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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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주석(1장-24장)



성 경: [눅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우리 중에 - 본절에서 '우리'는 구체적로 누구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리 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예수에 관한 나름대로의 산 체험과 증거들을 보호하고 전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저자 누가 역시 그러한 사람 중 하나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본문의 '우리'와 접촉하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다고 하면서 적잖은 문제들을 야기시켰으니 지나친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사건을 임의로 축소, 확대하기도 하며 또한 특정 종파의 교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을 왜곡시키거나 새로운 기사를 꾸며내어 기록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의 기록은 모두 객관성과 정확성이 매우 부족해 '외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저서들이 정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데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개연성(蓋然性)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수에 관한 기록에 객관성과 정확성과 역사성을 뒷받침해 주는 예수의 목격자들(witnesses)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나오는 2절과 함께 연결해 본다면 의미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증인들임이 분명하다(Alford).

⭕ 이루어진 사실(*, 톤 페플레로포레메 - 이 단어는 '충만한'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플레레스'(*)와 '가져오다'의 뜻을 가진 '페로'(*)가 결합된 '플레로포레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이미 '성사된 일', '성취된'(accomplished) 일이라는 뜻이다. 또한 '가장 확실하게 인정되고 믿어진 일'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때 이 말은 '벌써부터 예정되었던 계획을 따라 성취된 확실한 사건들'이라는 의미로 결론지을 수 있다(Merrill C. Tenney). 한편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취된'(딤후 4:5, 17) 그리고 '확인된'(롬 4:21;14:15;히 6:11;10:22)으로 사용됨으로써 위의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준다. 실로 예수의 생활과 그의 행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서두에서부터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KJV는 이 부분을 '우리들이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들'(those things which are most surely believed among u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제자들이 직접 체험하여 믿게 된 사실들'이라는 것으로서 앞으로 소개될 이 누가복음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기록되었음을 말해준다. 실로 본서를 통해 누가는 사료(史料)들과 정확한 날짜를 비교적 소상히 언급함으로써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성 경: [눅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처음부터(*, 아프 아르케스) -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프 아르케스' 중 '아르케'(*)란 말은 '모든 일의 시작'에 대해 또는 '말해진 일들의 시작'에 대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예수의 탄생에서부터'라는 의미보다는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라는 의미, 또는 '세례 요한의 활동의 시초에서부터'(3:1, 2;행 1:21, 22;10:37)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부터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의 목격자들이다.

⭕ 말씀의(*, 투 로구) - 여기서 이 단어는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말씀'(*, 로고스)은 다양하고 빈번하게 사용 된다. 특히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가 기술한 요 1:14에서는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었다"(incarnation)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분명 말씀이 성육신보다 선재(先在)했음을 암시한다(Lenski).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으며(요 1:3), 그 말씀은 생명이있고 또 사람들의 빛이 된다고 설명한다(요 1:4). 또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증언한다(요 1:14). 이에 비해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다. 사실 고대 헬라의 작가들은 어떤 사람의 말과 그에 걸맞는 행동을 연관시켜 그 중요성 강조했었다. 행 1:1에서도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기술할 때 '행하시며'와 '가르치시기를'이라는 말들을 서로 결합시키고 있다. 어쨌든 말씀과 행동을 통해 계시된 그 복음의 말씀은 1절의 '이루어진 사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Liefeld).

⭕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 아우토프타이 카이휘페레타이) - 마태나 요한과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내내 곁에서 목격자되고 일꾼되었던 제자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복음서 기록을 위해 그 같은 사도적 증거(witnesses)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목격자'에 해당하는 '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아우토스'(*)와 '보다'의 뜻을 가진 '호라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스스로 본 자', '직접 자기 자신이 본 자'(eyewitnesses, 목격자)라는 뜻이 된다(Robertson). 이는 곧 누가의 복음서 기록을 가능케 했던 각종 정보를 제공해준 자들로서 그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직접 그분의 활동상을 목도한 산 증인이다. KJV는 이 부분을 '말씀의 일꾼'(minister of the wor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실로 예수 공생애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외에 70인 전도대 및 예수를 수종들던 여인들(막 15:40, 41), 그리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자신의 복음의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 기술을 가능케 한 자들이 '목격자' 또는 '말씀의 일꾼'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양자 모두가 포함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그 복음의 권의와 내용상의 완벽을 넌지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1절의 '우리'는 바로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이다.

⭕ 전하여 준 그대로 - 본문에서 누가는 복음서 기록을 위해 준비한 모든 자료들이 임의대로 더하거나 뺀것이 없는 원형 그대로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누가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자신에게 전해진 구전(Oral tradition)과 기록(Written tradition)이 신빙성 있고 정확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전하여 준'(*, 파레도산)은 제2 부정과거 복수 능동태 직설법 동사로서 어김없이, 확실히 건네주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여기서 '구전'(口傳)을 가리킬 수 있으나(고전 11:23;15:3) 반드시 구전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24:20;행 1:20;3:13). 즉 이것은 구전과 기록 문서를 포함한 일종의 '전승'(*, 파라도시스)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실로 누가는 최초 목격자와 일꾼들이 전해준 전승을 통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편집 구성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실 누가는 예수의 제자도 아니었고, 사도도 아니었기에 복음에 있어서만은 직접적 증인이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 최초 증인의 확실한 보증 등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 내력을 저술하려고(*, 아나태사스다이 디에게신) - '저술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태사스다이'는 '차례로', '잇달아'라는 뜻을 가진 '아나'(*)와 '고정된 곳에 놓다', '어떤 순서대로 배열하다'라는 뜻을 가진 '타쏘'(*)의 합성어인 '아나타쏘마이'(*)가 원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임의대로 복음을 기록함이 아니라 일관성 있게, 차례대로 순서에 따라 편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력을'에 해당하는 '디에게신'은 '디에게오마이(*, '완전히 인도하다', '자세히 말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서(8:39;막 5:16;9:9;행 8:33;히 11:32) 이는 곧 내용을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함을 말한다.

⭕ 붓을 든(*, 에페케이레산) - 이 단어는 '손을 대다', '착수하다', '시도하다' 등의 뜻을 가진 '에피케이레오'(*)로서 흔히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의 의학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실패나 비난에 유념치 않고 무엇을 시도하다'로 이해되곤 했다(Robertson). 이로 보 건대 이 일을 착수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뒤늦게 누가가 이 작업에 착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앞서 기록된 자료(Written tradition)들이 부실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물론 누가는 자기 앞의 다른 기자(記者)들의 불완전함을 지적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경쟁자적 입장에서 붓을 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에 관한 증인 의식을 가지고 좀 더 방대한 정보와 심도깊은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상세하고 정확한 복음서를 기록하려고 의도했다. 사실 이런 점에서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내용들을 본서에서는 다루고 있다(5:1-11;7:11-17, 36-50;8:1-3;10:25-37;15:1-32;19:1-11; 24:13-53). 또한 그는 기존의 기록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답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가복음이나 각 기록들을 통해 확대되거나 모방된 외경들이 이단 교파나 특수한 종파 가운데서 사용되기도 했다(예:히브리인 복음서, 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 결국 이 부분은 예수의 교훈과 행적을 담은 당시의 각 기록이 나름대로의 독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다른 기자들과 공동으로 인식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자신도 감히 기록하겠노라는 복음서 기술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 사람이 많은지라 -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누가는 분명히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의 기록된 자료를 참고하여 이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 4복음서를 비교하여, 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빼고 다른 부분을 놓고 본다면, 누가복음의 초반부는 누가가 독톡한 자료를 참고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여기서 1절의 '우리'와 연결하여 본다면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진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속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누가가 '우리'와 많은 곳에서 여러 활동을 했던 것을 보게 된다(행 16:10-17, 20:5-14;21:1-18;27:1-22). 렌스키(Lenski)는 누가와 마가가 바울의 첫 투옥 중에 서로 접촉을 했고, 2차 투옥시에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을 중심으로 긴밀한 친우사이가 되었고, 따라서 둘 중 먼저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이 그 내용에 관해서 서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연결해서 볼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본서의 '우리'와는 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저술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 적어도 세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기록은 많은 기록들 가운데서 특별히 객관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말 어미에 해당하는... 지라(*, 에페이데페르)고 하는 이 접촉사는 '...이므로'란 뜻의 '에페이'(*)와 '확연히 알려진 것'이라는 뜻의 '데'(*), 그리고 뜻을 깊이하거나 강조하는데 쓰이는 후접사 '페르'(*) 등이 합성된 단어로서 '...이므로', '참으로...이니까', '생각해 보건대'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가 가진 뜻으로 보아 앞선 사실이나 기존의 잘 알려진 일에 대한 회상과 확인을 나타내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이 곳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 헬라 문학에서는 자주 사용된다. 헤로도투스(Herodotus)나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역사서의 서두에서도 이 단어가 전통적인 문체로 사용되고 있다(Robertson). 누가는 헬라인이었다. 그래서 헬라문학의 전통 양식에 따라 가장 격조높은 고전 헬라어로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1:1-4). 이에 대해 바클레이(Baclay)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마치,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눅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그 모든 일을...자세히 - 전하는 바에 의하면 누가는 의사였다고 한다(골 4:14). 따라서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그가 여기서 자신의 복음서 기록의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그 모든 일'(*, 파신)을 나타내는 원어는 중성 복수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사건, 예수 중심으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근원부터'(*, 아노덴)는 '처음부터', '맨 시초부터' 또는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2절의 '처음부터'란 말과 직접 연관은 없으나 의미상 유사성을 지닌다. 아마 누가는 이 팔을 쓰면서 분명 본서 1, 2장에 언급된 탄생 기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자세히'(*, 아크리보스)는 원래 '첨단' 또는 '극점'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나온 말로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 들어가는 열정적 태도를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매우 정확하게', '엄밀하게'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차례대로'(*, 카데크세스)는 '순서에 맞추어', '연속적으로'라는 뜻으로서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시간순을 존중하여 연대기적 기술 방법을 택했다고 소개한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각 사건들을 시간적 배열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신중히 체계화, 조직화 했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9:51-18:8은 주제에 의해 사건과 교훈이 나열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누가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따라 본 복음서를 기록해 나갔음이 밝혀진다. 즉 첫째, 역사성, 둘째, 정확성, 셋째, 논리적 일관성의 원칙에 따랐으니 이는 또한 누가복음 전체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 미루어 살핀(*, 파레콜루데코티) - '마음을 다하여 무엇을 따르다', '집요하게 무엇을 탐구하다'는 등의 뜻으로서 고대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되던 동사의 완료 능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누가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기 위해 언급한 말로서, 누가는 복음서를 기술하기에 앞서 주도 면밀하고도 심층적인 연구와, 정확하고도 방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기록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 나도(*, 카모이) - 이는 '붓을 든 많은 사람'(2절)과 짝을 이루는 말로서 누가 자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집필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 데오빌로 각하(*, 크라티스테 데오필레) - 누가가 기록한 두 책(본서,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명시되고 있는 데오빌로가 누구인지 전하는 바가 별로 없다. 혹자에 따르면 누가가 자신의 수신인의 진짜 이름 대신 가명으로 사용한 것이거나 또는 상징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로는 그가 도미티안 황제의 조카로서 상속인이었던 클레멘스(Titus Flavius Clemens)였을 것으로도 추정한다(Streeter). 그렇게 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가명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a proper name)이며 특히 누가가 그의 이름에 붙여 사용하는 '각하'라는 명칭을 통해 볼 때 그가 실재(實在)한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이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리펠드(Liefeld)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학우이거나 발행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E. J. Goodspeed, Grevdanus). 여기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데오스'(*, '하나님')와 '필레오'(*,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라는 단어들의 합성어로서 이를 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또는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명칭을 듣고 혹자는(Origen, Bruce) 이것이 B.C. 3C 경에 흔히 사용되딘 이름으로서 어떤 특정 개인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 즉 신앙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한 성도의 이름이라는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할 뿐 상징적 이름이나 가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로 데오빌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초보에 들어서 있었는데 누가는 그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4절). 한편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비록 본서는 데오빌로가 그 대표적 수신자로 밝혀져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오직 데오빌로 개인에게만 국한시켜 헌정(獻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책을 권위있고 명성이 높은 한 개인에게 헌사하는 경우는 당시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은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되었었다(Julicher Fascher). 더욱이 본서의 전반적인 기류는 탈(脫)유대적이요, 범세계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가의 복음서는 이방 세계, 특히 헬라주의에 깊이 물든 신앙인들에게 보내졌을 뿐 아니라 그들을 발판으로 하여 전세계 모든 신앙인들에게로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각하'(*, 크라티스테)라는 말은 '지존하신', '가장 고상한'이란 뜻으로서 형식적이고 친근하게 인사치례로 사용되기도 하고, 관례적으로 존경을 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대부분 어떤 특정한 지위나 관직에 있는 신분이나 하나의 공식적인 직함으로 사용되고 있다(행 23:26;24:3). 따라서 본문의 데오빌로는 로마제국 내의 행정 장관이었거나 어느 직할지의 총독 내지는 고위 관직에 있던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Noval Geldenhuys, Ramsay).

⭕ 좋은줄 알았노니(*, 에돝세 카모이) -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3절 문장 서두에 온다. 여기서 '에돝세'는 '찬양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도케오'(*)의 과거형이다. 실로 예수에 관해서 기록을 하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고, 주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또한 인간들에게도 큰 기쁨이다. 누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문장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KJV와 NIV를 통해서 보면 이 구절의 의미가 더욱 명백해진다. NIV는 이유를 나타내는 단어 'since'를 이 구절 문장 서두에 사용하고, KJV는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구문을 사용해 성경을 기록하는 일이 왜 좋은지를 밝히고 있다(It seemed good to me also). 실로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부터의 모든 일들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경: [눅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머리말]

⭕ 배운 바(*, 카 테케데스 로곤) - '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데스'는 '카테케오'(*, '귓가에 울리게 하다', '말로 가르치다')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로 미루어 데오빌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구전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의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에게 이 복음서 기록을 의뢰하였을수도 있으며 아니면 누가가 기록한 이 책을 출간해 주었을 수도 있다(Henry, Liefeld, Geldenhuys). 한편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로곤'은 '로고스'(*, '말씀', '사건')의 소유격 복수 형태이다. NIV와 KJV는 이 단어를 '사실들', '일들'(things)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알포드(Alford)는 이 단어를 '말씀에서 표현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버운바'는 말씀을 통해서 배운 것들을 의미한다.

⭕ 확실함(*, 텐 아스팔레이안) - 이 단어는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 '아'(*)와 '미끄러 넘어지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스팔로'(*)의 합성어이다. 즉 '확실함'이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않고 견고히 서는 것이다. 실로 우리가 믿고있는 복음은 우리를 견고히 세우고 온전케 하며 확신을 같게 한다(딤후 3:15-17). 사실 분명하지 않은 바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누가는 진리에의 확신과 예수께 대한 '확실함'을 간직하게 하기 위하여 붓을 들고 있다. 한편 이 책을 받아 볼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것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따라서 구전을 통해 믿음이 성장한 그는 많은 이단 사상에 도전(挑戰)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는 유대교의 박해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협하는 영지주의(Gnosticism)와 이단자들이 성행했다. 혹시, 데오빌로 역시 이런 영향에 위협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누가가 기록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복음 기사를 통해서만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따라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 기사가 이단 사상들의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고, 또 때로는 중요한 공격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엡 6:11-18). 그리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믿음을 반석 위에 올려 놓고 복음의 확실함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Liefeld).

⭕ 알게 하려 함이로라(*, 에피그노스) - 이 단어는'...에 부가하여', '...에 더하여'의 뜻을 가진 전치사 '에피'(*)와 '알려고 배우다', '알게 되다'라는 뜻을 가진 '기노스코'(*)의 합성어 '에피기노스코'(*) 의 부정 과거 형태로 사용되었다. 즉, '...을 철저히 알다', '정확하게 알다'라는 뜻이 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더하려고 하였다. 기존의 지식에 완벽함을 더하는 것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이제는 교육자의 위치로, 또는 증인의 위치로 이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 경: [눅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유대 왕 헤롯 때에 -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Herod the Great)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된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Octavius)와 안토니오(M.Antonius)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4:44;6:17;7:17;23:5;행 19:37)의 분봉왕(分封王)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Idumean)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 건물을 건립케함으로써 유더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政敵)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干與)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다(마 2:1 주석 참조).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버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가(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黎明期)가 시작됨을 알리려 한다.

⭕ 아비야 반열 (the priestly division of Abijah) - 여기서 먼저 '반열'(*, 에페메리아)이란 '...동안', '때마다', '만큼' 등의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와 '날', '하루' 등의 뜻인 '헤메라'(*)의 합성어로서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봉사하였다. 한편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다(대상 24:10).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8절 주석을 참조하라.

⭕ 사가랴요 엘리사벳이라 -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Zechariah)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엘리사벳(Elizabeth)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지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진다(출 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다(Geldenhuys).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한편 '엘키사벳'이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의 아내 이름과 같다는 사실은(출 6:23) 매우 의미있는 일치로 본다.

성 경: [눅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이 두 사람이...의인이니 - 이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에게 붙여진 관용구였다. 여기서 '의인'(*, 디카이오이)이란 '옳은', '똑바른', '정직한' 등의 뜻을 지닌 '디카이오스'(*)의 변화형으로서, 특별히 이 말이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是認)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앞에'(in the sight of God, NIV)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시된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의인'이란 말이 '순전히 윤리적인 측면의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 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인격을 가리킨다'고 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 수 없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디카이오스'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시다(Wuest).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었는데 (창 6:9;7:1;18:23-28;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만 붙여졌다. 이것은 유대인의 이상형이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義人觀)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다. 한편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Robertson). 이러한 부모의 경건한 삶이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겠는가?

⭕ 계명과 규례(*, 타이스 엔톨라이스 카이 디카이오마신) - 여기서 '계명'을 나타내는 '엔톨라이스'는'명령', '교훈' 등의 뜻을 지닌 '엔톨레'(*)의 복수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한다 개역 성경에서는 이 '엔톨라이스'를 주로 '계명'이란 말로 번역하고 있다(롬 7:8-13). 그리고 '규례'를 가리키는 '디카이오마신'은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 '공의를 행하다'는 뜻인 '디카이오오'(*) )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혹자(Bengel, Calvin)는 이 양자를 분리하여 '계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심판의 근거가 되는 종교, 도덕적인 법령(法令)을, '규례'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의식적이고 제의적인 예법(禮法)을 각각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또다른 학자들(Bruce, Lenski)은 이 양자를 대조시키지 않고 히브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두 개념을 동일하게 이해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여기서 '흠이 없이(*, 아멤프토이)란 '비난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이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다.

성 경: [눅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혈통]

⭕ 엘리사벳이...무자(無子)하고 -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다(Barclay).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受胎)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 '수태를 못하므로'라는 표현 가운데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카도티'(*)란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 저자인 누가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행 2:45;4:35). 이 '카도티'는 대략 '...때문에', '...만큼', '왜냐하면' 등의 뜻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후기 헬라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마침...할새(*, 에게네토 데) - 이 말은 이야기를 상호 연결시켜 주며 무엇을 소개시켜 주는 문구로서 히브리어의 '와에히'(*, '때마침 그것이 일어났나')와 유사한 표현이다. 특히 이 문구는 타복음서보다 본서에서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때 흔히 사용된다. 그리고 이 문구와 비슷한 '기노마이'(*) 역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쓰여진 것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본서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를 기술할 때 자신의 문학적인 역량에 덧붙여 자신이 참고한 자료들을 하나하나 편집해갔음을 알 수 있다(Gaston).

⭕ 반열(班列)의 차례대로 -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division, 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진다.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고 그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다 (대상 23, 24장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벧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된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제사장의 직무를...행할새 -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된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지사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된다(J. Jeremias). 그러나 다음과 같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the daily sacrifice)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혹자(Farrar)에 따르면 한 제사장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본문에는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에난티 투 데우)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성전이 곧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합 2:20).

성 경: [눅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 이 말은 내용상 원래 8절에 부속되고 있으나 개역 성경의 읽기대로 '제비를 뽑아...분향하고'라는 표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의 전례' 곧 '제사장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오던 관습(*, 에도스)'이란 8, 9절에 명시된 내용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볼수 있다.

⭕ 제비를 뽑아(*, 엘라케) -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한편 이 제비뽑기는 히브리어로 '고랄'(*)이라 하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수한 표시를 한 물건을 땅에 던지거나 용기(容器)에서 뽑는 제비뽑기가 매우 유행하였다. 물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 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Coram Deo)하에서 이뤼진 것이다(신 18:10-12;수 18:6, 8).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삼상 14:42), 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수 있는데 예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난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다.

⭕ 주의 성소에 들어가 - 여기서 '성소'(*,나오스)란 성소(Holy Place)와 지성소(the Holy of Holies)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로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 구별된다. 결국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세마포및 에봇으로 된 성의(聖衣)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된다.

⭕ 분향하고 -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한다(시 141:2;계 8:3).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바깥에서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흡향(吸香)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다(10절).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受胎告)를 받게된다.

성 경: [눅1:1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이 구절의 '모든 백성'에 대해 NIV는 '운집한 경배자들'(all the assembled worshipers)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문은 '라오스'(*, '백성')이다. 따라서 정확한 의미 전달이 안 되고 있다.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이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다. 이들의 첫째와 섯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다(Geldenhuys). 한편 이 백성들 가운데 연로한 시므온(2:25)과 여선지자 안나(2:36)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이 곳에 모인 백성들은 뒤에 21, 22절에 기록된 백성들과 일치한다(Liefeld).

성 경: [눅1:1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의 사자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스'(*)는 '사자', '천사',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곳에 따라 '사자'(12:9;마 2:13), 또는 '천사'(마 24:36;막 12:25;롬 8:38;고전 4:9;1:13, 14)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곳 외에도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한다(1:26;2:9, 13, 21;12:8;15:10;16:22;22:43;24:4, 23).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행 10:4, 7;12:8-10).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 향단 우편 - 향단과 번제단은 다르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한다. 매일의 분향은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제사는 성소안에서 드려졌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른다(Alford).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게 된다(출 30:1-10;40:2-27, 아래 그림 참조).

성 경: [눅1:1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놀라며 무서워하니 - '놀라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타라크데'(*)는 원형인 '타라쏘'(*)의 수동태 과거형이다. 그 뜻은 '요동하다', '내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이다(마 2:3;막 6:50;요 11:33). '무서워하니'에 해당하는 '포보스'(*)는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이다(삿 6:22;13:22).

성 경: [눅1:1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간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 는 일반적인 기도를 뜻하는 단어 '프로슈케'(*)와 비교해 특별한 기도를 뜻한다. 따라서 사가랴는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들린지라'에 해당하는 부분을 KJV는 현재형으로, NIV는 현재완료형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 '에이세쿠스데'(*)는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로 사용되었다. 이는 일종의 무시간적 부정과거의 형태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이다(Robertson). 따라서 사가랴의 기도는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천사의 응답은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한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신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준다. 요한(*, 요안넨)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요난'(*, 대상 3:24), '요아네스'(*, 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성경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本性)과 인격까지 나타낸다. 다시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작명법(作名法)은 바벧론 유수기(幽囚期)를 전후허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다.

성 경: [눅1:1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너도 기뻐하고...기뻐하리니 - 이 부분은 '기쁨'을 뜻하는 헬라어 '카라'(*)와 '즐거워하다'로 번역된 '아갈리아시스'(*)가 연이어서 나오는 문장이다. '아갈리아시스'는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킨다.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한다.

성 경: [눅1:1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 앞에 큰 자 - '큰'에 해당하는 '메가스'(*)는 '위대한', '덕스러운','권위있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 20:25;딤 2:13). 이 말을 32절의 예수께 대해 큰 자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보면, 32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수식어가 없음을 알수 있다. 결국 요한은 예수 때문에 큰 자가 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나실인에 대한 계율을 기억할 수 있다(민 6:3, 4). 요한은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절제된 생활을 한다. 소주에 해당하는 '시케라'(*)는 강한 , 독주 등을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 부분은 앞부분의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의 성령 강조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고 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1:1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이스라엘 자손을...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렘 3:7, 10;겔 3:19;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다(Alford).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이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하였다(눅 3:3)

성 경: [눅1:1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심령'을 나타내는 '프뉴마'(*)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는 성질 또는 영향력, 어떤 능력이나 애정, 감정, 욕구 등의 근원' 등을 나타낸다. 그리고 '능력'을 나타내는 '뒤나메이'(*)는 '물려받은 힘', 또는 '사람이나 사물에 내재된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을 의미한다. 더러는 '기적을 행할 때와 같은 놀라운 권능'을 의미할 때도 있다. 즉, 요한은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것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난다. 광야에서의 삶(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이나 지위고하(地位高河)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벧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는다)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신다(마 17:12;막 9:13).

⭕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돌아오게 하고 - 이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한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당(Zealots)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 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한편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이다.

⭕ 주를 위하여...예비하리라 - '백성'이라는 헬라어 '라오스'(*)는 공관 복음서에 49회나 사용되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35회나 사용되고 있다. 누가는 이 단어를 '무리', '군중'을 나타내는 '오클로스'(*)와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마 21:26)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Liefeld). 여기서 요한의 사역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예비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진다.

성 경: [눅1:1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어떻게 알리요...나이 많으니이다 - '어떻게'에 해당하는 '카타 티'(*)는 '무엇에 의하여'라는 뜻이다(in what way, MLB).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20절과 연결하여 보면, 이것은 사가랴의 겸손이 아니고 불신의 소치임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마리아의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절)라는 질문은(Haw shall this be, RSV) 45절로 미루어 천사의 메시지를 믿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사가랴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고, 마리아의 질문은 성취 방법에 대한 질문이다. '늙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스'(*)는 나이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민 4:3;8:24, 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하였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성 경: [눅1:1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천사가...가브리엘이라 -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이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단 8:16;9:21)과 '미가엘'(단 10:13, 21;12:1; 유 1:9; 12:7) 둘 만이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난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Book of Enoch)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온다. 그 이름은 미가엘(Michael), 라파엘(Raphael), 우리엘(Uriel), 가브리엘(Gabriel) 등이다. 한편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 좋은 소식(*, 유앙겔리사스다이) - 이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유앙겔리조마이(*)에서 왔다. '유'(*)는 '좋은'(good)을 뜻하며 '앙겔로'(*)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합성어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된다(Wuest). 그리고 '유앙겔리조마이'는 공관복음에서 모두 11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누가복음에서 10회나 사용되었다(본절;2:10;3:18;4:18, 43;7:22;8:1;9:6;16:16;20:1). 따라서 누가에게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님을 알 수 있다(Liefeld).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헬라어 성경의 이 부분의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천사의 대답은 사가랴의 불신의 질문에 뒤이어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성 경: [눅1:2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내 말이 이루리라 -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는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사용하는 불변사이다. 이 단어는 말을 강조할 때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팔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된다.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 또한 62절과 비교해 보면 사가랴는 벙어리뿐만이 아니라 귀머거리까지 된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성 경: [눅1:2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백성들이...기이히 여기더니 -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Alford). 탈무드(Talmud)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Lenski).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능한 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 이 구절에서 보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이다(레 10:1, 2).

성 경: [눅1:2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 이상(異像) - 헬라어에서 사용되는 '이상' 또는 '환상'이라는 말은 모두 3개가 된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행위'에 해당하는 '와타시아'(*), '보여지는 것'을 나타내는 '호라마'(*), '봄', '외관', '자태'에 해당하는 '호라시스'(*)등이다. 이구절에서는 '와타시스'가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한다.

⭕ 형용(形容)으로 -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성 경: [눅1:2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직무(*, 레이투르기아스) - 이 말은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한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를 나타낸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한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성 경: [눅1:2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엘리사벳이...숨어 있으며 - 엘리사벳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삿 13:13, 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할 듯하다.

성 경: [눅1:2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예고]

⭕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 이 구절에는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있다. '내 부끄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이다(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 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 부끄러움(*, 오네이도스) - 이 말은 '비난', '불명예', '모욕'이라는 뜻을 갖는다. 신약성경 중에는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이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심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으로 빠뜨리는 치욕을 뜻한다.

⭕ 없게 하시려고(*, 아펠레인) - 이 단어는 원형이 '아파이레오'(*)로서 '치워버리다', '가져가다', '베어버리다'라는 뜻이다.

성 경: [눅1:2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 가브리엘이...동네에 가서 - 타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을 소개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유년시절을 병행하며 소개하는 치밀감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음을 나타낸다. 이제 본절로 부터는 예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 갈릴리 나사렛 -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동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먼저 갈릴리 지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받아볼 데오빌로나 그 외 이방 사람들은 작은 나라의 작은 마을인 나사렛이 어느 지방의 어떤 곳인지 잘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사렛은 앞에 언급된 예루살렘과 비교가 된다. 천사는 호화롭고 화려한 대도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외진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요 1:46에 기록된 나다나엘의 말을 기억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극단적으로는 이렇게까지 취급받던 동네가 나사렛이다. 예수는 공생애 이전의 삶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보내셨다. 이 마을은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70마일 떨어진 이스르엘 또는 에 스드라엘론(Esdraelon) 평야 북편의 깊은 산 계곡에 위치해 있다. 나사렛 뒷편에는 레바논과 언제나 눈이 덮여있는 헬몬산이 있고, 다른 쪽에는 푸르고 높은 갈멜산이 위치했는데 이 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현재는 이 지역을 '엔 나시라'(EN Nasirah)로 부른다(Geldenhuys).

성 경: [눅1:2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요셉이라...마리아라 - 요셉과 마리아의 정혼은 천사가 나타날 때까지 잘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한다. 샴마이(Shammai)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처벌된다고 했다. 그리고 혼전의 성관계도 물론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정혼 기간 내에 신랑이 사망할 경우 신부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본절과 29, 34절 등에서는 마리아의 처녀성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강조는 약혼 이후에 마리아가 더욱더 조신(操身)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음을 부각시킴은 물론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확증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 처녀(*, 파르데논) - 이 단어는 원형이 '파르데노스'(*)로서 '미혼녀', '소녀'라는 뜻이다. 성경 외적 문헌에 의하면 이 말이 동정녀만을 뜻하지 않고 단지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후 문맥과 특히 34절에 수록된 마리아 자신의 고백으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동정녀를 뜻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1:5-38의 주제 강해 참조.

성 경: [눅1:2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은혜를 받은 자여...함께하시도다 - 천사 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 나타난 것(8-24절)과 같이 마리아에게도 나타난다. 사가랴의 경우와 마리아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에는 평안과 주의 임재의 인사를 하지 않은 반면에(8-24절) 마리아의 경우에는 이 같은 천사의 인사가 있던 점이 차이가 난다. '은혜를 받은 자'에 허당하는 헬라어 '케카리토메네(*)는 그 어원이 '은혜'를 뜻하는 어근 '카리스'(*)에서 온 말로서 완료 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완료 분사는 강한 현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은혜를 받은상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Lenski). 한편 천사와 마리아 간의 대화는 세차례에 걸쳐 전개된다. 1차 대화에서는(28, 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성 경: [눅1:2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생각하매(*, 디엘로기제토) - 이 말은 원래 '별개의 논거(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라는 한편 모든 일들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3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천사가...무서워 말라 - 사가랴의 경우는 천사가 나타나는 순간 놀라고 무서워했으나(12절)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듣고 무서워했다. 역시 두 상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얻었느니라(*, 휴레스) - 이 말은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의 단순 과거형이다. NIV는 이를 '발견했다'(have found)라는 현재 완료형으로 번역했고 렌스키(Lenski)는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지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나 공로를 요구하지 않는 채 주어진다(엡1 :6). 그러나 언제든지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여기서 헬라어의 단순 과거형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마리아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미 은혜를 받은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1:3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예수라 하라 -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인 히브리어 '예호수아'(*)의 헬라음으로서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출 24:13;삼상 6:14;왕하 23:8;대하 31:15;학 1:1;슥 3:8). 이 이름은 주후 2세기 초까지 흔하게 사용되었으나 2세기 이후부터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행 13:6;골 4:11). 이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그 이름의 사용을 꺼렸기 때문인 것같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며 이 이름의 기독교적 의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마 1:21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여타의 다른 인물들과 그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마21:11), '다윗의 자손'(마 27:37;막 10:47-48;요 18:5) 등의 문구를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성 경: [눅1:3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큰 자 - 이 구절은 15절과 대구를 이룬다. 가브리엘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 예수께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어투를 사용한다. 요한에 대해서는 다분히 제한적 어투를 사용했으나 예수께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우 경외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Liefeld).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휘오스 휘프시스투) - 예수께서 신적 기원(divine origen)을 지닌 메시야이심을 단적으로 증거하는 말씀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35절에서도 나오는데 양자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명칭, 특히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는 모두 아홉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일곱번을 누가가 사용했다(본절, 35, 76;2:14:35; 8:28; 19:38).

⭕ 그 조상 다윗의 위(位) - 당시의 대중적인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예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예수는 다윗의 혈통임을 확인 할 수 있다(3:31). '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은 '등받침이나 팔받침 또는 발등상을 갖춘 높은 의자'를 가리킨다. 또 이 단어의 복수형은 왕이나 신의 권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골 1:16). 여기서 다윗의 위는 왕되신 메시야의 보좌를 상징하는 다윗 왕의 보좌를 가리킨다. 요컨데, 예수는 예언된 바 그대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사(삼하 7:12-16;시 89:29;132:11;사 9:7) 다윗 왕권을 통해 드러내 보이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성 경: [눅1:3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영원히(*, 아이오나스) - '시대', '영원' 등의 뜻인 '아이온'(*)의 복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때때로 '오래 전부터'(70절), 혹은 '창세 이후로'를 뜻하기도 하나, 특정한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성과 결부된 문맥에서 잘 쓰인다(55절;요 6:51). 특히 이 단어는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영원성'에 대한 암시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마 6:13;롬 1:25;히 13:8;유 1:25, H. Sasse, TDNT. I, 197-209).

⭕ 야곱의 집(*, 오이콘 야콥) - '집'에 해당하는 '오이콘'은 '오이코스'(*)의 단수 목적격으로서 '집', '가족', '가문', '종족'의 뜻을 나타낸다. '야곱의 집'이라는 표현은 행 7:46에도 나타나며 그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나타내지만 더 정확히는 영적 이스라엘로(마 3:9;롬 10:10-13)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드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는 견행에 많은 학자들이 공통된 입장을 취한다(Lenski, Geldenhuys, 이상근).

⭕ 왕 노릇 - 다윗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가 된다는 의미이다(고전 15:25;계 11:15).

⭕ 그 나라(*, 바실레이아스) - '왕국'의 의미를 담고있는 이 단어는 때때로 '왕권', '왕정', '통치' 등의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에 의해 통치되며 의와 평강과 희락(喜樂)으로 가득한(롬 14:17) 하나님의 나라에 다름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해서는 막 1:15의 주제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고(22:29), 우리를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 무궁하리라(*, 우크 에스타이 텔로스) - '무궁'을 나타내는 '텔로스'는 '끝', '목표','정지' 등의 뜻을 가지며,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우크'와 함께 사용되어 '정지되지 아니하리라' 또는 '끝이 없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 '영원'과 '무궁'을 연이어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원성과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시 45:6;단 2:24;7:14;요 12:34;계 11:15).

성 경: [눅1:3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알지'에 해당하는 '기노스코'(*)는 히브리어에서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4:1;19:8;삿 11:39). 이 동사는 현재 시상으로 사용되어서, 과거의 모든 행동을 포함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나는 처녀이니'(since I am a virgin)라고 번역한다. 즉, 과거에나 지금 이 순간에나 아무 남자도 알지 못한 처녀임을 말해 준다(Liefeld). 그러나 이 구절을 놓고 로마 카톨릭이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로서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겐 육친(肉親)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12:46;막 3:31, 32).

⭕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의심하여 표적을 구한 사가랴와는 달리(18절) 마리아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성취 방법을 묻는다(18절 주석 참조). 천사의 수태 고지(announcement)를 듣고서 처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었었기에 이제 마리아는 천사의 전언(傳言)을 오히려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 경: [눅1:3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 누가는 다시 성령을 언급하고 있는데, 1장, 2장에서만도 여섯번 이상을 언급한다(41, 67, 80절;2:25, 26, 27).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는 세분히 동역자,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 출생할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Lenski, Barclay).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한 기적이었다.

⭕ 능력(*, 뒤나미스) - 신체적, 지적, 영적 '힘' 혹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약의 여타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능력'에 대한 개념 또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능력과 메시야가 밀접한 연관을 나타낸다(시 110:2;사 9:5;미 5:5). 이러한 능력은 일차적으로 왕적 능력이지만 선지자의 능력도 포함된다(17절;24:19;미 3:8;행 7:12). 하지만 그리스도는 바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시라는 점에서 능력있는 선지자 이상의 존재이다. 이러한 점은 동정녀 잉태의 과정에서 성령과 지존자의 능력이 함께 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함께하였으며, 당신의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하실 때에도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친히 행해 보이셨다(4:14, 36).

⭕ 덮으시리니(*, 에피스키아세이) - '그늘을 지우다', '덮다', '역사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피스키아조'(*)의 직설법 미래형이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는 출40:38의 영광의 구름(the shekinah glory)을 암시한다(Robertson). 또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산 관련 기사에서도 구름이 덮힌 사실이 묘사되었다(9:34;마 17:5;막 9:7). 이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는 목소리가 구름 속에서 들렸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날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 구절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 하나님의 아들 - 이 칭호는 예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지는 않았지만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되실 때(막 1:11;9:7) 들린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의해(마 16:16), 귀신들에 의해(막 5:7) 그리고 로마의 한 백부장에 의해(막 15:39) 불리워졌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자신과의 부자(父子) 관게를 암시하신 적이 많다(마 11:27;막 13:32). 하지만 예수는 단순히 한 아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독생자이다(요 20:17). 아들과 아버지는 뜻과(요 4:34;6:38;7:28;8:42;13:3) 행위와(요14:10) 영생 수여의 면에 있어(요 10:30) 하나이다(요 5:19, 30). 이런점에서 이 칭호는 메시야적 칭호임과 아울러 성부와 성자께서 그 기원과 성품에 있어 동등하신 분임을 시사한다(요 3:16;히 1:2).

성 경: [눅1:3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네 친족 - '친족'에 해당하는 '슁게네스'(*)는 '동족' 혹은 '친척'이란 뜻이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엘리사벳은 레위인출신의 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지만(5절) 그렇다고 하여 마리아도 레위인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서로 다른 지파 사람들과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출 6:23;삿 17:7).

성 경: [눅1:3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없느니라 -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는 '생생한 목소리로 말해진 것', '말씀', '진슬'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동의어인 '로고스'(*)에 비해 '계속적인' 의미와 단일 개념을 강조한다. 한편 본절은 창 18:14과 마 19:26에서도 나오는 내용으로서 천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3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예수의 탄생 예고]

⭕ 주의 계집종 - '계집종'을 뜻하는 헬라어 '둘레'(*)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의 단수 여성형이다. 이 표현은 자식을 간구하던 한나의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삼상 1:11). 마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밝혀질 경우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온갖 비난(非難)과 돌팔매질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다 모든 것을 맡기려는 심정을 이 말로써 표현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의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마리아의 이 고백은 엘리(삼상 3:18)나 다윗(삼하 7:25)의 전례를 연상시킨다(이상근). 마리아의 이 고백은 결코 가볍게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녀 수태로 인해 파급될 문제는 엄청난 것이다. 요셉과의 파혼과 함께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세인(世人)의 멸시와 지탄을 받아야 하고 자칫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사의 마지막 말(37절)이 마리아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는 굳센 믿음이 마리아의 심령을 사로잡았다.

성 경: [눅1:3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마리아가...빨리 - 본절에 이르러 엘리사벳과 마리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요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수와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주의가 집중된다(43절). 여행길이 얼마나 걸렸는지, 어떻게 여행했는지, 누구와 함께 찾아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그녀는 엘리사벳을 만나고자 하는 일념으로 여행길을 재촉해 '빨리' 갔다고 전한다. 아마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도 이적적 은혜에 의해 수태되었다고하는 소식을 듣고 그 기쁨과 놀라움을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기 전에 마 1:18-25의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 산중에(*, 오레이넨) - 이 단어는 해안에 접해 있는 유대 산지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 팔레스틴을 해안 지대, 평원 지대, 계곡 지대 그리고 고원 지대로 구분할 때, 사가랴의 집은 이 고원 지대에 위치했던 것 같다(이 상근).

성 경: [눅1:4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문안하니 - '에스파사토'(*)의 기본적 의미는 '껴안다'인데, 여기서 파생된 의미가 '...을 좋아하다', '...에게 경의를 표하다', '...를 환영하다' 등이다. 즉 이 인사는 포옹과 문안을 포함하는 매우 열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H. Windisch, TDNT., I, 496-502, Lenski).

성 경: [눅1:4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아이가...뛰노는지라 - 임선 6개월에 복중(腹中)의 아이가 뛰노는 것은 흔히 있는 자연적 현상이다(창 25:22). 자연적인 것 같은 현상을 특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까닭은 이 순간의 태동(胎動)이 다른 때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것을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이 복중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방문을 기뻐 뛰놀며(44절)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포스'(*)는 이 구절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태아(胎兒)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15에서는 예수로부터 영적 축복을 받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아이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감동이 그의 모친 엘리사벳에게도 역사해 그녀의 마음에 놀라움과 감사, 사랑을 가득 채워주었다. 엘리사벳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예언을 통해 나타났으며, 이러한 예언의 영은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난 바이다.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그 인사를 들은 엘리사벳, 복중의 태아, 모두가 성령 안에 있었다(15절 주석 참조)

성 경: [눅1:4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 오랜 산중생활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던 중 마리아를 만난 데서 온 기쁨,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복중의 아이가 뛰는 사실에 대한 감동 그리고 성령의 계시 등에 의한 복합적 감정의 표시로서 탄성을 발했을 것이다. 물론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일어난 사실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리아가 찾아와 인사를 하자 그 순간 계시에 의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Lenski).

⭕ 여자 중에...복이 있도다 -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입을 통하지 않고서 성령의 계시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았다. 본절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적, 아람어적 표현으로서(삿 5:24;아 1:8) 마리아가 세상의 모든 여자 중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임을 가리킨다. 물론 마리아의 축복은 그녀의 복중에 든 아기 곧 만백성을 구원하실 메시야 때문이지 마리아 자신의 특별한 장점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카톨릭에서 마리아를 성모로서 숭배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4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주의 모친 -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 라고 한 곳은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신성(Deity)을 인성(人性)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예수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이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리아는 메시야요 주이신 예수의 어머니였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다. 한편, 본서에는 '주'(Lord)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공관복음에 이 명칭이 166번 나오는데 그 중 95회가 누가복음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기사를 보면 이곳 외에도 다른 두 곳에서 예수는 '주'로 불리워졌다(76절 ;2:11). 여기서 이 말은 유대인들이 대망해 오던 바로 그 메시야를 지칭한다.

⭕ 내게...어찌 된 일인고 - 엘리사벳의 이 말과, 후에 세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신 예수께 한 말,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는 맥을 같이한다. 엘리사벳의 이 겸손함이 예수의 신들메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겸손으로 이어진다.

성 경: [눅1:4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네 문안하는 소리가...뛰놀았도다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서두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헬라어 '가르'(*)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가 엘리사벳 자신에게 임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 마리아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복중의 태아도 기쁨으로 뛰어놀았다. 한편 자신에게 있었던 그 비밀한 일을 엘리사벳이 알고 반응하며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이 낳을 아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이도 기뻐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경배하자 마리아는 크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 경: [눅1:4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믿은 - '피스튜사사'(*)는 원형이 '피스듀오'(*)로 단순 과거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가 어느 한 순간만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온 여인임을 알 수 있다.

⭕ 주께서...이루리라 - 이 문장에는 개역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문두에 있는 '호티'이다. 이것은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문에'(for because)라는 뜻이며 이 후자의 뜻으로 옮기면 더욱 생생한 의미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어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믿은 여인 곧 마리아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성 경: [눅1:4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마리아가 가로되 -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이 시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당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 찬양하며(*,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벳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벳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벳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벳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벳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성 경: [눅1:4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 내 마음(*, 토프뉴마 무)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46절의 '프쉬케'(영혼)와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공히 인간의 지적, 정서적, 의지적 생의 중심부를 말하며 때로는 '영혼' 혹은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굳이 그 의미를 구분하자면 '프쉬케'가 개인의 생리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된 반면에 (벧전 2:11), '프뉴마'는 프쉬케보다 더 고등한 면을 나타냈 을 때 사용되었다(롬 8:16). 여기서는 이 두 용어가 별다른 의미의 구별없이 반복적으로 사용된 바, 이는 반복을 통해 강조를 꾀하는 히브리식 관용법에 해당한다.

⭕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성 경: [눅1:4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 보라 이제...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 경: [눅1:4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능하신 이(*, 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 거룩하시며(*, 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성 경: [눅1:5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성 경: [눅1:5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 5:3-6 주석 참조).

성 경: [눅1:5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주리는 자를...배불리셨으며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1-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 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 그러하며 본절 또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배불리셨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의 원형은 '엠피플레미'(*)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 부자를...보내셨도다 -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비케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讚頌詩)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성 경: [눅1:5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 '종'에 해당하는 '파이도스'의 원형 '파이스'(*)는 '어린아이'(소년, 소녀)란 뜻이며 혈통과 관련하여서는 '아들',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서는 '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택하심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수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긍휼'과 '도움'이 원칙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끊김으로써 소위 암혹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던중 이 암흑을 뚫고서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임하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메시야가 마침내 도래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된 것이다(롬 9:6;갈 3:16;6:16). 사실상 이방인 구원은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 등).

⭕ 기억하시되(*, 므네스데나이) - 이 말의 헬라어 원형 '밈네스코'(*)는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등의 뜻으로서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창 9:15이하;출 2:24).

성 경: [눅1:5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우리 조상에게...영원히 하시리로다 -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창 12:3) 이삭과(창 26:3, 4) 야곱에게(창 28:14)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 장래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하시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표명하고 있다.

성 경: [눅1:5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마리아의 찬가]

⭕ 마리아가...돌아가니라 - 36절에 의하면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 이후에 마리아가 방문하여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마리아가 3개월이나 함께 있다가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지 않고 돌연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해산을 보고 돌아갔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않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해산 이전에 돌아갔을 경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제시할 수 없다. 여하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요셉 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게 된다(2:4).

성 경: [눅1:5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엘리사벳이...낳으니 - 앞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본절은 5-25절에 이어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성 경: [눅1:5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함께 즐거워하더라(*, 쉬네카이론 아우테) - 지속적인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미완료형을 사용하고 있다. 기쁨은 엘리사벳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으로 옮아갔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앞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하다.

성 경: [눅1:5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할례(割禮)하러(*, 페리테메인) - 이 단어의 원래적 의미는 '둘레를 자르다', '칼자국을 내다'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았는데,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가지였다. 1.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 2.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 3.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 4.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등.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다(신 10:16;30:6;렘 4:4;겔 44:7).

⭕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하더니 -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다(59절;2:21). 따라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창 17:5), 야곱이 이스라엘로(창 32:28), 혹은 사울이 바울로(행 13:9) 칭하심받게 된 때는 그들의 인생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에 해당한다. 또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릇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와 동일시되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다(사 63:19).

성 경: [눅1:6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아니라 요한이라 - 엘리사벳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 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아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는 '정말로, 절대로 아니다'는 뜻이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는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한다(Meyer, Bengel). 그러나 그보다는 엘리사벳이 필담(筆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거라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Bruce, Plummer, Lenski). 원문에는 '우키' 다음에 바로 '알라'(*)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이 단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오히려'라는 뜻이며 부정어 '우키'와 함께 사용될 때는 '정반대로'의 뜻을 나타낸다. 한편,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 '요한'이라는 이름은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2.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다(64절). 3.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다(3:10-14;마 3:5-6).

성 경: [눅1:6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저희가 가로되...이름한 이가 없다하고 -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롬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지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다.

성 경: [눅1:6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그 부친께 형용하여...물으니 -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20절 주석 참조). 22절에서 누가는 '사가랴가 벙어리대로 있더니'라고 말하지만 사용된 단어 '코포스'(*)는 '벙어리'뿐만 아니라 '귀머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7:22).

성 경: [눅1:6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서판(書板) - 표면에 밀랍(wax)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little-tablet)으로서 그곳에 첨필(尖筆)로 글을 썼다.

⭕ 그 이름은...기이히 여기더라 -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라'였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것은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가랴가 귀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벳과 주위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눅1:6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이에 그 입이...찬송하니 -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sign)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이다. 아마 그는 장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이다.

성 경: [눅1:6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다 두려워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스'(*)는 '공포'가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이다(12절 주석 참조).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 면밀하게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의미이다.

⭕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본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다. 유대는 특히 '산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다(헤브론의 북쪽).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다. 한편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성 경: [눅1:6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세례 요한의 출생]

⭕ 마음에 두며 - 헬라어에서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한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이다(47, 51절 주석 참조).

⭕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 이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이은 구절 '주의 손'이 이 질문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의 손(*, 케이르 퀴리우) - 구약은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한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신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것은 곧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한다.

성 경: [눅1:6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본장 원문에서는 '성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관사를 계속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을 계속해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진행되어 온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 역시 성령의 세밀하신 역사 아래 진행되어질 것을 시사하고 있다(15,41절 주석 참조).

⭕ 예언하여 가로되 - 예언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누가의 의지를 엿보게하는 구절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이하로부터 전개되는 사가랴의 축가(Benedictus)는 전반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역과 역사하심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그것을 교훈과 예언의 형식을 빌어 표현했다. 내용상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눌 때 전반부는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후반부는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축가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강조하며,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구절을 엮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시 105:8, 9;106:45;111:9;사 42:7;렘 11:5;겔 29:21).

성 경: [눅1:68]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찬송하리로다(*, 율로게토스) - '율로게토스'란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을 베푸신 사람에게(42, 45절에서처럼 '복되도다'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6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68-79절은 찬송의 말씀이자 축복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Liefeld).

⭕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 이스라엘이란 말은 17절과 77절에서 언급된 '주의 백성'과 같은 말이다(54절 주석 참조).

⭕ 돌아보사(*, 에페스케프사토) - 이 단어는 원형이 '에피스케프토마이(*)로서 3인칭 과거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도움을 주시기 위해 살펴보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주권적 개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보사 그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해 내신다는 사상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여러 의미 가운데는 '방문하다', '탐구하다', '찾아내다'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그 백성들을 '방문하시거나', '돌아보신다'는 의미는 7:16에도 잘 나타나 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영적인 의미가 강화된다(H.W.Beyer, TDNT., II, 599-622)

⭕ 속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는 '구속', '구원', '해방', '자유' 등의 뜻이며 그 동사형인 '뤼트로'는 '몸값을 치르고 놓아주다'는 뜻이다. 신약 시대의 한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가 '속죄금을 치르다'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한 특정인이 죄인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고 그 사람을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인생의 죄값을 십자가상의 저주로써 대신 치르시고 죄와 사망에서 인생을 구원해내신 것을 나타낸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신약 성경에서는 '값을 치르고 구원함', '구속'(자)의 뜻인 '아폴뤼트로시스'(*)가 주로 쓰인다(21:28;롬 3:24;8:23;고전 1:30;엡 1:7등). 한편 구속의 개념은 신.구약을 통털어 성경 전체에 폭넓게 깔려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에서 '구속(속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파다'(*)와 '가알'(*)의 번역이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장자의 속건(贖錢)으로 돈 지불을 요구할 때 사용했으며(출 13:2, 11-16),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출 21:8). 후자는 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땅을 회복하는 것이나(레 25:26;룻 4:4) 서원한 것을 도로 물리는 것을 말한다(레 27:13). 특히 이 말을 신학적 내지는 교리적 의미로 이해할 때, 구약에서의 구속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다.

성 경: [눅1:6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구원의 뿔 - 근동 지역에 사는 뿔가진 짐승들은 매우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뿔은 흔히 힘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능력(왕상 22:11;단 8:3)과 왕권(단 7:23;8:20-22)을 상징하는 것이니 만큼 '구원의 뿔'은 구원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 곧 메시야를 가리킨다. 사가랴는 이 구원을 일종의 힘으로 생각한듯하며, 구약적 개념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이 구원자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온 바로 그 메시야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 그 종 다윗의 집 - '집'이라는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가족'과 '종족'으로서의 뜻을 나타내기도한다(33절 주석 참조). '다윗의 집'은 27절과 2:4에서처럼 가문이나 자손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표현이 사가랴 당시에 유대 전역에 있던 메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와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이스라엘을 열방의 위협에서 건져내었던 다윗 왕가 중에서 나타난다는 사상이 유대 민족 사이에 팽배했었고 또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종 다윗'이라는 표현은 오실 메시야의 선재성(先在性)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처럼 위대했던 다윗도 그의 종이었음을 보아 그의 위대함과 놀라운 위치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은시 132:17의 말씀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메시야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눅1:7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거룩한 선지자의...말씀하신 바와 같이 - 이 문구는 단순한 삽입구가 아니라 히 1:1과 같이 예수의 메시야 역활이 구약에 기원을두고 있음은 물론 구약의 지지를 받는 것임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는 문구이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은 율법서나 선지서, 시가서 등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언급된다(마 1:18-25 주제 강해 '메시야 예언과 그 성취'의 도표 참조).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에서의 '선지자'라는 의미도 문자 그대로의 선지자라기보다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iefeld Geldenhuys).

성 경: [눅1:71]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원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드로스'(*)가 형용사로 쓰이면 '적개심 있는', '미워하는'이란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이 대부분 민족적이고 정치적 성격이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사가랴는 원수라는 말을 로마 세력 혹은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에 빗대어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 축가가 구속 역사의 진행 과정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는 측면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원수'는 곧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훼방하는 사단과 그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마 13:39).

성 경: [눅1:72]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긍휼히 여기시며...언약을 기억하셨으니 - 본절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긍휼이 언급된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관계는 그 백성의 범죄와 완악성으로 인하여 오래전에 이미 파기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73절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칭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외에도 아담(창 3:15), 노아(창 6:18), 이스라엘 백성(신 29:1-30:20), 다윗(삼하 7:5-16) 등과 더불어 구속사의 중요 시기마다 언약을 체결하사 신앙적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심과 아울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약속의 형태로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언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고 또한 성취되어졌다.

성 경: [눅1:73]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창 22:16-18의 내용으로서 그의 후손들의 원수들이 정복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구원은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리라고 하는 정치적 해방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소위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의 '맹세'는 72절의 '언약'과 더불어 교차 대구법적으로 구성된 본 축가의 중심 위치에 놓여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과 그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하심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내고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에서 언약과 맹세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을 밝혀주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시 106:45).

성 경: [눅1:74]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원수의 손 - 71절 주석 참조.

⭕ 건지심을 입고(*, 뤼스덴타스) - 이 단어는 원형이 '뤼오마이'로서 과거 수동형으로 쓰였으며 '글어내다', '구출하다', '구원하다'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헬라 세계의 불멸의 신들(Gods)과 또 그들과는 대조되는 유한한 인간 존재들과 같이 존재론적 법칙들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느 9:8), 자기 이름을 위하여(시 79:9),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바로 그의 이름이 구원자이시다(사63:16). 본절과 75절 내용은 하나님이 그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따라 언약을 주권적으로 성취시키시는 이유 혹은 목적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의 목적 또한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알게하는 것이라는 점에서(77절) 더욱 확연해진다. 한편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하심 가운데에서의 보호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편에서의 믿음 혹은 신뢰가 요구된다(시 22:4, 5;34:19).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를 고백하는 자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아끼지 않으신다(W Kasch, TDNT, VI. 998-1003).

성 경: [눅1:75]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종신토록(*,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헤몬). 헬라어 '파사스'는 원형이 '파스'(*)로서 복수 목적격으로 쓰였으며 '모든', '온', '모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헤메라스'는 원형 '헤메라'(*)의 복수 목적격으로 '날', '낮', '때'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우리의 모든 날들' 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생을 의미한다. 주의 앞에서(*, 에노피온 아우투). 헬라어 '에노피온'은 '...앞에', '...의 목전에', '...가운데'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의 목전에서' 또는 '그의 면전에서'가 된다. 이는 제의적인 용어로서 이 어구에 담긴의미 가운데는 제사장적 섬김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본 구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된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Lenski).

⭕ 성결과 의(*, 엔 호시오테티 카이 디카이오쉬네) - '성결'에 해당하는 '호시오테티'는 원형 '호시오테스'(*)의 단수형이다. 이 단어는 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경건성과 관련하여 쓰이며 신약성경에서 '거룩함과 의로움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2회 나타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시대에 사는 신자들의 삶을 묘사하며, 엡 4:24에서는 중생으로 얻어진 새로운 본성을 가리킨다. '의'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의미(사 5:7)로 사용되었으며, 랍비들에게 있어서는 특히 가장 많은 공로가 쌓이게 되는 행위들 중 하나로서의 자선행위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스라엘에게 새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소극적으로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적극적으로는 '성결과 의'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시 5:8, 9).

성 경: [눅1:76]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 중의 하나이다(32절 주석 참조). 그리고 '선지자' 세례 요한은 두 가지 면에서 선지자보다 큰 자(마 11:11) 혹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 (1) 시대적인 위치의 면에서, 그는 신약과 구약의 가교적(架橋的) 위치에 있었다. 그는 예수와 동시대에 살면서 친히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즉 그는 복음의 여명이 동터오는 것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2) 사역의 내용면에서,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위대한 선지자였다. 구약에 탁월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메시야의 앞길을 평탄케하는 사역을 직접 수행한 선지자는 세례 요한뿐이었다. 한편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서 표현이 되고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서 표현이 되는 것은 현격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서로가 중요하고도 내밀한 상관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 앞서 가서...예비히여 - 이 말씀은 사 40:3;말 3:1;4:5 말씀의 성취이며, 이 구약 말씀과 비교할 때 누가는 요한을 엘리야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1:17)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선구자였던 것이다(3:3-6;마 3:1-6).

성 경: [눅1:77]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주의 백성 - 17절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 54절 '그 종 이스라엘' 주석 참조.

⭕ 죄사함(*,아페세이 하마르티온) - '사함'에 해당하는 '아페세이'는 '용서', '해방', '탕감'의 뜻을 나타낸다. 성경상에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죄사함'이라는 말이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의 대속 죽으심을 예표한 것이므로 반복적으로 드려져야 했다. 그러나 흠없고 완전한 희생 양이신 예수는 단 한번의 희생을 통해 영원하고도 완전한 죄사함을 이루셨다(히 9:25, 26). 또한 하나님은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용서하시고(사 1:18), 한번 용서한 죄는 기억치도 않으심으로써(사 43:25), 죄에 대한 앙금이나 미련을 갖지 않으시며 그 흔적을 조금도 남기시지 않으시며(시 103:12;미 7:19), 완전하고도 무한한 죄사함을 이루신다(Lenski).

