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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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예레미야애가 주석



성 경: [애1: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이 책의 주제는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의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본장 전반부, 곧 1-11절까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파멸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언급된다. '슬프다' 라고 번역된 감탄사 '에카'(*)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한다(사 1:21 참조).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상시에는 민족 종교의 구심점이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혹하게 황폐화되어 버린 폐허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파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잃은 과부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을 돌아보면서 애도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부 예화는 인간의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었다. 한때 예루살렘은 에돔이나 모압 등과 같은 주변 나라의 지배자였으나, 이제는 포로가 되었고 버림받았다.

성 경: [애1: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밤새도록 애곡하니...친구도 다 배반하여 -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밤새껏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은 극에 달한 슬픔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한편 본절에서는 유다가 '사랑하던 자' 혹은 '친국'로 부터 배신당한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 유다가 의지하던 대표적인 맹방은 애굽이었는데, 성경 기록상에는 애굽이 유다에 대해 배신하였다고 하는 특별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B.C. 588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은 비록 패주하긴 했으나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렘 37:5). 그렇다면 본절 내용은 맹방의 특별한 배신 행위보다는 의존하던 대상으로부터 실질상으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겔 23장; 호 8:9, 10). 유다는 외세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들의 안전을 유지하여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었다(왕상 15:16-20). 유다는 이러한 친구들이 꺽어진 갈대라는 사실을 패망 후에야 비로소 배웠을 것이다(겔 29:6, 7).

성 경: [애1:3]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 여기서 시인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로 눈을 돌린다. 영역 성경 KJV 는 이를 '유다가 환난으로 인해서 포로잡혀 갔도다'(Judah is gone into captivity because of affliction)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로잡혀 갔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렘 40:11; 42:4-10; 44:1 참조). 그러나 '사로잡혀 갔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레타'(*)는 삼하 15:19과 겔 12:3에서도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전혀 자발적인 포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은 언약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실에 대해서는 왕하 24:1-5; 25:8-12; 대하 36:6, 10, 20을 참조하라.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 '협착한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차르'(*)는 흔히 어떤 사람이 곤경에 처하게 된 고통스러운 상황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RSV 영역 성경은 본문을 '그녀의 고통 중에'(in the midst of her distr ess)라고 번역하였고, NEB 영역 성경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협곡에서'(in her sore st raits)라고 번역하였다.

성 경: [애1:4]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예전에는 성전에 올라가 제사 절기르 마지키려고 하는 순례자들로 북적대었으나 이제는 황량하고 인적이 끊겼다. 렘 41:5 에 의하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드물게나마 순례 행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것조차 끊어졌던 것 같다(Ellison).

성 경: [애1:5]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곤고케 하셨음이라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이미 언약에 규정되어 있던 것이다(신 28:4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원래 '위반', 혹은 '반역'을 뜻하는 말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 역시 언약 파기에 따른 처벌로서 이미 예언되었던 것 중에 하나였다(신 28:36, 63-68 참조).

성 경: [애1:6]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목백'에 해당하는 '사르'(*)는 영역 성경에서 주로 '군주'(princes)로 번역되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온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듯하다(왕하 25:4; 렘 39:4 이하 참조). 그리고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사슴'예화는 시 23편에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양떼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로 묘사된 바 있다(요 10 :11 이하). 시인은 여기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비참한 지경을 대조시킴으로써 포로로 잡혀 가는 비애와 슬픔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Harrison).

성 경: [애1:7]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정복자의 먹이가 되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과거의 영광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비참하였다. 아마 이 시는 이 성이 함락된 이후 오래지 않은 그 어느 시기에 구성되었던 것 같다. 설상 가상으로 그 대적들을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성경에서 대부분 비웃음은 조롱이나 비난과 연결되어 쓰였다. 한편, '군박'의 히브리어 '마루드'(*)는 그 어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약간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즉 '루드'(*, 이주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추방'을 그리고 '마라드'(*, 반항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핍박'을 각각 가리킨다.

성 경: [애1:8]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 이곳에서 5절에서 언급되었던 예루살렘의 범죄에 대한 주제가 보다 더 상세하게 지적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본서의 주요 신학적 문제들 중에 하나가 된다. 시인은 여기서도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여인을 예화로 사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애1:9]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여호와여...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 선지자는 여호와께 호소하며 환난을 감찰해 줄 것을 간구하는데, 이 간구는 스스로 큰 체하는 적들의 무례에 근거해 있다. 아마 유다 백성은 그들의 운명을 다시 역전시켜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었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그 근본적 원인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상반절). 따라서 적들의 오만 불손한 승리의 자부심을 징벌할 것을 요구하며, 백성들의 고난을 제거해줄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그 두드러진 예로서 앗수르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 10;12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한편 '스스로 큰 체하오니'란 말을 영역 성경 NIV, RSV 등은 '적이 승리했사오니'(the enemy has triumphed)라고 번역하였는데, 문자적으로 틀린 번역은 아니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적들의 승리로 인한 보응이 아니라, 승리 후에 보여준 오만 불손한 교만으로 인해서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 경: [애1:10]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 '보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하마데하'(*)는 여기서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드문 용례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그녀의 가치 있는 것들'로서, B.C. 586년 바벨론인들의 공격으로 성전에 있는 값비싼 장식품들이 모조리 강탈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렘 52:17-23). 이스라엘 자손들조차도 제사장 신분이 아닌 이상 성소에 입실하는 것에 금지된 상황인데, 이교도들이 그 거룩한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았던 것이다.

성 경: [애1:1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 보물로 식물들로 바꾸었더니 - 여기서 '보물'은 양식을 사기 위해 내주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을 말한다. 아마 이것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값비싼 보물이라해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애1:1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1)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 NIV, RSV 등의 영역 성경들처럼 의문문으로 옮기는 견해, (2)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혹은 '나의 슬픔이 너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등과 같이 평서문으로 번역하는 견해. (3) '너희에게 슬픔이 임하지 않게 하라'와 같이 명령문으로 옮기는 견해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들 중에서 첫 번째의 견해, 즉 의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우리는 의문형을 가리키는 '헤'(*)가 생략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Calvin).

성 경: [애1:13]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 본 구절은 '그가 불을 내려보내시고 그것으로 내 뼈를 관통하게 하셨나이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그물'과 '곤비', '불'이란 개념을 사용하여서, 예루살렘을 뒤흔들었던 그 공포와 혼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은 예루살렘 성 깊숙이 번져들어갔으며, 또한 그물이 쳐쳐 있어서 아무도 거기서 달아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한편, '이기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는 '짓밟다', '정복하다'는 뜻으로 바벨론 군대의 침탈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애1:14]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 맛소라 사본은 해석하기 어렵다. '묶고'로 번역된 '니쉬카드'(*)란 말이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쓰였으며, 그 의미 또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70인역(LXX)과 수 많은 사본들은 자음들을 변형시켜서 '솨카드'(*)란 동사로 읽고 있다. 이것은 '주의하다', '지키다'란 뜻인데, 이를 받아들여 본절 상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 죄악이 주시되어 왔었다'(Watch has been kept over my transgressions)이다. 이 번역은 '멍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 '(*)마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알'(*)로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은 '무겁다'란 뜻을 가진 어근 '카쉐'(*)에서 파생된 말로 읽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내 범죄의 멍에가 무겁다'로 번역될 수 있다. 아무튼 이 구절의 취지는 예루살렘의 죄악이 복합적이므로 마치 동물 목에 걸린 무거운 멍에처럼 그들을 짓누른다는 의미이다(Harrison).

