 계속된다. 공의와 자비로써 통치하는 여호와의 나라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 경: [시145:14]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의 선하심]

⭕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 '넘어지는 자'(*, 하고플림)란 '자신의 힘으로 계속 걸을 수 없는 자'를 뜻하지만 좀더 넓게는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억눌려 피곤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의미한다. 또한 '붙드시는'(*, 소메크)의 문자적인 뜻은 '지탱시켜 주는'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분임을 밝혀준다. 한편 전(前) 문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위엄, 영원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하다고 단정하기 쉽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문맥상 의의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이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연관시켜 준다는 데서 찾아진다.

⭕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 여기서 '비굴한 자'(*, 하크푸핌)의 문자적인 뜻은 '그 몸을 구부린 자'로서 인생의 시련, 의무 따위로 정신적으로 억눌려 있는 자를 암시한다. 그러한 자를 일으킨다는 본 내용은 상번절과 그 의미에 있어서 평행을 이룬다 하겠으며 평행, 곧 유사 개념의 병행은 반복, 곧 강조를 나타낸다.

성 경: [시145:15]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에네 콜 엘레카 예사베루) - '모든 것의 눈들이 당신을 기다리다'가 그 문자적인 뜻이다. 여기 '모든 것'이란 사람뿐 아니라 땅 위, 공중,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피조 생물을 가리킨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하여 애타는 눈으로 한 분 하나님을 쳐다보며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 우주가 날마다 매시간마다 매분 매초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 표현은 자연신론자들의 주장, 곧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후 하늘 나라로 올라가셔서 뒷짐지고 구경만 하신다는 주장을 일거에 일축해버린다. 일분 일초라도 그 간섭과 통치를 중단하신다면 온 우주는 엉망이 될 것이고 곧 멸망에 이를 것이다. 본절과 후속절 상반절은 104:27, 28과 유사하다.

성 경: [시145:16]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 여기서 '생물'이란 땅 위, 물속, 공중에 기식(寄食)하며 사는 모든 피조물, 곧 인간, 가축, 짐승, 물고기, 곤충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고 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생물계에 적용하시는 '보존을 위한 보편 원칙'을 의미한다. 즉, 본절은 한 생물도 궁핍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 궁핍을 느끼고 소멸되는 생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어떤 숫자의 생물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배려하신다는 뜻인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많은 생물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추위, 배고픔, 헐벗음으로 소멸되는 생물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성 경: [시145:17]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차디크 베칼 데라카) - 직역을 하면 '그의 모든 방법들에 있어서 의로우며'인데, 문맥상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하는 방식, 곧 그것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면에 있어서 공평하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103:7).

성 경: [시145:18]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진실하게(*, 베에메트) - 문자적인 뜻은 '진리 안에서'인데 이것은 위선적이지 않고 '신실함으로'란 뜻이다. 즉, 하나님을 참신으로 예배하면서 신실하게 그분의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요 4:24).

성 경: [시145:19]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경외하는 자(*, 예레아) - 한 명의 개인보다는 경건한 공동체에게 주로 적용되는 용어로서,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는 마음으로 진실한 찬양과 기도, 순종과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다(34:9).

⭕ 소원(*, 레촌) - 여기서는 하반절의 '구원'(*, 요쉬엠)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시편에서 '소원'이 '구원'을 뜻하는 곳은 여러 곳에 있다(35:3;106:4).

성 경: [시145:20]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자기를 사랑하는 자 - 문맥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가리킨다. 쿰란 사본, 70인역, 시리아역, 탈굼역 등은 '사랑하는 자'(*, 오하바)를 아예 '예레아'(*)로 바꿔 적고 있는데 굳이 이처럼 원문을 개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의미 해석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하면 되겠다.

⭕ 다 멸하시리로다 - 진리와 선(善)의 종국적인 승리는 거짓과 악(惡)의 종말을 의미한다(104:35;143:12).

성 경: [시145:21]

주제1: [하나님의 속성과 왕권에 대한 찬송]

주제2: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주의 은혜]

⭕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 '영예'에 해당하는 '테힐라트'(*)는 '찬양'을 뜻한다. 말하자면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말로서, 그분이 하신 모든 일, 그분의 품성,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6:1]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할렐루야 - 본 시를 전체 시편을 종결하는 일련의 할렐루야 시편들(146-150편)의 시작으로 보는 근거는 바로 이 용어 때문이다. 본 시편의 용어들 및 구절들은 145편의 그것들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며 104편, 118편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이와 같은 시편들은 119 및 150편 등과 함께 후대에 유대 공동체의 매일 아침 기도서의 일부로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 이 구절의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나는 개인적으로 여호와 찬양하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103:1;104:1, Anderson).

성 경: [시146:2]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아할라 예화 베하야이) - 직역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를 찬양하겠습니다'이다. 이는 곧 기자의 삶의 주요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므로 그의 찬양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겠다는 의미이다(34:1;63:4;104:33).