⭕ 구원을 알게 하리니 - 구원을 알기 위한 전제조건은 선행되어 나온 '죄사함'이다. 즉 회개와 함께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넘어선 보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애당초 인간은 하나님과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며 참생명을 누리도록 피조되었으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가 둘 사이를 갈라 놓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손을 내밀 때 하나님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오직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기 때문이다(사 59:1, 2).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행위 가운데는 철저한 회개와 죄사함의 요청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요한은 후에 그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게 된다(3:3).

성 경: [눅1:78,79]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돋는 해가...인도하시리로다 - 캄캄한 어둠을 물리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관한 이미지는 이미 말 4:2에 나오며 사 9:2;60:1에는 '빛'으로 그리고 민 24:17에는 야곱에게서 나온 한 '별'로 등장한다. 이는 모두 흑암과 죽음을 몰아내고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충만한 세계를 도래케 할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다.

⭕ 임하여(*, 에피스케프세타이) - 이 단어는 68절에서는 '돌아보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메시야의 도래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뜻함을 암시한다.

⭕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 이 구절은 사 9:2을 인용하고 있다(마 4:16). 이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제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1)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평화(14:32;행 12:20), (2) 하나님과 인간간의 바른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화목(고후 5:19), (3) 심령의 평화(골 3:15)등을 의미한다. 이 평강은 신.구약을 통털어 풍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신학적 개념이라 할 수있다. 특히 본절에서 메시야와 평강의 길은 밀접한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사 9:6에서 메시야는 평강의 왕으로서 예언된 바 있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였다(롬 14:17). 또한 예수께서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영속적이고도 완전한 평안을 성도들에게 끼치노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14:27).

⭕ 인도하시리로다(*, 카튀뒤나이) - 원형 '카튜뒤노'(*)는 '곧게 하다', '똑바로 하다', '바로 안내하다' 등의 듯을 나타낸다. 즉 왜곡되고 잘못된 길을 바로 잡아 똑바로 가게 하는 것이다. 밝은 빛 가운데서 길을 잘못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평강의 길은 주께서 가시는 길이며 그분께서 예비하신 길이다. 구원의 빛이 길을 잘못가지 않도록 우리의 앞을 비추어 평강의 길로 나가게 한다. 한편 이렇게 하므로써 사가랴의 찬가는 끝을 맺는다. 사가랴 찬가는 첫말이 '찬송하리로다'로서 시작되어 '평강'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찬송'과 '평강'으로 특징지워지는 것을 반영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찬송을 드림으로써 그분과 인격적 교류를 갖고 그의 구원의 계획 속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평강을 얻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찬송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시는 것은 평강이다.

성 경: [눅1:80]

주제1: [인자 탄생 직전의 이야기들]

주제2: [사가랴의 찬가]

⭕ 자라며(*, 유크사넨) - 신체적 성장을 뜻하는 말이다. 요한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음을 나타낸다.

⭕ 심령이 강하여지며 - 요한은 신체적 성장과 아울러 영적으로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이 성장 과정은 예수의 성장 과정과 흡사하고(2:40, 52), 어린 사무엘이 성장할 때와도 유사하다(삼상 2:26). 모든 일이 그렇듯이 어린아이의 자라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가운데 있는 것이다.

⭕ 빈 들에 있으니라 - 혹자는 요한이 사해(死海) 부근의 유대 광야 어느 곳에 있었던 에세네파(Essenes)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그것을 입증할 만한 별다른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요한은 에세네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은 곧 오실 메시야의 도래를 전파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만 에세네파는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행동했다. 또한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회를 외면하고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아울러 요한이 민족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정의를 집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으나 에세네인들은 개인 구원의 수단과 방법에 집착해 철저한 금욕적 생활과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다. 또한 쿰란(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

성 경: [눅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이때에 - 2장을 시작하는 이 말은 1:80의 언급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새로운 사건의 시작을 알림과 아울러 상황의 변화로 인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K* A , 카이사로스 아우구스투) - '카이사로스'는 하나의 인명일 수도 있고 후대적 용법에서처럼 칭호일 수도 있다. 아구스도는 원래 라틴어인데 헬라어로는 보통 '황제'(*, 세바스토스, 행 25:21, 25)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인명으로 사용되었다. 아구스도 황제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이다. 그는 B.C. 27-A.D. 14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고 그후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부여받으며 그후 그는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로 명명되고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점령지에 대한 정책의 일환(一環)으로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점령지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나라의 법률까지도 로마법에 비추어 무리가 크게 없는 한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정책과 통치로 인해 전에 없이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代父)로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이란 칭호를 받아들여 모든 종교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게다가 그는 피살(被殺)된 자신의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그를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편 탁월한 정치 지도자이며 행정가인 그가 자기에게 속한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는 로마에 속한 모든나라들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그는 인구조사의 실시로 말미암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 5:2의 예언을 성취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Hendriksen).

⭕ 영(*, 도그마) -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며 '원리', '법령' 등의 뜻이다. 동사로는 '법령을 제정하다', '칙령을 공포하다'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는 황제의 포고령을 가리킨다.

⭕ 천하 - 이는 원어상 '거주지'란 뜻이다. 고대 학자들은 이방인의 땅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헬라인의 거주지를 이 단어로써 나타냈으며 그 후에 '로마제국'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행 11:28;17:6).

⭕ 호적(戶籍) - 황제의 칙령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실시하는 인구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2:3, 5;히 12:23)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인구 조사는 예수의 탄생을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넣어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지상의 통치자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눅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구레뇨 -B.C. 12년에 마르마리대(Marmaridae)를 군사적으로 장악하여 집정관이 된 후 구레뇨는 갈라디아의 남쪽 접경에 있던 산적떼의 후손인 호모나덴세스(Homonadenses) 족을 정복하였다. 그후 그는 A.D. 3-4년 가이우스 시이저(Gaius Caesar)의 고문역을, A.D. 6-9년에는 시리아의 황제 파견관을 역임한 후 A.D. 21년에 죽었다.

⭕ 수리아 - 시리아(수리아, :27)는 B.C. 64에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A.D. 70까지 유대는 별도로 자체의 행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시리아에 복속되어 로마의 통치를받고 있었다. 따라서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다.

⭕ 첫 번 한 것이라 - 제1차 인구 조사는 흔히 예수의 탄생보다 훨씬 이후인 A.D. 6년경 구레뇨가 통치하던 시기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행 5:37과 요세푸스의 저서(Antiq. , 26.1)에도 제1차 인구조사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누가가 A.D. 6년에 실시되었던 제1차 인구조사를 그 이전에 실시되었던 것으로 혼동했다고 추측한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었지만 다음 두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첫째, 어떤 사본에는 구레뇨가 '두번째'로 '시리이의 총독'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 사본의 내용이 애매한점이 있기는 하지만 구레뇨는 예수가 태어날 당시와 그 후의 몇 년이 지난 뒤, 곧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의 총독 직위에 있었다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F.F. Bruce, Quirinius, NBD, p.1069). 둘째, '첫 번'의 헬라어 '프로테'(*)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첫 번째의'라고 번역되었지만 그 단어는 그 의미보다 '이전의' 또는 '앞의'를 뜻할 수 있다. 만약 '첫 번'이라는 단어가 '이전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본절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이 되기 이전에'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본문의 기록의 역사성이 대해 회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만일 이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면 초대의 기독교 논박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았을리 없으며 또한 당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 써보낸 누가의 기록 속에 터무니없는 내용이 수록되었을리도 없겠기 때문이다.

성 경: [눅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모든 사람이...고향으로 돌아가매 - 인구 조사는 각 사람의 고향에서 실시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게 많은 불편을 감수하며 자기의 고향까지 가서 호적을 하는 것은 유대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로마의 호적제도는 자신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인적 사항만을 기록하는 훨씬 더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의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고 굳이 번거롭게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호적제도를 따르는 것은 이 호적명령이 로마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것이지만 자신들의 독자적(獨自的)인 방법과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모든 사실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본(1:1-4) 누가가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던 인구 조사를 강조하여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눅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동네로 - '집'은 단순한 문자적 의미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어 '민족', '족속', '나라' 등의 의미를 내포하며, '족속'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나 이 곳에서는 둘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다. 평행본문 마 1:6, 16에서도 요셉이 다윗의 후손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본절에서 다윗의 집 혹은 다윗의 동네라는 말이 거듭 언급되는 것은, 예수께서 육신상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함과 아울러 다윗 왕가의 후손이자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께서 일개초라한 시골민의 가정에서 태어남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삼상 20:6에서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라 불리운다. 다윗은 약 천년전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양떼를 돌보던(삼상 17:15) 곳도 이 마을 근처의 언덕이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7.2Km 떨어졌고 나사렛에서는 약 144Km 떰어진 곳이며 그것의 옛 이름은 에브라다이고 라헬이 장사된 곳이기도 하다(창 35:19). 이 마을 이름의 뜻은 '떡집'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다윗이 자라난 곳이고 미 5:2에 나타난 대로 메시야가 출생한 곳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태어난 아기가 다윗성에서 난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성 경: [눅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 누가는 요셉이 어느 시기에 베들레헴을 향해서 출발했으며, 또한 그가 왜 마리아를 동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 마리아의 고향에서 마리아에 대한 그릇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며 그 소문으로 인해서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았을 것이므로 요셉은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마 1:24). 그러나 그들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낳을 때 까지는 분명히 약혼 관계에만 머물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정혼'이라는 말을 유대적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유대적 개념에서 '정혼'은 결혼을 의미하고 절차상으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혼인서약은 대체로 정혼에 행해졌으며 이 정혼은 항상 공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신랑이 그의 신부를 데려가는 일에 있어서 어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한편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는 것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그 장거리(약 144Km, 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를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함께 동행하는 것은 세인(世人)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요셉의 배려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자신의 뜻대로 운행하는 주관자이시기 때문이다(시 136:8-26).

성 경: [눅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 이 표현은 단순히 임신과 출산 사이에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아이가 태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임신 자체는 비록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지만 태중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것은 일반적인 과정에 의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性情)을 가지고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며 모든 인류를 대속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과 성장과정을 거쳤기에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한편 이 구절에서 '해산할 날'이 현재대로 12월 25일인지는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전승에 따라 보통 겨울로 잡는다. 이것이 3세기부터 문제시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5월 20일을 제안했다. 12월25일을 성탄일로 지킨 것은 336년부터였다. 서방에서 이날을 택한 것은 로마신인 '정의의 태양'(Sol Invictus) 탄생일에 대치한 것이나 동방 교회에서는 주현제 즉 동방의 현자들이 도착했다고 하는 날(Epiphania manifestation, 1월 6일)에 예수의 수세를 기념하다가 4세기부터는 예수의 탄생도 연결시켰다. 그리고 5세기 중엽부터는 동방 교회도 거의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으나 예루살렘 교회는 549년까지도 1월 6일을 크리스마스날로 지킨다.

성 경: [눅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탄생]

⭕ 맏아들 - '외아들'이 아닌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뒤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 계속해서 동정을 지키며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이야기며 이는 마리아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와 경외심에서 나온 이야기라 하겠다. 그리고 예수의 여러 형제와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8:19, 20;마 12:46, 47;13:55, 56;막 3:31, 32;요 2:12;7:3, 5, 10;행 1:14).

⭕ 사관(舍館)(*, 카탈뤼마) - 이 단어는 흔히 '여관'(inn)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22:11) '객실'(guest room)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22:12에는 그 객실이 '다락방'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군인들의 숙소나 여관을 포함하여 숙박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갔던 '판도케이온'(*, '주막', 헬라어에서 대체로 여관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과는 다르다(10:34).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그 보잘 것없는 가족에게 허락되었던 장소는 가축우리 있다고 누가는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곳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대로 곳간(cave)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는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 구유(*, 파트네) - 신약에서 이 '파트네'는 누가복음에서만 4회 나온다(7, 12, 16절;13:15).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신분으로 보잘것없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이 세상에 오셨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구유는 세상 구속주의 비천한 탄생을 당시 세계의 주관자인 아구스도의 영광과 대조시키며(1, 11, 14절), 아무데도 머리둘 곳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자이신 예수의 겸손과 고난을 상징한다(9:58). 어쨌든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 맞춤이었다. 그리고 마굿간밖에 내어 줄 수 없었던 여관 주인은 동정심이 전혀 없어서 그러했다고 보이지 않으며 누가 역시 그러한 각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H. Hengel, TDNT. , 49-55).

성 경: [눅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목자들이 - 당시 유대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들 중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목자들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자들이 하는일이란 유대인의 규례(規例)에 의하면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다. 이 이야기를 살펴볼 때 명백한것은 복음이 맨 먼저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마져 아끼지 않는 선한 목자처럼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이심을(마 20:18;요 1:29) 넌지시 암시한다. 한편, 이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언약하는 내용(삼하 7:8)을 상기해볼 수 있다. 그 내용 중에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리고 신구약에서 목자는 하나님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시 23:1;사 40:11;렘 23:1-4;히 13:20;벧전 2:25;5:2).

⭕ 밤에...지키더니 - '지키더니'에 해당하는 '퓔라쏜테스'는 '파수하다', '보호하다'의 뜻인 '퓔라쏘'(*)의 복수 현재능동태형이다. 그리고 '밤에'에 해당하는 '테스뉴토스'는 '밤 새워'란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귀절은 밖에서 여러명이 교대로 밤을 새워 도둑이나 다른 들짐승들로부터 양떼를 지키며 보호하는 일련의 행동을 묘사한다. 팔레스틴 지방에서 목자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이런 식으로 양떼를 밖에서 방목(放牧)하였으며 겨울철에도 날씨가 춥지 않을 때에는 종종 그렇게했다. 한편 본문상으로는 예수가 어느 철에 태어났는지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느 철에 태어나셨나 하는 점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그 자체이다.

성 경: [눅2: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주의 영광 - '영광'(*, 돝사)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며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독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표현 속에서도 흔히 등장한다(9절;9:31, 32;행 22:11;계 15:8).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에 의해 다시 살아나셨으며(롬 6:4) 영광 속으로 올리워 지셨고(딤전 3:16) 지금도 영광의 우편에 계신다(행 7:55). 또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듯이 그에게도 돌려진다(2:14;히 13:21). 따라서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다(고전 2:8;약 2:1). 나아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사 40:5)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딛 2:13).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이나 본 구절에서 그의 출생시에 영광이 드러난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진작부터 말해주는 것이며 요한복음에서도 또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요 1:14;2:11;11:40). 그리스도께서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요 13:31).

⭕ 두루 비추매(*, 페리엘람프센) - 이 단어는 '페리'(*, '주위에')와 '람포'(*, '비취다')의 합성어로서 '빛에 완전히 쌓인 상태'를 뜻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한 빛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 민족들 가운데서는 '세키나'로서 알려져 있다. 이는 매우 희고 밝게 빛나는 구름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출 24:16;왕상 8:10;사 6:1-3;행 7:55).

성 경: [눅2:1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온 백성 - 이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전달된 복음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세계 만민에게 개방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 백성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이 먼저 전달된 것은 그들을 통해 온인류에게 전해지게끔 하고자 함이었다. 이러한 소식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접할 대상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14절)과 '이방'(32절)에로 확대(擴大)된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 좋은 소식을...전하노라(*, 유앙겔리조마이) - 이 단어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다'의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바사르'(*)에 해당한다. 이 히브리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다'는 뜻을 나타냄은 물론이나 승리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사용된다(삼하 4:10;왕상 1:42). 이 용어는 특히 사 40장 이하에서 의미심장하게 사용되었으니 여기서 사자는 시온에 이르러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전세계적인 승리를 선포한다(사 40:9; 41:27;52:7). 한편 본문에서의 '좋은 소식' 이란 곧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곧 복음이라 할수 있었다.

성 경: [눅2:1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다윗의 동네 - 베들레헴(4절 주석 참조).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 예언되었다. 여기서 베들레헴을 '다윗의 동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기억나게하고 그와 관련된 예언의 성취를 암시하기 위함이다.

⭕ 구주(*, 소테르) - 헬라어 '소테르'는 신약 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며 그것도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만 주로 사용된 표현이다(행 5:31;엡 5:23;딤후 1:10). 이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표현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바(1:47;삼하 22:3;시 49:26), 예수께서 죄악에 찌들은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임을 뜻한다.

⭕ 그리스도 주 - '그리스도'는 마 1:1 주석에서 설명된 바처럼 인류 구속의 대사명과 관련되는 주님의 직능적 명칭이며, '주'(헬, 퀴리오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는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되었으며(엡 1:4;3:11;골 4:3),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성 경: [눅2:12]

주제1: [8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강보에 싸여...표적이니라 -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는 긴 옷감으로 아기를 포근히 감싸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를 따뜻하게 하고 병으로부터 보호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기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놓여있다는 것은 특별한 표적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다음 세가지 면에서 표적이 되었다. (1)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언한 시기의 장소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2) 그들에게 전달된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그리스도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지극히 비천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다. 한편 겔 16:1-5에는 예루살렘이 이방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불쌍한 아기로 묘사되었거니와, 예수는 이와 같은 가련한 상태에 놓인 이스라엘과 나아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돌보시기 위해 스스로 비천한 자리(구유)에 누이셨던 것이다.

성 경: [눅2:1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허다한 천군이...찬송하여 - 두 세사람의 증거로도 어떤 사실의 진정성을 입증할 수 있었거니와(마 18:16) 여기서는 수많은 천군이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고 있다. '천군'에 해당하는 '스트라티아'(*)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천체(henvenly bodies)를 가리키나(느 9:6), 여기서는 일군(一群)의 천사들을 가리킨다(시 103:21).

성 경: [눅2:1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천사들의 찬송]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 이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등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의 영윈하신 신성과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거하고 또한 그를 통해 확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요 1:14).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요 14:9). (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찬양과 경배로써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0). (3)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섭리에 따라 인생과 세상 만물을 향해 이루고자하신 계획을 그리스도를 통해 완수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 땅에서는...평화로다 - 그리스도의 오심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and on earth peace to men on whom his favor rest, NIV) 것은, (1) 그리스도의 중재와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혔던 장벽이 제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4).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있으므로 늘 불화의 다툼의 수렁에서 허덕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 화해를 이룬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강을 선물로 소유하게 된다(요 14:27). (2)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사람들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엡 2:16-18). 여기 언급된 평화는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총체적 축복과 구원을 지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는 평강의 왕으로서(히 7:2), 당신의 공생애를 백성들의 평강을 위해 보내셨으며(7:50;8:48) 그 평강을 위한 사역은 십자가상에서 절정에 달했다.

성 경: [눅2:1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하늘로 올라가니 - 누가는 천사들이 단순히 사라졌다고 언급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이는 공간적인 이동을 자세히 묘사한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다(24:51;행 1:10). 물론 우리는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하여 수직 상승의 뜻으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의 처소 곧 하늘 나라는 이 우주속의 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의 승천장면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지각 가능 상태로부터 지각 초월 상태에로 변화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 이제(*, 데) - 강조를 위한 접두사로서 특히 명령형 문장과 더불어 사용되며 여기서는 긴급성을 강조한다.

성 경: [눅2:1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빨리 가서 -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만난 후 엘리사벳을 찾아 나선 장면을 연상시킨다(1:39). 목자들은 자신들이 돌보던 양떼를 두고 마리아처럼 서둘러 찾아 나선다. 목자들이 양떼를 다른 동료 목자들에게 맡기고 갔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보존에 맡겼는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 목자들은 즉각적(卽刻的)인 반응을 보여주고 아기 예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양떼를 뒤로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는 결단이 요구된다. 우리도 목자들과 같이 순수한 믿음과 겸손하고 완전한 섬김으로써 주를 찾을 때에 주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인도자 되신다.

⭕ 찾아서(*, 아뉴란) - 원어상으로 '끊임없이'(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다'라는 뜻이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계속해서 찾아다녔으며, 그렇게 노력하여 찾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평강의 왕 아기 예수를 발견한 것을 말한다.

성 경: [눅2:1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보고...말한 것을 고하니 -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처해 있었던 이 목자들이 최초로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고 또 최초로 복음을 전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목자들이 그 아기에 관한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마굿간에 모여 있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고, 목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고도 짐작된다.

성 경: [눅2:1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기이(奇異)히 여기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이상히 여기다', '놀라다'는 뜻 외에 '찬양하다'는 뜻도 내포한다. 즉 이 말은 초자연적인 혹은 신적인 사건과 접한 자의 외경스러운 감동을 시사한다. 누가는 메시아에 대하여 선포하는 말을 들었던 이들이 그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는데 본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마리아와 요셉도 시므온이 예수께 대하여 하는 말을 듣고 기이하게 여겼으며(33절) 47절에 보면 성전에서 답변하는 어린 예수의 말을 들었던 모든 이들이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 또한 나사렛의 회당에서 예수가 사 61장의 어떤 부분을 읽고 나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곳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예수의 말을 기이하게 여겼다(4:22;8:25;9:43;11:14, 38;20:26;24:12). 이외에도 사람들이 위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을 설명해주는 여러가지 어휘가 사용되었다(4:15, 36;5:26). 사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충만히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롬 1:20).

성 경: [눅2:1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지키어 생각하니라 - '지키어'에 해당하는 '쉬네테레이'는 원형 '쉰테레오'(*)의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기억으로) '간직하다'의 뜻이며, '생각하니라'에 해당하는 '쉼발루사'는 원형 '쉼발로'(*)의 주격 분사 현재형으로 '숙고하다', '생각하다', '만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마리아는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음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 등은 마리아로 하여금 아기 예수의 신분과 사명에 대해 거듭 상고해 보게끔 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

성 경: [눅2:2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목자들의 경배]

⭕ 목자가...찬송하며 돌아가니라 - '하나님께'라는 목적어를 받는 '영광을 돌리다'(*, 돝사조)라는 표현이 누가복음에 자주 쓰인다(5:25;7:16;13;17:15; 18:43;23:47). 그리고 본절에서와 같이 어떤 이야기가 찬양으로 끝맺는 것은 누가복음의 특징중 하나이다(24:53). 목자들은 그들이 천사들로부터 들은 바와 실제로 본 것이 똑같음을 알고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린다. 사실 아기의 탄생 자체는 평범한 보통의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는 그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많은 아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는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육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성 경: [눅2:2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 성경에는 아기가 출생하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지어진 예가 여러번 나온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요한(1:13,60-63), 예수(마 1:25)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한편 예수라는 이름이 명명된것은 마리아나 요셉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아기 탄생 전에 천사가 지시한 바를 따른것 뿐이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그대로 수행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이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진행되어온 일이라는것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 역시 성령께서 진행시켜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 경: [눅2:2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결례(潔禮)의 날 - 유대의 모든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서 정한 기한이 지나면 제사장에게로 가서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속죄를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해산한 산모는 부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율법에서는 부정하게 된 산모와 아이들을 위해서 정결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율법이 명시한대로 정결케 되는 기간이(남자 아이 40일, 여자 아이 80일) 찬(레12:1-5) 산모는 최종 정결 예식으로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다. 여기서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不淨)을 제거하는 뜻에서 드렸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였으나 가난할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대치할 수 있었다(레 12:1-8). 본문에서 누가는 어머니의 정결 예식과 아기를 바치는 행위를 함께 묘사하고 있다(Marshall). 여기서 아기 예수를 위해 제사장을 찾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만, 결국 이 예수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다(히 3:1). 이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며 우리의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성 경: [눅2:2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주의 율법에...아기를 주께 드리고 - 율법은 처음 난 짐승의 새끼를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였다(출 13장;22:29;34:19;민 3:11-13;40-51;8:16-18;신 15:19).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첫 아기를 제물로 드리는 일을 대치시키기 위해 레위 지파를 성별하셨는데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슷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 수만큼, 즉 한 사람당 다섯 세겔씩을 속전으로 지불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께서도 장자, 곧 거룩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입으셨긴 하지만 전혀 무죄하시다(히 4:15). 따라서 예수가 주께 바쳐진 것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한다(딤전 2:5). 실로 예수의 생애 자체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다.

성 경: [눅2:2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예수의 할례와 헌신례]

⭕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斑鳩)둘로 제사하려 - 누가는 계속해서 산모의 정결예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반구는 산비둘기를 말한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가정환경과 그 사회적 형편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앞서 기술했듯이 레 12장에는 해산한 여인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을 '양 한마리와 비둘기 한마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에 따라 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으로서 그 양(量)과 방법들이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극빈자의 경우는 정한 제물의 양대로 바치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종교적으로 갈등을 갖게 될 것이므로 그 양을 줄이는 것 역시 법으로 정하여 바치게 했다.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들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레 12:8).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관심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부유한자나 가난한 자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님을 경배하여 그에게 예배를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약1/10정도에 해당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들이 극빈층에 속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눅2:2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시므온 - 이러한 이름은 유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이고 흔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혹자들은 이 구절의 시므온은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의 회장이 되었다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막연한 추측일 뿐 정확한 자료나 확증이 없다. 어쨌든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으며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메시야가 바로 그의 위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우리가 언제 재림하실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경건된 삶을 준비하여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마 25:1-13).

⭕ 의롭고 경건하여 - 1:5, 6에서 세례 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스벱이 소개될 때처럼 의로음과 경건함이 강조되고 있다. '의롭고'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스'(*)는 '공정한', '정의로운'등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신정 사회(神政社會)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리고 '경건하여'에 해당하는 '율라베스'(*)는 '경건한', '독실한' 등의 의미외에 '주의', '신중함' 혹은 '두려워하다', '경계하다' 등을 뜻하며, 율법의 요구를 면밀하고 세심하게 충족시키고자 행동거지를 주의하는 독실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잘 사용된다. 따라서 시므온이 얼마나 율법을 공경하며 준수했는가를 알 수 있다.

⭕ 이스라엘의 위로 -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받는 위로를 가리킨다(사 40-55장). 말라기선지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시므온은 이러한 소위 오랜 침묵의 시대에 살면서도 메시야의 도래를 확신하며 끈기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소유한 자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우리는 눈앞에 전개되는 타락과 불신의 흐름에 휩쓸려갈 것이 아니라 역사의 끝까지 투시(透視)하는 신령한 눈을 떠서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결단하고 인내하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눅2:2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 '지시를 받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크레마티스메논'(*)은 '사건을 다루다', '계시를 전달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본 구절에서 이 단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메시야를 대망하며 그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경건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을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시의 전달자인 성령을 통해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에게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보리라는 계시를 허락하셨다.

성 경: [눅2:2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성령의 감동으로(*, 엔 토 프뉴마티) - 이 구절은 시므온이 계속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결국 시므온이 성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이고 마리아 부처가 아기예수를 성전으로 데려올 때 그를 맞이하도록 시므온을 준비시킨 분도 바로 성령이셨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정확하다. 오랜 세월을 기다림으로 보낸 나이먹은 시므온은 이제 계시의 말씀이 완성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 부모 - 법적인 차원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의 부모였다.

성 경: [눅2:2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찬송하여 - 아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시므온은 그를 알아보고 안아 하나님께 찬양드렸다. 시므온은 율법에 따라 결례와 번제와 속전을 드리러오는 많은 사람, 많은 아이 가운데(그 중에는 품위있고 고상해 보이는 부모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 출신의 요셉과 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예수를 보자 곧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되었다. 이는 오직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에 분명하다. '찬송하여'에 해당하는 '율로게센'(*)은 '좋게 이야기 하다', '축복하다'(bless, KJV) 등의 뜻을 나타낸다.

성 경: [눅2:3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 시므온은 히브리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의 한 특징으로서 이미 나타난 바와 같이(1:69,71,77)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이 구체화된 것(embodied)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예수로 말미암아 구현될 인간구원의 역사를 예견하였다는 의미이다. 사실 예수 탄생 자체가 이미 인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사역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에 그 사역은 벌써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시므온은 구약시대 동안 계속해서 예언되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던 메시야를 맞이하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인물이요, 또 메시야를 맞이함으로 신약시대를 열도록 길을 열어주는 서언적(序言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갓난아기의 모습인 예수를 보고서 그토록 즐겁고 평안한 심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시므온이 받았다면, 구원의 실제적 내용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이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 큰 기쁨과 확신을 나타내어야 하겠는가!

성 경: [눅2:3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만민 앞에 -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팔에 안고서 세상 끝에까지 미칠 그분의 영광과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넘어 세게 만방에로 확장될 것임을 내다보는 예언자적 통찰력이다. 한편 이방인의 구원 혹은 복음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누가복음에서 강조된 사실들 중 하나이며(15장),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었다(사 43:5,6;45:6;49:12;미 4:1,2;슥 8:20-23). 이점에 관해서는 마8:1-17주제 강해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관계'를 보라.

성 경: [눅2:3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또한 그의 온전히 의로우신 성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시 27:1;요 1:5;딤전 6:16) 또 하나님의 계시와(시 34:5) 생명의(요 1:4) 상징으로서 언급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사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을 이방에 전파할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고 되어있다(사 42:6).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되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조금의 어둠도 없으신 참빛로서 인종과 신분 등 모든 인간적 장벽(障壁)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에게 비추이신다(요 1:9).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고(마 5:14)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고 명하셨다(마 5:16).

⭕ 주의 백성...영광이니이다 - 예수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온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길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세력의 지배 하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잃은 상태였는데, 이제 메시야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특권을 바로 깨닫기는 커녕 오히려 메시야를 배척하고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로 내몰아 버렸다.

성 경: [눅2:3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기이히 여기더라 - 마리아와 요셉이 기이히 여기며 놀란 것은 단지 시므온의 찬송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보다는 천사들, 목자들, 동방박사들,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 등 사방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아기 예수에 관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마리아 부처는 애초 그들에게 임했던 천사들의 계시를 거듭 상고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들의 이해를 보다 깊게 다져 나갔을 것이다.

성 경: [눅2:3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많은 사람의...세움을 입었고 - 이 구절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도 하는 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데 기초석이 되기도 하는 돌(사 8:14;28:16)에 관한 사상을 반영한다. 예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며 멸망에 이르게하실 것이요 또 그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초석(礎石)이 되게 하실 것이다. 또한 예수는 백성의 구원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해와 곤욕을 치러야만 될 것으로 예언되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받으셨던 각종 모욕과 비방(4:29;22:63-65;23:11, 34-39)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시 32:6-8;사 50:6;53:4-12)임을 증거해 준다. 시므온의 이러한 예언은 엘리사벳의 노래나(:42-45) 사가랴의 예언(1:68-79)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과는(2:10-14) 반대로 예수께 드리워질 어두운 면을 증거한다. 예수의 영광에 관한 기쁨의 증거와 더불어 이러한 비탄스러운 증거는 앞으로 전개될 메시야적 사역의 진면목이 어떠한지를 암시해 준다.

성 경: [눅2:3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시므온의 찬송]

⭕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 '칼'을 나타내는 헬라어 '롬파이아(*)는 드라키아인들의 대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큰 칼을 의미한다. 여기서 마리아는 '여인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1:42) 곧 메시야의 어머니라는 영광과는 또 달리 '슬픔의 어머니'(Mater dolorosa)로 묘사되고 있다. 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나사렛에서 함께 보낸 소년 시절과 청년시절이 가장 행복된 나날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됨과 그의 때를 같이하여 대두한 유대교 지도가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각성을 띠어 갔으며, 이로 인해 혈육의 정을 떨칠 수 없었던 마리아로서는 예수의 장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으로 노심초사(勞心焦思)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 드러내려 함이니 - 여기서 헬라어 '아포칼뤼프도신'(*)은 '베일이 벗겨지는'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과 허위가 드러나지 않은 채 그대로 숨기워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통해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과 더불어 그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다.

성 경: [눅2:3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아셀 지파 비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 - 시므온의 소개와는 달리 안나의 경우는 지파명까기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시므온의 경우는 구체적인 신분을 확인할 수가 없었으나 안나는 삶의 배경이 기술되었다. 아셀은 야곱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창 30:13). 예수 탄생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어 나머지 10지파의 행방은 불투명했다. 이는 바벧론 포로지로부터 귀환(歸還)한 자들 중 거의가 이 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던 연유도 있겠는데, 안나도 바로 다른 지파에 속한 소수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자신들의 족보를 보관하고 그 잃어버린 지파 백성의 후손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한편 '바누엘'은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 이라는(창 32:30) 지명에서 나온 이름이다. 따라서 히브리식으로는 '브니엘'이며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의 '한나'(*)에 해당한다(삼상 1:2). 즉 이 이름은 사사이며 제사장이고 선지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름과 동일하다. 그녀는 구약 성경의 드보라(삿 4:4)와 훌다(왕하 22:14)와 같이 휼릉한 여성 예언자였다.

성 경: [눅2:3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과부 된 지 팔십 사 년이라...기도함으로 섬기더니 - 당시 유대 사회의 조혼 풍습에 비추어 볼 때 안나는 14세를 전후하여 결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안나의 나이는 14+7+84=105세 쯤 되는 셈이다. 이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여인이었다. 이는 그녀가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이스라엘의 소망 곧 메시야를 대망하며 기도했던 여인임을 나타내준다. 아마 그녀는 오직 메시야만이 그녀와 이스라엘의 가슴에 수십년 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를 풀어주고 위로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편, 안나는 성전에서 시므온의 송가(頌歌)를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송가를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그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확신하였다.

성 경: [눅2:3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하나님께 감사하고 - '감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도몰로게이토'(*)'는 '찬양하다', '감사하다' 등의 뜻외에 '단호하게 신앙을 고백하다',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고백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안나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신앙 고백적인 믿음의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나의 감사는 순종 및 메시지의 선포와 결합되고 있다.

⭕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 이 구절은 사가랴가 이스라엘의 속량(1:68)을 노래하고, 시므온이 이스라엘의 위로(25절)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사 52:9에 나타난 메시야의 예루살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사실 '구속'은 예수께서 이룩하실 신적구원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다(롬 3:24;엡 1:7;골 1:14).

성 경: [눅2:3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주의 율법을 좇아 - 누가는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차례 강조되고 있다. 22절(모세의 법대로), 23절(주의 율법에 쓴 바), 24절(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27절(율법의 전례대로 미루어 보건대 마리아 부처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갈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한다.

⭕ 갈릴리로...나사렛에 이르니라 -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40, 52).

성 경: [눅2:4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안나의 예언]

⭕ 아기가 자라며...그 위에 있더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된다. 그리고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이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이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눅2:4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부모가 해마다...예루살렘으로 가더니 -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 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다(신 16:16). 그러나 바벧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수가 있다.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이다.

성 경: [눅2:43]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날들을 마치고 -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다(출 12:15;레 23:6-8;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 아이 예수는...알지 못하고 -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행했을 것이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게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해맨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계속해서 염두에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44]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동행 중에...아는 자 중에서 찾되 -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섰다.

성 경: [눅2:45]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찾으면서 - 헬라어 '아나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마리아 부처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한다.

성 경: [눅2:46]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다.

⭕ 선생들 중에 앉으사...묻기도 하시니 -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한다. 대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한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된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성 경: [눅2:47]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듣는 자가 다...기이히 여기더라 - '기이히 여기더라'(*, 여시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이다. 즉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하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는 '이해'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성 경: [눅2:48]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너를 찾았노라 -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먼저 다가왔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의 대답은(49절) 마리아 부처로 하여금 예수의 신분에 대해 다시금 깊이 숙고해 보게 하였을 것이다.

성 경: [눅2:49]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어찌하여...알지 못하셨나이까 -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말씀이다.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 순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18:29;신 33:9;마 6:33). (2) 예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 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간의 양자 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

⭕ 내 아버지 집에 -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23:46;마 11:25;막 14:36;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이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된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이다.

성 경: [눅2:50]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양친이...깨닫지 못하더라 -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부의 깨닫지 못함이 훨씬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 경: [눅2:51]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예수께서...순종하여 받드시더라 -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다. 예수는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된다.

⭕ 그 모친은...마음에 두니라 - 1장의 주석 서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누가는 이 복음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하다. 그녀는 여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한다.

성 경: [눅2:52]

주제1: [인자 탄생과 유년 시절]

주제2: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 예수는...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하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40절 주석 참조),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이다(빌 2:6, 7). 한편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된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다(행 2:47).

성 경: [눅3: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디베료 가이사가...열 다섯 해 - 이 구절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소 다르다. 그것은 디베료 가이사의 통치 연대 때문이다. 디베료는 전임 황제이자 양아버지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A.D. 14년 8월 19일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즉위했다.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왕위에 즉위한 때부터 연대를 계산하지 않고 통치한 햇수에 의해서 연대를 계산했다.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디베료는 A.D. 28년 8월 19일에서 12월 사이에 즉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 다섯 해'는 로마의 일반적인 연대계산법으로 계산할 때 A.D. 28년 8월에서 A.D. 29년 8월까지가 된다. 그러나 안디옥 태생인 누가가 시리아의 연대 계산법(군주의 통치 연대를 셀루시드(Seleucid)시대부터 사용해온 방법에 따라 계산하는 법, 통치의 기원을 9, 10월로 잡음)을 따랐다면 '열 다섯 해'는 A.D. 27년 9월 21일부터 A.D. 28년 10월 8일까지가 된다. 그렇지만 저자 누가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적 배경이나 이 책의 독자들을 고려하건대 로마의 계산법을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본디오 빌리도 - 이 빌라도는 A.D. 26-36까지 유대의 제5대 총독으로 있었다. 이 '총독'(*, 헤게모뉴온토스)은 고대의 로마 지방 장관(procurator)을 가리킨다.

⭕ 헤롯 - 이 헤롯은 보통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로 알려졌다. 그는 아켈라오의 친형제이며 헤롯 대제의 아들이다. 헤롯 안디바스는 아켈라오의 유언에 의해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지내다가(B.C. 4-A.D. 39) 고울 지방의 리용으로 추방당하여 폐위된다(Hendriksen). 사복음서 상에 나타나는 헤롯은 대부분 안디바스를 가리킨다.

⭕ 빌립 - 빌립 역시 헤롯대제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이다(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님). 그는 팔레스틴의 북서부 지방 이두래(Iturea)와 드라고닛(Traconitis ; 바위돌로 된 마당이라는 뜻)을 B.C. 4 - A.D. 33/34까지 통치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빌립은 훌륭한 인격자이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왕이라고 한다. 그는 바네아스를 고쳐 가이사랴 빌립보라 명명하고 벳새다를 고쳐 벳새다 쥴리아스로 명명했다.

성 경: [눅3: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안나스와 가야바 - 안나스는 A.D. 6년로마 황제 구레뇨에 의해 대제사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A.D. 15년 로마 황제 발레리우스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해임되었다. 안나스가 해임되고 파비(Pabi)의 아들 이스마엘과 엘르아살(Eleazar)과 가미데스(Gamithes)의 아들 시몬(Simon)이 A.D. 18-19년 사이와 A.D. 25-26년 사이에 그 뒤를 바로 계승했다. 그리고 그후 안나스의 조카 요셉이 그 뒤를 계승했는데 이 대제사장이 바로 가야바(Caiaphas)이다(Jos. Antiq. 20, 198). 가야바는 A.D. 18-36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원래 대제사장직이 종신직(민 35:25)이었으나 로마인들에 의해서 정치적 목적에 맞게 통제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계속해서 종신직으로 여겼다. 따라서 유대의 최고기관인 산헤드린에서는 로마정부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유대인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推仰)되는 대제사장과 로마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이 함께 남아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제사장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Jeremias, Jerusalem, 157). 안나스는 봉직 기간이 길었고 권력과 영향력이 산헤드린에 강력하게 미쳐, 그는 이스라엘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야바는 또한 안나스의 사위이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 이유로 공식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은 안나스가 행사했다(요 18:13-29).

⭕ 빈 들 - 세례 요한은 황량하고 거친 빈 들에서 기거했다(1:80). '빈 들'은 유대의 황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서쪽의 유대산지와 동쪽의 사해 그리고 요단 저지대 사이에있는 기복이 심한 지형을 일컫는다. 이 지형은 석회질로 이루어져 땅의 굴곡이 심하고 자갈과 암석 조각이 많이 있다. 특히 이곳은 광야 특유의 잡목들이 많고 독사들도 많이 있다. 이 '빈 들' 북쪽으로 길게 뻗으면 요단강과 합류하게 된다(Hendriksen). '빈 들'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애굽을 탈출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방랑했던 장소로 연상되는 곳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빈 들'(광야)이라는 말을 들을 때 종말과 연관된 것을 연상하기도 한다(사 40:3;호 2:14). '말씀'을 나타내는 헬라어 '레마'(*)는 실제로 말하여진 말씀(the actual words spoken)을 의미하는 바 세례 요한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였다. 결국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사역을 시작하게도 하셨지만 사역을 끝마치게도 하실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모든 것의 끝이다(계 22:13).

성 경: [눅3: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요단 강 부근 - 하나님은 수세기 동안의 침묵을 깨시고 요한에게 임하여 당신의 말씀을 대언케 하셨다. 그런데 요한이 주로 요단 강변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은 '빈 들'의 특성상 땅이 메마르고 바위가 많으며 물이 귀하였으므로 세례를 베풀기에 적합한 물을 찾아 요단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요 3:22). 한편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요한은 한 곳에서만 머물러 전도하지않고 각 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저자 누가 역시 다른 복음서 저자보다 요한이 순회 전도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한다.

⭕ 회개(悔改)의 세례 - 세례요한이 베풀었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의 동사형 '메타노에오'(*)는 '마음을 바꾸다', '회개하다'라는 뜻이다. '회개'는 요한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으로서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불세례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부언컨대, '회개의 세례'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가 죄사함을 얻는다는 약속의 구체적인 표시였다. 왜냐하면 그 세례는 바로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기 때문이다(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 참조). 그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권고는 종말론적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긴박성을 보여준다.

성 경: [눅3: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 세례 요한의 출현과 그의 사역은 사 40:3 말씀의 예언 성취이다. 이 이사야서의 인용은 사복음서가 모두 공통적이다. 그러나 누가만이 사 40:3-5 전체를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쿰란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광야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로서 사 40:3을 제시했다. 그들은 광야에 격리되어 율법을 계속해서 연구함으로써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마찬가지로 누가는 사 4-:3이 분명히 세례요한의 사역을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책'을 나타내는 헬라어 '비블로스'(*)는 구약의 개별적인 낱권의 책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비볼리온'(*)은 '두루마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평탄케 하라 - 이 인용 구절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기쁜 마음으로 고국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실 구속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바벨론과 유대 땅 사이에는 시리아 사막이 있다. 이 사막을 통과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게 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구속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그 곳에 길이 닦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일을 전담할 하나님의 사자가 행차를 위한 준비를 외치게 된다. 따라서 '...예비하라...평탄케 하라'라는 이 말은 좀더 정확한 의미에서 위대한 자유와 평강의 시대를 도래케 할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게 될 때 세례 요한은 당연히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하나님은 요한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모든 백성들을 준비시키고 그를 맞을 채비를 갖추도록 촉구하신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했다'고 외쳤다(사 59:1, 2). 그렇다면 주의 오심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죄이다. 왕의 행차를 위해 왕의 사자가 먼저 길을 예비하고 평탄(平坦)하게 하듯이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게 하고 그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했다.

성 경: [눅3: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모든 골짜기가...평탄하여질 것이요 - 은유적 표현으로, 누가는 세례 요한과 메시야 예수를 잘 대비해 메시야의 탁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고대에 왕의 행차가 골짜기나 높은 산, 굽고 험한 길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행로를 평탄하게 만들었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마샬(Marshall)은 '평탄하여지다'는 말이 교만한 이들의 낮아짐을 암시하며 '굽은'이라는 말은 비뚤어진 인간들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렌스키(Lenski)는 '굽은'과 '험한'이라는 말에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비유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즉 '굽은'은 히브리적 표현으로는 '속이는'(*, 아크자브)을 뜻하고, 이것을 곧게 하는 표현의 히브리어는 '정의'와 '공정'(*, 미쇼르)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험한 곳'은 모든 종류의 악이 모여 있는 곳(*, 르카심)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풀핏(Pulpit) 주석에서는 낮추어야 할 산을 바리새인들의 교만으로 비유하고 있고 메워야 될 골짜기들을 사두개인들의 도덕적.종교적 무관심(無關心)으로 비유한다. 결국 이 비유들을 종합해 보면 이 구절은 인간의 죄된 심성의 교만과 거짓과 불의와 불신 등을 회개하고 정의롭고 순결한 심성으로 구속의 메시야를 맞이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 경: [눅3: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 누가는 이 부분을 70인역(LXX) 사 40:5 에서 인용하였는데 그 전반부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란 구절이 수록되어 있다. 위에서 모든 육체(즉 유대인들만이 아닌 세계 만민)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는 것은 메시야로 인한 세계적 구원의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incarnation)사건 및 공생애로써 구체화되며, 사도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온 세상의 모든 육체를 향해 그 복음의 소식이 계속 전파되고 있고, 궁극적으로 마지막날 큰 구원에서 그 절정을 맞이할 것이다(Lenski). 이는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현저히 드러내보이는 본서의 신학적 특징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성 경: [눅3: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무리 - '무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오클로스'(*)는 '백성'을 가리키는 '라오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리펠드(Lifeld)는 '오클로스'가 '라오스'와 달리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을 말한다고 한다. 누가는 여기서 이 무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 3:7과 요 1:19, 24은 그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다고 밝힌다.

⭕ 독사의 자식들아...진노(震怒)를 피하라 -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지자의 경고성 선포처럼 매우 날카롭고 엄하다. 이 설교는 마 3:7-10과 동일하다. 여기서 '독사'는 사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악인(시 58:3-5;사 59:5)과 메시야를 적대하는 자(시 91:13)에 대한 표현이다. 요한은 세례받으러 나오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오기는 했지만 진실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와 세속적인 명예심 등으로 부패한 마음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표현은 8절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후에 예수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힐난(詰難)했다(마 12:34). 그리고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요한의 질문에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그에게 나아오는것이 마땅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는 마음의 동기에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30회 이상 언급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도 수차례 언급이 되었다. 이것은 불의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하신 반응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때마다 일마다 표현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반드시 엄한 심판을 행하신다. 또한 마샬(Marshall)은 지적하기를 이 질문은 수사적 질문으로서 종말에 있을 마지막 심판이 이러한 형태의 외적 종교예식(religiousrite)으로도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상황임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세례는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방도가 아니라 회개의 표현으로서 촉구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3: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회개에 합당한 열매을 맺고 - 성경에서 '열매'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선악간의 결과들을 표현하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시 1:3;렘 17:8;행 26:20). 나무는 그 나무에 맞는 열매를 맺는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그 구체적 결실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물론이 열매는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내적변화에 의해 외적으로 표현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인적(全人的)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회개란 죄에 대한 단순한 외적 고백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격적 변화, 곧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품성의 변화들이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한다.

⭕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돌들로도...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종교적 특권이나 혈연적 계보나 의식(儀式)이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유대인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와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이유로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따라서 패역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요구하는 진정한 회개에서 자신들을 제외시키려고 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해 칼날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은 첫인간 아담을 흙에서 취하셨다(창 2:7). 그렇기 때문에 빈 들이나 강 가의 돌들을 통하여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실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가리킨다(갈 3:7). 렌스키(Lenski)와 슈어만(Schurmann)은 이 '돌들'이 바로 이방인들을 나타낸다고 한다. 어쨌든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주권적 권능을 강조한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실된 회개이다. 우리의 구원은 외적조건에 있지 않고 진정한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에 있기 때문에 항상 우리에게는 바로 삶에의 결단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인내하시면서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벧후 3: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성 경: [눅3: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 8,9절에서 요한의 설교는 두 가지의 이미지(image)로 묘사된다. (1)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찍혀서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후에 예수도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해서 언급한다(6:43-45). 그리고 예수는 비유로써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를 찍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13:6-9). 요한은 아마도 '나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로 비유된 이스라엘을 연상케 했을 수도 있다(사 5:1-7). (2) 이미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당장에 어떤 급격한 행동이 취해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나무 전체가 찍혀서 곧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Liefeld). 이 구절에서는 상황의 긴박성과 다급함이 강조되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일순간 아차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찍혀 넘어가게 되고 만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구약의 선지자인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의 앞날의 운명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활동했던 시기는 A.D. 30-32년 사이이다. 결국 세례 요한의 경고의 메시지가 있은 지 약 40년 후 A.D. 70년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운명을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경고를 경히 여겼다. 그들은 회개하고 믿기에 적합한 때를 놓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회개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는 커녕 악의 싹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었다.

성 경: [눅3:1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무리가 물어 가로되 -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무리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구원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이 질문을 한 무리는 세례 요한에게 질문한 세 무리중 세리와 군인들을 시시한 나머지 사람들로 짐작된다.

성 경: [눅3:1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옷 두 벌 있는 자는...그렇게 할 것이니라 -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란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좋은 열매'란 작은 사랑의 실천으로부터 나타난다. 본문에서 '옷'을 나타내는 '키톤'(*)은 기다란 겉옷 '히마티온'(*)안에 입는 옷을 가리킨다. 팔레스틴 지방은 일교차가 심해 밤에 기온이 떨어질 때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거나 껴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요한은 이러한 여벌 옷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삶의 결단과 실천으로써 가진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청한다. 또한 음식물에 대한 경우에도 동일한 원칙이 주어졌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주변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정황들을 보고서 그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이미 율법 시대 때부터 가장 중요한 규범 중 하나로 규정되어 왔었다(레 19:18). 그리고 '나눠줄 것이요'를 나타내는 '메타도토'(*)는 '함께 나누다'라는 뜻이며 '복음을 나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올바른 물질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재물은 축적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서도 안 되고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사용되고 남은 몫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용될 때 그 재물은 귀한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마 25:31-46;딤전 6:18;약 2:14-16).

성 경: [눅3:1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세리들 - 세리들은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심지어 '죄인들'이라 지칭되었다. 이들은 로마 정부로부더 관세나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위탁받고 같은 동족인 유대인의 주머니를 털어갔다(막 2:14 주석 참조). 그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로마에서 요구하는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를 징수하였고 그 일을 위해 직접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 세리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금 관계등의 일로 그들의 압제자인 로마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마 11:19) 요한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여주었다. 세례 요한은 세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해 정죄하는 입장에 서는 대신, 기존 상황을 직시하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되 다만 가능한 한 최선의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성 경: [눅3:1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정한 세...말라 - 요한은 사회 제도 자체를 전복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사회적 폐단은 개인의 탐욕스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세리들은 그들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리들이 그들의 직업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요한의 요구는 그들이 지위를 남용하거나 개인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해서 지나친 과세(課稅)를 하지 말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현대에 있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법대로 시행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레 19:35, 36;잠 11:1).

성 경: [눅3:1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회개 세례의 선포]

⭕ 군병들도...족한 줄로 알라 - 본문에서 '군인'을 나타내는 헬라어 '스트라튜오메노이'(*)는 아마도 로마 군인이 아니라 국내 정세를 담당하는 유대의 군인들을 언급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 군인들은 업무상 특정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소지가 많았다. 예컨대, 그들은 세리들의 징세 업무를 도와 수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포'(强暴)를 나타내는 '디아세이오'(*)는 '맹렬히 흔들다', '협박하다', '강탈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또 '무소'(誣訴)를 가리키는 '쉬코판테오'(*)는 '억압하다', '착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이들은 강압적 수단으로 백성들에게 돈을 강탈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웠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군인들이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군인들은 월급이 매우 적어 생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따라서 그들의 부정은 갈수록 심화되었다고 한다. 한편 원어상 '우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이스'(*)는 강조 어구로서 군인들의 심한 도덕적 갈급함을 암시해 주고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역시 요구되는 바는 정의롭고 공평한 회개의 열매이다. 이와같이 요한이 각 집단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어떠한 직업에 종사하든지 선을 위해 일을 해야지 악을 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로 세 무리의 질문에 대한 요한의 대답은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사랑은 각자가 처한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맺혀져야 할 회개의 열매들인 것이다.

성 경: [눅3:1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요한을...의논하니 -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메시야가 곧 도래하리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 가운데에 메시야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선포되자 그들의 메시야 대망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조되는 메시야 대망의 분위기 속에서 세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말씀 선포에는 그만큼 능력과 확신이 있었으며 그의 세례는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유다 지파 출신도 아니었으며 또 아무런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사 11:1;29:18,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어 백성들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게 만들었다. 요 1:19-25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눅3:1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나는 물로...세례를 주거니와 - 요 1:20 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님을 스스로 강하게 부인하는 내용이 나오는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사역과 메시야의 사역을 비교함으로써 메시야의 탁월성을 밝히 드러내 보인다. 고대 세계에서 물은 흔히 정결케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물은 정화(淨化) 의식, 예를 들면 제의적으로 정결함을 인정하는 의식에 사용되었다. 이 의식에서는 가능한한 흐르는 물이 사용되었다. 한편 정화 의식 외에도 물은 때로는 특별한 형태의 의식의 집행 과정에서 신성한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적인 예식이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을 상징하였다고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전까지의 예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3:1-20, 주제 강해 '세례 요한의 세례' 참조).

⭕ 신들메를 풀기도 - 근동과 그리이스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맨발로 다니거나 샌달을 신고 다녔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예배나 애곡, 금식 등을 할 때는 보통 샌달을 벗었다. 이때 노예들은 주인들의 샌달을 묶거나 풀어주며 또 필요하지 않을 때는 샌달을 집으로 가져갔다. 이렇듯 주인이나 주인의 방문객들의 신발을 풀고 묶어주며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가장 낮은 노예의 의무였다. 요한처럼 이렇게 능력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 발에 신기운 하찮은 신발끈조차 풀어드릴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면 도대체 예수는 얼마나 위대한 분이란말인가?

⭕ 성령과 불로 - 성령 세례와 불 세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문을 보면 헬라어 전치사 '엔'(*, '...안에' 혹은 '...로써')이 '성령'과 '불'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세례 요한의 이 예언이 바로 욜 2:28의 성취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1:5)을 뜻함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한다. 성령이나 불과 같은 사역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화(purification) 작업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사 40:3;겔 36:25-27;욜 2:28, 29) 성령은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불은 심판과 새롭게 함(refinement)이나 정죄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문에서도 성령과 불은 이러한 복합적 의미로 쓰인 듯하다. 또한 그렇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성경에서 성령은 분명히 메시야와 관련되어 언급되었다(사 11:1, 2). 메시야께서 오시면 그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이었다. '불세례'에 대해서는 행 1:4, 5의 주제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자.

성 경: [눅3:1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손에 키를 들고...불에 태우시리라 - 성령과 불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요한은 농사 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든다. 농부들은 키를 가지고 곡식의 열매를 키질한다. 그러면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구별되어진다. 무거운 것(알곡)은 키에 남게 되어 타작 마당에 쌓이게 되고 가벼운 것(쭉정이)은 모아져 불살라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와 불신자를 이렇게 구분하실 것이다. 즉 그가 재림하실 때 타작 마당을 정(淨)하게 하듯이 심판의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말은 영원한 심판과 멸망을 가리킨다(욥 20:26;사 34:9, 10;66:24;마 5:22;13:42, 50;막 9:43-48). 그리고 이러한 추수와 타작이 심판과 관련되어 묘사된 예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는 바이다(시 1:4;잠 26장;사 41:15;렘 15:7;계 14:14-20). 요한의 이 경고는 매우 엄중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심판이란 자신들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이방인들에게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왜곡된 특권 의식을 지적하고는 회개를 통하여 타작 마당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경고한다. 이와같은 요한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시는 날에 성취될 것이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서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시고 악인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던지실 것이다(벧후 3:7).

성 경: [눅3:1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 요한의 메시지는 신랄한 경고와 책망이었음과 아울러 '좋은 소식'이었다. 타작 마당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명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엥겔리제토'(*)는 사복음서에서 줄곧 '복음을 전파하다'는 내용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통한 절대적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자신의 사역을 마감하게 된다.

성 경: [눅3:1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분봉왕 헤롯은...책망을 받고 - 여기 헤롯은 1절에서 등장한 헤롯 안디바스(Herod Antipas)이다. 요한은 백성에게는 '권하여' 말씀을 전하였지만 헤롯에게는 '책망'을 했다. 요한의 책망은 헤롯의 무분별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헤롯은 A.D. 26년경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버리고 그의 조카이자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것은 유대적 전통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悖倫)이었다(레 18:16;20:21). 또한 헤롯의 난잡한 생활과 악행은 유대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요한의 헤롯에 대한 공공연한 책망은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과 요한의 직선적인 공격은 헤롯의 권력 구조에 위기감을 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에 대한 반감 분위기의 진원지(震源地)라고 생각한 세례 요한을 체포하게 된다. 이로써 헤롯의 악행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성 경: [눅3:2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 한 가지 악을 더하여...옥에 가두니라 - '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티데미'(*)는 '더하다', '첨가하다'등의 뜻 외에도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행동을 하다', '계속해서 하다'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고 더욱 큰 죄악으로 빠져들어갔던 헤롯의 타락된 심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세례 요한의 활동이 백성들 가운데서 계속되는 한 자신의 행동에 여러가지 제약이 따를 것이고 나아가 자신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헤롯은 악한 권력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탄압으로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에는 헤로디아의 농간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게됨으로써 헤롯 정권의 윤리적, 도덕적 상황은 참담할 지경에 이른다. 누가는 본서에서 요한을 체포한 죄를 헤롯이 저지른 악행 중에서 가장 악한 죄였다고 기록하였다. 그것은 헤롯이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에게 손을 대어 그의 복음 전파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불의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한편 요한의 죽음에 관해서는 9:7-9과 막 6:17-29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성 경: [눅3:2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받으신 예수]

⭕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예수는 12살때 예루살렘에 와서 랍비들과 변론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성장 기간을 보내셨으며(2:52) 그후 착실히 성장하여 마침내 공생에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이 물러가고 예수께서 나타나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인은 아니다(히 4:15). 따라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은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이어서가 아니다. 다만 예수는 자신이 구원할 사람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 3:15에서 예수는 자신이 세례를 받으므로 '모든 의(義)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며 세례를 받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백성들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활동이 절정에 달한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세례가 요한의 사역의 정점에 위치하였다는 뜻이다.

⭕ 기도하실...열리며 - 누가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기도를 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첫번째 기도 모습이다(6:12;9:18, 29;22:41). 예수는 일생 동안 기도의 삶을 사셨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기도는 하늘을 열리게 한다. 마가의 경우는 누가보다 하늘이 열렸다는 사건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술한다(막 1:10).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제 곧 계시나 말씀을 주시려고 한다는 상황적 암시를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의 기간을 깨시고 다시금 그의 능력과 권위를 행사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이는 예수께서 본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며(요 3:13)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암시한다.