성 경: [애1:15]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성회'(*, 모에드)는 일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적군이 여호와의 호출을 받아 유다 용사들을 쳐부수는 축하 행사를 위해 모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술틀'은 예루살렘의 저항이 분쇄되고 그 방어자들의 피가 마치 술틀에서 포도즙이 으깨져 나오는 것과 같다는 회화적 표현 수법이다.

성 경: [애1:16]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 본절에는 예루살렘 함락에 따른 쓰라린 심정이 표현되고 있는데, 이들 침략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그 고통을 더욱 쓰라리게 한 것이다. 원문에는 '내 눈에'(*, 에니)란 말이 반복되고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초기의 역본들을 따라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Ellison)

성 경: [애1:17]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 본절은 시인이 파괴된 이 도시 대신에 애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손을 펴는 것'은 슬픔과 탄원의 몸짓을 나타낸다.

성 경: [애1:18]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거역하였도다 -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이런 참혹한 심판으로 몰아 넣었던 죄악에 대한 한탄의 노래가 나타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다거나 또는 그 공의로우신 처사에 반발하는 듯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오랜 반역을 꾀하던 이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처벌당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종교의 퇴폐적인 제사 의식에 빠져들음으로써, 이미 오염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던 것이다(Harrison).

성 경: [애1:19]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사랑하는 자' 란 동맹국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바벨론 군대가 이땅을 파괴시키고 있었을 때 유다를 도우러 오지 못했다.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애굽도 갈대아군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거짓 선지자들의 그럴 듯한 거짓말에 현혹되어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했던 바로 그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포위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긴 하였으나 결국 양식을 찾지 못해서 죽어갔다.

성 경: [애1:20]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예루살렘의 유일한 희망은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는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7 0년이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고 그 반면에 갈대아인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었다(25:12-14).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은 이 예언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충격이 될 정도로 처절했음이 분명하다.

⭕ 마음이 괴롭고 - 이의 히브리어 '메아 하마르'(*)는 문자적으로 '창자가 뒤틀린다'는 뜻으로서 극도로 괴로운 심경을 나타낸다.

성 경: [애1:2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여기서는 전날 선택된 백성을 위해 대적을 무찔러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대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즐거워한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본절 끝부분의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 헤베타욤 카라타)라는 표현은 난해한 구문이다. 어떤 학자는 '반포하신 날'을 유다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나, 거만한 이스라엘 대적들이 처벌을 받아 낮아지는 때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RSV 영역 성경은 페쉬타(Peshitta)역을 따라 이를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NIV 영역본은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는 희구적 가정법(optative suvjunctive)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그 날이 이르도록 하시기를'(May you brin g the day)이라 번역하였다. 그런가 하면 KJV, ASV 는 이를 예언적 완료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대적들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처벌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이 처벌되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이 바로 심판이었다는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몇 장의 주제로 등장한다. 본절은 이런 의미에서 본서의 기본적인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민족이 바라보고 기대를 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Harrison).

성 경: [애1:2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본절은 본장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즉 온 세계의 심판주 되신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처벌하였던 것과 같이 악하고 죄많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그와 같은 심판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이런 탄원은 전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거한 것으로서, 사도바울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주의 약속을 상기 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롬 12:19).

성 경: [애2: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천둥치는 구름처럼 유다 왕국을 덮고 있으며 무서운 권세로서 그 진노를 폭발 시키실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사 1:7; 렘 4:31; 6:2, 23 등 ). 이 민족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특권을 나타내는 증표로만 생각했었으나, 도덕적, 영적 영역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그런 특권적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민족의 찬란하던 수도는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신성 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성소, 곧 발등상도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성소가 이처럼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Harrison).

성 경: [애2: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전유다가 황폐해졌다. 70인역은 '나라' 대신에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왕과 그 대신들도 그들의 영광스럽던 신분을 다 상실했다. 욕되게 하셨도다 - 의 히브리어 '할랄'(*)은 '상처를 입히다', '살해하다', '모독하다', '더럽히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애2:3]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 '뿔'에 해당하는 '케렌'(*)이란 말은 구약에서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사용된다(신 33:17; 삼상 2:1, 10; 암 6:13; 미 4:13). 본절은 거대하고 튼튼한 성과 요새들이라도 하나님의 분노가 집어 삼킬 때는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성 경: [애2:4]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시인은 여기서 신인 동형론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에 대한 강력한 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백성들은 오랫동안 죄와 우상 숭배에 젖어서 하나님께 대항하여 왔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사되었던 하나님의 권세가 이제 이들을 파멸시키는 목적으로 등장한다. 본절에는 불타오르는 장막이 예화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좋은 것이면 무엇이나 약탈해 가는 약탈자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는 그나마 약탈해 갈 만한 좋은 것도 없다. 또한 '불'의 이미지(image)가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이를 심판에 대

한 상징으로 사용하셨다(마 13:42; 18:8; 25:41 등).

성 경: [애2:5]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근심과 애통'은 히브리어 '타아니야'(*)와 '아니야'(*)를 번역한 말이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로 두운법을 이루고 있으며 통렬하고 날카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는 그런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성 경: [애2:6]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성막'으로 번역된 '소크'(*)는 원래 '오두막', '천막'이란 뜻이며, '공회 처소'(*, 모에드)는 원래 '성회'(聖會), '집회 장소'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 둘 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칭하는 듯하다. 또한 '초막같이'의 히브리어 '카간'(*)은 문자적으로 '정원같이'로서 원문상의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70인역( LXX)은 '덩굴(포도나무)같이'라고 읽고 있다. 또한 성전과 함께 '왕과 제사장'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왕정 정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왕은 물론 제사장 직무에서 배제되어 있었긴 하난, 그는 이를 보호,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Ellison).

성 경: [애2:7]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이 민족의 자존심이었던 찬란한 솔로몬 성전도 이 파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궁장(*, 호모트 아르메노테하). 곧 왕궁 벽돌은 성전 복합 건물의 일부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제단, 성소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성전은 몇개의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7년에 걸쳐 건축되었고 왕궁을 세우는 데 다시 13년이 걸렸었다. 한편 '훤화'(*, 콜)는 적들이 승리를 기뻐하며 내지르는 함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히브리 경배자들의 축제 함성이 아니었다(Harrison).