⭕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아잠라 렐로하 베오디) -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이다. 상반절과 외관상 유사하나 한층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곳에 담긴 의미의 핵심은 하나님을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지 않고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한 전인(全人)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이처럼 전인적으로 바치는 찬양을 귀하게 여기사 받으시는 것이다(삼상 16:7).

성 경: [시146:3]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 '방백들'에 해당하는 '네디빔'(*)은 원래 '관대한'이란 뜻으로서 '고관', '귀인', '방백'(princes, KJV) 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영향력있는 사람'(Kidner) 혹은 '탁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Anderson)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본 구절은 그 같은 '월등한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신뢰를 두지 말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본 시편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저작된 것임을 고려할 때 이 명령은 포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귀환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 특히 바벨론 왕 고레스의 덕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릇된 경향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성 경: [시146:4]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흙으로 돌아가서(*, 야슈브 레아드마토) - 직역하면 '그의 땅에 거할(돌아갈) 것이다'이다. 여기서 '그의'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1) 인간이 그것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의 '그의 땅'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것이 생겨난 곳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창 3:19). (2) '그의 땅'이란 곧 무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그 시신이 머물 장소가 바로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3) '그의'라는 표현을 한 인간이 죽은 후에 차지하게 될 유일한 소유라는 면에서 이해한다(Barnes). 왕, 귀족, 군주, 백만 장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불과 한평 남짓한 '그의' 무덤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의' 무덤은 각 개인 그들의 소유이므로 당분간은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 역시 곧 다른 사람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인데, 왜냐하면 묘지 이전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묘지 자체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지어 무덤까지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 아베두 에쉬토노타) - 직역을 하면 '그의 생각(계획)들이 사라질 것이다'이다. 아람어인 '에쉬토노타'(*)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계획, 목적들을 가리킨다. 부자나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삶의 계획, 집을 세우기 위하여 기초를 놓거나 벽돌을 쌓는 일과 같은 비교적 사소한 일 혹은 책을 저술하거나 여행하기 위해 세우는 계획들까지도 여기 포함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 목적들은 세상을 떠나는 날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눅 12:19, 20). 또한 '에쉬토노타'(*)는 과학 이론, 철학적 이론 혹은 정치적 수완과 같은 현대적 개념의 학문 이론, 정치 술책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무리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론, 술책(정책)이라고 할지라도 그 주창자가 살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서서히 타파되기 마련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세계적 지적 거장도 내일이면 그 화려한 영예의 화관을 벗게 되는 것이다. 각 영역에 있어서 쉴새없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이 세대에 있어 사상가, 석학(碩學), 정치가는 잠시 그의 사상, 이론, 정책으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서고 그 이름이 기억되지만 곧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그의 사상, 이론, 정책과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성 경: [시146:5]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 하나님의 축복은 진실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어떤 의도에서 사용되었는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러나 이 표현이 시온의 노래(the songs of Zion)를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시온의 노래들 중에서 '야곱의 하나님'은 시온에 임재하사 당신의 백성들을 돕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종종 묘사된다(46:7, 11;76:6;84:8). 물론 여기서 '야곱'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높이는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54:4;144:15).

성 경: [시146:6]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바다 - 여기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영역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바다'가 구약 성경에서는 대체로 위험스러운 어떤 요소를 암시할 때 비유적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65:7;욥 26:12 등). 그런가 하면 이방 나라들에서는 흔히 신화적 의미를 지닌 소재로 자주 사용된다(Anderson).

⭕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하쇼메르 에메트 레올람) - 본절과 후속절에는 하나님의 몇 가지 행사 및 속성을 가리키기 위한 일련의 분사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유독 본 구절의 분사 '솨마르'(*)에만 관사 '하'(*)가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하'가 포함된 구절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한 품성, 곧 하나님이 영원히 진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사실 하나님의 본 품성은 본 시편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열거되고 있는 다른 품성들은 이 품성을 근거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시146:7]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오세 미쉬파트 라아슈킴) - 직역하면 '눌린 자를 위하여 심판을 행하시다'이다. 직역상의 의미로만 볼 때는 하나님의 이 심판이 어떤 심판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본 구절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을 축복의 세 번째 내용인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심판은 세상적으로 억눌리거나 잘못된 대우를 받던 자들을 위한 하나님 편의 공정한 형의 선고 및 형의 집행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판을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만한 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심판을 행하는 것이 바로 그의 품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03:6은 이 같은 사실을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 주고 있는데 원문에 입각해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여호와는 모든 억눌린 자들을 위하여 의와 공정한 심판을 집행하신다.'

⭕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 여기서 '주린 자'란 영과 육간에 주린 자를 가리킨다(107:9). 신약 성경의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엿볼 수 있다(눅 1:53). 결국 본 구절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하면, 겸손히 참메시야를 기다리던 자들이 그의 도래로 인하여 영적인 만족을 얻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 본 구절을 부당하게 고소당하여 옥살이를 하거나 유배당한 자들과 관련시켜 볼 수도 있겠으나, 영적인 압박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의 구원을 암시한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68:6;107:10-16;사 42:7;61:1).