성 경: [눅3:2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세례받으신 예수]

⭕ 성령이...비둘기 같이 -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출 24:10, 11;33:11;신 5:4).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강림했다고 전한다. 누가는 성령이 임할 때 오직 예수만이 그것을 의식했고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식의 별다른 보도를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마도 그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성령 강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비둘기 같은 형체가 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비둘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학자간에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온유하고 평화스런 속성을 나타낸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한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습과 그 의미를 도표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령의 모습 의미

신자의 삶에서 죄를 소멸시키며 성결케 불

하는 능력(사 6:1-7;행 2:3)

깊이 감추어져 있으나 강력하며 중생케하는 바람

힘(요3:8)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평화스런 속성(막1:10) 비둘기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채우시는 물

힘(요 7:37-39)

신자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셔서 완전하게 인침

영원한 교호(交互)를 약속하심(엡 1:13)

사역을 위해 부여되는 능력(행 10:38) 기름

한편 이러한 성령 임재는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리라 하신 약속(사 42:1)과 성령이 그 새로이 생겨난 가지에 임할 것이란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기도 하다(사 11:2). 또한 예수가 하늘나라의 일을 위하여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시작하기 이전의 준비 절차로 왕, 제사장, 선지자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너는...기뻐하노라 - 하늘로부터의 음성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직접적으로 공표하신 말씀이다. '사랑하는'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페토스'(*)는 '사랑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아듸'이나 '딸'을 붙여 사용할 때는 '외아들', '외동딸'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아가페토스'는 예수가 유일한 아들, 즉 독생자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한편 이 구절은 변화산에서 들려진 음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을 포함하고 있다(사 4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천사들(욥 1:6;2:1)과 이스라엘 국가와 이스라엘의 왕들(출 4:22;삼하 7:14;호 11:1)에 적용시켰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 말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서 잉태될 것이라는 천사의 수태고지(受胎告知)에서도(1:32) 예수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사랑하는...기뻐하노라'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의 유일무이하고도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요컨대, 예수께서 받으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동 사역이라 할 수 있었다. 즉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간의 구원을 향한 공생애를 시작하고, 성령도 성자가 그 일을 감당하도록 협동하여 힘을 공급해 주시며, 성부도 그 일을 시작한 아들에게 하늘을 열고 땅을 향해 기쁨과 승인의 음성을 발하였던 것이다.

성 경: [눅3:2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예수께서...삼십 세쯤 되시니라 - 예수의 나이가 기록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이다. 누가가 공생애 시작 당시 예수의 나이를 '30세 쯤'으로 밝힌 것은, 30세라 하는 나이가 제사장들이 그들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하는 시기(민 4:3)인 점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해 마침내 예수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실 시점에 이르신 것이다(히 5:10). 즉, 예수는 스스로는 전적으로 무죄(無罪)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죄악의 장벽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여실(히 10:20) 시점에 이른 것이다. 한편 그리고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고(창 41:46) 다윗도 30세에 왕위에 올랐다(삼하 5:4). 또한 산헤드린의 회원 자격도 30세가 되어야만 주어졌다. 따라서 누가는 이러한 여러 배경을 감안하여 예수의 나이를 밝혔을 것이다. 예수는 한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연륜을 감안해볼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신앙적으로도 사역을 하기에 충분한 시기에 이르러셨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항상 자신의 '때'를 잘 알았다(요 7:6).

⭕ 헬리 - 학자들에 따라 요셉의 의붓 아버지이거나 마리아의 아버지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 경: [눅3:2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맛닷 - 이는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또 나타나고 '맛다다'(31절)와 '맛다디아'(25, 26절)라는 이름과 비슷하다.

⭕ 레위 - 이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 하나 히브리어 '레위'(*)의 뜻을 따라 일반적으로 '점착(粘着)하다', '연합하다'등의 뜻을 담고 있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 멜기 - 이 이름은 아마도 '말기야'( ,말키야, '나의 왕은 야웨이시다')의 축소형인 것 같다(G.Kuhn). 이 이름은 2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 안나 - 이 이름의 뜻은 '조롱하다'이다. 이 이름은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성 경: [눅3:2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맛다디 - '여호와의 선물'이라는 뜻이며 26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 아모스 - 이 이름의 인물은 성경 상에서 이사야의 아버지로(왕하 19:2) 혹은 선지자(암 1:1)로서 나타난다. 이 이름은 '짐지는 자' 또는 '강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 나훔 - 예수의 조상으로서 그리고 선지자로서 성경에서 언급된다. '위로하고 돕는 자'라는 뜻이다.

⭕ 에슬리 -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를 가까이 함'이라는 뜻이다.

⭕ 낙개 - 대상 3:7에 나오는 '노가'(*)와 비슷하다. '빛나다'라는 의미이다.

성 경: [눅3:2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마앗(*) - '끊는 것'을 뜻한다. 대하 29:12;31:13에서 나오는 마핫과 비교된다.

⭕ 서머인 - 히브리어로 '시므이'(출 6:17등)가 된다. '몰약성'이라는 뜻이다.

⭕ 요섹 -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인물인 듯한데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 요다 - 바벨론 포로기 때의 인물이다.

성 경: [눅3:2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요아난 -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이다. 요하난이란 이름은 (1) 유다 왕 요시야의 장남(대상 3:15) (2) 다윗의 여덟번 째 용사(대상 12:8-12) (3)느헤미야 당시 도비야의 아들(느 6:14)등에게도 붙여진 바 있다.

⭕ 레사 - '황태자'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원래 스룹바벨의 칭호로 소개된 말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스룹바벨이 유대의 지도자로 바벨론에서 포로들을 인솔해 유대 땅으로 귀환하자 백성들은 그를 유대 왕의 계승자로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황태자'라는 칭호가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스룹바벨'과 '스알디엘'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도 나타난다(마 1:12). 스룹바벨이 스알디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뒷받침된다(스 3:2;학 1:1).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이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앞서 설명되었듯이 수혼(嫂婚) 관계에서 해결될 수 있다. 대상 3:17, 18를 보면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여고냐의 아들로서 서로가 형제지간이었다. 따라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의 법적 아버지이며 브다야는 그의 원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대상 3:17에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본문은 그의 아버지를 네리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 역시 수혼 제도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즉 여고냐가 아들이 없이 죽자(렘 22:30) 네리의 친아들이 여고냐의 법적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Machen, Plummer).

성 경: [눅3:2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멜기 - 스룹바벨의 증조부로서 '왕'이란 뜻이다.

⭕ 앗디 - 스룹바벨의 5대조이며 그 이름은 '붙들다'라는 뜻이다.

⭕ 고삼 - '나누다'라는 의미이다.

⭕ 엘마담 - 창 10:26의 '알모닷'이라는 이름과 비교된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광대'라는 의미이다.

⭕ 에르 - 이 이름의 인물은 구약성경에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가나안 여인에게서 난 유다의 장자이며(민 26:19) 다른 하나는 겔라의 자손이다(대상 4:21).

성 경: [눅3:29]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예수(*, Jesus) - 구약의 '여호수아'(수 1:1)와 같은 이름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으로 '여호와의 구원' 혹은 '구세주'라는 뜻이다(마 1:21).

⭕ 엘리에서 - 이 이름은 '엘리에셀'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이는 창 15:2;출 18:4에 나타난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는 뜻이다.

⭕ 요림 - '여호와의 칭찬'을 뜻한다.

성 경: [눅3:30]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유다 - 역시 이스라엘에서는 보편적인 이름이다. 본문의 인물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사람이다.

⭕ 요남 - 다윗 이래 약 200년 후의 인물로 추정된다.

⭕ 엘리아김 - 왕하 18:18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이름이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성 경: [눅3:31]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멜레아 - 이 이름은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이름의 주인공은 다윗의 고손(高孫)이며 이름의 뜻은 '충만'이다.

⭕ 멘나 - 이 이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는 다윗의 증손이며, 이름의 뜻은 '큰 고통'이다.

⭕ 나단 - 다윗의 셋째 아들로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다(삼하 5:14;대상 3:5;14:4). 이 이름은 '양심' 또는 '주는 자'라는 뜻이다.

⭕ 다윗 -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이며 이새의 막내 아들이다. 이스라엘의 세 임금이며 지혜와 용맹과 많은 시편의 저작들로 유명하다(삼상 16장-왕상 2장). 이름의 뜻은 '사랑함'이다.

성 경: [눅3:32]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이새 - 다윗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에 나오는 족보와 거의 같다. 이새는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으로 다윗왕의 아버지이다(삼상 17:12). 사 11:1은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 오벳 - 보아스와 룻의 아들이다(룻 4:17, 21, 22;마 1:5).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룻 1:4) 다윗과 예수를 잇는 가계(家系)의 한 역할을 담당했다.

⭕ 보아스 - 룻의 남편이며 살몬의 아들이다. 그는 또한 베들레헴의 큰 부호였다. 보아스는 룻이 모압땅에서 시모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을 때 그녀를 다방면에서 돕고 그녀의 효성에 탄복하며 그녀와 결혼하게 되기까지 이른다(룻기)

⭕ 살몬 - '그늘'이란 뜻. 가나안 땅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의 남편이다(마 1:5 비교).

⭕ 나손 - '점쟁이'란 뜻. 보아스의 조부이다(룻 4:20). 마 1:4과 비교.

성 경: [눅3:33]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아미나답 - 유대 헤스론 계통인 '람'의 아들이다(룻 4:19;대상 2:10). 그리고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부친이기도 하다(출 6:23).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친척은 고귀하시다'이다.

⭕ 아니 - '높은 땅'이란 뜻. 룻 4:19과 대상 2:9에 히브리 이름 '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 헤스론 - '닫힌'이란 뜻. 유다의 손자로 창 46:12;민 26:21;룻 4:18;대상 2:5;마 1:3 등에서 언급된다.

⭕ 베레스 - '파괴'란 뜻. 유다와 유다의 며느리 다말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형이다(창 38:24-30;46:12). 베레스에게서 두 종족이 생겼다(민 26:20, 21;대상 2:4, 5).

⭕ 유다 - '찬송'이란 뜻.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의 소생이다(창 29:35;마 1:2). 그는 밧단아람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며느리 다말을 통하여 쌍동이 베레스와 세라 두 아들을 얻었다.

성 경: [눅3:34]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야곱 - '발 뒤꿈치를 잡다'란 뜻.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태어난 쌍동이의 동생이다(창 25: 21-26). 그는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사고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 대한 축복을 가로챘다. 야곱은 하단의 외삼촌댁 라반의 집으로 피하여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고, 그 두 부인과 부인들의 하녀 빌하와 실바를 통하여 12아들을 얻었으며 이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12 지파가 형성되었다(창 29장). 야곱은 애굽 근교 고센 땅에서 살다가 14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 이삭 - '웃음'이란 뜻.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낳은 아들이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태어났으며 그때 그의 아버지가 100세, 어머니는 90세였다(창 17:17;21:2, 3, 5). 이삭은 어렸을 때 아브라함에 의하여 하나님께대한 믿음의 증거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창 22:1-18).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 리브가와 결혼하며 쌍동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는 노후에 기럇아르바 마므레에서 살다가 180세에 죽었다(창 35:27, 28).

⭕ 아브라함 - '열국의 아버지'란 뜻.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며 나홀과 하란의 형이다.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으며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이 살던 땅과 집을 버리고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떠났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시로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100세에 얻었다. 그의 신실한 삶은 성경에서 믿음의 표상(表象)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창 25:1-9).

⭕ 데라 - '표백'이란 뜻.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이다. 그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하며(수 24:2), 갈대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단으로 이사가서 205세에 죽었다(창 11:24-32).

⭕ 나홀 - 아브라함의 조부이다.

성 경: [눅3:35]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스룩 -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며(창 11:20-23;대상 1:26) 이 이름은 '활'이라는 뜻이다.

⭕ 르우 - '친구'란 뜻. 셈의 6대손이다(창 11:19).

⭕ 벨렉 - 셈의 자손 에벧의 아들이다(창 10:25-29;11:16). '나뉘다'는 뜻의 이름은 그가 태어날 즈음 세상 사람들이 나뉘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정확히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 정화 운동 혹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다고 짐작하는 견해가 있다.

⭕ 헤버 - '과거'라는 뜻. '헤벧' 또는 '에벧'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그는 노아의 6대손이다.

⭕ 살라 - '보내다'는 뜻. 노아의 고손이며 창 10:24;11:13;대상 1:18, 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다.

성 경: [눅3:36]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가이난 - '철공'이란 뜻. 셈의 손자이나 창 10장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 아박삿 -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을 가리킨다(창 10:22, 24;대상 1:17, 18), 그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출생했으며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후 403년을 더 살다가 438세에 사망했다(창 11:10-13).

⭕ 셈 - 노아가 500세에 낳은 아들로 3형제 중 맏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피해 아내와같이 방주에 들어가 구원을 받았다(창 7:7;벧전 3:20). 또한 그는 술 취한 아버지의 실수를 조심성있게 덮어주어 축복을 받기도 했다(창 9:20-27). 또한 그는 셈족의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이름' 또는 '명성'이라는 뜻이다.

⭕ 노아 - 아담의 10대 손이다. 이 이름이 붙여진 연유에 대해 창 5:29은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설명한다. 그는 의인이어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백성들에게 전파하며 그 심판을 피할 방주를 건축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직 그의 가족과 동물 암수 한 쌍씩만이 구원받았다. 노아가 대홍수를 만났을 때가 600세였으며, 그는 홍수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다(창 9:28).

⭕ 레멕 - 구약성경에 '라멕'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는 182세에 아들 노아를 낳았다. 그는 노아를 낳은 후 595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고 777세에 사망했다(창 5:25, 28-31;대상 1:3).

성 경: [눅3:37]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므두셀라 - 셋의 후손 에녹의 아들이다(창 5:21-27). 그는 969세까지 산 것으로 기록되 성경상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은 '대확장' 또는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에녹 - 아담의 7대 손이며 야렛이 162세에 낳은 아들이다. 그는 65세에 인류 역사상 최장수자(最長壽者) 므두셀라를 낳으며 그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365세를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으므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전한다(창 5:18-24;히 11:5;유 1:14). 그의 이름은 '교수' 또는 '시작하는 자'라는 뜻이다.

⭕ 야렛 - 에녹의 부친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이다(창 5:15-20;대상 1:2). 그는 므두셀라 다음가는 자로(962세) 알려져 있다.

⭕ 마할랄렐 - 아담의 5대손이며 셋 계통의 한 조상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뜻이다.

성 경: [눅3:38]

주제1: [세례 요한과 인자]

주제2: [예수의 족보]

⭕ 에노스 - 아담의 손자이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으며 905세를 향수했다. 가인의 시대가 폭행으로 표현된 반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현되었다.

⭕ 셋 - 아담의 셋째 아들로 맏아들 가인이 죽인 둘째 아들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창 4:25).그는 아담이 130세 때 태어났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912세에 죽었다(창 5:3-8). 그의 이름은 '대신 주다'라는 뜻이다.

⭕ 아담 -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류 최초의 인간이다. 그는 타락하기 전까지 하나님이 그의 갈비뼈로 만드신 아내 하와와 낙원 에덴 동산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을 잃어버리고 노동의 수고로움과 해산의 고통을 맛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아담은 막내 '셋'을 130세에 낳고 그후 800년을 더 살다가 930세에 죽었다. 그의 이름은 '사람' 또는 '붉다'라는 뜻이다.

⭕ 하나님 - 하나님을 아담의 아버지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직접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제시된 족보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담의 아들로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점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불순종한 첫째 아담과 대조하여 비록 암시적인 주제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하나님께 순종했던 둘째 아담으로 묘사해 준다(고전 15:47). 이와같이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고 있다.

성 경: [눅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예수께서...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이 구절은 3:22에 연결된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연결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준다.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wander)했던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모세가 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40일간 있었던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신 9:9).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호 11:1)로 비유한다면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집단적 개념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또는 단일적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예수를 광야로 인도했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셨으나 여기서는 사단이 그의 아들을 시험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았을 때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은 수많은 시험 가운데서 거의 매번 시험에 져 엄청난 죄악들을 범했지만 예수는 광야에서의 몇차례의 시험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내내 많은 시험들을 당하셨지만 그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출생, 똑같은 유년기, 똑같은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다(히 4:15). 바로 이런 흠없고 순전(純全)한 어린 양 같은 예수께서 온갖 시험을 이기시면서 우리 인류의 죄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한편 누가가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구절에서도 그 사실이 명확해진다. 3:22에서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시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식적(公式的)으로 모습을 드러내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언급했다. 여기서 우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세례식 이후에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그 인도하심에 따라 활동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 역시 이 가운데 성령의 개입하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에게 있어 행동 동기였고, 그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폭발적 복음운동의 주요 동인(動因)이었다(행 2:4;10:44;13:4).

성 경: [눅4:2]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에게(*, 디아볼루) - '마귀' 또는 '사단'을 나타내는 이 단어는 '비방자', '고자질장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70인역(LXX)은 비난자나 적이나 유혹자로서 마귀를 지칭하는데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대상 21:1;슥 3:1). 한편 이와 유사한 내용의 단어로 '사타나스'(*, '대적자' *, '적')를 들수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사탄(*)에서 유래하였다(삼상29:4). 이 두 단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반면에 바울은 대개 '사타나스'를 사용하며 평행구절인 막 1:13도 '사타나스'를 사용하고 있다. 사단이 세상의 왕이요 신이다(6절;고후 4:4). 그러한 존재로서 사단은 하나님의 것인 영광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사단의 통치 아래 있게 되며(마 6:13;막 3:27;요 6:70;8:44;행 13:10;26:18;골 1:13) 그들이 하는 일은 '디아볼로스'의 일이다(요일 3:8). 결국 사단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갈라놓는 것이며 사단의 궁극적 무기는 사망이다(히 2:14).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왕국이 마귀의 왕국을 멸망시키게 되고 결국 사단은 하늘로부터 쫓겨나게되며(10:18;요 12:31;계 12:9) 그 결과 사단은 더이상 비방자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共同體)를 상대로 계속된다(고전 7:5;엡 4:27).

⭕ 시험 - 우리는 여기서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역성경은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고 모두 '시험'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사단은 사람들을 '시험'(temptation)한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시험을 하시지도 않으며 그 자신이 그런 방법에 의해서 시험을 받으시지도 않는다(약 1:13). 게다가 모든 시험(temptation)이 직접 사단으로부터 온다고 말할수도 없다. 왜냐하면 가끔 시험은 우리 자신의 그릇된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약1:14, 15). (2) 사람들은 하나님께 신앙과 어긋나는 그릇된 요구들을 하므로 하나님을 시험(test)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가 신 6:16을 인용한 의도도 아마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12절). (3)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백성들을 시험(trial)하신다(신 8:2). 이스라엘 사람들과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 가운데는 위의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遵行) 여부'를 보시려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다(출 16:4). 한편 사단의 시험에 마주쳤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3:22)고 하신 말씀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즉, 예수는 구약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이겨내셨던 것이다.

⭕ 주리신지라 - 본 구절이 보도하는 바는 예수께서 금식을 하는 40일 동안 전혀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다거나 또는 배고픔에 대해 전혀 자유했었다(Shurmann)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계속 주리신 가운데 극도의 배고픈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마귀가 유혹을 해왔다는 것이다. 즉 마귀는 예수의 배고픔이 극에 달한 것을 알고는 그 배고픔을 더욱 자극하여 먹는 것으로 예수를 유혹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 경: [눅4:3]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떡덩이가 되게 하라 - 여기서 사단이 떡덩이를 언급한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신 것을 연상시킨다(출 16:31).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던 것과 같은 이적을 베풀어 주리라 기대했었다(요 6:30). 결국 사단이 예수에게 이와 같은 시험을 했던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는 어떤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촉구의 목적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객관적 증거를 보려는 것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부추기는테 있었다. 즉, 이 사단의 간악한 시험 배후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사이를 와해(瓦解)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멸망시키고 예수가 수행할 메시야적 사명을 방해하려는 사악하고도 교활한 간계가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애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이겨내는데, 사단의 유혹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그 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해 준다(I.H. Marshall).

성 경: [눅4:4]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예수께서...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신 8:3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를 40년 동안 유랑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며 그들을 시험하사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것이다(신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그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준수함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신 8:3).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동안에 예수는 줄곧 신실했다. 예수께서 보여준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했을때 그들이 행동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답변한 내용은 예수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두철미 순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가 시험받을 때 모범이 되는 것이다(히 4: 14-16;5:80. 한편 극도의 굶주림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하심을 갖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는 떡부스러기 하나를 취하시는 것조차도 인류 구속을 위해 거부하시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셨다(22:19;요 6:48-51). 따라서 우리는 시험 당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 수 있다.

성 경: [눅4:5]

주제1: [인장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천하 민국을 보이며 - 이 두번째 시험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세상 권세에 대한 정치적 시험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다른 두 시험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여기서 누가는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라고 기록해 어디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평행구절인 마 4:8은 '산'이라고 기록하여, 모세가 느보산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신 34:1-3). 그러나 혹자(I. H. Marshall)는 '산'이라는 표현이 상징적(象徵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나 육신의 몸을 입고 계신 예수께서 모든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 일이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수께서는 실지로 시험을 받기 위해서 모든 세상을 구석구석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를 이끌고 올라간 곳이 산이든 아니든 천하 만국을 보기위해서 설정된 장소였다는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성 경: [눅4: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이 모든 권세와...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 이후 이 세상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사단은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 소유권, 양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그러한 권한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조만간 모든 '권세와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며, 또한 온전한 공의와 사랑으로써 모든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는 예수께 세상 전체를 소유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귀의 주장에 대해서 예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시며 그렇다고 마귀의 주장을 인정하시지도않는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궁극적 지배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사단의 뜻에 의해 좌지우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는 행위인 우상 숭배를 조건부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시험은 성도들의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냐 신앙적 진리냐 혹은 사단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만국의 권세를 초개처럼 버리시는 예수의 단호한 결단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마 6:24).

성 경: [눅4: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 마귀가 요구하는 절은 단순한 인사형식이 아니라 '완전한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들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가 마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들의 구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2) 성경은 메시야가 먼저 고난을 받고 그 다음에야 '영광에 들어간다'(24:26)고 가르친다. (3) 마귀는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이 시험은 예수가 왕국을 즉시에 받으므로 십자가를 피하게 하여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挫折)시키려는 것이었다.

성 경: [눅4: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주 너의 하나님...그를 섬기라 -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방법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예수는 사단을 대적함에 있어 신 6:13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한 마지막 아담(고전 15:45), 곧 완전한 인간으로서 마귀를 대적했다. 즉 예수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고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듯 예수가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마귀를 대적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무기였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려는 그리스도와(요 5:30;6:38) 항상 그 뜻을 대적케 하려는 사단의(창 3:1)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 경: [눅4: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뛰어내리라 - 마귀는 세번째 시험을 위해서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런데 마태는 이 시험을 두번째로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마 4:5-7).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성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험이 의도하는 바는 예수의 자기 과시욕을 부추켜 그러한 저급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꼭대기'라는 말의 헬라어 '프테뤼기온'(*)은 '날개'라는 뜻의 '프테류스'(*)에서 온말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세푸스(Jos, Antiq. 15, P. 411)에 의하면 이는 성전 바깥뜰 남쪽에 있는 주광을 뜻한다고 한다. (2)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성전문 위로 가로지르는 인방(lintel)이라고 한다. (3) 게르하드슨(B. Gerhardson, Testing Gods son, P. 54)에 따르면 시 91:4(LXX은 제 90편)의 '프테뤼가스'(날개들)와 본문 9절의 '프테뤼기온'(꼭대기) 사이에는 일종의 언어 유희가 있다고 하며 이를 일종의 성전을 보호해 주는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 이중 어떠한 견해를 취해본 구절을 이해하든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결국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끌고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랍비 문헌에 보면 메시야가 성전의 꼭대기에 나타날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비록 랍비문헌에는 뛰어내린다는 언급은 없지만 마귀는 그러한 배경에서 이 시험을 예수께 제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성 경: [눅4:1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하나님이...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 이 시험에서 마귀는 성경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이 구약성경들을 잘못되게 인용한다(시 91:11, 12).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어떤 성경구절들을 인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을 막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귀는 시 91:11, 12을 인용하면서 고의적으로 '네 모든 길에'라는 구절을 빼버렸다. 게다가 여기에 인용된 시편은 택한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것이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섭리를 방해하는 일이나 충동적으로 위험에 뛰어드는 일을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엄히 징계하신다고 가르쳤지만(신 6:16;18:20;사 45:9) 마귀는 이런 진리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성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순수한 신앙을 변색시키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게 만들고 거짓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왜곡시킨다(마 22:29;고후 2:17). 사실 세계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는 허다한 이단들은 성경을 그들의 경전으로 내세우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이 성경 말씀을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세우고 은폐시키려는 목적에서 아전 인수(我田 引水)격으로 짜맞춘다는데 있는 것이다.

성 경: [눅4:1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 예수의 대답은 다시 성경의 인용으로 주어진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맛사에서 물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출17:1-7)를 배경으로 하는 신 6:16을 인용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마귀의 시험에 응한다면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나님께 그릇된 표적을 구하는 셈이 되어 하나님을 격분(激忿)케 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여기에서도 마귀는 하나님과 예수와의 신실한 관계를 공격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사단의 시험에 대한 결론적 말씀이라 할 수 있는 본절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의를 보여준다.

성 경: [눅4:1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예수의 시험 받으심]

⭕ 마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4:1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 성령의 권능으로...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 저자 누가는 철저하리 만큼 성령에 대해서 강조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한 사실(3:21, 22)과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일(1절) 등에서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부각(浮刻) 시킨다. 그런데 이 곳에서도 누가는 재차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 새로운 사역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었음을 재삼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으로 본서(10:21)와 사도행전(행 1:8;10:38) 등에서 자주 나타난다. 우리는 1장에서 4장까지 오면서 예수의 잉태에서 사역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개입했던 성령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능력이 성령의 권능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나 그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보였던 몇몇 반응들(22, 28, 32, 36, 42절) 중에서 우선 예수에 대한 소식이 퍼져 나갔다는 것을 언급한다. 한편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가신 이유를 그가 요한의 투옥 사실을 들으셨기때문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12;막 1:14).

성 경: [눅4:1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도의 시작]

⭕ 가르치시매...칭송을 받으시더라 -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 내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쳤고 그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칭송했다고만 전할 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칭송을 받은 이유는 그의 가르침에 생동력, 권위, 논리 정연함, 실제적 적용, 흥미, 진리 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31, 32절;마 7:28, 29).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몰려온 무리들의 칭송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찾아왔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그들의 선입견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은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거나 심지어 적대적 행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본장에도 기록되어 있다(28, 29절). 한편 '가르치는' 것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 골격을 이루며(마 4:23;9:35;11:1), 그 가르침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자신에 관한 계시(마 6:32, 33;요 14:6)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17:20, 21;마 21:31) 등으로 요약된다. 복음서에는 병자 치유등을 위시한 예수의 놀라운 이적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적들도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메시야의 여러 교훈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에 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눅4:1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예수께서...자기 규례(規例)대로 - '그가 자라나신 곳'은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 있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표현이다. 예수가 회당을 방문한 것은 예수의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이다. 누가는 예수가 '자기 규례대로' 곧 '전에 하던대로' 회당에 참석했음을 시사함으로써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을 강조한다. 이와같은 누가의 강조는 예수께서 이처럼 유대인의 경건 생활을 준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철저하게 배척당했다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있다.

⭕ 회당에 들어가사 - 유대에서는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고 13세가 되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유대인 율법생활의 일부분이다. 유대인들의 회당의식은 성경에 나타난 바 없지만 유대 전통에 따르게 되면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개인 기도를 한다. 그 다음 '쉐마'(*, 신 6:4-9;11:13-21)를 고백하고 열 여덟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소위 18기도문을 낭송한다. 그후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게 되는데 보통 모세오경이 중심된 고정된 성구집(lectionary)의 구절을 읽는다. 성경은 몇사람이 교대로 읽는데 아람어로 돌아가면서 읽는 경우도 있다. 성경 낭독 후 기도를하고 설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할 만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하게 된다(행 13:15). 한편 성경을 낭독할 사람은 선정(選定)되었는데 본문에서 예수께서 자진해서 성경을 낭독하였는지 아니면 그전에 비공식적인 요청이 있었는지는 언급이 없다(W.Schrage, TDNT VII, 798-841).

⭕ 성경을 읽으려고 - 예수의 가르침은 성경으로 시작되어 성경으로 끝난다. 이는 그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참 메시야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예수는 구약 말씀, 특히 율법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거부감을 나타내신 적이 없다. 다만 예수는 율법의 자귀 자체에 얽메이지 않고 그 율법 규례들 속에 함축된 정신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로 요구되는 생명력있는 교훈을 베푸신 것이다.

성 경: [눅4:1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찾으시니 - 저자 누가는 예수 자신이 사 61장을 선택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 구절들이 그 날 안식일에 읽혀지도록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드리거늘'(*, 에피디도미)이란 말을 예수가 특정한 책을 요구하고 그 책을 사람들이 넘겨주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찾으시니'에 해당하는 '휴렌'(*)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뜻보다는 예수의 의도적 발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성 경: [눅4:1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자유케 하고 - 예수께서 낭독하신 사 61:1, 2의 말씀은 예수의 두가지 사역 곧 선지자적 사역과 메시야적 사역을 증거하고 있다. 먼저 예수는 신 18:15, 18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the prophet)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이심을 증거한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곧 메시야로서(단 9:24) 영적으로 눈멀고 포로된 자들을 죄악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기 위해오신 분임을 증거한다(6:20, 21;7:18-23). 본문의 '임하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리세'(*)는 '기름붓다', '기름바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께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제사장(출 28:41), 선지자(왕상 19:16), 왕(삼상 10:1)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듯이 예수께서도 기름부음 받으신 분으로서 이러한 직분을 모두 수행하실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사야 예언의 주인공이신 예수께서는 (1) 성령을 받은 자이며 (2) 복음의 선포자이며 (3)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이신 것이다. 한편 '가난한 자'란 순수한 은혜와 자비만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소유케 하실 것을 가리킨다(마 5:3). 그리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일차적으로 유대 백성이 바빌론에서 귀환(歸還)할 것을 가리켰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께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해방시킬 것을 의미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다시보게'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란 표현은 죄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근심과 걱정에 얽매이며 고통받는 자에게 예수께서 영혼의 평안과 자유를 주실 것을 가리킨다.

성 경: [눅4:1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 '주의 은혜의 해'는 레 25:8-55에 나타난는 '희년'(year of iubilee) 곧 여호와께서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을 쉬게 하고 모든 거민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정하신 해방의 해를 뜻한다. 나아가 이 해방의 해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은혜로 죄와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사(歷史)의 시기를 가리킨다. 바로 이와 같은 시기는 메시야가 선도할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예수께서 이사야의 이 놀라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그가 당신의 사명을 똑똑히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인용 부분인 본문을 누가는 결국 예수의 사역에 대한 표제적(標題的)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선지자이며 메시야로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회의 소외자들, 가난한 자들 및 이방인들을 포함한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하실 것이다.

성 경: [눅4:2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책을 덮어...주목하여 보더라 - 읽기를 마치신 예수는 성경 두루마리를 말아서 그것을 '맡은 자'에게 건네주셨다. 여기서 '맡은 자'(attendant)는 헬라어로 '휘페레테스'(*)인데 흔히 '섬기는 자', '배 젓는 자'를 말한다. 이 '맡은 자'의 직책은 매우 다양한데, 이들은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회당을 청소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성일을 선언하는 은나팔을 불며 주중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친다. 이들이 관리하는 성경 두루마리는 보통 함이나 궤에 보관된다. 한편 낭독자가 성경 두루마리를 '맡은 자'에게 넘겨주고 나면 낭독자는 자리에 앉게 된다. 랍비적 전통에 따르면 앉는 것은 가르침의 시작이다. 낭독자는 그 자리에 앉아 낭독한 구절에 관한 교훈적 강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수의 강론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호의로 시작해서 결국은 적대감으로 끝이나고 만다.

성 경: [눅4:2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오늘날 - '오늘날'을 나타내는 헬라어 '세메론'(*)은 다분히 긴박감을 띤 표현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에 해당하는 '하루'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허용된 일정기간'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이 '오늘날'은 다음의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도 말했듯이 사 61:1, 2의 예언이 성취된 그날 곧 이사야의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야가 오셔서 회당 사람들이 그 메시야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있는 그 날로 볼 수 있으며 둘째, 그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과 동시대인들이 맞게 되는 시대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셋째,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접하는 모든 시대 곧 시시각각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시대를 뜻한다고 볼 수있다. 결국 오늘날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생생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날인 바 지나간 과거가 아닌 오늘 완성되는 '주의 은혜의 해'(19절)를 뜻하는 것이다. 실로 '오늘'이야말로 구원받을 날이요 하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날인 것이다.

성 경: [눅4:2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그를 증거하고..요셉의 이들이 아니냐 - '증거하고'에 해당하는 '에마르튀룬'(*)은 '칭찬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speak well of, NIV). 따라서 우리는 회당에서 말씀을 들은 청중들이 예수의 강론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예수의 '은혜로운 말'에 대한 청중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후로도 예수가 말씀을 증거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20:26). 청중들이 기이하게 여긴 것은 예수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서 나온 것이아니라 '은혜로운 말씀'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 청중들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부분에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본문은 청중들이 왜 적대적이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같은 동네 나사렛에서 목수 요셉의 아들로 자라 이토록 엄청난 주장을 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에게서 너무도 당돌한 느낌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간다. 즉 사람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면, 즉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염두에 둘 뿐 그가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은 믿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를 기이히 여기며 칭찬하던 분위기가 쑥덕공론과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돌변하여 급격하고도 과격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성 경: [눅4:2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의원아 너를 고치라 - 본래 이는 '남을 돕는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의미의 속담으로서 의사인 누가에게는 친숙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속담은 예수께서 메시야되심을 입증하기 위해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행하신 이적들을 여기 나사렛에서도 행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시험기 깃든 요청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회당에서 그의 강론을 들은 나사렛사람들이 나타낼 반응을 미리 간파하고 계신 셈이다. 예수는 그의 사역 기간중 계속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요구들을 받곤 했다(11:16, 29).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적을 행하시지는 않는다.

성 경: [눅4:2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 , 아멘 레고 휘민) - 이 말은 엄숙한 단언을 내리고자 할 때 사용된것으로 누가복음에서 여섯 차례 사용되었다(12:37;18:17등). '진실로'에 해당하는 '아멘'('A )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각개인과 공동체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1) 하나님의 뜻에따라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다(왕상 1:36) (2) 하나님의 위협이나 저주가 내림을 확증하다(민 5:22) (3) 송영에 답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참여하다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1) '아멘'은 예배시의 환호로서 적극적 응답을 의미하며(계 5:14) (2) 기도와 송영에서(갈 1:5;엡 3:21;딤전 1:17) 아멘은 그 기도와 송영의 내용에 대한 온전한 공감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처럼 예수가 아멘을 자기 자신의 말씀 앞에 둘 때, 그 목적은 그 말씀의 진정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 선지자가 고향에서...없느니라 - 이 속담 자체는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는 오히려 냉대받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왜냐하면 대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인해 타인의 탁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며 자신의 평범한 수준으로 타인을 격하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속담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만, 나아가 한층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한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의 민족에게 배척당한 선지자들의 계보(系譜)에 속한다는 것이다.

성 경: [눅4:2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본 구절은 '...위에'를 나타내는 '에피'(*)의 축소형 '에피'와 '진리'를 나타내는 '알레데이아'로 서두가 구성되어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근거 위에서 말하노니'라고 다시 번역할수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구약상의 두 가지 실례가 나사렛 사람들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확증해준다. 나사렛 사람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서 잘 알고있고 또 그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오직 이방인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푼 일이 자신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Lenski).

성 경: [눅4:2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엘리야가...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 왕상 17:8-24에 나타난 내용이다. 3년 6개월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을 때 온땅에 흉년이 들어 그 상황은 매우 참담했었다. 더욱이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웠던 과부들의 생활상은 매우 극심해 그들 중 대부분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을 남겨두고 베니게의 큰 도시 시돈에있는 작은 마을 사렙다에 사는 이방인 과부를 찾아가 그 집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엘리야가 단독적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룬 일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편 사렙다의 과부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해주신 경우와 유사하다(막 7:26-30).

성 경: [눅4:2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엘리사 때에...수리아 사람 나아만뿐 - 왕하 5:14의 내용이다. 엘리사의 경우도 엘리야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른 많은 문둥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수리아의 장수 나아만만이 깨끗함을 얻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라고 예수는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구속사의 새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즉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하여서 진실되게 '예수께로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마 8:11;요 6:37).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당시 배타적 선민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일대 충격이고 도전이었다. 이 이방인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로 말미암아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미 4:1, 2;슥 8:20-23). 한편 나아만 장군의 치유사건은 예수께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경우와 유사하다(7:1-10).

성 경: [눅4:2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회당에...분이 가득하여 - 예수의 말씀이 선민 의식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언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회당은 일시에 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길 간구해야 할 청중들은 냉소적이고 불신에 찬 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목적인 증오와 분노의 태도로 돌변한다.

성 경: [눅4:2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 분노가 극에 달하면 살의(殺意)를 띠게 된다. 처음엔 호의적인 태도로 말씀을 듣던 청중들이 어느새 폭도가 되었다. 이는 예수를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외치던 군중들이 종국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적대 무리로 돌변하는 장면과 대비해 보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사렛은 갈릴리 구릉의 남쪽 경사면의 낭떠러지 위에 위치하였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이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뜨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배척과 살해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예수가 민족 반역죄를 범한 것으로 몰아 유태 전통상 반역자를 처단하는 형벌 제도인(대하 25:12) 벼랑에서 아래로 사람을 밀쳐 죽이는 형벌을 집행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후에 십자가의 형장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잃은 무리가 자신을 마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묵묵히 허락하셨다.

성 경: [눅4:3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심]

⭕ 예수께서...지나서 가시니라 - 아직은 예수께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가 아니었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므로 그 상황에서 예수가 어떤 기적적인 탈출을 시도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저자 누가는 단지 무리가운데로 걸어서 지나 가셨다고 전한다. '가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포류에토'(*)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길로 계속 가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던간에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난관에 봉착(逢着)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를 보게 된다. 또한 선교활동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혀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후에 지속적으로 봉착하게 될 어려움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시리라는 예측도 가능케 한다. 아울러 사역 초기에 당한 어려움을 통해 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가도 감지하게 된다. 한편 나사렛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예수는 가버나움으로 행로를 잡는다. 이에 대해 플루머(Plummer)는 예수가 이후 다시는 나사렛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 경: [눅4:3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 -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 갈릴리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께서 광범위한 사역을 수행하신 곳이다(마 8:5, 14;요 6:55-59).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격하고서도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가버나움에는 장차 화가 임할 것이 예언되기도 했다(마 11:23).

⭕ 내려오사 - 이 표현은 갈릴리 바다가 지중해의 수면보다 약 200m 정도가 낮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나사렛에서 해변의 평지에 이르는 길이 내리받이 경사였음을 보여준다.

⭕ 가르치시매(*, 엔 디다스콘) - 본 구절의 원문 표현은 완곡한 미완료 시제로서 그 뜻이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가 된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 참석하여 가르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음을 암시한다(33, 38절;막 1:21). 한편 우리는 31-41절에서 예수의 사역이 하루종일 쉴틈없이 진행되었음알 수 있다. 예수는 오전에 회당에 들어가서 권세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베푸시고 귀신을 축출하셨으며, 오후에는 시몬의 집을 방문하여 그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다. 그리고 해가 진 이후로부터 밤 늦도록까지는 몰려든 수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치유하시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성 경: [눅4:3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권세가 있음이러라 - 마가복음 평행절(막 1:21, 22)은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전한다. 랍비 정도도 못되는 사람이 독특한 권위로써 가르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의 랍비들은 그들의 선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인용함으로써 자신들의 가르침을 누적된 전승(tradition)의 기초 위에 세웠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 가르침 자체에 독자적인 권능이 담겨 있었다. 이렇듯 예수의 말씀 전파는 그의 생애 전체를 통하여 항상 권세와 능력을 수반하고 있다(36절).

성 경: [눅4:3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더러운 귀신들린 - 귀신 '들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는 '가지다', '소유하다', '잡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귀신들린 상태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간혹 목격되는 바이다. 이 상태는 '전혀 이질적인 타인격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지배하는 상태'라고 정의내려질 수 있다. 따라서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되는 것이아니라 다만 그 귀신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게됨을 의미한다. 귀신이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은혼인 것처럼 나타날 때가 있지만 이는 속임수에 불과한다. 인간의 영혼이 귀신의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은 비성경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한편 귀신들린 자의 상황은 완전히 미친 상태, 병걸린상태, 혹은 귀신을 빙자한 주술적 능력을 지닌상태 등이다. 귀신은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은 인간보다 영적 능력이 더 우월한 상태로서 인간을 괴롭힐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써 귀신을 추방하고 정복할 능력과 특권을 지니고 있다(약 4:7). 그런데 축사 신학에서 주의할 사항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귀신이 축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4:3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아(*, 에아) - 이는 놀라움이나 두려움, 분노 등을 표현하는 감탄사이며 본 문장에서는 악마적인 무서운 비명을 나타낸다.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수사적 용구인 본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이까', '왜 방해하시나이까' 등의 의미이다. 즉 예수의 출현으로 인해 귀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되자 그 긴장과 불안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귀신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존재 거점의 근거를 잃어버려 두려움에 떨게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권위 아래 사단의 어두운 지배와 군림이 사라지는 곳이다. 따라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는 사단이 떨며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여러 가지 것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귀신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은 예수의 신성을 인식한 것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은 마 8:29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막 5:7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말은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과도 대조를 이룬다.

성 경: [눅4:35]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 예수께서는 귀신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을 금하는 예수의 행동 가운데 그 첫번째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함구령을 거듭내리신(마 8:4;막 1:34)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대적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사역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점점 늘어갔으며 더욱이 예수의 교훈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초월한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날이 갈수록 예수께 대한 의혹과 경계의 눈초리를 나타내었다. (2) 호의적인 무리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경계하시기 위함이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거의가 육신상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 중에는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위대한 민족적 영도자(領導者) 곧 정치적 메시야로 여기고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는 자신이 입으로 증거되기 이전에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령한 권능으로 인해 자연히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더욱이 본문의경우 예수는 굳이 더러운 귀신의 입을 빌어 당신의 신분을 중거케하기를 원치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 넘어뜨리고...상하지 아니한지라 - 예수의 행동은 소위 전문적인 '악령 추방'(exorcism)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다른 이의 권위를 끌어들이지 않은데서 알 수 있다. 대신 예수는 단 한마디 명령하는 말씀으로써 귀신을 내어 쫓았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이 얼마나 권세있는 것인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시는 등(8:49-56) 인간의 어떤 불가능도 가능케 하신 것이다.

성 경: [눅4:36]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다 놀라 -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말씀과 권세와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다. 귀신을 축출하는 이례적인 사건을 통한 예수의 신적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에게서 범접(犯接) 할 수 없는 권위를 보게 된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는 귀신을 달래거나 위로하는 주문과 주술적 행위를 통하여 일시적 또는 거짓으로 악령추방이 행해지기도 했지만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환자를 잠시 잠들게 하는 것 뿐으로 오히려 또다른 귀신의 힘을 비는 경우도 있어 귀신들린 사람으로 하여금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문이나 주술적 행위가 아닌 일방적인 명령을 귀신에게 던졌다. 그것은 하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은 불가항력적인 명령이었다.

성 경: [눅4:37]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귀신들린 자를 고치심]

⭕ 소문이...퍼지니라(*, 여세포류에토 에코스) - '퍼지니라'를 나타내는 '여세포류에토'는 원형 '여포류오마이(*)의 미완료 중간태로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소문'을 나타내는 '에코스'에서 영어의 '메아리'를 나타내는 '에코'(echo)가 파생되었다. '에코스'는 해변가의 파도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던 단어이다. 즉, 예수의 소문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퍼져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예수의 권능과 말씀을 가버나움 회당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은 가는 곳곳마다 이 경험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성 경: [눅4:38]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시몬의 장모 - 저자 누가는 이전까지 베드로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본서를 기록하다가 본 구절에서 갑자기 아무런 소개없이 베드로를 언급한다. 그것은 누가가 본 복음서를 기록할 시기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였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통해 베드로의 이름이 온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갑자기 그의 이름을 언급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같다. 한편 본 구절과 고전 9:5은 베드로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의 이름은 컨콜디아(Concordia)나, 또는 펄페튜아(Perpetua)였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녀가 베드로보다 일찍이 순교당하였다고 전한다.

⭕ 중한 열병 - 문자적 의미로는 '높은 열병'(high fever)이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는 열병의 정도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의학적 관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누가가 전문 의사였음을 확증해준다.

⭕ 붙들린지라(*, 쉬네코메네) - 이 동사는 헬라 의학 저술에서 흔히 사용이되는 동사로 의학 전문 용어이며 '어려움을 겪다', '억눌리다'는 뜻인 '쉬네코'(*)의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서 열병이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마 시몬의 장모는 만성병(慢性病)에 시달린 듯하며 당시에는 매우 중태였던 것 같다. 베드로의 장모의 중병이 그 가정에 위기를 가져왔지만, 그 위기 상황은 또한 예수가 그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성 경: [눅4:39]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 원문상으로는 예수께서 환자의 머리 곁에 서서 허리를 굽혀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주술적 행위나 무당의 무속적 행위에 의해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학적 판단에 의거한 정확한 진단과 완전하고도 즉각적인 치료를 하신다.

⭕ 열병을 꾸짖으신대 - 본 구절을 두고서 혹자는 이 열병의 배후에는 악한 귀신이 자리한 것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홍해를 꾸짖으셨다고 해서(욥 26:11;시 106:9) 하늘과 홍해 뒤에 귀신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열병을 꾸짖었다'는 표현은 열병을 내모는 행위 자체를 더욱 생생히 부각시키기 위해 열병을 의인화시키거나 아니면 누가가 예수의 말에 힘이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있다.

⭕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 만성 질병이었던 열병은 사람을 탈진(脫盡)시키고 매우 심약하게 만드나 환자는 치료 즉시 일어나 시중을 든다. 이는 예수의 치유 권능이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효력을 나타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가 예수 일행을 위해 수종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의무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눅4:40]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해질 적에 -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들이 예수께 몰려든 것은 안식일 때문이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 행위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환자를 운반하는 일이나 치료 행위를 행하는 것 역시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안식일에 발이 묶여 환자들은 예수께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이다(창 2 :2, 3;출 34:21).

⭕ 손을 얹으사 - 원래 안수란 첫째, 제사드리는자가 희생당할 동물에게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전가시키거나(출 20:15, 19) 둘째, 신성모독자를 돌로 칠 때 신성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더러워진 인격, 죄악등을 전가시키거나(레 24:14) 셋째, 병을 고치는 역사를 행할 때 예수님 혹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들에게 전가시키거나(막 6:5;행28:8) 넷째, 사도들이 사도적인 권위로써 성령이 임하지 않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몸이 되었음을 외형적으로 나타내는(행 8:18, 19) 등의 이유에서 사용되었다. 결국 안수란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전가시킨다는 의미가있다. 이중 본문에서는 세번째의 의미로 사용된바 이러한 예는 예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도들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안수하심으로 병을 고치신 행위는 어떤 마술적인 요법이 아니라 단지 그분의 능력이 그 환자에게 전가됨을 외형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환자들에게 손을 얹은 것은 예수가 치유능력의 근원이라는 것과 그가 병자들 개개인에게 자상하신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눅4:41]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더러운 귀신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신앙고백적 차원이 아니며 다만 예수 앞에서 그들의 패배와 예수의 권능을 인정하는 말로 이해된다. 한편 간악한 귀신들조차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리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은 서로 역설적(逆說的)인 대조를 이룬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사람들, 심지어 불신자들이나 귀신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서들이 확고히 하고자 하는 사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지해 주는 폭넓은 증거 구실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4:42]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한적한 곳에 가시니 - 평행 구절 막 1:35에서는 예수께서 아직 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전한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시는 모습은 단순히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장면이지만 여기에 예수의 사역의 비결이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여겨 보지않았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정작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해야 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22:39-46). 예수는 언제나 기도를 하며 자신의 사역을 준비하고 하나님과의 다함없는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성 경: [눅4:43]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하나님의 나라 - 이는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8:1;9:2).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죄인들을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골 1:13).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왕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오해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예수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라.

⭕ 전하여야 하리니 - '...해야 한다'(*, 데이)는 말은 예수 사역의 필연성과 긴박성을 강조하기 위해 누차 사용되었다(2:49;13:33;24:7, 26, 44).

성 경: [눅4:44]

주제1: [인자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들을 고치심]

⭕ 갈릴리(*, 테스유다이아스) - 본 구절은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서 각각 '갈릴리'나 또는 '유대'로 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유대'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NIV 난외(欄外)에서는 '유대인들의 땅'(the land of the Jews)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전달해 주려는 것 같다. 즉 '땅'(land)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고향인 팔레스틴 전부를 의미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다. 누가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유대'(Judea)라는 말을 사용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광의(廣義)에서 '유대'라는 말을 쓰면 그 속에서 갈릴리가 자연스럽게 포함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예수의 이 첫번째 전도 여행 기간은 대략 4, 5개월 정도로 추측된다. 또한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200개 정도나 있었고 전체 인구수는 3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 경: [눅5: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게네사렛 호숫가 - 갈릴리 바다의 별칭이다. 이 외에도 이 바다는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 또는 '긴네롯 바다'(수 11:2)로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긴네렛 호수', '디베랴 바다'(요 21:1)로 불리웠다. 이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Km, 동서의 폭이 12Km이고 면적이 144Km에 달한다. 요단강 수원으로부터 흘러 호수를 거쳐 흘러 내려온 맑은 물과 갈릴리 바다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로 이루어진 이 바다에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이 번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을에워싸고 있는 계곡들은 비옥한 충적토(沖積土)로 덮여 있으며 날씨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하여 밀, 보리, 무화과, 포도, 야채 등의 농작물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이 바다는 하아프 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주변에는 높은 산들이 둘러 서 있으므로 바다 한복판에서 이따금씩 돌풍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8:22-25;막 주제 강해 4:35-41, '갈릴리 호수 조감도' 참조). 또한 이 바다는 예수 사역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이 이곳이며 오병이어(五餠二漁)의 이적을 행하신 곳도 이곳 해변가이다. 한편 예수께서 말씀하고 있는 동안에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에워쌌다. 군중에 둘러싸인 가운데서 예수의 말씀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또 군중들은 예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자 자연히 소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리와 함께 서있던 예수는 말씀을 가르치는데에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성 경: [눅5: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호숫가에 두 배 - 예수께서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기로 하셨다. 호숫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는 것을 보아 그 두 척의 배는 고기잡이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배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배를 사용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면 그 두 배가 모두 빈배였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가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소득없이 돌아왔다는 결론이 선다.

성 경: [눅5: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호숫가는 단구(段丘)로 둘러싸인 평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썩 훌륭한 강론(講論)의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시몬의 배에 올라 시몬에게 청하여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진 다음 배를 설교 연단으로 삼아 무리를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함으로 1절에서보다 말씀은 훨씬 더 효과적으로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한편 누가는 이 배가 시몬의 배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결국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만 한 사람은 다름아닌 전문 어부 시몬이었다.

성 경: [눅5: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깊은 데로...고기를 잡으라 -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다. 반면 예수는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의 예수께서 무슨 연유에서인가 전문 어부인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다.

성 경: [눅5: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말씀에 의지하여 - 예수의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해본 어부라면 누구나가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으로 여러 가지 면에서 불합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1) 예수는 고기잡이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는 목수였다. (2) 고기잡는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3) 그물을 내리는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신다. (4) 시몬은 고기를 잡기 위해 지난 밤을 새운 까닭에 몹시도 지쳐 있었고 게다가 깨끗하게 씻어 놓은 그물을 다시 내려 간밤의 헛수고를 다시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불합리한점을 모두 알고 있는 시몬은 전문 어부답게 예수의 가당찮은 명령을 조목 조목 지적하며 반박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말씀을 의지하여 그 명령에 순종한다. 시몬의 어부로서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은 예수 앞에서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은 정말 하찮은 것이었다. 그런 경험과 지식등이 한끼니의 양식을 해결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나 죄와 구원의 문제는 결코 해결해 주지못한다. 사실 복잡한 삶의 정황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체득한 경험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노 하우(konw-how)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경험들과 스스로 설정한 원리나 기준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케 되는 경우가 있다. 성도들의 삶이란 단순한 자연 법칙이나 합리적 상식의 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는 역설적이고 이적적인 차원 또한 강력히 요청된다. 특히 베드로와같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는 끝없이 자기를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의탁하고 순종하는 신앙 훈련을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패,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 경: [눅5: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 순종(obediance)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삼상 15:22).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렇다. 우리에게 그 상황이 불합리하고 불가능해 보이고 나타난 결과가 기적처럼 느껴질지라도 예수에게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수께서는 고기의 있고 없음을 보신것이 아니라 시몬의 심증을 보신 것이다. 결국 기적은 예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일 사람의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곳에 차고 넘치게 주어진다. 한 사람의 순종이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을 미치며 은혜를 끼치게 된다.

성 경: [눅5: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 예수의 지시에 따라 그물을 던져 잡은 고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게 많은 양이였다. 고기는 그 무게와 양에 의하여 그물이 터져 나갈 지경으로 많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시몬은 지난 밤에 함께 고기를 잡다가 헛수고만 한 다른 배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도움을 청했다. 저자 누가는 이러한 상세한 기술을 통하여 이 이야기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부각시킨다. 한편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아 배가 잠길 지경에 이르렀다는 묘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인색하지 않고 풍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6:38;빌 4:19).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시몬이 사람낚는 어부로서 부름을 받은 후에 감당할 사역들을 미리 예시(豫示)해 준다. 후에 그는 예수 부활 승천후 말씀을 증거하고 한번에 3,000명 또는 5,000명의 회개하는 신자들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한다(행 2:41;4:4).

성 경: [눅5: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시몬 베드로 - 지금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만 언급이 되다가 이 구절에 와서야 '베드로'라는 이름이 나온다. 시몬과 베드로라는 이름이 함께 결합되어 사용되는 경우는 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나타난다. 여기서 누가가 의도적으로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 덧붙여 기록한 것은 중대한 상황의 변화를 예시하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삶에 중대한 전환기(轉換器)를 맞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라 하는 이름은 그가 예수를 만난 후에 예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것이다(마 16:18;요 1:42).

⭕ 무릎 아래 엎드려 -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거나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으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때때로 수치로 여겨지기도 하고 비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여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무릎 아래 엎드리는것은 그 사람의 삶의 자존심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종종 삶의 내용이나 삶의 질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 그것은 포로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됨이나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므로 무릎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신의 자아와 자존심 그리고 모든 삶을 상대방 앞에서 포기하는 것이된다. 그러나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본래 자아와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된다. 그것은 당연한 회귀(回歸)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삶을 찾는 것이고 본래의 우리의 형상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이나 자아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본래의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현재 우리의 삶의 질그릇에 담긴 것을 쏟아 내고 하늘로부터의 것을 담아야만 한다. 대단한 역설(paradox)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 주여 - 베드로는 5절에서 '선생이여'라고 부르던 호칭을 바꾸어 이제는 '주여'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호칭은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말이다. 70인역에서 '퀴리오스'(*, '주')는 하나님과 동의어로서 빈번히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한 선생이란 표현보다 훨씬 더 깊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가 이순간에 예수를 신적 존재로 감지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로서의 권능과 권위를 수반한 예수의 탁월성을 감지했음이 분명하다.

⭕ 죄인(*, 하마르톨로스) - '죄인'을 나타내는 이 용어는 누가에게 있어서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들 중 하나이다(7:37;15:7;19:7등). 누가에 의해서 경멸적이 아니라 동정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공공연한 죄와 용납하기 어려운 직업 및 생활 방식 또는 이교도라는 신분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집단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누가는 이런 죄인들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탁월하신 신적 권능을 목격하고서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한 자신의 죄성마저 돌아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1)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이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연의 정체를 깨달아야 마땅하며(사 6:5) (2) 그 같은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성 경: [눅5: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놀라고(*, 담보스) - 놀라움을 나타내는 헬라어 '담보스'는 두려움이 섞인 놀라움을 뜻하며 신의 임재에 대한 외경심을 내포한 말이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시몬과 그의 동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궁극적으로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으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눅5:1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동업자(*, 코이노노이) - 이는 '공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7절에 나타난 '동무'라는 단어와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준다. 특히 '교제'를 나타내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친교' 뿐만 아니라 공동 협력을 통한 상호 봉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 무서워 말라 - 이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난 다음에 흔히 등장하는 어휘(1:13, 30;2:10)로서 베드로가 신현현(神顯現) 장면과도 같은 상황에 압도당해 있음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단어가 용서의 선포의 기능을 가진다고 한다. 베드로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에 대해 예수는 '무서워 말라'며 그의 죄인됨을 용서하신다.

⭕ 취하리라 - 이는 궁극적으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한 말이다. 70인역(Septuagin)에서는 이 말이 '위험에서 생명을 건져낸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본 구절에 의미를 더욱 명확히 한다. 특히 누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널리 퍼져 모든 인류에게 이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이는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교회로 받아들이라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예시(豫示)하는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행 10:9-48).

성 경: [눅5:1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제자들을 부르심]

⭕ 저희가...좇으니라 - '저희'는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말한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10절에서 이미 이야기되었듯이 하나의 일에 있어서 공동 협력을 행하는 '코이노노스'(*)의 삶의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의 삶은 예수 공동체의 삶이다. 이들의 결단과 헌신은 예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과 결단이 무분별한 희생이나 복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물론 복음 사역자로서의 특별한 헌신을 뜻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적용해 볼 때 모든 사회적 책임까지도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갖자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가장 첫자리에 놓자는 이야기다.

성 경: [눅5:1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 - 구약에서 문둥병은 오늘날 정확한 의학 용어로 '한센씨병'(Hansens Disease)이라 불리는 질병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인 피부병을 모두 포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레 13:1-59). 문둥병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에 문둥병자들은 육체적, 사회적 및 심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레위기 13장에는 피부병의 일곱 가지 증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문둥병자들은 의식상(儀式上) 부정하였므로 타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다' 소리쳐야 했고, 동리 밖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다. 랍비들은 문둥병자가 치유받는 일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다. 만일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희생 제물을 바친 후 정상적인 사회로 복귀되었다(레 14:1-32). 한편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a man came along who was covered with leprosy, NIV)이라는 누가의 표현은 의사로서 병의 특성과 범위에 대하여 세심히 관찰하여 기록했음을 보여준다.

⭕ 원하시면 - 이 문둥병자 역시 문둥병의 불치성(不治性)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더럽고 부정한 문둥병을 치료하실 의사(意思)가 있으실까'하고 다소 의구심을 지녔던 듯하다. 즉 이 문둥병자는 주께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은 믿고 있었으나 병을 고칠 의사가 있는지를 몰라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문둥병자의 의심을 일순간에 종결시키신다.

