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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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요나서 주석



성 경: [욘1:1]

(주);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 히브리어 본문에는 '와우'(*)로 시작된다. 이것은 히브리 가사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삼상 1:1; 룻 1:1) '이제는'(now)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였다(KJV,RSV). 또한 '여호와의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바르 아도나이'(*)는 선지서들의 첫머리에 주로 사용된 표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계시임을 미리 전제하고 예언하였다(호 1:1; 욜 1:1; 미 1:1; 습 1:1; 말 1:1). '아밋대의 아들 요나'는 엘리사의 죽음과 아모스의 사역 사이의 근 40년동안 북이스라엘에서 기록된 유일한 선지자의 이름이다(왕하 14:25).

성 경: [욘1:2]

(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외치라 - '큰 성읍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왕하 19:36) 노아 홍수 직후에도 있었다(창 10:11).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니느웨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B.C.45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특별히 니느웨를 '큰 성읍'이라고 하는 것은 성의 규모보다는 많은 인구를 염두에 둔 때문이었을 것이다(4:11).

(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 니느웨에는 교만한(사 10:13), 잔인함(나 3:1,10,19), 극도의 이기주의(습 2:15)가 만연해 있었다.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땅을 심판하심을(창 18:25) 알 수 있다.

성 경: [욘1:3]

(주);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배에 올랐더라 - '다시스'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지중해 연안에 많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다시스'는 아마도 과달퀴비르(Guadalquivir)강 어귀에 있는 타르텟수스(Tartessus)이었을 것이다(H.L.Elison).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한 니느웨는 동쪽이었고, 다시스는 그와 정반대인 서쪽에 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르쉬솨 밀리프네이 아도나이'(*)가 두 번째 반복되어 요나가 도망간 궁극적인 이유는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달아나려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요나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심판을 면한다면, 그에 대한 영향은 곧바로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았고, 예후가 통치하던 B.C.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했다(4:2).

성 경: [욘1:4]

(주); 여호와께서 대풍을...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 요나가 도망했지만,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시 19:1-6). '대작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틸'(*)은 '세게 던지다'(hurl)는 뜻으로 매우 강력한 하나님의 간섭을 시사한다. 이와같이 자연 현상까지 동원하여 요나의 길을 막으시고, 순종을 유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C.L.Feinberg).

성 경: [욘1:5]

(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신들이 혼돈의 세력을 패배시킴으로써 질서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혼돈의 세력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억제되었을 뿐이므로 언제라도 잠재된 위협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H.L.Elison).

(주); 요나는...깊이 잠이 든지라 - '깊이 잠이 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예라담'(*)이라는 동사가 암시하듯이(창 2:21;15:12;삿4:21), 요나는 선원들까지도 두렵게 만들 정도로 거센 폭풍에 그만 힘을 잃고 의식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H.L.Elison), 근본적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달아나는 상황 속에서 허탈감과 그로 인한 무력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치는 입장에서 가능한한 자신을 깊이 숨기려는 심정으로 배 밑층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성 경: [욘1:6]

(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 이방인 선장이 요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일반적인 이방 종교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마 6:7), 다신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가능한한 많은 신들에게 기도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욘1:7]

(주); 우리가 제비를 뽑아...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 지중해의 항해철에는 거의 폭풍이 없었고(행 27:9), 선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폭풍이 그치지 않자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비를 뽑아 누구의 신이 이런 일을 하는지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 제비를 뽑으니...요나에게 당한지라 - 제비를 뽑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고, 제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도 했다(수 7:16;15:1;행 1:26).

성 경: [욘1:8]

(주);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 '고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기다'(*)는 '말하다'는 의미를 가진 '나가드'(*)의 히필 명령형으로 매우 강력한 요구임을 보여준다. 그만큼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주); 네 생업이 무엇이며...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 몇몇 구약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질문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 내용이 없다면 내용 전개가 어색하게 된다.

성 경: [욘1:9]

사람들의 질문이 여러 가지였던 것과는 달리 요나의 대답은 매우 간단 명료하다. 또한 그 대답에서 요나는 자신의 신관을 밝힌다.