성 경: [애2:8]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여기서는 건축자가 어떤 건물을 파괴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시온이 황폐화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의 '곽' 곧 성벽이란 말은 일부로서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적 표현으로서, 예루살렘 성벽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파괴 작업은 너무나 정확하고 섬세하여서 성전 돌 하나가 다른 돌 위에 놓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독교 초기에 예루살렘은 다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된다(마 24:2; 막 13:2; 눅 19:44; 21:6, Harrison).

성 경: [애2:9]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7절에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나, 8절과 본절에는 다시 예루살렘 성의 파괴와 왕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애도하고 있다. ⭕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 '율법 없는'(*, 엔 토라)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판이나 돌에 새겨 성전에 비치된 율법이 갈대아인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져버린 사실을 가리킨다고 본다(Gataker).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처럼 이를 '열방'을 수식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겠다. 이스라엘은 제의적, 도덕적, 시민법적 차원의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권을 누렸으나 이를 거역하고 파기함으로써, 이제 이방 땅에 추방당하여 율법 없는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Calvin).

성 경: [애2:10]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 '장로들'은 가문의 머리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리고 민 11:25에는 모세를 도와서 백성들의 재판을 주관하기 위해서 장로 70인이 임명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출 24:1 참조). 그리고 가나안 정착 시대 이후에는 각 고을에 장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역적 문제를 관장하였다(신 19:12; 21:2; 삿 8:14 참조).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알려진 이 국가적 위치의 집단은 포로기를 전후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이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에 장로들은 더 이상 시민의 업무에 관여할 것이 없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란 말은 슬픔과 애도의 독특한 표현이었다(욥 2:12; 겔 27:30). '굵은 베' 옷은 초상집에서 입던 것으로서, 고인을 애도한다는 의미를 가졌다(창 27:34; 삼하 3:31). 이것은 주로 염소 털로 만들어졌으며 검은 색깔이었다.

성 경: [애2:1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 졌으니 - '창자'와 '간'이란 말은 예리하고도 견딜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이나 슬픔을 상징한다. 간은 정신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가, 또한 깊은 정서적 반응과 결부된 곳으로 여겨졌다. 몇몇 영역 성경들은 이를 심장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heart, NIV, RSV), 이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Harrison).

성 경: [애2:1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 예루살렘 포위 공격 동안 어린 아이들이 당한 그 처절한 운명이 언급되면서 슬픔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주제는 19-21절과 4:4, 10 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 보여지는 생생한 장면은 그것을 묘사한 자가 목격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이 아이들은 어미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양식을 호소하고 있다. '곡식과 포도주'란 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식량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한편, 이런 장면들은 민족이 회복될 때의 약속의 상황, 곧 예루살렘 거리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행복한 때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슥 8:5).

성 경: [애2:13]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시인은 그들의 고난이 너무나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굳이 비교한다면 바다의 크기에나 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다는 그 크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황폐가 마치 태초의 혼돈의 바다를 연상시킴도 아울러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Ellison).

성 경: [애2:14]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본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거짓 선지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히며(렘 23:18-22; 겔 13:10-16), 또한 이 거짓 선지자들을 환영하고 좇은 백성들의 영적 우매도 신랄하게 지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위대하고도 찬란함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또 신성 불가침이라는 대의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어서 그들이 해야 할 의무는 실행치 않고 기득권 유지와 세속적 인기에만 연연하고 있었다. 한편 '어리석은'이라 번역된 '타펠'(*)은 음식에 적용될 때에는 '평범한', '맛없는'이란 뜻이지만 '우둔한', '거짓된'의 의미도 내포한다(Calvin).

성 경: [애2:15]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 유다 대적들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짐으로 매우 기뻐하는 광경이다. 한편, 고대에 각 도시들은 그 자체의 신들을 섬겼는데 그 신들이 비록 서로 경쟁적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재난을 당할 때는 공개적으로 비웃거나 하는 것을 자제하고 상호 묵과해 주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두고 대적들이 기뻐 뛰며 조롱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Ellison).

성 경: [애2:16]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며 예루살렘이 그 수도임을 주장하면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에 대해 주변 국가들은 시기하고 있었던 바, 그 도시가 파괴되자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처럼 기뻐하였다.

성 경: [애2:17]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 여기서 시인은 유다를 대적자들의 비소거리로 전락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지적한다. 포로기 이전 대다수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는 변함이 없으심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그 성전을 버린다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노골적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선언하셨던 내용은 오경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뜻에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레 26:1-45; 신 28:15-68).

성 경: [애2:18]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 본절에서부터는 주제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이 책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시인은 황량한 이 도시를 향해서 하나님께 탄원할 것을 촉구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라는 말은 그곳 인구 전체를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주'란 말과 '성곽'이란 말을 나란히 병기함으로써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던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애2:19]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 '경'(*, 아쉐무로트)이란 밤을 12 등분하는 시간 단위였다. 이곳의 '밤 초경'이란 말은 아마도 밤 동안에 어떤 간격을 두고 계속 애곡하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생존자들의 잠을 깨워 이전의 죄악으로 인해 처절한 심판을 받았다는 슬픈 사실을 상기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는 특이한 표현은 열정적이고도 진지한 기도를 나타낸다(Harrison).

성 경: [애2:20]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 여인들이...아이를 먹으오며 - 부모들이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죽은 자기 자녀들을 먹는 끔찍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광경은 예루살렘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허물어져 간 그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렘 3:23-26)을 극명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아마 시인의 뇌리에는 그때의 그 사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손에 받든'에 해당하는 '티푸힘'(*)을 70인역(LXX)은 '젖을 빨던'이라 의역하였고, 탈굼역(Targum)은 '비단옷을 입은'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개역 성경처럼 '손에 받든'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원문적이라 하겠다(Blayney, Calvin).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집과 관련된 최고의 영적 전통의 근간이 되었던 무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범죄하였던 그 무대 위에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 어떤 제사 의식이 종교 행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질 때에야만 효력이 있었고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외적인 제사보다는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정결한 상태에서 마음으로 예배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강조해 오셨던 것은 제사 절차라는 기계적이고 의식적인 것 자체보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영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일이었다(삼상 15:22; 시 51:17).

성 경: [애2:2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긍휼에의 호소]

⭕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 젊은 남녀들이 살육당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세대란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시온은 이제 바람의 씨를 뿌리면 결국 태풍을 거두게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변함없으시고 또 일관된 신적 심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애2:2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긍휼에의 호소]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에드'(*, 1:15)는 '정해진 시기', '모임' , '지정된 장소'란 의미를 가지는데, 주로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적 절기나 축제를 지키는 것을 가리켜 쓰인다. 사 33:20에는 시온이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으로 묘사되었고 시 74:4에서는 이 말이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적용되었다.