성 경: [눅5:1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손을 내밀어 - 문둥병자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여 특별히 격리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 것은 의미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후에 예수께서는 관(棺)을 만지기도 하셨는데(7:14) 이것 또한 의식적(儀式的)으로 금지된 행동이었다. 이처럼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손수 만지신 것은 단순한 관심의 차원을 넘어 고통받는 이의 추하고도 뼈아픈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시는 구세주의 크신 긍휼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사회와 겪리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부정한 문둥병자와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인 예수 자신과의 사이에 막혀 있던 장벽을 예수께서 무너뜨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릇된 통념(通念)과 잘못된 전통들을 뒤엎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고 막힌 것을 허시고 끊어진 것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 경: [눅5:1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 예수의 명령은 4:41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공식적으로 선포되기전에 먼저 메시야로서 할 일을 하고 '희생적 고난'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했다. 문둥병자들을 고치는 일은 감옥에서 세례 요한이 상기(想起)받은 바도 있는(7:22) 메시야적 표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이 백성들 사이에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예수의 이러한 기적적 행동들을 보고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내세우는 것을 방지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 제사장에게...보이고 -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가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은 레위기 4장에 규정된 의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문둥병자를 치료한 예수의 메시야적 행동이 '저희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7:21-23의 주석 참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처럼 명약 관화한 메시야적 권능을 보고서도 예수를 영접하기는 커녕 도리어 핍박함으로써, 그 완악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성 경: [눅5:1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 예수의 함구령이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과 함께 사람들이 그 함구령을 위반하는 사례도 자주나타난다. 실로 문둥병은 완쾌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포기하고 스스로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 질병이 치료되었다는 것은 만성고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곧 복음이었다. 한편 누가는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몰려 왔다고 강조한다. 마샬(Marshall)은 이것을 누가가 예수의 선포 활동을 치유 활동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 경: [눅5:1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 한적(閑寂)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 NIV는 이 구절의 문장 속에 '종종'(oft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기도하시러 가는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원문의 '엔 휘포코론'(*, '물러가시고 있었다')도 완곡한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귀찮아서 물러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시기 위해 잠시 물러가셨다가 또 다시 나오셔서 말씀도 가르치시고 병자도 치료하시는 사역을 계속해서 반복하셨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됨으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즉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으며 예수 자신도 그곳에 안주하려 든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매일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수는 그런 위험을 피하여 종종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던 것이다. 하지만 더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고 그 교제 가운데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의 삶의 주 원동력이 있는 것이다.

성 경: [눅5:1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바리새인 - 누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리새'는 '분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파라쉬'( )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분리된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수하고 랍비들이 제정한 전통을 지켰다(막 7:3). 종교나 세속의 영역에서 세부적인 율법 규례들을 제정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와함께 제사장없는 회당에서 바리새인들이 평신도 예배에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성전과 제사장 직제가 없어진 후에도 바리새적인 합리주의가 계속하여 유일한 종교적 교육을 전담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세상의 종말에 있을 부활(행 23:6)과 천사의 존재를 가르쳤고, 부활 후에는 인간이 보상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메시야적 소망, 민족주의, 반로마 제국주의를 고취하였지만 그렇다고 열심당과 뜻을 같이 하지는 않았다. 또한 바리새인과 예수와의 반목은 극에 달했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의 교훈을 무시한데 대하여 그들은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죄사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의 허영과 위선을 질책하셨고, 그들이 율법의 참뜻을 깨닫는데 실패했음을 힐난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에 얽매여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매우 극단적이고 위신적으로 변해버렸다.

⭕ 교법사(敎法師) - 교법사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나 말로 NIV는 '율법 선생들'(teachers of the law)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율법(written tradition과 oral tradition을 포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석학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경 연구와 율법 연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을 '교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일파를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대의 법적 전통의 세부적인 사항들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존경을 받았다. 요 5:16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이미 충돌한 바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예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해 일일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된다.

⭕ 병을 고치는...함께하더라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의 사역에서 치유의 사역으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누가에게 있어서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말씀과 치유의 능력이라는 이 두 요소는 본 기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종종 구약에서 하나님은 영육간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출 15:26;렘 30:17;호 7:1).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도 위대한 치료자로 묘사된 바 있다(말 4:2). 본문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음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바로 그 능력을 지닌 메시아이심을 아울러 증거한다.

성 경: [눅5:1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한 중풍병자 - 중풍병은 뇌일혈로 인하여 반신 또는 팔다리 등 몸의 일부나 전체가 마비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병이 죄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 한 사람의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동원되었다. 환자를 메고 온 저들의 열심과 노력이 결국 환자를 치유케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이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믿음의 세계란 결코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서는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 [눅5:1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지붕에 올라가...달아 내리니 - 팔레스틴의 가옥은 대개가 흙벽돌로 된 단층 슬라브형으로 집 한쪽에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 있었다. 따라서 지붕에서 약간의 일상 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외부인이라 하더라도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 용이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메고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가 흙벽돌로 된 지붕 기와를 벗겨내고 구멍을 내었다. 이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이런 행동을 감행한 것은 먼저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도 컸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병자를 사랑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 경: [눅5:2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저희 믿음을 보시고 - 확신있고 열심있는 믿음은 끝내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는 그 믿음에 확실히 반응하신다. 예수는 행위 보다도 먼저 믿음을 보신 것이다. '저희의 믿음'이라고 했을 때 '저희'란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을 말함이 분명하나 그 가운데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돌보는 다른 자들의 중재(仲裁)에 응답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남의 신앙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자들은 예수께서 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구원은 그와 예수사이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그가 믿음을 가졌다는 이야기는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는 그를 치료하기로 선택했으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긴박한 필요성에서 절실한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을 때 그가 그 명령대로 행한것은 그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이 사람아...받았느니라 - 예수는 여기서 자신이 죄를 사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sins are forgiven, NIV)고 말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겸손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있다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죄가 그의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 당시에는 흔히 병의 원인이 죄라고 여겼는데 예수의 제자들 조차 그러했다(요 9:2). 그러나 본문의 문맥 속에서는 죄와 병을 연결시키는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예수는 육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병자에게 보다 근원적인 질병 곧 죄의 문제에로 관심을 집중토록 유도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부분적인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그 구원은 영적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육적구원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예수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영육간의 전인적(whole personal)인 구원이다. 예수의 치유 또한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이다.

성 경: [눅5:2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참람(僭濫) - 이것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이다.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모독일 수도 있고(계 13:6), 그의 이름, 그의 말씀(딛 2:5), 혹은 천사적 존재(유 1:8-10;벧후 2:10-12)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또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대법은 이렇게 공공연하고 명백하게 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신을 모독하는 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죽이는 벌을 내렸다(H. W. Beyer, TDNT. I. 621-625).

성 경: [눅5:2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무슨 의논을 하느냐 - 예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비상한 통찰력으로 그들의 의논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omniscience)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성 경: [눅5:2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어느 것이 쉽겠느냐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되물어보는 예수의 질문 속에 내포된 전형적인 '가언적 양도논법'(假言的 兩刀論法; hypothetical dilemma)의 뿔에 찔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6:9). 어떤 의미에서 생각하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들이 말하기에는 모두 똑같이 쉽고, 행하기에는 똑같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언급이 표면적으로는 더 쉽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반드시 외적 증거로 나타나지 않아도 되는데 반해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은 외적 증거가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어쨌든 이 물음의 핵심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둘다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서 그 불가능을 가능케 해보이는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에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에 있다.

성 경: [눅5:2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인자(*, 호 휘오스 안드로푸) - 복음서에서는 이 용어가 90여회 나온다. 그 중 본서에만 26회 나올 만큼 인자 개념은 본서의 핵심 사상이다. 요 12:34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신 용어(6:5, 22;11:30;마 8:20;막 14:41;요 3:14)인 '인자'가 원문의 표현상 여자적(如字的) 의미로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라고 칭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1)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관계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곧 그가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신 것을 의미한다. (2) 이는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이상(異象)중에 본 '인자'가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였던 점(단 7:13)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대제사장들의 질문에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신 예수의 대답(막 14:62)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3) 그러나 예수께서 인자로서의 종말론적 영광을 누리기 의하여서는 그 이전에 반드시 이 땅에서의 각종 수난과 죽임을 당하여야만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다(22:42).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정녕 열 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마 26:53) 시도 때도 없이 대적들로부터 당하는 각종 모욕과 수난을 감내해내셨는데(4:29;11:53, 54;20:20;22:63-65;23:11) 여기에 예수께서 자기를 가리켜 '인자'라 칭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본절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 참조).

성 경: [눅5:2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하나님께 영광을...돌아가니 - 중풍병자가 치료받은 것은 예수께서 난언한 말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주어진 '일어나 걸어가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따르는 일은 신앙에 바탕을 둔 순종으로써만 가능하다. 병자가 치료를 받자 그 사람 자신과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난다. 메시아의 사역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였다(2:14).

성 경: [눅5:2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중풍병자를 고치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장면은 본서에 여러번 나타난다(25절;2:20;7:16;13:13; 17:15; 18:43;23:47).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누가의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기이한 일을 보았다 - 원문은 '기이한 일'을 '파라돝사'(*)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기대와는 반대되는', '기대에는 어긋나는'(contrary to expectation)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NIV는 이 부분을 '주목할 만한'(remarkable)이라 번역한다. 영어의 '역설'을 나타내는 paradox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건대 예수 주위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의 기대를 뒤엎고 중풍병자를 그 즉시로 치료하시자 무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던 것이다.

성 경: [눅5:2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세리(*, 텔로넨) -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두세(마 22:15-22)와 토지세, 통행세 등과 같은 각종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감찰관(censor)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서 위탁 형식으로 조세징수권을 유대 고위 인사들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자 유대 고위층들은 이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다시금 조세 징수원을 고용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세리이다. 이들 세리도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곧 세관에 근무하면서 통행세와 같은 간접세를 받는 세리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인두세와 같은 직접세를 징수하는 세리이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이들이 유대를 지배하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이고 (2) 이들이 동족들에게 그것도 가난한 자나 부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똑같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잔액을 자신들이 착복하였기 때문이다.

⭕ 세관 - 가버나움에 있던 로마의 세관이다. 가버나움은 로마 군대가 상주해 있을 정도로(7:1-10;마8:5-8) 중요한 도시였는데 특히 북쪽으로는 수리아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유대와 애굽 지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목에 위치한 탓에 통관세를 징수하는 로마의 세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레위'(마태)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세관원이었다.

⭕ 보시고(*, 에데아사토) - 이 동사는 관찰자가 주의깊게 보는 것, 즉 '눈여겨 보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레위를 주의깊게 살펴보아 그를 특별히 골라 내셨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5:2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버리고...좇으니라 -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의 직접적인 명령에 레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로 그를 따라 나섰다. 레위가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모든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레위의 이런 행동은 후에 상세히 밝혀지게될 제자도(discipleship)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레위의 행동의 두 가지 면, 즉 모든 것을 버리는 소극적인 면과 그를 따르는 적극적인 면을 모두 보여준다(9:23-25).

성 경: [눅5:2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큰 잔치 - 신약성경에서 잔치는 기쁨을 상징하며, 때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베푸실 종말론적인 천국 잔치를 암시하기도 한다(13:29;14:16). 레위가 예수를 모시고 잔치를 배설한 것은 접대와 송별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신들의 옛친구들도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었을 수도 있다.

성 경: [눅5:30]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세리와 죄인 - 29절에서 '다른 사람'이라고 언급된 사람들은 결국 '죄인들'이었다. '죄인들'을 나타내는 '하마르톨로스'(*)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규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막 2:16).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죄인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이는 곧 율법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거룩하며 반면에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방인)은 본래 죄인임을 의미했다. 바리새인들은 또한 그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마 12:1;15:2)을 죄인으로 간주했다(K. H. Rengstorf, TDNT. I, 317-35). 특히 압제자인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의 고혈을 짜는 세리는 죄인중의 죄인이요 극단적 경멸의 더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경스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계명의 본질적인 한 부분을 범하는 행위였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특히 유대교적 신앙과 생활을 고수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러한 헌신의 노력으로 그들은 도덕적, 의례적 순결성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여기서 분리된 사람들은 죄인으로 간주가 되어 반드시 정결 예식을 거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갈릴리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그러한 율법의 조항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 먹고 마시느냐 -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한 것은, 식탁에서의 교제가 그들의 사회에서는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5:31]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건강한 자에게는...쓸데 있나니 - 예수는 속담이나 비유를 만들어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퍼져있던 속담이나 비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셨다. 이 구절에서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대비는 32절의 '의인'과 '죄인'의 대비와 연결된다. 한편 영혼의 의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아픔을 호소하는 모든 병자를 진단하시고 치료하신다. 그러나 의사의 몫까지 자처하여 스스로를 건강한 자로 진단내리고 처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예수의 처방이 적용되어질 수 없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자신의 오진(誤診)으로 인한 죽음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성 경: [눅5:32]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마태를 부르심]

⭕ 죄인을...왔노라 - 예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의인인체하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와 잘못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실상 이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 3:10).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물리치시며 자신의 무가치함과 구원의 필요를 깊이 느끼는 자들에게 구원의 초대를 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구원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진실된 회개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말씀의 요지는 누구든지 회개에의 호소에 진실로 응답하려면 먼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행 구절인 마 9:13과 막 2: 17에는 빠져있는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예수께서 인용한 속담의 신학적 의미를 밝혀준다. 또한 이 '회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도입한다. 그것은 은혜와 용서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은 사실이지만(2:10) 그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3, 14에 나오는 세리는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시켰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8:11, 12). 한편 본 구절의 '회개'라는 주제는 15:7, 10, 22-27, 32에서 '기쁨'이라는 주제와 연결되고 있다.

성 경: [눅5:33]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금식하며 기도하고 - 예수 당시에 금식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다. 원래 유대 민족은 금식을 속죄일(7월 10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다(레 16:29). 이것은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 '영혼을 괴롭게 하다')라 하여 율법으로 엄히 명한 것이었다. 이외에 유대인들은 금식을 국가적 재난이나(삿 20:26), 병들었을 때(시 35:13), 애곡할 때(삼상 31:13), 회개할 때(왕상 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 20:3), 재앙을 기념할 때나 기근때에 실시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바벧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재앙에 대한 애도와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시작했다. 이 금식은 예루살렘 파멸과 관련하여 나흘을 했는데 (1) 성전이 불탄 날(5월 7일 ;왕하 25:8, 9), (2) 그달리야 피살일(7월 2일;왕하 25:23-25), (3) 성전 포위 개시일(10월 10일;왕하 25:1), (4) 성전 함락일(4월 9일;왕하 25:3, 4)등 이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금식일로 지켰고 경건한 사람은 더 자주 금식했다(외경 유딧서 8:6). 그러나 이 금식의 의미는 갈수록 개인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시 행위로 전락하여 외적인 자기 과시와 위선이 많이 개재되어 예수의 질책의 대상이 되었다(마 6:16;9:14). 예수는 강제적이고 의식적인 성격을 띤 자기 과시나 종교적 공적을 쌓는 행위로서의 금식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금지하셨다. 예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 형태로서의 영적 훈련으로 실시하셨던 것이다(마 4:2;6:16-18).

⭕ 바리새인의 제자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7:18;11:1;막 6:29;요 1:35, 37;:25).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당시 대다수의 랍비들처럼 제자들을 두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세푸스와 렝스토르프의 견해처럼 '바리새인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예언자의 아들들'(왕하 9:1, 개역성경에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로 표현)이라는 표현을 '...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먹고 마시나이다 - 예수께 바리새인들이 하나의 질문 형식으로 묻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묻는 것은 교묘한 질문 방식이다. 30절에서 대적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으며 이에 대해 예수는 당신의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 구원에 있노라고 대답하셨다(31절). 이제 여기서는 대적들이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대적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반대 입장에 둠으로써 예수를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려 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금식하는 형식적행위에 연연한 나머지 그러한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금식에 관한 형식적 틀을 초월하셨으며 진정 필요할 시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35절;마 9:15).

성 경: [눅5:34]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신랑이라는 표현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사 54:5, 6;렘 2:2;겔 16장;호 2:16, 19). 이와 관련하여 예수는 자신이 세상에 있는 것을 혼인잔치와 비교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와 교회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비교한다(마 25:1;요 3:29;고후 11:2;엡 5:32;계 19;7;21:9).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다. 이 잔치 마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주고는 잔치집을 떠난다. 이 일주일 동안의 잔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이때 금식일이 닥치어도 금식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금식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실로 금식은 강제적이고 형식적 절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셨다. 그가 함께하여 자비로운 사역을 베풀고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현재는 결혼 잔치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금식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성 경: [눅5:35]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금식의 문제]

⭕ 신랑을...금식할 것이니라 - 예수는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결혼식을 비유로 들어 금식에 관한 자기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신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이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따르면 이는 위경 제4에스라 10:1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내 아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나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하기를 작정하노라"는 내용이다(Jeremias, Theology I, 283). 이러한 사상을 예수께서 염두에 두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이 비유는 분명히 예수가 죽어서 제자들과 이별하게 되어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눅5:36]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비유(譬喩) - 이 단어는 '곁에', '옆에'를 나타내는 '파라'(*)라는 단어와'두다', '놓다'라는 뜻의 '발로'(*)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옆에 두다', '정도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특히 수사학에서는 '유사', '비유'라는 뜻을 나타낸다. 비유는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 생활 중 많이 접하는 친근한 것들을 예로 들어 비교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마솰'(*, '비유')을 번역한 것인데 지혜 문학에서 이 단어는 현명한 말을 나타내며, 생활로부터의 본보기, 신중함과 정중함의 원칙들, 직업적인 충고, 도덕적 훈계들, 종교적인 지도들을 포함한다. 또한 묵시문학에서 비유들은 종말론적 가르침을 주는 방법들이다. 지상의 사건들은 하늘의 사건들을 설명해 준다. 하늘과 미래의 신비들에 대한 환상(심판, 부활, 축복받은 자들의 거처)도 역시 비유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는 물론 많은 비유를 베푸셨는데, 이 비유는 알려지지 않은 것(그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행위) 안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알려진 세계의 분명한 진리를 사용하는 유비법(類比法)이다. 막 4:33, 34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더디기 때문에 비유들을 많이 사용한다고 언급한다.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일, 인간의 운명 등을 취급한다. 랍비들의 비유나 율법을 상술하지만, 예수의 비유들은 대부분이 종말론적(묵시적은 아닐지라도)이다. 대부분의 예수의 비유들은 교훈적인 문맥으로 짜여져 있으나 어떤 것들은 베일 뒤에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도록 청중을 자극한다(막 12:1). 그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빛이요 구원이지만, 응답하지 않는 대중들에게는 어두움이요 심판이다. 그들은 동일한 말을 들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 6:9, 10의 예언 아래 있게된다.

⭕ 새 옷에서...합하지 아니하리라 - 여기서 또다시 새 옷과 낡은 옷이 대비를 이루어 나타나고 37, 38절에 가서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부대가 대비되어 등장한다. 이는 누가의 독특한 기술 방식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의 의미의 선명성 부각에 적절한 효과를 나타낸다. 한편 '새 옷'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낡은 옷'은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서 율법을 오해하여 가르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음을 나타낸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폐단은 복음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 자체를 버리게 됨은 물론이고, 또한 빨면 새 옷 조각이 줄어들어 낡아빠진 헌 옷을 잡아당겨 뜯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마 5:17).

성 경: [눅5:37]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낡은 가죽 부대 -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그 속에 여러 가지 액체를 보관하였다. 이 가죽 부대는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그 가죽을 벗겨낸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하여 목 부분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 기간 손질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팔레스틴은 물론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되던 방법이다. 한편 이 가죽 부대는 오랫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며 그 탄력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강하고 독한 가스가 가죽 부대를 부식시켜 그 부대를 이내 터뜨리고 만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항상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경우 그 부대가 이내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롤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 형식 위주의 율법의 낡은 형태 속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이와 같은 사실을 비유로 사용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이며 기쁨이 없는 금식은 그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5:38]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칙론적으로 유대교의 형식주의적 의식과 종교 체제로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담지 못함을 가르시기 위해서였다. 원어상 (1) 새옷, 새 가죽부대에서의 '새'(*, 카이노스)는 '질(質)과 그 신선함'을 강조하고 (2) 새 포도주에서의 '새'(*, 네오스)는 '시간'을 강조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비유한 본문의 '새 포도주' 를 (2)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옛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추이를 보게 된다. 예수는 옛언약을 온전히 성취시키는 완성자로 오셨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이제 예수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정신과 생활 방식을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따르는 낡고 형식적인 종교 형식으로는 보존될 수 없다.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할 수 있는 것 같이 역동적 생명이신 예수와 그 복음의 수용을 위해선 이미 고착화된 낡은 형식주의적 신앙 형태가 아닌 신선한 새 부대 즉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새로운 신앙 형태가 요구되는 것이다.

성 경: [눅5:39]

주제1: [제자들을 부르시는 인자]

주제2: [의복과 술 부대의 비유]

⭕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 여기서 예수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논지를 뒤집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그의 새로운 교훈이 옛 것만큼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옛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옛 것을 원하고 새 것을 배척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항상 묵은 포도주만 마시던 사람들은 새 포도주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고집하며 새포도주를 무시하며 거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통하여 전해지고 제시되는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느끼지를 못했다.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맛보며 새복음에 참여하려면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옛 종교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을 통해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하여 율법이 계시한 그 메시야가 곧 당신 자신임을 드러내셨으며 자기를 통해 성취될 새 언약으로 돌아오길 촉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눅6: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안식일에(*, 엔 사빠토) - 다른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두번째 중 첫째"(*, 듀테로프로토)라는 단어가 있는데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번째 중 첫째"라는 단어는 고대의 권위있는 대다수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 중 어느 것도 확실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원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은 "두번째 중 첫째 안식일에"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1)7년의 안식년 중 두번째 안식년의 첫번째 안식일(Wieseler), (2)유월절 후 둘째 날 후의 첫 안식일(Lange,Ewald, De Wette), (3)두번째 달의 첫 안식일(Wetstein), (4)오순절의 안식일(유월절 안식일을 첫번째 안식일로 보고, a Lapide).

⭕ 제자들이...비비어 먹으니 -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마 12:1)란 말을 첨가하였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도 분명히 허락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2절).

성 경: [눅6: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나그네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따는 것은 위법(違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삭을 잘라 비비는 것은 추수하고 타작한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규정했다. 당시에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된 사항들을 제외하고도 문자 그대로 수천가지의 명령에 대한 미묘한 조항들을 규정해 놓았다.그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원칙과 형식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를 중요시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성 경: [눅6: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는 문자적인 율법보다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삼상 21:1-6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다윗과 그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에게만 먹도록 허용된 진설병을(레 24:9) 먹었다는 사실은, 율법의 더 중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적 예라 하겠다. 마태는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정곡을 찌르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곧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는 말씀이다(마 12:7).

⭕ 읽지 못하였느냐 -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전하는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유전에만 집착하고 형식으로 치우쳐 허탄한 일만 일삼는데 대해 성경 자체에 기록된 사례를 통해 일침을 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께서 다윗의 예증을 사용하신 것은 다윗이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율법 내용 가운데서 예외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성 경: [눅6: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 '진설병'(showbread)은 히브리어로 '레헴판님'(*)이라 하여 '면전의 떡', '누군가의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을갖고 있다(출 25:30). 이 떡은 모두 열 두 덩이로 성소 안에 있는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상 위에 진설되었다가 제사장이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먹었다(레 24:5-9).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였다(삼상 21:2,3;마 12:4). 또한 이 열 두 덩이의 떡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였으며(레 24:8) 민족의 통일을 상징하였다(왕상 18:31,32;겔 37:16-22). 한편 예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만을 위한 음식으로 율법에서 지정한 진설병을 먹은 사건(삼상21:1-6)을 인용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도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 공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6: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안식일의 주인]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 안식을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준수하셨는가를 분명히 밝혀준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창 1:26) 제 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며(창 2:1-3),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자이기 때문이다(히 4:1-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같은 안식일 제도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신데(출 20:8-11;신 5:12-15)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 (1)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다.(2)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성별시켜 주신데 대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이다(출 31:13). (3)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신 5:15). (4)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출 20:10). 이상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같은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금기조항에만 연연한 나머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선한 규례를 오히려 인간의 행동을 제어(制御)하는 악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으니 그 어리석음과 잘못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되는 외적인 형식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주일 성수는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 경: [눅6: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또 다른 안식일에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준수가 엄격한 형식적 규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신다. 이 구절에서 '다른 안식일'이란 반드시 그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다. 누가가 이 부분에서 의도하는 바는 어느 안식일이냐가 아니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고쳤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 예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인 것 같다. 예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회당이나 성전이나 노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관복음 전체에 걸쳐 입증된다(21:37;마 13:54;막 1:21 등).

⭕ 오른손 마른 사람 - '오른손'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 가운데서 오직 여기 뿐이다. 이는 여러 방향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문가적인 직업 의식에서 나온 결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문 의사로서 환자의 정확한 병명과 정확한 환부(患部)의 상태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진찰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례 수집이라는 차원에서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환자의 마른 손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는 것은 이 환자의 상항이 보다 심각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환자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손으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었다면 일반적인 대부분의 오른손 잡이처럼 오른손의 마비는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환자에게 그간 손이 말라 있었던 기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성 경: [눅6: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서기관과 바리새인 -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는 경건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패배하고 예수의 정곡(正鵠)을 찌르는 지적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던 터라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 엿보니(*, 파레테룬토) - '엿보다'의 미완료형으로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던 것은 송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성경을 보되 그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헐뜯을 근거를 찾기 위해서 말씀과 씨름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와 일맥 상통한다. 이들은 공히 예수나 성경 말씀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방 일변도로 흐르게 마련이다.

성 경: [눅6: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한다(막 3:5). 따라서 '저희 생각'이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관해서 누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실 수 있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 일어나 한 가운데서라 -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무리가 잘 보이는 가운데 일어서라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명령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엿보니'와 대조되는 말로서 완악한 마음을 갖고 송사할 구실을 찾으며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한번 반격하실 예수의 당당한 행동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기 위해 그의 병고치는 이적을 공개적으로 행하셨음을 의미한다.

⭕ 저가 일어나 서거늘 - 손마른 사람은 예수의 말씀에 곧 복종했다. 그는 권위있는 예수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미리 아시고 그들이 치료의 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병고침이 손을 만짐으로써가 아니라 말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리라.

성 경: [눅6: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예수께서...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 등에게 예수는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여기서 '묻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타오'(*)는 '질문하다', '요구하다'는 뜻인 '에로타오'(*)보다 훨씬 강한 표현으로 '심문하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따라서 이말투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편견(偏見)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자 하는 메시야의 권위가 스며있다 하겠다.

⭕ 안식일에...어느것이 옳으냐 - 이 질문은 병든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을 경우에만 안식일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신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해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과감히 실행하려고 하셨다. 특히 우리는 예수의 이 반문에 담긴 예리한 풍자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러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지 않고 '안식일에 선행(혹은 생명 구함)이 옳으냐 아니면 악행(죽임)이 옳으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형식과 위선의 허물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의 비정함을 이미 악행 내지는 살인 행위로 규정하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예리한 질문 속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를 '멸하려고' '악'을 꾀하는 대적들의 음모에 대한 질책이 시사되어 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은 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화를 사용했는데 그 주인은 안식일일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확실히 건져내어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결론지으셨다(마 12:11,12).

성 경: [눅6:1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무리를 둘러 보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리를 둘러 보시는 예수님은 근심하시고 노하신 상태였다(막 3:5).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가하신 후에 그들의 태도를 살피신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意中)을 찌르는 질문을 하셨다. 사실 이 질문은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사람이 답할 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묵묵 부답, 유구 무언이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이든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쪽도 택일할 수없는 난처한 처지에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 예수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는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시며 곡해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쇄신하려고 하신다.

⭕ 네 손을 내밀라 - 이 명령은 사실상 그 손 마른 자가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공관복음 어디에도 그 병자가 믿음을 가졌다거나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예수를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그리하매'는 손 마른 사람의 신앙적 행위를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께서 힘이 없고 마른손을 내밀라고 명하셨고, 그 사람이 손을 내밀었을 때 즉시 그 손이 회복되었다. 세 공관복음서 기자가 모두 '회복되다'는 말인 '아페카테스타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상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병자의 병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방치해 두는 것은 오히려 '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멸하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고 결국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입법자이심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셨다.

성 경: [눅6:1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손 마른 자를 고치심]

⭕ 분기가 가득하여 - '분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는 모든 감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 마태와 마가는 이 구절에 '죽이다'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마 12:14;막 3:6).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처치 하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기자들보다 완화된 어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예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교묘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예수를 모해(謨害)하려고 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 서로 의논하니라 - 마가는 그들이 회당을 나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를 죽일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기술한다(막 3:6). 그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를 모함하고 그를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음모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를 죽일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성 경: [눅6:1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이 때에 - 예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킨다.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음모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이 때'는 예수께서 그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때인지는 알 수 없다.

⭕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 이 구절에서 산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나(Conzelmann)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한다(Farrar). 아무튼 여기서 '산'(*, 토 오로스)에는 관사가 있어서 예수가 늘 오셨던 친숙한 산임을 암시하고 있다.

⭕ 밤이 맞도록 - '디아뉘크테류오'(*)는 '밤을 새다'의 미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로(Vincent)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오지만 70인역 등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의학적 용어로 쓰는 경우에는 밤을 새워 병 간호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의 삶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끝임없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막 1:35).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된다(막 12:40).

성 경: [눅6:1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열 둘을 택하여 - 열 둘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완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예수의 복음 사역의 초기 단계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의미에서 복음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구약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형성 과정상의 12지파가 암시하는 바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택하여'는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요15:16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입증해 준다. 거기서도 예수는 선택의 주체는 분명히 예수인 것을 밝히고 있다.

⭕ 사도(*, 아포스톨로스) - 이는 '아포스텔로'(*, '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사절을 말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 둘을 택하여 다른 무리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사도의 정의와 용법 및 사도직 계승의 문제등에 관해서는 막 3:13-19 주제 강해 '사도직에 대하여'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성 경: [눅6:1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베드로 - 14-16절은 사도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네 곳에 나타난다(마10:2-4;막 3:16-19;행 1:13). 베드로는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께 부름받은 자는 아니라 할지라도(요 1:42)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그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首弟子)였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 주신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이다. 또한 요 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 그 형제 안드레 -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막 1:16-18;요 1:44) 세레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다(마 4:19,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후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2:20-22).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다(요 6:8,9;12:20-22;행 1:13,14). 안드레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이다.

⭕ 야고보와 요한 - 이들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이다. 마가는 이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의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이다.

⭕ 빌립 -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이다. 주를 처음 만난후 친구 나다나엘을 주께 인도했던 자이다(요 1:45,46).

⭕ 바돌로매 -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매'(*)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Herbert Lockyer)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성 경: [눅6:1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마태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그는 '레위'로 소개되는데(5:27-29;막 2:13,14) 그 의미는 '연합하다'이다. 아마 예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인지 자신을 '세리 마태'로 숨김없이 표현한다(마 9:9,10).

⭕ 도마 -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온다(6:14-16;마 10:2-4;막 3:16-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 '쌍동이'라는 뜻이다.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 불리운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언급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10:3;막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 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 셀롯이라 하는 시몬 -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따라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Zealot)을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한 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열심당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행 했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몬은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고 한다(Josephus, Antiq.,18,1,1;6;Wars,2,8,1).

성 경: [눅6:1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12제자를 세우심]

⭕ 야고보의 아들 유다 -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른다. RSV에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이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 졌다(요 6:71;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치한 유다에 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이 없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예수를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게 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넘겼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다(출 21:32).

성 경: [눅6:1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 '저희'는 이미 택하신 열 두 사도들뿐 아니라 그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까지 지칭한다.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예수께서 계속해서 산에만 계실 수 없었다. 이제 택한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서 죄악에 빠진 영혼들을 구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셔야 했다.

⭕ 평지에 서시니 - 여기 언급된 '평지'는 마 5:1의 '산 위'(mountainside)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평지'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 토푸 페디누'(*)는 반드시 저지(低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를 뜻하기도 한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마태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 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해결될 수있다.

⭕ 유대 사방과...많은 백성도 있더라 -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5:1)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성들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평지에 멈추어서 가르치실 때 그 주위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택하신 열 두 사도들, 그들 보다 좀 많은 제자들의 무리, 그리고 일반 군중들이었다. 백성들이 허다하게 몰려든 목적은 예수의 권능있는 말씀을 듣고 또 그의 치유 능력을 보고자 함이었다. 한편 여기서 각 지방의 이름은 곧 팔레스틴 지역을 뜻한다. 앞 페이지의 지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치유 사역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 각처에서도 행해졌다. 여기서 '유대 지방'이라함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남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동북쪽으로 베니게에 속한 항구 도시이며 이방 지역이다. 따라서 팔레스틴 남.북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사방 각처에서 예수의 말씀과 병고침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요단강 건너 지방까지 언급함으로써 팔레스틴 전지역을 서술적 형태로 표현해 의미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성 경: [눅6:1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더러운 귀신에게...고침을 얻은지라 - 누가는 귀신들린 자들과 단지 육체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자들을 구별한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더러운 귀신에게'가 '고난받는'과 연결될 수 있고 둘째는 '고침을 얻은지라'와도 연결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고치다'(*, 데라퓨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서술적인 반복의 뜻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 에데라퓨온토)로 쓰였다. 본절과 19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이적적 권능(power)과 고침(healing)에 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 기사는 평지 수훈 직전에 위치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권위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성 경: [눅6:1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예수의 치료하시는 능력]

⭕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 예수의 치유 능력이 알려지게 되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기만이라도 하려고 모여들었다. 병자들은 예수의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에게 감히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지 못했다. 예수를 만짐으로 병을 고치는 기사는 8:43-46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예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예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를 통해 병이 나을수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만진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의 주권적인 은혜를 시사한다.

성 경: [눅6:2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눈을 들어 - 이같은 표현은 마 5:2의 '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된다.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예비동작의 표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있게 전달해 주며 동작의 주체자의 의지적이고 결단력있는 모습이나 엄숙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인다(마 5:3).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 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한다. 특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로서 압제를 당한다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자들을 가리키고 때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한다.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묘사된다(단 4:27).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 하나님의 나라가 -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 바실레이아)란 구약의 용어로는 '말쿠트'(*)인데이 말은 본래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예수는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다(마 6:10;10:7;12:28).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면 이 말은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되는 곳에 '바로 지금' 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기 바란다.

⭕ 너희 것임이요 -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성 경: [눅6:2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 '주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논테스'(*)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할 때 주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이다.

⭕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이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다(암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클라이오'(*, '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한다.

⭕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보라(롬 14:17).

성 경: [눅6:2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인자를 위하여 - '인자'(*, 투 휘우 투 안드로푸)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칭호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다(9:26;11:30;17:2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자'라는 칭호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이다. (1)인자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의미한다(19:10;마 9:6). 예수가 그의 메시야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17:24;18:8),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므로 이 말을 당신께 적용하기를 삼가셨다. (2)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자란 말과 연결된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신인적인 성육신의 본성은 그의 사역 활동의 목적과 성격을 반영한다. (3)인자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구원의 승리를 거두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이다(요 3:14). 그리스도의 죽음은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의 부활 및 승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이와 같이 대속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승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이 완전히 승리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기 위해 예수는 인자의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다. (4)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Lordship)을 나타낸다(막14:62).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과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5)인자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 되심을 의미한다(마 13:41,42;19:28). 그리스도는 만민의 재판관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동등하게 되었으면서 여전히 신성을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 너희를 미워하며...버릴 때에는 -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바이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 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준다. 사도행전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발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멀리하다'(*, 아포리조)는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또한 '버리다'(*, 에크발로)는 연극 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눅6:2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 '뛰놀라'로 되어서 더 적극적이고 격렬한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앞절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바로 그때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의미이다. 이는 주님 때문에받는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극적(dramatic)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이 예비되어 있다. '하늘에서의 큰 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 참예함'을 의미한다(마 5:10 주석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 '하늘의 큰 상'을 말씀하신 것은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 것을 격려하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박해 만큼이나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서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는 하늘 나라가 큰 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성 경: [눅6:2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 여기서 '부요한 자'는 20절의 '가난한 자'의 반대개념으로서 등장한다. 본문의 의미가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자신만을 신뢰하고 자만하며,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한다. 더욱이 이들은 마음이 심히 완악하고 강퍅하여 그리스도의 경고의 메시지에 귀기울일줄 모르며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허탄한 일만 일삼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다.

⭕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축복받은 자들과 잘 대조된다(23절). 여기서 '받았도다'란 의미의 원어 '아페코'(*)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또는 '완전하게 수령했다'를 뜻하는 상업적 용어이다.

성 경: [눅6:2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배부른 자 -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한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지칭한다. 이는 21절의 '주린 자'와 대조가 된다.

⭕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여기서 웃는 자의 웃음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육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한편 이 '웃는 자'는 21절의 셋째 축복 '우는 자'와 대조된다. 이처럼 20절로부터 계속 묘사되는 일련의 역전(逆轉) 상황들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인간의 완악한 본성에서 기인하는 진리의 역설(paradox)을 선명하게 노출시킨다. 이와 같은 역전 상황 내지는 역설의 논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나(마 10:3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러하다(고후 6:10).

성 경: [눅6:2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평지 수훈]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 일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추는 자들을 칭찬하기 쉽다. 예로부터 거짓 선지자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여 칭찬을 받지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을 받아 왔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칭찬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빛가운데 백일하에 드러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22절의 넷째 축복 '핍박을 받는 자'와 대조된다.

⭕ 저희 조상들이...하였느니라 - 본문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 당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아합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다(왕상 18:19).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달콤한 통치자와 예언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며 나아가 그들을 우상 숭배에 빠뜨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레미야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득세를 애통해 했다(렘 5:31). 예수께서도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로 표현하며 경계하셨다(마 7:15).

성 경: [눅6:2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그러나(*, 알라) - 원래 '알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이나여기서는 앞에서 나온 주제와 병행하는 다른 주제를 소개하는 연결사로 쓰인다. 본절로부터 36절까지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 5:21-48에는 주님의 가르침 다섯가지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누가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마 5:43-48)를 택하여 이를 보다 확대시켜 상세히 기록하였다. 누가는 구약의 구체적 계명을 꼬집어 말하면서 예수의 교훈과 대조시키지는 않는다(마 5:42,44 비교). 단지 그는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직접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마태는 황금률(黃金律)을 의도적으로 뒷쪽으로 옮겨 앞의 교훈들에 대한 결론적 요약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 7:15) 누가는 자연스럽게 문맥을 따라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31절).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 지위 등에 상관 없이 그에게 참된 관심을 나타내고 먼저 사랑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 중에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요 기독교의 가장 큰 교훈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몸소 실천하심으로써(23:24) 본을 보여 주셨다. 이 구절 하반부에서부터 30절까지는 사랑의 행위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롬 12:14-21). 평행 분문인 마 5:43-48은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의 차원 높은 새 계명들이 열거되는(마 5:21) 가운데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반면에 본문에는 앞 뒤의 연결이 다소 어색하지만, 앞의 내용이 완악한 유대교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비추어 본문은, 독선적 정죄에 급급하였던 당시의 폐단을 염두에 두고 이해됨이 자연스럽다.

성 경: [눅6:2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을 금하시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면해 주는 권한만을 부여하셨다(요20:23). 여기서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라오마이'(*)는 전치사 '카타'(*)와 '소원', '간구'라는 뜻의 '아라'(*)의 합성어이다.따라서 이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며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진 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숭고한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하고 원수들을 용서하신 십자가상의 외침에서 문자 그대로 실천되었으며(23:34), 스데반의 순교시에도 생생히 증거되고 있다(행 7:60). 사실 예수께서 죄있는 인간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바로 원수 사랑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 놀라운 교훈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산술적인 계산의 안목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억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해질 인생이 예수의 대속으로 용서함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성도는 도저히 갚을 길없는 큰 사랑의 빚을 예수께 지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원수 사랑의 도(道)까지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눅6:2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 '뺨'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아곤'(*)은 턱이나 턱뼈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모욕의 행동뿐 아니라 폭력적인 행위까지 포함된다.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단순히 참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덮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폭력은 그보다 더 큰 폭력을 부르며 그때까지 참아 왔던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수반되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핍박에 직면하였을 때가급적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자청하여 핍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요 18:22,23;행 23:3).

⭕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 출 22:26과 신 24:13은 다른 사람의 겉옷을 전당잡거나 압류한다면 그날 해가 지기전에 돌려보내도록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겉옷이 생필품으로서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역할을 하고 먼지가 많이 이는 낮에는 겉옷으로 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옷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추위 속에서의 굉장한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중요하게 여기는 겉옷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아울러 겉옷의 현물가치 때문에 노상 강도들은 겉옷을 걸친 사람들을 약탈하는 수가 다반사였으며 심지어는 겉옷과 함께 속옷까지도 빼앗아 가는 사례가 심심찮게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 감내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까지도 희생할 줄 아는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다(23:34).

성 경: [눅6:3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이것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던져 주는 것이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의 정신에서 주는 것을 의미한다(마 5:42).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계명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도 없이 어리석은 맹목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도는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 계산된 행동과 숨은 의도로서 다시 받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주는 것을 뜻한다. 잠언 기자는 이를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갈파한다(잠 19:17).

⭕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 본절 상반절의 내용과 비슷하지만더 강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구하는'에 비해 '가져가는'은 보다 강압적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주며'보다는 '다시 달라지 말며'라는 말이 한층 사랑의 밀도를 더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라거나 절도자의 손을 제지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지는 않았다. 다만 물질의 손실이나 이해 타산에 급급한 나머지 정작 소중한 영혼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를 우려하시며, 더 적극적으로는 궁핍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헌신적으로 구제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들을 반복하신 것이다.

성 경: [눅6:31]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른바 황금률(黃金律)로서 기독교 윤리의 적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주석은 이 황금률이 원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랍비 힐렐(Hillel)이 이미 사용한 규범을 예수께서 사용하여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B.C. 5세기 후반 헬레니즘 세계에서 소피스트 운동의 결과로써 이와 유사한 교훈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유대의 저명한 랍비인 힐렐(Hillel)은 '네가 싫어하는것은 타인에게도 행치 말라'고 하였고 헬라의 스토아 철인(哲人)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치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들이 예수의 황금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교훈이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으나 그것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이고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올리신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 중 황금률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황금률을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의 교훈은 보편 윤리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차원 더 앞선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긴데에 그 독창성과 특징이 있다.

성 경: [눅6:3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만일...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 마태는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고 말한다. 마태가 의미하는 '상'(*, 미스도스)은 그들 자신의 일이나 고생에 의해 얻어지는 상이 아니라 무조건적 은혜로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본문의 '칭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또한 '은혜' 혹은 '선물'의 뜻으로 자주 쓰인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암시한다. 결국 이제껏 언급된 차원높은 새 교훈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의 은혜에 근거하여 실행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을 율법의 정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나 예수는 인과 응보적 보복의 차원을 넘은 희생과 사랑의 온전한 모랄(moral)을 제시하신 것이다.

⭕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 '죄인 들도'(*, 카이 호이하마르톨로이)란 '그 죄인들 조차도'란 뜻이다. 마태는 '세리'(마5:46)라고 말한다. 여기서 죄인이란 이방인들(5:47)과 세리(5:46) 그리고 창기와 기타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던 소외된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 이처럼 버림받은 사람들 조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다.

성 경: [눅6:3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 이 구절은 앞절(32절)의 반복으로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한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는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처세에 급급한 나머지 기껏해야 '주는 만큼 받는'(give and take)식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개도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든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듯이, 그러한 단계는 그리 수준 높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자연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야 할 위치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6:3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무엇이뇨 - '빌리다'(*, 다네이조)는 상업적인 거래에서 이윤을 목적하고 빌려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받기를 바라는'것은 대부(貸付)의 이자를 포함한 최종적인 총액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업자처럼 이윤 목적으로 남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주는 자는 결국은 자신의 치부를 위한 것이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예수의 의도는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남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지만 그러나 그것을 되돌려 받기를 바라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의수히 받고자 하여 - 문자적으로는 '똑같이 돌려받기 위해'란 뜻이며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빌려준 것을 다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반드시 돌려 받을 것을 전제하고 빌려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 경: [눅6:3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 다시 27절의 원래적 명령으로 돌아가 원수 사랑의 계명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여기서 '원수'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증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우상 숭배자들이나 계약 관계를 깨뜨린 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낼 때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적들을 나타내게 되었다. 어쨌든 여기서는 그들이 설사 계약 관계를 위반하였든 개인적인 해를 끼쳤든 간에 그들을 정죄하거나 재판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사랑의 행위여야지 단순한 보복의 동기에서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파오'(*)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나타내지만 이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도 수반된다(마 22:39). 아울러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원수에대한 사랑도 분명히 포함된다(마 5:43-44). 따라서 이 '아가파오'의 사랑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즉 자신의 불이익이나 고난과 어려움을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감당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이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 바라지 말고 - KJV는 "아무 것도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hopingfor nothing again)라고 번역한다. 이 부분에 대해 여러 번역본상의 차이들이 있으나 KJV의 번역이 가장 적절한 듯 하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빌려주든 무조건적으로 줄 것이며 다시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 1:32에서 이미 예수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칭한 바 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할 때 얻는 상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누가의 표현에 비해 마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마 5:45). 이는 둘다 절대적인 권위(authority)와 지존(majesty)의 개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성 경: [눅6:3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 마태는 '온전'이란 말을 사용하지만(마 5:48) 누가는 그대신에 '자비'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누가는 글을 읽을 자가 율법에 능한 유대인(바리새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하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신다. 그것이 곧 '온전'일 것이다.

⭕ 너희도 자비하라 - 이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 (1)이 명령은 죄인인 인간의 절망을 시사한다.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이 시행될 수있음을 뜻한다. 이 고차적인 명령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면 인간은 누구나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계명을 완수하신 예수께서 우리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인도와 간섭 그리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3)성도의 신분과 위치가 실로 고귀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성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그러한 교제를 위해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사(히 2:11) 이른바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하신다(벧후1:4).

성 경: [눅6:3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27절의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이 28-35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듯이 36절의 자비의 정신은 이제 본절과 38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먼저 '...말라'는 부정 명령이 두 차례 언급되며 이어 '...하라'는 적극적 명령이 또한 2회 나온다.

⭕ 비판치 말라 - 이 말은 단순히 윤리적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다음 구절의 "정죄하지 말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종교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정죄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이 말은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참과 거짓 그리고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수있는 판단력을 강력히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편견을 가지고 무분별하고 성급하게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판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습관적인 비판 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을 보면 누구든 그를 비판하고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려는 것을 나타낸다.

⭕ 정죄하지 말라 - 어떤 사람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은 법정에서 재판을 하거나 선악을 구별하는 일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재판관으로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금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선악의 분별을 가져야 하지만 심판이나 판결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고유 권한이다(롬 2:1,2;14:10;고전 4:3,4). 우리가 타인을 정죄하거나 심판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내포하고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며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참되고 유일하신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롬 12:18,19).

성 경: [눅6:3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천국 생활의 규칙]

⭕ 주라 - 이 명령형은 다른 사람들의 곤궁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급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주라는 뜻이며 또한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 동사(*, 디도미)는 요 3:16'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에도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니와(행 20:35), 그 이유는 서슴없이 베푼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 후히 되어...주리라 - '후히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칼론'(*)은 '분량', '척도'(메트론)라는 말과 '좋은'(칼로스)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좋은 분량으로 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준다는 의미이다. 즉 굵은 콩 사이로 작은 조나 깨를 섞듯이 조금도 빈틈없이 누르고 흔들어서 채울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채워서 준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임한다.

⭕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안티메트레데세타이) - 이 단어는 '다시', '반복'을 나타내는 단어 '안티'(*)와 '재다','측량하다'는 뜻의 단어 '메트레오'(*)의 합성어로서 '다시 측정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는가에 따라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 경: [눅6:3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비유로 말씀하시되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네가지 짧은 비유로 끝맺는다.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들을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든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군중들에게 설교하든지, 서기관 및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하든지 간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비유가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내용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고 착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수수께끼조차 환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이 A.D. 20-30년대 팔레스틴 변방의 생활 환경을 잘 밝혀준다는 사실이다. 비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 중 일부는 청중이 그 비유 속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에 이미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에서 청중들은 모두 동전 하나를 잃는 일이(15:8-10) 어떻게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가를 잘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먼 나라로 자기의 행운을 찾아 떠난 방탕한 아들을(15:11-32)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여리고 도로의 위험은(10:30) 그 소문이 자자했다.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 이 구절은 팔레스틴의 지형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곳의 땅들은 바위들이 많고, 많이 패여서 소경이 안전하게 보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길을 소경이 또다른 소경을 인도한다면 어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소경이 영적 소경을 인도하고 지도한다면 인도한 자는 물론 인도함을 받은 자까지 영혼의 멸망을 당하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경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빛되신 예수를 반대하였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으며, 보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본다고 말하였다(요 3:19;9:40,41).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얻기 위해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결국에는 그 제자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말았다(마 23:15).

성 경: [눅6:40]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 마태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10:24)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핍박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어,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이 예수께 닥친것보다 더 심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절에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 소경들이 바리새인들을 가르킨 것이라면 지금 이 구절에서도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소경인 제자는 소경인 선생보다 못할 것이고 바리새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그 거짓된 교훈의 틀에 속박당하고말 뿐이라는 의미이다.

⭕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 선생의 가르침을 온전히 좇게 된다면 그 선생과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의 다른 의도, 즉 '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 사람보다는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 나와 같이 되라'는 권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없지만,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범사에 자라가야 한다(엡 4:15;골 1:18).

성 경: [눅6:41,42]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비판에 대한 교훈]

⭕ 어찌하여 형제의...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이 두 구절은 39, 40절과 연결되어 잘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이다. '티'와 '들보'는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성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티'(*, 카르포스)는 원래 '조각'이란 뜻인데 조그마한 나무조각, 즉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지셨던 목수 일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를 가리킨다.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거짓 선생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예수께서 작은 나무 부스러기와 커다란 들보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은 대개 다른 이의 잘못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쾌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 단체의 개선이나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개혁이 수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냉철히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 바리새인들의 심각성은 그들 속에 들보가 박혀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개선이나 회개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거니와 그들은 위선과 외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 어찌하여(*, 포스) - 이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사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 즉 온갖 위선과 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형제의 조그마한 실수나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성 경: [눅6:43]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못된 열매 맺는...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 가시적 결실, 곧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들의 인격 혹은 마음을 묘사하며 열매는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태도, 말, 행동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1)사람의 영적상태는 자연스럽게 외적으로 나타남을 가르친다. 물론 당시 바리새인과 같이 위선으로써 철저히 은폐하는 자들은 표리 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의 궁극적 관심사(예컨대, 재물욕, 명예욕 등)는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발한다(고후 2:15). (2)구체적 결실을 맺는 신앙이 되어야함을 가르친다. 입으로만 온갖 경건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냉담하다면 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이런 나무는 찍혀 불붙은 아궁이에 던져지게 된다(마 7:19).

성 경: [눅6:44]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는 나무의 가치나 중요성이 그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나니'(*, 기노스케타이)란 본질적인 것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 가시나무에서...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 마태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로 기록한다. 각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들이 서로 바뀌어져 열릴 수 없듯이 사람의 경우도 그 심령의 상태 대로 외적 행실이 드러나게 마련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씀이다. 한편 본 비유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있는 광경에서 취해진 것이다. 즉 무화과나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대개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무화과나 포도 열매가 가시 덤불과 섞여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 되었던 것이다.

성 경: [눅6:45]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나무와 열매]

⭕ 마음의 쌓은 선에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로부터'라는 뜻이다. 이는 마음이 선이나 악이 쌓이는 창고인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잠 4:23은 특별히 마음을 지킬 것을 훈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성경에서 지(知), 의(意), 정(情)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적 생(生)의 근원으로 또 나아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원천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신 20:14;시 27:8;잠 6:18). 말과 행실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산물이다(마 12:34,35). 속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악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여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 경: [눅6:46]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본절로부터 49절까지는 평지 수훈 전체의 결론으로서, 참된 신자의 표는 번지르르한 말이나 종교적인 의식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모든 가르침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 주여 주여 하면서도...행치 아니하느냐 - 마태는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였다(마 7:21). 본 구절은,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도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예수의 신령한 교훈을 깨달아 실천에 옮기는 일에는 무관심하였던 많은 무리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넓게는 소위 외형상으로 종교 생활을 해나갈 뿐 실제적으로는 신앙의 결실을 맺지 않는 일부 맹목적 신자들 전체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수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맺어야 할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재림시에 '도무지 알지 못하는'자로서 제거되고 말 것이다(마 7:21-23 주석 참조).

성 경: [눅6:47]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내게 나아와...행하는 자마다 -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동사가 제시되는데 곧 '나아와', '듣고', '행하는'이다. 이는 곧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원리를 순서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1)'나아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곧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 나아와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된다(요 1:12). (2)'듣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롬 10:17). (3)'행하는'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다(약 2:17).이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지키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곧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선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다.

성 경: [눅6:48]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집을 짓되 깊이 파고 - 예수의 이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와 건축 양식을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으로서 일단 비가 왔다 하면 보통 사나운 폭풍을 동반하여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졌고 그로 인해 산에서 탁한 급류가 흘러내려 기초가 약한 건물들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는 폭우가 쏟아져 흘러 내릴 때를 대비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기 때문에 깊이 파들어 가야 했다.

⭕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 지혜로운 건축자는 기초를 세우기 전에 반석까지 깊이 파들어가 그곳에다 기초를 세운다. 이 말이 바로 전체적인 요점이기도 하다. 예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의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는 것이다. 주초를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운 집이 온갖 폭풍에도 잘 견디어 내듯이, 예수의 말씀을 머리 속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구체적 삶 가운데 실천해 나감으로써 크고 작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축적하게 되며 결국에는 큰 환난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수 있다는 말씀이다.

성 경: [눅6:49]

주제1: [인자의 새 교훈]

주제2: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있는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한다(마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탁류가 부딪히매...파괴됨이 심하니라 - 탁류가 흘러 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하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한다(고전 3:11-15).

성 경: [눅7: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마치신 후에 - '모든 말씀'은 앞장에서 행하신 평지 수훈(平地垂訓)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서두의 말씀을 단순히 앞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말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로센'(*)은 '성취한'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반면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전환될 때 마태복음에서 주로 사용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마치다'는 뜻인'텔레오'(*)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성취되어 갈 것이다.

⭕ 가버나움 - 갈릴리 바다 북서안의 성읍으로 '나훔의 동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음역이다. 이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나훔'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지만 선지자 '나훔'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이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선교의 전초 기지로서 그의 선교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 였으며 예수의 공생애의 중심지였다(5:23,31-37;마 8:5-13;17:24-27;막 1:21-28;2:1-12;요4:46-54;6:16-59).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마음이 강포하고 완악하여 예수의 복음 전파에 무감각하고 또 그들의 죄를 회개치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진노(震怒)를 사고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당했다(10:15;마 11:23).

성 경: [눅7: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백부장 - 본래 백부장이란 백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를 말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본문에 언급된 백부장의 군대는 여러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로 구성되었고 헤롯 안디바의 봉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또 폴리비우스(Polybius)는 백부장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기를 지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군대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백부장의 지위에 선택되었다고 진술한다. 따라서 이 직책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실성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격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소개된 백부장들이 모두 인격자였다는 것과 일치한다(23:47;행 10:22;22:26;23:17;24:23). 이 백부장이 반드시 이방인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었던 것(3절)과 예수의 말씀(9절)이 그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 사랑하는 종 - 마태는 '아들'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파이스'(*, '하인')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마 8:6) 누가는 분명히 '둘로스'(*,'종')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종' 또는 '노예'를 가리키는 말로 생명에 대한 결정권이자신에게 없고 주인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장로를 손수 찾아가 예수께 부탁을 올릴 것을 간구한 사실은 이 백부장의 종에 대한 강한 애정을 반영한다. 아울러 이 종이 그의 상전인 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 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반증하기도 한다.

성 경: [눅7: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마태는 '백부장이 나아와'라고 말한다(마 8:5). 반면 여기에는 백부장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보낸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마태는 요약적인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일어난 일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유대인의 장로들을 택한 이유는 자신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와 잘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오셔서...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 '구원하시기를'(*, 디아소세)이란 폭풍같은 상황 속에서도 안전하게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에는 그종의 생명이 몹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백부장이 구원을 요청하는것은 예수께서 죽어가는 자신의 종을 구원하여 건강하게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 백부장의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 죄인으로 여긴터라 감히 예수께 직접 나아가 간구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눅7: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이에...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며 그들과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서 간주했다. 특히나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인들과의 접촉은 더더욱 기피했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장로들이이 백부장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보건대 이 백부장이 평소 유대인들에게 베푼 선행이 엄청났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장로들은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위해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또한 예수께 가서도 간절히 간청하였다. '간절히'란 원어상으로 보건대 서두름을 의미하는말에서 나왔는데 시간에 쫓기는 상태에서 열렬히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는 장로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백부장의 종을 위해 시간을 다투어 예수께 열심히 간청한 것을 나타낸다. 또한 '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파레칼룬'(*)은 미완료형으로서 간구하기를 시작한 후 계속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장로들의 간구가 단순히 한 두 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성 경: [눅7: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가 - 이 구절은 앞에서 장로들이 백부장을 '합당하다'고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원래는 '가르'(*, '왜냐하면')가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저가'(*, 아우토스)는 문법적으로 '그 자신이'란 의미다. 따라서 이 말은 회당을 짓는데 있어서 그가 완전히 그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당시 로마 군관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백성을 압제하여 재물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전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고 이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었으며 또 유대인들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로들은 백부장을 위해 그의 종을 살려주어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가 그에게 충분히 있음을 예수께 강조하였다.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회당을 지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 지도자로서 회당을 지어 희사(喜捨)했는지 알 수없다. 그러나 이 백부장의 태도로 보아 일단의 신앙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7: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주여 - 이는 단순한 호칭의 의미보다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9절) 신앙 고백적 측면까지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 백부장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큰거리낌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비록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하신 분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치 못할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신앙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또한 그는 예수의 놀라운 신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굳이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성 경: [눅7: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말씀만 하사 - 이를 직역하면 '한 마디 말씀만 하시면'이다. 그는 예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의 믿음대로 예수는 한 마디 말씀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11-16절)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다(8:22-25). 예수의 말씀은 태초에 무(無)의 상태로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과 동일한 것이었다(창 1:1-31).

⭕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2절에서는 '종'(둘로스)으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하인'(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스'는 '아들'을 지칭하기도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장로들과는 달리 백부장이 그 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종을 아들과 같이 여겼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백부장은 아들과 같은 하인이 죽어가는것을 볼 수가 없어서 예수께 간절히 간청하였던 것이다.

성 경: [눅7: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저도 - 원문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있어서 백부장이 예수께서 말씀으로만 그 종을 치료하시리라고 생각하게 된 뚜렷한 이유를 드러낸다.

⭕ 남의...사람이요 -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부하를 내세워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고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남의 수하(underauthority, NIV)에 있음을 먼저 드러내는 겸손함을 취하고 있다.

⭕ 이더러...하나이다 - 백부장은 자신의 군대 생활의 경험을 예로 들어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지금까지 명령만 하면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그 명령에 따라 원하는 것이 그대로 실행되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도 어떤 권위로 말씀만하시면 그것이 능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 백부장은 유대교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하나님의 명령에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순종했던 천군 천사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왕하 6:17;시 34:7;68:17;103:20;마 26:53). 어쨌든 군대의 상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신적권위를 가진 예수와 연약한 인생인 자신이 영적상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으며, 권위 아래에 있는 자신이 그 수하 사람들을 복종케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적 권세를 가진 예수께서 못하실 일이 없으리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하늘과 땅에 속한 권세를 지닌 주권자이시다(요 17:2).

