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홈 > 성경 > 성경주석신약 > 골로새서
골로새서
골로새서 주석



성 경: [골1:1]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문안 인사]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 본서의 서두는 바울과 골로새 교회가 피차 처음 알게 되는 상황이므로 담담하게 바울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의 의미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단순히 '심부름을 하는 자'의 의미가 아니라 '파견자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Vaughan).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정당한 자신의 권위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권위는 스스로 취한 것도 아니요 사람들의 추천으로 된 것도 아니다(고후 3:1). 오직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권위와 권능을 대변하는 자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감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권위의 연속성(連續性)을 주지시키고자 함이다.

⭕ 형제 디모데 - 디모데는 본서 외에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된다(고후 1:1; 빌 1:1; 살전 1:1; 몬 1:1). 이는 디모데가 여러 지역의 교회들에 상당히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서에서 바울이 디모데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디모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디모데를 자신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친근감을 주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을 처음 만났고 바울과 동행하면서 함께 사역하였다(행 16:1; 고후 1:19).

성 경: [골1:2]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문안 인사]

⭕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 '성도들'(*, 하기오이스)이란 말은 '신자'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며, 여기에는 구약적 배경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별하여 선택하였고, 이렇게 '성도'로 불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높은 지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요청받았던 것이 전제된다. 골로새 교인들도 '성도'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O'Brien).

⭕ 그리스도 안에서 - 이는 성도의 영적 위치를 강조하는 말로 성도는 한 육체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이다(Vaughan).

⭕ 신실한 형제들 - 만약 골로새 교인들이 인격적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투철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면 그들은 마치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1절), 바울과 영적 형제가 될 것이다.

⭕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 바울의 편지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생략한채 아버지의 이름만을 언급한 것은 본 서신이 유일한 예이다(Lightfoot). 한편 헬라어 서신 형식에서 발신인은 '...로부터'에 의해 드러나는데 본문에서는 '...로부터'가 '아버지 하나님'에 붙어 있다. 이것은 본 서신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 은혜와 평강 - '은혜'(*, 카리스)는 하나님에게서 흘러 넘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값없이, 자격을 묻지 않고 주시는 것이다. 즉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을 가리킨다. '평강'(*,에이레네)은 '은혜'에 의하여 귀결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한편 여기까지는 당시의 헬라적 서신의 서문이라고 할 수있다. 발신자의 이름, 수신자의 이름, 그리고 인사와 기원이 이어지는 형식은 전형적인 헬라식 서신의 서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편지의 서문에 그치지 않는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하는 시간에 온 회중들에게 낭독되었다(4:16). 예배시간에 회중들에게 들려진다는 의미에서 이 편지의 서문은 단순한 인사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정 사실화하는 구약성경의 축복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O'Brien).

성 경: [골1:3]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 바울의 편지 서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같이 언급되는 경우에도 감사의 부분에서는 '내가'라는 단수형으로 서술되는 것과 달리 본문에서는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표현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저자 문제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Bruce). 즉 전자의 경우에는 바울이 단독 저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공저자(共著者)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공저자라면 그는 디모데일 것이고 이는 디모데가 실제적으로 서신 집필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곁에서 심정적으로 함께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기도할 때마다'는 바울이 늘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했다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고'라고 번역하여 이 의미를 살리고 있다. 이는 바울이 비록 골로새를 방문한 적은 없지만 계속해서 골로새 교회에 대한 사도직을 수행해왔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 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돌려진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묘사했는데(2절) 여기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서술하고 있다(요 14:6). 따라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우리의 아버지이다(요 20:17).

성 경: [골1:4]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 바울은 직접 골로새 교회를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들어서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알고 있다. 아마 에바브라를 통해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7절; 4:12). 바울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의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일 수도 있고(Calvin),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Bruce). 이 둘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바른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은 성도들간의 폐쇄적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도들간의 사랑이 더 긴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복음이 땅 끝가지 전파되면 이 사랑은 온 인류의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은 믿음과 긴밀하게 결합된다. 사랑은 믿음의 구체화(具體化)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믿음의 열매요 참증거인 것이다(Carson).

성 경: [골1:5]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하늘에 쌓아둔 소망 - 본절의 '소망'은 앞절의 '믿음', '사랑'과 밀접하게 결합된다. 이 '소망' 때문에 믿음과 사랑이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소망은 하늘에 대한 소망이다. 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산 결과 하늘에서 받게 될 영광스러운 보상 즉 하늘의 축복에 관한 소망이다.

⭕ 복음 진리의 말씀 - 복음과 진리는 서로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진리' 곧 '복음'은 사람들을 하늘의 소망에로 인도하며 믿음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복음에서 비롯된다(롬 10:17). 또한 복음의 진리는 참다운 가르침과 사이비 교훈을 구별해 주는 척도가 된다.

성 경: [골1:6]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하나님의 은혜 - 복음이 말 그대로 좋은 소식인 것은 그것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핵심으로 한다(Carson).

⭕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 복음은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르렀고 온 천하에도 이르렀다. 여기서 '온 천하'는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당시 복음이 다메섹, 다소, 안디옥, 고린도, 에베소뿐만 아니라 로마에까지 전파된 것을 염두에 두고 '온 천하'란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O'Brien). 즉 바울은 복음이 끊임없이 그 영역을 확대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Vaughan).

⭕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복음은 열매를 맺게 하고 자라게 하는 능력을 지닌다.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은 각각 복음의 내적 활동과 외적 팽창을 나타낸다. 또한이 두 동사가 현재 중간태분사로 되어있는 것은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복음의 역동적 활동을 암시한다(Vaughan).

성 경: [골1:7]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 - 바울이 에바브라를 '함께 종 된'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그를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인정하였음을 뜻한다. 본문의 '에바브라'는 빌립보 교회의 신실한 일꾼이었던 '에바브로디도'(빌 2:25; 4:18)와는 다른 인물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태생으로(4:12), 그곳뿐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도 큰 활약을 한 사역자로 보이며 어떤 혐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 바울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했다(몬 1:23).

⭕ 배웠나니 -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아 열매를 맺게 된 것은 바로 에바브라의 선교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인들이 받은 복음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 '너희를 위하여'는 '우리를 대신하여'(공동번역)로 볼 수 있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사본들도 많다. 물론 에바브라의 복음 사역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골로새에 갈 수 없는 바울을 대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바브라는 바울의 동역자(同役者)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바브라의 일꾼 됨은 바울에게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소급되는 것이다(Carson).

성 경: [골1:8]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자니라 - 에바브라는 바울을 대신해서 골로새를 방문해 복음을 전했고 바울에게 되돌아와서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적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열매를 맺으며 자란다는 것의 한 가지 증거는 그들에게서 사랑이 생겨났다는 것이다(4절). 이 사랑은 그 동기와 출처가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이다. 칼빈(Calvin)은 이것을 '영적인 사랑'이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본 서신 전체에서 성령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본문이 유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은 '너희 사랑'이라는 말의 본질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골로새 교인들이 지니고 있던 사랑은 다름 아닌 성령께서 일깨워 준 것이었다(Vaughan).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사랑이 넘쳐나는 곳, 그곳이 바로 이상적인 교회의 모형이다.

성 경: [골1:9]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이로써...우리도 듣던 날부터...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여기서부터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에바브라의 귀환과 골로새에 대한 소식의 청취에서 강하게 동기지워진 것이다.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들은 골로새 교회의 상황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상황, 즉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대해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불만이 점잖은 방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Scott).

⭕ 신령한 지혜와 총명 - 공동번역은 이를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분명 '지혜와 총명'은 성령의 역사의 산물이다.

⭕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성령께서 주신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아는 것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피그노신'(*)에서 '알다'는 피상적인 인식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을 뜻한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요구, 뜻을 깨달아아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온전한 지식이다(O'Brien).

성 경: [골1:10]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주께 합당히 행하여 - 본문은 당시 교회들에서 사용되었던 정형화된 격언과도 같은 것이었다(엡 4:1; 빌 1:27; 살전 2:12).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의 필연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다(9절). 이것은 기독교의 지식이 지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신앙적 행실을 지향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Lightfoot).

⭕ 범사에 기쁘시게 - '주께 합당히 행함'은 구체적으로 '주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쁘시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레스케이안'(*)은 거의 아부에 가까울 정도로 상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미리 알아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에게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모종의 반대 급부(給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 '열매를 맺게'(*, 카르포포룬테스)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도의 삶이 계속해서 열매맺는 것임을 말해준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불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구체화이다.

⭕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 '하나님을 아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같은 의미일 수 있으나 전자가 후자보다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암시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성 경: [골1:11]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께 합당한 삶, 그리고 열매 맺는 삶을 넘어 하나님의 권능을 골로새 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으로 향하고 있다. 본문의 '능하게 하시며'(*, 뒤나무메노이)는 현재형으로, 성도에게 발휘되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영광의 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더듬어 올라갈 수 없는 초월적 영역에서 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의 예수를 일으킨 능력이요, 환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이다.

⭕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견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는 정해진 목표 지점을 향해 고난을 무릅쓰며 정진하는 것을 뜻하는데, 경주자가 총력을 기울여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다(히 12:1). 결국 '견딤'은 유혹과 저항을 물리치고 한 곳 목표만을 향하여 묵묵히 달려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오래참음'(*, 마크로뒤미안)은 무거운 짐에 눌리거나 실패를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불굴의 투지(鬪志)를 가리킨다. 분명 '견딤'과 '오래 참음'은 즐거움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기쁨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바로 '영광의 힘'을 좇아오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한다.

성 경: [골1:12]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 '기업'에 대한 언급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 영토를 분배받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것이 하나님의 옛 백성들에게 주어진 '육적인 기업'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분깃은 '영적인 기업'이라고 할수 있다. 한편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산티'(*)는 근본적으로 '충분하게 하다', '적절하게 하다'는 뜻으로 갖추어진 자격을 의미한다. 이 자격은 인간이 자생적으로 구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것인 바 자격없는 자를 회개시켜 빛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Vaughan).

⭕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 본절의 요지는 '감사'이다. '감사'는 '열매 맺음', '자라남', '능하게 됨'에 이어지는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성도의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격없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격을 주며 장차 받을 영적 기업까지 허락하셨으므로 감사는 그 은혜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성 경: [골1:13]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흑암의 권세 - 이는 앞절의 '빛 가운데서'와 대조된다. 이러한 대조는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 나오고 쿰란의 문서들에서도 발견되는 개념이나 바울이 여기서 그들의 개념을 빌어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악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흑암'과 '선한 세력'으로 상징되는 '빛'의 대조는 보편적인 인간 세계의 개념이라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의 '흑암의 권세'는 일찍이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 직전에 체포되셨을 때 예수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에 대해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있는 바(눅 22:53), 그 세력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성도들을 탄압하거나 오도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배후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비가시적인 사단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 '사랑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란 뜻이며 '나라'(*, 바실레이안)는 종말론적이고 영토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요 3:3-5)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장차 기업으로 받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전혀 배제할 수도 없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며 반드시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래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지금 성도들의 마음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Vaughan).

성 경: [골1:14]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감사와 기도]

⭕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 '구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트로신'(*)은 '값을 지불하고 어떤 대상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취하였음을 말해준다(롬 3:24, 25; 엡 1:7; 히 9:14, 15).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 경: [골1:15]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고후4:4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복음서에 의하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고 했고 예수 자신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선언하기도 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분명한 현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실체, 본성, 그리고 영원성에 있어서 성부와 그리스도가 완전한 동등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최초로 창조된 피조물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아리우스(Arius A.D. 256-336)는 본절을 근거로 그리스도도 피조물이었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본문은 결코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본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요 1:1, 2; 8:58; 히 1-3; 10:5-9). 본문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시간적으로 만물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고 그런 만큼 만물에 대한 우월성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준다(Carson).

성 경: [골1:16]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 '그에게 창조되되'에서 '그에게'(*, 엔 아우토)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실재적 주역임을 말해준다. 본절의 후반부에 나오는'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라는 표현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원인이자 목적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서 나왔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며 그를 향하고 있다(요 1:3; 히 1:2).

⭕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 - 이는 골로새 교회 이단자들의 사상 체계에서 뚜렷이 부각되었던 천사 계급에 관한 암시인 듯하다. 본문을 천사들 중에도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천사들의 계급이 아니라 천사들 조차도 그리스도의 창조에 종속된다는 사실이며, 이로써 당시에 퍼져 있던 천사 숭배가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음을 말해주는 데 있다(Vaughan).

성 경: [골1:17]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 이는 다소 철학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만물의 통일의 원리이며 모든 창조물을 유지하는 분임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온 우주에 혼돈 대신 조화를 가져다 주는 응집의 원리이신 것이다(Lightfoot). 이것은 단지그리스도가 피조된 세계의 외적 질서의 중심이 되심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할 때 본질적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성 경: [골1:18]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 바울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성도들 상호간의 긴밀한 유기체적 관계와 통일성을 강조하곤 했다(롬 12:4, 5; 고전12:12-27).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몸으로서의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사면받고 성도가 된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본질적으로 설명해준다. 성도들은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는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갖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첫째, 그리스도와 교회는 매우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와 더불어 그의 생명을 공유한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음으로써만 삶을 얻을 수있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권자로서 절대적 지배권(支配權)을 갖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주권자인 그리스도의 뜻과 명령에 복종함으로써만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

⭕ 그가 근본이요 - 그리스도가 '근본'이 된다 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보다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연관이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또한 성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존해서만, 그리스도에 근거해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시다.

⭕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 '으뜸'(*, 케팔레)이라는 말은 만물과의 차별적 우월성을 말하는 것인 바, 이 차별성은 상대적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차이이다.

성 경: [골1:19]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 본절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본문의 주어가 '하나님'이냐 '충만'이냐 하는 것과 '충만'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하나님'을 주어로 취하고 있는 반면, RSV는 '충만'을 주어로 삼고 있다. 적어도 문법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충만'을 주어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렇게 볼 경우 다음절(20절)의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다'에 대한 주어도 '충만'이 되어야 하는데 바울의 신학에서 화목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충만'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어로 보는 것이 문맥상으로나 신학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충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마'(*)는 그 의미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기 때문에 해석이 분분하다. (1) '의와 지혜와 권능 그리고 모든 축복의 충만'이다(Calvin). (2) '은혜의 충만,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모든 부요함'이다(Eadie, Alford). (3) '매우 충만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의 모든 것'이다(Moule).(4) '하나님의 온전하신 본성'이다(Phillips, Lightfoot). 이러한 견해들은 서로 상치(相馳)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성을 보인다. 2:9을 염두에 둘 때 '하나님의 속성과 권능의 충만'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성 경: [골1:20]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하나님의 신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충만하게 임했다는(19절) 그 충만함은 하나님과 만물을 화해하게 할 수 있는 자격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예수의 단순한 중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쳐 피흘림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 '화평을 이루사'의 헬라어 '에이레노포이에사스'(*)는 과거분사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이루신 평화가 단번에 되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 예수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긴 화해의 효력은 무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어떤 것도 예수의 희생이 가져다주는 화해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동적으로 화해에 참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예수 희생의 효력이 무제한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거역하던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고 화해의 은총을 거부한다면 그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있다.

성 경: [골1:21]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 앞에서는 예수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것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면 본문에서부터는 그것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개개인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은 먼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다. 예전 골로새 교인들의 실존은 '멀리 떠나'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거리가 먼 것으로 규정된다. 그 멀어진 거리의 공간에는 악한 행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다. 여기서 '악한 행실'과 '마음으로 원수됨'의 순서에 유의해야 한다. 즉 악한 행실의 결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됨으로 해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악한 행실'이었다는 것이다(Vaughan).

성 경: [골1:22]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 '이제는'이라는 전환 문구로 인도되고 있는 본절은 '하나님과의 원수됨'에서 '하나님과의 화해'로의 변화를 말한다. 바울은 이 전환의 중심에 예수의 피 흘림이 있었음을 이미 말한 바 있다(20절). 그런데 본문에서는 '피흘림'을 '육체의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육체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골로새 교회에 유입되거나 주변에 유포(流布)되었던 이단적 사상들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육체를입은 존재가 아니라 천사에 비견되는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만 매개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인 바, 바울은 그들을 겨냥해서 그리스도의 육체성을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Bruce). 아울러 바울은 본문을 통해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그런 이단사상에 말려들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Martin).

⭕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 예수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화해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습은 실제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해의 실질적 효력 발생으로 하나님의 '칭의' 선언이 주어지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현재적인 것이냐 미래적인 것이냐 하는 것은 양자 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적이나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Bruce).

성 경: [골1:23]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권위]

⭕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물론 여러분은 튼튼한 믿음의 기초위에 굳건히 서서 여러분이 이미 받아들인 복음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신앙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본문을 미래적인 것에 대한 조건문으로 보지않고 오히려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저자 바울의 확신에 찬 표현으로 보고 있다(Nicholson, Radford). 이렇게 볼 때 본절은 앞절(22절)에서 말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위해서 튼튼한 믿음의 기초 위에 바로 서는 일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소망을 굳건히 지키는 일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 된다. 여기서 '믿음'은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요, '복음의 소망'은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 모든 믿는 자들이 소유하게 될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 '천하 만민'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복음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본 구절이 수사적 과장의 표현도 아니다. 오히려 본절은 6절에 표현된 것처럼 당시복음이 계속하여 널리 전파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는다(O'Brien). 즉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고립된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복음이 하나님께 기원(起原)하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진정한 것임을 말해준다(Bruce).