성 경: [애3:1]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 여기서 고난을 '당하다'(*, 라아)란 말의 문자적 의미는 '보다'인데, 구약에서 이 말은 시간적 측면에서 단순히 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노하신 매'란 말은 욥 9:34; 21:9; 시 89:32; 사 10:5 에서 볼 수 있다(Ellison). 한편, 본장의 시는 각 행의 머릿글을 모으면 히브리어 알파벱 순이 되며 삼중시의 형태를 띠면서 진행되는 대단히 정교한 애가이다. 여러 면에서 이 시는 애가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 22편과 사 53장에서 볼 수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묘사와도 유사성을 보여준다(Harrison).

성 경: [애3:2]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 유다 백성의 고난이 한 개인이 당한 고난에 비유되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민족의 현실에 온몸으로 동참하며 동족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빛과 어둠은 흔히 번영과 재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암 5:18, 20; 욥 12:2 5). 또한 '이끌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그'(*)는 짐승을 모는 것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며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인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지 않는다.

성 경: [애3: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 출애굽 당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그 이후에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그 이후에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역사와는 정반대로 이제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향해 심판의 손을 드사 그들을 내리치신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 자주'란 말은 그들이 당한 고난의 심각성을 대변하고 있다.

성 경: [애3: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 이는 이 민족에게 임하였던 재앙과 고난을 전면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인 어구이다(Harrison). '쇠하게 하다'란 말의 히브리어 '발라'(*)는 '오래되다', '낡아지다'는 뜻으로서, 커다란 상심으로 인해 쇠약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질병이나 고통에 처하면 야위고 늙어 보이듯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환난에 동참하였기에 수척해 졌다는 것이다. 또한 '뼈를 꺾는다'고 하는 것은 극심한 고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사 38:13, Ellison).

성 경: [애3:5]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담즙과 수고를 쌓아 - '담즙'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쉬'(*)는 극심한 가난이나 모든 희망의 상실(Ellison), 정체가 확실치는 않으나 아주 쓴 맛을 내는 식물이나 열매(Harrison), 혹은 독약(Calvin)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며 정확한 의미는 규명하기 힘들다.

성 경: [애3: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 이는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죽은지 오래되어 기억에서 잊혀진 자란 뜻. (2) 죽은지 오래되어 사람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다는 뜻.

성 경: [애3:7]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나를...나가지 못하게...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 본절은 렘 38:6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죄수들을 사슬에 묶어 밀폐된 곳에 가두어 두어 죽게 하는 것은 앗수르인들이 흔히 사용하던 고문 방법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성 경: [애3:8]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 기도마저 상달되지 않는 듯한 답답한 상황을 탄식하고 있다. 이는 7절과 더블어 영육간의 견디기 힘든 곤경을 토로하는 구절이다.

성 경: [애3:9]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 유일한 출구조차 잘 다듬어진 돌이 벽을 이루고 있어서, 그 틈바구니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7절의 갇힌 상태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 경: [애3:10]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 - 여기서 하나님은 마치 그 길로 지나는 자면 무엇이나 갈기 갈기 찢어 놓을 준비가 된 야생 사자에 비유되고 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멸망 당한 유다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선지자의 고뇌에 찬 표현이라 하겠다.

성 경: [애3:11]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나로 적막하게 하셨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멤'(*)은 '넋을 잃게 하다', '황폐하게 하다'는 뜻으로서, 심각한 환난에 처해 도움의 손길마저 끊어져 버린 상태를 나타낸다.

성 경: [애3:12]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본절과 다음 절은 욥 16:12, 13과 유사한 표현으로서 고통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과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타라'(*)는 '감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느 12:39).

성 경: [애3:1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음을 가리킨다. '허리'(*, 킬야)는 문자적으로 '콩팥'이란 뜻으로 치명적인 급소를 나타내며, 상징적으로는 인간의 감정과 의지의 중심으로서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욥 19:27; 시 73:21; 잠 23:17).

성 경: [애3:1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본절은 일차적으로 예레미야 개인이 직접 당한 체럼을 보여준다(렘 20:7). 그러나 이는 더 나아가 주변 열방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유다의 비참한 모습을 겨냥한 표현이기도 하다(Harrison).

성 경: [애3:15]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쓴 것'은 세계 어느 언어에서나 역경 혹은 재난을 상징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표현이다(Clarke).

성 경: [애3:1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본절은 사슬에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땅바닥에 던져진 음식을 입으로 집어 먹다가 이를 다친 경우를 묘사한다고 이해하기도 하나, 그 보다는 대적들의 발에 눌려 얼굴이 땅에 짓밟힌 상황에 관한 묘사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Ellison).

성 경: [애3:17]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 본절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하건대, '솰롬'(*, 평강)은 '성공' 혹은 '번영'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히브리인들이 '평강' 이라는 말로써 모든 번영을 자칭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Calv-in)

성 경: [애3:18]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비통함]

여호와께 대한 소망마저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거의 절망에 가까운 탄식이다. 그리고 '힘에' 해당하는 '네차흐'(*)는 '승리'(LXX), '목적'(Vulgate), '영광'(Sy-riac), '용기'(Targum)등 역본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성 경: [애3:19]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절망의 탄식이 본벌에서부터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바뀌는 극적 전환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자각함으로써 소망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성 경: [애3:20, 21, 22, 2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유다가 그토록 심각한 파멸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각하고, 또 그 환난의 와중에서도 진멸되지는 않은 사실을 오히려 감사하는 고백이다. 유디 백성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보고서 앞에서는 깊은 좌절을 느꼈던 예레미야가 이제는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망을 지니게 된 것이다(Clarke). 다시 말해서 이 '소망'은 당면한 재난과 침상을 망각하거나 경감시킴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심령을 여호와께로 향함으로써 생겨났다(Ellison).

⭕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 '자비'(*, 헤세드)는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이며, '긍휼'(*, 라함)은 다름 아닌 이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애3:2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 내 심령에 이르기를 - '심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인간의 전인격 혹은 자아(self)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굳이 '영혼'으로 번역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myself, NIV).

⭕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 현실상의 어떤 어려움과 궁핍 속에서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하는 고백이다(시 16:5; 73:26; 119:57; 142:5 참조).

성 경: [애3:25, 26, 27]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이 세절들은 공히 '선하다' 혹은 '좋다'는 뜻의 히브리어 '토브'(*)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단순히 좋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고난에 직면한 자의 겸허한 인내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사항은 히 12:7-11에 잘 묘사되어 있다.

성 경: [애3:28, 29, 30]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받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 잠잠할 것은 - 이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과 사람들이나 하나님께 불평 불만을 발하지 말 것을 아울러 의미한다.

⭕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 입이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라는 말로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성 경: [애3:31]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본절은 인내와 순종을 가르치는 앞부분, 그 중에서도 특히 24절과 연관된다. 즉 여호와께서는 지은 바 죄악에 대해 엄하게 징벌하시지만 영원토록 버리지는 않으시기 때문에,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Calvin).