성 경: [시146:8]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소경의 눈을 여시며 - 본 표현은 (1)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적적 치유의 은총, (2)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이 단절되고 궁지에 처한 자에 대한 보호(신 28:29;욥 12:25;사 59:9, 10) 혹은 (3) 영적 분별력의 결핍으로부터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사 29:18;42:7, 18;43:8)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으나, 문맥상 (2)의 해석이 가장 나을 것 같다. 여호와는 전혀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에게까지도 그 손을 펼치사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다. 고대 팔레스틴 주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조건 속에 있는 자란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는 흔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로 간주되곤 하였다(출 4:11).

⭕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죠케프 케푸핌) - 문자적인 뜻은 '꿇은 자를 일으키시다'이다. 여기서 '꿇은 자'란 염려, 근심, 고통 혹은 재앙으로 인해 그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자를 가리킨다(145:14).

⭕ 의인 - 의인이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고 전심 전력하는 자를 뜻한다.

성 경: [시146:9]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객...고아...과부 -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던 대표적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Perowne). 히브리 율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방 법전들은 세 번째 부류인 '과부'의 유산 상속을 명기하고 있다고 한다. 히브리 율법만 과부의 유산 상속을 명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 이유 때문에 히브리 과부들은 그 사회에서 큰 푸대접을 받았으며 고아나 객(나그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de Vaux, Baab).

⭕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 여기서 '길'은 '계획', '음모'를 뜻하며 '굽게 하시는도다'에 해당하는 '예아웨트'(*)의 문자적인 뜻을 '구부리다', '왜곡시키다', '전복시키다' 등이다. 결국 본문은 악인의 악한 계획,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과정 안에 있는 것이며, 이는 의로운 율법의 시행에 따른 필연적 결과의 일부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Perowne).

성 경: [시146:10]

주제1: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찬양]

주제2: [영원한 공의의 통치자]

⭕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 고대에 있어서 왕이 수행한 주요 기능들 중의 하나는 정의 실현과 안녕의 유지였는데 위대한 왕이신 여호와야말로 비교할 상대가 없는 정의 실현과 축복의 수여자이시다. 이러한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특징은, 인간적 의지의 틀 안에서는 효과적으로 책임을 수행할 수 없는 모든 인간 왕들의 불완전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 할렐루야 - 본 시편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본 시편에서부터 150편까지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성 경: [시147:1]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아름답고 마땅하도다 -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도 무난할 것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을 노래하라. 그는 사랑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름답도다'(praise the Lord! For it is good to sing praises to our God;for he is gracious, and a song of praise is seemly, RSV). 개역 성경은 '키'(*)를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지 않고, '얼마나'(how)란 뜻의 의문사로 번역하였다(Praise th Lord, How good it is to sing praises to our God, how pleasant and fitting to praise him!, NIV).

성 경: [시147:2]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세우시며 - 포로 시대 이후의 성벽 재건에 관한 언급으로 보여진다(122:3 주석 참조).

⭕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유수를 계기로 세계 각처로 흩어진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를 본토로 귀환케 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보다 넓게 이해하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영적 고아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심을 뜻한다.

성 경: [시147:3]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 하나님께서 오랫동안의 포로 생활로 그 마음이 찢어지고 상하였던 자들을 고치셨었던 사실 그리고 그들을 고향으로 귀환시킴으로써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었던 것을 일차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의 표현으로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한 것이지만 유사 용례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치료자되심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인생의 영과 육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신 32:39;사 19:22;57:18;렘 30:17).

성 경: [시147:4]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 여기서 '계수하시고'는 '모네'(*)로서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수를 세다'를 뜻하기도 하지만 '지정하다' 혹은 '알다'의 뜻도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별들의 수를 일일이 지정하셨고 따라서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사 40:26).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함을 암시하는 의미가 있다(창 15:5).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 및 치유를 서술하고 난 직후 하나님의 전능성을 언급한 이유는 앞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주기 위함이다.

⭕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별들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온 세계를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해 준다. 고대 근동에서는 하늘의 별들 하나하나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별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별들의 운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암시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만 의존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자세히 알고 또한 세심하게 돌보시리라는 확신도 겸해서 심어주고 있다(요 10:3).

성 경: [시147:5]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능력이 많으시며(*, 라브 코아흐) - 문자적인 뜻은 '능력에 있어서 풍성하며'이다. 이것은 앞 문맥과 다른 내용의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즉, 별의 수효를 아시고 그 하나하나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재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리트부나토 에인 미스파르) - 문자적인 뜻은 '그 이해력(지혜)은 수를 셀 수가 없다'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무궁성을 암시하는 이 구절은 4절의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와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성 경: [시147:6]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메오데드 아나임) - 문자적인 뜻은 '고통당하는 자를 세우시고'이다.