⭕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 이것은 거짓 복음의 전파자들과 바울 사이에서 혼동하고 있는 과로새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전한 '소망의 복음'(23절)과 만민에게 전파된 보편적 복음을 위해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도요 일꾼이었다.

성 경: [골1:24]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불충분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당연히 받아야하는 고난인 바 유기적인 관계에서 머리가 당하는 고난을 몸의 각 지체가 필연적으로 느껴야 하는 고난이다(Lightfoot).

성 경: [골1:25]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 바울은 자신의 '일꾼'됨의 기원이 하나님께로 소급되어 올라감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사도직의 진정성 및 권위를 분명하게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경륜'(*, 오이코노미안)은 '청지기'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따라'로 해석하고 있다(by thecommission God gave, NIV). 바울의 이 청지기직은 바로 '너희' 즉 이방인인 골로새교인들을 위하여 부여된 것임을 골로새 교인들은 인식하여야 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 '이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로사이'(*)는 문자적으로 '채우다', '가득하게 하다', '완성하다'는 의미이나 본문에서는 선교사역과 관련하여 '전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delivering, JB, O'Brien). '플레로사이'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신약의 용례는 롬15:19이다('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전파하였음을 밝히고 있다(Carson).

성 경: [골1:26]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이 비밀은...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비밀'(*, 뮈스테리온)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말씀'과 상응한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왔던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나타났었다(단 2:19,28, 2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받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드러났다(Carson).

성 경: [골1:27]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하나님이...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비밀인 복음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부연 설명한다. 바울은 '풍성함'(*, 플루토스)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롬 2:4), '영광의 풍성함'(엡 1:18; 빌 4:19), '지혜의 부요함'(롬 11:33), '은혜의 풍성함'(엡 1:7; 2:7) 등으로 자주 사용했다. 또한 바울은 '놀라울 만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풍성함'이란 말을 사용했다(Caird). 이와 같이 바울서신 중에 나오는 '풍성함'은 신적인 것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Scott). 본절에서 바울은 '풍성함'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이방인들의 회개, 곧 그리스도와의 한 몸됨의 신성한 경이(驚異)를 표현하고 있다.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 공동번역은 본문을 '이 심오한 진리는 곧 이방인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또 영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방인인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것 즉 골로새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하는것, 이것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성취된 것을 말해줌과 동시에(25절)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가질 소망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성 경: [골1:28]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 '우리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이스'(*)는 일인칭 복수 강조형으로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는 적대자들과 바른 진리를 전파했던 바울, 디모데, 에바브라를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광의 소망'되시는 그리스도만을 전했다.

⭕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 '권면과 가르침'은 바울의 사도직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사도의 전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으로(27절)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아니다.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22절) 설 수 있도록 신앙의 진보가 있어야 한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직무는 궁극적으로 성도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것이다.

성 경: [골1:29]

주제1: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주제2: [바울의 순종]

⭕ 이를 위하여 -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 성도들을 권면하고 가르쳐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능력의 원천이 자기 밖에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있다.

⭕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 바울이 사도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그리스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사도의 수동성 즉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진가를 드러내는 것은 바울 자신의 사도적 소명 의식의 철저성과 전적 헌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이방 선교를 수행하면서 괴로움을 받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교회를 위해 헌신한 것은(24절), 그리스도의 능력주심과 아울러 바울의 사도적 충성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성 경: [골2:1]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 '라오디게아'는 골로새 근처 루카스 평야에 있는 소아시아의 중요한 도시로 문화와 예술이 발달했고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도시이다. 바울은 이 도시에 자신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4:16 주석참조). 또한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라는 것은 바울이 직접 사역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로서 아마도 에바브라가 사역한 히에라볼리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Hendriksen, O'Brien).

⭕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힘쓰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나'(*)는 전투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를 위하여 벌인 전투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아고나'가 순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ohmeyer). (2) 혹자는 '아고나'가 믿음과 복음을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fitzner).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바울이 옥중에서 복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위하여 벌인 투쟁은 영적인 것으로서 중보 기도를 시사한다(O'Brien, Vaughan, Bruce). 당시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거짓 교훈들과 대적하는 상태였다. 그러기에 바울은 비록 자신이 설립하고 전도하지 않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로 영적 투쟁을 하고 있었다.

성 경: [골2:2]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사도적 노고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인들 그리고 바울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이유를 설명한다.

⭕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 바울은 거짓 교훈들과 대적하여 투쟁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로 돕고 있음을 밝힘으로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위안'은 슬픈 일을 당했거나 실의에 빠진 마음을 위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 의해 흔들리는 마음을 강하게 잡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힘을 얻어 거짓 교훈에 잘 대적하게 하기 위함이다(Vaughan).

⭕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 바울이 중보 기도를 통해 영적 투쟁을 하는 목적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교인들 모두가 온전히 서게 됨으로(3:14) 분열되지 않고 거짓 교훈에 강력하게 대항하게 하기 위함이다.

⭕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 '이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세오스'(*)는 통찰력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이 통찰력을 가지고 거짓 교훈을 분별하여 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온전히 서게 되기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였다(O'Brien, Hendriksen).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바울이 그들에게 간절히 원했던 궁극적인 목적이다.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뮈스테이우 투 데우 크리스투'(*)에서 '투 뮈스테리우 투 데우'와 '크리스투'는 동격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임을 시사한다(Vaughan, Bruce, O'Brien).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이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한다.

성 경: [골2:3]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다. '지혜와 지식'은 같이 연결되어 나타난다(롬 11:33;고전 12:8). 지혜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가리키며 지식은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리킨다(Carson).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들이 초자연적 존재들과 연결되어서 타인보다 훨씬 우월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Vaughan). 그러한 거짓 교훈에 대해 바울은 모든 지혜와 지식이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진술로 반박하며(4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감취어 있느니라'는 사람이 자력으로 찾아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비밀이었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이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밝히 드러났다(1:27;엡 1:9, Bruce).

성 경: [골2:4]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 바울은 앞절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1-3절)이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인들 그리고 그 외에 그리스도인들을 속이려는 거짓 교사들을 대적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공교한 말'은 설득하려는 말로서 '속이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Vaughan, O'Brien, Lighfoot).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여 그리스도를 떠나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궤변을 진실처럼 가장하여 현혹시키고 있었다.

성 경: [골2:5]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 너희와 함께 있어 - 본절은 비록 바울 자신의 육신이 옥중에 있기 때문에 거짓 교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과 같이 있을 수 없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로 애쓰고 있음을 시사한다.

⭕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 '규모'의 헬라어 '탁신'(*)은 군대에서 군인들이 질서 정연하게 정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거짓된 진리로 교인들이 잘 훈련받은 군인들처럼 분열됨이나 흐트러짐 없이 강력하게 맞서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굳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레오마'(*)는 '확고하게 만들다'를 의미하는 '스테레오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골로새 교인들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거짓 교사들의 유혹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견실(堅實)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 중 소수만이 '공교한 말'에 현혹되어 그리스도를 버렸을 뿐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믿음을 견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듣고 기뻐한다.

성 경: [골2:6]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 본절은 골로새 교인들이 사도들과 같은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신앙의 내용을 전송받았음을 나타낸다.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 전송받았다(O'Brien). 골로새 교인들이 받아들인 기독교의 유전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는 신앙이다.

⭕ 그 안에서 행하되 - '행하되'에 헬라어 '페리파테이테'(*)는 어떤 특별한 행위 보다는 일상적인 생활을 가리킨다(롬 14:15;고후 4:2;갈 5:16). 골로새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서 모든 미혹하는 것들을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된 삶을 살아 가야 한다.

성 경: [골2:7]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복음의 일꾼된 바울]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 바울은 본절에서 신앙이 깊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뿌리를 박으며'의 헬라어 '에르리조메노이'(*)는 식물을 비유한 것으로 완료형이다. 이 완료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 단번에 그리고 영구적으로 되어진 것임을 시사한다(Vaughan).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과거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에 대한 신앙이 자리를 잡았다. 한편 '세움을 입어'의 헬라어 '에포이코도무메노이'(*)는 터 위에 건물을 지어 올라가는 형상을 비유한 것으로 현재 시상이다. 이것은 이미 완료되어 뿌리를 박은 터 위에서 이제는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 함을 시사한다.

⭕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서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교훈'은 에바브라가 전하여 준것을 가리킨다(1:7).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가 전하여 준 주 되신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가운데 머무를 뿐만 아니라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감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넘치게 하라'의 헬라어 '페릿슈온테스'(*)는 문자적으로 '강물이 제방을 넘쳐 흐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 시상이다. 이는 골로새 교인들의 감사 생활이 몸에 배어 일상화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받은 교훈에 충실하고 믿음에 굳게 설 때 그들의 삶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가 넘치게 된다.

성 경: [골2:8]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진리의 말씀인 복음과 대조 개념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골로새 교인들을 거짓 교훈으로 이탈시키려 하는 영지주의 철학을 가리킨다. '노략할까'의 헬라어 '쉴라고곤'(*)은 본래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아 그들을 노략물로 취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헛된 속임수와 철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가 죄의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O'Brien). 바울은 이러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대해 두 가지로 정의한다.

⭕ 사람의 유전 -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에바브라에게서 전해받은 유전인 사도적 전승(6절;1:7)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인간들이 꾸며낸 거짓 교훈을 가리킨다(막 7:8;벧전 1:18).

⭕ 세상의 초등학문 - '초등학문'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토이케이아'(*)는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과 마귀 혹은 종교적 지식의 미숙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O'Brien, 갈 4:3 주석참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거짓 교훈에서 비롯된 '천사 숭배'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18절). 거짓 교사들이 골로새 교인들을 미혹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거짓 영과 같은 것을 섬기는 데서 비롯된 우상숭배인 것이다.

성 경: [골2:9]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 '신성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데오테토스'(*)는 고양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본질로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적절한 형상임을 시사한다(Meyer).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 그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1:19 주석참조).

⭕ 육체로 거하시고 - '거하시고'에 해당하는 '카토이케이'(*)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계속적으로 거주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성의 충만이 부활하시고 고양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Schweizer, O'Brien, Vaughan). 한편 '육체로'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지 않았다는 가현설(假現設)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분명한 반박으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지니고 오셨음을 시사한다(Moule, 요 1:1,14).

성 경: [골2:10]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신성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즉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취된다(Carson, Vaughan, 요 1:16;엡 3:19).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것 즉 골로새 교인들이 당면한 거짓 교사들의 철학이나 모세의 율법 의식이나 이방인들이 섬기는 천사 숭배 같은 것들을 채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연합하시며 거하시기 때문이다.

⭕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 본절은 바울이 천사 숭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정사와 권세'는 당시 골로새 교회에 존재했던 거짓 교사들이 주장한 천사 계급을 나타내기 때문이다(Bruce). 그리스도는 이런 천사들의 '머리'가 되신다. '머리'는 '통치'나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가 있음을 시사한다(Vaughan, Bruce).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정사와 권세들'까지 창조하셨기 때문이다(1:16).

성 경: [골2:11]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 '할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에 맺은 언약을 나타내는 외적 표징이다(창 17:10-14,23-27;출 4:25;12:44-48;레 12:3). 구약에서 '육체적 할례'가 '마음의 할례'로 전이 되어 윤리적 요소를 강조하였으나(신 10:16;렘 4:4;겔 44:7) '마음의 할례'가 '육체적 할례'를 대신하지 않았다(Bruce, O'Brien). 바울도 본절에서 '손으로 행한 할례'가 '육체적 할례' 대신에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곧 '영적 할례'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울은 '영적 할례'를 두 가지로 정의한다.

⭕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본절의 '육적'에 '아우투'(*, '그의')를 삽입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le, Beasley-Murray). 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으셨을 때 즉 돌아가셨을 때 육적 몸이 벗겨진다. (2) 혹자는 본절이 세례와 관련된 것으로 세례를 통해 옛 본성 또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3:9;롬 6:6;7:24;갈 3:27, Lohse, O'Brien, Caird).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고 본다.

⭕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할례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킨다(Bruce, O'Brien). 그리스도께서 아기 때 받으신 할례는 예표에 불과하며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할례인 자신의 죽음심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적 할례를 시사한다(O'Brien, Schweizer).

성 경: [골2:12]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본절은 앞서 언급한 '영적 할례'의 외적 표현이 세례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골로새 교인들이 경험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동반한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사실을 확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갖고 있었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게 되며 죄의 종노릇에서 풀려나게 된다(롬 6:3).

⭕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다시 살리신 사실을 믿음으로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사람을 입으며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롬 6:4,11).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부활 사건이 미래에 일어날 일로 언급되었으나(3:1;엡 2:6) 본절에서 '쉬네게르데테'(*,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는 부정과거로서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일이며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일임을 시사한다(Bruce).

성 경: [골2:13]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 13-15절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이전의 인간은 죽은 상태이다. 이 죽음은 '범죄'와 '무할례'로 말미암은 것으로 '범죄'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타락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며(히 6:6) '무할례'는 골로새 교인들이 과거에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던 상태였음을 시사한다(O'Brien, Carson). 이렇듯 골로새 교인들은 과거에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었다.

⭕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 과거 이방인으로서 무할례자였던 골로새 교인들은 이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11절)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 진정한 할례당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현재 새 생명을 누리고 있다(12절).

⭕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 '사하시고'의 헬라어 '카리사메노스'(*)는 '카리스'(*, '은혜')에서 파생한 것으로 '은혜로 인정해 주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과거의 죄악이 사해졌다. 이러한 속죄는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Vaughan, Carson). 한편 '너희'에서 '우리'로의 인칭 대명사 변화는 골로새 교인과 같이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속죄 받았음을 시사한다(O'Brien).

성 경: [골2:14]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 - '증서'의 헬라어 '케이로그라폰'(*)은 문자적으로 '손으로 쓴 문서'를 뜻하는 것으로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고소장(Scott). (2) 자술서(Barclay). (3) 채무증서(Bruce, Carson). 한편 '의문에서 쓴 증서'는 '규례나 율법적인 계명을 쓴 증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죄의 결과를 규정함으로 대가를 치르어 형벌을 받아야 함을 선고하여서 인간을 공격한다(롬 3:20).

⭕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괴롭히는 율법을 무효화시키셨다. 바울은 율법의 폐지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1) '도말하시고'의 헬라어 '엑살레이프사스'(*)는 문자적으로 '문질러서 지우다'라는 의미로 증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모두 지우고 새롭게 출발함을 뜻한다(O'Brien). (2)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의 헬라어 '에르켄 에크 투 메수 프로셀로사스 아우토 토 스타우로'(*)는 문자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사 제하여 버리시고'라는 의미이다. '에르겐'은 완료형으로 율법을 제하신 효력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율법이 십자가에 못박힘을 의미하여 율법의 완전한 폐지를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율법의 제약이나 율법의 고발에 제한받지 않는다(Hendriksen, Carson, Bruce).

성 경: [골2:15]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세상의 헛된 철학]

⭕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 '정사와 권세'는 적대적인 초자연적 존재들 즉 악한 천사들을 의미한다(10절;1:16;엡 6:12). 한편 '벗어 버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뒤사메노스'(*)는 중간태이다. 그래서 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정사와 권세의 옷을 벗어 버려 해방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ightfoot). 그러나 여기서의 중간태는 능동태 의미를 갖는 것으로(Robertson) 하나님께서 정사와 권세들의 세력을 쳐서 완전히 무장 해제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O'Brien, Vaughan).

⭕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 '드러내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에데이그마티센'(*)은 '본보기로 보이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정사와 권세들의 진정한 특성 즉 정체를 보여주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패배당해 무장 해제된 정사와 권세의 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냄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심을 시사한다(Vaughan, O'Brien, Carson). 한편 '승리하셨느니라'의 헬라어 '드리암뷰사스'(*)는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로마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적대 세력인 정사와 권세를 완전히 패배시켰음을 암시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정사와 권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승리자의 자리에 동참하게 된다.

성 경: [골2:16]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그러므로...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 '그러므로'는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와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사실은 율법의 완전한 패배와 폐기를 의미한다. 한편 '폄론하지'는 '판단하다'라는 의미로 율법이 완전히 폐기되었기 때문에 율법 규례의 준수 여부로 인해서 판단받아서는 안됨을 시사한다.

⭕ 먹고 마시는 것 - 이것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음식에 대한 규정을 가리킨다기보다는(레 7:20-27;민 6:3)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적 경향을 나타낸다(막 7:19).

⭕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 본문은 유대인들의 성일(聖日)을 가리킨다. 이런 '성일'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특별한 날이며(LXX, 대상 23:31;대하 31:3;겔 45:17) 율법에 대한 순종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택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O'Brien).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기시키셨기에 이러한 날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초등 학문에 불과한 것이다(갈 4:9-10).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날들의 준수 여부에 따라 판단받거나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성 경: [골2:17]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와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그러한 것들은 실체를 암시하는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히 8:5;10:1). 몸 즉 실체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림자'들은 폐기되었다(NIV).

성 경: [골2:18]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본절은 골로새 교회에 퍼져있던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고이다. '일부러 겸손함'은 위선적인 겸손을 가리켜며 '천사 숭배'는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영적 존재인 '천사'를 숭배하는 것으로 거짓 교사들의 헛된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은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거짓교사들은 인간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직접 경배드리는 것은 교만한 것이므로 그보다 못한 천사에게 경배해야 하며 그것이 곧 겸손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Lightfoot, Bruce). 그래서 그들은 천사 숭배를 강요하였다. 한편 '상을 빼았지'의 헬라어 '카타브라뷰에토'(*)는 '심판으로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브라뷰오'(*)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하다' 혹은 '정죄하다'는 뜻을 갖는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거짓 교훈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정죄하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이다(Bruce, Hendriksen, Carson, Vaughan, O'Brein).