성 경: [애3:32, 3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인생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지만, 하나님은 징계나 심판 자체를 원하시지 않으며 회개로 유도하신 후에는 그 크신 자비에 따라 긍휼이 여기신다는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시 89:32, 33; 사 54:7, 8; 합 3:2)

성 경: [애3:34, 35, 3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혹자는 본문을 유다를 억압하는 갈대아인들의 만행에 관한 내용으로 해석하나, 그보다는 유다 내부의 불의에 대한 지적으로 봄이 더 문맥적일 것이다(Ellison). 즉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는 달리 유다 백성들은 부당한 방법으로 약자들을 압제하며 송사를 굽게 하였기 때문에 재앙을 자초하였다는 것이다(39절 참조). '지극히 높으신 자'(*, 엘룐)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사 모든 것을 일일이 보시므로, 공의를 굽게 하고 죄악에 탐닉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과 직접 연결되는 죄라는 뜻을 암시한다.

성 경: [애3:37, 38]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인간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르치는 본문 역시 전후 문맥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므로,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인내로써 기다리는 일이다(롬 8:23). 이러한 자세는 지은바 죄로 인해 징벌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34-36, 39절; 벧전 2:19) 애매한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벧전 2:20, Harrison).

성 경: [애3:39]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소망]

본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살아 있는 사람, 죄로 인한 사람이 왜 불평하느냐?'가 된다. 이는 인생의 고난이 근본적으로는 죄악으로 인해 생긴 것임을 나타냄과 아울러, 살아있는한 그 사람에게는 회복의 희망이 있음을 시사한다(D.R. Hillers).

성 경: [애3:40, 41]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여기서 예레미야는 앞에 언급된 자각에 근거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은 영원한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진정 회개하면 회복의 길이 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근간이 되는 주제이다.

⭕ 마음과 손을 아울러...들자 - '아울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은 '..와 함께'(with)라는 뜻으로도 번역되지만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후자의 입장을 취할 경우 본문은 '손을 들지 말고 마음을...들자'로 번역된다. 어떤 방식으로 번역하든지 간에 진실된 회개를 강조하고자 하는 본문의 의도에는 변함이 없다 하겠다.

성 경: [애3:42, 4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여기서는 '우리'(*, 나흐누)와 '당신'(*, 아타)이 대조되며, 하나님의 처벌이 정당하다는 의미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즉 '우리'의 반역과 불순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차없는 진노가 임하였다는 것이다(Ellison).

성 경: [애3:4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구름, 연기, 혹은 흑암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관련하여 성경에 종종 언급된다(출 20:21; 40:34, 35; 레 16:2; 왕상 8:10, 12; 시 18:9, 11; 97:2; 사 6:4; 나 1:3). 그러나 여기서는 범죄한 유다 백성의 기도를 차단하는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주께서는 너무도 두려운 구름으로 당신을 가리우사 기도가 뚫고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의 번역은 좋은 참조가 된다.

성 경: [애3:45]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진개'에 해당하는 '세히'(*)는 '쓸어버리다'는 뜻인 '사하'(*)에서 유래한 말로서, '쓰레기', '오물'을 의미하며, '폐물'의 히브리어 '마오스'(*)는 '멸시하다', '거절하다', '내버리다'는 뜻인 '마아스'(*)에서 유래한 말로 '경멸의 대상'을 가리킨다.

성 경: [애3:4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본절과 47, 48절은 히브리 원문상 각기 '페'(*)로 시작되며, 알파벱 순서상 49- 51절(이 부분은 '아인'(*)으로 시작됨) 다음에 오는 것이 정형(定型)이다(Clarke).

성 경: [애3:47]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두려움과 함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파하드'(*)와 '파하트'(*)로서 두운법(alliteration)의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서 '함정'으로 번역된 '파하트'는 53절, 55절의 '구덩이'(*, 보르)와는 다른 말로서, 사냥꾼이 파놓은 함정을 가리킨다(사 24:17, 18; 렘 48:43, 44 참조).

성 경: [애3:48, 49]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자기 민족 유다의 운명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예레미야의 애끓는 조국애를 엿보게 하는 구절로, 렘 9:1; 14:17을 연상시킨다.

성 경: [애3:50]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여호와께서...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 예레미야의 슬픔과 애도는 불신자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불신자들은 환난에 처하여 마치 야수와 같이 부르짖으며 맹목적인 동요와 자포자기에 빠지지만, 예레미야는 극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끝내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다(Calvin).

성 경: [애3:51]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 '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벤'(*)은 흔히 '처녀'를 가리킨다. 저자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참담한 고난에 처한 유다의 딸들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말은 유다의 모든 성읍들에 대한 신적 표현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편, 혹자는 '...인하여'에 해당하는 전치사 '민'(*)을 '...보다 더'(more than)로 이해하여, 본문을 '성읍의 모든 여자들보다 더욱'으로 번역하는데, 참조해볼 만한 해석이다.

성 경: [애3:52, 53, 5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본문은 예레미야 자신이 겪은 수난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특히 53절은 시드기야 왕 당시 시위대 뜰의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뻔한 경험을 연상시킨다(렘 38:6).

⭕ 나를 새와 같이 심히 쫓도다 - 시 11:1, 2; 140:5 을 참조하라.

⭕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 환난과 고통을 묘사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욥 27:20; 시 4 2:7; 66:12; 88:7; 124:4; 사 43:2).

성 경: [애3:55]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심히 깊은 구덩이 -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재난이나 깊은 고뇌를 말한다. 이는 마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 :1)라고 절규했던 다윗의 그것에 비교될 수 있겠다. 이렇듯 심한 환난 속에서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여호와께 매어달렸다는 데서 선지자의 위대한 신앙의 일면을 보게 된다.

성 경: [애3:5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본절은 원문 해석상 다소 애매한 면이 있으며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번역된다. (1) "내 음성을 들으소서...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소서"(Hillers). (2)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귀를 가리우지 마소서." 이는 본절의 '나의 음성' 곧 간구 내용이 바로 하반절 내용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대다수 영역 성경에서 취한 번역이다. (3)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귀를 가리우지 마소서." 이는 선지자가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에 근거하여 현재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따랐다.

성 경: [애3:57]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본절 이하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저자의 믿음이 돋보인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이 당신께 간구하는 신실한 자녀들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신다고 하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사 58:9; 65:24, Harrison).

성 경: [애3:58]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 여기서 하나님은 '고엘'(*)로 묘사된다(룻 3:6-13 주제 강해, "'기업무를 자'의 구속사적 의미" 참조).

성 경: [애3:59, 60]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하나님의 공의가 속히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난과 고통이 사라지게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정작 유다 백성이 환난에 처한 것도 하나님의 공의로 말미암았지마,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역시 동일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택한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긍휼(32절)과 공의는 불가분적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성 경: [애3:61, 62, 63]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대적들의 끊임없는 핍박과 억압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보응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 앉든지 서든지 - 이는 '항상', 혹은 '매사에'라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의 관용적 표현이다(신 6:7 참조, Hillers).