성 경: [눅7: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예수께서...기이히 여겨 - 예수께서 이상히 여기신 것은 오직 두 번 기록되었는데 한 번은 믿음이 있음을 보신 후였고, 또 한 번은 믿음이 없음을 보신 후였다(막 6:6). 예수께서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백부장의 믿음이 위대했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되었다시피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1)그의 겸손함(humility)이다. (2)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확신한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요 4:50에서도 발견된다. (3)예수의 신적인 신분에 관한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그의 겸손함이나 말씀의 권능 확신 등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라 할 수 있다.

⭕ 이스라엘...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이 말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미 믿음을 찾으셨기 때문이다(5:20;마 8:2,3). 예수께서 놀라신 것은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헬라어 원문 중에 쓰인 부사 '우데'(*)는'...조차도...않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성경을 늘상 접하며 여호와 신앙에 삶의 기반을 두는 선민으로서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방인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아직 유대인 중에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시는 예수의 책망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이는 선민들조차 갖지 못한 귀한 믿음을 이방인 백부장이 지녔던 사실을 한층 강조해 준다.

성 경: [눅7:1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 집으로 돌아가...강건하여졌더라 - 마태는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다만 보냄을 받았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건강해진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는 치료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종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를 정도로 심각했던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적적 치료 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메시야성은 밝히 드러났으며 아울러 예수의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을 향하는데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7:1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나인이란 성 - '나인'(Nain)은 '즐거움'이란 뜻이며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이 성의 위치는 나사렛에서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수넴(Shunem) 지방과 모레 언덕(the Hill of Moreh) 사이의 작은 헬몬산(little Hermon)의 비탈에 위치하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40km쯤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성에서 엔돌(Endor) 방향으로는 약 10분쯤 거리에 묘지가 있다. 한편 '나인' 성은 오늘날까지 '네인'(Nein)으로 불리우는 작은 마을로 현존한다. 그 당시 이곳으로 올라가자면 좁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지대를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길 양편에는 무덤같은 굴들이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지점 부근에서 예수께서는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葬禮行列)과 마주치셨다. 아마 그 지역의 사람들은 엘리사가 행했던 기적을 회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왕하 4:8-37).

성 경: [눅7:1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이 성은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고 벽에 나 있는 큰 문을 통해 들어갔다. 보통 성문 근처는 성 주민들의 집회 장소로서 정규적인 화합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르었다. 그리고 묘지는 보통 성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금 성문근처에서 모였던 장례 행렬이 성 밖의 묘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때 예수의 일행은 성문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 사람들이 -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례시에 두 명 이상의 피리부는 사람과 한 명 이상의 호곡(號哭)할 여자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람들'이란 단순히 시체를 직접 운구(運柩)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곡을 위해 고용된 사람들까지 포함된 것이다.

⭕ 이는 그 어미의...과부라 - 여인이 과부라는 사실은 그 가정의 비참한 경제 생활을 입증한다. 1세기 당시에 여자가 자기의 생계를 꾸려 나가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마지막 소망이었던 외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엄청난 상심에 빠졌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 성의 주민들은 그전에도 이미 이 여인을 위해 죽은 사람을 한번 운반해 주었을 것이다. 그 죽은 사람은 물론 이 과부의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장성한 아들을 장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자요', '과부라'라는 말은 이 여인의 참담한 심경을 더욱 강조하며 잘 묘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의 많은 사람이 장례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과부에게 참된 동정을 표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성 경: [눅7:1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주께서(*, 호 퀴리오스) - 여기 사용된 '주'(主)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죽음을 다스리시는 권세있는 '생명의 주'이심을 나타낸다.

⭕ 과부를 보시고 - 본문은 예수께 그 상황을 알리거나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스스로 비통해하는 여인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 불쌍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 -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그 원동력은 사랑과 동정이었다(마 14:14;15:32;20:34). 이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원래 뜻은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과부의 슬픔을 목격한 예수께서는 속내장까지 뒤틀리는 듯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께서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얼마나 큰 동정과 사랑을 보내셨는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긍휼은 본 이적의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적적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으나, 본문의 경우처럼 믿음의 유무를 보기 전에 고통당하는 인생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먼저 은혜를 베푸신 경우도 종종 있었다(마 15:32;20:34;막 1:34;8:2). 그리고 이는 곧 죄많은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요 원수된 상태였을 때 독생자 예수를 대신 죽으시게끔 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 지으신 것이다.

⭕ 울지 말라(*, 메 클라이에) - 현재 명령법으로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다. '울다'는 동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클라이오'(*)와 '다크뤼오'(*)이다. 전자는 '흐느껴 우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지금 독자의 죽음에 슬퍼하고 비통해 하면서 매우흐느끼며 울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눅7:1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가까이 오사...대시니 -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레 22:4;민 19:11). 왜냐하면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랑의 법으로 이 율법을 초월하셨다. 여기서 '관'(*, 소로스)은 호머(Homer)의 글에서 나타난 바대로 원래 죽은자의 유골이나 재를 넣어 두는 항아리를 의미했으나 나중에 시체를 넣는 함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시체는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이나 수다리움(sudarium)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Josephus).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체에 대한 고정 관념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셨음은 과부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의 사랑이 이런 율법의 문자적 이해를 뛰어넘었음을 뜻한다.

⭕ 일어나라 - 예수께서는 지금 죽어 있는 청년에게 마치 그가 듣고 순종할 수 있는 것처럼, 즉 지금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사는 본문을 포함해서 세 번 나타나는 데 그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8:54;요 11:43). 성경의 몇몇 인물들이 죽은 자를 살렸던 경험이 있지만(왕상 17:21;왕하4:35;행 9:40;20:10)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그러한 이적을 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시어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예수께서 음부의 열쇠를 지니고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단적 실례이다(롬 8:2;고후 1:10;딤후 1:10).

성 경: [눅7:1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죽었던 자가...하거늘 - 누가는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로 '일어 앉고 말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적인 한 암시를 볼 수가 있다. 즉 세상 끝날 성도의 부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를 보게 된다.

⭕ 예수께서...주신대 - 그 과부를 향한 예수의 사랑과 동정이 얼마나 크셨는지 분명히 나타난다. 이러한 행동은 왕상 17:23의 엘리야의 그것과 유사하다. 예수는 소생한 청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대신 그 불쌍한 여인을 잘 봉양하도록 당부하셨을 것이다. 이제 이 과부에게는 더 이상의 비애와 고통이 없고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과 자비로우신 예수를 만난 희열로 가득했을 것이다.

성 경: [눅7:1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 누가는 또다시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5:26;18:43;23:47). 무리들은 이 이적이 하나님의 권세로 이루어진줄을 믿었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영광을 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존'(*)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예수의 크신 권능에 압도당한 무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을 나타낸다.

⭕ 큰 선지자가...일어나셨다 - 전에는 보지 못한 큰 이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예수를 한 위대한 선지자로 보았고 이런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대한 이 칭호가 비록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는 그 무리들이 사람에게 붙일 수있는 최대의 경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대해서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직접적인 동기는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구약의 선지자가 행한 일(왕상 17:21;왕하4:35)과 같은 일을 행하신 데 있었을 것이다. 무리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부터 약4세기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으나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기 시작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당시부터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야관은 현세적이며 또한 민족주의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 데에 큰 문제가 있었다.

⭕ 하나님께서...돌아보셨다 하더라 - 이 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오며(룻 1:6;삼상2:21) 축복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고 또한 심판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었다. 원래 '돌아보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의사가 왕진하여 환자를 치료할 때 쓰는 동사 '에피스켑토마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이 오랜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 이 큰 선지자를 통해 다시 그들을 방문하여 상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러(말 4:2) 오셨다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눅7:1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결과 무리들이 하나님을 찬양한 바 곧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관련된 소문이다(Meyer). 당시에 백성들이 순수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기에는 아직까지 그들의 믿음이 너무 어렸으므로 그들은 예수의 놀라운 치유 이적을 목격하고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이것은 유대 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땅 전체, 즉 실질적인 팔레스틴을 말한다(1:5). 물론 유대 지방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방 지역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 보통 '온 유대'라고 했을 때는 팔레스틴 전역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인 성'은 갈릴리에 속한 자그마한 마을이었으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신 예수의 위대한 권능은 소문의 꼬리를 물고 각처로 퍼져 나갔다.

성 경: [눅7:1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의 제자들이...고하니 - 마 9:14;요 3:26 등으로 비추어 보건대 요한의 제자들 중에 예수를 따른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베드로를 위시한 열 두 제자들처럼 철저하게 예수를 따르지는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 출신이라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들이 감옥 밖에서 되어가는 일들, 특히 예수의 활동에 대해 세례 요한에게 수시로 알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7:1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 그 당시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저지른 불륜의 관계를 책망하고 또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다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헤롯은 자신의 부정에 대한 요한의 책망을 괘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많은 백성들이 그의 교훈과 회개의 세례에 동조하며 따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며 자신의 정치적인 위상(位相)에 도전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를 투옥하게 되었다(3:18-20). 이로 인해 옥에 갇힌 요한은 제자들을통해 외부의 소식을 들으며 예수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곧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행적에 대한 관심이 그 누구보다 컸다 하겠다.

⭕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오실 그이'는 메시야를 의미하는데 이 칭호는 시40:7;118:26;단 7:13등에서 유래한다. 원문에 의하면 '당신'(*, 쉬)이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요한은 감옥에 있는 동안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즉 요한은 예수께서 진정 메시야라면 빨리 어둠의 세력을 멸하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요한은 옥에 그대로 머물렀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대적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에 요한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정말 메시야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성령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깨달았다(마 3:13-17).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보고서도 제지하기는 커녕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오히려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인도하였다(요 3:30). 따라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는 요한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하여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가 메시야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오랜 옥살이에 지쳐 예수의 사역에 대해서 의심이 일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즉 요한은 유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헤롯과 같은 악한 세력을 제거하여 이스라엘에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줄 메시야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요한의 제자 파송이 예수의 권능과 명성을 시기하는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의 말씀을직접 듣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기도 한다(Clavin,Jerome). 어쨌든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그가 참수형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그의 사역에 충실했다. 그가 옥중에서 예수의 메시야성을 오해하거나 의심했었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를 인정하셨으며 그의 사역을 극찬하셨다.

성 경: [눅7:2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하더이다 하니 - 요한의 보냄을 받은 두 명의 제자가 예수께 나아가 요한의 지시대로 질문하였다. 여기 사용된 의문형은 화제에 주목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용법은 신.구약을 걸쳐 많이 사용되고 있다(창 32:27;33:5;삼상24:16;요 1:19,25;4:11,12;6:5 등).

성 경: [눅7:2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예수께서...많이 고치시며 -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유는 먼저 그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한 대가나 칭송을 받으려 하신 적이 없으며 어떤 특별한 조건을 제시하기 이전에 병마에 신음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자체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아울러 이런 치료 행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그곳에서는 애곡하는 것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암시가 들어 있고 따라서 이러한 치료 행위에 나타나는 그의 이적적 권능을 통해 그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시고자 하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성 경: [눅7:2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병고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것으로 보인다. 마태는 현재 시제로 '너희가 듣고 보는 것'으로 말하는데(마11:4)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말한다(NIV역은 완료형으로 번역되었다). 누가가 여기에서 과거형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의 병고치는 일과 지금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시차를 분명히 하려는 정밀한 표현으로 보인다.

⭕ 요한에게 고하되...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 예수께서는 여기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사 35:5,6;61:1). 이 여섯가지 표적들은 모두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이적으로 유대인들이 구하는 것들이었다(고전 1:22). 따라서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하는 것을 피하고 이와 같은 표적들을 언급하심으로써 자신이 메시야임을 확증하신 것이다. 본절과 관계된 구약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

| 내 용 | 예 언 | 성 취 |

+--------------------------------+---------------------+-----------+

| 소경이 보며 | 사 29:18;35:5 | 마 15:31;막 10:46-52 |

+--------------------------------+---------------------+-----------|

| 앉은뱅이가 걸으며 | 사 35:6;61:1 | 마 15:31;행 3:6 |

+--------------------------------+---------------------+------------

| 문둥이가 치유되며 | 사 61:1 | 17:14;마 8:3 |

+--------------------------------+---------------------+------------

| 귀머거리가 들으며 | 사 29:18;35:5 | 막 7:34,35;9:25-27 |

+--------------------------------+---------------------+------------

| 죽은 자가 살아나며 | | 14,15;8:54;요 11:43,44 |

+--------------------------------+---------------------+------------+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 사 61:1 | 4:18 |

+--------------------------------+---------------------+------------

성 경: [눅7:2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세례 요한의 질문]

⭕ 누구든지...아니하는 자는 - '실족하다'(*, 스칸달리조)는 동사는 '걸어 넘어뜨리다', '함정에 빠뜨리다'는 뜻이다. 이 말은 미끼를 놓은 덫에 어떤 목표물이 걸려 결국 죽게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사단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져 죄를 범하고 결국은 영혼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결과를 나타낸다. 그런 뜻에서 이 말은 신약에서 '죄를 범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는 그 누구든지 자신을 오해하거나 정죄하여 거절하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예수를 생명의 주로 바로 알고 받아들이면 복이 있다는 말이다.

⭕ 복 - 여기에서 '복'은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거나 육적(肉的)인 복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영원한 축복을 뜻한다. 한편 본절이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바, 세례 요한을 위시한 그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여 예수를 무작정 배척하거나 경원(敬遠)시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복음에 귀 기울이라는 경계와 당부의 말씀으로도 이해된다.

성 경: [눅7:2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무리에게...말씀하시되 -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요한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이는 주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강한 경고의 어조로 말씀하셨을 때 무리들이 듣고 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차지하는 요한의 중요한 위치를 분명히 주지시키기 위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요한을 증거하셨다.

⭕ 너희가 무엇을...나갔더냐 -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 회개를 외칠때 많은 무리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였다(3:2-14).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그의 설교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모였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요한이 어떠한 인물이며 그가 왜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는지 가르쳐 주셨다.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 질문과 바로 다음의 질문(25절)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답변으로 이끄는 풍자성이 강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흔한 갈대를 보기위해 굳이 험한 광야로까지 나갈 필요는 없겠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어디서든지 볼 수있는 흔하고 하잘 것없는 갈대처럼 요한이 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당시 유대 땅에는 일신의 부귀와 안락을 위해 마치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 양심마저 팔아 넘겨버리는 배도자(背道者)들과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 요한이 사람들의 여론이나 세상의 유혹에 동요되지 않고 거룩한 소명에 충실한 사람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의 강직성은 헤롯과의 충돌 사건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헤롯의 악행은 묵시적으로 방관될뿐 누구 한 사람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이 범죄를 공공연하게 책망하다가 결국 옥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눅7:2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알라) - 화제를 새로운 초점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너희가 갈대를 보려고 나간 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보기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미이다(R.C.H. Lenski).

⭕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부드러운 옷'이란 곱고 감촉이 부드러운 값비싼 옷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한은 거칠고 값싼 약대 털옷을 입었음으로(막 1:6) 이와는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상황에서 수탈과 착취로 인해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녔음에 비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은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고 다녔다.

⭕ 보라...자는 - '사치하게 지내는'이란 원어상으로 '건강을 해치다', '쇠약해지다'는 의미이다.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결국 건강을 해치기까지 흥청거린다. 이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서고관 대작들이 호의 호식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핍절해 감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은 황폐한 곳에서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으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만일 세례 요한이 권력자들에게 아부하고 그들의 귀에 달콤한 말만 골라 들려주었더라면 근사한 옷과 음식을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궁의 회유 따위에 넘어가거나 무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의 치부까지도 과감히 책망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요 또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 왕궁에 있느니라 - 헤롯의 왕궁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며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지금 마캐루스(Machaerus) 요새에서 낡고 거친 외투를 입은 가련한 죄수로서 있다.

성 경: [눅7:2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그러면 너희가...나갔더냐 - 예수께서는 요한의 위대함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무리들에게 두 가지 풍자적 질문을 자문 자답 형식으로 던지셨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 질문은 요한이 선지자 혹은 그보다 탁월한 자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서곡으로 볼 수있다.

⭕ 선지자냐 - 이 말은 선지자를 본다는 것은 '보려고 나갔더냐'는 의미이며 '선지자를 그와 인격적인 접촉을 얻기 위하여, 즉 그의 말과 그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려고 한다'는 의미이다(R.C.H.Lenski). 한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신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2)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소망과 격려를 주기 위함이다. (3)하나님과 그의 창조에 대한 사실들을 계시하기 위함이다.(4)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취해야 될 행동에 대한 정보를 주기위함이다. (5)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나 예언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6)장차 메시야를 통해 절정에 이를 위대한 구속 역사의 맥을 잇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관건은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느냐는 것인데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3:2). 따라서 요한은 분명히 선지자였다.

⭕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원문대로 번역하면 '선지자 이상의 어떤 자'(*, 페리쏘테론 프로페투)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이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한 이유는 (1)그의 활동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단적 예로 사 40:3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예언한다. 그리고 말 4:5에 예언된 '선지 엘리야'란 바로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2)그의 사역의 위대성 때문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직접 그 메시야를 보고 그를 증거하며 또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구자였다(27절).

성 경: [눅7:2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기록된 바 - 예수께서는 말 3:1에 예언된 말씀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셨다. 완료형 '게그랖타이'(*)는 '지금도 기록되어 있다'(has beenwritten)는 의미이다.

⭕ 보라 내가...보내노니 - 주님께서 이 예언을 인용하실 때에 구약의 원문 그대로 하신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여 인용하셨음에 유의하자. 그것은 여기에 인용된 '네 앞에'(*, 프로 프로소푸 수,)란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는 '내 앞에'(*, 레파나이)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도 '내 앞에'(*, 프로 프로소푸 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주님께서 이처럼 '내 앞에'란 말을 '네 앞에'로 바꾸어 사용하신 이유는 자신이 친히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간접적인 자기 계시(self-revelation)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하나님 앞에'를 '메시야 앞에'로 해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메시야이신 자신이 일체(一體)인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 네 길을 예비하리라 - 요한은 메시야의 직접적인 선구자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해야 할 사람이었다. 원문에는 목적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가 쓰여서 사자의 역할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선포함으로 메시야의 출현을 명백히 선포하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회개를 외치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3:7-14;마 3:2). 또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에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겸손히 말하면서 구속 역사의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졌다.

⭕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 말라기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메시야이신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언하는 말씀이다.

성 경: [눅7:2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여자가 낳은 자 중에 - 인간의 죄성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강조한다(시51:5). 요한은 비록 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모든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볼 때 그만큼 위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하나님의 나라에서는...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결코 요한의 위대함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비록 위대한 선지자보다도 큰 자라 하여도 그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로 작은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증거하는 등 사역면에서 구약에 속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하였지만, 계시의 점진성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여전히 옛 언약이 속한 옛 세대(the Old Dispensation)의 사람이었고 신약의 예비 단계에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신약에 속한 성도들은 세례 요한과 같이 강하고 담대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이해하며 신.구약 66권으로 구성되어 기록된 계시의 완결서를 늘 묵상할 수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성도의 심령속에 내주하사 영적 안목을 뜨게 하며 삶의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딤후 1:14). 한편 이 구절을 하나님 나라에서 요한을 배제시킨 것으로 생각한다면 13:28(마 8:11)의 내용과 상반된다. 따라서 예수의 의도는 요한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요한의 활동 이후에 온 시대의 변화에 중요성을 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성 경: [눅7:2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 모든 백성들이란 말 안에는 당연히 세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리들이 따로 구별되어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그 당시 일종의 사회적 계급의 한 부류로서 마치 별개의 족속처럼 취급될 정도로 동족 유대인들로 부터미움과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12,13;5:27-30). 이들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것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두워들인 세금을 관청에 보고하고 남은 여분의 세금은 자기들의 몫으로 착복하였다. 랍비 문헌에는 이 세리들이 강도와 동일하게 분류되어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죄인들'로 언급된다(5:30;7:34;마 9:10;11:19;막 2:15). 이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로마 압제자들에게 아부하여 자기 동족을 희생시켜 치부(致富)하고자 하는 변절자인 것으로 생각했다.

⭕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 3:12 주석 참조. 누가가 '요한의 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에 통용된 관례에 의한 표현법이다(20:4;행 18:25;19:3). 요한의 세례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1)메시야적 내지는 종말론적 예비 교육의 측면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임무가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소개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장차 메시야를 통해 시행될 성령 세례의 예비 단계로서 물 세례를 시행하였다(마 3:11). (2)세례 받는자의 생활 변화의 측면이다.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은 단지 혈통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자긍하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들이 메시야를 통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와 구체적 삶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베풀었다(마 3:7-9).

⭕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이 말의 의미는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라고 선언했다는 뜻이다.

성 경: [눅7:3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율법사 - '율법사'에 해당하는 '노미코스'(*)는 '서기관'(*, 그람마튜스)과 동의어로 쓰였다(5:21;10:25;11:45,46,52,53;14:3;마22:35). 이 말은 마 22:35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이는 누가가 '그람마튜스'라는 말보다 '노미코스'라는 말을 이방인들이 듣고 쉽게 이해하리라는 생각에서 사용했을 것이다.

⭕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 예수의 말씀에 대한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있다고 자랑하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를 배척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반면, 세리들과 같이 외견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의 율법사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연구에 헌신한 사람들이어서 율법의 세부 조항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메시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 자체였기 때문이다.

성 경: [눅7:3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이 세대의 사람 - 류만(Luhrman)에 의하면 '세대'(*, 게네아)란 이스라엘 전체보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세대'라는 말 속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 말이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거절한 당시의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마 11:20-24;13:53-58 참조). 이 말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그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의 진노가 암시되어 있다.

성 경: [눅7:3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춤추지 않고...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아무런 상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평일날 장터에서 놀이를 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에 대해 묘사하신다. 아이들은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를 하면서 한 편이 장례 흉내를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도 그 곡(哭)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놀이가 잘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쪽 아이들이 상대편의 행동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이 아이들은 불평했고 서로가 서로를 나무랬다. 이처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그 놀이에 흥을 돋우면서 재미를 더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쪽에도 응하지 않는 아이들처럼 그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의(義)를 내세우며 세례 요한과 예수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공의를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라고 비난하고 세리나 기타 죄인 취급받는 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우셨다는 이유로 예수를 죄인 중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성 경: [눅7:3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원문에는 '왜냐하면'(*, 가르)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은 앞절에서 말씀하신 아이들의 비유가 이 세대를 적절히 묘사하는 이유를 제시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구절과 다음 절을 통해서 요한과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들과 흡사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 떡도 먹지...마시지 아니하매 - 마태는 떡과 포도주를 말하지 않는다(마 11:18).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만을 먹었다(눅1:15;막 1:6). 또한 그는 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구별되어 나실인처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고(민 6:2-4) 광야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였다.

⭕ 너희 말이...들렸다 하더니 - 유대인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활에 대해서 비난했다. 왜냐하면 요한이 자신들의 사악한 잔치와 사치한 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책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요한을 가리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앞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장터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싸움에까지 이르는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도 그와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눅7:3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인자는...먹고 마시매 - 예수께서는 요한이 하는 것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다. 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없다'(막2:19)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가운데서 진리의 본질과 참된 생명의 도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예수의 사역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세리들과도 상종(相從)하신 것을 보면 예수는 인위적인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과 온정을 베푸셨다(5:27-32).

⭕ 보라 먹기를...즐기는 사람이요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처럼 율법적인 금식을 하지 않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폭언을 일삼았다. 요한에 대해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 하여 귀신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오히려 이제는 예수를 향하여 그 반대 이유를 들어 비난한다. 그들이 비난한 대로 만일 예수께서 탐식가요 술주정꾼이셨다면 율법의 기준대로 한다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의 항목에 속했다(신 21:20,21).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난은 곧 예수를 정죄할뿐만 아니라 그를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I. Howard Marshall).

⭕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이러한 비난은 특별히 세리 마태의 집에서 베푼 잔치 때에 예수께서 참여하신 사실과 관련된다(5:27-32). 예수는 세리 마태의 경우 외에도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관심은 특히 잃은 양(15:1-7), 잃은 드라크마(15:8-10), 돌아온 탕자(15:11-32)등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경: [눅7:3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예수께서 세례 요한을 높이심]

⭕ 지혜 -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지혜를 의인화시켜서 표현한다. 특히 잠언의 경우는 지혜에 관해 많은 언급을 하며 특별한 강조를 하고 있다(잠 1:20;8:22-31). 그리고 특별히 사 9:6과 11:2는 메시야를 지혜와 긴밀하게 연관시킨다. 여기서 '지혜'란 곧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전 1:23,30). 성경은 지혜의 출처를 하나님께로 부터 찾는다. 욥기의 저자는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욥 28:12)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잠언서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갈파하였다(잠 1:7).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할 때 그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며, 이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할 수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특별히 성령과 관계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얻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행 6:3;고전 2:6;12:8;엡 1:17;골 1:9;3:16;약1:5;3:15-17).

⭕ 자기의...옳다 함을 얻느니라 - 마태는 '그 행한 일로...'라고 묘사했다(마11:19). 여기서 '자녀'란 지혜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롬 9:7,8). 그리고 '옳다 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카이오데'(*)는 '바르게 선포되다', '옳음이 밝혀지다'는 뜻이며 원문상으로 이 말은 문두에 나와서 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의 의미는 쉽게 설명하면 이러하다. 그리스도와그 복음이 대적들에 의해 곡해되고 비난 받으며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큰위로와 기쁨이 되며 그들에 의해 세계 만방에 선포되고 옳다고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눅7:3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한 바리새인이 -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다.

⭕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한 일은 일견 용기있는 태도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청한 이유가 예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하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예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초대한 예를 두 곳에서 들고 있다(11:37;14:1).

성 경: [눅7:3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죄인인 한 여자 -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향유담은 옥합 - 이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다. 이런 류의 고급 향류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눅7:3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는 그녀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자기 머리털로 씻고 -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신 예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일이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를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된다.

⭕ 그 발에 입맞추고 -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 '입맞추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께서 들어 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의 입을 맞췄다는 의미이다(Robertson).

⭕ 향유를 부으니 -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다. 그녀는 예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가지 살필 수가 있다. (1)복음을 듣고 알아야 한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한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한다(자기 머리털로 씻고). (4)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한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사를 해야 한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다.

성 경: [눅7:3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기름부음을 받으심]

⭕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시몬은 여인의 도유(塗油)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같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는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이다.

성 경: [눅7:4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다. 바리새인은 마음 속에 예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는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된다.

⭕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다.

성 경: [눅7:41]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빚진 자가 둘이 있어 -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다(17:10;마 6:12;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마 6:12).

⭕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다.

성 경: [눅7:42]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이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니다.

성 경: [눅7:43]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두 빚진 자의 비유]

⭕ 시몬이 대답하여...받은 자니이다 - 예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예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는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신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이다.

성 경: [눅7:44]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다(창18:4;19:2;24:32;삿 19:21 참조). 그러나 시몬은 예수를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다.

⭕ 이 여자는...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 예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한다.

성 경: [눅7:45]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게...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다(창 29:13;45:15;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다. 예수는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께 묵언(默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 경: [눅7:46]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준다.

성 경: [눅7:47]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여기서 '많은'(*, 폴라이)이란 강조하기 의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사하여졌다'(*, 아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 '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은 억측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이다(엡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과 상치된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한다.

성 경: [눅7:48]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신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7:49]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를 신성 모독자로 정죄하였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다.

성 경: [눅7:50]

주제1: [인자의 복된 소식]

주제2: [용서받은 여인]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하였다'(*, 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 준다. 다만 예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이다(8:48 주석 참조).

⭕ 평안히 가라 - 이는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18:6;삼상 1:17;삼하 15:9;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한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를(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행 2:28;엡 6:23;몬 1:20 ;히 9:22).

성 경: [눅8: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이후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카덱세스'(*)는 '후에', '순서대로'(1:3), '뒤를 이어서' 등의 뜻이며 반드시 시간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의미는 7:36-50의 사건이 있은 후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있다.

⭕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 앞에서 시간에 관하여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은 것처럼 장소에 관해서도 정확한 정보를 말해주지 않고 단지 '각 성과 촌'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아마 이 지역들은 갈릴리지방에 있는 고을들이었을 것이다. 혹자는 4:15와는 달리 본문에서 '회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들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마 12:9-14, 13:54-58;요 18:20을 볼 때 예수께서는 회당에서도 가르침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고 '각 성과 촌'이라는 축소(縮小)된 표현 속에는 '회당'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두루 다니시며'(*, 디오듀엔)는 누가만의 독톡한 언어로서 이곳과 행 17:1에만 나오며 '디오듀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이다. 이 단어가 미완료 능동태인 점과 또한 이 단어 속에는 '이리 저리 길을 만들다'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은 예수의 사역이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progress)되었으며, 성읍이나 촌, 또는 집이나 회당에서, 심지어는 노천이나 길 등에서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셨음을 말해준다.

⭕ 하나님의 나라...복음 -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요약된다(4:43).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예수께서 하였던 일들을 보건대(7:22,48) 죄의 결과로 인해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왜곡된 인간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복음이란 바로 이런 일들이 예수로 인해 현재에 실현되기 시작했으며 장차 완성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 참조).

⭕ 열 두 제자 - 이들은 6:12-16에서 예수의 정규 제자로 선택된 자들이었으며 예수께서는 이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밤을 세우며 기도하기까지 하셨다. 이제 이들은 공적인 예수의 수행원(隨行員)으로 언급되고 있는 바 이들은 예수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스승의 사역을 계승할 수 있는 진정한 사도로 설 수 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성 경: [눅8: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악귀를...병 고침 받은...여자들 - 예수를 수행하여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는 열 두제자 외에도 다수의 여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대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몇몇 신실한 여인들을 전도 여행에 합류(合流)시킴으로써, 천국의 일꾼될 자격이 외적 조건에 달려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본서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하며 과연 천국이 어떤 자들의 것인지에 관해서도 암시하고 있다. 곧, 천국은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시인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겸손히 간구하는 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18:13,14).

⭕ 막달라인...마리아 - 마리아라는 이름은 매우 흔했으므로 이 특정한 마리아를 구별하기 위해서 '막달라'라는 지명을 이름 앞에 붙였다 '막달라'는 '탑' 또는 '망루'라는 뜻의 지명으로 갈릴리 바다의 서해안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이다. 이 마리아를 특징지워 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녀가 과거에는 일곱 귀신에 들려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였으나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어 지금은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는 점 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마 12:45) 이 여인에게 임한 고통이 얼마나큰 것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은총을 입었으므로 그녀가 예수에게 전적인 헌신을 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인 바 예수를 따랐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짐작된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의 수난사에서 독보적(獨步的)인 증인이 된 점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할때 그 자리에 있었으며(마 27:55,56;막 15:40;요 19:25), 예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고(마 27:61;막 15:47;눅 23:55), 주일날(안식 후 첫날)이른 아침에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고(마 28:1;막 16:1;눅 24:10), 예수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자도 바로 그녀였다(막 16:9;요 20:1-18).

성 경: [눅8: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섬기는 여자들]

⭕ 요안나 - 이 여인은 24:10에서 예수의 부활 사실을 두 천사로부터 통고 받은 인물로 나오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본절에서 그녀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라는 사람의 아내로 소개된다. 여기서 헤롯은 당시 갈릴리를 지배하던 헤롯 안티파스로 보이며 구사라는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오므로 그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직업을 말해주는 청지기는 그 직책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청지기'의 헬라어 '에피트로포스'(*)가 '넘겨 준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재산을 넘겨 받아 관리하는 재정 담당관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직책을 가진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매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자였음에 틀림없다. 고뎃(Godet)과 같은 학자는 '구사'라는 관리가 다름 아니라 그 아들을 예수께서낫게 하였던 요 4:46이하의 관리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럴 경우 그의 아내 요안나가 예수를 따르며 섬겼던 이유는 각별(恪別)한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를 대비하여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낮은 계층의 여성과 요안나와 같은 부유한 계층의 여성을 모두 제자로 받아들이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의 보편성(universality)을 보여 주었다는사실이다.

⭕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 - 수산나라는 이름의 뜻은 '백합'인데, 그 이름대로 매우 친절한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름이 언급된 세 명의 여인들 외에도 수명의 여자들이 함께 하였다는 사실도 전하여 주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여자들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면에서 여자를 남자들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던 유대인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해주었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여자들에게서도 남자들에게서와 똑같이 구원의 가능성과 복음의 증언자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 자기들의 소유로...섬기더라 - 이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원을 어떻게 얻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줄 수 있는 일부분의 자료가 된다는 점과 예수의 선교 사역 배후에는 이와같은 여인들의 헌신적인 섬김이 있었음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 13:29에 의하면 예수와 제자들 일행에게는 공동의 '돈 궤'가 있어서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거나 가난한 자들을 도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돈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이와같이 예수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신들의 소유를 헌금한 것에 의해 충당(充當)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대의 순회 설교자들이 부유한 여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경우는 혼히 있었던 일이나, 본문의 여인들이 예수를 헌신적으로 섬긴 것은 그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며 그들이 예수와 참된 정신적 영적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더구나 이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 '섬기더라'이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에코눈'(*)이 '디아코네오'(*)의 미완료 과거 능동태임을 감안할 때 여인들의 재정적인 섬김은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적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도움은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성 경: [눅8: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큰 무리를 이루니 - 누가는 현재의 시점과 장소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 않으나 마13:1-23;막 4:1-20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형제, 자매, 모친이 누구인가에 대한 교훈을 하고 난 후 가버나움의 어느 해변에서 배를 타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 동네에서 모여 들었는데, 이들은 아마 예수의 교훈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 비유로 말씀하시되 - 디아 파라볼레스(*)는 '비유의 방법으로'라는 뜻으로 비유로 말하는데에는 무언가 의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10절주석 참조). 여기서 비유는 헬라어 '파라볼레'(*)에 해당하는데, 이 말은 '곁으로'를 뜻하는 '파라'(*)와 '던지다'를 뜻하는 '발로'(*)의 합성어로 한 물건을 다른 물건 곁에 두고 비교함으로써 그 실체(實體)를 정확히 아는 방법을 뜻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어려운 이치를 다른 것에 빗대어 쉽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모든 세대에 걸쳐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존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비유는 그 단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며 또한 복음의 의미를 학술적이기 보다는 일상적으로 쉽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복음의 원뜻을 너무 과도하게 노출(exposure)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위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실수를 막아주는 보호막 구실을 한다.

성 경: [눅8: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씨를 뿌리는 자 - 원문상으로는 씨를 뿌리는 자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있다. 이는 씨를 뿌리는 전체를 대표하거나 또는 예수께서 본 비유를 베푸실 당시 주위에 씨를 뿌리는 특정한 사람이 있었음을 가리킨다. 아무튼 예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대다수의 청중들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5-8절은 씨뿌리는 비유에 관한 말씀으로서, 씨뿌리는 자나 씨앗 자체보다도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토질(土質) 곧 성도들의 마음밭에 강조점이 있다.

⭕ 길가에 떨어지매 - 밀이나 보리 등을 사람이 손으로 뿌리는 일은 통상적이었다. 팔레스틴의 토지는 보통 가늘고 길게 분할되어 있고 분할된 밭 사이에 좁은 길이 있어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다. 씨를 뿌릴 때는 이 좁은 길에도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곳에 떨어진 씨는 당연히 뿌리를 내릴 수가 없으며 농부들이 지나다닐 때 그 발에 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되어 버리게 마련이었다.

성 경: [눅8: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바위 위에 떨어지매 - 마태(마 13:5)나 마가(막 4:5)는 '돌밭'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돌로만 이루어진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밭에 간혹 바위가 있어 그 바위위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땅에서는 씨에서 싹이 나서 조금 자라기는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고 자양분이 없으므로 해가 뜨면(마 13:6) 곧 말라 죽게 된다.

성 경: [눅8: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헥커(Hacker)와 같은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히브리 성경에는 가시나 가시 종류의 식물을 의미하는 용어가 22종류나 된다고 한다. 아무튼 가시 떨기 속에 뿌려진 씨는 싹이 나고 자라기는 하지만 왕성한 성장력들 지닌 가시떨기에 자양분(滋養分)을 빼앗겨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성 경: [눅8: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좋은 땅에 떨어지매 - 충분한 습기와 자양분을 구비하고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성장하여 백 배의 결실을 맺는다. 마태나 마가의 경우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3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나(마 13:8;막 4:8), 누가는 나머지 두개는 생략한 채 백 배의 결실만을 언급함으로써 풍성한 결실을 강조하고 있다.

⭕ 들을 귀 있는자 - 들려 준 이야기의 표면적 의미 외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러한 표현은 종종 예수께서 중요한 교훈의 종결 어귀로 사용하신 것이다(14:35;마 13:9, 43 등).

성 경: [눅8: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제자들이...물으니 - 유감스럽게도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비유에 대해 적절한 응답을 한 청중도 없었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톤'(*)은 '심문하다'의 뜻을 가진 '에페로타오'(*)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집요한 질문을 하였음을 뜻한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알려고 하는 열정적인(passionate)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성 경: [눅8:1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하나님 나라의 비밀 - 비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아'(*)는 '가둔다'의 뜻을 지닌 '뮈오'(*)에서 온 말로 숨겨겨 있는 사실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 비로소 알 수있는 참다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그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부여받을 때 뿐이다. 그런데 그 선물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선택적(選擇的)으로 주어진다. 예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과 그밖의 제자들(막 4:10)에게는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 즉 군중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닫혀 있음을 말해준다.

⭕ 이는 저희로...함이니라 - 본문은 사 6:9,10의 내용을 축약적으로 인용한 것인데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셨던 목적을 설명해 준다. 한편 마태는 사 6:9,10을 보다 명확하게 인용하고 있는데(마 13:13-15),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였다는 점에서 본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이 두 복음서들의 기록은 상호 보충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마태의 문장은 '호티'(*)절로 되어 있어 '왜냐하면...'의 구문으로 이해되는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완악(wicked)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 듣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마 13:15). 사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 원하지만(마28:19,20;요 3:16;딤전 2:4;벧후 3:9)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5:21,30;6:2,7,11;7:30;마 23:37)증거한다. 한편 누가의 문장은 '히나'(*) 구문으로 되어 있어 '...하기 위하여'로 이해되는데 이는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을 말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사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비밀'을 감추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성 경: [눅8:1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하나님의 말씀 -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어귀로 본서에 네번(11,21절;5:1;8:11,21;11:28) 나오고 사도행전에는 12회나 사용되고 있으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한 차례씩만 사용되고(막 7:13;요 10:35), 마태복음에는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9절) 예수의 답변은 '씨를 뿌리는 자'보다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물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 자신일 것이다. 씨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천국 말씀(마 13:19)이라면 그것은 예수 자신이고(요 1:14) 복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8:1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길가에 - 계속되는 설명은 씨가 뿌려진 밭(5-8절)이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 자신임을 말해준다. 좁게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전인격적인 인간을 말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길가와 같은 상태의 인간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에 대해 냉담(冷談)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 마귀 - 마태는 '악한 자'(포네로스, * )로, 마가는 '사단'(*, 사타나스)으로 표현하는데 비해 누가는 '마귀'(*, 디아볼로스)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길가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데 그치고 받아들이기를 보류(保留)하고 있을 때 그 말씀을 빼앗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5절과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씨앗은 밟히기도 하고 새에게 먹히기도 한다는 점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려는 마귀의 훼방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 뿐이다(엡 6:13-17).

성 경: [눅8:1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바위 위에...시험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께서는 뿌리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이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말씀을 듣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 버린다. 한편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믿음이 참인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이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마치 뿌리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것이 된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약 1:12).

성 경: [눅8:1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 경: [눅8:1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성 경: [눅8:1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등불 - 여기서 '등'은 한쪽 끝에 손잡이가 달리고 다른 한쪽에는 심지를 꽂도록 구멍이 나있는 대롱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접시모양의 적갈색 그릇이었다. 등의 윗부분에는 기름 공급용과 공기 소통을 위한 두개의 구멍이 있었다.

⭕ 그릇으로 덮거나 - 마태복음 5장 15절이나, 마가복음 4장 21절에는 '말'(*, 모디오스) 즉 '되'로 표현되어 있는데 비해 본문에는 단지를 뜻하는 '스큐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곡식이나 밀가루 등을 넣어서 보관하는 용기를 뜻한다. 등불을 피워놓고 이 그릇으로 덮어 버린다면 당연히 빛은 아무 곳도 비출 수가 없을 것이다.

⭕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 이 말은 침상을 의미하는 바 등불을 켜서 침상밑을 밝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등경 - 이 기구는 등불을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를 말한다. 이것은 방 중앙에 있는 기둥에 부착된 쪽선반이거나, 벽에서 방 안쪽으로 돌출(突出)되어 있는 돌받침이거나 또는 이와 동일한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금속 토막일 수도 있다.

⭕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 16-18절의 말씀이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와의 연관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다면 본 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만일 숨겨진 것이 악이라면 이 말씀은 10절과 12-15절에 언급되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으로 임하게 될 것임을 말하며 둘째, 만일 숨겨진 것이 선이라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적으로 가르쳐 주신 진리의 말씀이 장차 제자들에 의해 밝히 드러나리라는 말씀이다. 셋째, 본문의 말씀이 앞의 비유와 무관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라면 빌 2:15의 말씀처럼 좁게는 제자들이, 넓게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진리의 빛으로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어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마 5:16).

성 경: [눅8:1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숨은 것이...감추인 것이...없느니라 - 마치 '비밀은 없다'는 뜻의 속담과 같은 것으로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 말씀이다(마 10:26;눅 12:2). 빛이 있는 한 감추이거나 숨겨진 것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서의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 동시에 어둡고 부정적인 국면들을 드러내고 밝혀내야 한다. 여기서 사실상 중요한 것은 신앙인들이 빛으로 온전히 서느냐의 여부이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참다운 빛으로 선다면 그 빛에 의해서 숨겨지고 감추인 것이 드러나기란 필연적(inevitable)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8:1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등불의 비유]

⭕ 어떻게 듣는가...삼가라 - 말씀을 듣는 자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해주는 구절이다. 겸손하며 진실되게 말씀을 새겨 듣는 사람은 있는것 위에 더욱 풍성한 것을 받게 되지만 교만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기게 된다. 이는 경제적 차원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와는 전혀 무관(無關)한 것이며 영적 생명의 법칙에 관계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여 풍성한 생명의 결실을 거두기를 원하시지만, 이러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거나 예수의 달란트 비유 중에 나오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장시켜 버리는 자는(마 25:24-30)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성 경: [눅8:1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가까이 하지 못하니 - 마태와(마 12:46-50) 마가(막3:31-35)도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이 이야기를 바알세불 논쟁의 결론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과 다르다. 마태와 누가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마가에 의하면 이들이 찾아온 이유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어 예수를 데려가기 위함이었다(막 3:21). 그러나 19-21절의 말씀은 예수께 대한 친속들의 무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방문을 또 다른 차원의 교훈(敎訓)을 위한 동기로 활용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한편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만나려 하였으나 무리로 인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는 데서 우리는 당시에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리들은 예수께서 일으키는 갖가지 이적들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의 가르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마13:13).

성 경: [눅8:2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고하되 - 막 3:31,32은 이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즉 먼저 마리아 일행이 한 특별한 전달자를 보내어 면회를 신청하고 그 사람은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면회를 요청하였으며 그리고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예수에게 친속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으로 되어 있다.

성 경: [눅8:2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예수의 모친과 형제들]

⭕ 내 모친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 마태(마 12:48)와 마가(막 3:33)는 이 부분에 대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는 예수의 반문을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이를 생략한 채 바로 교훈적 답변을 기록한다. 먼저 우리는 '내 모친과 내 형제'(*, 메테르 무카이 아델포이 무)라는 표현이 관사없이 쓰여져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죄를나눈 실제의 모친과 형제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친과 같은 사람, 형제와 같은 사람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Plummer). 이는 피를 나눈 육신의 혈육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요 19:26,27) 영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암시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은 '피를 나눔'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 얼마든지 보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혈통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요 1:13의 말씀은 이것을 밑받침해 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의 뜻(마 12:50;막 3:35)에온전히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며 이것에 의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의가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불분명한데, 마태에 의하면(마 12:49) 제자들을 가리키고 마가에 의하면(막 3:34) '둘러앉은 자들'을 가리킨다.

성 경: [눅8:2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하루는 - 본문에 의하면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가 앞의 이야기와 상당한 시차(時差)를 두었던 것처럼 보이나 막 4:35에 의하면 이때는 그날 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려주신 날 저녁 해질 무렵이었다.

⭕ 호수 저편으로 - 마태(마 8:24)와 마가(막 4:39)는 '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 유대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누가는 '갈릴리 바다'라는 말이 이방인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될 것으로 보아 '호수'라는 표현을 사용한듯하다.

⭕ 떠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고'(*)는 항해 용어로 '출항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특히 사도행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13회).

성 경: [눅8:2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잠이 드셨더니 - 예수께서는 쉴새 없이 진행되는 선교 사역으로 인해 매우 피곤해 있었으므로 배에 오르자 깊은 잠에 빠져들어가셨다. 한편 마태나 마가의 기록에 비해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잠이 드셨다는 사실이 더 일찍이 언급되어져 있다. 이는 폭풍의 흉흉함과 예수의 평화로운 휴식을 대조시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 광풍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일랖스'(*)는'돌풍'(突風) 또는 '회오리 바람'을 뜻한다.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갈릴리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면보다 200m가량 낮고 주변에는 높은 협곡들이 둘러싸여 있다. 높은 곳에 있던 차가운 바람은 깔떼기 역할을 하는 협곡(ravine)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내려와 호수면에 있던 더운 공기와 충돌하여 폭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 광풍은 배에 몰아쳐 배의 조종을 불가능하게 할뿐 아니라 마태의 표현처럼 '큰 놀'을 일으켜 배를 전복시키거나 가라앉힐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 배에 물이 기득하게 되어 - 게속해서 몰아치는 높은 파도는 배 안에 물을 퍼부었고 그 물을 제자들이 퍼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물은 점점 배를 채워 마침내 배는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성 경: [눅8:2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주여 주여...죽겠나이다 - 제자들 가운데는 배를 다루는 일에 전문가인 사람들도 있었으므로(눅 5:1-11),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대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고 마침내는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자들은 예수를 깨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주여' '주여'라는 반복된 외침은 그들이 처한 다급한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마가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곤경에도 불구하고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께 대해 원망하는 투의 말을 기록하고(막 4:38), 마태는 탄원의 말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8:25), 누가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단지 제자들의 급박한 보고만을 언급한다. 이는 예수께서 깨어나기만하면 제자들을 구해주리라는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 꾸짖으시니 - 마치 바람과 물결에 인격이 있는 것처럼 꾸짖었다는 이 표현에 대해 혹자는 예수께서 바람과 물결 배후에 있는 악령(惡靈) 또는 악마적인 세력을 꾸짖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Tyndale).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을 꾸짖었던 것처럼(눅 4:39), 본문에서도 바람과 물결 그 자체를 꾸짖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Hendriksen). 이는 자연계를 한마디 말씀으로써 제어하시는 예수의 신적 권능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 잔잔하여지더라 - 마태(마 8:26)와 마가(막 4:39)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하여 잔잔해진 상태를 부각시킴으로써 예수의 권능을 강조한다.

성 경: [눅8:2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풍랑을 잔잔케 하심]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다소 위급한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함께 있는 한 안전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을 질책하신 말씀이다(막 4:40). 두려움에 떤 제자들의 불신앙은 예수의 평안한 모습과 대조되며, 시험의 때에(13절) 마땅히 취해야 할 인내의 태도를 망각하였음을 보여준다. 막 4:40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는 강한 어조의 책망과 비교된다.

⭕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 제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목격하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여기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이함은 조금전에 자연력의 위력 앞에서 느꼈던 죽음의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신적인 능력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敬畏心)을 가리킨다(7:16).

⭕ 저가 뉘기에...순종하는고 -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고(6:8) 귀신을 쫓아내며(6:18),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을 목격하였다(7:11-17). 그럴때 마다 그들은 놀라기만 할 뿐 예수를 선지자중 한 사람으로 여겼었다(7:16).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은 너무 놀라운 것이었으므로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을 묻는다. 자연 현상을 지배하시는 예수의 권능에서 신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신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놀라운 감정에 사로잡혀 '저가 뉘기에'라는 물음만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되지 않은채 하나의 강한 의문으로 남는다. 도대체 자연 현상을 한 마디의 명령으로 순종시키는 예수는 누구인가?

성 경: [눅8:2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거라사인의 땅 - 이 지명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첫째 마가와 누가의 기록상으로는 지명이 일치하지만 마태는 '가다라'(*, 가다레논)라고 기록함으로써 불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까지 거리가 무려 40km이상 떨어져 있어서 예수께서 육지에 내린 직후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고 기록한 27절과 부조화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가다라'는 호수에서 9km정도 떨어져 있어 거리상 거라사 보다는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9km의 거리가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역시 지지받기 힘들다. 한편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제 3의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오리겐(Origen)이 주장한 것으로 본래의 지명은 게르게사(Gergesa)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복음서 기자들이 이 지명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알고 있는 부근의 마을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는 가다라 지방의 가파른 동쪽 제방에 위치한 '게르사'(*)라는 지명이 바로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주는 곳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난 곳이 갈릴리 호수 근처인데 그곳을 '거라사' 지방 또는 '가다라'로 표현한 것은 그곳이 이 지명들의 지배권(支配權)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증서는 없으며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성서의 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 마지막 견해를 지지할 수 있다.

성 경: [눅8:2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들린 자 하나 - 누가와 마가는(막 5:2) 귀신들린 자 한 사람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둘이었다(마 8:28).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귀신들린 자의 수가 아니라 이방 땅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사실 자체였다.

⭕ 오래 옷을...거하지도 아니하며 - 이 귀신들린 자는 집을 나가 자신을 정상 생활로부터 격리하였으며,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모두 잃어버린 채 벌거벗고 산 지 이미 오래되었다. 표면적인 증상으로 미루어 볼 때는 악성 정신질환을 앓은 것 같으나 누가는그가 분명히 귀신에 들려있다고 확증한다. 이 귀신들린 자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일도 하였다(막 5:5). 인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태를 보는 듯한 이 모습은 죄인의 영적인 상태를 형상화(刑狀化)한 것인지도 모른다.

⭕ 무덤 사이에 - 무덤이 귀신들린 자의 거처로 묘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팔레스틴에는 바위에 동굴이 많아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은거하는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무덤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귀신들린 자의 모습은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는 죄인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일 수있다.

성 경: [눅8:2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 귀신들린 자가 엎드려 절한 것은(막 5:6) 결코 경배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능력에 굴복한 표현이다. 눅 4:33-37에서나 그 밖의 귀신 축출 이야기에서처럼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의 고백은 예수와 화해를 하기 위한것도 아니고 예수께 대한 복종과 신앙 고백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예수의 마음을 약하게하여 적절한 타협을 얻어내려는 본능적 자기방어의 술책(intrigue)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귀신의 고백은 정확한 사실을 말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으며(25절), '저가 뉘기에'라는 의문만을 제기했었다. 결국 귀신의 고백은 제자들과 복음서 독자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질 수 있다.

⭕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히브리인들의 관용어로 '나를 버려두고 네 일에나 신경쓰라'는 뜻이다. 귀신은 예수의 명령을(29절) 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고백을 하고 그 앞에 엎드려 굴복(屈服)의 표시를 하여 예수의 마음을 누그려 뜨려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귀신은 예수께서 자기를 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요일 3:8). 그리하여 귀신은 예수에게 피차에 상관말자고 말한 것이다.그러나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마귀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을 하고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이다(8:12;요 3:16).

⭕ 괴롭게 마옵소서 - 마태에 의하면(마 8:29) 귀신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말했다. 귀신의 최후가 괴로움과 멸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점을 암시한다(계 20:1-3).

성 경: [눅8:2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이...광야로 나갔더라 - 귀신이 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귀신들린 자는 늘상 정신 이상의 상태로 있었고(27절) 때로 귀신의 특별한 작용에 의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마 8:28).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매어 두곤 했지만 귀신들린 자는 번번히 그것을 끊고 광야로 나갔다(막 5:4).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주체적 의지를 파괴하고 마귀의 의지대로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 사람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마 8:28-34;9:32;12:22;15:22;막 1:23-26;16:9). 그러나 이처럼 강한힘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 예수 앞에서는 순한 양같이 꼼짝못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성 경: [눅8:3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네 이름이 무엇이냐...군대라 -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묻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대의 민속 신화에는 귀신 축출자가 귀신의 이름을 물어서 귀신에 대한 우위(優位)를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하튼 귀신의 이름은 '군대'로 드러났는데, 이 이름은 많은 귀신이 들어갔음을 뜻한다.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기온)는 군대 용어로 6,000명의 단위 군대를 뜻한다. 한 귀신이 한 사람에게 있는 경우와 한 사람에게 여러 귀신이 있는 경우를 찾아볼수 있다. 가령 2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한때는 일곱 귀신에 들려 있었음을 전해주는 보도가 있고 11:24-26에는 한 사람이 한 귀신에 들렸을 때보다 일곱 귀신에 들려 더악화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것에 비추어 볼때 군대 귀신에 들린 이 사람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받았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눅8:3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무저갱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뷔쏜'(*)은 부정 접두어 '아'(*)와 '깊은'의 의미를 가진 '바두스'(*)의 합성어로 바닥이 없는 깊은 장소를 뜻한다. 이는 끝없이 깊은 곳이며 마귀가 일시적으로 갇힐 곳이다(계 9:1;20:3). 또 마 25:41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 표현되어 있다.

성 경: [눅8:3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많은 돼지 떼가...이에 허하신대 - 막 5:13에 의하면 이 돼지 떼는 무려 2,000마리에 달했다. 귀신은 이제 예수의 명을 거역하고 그 사람에게 계속 있을 수 없음을 알게되었다. 그러자 귀신은 자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는 이를 허락하셨다. 결국 2,000마리에 달하는 돼지떼의 몰사로 말미암아 돼지떼의 주인에게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 돌아갔고 이 사실은 혹자들에게 도의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 사람의 영혼이 2,000마리의 돼지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다는 점이다. 예수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 16:26).

성 경: [눅8:3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비탈로 내리달아...몰사하거늘 - 사건 발생 지점은 분명히 호수에 근접한 곳이었다. 갈릴리 호수 동편에는 급한 비탈이 있고 비탈 위에는 평지로 되어 있어 그곳에서돼지를 먹였다.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자 이천여 마리에 달하는 돼지 떼가 비탈길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沒死)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에 대해서 혹자는 왜 예수께서 귀신들을 돼지 떼에 들여 보내 다 몰사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하셨느냐고 문제를 제기하기도한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짐작해 볼 수 있는것은 다음과 같다. (1)앞절 주석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어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이천 마리의 돼지는 오히려 하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그 귀신들에 붙잡혀 무수한 고통을 당할 제2, 제3의 피해자는없을 수 있게 되었다. (3)율법상 돼지는 그 고기를 식탁에 올릴 수없는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었다(레 11:7,8). 따라서 이들을 몰사시킨 예수의 처분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4)예수께서는 온 우주의 주권자로서 세상에 있는 사물을 임의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과 권능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예수의 판단과 행위는 정당하며 실수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눅8:3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치던 자들이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부정(unclean)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물론 먹지도 않았다(레 11:7). 또한 탈무드에는 '돼지를 기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라'는 격언이 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 주변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돼지를 치던 자들은 이방인으로 짐작된다.

⭕ 도망하여...고하니 - 돼지를 치던 자들은 예수와 귀신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목격(目擊)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치던 돼지 떼의 손실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고 또 다른 한편 예수의 권능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도망'하였다는 표현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이 신기하고도 두려움을 느낄 만큼 놀라운 사건에 대해 동리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성 경: [눅8:3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 옷을 입었다 함은 그가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완전한 정상인이 되어 예수의 발 아래 앉아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은 자기를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 주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의 경배를 드렸을 것이다. 불과 조금전만 해도 발가벗은 몸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며 때로는 괴성과 괴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였던 사람이 이제는 옷을 단정하게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점잖게 앉아있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야기시켰다. 그들이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지금 그들에게 직면된 상황이 매우 파격적(破格的)임을 뜻하며 인간의 논리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또는 신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성 경: [눅8:3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구원받은 것을...이르매 - 아직 사건의 자세한 전모를 모르던 상황에서 돼지치는 자들이 자세한 사실을 증거하자 몰려온 사람들의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어 간다. 한편 '구원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데'(*)는 '구원하다', '안전하다' '견실하다'의 뜻을 가진 '소스'(*)에서 유래한 '소조'(*)의 제 1 부정과거수동태 직설법이다. 귀신들린 상태에서 원상 회복된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먼저 그는 귀신에 붙잡힌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더 나아가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적인 구원을 받기에 이르렀음에 틀림없다. 결국 구원은 육신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모든 저주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한다.

성 경: [눅8:3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시기를 구하더라 - 예수께서 일으키신 귀신 축출 사건은 그곳 주민들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크게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은 신적인 능력에 접한 인간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25절에서도 제자들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의 권능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거니와, 거기서의 두려움은 '신적인 능력'에 대한 경이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저들이 느낀 두려움은 미신적인 것이었다고 짐작된다.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이천여 마리의 돼지 떼가 물에 빠져 몰사한 사건은 자기들이 믿었던 미신의 재앙(woe)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은 더없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돼지 떼에 대해서는 감히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떠나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죽은 것과 다름없던 귀신들린 사람의 구원을 보았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의 손실만을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실수를 범한 셈이다. 예수께서는 그 지방에서도 구원 사역을 펼치실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무리들로부터 아무런 미련없이 떠나신다. 이것은 예수를 알아보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던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와는정반대의 일이었다(요 4:40).

성 경: [눅8:3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귀신 나간 사람이 - '귀신 나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렐뤼데이'(*)는 '엑세르코마이'(*)의 과거 완료 능동태로서 과거 시점에서 완료된 상태를 뜻한다. 즉 귀신이 나간 것은 이제 이미 과거의 일이며 이제는 완전히 정상인임을 말한다.

⭕ 구하였으나...저를 보내시며 - 이 구문은 미완료과거 중간태로 되어 있어(*, 에데이토 아우투) 몇번이고 반복해서 계속 구하였음을 뜻한다. 이 사람은 너무나 귀한 은총을 체험했으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거듭되는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집으로 돌려보내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그를 위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처지(處地)와 재능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당신을 섬기게끔 하신다(요 21:21,22).

성 경: [눅8:3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거라사의 광인]

⭕ 하나님이 네게...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 예수께서는 그를 단지 귀신의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증거자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로 하여금 그 지방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전파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일을 일일이 전하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주님이 귀신 축출 사건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일과 자기의 일을 동일시(同一視)하는 놀라운 계시가 있다. 이것은 예수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나아가 제자들이 제기한 바 있는 예수의 신분에 관한 물음에 대한(25절) 명확한 대답이 되는 것이다.