⭕ 저가 그 본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신비적인 체험에 근거하여서 그것을 자랑하였다(Bruce, Ramsay, Carson, Vaughan, O'Brien). 그들의 이러한 자랑은 '육체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육체의 마음'은 성령의 마음이나 생각과 반대되는 것으로(고전 2:14)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이나 이성 혹은 욕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 경: [골2:19]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 골로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망각한 자들로서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도리어 천사를 숭배하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 아니었다.

⭕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 몸은 곧 교회로서(엡 4:16) 교회의 구성원인 각 지체들이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여 긴밀히 연합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양육시킴으로 성장해 나간다(1:18,24;3:15;엡 1:22,23).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로 대치하여 자신들을 자랑하였다.

성 경: [골2:20]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다(11,12절). 그들은 옛 사람을 벗어버렸고 '세상의 초등 학문' 즉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들의 구속에서 해방된 자들이다(8절;갈 4:3).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결별한 자들이며 새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 본절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져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다. '의문'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하여 버리신 율법을 가리킨다(14절). 하나님께서 율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처럼 거짓 교사의 미혹을 받아 율법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

성 경: [골2:21]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 본절은 '의문'이 요구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거짓 교사들은 세상적인 접촉과의 분리를 요구하며 외적인 금지 명령을 통해서 거룩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외적인 금욕을 통해서 내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할 때 만이 변화되며 성숙해져 갈 수 있다(Bruce, Caird). 한편 세가지 금지 명령 중 '붙잡지도'의 헬라어 '하프세'(*)에 대해 혹자는 성 생활에 관계된 것으로 보아 성 생활 금지를 요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R.Leaney). 그러나 본서 내에서 성 생활을 금지시키는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하프세'를 성 생활과 관련시킬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성 생활과의 관계보다는 음식물과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O'Brien, Bruce).

성 경: [골2:22]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 본문의 괄호는 삽입구이다(Vaughan, Hendriksen, RSV). 본절은 앞서 언급된 음식물에 대한 금지 명령과 관계된 것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썩어지는 것임을 뜻한다. 결국 '의문'이 요구하는 것들은 일시적이며 부패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제한하거나 속박할 수 없다(Vaughan, Carson).

⭕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 본절은 사 29:13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사람의 계명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골로새 교인들을 현혹하는 각종 금욕주의적 금지명령들도 역시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다(8절).

성 경: [골2:23]

주제1: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주제2: [율법주의 비판]

⭕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 '자의적 숭배'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자기 생각대로 섬기는 것을 가리키고, '겸손'은 위선적인 겸손을 가리키며,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금욕주의를 의미한다(Bruce, Vaughan, Carson). 의문에 쓰여져 있고 거짓 교사들이 요구하는 금지 조항들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사항을 행하는 데는 탁월한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항들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간의 계명을 따른 행위에 불과하다.

⭕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육체'는 죄악된 본성을 가리킨다(갈 5:19-21). 또한 '좇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레스모넨'(*)은 '만족' 혹은 '충만'이라는 의미로 '육체적인 탐닉'을 가리킨다. 바울은 본절에서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이 요구했던 금지 조항들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따라 나타나는 '육체적인 탐닉'을 제한하는 데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음을 진술한다(Vaughan, Moffatt, Bruce, Carson, NIV, RSV 각주).

성 경: [골3:1]

⭕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은 2장에 뒤이어 본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한 것에 대한 내용이(2:11,12,20) 전개됨을 나타낸다.(Lighfoot. O' Brien).

⭕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본절은 2:20의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과 평행되는 구절이다. '살리심을 받았으면' 에 해당하는 '쉬네 게르데테' (*)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사건이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2:12). 또한 '쉬네게르데테'는 2:12의 '쉰타펜테스' (*, '장사하다')와 2:20의 '아페다네테' (*, '죽었다')와 더불어 초대 교회 당시의 성례전에 사용되던 용어들이다(Lighfoot).

⭕ 위엣 것을 찾으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골로새 교인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들의 생명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관심사로 바뀌어야 했다. '위엣 것' 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하늘' 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1:5,16,20, O ' Brien). 따라서 '위엣 것'은 '하늘 나라와 새 시대의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면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12-14절)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포함한다(O' Brien). 이것은 이미 골로새 교인들이 맛보고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으며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찾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테이테'(*)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본절의 요구에 충족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Hendrikaen, O' Brien).

⭕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본절은 '위엣 것'을 찾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Primitive Confeaaion)을 반영하는 것으로(Bruse),사도들의 설교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였다(행 2:33-35 ; 5:31 ; 7:55,56 ; 롬8:34; 엡1:20 ; 히1:3,13 ; 8:1 ; 10:12; 12;2 ; 벧전 3:22 ; 계 3:21).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시 110:1의 기독론적 해석이다(막 12:35-37 ; 14:61-62). 사도들은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다스리신다'(엡 4:10 ; 빌2:9-11)는 의미로서, 하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그의 신적인 지고의 권위를 나타낸다(O' Brien, Bruce, Carson, Vaughan).

성 경: [골3:2]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바울은 본절에서 '위엣 것'과 '아랫 것'을 대조하는 바 이 대조는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위엣 것'에 해당하는 윤리적인 요소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사랑들이며(12-14절). '땅에 것'에 해당하는 윤리적인 요소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등이다(5-7절). 한편 '생각하고'의 헬라어 '프로네이테' (*)는 '판단하다' ,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 요소분만 아니라 의지적인 요소를 내포한다.(O' Brien).

성 경: [골3:3]

⭕ 이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가르'(*)는 본절이 골로새 고인들이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 너희가 죽었고 - 본절은 골로새 교인둘아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감취었음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뤼프타이'(*)는 현존적 현재 완료(Perfect of Existing Srate) 시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생명의 효과가 지적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나타낸다(Lighrfoot, O'Brien).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얻은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대해 감추어진 영원한 비밀이여, 그리스도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이다(고전2;14 ; 요일 3:2).

성 경: [골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 본절은 앞절보다 두 가지 측면에서 진보하였다(Light-foot, O' Brien). 1. 본저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란 의미이다(Carson). 즉 그리스도는 생명의 수여자로서 자신과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이다(Vaughan). 2. '너희'가 '우리'로 대치된다. 즉 바울은 생명의 피수여자 속에 골로새 교인들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포함하고 있다(빌 1:21).

⭕ 나타나실 그 때에 -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네'(*)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공개적으로 '알려짐'이나 '보여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포칼龼토'(*,'계시하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O' Brien).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본절은 골로새 교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하는 세 번째 이유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 수반되는 그리스도인의 변화이다. 그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43 ; 고후 5:1,2; 빌3:20,21).

성 경: [골3:5]

⭕ 그러므로 - 본절은 앞서 언급한 2:20-3:4을 상기시킨다. 특히 3,4절에서 언급한 신학적 기초를 가리킨다.

⭕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 '죽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사테' (*)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로 해석한다(Bruce). 그 근거로 '네크로사테'가 부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3절에서 바울이 '죽은 것'을 선포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분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이 되었지ꂥ(롬3:24) 현재의 삶은 죄와 투쟁하는 삶이다. 따라서 '네크로사테'는 현재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아시하며, 과단성 있는 행위를 통한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마5:29,30). 한편 '지체'는 신약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나(마5:29,30 ; 롬6:13,19; 약3:6). 본절에서의 '지체'는 신체적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문맥에서 '악의 목록'들이 '지체와'와 동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체'를 '악'으로 해석한다(Calvin, Hendriksen, Vaughan).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지체'와 '악'을 동일시하는 차원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이 사용한 '지체'는 옛 본성에 이용되어서 범죄하는 여러 중류의 죄의 차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O' Brien,롬 6:19 ; 7:23), 도덕적인 인격을 시사한다(Lightfoot).

⭕ 음란 - 혼외정사(살전4:13)와 같은 불법적 성관계를 의미한다. '음란'이란 말은 신약 시대의 헬라에 편만했던 문란한 생활을 반영한다(Lohse). 바울은 음란을 금지하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고전 6:18 ; 갈 5:19)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엿다(고전 6:9).

⭕ 부정 - '부정'은 음란보다 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육체적 부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23:27)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부정 즉 사상이나 행동, 말 등의 불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Vaughan). 여하튼 이것은 육체의 일이며(갈5:19) 성령 안에서의 삶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Lohae, O' Brien).

⭕ 사욕과 악한 정욕 - '사욕'은 색욕을 둁발하는 구끄러운 욕망을 의미하며(롬 1;26 ; 살전4:5), '악한 정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의미한다(Lohse). 악한 정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지배하며, 그 자연인 안에 거하는 죄의 현현이다(O'Brien). 그것은 육욕(갈 5:16,24).

⭕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탐심'은 앞서 언급한 네가지 '악'과 상관성을 갖고 있으며 (Carson)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의미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와 동일시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엡 5:5, O' Brien).

성 경: [골3:6]

⭕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 앞절에 언급된 죄를 범함으로 초래된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신. 구약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가르키며 그 분노의 결과는 심판이다(살전 1:10 ; 2:16, O'Brien). '임하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케타이' (*)는 현재 시상으로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는 확실성(Vaughan, Lightgfoot, Hendrikaen) 과 범죄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긴박성을 나타낸다. 한편 공인 본문 (Texus Receptus) 에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에피 투스 휘우스 테스아페이데이아스)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의미가 명확해지기 위해서 이 문구가 삽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Carsin). 그러나 그 어구를 삽입할 경우 다음 절에서 '그 가운데'를 '그들 가운데'로 바꾸어야 하며, 골로새 교인들이 전에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살고 행한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는다는 내용이 됨으로 이 어구의 사입은 도리어 본절의 내용을 어색케 한다.

성 경: [골3:7]

⭕ 너희도 전에 그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 '너희도 전에'는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상태를 상기 시킨다(Lohse).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골로새인들의 삶은 앞서 언급한 '악'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다. '살'의 헬아어 '에제테'(*)는 미완료 시상으로 과거의 생활 습관과 의식을 의미하며, '행하였다'의 헬라어 '페리에파테사테'(*)는 부정 과거로 그 습관에서 비롯된 외형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삶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골로새 교인들의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삶과는 정반대이다(갈 5:25).

성 경: [골3:8]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 '이제는'은 앞절의 '전에'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골로새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단순히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의 '악'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과 행위(7절의 '에제테'와 '페리에파테사테')전체를 의미한다(Lighfoot). 한편 '벗어버리라'(*, 아포데스데)는 '더러운 의복을 벗어버리는 행위'를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과거의 모든 행위나 습관, 의식을 온전히 제거함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행동이나 성격을 '의복'으로 묘사한다(욥 29:14 ; 시109:29 ; 132:9 ; 사 11:5; 59::17 ; 롬13:12,14 ; 살번 5:8).

⭕ 분 - 헬라어 본문에는 '오르겐' (*,'분')과 '뒤몬' (*,'노함') 두 가지로 나타난다. '오르겐'은 혐오감이 다소 가라앉은 상태를 의미하며, '뒤몬'은 감정이 몹시 격하게 분출된 격노를 의미한다(Lightfoot).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발견되어서는 안되는 '육체의 일'이다(고후 12:20 ; 갈 5:19,20 ; 에4:31).

⭕ 악의 - 이는 '분쟁'에서 '사악한 태도'에 이르는 모든 악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O'Vrien, Carson)> 이것은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자 하는 악한 기질로 사회 적인 상호 관계를 파괴한다(Lightfoot, Lohse).

⭕ 훼방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안'(*)은 두 가지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하나님을 거스려 말하려는 것' '중상모략'(slan-der,NIV, RSV)을 의미한다(Lightfoot, O' Vrien).

⭕ 부끄러운 말 -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1, 음담 패설이다(Filthy communixation, KJV; filthy language, NIV, Bruce). 2. 독설적인 욕이다(O' Brien, Lohse). 두 가지 의미는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후자는 전자에서 유래한다(Lightfoot).

성 경: [골3:9,10]

⭕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 본절의 금지 명령은 앞절의 '훼방'과 부끄러운 말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서로'라는 것은 이 명령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내에서 믿는 자들간의 관계에 대한 권고임을 시사한다. 거짓말은 모든 위선을 가리키며, 위선응 그리스도께서 가장 증오하시는 죄악이다(마 23:13-28).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 '옛 사람'은 타락한 죄성을 가진 '옛 본성'을 의미하며,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게 된 새로운 본성을 의미한다. 옛 본성을 소유한 사람들의 삶은 앞서 열거한 수많은 악으로 가득찬 생활인 반면(5, 8, 9절) 새 본성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간다. 본절에서 나타나는 대조적인 두 단어 '벗어 버리고' (*, 아페크뒤사메노이)와 '입었으니' (*, 엔뒤사메노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을 때 발생하는 사건이다(2:6,7). 두 단어는 부정 과거 분사로서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의 행위임을 시사한다(Lenski).

⭕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본절은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설명이다.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의 모델로 언급된 '창조하신 자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창1:26)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첫사람 아담은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야만 하는 '옛 사람'이기 때문이다(Bruce, O'Brien). 그러므로 본절의 '창조하신 자'는 분명히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1:15 ;롬 8:29 ;고전 15:49 ; 고후 4:4 ; 빌2:6). 따라서 '창조하신 자의 형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재창조하셨음을 시사한다(O'Brien). 한편 '새롭게 하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카이누메논'(*)은 현재 시상으로 새롭게 되어가는 과정이 계속적으로 반복됨을 나타낸다. 즉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부단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새로워지게 되는 것이다(Lohse).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지속적으로 새로워져야 하는 목적은 '지식에 이르게 하기 위함' 이다(Carson). 새 사람이 획득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인식하는 능력으로(1:9) 새 사람은 이 지식을 통해서 창조자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Lohse, O'Brien).

성 경: [골3:11]

⭕ 거기는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 '거기'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상태를 가리킨다.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는 차별과 장애가 있을 수 없다(롬 1:14 ; 갈 3:28).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룬 자들이기 때문이다(고전 12:13), 본절에서 바울은 네 가지 차원에서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1. 헬라인과 유대인 - 이것은 민족적 장벽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선민 으이식으로 인해 자기 민족외의 모든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정죄하였다. 2. 할례당과 무할례당 - 이것은 종교적 장벽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蝁虡징으로 '할례'를 고집하였다. 3. 야인이나 스구디아인 - 이것은 문화적 장벽을 가리킨다. '야인'은 헬라어를 말할 수 없는 자를 가리키며, '스구디아인'은 흑해 주변에 살았던 부족으로 난폭한 자들을 의미한다(Loghtfoot). 4, 종이나 자유인 - 이것은 사회적 장벽을 가리킨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종'은 법적으로 소유주의 재산에 불과했다. 결국 본 구절에서 이러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장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영적 지위에 있어서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O'Brien). 그러나 바울은 본절에서 모든 사람의 자연적인 동등성이나 도덕적인 동등성을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한 주에 대한 충성을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성을 이룬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Lohse).

⭕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 본절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차별이 없음에 대한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연합의 원리를 시사하며 (Vaughan), 동시에 그리스도의 절대적이며 우주적인 우월성을 나타낸다(Lightfoot). '그리스도는 만유시요'라는 것은 모든 사람과 사물을 그리스도께서 지배하고 계심을 의미한다(Car-son). 또한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민족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된 그리스도인들 안에 내주하심을 의미한다(O'Brien).

성 경: [골3:12]

⭕ 그러므로 옷 입고 - 앞서 언급한 일련의 권면들의 결론이다. '옷입고'의 헬라어 '엔뒤사스데'(*)는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 새 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등의 덕목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함을 의미한다(Vaughan, Lenski).

⭕ 너희는 하나님의 태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 '하나님의 택하신자'와 '거록하고 사랑하신 자'는 동격이다(Lo-hse).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며(롭 16:13 ; 고전 1:26,27 ; 벧전 1:1).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을 지칭한다(시 33:12, O' Brien, Lohse), 한편 '거룩하고 사랑하신자'는 '택하신 자'를 설명하는 어구이다. 복음서에서 이 호칭은 예수께 사용되고 있다. 즉 예수는 '거룩한 분'으로 불리며 (막 12:24 ; 눅 4:34 ; 요6:69). 예수의 메시야적 칭호로 '사랑하신 '가 사용되고 있다(마12:18 ; 17:5).

⭕ 긍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무' (*)이다. '오이크티르무'는 70인역(LXX)에서 하나님이 '아엽게 여기는 자'로 묘사되ꁁ(시 24:6 ; 102:4 ; 144:9).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연민'을 나타낸다(롬 12:1 ; 고후 1:3). 또한' 플랑크나'는 문자적으로 '감정의 자리' 즉 '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두 단어의 합성어인 '스플랑크나오이그티르무'는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겪는 자들에게 나타내는 사랑으로 '동정어린 마음' 혹은 자비로운 마음'을 의미한다.

⭕ 자비 - 이는 '친절' , '상냥'을 의미한다. 이것은 70인역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보여준 친절함을 나타내며 (시24:7 ; 30:20 ; 64:12 ; 67:11: 84:13),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가리킨다(롬 2;4 ; 11:24 ; 엡 2:7; 딛 3:4). 새 사람을 옷입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자하심에 대한 응답으로서 타인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친절함을 보여야 한다(Carson).