(주);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 '나는 히브리사람이요'라는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인들에게 자신을 알릴 때 주로 사용된 표현으로(창 40:15; 출 2:2:7; 삼상 4:6,9; 14:11) 원래 여기에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기는 뜻을 담고 있었다(창 14:13; 41:12; 출 1:16).

(주);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 요나는 자신이 믿는 여호와에 대한 신관을 피력한다.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당시에 페니키아인들이 '하늘의 바알'을 섬기고 있었던 사실(M.C.Griffiths)에 비추어, 그 선원들에게 상당히 도전적인 선포였을 것이다. 더욱이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로 소개하였던 것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이었을 것이다.

성 경: [욘1:10]

(주);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 본절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서 터져 나온 감탄이다(창 4:10).

성 경: [욘1:11]

선원들이 에기치 않은 상황에 처하긴 했지만, 요나가 심각한 범죄자가 아니었으므로 선원들은 요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비록 바다가 더욱 흉용하게 되었지만, 선원들은 요나만이 그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질문한다.

(주);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 본절에서 당시의 선원들은 요나에게 뭔가 긍정적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요나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어야만 그가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 분명하다.

성 경: [욘1:12]

이방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요나는 자신의 과오를 인해 폭풍이 일게 되었음을 시인하고,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여기서 요나의 영적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요나는 여호와께서 홧김에 선원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바알처럼 비도덕적인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일단 바다에 던져지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H.L.Elison).

성 경: [욘1:13]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념상, 창조주에 대한 이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뭔가 노력하면 요나도 살리고 항해도 계속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바다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성 경: [욘1:14]

(주);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 사람들은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고, 급기야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구하노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동사라기보다는 감탄사이다. 따라서 이 말은 '오 제발! 이라는 뉘앙스를 가진 절박한 외침이다.

(주);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돌리지 마옵소서 -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도박과도 같았다. 만약 이로 인해 요나가 섬기는 하나님이 진노하는 날에는 자기들 목숨은 끝장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서 무죄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간곡하게 간구한다. 이는 이러한 행동이 자기들의 의사와는 무관하므로 그의 죽음에 대한 보응을 면케 해달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선원들은 요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성 경: [욘1:15]

(주);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 요나를 바다에 던진 후 바다가 잔잔해진 사실은 폭풍의 원인이 전적으로 요나에게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진 책임을 선원들에게 전혀 묻지 않으셨다는 사실로 인해 이방 선원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욘1:16]

선원들은 일련의 과정들을 틔해 여호와께서 바다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고, 자연보다 더 웅장하고 크신 하나님께 경외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여호와께 종교적인 행동을 취한다.

(주);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 탈굼역(Targum)은 본절을 '그들은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희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고 번역한다. 또한 미드라쉬(Midrash)는 그들이 욥바로 귀환하여 개종자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절만 가지고는 그들의 영적인 이해가 더 이상 진전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성 경: [욘1:17]

내용상 본절은 새롭게 전환되는 부분으로 히브리어 원문에는 2:1로 되어 있다. 즉, 앞에서는 요나가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자의에 의해 바다에 뛰어들었던 사실을 다루었고, 본절 이후, 즉 2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요나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계획을 진행하시는 일과 그로 인해 요나가 여호와께 기도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 '큰 물고기'(*, 다그 가돌)가 동물 중에 가장 큰 부류임을 감안할 때 고래나 상어라고 주장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물고기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다. 더욱이 히브리어에는 물고기에 대한 세세한 구분이 없는 까닭에 이런 논의에 집중하는 자체가 하나의 흥미로운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물고기는 요나가 3일 동안이나 뱃속에 들어가 있을 정도로 큰 물고기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삼일 삼야'는 정확히 72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날수로 3일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이다. 어쨌든 요나가 3일간이나 뱃속에 있으면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할 정도로(마 12:40)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었던 기상 천외한 사건이었다.

성 경: [욘2:1]

본장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이다.