⭕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하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성내에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온 성'을 다니며 자기에게 있었던 일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직접 예수를 따르던가 아니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저마다 은총을 나누어야 할 소명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눅8:4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환영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덱사토'(*)는 '기쁨으로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무리들이 예수를 진심으로 환영하였음을 뜻한다. 이들이 그렇듯 환영한 이유는 아마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다 기다렸음이러라'는 표현 속에는 예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성 경: [눅8:4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회당장인 야이로 - 회당장은 회당의 수반(head)으로 집회를 인도하고 회당 건물의 유지, 보존, 운용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예배의 질서와 신성함을 유지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또한 토라(율법)를 낭독하거나 설교하는 사람을 선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회당장은 지방에서는 최고의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사회적 지위가있고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 발 아래 엎드리는 것은 동양의 보편적인 경의의 표시였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경의를 표하며 자기 집으로 가주기를 간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대한 사건이 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8:4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열 두 살 먹은 외딸 - 야이로의 의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가 설명되고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자식인 외딸이 그것도 열 두살의 젊은 나이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열 두살이라는 나이가 유대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바야흐로 결혼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나이를 뜻하므로 이제 막 피어 나려는 한 여성의 인생이여기서 마감 된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죽어감이러라'의 헬라어 '아펠네스켄'(*)은 미완료 과거로 되어 있어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외동딸이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야이로의 애타는 심정은 체면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 무리가 옹위하더라 - 아마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도움으로 회생하게 되기를 바라는 동정의 마음으로 또는 과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수히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몰려든 무리들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이 살아있는 동안에 도착하시지 못하게끔 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더욱 결정적인 이유는 가는 도중에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43-48절).

성 경: [눅8:4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 이 여인이 병을 앓았던 햇수와 야이로의 딸이 살아온 햇수가 우연히도 일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혈루증'(血漏症)이라는 병은 대개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boil)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이 병은 의식적(儀式的)으로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병에 걸린 자를 멸시 천대하였고 완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었다(레 15:1-12, 25-27).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 여인은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끝임없는 투병 생활을 해왔으며, 마침내는 예수께 구원을 얻고자 무리들 틈에 끼어 예수에게 접근하여 온 것이다. 만약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가 발각되는 때에는 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대단한 결단력과 의지를 보여준 행위였다.

⭕ 고침을 받지 못하던 - 열 두해를 통하여 병고침을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갖고 있는 가산(家産)을 다 탕진하였지만(막 5:26)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절망의 상황에서도 여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성 경: [눅8:4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옷가에 손을 대니...그쳤더라 - 여인은 매우 은밀히 예수의 뒤로 접근하여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었다. 그녀가 그렇게 은밀히 접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병이 부정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예수께 직접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것은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이었다(막 5:28). 여인이 손을 댄 옷은 유대인들이 입는 겉옷, 더 정확하게는 이 겉옷에 달린 술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의 겉옷은 네모 반듯한 정방형의 천인데 가운데는 머리를 내어놓을 구멍이 있고 그옷의 네 귀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하였다. 이 술은 율법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민 15:37-41) 바리새인들은 과시하기 위하여 이것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비난을 받기도 했다(마 23:5). 하여튼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인은 그녀의 믿음대로 혈루증이 즉시 그치는 이적을 경험했다. 한편 '그쳤더라'(*, 에스테 헤 뤼시스)는 '흐르기를 그쳤더라'는 뜻으로 누가에게 볼 수있는 독특한 의학적 표현이다.

성 경: [눅8:4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 예수의 이 물음은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각 사람의 심중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요 13:21-30).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런 질문을하신 까닭은 다음의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여인의 병이 나았음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증거하기 위함이다. (2)만약 그녀가 예수의 옷을 만진 이유가 미신적 기대 때문이었다면 그녀의 믿음 속에 들어 있는 미신적(迷信的) 요소를 제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다. (3)사람들로 하여금 여인의 병 나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4)그녀에게 구원의 확신과 아울러 위로와 평강의 말씀을 주시기 위함이다.

⭕ 옹위하여 미나이다 - 예수 주변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들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밀치며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예수의 옷에 손을 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질문은 제자들이 듣기에 조금은 의아스러울 수도 있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점잖게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예수의 질문을 무시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막5:31에 의하면 제자들은 강한 어조로 예수의 질문이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였음을 알게된다. 이는 누군가 예수의 권능을 힘 입고자 의도적(意圖的)으로 그의 옷에 손을 댄자가 있음을 인지하고 물으시는 예수의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 경: [눅8:4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 이 표현은 예수의 몸에 있던 일정량의 능력이 빠져나가 소모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옷에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에게 치유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사건의 장본인을 밝히려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45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눅8:47]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떨며 나아와...고하니 - 예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은 사실과 그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능력에 깜짝 놀란 그 여인은 자신의 은밀한 시도가 공개되고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당혹감과 긴장으로 떨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유대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옷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부정한 병에 걸린 자가 다른 사람의 옷에 접촉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부정이었으므로(레 15:1-12, 19-27) 여자는 그 사실에 대한 추궁이 두려웠을 것이다. 마태는 여인이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보도하는데(마 5:33) 비해, 누가는 초점을 증언의 공개성에 맞추어 '모든 사람 앞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여인의 병 나음은 공개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예수의 신적인 권능 또한 모든 사람 앞에서 증거되었음이 강조되는 것이다.

성 경: [눅8:48]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혈루증 걸린 여자를 고치심]

⭕ 딸아 네 믿음이...평안히 가라 - 예수께서는 먼저 여인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딸아'하고 매우 부드럽게 부르고 있다. 여기서 '딸아'(*, 뒤가테르)는 다정한 목소리로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바,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를 소유한 예수의 신성을 엿보게 한다. 다음에 예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 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믿음 그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을 획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녀의 믿음은 치유가 성취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의 역할을 한 것이다. 즉 그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의해 자신이 치유될 수 있도록 사용된 도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여인의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께서는그 적은 믿음을 귀중히 여기셨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해주신다. 아마 이 평안은 영혼과 육신의 안녕을 동시에 뜻하는 온전한 의미의 샬롬이었을 것이다.

성 경: [눅8:49]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당신의 딸이...괴롭게 마소서 - 예수께서 여인에게 마지막 축복의 말을 하고 있을 즈음에 야이로의 집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비보(sad news)가 날아들어와 이제 막 병에서 치유된 여인에 대한 축하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뒤바꿔 버리는 장면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의 태도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취하였던 태도(요11:21-32)와 흡사하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인으로서 표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서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신 권능을 행하셨던 것을(눅7:11-17) 기억하였다면 그렇게 쉽사리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눅8:50]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믿기만 하라...구원을 얻으리라 - 누가는 마가에는 없는(막 5:36)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첨가시키고 있다. 야이로는 한 혈루증 환자가 예수의 권능으로 치유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으로 가득했을 터이나 집으로부터 전해져온 딸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는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은 먼저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는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신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할 때 야이로의 딸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성격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통해 볼 때에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같이 뵈는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사실을 익히 발견할 수 있다(시 22:4;사26:3,4;43:2). 또한 이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직한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사 42:3).

성 경: [눅8:51]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예수께서는 집에 데리고 들어가는 수행원의 수를 세 제자로 제한하고 있다. 이 세 제자를 따로 구분하여 데리고 간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였는데, 지금이 처음이고, 변화산에 오르실 때(9:28)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대 결산을 하실 때였다(막 14:33).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 특별히 긴요한 역할을 감당할수 있도록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께로부터 각별한 훈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8:52]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울며 통곡하매 - 집 안에서는 이미 집안 식구들이 딸의 죽음을 인하여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장례식에는 모인 사람들이 같이 우는 풍속이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업적인 애곡꾼들을 고용하여 울게 하기도 하였다(렘 9:17). 마 9:23에 의하면 그들 중에는 피리를 부는 이들도 있었다.

⭕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혹자는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딸 아이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며 누가의 문맥에서도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1)53절은 사람들이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였음을 밝히고있다. (2)55절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 '그 영'(Her spirit)이 돌아왔다고 진술하는데, 이는 영과 육이 분리된 상태 곧 죽음 상태를 전제로한 표현이다. (3)요 11:11에서도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잠든 것이라고 표현했던 일이있다.

성 경: [눅8:53]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비웃더라 - 아이의 죽음을 분명히 확인했고, 예수의 신적 권능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 호곡자(號哭者)들의 비웃음은 아이의 분명한 죽음과 또한 분명한 부활을 증거해 주는 간접 자료가 된다. 막 5:40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이 비웃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아이를 일으키셨다.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성 경: [눅8:54]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손을 잡고...일어나라 하시니 -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아람어(Aramaic)로 말씀하셨다(막 5:41). 예수는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율법에는 시체에의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 규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마찬가지로 율법이 금하고 있는 나환자에게도 손을 대었던 일이 있다(5:13).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그의 뛰어난 사랑을 표현해 주며 율법을 초월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르는 소리는 너무나 다정하여 마치 엄마가 아이를 깨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성 경: [눅8:55]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영이 돌아와...일어나거늘 - '영이 돌아와'라는 말은 누가만의 섬세한 표현으로 생명이 즉시 회복되었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부드러운 음성은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조용히 살려냈다. 막 5:42에 의하면 아이가 일어나 걸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 아이가 완전히 회생했음을 증거해 준다.

⭕ 먹을 것을 주라 -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이 너무 흥분되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을 섬세하게 배려해 주는 예수의 자상하심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아이의 회생을 공식적으로 확증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질적 도움도 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성 경: [눅8:56]

주제1: [구세주이신 인자]

주제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 말하지 말라 - 예수의 함구령(緘口令)은 여러모로 보아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애곡하던 자들에게 딸 아이가 살아났으니 더이상 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도 해주어야할 것이고 딸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다닐 때 그 사연을 묻는 자들에게 설명도 해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 9:26에 의하면 실제로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다음 몇가지로 짐작된다. (1)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단지 기적이나 일으키는 마술장이 정도로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2)일찍이 예수께서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해 보이라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 일이 있었다(4:9).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대중들 앞에 자신의 위력을 과시하여 영웅으로 행세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그리스도됨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3)예수의 지상 사역의 궁극 목적이 결코 사람들의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4)아이의 부모들이 지나치게 흥분하여 나타난 사건에만 집착하여 본질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망각하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어떤것이든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성 경: [눅9: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 이 제자들은 5:3-11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처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어 6:12-16에서 그 선택이 완료된 인물들이다. 예수께서 열둘을 부르신 것은 열 두 지파에 의해 상징되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Hendriksen). 한편 누가는 마가의 '부르다'(*, 프로스칼레오)라는 표현(막 6:7) 대신 '불러 모으다'(*, 슁칼레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8:51에 있었던 잠깐 동안의 헤어짐과의 논리적 일관성을 고려한 누가의 세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 모든 귀신...능력과 권세 - 마태와(마 10:1) 마가는(막 6:7)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모든 귀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 마태와 마가는 귀신의 악함에 초점을 두고 누가는 '모든 종류'의 귀신을 제어하시는 예수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또한 누가는 마가복음에 있는 '권세'(*, 엑수시아)에 능력(*, 뒤나미스)을 첨가하고 있는데, 전자는 합법적 권리나 권위를 나타내며 후자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 영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세와 능력이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에도 있었던 마술사(행 19:1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성 경: [눅9: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하나님의 나라...보내시며 - 마태에 의하면(마 9:36)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는 동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는 것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두 가지 책무를 부여받고서 파송되었다. (1)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사역과 인격 속에 현존함과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이기도 했다(마 6:10).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뜻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편협한 민족주의적 희망으로 인해 곡해(曲解)하고는 있었으나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왕권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4:15;마 18:1;20:21;막 11:10;15:43;14:15).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막 1:15의 주제 강해 '하나님의 나라개념'을 참조하라. (2)제자들은 병을 고쳐주어야 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영적인 일이라면 병을 고치는 것은 육적인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바 육적인 문제의 해결도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짐에 주목해야 한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 영혼의 구원에 비하여 이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질병 치유가 단순히 영혼의 문제로 이끌어 가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병을 고치는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는 본문에서 '전파하고'(*, 케뤼쎄인)와 '고치는'(*, 이아스다이)이 대등 접속사 '카이'(*)로 연결되어 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 한편 제자들이 해야할 이 두가지 과제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병을 고치는 일은 다름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친히 행하셨던 일인데(11절;마 9:35), 이는 제자들이 해야하는 일이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계승할 사도로 서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성 경: [눅9: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 - 예수께서는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도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하나 하나 세부적인 항목까지 열거하고 있다. (1)지팡이(*, 라브도스)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점에 대해서는 마태도(마 10:10) 동일하게 보도하고 있으나 마가는(막 6:8) 지팡이는 허용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ㄱ)마가는 왕하 4:29에 나오는 게하시의 경우처럼 지팡이를 스승의 권위에 대한 상징으로 파악했다는 견해(Schurmann). 그러나 게하시의 경우에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스승의 지팡이를 사용했다. 따라서 만약 게하시의 경우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들 모두가 스승인 예수의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야 한다. (ㄴ)누가는 지팡이나 슬리퍼나 허리띠를 띠고 성전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는 랍비적 규율을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Manson). (ㄷ)발음은 비슷하나 뜻은 서로 다른 아람어가 혼동되었다는 견해. 즉 '...외에'라는 뜻의 'ella'(엘라)와 '그리고...도 아닌'의 의미를 가진 'wla'(웰라)를 혼동한데서 생긴 차이이다. 이 설명은 헬라어 성경 원문의 무오성(無誤性)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ㄹ)두 복음서 기자가 서로 다른 지팡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견해. 즉 마가는 길을 걸을 때 사용하는 지팡이를, 누가는 맹수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팡이를 각각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복음서가 모두 여행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인 '라브도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충분한 해명이 못된다. 결국 이런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뿐 보편적으로 공감되는 설명은 아직 없다 하겠다. (2)가방(*, 페라)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가방은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담는 가방일 수도 있고 동냥 주머니일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주머니가 동냥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 여행 도중에 축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한 것이라고볼 수 있고, 여행 필수품을 담는 가방이라면 아무것도 의지할만한 물건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금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빵(*, 아르토스)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4)돈(*, 아르귀리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스스로 필수품을 자급할 수 있는 일체의 가능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5)마지막으로 두 벌 옷(*, 키톤)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이 옷은 속옷으로 거의 발에까지 닿으며 소매가 달려있었다(Hendriksen). 한편 마가복음에는(막 6:9) 신발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해 누가는 신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고있는 신발 외에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이렇게 여행에 필요한 일체의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현실적 여건이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신앙을 가르쳐주며, 동시에 사사로운 재산에 얽매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예수의 정신과도 일치한다(18:18-27). 22:35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전도하러 다녔지만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9: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어느 집에...떠나라 - 여행 준비에 관한 말씀에 이어 이번에는 유숙(留宿)하는 방법을 일러주신다. 물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머물라는 말은 아니며 말씀을 받아 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이다(마 10:11). 그러나 한 번 숙소를 정했으면 그 마을을 떠날때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지 불편한 점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주의 교훈집으로 알려지고 있는 '디다케'(Dedache)에는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있는데, 본문은 제자들이 거짓 선지자들 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탐하지 말고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 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성 경: [눅9: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발에서...떨어버려 -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간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聖別) 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이다. 한편 본문에서 주님이 이러한 행위를 지시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선민과 이방인의 진정한 구분은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2)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된다. (3)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 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고로 행 13:50,5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지역에서 주의 일을 하는 도중 유대인들로부터 방해를 당하였을 때도 이런 행동을 했었다.

성 경: [눅9: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열 두 제자의 파송]

⭕ 나가 각 촌에 - '나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르콘토'(*)는 '디에르 코마이'(*)의 미완료과거 중간태로서 제자들의 선교 활동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촌'(*, 코마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룬트만(Grundmann)같은 학자는 예수가 읍내들을 돌아다니신데 비해 제자들은 촌락들을 돌아다닌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나, 8:1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성' 뿐만아니라 '촌'에도 다니셨음을 알 수 있다.

⭕ 처처에 복음을...병을 고치더라 - '처처에'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쿠'(*)는 '그들이 가는곳 어디서나'의 뜻으로, 제자들이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등 예수의 사역을 열심히 대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제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고 실현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9: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분봉왕 헤롯 - 이는 헤롯이 왕(王)이 아니라 영주(領主)였음을 뜻한다. 그는 B.C.4-A.D. 39까지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었는데 그 지역은 예수의 사역이 펼쳐진 중심지였다. 분봉왕 헤롯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3:1주석 참조.

⭕ 이 모든 일 - 이 문구의 헬라어 표현은 '타 기노메나 판타'(*)로 문법 구조상 현재 중간태 분사임을 알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을 말한다. '이 모든 일'이란 일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일으키셨던 갖가지의 이적들과 선포이겠지만 누가는 이 표현을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에 이어 서술함으로써 제자들의 역할도 예수의 소문이 널리퍼져 헤롯의 귀에까지 들려지게 되는데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한다. 심히 당황하여 - 이 말은 부정의 접두사 '디아'(*)와 '길'을 뜻하는 '포로스'(*)의 합성어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헤롯도 당황하여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표현이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인 점을 감안할 때 헤롯의 당황과 불안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요한이...살아났다고도 하며 - 마태나(마 14:2) 마가(막 6:14)는 헤롯이 예수의 소식을 듣자 곧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비해 본문에서는 그러한 내용의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에 관한 헤롯의 최종적인 확신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고 누가는 무엇이 헤롯으로 하여금 이 최종적인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를 보도하고 있는 듯하다. 즉 먼저는 세례 요한이 살아난 인물이 바로 예수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 소문이 헤롯에게 들려지자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한 자신의 좋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하여(3:19,20;마14:3-11;막 6:17-28) 즉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세례 요한이 예수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은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구약적 부활 사상이 담겨져 있음(신 32:39;삼상 2:6;욥 19:25-27)을 엿보게 한다.

성 경: [눅9: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혹은 엘리야가...혹은 옛 선지자...함이라 - 예수를 엘리야로 생각하게된 배경에는 말 4:5의 말씀이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종말을 알리는 '종말적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와의 연관성은 세례 요한에게 그가 적용된다(1:17;마 11:14). 예수는 단지 종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성취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 대한 세번째 견해는, 옛선지자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살아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들은 정확하게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만 예수의 사역이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에게 선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퍼져나갔음을 알수 있다.

성 경: [눅9: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헤롯의 불안]

⭕ 이 사람이 누군고...보고자 하더라 - 헤롯은 예수께 대한 다른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견해에 집착하며 고민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의로운 세례 요한을 터무니 없이 죽인 일에 대해서 늘 양심의 가책을 겪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마 14:3-11; 막 6:17-28). 여기서 "...자 하더라"는 표현 '에제테이'(*)는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헤롯이 계속해서 예수를 보고자 했음을 뜻한다. 그런데 13:31에 의하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한것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나, 죄 없는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악의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예수를 희롱하며 예수가 처형되는 일에 적극적인 방조자내지는 동조자(同調者)로서의 역할을 했다(23:8,11).

성 경: [눅9:1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사도들이 돌아와...고한대 - 제자들이 사역한 기간이나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일들은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시에 돌아와 예수께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사역의 기간과 다시 모이는 장소는 미리 약속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고한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게산토'(*)는 "경과를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의미로서 제자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예수께 상세히 보고하였음을 가리킨다.

⭕ 벳새다 - 이 지명의 뜻은 '고기 잡는 집'인데 정확한 명칭은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로 빌립왕이 건설하여 황제 아구스도의 딸 율리아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벳새다 율리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동쪽 연안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인 이곳은 베드로, 빌립, 안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요 1:44). 예수께서 이곳으로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간것은 제자들이 먼 선교여행에서 돌아왔고 더구나 예수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어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막 6:31). 말하자면 피곤하고 시장한 제자들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예수의 자상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따로' 사적인 만남을 갖고자 했음을 부각시키는 인상을 주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주고 동시에 제자들이 했던 일들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면서 그들을 온전한 사도로 교육시키는 기회로도 삼고자 했을 것이다.

성 경: [눅9:1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무리가...따라 왔거늘 -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으나 마가에 의하면(막6:32,33) 예수와 제자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예수와 그의 일행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을 알아 본 많은 사람들이 배가 상륙할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보다는 예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강조점을 두려는 듯하다.

⭕ 영접하사...고치시더라 - 제자들 하고만 있고자 했던 예수의 계획은 모여든 무리들로 인해 일단 좌절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을 떠나간 것은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제자들과 별도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무리들을 영접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영접했다'는 표현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목자없는 양 같이 보인 불쌍한 무리들을 따뜻이 그리고 흔쾌하게 맞아주신 예수의 온정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두 가지 하셨는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는 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는 일이다. 특히 '이야기 하시며'(*, 엘랄레이)와 '고치시더라'(*, 이아토)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상당한 시간동안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9:1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날이 저물어 가매 -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병고치는 능력에 완전히 마음이 붙들려 시간가는 줄도 몰랐던 듯하다.

⭕ 먹을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시티스몬'(*)은 '곡식'을 뜻하는 '시티온'(*)에서 유래한 동사 '에피시티조 마이'(*, '스스로 양식을 공급하다')에서 나온 단어로 특히 고대 헬라어에서 '여행중의 양식'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와같이 제자들이 무리들의 묵을 곳과 먹을것을 염려하는 모습은 예수의 생각에 비교한다면 믿음이 없는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이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성 경: [눅9:1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너희가 먹을 것을...없삽나이다 - 예수는 제자들이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아무런 물질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령을 하신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1)본문에서는 '너희가'(*, 휘메이스)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이것은 무리들의 배고픔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결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계승해야할 사도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전적인 책임의식을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2)예수께서는 선교여행 중 지녔던 권세와 능력에 대해 망각한 채 극히 평범하고 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깨우쳐주고 책망하는 의미로 그런 주문을 하셨다. (3)제자들은 선교여행 중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주리지않고 헐벗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것에 대해서 필요에 따라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적인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명령은 엘리사가 그의 사환에게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라고 명령한 것을 연상시킨다(왕하 4:42-44). 이에 대해 제자들은 자기들이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함을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본문의 기록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가 두 마리 뿐이니 이것은 단 한 사람이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다. (2)지금의 장소는 너무 외진 곳이어서 음식을 구하러 사람을 보낼 수가 없다. (3)설령 사람을 보내어 200데나리온 어치의 음식을 사온다 한들 어림없이 부족하다(요6:7). 특히 마가(막 6:37)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당치도 않다는 듯 빈정대는 말투로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비교적 진지한 태도로 대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성 경: [눅9:1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남자가 한 오천 명 - 남자 장정만 오천명 이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될 것이다.

⭕ 떼를 지어 - 마가는 이 표현을 라틴어의 '심포지움' 즉 '향연'과 같은 의미의 '쉼포시아'(*)를 사용하는데(막 6:39) 비해 누가는 이 표현을 '클리시아스'(*)라는 단어로 나타내고 있다. 이 단어는 정찬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되는 것으로서, 마샬(Marshall)같은 학자는 이것이 초대 교회의 만찬을 반영해 준다고 한다.

⭕ 한 오십 명씩 앉히라 - 여기서도 누가는 독특하게 '한'(*, 호세이)이라는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누가는 의사와 역사가로서 숫자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비교, 막 6:40). 몇 명 단위로 앉혔는가 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전승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여기서는 단지 무리를 일정한 단위로 세분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데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리를 세분화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9:1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제자들이...다 앉힌 후 - 제자들이 예수의 지시에 아무런 이의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습이 간결하게 서술되고 있다. 또한 사람들 역시 음식이 어디서 올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눅9:1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공관복음서 모두가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문구(文句)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취하신 행동은 일반적인 유대인의 식사 관습과 일치한다. '축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게오'(*)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감사하다'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것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며 단지 평범한 감사의 식사 기도로 보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는 삶을 사신 예수께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였으므로, 오병이어의 이적을 위한 별도의 간구가 필요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 주어...놓게하시니 - '주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두'(*)는 '디도미'(*)의 미완료과거 능동태로 예수께서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었음을 가리킨다. 떡과 물고기는 예수의 손에서 제자들을 경유하여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어떤 기적적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단지 우리는 '주어'(*, 에디두)라는 미완료 동사에서 예수의 손에서 떡이 끝없이 계속해서 떼어져 나가는 기적적인 증가가 있었음을 암시받을 뿐이다.

성 경: [눅9:1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오병 이어(五餠二魚)의 이적]

⭕ 먹고 다 배불렀더라 - 그곳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배불리 먹지 못한 자는 하나도없다. 이는 예수의 능력의 완전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빵 문제를 해결하는 것 자체 보다는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무리를 먹이는 일에 궁극적 목적을 두셨다. 이는 예수의 능력에 매료(魅了)되어 찾아온 무리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한 요한의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요 6:14,15,26,27)

⭕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 - 무리가 모두 배불리 먹은데 그치지 않고 남은 양이 무려 열 두 바구니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들이라 명하시는데(요 6:12), 이것은 음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 외에도 무엇이든 힘들이지 않고 예수의 이적에 의존하려는 태도를 갖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다음에 또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켜 해결해 주시리라는 기대는 갖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구니'(*, 코피노이)는 군인들이 장비나 급식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기구 또는 여행자들이 음식과 필수품을 가지고 다니는 기구를 가리킨다. 처음의 시작은 바구니 같은 것은 필요치도 않는 적은 양이었지만 그것이 예수 앞에 바쳐졌을때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의 결과를 가져왔음에 주목하라. 제자들은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겨우 한 아이의 식사에 적합할 만큼의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하신 것이다.

성 경: [눅9:1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따로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막 6:45-8:26의 내용을 생략한 채 오병 이어의 기적에 이어 바로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으로 넘어가기 위해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할때에'라는 '엔토'(*)구문으로 단락을 전환시키고 있다. 마태나 마가에 의하면(마 16:13;막 8:27) 이 장소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90km 떨어진 헤르몬 산 근처의 성읍으로 특히 우상 숭배로 유명하다. 토착민들은 바알신을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겼으며 헤롯은 황제 아구스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황제 신전을 건립해 놓았다. 이런 우상 숭배의 지역에서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irony)라 할 수 있다. 한편 누가는 이러한 단락 전환에 있어서 그 서두를 예수께서 기도 중에 있는 사실로 시작하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누가의 복음서 기록에 있어서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3:21;6:12;9:28).

⭕ 무리가...누구라고 하느냐 - 무리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소문을 못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위해 물으신 듯하다. 예수께서 지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리들의 생각이 아니라 제자들의 생각이었으며, 그는 이미 무리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요 6:14,15,26).

성 경: [눅9:1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세례 요한...엘리야...선지자...살아났다 - 제자들의 답변은 7,8절에서 헤롯이 들었던 소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예수의 특별성은 보았으나 그가 단순히 특별한 선지자 이상의 존재 즉 메시야라는 생각은 가지지 못했다.

성 경: [눅9:2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베드로의 신앙 고백]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 41-56; 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성 경: [눅9:2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경계하사...명하시고 - '경계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티마오'(*)인데 이 말은 '보통 꾸짖다'(4:35)라는 뜻을 가지나 여기서는 '당부하다' 또는 '심각하게 말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명령하다'(*, 파랑겔로)를 첨가하여 매우 강도 높은 함구령임을 부각시겼다. 예수께서 이렇게 메시야로서의 정체를 강력하게 숨기려 한것은 (1)유대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오랜 역사의 억압과 수탈을 당해 오면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메시야를 열렬히 대망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야시라는 소문이 퍼져나갈 경우에 그들은 예수를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들었을 것이다(요 6:14,15). (2)예수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메시야라는 소문이 퍼질 경우 너무나 빨리 그에게 정치적 위협이 다가올 수 있고 그럴 경우 예수의 지상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3:31).

성 경: [눅9:2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인자가...하리라 - 본절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네차례의 수난 예고 가운데 첫번째 것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바로 이어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즉 예수는 민족적 정치적 메시야로서 유대의 주권을 회복하여 그들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 주는 임무를 가지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임무를 띠고 오신 분이다. 본절의 수난 예고는 예수에게 네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주는데 (1)먼저 수난을 당하신다. 이 고난의 배경에는 사 53:4,11의 예언이 있다. (2)버림을 받으신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아포도키마조'(*)는 '거부하다', '쓸모 없다고 선언하다'는 뜻으로 공무원 지망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심사한 후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경우나 열등한 화폐를 검사하여 버리는 경우에 사용되는 동사이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이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을 말해준다. (3)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4)죽은 후 제 삼 일에 살아나실 것이다. 여기서 마가는 '일어나다'는 표현을 능동태 '아나스테나이'(*)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수동태 '에게르데나이'(*)를 사용하여 '일으킴을 받는다'(be raised)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삶에 하나님의 권능이 개입함을 시사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동사'데이'(*)는 당위의 뜻인 바, 예수의 수난이 필연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밝혀준다(사 53장; 요 3:16;롬 8:32).

⭕ 인자 - 여기서 인자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 인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5:24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스)은 지방의 하급 법원에서 재판관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람들로 지방의 공회를 구성하였다(7:3;20:1;22:52). '대제사장들'(*, 아르키에류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특권과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권한이있다. 본래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종신적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고 총독들에 의해 임시로 교체되는 관행이 생기면서부터 그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된 것은 대제사장을 지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기관들'(*, 그람마튜스)은 '랍비', '율법사'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으로서 각각 공공기관 또는 사설 단체에 속하여 율법의 이론적 발전, 율법의 교수, 율법의 적용에 힘썼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나열되고 있는데 실제로 이 그룹들은 유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무리들이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모두 7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법권과 행정권을 가지고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기관이었다. 유대 민족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백성들을 옳바른 종교적인 삶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선도적으로 하게된다는 것은 비극적인 유대인의 역사에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성 경: [눅9:2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지고 - 예수의 길이 분명하였듯이(22절) 이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야함을 말해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의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기란 실로 어렵다. 첫째로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한다는 말이다. 둘째로 자기 십가가를 져야한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벌 중 가장 잔혹한것으로 고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세째로 이러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는 삶이 지속성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성장하려면 일시적 결심으로만은 부족하며 일관된 신앙 훈련이 요구된다.

성 경: [눅9:2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목숨을...잃을 것이요 - 자기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 즉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아의 범주 속에 파묻혀 일신상(一身上)의 부귀 영화만을 위하여 타자를 생각하지 않는자는 도리어 자신의 목숨을 잃게될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자는 교회에 핍박과 순교의 시련이 올 때 육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 진정한 생명을 잃게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요 12:25).

⭕ 나를 위하여...구원하리라 - 마가복음에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고 하여 '복음'을 첨가하고 있으나 누가는 그것을 삭제하여 예수께 대한 헌신에 초점을 집중 시킨다. 진리를 위해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기꺼이 포기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잃음이 아니요 얻음이라는 이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예수의 참 제자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2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온 천하를...유익하리요 - 사람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의 문제를 가르친다. 세상이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쾌락을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누려본다 한들 자기의 영혼과 본성을 잃게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기위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의 가치를 소모한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은 온 천하를 잃게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지막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계 2:10).

성 경: [눅9:2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 적극적 의미에서는 복음 증거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을 의식(意識)하지 말라는 당부이며, 소극적 의미에서는 박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 승천후 교회에 핍박이 닥쳐올 때예수께서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 무기력해 보이며 기독교인들의 삶이 실패자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인자도...부끄러워 하리라 -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재림이 최초로 언급되고있다. 누가는 마태나(마 16:27), 마가(막 8:38)와 달리 '자기와 천사의 영광'을 첨가하여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이라는 삼중(三重)의 영광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재림주로 오실 예수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한다.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은 사람들을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마 16:27)에 주목하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히 12:2) 종말 때의 심판주로 재림하시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을 부끄러워 하여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았던 사람은 혹 세상을 얻었을지 몰라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수치스러운 종국을 맞게 될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 1:16).

성 경: [눅9:2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번째 예고]

⭕ 여기 섰는...있느니라 - 26절에서 예수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심판을 확인하였다면 본절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이 약속되고 있다. 본절에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섰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구별된 사람들'이 보게될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해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쉽지 않다. (1)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 (2)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기까지 오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견해, (3)오순절이후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4)예수의 재림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이다. 이 중 세번째 견해가 유력하다고 본다.

성 경: [눅9:2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이 말씀을 하신 후 - 누가는 마태(마 17:1)나 마가(막 9:2)와 달리 이 연결구를 첨가하여 앞에서 하신 말씀과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과 이제부터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 이 세 명의 제자들은 본 사건 뿐만 아니라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사건(8:51)에서도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의 최후의 결단시에도(마26:37;막 14:33) 예수를 따로 수행했던 제자들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드로는 훗날 여기서 경험한 놀라운 사건을 벧후 1:17,18에 증언하기도 했다.

⭕ 기도하시러 산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산행(山行)의 목적을 밝힌다. 전통적으로 이 산에 대해서는 '헤르몬 산', '메론 산', '다볼산'이라는 추측들이 있으나 복음서 기자들은 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누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이며 앞으로 일어날 놀라운 계시의 사건도 '기도'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성 경: [눅9:2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기도하실 때에...나더라 - 이러한 놀라운 일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났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는 문자적으로 '그 얼굴의 모습이 달라졌다'이다. 마태에 의하면(마 17:2)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다고 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해'는 하나님이나 천사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시 84:11;계 1:16;10:1). 한편 누가는 '변형되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메테모르포데'(마 17:2;막 9:2)가 헬라적 사고방식을 따른 신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흰색은 하늘의 색깔, 천사들이 입는 옷의 색깔이며 평화와 순결과 사랑을 상징하는 색깔이다(마 28:3;막 16:5;행 1:10;계 3:4,5;7:14). 이것 역시 예수의 천상적 신분을 밝혀준다. 또한 '광채가 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사스트랖톤'(*)인데 이 말은 '밖으로' 또는 '앞으로'를 뜻하는 '엑스'(*)와 '빛이 번쩍나다'를 뜻하는 '아스트랖토'(*)의 합성어로 예수의 영광스러운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빛의 광채를 생생하게 묘사해 준다. 결국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는 (1)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 즉 그가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35절) 확증해 주며 (2)장차 수난을 받는다 하더라도(22, 31절) 다시금 그의 영광을 회복하리라는 점(빌 2:8-11)을 암시하며 또한 (3)천국에서 영광 중에 계실 예수의 모습과(롬8:34) 다시금 재림하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26절)을 간접적이나마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눅9:3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모세와 엘리야 -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이며 엘리야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이자 예언의 대표자이다. 또한 모세는 과거에 시내산에서(출 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왕상 19:8) 각각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고(신 18:15), 엘리야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예언되었다(말 4:5). 엘리야는 산채로 승천하였고(왕하 2:11), 모세도 특이한 방식으로 소천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신 34:6). 이제 이들이 변화산에 나타나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구약이 예수에 의해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결국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은 예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나타낸다(마 5:17,18).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성 경: [눅9:3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곤하여 졸다가 - 본절 역시 누가만의 기록으로 예수와 두 구약인물이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이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기도함으로써 하늘의 계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신데 반해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곯아 떨어짐으로써 포착했어야 될 중요한 계시를 놓쳤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곡해하는 결과까지도 초래한다(33절). 이와 유사한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연출되는데, 그 때에도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하는데 반해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는 실수를 범하며 결국 예수를 버리고 도망가는결과를 초래했다(22:42-46).

⭕ 아주 깨어...보더니 - 제자들은 뒤늦게나마 깨어난다. 아마 예수와 모세, 엘리야를 둘러싸고 있는 찬란한 빛 때문에 깨어났을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예수와 두 인물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장면에서 예수의 영광에 두 사람이 압도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을 능가하는 존재임을 간접 시사한다.

성 경: [눅9:3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이 제단은 하늘로부터 온 두 사람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는 베드로의 바램을 보여준다. 하지만 베드로는 조금 전에 들었던 예수의 수난 예고와(22절) 그것을 확증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31절) 충분히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겪어야하는 고난과 그 이후의 영광을 망각하고 현실에 안주(安住)하기를 도모하는 비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초막 셋을 짓되 - 이 초막은 숙곳에서 장막절에 사용했던 것(출 13:20)과 같이 나뭇잎이나 기타 일시적인 재료로 지은 움막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는 텐트나 장막을 가리킨다. 아마 베드로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천상적인 영광의 임재를 계속해서 느끼고 싶은 심정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초막 셋'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다른 두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적 무지를 반영한다.

성 경: [눅9:3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구름 - 구름은 미래에 다시오실 인자와 관련되기도 하고(단 7:13) 성도들을 하늘로 들려 올리는 수단으로도 사용되며(계 11:12), 신 구약 중간시대 문학에서는 메시야의 도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였다(위경 2 Baruch 53:1-12;4 Ezra 13:3). 구름이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경우이다(출16:10;19:9;24:15-18;33:9). 특히 출 24:15-18에는 본문과 매우 유사한 병행구를 찾아볼 수 있다. 예수와 두 인물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이어 하나님 자신의 임재로 말미암아 상황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 저희를 덮는지라 - 여기서 '저희'가 누구를 가리키는 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예수와 두 인물 그리고 3제자 모두(Schurmann), (2)모세와 엘리야만(Greijdanus, Williams), (3)예수와 모세, 엘리야(Godet, Knox, Marshall).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무서워하더니 - 신적인 권능 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이는 인간의 죄성과 유한성 때문이다(8:25;24:4,5).

성 경: [눅9:3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 - 구름 속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기에 그만큼 이 선언은 엄숙하고 확정적이다. 또한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때 들려왔던 음성과도 비슷하다(3:22).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고백한 예수 이해는 이제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 더이상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수난 주간에도 한번 더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요 12: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 사역의 시작과 절정기와 마지막에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그 사역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한편 누가는 마태(마 17:5)나 마가(막 9:7)와 달리 '사랑하는'을 생략하고 '택함을 받은 자'를 첨가하고 있다. 누가는 이런 표현을 통해 예수의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과 아울러 예수의 권위의 출처가 초월적인 것임을 말해 준다.

⭕ 저의 말을 들으라 - 이 명령은 신 18:15의 반영으로 이제 예수의 정체(正體)가 분명히 드러난 이상 그분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가정한다면 이 명령은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는것이고 그 선택 여하에 따른 필연적 심판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하여튼 본문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의 순종에 있으며 예수께서 제시하는 사역의 목적과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불신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16:21-23).

성 경: [눅9:3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 누가는 상황이 끝나는 장면을 매우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마 17:6-8 비교).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지고 '예수만' 남아 있음이 '오직'이란 뜻의 '모노스'(*)로 강조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도 결국은 예수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보조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사라질 뿐 주인공은 '오직 예수' 뿐이다. 그만큼 예수는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 그 때에는...아니하니라 - 자기들이 본 사실을 잠정적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음을 말하는데 아마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말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듯하다(마 17:9;막 9:9).

성 경: [눅9:3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이튿날 - 누가만이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변화산의 영광이 밤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태나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17:10-13;막 9:11-13) 누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한채 바로 무리들과의 만남을 서술한다. 이 무리들 중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외의 제자들도 함께 있었고(40절), 막 9:14에 의하면 서기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성 경: [눅9:3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내 외아들이니이다 - 무리들이 예수를 기다리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딱한 사정에 대하여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은 8:40,41에 있는 야이로의 외딸을 살리신 사건과 유사하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외아들'을 첨가하고 있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당하는 고통의 극심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고통이 극심한 만큼 하나님의 은총도 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릴 때(7:12)나 야이로의 외동딸을 살릴때도(8:41) 마찬가지였다. 한편 누가는 아버지의 간청을 묘사함에 있어서 마가(막9:22)의 '불쌍히 여기다'(*, 스플랑크니조마이)를 '돌아보다'(*, 에피블렙사이)로 대치시키고 있는데 이 단어는 '위로'를 뜻하는 '에피'(*)와 '보다'를 뜻하는 '블레포'(*)의 합성어로 환자를 정밀하게 검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이다. 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누가의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3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귀신이 저를 잡아 - 마태는 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다 하고(마 17:15), 마가는 벙어리 귀신에 들렸다고 하나(막 9:17) 누가는 간략하게 귀신에 붙잡혔다고만 서술하고있다. 누가로서는 이 사건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증을 받은 '아들'과 아들의 사역을 방해하는 핵심 세력인 '귀신'과의 싸움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졸지에...떠나 가나이다 - 이런 증세는 의학적으로 규명할 때 간질병의 증세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간질병 배후(背後)에는 귀신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공통된 진술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의 문제는 간질병과 예수와의 관계가 아니라 귀신과 예수와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눅9:4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제자들...능히 못하더이다 - 결국 서기관들을 포함한 무리들의 변론 주제가(막9:14) 제자들의 무능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신적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동안 예수와 함께 있던 세 제자는 잠을 자고(32절), 아래에 있던 제자들은 귀신에 붙잡힌 아이를 구하지 못해 무리들로부터 실망을 사고 서기관들로부터 야유와 비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인 바, 이는 제자들의 아둔함을 잘 보여준다. 본래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온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제자들은 능히 예수를 대신하여 귀신을 쫓아내 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예수로부터 권능을 받았고 그 권능으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6절). 그렇다면 제자들의 능력이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9:4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 이 꾸중은 믿음 없는 제자들과 거기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이적(異蹟)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에게 적합한 책망인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내가 얼마나...너희를 참으리요 - 본절에 나타난 '믿음이 없는', '패역한' 등의 표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을(신 32:5,20) 반영하며, 본문의 말씀은 더이상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패역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들을 품안에 품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를 연상시킨다(사 46:4). 이제 예수의 지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의 종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의 결핍을 노출시켰고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인도되는 무리들은 점점더 패역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느끼는 예수의 격한 감정은 '호'(*)라는 탄식어가 잘 나타내 준다.

성 경: [눅9:4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 '올때에'는 문자적으로 '아직 저가 오고있는 동안'의 의미로 아직 소년이 예수 앞에 도착하지 않았을 때부터 귀신이 도발을 시작했음을 뜻한다(비교, 막 9:20). '거꾸러뜨리고'(*, 엘렉센 아우톤)는 전투나 레슬링에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타격을 가하는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아이의 발작이 귀신의 공격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동시에 귀신이 예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는 의도에서 감행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 더러운 귀신을...낫게하사 - 귀신의 격렬한 도발 행위는 예수의 꾸짖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멈춰졌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괴롭힘당했던 모든 질병들로부터 치유를 받았다. 한편 마가(막 9:22-24)는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을 갖게 되는 이야기를 전해 줌으로써 신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그 부분을 생략하여 예수의 놀라운치유 능력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조금전의 엄한 꾸짖음(41절)과 달리 이번에는 부드러운 사랑과 자비로운 행위로 아이를 아비에게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런 행위는 7:15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이 사랑임을 나타내 준다.

성 경: [눅9:4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심]

⭕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 경: [눅9:4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 사람들이 예수의 행함을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다시 한번 수난 예고를 하고 있다. 이 수난 예고는 22절에 이어 두번째에 해당하며 여기서는 '너희'(*, 휘메이스)가 강조적으로 쓰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다른 사람들이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기적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든지 제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란 계속 이어지는 '수난 예고'를 가리킨다.

⭕ 인자가...넘기우리라 -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수난 예고는 누가복음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네 번의 수난예고 가운데 두번째 것이다(9:22,44; 18:31-34;22:21-23). 여기서 '넘기우다'(*, 파라디도스다이)는 수동태의 표현은 가룟유다에 의한 배반을 예고하며 '사람들'은 22절에 언급된 바 있는 산헤드린(Sanhedrin)을 가리킨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배반 이면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음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마태(마 17:23)나, 마가(막 17:31)와 달리 누가는 여기서 '부활'에 관해서는 언급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 경: [눅9:4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번째 예고]

⭕ 알지 못하였나니 - 제자들은 두 번에 걸쳐 주어진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첫째,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變貌)를 목격하고 이어서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에, 둘째 수동태의 '히나'(*)절에 의해 확인되는 바 제자들의 몰이해 배후에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숨김'에 대한 진술은 본서에만 나오며, 일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제자들이 무지한 상태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여기서 누가가 더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걸으셨던 수난에로의 길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갖게 될 성서적 지식과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Marshall).

⭕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것에 대해 묻기조차 두려워 하였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며 동시에 23-27절에 기록된 바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사도로서 사역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성 경: [눅9:4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누가 크냐 - 마가복음에서(막 9:33) 제자들은 가버나움에 이르는 노중(路中)에 논쟁을 벌였으며 가버나움에 이르러 예수의 추궁이 있었다. 누가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 채 문제의 쟁점만을 취급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대한 것이었다(마 18:1). 여기서 변론(*, 디알로기스모스)은 '논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시사한다. 불과 일주일 쯤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 부인을 가르치셨고(23,24절), 조금 전에는 진지한 어조로 자신의 수난을 제차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44절) 제자들은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크냐 하는 문제는 결국 메시야가 일으켜 세울 왕국에서 누가 높은 요직을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때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아(ego)를 버리지 못하고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찬 제자들로서는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 경: [눅9:4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예수께서...아시고 - 제자들은 예수 몰래 자기들 끼리 논쟁을 벌였으나 예수께서는 신적인 능력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다툼을 이미 알고 계셨다.

⭕ 어린아이 하나를...세우시고 - 누가는 마태나(마 18:3,4), 마가(막 9:35)가 기록하고 있는 '큰 자'에 대한 결론적 서언을 생략한 채 바로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성 경: [눅9:4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내 이름으로...영접함이요 - 예수께서 제자들의 사고 방식을 교정시켜 주기 위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훈을 베푸신다. 먼저 '내 이름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명예나 지위가 예수께 완전히 종속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즉 모든 제자들의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 앞에 따로 드러날 수 없으며 모든 영광이 예수의 이름에 돌려져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은 예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가의 여부인 것이다. 한편 마가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라고 하여(막9:37) 어린이 일반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데 비해 누가는 '이 어린아이'라고 하여 바로 제자들 앞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실제로 어린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 나를 영접하면...영접함이라 -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이 논리는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된다.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대로 대할 때에는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과 헌신의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 - 작은 자가 큰 자라는 역설적 진리는 23-25절에서 말씀하신 죽음으로써 삶을 얻는 역설적 진리와 갖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의 대가로 지위나 명예를 얻어 보려는 욕망을 버린 사람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낮은 자'와 대비되는 개념을 '가장 큰 자'가 아니라 단순히 '큰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데는 비교 우위의 개념이 적용되지만 높아지는 데에는 비교 우위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9:4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 제자들은 그가 자기들과 같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들만이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베풀 수 있는 제한된 자격을 가졌다는 자의식(自意識)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1, 2) 아울러 이러한 행위의 이면에는 자기들의 실패에 대한(40절) 열등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성 경: [눅9:5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들의 욕망과 포용에 대한 교훈]

⭕ 금하지 말라...위하는 자니라 - 그 사람은 예수에게서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 11:23의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의 요지는 이러하다. 익명(匿名)의 귀신 추방자는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의 참경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바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결국 이 사람의 행위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했던 일을(6, 42절) 한 것이므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하는 자인 셈이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성 경: [눅9:5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 여기서 '승천'(*, 아날렘프세오스)은 '위로'를 뜻하는 '아나'(*)와 '올리다'의 의미를 갖는 '렙시스'(*)의 합성어로 '들어 올라감'이란 뜻이다(24:51). 여기서는 '죽음'(31절) 대신 '승천'이 언급됨으로써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차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쉼플레로오'(*)는 본래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승천을 성취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정되었음과 예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심을 분명히 밝혀준다.

⭕ 예루살렘을...굳게 결심하시고 - 갈릴리로부터 예수의 최종 종착지인 예루살렘에로의 대전환이 언급되고 있다. 승천은 곧 수난과 죽음을 전제한 것이므로 예수께서는 그일이 일어날 장소인 예루살렘에로의 행로를 굳은 결심으로 시작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굳게 결심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어귀는 '...로 얼굴을 향하다'는 셈어적인 표현으로 굳게 마음을 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는 죽음을 향한 결단을 하신 것이다(22:42;요 10:11).

성 경: [눅9:5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 깊은 불화와 반목(反目)이 있어(왕하 17:24-41;요 4:9)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순례객들은 가까운 사마리아 길로 가지않고 먼 베레아 지방으로 지나다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사마리아를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하셨음을 보여준다.

성 경: [눅9:53]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 사마리아인들은 예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중앙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신 12:4-14). 유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하는 성전을 그리심산에 따로 지어서 이것을 자기들의 중앙 성소로 삼았다(요 4:20). 이런 종교적 갈등 때문에 저들은 예수께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행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며,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의 조그마한 난관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겪을 고초를 암시하는듯 하다. 또한 이 사마리아인들은 전통적 관습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혀 진정한 성전이신 예수를 만나 구원의 길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예수의 예루살렘행을 방해하는 불행을 자초하였다.

성 경: [눅9:54]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야고보와 요한이...원하시나이까 -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Sons of Thunder, NIV)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막 3:17), 그 까닭은 본절에서 보는대로 그들의 성격이 매우 급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은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하나의 보복 조처를 제안하는데 그 내용은 아하시야 왕 당시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 그들을 사른 사건(왕하 1:10-12)을 반영한다. 어쨌든 제자들은 복음이나 메시야 사역의 본질을 아직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상태였으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19:10;요 3:17;12:47)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눅9:55]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꾸짖으시고 - 구체적인 내용없이 간략하게 언급된 '꾸짖으시고'는 제자들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일축하셨음을 말해준다.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보복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구약적 대응방식 즉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꾸짖고 있다. 제자들은 엘리야의 방식 즉 '보복의 방식'을 요구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사랑의 방식을 말씀하심으로써 엘리야를 능가하는 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여기 나타난 예수의 태도는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에 대한 하나의 복선(伏線)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9:56]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예수를 배척한 사마리아인들]

⭕ 다른 촌으로 - 누가는 지리에 관한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단지 다른 곳으로 갔다고만 하여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한 사실 자체에만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방해하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보복적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먼 길로 돌아가는 비효율적 방식을 택하셨고 폭력이 아닌 평화의 길을 택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삶의 방식,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교회도 이러한 예수의 방법을 따를 때 모든 난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 한편 학자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함께 간 '다른 촌'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추측하는데, (1)사마리아에 있는 다른 마을(Klostermann, Zahn, Plummer), (2)사마리아로부터 다시 돌아간 갈릴리의 어느 촌(Bruce, Gilmour, Farrar), (3)베레아 접경의 촌 등이 그것이며 이중 어느 견해가 정확한지 단정 지을수 없으나 9절과 10:10과 17:11의 본문을 참고할 때 세번째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눅9:57]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혹이...좇으리이다 - 여기서 '혹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22절 주석 참조)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모습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답변(58절)의 빛에서 볼 때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의 권능(마 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성 경: [눅9:58]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여우도...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23절).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성 경: [눅9:59]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부친을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레 21:1-3).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성 경: [눅9:60]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죽은 자들로...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 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9:6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왕상 19:20). 그러나 뒤이은 예수의 대답을(62절) 통해 유추하건대,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 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성 경: [눅9:62]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제자도에 대한 교훈]

⭕ 손에 쟁기를...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 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 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유데토스'(*)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 경: [눅10: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이후에 - 이 표현은 단락의 전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 주께서 - '주'의 헬라어 '호 퀴리오스'(*)로 7:13 이후 처음 사용되며 제자들을 세워 사명을 부여하는 경우에도 이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9:1). 리펠트(Liefeld)같은 학자에 의하면 이 칭호는 이하의 교훈이 바로 예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또 헨드릭슨(Hendriksen)같은 학자는 이명칭이 구세주의 소유권, 권위,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 외에도 여기서 주어지는 예수의 제자 파송이 전세계의 열국에 대한 처음의 전파를 의미한다고할 때 이 중요한 사역을 지시하시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칭호가 사용된 듯하다.

⭕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 여기서 '달리'(*, 헤테루스)는 앞에 있었던 열 두 제자의 파송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된 듯하며 '70인'은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이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사본에 따라 어떤 것에는 72인으로, 어떤 것에는 70인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70인을 뒷받침해 주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1)이스라엘의 장로가 모두 합하여 70인이었다(출 24:1;민 11:16-17;24-25). (2)산헤드린의 구성원이 70인이었다. (3)세계에는 70개의 민족들이 있다고 여겨졌다(창 10장). 다음으로 72인을 주장하는 근거는 (1)이스라엘의 장로는 70인 뿐 아니라 72인으로 보는 견해도있다(민 11:26의 엘닷과 메닷을 포함하여) (2)창세기 10장에 대한 70인역(LXX)은 세계의 민족을 72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3)70인역을 준비한 장로들은 모두 72명이었다. (4)세계에는 72명의 왕자들과 72개의 언어가 있다고 여겨졌다(위경 에녹 3서 17:8;18:2-3;30:2). 이러한 논거(論據)들 중 앞의 (3)과 뒤의 (2)가 본문의 맥락에 가장 잘 적용된다고 본다. 즉 창세기 10장에 대한 해석에서 히브리 원문을 택하느냐, 70인역을 택하느냐에 따라 70인도 될 수 있고 72인도 될 수 있으나 그것들이 세계의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뜻을 갖는다고 보아 예수께서 70(72)인을 선택한 것은 후대 교회가 세계 모든 나라들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 것을 예견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세우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데이크센'(*)은 '공식적으로 임명하고 선포하사'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번에 파송하는 70(72)인의 제자들 역시 지난번의 12제자와 동일한 권위로 보내어졌음을 의미한다.

⭕ 둘씩 - 열 두 제자를 파송할 때처럼(막 6:7) 이번에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떠나게 하신다. 제자들을 둘씩 파송한 것은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유효한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민 35:30;신 19:15;전 4:9;마 18:16;딤전 5:19). 이것은 후에 제자들의 설교나 초대교회 선교의 모델(model)이 되기도 하였다(행 3:1;4:1,13,19;13:1-3;15:40;15:27,39,40;7:14-22).

성 경: [눅10: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추수할 것은...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 본절은 마 9:37,38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으로 마태복음에서는 12제자들을 파송하기전에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70인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틈나는 대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시급함을 말씀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구약적 이미지에서 볼 때 흔히 추수는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며 이런 경우 추수를 하는 자는 주로 천사들로 묘사된다(욜3:13;계 14:15-20). 그러나 여기서는 심판이 아니라 은혜의 측면에서 복음의 전파를 말하며 그 임무가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또한 본절은 일꾼이 부족한데서 오는 안타까움과 그나마 있는 일꾼들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꾼들은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동시에 주인에게 일꾼을 증원(增員)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이며 일꾼들은 제자들이다. 제자들은 임의대로 일꾼을 부를 수 없다. 다만 일꾼을 보내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으며 그분이 보내주는 일꾼만이 진정으로 그분의 추수를 돕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성 경: [눅10: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 마 10:16에는 '양'(*, 프로바톤)이라고 되어있는데 본문에서는 '어린 양'(*, 아렌)이라고 하여 제자들의 연약함이 지적된다. 양은 용감하고 능력있는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은 선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제자들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수행해야 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영적인 선한 싸움을 할때 절대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방심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도 전혀없다. 왜냐하면 강하고 능력있는 목자이신 예수께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들은 자기들의 연약함을 늘 확인하여 겸손해져야 하며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엡 6:10-17). 한편 마샬(Marshall)은 '보내다'(*, 아포스텔로)라는 동사가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점을 주목하여 사도직의 기원(起原)이 '선교'의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성 경: [눅10: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전대(纏帶)나 주머니나 신 - 마태는 금이나 은 또는 돈을 넣어다니는 '허리띠'(*, 조네)로 표현하는데 누가는 '지갑'의 의미인 '발란티온'(*)을 사용하고 있다. 허리띠에 돈을 넣어 묶는 관습 보다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더 후대의 관습이라고 볼 때 누가는 도시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적절하게 단어를 바꾼 것이라 하겠다. 주머니(*, 페라)는 일용품을 넣는 가방이며(9:3)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맨발로 다니라는 것이 아니라 여분의 신을 지참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제자들은 9:3에서 처럼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 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자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전적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문안하지 말며 - 동양에서는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다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의 인사를 금한 것은 복음 전파의 긴급성을 강조한 것이다(Marshall).