⭕ 겸손 - 본서 내에서 '겸손'은 두 번더 나타난다(2:18,23). 2장에 언급된 '겸손'은 골로새에 있던 거짓 교사들이 범한 금욕주의적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언급된 '겸손'은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세이며 (행 20:19), 타인들을 섬기는 자세이다(엡 4:2 ; 빌 2:3 ; 벧전 5:5).

⭕ 온유 - 이것은 겸손과 함께 이방 세계에서 미덕으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한다(Vaughan). 반면에 구약에서 '온유'는 비양심적인 착위로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자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으며(시 25:9), 메시야를 설명하는데도 사용되었다(슥 9:9). 또한 신약에서 이 용어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구원을 가져다 주신 예수의 메시야적 왕의 역할을 나타낸다(마 2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를 고린도인들에게 모범의 예로 제시하였다(고후 10:1). 온유는 비그리스도인은 물론 (빌 4:5 ; 딛 3:2) 범죄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지녀야 할 자세이다(고전 4:21 ; 갈 6:1,2 ; 딤후 2:25).

⭕ 오래 참음 -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인은 (눅18:7)물론 비그리스도인에게까지(롬 2:4) 보이신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으로 인해 심판의 날을 연기하셨다(롬 9:22). 이러한 '오해참음'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보복을 행하지 않고 중상 모략을 견디며 사랑으로 용서하는 자세이다(vaughan, Lenski).

성 경: [골3:13]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본절의 '용납'과 '용서'는 앞절의 '오래 차음'에서 비롯된다. '용납한다'는것은 그리스도인둘이 서로에게 불평이 있을 때 그 혀오감이나 짐을 피차 지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Vaughan). 문자적으로 '대가없이 베푸는 것'을 뜻하는 '용서하되'의 헬라어 '카리조메노이'(*)는 현재 시상으로 '상호간의 용서 행위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나타낸다.

⭕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본절은 피차 용서해야 하는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언급한다(1:22).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근거가 된다(마 6:12 ; 눋11:4).

성 경: [골3:14]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 '이 모든 것'은 앞서 언급한 새사람이 입어야 하는 덕목 즉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며 (12절), 오래 참음의 확대된 덕목인 '용서'도 포함한다(13절). 바울은 이 모든 덕목 위에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목인 '사랑'을 소유하라고 권고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모든 계명을 요약한 가장 큰 계명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롬13:9,10).

⭕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사랑이, 유기체적 통일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모든 덕목들을 연합시키는 완전한 띠라고 해석한다(Bruce). 2. 혹자는 사랑이 '온전함으로 인도하는 띠'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Lohse).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성 경: [골3:15]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 '그리스도의 평강'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며(요 14:27 ; 16:33 ; 20:19,21,26 ;살후 3:16). 그리스도 자신이 평안임을 의미한다(엡2:14), '주장하게 하라'의 헬라어 '브라뷰에토'(*)는 본래 게임을 통제하는 '심판'(*, 브라뷰테스)의 기능을 말한다. 본절에서는 '지배하다' , '통제하다' , '결정하다'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차별 등에 대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통제해 나가야 하을 의미하다(Vaugran).

⭕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 '한 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은 목적보다는 방법이나 형태를 시사하며, 그리스도의 평안이 구현되는 영역을 나타낸다(O' Brien).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각 지체들이다. 한 몸의 지체로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1:20,22) 그리스도의 평안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 평안을 구현해야 한다.

⭕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는 하나님께서 어둠의 세력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 주셨음(1:12-14)을 깨달음으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감사는 평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는 그리스도의 령강을 소유하게 하며,타인에 대한 감사는 상호간의 평강을 지속하게 한다(Carson, Vaughan).

성 경: [골3:16]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그리스도의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 (*)에 대해 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Lenski, Lightfoot). 그러나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를 꼭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본절의 소유격은 주격적일 뿐 아니라 목적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물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Vaughan, Carson). 한편 '너희 속에'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희 마음 속에'를 의미한다(Lightfoot). 2. 공동체의 차원에서 '너희들 속에'를 의미한다(Masson, Lohse).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ruce, O' Brien).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인 각자는 물론 공동체내에 풍성히 거함으로 그 영향력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 1.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蕡 권면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가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28) 골로새 교인들이 피차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혜'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O' Brien). 2.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시'와 '찬미'蝡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굳이 구별한다면, '시'는 구약 시편을 의미하며 (눅20:42 ;24:44 ; 행 1;20 ; 13:33),' 찬미' 는 '축제의 찬양' (O' Brien, Lohse) 혹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작곡되고 불리는 찬송' (Lightfoot)을 의미하고,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의 행위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노래' (Lohse, O' Brien)혹은 '즉흥적으로 불리는 영적 노래'를 가리킨다(Bruce). 그러나 세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구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헌편 찬양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의 열매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히 13:15). 진정한 찬양은 '감사하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혹자는 '감사함으로'의 헬라어 '엔 카리티' (*)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ohse). 그러나 15절과 17절 사이에서 '감사함'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감사함'의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O' Brien).

성 경: [골3:17]

⭕ 또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게 감사하라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면을 내포하는 일반적인 권면이다. 그 권면은 두 가지이다. 1.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Bruce, Vaughan). 이러한 삶은 주 예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고(Lohse)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이며 영적 예배이다(롬12:1) 2.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하라'의 헬라어 '유카리스툰테스' (*)는 현재 분사로서 '감사하는 삶'이 지속적이어야 함을 나타낸다. 한편 '그를 힘입어'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의 근거이며 목표'라는 뜻으로 해석하지ꂥ(Lohse), '그리스도께서 감사 행위의 중재자'이심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O' Brie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신 중재자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골3:18]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 '복종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탓소'(*)는 신약에 23번 나타난다. 본절에 나타난 '복종하라'의 헬라어 '휘포탓세스데'(*)는 중간태로서 '자발적인 복종'을 의미한다. 바울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할 것을 권면한다(Vaughan, O' Brien). 남편에 대한 아내의 자발적인 복종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며 (창2:18 ; 3:16 ; 고전 11:3,7-9).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엡 5:22-24).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마땅하니라'는 아내의 복종이 적절한 것이며 의무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주안에서'라고 하는 제한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성 경: [골3:19]

⭕ 남편 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바울은 남편에게 긍정적 측면에서 아내를 '사랑하라'와 부정적 측면에서 '괴롭게 하지 말라'는 두 가지 권면을 한다. '괴로게 하지 말라'는 것은 '사랑하라'는 권면의 소극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아내를 짜증나지 않게 하라'는 의미이다(Vaughan).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애정보다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돌보고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골3:20]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 '순종하라'의 헬라어 '휘파쿠에테'(*)는 아내들에게 권면할 때 사용했던 용어인 '휘포탓세스데'(*, '복종하라')에 비해 강제적이다. '휘파쿠에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절대적이며 지속적인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개역 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돼어 있다. 본문은 자녀들이 모든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기쁘게 하는'의 헬라어 '유아레스톤' (*)은 뒤에 여격을 동반한다. 그래서 '토퀴리오' (*, '주를')가 되어야 하나 헬라어 본문에는 '엔 퀴리오'(*, '주 안에서')로 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자녀들의 순종이 '주안에서' 행해져야 함을 시사한다(Moule). 2. 그리스도인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Light-foot). 3.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절한 것이며 마땅한 것임을 의미한다(Lohse, Martin). 이 세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성 경: [골3:2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격노케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로 '자극시키지 말라' (do not embitter, NIV)는 의미이다. 부모는 단순히 자녀를 격노케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녀를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다(시 127:3 ; 엡 6:4).

성 경: [골3:22-25]

⭕ 혹자는 본문에서 바울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권면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Carson, Lohse),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자유 (3:11)와 그리스도인 노예가 상전을 계속 섬겨야 하는 노예 제도 사이에서 생기는 갈 등을 염두에 두었다고 불 수 있다(O' Brien).

성 경: [골3:22]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 '육신의 상전'이라는 것은 '하늘에 있는 영역, 곧 지상적 영역 안에서만 상전임을 가리킨다. 한편 '순종하되'의 헬라어 '휘파쿠에테'(*)는 자녀들에게 권면할 때 사용한것과같은 용어로 강제성이 부여된 순종을 의미한다.

⭕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본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차원에서 권면을 하고 있다. 1. 부정적 측면으로 눈가림으로 순종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눈가림'이란 주인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행하는 불성실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2. 긍정적 측면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권면한다. '성실한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순결하고 정결해서 흠을 찾을 수 없는 마음이다(Carson). 그리스도인 종들이 이런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동기는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동기이며 원리이다(눅 18:2,4 ; 벧전 2:17 ; 계11:18,Lohse).

성 경: [골3:23]

⭕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바울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 종들이 육신의 상전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 권면한다. 그 방법은 부여된 일이 무엇이든지간에 '마음을 다하여' 행하는 것 즉 충성된 마음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성 경: [골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고 그리스도께 하듯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는 종에 대한 보상을 나타낸다. 그 보상은 주께로부터 '받는 것' 이다. '받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렘프세스데'(*)는 당연히 받으며, 받기에 충분한 것을 의미한다(Vaughan). 충실한 종이 받아야 할 상은 '유업'이다. 바울은 이미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준비된 영원한 유업에 대해 언급하였다(1:5,12,27 ; 3:1-4). 이런 유업에 대해 약속하신 자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종들이 섬기는 주이시다.

성 경: [골3:25]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부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 본절에서는 앞절의 내용과 대조적으로 불의를 행하는 자에 대한 경고가 나타난다. 그런데 '불의를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상전'이라고 주장한다(Ridderbos, Carson). 이들은 개역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왜냐하면')

에 주목하여 앞절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종들에 대한 위로인 반면 본절은 부당한 대우를 한 주인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다. 2. 혹자는 '종'이라고 주장한다(Lenski, O'Brien, Lohse, Vaughan). '불의를 행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콘'(*)은 오네시모의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몬1:18) 본절은 '종'에 해당하는 권면이라고 주장한다. 3. 혹자는 '상전'과 '종' 둘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Hendrksen, Schweitzer). 이들은 '불의를 행하는 자'의 헬라어 '호 가르 아디콘'(*)은 종에게 해당하며, '의와 공평' (4:1)의 헬라어 '토 디카이온 카이 텐 이소테타'(*)는 상전에게 해당된다고 한다. 따라서 본절의 경고는 종에게 주어진 것이나 그 경고가 주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더욱이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는 바울의 권면이 에베소서에서는 주인에게 해당되므로 마지막 견해가 뒷받침된다(엡6:9). 따라서 바울은 본절에서 주는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종이나 주인 둘 다 모든 일에 있어서 공의롭고 성실하게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롬 14;10-12 ; 고전 3:12-15 ; 4:4,5 ; 고후 5:10, Bruce, O'Brien).

성 경: [골4:1]

⭕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 바울은 본절에서 상전들에게 종에 대한 대우의 문제를 권면한다. 상전들은 종들을 '의와 공평으로' 대해야 한다. 여기서 '의와 공평'은 당시의 윤리적 가르침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며 양자는 유사한 개념을 갖는다. 다만 부연 한다면 '의'는 평 등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공평'이란 말에 의해서 그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O' Brien).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와 공평'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결산해야하기 때문이다(마 18:23 ; 25:19, Lohse). 그래서 바울은 상전들에게 하늘에 상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성 경: [골4:2]

⭕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바울은 본절에서 '기도'에 대해 권면한다. '힘쓰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카르테레이테'(*)는'끈질기게 매달리는', '지속적인'을 의미한다(Persevering, JB). 이는기도의 열심과 지속성을 시사한다(Vaughan, Lightfoot). 본절의 '기도'에 사용된 '테 프로수케'(*)는 신구약에서 '탄원'(Petirion)을 의미한다(왕하 19:4 ; 기 4:1 ; 막 9:29 ; 행 10:31 ; 롬 1:10 ; 약 5:17). 이것은 바울이 다음 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것과 연결된다. 한편 '영적인 자각'을 의미하는 '깨어 있으라'의 헬라어 '그레고룬테스'(*)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기도와는 다른 독립적인 명령으로 간주한다(Lohse, Lohnmeyer). 2.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서의 기도를 의미한다(Meyer, Abbott. Martin). 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깨어 있음'이 또 다른 명령이라 할지라고 그 명령은 '기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골4:3]

⭕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 본절은 바울이 부탁한 기도 내용이다. '우리'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즉 디모데(1:1), 에바브라(12절)를 가르킨다. (Lightfoot). 그러나 바울은 다음 절에서 '내가'를 사용함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3,4절, O'Brien).

⭕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한다. 신약에서 '문을 여는 것'은 주로 복음 선포의 기회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6:9 ; 고후 2:12). 아마도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생각하며 기도를 요셷하고 있는 것 같다(몬 1:22, O' Brien, Lohse, Lenski, Carson). 한편 '그리스도의 비밀' 은 바울의 설교의 내용으로서 이방인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의미한다(1:26 ; 2:2).

⭕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비밀을 선포하다가 고난과 투옥을 당하였고 이를 견뎌내야 했다(엡 6:19,20). 바울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오직 복음 전파였기 때문이다.

성 경: [골4:4]

⭕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 '마땅히 할 말로써'는 앞절에서 언급한 '매임을 당한 것'과 상관된 것으로 '설교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선포하기를 원했다. 바울은 자신이 '설교 한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 본절의 '나타내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로서'(*)를 서신에서 사용한 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 바울이 '파네로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선포가 매우 중요한 것임을 시사한다(Lohse, O' Brien).

성 경: [골4:5]

⭕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 '외인'은 '비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전 5:12,13 ; 살전 4:12 ; 딤전 3:7). 그리고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1:9)과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1:10)과 상관된 것으로 실천적이며 실제적인 것을 의미한다(O'Brien). 그러므로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거 망동으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난을 사지 않도록 행하라는 권면이다. 또한 '세월'은 '결정적인 시기' 즉 지나갈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하며(Bruce), '아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 라조메노이'(*)는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서 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O'Brien).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을 지혜롭게 대함으로 믿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으며, 최대한으로 이용할 것을 교훈한다(Vaughan).

성 경: [골4:6]

⭕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의 언어 습관에 대해 권면한다. 본절에서 '너희 말'은 골로새 교인들의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선포를 포함한다. 골로새 교인들이 일상적인 대화나 복음 선포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1. '은혜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 '은혜 가운데서'로 번역된 헬라어 '엔카리티' (*) 는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감사함으로'를 의미한다(3:16).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를 의미한다(엡 2:5). 셋째, '은혜롭게'를 의미한다(눅 4:22). 세 가지 중 마지막 의미가 본질의 문맥에 가장 잘 어울린다(Lighrfoor Martin, O'Brien).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대화의 내용이나 방법이 매우 중요함을 시사한다(벧전 3:15,16). 2.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해야한다. 헬라인들에게 '소금'은 '재치'나 '기지'를 의미한다(Bruce, Vaughan), 또한 랍비 문헌에서도 '소금'은 지혜를 의미한다(O'Brien). 따라서 본절은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속에서 은혜롭고 지혜로우며 재치있는 말을 함으로써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성 경: [골4:7]

⭕ 두기고가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 '두기고'는 아시아 지방 출신으로(행20:4),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때에 바울과 함께 드로아까지 여행하였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도 천거되었으며(엡 6:21), 사도의 사자로 파송되기도 하였다(딤후 4:12 ; 딛 3:12).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 세 가지 호칭을 부여한다. 1. '사랑을 받는 형제', '형제'하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된 그리스도인들 간의 실제적인 관계성을 시사한다(롬 15:14 ; 고전 15:58 ; 빌3:1, O' Brien). 2. '신실한 일꾼' 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특별한 사역을 부여받은 사람을 가리킨다(Lohse). 3. '주안에서 함께 된 종'. 에바브라도 같은 호칭을 듣는다(1:7). 이것은 두기고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안에서' 자신의 임무를 잘 감당하는 종임을 시사한다.

성 경: [골4: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 '보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펨프사' (*)는'서간체 부정 과거'로 편지의 수신자 입장에서 바라본 시상이다(Lenski, O' Brien). 한편 바울이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에 보낸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2. 자신이 투옥된 사실로인해 상심에 빠져 있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사도의 가르침을 되새기게하여 상심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성 경: [골4:9]

⭕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두기고와 함께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에 보낸다. 본절의 '오네시모'에 대해서 혹자는 빌레몬서에 나오는 闗간 노예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Calvin). 그러나 본절의'오네시모'와 동일 인물이다(Lohse, Schweitzer, Lighrfot).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오네시모를 '골로새에서 온 자'라고 밝힘으로써, 골로새에 거주하고 있는 빌레몬의 도망간 노예임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오네시모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추천장이 되었다(Bruce,P'Brien).

성 경: [골4:10]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으며(행 19:29), 바울과 더불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고(행 20:4),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항해할 때 바울,누가와 함께 동행하였다(행 27:2). 바울은 이런 아리스다고에 대해 '나와 함께 갇힌 자'라고 소개한다. 이 호칭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은유적이고 영적인 의미이다(Carson, Lenski).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임을 시사한다. 2. 신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함께 투옥되었음을 의미한다(O' Brien, Lohse). 이 견해는 세부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이리스다고가 자발적으로 바울과 함께 갇혔다는 것이다(Ramsay, Bruce).둘째는, 아리스다고가 바울을 돕는 자로서 순번제로 투옥되었다는 것이다(Abbott). 이러한 영적인 것과 신체적인 투옥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Vaughan).