(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 본절은 4:2과 마찬가지로 이미 경험한 고통에 대해 기도한다는 표현이다(M.C.Griffiths). '기도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트팔렐'(*)은 히트파엘 동사 미완료형으로 지속적이면서도 강한 재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스올의 뱃속(2절)이라고 비유될 정도로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한 물고기 뱃속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계속적으로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욘2:2]

(주);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스올의 뱃속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베텐 쉐올'(*)은 '무덤의 깊은 곳에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요나가 죽었었다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는다(C.L.Feinberg). 다만 요나는 자신이 죽은거나 다름없다거나, 죽은 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성 경: [욘2:3]

본절은 매우 역설적인 기도 내용이다. 왜냐하면 요나는 심각한 역경을 토로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역경을 허락하신 주체가 바로 그의 기도 대상인 주님이기 때문이다. 요나는 주께서 자기에게 고난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도하고 있다. 이는 요나의 훌륭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 '주의 파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바레이카'(*)는 원래 '파괴자들'(breakers)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나가 자기에게 닥친 하나님의 징계가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실감한 듯하다. 이와같은 표현은 고라의 시편(시 42:7)에서도 사용된 것으로 암울한 자신의 형편을 토로할 때 사용되었다.

성 경: [욘2:4]

3절에서 언급된 것과 마찬가지로 요나는 자신이 처한 암울한 상태를 주의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을 한다.

(주);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 본절은 자신이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쫓겨나는 꼴이 되긴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표현이다(H.L.Elison). 사실 요나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였지만,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고 표현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으로부터 격리되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은혜로우심을 의지하는 태도이다(시 42:2-5). 아무리 죽음과 고통 중에 거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은 인생들에게 참된 힘이 된다(사 40:31).

성 경: [욘2:5]

본절은 3절에서 시작된 요나 자신이 처한 상황, 즉 깊음 속으로 빠져든 자신의 처지를 계속 토로한다. 본문은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자신이 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자신이 인간적인 어떠한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음을 고백한다.

(주); 물이 나를 들렀으되...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 물 속에 빠져 급기야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살아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성 경: [욘2:6]

(주); 내가 산의 뿌리까지...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니 -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아레츠'(*)는 문맥상 '아래의 땅'(earth beneath), '하계'(下界,land beneath)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땅 속에 있다고 하는 '죽은 자들의 장소'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요나가 필연코 죽을 운명임을 깨달았을 것을 보여준다(H.L.Elison).

(주);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 셈족의 문화권에서 '구덩이'는 통상 죽은 자의 영역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이 아니면 자신은 완전히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시 30:3). 요나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과 장차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성 경: [욘2:7]

(주);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 '피곤할 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히트아테프'(*)는 문자적으로 '덮혔을 때', '압도되었을 때'(시 142:3; 143:4)라는 의미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탈진된 상태를 나타낸다. 이처럼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를 생각했다는 사실은 구원얻은 자의 특성이기도 하다.

(주);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 아무리 암울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달음박질하여도 피곤치 않을 정도로 새 힘을 공급받게 되며(사 40:31), 영혼이 소생된다(시 23:3). 특히 '주의 성전'(* , 헤이칼 카데쉐카)은 4절에서 지상의 성전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하늘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H.L.Ellison), 요나는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성 경: [욘2:8]

요나는 자신이 가진 믿음의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 우상 숭배자의 실상을 대조시킨다.

(주);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니 -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세담'(*)은 언약적인 용어로 요나가 그의 동족 중에서 우상 숭배자들을 염두에 두고 본절의 말을 했다면, '한결같은 사랑' 내지는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구원의 근원이시며 지고의 선이시라는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상이 거짓되고 헛되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상을 섬기며 그것들로부터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렘 2:5-13).

성 경: [욘2:9]

본절은 앞 구절과 대조적으로 요나 자신이 우상 숭배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궁극적인 구원이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다는 믿음의 내용을 밝힌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 경: [욘2:10]

(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 '여호와께서...명하시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요메르 아도나이'(*)는 직역하면 '여호와께서...말씀하셨다'(KJV,NEB,RSV,JB)라는 의미이며, 이런 용어는 하나님의 창조에 사용된 것으로 단순한 명칭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창 1장).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동안 살아 있었던 일이나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로 뱉어낸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이런 일은 인간적인 과학 이성으로 규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만큼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마 12:39).