⭕ 땅에 엎드러 뜨리시는도다 - 신적(神的) 공의의 수행을 뜻하는 시적인 묘사의 일종이다. 본절은 무한한 능력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우주 궤도 속에 있는 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인간 세계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하는 혹은 부당하게 핍박당하는 자를 옹호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워지는 통치는 인간 정부의 무질서, 부패상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성 경: [시147:7]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 1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 이유가 2-6절에 걸쳐 기록되었다면 본절의 감사 찬양의 이유는 8-11절에 기록되어 있다.

⭕ 수금 - 오늘날 '하아프'로 알려져 있는 이 악기는 당시 공적(公的) 예배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33:2;43:4;49:4;57:8;71:22).

성 경: [시147:8]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덮으시며...예비하시며...자라게 하시며 - 본 시편은 각 절이 짝수 행으로 되어 있는데 본절만이 홀수 행인 세 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70인역(LXX)은 이것을 필사자의 실수, 즉 한 행의 필사 누락으로 보고 임의로 한 행을 추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의 사용을 위하여 풀을 주시며'이다. 그러나 이 첨가는 단순히 정형(定型)이라는 틀에 맞추어 원문을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70인역의 추가 내용은 104:14에서 끌어온 것이다.

성 경: [시147:10]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말 - '전마'(戰馬)를 가리키나 '말을 잘 타는 용사'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이나 말과 같은 수단을 의뢰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고 하나님 자신만 의뢰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20:7;암 2:15).

⭕ 사람의 다리 -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민첩성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용사와 같은 인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슥 4:6).

성 경: [시147:11]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 10절의 왜곡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한 묘사의 대비로 본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19:9;25:12;85:19)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를 소망하고 믿는 자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줄 알 뿐 아니라 그 도움의 손길에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자들이다(출 14:13).

성 경: [시147:12]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 이제 다시 시편 기자는 새로운 차원의 찬양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 노래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 그리고 귀환 후에 이스라엘 민족 위에 임할 밝은 축복에 관한 전망을 포함하고 있다.

⭕ 시온 - 시온은 '예루살렘'과 평행을 이루는 용어이다(65:1).

성 경: [시147:13]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 이는 한도성의 안전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나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포로로부터의 귀환 및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언급하여 왔으므로(2절) 본 표현은 느 7:1-4에 묘사된 것과 같은 성문들의 수축에 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사 60:17, 18).

⭕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 이것은 상반절의 성문을 세우는 일과 연관성이 있다. 즉, 성문을 세워 그 성의 안정이 확보된 가운데 그 성의 주민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시147:14]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하삼 게불레크 솰롬) - 직역하면 '그가 너의 경계선을 평화롭게 하신다'이다. 여기서 경계선은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영토를 구별하는 국경선을 뜻하므로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국가의 일부 지역이 아닌 전체의 평안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솰롬'(*)은 전쟁이라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의미의 평안인 국가적 안녕 및 번영을 가리킨다.

⭕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 여기 '아름다운 밀'은 '헬레브 히팀'(*)으로 '가장 좋은 질의 밀' 혹은 '통통한 밀'을 뜻한다. 하나님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든든한 성벽과 성문으로 보호하실 뿐 아니라 양질의 밀로 풍족히 그들을 먹이신다는 것이다(132:15).

성 경: [시147:15]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로서 나름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존하시는 섭리와 간섭하심을 통해 움직여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파종 시기, 추수기, 여름과 겨울, 밤과 낮, 삶과 죽음과 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형태가 갖추어져 숙명적으로 보여지는 현상들까지도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Robinson) 여호와의 손길이 멈춰지면 일순간에 혼돈과 무질서와 파국이 초래된다.

⭕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은 연기됨이 없이 신속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33:9).

성 경: [시147:16]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 산간 고지대를 제외하면, 눈발이 날리는 혹독한 겨울이란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같은 현상의 희귀성이야말로 여호와의 능력의 예시를 좀더 인상 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 같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다(사 1:18;단 7:9).

⭕ 재같이(*, 카에페르) - 본 직유는 언어의 유희(word-play)를 위해 의도적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즉 '재같이'는 '카에페르'(*)이고 바로 앞(히브리 원문에서는 바로 뒤)에 나오는 목적어 '서리를'은 '케포르'(*)인데 음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두 단어는 뜻은 그렇지 않으나 발음상 매우 유사하다. 바로 이 같은 점, 곧 동음 이의어(同音異議語)에 가까운 이 두 단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저자는 의도적으로 두 단어를 나란히 배열한 것이다.