⭕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본절의 '마가'는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요한 마가이다(행 12;12,25). 마가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도중에 바울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행 13;13). 그래서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에 마가를 데리고 떠나자는 바나바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그것으로인해 바나바와 결별하게 되었다(행15:36-41). 그러나 바울은 후기 서신에서 마가를 '동역자'로 부르고 있는데 (딤후 4:11 ; 몬24) 아마도 마가가 바나바의 세심한 지도하에 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O' Brien, Bruce). 한편 '너희가 명을 받았느매'에서 누가 무슨 명을 보냈는가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두기고를 통해서 마가에 관한 명을 보냈다고 주장함며(Lenski), 혹자는 단순히 바울이 '마가를 영접하라'고 한 것이 명령의 내용이라고 주장한다(Lightfoot, Bruce). 그러나그 명령이 '바울' 에게서인지 아니면 '벧,로나 바나바'에게서인지 확인할 수 없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O' Brien).

성 경: [골4:11]

⭕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 '유스도라하는 예수'에 대해서는 본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과 함께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예수'라는 이름은 유대명인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의 헬라명으로 주후 2세기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일번적으로 나타나는 이름이었다. 2세기 이후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유대인 회당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생긴 배타적 감정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기피한 까닭이다(O' Brien, Foerster). '유스도'는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명이다(Bruce).

⭕ 저희는 할례당이라 - '저희'는 앞서 언급된 '아리스다고' , '마가' , '유스도라는 예수'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들이 유대인이라고 밝힌다. 혹자는 셋 중에서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이며 이방 교회의 대표자로 예루살렘에 파견된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Lenski, A S.Peake). 그러나 유대인이 이방 교회의 교인이나 대표자가 되는 데에 문제될 것은 없다(Bruce).

⭕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 '함께 역사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고이'(*)는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역하는 바울의 동역자를 가리킨다(롬 16;21 ; 고전 3:9 ; 고후 1:24 ; 빌2:25 ; 살전3:2). 그들은 바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두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1. 다가오는 미래에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유업이다(고전 6:9,10 ; 갈 5:21 ; 살전 2:12). 2,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것으로 (1:13 ; 롬 14:17)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의 구원 시대를 가리킨다. 한편 본절에서 바울이 유대인인 동역자들로부터 '위호'를 받는다고 한 것을 볼 때 럁도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치 않은 점을 염두에 둔 듯하다(Hendriksen).

성 경: [골4:12]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 '에바브라'는 바울의 대리자로서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였다(1:7, Vaughan).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에바브라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호칭은 바울 자신 (롬 1:1)과 디모데 (빌 1;1)에게 사용한 것으로 에바브라가 자신과 같이 복음 사역을 위해서 주께 순종하는 종임을 의미한다(P' Brien).

⭕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거기를 구하나니 -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인들이 '서기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하였다. '서기를 '로 번역된 헬라어'스타데테'(*)는 수동태로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을 나타낸다(O' Brien).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인들이 두 가지 모습 가운데서 서기를 기도하였다. 1. 완전하고 -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였다. 왜냐하면 골로새에 있는 교사들이 자신들의 철학을 통해서 완전을 추구하였기 때눈이다(2:8) 따라서 에바브라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게 될 것을 기도하였다. 2,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확신있게-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포레메노이 엔 판티 델레마티 누 데우'(*) 는 두 가지로 해석 된다, 1.'페플레로포레메노이'를 '확신하다' (롬 4:21 ; 14:5)로 보고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확신있게'라고 해석하다(Moyle). 2. '페플레로포레메노이'를 '채우다' (딤후 4:5,17)로 보고 '하나님의 모든 뜻으로 채우는'으로 해석한다(O' Brien). en 가지 견해 중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듯 하다.

성 경: [골4:13]

⭕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아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 바울은 본절에서 세 교회를 위한 에바브라의 봉사에 대해 소개한다. '소고'의 헬라어 '포논'(*)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으을 위한 에바브라의 헌신적 노력을 시사한다(O' Brien). 즉 에바브라가 세 교회의 복음 전도자로서, 골로새 교회에 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세 교회 전체에 퍼져나간 것에 대항하여 싸운 것을 가리킨다(Lohse, O' Brien). 한편 세 교회 중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단지 '라오디게아 교회'는 계시록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중 하나로 책망받는 교회로 나타난다(계 3:14-22).

성 경: [골4:14]

⭕ 사랑을 받는 위원 누가 - '누가'는 바울과 함께 2차 전도 여행 때 드로아와 빌립보에 있었고 3차 전도 여행 때 빌립보에서 바울과 합류하여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다(행 16:10-17 ; 20:6-16 ; 21: 1-18 ; 27:1-28:16). 누가는 이방인이었으며 바울의 투옥 기간 동안 바울의 주치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에 대해 특별히 '사랑을 받는 의원'이라고 골로새 교인에게 소개하고 있다.

⭕ 데마 - 골로새 교회와 빌레몬에게 문안한 바울의 동역자였으나(몬1;24) 후에 바울이 재차 옥에 갇혔을 때 바울 곁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버린 자였다(딤후 4:10).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 '데마'에 대해 단지 이름만 언급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데마가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사역에 대해 실패할 것을 암시한다고 말한다(Lightoot).

성 경: [골4:15]

⭕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 바울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라오디게아'에 거주하는 골로새 교인의 가족 때문이라고도 주장하며(Meyer, Lightfoot),혹자는 두 교회 사이에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가기를 바울이 바랐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한다(Dibelius- Greeven). 한편 '눔바'의 헬라어 '뉨판'(*)이 남성을 말하는 '윔파스'(*)인지 여성을 말하는 '눔파'(*)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서 KJV와 ASV는 남성 이름인 '뉨파스'로, NIV와NEB는 여성 이름인 '뉨파'로 번역하고 잇다. 이 두가지 번역 중 후자가 더 타당할 것이다(Vaughan, O' Vrien). 왜냐하면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남성을 여성 이름인 '뉨파'로 바꾸어 표현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Bruce). 여하튼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는 가정 교회로서 골로새 교회 내에서 친교를 위해 모이는 작은 모임이었을 것이다(O'Brien, Bruce).

성 경: [골4:16]

⭕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 당시 교회에서 사도의 서신을 읽는다는 것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크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O' Brien).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골로새 교회가 자신의 편지를 서로 교환하여 볼 것을 권면한다.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에 대해서는 여러 거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편지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Theodore, Beza, Calvin). 그러나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에크 라오디케이아스'(*)에서 '에크'( 로 부터)는 이 편지가 라오디게아에서 골로새로 가져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2. 혹자는 에베소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ightfoot, Carson).그러나 에베소서는 골로새서 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본절에서 언급될 수 없다(O' Brien). 3, 혹자는 빌레몬서라고 주장한다(Knox, Goodspeed). 그러나 빌레몬서는 사적인 편지이며, 빌레몬은 라오디게아가 아니라 골로새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Bruce, O' Brien) 4. 혹자는 바울이 라오디게아로 보낸 편지인데 이 편지는 분실되었다고 주장한다(Vaughan, O' Brien). 라오디게아 편지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도 분실되었다(고전 5:9). 위의 네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 [골4:17]

⭕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 '아깁보'는 아마도 빌레몬 가족의 일원으로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일 것이다(Lenski, Bruce, 몬 1:2). 한편 '직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니안'(*)은 전통적인 용어로 '설교 사역'을 의미한다(Merkein, O' Brien). 이 직분은 주 안에서 받은 것으로서 에바브라가 없을 때 아킵보가 사역자로 봉사하였음을 시사한다(Vaughan, Lightfoot).

성 경: [골4:18]

⭕ 나 바울은 서신을 쓸 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하였으나, 서신을 끝 맺을 때는 직접 문안 인사를 하였다(고전 16:21 ; 갈 6:11 ; 살후 3:17 ; 몬1:19). 이러한 관습은 1세기 당시에 흔히 있었던 일이다(Deissmann). 바울음 친필로 문안 인사를 함으로써 당시 사도의 이름을 빙자한 위조를 방지하고 본서의 권위를 입증하며(Bruce), 본서에서 말한 내용을 강조하고자 하였다(O'Broen).

⭕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 '생각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테'는 상대방을 위해서 계속 기도를 요청하는 의미로 사용된 바(1:2 ; L XX 삼하 14:11 ; LXX 시 62:6 ; 몬 1:4), 본문의 '므네모뉴에테'는 바울 자신을 위해서 계속 기도해 주기를 요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Bruce, O' Brien).

⭕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골로새 교인을 위한 바울의 축도로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온전히 서기를 기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독교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다른 주석

성 경: [골3:1]

사도 바울은 2:8-23에서 그리스도의 충족성(充足性)에 대하여 말하는 동시에, 이단의 그릇됨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논술하였다. 그는 여기서 그러므로(* )란 말로써 그 결론을 짓는다.

⭕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헬라 원문에서 직역하면,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입었으면"이니, 이것은 2:12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인해 성립된(벧전 1:3)신자들의 영적 중생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중생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말일(末日)에 부활의 복도 받게 되어 있다(요 6:44).

⭕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함께 부활하였다(롬 6:5). 우리는 영적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 곧,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할 근거를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구함이 무리가 아니다 마 6:33;갈4:26;빌 3:20참조,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우리는 그의 계신 곳을 바라보며 거기 속한 것들을 탐구해야 된다. 이것이 곧, "우엣 것을 찾으라"는 말의 의미이다. "위엣 것"이란 말(*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중심한 영적 사실들을 가리킨다(요 8:23; 빌3:20-21). 우리가 믿음에 의하여 위엣 것을 사모하며 그것을 찾아 거기서 살면 참 자유(고후3:17; 갈4:26)와 참 지혜(약 3:17-18)를 얻게 된다. 그것은 골로새의 이단자들이 선전하는 의식주의나 고행주의와 달라서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한 성결과 평강과 영적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이단자들의 교훈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승리(2:12-15)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이다. "찾으라"는 말(* )은 '계속 힘들여 찾음'을 의미하는데, 이 말을 보아서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이 사람의 노력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그것을 받는 데는 우리의 노력이 요구된다. 노력은 진실성이 증표이다. 마11:12;히12:4 참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과 하나님의 천국 통치에 동참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눅 20:43; 행2:35; 롬8:34; 엡1:20; 히10:12; 계3:21참조. 그가 거기 계시니 만큼 우리는 우리의 찾는 "위엣 것"을 그의 중보사역에 의하여 얻게 된다. 그는 우리의 받을 복의 원천이시고 방법이시다. 롬8:34 참조.

성 경: [골3:2]

본절은 윗절의 "위엣 것을 찾으라"는 사상을 좀 더 밝히 해명하고 또한 고조한다.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생각하라"란 말(* )은 '애착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Abbott).벴겔(Bengel)은 이것이 '즐기는 마음을 가지라'은 의미라고 하였다.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염세주의(厭世主義) 사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의 것에 지나친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땅 위의 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그것들을 오용(誤用)함이 악한 것이다(고전 6:12,10:23). 우리가 발로는 땅을 딛고 머리는 위를 향하였으니, 천상(天上)의 것을 사모하고 섭취하여 땅 위의 것들을 하늘 위의 것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들에게 복속하는 행동들은 죄악이다(빌 3:19).

성 경: [골3:3]

본절은 이는 번역된 이유접속사(* )로 시작하여 윗말의 첫째 이유를 보여준다. 신자들로 하여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인 영생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

⭕ 너희가 죽었고 - 신자들은 그들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었으며, 그 죽음은 (1) 죄에 대하여 죽음이고(롬 6:6,11). (2) 율법에 대하여 죽음이고(롬7:4), (3)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니, 그것은 곧, 땅엣 것을 애착하여 추구하고 의지하는 이 세상 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갈 6:14). 기독신자는 원칙적으로 땅엣 것에 대하여 전혀 시체적(屍體的)관계를 가진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영원한 집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로지 그곳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노력해야 된다.

⭕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 그리스도에게 대표되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참 신자들은,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지체(肢體)된 참 신자들의 부활도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신자들의 생명이 포함된 셈이다.

⭕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하나님 안에"란 말은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합된 상태를 가리킨다(요일 3:2).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 승천하셔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천계(天界)에 감취어 계신 것과 같이, 그 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러하다. 그리스도는 대신 원리(代身原理)에서 우리의 생며이니(4절 초두의 해석 참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사 감취었음과 함께 우리의 생명이다. 그렇게 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이다. 어떤 학설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하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는 말은 다만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영적 생명의 신비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벴켈도 역시 그와 같은 견해로 말하기를,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모른다. 그리스도인 자신도 자기를 원만히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성 경: [골3:5]

사도는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이 장차 나타날 것을 여기서 말함으로 그 생명의 영광을 보여준다. 이것도 2절의 둘째 이유이다(첫째 이유는 3절). 이렇게 영광스러운 생명이 위에 있으니,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한다.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 우리의 대표자이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은 곧, 우리의 부활과 영생으로 그와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부활의 원인자(原因者)이시요 또 원천이시다(요 11:25). 여기 "나타나신다"는 말은 재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초림도 어느 정도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재림에 비교하면, 그렇지 못한다. 초림하신 그리스도는 인류의 일부가 보았거니와, 재림하실 그는 온 인류가 다 보게 될 것이다(계1:7).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의 재림을 가리켜 "나타나심"이라고 하였다. 그가 "나타나실" 그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한 일들도 선악간에 다 나타나다(고전 3:13).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우리 신자들이 그와 같은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미천(微賤)하던 우리가 영광스러운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롬 8:18-19; 요일3:2).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육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본절부터 9절까지는 믿음을 장성하게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죄를 끊어 버림이다. 기독교의 인간 개조는 피상적(皮相的)인 것이 아니고, (1)먼저 죄악의 뿌리부터 단절해 버림으로(5)절, (2)악한 행습들을 제거함에 이르고(8절), (3) 선미(善美)한 덕행을 옷입듯하게 한다(12-17). 다시 말하면, 그것은 먼저 죽고 그 뒤에 사는 것이다. 곧, 악심과 악행을 죽이고 선미한 새 생명을 가꾸어 낸다. 여기 "그러므로"란 말은 위의 교리론(1-4)에서 실제적 결론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이니만큼, 세상 끝날에 그것일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땅 위에서 믿음을 착실히 지켜야 한다. 이 사상은 벧전1:3-5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누릴 자들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벧전 1:5). 우리가 믿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끊어 버려야 된다. 이 의미에서 사도은 여기서부터 골로새 신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버리라고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란 문구에 대한 해석은 두가지이다. (1) 이것은 불의(不義)의 병기로서의 지체들을(롬 6:13) 가리킨다는 해석, 곧, 하나님보다 땅의 것들을 더 사랑하는 육신의 지체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채택하는 경우에는, 아랫말 "죽이라"는 것은 제어(制御)하고 극복하라는 의미이겠다. (2) 이것은 우리의 부패한 성품의 각양 작용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해석. 하반절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란 말이 "땅에 있는 지체"란 문구의 설명인 사실로 보아도 이 해석이 적합하다."죽이라"(* )는 것은, 악한 성품의 활동을 그것이 '아주 죽은 것처럼 영원히 정지시키라'는 의미이겠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땅엣 것들을 즐겨 하나님을 떠나 버리게 만드는 죄악들이다. 여기 열거(列擧)되 다섯 가지 죄악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여 "음행"과 "탐심"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1) 성적 죄악.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음란, 부정, 사욕, 악한정욕"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음란의 충동과 욕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음란과 부정"의 차이는 무엇이며 "사욕과 악한 정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음란"이란 말은 "부정"이란 말보다 범위가 좁은 말로서 불법저그로 취하는 성적 행동을 의미하고, "부정"은 성문제(性問題)에 대한 일체의 불합리한 언행을 가리킨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정 무서운 죄악은 음란이다. 그렇게 때문에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 열거한 죄목들에는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선두에 놓는다(갈 5:19; 엡 5:3). 그 이유는, 이 죄악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을 영구히 떠나기 쉬운 까닭이다(고전 6:15-20). (2) 무제한의 소유욕. 이것은 "탐심"이라고 불리우는데 "우상숭배"와 같이 간주된다. 이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죄악이다. 탐심의 소유자는 세상 것들에 애착하여 그것들을 추구하기에 전심 전력하고 하나님을 떠난다. "탐심은 우상 숭배"라는 내용의 교훈은 마 6:24과 엡 5:5에도 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곧 하나님을 섬김으로)하나님의 뜻이면 물질도 받을 수 있다(마 6:33). 그런데 이 말씀을 외면하고 물질을 먼저 구하면서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는 자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다.

성 경: [골3:6]

⭕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노라 - 이 말은 위의 권면의 이유이다. "이것들" 곧, "땅에 있는 지체"들은 위험하니 그것들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에게 두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롬 1:18-32이 가르침과 같이, 그들을 그 범하는 죄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두심이고(롬 1:18,24,26,28), 둘째는, 끝날 대심판 때에 그들을 영벌에 처치시키는 것이다(계6:17). "임하느니라. "한역의 각주(脚註)가 보여줌과 같이, 어떤 사본들(A,C,D,E,K,L)에는 이 말 위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식들에게"란 어귀가 있다. 그러나 마이어는 이 어귀가 본래의 원본에서 순전히 보전되어 내려운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어귀를 취하든지 취하지 않든지 본절의 큰 뜻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임하느니라"란 말의 헬라 원어(* )는 현재 시상(現在時相)이다. 이에 대하여 라이트푸트는 말하기를, 이것이 죄인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아주 확실하다는 의미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성 경: [골3:7]

⭕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해하였으나 - 여기 "그 가운데"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그것들 가운데"란 복수로서 위에 말한 '죄악들 중에'란 말이다. 골로새 사람들이 중생하기 전에는 그런 죄악들이 그들의 방편이었다.