성 경: [눅10: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먼저 말하되...평안할지어다 - 지금까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행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평안' 혹은 '평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이웃의 안부를 물을때(삼하 8:10;11:7;왕하 4:26), 사람을 만났을 때(왕하 5:21), 헤어질 때(삼상 1:17;삼하 15:9) 하던 '샬롬'(*)에 상응하는 인사말로 샬롬의 의미가 '평강을 빕니다'(스 4:17), '평안하냐'(왕하 4:26;5:21), '평안히 가시오'(삼상 1:17)인 만큼 '에이레네'도 같은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인사 내용 자체는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법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자들에게 '먼저'(*, 프로톤) 인사의 말을 하라고 하여 그들이 친절하고 공손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인데 아마 이것은 예수의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이 그 권위에 도취되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절의 인사가 일반적인 인사말이라 해서 일반적인 의미의 단순한 바램이나 기원을 뜻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앞으로 제자들이 흩어져 선교(mission) 활동을 할 때 하게 될 '평안'이라는 인사는, 하나님의 구원이 도래함을 뜻하는 차원에서의 '평안'을 의미하며(요 14:27;행 10:26), 하나님께 기원을 둔 하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성 경: [눅10: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평안을 받을 사람 - 헬라어 '휘오스 에이레네스'(*) 즉 '평안의 아들'(Son of Peace, R S V)은 히브리식 용법으로 '부활의 아들'(눅 20:36), '빛의 아들'(눅 16:8), '지옥의 아들'(마 23:15), '멸망의 아들'(요 17:12) 등과 같은유형의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사람의 성품과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태도에 따라서 겪게될 응분의 운명을 말해주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평안의 아들'은 '평화에 합당한 사람',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마 5:9).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인사가 단순한 기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선물로 주어지게 된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말이 지니는 힘에 대한 히브리식 믿음이 깃들어 있는 바, 구약에서 족장들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 유산(遺産)으로 여겨졌었다(창 27:37). 그러나 제자들의 축복은 수용자의 태도 여하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 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책임성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성 경: [눅10: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그 집에...옮기지 말라 - 여기서 '그 집'이란 물론 '평안의 아들'이 있어 제자들을 영접해 주는 집을 뜻한다. 여기서 '그 집에'(*, 엔 아우테 테 오이키아)는 강조적 표현으로 직역하면 '그 집 자체에서'(in the houseitself)이며, '바로 그 집에'(in that very house)란 뜻이다. 제자들은 대충 아무 집에서나 유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의 아들'이 있는 바로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열 두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9:4) 70(72)인의 제자들도 여러 집을 옮겨다니지 말고 한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열 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옮겨다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한편 제자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 받을 권리가 있다(갈 6:6). 말씀의 사역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성도들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딤전 5:18;고전 9:3-18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물질적 제공을 받는것이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서의 삯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겸손해야 함과 그들이 받는 물질적 대가는 풍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함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성 경: [눅10: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차려 놓는 것을 먹고 - 본문의 말씀은 단지 앞절에 대한 동의어적 반복으로 보기보다는 고전 10:2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하다(Marshall,Hendriksen). 즉 제자들 중 대다수가 유대인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지켜내려오던 음식에 대한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라도 이방인의 동네에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때 그들 앞에는 유대적인 음식 규정에 의하지 않은 음식상이 차려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본문의 말씀은 그러한 상황에서 음식물에 대한 유대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주어졌다고 보아야한다는 것이다(행 10:9-16). 그렇다고 할때 이 말씀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는(막 7:15,16) 예수의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성 경: [눅10: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병자들을 고치고...하나님의 나라...가까이 왔다 - 여기서도 열 두 제자들에게처럼 병을 고치는 능력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대한 사명이 주어지고 있다(9:2). 예수에게 있어서 각종 질병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 임재(臨在)하는 것에 대한 표상(表象)이었다(마11:5;눅 7:21-22). 그런데 본문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가까이 왔다'로 번역된 헬라어'엥기켄'(*)에 대한 해석이 '가까이 다가오다'로도 '당도하다' '이르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막 1:15에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고 가까이 이른 상태를 묘사하는 한편 눅 11:20(마 12:28과 평행)에서는 이미 당도한 것으로 쓰여진다. 눅 11:20에서는 귀신 축사(逐邪)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에 대한 표시로 제시된다. 그리고 귀신들림에서 해방되고 병으로부터 온전해진다는 것은 인간이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상태로부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됨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와졌다고 선포할때 그 말의 의미는 시.공간 속에 도래하는 완성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효력들이 발생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고 느낄 수 있을 만큼 가시화(可視化)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엥기켄 에프 휘마스)는 구문이 문법상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아직'(not yet) 완성된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10:1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 이번에는 영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의 행동 지침을 일러주고 있다.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코마이'(*)는 사신들(ambassadors)을 환영하거나 그들이 전달해 주는 통지문을 환영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 제자들 개인의 자격이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또한 '거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테이아'(*)는 '넓은 길' 또는 '노천의 넓은 거리'를 뜻하는데 이것은 거절하는 사람 또는 동네에 대한 제자들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성 경: [눅10:1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 복음을 거절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하는 행위로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것이다(9:5 주석 참조). 결국 이런 행위는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한 행위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과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이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경고성 행위는 반대나 불이익을 뜻하는 여격이 사용된 '너희에게'(*, 휘민)로써 더 강조되고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마지막까지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행위에 대해서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2)복음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엄연한 사실로서 다가오며 어떤 악한 세력에 의해서도 지연되거나 저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눅10:1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의 파송]

⭕ 저 날에 소돔이...쉬우리라 - '저날'은 마태복음의 병행 본문에 기록된대로(마10:15) '심판의 날'을 뜻함이 분명하다(21:34;마 7:22;살후 1:10;딤후 1:12,18). 또한마태는 구약적 표현에 일치되게 '소돔과 고모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고모라를 생략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악의 상징이며(사 1:9;렘50:40) 본래 이 두 성읍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심판을 받아 멸망한 도시였다(창 19:24-28). 한편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는 표현은 심판의 강약을 뜻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심판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확정지우며 그 심판의 준엄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눅10:1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여기서 '화 있을 진저'는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 보다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될 대상에 대한 슬픔과 유감을 표시한다(6:24). 고라신은 마태복음의 병행본문(마 11:21)과 이곳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이다. 고라신은 당시의 가버나움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인데 현재는 텔 흄(Tel Hum)으로부터 동부쪽으로 5km정도 거리에 있는 '케라제'(Kerazeh)일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께서 이 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에 비유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관심과애정을 기울이셨으리라 추측된다.

⭕ 벳새다 - 이 곳에 대해서는 9:10의 주석을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하신 기록은 9:10-17에 나와 있다.

⭕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 - 이 문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장소에서 행하신 사역들이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많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권능'(*, 뒤나미스)은 4:14과 9:1에도 나오는 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곳에서 두로와 시돈이라도 구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 두로와 시돈 - 이 두 도시는 갈릴리 북방에 있는 베니게의 항구도시로 두로는 B.C.2750년 경에, 시돈은 B.C. 1400년 이전에 건설되었다. 이 두 도시는 번영과 쾌락과 이교도의 도시로 유명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한 결과(암1:9;욜 3:6)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사 23장;겔 26-28장).

⭕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베옷(*, 삭코스)은 염소털로 만든 거친 옷으로 회개나 애도의 표시로 입었다(왕상 21:27). 재(*, 스포도스) 역시 애도의 표시였고(욥 2:8;욘 3:6;마 6:16) '삼베'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에4:2,3).

성 경: [눅10:1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심판 때에...쉬우리라 - 1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패역한 도시에 비유하여 고라신과 벳새다의 심판이 얼마나 중할 것인가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도 심판을 면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에 대해서 엄한 심판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성 경: [눅10:1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가버나움 - 문자적으로 '나훔의 마을'이며 '나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이름은 결국 '자비의 마을'이 되는 셈인데(Hendriksen) 예수의 심판의 말씀에 비추어 볼때 이 마을의 이름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완악한 마을'이라고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중심적 제자들이 그곳에서 선택되었고(5:10), 많은 이적과 교훈이 그곳에서 베풀어졌다(4:23,31-37;7:1-10). 그리하여 마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본 동네'라고 하였다(마 9:1). 그러나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는데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역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는 표현에 의해 그들이 매우 교만하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 하늘에까지...낮아지리라 - 이는 이사야가 포로후기 시대에 오만불손했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말씀(사 14:13,15)을 가버나움에 적용한 것이다. '네가...높아 지겠느냐'(*, 메 휩소데세)에서 '메'(*)는 부정적인 대답을 예상하는 조사로서 결코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준다. 하늘의 영광과 음부의 파멸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 당할 파국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음부'(*, 하데스)는 구약에서 죽은 사람들의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신약 시대에는 그 의미가 조금 변하여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Marshall).

성 경: [눅10:1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

⭕ 너희 말을...것이라 - 제자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자들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함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의 권위를 존중해주지 않고 거역할 때 그 행위는 예수를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권위가 자생적(自生的)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임을 인식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한다는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했다.

성 경: [눅10:1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기뻐 돌아와 -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이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들을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 주의 이름으로...항복하더이다 - 제자들의 이 보고는 귀신을 쫓아낸 일이 예상 외의 놀라운 경험이었음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 많은 사람을 고통에서 구원하고 이와 더불어 예수에게 그러했듯이 자기들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던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구할 때 놀라운 이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마 21:21).

성 경: [눅10:1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사단이 하늘로서...떨어지는 것 - 본절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1)70인의 제자들이 사역할 때 사단이 추방당했다는 견해. (2)사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제자들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신 말씀이라는 견해. (3)예수께서 광야 시험을 이겨내셨을 때 사단이 하늘에서 추방되었다는 견해. (4)70제자 뿐만 아니라향후 전도자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결국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게 될 것을 뜻한다는 견해 등이다. 어쨌든 70제자들의 귀신 축사(逐邪)는 악의 세력의 패배를 보여주는 명백한 표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0:1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뱀과 전갈 -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상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자들이 뱀과 전갈을 밟아 죽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바울이 뱀에 물렸으나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인데(행28:3-6) 그것은 본문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성경에서 뱀과 전갈은 주로 사단의 세력을 상징한다(창 3:1-15;고후 11:3;계 9:3,5,10). 본문의 출처라고 보여지는 시91:13의 맥락에서도 갈은 의미를 갖는다. 결국 이 말씀은 앞절(18)과 같은 맥락에서 사단의 세력이 제자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의미이나 다만 여기서는 사단의 실체가 더구체화되며 제자들에게 악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보다 강조된다. 창 13:15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처음 나온다. 이제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며 그 제자들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케 된 것이다.

성 경: [눅10:2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칠십 인이 돌아옴]

⭕ 귀신들이...기뻐하라 -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때문에 기뻐하라'는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 형식이다. 이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이 생명서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귀신 축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이는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참된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수표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마 7:22,23). 만약에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거나 성취한 업적에 대해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기록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게그랖타이'(*)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는 뜻의 헬라어 동사 '엥그라포'(*)의 완료 수동태로 하늘에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유대교의 문헌에는 하늘의 책에 대한 사상이 많이 발견되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는생명의 책을 가리킨다(출 32:32,33;시 69:28;단 12:1;히 12:23;계 13:8;20:12).

성 경: [눅10:2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이 때에 - 예수께서 제자들의 성공적 사역을 치하하신 바로 '그 때'(at thattime,NIV)를 가리킨다. 또한 이 표현은 누가가 즐겨쓰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도 많이 발견된다(2:38;7:21;12:12;13:31;24:33;행 16:18;22:13).

⭕ 성령으로 기뻐하사 - 마태의 병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마 11:25)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기뻐하사'(*, 에갈리아사토)는 '기뻐하다'는 뜻의 동사 '아갈리아오'(*)의 과거형으로 1:47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사용된 동사이다. 지금 예수께서 느끼는 기쁨임을 뜻하며 계속 이어지는 감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일종의 계시임을 암시한다.

⭕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천지의 주재'라는 호칭은 다분히 구약적인 표현으로(창14:19,22) 전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전권적 위엄을 나타내며 '아버지'(*, 파테르)라는 호칭은 아람어의 '압바'(abba)에 해당하며 따뜻한 부자 관계를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온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영적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롬 8:16).

⭕ 이것을 지혜롭고...나타내심 - '이것'이란 아마 예수의 사역 즉 그가 베푼 이적들과 말씀의 선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리고 방금 70(72)인의 제자들이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들일 것이다. 여기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대조되고 있는 데, 전자는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후자는 세상적 지혜나 율법적 지식이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사상 즉 지혜로운 현자(賢者)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는 생각을(위경제 4에스라 12:35-38) 뒤엎는 역설적인 말씀으로서 바울에게서도 발견되는 사상이다(고전 1:18-31). 또한 본절은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 그리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던 자들에 대한 예수의 각별한 애정을 암시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성 경: [눅10:2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 '모든 것'(*, 판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1)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계시(Jeremias), (2)(본문이 단 7:13,14;마 28:18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았을 때) 예수께서 위임(委任)받은 하나님의 권한(Lagrange, Schniewind), (3)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Weiss), (4)모든 사람(Bengel), (5)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것(Holtzmann), (6)그 하나님의 뜻(Plummer), (7)모든 교리(Harnack) 등. 그런데 본문에서 '모든 것'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주셨다'(*, 파라디도미)의 의미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주셨다'는 동사는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 교리, 전통과 같은 것을 물려주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며(막 7:13;고전 11:2,23), 권력이나 권위를 위임하는 데도 사용된다(4:6). 이렇게 볼 때 앞에 열거한 제 견해들은어느 것이 틀리거나 어느 것이 정확하게 맞다기 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질 세상의 것이라 하겠다. 결국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 외에는...아는 자가 없나이다 - 여기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상호 인식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한 본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론적(存在論的)인 관계 즉 복음서들이 한결 같이 증거해 주는 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증거한다. 물론 성도들도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능력에 의해 아버지를 안 것이 아니라 아들이신 예수의 중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식이 너무도 부분적이라는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성 경: [눅10:2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너희는 보는...복이 있도다 -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것'(what you see, NIV)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넓은 의미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그리고 행하실 이적들과 가르침들을 통해서(4:6)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밀을 보는것을 의미한다(22절). (2)좁은 의미에서,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굴복시킬 때 경험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언급한 마태복음의 문맥에서는(13:16) 전자에 가깝고, '듣는 것'을 생략한 누가복음의 문맥에서는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10:2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예수께서 기뻐하심]

⭕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제자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옛 선지자와 임금들을 제자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본절의말씀에는 과거에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선지자)과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들(왕)조차 보지 못한 것을 지금에 평범한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사상을 말하려는 누가의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되기를 대망한 사람들이고(사 52:15) 왕들 가운데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왕들은 옛계약을 신뢰한 자들로서 선지자들의 계시를 받아들여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기를 열망했었다(시 110:1).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니 복된 자들이 아닐수 없다(2:30;히 11:13;벧전 1:10,11).

성 경: [눅10:2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율법사가 일어나 - 마가는 '서기관'으로 기록한(막 12:28) 반면 마태와(마 22:35) 누가는 '율법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보면 될 것이다. 율법사는 유대 율법의 전문가를 말한다(9:22 주석 참조). 이 율법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치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한편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어느 장소, 어느 시점에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막12:28-34) 마태복음과(마 22:35-40)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이 이야기가 24절에 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막 11:27을 고려하여 이 이야기가 예루살렘이나 그 근처에서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그룬트만(Grundmann)의 견해는 일리가 있다.

⭕ 시험하여...영생을 얻으리이까 - 마가복음에서는(막 12:28)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한 나머지 진지한 물음의 자세로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에서의 '시험'(test, NIV)은 강한 악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라기 보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종교 지도자가 공식적 직함을 받지 않은 예수께서 올바른 대답을 줄 수 있는가를 보려고 물어본 것으로 이해된다. 계속되는 질문 가운데 '영생'(eternal life, NIV)은 '내세에 적합한 생명'(Tyndale) 또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가리킨다(18:18,24,25,29;요 3:3,5,15,16,36). 한편 여기 율법사의 질문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선행을 물은 어떤 부자 관원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18:18).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율법의 자구적(字句的) 해석과 적용에만 몰두했던 사람으로서는 본절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러울 따름이었다.

성 경: [눅10:2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율법에...어떻게 읽느냐 - 결국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은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마 22:36;막 12:28)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태복음(마 22:37-40), 마가복음(막 12:30-31)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반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 형태로 전개된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율법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율법으로 인도하고 있는데 이는 율법사의 이해의 범주에 맞도록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율법사들은 모세 오경의 핵심 내용을 담은 경문을 손목이나 이마에 붙이고 다녔는데, 아마 예수는 이 경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성 경: [눅10:2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네 마음을 다하며...사랑하고 - 이 말씀은 신 6:5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전반부 즉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내용을 주석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유대교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일편 단심의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것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 관계에 의해 피차간에 충성과 사랑의 관계를 지켜야함을 주장하는 신명기 학파의 신학의 주제이기도 하다. 율법사들은 신 6:7-9에 의거하여 이 중요한 말씀을 소가죽에 기록하여 호부(護符)처럼 늘 지니고 다녔다.

⭕ 네 이웃을...사랑하라 - 이 말씀은 레 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의 후반부 즉 대인(對人) 관계에 관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이웃'(*, 플레시온)이라는 단어는 유대적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 단어의 범주에서 제외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뒤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교적 관점을 파기하는 의미가 있다.

성 경: [눅10:2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이를 행하라"(*, 투토 포이에이)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행위의 계속성을 강조한다. 행함에 대한 결과는 '살리라'는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레 18:5;갈 3:12에도 있다. 혹자는 여기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을 구분하는 차원에서 예수의 인정(認定)과 행하라는 명령이 행위에 대한 거부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Tyndale) 본문의 문맥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러한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이 율법사가 요약한 율법의 핵심은 옳다고 인정받을 만한 것이었으며(마 22:37-39;막 12:30,31)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바 있기 때문이다(마7:21,24;25:31-46).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이 율법사의 율법 지식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그가 물음을 묻는 저의(底意)와 그의 위선을 아셨다. 그렇기때문에 예수의 대답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한 의미에서 충족시키기란 불가하며 따라서 율법 준수를 위해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교훈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0:2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율법에 정통하다고 자부하는 소위 율법사가 사람들 앞에서 제기한 자신의 질문이 어리석은 것으로 드러나자 2단계로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웃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아마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이웃의 개념을 과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율법사가 생각하고 있는 이웃의 개념 속에는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이 제외된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 경: [눅10:3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하(海面下) 250m의 저지대로 두 지역간의 거리는 약 36km정도였으며 길이 가파르고 길 옆에는 암석들이 많아 도둑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A.D.4세기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횡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길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예수의 말씀은 시작된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민족적 구분을 초월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

⭕ 옷을 벗기고...거반 죽은 것을 - 길을 가던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심지어 강도들은 옷까지 빼앗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심한 폭행을 가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상태에서 버려두고 떠나갔다. 혹자는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는 배척당했으나 사마리아인들로부터는 영접받은 예수라고 하고 주막은 교회를 뜻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해석(Allegory)일 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의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였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성 경: [눅10:3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마침 한 제사장이...피하여 - 여기서 '마침'(*, 카타슁퀴리안)은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우연히'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강도 당한 사람이 쓰러져 있던 곳이 외진 곳이며 그가 오래도록 구조를 받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이 길을 지나간 제사장의 주 임무는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리고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피하여 지나가고'(*, 안티파렐덴)는 반대편의 길로 돌아가는것을 말해주는 바 제사장의 '도피'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제사장이 피하여 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자기도 강도 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Marshall)이거나 (2)그 사람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준수의 정신 때문(레 21:1-3)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사 여부를 획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이 제사장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성 경: [눅10:3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한 레위인도 - 레위인도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성별된 지파였다(민 18:1-32). 레위인들은 제사장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유대의 종교적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이 레위인은 앞서 지나간 제사장과는 달리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기는 하지만 역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성 경: [눅10:33]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불쌍히 여겨 -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세번째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더구나 앞의 두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사마리아인은 그들에 비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부류에 속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교만하고 완악한 유대주의자들과 강한 대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에 대해서는 9:52,53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성 경: [눅10:34]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 사마리아인은 먼저 응급 조치를 취하고 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상처의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것이다. 대개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식히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한다(Robertson).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른 후 싸매어 주었다. 이 여행자가 비상시를 대비해 붕대를 가지고 다녔다면 다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의 옷이라도 찢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 '짐승'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테노스'(*)는 타고 다니거나 짐을 실을 수 있는 짐승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아마 이 짐승은 나귀였을 것이다(Lenski). 그리고 '주막'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도케이온'(*)은 '모든'을 뜻하는 '파스'(*)와 '영접하다'를 뜻하는 '데코마이'(*)의 합성어로 많은 사람을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의 여관을 말한다. 탈진한 환자를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온 사마리아인은 계속해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 '돌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딤전 3:5에서 교회를 돌보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마리아인이 환자를 '책임적으로' 돌보아 주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눅10:35]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이튿날에 - 시리아어 시내역 본(Syraic Sinaitic)에는 "그 날 새벽에"(at dawn ofthe day)로 되어 있어 더 정확한 시점을 전해 주고있다. 이렇게 일찍 떠났다는 것은 그 여행객이 결코 제사장이나 레위인 보다 할 일이 없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사실 그는 새벽에 일찍 떠나야 할만큼 바쁜 사람이었으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바쁜 시간과 물질을 희생했던 것이다.

⭕ 데나리온 둘 - 마 20:2에 의하면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며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us)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동시대 이탈리아(Italy)에서 하루 숙박비가 로마 제국 화폐로 1/32 데나리온이었다. 로마 제국 내에서 통용되던 화폐의 가치가 동일하였다고 볼 때 이 금액은 약 2개월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 갚으리라 - 이 사마리아인은 완전한 이웃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되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책임을 지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일시적이며 충동적인 동기에 의해서 행해져서는 안되며 끝까지 완전하게 책임 의식(責任意識)을 가지고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도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온전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요 13:1).

성 경: [눅10:36]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누가...이웃이 되겠느냐 -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질문으로 결론을 유도하고 있다. 두 질문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전자에는 이웃의 개념을 범주적으로 제한하려는 의도(意圖)가 숨겨져 있는 반면 후자에는 전자의 제한적인 이웃 개념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의 질문의 의도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 누군가를 미리 설정해 두기 보다는 스스로 이웃을 만들어 나가는 자세가 은혜받은 자들의 바른 태도이다.

성 경: [눅10:37]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선한 사마리아 사람]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이니이다'로 대답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는 표현으로써 핵심을 피해가고 있다. 예수께서는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는 것이다.

⭕ 너도 이와같이 하라 - 이웃의 개념을 따져 묻는 율법사의 현학적(衒學的)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너무도 단순 명료하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하라"는 예수의 권위있는 명령은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어버리는 위엄있는 말씀이다. 율법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당장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다.

성 경: [눅10:38]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길 갈 때에...한 촌에 - '길 갈 때에'라는 모호한 표현은 장소와 시점 그리고 앞부분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한 촌'이라는 표현 역시 누가가 장소에 대한 정확성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개괄적인 표현이다. 이 '한 촌'은 요 11:1과 12:1에 의하면 '베다니'라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마을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마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서 사역한 것에 관해서는 이후에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13:32,33; 17:11; 19:28).

⭕ 마르다...영접하더라 - 마르다의 자연스러운 영접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와 그들이 초면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요 11:5). 이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며 나사로의 동생이다(39절;요 11:19,20;12:2,3). 나사로는 죽었다가 예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이 있으며(요 11, 12장) 마리아는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는데 그 만큼 이들 가족은 예수와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예수를 영접하는 주체로 마르다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마르다'(*)라는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람어의 여성 명사이다. 성경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단지 마 26:6에 근거하여 그가 문둥이 시몬의 아내일 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추측할수 있을 뿐이다.

성 경: [눅10:39]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주의 발 아래 앉아...말씀을 듣더니 -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은 요 12장에서의 모습과 병행을 이룸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마르다는 예수를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고(요 12:2) 마리아는 예수 곁에서 그에게 향유를 붓는다(요 12:3). 여기서 '아래 앉아'(*, 파라카데스데이사)의 문자적 의미는 '곁에 앉다'로 제자가 스승의 발치에 앉아 교훈을 듣는 자세를 묘사하는 말이다(행 22:3). 이것은 마리아가 마치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듯이 예수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매우 열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이는 마리아의 태도를 묘사한 '듣더니'(*, 에쿠엔)가 미완료 능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 그녀는 다른 일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채 열심히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가리켜 '발 아래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의 발 아래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본절), 죽은 오라비를 위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고(요 11:32),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에게 향유(perfume, NIV)를 부었기 때문이다(요12:3).

성 경: [눅10:40]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마르다는...분주한지라 - 마르다의 바쁜 모습은 그녀가 예수께 대단한 정성을 쏟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분주한지라'(*, 페리에스파토)는 '사방에서 끌어당기다'는 의미로 그녀의 바쁜 상태가 어느 정도인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이렇게 바쁜 마르다의 모습과 예수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은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마르다도 마리아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그분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 명하사...도와주라 하소서 - 아마 마르다는 혼자서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너무 바쁘니 와서 도와 달라고 마리아에게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에 너무 열중인 나머지 그녀의 요청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난 마르다는 마침내 예수에게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마르다의 이의 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이다. (1)자신이 그렇게 바쁜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기를 도우려 하지 않는 마리아에 대한 간접적인 책망이 있을 것이고,(2)그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예수의 무관심에 대한 원망이 있으며, (3)적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음식을 마련하는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가장 옳다고 하는 확신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에 비해 자기가 지금 얼마나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은연중 과시하려는 마르다의 생각이 담겨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10:41]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마르다야...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부르는 이중 호격의 사용은 예수께서 마르다의 정성스런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셨음을 암시한다. '염려하고'(*, 메림나스)라는 표현은 '흩어지다''나누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메리조'(*)에서 파생된 것으로 과도한 욕구로 인해 어지럽게 분열된 심적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근심하나'(*, 도뤼바제)는 '문제를 야기시키다'는 뜻으로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열심으로 말하면 마르다(Martha)나 마리아(Mary)가 매일반(每一般)이었다. 하지만 마르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을 해소해 줄 먹을거리 보다는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했다(시 119:103-105).

성 경: [눅10:42]

주제1: [확장되는 인자의 사역과 교훈]

주제2: [마리아와 마르다]

⭕ 몇 가지만...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 본문은 해석이 난해한 구절로서 각 사본들에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가지'와 '한가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둘 다 음식의 가지 수로 보는 견해.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마르다는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려 했기 때문에 바쁜 것이니만큼 음식의 가지 수를 몇 가지로 줄이거나 또는 한가지만 하여도 족하다는 것이다. (2)전자는 물질적인 것을, 후자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접대 행위 자체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가르쳤다는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따라 (2)의 견해(見解)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예수께서 물질적인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 좋은 편을...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도록 명하여 달라는 마르다의 요청은 거부되며 오히려 마르다가 마리아의 태도를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대답이 주어진다. 예수를 섬기는 적절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지나친 물질로써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동참함으로써 섬기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여인들의 위치가 가사 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자들도 복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성 경: [눅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 마태복음의 경우 '주의 기도'는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그 장소는 어느 산 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다소 모호한 표현인 '한 곳에서'로 이야기의 서두를 삼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3:21;6:12), 이렇게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심을 지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 요한이...가르쳐 주옵소서 - 복음서 안에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서 요청하는 것은 이 곳이 유일한 경우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는 것을 보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것이 생각나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당시 어떤 종교 공동체(宗敎共同體)에서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일이 있었고(Farrar, Plummer),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다(행 10:3,9).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Jeremias).

성 경: [눅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이렇게 하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 본문을 영원 불변의 기도형으로 생각해서 마치 주문(呪文)을 외듯이 반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기도가 담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과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것을'(what) 기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how) 기도하라 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 아버지여 - 이 호칭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사용했던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가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것임을 나타낸다(10:21 주석 참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도 그런 의미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라고 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롭게 갖게되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준다(요 20:17;롬 8:14-17). 한편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되어 있어 형식에 있어서 더 세련되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이 부분은 마태복음과 일치한다(마 6:9).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표현한 것이니만큼 여기서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뜻한다. 결국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원(祈願)이자 경외심에서 기인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또한 본 구절의 표현이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겠다는 신앙의 표시이자 하나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다(레 22:32;시 79:9;사 8:13;29:23). 동시에 이 기원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worship)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형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간구이기도 하다.

⭕ 나라이 임하옵시며 -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배하는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어 지는 것에 상응하는 인간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종말론적 성취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사단의 통치의 종식(終熄)을 뜻한다는 의미에서 이 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9:1;10:17). 따라서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단지 미래에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개인과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을 바라며, 또한 실제로 경험하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로 보아야 한다.

성 경: [눅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은 개인적인 필요를 구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용할'(*, 에피우시온)이라는 형용사의 해석이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여기에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사용된 범례(凡例)를 참고할 수도 없으며 그 의미도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1)'내일을 위한'이란 의미. 그러나 문맥상 '내일'이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요청하는데 초점이 있는만큼 이 해석은 저녁에 기도하는 경우에만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단어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면 '내일'은 종말론적 완성의 때를 가리키며 '양식'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을 영적인 양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날'(6:11)은 그 미래의 양식을 '오늘' 허락해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Liefeld). (2)'필요한' 또는 '충분한'이라는 의미. 이렇게 되면 본문은 "날마다 충분한 양식을 주옵시고"가 되어 비교적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예수 당시의 날품팔이 노동자들에게 있어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일이었으며(마 20:1-5),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은(출 16:4;신 8:9) 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육체적인 양식이든 영적인 양식이든 그것을 공급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성 경: [눅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주기도문]

⭕ 용서하오니...사하여 주옵시고 - 여기서 '죄'(*, 하마르티아)는 아람어 '호바'(hoba)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빚'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에 근거하건대 '죄'란 하나님께 '빚' 또는 '부채'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응분의 대가를 치뤄야 할 '채무'를 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바 그것은 나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하나님께 빚진 나의 채무를 필연적으로 탕감되도록 하는 담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 빚의 탕감을 조심스럽게 간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여기서 '시험'(*, 페이라스모스)은 '유혹'(temptation, NIV)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성도의 신앙을 꺾으려는 외적인 시련과 죄를 범할 수 있는 내적 유혹을 함축적으로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단 시험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을 견디어내는 것이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하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으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나 약 1:1-15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그분의 선한 뜻을 펴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기도 하지만(4:1-12;욥 1:12) 본문은 성도가 시험에 부딪쳤을 때 굴복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이것은 마 6:13의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편 마태복음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구가 있으나 권위있는 마태복음 사본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어 이것이 본래적인(original)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성 경: [눅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밤중에...내게 빌리라 - "너희 중에 누가"라는 양식으로 비유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형식이다(11절;12:25;14:28;15:4;17:7). 한 친구가 찾아온 시각은 '밤중'이다. 7절에 의하면 이 시각은 제법 늦은 밤이었다. 왜냐하면 식구들이 모두 잠 자리에 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구의 방문이 예의를 벗어나는 것임과 따라서 환영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성 경: [눅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여행 중에...먹일 것이 없노라 - 이 친구가 밤중에 떡(bread,NIV)을 얻으러 다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제시된다. 팔레스틴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고려하건대 밤에 여행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 온 것은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마 2:9). 그런데 친구의 방문을 받은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다. 이 친구에게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조금은 있었으나 당시의 풍습상 손님에게 떡을 부족하게 대접하거나 먹다 남은 떡 조각으로 대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모욕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그는 떡을 필요로하는 여행중의 친구를 위해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자야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분명하다.

성 경: [눅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 아마 이 주인은 잠이 들었다가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다소 불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친구의 방문을 환영하는 "친구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Manson). 실질적으로 이 집 주인이 괴롭게 생각했던 것은 떡을 주는 것보다는 첫째는 문이 이미 닫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식구들과 함께 자고 있는데 일어나 움직이면 식구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염려이다. 첫째 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문을 잠그기 위해 문빗장을 걸었을 텐데 그것을 어두움 속에서 찾아 여는 것은 대단히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Easton). 이 집은 온 가족이 한 방 한 이부자리 밑에서 잠을 자는 팔레스틴의 시골 농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성 경: [눅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벗됨을 인하여...강청함을 인하여 - '강청'(boldness, NIV)함을 견디지 못해 필요한 것을 준다. 여기서 '강청함'(*, 아나이데이안)은 부정접두어 '아'(*)와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체면 불구하고 간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는 두가지 교훈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하지 않으려 했던 집 주인과 하나님의 쾌히 주심을 대비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려는 것이고(9-13), 둘째, 응답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계속해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친다(살전 5:17).

성 경: [눅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라...주실 것이요 - 본문의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와는 달리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된다(10:13;마 18:19;막 11:24;요 11:22;엡 3:20).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 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고(Lagrange), '구하면 확실히 받을 수 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Marshall). 그런데 후자의 의미는 다음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기에 본절은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기도할 때 반드시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찾으라...찾을 것이요 - 이 문구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거일 수 있고,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 '찾으라'(*, 제테이테)의 성경적 용법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신 4:29;삼하 21:1;호 5:15;행 17:27).

⭕ 두드리라...열릴 것이니 -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예레미아스(Jeremias)는 이 장면이 하늘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후 문맥상 다소 거리가 있다.

성 경: [눅11:1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구하는...열릴 것이니라 - 본절은 앞의 말씀에 대해 재차 강조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고취시킨다(시 91:15;사 58:9;슥 13:9;요 15:7). 본절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자의 끈기와 인내보다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신다는 '절대 신뢰'와 구한 것은 틀림없이 받는다는 '확신'이다.

성 경: [눅11:1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생선을 달라하면...뱀을 주며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비유의 말씀이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자가 있겠는가. 생선을 주거나 생선이 없다면 적어도 해로운 것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말해주는 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틀림없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이다.

성 경: [눅11:1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알을...전갈을 - 여기서 알은 떡, 마른 생선과 함께 유대지방의 정식으로 알려진 삶은 달걀을 말하며 전갈은 꼬리로 상대를 찔러 무감각하게 만드는 독을 가진 짐승이다. 이 전갈(全蝎)은 성경에서 악하고 위험한 것의 상징으로 묘사되며(신 8:15;계 9:3,10), 몸을 구부리면 계란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한편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에는 '떡과 돌이' 한 쌍을 이루며 서술되어 있어(마 7:9) 누가복음과 차이를 보인다.

성 경: [눅11:1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기도에 대한 교훈]

⭕ 너희가 악할지라도 - 여기서 '악한'(*, 포네로스)이라는 형용사는 사람과 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3:19;6:45). 혹자는 이 표현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사례에 근거하여(마 12:34), 여기서도 이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Marshall). 또한 이 말씀이 인간 일반의 원죄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둘 다 정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설사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강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천부께서...성령을 - 누가가 인간이 주는 '좋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의 질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 가운데 최고의 선물인 성령이기 때문이다(요 16:7).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4-11). 실제로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장 귀한 선물 곧 복음의 물결이 온 세계에로 확산되어갔다. 한편 마샬(Marshall)의 견해대로 마태의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 영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면(롬 10:15;히 9:11;10:1) 누가와 마태는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성 경: [눅11:1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한 벙어리 귀신 - 평행 본문인 마가복음는 귀신 축출에 관한 기사가 없고(막 3:22), 마태복음(마 12:22)에 의하면 이 귀신은 그 사람을 벙어리가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눈까지 멀게 했다. 귀신을 좇아내는 과정은 일체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고 그 사람이 온전해졌다는 기사(奇事)만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어지는 바알세불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고 묻는 모습이 나온다(마 12:23).

성 경: [눅11:1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그 중에 더러는 -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일단의 무리들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이히 여기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되어 있고(마 12:24), 마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되어 있다(막 3:22). 서기관의 대다수는 바리새인이었으므로 사실상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일치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 귀신의 왕 바알세불 -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불리어지게 된 기원과 '바알세불'이라는 이름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가 없이 다만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왕하 1:2에 근거하여 '바알'이 에그론(Ekron)에서 숭배되던 우상인 '바알세붑'(Baal-Zebub)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한편 이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는데 공동 번역의 '베엘제불'(Beelzebull)에서 'Beel'은 'Baal' 즉 '주'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뒷 부분인 'Zebull'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1)'집', '높은 곳'을 뜻한다고 보면(왕상 8:13;사 63:15) '거주의 주' 또는 '높은 곳의 주'가 된다(Foerster). (2)발음이 유사한 '똥'이라는 의미의 Zebel로 보면 '똥의 왕'의 된다(Hendriksen). (3)이를 '파리'로 해석하여 '파리의 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Bengel, Tyndale). 이 가운데 비교적 많이 인용되는 것은 (1)의 설명이다. 아무튼 본문을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좁게는 교권자들)이, 예수가 귀신을 좇아낸 사건 자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무능력을 은폐(隱蔽)하기 위하여 진리를 매도하려 했던 것이다.

성 경: [눅11:1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시험하여...표적을 구하니 - 마가는 여기서도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마태에 의하면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2:38). 이들은 예수가 다윗의 자손(마 12:23), 즉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담당할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귀신 축출 사건을 신적 권위의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 신적 권위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을 만큼 흔한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에게 더 무리한 요구를 하여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의도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이 말하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a sign from heaven, NIV)에 대해서는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류의 이적을 요구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왕상 18:1).

성 경: [눅11:1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아시고(*, 디아노에마타) - 이는 '깊이 생각하다', '구분하다'의 의미를 갖는 '디아노에오'(*)에서 나온 말로 의도나 목적을 간파하였다는 의미이다.

⭕ 스스로 분쟁하는...무너지느니라 -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나라나 집은 없다.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비유 앞에 적대자들의 논리는 산산이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성 경: [눅11:1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 앞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일반 논리로 이끌어 내었는데 여기서는 그 일반 논리를 특수한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나라와 집이 그러하듯이 사단도 자기들 끼리 싸우면 그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것은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입은 것이며, 싸움은 사단의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만 있을 뿐이다(고후 10:4).

성 경: [눅11:1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너희 아들들은...재판관이 되리라 - 적대자들의 비방에 대한 예수의 반대 논리는 매우 철저하며 집요하다. 이제는 적대자들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귀신 축출 행위(逐出行爲)를 사단의 힘입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그들의 추종자들의 귀신 축출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 스스로를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재판관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followers, NIV)로 번역된 '휘오스'(*)는 '추종자', '제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며(히 12:5;벧전 5:13), 예수 당시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행 19:13).

성 경: [눅11:2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다크튈로스'(*)는 '손가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며(46절) 이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8:19;31:18;신 9:10). 그러나 더 흔하게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출 7:4,5;9:3,15). 한편 마 12:28에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삶의 초기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셨다는 의미에서(3:22;4:1,18) 마태의 서술도 적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영'이 의미상 거의 동일하였다고 할 때(대상 28:12,19) 누가와 마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적대자들의 비방은 완전하게 부정되며 예수는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었다는 사실이 선언되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임하였느니라 - 예수의 말씀은 단지 적대자들의 비방을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사건은 단순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함을 말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임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프다센'(*)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동사의 의미는 '앞서 오다'의 뜻도 있고(살전 4:15), '방금 도착했다', '도달한다'는 뜻도 있다(Lenski). 이 동사의 의미를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곧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 되고 현재적인 의미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이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 하나님의 권세가 사단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보게 된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이 견해를 지지해주는 더 결정적인 단서는 '너희에게'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분명히 지금 예수 앞에 있는 청중들을 가리키는 것이지 미래의 청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성 경: [눅11:2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강한 자가...안전하되 - 전통적으로 본문의 '강한 자'(a strong man, NIV)는 사단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그리고 '집'은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Lenski). 한편 사단이 지키고 있는 '소유'에 대해서는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갖추어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빼앗은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단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더 강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는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의 안전을 파괴할 것이다.

성 경: [눅11:2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 강한 자가...이길 때 - 일반적으로 '더 강한 자'는 예수를 지시한다. 여기서 '이길 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예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긴 것을 뜻한다. (2)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켰던 귀신 축출 사건들을 가리킨다(14절;4:1-13;8:26-39;9:37-45). (3)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승리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가 옳다고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 믿던 무장을 빼앗고...재물을 나누느니라 - '믿던'(*, 에페포이데이)은 '설득시키다', '믿게하다'는 의미의 '페이도'(*) 제2과거완료 능동태로 '매우 유용하다고 신뢰하던'의 뜻이다. 무장(*, 파노플리안)은 방패, 검, 창, 투구, 무릅받이, 흉배 등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를 나타낸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예수는 사단을 궤멸시켜 그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이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와 새생명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요 5:24). 바야흐로 인간을 약탈하던(9:39) 사단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의해 도리어 약탈을 당하고 파멸의 종국을 맞게 되며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가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성 경: [눅11:2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함께 아니하는...모으지 아니하는 - 이 말씀은 매우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즉 예수와 사단과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에서 중립적인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의 편에 서든지 사단의 편에 서든지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시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15,16절) 반대하는 자요 사단의 편이요 성령의 훼방하는 자들인 것이다(마 12:31). 마찬가지로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놓는 자이다. 이것은 양떼를 모으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데(요 10:12), 위급한 상황에서 양떼를 모으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 자는 양떼를 죽이는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씀이 9:50의 말씀과 모순이 된다고 하나 그것은 문맥, 또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이해에 얽매이는 데서 오는 오류이다(마 12:30 주석 참조). 9:50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대해 중립적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셨고 또 하려고 하는 일을 그가 행했던 것이고, 여기서는 선과 악, 진리와 반(反)진리가 싸우는 상황에서 중립지대는 없으며 분명히 어느 한편에 서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 경: [눅11:2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러운 귀신이...돌아가리라 -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긴 했지만 그 속에 성령이 거하시지는 않는 경우이다. 다시말해서 귀신이 나간 이후 한동안 공백 상태가 지속될 뿐 성령을 영접해 들이지 않음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영적 파탄에 빠지게 된 경우인 것이다. 도덕적 파국의 심각성은 26절의 '거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고'가 '정착하다', '영구히 거주하다'란 의미를 지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성 경: [눅11:2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소제(掃除)되고 수리되었거늘 - 본문의 평행 구절(마 12:44)에는 그 집이 '비고'라는 표현이 더 첨가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채워져 있지 않음으로 결국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틴데일(Tyndale)은 본문의 의미를 도덕적인 청소가 되어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정리되고 그런 결과로 생활이 좋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 경: [눅11:2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알세불 논쟁]

⭕ 더 악한 귀신 일곱을...거하니 - 집이 소제되고 수리됨으로 말미암아 예전에 거했던 한 악령이 들어가기에는 저항력(抵沆力)이 강했다고 본다면 이 악령이 다른 일곱 귀신을 데려온 것이 이해가 된다. 여기 일곱 귀신은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힌 일곱 귀신을 연상 시키는데(8:2), 그 숫자도 엄청나게 불었거니와 그 악함이 전에 있던 한 귀신보다 더 심하다는 묘사는 이 사람이 일곱 귀신이 들었을 때의 상태가 얼마나 극심하였겠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이유는 악령이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영으로 채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악령이 축출된 자리는 빈 공간으로 두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마샬(Marshall)은 이 이야기가 귀신만을 축출해 놓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 유대인 귀신 축출자들에(19절)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이야기가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평행 구절에서 이 귀신들린 자가 바로 '이 악한 세대' 즉 '유대인' 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했던 유대 백성들이(마 3:1-6)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 완악해져 예수를 거역(마 12:24)했던 상황과 연관될 것이다(Hendriksen, Lenski).

성 경: [눅11:2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복있는 자]

⭕ 당신을 밴 태와...복이 있도소이다 -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하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이다(Marshall).

성 경: [눅11:2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복있는 자]

⭕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 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헌신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는'(*, 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한다.

성 경: [눅11:2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 마태는 '음란한'을 첨가하고 있는데(마 12:39),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할 때(호 1: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상 숭배는 곧 음란으로 표현되었다. 유대인들의 표적(sign, NIV) 요구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Marshall), 또한 지금까지 예수께서 일으키신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14,20절;4:38-44;8:22-25;40-56)이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아예 인정치 않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1:3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요나가...인자도...그러하리라 - 요나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구원받은 것이 곧 예수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예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평행 본문인 12:40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9:22에 이은 또 하나의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씀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함을 촉구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알리신 것이기도 하다.

성 경: [눅11:3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남방 여왕이...정죄하리니 - 여기에 언급된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queen of Sheba, NIV)을 말하는데 스바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Yemen)을 가리킨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다. 이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땅 끝에서 온 것이다(마 12:42). 이 여왕의 열정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태도는 너무도 완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솔로몬 보다 더 위대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을 솔로몬 보다 '더 큰 이'라고 한다. 결국 유대인들은 거리상 비교도 안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인격의 위대함에 있어서도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와 접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던 셈이다.

성 경: [눅11:3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요나의 표적]

⭕ 니느웨 사람들이...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창 10:11)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다(욘 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다(욘 3:5-10).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원 관계에 관해서는 마 8:1-17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눅11:3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누구든지...보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의 의미는 두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등불이 예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2)등불을 복음의 메시지로 간주하는 견해.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는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비춰주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눅11:3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몸의 등불은 눈 - 여기서 몸은 전체적인 인격을 뜻하나 등불에 비유된 눈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통로에 해당한다.

⭕ 눈이 성하면...나쁘면 - '성하면'(*, 하플루스)의 본래적 의미는 '주름이 없는', '단순한', '진실한'으로 영적 안목이 단순하고도 진실되게 진리에만 고정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 단어에 '일편 단심'이라는 은유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 "온 몸이 밝을 것이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눈이 건강해서 빛을 받아들인다면 즉 영적인 눈이 일편 단심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전 존재는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나쁜'(*, 포네로스) 눈은 그 시선이 약한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와 복음을 거부하는 눈이다.

성 경: [눅11:3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 누가는 이 말씀을 하나의 권고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경고의 형식으로 기술하였다(마 6:2). "속에 있는 빛"에 관해서는 (1)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 빛 곧 양심(Gilmore) 혹은 (2)청중들이 스스로 빛이라고 여기는 것을 각각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중 어떤 견해를 취하든 본절은 본성적으로 진리를 거스리기 쉬운 인간의 무지함과 완악함에 대한 경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경성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눅11:3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몸의 등불]

⭕ 온몸이 밝아...온전히 밝으리라 -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특한 결론이나,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아 베자 사본, 고대 라틴역, 수리아역 등에서는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앞의 내용을 반복하는 듯한 본절은 반복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면이나 주제면에서 볼 때 엡 5:13,14와 유사하다. 본절의 의미는 34,35절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해지는 바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가 그 빛을 주위에까지 비추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엡 5:8).

성 경: [눅11:3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한 바리새인이...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 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것이 주식사이다(*, 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요 21:12,15), 시간상 점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앉으셨더니'(*, 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성 경: [눅11:3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손 씻지 아니하심을...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성 경: [눅11:3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겉은 깨끗이...속인즉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 호 퀴리오스)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마 23:25)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 하르파게스)은 '채어가다'는 뜻의 '하르파조'(*)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 포네리아스)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에서 온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성 경: [눅11:4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마 10:26).

성 경: [눅11:4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바리새인의 외식]

⭕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1)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NEB)가 된다. (2)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3)"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이 깨끗해 질것이다"(J.Knox). (4)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가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2)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 경: [눅11:4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 여기서부터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해서 여섯가지의 화(禍)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게 선포되는데, 이 문구에는 '저주' 또는 '복수'의 의미라기보다는 '탄식'의 뜻이 들어 있다(10:13).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장(死藏)시킨 채 그 형식에만 집착함으로써 성스러운 하나님의 율법을 박재화시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신랄하게 바판하고 있다. 본래 구약의 율법은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가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다(레 27:30-33;신 14:22-29). 물론 여기에는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랍비적 규범은 십일조를 아주 사소한 것까지 세분화하였는데, 심지어는 땔 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한다(Mishna). 이런 것 자체가 벌써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리새인들이 바친 십일조의 세 항목이 열거되고 있는데, '박하'(*, 헤두오스몬)는 정원에서 재배하는 식물로 그 향기가 좋으며, '운향'(*, 폐가논)은 회록색의 잎과 노란 꽃을 가진 식물이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23) '회향'(*, 아네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논드 향료(anethum graveolens)를 가리킨다. 마지막 항목인 '채소'(*, 라카논)는 어떤 특정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서의 채소를 뜻한다. 마태는 누가와 달리 특정한 종류인 '근채'(*, 퀴미논)로 기록하고 있다.

⭕ 공의와...사랑은 버리는도다 - 형식적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는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며 철저했던 바리새인들은 정작 가장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탈색시켜 버렸다. 여기서 '공의'(*, 크리시스)는 '정의', '의로움'의 뜻으로 사회 정의와 관련된 말이며(Easton),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사랑'(*, 아가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에 근거하여 마음과 목숨과 힘, 그리고 뜻을 다해 하가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가리킨다(10:2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공의와 사랑을 버렸던 것이다. '버리다'(*, 파레르케스데)는 '비켜나다', '간과하다'의 의미로 이들의 행위가 중요한 핵심을 비켜가면서 형식만을 추구하는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 예수게서 그들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는 만큼 그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간과되거나 무시된 채 전자만이 지켜질 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는 정결법의 규절을 파기하신 예수께서(38절) 율법의 준수를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맹목적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는 데서 오는 그릇된 문제 제기이다. 왜냐하면 (1)예수께서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거나 반대하시지 않고(16:17), (2)결코 예수는 정신이 결여된 율법 준수를 인정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3)을 법이 규정하지도 않은 유전적(遺傳的) 규범을 거부하는 것과 정당한 목적을 가진 십일조를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 경: [눅11:4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명예욕이 지적된다. 첫째로 지적되는 것은 교권적 교만으로, 그들은 공식적 예배 종교 교육 담당 기관인 회당에서 늘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23:6) 이들이 잔치에서도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높은 자리'(*, 프로토카데드리아)는 '가장 높은 자리'(the most important seats, NIV)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바리새인들이 회당의 상석에 앉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맡은 바 종교적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 보다는 특권적 우월 의식(優越意式)이나 교만한 과시욕에 몰두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던 점이다. 둘째로 지적되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으로 그들은 시장에서 인사 받는 것을 자신들의 특별한 존재성을 확인받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 존경의 표시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당연히 존경의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신들의 내면과 행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른 것인지를 점검해 봤어야 했던 것이다.

성 경: [눅11:4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평토장(平土葬)한 무덤 - 바리새인들에 대한 세번째 화(禍)는 그들의 본질적 모습에 관한 것이다. 즉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억울한 부정을 범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무덤에 닿으면 칠일간 부정하게 되는데 평토장한 무덤 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도 닿으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본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부패하고 썩은 무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 중에 부정한 죄를 범하게 하는 자들로 비판되고 있다. 이에 비해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23:27)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서술되고 있다. 즉 거기서는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즉 속에는 죽음과 부패함이 있으나 겉은 아름답게 치장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그들의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고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외부적인 치장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1:45]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한 율법사가...모욕하심이니이다 - 여기서부터는 비판의 대상이 바리새인에서 율법사로 바뀌어진다. 마태복음의 경우 이 두 그룹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함께 싸잡아 바난하고 있다(마 23:13,27,29). 여기서 율법사는 일명 서기관(scribe)으로 불리기도 하는데(막 12:28), 유대교의 전문적인 율법 해석자나 율법 교사들을 가리킨다. 본문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에 율법사도 함께 있었음을 말해주는데(37절) 이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을 듣고 있던 중 마치 도둑이 제 발저린다는 격으로 찔림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율법사의 대부분은 바리새인이었으므로 그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율법사는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는 불만을 드러냄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대한 비판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한편 그가 교만으로 가득차 예수의 비판을 '모욕'(insult, NIV)으로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비판을 근거 없고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았음을 뜻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사들의 죄악성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성 경: [눅11:46]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지기 어려운 짐을...대지 않는도다 - 여기서 말하는 '지기 어려운 짐'이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율법사들의 해석을 말하는데,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해석을 율법 자체보다 우월한 것으로까지 여겼다. 그런데 이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세분화 되어 있고 복잡하여(모세의 율법을 제외하고도 613조에 달하는 규범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 일일이 암기하여 지키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다. 저들은 이런 부담(burden)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자기들은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마 23:3).

성 경: [눅11:47]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 이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마 23:29,30)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며(9:9;마 14:3-12), 앞으로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를 합한 것 보다도 더 위대한 한 선지자를 죽일 것이다(23:18,21,23).

성 경: [눅11:48]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너희는 쌓으니 - 47절과 마 23:29에서처럼 무덤을 장식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역설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 의미는 (1)"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 즉 조상들의 악행을 완성한다"(Manson, Schweizer). (2)"너희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전하는 말씀을 거부한 너희 조상들 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 너희들은 죽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O.Michel, Schulz). 결국 여기서도 계속 지적되는 것은 외적인 경건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역이다.

성 경: [눅11:49]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하나님의 지혜 - 이 문구에 대한 용례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문구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도 각양 각색이다. 학자들의 제 해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핍박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대 묵시문학서 중 하나의 이름이라고 본다(Bultmann). 그러나 이런 제목의 책은 발견된 적은 없다. (2)하나님의 '지혜'(God in his wisdon. NIV)는 예수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Tatian, Geldenhuys).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wisdon from God, NIV)라고 말한 적은 있으나(고전 1:30), 예수께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경우는 없다. (3)구약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Godet). (4)예수께서 과거에 하셨던 말씀들로 본다(Meyer). (5)예수의 지혜 속에 있는 하나님 즉 그의 예지와 신적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Lenski). (6)'하나님이 그의 지혜로'의 의미로 본다(Creed, Manson, Danker). (7)구약과 유대교에서 지혜를 인격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적 지혜"로 이해한다(U.Wilckens, Schulz). 지혜가 인격화되는 예를 보면 잠 1:20-33에서는 인간에게 말을 하며, 7:35에서는 그 자녀들에 관해 언급한다. 이러한 제 견해들 가운데 (6)과 (7)의 견해가 비교적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성 경: [눅11:50]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모든 선지자의 피 - 앞서간 세대들이 저지른 과오는 후대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고 은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어진 기회와 은총을 저버릴 때에는 전(前) 세대들로부터 누적된 심판을 받게된다. 바로 예수 세대의 유대인들이 이런 상황을 자초하고 있었다(47-48). 전 세대들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을 더하는 세대들에게 가해질 형벌의 중함과 엄격함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여러 차례 기록이 되어 있다(잠 29:1;렘 7:16;겔 14:14). 한편 본문의 '모든 선지자'에 대해서 마태는 '의인'(*, 디카이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벨'을 언급함에 있어서 '선지자'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Marshall). 그러나 본문에서도 '선지자'라는 칭호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종들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므로 그 의미는 동일하다.

성 경: [눅11:51]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아벨의 피...사가랴의 피 - 이것은 유대인들의 성경 분류법상 처음 책인 창세기로부터 마지막 책인 역대기하에 이르기 까지의 의로운 첫번째 죽음과(창 4:8) 마지막 죽음(대하 24:20-22)을 표현한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로 칭함을 받았으나 그의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비판하다 죽임을 당한 의인이었다. 한편 마태는 사가랴가 바라갸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마 23:35),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사가랴(스가랴)로(대하 24:20) 기록하고 잇는 본문과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에 대해 마샬(Marsha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는 여호야다의 아들과 예언서 스가랴의 기록자인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를 혼동하고 있거나 아니면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도 동일하게 살해당했다는 전승이 있거나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여기서 언급되는 스가랴는 A.D.67년 헤롯당에 의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바라이스의 아들 스가랴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럴 경우 선지자의 죽음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의 전(全) 유대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셈이며 예루살렘의 멸망도 피의 대가로 지불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담당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매우 강한 결의의 표현으로 그 속에는 예수의 신적인 권위가 내포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A.D. 70년경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멸됨으로써 과연 그 세대는 피의 대가를 담당하였다.

성 경: [눅11:52]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지식의 열쇠 - 선지자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 행위 자체로도 악한 것이지만 더 악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시켜 버리는 행위임을 밝혀지고 있다. 사실상 율법사(律法士)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어서 마치 천국 문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에서 형식만을 남겨둔 채 정신을 사장시켜 버리는 행위나 인간적인 전통에 맹종하여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집을 부과하는 그들의 행위는 말 그대로 진리의 문, 천국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들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이런 행위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부지 중에 부정을 범하게 만드는 행위(44절) 이상의 것으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성 경: [눅11:53]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거기서 - '거기'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의 집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위선과 몽매함을 준엄하게 비판하신 후에 그 집에서 나오고 있다. 식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식사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 맹렬히 달라붙어...힐문하고 - '맹렬히'(*, 데이노스)는 '두렵게', '무섭게'의 의미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얼마나 결한 감정의 상태로까지 흥분되어 있는가를 말해준다. '달라붙어'(*, 에네케인)는 '몹시 분노하다' '누구에게 분노를 품다'의 의미이다. 이 역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예수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기들의 잘못을 비판(批判)하는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처럼 예수를 해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1:54]

주제1: [배척당하신 인자의 질책과 교훈]

주제2: [여섯 가지 화]

⭕ 잡고자 하여...지키더라 - 이 표현들은 사냥에서 사용되는 것들로 적대자들의 증오의 정도가 얼마나 심하며 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잡고자 하여'(*, 데류사이)는 '쫓다', '사냥에서 잡다'의 의미를 가지며, '지키더라'(*, 에네드류온테스)는 '...안에'를 뜻하는 '엔'(*)과 '자리'를 뜻하는 '헤드라'(*)의 합성어로 사냥감을 포획(捕獲)하기 위해서 매복해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저들은 지금까지 행한(39-52절) 예수의 비판에 대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의 비판이 정당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공격할 허점을 찾기 위해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명분도 없는 일을 위해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품위를 완전히 상실한 모습이며 짐승이나 잡아먹고 사는 추한 모습인 것이다.

성 경: [눅12: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외식에 대한 교훈]

⭕ 그 동안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구'엔 호이스'(*)는 문장이나 문단을 시작하는 고전적인 관용구로, 여기서는 앞의 상황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며 그 의미는 11:53,54가 진행되는 동안에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최소한 11:37부터 진행 되어온 상황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거나 넓게는 11:29절 이하 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수만 명 - 헬라어 '뮈리아스'(*)의 문자적 의미는 '만'(萬)인데 때로는 막연하게 무수히 많은 수를 나타낼 때나 과장법적으로 수의 많음을 표현 할때 사용되기도 한다(행 21:20;계 5:11; 9:16). 이는 11:29 이후로도 많은 수의 무리가 더 모여들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수만 명'이라는 문구 앞에 정관사 '톤'(*)이 붙음으로써 '늘 그러했듯이 수많은 군중'이라는 의미가 된다면 이렇게 많은 수의 무리가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늘 있어왔던 현상에 불과함을 가리킨다. 이는 무리들이 모여든 이유와는 상관없이 적어도 예수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었던가를 말해준다.

⭕ 먼저 제자들에게 - 예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히 둘러싸 그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청중들을 구분하고 있다. 사실상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보건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상당 수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라는 말로 청중들을 1-12까지의 말씀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무리'들의 영적 상태를 넌지시 암시한다고 본다. 1-12절 내용의 요지는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요청이다. 그런데 이 요청이 제자들에게만 주어지고 무리들 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리들이 신앙의 절개(節槪)를 지키라는 요청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주변에 열광적으로 모이들었지만 그 의도는 영적인 진리를 갈구해서가 아니라 욕체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였으며(요 6:24-26).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자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 유대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도 있는데(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뿐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뿐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다.'외식'(*, 휘포크리시느)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11:52).

성 경: [눅12:2]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외식에 대한 교훈]

⭕ 감추인 것이...숨은 것이 - 이와 동일한 말씀이 이미 8 :17에 나온 바 있고 마 10:26에도 평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전후 문맥상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먼저 8:17 에서는 강조점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성이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고 만다는 데에 있으며, 마태의 평행 본문(마 10:26,27)에서의 강조점은, 예수께서 은밀히 가르쳐 준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라는 격려에 있는데 비해 본문의 의미는 바리새인들의 외식 행위가 감추고자 하는 그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깃은 '감추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케칼튐메논'(*)의 의미가 '모든 면을 완전히 덮어버리다', '감추다'임을 감안할 때 더 분명해진다.

성 경: [눅12:3]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외식에 대한 교훈]

⭕ 너희가...들리고 - '너희가'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이 제자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일반 사람을 가리키는지 분명치가 않으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제자들 뿐만 아니라 무리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럴 경우 본문의 의미는 은밀히 이야기한 것이 비밀로 남아있지 못하고 밝히 드러나리라는 말씀이 된다(비교, 마 10:27).

⭕ 골방에서...전파되리라 - 같은 내용의 말이 반복됨으로써 강조 효과를 나타낸다. 여기서 '골방'(*, 타메이오이스)은 '방의 안쪽'(Marshall),'광'(창고)(Tyndale,눅12:24). '보물을 보관하거나 때로는 극비 회의를 여는 은밀한 곳'(Hendriksen)의 의미이며 '집 위'는 공개성을 상징하는 격인적 표현이다.본문 역시 앞부분과 같은 의미로 끝까지 숨겨지는 비밀은 없으며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마 10:27) 앞 부분과 달리 제자들이 예수께 은밀히 들은 것을 집위에서 담대히 공개적으로 전파하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 경: [눅12: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외식에 대한 교훈]

⭕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성 경: [눅12: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외식에 대한 교훈]

⭕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성 경: [눅12: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 4, 5절에서는 인간들로부터 오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겨 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하였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제자들을 철저한 관심 속에 보살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있다. '아싸리온'(*)은 드라크마의 1/10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창세기 p.41 도표참조).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새가 보잘 것 없이 작으며 그 가치도 결코 대단치 않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 참새 다섯 마리의 중요성과 가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시해도 무방할 만큼 미미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단 한 마리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사람들 특히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보증해 주는 셈이다. 한편 본문은 날이 갈수록 인명(人命) 경시 풍조가 그 세(勢)를 더해가는 작금의 세태에 대한 하나의 경종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성 경: [눅12: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 하나님께서는 머리털로 비유되는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실만큼 인간의 총체적 삶을 완벽하게 돌보신다는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히브리 용법으로 구약성서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엿보인다.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삼상 14:45;왕상 1:52;행 27:34). 이렇게 완벽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제자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 앞절에서 언급된 '하나라도'와 대조를 이루면서, 단 한 마리의 참새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 하나님이 하물며 많은 참새를 합한 것보다 귀중한 제자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논리정연하게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눅12: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사람 앞에서...시인할 것이요- 본문에서 반복되고 있는'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성 경: [눅12:9]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눅12:10]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인자를 거역하면...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 마태와 마가는 바알세불 논쟁과 관련하여 본문의 말씀을 다루어가고 있는데 비해(마12:31,32;막 3:28,29, 누가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의 자리에 담대히 서라고 격려하는 문맥에서 이 말씀을 기록한다. 그러나 위 말씀들에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성령 훼방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마 12:22-37의 주제 강해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보라.