성 경: [욘3:1]

(주);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본 구절의 히브리어 본문은 1:1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표현과 '두번째'라는 표현만 다를뿐이다. '두번째'(*, 쉐니트) 임하였다는 것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얼마 동안의 기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H.L.Elison).

성 경: [욘3:2]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내용은 히브리어 원문상 앞 부분(1:2)과 똑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내용으로 요나에게 임무를 부여하신다.

(주);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 '내가 네게 명한 바'는 니느웨의 악독에 대한 내용(1:2)을 가리킨다. 다만, 여기에 사용된 '선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케라'(*)는 단순히 '전파하라'(preach,KJV), '공표하라'(proclaim, RSV)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에서 '쳐서 외치라'는 표현보다 약화된 듯하다. 즉, 이번에는 요나의 선포행위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내용을 더욱 강조하여, 요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말씀만을 전할 것을 촉구받는다.

성 경: [욘3:3]

본절에서 요나는 앞에서 여호와를 피하여 달아났던 것과는 달리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한다.

(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 니느웨는 줄곧 '큰 성읍'(*, 이르 게돌라)으로 묘사된다(2절;1:2;4:11). 니느웨 성읍은 그 둘레가 약 96Km(480스타디엄)에 달하였고, 1500개의 탑이 있었으며, 성벽은 100피트 높이에, 성벽 위로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인구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들'만 12만 명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4:11), 그 성에는 적어도 60만의 인구가 있었을 것이다(C.L.Feinberg). 이 정도의 규모는 고대 도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이다.

성 경: [욘3:4]

요나는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고, 급기야 니느웨에서 선포 행동을 시작한다.

(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 요나는 당시에 통용되었던 언어로 니느웨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선포했을 것이지만,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끌었을 것이다. 그 선포 기간은 단 하루였으며, 요나의 선포를 직접 들은 범위는 전체 성읍의 1/3 정도에게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 요나의 선포 내용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시험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으로(창 7:4,12; 출 24:18;왕상 19:8), 일정 기간 동안 심판을 유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십 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르바임욤'(*)은 70인역에는 '3일'로 되어 있다. 이는 70인역에서 3절의 '삼 일 길'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황의 급박성을 잘 나타낸다(H.L.Elison). 어쨌든 요나의 선포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정도 유예 기간이 있겠지만 매우 급박하게 시행될 것이었다.

성 경: [욘3:5]

요나가 회개를 촉구하자, 니느웨 백성은 그 경고를 받아들였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주);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 '믿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야아미누'(*)는 히필동사 미완료형으로 전폭적이고도 지속적인 신뢰를 뜻한다. 원문에는 이 단어가 본절 초두에 나와 있어서 강조되고 있다.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신실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회개했음을 잘 보여준다(왕상 21:27; 욜 1:13,14).

성 경: [욘3:6]

(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 요나의 선포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에게도 그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의 왕을 만나서 선포하려 했을 것 같은 암시는 전혀 없다. 따라서 요나의 외침이 먼저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던 왕의 신하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 후에 왕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H.L.Elison).

(주);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 이는 통상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며, 재를 뒤집어 쓴다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상징하는 행동이다(C.F.Keil). 이것으로 봐서 당시의 니느웨 왕은 상당히 겸허한 태도로 요나의 선포를 받아들였던 것이 분명하다. 고대 사회에서 왕의 운명은 성읍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였으므로, 백성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즉각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성 경: [욘3:7]

(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 왕이 대신들과 함께 조서를 내렸다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현상(5절)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주); 사람이나 짐승이나...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니느웨 왕이 내린 조서 내용은 백성들의 태도보다 더욱 급진적인 상황을 보인다. 즉, 금식의 대상에 있어서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확대한 것이다. 이처럼 짐승에게까지 확대한 것은 짐승들을 용서받아야 할 인격체로 인정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짐승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음으로 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소유자들과 이웃들로 하여금 회개와 슬픔을 더하게 하려는 의도이다(J.H.Hertz).