성 경: [골3:8,9]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라 - "이제는"(* )이란 말은 개종하고 복음을 믿은 그 때를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이란 말은 "땅에 있는 지체들"(5절 상반)곧, 모든 죄를 의미한 것인데(5절 하반), 곧, 모든 죄를 의미한 것인데(5절 하반), 역시 8절 하반부터 9절 초두에 있는 죄들까지 총칭한다. "벗어 버리라"는 말은 낡은 옷을 벗듯이 이 모든 죄들을 전적으로 내버리라는 말이다.

⭕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히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 헬라 원문에는 "분"이란 말(* ) 바로 위에 "노함과"란 말(* )이 있는데, 한역에는 그것을 빠뜨렸다. 그러면, 헬라 원문대로 여기에 여섯가지 죄악이 역거되어 있으니, 처음 두 가지가 서로 관련이 밀접하고, 다음 네 가지 역시 서로 관련이 밀접하다. 처음 두 가지 곧, "노함과 분"에 대해 말하자면, "노함"은 외부에 폭발된 거이고, "분"은 마음 속에 불타듯이 잠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네 가지에 대하여 말하자면, "악의"(* )라는 죄악은 기타 모든 것들에게 원인(原因)관계를 가진다. "악의"란 것은 남을 해하려는 독한 마음을 말함이니, 이것이 원인이 되어 (1)남을 훼방하며, (2) 남을 대면하여 욕하며(본문에 "부끄러운 말"은 대면해서 버릇 없이 말함을 의미한다), (3) 혹은 남을 속임이다. "훼방"이란 말(* )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경(不敬)하게 말함을 의미하는 때도 있으나, 여기서는 이웃이 듣지 않는 곳에서 그를 비방함을 의미한다.(롬 3:8,14:16;고전 4:31;딛 3:2). "부끄러운 말"(* )은 신약성경 중 여기에만 한 번 사용되었다. 이것은 부정한 말(음탕한 말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버릇없는 말)을 의미한다.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 여기서부터는 골로새 신자들이 위의 모든 죄를 끊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 때에 원칙적으로는 벌써 옛사람과 그 악행을 벗어 버렸으니만큼 그들로서는 그 죄악을 습성을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옛사람"은 무엇인가? (1) 성령으로 중생되기 전의 사람이므로 옛사람이고, (2) 타락하요 파상되었고, 또 부패해진(엡 4:22) 인성(人性)이므로 옛 사악한 행습을 의미하는데, 일시적이 아니고 상습적으로 기탄 없이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벗어 버리고." 8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성 경: [골3:11]

⭕ 새 사람을 입었으니 - 이것은 위에 기록된 악행을 버릴 이유이다. 기질상(氣質上)죄악 곧, 노함과 분을 제거하고, 또 언어상(言語上) 죄악들 곧, 훼방, 욕설, 거짓말을 끊어 버려야 할 이유는 어디있는가? 그것은 이 문구들이 보여줌과 같이, 믿는 사람들은 원리상으로 그 믿는 순간부터 옛사람 (부패한 본성)을 삽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새사람(중생된 사람)을 입은 사실을 인식하는 까닭이다.(롬 6:6). "새사람"이란 말은 성령을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아(自我)를 가리키는 바, 고후 5:17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갈 6:15; 엡 4:23-24).

⭕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적에 채택하신 모형이니(창 1:26-27),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역시 그 모형을 취하셨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큰가를 알 수 있다. (1)그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그 이상 더 할 수 없는 지극한 사랑이요, (2) 그리스도 안에서 제 2차로 인간을 개조하심에 있어서 또 그같은 모형을 취하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불변성(不變性)을 보여준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가라키는가? 그것은 엡 4:24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잘 밝혀 준다. 여기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란 말(* )을 개역하면, "진리의 의(義)와 진리의 거룩함"이나, 곧, 진리가 소유한(혹은 산출하는)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복음의 진리는 죽은 해골과 같은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고, 그것을 참으로 믿는 자들로 하여금 의와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 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올바름이고, 거룩하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말한다.

⭕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번역하면, "지식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심"이니 곧, 인간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적 개조(靈的改造)를 말한다. 그러면 이것을 그 바로 윗말과 연락시켜 볼 때에, 그 뜻은 이러하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로 지으심에 있어서 (1) 그 모형은 자기의 형상인데, (2) 그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의 지식(복음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그 시령을 새롭게 하심이다. 복음 진리를 참으로 아는 데 이른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곧, 의와 거룩)으로 변환한다. (핫지의 주석, 엡 4:24에 대한 해석 참조). "지식"이란 통속적 의미의 지식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만 받을 수 있는 영적 통찰이다. 이 말에 대하여 화란 주석가 반류웬(Van Leeuwen)은 말하기를 , "여기 '지식'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론상 지식이거나 자역적 지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생활에서 흘러 나오는 신앙적 지식 곧, 영적 통찰이다"라고 하였다. 여기 "새롭게 하심을 받는"이란 말(* )은 "새로워져가는"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진행형(進行形)으로서 (현재분사이니만큼)그 새로워짐이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자의 성화(聖火)가 단번 성취가 아니고 점진적이고 계속적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자가 악행을 끊은(8-9절 상반) 결과로 하나님을 아는 그의 지식이 더욱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신자가 악을 떠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만 그가 악을 떠날 때에 새 힘을 얻는 것도 확실하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행해야 그것이 축복의 원천으로 임한다. 진리를 순종함은 믿음의 진실성이다. 본절은 윗절의 계속으로서 "새사람"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다.

⭕ 거기는 - 이 밀(* )은 새 사람의 세계에는 아무런 계급이나 차별이 없나니, 누구나 그리스도께 속하여 구원을 얻는다(갈 3:27-29).

⭕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 "헬라인"은 희랍 민족을 가리킬 뿐 아니라. 희랍 문화를 받은 모든 다른 민족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Zaha, R merbrief, p. 66). 다시 말하면 "헬라인"은 성경에서 문화인들을 총칭하는 말이다(고전 1:22). 그리고 "유대인"은 구약 종교의 특혜를 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롬 3:1, 9:1-5).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헬라인도 그 문화의 특수 지위를 자랑할 수 없고, 유대인도 그 소유했던 종교상 특권을 인하여 이방인들을 멸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구원은 문화상 발달이나 종교상 특권으로 말미암아 받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 이것은 종교의 외부적 특권과 관련된 자들과 또한 그것과 관련되지 않은 자들의 차이를 가리킨다. 외형적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중생하여 새 사람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롬 2:29).

⭕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 "야인"이란 말(* )은 말이 어눌(語訥)하고 명료하지 못한 자란 의미이다. 본국인은 외국인의 언어를 그런 불명료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헬라 문화를 받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헬라 문화권 밖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볼 때에 그들은 "야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구디아"란 말(* )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을 의미하는바, 그 윗말 "야인"보다 더 미개한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스구디아"는 본래 흑해 북편 칼파디아 산 (Mt, Carpathians)동쪽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에 의하여, 아시아에도 구라파의 스구디아인과 같은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동쪽 구라파와 중앙 아시아와 북 아시아 전부가 스구디아인의 땅이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들은 문명에 낙오됨이 심하였으므로 그들의 부족 이름은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는 특권은, 문화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나님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들과 야만의 야만인들까지도 똑같은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미개한 민족에 속한 신자들은 이 특권을 누림에 있어서 외축하거나 자포자기할 바 아니다.

⭕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 이 말은 바울이 그 당시의 사회 형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다. 당시 사회는 노예를 학대했으므로 그들의 인권이 인정되지 못했다. 그런 사회제도 아래 있는 노예들에게 있어서, 사도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복음이었겠다. 갈 3:28을 보면, 새 사람의 세계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의 차별 대우도없다.

⭕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어떤 문화의 특권이나 종교상의 외형적 특수 관계도 아니며, 민족적 우수성이나 사회상 지위도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도 구언을 얻게 할 부속조건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르스도께서 "만유"(전부)이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성립시키는 유일한 원인이시니만큼, 그가 이 원인의 전부란 말이다. 그리고 그가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한 말은, 피조물 중에 그리스도의 주관과 권고(眷顧)를 벗어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그는 "만유"곧, 헬라인, 유대인, 야만인, 스그디아인, 노예, 자주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류에게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신 구원자로 계신다는 말이다. 롬 10:12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하는 말씀이 이 뜻을 잘 설명한다. 고전 12:13; 갈 6:15 참조.

성 경: [골3:12]

⭕ 그러므로 - 이 말은 골로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 사람"을 입었으니, 마땅히 이행해야 할 바가 있다는 결론을 소개하는 말이다.

⭕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 - 이 문구는 원문대로 직역하면, "택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하심을 입는 자들"이다. 이들은 물론 그리스도 신자들이니 창세 전에 택하심을 입었다. 그 택하심을 입은 결과로, (1) 그들은 거룩하게 되었고, (2)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영원히 입는 것이다. 기독신자는 자기도 남과 다름 없이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감겨함에 넘쳐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봉사하려는 동기를 품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남달리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신자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방심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을 품어 선을 행한다. 자기도 성도(聖徒)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불의를 행할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계속적으로 받는 부요(富饒)한 자임을 알고서야 어떻게 이 세상 것들 때문에 남과 다툴수 있으랴?

⭕ 처럼 -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로서"라고 개역되어 '사실 그대로'라는 의미를 나타내야 된다. 즉,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로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긍휼"이란 말(* )은 직역하면, "긍휼의 감정"이니 인격의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불쌍히 여기는 열정을 말한다. 영적으로 부요한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사람의 가련한 정형(情形)을 살피는 데 민감하다. "자비"란 말(* )은 성격의 인자함을 의미하는 바, 엄위(嚴威)에 정반대되는 것이다(롬 11:22). 이런 성격은 위에서 말한 긍휼을 근원으로 하고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겸손"(* )은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빌2: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려면, (1)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하며, (2) 높고 낮은 것을 판결하시는 때는 현재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남보다 우수한 줄로 자인(自認)하고 머리부터 상석(上席)을 택하는 것은 너무도 외람된 일이다. 눅 14:8-10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대로, 현세에 있는 교회의 복음 전파는 사람들을 연회에 초청함과 같다. 이 교회 생활(연석을 차지하는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높인다면, 그것은 연회에 초청된 객으로서 연주(演奏)인 하나님의 하실 일을 월권하는 무례한 행동이다. 우리는 차라리 말석(末席)을 차지하는 것이 예법에 정당하다. "온유"란 말(* )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 "그것은 베는 듯하고 쏘는 듯하고 찌르는 듯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며, 남에게서 손해와 방해를 받고도 격부되거나 원한을 품거나 반동하거나 복수하지 않는 것이고, 대인 접물(對人接物, 예를 들면 사람을 교훈하거나 사업을 경영함과 같은 것)에 있어서는 조급, 경솔, 조포(粗暴), 열광, 잔인, 속단, 흥분등과 정반대되는 인내, 시중, 화순(和順), 조절, 포용, 유화(柔和), 침착으로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오래 참음"(* )은 나를 괴롭게 하는 시험거리로 인하여 변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특히 남이 해하거나 혹은 은혜를 배반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노하지 않고 변함 없이 덕행(德行)을 계속함을 의미한다. 구약의 잠언에 오래 참는 덕을 칭찬하여 말한 귀절이 많다(잠 14:29, 15:18, 16:32,17:27). 하나님께서 이간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롬2:4, 9:22; 벧후 3:9에서 볼 수 있고, 인간이 인간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는 권면은 딤전 1:16; 딤후 4:2에 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5:22)에서 오래 참는 덕의 필요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단은 그가 시험하는 사람을 폭력으로 정복할 수는 없으므로 같은 시험을 오랫동안 계속함으로 그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질그릇과 같아서 계속적 시험에는 넘어가는 줄 그놈이 알기 때문이다. 그 놈은 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이와 같이 장기적 시혹(試惑)을 이기려면 우리는 오래 참는 덕을 소유해야 된다"(의역). "옷 입고"우리의 행습(行習)은 옷과 같이 남의 눈 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남의 평판을 받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행습들은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이 나타나서 그의 판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로운 행실의 소유자를 깨끗한 옷을 입은 자라고 한다.(계 19:8). 마 22:11-12 참조.

성 경: [골3:13]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본절은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미덕(美德)의 실제적 적용을 말한 것이니, (1)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적용으로서의 "용납"과, (2) 긍휼, 자비의 적용으로서의 "용서"이다. "혐의"(* )는 "원망"을 의미한다. "서로 용납하여." 교회 안의 원망이나 다툼의 책임은 한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선 양편에 다 있는 것이다. 원망을 받는 자 편에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원망 거리를 묵과하지 않고 불평을 일으키는 자도 사랑의 표준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측에서는 용납하는 정신을 가져야 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회에서는 잘못된 자의 짐을 져주는 의미에서, 혹은 자기 역시 그 사람에게 허물됨이(같은 종류의 허물의 아니며, 혹은 같은 정도의 허물은 아닐지라도)없지 않음을 자인하는 의미에서 그 범과자에게 용납을 청하는 것과 근사(近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갈 6:1-2).그러므로 서로 용납을 청할 필요가 있음도 사실이고, 서로 용납해야 될 것도 사실이다. "피차 용서하되"란 말(* )은 어떤 번역에 의하면,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되"라고 한다. 이 번역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뜻은, 한 신자가 다른 신자를 용서하면 그것은 실질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용서함과 같으르로 "네가 남을 용서하라"고 함보다 "너희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하는 재담식(才談式)문구를 사도가 썼다는 데 있다. 이 번역이 옳다면, 사도의 이 권면은 모든 신자들이 다 한 몸과 같다는 성경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이 번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골로새신자들은 서로 용납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서로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거니, "용납"은 피동적이요 소극적이고, "용서"는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다, 용납은 12절에 열거된 다섯가지 미덕 중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산물이고, 용서는 긍휼과 자비의 열매로 볼 수 있다.

⭕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를 반역하고 그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께서는 자기가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값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대하여 불평을 하시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큰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용서하셨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우리를 책 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리할 만한 최대 이유의 소유자는 그리스도였다"라고 하였다.

성 경: [골3:14]

본절은 12절의 다섯 가지 덕(德)에 연속하여 모든 덕행의 근본인 사랑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있다(요 13:34-35; 롬13:8-10; 고전 13:1-13;갈 5:13-15;엡 4:2-3;요일 4:7-21).

⭕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12절에 열거된 다섯 가지 덕도 중요하지만, 그것들 이상으로 더 중요하여 그것들의 기초를 차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완전의 띠"란 말이니 곧, 도덕 생활의 완전을 성립시키는 근본적 용소하는 말이다. 누구든지 사랑만 붙잡으면 모든 다른 덕행들은 거기에 따라온다(롬 13:8, 13:1-13).

성 경: [골3:15]

교회 생활에 있어서 피차간의 용납과 용서를 생산하는(13절)다섯 가지 미덕(12절의 긍휼,자비,겸손,온유, 오래 참음)이 사랑의 띠로 결속(結束)되면(14절), 교회 안의 평화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교회에 대하여, 본절에서는 평화를,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內住)를 희망한다. 그 논리적 단계를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의 평강의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된다 - 여기 "그리스도의 평강"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평화이다(빌 4:7). 이 평화를 마음에 소유한 자는 곧,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니 분토(墳土)와 같은 땅 위의 것 때문에 이웃과 다툴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에 참 평화가 있는 자는, 다른 사람과도 늘 평화의 관계를 가진다. 그런즉 남들과 평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참된 평화(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소유해야 된다(요 14:27; 엡2:14). "주장하게 하라"란 말(* )은 경기 지휘자(競技指揮者 = Umpire)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다. 경기장에서 혹시 분쟁이 일어나는 때는 두 말할 것 없이 그 지휘자의 결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 경기는 진행되는 법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신자의 마음에도 어떤 대외적 원한(對外的怨恨)이 있어서 암투(暗鬪)가 일어날 경우에는, 지체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펴화적 지휘에 순종해 나아갈 뿐이다.

⭕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 고전 7:15참조, 기독신자들이 얻은 구원의 최후적 목표는 "영원한 평강"이니(계7:14-17,21:1-7, 9-26,22:1-5), 그것을 성취하시는 방도로서의 "부르심"도 그것에 해당(該當)하여 아무 분쟁 없는 한 몸 같은 교회(고전 12:12-27)를 이루게 하는 부름이다.

⭕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 곧, 너희는 너희를 한 몸이 되도록 부르사 평강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 감사의 표는, 그들이 이 부르신 목표(한 몸이 되게 하는 것)에 순응하여 서로 화합하는 것이겠다. 칼빈은 여기 "감사하는"이란 헬라 원어(* )를 "유화(柔和)하는"(anabiles sitis)으로 번역했으니, 그것은 친목적 화합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절의 문맥에 아주 적합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평강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너희를 한 몸처럼 합일(合一)하는 조직체인 교회가 되도록 부르셨으니, 너희도 거기에 순응하여 너희끼리 유화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이다. 에디(Eadie)는 이 점에서 있어서, 이 말이 고전(古典) 헬라어에서는 "유화"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렇게 쓰인 실례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감사"의 의미를 채택하였다.

성 경: [골3:16]

사랑의 띠를 띠는 것으로 모든 미덕(美德)을 생산하여 지속할 수 있게 된 교회는(14절), 논리적으로 평화의 덕을 소유할 수 있으니만큼, 사도의 평화를 희망했다(15절). 그리고 또한 그런 교회에는 논리적으로 진리의 부요한 내주(內住)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2:2), 본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내주하기를 희망한다.