성 경: [시147:17]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우박을 떡 부스러기같이 뿌리시나니(*, 마쉴리크 카르호 케피팀) - 직역하면 '조각들같이 그의 얼음을 뿌리시는'이다. 여기 '조각들'이란 빵 따위의 부스러기, 작은 덩어리를 의미한다(창 18:5;삿 19:5). 본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얼음 곧 싸래기 눈, 혹은 우박 따위를 내리게 하시되 그 일을 마치 빵을 부수어 그 부스러기를 흩는 것 만큼이나 쉽게 하신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7:18]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자연과 사람을 은혜로 지배하시는 하나님]

⭕ 그 말씀을 보내사 - 성경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당신의 사자(使者)로 묘사되고 있다(107:20;사 9:8).

⭕ 바람을 불게 하신즉 - '불게 하신'의 히브리어는 '야쉐브'(*)인데 그 원형은 '나솨브'(*)이며 이곳과 '쫓다'로 번역한 창 15:11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다. '바람'에 해당하는 '루아흐'(*)은 '호흡', '영'(靈)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성 경: [시147:19]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 15-18절은 온 인류에게 그 영향력이 미치는 자연 현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였다(마 5:45). 그런데 본절은 그의 택한 백성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특권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특권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들을 세상 다른 민족들과 구별시킨다.

⭕ 율례와 규례(*, 후카 우미쉬파타) - 이것을 직역하면 '법령과 판단'인데 전자는 입법화되고 성문화되었다는 데 강조가 두어진 율법, 후자는 하나님이 옳은 것을 판단하거나 결정하시는데 기준으로 삼는 무엇이라는 데 강조가 두어진 율법을 각각 의미한다.

성 경: [시147:20]

주제1: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 하나님께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주셨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을 소유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민족에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이 민족에게 부여해준다. 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며 또한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특권이었다.

⭕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 이방 민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규례를 갖고 있으며 그 내용 중 어떤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거의 유사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 규례들은 나름대로의 유용한 목적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호와를 향한 예배와 헌신을 나타내는 방편으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와 헌신을 드릴 수 있게 하는 율법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했던 것이다.

성 경: [시148:1]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하늘에서 - 이것은 7절의 '땅에서'와 대비를 이루는 말이다. 이 두 구절은 합쳐서 세상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찬양과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는 천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어서 나오고 있는 태양, 달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성 경: [시148:2]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모든 사자(使者) - 여호와의 천사들(91:1), 곧 여호와의 보좌를 둘러서서 그의 뜻을 수행하는 모든 천상적 존재들(103:20)을 가리킨다.

⭕ 군대(*, 체바아) - 문자적인 의미는 '그의 무리들'이다. '체바아'는 '별들'을 가리킬 때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왕상 22:19의 경우와 같이 '천사들'을 뜻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본절은 동의적 평행구가 사용된 구절이며 하늘의 찬양자인 천사들을 강조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성 경: [시148:3]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해와 달 - 그 존재가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며 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하늘의 광명체들이다.

⭕ 광명한 별들(*, 칼 코크베 오르) - 문자적인 의미는 '모든 반짝이는 별들'인데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 해와 달을 제외한 하늘의 반짝이는 모든 물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해, 달 그리고 모든 별들이 찬양대로 소집되고 있는데 이것들의 웅장하고 찬란한 광채는 가히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암시적으로 증거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148:4]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하늘의 하늘(*, 쉐메 하솨마임) - 문자적인 의미는 '하늘들의 하늘들'이다. 이러한 문자적인 뜻은 후기 유대 문학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듯이 하늘에도 어떤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상을 저자가 인정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 의하면 하늘에도 세 층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은 사실이다(욥기 서론, '10.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히브리 관용구로서 '가장 높은 하늘'을 뜻하는 최상급적 표현의 일환으로 보던가(고후 12:2) 하늘의 무궁함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시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Gray, Perowne).

⭕ 하늘 위에 있는 물들 - 창 1:7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말하고 있는데 본 구절의 '물들'이 궁창 위의 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비를 듬뿍 담고 있는 구름에 대한 잘 알려진 표현 혹은 시적 묘사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Kidner).

성 경: [시148:5]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적 명령을 발하셨을 때(창 1장) 세상은 무에서 유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70인역(LXX)은 33:9의 평행구를 본절 뒤에 첨가하고 있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성 경: [시148:6]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천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 해, 달, 별과 같은 천체에 있는 태양계들은 피조된 이래로 엄청난 세월 동안 계속 그 수명이 지속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수명 역시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가 발동하면 언제라도 그것들은 소멸될 수 있다(72:5;89:2, 36, 37;119:90;벧후 3:7, 10, 13).

⭕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하크 나탄 웰로 야아보르) - 문자적인 뜻은 '그가 그들에게 한 법을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범하지 못한다'이다(Alexander). 여기서 '법'은 한계 혹은 경계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태양계 하나하나에게 고정된 법칙을 정하여 그것들이 정해진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의미이며, 강제로라도 준수할 수밖에 없는 일련의 법칙들을 주셨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만유 인력의 법칙을 두시어 그것들이 멀리 달아나 버리지 않게 하셨고 그들이 움직이는 궤도를 설정하시어 이탈하지 않게 하셨을 뿐 아니라 자전의 법칙을 주시어 스스로 돌 수 있게 하셨다. 이와 같은 법칙들은 세월이 바뀌어도 폐지되지 않는 그런 법칙들이다.