성 경: [애3:64]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은 자가 유복하리로다"고 노래한 시 137:8을 연상케 하는 구절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성 경: [애3:65]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그 마음을 덮으시고'이며, 암매성(暗買性) 혹은 완고성(완악함)을 가리킬 수 있으나, 본문의 저주 대상이 예레미야를 포함한 이스라엘의 대적임을 감안할 때 후자의 의미로 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Harrison).

성 경: [애3:66]

주제1: [좌절에서 소망으로]

주제2: [선지자의 고통스런 호소]

⭕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 이는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를 단지 '지상에서 멸하시리이다'로 번역하면 그 의미를 경감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천하'라는 표현 속에는 하늘의 심판관 되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절될 것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Calvin).

성 경: [애4:1]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 어찌 그리...정금이 변하였으며 - 금이나 정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본 구절의 원래 히브리어상에 어떤 수정이 가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토록 소중한 것이 제 값어치를 못하는 모습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문구로 이해될 수 있다(마 5:13 참조). 본 구절의 '금'이나 '정금'에 대해서는 (1) 유다백성, (2 )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 혹은 (3) 성전과 그 장식품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본절 하반절로 미루어볼 때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다(Ellison). 한편 '금'과 '정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각각 '자하브'(*)와 '케템'(*)인데, 전자는 '반짝반짝 빛나다'는 뜻의 사용하지 자낳는 어근에서 유래한 말이며, 후자는 '조각하다', '새기다'는 뜻인 '카탐'(*)에서 유래했다.

성 경: [애4:2]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 어찌 그리...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 예레미야가 종종 사용한 토기장이의 비유를 연상시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는 유다에게 임한 현재의 환난이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결과임을 암시하고 있다(Calvin).

성 경: [애4:3]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들개'로 번역된 히브리어 '탄닌'(*)을 히브리인들은 대개 '바다 괴물'로 이해하였는데(sea-monsters, KJV), '뱀'(Calvin), '고래'(Clarke) 혹은 '들개'(jac kals, NIV, RSV)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짐승은 잔인하여 제 새끼마저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데 유다 백성이 이 짐승보다 더 잔인해졌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본 구절의 의도이다. 또한 '광야의 타조'는 알을 낳자마자 그것을 잊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우둔한 새로서, 혹독한 기근으로 인해 자녀들을 제대로 먹일 수조차 없어진 유다 백성을 비유하고 있다. 즉, 본 구절의 강조점은 유다 백성의 잔인성 자체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 타조나 들개마냥 잔인해지게끔 만든 환난과 기근의 심각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Calvin).

성 경: [애4:4]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최우선적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젓먹이와 어린아이들마저 굶주림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극도의 기근 상태를 보여준다. 예루살렘성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오랫동안 포위당해 있었으므로 함락 직전에는 기근이 극치에 달해 있었다(10절 참조).

성 경: [애4:5]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진수'를 먹고 '붉은 옷'을 입는 것은 부유함에 대한 표시라 하겠다. 그러나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는 사회적인 특권과 재물로도 음식을 구할 수 없었다. 한편, 본절의 묘사는 고대 동방 세계에서 패망당한 성읍 거민의 비참한 처지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종종 쓰였다. 유다 백성의 경우는 거듭되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회개했었다면 이렇듯 비참한 지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끝내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환난을 자초한 꼴이 되고 말았다(Harrison).

성 경: [애4:6]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 '사람의 손'으로 번역된 '야드'(*)는 '일격', '공격'이란 뜻도 지닌다. 그리고 '대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루'(*)의 어원은 다소 불명확한데, 아마 '돌진하다', '떨다', '몸부림치다'란 뜻의 '홀'(*)에서 유래한 듯하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낄 틈도 없이 경각간에 공격당해 파괴되었다.' 혹은 '사람의 손을 빌지 않고 일순간에 파멸되었다'는 정도로 이해될 수 있겠다. 어쨌든 본절은 유다의 죄와 심판이 소돔의 그것보다 더 크고 심각하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는데, 소돔은 음란과 더러움으로 인해 멸망당한 존재의 대명사와도 같은 도시이다(창 19:1-28; 유 1:7). 한편 '죄와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과 '하타트'(*)는 모두 '죄' 및 그에 따른 '징벌'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성 경: [애4:7, 8]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5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부귀를 누리던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의 수치와 파멸이 다시금 언급된다. '존귀한 자'에 해당하는 '나지르'(*)는 '나실인'을 뜻하기도 하나(Calvin ), 여기서는 단순히 '유력자' 혹은 '존귀한 자'정도의 의미로 번역함이 무난하겠다(Bl ayney). 이에 대한 예로, 창 49:26에서 이 말이 요셉에게 적용된 바 있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산호'(*, 파닌)는 '진주'(Bochart), '천연자석'(Parkhurst), '루비'(Calvin)등으로도 번역되며, 붉은 색을 띤 보석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애4:9, 10]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기근으로 인한 참상]

선지자는 앞에서 갑작스럽게 멸망한 소돔이 차라리 유다의 형편보다는 나음을 언급한 바 있거니와(6절), 여기서는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준다. 극한 기아 상태에 빠져 온갖 괴로움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광경(9절)과 심지어 자기 자녀를 삶아 먹는 광적인 모습(10절)이 바로 그것이다. 북이스라엘이 아람의 침공을 당했을 때에도 10절과 유사한 장면이 묘사된 적이 있다(왕하 6:24-29). 이런 상상하기 조차 힘든 만행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녀의 어머니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데서 더 큰 전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부녀는 '자비한' 영인으로 묘사되고 있음에 유의하라.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흐마니'(*)는 '동정심이 많은', '인정 많은'이란 뜻으로 모성애(母性愛)의 일면을 암시하는 말이다.

성 경: [애4:11]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본절은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행사(行事)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언한다. 특히 '그 지대(地臺)를 사르셨도다'라는 표현은 유다에 임한 심판의 철저함과 심각성을 잘 드러낸다. 어떤 건물에 불이 났을 경우 지상의 건물 벽이나 지붕은 쉽게 타지만 기초 공사의 토대까지 타버리는 일은 여간해서 보기 힘든 것이다(Calvin).

성 경: [애4:12]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 이는 예루살렘이 천연적, 인위적 방어망으로 인해 난공 불락의 요새로 간주되었던 사실을 다소 과장하여 표현한 내용이다(Ellison). 아울러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은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유다 백성들의 자만 섞인 기대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한편 심판의 원인을 기술한 본절 이하의 내용은 신 29:14 이하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백성'에 해당하는 '요쉐베'(*)는 '(재판 자리에) 앉다' 혹은 '거주하다'는 뜻인 '야솨브'(*)에서 유래한 말인데, 혹자는 이를 '통치자들'로 번역하나(Hillers) 단순히 '거주자들'이란 뜻으로 이해함이 무난하겠다.