⭕ 그리스도의 말씀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이트푸트는 이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현시적(現時的) 영적 임재(靈的臨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본절의 문맥으로 보아서 이 둘째 해석이 합당하다.

⭕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 신자들 사이에 사랑이 풍성하여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의 말씀도 풍성히 내주한다. 그 이유는, 합심된 신자들의 단체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하시는 까닭이다(마 18:19-20). 이와 같이 사도는 사랑을 권면한 후(14절)에 그것(사랑)의 첫 열매로서 교회의 화평을 희망하고(15절), 또 그것의 둘째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을 희망한다. 신자가 서로 사랑 안에 연합하여야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여 얻는 지혜의 부요에 이른다(2:2 해석 참조).

⭕ 모든 지혜를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르 부르며 - 여기 말한 "가르침", "권면"."찬미"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주가 없으면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찬양이 참되이 나타나지 못한다. "가르침"은 영적 지식을 전달함이고, "권면"은 도덕 실행의 동기와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든 지혜"를 방법으로 한다. 지혜의 방법을 가지지 못한 가르침은 언제나 실패한다. 권면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여기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시"(* )는 악기에 반주되는 가곡을 가리킨 것이지만, 역시 반주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聖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떤 학설에, 이것은 구약의 시편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찬미"(* )는 단순히 목소리로 부르는 종교 음악이니,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영감(靈感)으로 지은 성가들이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는 위의 두 가지 중 어느 것이든지를 가리킬 수 있는 일반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어떤 특종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윗말 "시와 찬미"를 총괄하는 명칭이다(엡 5:19).

⭕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이 문구는 윗말과 밀접한 연락을 가졌으니 그 연락을 따라 약술(略述)하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이다. 신자가 모든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주요 목적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고, 교회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감사함으로"란 말(* )은 한역의 각주와 같이 "은혜로"라고 번역할 수 있으니, 그것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은혜를 받은 마음으로 하라는 의미이겠다. 그러나 첫째 번역이 자연스럽다.

성 경: [골3:17]

이 귀절에서 바울이 12-16절의 결론을 짓는 의미에서, 기독신자의 행동 원리의 요령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함과 또한 그 이름으로 감사함이다.

⭕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이 문구에는 이중 의미가 포함되었다. (1) 그 언행(言行)이 그리스도 자신의 언행답게 하라는 것이니, 신자가 그 언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모본하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를 위하는 언행을 의미한다.

⭕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여기 "그를 힘입어"란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그리스도 신자는 일반 언행에 있어서나, 하늘의 하나님을 송영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힘입어야만 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는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도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성 경: [골3:18]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부간의 도덕을 거론하였으니, 그 이유는, 부부가 가정의 기초인 까닭이다(창 2:18). "남편에게 복종하라."가정의 화평은 주로 아내된 자의 온유한 덕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 온유와 복종은 서로 유사한 덕이다. 벧전 3:4-5 참조. 구약의 잠언에 복종의 덕을 소유하지 못한 아내의 불화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경계한다(잠 11:22,12:4 하반. 21:9,19,25:24, 27:15). 잠 11:16,12:4,31:10-31 참조.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이 문구는 주 안에 있는 자가 마땅히 실행할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책임이 있는 이유는 성경에 밤히 기록되었다. (1)남자가 먼저 창조된 까닭(딤전 2:13), (2)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까닭(고전 11:9), (3) 여자는 남자에게서 난 까닭(고전 11:8), (4) 여자가 솔선하여 범죄한 까닭(딤전 2:14), (5)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그릇임으로 남자의 지도와 보호를 요구하는 까닭(벧전 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벧전 3:7), (6)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창 3:16;고전 11:3)이다. 그러나 이 복종은 예종(隸從)이 아니고 여자의 천직(天職)이다. 인권(人權)에 있어서는 남녀가 동등이다(고전 11:12;벧전 3:7).

성 경: [골3:19]

⭕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며 - "아내를 사랑하며." 엡5:25에,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어떠한가? (1) 그 사랑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고, (2)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가 솔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고, (2)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그가 솔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고, (3) 자기의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신 사랑이고 (4) 영원한 사랑이고, (2)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려고 사랑하신 것이다(엡 5:26-27). 남편된 자가 그 아내된 자에게 이렇게 큰 사랑의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 괴롭게 하지 말라 - "괴롭게"한다는 말(* )은 '쓰게 군다'는 의미이다. 남편된 자는 그 아내를 주관할 천직을 가졌으나, 그것은 독재적 압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사랑으로써 보호하고 부양하며 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남자는 이 권리의 성질을 오해하고 아내의 가정상 권리를 무시하고 전자(專恣)를 일삼는다. 크리소스톰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강해하였다. "남편된 너는 네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여 아내에 대하여 전자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아내된 너는 남편이 사랑한다고 하여 교만해지지 말아라. 아내된 너는 남편에게 종속하기를 서슴지 말아라. 너는 사랑하는 그에게 종속함이 고역이 아니니라. 남편된 너는 네 아내 사랑하기를 서슴지 말아라. 그 이유는, 네 아내가 네게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남편된 자는 언제든지 그 아내에게 오직 사랑에게 순종해야 할 본분을 가지고 있다.

성 경: [골3:20]

⭕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 출20:12; 레19:3; 신5:16; 잠23:22; 눅 2:51-52; 엡6:1-2 참조. "모든 일"이란 말은 그렇게 엄밀하게 볼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은 부모가 명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까지도 포괄하는 "모든 일"이 아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 것은 성경 말씀이 엄히 정죄한다. 잠 30:17에 말하기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였다. 롬 1:30과 딤후 3:2을 보아도 부모를 순종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순종하라"는 말(* )은 18절의 "복종하라"는 말(* )과 다르다. 18절의 것은 통솔(統率)에 종속함을 의미하고, 본절의 것은 교훈에 청종(聽從)함을 의미한다.

⭕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도덕 표준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Lightfoot).신자들의 도덕 표준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본(寫本)은 이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여기 "주 안에서"의 헬라 원어(* )를 "주에게"란 말(* )로 고쳤다. 기독신자는 세상의 안목(眼目)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보다 먼저 그리스도에게 부합하도록 행함이 필요하다.

성 경: [골3:21]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 이 귀절의 의미는 엡 6:4이 더 상세하게 밝혔으니, 그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부모된 자들이 그 자녀를 격노케 하는 원인 어디 있는가? 그것은, (1) 그들이 자녀들을 훈계하되 자기들의 권위와 자기들의 방법과 자기들의 표준을 고집하면서, (2) 만알 그 자녀들이 잘 순종치 않는 경우에는 혈기와 울분에 끌리어 강박(强迫), 악담(惡談), 폭력까지 사용하는 데 있다. 부모가 그 자녀에게 대한 자기들의 권한을 남용하여 지도하는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실패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를 교양함에 있어서 자기들의 권위나 방법을 자의적(恣意的)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만이 주인공이시니 그리스도만이 그 권위와 방법을 가지셨디.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하신 교양과 훈계를 그 자녀에에 전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엡 6:4참조. 그들은 그 자녀의 잘되고 못되는 문제를 일체 주님께 의뢰해야 된다. 그리고 혹시 그 자녀가 불순종하는 때에도 그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온유하게 지도해야 된다.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부모가 그 자녀를 옳게 지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모에게 대하여 노여워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그 부모에게는 잘못이 없다.

⭕ 낙심할까 함이라 - 이 문구에 대한 벵겔의 강해를 보면, "낙심은 청년의 패망이다"라고 말했다.

성 경: [골3:22]

⭕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바울 당시에는 노예 제도가 사회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 신자의 가정 도덕을 진술함에 있어서 역시 이 부분을 제외할 수 있는 대로 그 주인을 속여 가면서 맡은 일을 게으르게 하고, 주인은 노예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주인을 속여 가면서 맡은 일을 게으르게 하고, 주인은 노예를 학대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 문제의 도덕적 해결책을 여기에서 진술하였다. "육신의 상전" 바울은 이 말로써 노예들의 인격적 가치의 고귀함을 설명하여 그들의 눌린 심령을 위로한다. 곧, 이 말은 노예들이 육신상으로만 노예된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限), 남들과 같이 영생의 복을 누릴 자유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 문구에 대하여 크리소스톰은 강해하기를, "바울의 이 말은 노예들의 인격의 더 좋은 부분(영혼)은 자유한다는 것이며, 노예로서의 그들의 고역은 잠간임을 밤힌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누 가림만 하지말고." 그리스도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로 그 일을 성실히 감당해야 할 종교적 의미인 것이다. 그의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니, 그의 직업도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마음 속과 모든 은밀한 것을 밝히 보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행함이 마땅하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려면 거짓됨이 없이 중심으로 그 직무에 충성해야 된다. 그의 수고가 그 주인된 인간을 기쁘게 할 목적이면, 그것은 하나의 무의미한 고역(苦役)과 비애(悲哀)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노예의 수고도 주 안에서 행한 것이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봉사를 목표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늘에서 영원한 상극을 받게 될 천국 노동이다. 고전7:17-23 참조.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성실한 마음으로"란 말(* )은 '단순한 마음'곧, 거짓 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노예도 모든 다른 직무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끝날에 그 행한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갖게 되는 성실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된다.

성 경: [골3:22]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 본 절은 앞절의 내용을 이어서 노예 봉사의 또 한 가지 태도를 부가한다. 앞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부터 오는 성실한 마음(거짓이 없는 마음)으로서의 봉사 태도를 말하고, 본절에서는 그 봉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실행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마음을 다하여"란 말(* )을 자역(字譯)하면 "영혼에서부터"라고 할지니 이것을 보면, 마음을 다하는 것 뿐 아니라 감심(甘心)의 의미까지 포함한다. 아무리 노고가 심하고 비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향기롭고 영예로운 것이다. 그런 일은 누구든지 마음을 다하여 할 만하고 또 감심으로 할 만하다. 이런 감심적 봉사는 어언간 노예의 속박을 떠나 자유의 경역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고상해 지고 또 영화롭게 된다.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노예가 그 봉사를 할때에 주님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고, 인간을 위하는 의미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성 경: [골3:24]

⭕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 이 귀절과 다음절은 노예가 주님을 위하는 의미로 그 책임을 성실히 해야 될 이유를 보여준다. 곧, (1)노예된 자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서 영생의 기업을 은혜로 받으니 그 은혜가 감사한 까닭이며, (2) 그의 수고는 궁극적 의미에서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내용을 가진다. 그일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하면 끝날에 보응을 받겠기 때문이다(25절). "유업의 상." 이 문구 역시 노예들을 상대한 말이다. 노예들이 "육신의 상전"에게서는 종의 대우를 받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녀의 명분으로 장차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유업을 받는 자는 그 집 노예까 아니고 언제나 그 집 자녀일 것이다(마 21:35-38; 롬8:15-17; 갈 4:1,7). 신자가 내세에 들어가서 받게 되는 영생과 그 영광을 가리켜 "기업" 혹은 "유업"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 거저 받는 영생이기 때문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자녀의 처지에서 받는 영생의 복은 그의 어떤 공로와의 교환 조건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세에 그 성도들에게 주실 영생은 불변하는 것이다(벧전 1:4-5). 자식이 그 아버지에게서 받는 기업은 일시적 상급이 아니고 영구한 것이다(요 8:35).

⭕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한역의 각주(脚注)에, "종노릇하느니라"라는 번역은 "섬기느니라"(* )의 문자역으로서 글뜻을 더 밤히 보여준다. 이 문구는 노예들의 봉사의 의의(意義)를 결론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봉사가 직접으로는 인간을 상대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상대한다. 어떤 학자는 여기 "섬기느니라"를 "섬기라"란 명령사로 번역한다.

성 경: [골3:25]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 (1)본절은 내세의 심판이 공정할 것을 예고하여, 노예된 자들로 하여금 책임에 추성케 하려 하려 함이라고 한다. (2)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여기서 노예들의 나타(奴隸)와 불성실을 경계하라고 이 말을 하였다기보다, "상전들"의 노예 취급의 불공정함을 염두에 두고 노예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3)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은 두 계급(주인과 노예)을 함께 경성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한다. "불의의 보응." 이것은 그 행한 불의에 해당한 벌을 가리킨다.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여기 "외모"는 모든 외형적 차별들이 인종, 지위, 빈부, 귀천 등의 차별이다. 끝날의 심판 때에는 지위가 높았던 사람이라고 해서 받을 형벌을 면할 것이 아니며, 혹은 낮은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써 마땅히 받을 정죄에서 방면(放免)될바도 못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각 사람의 소행을 따라서 실행될 것이다. 롬 2:6;고후 5:10;엡 6:8-9 참조.

성 경: [골4:1]

⭕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 본절은 앞장 끝에 계속하여 "상전들"이 노예들을 취급하는데 관한 도덕적 책임("의와 공평")을 진술한다. "의와 공평"은 도덕적 총괄적 명사이다. 여기에 반대되는 악행의 실례를 들면, (1)그들에게 필수(必修)의 생활비를 적당히 주지 않는 잔인한 행위(약 5:4)나, (2) 그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 것 같은 비인도적(非人道的)행위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죄는 그 때에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에게 대하여 흔히 범하는 것이었다.

⭕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 이 문구는 종의 주인들이 그 노비를 천대하지 말고 의와 공평으로 대우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주인들도 장차 그들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인즉, 어찌 그 노예 취급에 있어서 의와 공평을 무시할 수 있으랴? 눅 12:46-48; 고전 7:22 참조

성 경: [골4:2]

⭕ 기도를 항상 힘쓰고 - 눅 18:1;롬 12:12;헵6:18; 살전5:17;벧전 4:7참조. "항상"기도하라 함은, (1)어떤 특정(特定)의 소원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심령으로 부단히 기구(祈求)하는 동시에, (2)일정한 기간을 내어 그 소원이 간절하기만 하면 이와 같이 힘쓰게 될 것이다. 기도의 주요 목적이 사고(事故)를 만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구함이라면, 사고가 생긴 그 대에만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주요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력을 섭취하는 방편(方便)의 하나로서 잠시라도 정지하면 안되는 것이니, 마치 우리 육신의 호흡을 일시라도 정지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 읽는 것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호흡에 비유할 수 있다.

⭕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이 문구는 위에 훈시된 항상 기도함에 관한 두 가지 긴요한 주의건(注意建)을 말한다. (1)항상 기도을 힘쓰는 자는 간구에만 몰두하고 감사를 잊어버리기 쉽다. 미래의 축복을 갈망하는 것만이 기도의 목적이 아니고, 과거에 받은 축복을 기억하여 가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잠잠하신 때에도 우리는 역시 감사해야 된다. 아버지의 잠잠하심도 자식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2) 항상 기도함에 있어서의 또 한가지 주의건은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항상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대에 신자들도 낙심하거나 피곤을 느끼는 시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신자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기도자의 유익을 위하여 응답의 시기를 먼 장래의 어느 때로 정하신 까닭이겠고, 혹은 그런 기도의 응답은 그 기도자에게 무익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밖에 다른 선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는 혹시 기도 응답을 못받는 때에도 실망이나 영적 피곤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전보다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기를 시작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번 더 각성한 태도로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그런즉 이상의 논조(論調)로 보아서 항상 감사함으로 각성하는 자라야 기도를 계속 실행할 수 있다.

성 경: [골4:3]

⭕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 사도 바울은 여러번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하였다(롬 15:30; 고후1:11;엡6:19;살전 5:25;살후3:1-2). 이러므로 오늘날 신자들이 서로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 하나님의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 사도가 그 교회에 자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는 목적은, 자기의 이 세상 생활의 안락이나 형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은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다. 여기 "전도할 문"이란 말은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한역의 각주와 같이 "말씀의 문"이다. 주석가들 중에서는 이것이 엡 6:19의 의미와 같이 말 할 수 있는 "입"을 가리킨다다고 하나, 전도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가리킨다는 학설이 더욱 유력하다(고전 16:9;고후 2:12).

⭕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 1:26해석 참조. 사도 바울은 오랫동안 감취었던("비밀"의 뜻)그 진리 곧, 복음을 참으로 알았다. 몰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진리를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깨달은 그는(갈 1:15-16), 구원을 알지도 못하고 멸망으로 달음질하는 뭇 영혼들을 불쌍히 여겼다. 이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어지 그 심령에 불타지 않았으랴? 더우기 그는 하나님에게서 모든 사람들을 구언해 내는 복음 전도의 큰 사명감 밑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도할 기회만 찾았다(롬 1:14;고전 9:16). 그가 옥중에서도 바라는 것은 어서 석방되어 자유로운 생활을 좀 누려보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 전도의 기회만을 갈망하고(빌 2:24)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행 28:30-31).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음이 달음질하듯이 속히 온 세계에 전파되기를 희망하는 때도 있었다(살후 3:1).