성 경: [시148:7]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용들 - 어떤 학자는 '용'에 대한 언급이 혼돈의 권세를 대항하는 이방 신들의 전투에 관한 전승을 담고 있는 창조 설화에 대한 암시라고 한다(Weiser). 그러나 문맥상 전투 모티브는 저자의 생각 속에 거의 없었거나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Rad). 따라서 본 시편에서 '용들'은 여호와의 대적들이 아니라 그의 피조물들 및 종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한데 아마도 이들은 거대한 수중 동물일 것이다(Skinner).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큰 고기, 고래, 악어, 큰 뱀 등을 뜻할 것이다(계 12:3).

⭕ 바다(*, 칼 테호모트) - 문자적인 뜻은 '모든 깊음들'이다. '모든 깊음들'에 대한 해석의 첫 번째 것은 이를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전체'로 해석하는 경향이고, 두 번째 것은 바로 앞의 '용들'과의 동의적 대구를 고려하여 큰 물고기, 고래, 뱀 따위를 제외한 '수중에 사는 모든 생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을 취하여도 무방하나 전자가 좀더 문자적 원문 해석 경향인 것 같다.

성 경: [시148:8]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불과 우박(*, 에쉬 우바라드) - 여기서 접속사 '우'(*)는 '에쉬'(*)와 '바라드'(*)의 밀접한 연관성을 암시한다. 불과 우박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듯하나 우박이 내릴 때 가끔 번개가 동반되는 현상을 고려할 때 이 두 단어는 '우박이 내리면서 번개가 치는 현상'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박이 내리면서 번개가 치는 자연 현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쉽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자연 현상의 찬양 개념을 잘못 알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원래 피조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두려움을 갖게 하는 현상, 곧 우박이 내리며 번개가 치는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은 자연의 찬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 눈과 안개(*, 쉘레그 우키토르) -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두 낱말의 상호 연관성을 암시하는 접속사 '우'(*)가 있다. '눈'의 의미는 확정적이니 '눈과 서리'(snow and frost, RSV)로 번역하든가 '눈과 구름'(snow and clouds, NIV)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 서리가 내리는 추운 겨울에 눈이 내리며, 또한 구름이 모이면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의 '안개'라는 번역은 다소 애매한 것 같다.

⭕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며(*, 루아흐 세아라 오사 데바로) - 직역하면 '그의 말씀을 성취하는 폭풍'이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폭풍도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잘 순종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한다. 맹렬하고 무법한 것 같고 포악한 것 같아 보이나 폭풍우는 정확히 하나님의 계획과 그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행동 자체가 하나님의 위엄, 그의 탁월하신 능력을 선언하는 찬양 행위인 것이다(89:9;107:29).

성 경: [시148:9]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산들과 모든 작은 산 - 단지 산악 지대뿐만 아니라 육지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 같다(Anderson).

⭕ 과목과 모든 백향목 - 전자는 과실을 맺는 유실수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가장 이름이 나 있는 나무로서 유실수들을 제외한 모든 나무들을 대표하는 의미를 지닌 것 같다(Barnes).

성 경: [시148:10]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짐승과 모든 가축(*, 하하야 웨칼 베헤마) - '하하야'(*)는 숲속을 어슬렁거리는 들짐승을 뜻하고, '베헤마'(*)는 인간의 필요를 위하여 사육되고 있는 가축을 뜻한다. '과목과 모든 백향목'에 모든 나무들이 포함되듯이 '짐승과 모든 가축'에는 들짐승 및 모든 가축이 포함된다.

⭕ 기는 것과 나는 새 - '과목과 모든 백향목', '짐승과 모든 가축'이 한 그룹으로 짜여진 이유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한 그룹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땅 위 높은 곳을 날으는 모든 날짐승 그리고 땅 위 높은 곳을 날으는 모든 날짐승 그리고 땅 위에 기는 모든 생물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기는 것'에는 생쥐, 도마뱀, 게와 같은 네 발 달린 것 그리고 뱀과 같이 다리가 없이 배로 밀고 다니는 것 등이 다 포함된다(Gesenius). 천박한 환경 그리고 열등한 방식으로 살고 있는 이와 같은 생물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의 일선으로 소집되고 있다. 그들이 피조된 목적을 이룸으로써 가장 고등하게 피조된 존재들과 함께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 능력 그리고 선하심을 선포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만약 가장 고등하게 피조되었다는 우리가 우리의 피조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는 것과 나는 새'만도 못한 존재임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성 경: [시148:11]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 - 피조물들에 대한 목록은 본절과 12절에 와서 드디어 모든 피조물의 제왕과 같다고 볼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 가운데 본 구절은 먼저 통치자와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분류하고 있다.