성 경: [애4:13]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저자는 예루살렘 패망의 1차적 원인을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성읍 중에서'라는 말은 의인에 대한 그들의 핍박이 공개적으로 자행되었음을 암시한다(Clarke). 특히 선지자는 제사장과 같은 종교적 지도자들의 범죄는 일반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흐리게 하기 십상이었고 재앙까에 대해 뻔뻔스러운 마음을 품게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래도록 참된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셨으나 그들이 진리보다는 거짓을 더 사랑하고 스스로 왜곡되고 망령된 행실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성 경: [애4:14, 15]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본 구절들은 아주 난해한 부분이다. 해석의 관건은 '저희'를 누구로 보느냐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유다 백성 개개인들을 일컫는다고 해석하지만(Hillers, Rudolph ), 그보다는 앞절에서 지적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문맥적이다. 즉 저들은 무죄한 피를 흘린 가인의 표를 받은 자들로서 가는 곳곳마다 배척과 멸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 이는 예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말씀을 연상시킨다(마 15:14; 23:16). 유다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는 커녕 스스로 거짓된 말로 미혹하고 범죄에 앞장섬으로써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 부정하다...만지지 말라 -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정결을 담당하는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들이 도리어 부정한 자로 취급당하고 있다(레 13:45, 46참조).

성 경: [애4:16]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여호와'로 번역된 히브리어 '페네 야훼'(*)는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얼굴'이다. 악인들에 대해 진노하시는 여호와의 얼굴에 관한 묘사는 레 20;3, 6; 시 34:16; 겔 14:8 등에도 나온다. 한편 본절의 '저희'에 대해서도, 앞의 두 절의 연장선에서 13절의 종교 지도자들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Ellison) 그보다는 포로지에서 만나게 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애4:17]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구원의 길]

⭕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 - 이는 애굽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도록 거듭 촉구한 바 있다(렘 38:17-19). 한편, 본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족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예레미야 저작설을 부인케 하는 표현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참다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애4:18]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구원의 길]

⭕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 '엿보니'의 히브리어 '차두'(*)를 '차단하다'는 뜻의 '차라르'(*)에서 유래한 말로 보고, 본절을 '우리의 걸음이 너무도 차단(제한)되어 있어 밖에 나갈 수 조차 없다'고 번역하는 이들도 있다(Ehrlich, Ginsburg). 그러나 굳이 맛소라 사본(M.T)을 변형시키지 않아도 본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다. 즉 '차다'(*)는 '추적하다', '매복하다'는 뜻인 바, 본절은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된 살벌한 상황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성 경: [애4:19]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구원의 길]

앞절에서는 유다 백성들이 성 안에서 제대로 돌아다닐 수 없음을 언급하였는데, 본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광야나 산골짜기로 도주해 보았자 곧 추적당하고 만다고 하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다. 한편 독수리 - 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말로 언급되었으며(사 46:11) 여기서는 특히 독수리의 민첩성과 파괴적인 공격성에 초점을 맞추어 사용되었다.

성 경: [애4:20]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구원의 길]

⭕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 - 혹자는 이를 요시야에게 적용시키려 하나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며, 문맥상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지창함이 분명하다(Calvin, Clarke). '콧김'으로 번역된 '루아흐'(*)는 '호흡', '생명'이라는 뜻도 내포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 개인에게 있어 호흡이 중요하듯이, 국가에 있어 왕이 차지하는 위치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이 말속에는 인간 왕을 생명처럼 의지하던 과거의 소위(所爲)가 얼마나 어리석었던지를 자조(自照)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권을 충실히 대리할 때에 실로 생명과 같이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지만, 대다수 열왕들은 그러지 못하였다.

성 경: [애4:21, 22]

주제1: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

주제2: [구원의 길]

지금껏 절망적인 현실에 절규하던 선지자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희망의 목소리로 바뀐다. 공허한 희망은 사라졌지만 엄연한 현실에 입각하여 새롭게 제시되는 참된 소망과 비전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모든 대적들을 대표하는 에돔(사 34장; 겔 35장)에게 시인은, '심판이 가까워오고 있으니 즐거워할 수 있을 때 실컷 기뻐해보라'고 조롱조로 말한다. 그리고 '벌거벗으리라'는 말은 수치와 죄악의 폭로뿐만 아니라 노예로 잡혀가게 될 것도 암시한다(사 47:2, 3참조).

성 경: [애5: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본장도 히브리어 알파벱의 수효인 스물 두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으나, 알파벱 순서대로 배열되는 답관체의 형식을 띠지는 않는다. 현재 처한 비참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면서 그 감정의 북받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시의 정형(定型)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Clarke). '기억하시고'(*, 제코르)라는 말은 단순한 회고의 차원을 넘어 구체적인 결과를 낳는 행동을 취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는 여호와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겠다(Ellison).

성 경: [애5: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 '기업'으로 번역된 '나할라'(*)는 '점유', '세습 재산'(patrimony, NEB). '유산'(inheritance, KJV, NIV, RSV)등의 뜻을 지니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서 여호수아 시대에 비로소 정복되었다(창 12:1; 13:14-17; 수21:43-4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써 이 축복의 땅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성 경: [애5:3]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과부 -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의지할 길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 특별한 보살핌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된다(출 22:22; 신 24:17; 26:12; 잠 23:10; 사 1:17; 약1:27). 본절은 기근과 살상으로 인해 유다 내에 실제로 고아와 과부가 급증한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유다의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갈망하는 호소이기도 하다.

성 경: [애5:4]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물'과 '섶'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메누'(*)와 '에체누'(*)에는 모두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대명사 접미어 '누'(*)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를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의 물'과 '우리의 섶'이 된다(Calvin). 아마도 본절은 바벨론의 강점(强占)하에서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심지어 천연 식수마저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해야 할 정도로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음을 뜻할 것이다(Clarke). 왕하 24:14; 25:12; 렘 39:10등에 의하면, 예루살렘 함락이후 유다에 남은 자들은 빈천한 자들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유다 땅을 기껏 경작해 보았자 바벨론 제국에서 상납해야 하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성 경: [애5:5]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알 차와레누 니르다페누) - 문자적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목을 추적당했다'이다. 혹자는 전치사 '알'(*)을 '멍에'를 뜻하는 '올'(*)로 읽기도 한다(Henderson Lowth). 그러나 굳이 맛소라 사본(M.T)을 변형시키지 않아도 동일한 의미로 이해 가능하다. 유다 백성은 마치 멍에 메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짐승처럼 하나님께 대해 목을 곧게 할 결과(출 32:9), 이방인에 의해 멍에로 메어진 꼴이 되고만 것이다. 한편, 본절은 항복한 대적의 목에다 발을 얹었던 승리자의 모습과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한다(수 10:24; 사51:23 참조. Harrison).

성 경: [애5:6]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앗수르 사람'에 관한 언급을 고려하여 본절을 7절과 더불어 '열조의 죄악'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제시된다(Ellison).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호 5:13;7:11;12:1등의 성구를 그 전거(典據)의 하나로 삼는다. 그러나 문맥상 본절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구하느라고 우왕 좌왕하는 유다 백성에 대한 묘사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Clarke, Harrison).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지만, 바벨론의 지배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이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유화정책은 페르시아 통치 시대 때 더욱 돋보였다(스 6:22 참조).