⭕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 바울이 로마옥에 갇힌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성 경: [골4:4]

⭕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 이것은 앞절에서 바울이 골로새교회에 부탁한 기도의 결과를 말해준다. 그의 부탁대로 골로새신자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준다면 그의 선교는 잘 성취될 것이라고 한다. "마땅히 할 말"은 '복음'이다. 복음은 바울이 마땅히 말해야만 될 것이다.그 이유는, (1)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잡아 그것을 전파하게 하신 까닭이다(고전 9:16), 마 28:19-20;행5:32참조. (2) 복음은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한 말씀으로서 천상천하에 유일한 진리이므로 이것을 아는 인간은 누구나 그 진리를 전파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복음 이외에 구원의 길이 절대로 없는 것을 아는 자는 그것을 남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밀"(* )은 역시 복음을 가리킨다(1:26 해석 참조). 그런데 이 복음을 나타내는 방도는 사람의 지혜와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의 말과 같이(고전 2:1-2,4-5)성령의 계시와 능력에 있는 것이다. 마11:25 참조. 그러므로 이것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의뢰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따라서 바울은 교회의 기도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성 경: [골4:5]

사도는 교회의 할 바 책임으로서 기도를 권장하는 중, 특히 불신자들에게 사도의 전도할 기회가 있기를 기도하라 하고(2-4),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골로새교인들에게 불신자들 앞에서 지혜 있게 행하여 전도에 도움이 있기를 희망한다.

⭕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 여기 "외인"이란 말(* )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전 5:12-13;살전4:12;딤전 3:7). 신자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전 5:12-13; 살전 4:12;딤전 3:7). 신자가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전 5:12-13;살전 4:12;딤전 3:7). 신자가 불신자들 중에서 가질 행동 원리는 무엇보다 먼저 "지혜"인 것이다.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에, 성경을 연구하는 정당한 순서를 밟지 않고 먼저 신자들의 행동과 신분(身分)을 살핀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 행동과 처신에 있어서 성경 진리(지혜)를 실현해야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그렇게 교훈하시면서 순결의 덕을 부가하여 훈시하셨으니, 곧, "보라 내가 너희를 보맴이 이리 가운에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다. 칼빈은 이 점에 있어서 불신자들 중에서 지혜로 행해야 될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하였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신자가 불신자들 앞에서 여간 실수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더욱 그리스도의 종교를 멀리하고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실수는 작은 것 같으나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은 것"(레 19:14)과 마찬가지이다. (2) 그런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음에 비방을 돌린다. (3) 또 한가지 유의해야 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신자가 불신자들 중에서 조심하지 아니하면 그만 그들과 융화되어 믿음에 손해를 받기 쉽다는 것이다(Calvin's Commentaries; Colossians, 1974, Eerdmans, p. 358).

⭕ 세월을 아끼라 - 이 문구(* )를 개역하면, "기회를 사서 가지라"란 말이다. 곧, 빨리 흘러가고 마는 기회를 나 자신이 선한 노력과 희생의 댓가를 냄으로 속구(贖救)하여 내 것을 만들라는 말이다. 신자들은 불신자를 상대하는 시간을 의미 없이 흘러 보내지 말고 그 시간에 지혜롭게 행하면, 무언 중에라도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매수(買收)해 둔 시간은 내세에 이르러 영원한 행복을 가져온다(눅 14:13-14,16:9).엡 5:16해석 참조.

성 경: [골4:6]

본절은 신자가 불신자를 대할 때에 말을 선미(善美)하게 하기 위하여, 우선 교회 안에서부터 신자들끼리 언사를 선미하게 하는 습관을 배양해야 될 것을 말한다. 엡 4:29 참조.

⭕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 여기 "은혜 가운데서"란 말(* )은 "은혜롭게"라고 개역함이 가하니, 신자는 언사를 '친절하게' 혹은 '인자하게' 표현하라는 것이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부패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로서(엡 4:29), 소금을 방부제(防腐劑)로 보는 해석이다(마 5:13; 막 9:49-50; 눅 14:34-35).

⭕ 그리하면 - 곧,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언사를 친절하게 하면, 대외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 벧전 3:15을 보면, 기독교에 관한 불신자의 질문에 대한 신자의 답변 태도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증인으로서 중대한 위치에 섰다는 것을 의식하는 태도이다. 이런 신중한 태도가 있는 자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성 경: [골4:7]

⭕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라니 - "두기고"는 소아시아 사람인데 사도의 조사(助事)로서 많이 수고한 사람이다(행 20:4;엡 6:21;딛 3:12). 두기고가 골로새에 가게 된것은, 그가 본 서신을 전달하는 동시에 사도 바울의 정황(情況)을 교회에 보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 여기 "신실한"이란 말은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란 명칭에까지 언급하는 것이다. 곧, 두기고는 "일군"의 자격으로도 신실하고,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의 자격으로도 신실하다는 의미이다. 신실은 "하나님의 비밀"곧, 복음을 맡은 사역자의 유일한 자격이다. 그러므로 고전 4:1-2은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신실)이니라"고 하였다. 주님의 일군의 신실은, (1) 복음에 신실함이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을 가감(加減)하지 않고 그대로 보수하여 전함이고(고후 2:17), (2) 인격 생활에 있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고(고후 1:18-20), (3)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다가 고통과 난관을 당하여도 변절하지 않는 진실이다(엡 6:24). 그런데 여기 "일군"이란 말과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란 말의 분별은 무엇인가? 전자는 특히 교역자의 사역을 염두에 둔 명칭이고, 후자는 그 교역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언급하는 명칭이다. "일군"이란 말(* )은 어원적(語源的)으로 보자면 티끌 가운데로 통과 하는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음질하는 자를 의미하나니(Trench), 그것은 노역(勞役)의 정황을 묘사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바울이 두기고를 가리켜 자기와 함께 그리스도의 종된 자라고 한 것은, 두기고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절대로 충성하고 순종하는 자였음을 가리킨다.

성 경: [골4:8]

⭕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로 보낸 것은 - 여기 "특별히"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없는데 한역에는 그것을 보역(補譯)했다.

⭕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 이 문구는 어떤 사본들의 사구(砂丘)대로 (* )보아서는 "나로 너희 사정을 알게 하고"이니, 그것은 시내산사본(* )의 제 삼 교정본을 위시하여 기타 몇 사본들(C, K, L)의 사구(寫句)이다. 그러나 그 보다 권위 있는 사본들(A,B)에 의거한 한역(韓譯)은 이 부분의 문맥에 적합하니, (1)두기고가 골로새에 가는 것이 바울의 사정을 골로새신자들에게 알려주려는 것이었음은 7절 초두에 밝히 말한 것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2) 9절 하반을 보더라도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Lightfoot, Van Leeuwen).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의 내정과 사생활은 다른 신자들에게 알려질 때에 유익을 끼친다. 그 이유는, 주님의 충성된 종의 이면(裡面)에는, 그 외부에 나타난 것 이상으로 모본할 만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에 갇힌 생활의 이면은 모든 교회에 큰 감동과 격려(激勵)를 줄 것이다.

⭕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사도의 실정을 알고자 갈망하던 골로새교회가 두기고에게서 그의 모든 정황을 청취(聽取)할 때에, 큰 위로(신앙을 격려하는 위로이고 단지 근심에서의 안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두기고를 통하여 그들을 위하는 바울의 관심이 얼마나 간절한 것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성 경: [골4:9]

본절을 두기고의 동반자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천거를 포함한다.

⭕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 7절 하반 해석 참조

⭕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 그는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로마로 도피해 있던 중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고 주님께 돌아온 자이다. 빌레몬서를 보면,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라고 하였으니, 그를 귀중히 여기는 바울의 애정은 말할 것도 없다 "오네시모"(* )는 헬라어의 뜻으로는 '유익한'이란 의미이다. 방울이 이 형제를 사랑하여 빌레몬에게 부탁하면서 그 이름의 뜻을 음미해 말하기를,"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1:11)라고 하였다. 몬 1:10-18 참조.

⭕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 곧, 골로새사람이란 말이다. "저희"는 위의 두 사람,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가리킨다.

성 경: [골4:10]

⭕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 바울과 "함께 갇힌 이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 거주하던 유대인으로서 (행 20:4), 바울과 함께 에베소의 소요(騷擾)를 겪은 후(행 19:29), 같이 여행하고(행 20-14), 로마로 잡혀 가는 바울과 동행하는 자로 나타났다(행27:2). 이것을 보면, 그가 바울이 받는 환난에 동참한 때가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평시의 동사(同事)도 막역(莫逆)의 친분을 의미하지만, 난시(亂視)의 동고(同苦)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 바나바의 생질 마가 - "생질"이라는 말은 남동생의 아들, 혹은 여동새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마가의 어머니는 바나바의 친 자매였다. "마가"는 "요한"이라고도 하는데 경건한 모친 슬하에서 생장하였고(행 12:12), 바나바와 바울의 제 1차 선교 여행에 수종들다가(행 13:5), 중도에 돌아왔으나(행 13:13), 후년에 베드로의 조사로 근무하기도 하고(벧전 5:13), 또한 바울의 조사로도 근무하였다(딤후 4:11). 사도행전 (행 13:13, 15:37-40)을 보면,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참된 교역자가 그 사역 초두에 혹시 실패할지라도 그것이 그에게 영원히 치료되지 못할 상처가 될 것은 아니다. 바울이 과거에는 불만족하게 여기던 마가를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그를 추천한다. 그 이유는, 재 출발한 마가의 신앙생활이 장족 진보하여 성역에 충성하기 때문이다.

⭕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 여기 "명"은 마가를 특별히 존대하라는 사도 바울의 지령인데, 이 서신을 가지고 골로새로 가는 두기고와 오네시모 편으로 그 지령이 전달된 듯하다.

성 경: [골4:11]

⭕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 "유스도"는 로마의 이름으로서 '의인'(義人)을 의미하는바, 이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성경에 두 번 더 나타난다(행 1:23,18:7). "유스도 예수"는 히브리 이름 "예수"에다가 "유스도"라는 로마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

⭕ 저희는 할례당이라 - 곧, 위의 세사람,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는 모두 다 순 유대인(할례 받은 자)들이란 말이다.

⭕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나 - 할례를 자랑하는 유대인 중 대다수는 반기독자(反基督者)들이고,또 그들 중에 약간의 신자들이 있어도 그들은 유대주의에 강하기 때문에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를 등한히 하였다. 로마의 큰 도성에 유대인들이 많았으나, 복음을 위하여 옥고(獄苦)를 당하는 바울을 동정하는 자가 별로 없었고, 오직 위의 세 사람만이 바울을 도와 함께 역사한 것이다.

⭕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 복음을 반대하고 또 몰이해(沒理解)하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위의 세 사람과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희귀한 일이었다. 이렇게 희귀한 일은 바울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막에서 진주를 줍는 것 같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성 경: [골4:12]

⭕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 - "에바브라"는 그리스도 예수께 절대로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기쁘게 함을 본무(本務)로 하는 (갈1:10) 충성된 종이다. 그런데 그는 골로새에서 온 사람이다. 1:7 해석 참조.

⭕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 에바브라가 골로새교회를 극히 사랑한 증거는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되 "항상"하였고, 또 "애써"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도할 "항상"한다 함은, 그 기구하는 제목이 일향(一向)떠나지 않고 그 중심에 있어, (1)무언 중에도 기구가 계속될 뿐 아니라, (2) 일정한 규례를 따라 밀실 혹은 집회석에서 기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애써 기도"한다 함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 기도에 노력함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 모범이다. 그의 겟세마네기도를 보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히 5:7),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도록 애써 간구하셨고(눅 22:44), 같은 기도를 중복하셨다(마 26:36-44).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계시하신 모든 교훈이다. 골로새신자들은 그것을 완전히 또는 확신 있게 알아야 견고하게 설 수 있다. "완전"이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성숙'(成熟)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해주신 모든 교훈들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양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아랫말 "확신"(* )은 성숙한 지식의 결과일 것이다. 진리 지식이 성숙한 신자는 필연적으로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서기를" 이란 말(* )은 견고히 선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아는 지식이 성숙한 자는 확신을 소유하게 되고, 확신이 있는 자는 견고히 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확신 있는 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교훈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동요하지도 않는다. 골로새교회는 이단이 유행하는 위기(危機)에 있었으므로(2:4-23), 그 교회의 사역자인 에바브라(1:7)는 으례 이런 기도를 주님께 드렸을 것이다.

성 경: [골4:13]

⭕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 2:1 해석 참조,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은 수고하느 것. "히에라볼리"라는 도시는 골로새의 동편에 있는 곳이다. "많이 수고함"은 에바브라가 그들을 위하요 가지는 영적 노력을 가리킨다.

⭕ 내가 증거하노라 - 바울은 자기와 동역하는 자들을 높이 추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1:7;고후 8:16-23; 빌 2:20-22, 25-26).

성 경: [골4:14]

⭕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누가"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귀한 조사였다.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의 대부분을 동반(同伴)한 자로서, 특히 옥중에서 바울의 임종시(臨終時)까지 시종한 사람이다. 딤후 4:11에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씌어 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었던 것과 같이, 누가는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되었다. "데마"는 누가와 같이 나중까지 바울과 동고(同苦)하지는 못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다(딤후 4:10). 우리가 그를 가리켜 배교한 사람이라고까지는 하기 어려우나, 그의 신앙이 후년에 이르러 약해졌다는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성 경: [골4:15]

⭕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 - "라오디게아"는 골로새에 가까운 곳이니만큼, 두 교회 사이의 우교(友交)는 친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통하여 라오디게아신자들에게 문안을 보낸다.

⭕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 어떤 사본들(A, C, * )에 의하면, "눔바와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다. "눔바"라는 인물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수 없다. "그들"은 눔바란 사람의 가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코트와 홀트 두 사람은 한역이 취한 사본(B)의 사구(寫句)를 채택하였다. 그러면, 위의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은 눔바의 집에 모이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일 것인가? 이 난제에 관하여 두 학설이 있다. (1) 동일한 교회라는 학설, 양자(兩者)가 실질에 있어서 같은 라오디게아교회를 가리키나니, 전자(前者)는 라오디게아의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한 것이고, 후자(後者)는 그들을 하나의 회중으로 상대한 것이라고 한다. (2) 각기 다른 교회라는 학설. 전자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가리키고, 후자는 라오디게아 혹은 그 부근에 있는 작은 교회를 가리킨다고 한다. "집에 있는 교회"는 어떤 신실한 신자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정하고 그곳에 모이는 신자들의 단체이다. 행 12:12; 롬 16:5; 고전 1:19; 몬 1:2 참조. 이런 교회들 사이에는 경쟁이 없었을 것이며, 신자들은 외부적 시설보다 신앙의 장성을 위주하였을 것이다.

성 경: [골4:16]

⭕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 바울은 본절에서 자기의 서신들을 각 교회가 윤독(輪讀)할 것을 권한다. 이것을 보면, 사도 서신들이 개교회에 국한된 사서(私書)가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위하여 정경적 문서(政經的文書)인 것이 분명하다. "이 편지"란 것은 물론 골로새서를 가리킨다.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 이문구에 대하여는 해석이 여러가지 있다. (1) 라오디게아교회가 바울에게 보냈던 편지라는 학설, 다시 말하면, 바울에게 보낸 라오디게아교회의 서신을 두기고와 오네시모편으로 골로새교회에 전송(傳送)하면서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억설인 것 같다. (2) 바울이 라오기게아를 심방하고 거기서 골로새에 발신(發信)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골 2:1 참조. (3) 방울이 옥중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발송한 서신이라는 학설. 그렇다면, 현존의 신약성경에 "라오디게아서"란 서신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4)에베소서가 바로 라오디게아서라는 학설. 이추측도 할 만하다. 그 이유는, 첫째, 에베소서는 실로 에베소교회만 상대로 해서 발송된 것이 아니고,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상대로 한 까닭이다. 엡 1:1의 "에베소에 있는"이란 말은 주요한 고대 사본들(* ,B)에는 없기 때문에, 그 서신은 어떤 개교회에 지정됨이 없는 윤독 서신(輪讀書信)으로 볼 수 있다. 이 윤독 서신은 조만간 소아시아 교회들 중의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를 경유해서 골로새교회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윤독 서신을 염두에 두고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한 것 같다. 둘째, 이 윤독 선신(에베소서)이 골로새서와 동일한 시기에 저작되어 동일한 인편에 송달(送達)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겠다. 세째, 말시온(Marcion)은 2세기 중엽에 에베소서의 제호(題號)를 "라오디게아서"라고 했으니(Tertullian, Against Marcion 5:11,17), 그의 말도 어떤 신임할 만한 고대의 유전에 의종(依從)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 경: [골4:17]

⭕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 "아킵보"는 골로새교회에서 주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몬 1:2 참조. 바울은 여기서 골로새교회에 아킵보를 격려하라고 부탁한다. 사도가 직접 아킵보를 격려함보다 교회를 통하여 간접으로 권고하는 것을 보면, 사역자는 교회의 권위 아래 지배를 받는 자이고 교회를 지배하는 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은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감독하시며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으로서, '거룩한 직분'이란 뜻이다. 그것을 맡은 자는 자행 자지(自行自止)할 수 없고 "삼가 이루"어야 한다. 교직자는 그 직무가 인간을 상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니만큼, 성실히 그것을 수행해야 된다. "이루라"는 말은 그 맡은 책임들 중 하나라도 빼놓지 말고 원만하게 실행하라는 말이다(딤후 4:5).

성 경: [골4:18]

⭕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 사도는 앞절까지 대서자(代書者)를 통하여 본서를 쓰다가 끝에 와서는 자필(自筆)로써 기록한다(살후 3:17).

⭕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 사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중에 수금된 사실이 골로새신들에게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그가 골로새신자들에게 자기 개인에 대한 도움을 구하는 사욕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갇힌 바울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모든 이단자들을 막을 마음이 강해질 것이다. 복음을 인하여 수난(受難)하는 자를 기억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더욱 충성할 동기를 얻게 된다.

⭕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렇게 짧은 축도는 딤전6:21;딤후 4:22; 딛3:15에도 있고, 길게 구비한 축도는 고후 13:13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