성 경: [욘3:8]

조서의 내용은 단순한 겉치레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태도와 함께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요나의 선포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주);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 '부르짖을 것이며'에 해당하는 '웨이크레우'(*)는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히브리어 원문에는 맨 앞에 나와 강조되었다. 더욱이 '힘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하즈카'(강력하고 힘있게)라는 부사에 의해 본 구절의 표현 자체가 극도로 강조되어 있다.

(주);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항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악한 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다르코 하라아'(*)는 율법과 양심이 정죄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악을 포괄적으로 함유한다. 또한, '강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하마스'(*)는 율법을 어긴 구체적인 범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완전한 증거가 확보되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악을 가리키며,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범죄를 모두 말한다(창 16:5). 그러므로 이는 크고 작은 모든 범죄로부터 돌이키라는 명령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봐서 니느웨의 죄악상이 단지 니느웨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범죄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앗수르인이 타국인들에 대해 저지르고 있는 죄악상을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국제적인 범죄는 당시에 국제적인 관계에서 형성되었던 일종의 불문율과 같은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을 것이다(암 1:3-2:3).

성 경: [욘3:9,10]

본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히브리어 표현은 '나함'(*)으로, 그것을 동일한 어원으로 가진 '그 진노를 그치사'(9절)로 번역된 '니함'(*)과 '뜻을 돌이키사'(10절)로 번역된 '와이나헴'(*)이 해당된다. 이 단어는 감정적인 요소가 포함된 표현으로 '후회하셨다'(repent)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KJV,RSV).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 변화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신 일을 하시지 않는 것이 사람의 눈에는 뜻을 돌이킨 것으로 여겨질 뿐이므로 이렇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라는 표현보다는 '마음을 누그러뜨린다'(relent)라는 번역이 더 적합할 것이다(H.L.Elison).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를 근거로 긍휼을 베푸셔서 진노를 유보하신다.

성 경: [욘3:10]

(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 왕은 니느웨 사람들이 그릇된 행위를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리라는 것을 기대하였다. 사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변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는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형벌을 삼가신다(출 32:14;암 7:3,6).

성 경: [욘4:1]

본장에 들어서면서 요나는 자신의 신앙적 불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주);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 요나가 이런 태도를 보인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신 사실로 인한 것이다. 요나는 단지 니느웨가 이스라엘의 적대국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 성읍이 구원받은 기쁜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드러냈다. '심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그돌라'(*)는 문자적으로 '큰 악'(a great evil)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는 이 단어가 니느웨 사람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줄곧 사용되었지만, 본절에 와서는 요나의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요나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분노를 나타냈던 것이다.

성 경: [욘4:2]

요나는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여호와께 기도로 고한다.

(주);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 그의 기도는 마치 물고기 뱃속에서 했던 기도와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원망을 토로하는 내용으로 일관된다.

(주);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 요나는 니느웨가 심판받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것은 원수를 미워하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성향이다. 당시에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위협적인 나라였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적도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3의 주석을 참조하라.

(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돌판을 주시면서 계시하신 내용이기도 하고(출 34:6,7), 요엘 선지자에 의해 선포되었던 내용이기도 하다(욜 2:13). 특별히 요엘은 자신이 하나님께 불순종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던 사실을 경험했던 까닭에,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자비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M.C.Griffiths). 요나 역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체득하였다. 하지만 요나의 의중에는 이런 고백이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성 경: [욘4:3]

요나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에서 우러나온 감정적인 표출이다. 이는 마치 엘리야가 이세벧을 피하여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드렸던 말씀을 의도적으로 흉내낸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종과 선지자로서 제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체험한 하나님과 이 세상의 질서는 너무 괴리가 심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저의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더 살아서 무엇합니까?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깨달음이 있게 해주십시오"(H.L.Ellison). 그만큼 요나는 니느웨의 구원을 목도 하면서 세상 현실에 대해 상당한 괴리감을 맛보고 있었을 것이다.