⭕ 악수하고(*, 나타누 야드) -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손을 주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우정의 의미에서 주고 받는 악수보다는 주종(主從)관계를 밝히는 어떤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암시한다(Hillers).

성 경: [애5:7]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 이는 열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유다의 국운(國運)이 점점 위태해져 갔고 그들의 악영향을 답습한 후손들의 범죄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가득 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Clarke). 궁극적으로 죄에 대한 심판은 각 개인의 행위에 따라 주어진다는 사실은 겔 18:1 이하에서 강변되고 있다.

성 경: [애5:8]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 '종들'이란 바벨론의 하급 관리들을 가리킨다. 유다는 자국의 왕을 모시지 못하고 대신 이들의 압제와 간섭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탄원할 법정마저 없었다(Ellison).

성 경: [애5:9]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 '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브'(*)는 '가뭄'이라는 뜻도 지닌다. 대부분의 영역본들과 한글 개역성경, 탈굼역(Ta rg um) 그리고 블레이니(Blayney). 핸더슨(Henderson)같은 주경 학자들은 '칼'로 번역하여, 광야 지대로부터 습격해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도적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광야'(*, 미드바르)란 주로 사막을 뜻하며 다음 절에서도 기근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본절은 '사막에는 기근이 있으므로'라고 번역되어도 무방하겠다(Calvin).

성 경: [애5:10]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극심한 영양 실조 현상으로 인해 가죽만 남은 피부가 거무틱틱하게 수척해진 모습을, 검댕과 열기에 의해 계속 찌그러들고 검게 변한 가마솥에다 비유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4:8; 욥 30:30에도 나온다.

성 경: [애5:1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유다의 여자들이 무자비하게 겁탈당한 치욕적인 사실이 언급된다. 이는 모세와(신 28:30, 32) 예레미야(렘 6:12)등에 의해서도 예언된 바로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순결성을 거부했던 백성들에게 임한 심판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특히 시온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자주 언급되는 바(시 78:68; 사 8:18) 본절의 비극상과 수치스러움을 더욱 부각시키는 말이다. '욕보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낮추다', '강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강제로 겁탈한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애5:1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방백들의 손이 매어 달리며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갈대아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극형의 하나로서, 손을 갈고리에 묶어 탈진하여 죽을 때까지 벽에 달아 놓은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Clarke). (2)방백들로부터 숨겨놓은 재물을 찾아낼 목적으로 가했던 고문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 (3)죽은 이의 시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내어 걸었던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Ellison). (4)방백들 스스로 자학하거나 자살을 기도한 것에 대한 묘사라고 보는 해석(Calvin). 이중 어느 것이 정확히 옳은지를 선택적으로 지지하기란 힘들다. 다만 다소 완곡한 투로 언급되는 본절 하반절과 연관성을 고려할 때, 어떤 목적에서 가해졌던 고문에 관한 언급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 경: [애5:13]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 - '소년'으로 번역된 '바후르'(*)는 '선택된 자' 혹은 '젊은이'를 뜻한다. 군사로 뽑힐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주로 여자(노예)들의 일로 여겨졌던 맷돌질이나 하게 된다는 뜻이다(Clarke, Ellison). 한편, 벌게이트역(Vulgate)은 본 구절을 '젊은이들이 성적(性的)으로 문란해졌다'라고 옮기는데, 이는 '맷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혼'(*)을 '가루를 빻다'는 뜻과 함께 '첩이 된다'는 뜻의 속어로도 쓰이는 '타한'(*)으로 읽은 데서 연유한 번역이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하건대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Hillers).

성 경: [애5:14, 15]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시민 질서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겨버린 서글픈 현실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 장로들이나 재판관들이 재판을 주재하던 성문도 이제 폐허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백성들은 공의로운 율법에 따른 재판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제멋대로 결정되는 판단에 아무 말없이 굴복해야 했다.

성 경: [애5:16]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면류관'(*, 아타라)은 왕관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나 결혼식과 같은 즐거운 잔치석상에서도 썼으며 영광과 영예를 상징하기도 했다(욥 19:9; 사 28:1, 3, Calvin, Hillers). 따라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말은 대단히 폭넓은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로, 이는 유다가 민족적 특권과 위엄을 상실하고 노예국으로 전락했다는 의미이다(Harrison). 둘째로는, 모든 기쁨의 축제가 유다 땅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이다(Clarke). 셋째로는, 신정(神政) 왕국 제도나 제사장 제도와 같은 유다 민족 고유의 위대한 유산이 멸절되었다는 의미이다(Calvin).

⭕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 지금까지 당면한 재난에 대해 절규한 것이 단순히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족의 죄악을 통렬하게 고백하는데에 주요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론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애5:17, 18]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당면한 모든 재난이 범죄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한 후, 선지자는 그 범죄의 결말을 '이러므로'(*, 알 제)라고 다시금 진술한다. 특히 여기서는 수많은 재난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비극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시온의 황폐함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서 거룩히 구별되어졌던 시온이 들짐승의 거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약 백성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었다(Calvin). 여우(*, 슈알)는 팔레스틴지역에 흔한 짐승이며(삿 15:4), 야생 짐승이 거주하는 것을 황폐함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예는 히브리인들에게 익숙했다(Clarke).

성 경: [애5:19]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 여호와여...세세에 미치나이다 - 저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하여 미래의 구원을 호소하며 밝은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암울한 현실을 볼 때는 절망의 탄식밖에 나오지 않지만 세상 만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 힘을 얻고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성 경: [애5:20]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잊으시오며'(*, 티쉬카헤누)와 '버리시나이까'(*, 타아즈베누)의 두 동사는 모두 미완료형으로서, 하나님께 잊혀지거나 버림받았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던 저자의 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성 경: [애5:2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본절은 하나님이 아직도 언약 백성을 위한 주권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확신속에서 하나님과의 화해와 민족의 회복을 바라는 저자의 열망을 표현한다(Harrison). 특히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회개도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각을 보여준다(렘 31:18, 33, 34; 겔 36:26, 27). 어떤 점에서 이는 신약의 중생(regeneration) 교회의 일면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Ellison).

성 경: [애5:2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히브리어 원문상 본절을 시작하는 말인 '키 임'(*)에 대한 해석은 갖가지이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영역 성경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KJV는 이를 역접 접속사(dut)로 옮겼고 NIV는 양보의 접속사(unless)로 해석했다. 그런가 하면 RSV는 이를 명령문 다음의 or로 보고 본절을 의문문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쨌든 본절이 유다의 비참한 현재 상황을 묘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부정적이고 불행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끝맺는 예는 사 66:24; 말 4:6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이 부정적인 내용으로 끝맺음하고 있기 때문에, 공적인 낭독시에는 22절을 읽은 다음 21절을 읽는 것이 관례였다 한다(Harr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