⭕ 방백과 땅의 모든 사사(*, 사림 웨칼 쇼프테 아레츠) - 직역하면 '왕자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다. 땅 위 인간들 중에 법을 집행하는 권위를 가진, 혹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높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유의해 볼 단어는 '땅의'이다. 비록 그들이 법을 집행하는 권위를 가졌다고 해도 그들 역시 땅 위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피조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큰 권위를 가졌다고 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하는 구절이다.

성 경: [시148:12]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지상에 대한 찬양 촉구]

⭕ 청년 남자와 처녀 - 이제 나름대로의 성품을 쌓아가며 경험쌓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인생의 동틀녁을 맞이하고 있는 이들은 열정, 유연성, 명랑함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살되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해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며 바른 소망에 따른 적극성, 긍정성을 동반한 음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 봉사해야 할 것이다.

⭕ 노인과 아이들 - '청년 남자와 처녀'와 더불어 남녀 노소(男女老少)를 총칭하고 있다. 인생을 정리하는 입장에 있는 '노인' 그리고 인생을 시작하는 입장에 있는 '아이들' 그들 역시 그 연령에 맞는 열정과 경륜을 따라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를 찬양해야 한다.

성 경: [시148:13]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찬양의 이유]

⭕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 하나님 그분 자신 및 그 역사(役事)는 땅 위의 무엇과 견줄 바가 없이 탁월한데 그것은 그만이 창조적 명령을 발하시고(사 44:24) 그만이 피조 세계를 지탱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 천지에 뛰어나심(*, 호도 알 에레츠 웨솨마임) - 직역하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시다'이다. 하나님은 3-12절에 언급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며 그것들 모두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땅과 하늘'은 창 2:4에도 나오는데 이 용어 자체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성 경: [시148:14]

주제1: [창조에 대한 기쁨의 노래]

주제2: [찬양의 이유]

⭕ 그 백성의 뿔 - 여기서 '뿔'을 '다윗 왕가'로 볼 경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다윗 왕가를 세우셨기 때문이 된다. 반면, 이 '뿔'을 '힘', '용기'로 볼 경우(75:4)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 된다. 문맥이 시대나 어떤 사건을 초월한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 찬양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뿔'을 '다윗 왕가'나 '힘', '용기'로 보는 해석이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원시(遠視)적 안목으로 보면, 결국 하나님이 피조물의 찬양을 받으시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문임을 고려할 때 '뿔'을 '다윗 왕가'로 번역하는 해석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경우 본 시편은 장차 오실 왕된신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시149:1]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

⭕ 새 노래 - 본 시편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그 저작 시기는 포로 귀환 이후 성전을 재건하고 헌당(獻堂)한 시기 정도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 '새 노래'란 새로운 시대의 소망과 기쁨을 담은 노래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 성도(*, 하시딤) - 이를 마카비 시대 역사속에 나타나는 하시디안과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마카비전서 2:42). 여기서는 단지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을 의미할 뿐이다. 5, 9절에서 연거푸 '하시딤'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본 시편의 특징적 용어인 것 같다(Perowne).

성 경: [시149:2]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

⭕ 저희의 왕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 당시는 아직 다윗 왕가의 왕위에 앉은 자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때문에(68:24) 이같이 일컫고 있다. 이 왕은 이스라엘을 이방 통치 아래 남겨 두지 않으실 왕이며 그들의 목에 있는 압제의 모든 멍에를 파괴하실 왕이시다.

성 경: [시149:3]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

⭕ 춤 추며 - 이것은 큰 즐거움을 나타내는 표현임과 아울러 당시에 일반화되어 있던 예식 행위이기도 했다(30:11, Alexander, Anderson).

성 경: [시149:4]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

⭕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 이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본토로 귀환시키심으로 밝히 드러났다(사 54:7, 8).

⭕ 겸손한 자 - 상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할 때 이는 특정한 어떤 소수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오랜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겸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합당하겠다.

성 경: [시149:5]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

⭕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 심지어 쉬기 위하여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인해 도래할 승리의 날을 고대하며 기쁨의 새 노래를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시149:6]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尊榮)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 전반절은 '롬모트 엘 빅로남'(*)으로서 직역하면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을 높임이'이다. 특히 여기서 '그들의 입에는'으로 번역한 '빅로남'은 그들의 '목구멍에는'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이 구절은 목청을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후반절은 '헤레브 피피오트 베야담'(*)으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은데 이것은 잘 드는 칼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사령관으로 모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전투란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손에 든 칼로는 적(敵)을 섬멸하는 것이었다(수 6장). 그들이 소수의 병력으로써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존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끌어 오시면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전투에 임하는 그 백성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사 소위 성전(聖戰)을 승리로 이끄셨다(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참조하라). 한편 본 시편 기자는 이러한 전쟁 모티브를 다시 회상시킴으로써 포로 귀환 이후 이스라엘이 그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다시 승리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해주고 있다:"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느 4:17).