성 경: [욘4:4]

요나가 불만을 토로하자, 여호와께서는 요나의 분노가 매우 성급한 것임을 지적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책망하시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요나로 하여금 자신이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께서 심판을 거두시지 않고 유보한 것이므로 다시 심판을 시행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성 안에 거하거나 떠나버리지 않고, 성 밖에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봤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C.L.Feinberg). 요나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마음을 바꾸셔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을까 지켜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성 경: [욘4:6]

(주); 하나님 여호와께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 엘로힘'은 본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처음에는 요나가 하나님에 대한 명칭으로 단지 '아도나이'(*)만을 사용하다가(1,2장) 니느웨 백성들에게 '엘로힘'을 사용하여 하하나님의 전능성을 부각시켰고(3장), 본문에 이르러서 둘을 합친 용어를 사용하여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주); 박 넝쿨을 준비하사...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 요나는 이미 초막을 지어서 그늘을 만들어 두었기(5절)때문에, 박 넝쿨의 그늘이 주는 시원함으로 인해 기쁨을 맛보았다기보다는 녹색 식물성 감상하며 그로 인해 기뻐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준비하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만'(*)은 '정하다','제공하다','준비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로, 이미 '물고기'(1:17)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본문맥과 관련하여 '박 넝쿨, 벌레(7절), 바람(8절)'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주권과 결정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원래 목적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심판에 처하지 않고 용서해준 당신의 뜻을 체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성 경: [욘4:7]

앞에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여 요나로 하여금 기쁨을 맛보게 했지만, 본절에서는 박넝쿨 대신 벌레를 준비하여 그 기쁨을 빼앗아 버린다. 이로써 하나님은 니느웨의 백성들이 박넝쿨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요나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성 경: [욘4:8]

박 넝쿨의 이파리가 벌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 그늘이 없는 상태에서 뜨거운 바람과 태양으로 요나를 괴롭게 한다.

(주); 해가 뜰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 소위 시로코(Sirocco)라고 불리우는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며,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D.Baly).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불쾌 지수가 높아져서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도 까다로와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아무 이유 없이도 서로 싸우며, 온갖 초목은 메말라 버린다.

성 경: [욘4:9]

하나님은 일연의 시험 과정을 거친 후에 요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유도하신다.

(주); 네가...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헤이테브 하라'는 앞에서(4절)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보고 성냈을 때, 질문했던 것과 똑같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박 넝쿨이 시들자 이것도 못마땅하게 여긴 점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 이 표현은 요나의 극도로 화가 난(exceedingly angry)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문맥적으로 보면, 뜨거운 시로코 바람과 태양열로 인해 요나가 화를 낸 이유가 넝쿨이 제공하는 그늘이 없어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5절에서 요나가 '초막'을 지은 사실에 비추어 보건대, 단지 그늘 때문에 그러했다고 볼 수는 없고, 녹색 식물을 바라보는 기쁨을 상실한 것에 대해 분노를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H.L.Ellison). 이처럼 요나는 자신의 유익이 사라지자 성을 내고야 말았다.

성 경: [욘4:10]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비롯해서 벌레와 동풍 등을 이용하여 요나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지 체득하게 하시고, 본절에 이르러서는 그것들을 준비하신 의도를 밝히신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 '아꼈거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세타'의 원형 '후스'는 다음 절에 나오는 '아끼는 것'과 동일하다. 이는 요나의 내적 상태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교훈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요나가 하찮은 박 넝쿨을 아낀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니느웨 성의 사람들을 아끼신다는 것이다.

성 경: [욘4:11]

(주);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에 대한 해석은 주로 (1)니느웨의 모든 인구를 가리킨다는 해석과, (2)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유아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3)이 두 견해를 종합한 해석으로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유아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 이 가운데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 즉, 인간적인 관점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는 듯한 사람들의 부류를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시는 관심이 어떤 것인지 잘 나타낸다.

(주);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과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철회한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니느웨가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사실은 유대인의 우월주의를 반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민족적인 제한이 없는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하다(암 9:11,12; 행 1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