성 경: [시149:7]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열방에 보수(報讐)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 이것은 베벧론 포로 시대 당시 그 성을 파괴하고 늑탈하였던 바벨론을 위시한 이방 세력들에 대한 징벌을 암시하는 말이다. 6절과 연결시켜 생각할 때 그 징벌은 이스라엘의 칼에 의해 되어진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군대를 징벌한 역사는 없었던 사실을 기억할 때 이 징벌이란 또 다른 민족을 통한 바벨론 심판을, 더 나아가서는 세상 끝날에 있게 될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징벌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성 경: [시149:8]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貴人)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 이것은 바로 앞절의 의미인 바벨론을 위시한 이방 열방에 대한 심판의 구체적 실행에 관한 대표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전쟁에 패한 국가는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로로 잡혀가곤 하였는데 정복 국가는 그들의 철저한 승리,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들을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갔다(사 45:14, Barnes).

성 경: [시149:9]

주제1: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찬양]

주제2: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라이소트 바헴 미쉬파트 카투브) - 직역하면 '기록된 심판을 그들에게 집행할지로다'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본 구절은 율법에 기록된 내용에 따른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구체적으로는, 미래의 모든 의로운 복수 행위의 전형으로서의 가나안인 추방(Stier) 혹은 즘더 포괄적인 의미로 신 32:40-43에 기록된 율법을 위반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러나 여기 '기록한 판단'을 성경의 특정한 구절을 나타낸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각 사람 혹은 각 민족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억하시는 소위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무난하겠다(Alexander). 아마도 본 구절의 '심판'이란 확정된, 고정된 무엇으로서의 심판, 말하자면 그 영원성, 불변성을 암시하기 위하여 문서에 기록하도록 그래서 확정된 무엇으로 알리기를 원하는 심판에 강조가 두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 65:6이 말하는 바와 일치한다:"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지라".

⭕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하다르 후 레칼 하시다) - 문자적인 의미는 '이것은 그가 사랑하는 모든 자를 위한 영예이다'(This is glory for all his faithful ones, RSV)이다. 여기서 '영예'란 일차적으로 앞 구절들에 묘사된 바, 대적들에 대한 심판을 통해 나타난 영예이다.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세력들에 대한 심판과 같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은 결국 택한 백성을 영예롭게 하시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VanGemeren).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총과 사랑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 경: [시150:1]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 그 성소에서(*, 베카드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성소에서'이다. 이것은 땅위의 성소 혹은 하늘에 있는 성소를(11:4 참조)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하반절에 '그 권능의 궁창에서'라는 말이 나오므로, 이 '성소'란 땅위의 '성소'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단지 '성전'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모든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도 무난하겠다. 그렇다면 본절은 땅과 하늘을 포함한 모든 곳으로부터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다.

성 경: [시150:2]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 그의 능하신 행동 -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구원 및 보존의 섭리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전개 과정 주에 보여주신 크신 권능들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표현이라 하겠다(106:2;145:11,12).

성 경: [시150:3]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본절에서부터 5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것인지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관악기(나팔)와 현악기(비파, 수금) 그리고 타악기(소고)등이 총동원되었는데, 이는 단순히 악기들을 총동원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암시적인 뜻을 나타낸다 하겠다(Kidner).

성 경: [시150:4]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 소고 - 손으로 쳐서 소리를 내었던 이 악기는 흔히 춤을 출 때 동반되었던 악기로 알려져 있다(149:3;출 15:20;삿 11:34;삼상 18:6).

⭕ 현악(*, 미님) - 구약 성경에서 1회만 등장하는 이 용어는 시리아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일반적인 의미의 줄이 달린 악기를 의미한다(Anderson).

⭕ 퉁소(*, 우가브) - '목동의 피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이 악기는 세속적 음악 활동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창 4:21;욥 21:12;30:31)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종교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고 있다. 사실 심령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면 그 어떤 세속적인 악기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시150:5]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 큰 소리 나는 제금...높은 소리 나는 제금 - 전자는 '칠르첼레 솨마'(*), 후자는 '칠르첼레 테루아'(*)이다. 전자는 작지만 맑고 높은 음이 나는 심벌즈이고, 후자는 낮고 큰 소리가 나는 심벌즈를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재번역하면 전자는 '맑은 소리 나는 제금', 후자는 '큰 소리 나는 제금'이 되겠다.

성 경: [시150:6]

주제1: [시공(時空)을 초월한 찬양의 음성]

주제2: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콜 하느솨마 테할렐 야흐) - 직역하면 '호흡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앞서 언급된 것과 같은 악기들을 연주함은 물론이고 온갖 기예(技藝)를 동원한 음성으로써 또한 지정의(知情意)의 모든 인격의 정성이 담긴 영혼의 소리로써 아름다운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가리킨다. 위대한 '찬양의 책' 시편을 마감하는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