성 경: [눅12:1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 이 말씀은 제자들이 당할 고난 중 죄인으로 법정에 서게 될 것에 관한 내용이다. '회당'이 유대인의 법정을 뜻한다면 그 외의 것은 이방인의 법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고 '회당'이 종교로부터의 핍박을 뜻한다면 그 외의 것은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핍박을 뜻할 수 있다. 제자들은 동족과 이방인, 종교와 정치 세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종류의 핍박에 직면하거게 될것이나 성령께서 함께 하는 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격려의 말씀이 아닐수 없다. 삼엄한 산헤드린(Sanhedrin) 공회나 로마에서 파송된 총독의 법정 앞에서 스데반 혹은 바울 등이 담대히 진리의 증거자로 설 수 있었던 것도 성령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다(행 7:2 ff.;24:10-21). '대답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게세스데'(*)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법적으로 자신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는 발언을 하다'는 뜻이며 본절이 법정에 서게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뒷받침 하는 말이다. 제자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야 할 것이다. (1) 자신들의 육체적 안전을 위해 무죄함을 변호해야 하고, (2) 자신들이 선포하고 행하는 사역의 정당성을 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여 법정의 심판관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성 경: [눅12:12]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제자들에 대한 권면]

⭕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성 경: [눅12:13]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 '무리 중에 한사람'은 앞 부분(1절 ff.)과의 연결을 자연스럽게하며 관심의 대상을 제자들로부터 무리들에게로 바꾸어 넣는 도입구의 역할을 한다. 상속에 대한 규례는 율법에 명시되어 있으며(민 27:1-11;신 21:15ff.), 법규에 따라 분배가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랍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지금 예수를 찾는 이 사람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찾은 것이다. 이 사람이 정당한 몫의 유산을 받지 못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그가 예수를 율법 선생으로 곡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성 경: [눅12:1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누가 나를...세웠느냐 - 예수께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권위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몇가지의 설명이 있다. (1) 에수는 그런 문제에 관한한 당국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2) 예수는 유산을 나누는 정도의 일을 훨씬 능가하는 영혼 구원의 소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Hendriksen).(2)예수는 소유 자체 보다는 소유에 대한 태도에 관심을 유도하고자 하셨기 때문(Tyndale). 이 가운데 (2),(3)의 설명이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예수의 사명은 물질을 관리하는 일을 넘어서는 깊은 차원의 것으로 특별히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일이며 단순히 물질을 공정하게 분배하논 차원을 넘어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자기의 몫을 요구하는 이 사람은 그 심성 속에있는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그의 몫을 받는다 해도 아무런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성 경: [눅12:1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탐심'(*, 플레오녀시아)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합 2:9;골 3:5;딤전6:9-11).

⭕ 생명이...있지 아니하리라 - 소유의 넉넉함으로 인간의 진정한 삶이 영위되거나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가리킴에 주의하자. 오히려 넉넉함을 추구하는 탐심은 생의 목표를 진리가 아닌 것에 두게 하여 결국에는 멸망으로 이끌게 할 뿐이다.

성 경: [눅12:1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한 부자가 소출이...풍성하매 - 예수께서는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예증하기 위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그가 부자였다는 간단한 사실만 언급될 뿐 부 자체의 정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시켰다고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아마 그는 무절제나 방황에 빠지지 않고 오직 재물 모으는 일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가 재산의 노예로 보일 정도로 물질에 짐착하였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성 경: [눅12:1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심중에...어찌할꼬 - 밭의 풍성한 소출은 부자에게 고민을 안겨준다.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다. 이 고민은 그가 상당한 부자임을 말해준다. 아울러 이는 욕망의 무한성 곧 재물로써 채워질 길 없는 깊은 영혼의 갈증을 보여준다. 원문상 '곡식'이 '내 곡식'으로 되어있어 자기 소유에 대한 강한 짐착을 잘 나타낸다.

성 경: [눅12:1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내 곡간을 ..더 크게 짓고 - 그가 궁리한 끝에 내린 결론은 곡간을 더 크게 확장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곡간'(*, 아포데커)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창고'의 의미로 사용되며(24절;3:17;마3:12;6:26;13:30), 여러가지 물품을 취급하는 '대형 상점 을 또는 매우 큰 '상점'을 뜻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부자는 대농(大農)일 뿐만 아니라 상인의 역할도 했으리라 짐작된다.

성 경: [눅12:19]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성 경: [눅12:20]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눅12:2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마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성 경: [눅12:22]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목숨을...몸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 - 다시 예수의 말씀을 듣는 대상이 무리들에서 제자들로 바뀌고 있다. 제자들은 물질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또한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무소유에 대해서 염려해서도 안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것들을 축적하기 위하여 노력하며(18절), 이것들이 확보되지 않을 때는 염려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즉 목숨과 몸을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려 함으로써 싸움과 갈등을 일으키며 그러므로 안전이 아니라 염려만 더욱 증폭되는 상황을 정지 시킬 수 있는 삼의 방식이라고 할수 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고서 이기적 탐욕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성 경: [눅12:23]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목숨이...중하니라 -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목숨이나 음식, 몸이나 의복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게신다.목숨이 중요함을 아시므로 음식을 주실 것이고 몸이 중요함을 아시므로 의복을 주실 것이다. 적어도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 말씀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하여 본질적인 것이 아닌 음식을 위하여 본질적인 목숨을 가볍게 여기거나 중요하지 않은 의복을 위하여 중요한 몸을 하찮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전도(顚到)된 가치관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12:2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까마귀를...아니하며 - 7절에서는 참새에 비교하여 제자들의 귀중함을 강조했는데 여기서는 까마귀와 비교하고 있다. 마태가 단순히 '공중의 새'(마6:26)라는 표현을 사용한데 비해 누가는 까마귀를 언급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이다(레11:15;신 14: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까마귀를 돌보신다. 하물며 새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증요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깃이다. 한편 까마귀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는 것은 사람은 심고 거둔다는 것 즉 노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노동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성 경: [눅12:2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염려함으로...더할 수 있느냐 - 본문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는 '나이'를 뜻하기도 하고(요9:21), '신장'(身長)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19:3). 또한 '한 자'의 '자'(*, 페퀴스)는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기의 길이를 한 단의로 하는 '규빗'(창6:15)을 뜻하는데 이 단위 역시 '길이'를 가리키기도 하고 '시간'을 가리키기도(시 39:5)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두 가기 의미로 해석 될수 있다. (1)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키를 한 자 크게 할 수 있는가"(Bengel,Godet,Farrar). (2)'시간'의 개념으로 보아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는가"(Bruce, Plummer, Vincent).

성 경: [눅12:2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지극히...염려하느냐 - 본문은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없는 것으로 누가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이 말씀은 25절에 대한 결론으로,염려함으로써 해결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염려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키를 늘리는 것이든, 생명을 연장(延長)시키는 것이든 하나님께는 지극히 작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철저히 무능력함을 인정해야 하며 자기의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을 가짐으로써 삶의 안전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 경: [눅12:2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백합화를...못하였느니라 - 먹을 것에 대해서는 '새'에 비유하시고(24절), 입을 것에 대해서는 꽃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백합화로 번역된 헬라어 '크리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들이 있는데, '크로크스','터어키산 백합', '글라디올러스'등이 그것이다. 또는 솔로몬의 자색 의복이 상응하는 자색의 아네모네 꽃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Dalman).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옷도 들의 백합화 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 말씀은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세심하신 배려를 또 한번 대조해 보인다. 특히 이 백합화는 28절에서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것으로 묘사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더욱 뚜렷이 드러낸다.

성 경: [눅12:2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오늘 있다가...들풀도 - 수명의 짧음과 무가치함을 실감나게 표현하신 말씀이다. 인간에 비하면 형편없는 가치를 가진 들풀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입히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들의 풀들이 자라며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서 우주만물과 특히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예수께서 꾸짖으셨던 당시의 세대들처럼(9:41)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가나안의 여인처럼(마15:28) 믿음이 큰 것도 아닌 상태이며 당시의 제자들이 아마 이런 상태 즉 믿음과 염려가 교차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성 경: [눅12:29]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너희는...근심하지도 말라 - 22절 에서 주어졌던 '염려'에 대한 금령이 여기에서 재차 반복되면서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여기서는 '너희는'(*, 휘메이스)이 강조적 위치인 문장의 맨 앞에 나와있다. 또한 '근심하지도 말라'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인데 '허공에','높은 곳의'라는 뜻을 가진'메테오로스'(*) 에서 온 고대 동사로 '희망에 들뜨다', '공중에 높이 들다'는 뜻이다. 이는 허망한 욕망에 이끌려 상념이 가득찬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삶을 위한 정당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의 내적 열망 즉 궁극적 관심이 먹고마시는 것에 고착되어서는 안된다는 깃이다.

성 경: [눅12:30]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 경: [눅12:3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그의 나라를 구하라 - 지금까지의 금지령(禁止令) 대신에 여기서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행위를 명하신다. 본문의 의미는 (1) 물질적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구하라. (2) 물질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축복을 구하라 (3)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실천하라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 그리하면...더하시리라 - 이것은 물질적인 조건들이 하나님의 나라보다 하위 개념이며 물질이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물질적인 것들은 부속물로 주어진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성 경: [눅12:3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의식주에 관한 교훈]

⭕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성 경: [눅12:3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 제자들에게 두 개의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첫째는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옷은 길고 통이 넓어 여행을 할 때나 활동을 할 때는 허리에 띠를 띠었다(출 12:11;왕상 18:46;왕하 1:8). 따라서 이 명령은 일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으라는 말씀이다. 두번째는 등불을 켜라는 것이다. 이는 어두운 동안에도 활동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말해주며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의 연관에서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적절한 표현이다. 결국 본절은 언제 어느 때 예수께서 개림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이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친다(벧전 1:13).

성 경: [눅12:3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성 경: [눅12:3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주인이 띠를 띠고...수종하리라 - 여기서도 '깨어있음'(*, 그레고레오)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행20:31;고전 16:13;골 4:2;벧전 5:8;계 3:2, 3). 주인이 혼인집에 다녀왔을 때 종이 깨어있다가 문을 열어준다고 해서 그 종을 극진히 대접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깨어있는 성도들은 그러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보여지듯이(17:7-10), 정당한 대가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한 대접이다. 죄로 인해 영벌(永罰)에 처해질 수 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의 구속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재림시에 함께 왕노릇 하게 되는 것은(계 20:4) 종이 주인으로부터 수종받는 것보다 더 큰 은혜라 하겠다.

성 경: [눅12:3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이경에나 혹 삼경에 - 당시 로마식으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으며(1경:오후6-9시, 2경: 9-12시, 3경: 12-1시, 4경: 3-6시), 유대식으로는 3경으로 나누었다(1경: 6-10시, 2경: 10-2시, 3경: 2-4시, 삿 7:19);애 2:19). 본문이 로마법에 의한 서술인지 유대법에 의한 서술인지 분명치 않으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돌아올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과 그 시간이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상당한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하는 늦은 밤이라는 사실이다. 늦은 밤에 이르면 수면을 취하는 것이 저연스러운 현상이듯이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깊은 영적 수면에 빠져들어가게 되며 자칫하면 성도들마저 이러한 세상조류에 휩쓸려 들게 될 것이다(마 24:9-12).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는 말씀은 바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부딪혀 오는 것이다.

성 경: [눅12:39]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집주인이...알았더면 - 앞의 비유에서 신실한 행위에 더한 축복에 강조를 두었는데 여기서는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도둑침입의 돌연성(突然性)이 강조되고 있다. 도둑의 침입을 표현함에 있어서 '뚫고 들어오다'(*,디오뤼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의 도둑들이 흙 벽돌로 지은 집에 벽을 뚫고 들어 왔었던 사실에 근거한다(막 2:1-12주제 강해 '예수 당시의 서민 가옥 구조' 참조). 예고 없이 쳐들어오는 도둑으로부터 집과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서 경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도 이와 동일한 긴장과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성 경: [눅12:40]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 생각지...오리라 - 35절부터 전개되어온 비유의 말씀은 결국 이 결론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다. 주의 재림을 예기치 않게 임박해 오는 사건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도둑의 침입에 비유한 사례들은 이 밖에도 성서의 여러 곳에서 발견 된다(살전 5:2;벧후 3:10). 주의 재림일시를 정확히 아는 이는 오직 한분 하나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시 130:6).

성 경: [눅12:4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베드로가 여짜오되 - 마태의 평행 본문에서는(마 24:44,45) 44절과 45절의 내용이 단절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는데 비해 누가는 베드로의 질문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22절 이후 45절 까지의 말씀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베드로의 질문을 첨가한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말씀들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하기 위함이다.

성 경: [눅12:42]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청지기가...누구냐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 대신 또 다른 비유의 말씀으로 답하셨다. 비유의 내용은 일차적인 대상이 제자들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47, 48절)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아야 하며 '누구냐'라는 질문은 청중들을 비유의 주체와 동일시하는 의미가 있다(Bultmann,Grundmann). 여기서 '청지기'(*, 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가진 자로 자유인도 있고 종도있으나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이다. '청지기'에서 요구되는 것은 '충성'(고전 4:2)과 '지혜'(16:8)이다. 청지기와 구분되는 '종들'은 헬라어 '데라페이아'(*) 의 번역인데 이 말은 '돌봄' 또는 '섬김'을 뜻해 '주인을 돌보는 식솔' 또는 '주인을 섬기는 자'란 뜻이다. 청지기에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는 진실과 지혜로 생활을 절제있게 꾸려나가는 것과 종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자기에게게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상으로 모범적인 청지기는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과(창 15:2) 보디발의 청지기 요셉을 (창 39:4, 6) 들 수 있다.

성 경: [눅12:43]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주인이...복이 있으리로다 - 37, 38절 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축복이 선언되고 있다. 하나님의 칭지기 직분을 맡은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인데, 그 직분을 충실히 감당한 자에게 상급이 있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진 것은 실로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허공을 치는 것같지 아니하며 분명한 목표와 약속을 향한 것이다(고전 9:26).

성 경: [눅12:4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모든 소유를...맡기리라 - 이 세상에서 청기기직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성도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축복과 권세를 부여하신다는 의미이다. 주께 충성을 다한 사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가 주어질 깃이며(마 19:28),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일반 성도들도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딤후 2:12).

성 경: [눅12:4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더디 오리라 - 이 말은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에서 파생된 말로 '시간이 오래 걸리다', '지체하다'의 뜻으로, 주의 재림 즉 종말론적 절정에 이르기까지의 공백 기간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마 25:5).

⭕ 노비를 때리며...취하게 되면 - 이것은 그 종이 청지기의 직분을 오해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매우 불성실함을 말해준다. 폭력, 무절제, 방탕스러움 등은 그가 청지기로서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적나라(赤裸裸)한 모습이다.

성 경: [눅12:4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엄히 때리고 - (*,디코토메세이)1는 '두 부분으로'를 뜻하는 '디카(*)와 '자르다'는 뜻인 '템노'(*)의 합성어로서 '토막으로 자르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말은 구약에서 재물을 토막내는데 사용하기도 하며(출29:17), 아주 참혹한 처형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Apocalypse of Baruch). 그러나 여기서는 뒤에 이어지는 구절로 보아(47, 48절) 죽이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매우 준엄한 형벌을 내린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을 때 내려지는 이 형벌은 잘 했을 때 받는 축복과(44절)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 경: [눅12:4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알고도...많이 맞을 것이요 - '맞을 것이오'(*, 다레세타이)는 ''가죽을 벗기다', '때리다'. '뜯어내다'의 뜻인 '데로'(*)의 변화형으로서 주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는 자가 당할 형벌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이다. '알고 지은 죄'의 중함에 관해서는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히 10:26, 27;약 4:17; 벧후 2:21). 본문의 의미는 대략 두가지로 이해된다. (1) 지엄하신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만인에게 공정하게 적용된다. (2) 특권에는 항상 책무가 뒤 따른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는 위대한 특권의 소유자를 뜻한다. 그러나 이름 뿐인 신자는 그만큼 더 큰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2:4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

⭕ 알지 못하고...적게 맞으리라 - 이 말씀은 의식적(意識的)인 죄와 무의식적인 죄를 구분하는 구약의 기록들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고(민 15:30;신17:12;시 19:13),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의 불가피성에 대한 바울의 말과의(롬 2:12, 13) 연관성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이든 주의 뜻을 행치 않은 자에 대해서는 분명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 많이 받은 자...달라 할 것이니라 - 이 말씀을 결론으로 비유는 끝이 나고 있는데 본문은 이 비유의 강조점이 주의 뜻을 아는 자의 책임을 부각시키는 데 있음을 시사한다. 주의 뜻을 아는 자는 많은 것을 맡은 자로서 많은 것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마태의 결론처럼(마 24:51) 슬피 울며 이를 가는 형편에 처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2:49]

주제1: [제자들를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복음으로 인한 분열]

⭕ 불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심판 (Schlatter,Grasser). (4)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3)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성 경: [눅12:50]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복음으로 인한 분열]

⭕ 받을 세례가 있으니 -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며(막10:38), 바울도 이 사실을 재차 확언하고 있다(롬6:4).

⭕ 이루기까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오(*)는 '완성하다'의 의미이며 이는 예수가 인식하고 있고 맞아들이려고 하는 그의 죽음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할 사명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Kline).

⭕ 답답함이 -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완성되어야 할 사명으로 인식하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 일은 결코 일시적 결단이나 가벼운 노력에 의해 성취될 성질이 아니라 실로 고통스러운 도전이었다. 골고다 언덕이 점점 가까와 옴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성 경: [눅12:51]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복음으로 인한 분열]

⭕ 화평을...도리어 분쟁케 - 예수의 오심이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위한 것이지만(2:14;사 9: 6), 그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이다(49절).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화평이 아니라 검(劒)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마 10:34).

성 경: [눅12:52]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복음으로 인한 분열]

⭕ 한 집에...분쟁하되 - 이는 앞에서 언급한 '분쟁'의 성격을 밝혀주는 것으로 그 비극의 심각성과 비참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최악의 상태인 까닭은 분쟁이 가족 안에서까지 일어나며 그 결과는 천륜이라 할 수 있는 혈연 관계마저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10:21과 막 13:12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당하게 될 고난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라는 형식 때문에가 아니라 신자의 진리성과 비신자의 비진리성의 충돌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성 경: [눅12:53]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복음으로 인한 분열]

⭕ 아비가 아들과...분쟁하리라 - 앞 절에서 언급한 ' 다섯 사람'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 집은 아버지, 어머니, 결혼한 아들내외, 그리고 아직 출가(出嫁)하지 않은 딸로 이루어진 5인 가족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짝말들은 미 7:6 에서 온 것으로 가족의 비극적 분열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술된 표현이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은 예수와가족들 사이에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하며 그것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될 것이다(마10:36;눅 18:29).

성 경: [눅12:54]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또...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 청중이 제자들에서 무리들에게로 바뀌고 있다. 이 말씀은 팔레스틴의 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기후의 상태를 알면 이해하기 쉽다. 즉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다시 말해서 지중해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였다.

성 경: [눅12:55]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남풍이...심히 더우리라 - 이 역시 팔레스틴의 지리적 조건에 의한 일반적인 현상으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곧 아라비아 광야 방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하며 따라서 이 열풍은 더운 날씨를 예고해 주는 것이다.

성 경: [눅12:56]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천지의 기상은...분변치 못하느냐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성 경: [눅12:57]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 유대인들이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려 하지 않음을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촉구하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스스로'가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일반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행동하지 않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은 거짓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존하려 한 것이 자의(自意)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그 책임에 대해 변명될 수 없음을 지적한 말씀이다. 특히 '판단치 못하느냐'가 아니라 '판단치 아니하느냐'라는 표현은 그들의 자의적인 불성실함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성 경: [눅12:58]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내가...화해...힘쓰라 - 본문의 핵심은 법정에 서기 전에 화해를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다. '화해하기를'(*, 아팔라쏘)은 '벗어나다' '떠나다'의 의미를 갖는 법률 용어로 고소자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상태에 놓인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이 말이 지시하는 최종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라 하겠다(Hendriksen,Liefeld).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전에 시대의 징후(徵候)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로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길에서 라는 표현은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암시하며, 기회가 있을 때 즉 늦기 전에 속히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것이다.

성 경: [눅12:59]

주제1: [제자들을 향한 인자의 권계]

주제2: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라]

⭕ 호리라도 - '호리'(*, 려톤)는 유대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리킨다.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 '두 호리'에 해당하는'코드란테스'(*)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하찮은 액수라 할지라도 갚지 않고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일단 주어진 기회를 상실하여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여 심판을 받게 되면 그 결과를 되돌리기가 불가함을 뜻한다.

성 경: [눅13: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행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성 경: [눅13: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20;22:4-5;요 9:1,2).

성 경: [눅13: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7:1-5;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성 경: [눅13: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너희도 만일...망하리라 - 3절 말씀을 반복하여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세한 주해는 3절 주석을 보라.

성 경: [눅13: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 촉구]

⭕ 포도원에...얻지 못한지라 - 앞부분에서는 다분히 회개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심판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동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포도나(시 80:8-11; 사 5:2) 무화과 나무(렘 24:3;호 9:10)로 비유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하나님을 비유하며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된 회개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며 포도원에는 여러가지 과실수들이 함께 심어졌다(왕하 18:31;미 4:4).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성 경: [눅13: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과원지기에게 ...버리느냐 - 여기서 과원지기는 예수라고 보아야 하며 이 과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에 주인은 그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한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果實樹)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 쓸모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서 '찍어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Marshall),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주는 것이다(마 3:10;7:19;21:18-20).

성 경: [눅13: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금년에도...두루 파고 거름을 -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창 18:22-32) 예수가 지니고 있는 신적인 인내와 자기 백성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다. '두루 파고'에서 '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캐토'(*)는 뿌리 주변에 있는 흙을 긁어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다. 뿌리 주변의 흙을 부드럽게 해주고 거름을 주는 이 특별한 배려(配慮)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기간이 3년이나 지나도록 전혀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편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음으로써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궁극적 관심은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보여준다(23:34).

성 경: [눅13: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회개의 촉구]

⭕ 만일 실과가...찍어 버리소서 -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 강조하기 위하여 문장을 완결짓지 않고 중간에 끝맺는 돈절법(頓絶法)적인 표현이다. 과원지기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의 상태에 달린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해 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조건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회개를 하느냐 안하느냐의 결정은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수 있도록 유보(留保)해둔 심판까지의 기한은 분명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1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 안식일이라는 시점을 명시하고 있는 것은 여기서 전개 되는사건이 안식일과 관계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안식일'(Sabbath, NIV)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마지막 날에 안식하신 것과(창2:1-3), 십계명(출 20:8)의 명령에 근거한 것으로 매우 엄격히 지켜지는 율법 조항이었다. 본문에서 언급된 '한 회당'(one of the synagogues,NIV)이 구체적으로 위치한 지역에 대해서는 '베뢰아'일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Hendriksen,Lenski).

성 경: [눅13:1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보라'는 의미의 명령형 어구가(*, 이두) 본절 첫 머리에 기록되어 있어 독자들의 관심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집중되는 관심의 대상은 십 팔 년 동안 병 중에 고통을 당해 온 한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허리가 '굽어져'(*, 쇼큐토) 혼자 일어서거나 머리를 들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병은 현대 의학적 용어로 말하면 척추교착염과 유사하다(Marshall). 누가는 이 여인의 병이 귀신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십 팔 년이라는 세월의 병고는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는 최악의 상태를 말해준다.

성 경: [눅13:1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여자여...병에서 놓였다 - 이 여인이 이미 회당 안에 들어와 있었는지 아니면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들어왔는지 분명치 않으나 후자일 가능성이 많다. 다른 경우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요청이 있기 전에 자의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있다. 예수께서 그녀의 병을 즉각 고쳐주신 것은, 그녀의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의 비참함에 대한 연민 때문일 수도 있는데, 본문상 그녀의 믿음이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병을 고쳐주는 것으로 보아 전적인 예수의 자유 의사에 의한 은총이라 할수 있다.

성 경: [눅13:1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안수(按手)하시매 - 아마 이 행동은 앞절의 "여자여 네가 네병에서 놓였다"는 선언과 동시적으로 취해졌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안수'에 대해서는 그 원인이 구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창 48:13,14,17-19)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일반적으로 안수가 갖는 의미는, 수여자가 가진 그 무엇을 피수여자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다. 한편 안수는 여러 가지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는데 그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제사법에 나타나는 것으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에 손을 얹음으로써 자신이 범한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는 상징적 행위로 행해졌다(레 1:4;4:4;8:14 민 8:10,12). (2) 신성 모독자를 돌로 칠 때 나타난다. 이것은 신성 모독의 말을 들은 증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부정과 더러워진 인격, 나아가 장차 당할 심판등 신성 모독자에게 돌리는 의미가 있다(레 24:14). (3) 병을 고치는 행위로 안수를 한다. 이것은 예수나 사도들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 병자에게 전이시킴으로써 병을 낫게하는 것이다(눅 4:40;행 28:8). (4) 성령을 받게 하는 데 행해진다. 사도들은 성령이 임하지 않은 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도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음을 증거해보였다(행 8:18-19;16:6). (5) 직분을 위임할 때 안수한다. 이것은 안수하는 자가 자신의 권위, 직분, 능력을 피안수자에게 전그시켜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사역을 담당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행 6:6;13:3).

⭕ 곧 펴고 - '펴고'(*, 아노르도데)는 '회복하다' '재건하다'의 뜻으로(행 15:16;히 12:12) 여인이 완전히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뜻한다.

⭕ 영광을 돌리는지라 - (*, 에돝)는 문법상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여인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일회적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병을 고쳐주신 분은 예수인데 찬양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다. 이는 예수의 병 고침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눅13:1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회당장이...분내어 - 드디어 안식일에 병 고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회당장(synagogue ruler,NIV)이 분을 낸 표면적인 이유는 예수께서 병을 고침으로써 안식일에 노동을 금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븐노이면에는 회당의 최고 수반(首班)으로서 회당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를 주도적으로 관장하는 그의 권위가 완전히 소외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열등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자그마치 십 팔 년 동안이나 고통스러운 병을 앓던 여인이 치유된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했다고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폐기자의 모습인 것이다. 한편 회당장이 말하는 대상이 '여인'이 아니라 '무리'로 되어있는 것은 여기서 병 고침을 받은 여인 말고도 병 고침 받기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많았다는 추축을 가능하게 한다.

성 경: [눅13:1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너희가 ...먹이지 아니하느냐 - 이 말씀의 베경에는 짐을 싣지 않는 한 안식일에도 짐승들을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다는 미쉬나의 규정이 있고 안식일의 여행 제한을 어기기 않는 범위 내에서 가축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특별조치가 있었다. 또한 쿰란 종파에서는 안식일에 가축에게 풀을 뜯어 먹임에 있어서 이 천 규빗 그러니까 약 910m이상을 끌고가지 못하게 하는 제한 규정이 지켜졌었다(Marshall). 이와 같이 당시 관례상 동물들에 대해서는 안식일에 관한 율법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게 지켜졌지만, 오히려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의 융통성(融通性)도 허락되지 않았다.

성 경: [눅13:1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아브라함의 딸...합당치 아니하냐 - 15절과 16절에서는, 짐승과 아브라함의 딸, 물먹이는 것과 병 고치는 것, 수 시간의 매임과 18년 동안의 매임, 마구에서 푸는 것과 사단에게서 푸는 것이 치밀하게 대비되면서 적대자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드는 예리한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짐승도 목이 마르면 물을 먹이는 법이거늘 하물며 18년 동안이나 고통 속에 살아온 여인을 치유하는 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지연될 수 없었다. 특히 "합당치 아니하냐"(*, 에데이)는 '반드시 해야한다'는 뜻을 가진 '데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여인의 병을 고친 것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일에 대한 선택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꼭 해야 할 당위성을 가진 일이었음을 말해준다.

성 경: [눅13:1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안식일에 여인을 고치심]

⭕ 부끄러워하고 ...기뻐하니라 - 이 부끄러움에 대한 표현은 사 45:16의 "...성을 내며 너에게 달려드는 자들은 모두 어이없이 창피를 당하리라"(공동번역)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누가는 메시야적 대망이 예수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하려 했었다고 볼 수 있다(Marshall), 한편 반대자들dmf 제외한 모든 무리들은 예수의 통쾌한 승리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아마 이들도 회당장 이하 맹목적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위선이 폭로되고 예수의 탁월한 가르침이 베풀어 졌을 때 매우 흡족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본문은 진리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들과 기뻐하는 자들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성 경: [눅13:1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성 경: [눅13:1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성 경: [눅13:2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 또 가라사대...무엇으로 비할꼬 - 이 비유는 내용상 마 13:33과 일치하지만 본문의 의문문은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이 가르쳐지고 있다.

성 경: [눅13:2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 가루 서 말 속에...누룩 - '가루 서말'에 대해서는 노아의 세 자손(Bengel), 사람의 몸, 혼, 영혼의 세 요소(Lange)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으나 거기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숨겨겨 있다고 보기 보다는 그냥 일반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가루 서 말'은 대개 한 번 반죽할 때 사용하는 평균적인 양이라고 본다(창 18:6). '누룩'(*, 쥐메)은 빵을 굽기 위한 전 단계로 반죽을 부풀게하는 효소이다. 누룩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는 파급 효과 때문에 흔히 악한 것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된다(12:1;마 16:6;막8:15;고전 5:6;갈 5:9).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영향력을 표현한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가 '외적인 성장'을 표현한 것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내재적인 능력의 확장'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경우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며, 특히 누룩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을 파급시키는 방식이 스스로를 거창하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을 산화(酸化)시켜 대의를 이루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간에 실현되는 것이다.

성 경: [눅13:2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각 성 각 촌...예루살렘으로 - "각성 각 촌"이라는 표현은 누가에 의해 사용된 독특한 도입구로서(8:1) 어떤 특정한 지리적 정보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서술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라는 표현은 9:51의 예루살렘으로의 출발에 이어 예수의 행로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재확인 시키는 것으로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예루살렘이 가지는 중요성을 암시한다.

성 경: [눅13:2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구원을 얻는 자 - 시간과 장소에 대한 배경 설명 없이 하나의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질문의 요지는 '구원받을 사람'의 많고 적음에 관한 것으로 본문에 해당하는 문구 '호이 소조메노이(*)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라는 미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종말론적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얻는 사람들의 수가 많으냐 적으냐에 대한 물음은 당시의 유대교 내에서 많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소수의 극악한 죄인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와 극소수의 사람들 만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견해가 엇갈렸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후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마22:14;요 8:31-47).

성 경: [눅13:2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좁은 문으로...힘쓰라 - 예수께서는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본절 후반절에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많지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얼마 만큼의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로부터 구원의 좁은 문을 통과하려는 노력을 스스로 얼마나 하고 있는가에로 질문의 초점을 돌려놓고있다. 이 좁은 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드러나는 바가 없다. 그러나 '힘쓰라'(*, 아고니제스데)는 단어가 '투기장'이나 '운동경기'에서 전력 투구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결코 안락한 것이 아니라 매우 고된 노역을 경주해야 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순결하기 위한 노력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적들과의 영적인 싸움도 포함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9:23-25). 할편 '구원을 얻을 자'가 미래적인데 비해 '힘쓰라'가 현재형인것은 신앙의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최종적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구원은 미래적인 것이지만 그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현재적인 신앙의 삶이라는 것이다.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 이 말씀은 구원의 문이 어려운 길이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정해진 기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한이 지난 뒤에는 들어가고자 하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절과의 관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눅13:2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워에 이르는 길]

⭕ 주인이...문을 한 번 닫은 후 - 본문에서는 비유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마7:22-23)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있다. 마태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집주인'은 심판 주이신 예수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좁은 문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 번 닫혀진 문은 다시 열리기 않는다는 것은 성도들이 주어진 기회를 지나치게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여 결단을 유보하거나 다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 경: [눅13:26]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가르치셨나이다 - 문 밖에서 거절당한 무리들은 예수와 안면이 있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대인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와 친분이 있다는 것으로 구원을 보장받으려 하고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첫째로 그들이 제시한 사항은 "주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함께 식사하는 것을 친밀한 교제의 표현으로 여겼다. 하지만 본절의 무리들은 형식적으로 예수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밀한 교제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둘째로 그들이 제시한 것은 주께서 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응답(應答)한 흔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과 예수 사이에는 아무런 인격적 친분도 없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한편 마태의 평행 본문에는(7:22)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 조차도 구원을 보증해주는데 아무런 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하물며 본문의 조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 경: [눅13:27]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나는...알지 못하노라 - 무리들은 자신들과 예수 사이를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항들을 열거하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단호한 대답은 전혀 아는 바 없다(I don't Know you.NIV)는 것이다. 이 대답은 25절에 이어반복 되면서 그들이 당하는 외면을 더 비극적로 강화시키고 있다.

⭕ 행악하는 모든 자들 -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들을 거부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 6:8의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행악'(*, 아디키아)은 '불의', '악행'을 뜻하며,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다(16:8-9;18:6;행 1:18;8:23). 이는 누가가 '불의'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 나를 떠나 가라 - 단순히 알지 못한다는 차원을 넘어 여기서는 완전한 분리를 선언하고 있다. 마태의 경우에는(7:23)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범죄자를 추방(追放)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인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는 표현을 썼다.

성 경: [눅13:28]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아브라함과...나라에 있고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the chosen people)의식을 철폐시키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대 즉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서(29절) 열조들과 함께 하리라는 기대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세 명의 선조들을 천국 잔치에서 언급을 한 것은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과 일치하나(마8:11) '선지자'에 대한 언급은 누가만의 기록이다. 그러나 '선지자'에 대한 언급이 의미는 아니다. 선지자와 선지자를 거역한 백성들의 대조는 이미 앞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1:47-51).

⭕ 슬피 울며 이를 갊이 - '슬피 울며'(*, 클라우드모스)는 위로할 길 없는 비참과 영원한 절망에 대한 울음이며(Hendriksen), '이를 갊'(*, 브리그모스)은 증오에 떠는 몸부림이다. 결국 본문이 표현하는 그들의 상태는 '절망적 후회'의 차원을 넘어 주를 향한 강한 적대감까지 표시하는 최악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13:29]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원에 이르는 길]

⭕ 동서 남북으로부터 잔치에 - 이 장면은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여러 문헌에서 이야기 해왔던 하늘에서의 잔치를 묘사한 것이다(사49:12). 이 잔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될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혼인잔치를 뜻한다(계 19:7). '동서 남북'은 '전세계'를 뜻하는 표현이며(사 59:91;말1:11;슥 8:7), '참여하리니'(*, 아나클리데손타이)는 만찬 석상에 비스듬히 누워 음식먹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본래 그 자리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 유대인들은 밖에 쫓겨남을 당하고 그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겨져왔던 이방인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참여한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이(마8:11-12)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성 경: [눅13:30]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구워에 이르는 길]

⭕ 나중 된 자...먼저 된 자 - '좁은 문'의 비유는 이 말씀으로 결론에 이른다. '나중됨과 먼저 됨'의 처음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인데,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지옥에서의 고통이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12:47,48)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도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천국에서의 등급이 뒤 바뀔 수 있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천국과 지옥에 갈 자가 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의 등급이 바뀐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2) 이 세상에서의 명성이 곧 하늘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뀔 수도 있다(Hendrikson).(3) 현재 억압 당하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자신들만 합당하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은 거부당한다는 의미로 본다(Marshall,1:51-53). (4) 먼저 선택받은 선민으로서의 유대인들은 교만과 불신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하고, 멸시받던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로 본다(Yyndale). 이 가운데서 네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본문을 유대인과 이방인이 전체 집단으로서 뒤바뀐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모두가구원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성 경: [눅13:31]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 바리새인들이 ...떠나소서 -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헤롯의 음모(陰謨)를 알려주면서 혜롯의 영역을 떠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동기가 작용하고 있는지 여러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들도 있었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7:36;11:37) 이 바리새인들은 선의로 예수를 염려하여 피신을 종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중립적인 입장에서 헤롯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전달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인 경험도 있고 해서(마14:1-12) 예수를 죽일 의사는 없었으나 혜롯 자신이 관할하던 갈릴리 베레아 지방의 사회적 안정을 원했으며 예수로 인하여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위협용 정보를 알리게 하여 예수 스스로 그 지역에서 떠나게 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3) 바리새인들이 단순히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적극적인 악의를 가지고 헤롯과 합세하여 예수를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세번째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성 경: [눅13:32]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 견해가 유력하다.

⭕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 텔레이우마이)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Farrar,Marshall,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성 경: [눅13:33]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 그러나...갈길을 가야 하리니 - ' 그러나'(*, 플렌)는'...완전하여지리라'와 대조대는 문구로 '완성의 때'까지는 예수의 길을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 여기서 '오늘과 내일과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의 왕성을 이루기까지 그가 계속 수행해야 할 사역의 기간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이라 하겠다. 또한 '...해야만 한다'(must)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데이'(*)는 예수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완수되어야 할 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죽는 법이 없느니라 - 헤롯이나 바리새인이나 간에 그 누구도 예수를 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예수께서 부패한 종교와 타락의 상징인 에루살렘에서 자신의 생명이 끝나게 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능동적 결의가 넘치고 있다.

성 경: [눅13:34]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예수의 관심이 해롯에서 예루살렘으로 바뀌고 있으며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될 선민의 도시 예루살렘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한 심정이 표현되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가리키며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선지자들과 사자들을 살해하고 돌로 쳐죽인 주체로 묘사되는것이다(삼상30:6;왕상12:18;18:4,13;19 :10;21:10-15;느 9:26).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탄식의 말씀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어(마23:13-36) 예루살렘 멸망의 책임이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는데 비해 본문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다.

⭕ 암탉이...몇 번이냐 - 어미 새가 새끼들을 둥지 속에 모아 보호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이 문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는가를 말해준다. 암탉과 그 새끼의 관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는 경우는 구약에 흔히 나타난다(신 32:11-12;시 36:7;사31:5). '몇 번이냐'(*, 포사키스)는 '얼마나 자주'의 뜻으로 빈도 수가 한 두번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예수는 실제로 예루살렘을 여러차례 방문했었다(2:14;5:14;7:14, 28, 37;10:22, 23). 그러나 이 말씀이 예루살렘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전체 이스라엘을 상대로 한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15장;마 9 :36;11:25-30;15:32).

⭕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거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구원 사역도 거부하였다(13절;11:15).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죽일 것이다(23:18,21,23).

성 경: [눅13:35]

주제1: [인자의 회개 촉구]

주제2: [예루살렘을 위한 애통]

⭕ 너희 집이 황폐(荒廢)하여 - 예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당할 결과가 서술되고 있다. 여기서 '집'(*, 오이코스)은 '신전'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곧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은 렘 12:7과 22:5의 반영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종국에는 저버리신다는 의미이다.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 이 말씀은 시 118:26의 인용으로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가리킨다고 본다(Danker, Erasmus). 이 견해는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외친 소리가 본문과 다르며, 환영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 더구나 마태의 평행본문에서는 입성후에 본문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2) 유대인들의 대회개를 뜻한다고 본다(plummer).(3) 주의 재림을 뜻한다고 본다(Godet,Farrar,Marshall). 즉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재림하기 까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주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그를 거부하였던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통절(痛切)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4: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 '두령'(*, 아르콘)은 '지도자'를 뜻하는 이에 대해서는 (1) 바리새파에 속한 지배자(RSV,Creed), (2) 회당장(Marshall), (3) 바리새인의 계층가운데 지도급 인물(NEB,NIV), 등의 견해가 있는데 세번째 견해가 무난하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안식일의 회당의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식사일 가능성이 높다. 안식일에는 회당의식이끝난 후에 가장 큰 식사를 하였으며 랍비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안식일에 손님 접대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은 종교적 의무로까지 여겨졌다.

⭕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 여기서 '저희'는 그 곳에 있던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며(3절) '엿보고 있더라'(*, 파라테루메노이)는 문법구조상 미완료로 되어있어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계속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 보건대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동기가 불순한 것이었던 것같다.

성 경: [눅14: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성 경: [눅14: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 13:10-17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병고쳐주기 전에 먼저 질문부터 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먼저 질문하시는 것은 그들의 악의를 아셨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합당하냐'(*, 여세스틴)는 직역하면 '그것이 율법적이냐'는 뜻으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예수께서 이미 간파(看破)하셨음을 말해준다. 앞에서도 두 차례에 걸친 안식일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6:1-11;13:10-17) 또다시 안식일 논쟁이 수록된 것은 안식일 문제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성 경: [눅14: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심]

⭕ 잠잠하거늘 -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율법 지식에 의거하여 당연히 합당하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랍비적 규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환자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암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생명의 위태함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예수께서는 그 병자를 고쳐주리라는 결의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 예수께서는 침묵하고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섀인들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 예수의 이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사문화(死文化)된 율법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즉 고통받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안식일 규범의 미신성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형태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일 규범을 가르치신 것이다.

성 경: [눅14:5]

주제1: [척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침]

⭕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의 규정에는 온건한 것이 있고 엄격한 것이 있는데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나 엄격한 규정은 다만 구덩이에 꼴만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바리새인 보다 훨씬 엄격했던 쿰란(Qumran)공동체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 구해낼 수 있고 짐승은 구해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채택된 규정에 의하면 우물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었던 셈이다. 예수의 질문 속에 깔린 논리는,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면서 고통 가운데 빠진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것이다.

성 경: [눅14: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침]

⭕ 대답지 못하니라 - 이 말은 4절의 단순한 침묵과는 달리 반대 논리로 맞서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롬 9:20). 그들은 예수에게 모종의 도전과 공격을 하려고 준비하였지만(1절)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지는 것들이 예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예수는 진리였으나 그들은 비진리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왜곡된 판단력을 지닌 인간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상좌 택함을 보시고 - 그 바리새인의 식사에는 예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다. 아마 초청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석에 앉으려는 암묵적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축되며 이것을 본 에수께서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시는 듯하다. 당시에는 음식상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Marshall). 그리고 가장 귀한 손님은 대개 가장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대인의 연회석은 디귿(鑁)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좌는 그 세 면의 중앙 부분을 각각 의미한다. 상좌에 앉아서 섬김을 받기 좋아한다는 것은 바리새인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막 12:38,39).

성 경: [눅14: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혼인 잔치에...상좌에 앉지 말라 -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가장 엄격한 격식이 요구되는 결혼식의 잔치를 비유의 상황으로 설정하신다. 여기서 '앉다'는 물론 유대인의 식탁 자세 즉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묘사한다. 다른 자리에서도 그러하지만 매우 각별한 격식이 요구되는 혼인 잔치에서는 어디에서나 상석에 앉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의례히 자기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여겨 먼저 상석을 차지했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때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잠25:6, 7에는 본문과 유사하게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겸손의 덕목은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 [눅14: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말석...되리라 - 교만하여 상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당하게 될 비참함이 희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하여 그러한 차이에 얽매이지 말고 매사에 겸손하라는 교훈이며, 그 교훈을 직접 말씀하지 않고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완악성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1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말석에 앉으라 - 8,9절과 정반대의 상황이 제시되어 처음 경우의 참담한 수치와 지금의 영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단순한 공식 석상에서의 예법 즉 소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적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상좌를 차지하려는 바리새인들이 소아적(小兒的)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함과 아울러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성 경: [눅14:1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높이는 자...낮추는 자 - 이 말씀은 18:14;마 23:12 에서도 보여지는데 인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추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것은 "낮아지고"(will be humbled,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NIV).라는 문장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사 람은 높아짐을 당하거나 낮아짐을 당할 수 있을 뿐 그것을 결정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 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바로 겸손임을 강조한다.

성 경: [눅14:1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점심이나...청하지 말라 - '점심'(*, 아리스톤)은 늦은 아침에 먹는 첫번째 식사를 뜻하고 '저녁'(*, 데이프논)은 늦은 오후에 먹는 주식사를 뜻한다(11:37 주석 참조).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런 식사에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 절의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나 소경의 네 부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본문은 이런 대비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여기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사랑을 나누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진정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이며, 이들에게 은밀히 행한 자선이 곧 하나님께 대접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6:4).

성 경: [눅14:13]

주제1: [척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 가난한 자들...소경들을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보답도 해 줄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린 이유를 오히려 초청시 동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 25:32-35의 천국 비유와도 의미가 통하며 6:32-35와도 통하는 말씀이다.

성 경: [눅14:1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겸손과 구제에 대한 교훈]

본절은, 구제와 자선을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한 혹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보다는 곤경에 처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가르친다.

⭕ 의인들의 부활 -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만인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을 모두 포괄하는 부활을 의미하며 계 20:5,6이나 살전 4:16처럼 단계적 부활 에서는 첫째 부활을 뜻한다.

성 경: [눅14:1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하나님의 나라에서...복되도다 - 본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야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이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사람이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 기기에다 바리새인으로서 이 잔치에 당연히 참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앞에서 말씀하신 행위 기준에(12-14)자신이 충실하였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과연 이 사람의 생각이 옳은 것인가는 또 다른 기준 즉 그가 하나님의 초청을 진정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가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검증케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14:1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 이 비유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마22:1-14에는 잔치를 베설한 사람이 '임금'으로 묘사되고 잔치의 성격도 '혼인잔치'로 되어있다. 여기서 '큰 잔치'(*, 데이프논)는 '오찬' 또는 '공식 연회'를 뜻하며 여기서 잔치가 의미하는 것은 '구원'이다.

⭕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유대인들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를 여는 사람은 사전에 날짜를 정한 다음 종을 보내어 초청된 사람들에게 참석 여부를 물은 후에 그 수효에 맞추어 잔치를 준비한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주인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음을 암시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사실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Marshall).

성 경: [눅14:1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잔치할 시간에...종을 보내어 - 최초의 초청을 수락한 사람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보내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으며(에 6:14;잠9:1-6) 이때 불가피한 사유가 아닌 한 잔치에 불참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였다. 심지어 아랍인들에게는 두번째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선전 포고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한다. 마태의 경우 임금은 '종들'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있고 초청받은 자들 가운데 더러는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 까지하는데 이것은 선전 포고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마 22:3-6). 한편 마태의 본문에 복수로 표현된 '종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뜻한다고 보고 누가의 본문에 단수로 표현된 '종'은 예수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Lenski) 일리가 있다 하겠다.

성 경: [눅14:1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일치하게'(*, 아포 미아스)는 '당장', '곧'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만장일치로','한결같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초청을 사양하고 있는 것은 국면(局面)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할 것같은 암시를 준다.

⭕ 밭을 샀으매 - 첫번째 사람이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밭을 이미 사고난 후에 밭에 가보는 일이 그토록 긴박한 일인지에 관해서는 의아하기 때문이다. 밭을 먼저 확인한 후에 매입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할 때 그의 거절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 경: [눅14:1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 두번째 핑계 역시 첫번째 경우처럼 농경생활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섯 겨리'는 '다섯 쌍'을 뜻하는데 이 정도의 소를 살 정도면 상당한 부농(富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보통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한 두 겨리의 소로 충분했기 때문이다(Jeremias). 또한 '시험하다'(*, 도키마사이)는 '테스트해 보다' 또는 '검사해 보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소를 살때는 그 소가 일을 하기에 적합한 소인지 아닌지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정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혹 불가피하게 소를 먼저 사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소를 시험해 보는 일이 약속되어 있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까지 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 경: [눅14:2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장가들었으니 - 세번째 사람은 아마도 최근에 결혼했던 것같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결혼한 남자는 1년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면제되었다(신 24:5). 그러나 생사가 걸린 전쟁에 나가는 것과 잔치 석상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그는 단지 신혼의 재미를 깨트릴 수 없다는 하찮은 이유로 정중한 초대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할 복음 사명을 일신상의 하찮은 일을 핑계로 도외시하는 우리들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 가지 못하겠노라 - 대답자들의 태도가 점점 더 무례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사람은 비록 납득할 수 없는 사유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불가불...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예의를 갖춘 형식으로 정중히 사양하고 있고, 두번째 사람은 약간 퉁명스럽게 자신의 불참 사유를 단순히 통보하며 용서를 구하는 반면 세번째 사람은 전혀 사과의 뜻도 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불참을 통고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점점 더 완악해져 감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 경: [눅14:2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집 주인이 노하여 - 종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주인은 그들의 사유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의 행위는 상호간의 인격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깨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매우 분노한다.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마 22:6, 7) 마치 전쟁을 방불(彷佛)케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비극상이 어느 정도일 것인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 시내의 거리와 골목 - '시내의 거리'(*, 플라테이아)는 다양한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넓은 길'을 가리키며 '골목'(*, 뤼메)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암시한다.

⭕ 가난한 자들...저는 자들 - 여기 언급되고 있는 네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적으로는 멸시를 당하며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한 버려진 존재들이다. 이들은 돈이 없어 말이나 소를 사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며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4:22]

주제1: [천구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 주인의 분부대로 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남은 자리가 있다는 종의 보고에서 그 잔치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요 14:2).

성 경: [눅14:2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 여기서의 '길'(*, 호도스)은 성밖의 공용도로를 가리키고 '산 울'(*, 프라그모스)은 '둘러 막다'의 뜻을 가진 '프라쏘'(*)온 말로 '울타리'를 가리킨다. 21절의 '거리와 골목'이 성내의 영역을 뜻한다면 본문의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 잔치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대됨을 뜻한다. 이렇게 볼 경우 앞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자들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되고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강권하여 - 헬라어 '아낭카손'(*)은 '필요하다'의 뜻을 가진 '아낭케'(*)에서 온 말로 물리적인 강제력(compulsion)을 이용하여 데려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끝까기 설득하여 데려오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이 엉겁결에 사양한다 하더라도 친철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양적 예법(禮法)이 배경에 깔려 있다.

성 경: [눅14:2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큰 잔치의 비유]

⭕ 내가 너희에게 - 갑자기 '너희에게' 라는 복수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니희에게' 라는 말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1)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Bengel,Marshall).(2) 본 비유에 대한 결론적 적용으로서, 비유를 듣게 된 최초의 청중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시는 것으로 본다(Bruce,Greed). 이 중 전후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 전에 청하였던...맛보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맞게 될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문자적으로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않될 것이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모든 특권이 무효화 됨을 뜻한다고 봄이 낫겠다. 유대 민족이 A.D.70년에 예루살렘 파멸이라는 징표를 받은 것도 이 사실에 대한 한 징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다(롬 11: 25,26).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창 17:7),이삭(창 26:24), 야곱(창 28:13-14)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며 그분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2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 바리새인의 집에서 떠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리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허다한 무리'(*, 오클로이 폴로이)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상당히 많았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예수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예수께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다. 혹자는 이 무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레자들 이었고(Farrar),이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Plummer).

⭕ 돌이키사 - 예수의 가르침이 시작될때 많이 사용되는 용법이다(7:9;9:55; 10:23; 22: 61; 23: 28 ).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진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무리들의 빗나간 기대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눅14:26]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미워하지 아니하면 - 예수에게 나아오는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일차적인 응답이라면 본절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보여야 할 이차적인 응답에 해당한다. 일차적인 응답 으로부터 이차적인 응답으로 발전하기 의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가 '조금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으로,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마 19:29).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중 후자의 것에 궁극적(窮極的)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한편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고 있는 '형제자매' 및 '아내'와의 단절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중 특히 '아내'에 관한 부분은 20절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Marshall).

성 경: [눅14:27]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자기 십자가를 지고 - 본절의 문구는 9:23에 표현된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여기서 '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조'(*)는 요19:17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당시에 죄수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자도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가 몸소 져야 하는 것이다.

성 경: [눅14:28]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망대 - 이는 13:4에도 언급되는데 그와 달리 여기서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본다(A.G.Marshall). 이러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만 놓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 먼저 앉아 - '앉아'(*,카디사스)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서 정좌하여 앉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소요(所要)되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길은 결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주께로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가지 않아 작은 시험조차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눅14:29]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기초만 쌓고...이루지 못하면 - 아마 당시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없이 건축을 시작하여 기초만 쌓고 건축을 증단하거나 또는 건축 중간에 비용이 없어 중단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가 수도 공사를 진행시키던 중 공사비 부족으로 중도에 공사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이상근).

⭕ 비웃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피이제인'(*)은 '놀림감'을 만들다', '조롱하다', '우습게 보다'의 뜻으로 어리석은 건축자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고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실패가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은 애초에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악조차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4:30]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이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호 안드로포스'(*)는 경멸적 또는 풍자적 용법으로서 '이친구' 라는 뜻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자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잘못된 비전(Vision)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작될 경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제자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작의 귀중함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히 6:11).

성 경: [눅14:31]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싸우러 갈때에 -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의 비유가 연속하여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의 비유처럼 '너희 중에'라는 서두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있던 무리 가운데 왕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 만큼 더욱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 헤아리지 - 만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승산이 있는지의 여부를 빨리 판단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집단 몰사할 가능성이 많겠기 때문이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배나 많은 것으로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과도 같은 상황처럼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감당 되어질 수 있다(히 2:18).

성 경: [눅14:32]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화친을 청할지니라 - 이는 순수한 전쟁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선과 악의 싸움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걱과 타협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비유의 초점은 화친을 하고 안하고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의 냉철한 판단력에 맞춰져 있음에 유의하자.

성 경: [눅14:33]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27절의 구체화이자 두 비유(28-30,31-32절)의 결론으로서 본문의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려고 결정할 때,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하는 상황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 결국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제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18-20절). 본문에서 '버리다'(*, 아포타쎄타이)는 말은 사용되는 대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작별 인사를 뜻하고 사물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포기하다', '버리다'의 의미가 된다. 특히 '아포타쎄타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문에는 18:22의 부자 청년에게 주어진 명령과는 달리 포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委任)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Liefeld).

성 경: [눅14:34]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종교 의식상의 용도 곧 소제(레 2:13)와 번제(겔 43:24)의 예물 위에 뿌리는데도 사용되었다. 또 성전에 피우는 향의 성분 속에 소금이 들어갔으며(출 30:35)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리기도 했고(겔 16;4) 방부제로 쓰기도 했다. 이중 특히 소금의 역할로 중요한 것은 맛을 내는 일이다. 본문도 이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 본래 이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복음도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이 전승과정에서 제자들의 변절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G.Bertram). (2) 가축의 똥을 연료로 땔 때 소금을 촉매제로 함께 섞어 사용했는데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소금의 촉매력이 없어져 화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3) 팔레스틴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사해(死海)의 소금물을 증발시켜서 만든다. 그런데 사해의 물에는 염화나트륨 외에도 여러가지 성분이 있기 때문에 수분을 증발시키면 거기에는 소금과 광로석 및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 때 소금이 먼저 결정되므로 그것들을 모으면 순수한 소금이 되지만 쓴 맛을 내는 광로석을 소금으로 착각하여 채취하기도하였다. 이렇게 잘못 채취된 광로석의 표면에 묻어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버리면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J.Tinsley,Marshall). 이 세 개의 해석 가운데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이는 소금도 그 맛으로 소금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참다운 제자됨을 확인 받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성 경: [눅14:35]

주제1: [천국 시민에 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제자도에 관한 교훈]

⭕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이...버리느니라 - 소금이 땅과 거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소금이 비료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부정과 긍정의 견해로 갈리기 때문이다. (1) 부정하는 견해-팔레스틴에서 소금을 거름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Jeremias). (2) 긍정하는 견해-현대 이집트에는 소금기 있는 홅을 비료로 사용한 증거가 있다(H.Gressmann). 소금은 잡초를 죽일 뿐만 아니라 땅속깊은 곳에서 사해의 소금이 가지고 있는 칼슘 성분을 용해시켜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늘 작용을 한다(E.Deatrick). 이러한 양 견해에 대해서 어느것이 옳은지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마태는 누가의 본문보다 더 강하고 경멸적(輕蔑的)인 표현인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밝힐 뿐이니라"로 서술하고 인다(마 5:13).

⭕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매우 의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25절)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해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현명한 결단을 하는 일이다. 그 결단은 강요에 의한 것도 구걸에 의한 것도 아니요 다만 듣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성 경: [눅15:1]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 모든 세리와 죄인들 - 본장의 1, 2절은 본장 전체의 서론 부분에 해당한다. 여기서 '세리와 죄인들'은 비유에 등장하는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해당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 해석을 기초로 해서 만든 수많은 금지사항과 의무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다. 죄인으로 지칭 되는 사람들은 (1)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간음한 자, 속이는 자(18:11)등이며 (2) 불명예스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들은 공민권(公民權)인 공직퇴임권(公職退任權)과 법정 증언권(法廷證言權)을 박탈당한 자들로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이었다. 흔히 본장의 내용은 '소외된 자의 복음'(Gospel of the Outcast)이라고 불리운다. 여기 등장하는 세 비유는 한결같이 잃어버린 자 즉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및 그들의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으며, 소외층에 대한 누가의 남다른 관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16:19-25;17:11-19;18 :1-8, 9-14;19 :1-10). 물론 보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외된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지 못한 혹은 아직 그것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모든 죄인들을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 가까이 나아 오니 - '엥기존테스'(*)는 '접근하다'는 뜻의 현재 분사형 으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함께 식사와 대화를 나누시는 자리로 '죄인'으로 정죄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소외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음을 시사한다.

성 경: [눅15:2]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양의 비유]

⭕ 원망하여 - '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떠들다' 또는 '수근거리다', '불평하다'의 뜻으로, 여기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게 된 데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불만스러운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이 동사는 그들의 불만이 단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쉴새없이 계속해서 토로되었으며, 아울러 이러한 불평불만의 소리는 사건 때마다 늘상 있었딘 것임을 나타낸다.

⭕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 이 말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을 손님으로 접대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예수가 어떻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가라는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추종자들을 향해 예수를 탄핵(彈劾)하는 말로서 '예수는 경건한 자가 아니니 그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의미이다. 더욱이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대해 '이 사람'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보지 않고 기껏해야 율법 선생 정도로 여겼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 경: [눅15:3]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양의 비유이다. 양은 성경에서 약 50회 이상 언급되며 팔레스틴 지역 특산물로 대표될 만한 동물이다. 양이 일찍부터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축화 되었다는 것은 창 4장의 가인과 아벧의 기사에서 시사되어 있다. 양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주된 재산이요 생계 수단이며 종교 의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양은 희생 제사와 그 제물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동물인데 해마다 막대한 수의 양들이 그러한데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양의 특색은 (1)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른다(요 10:2-5). (2) 순하고 복종한다(사 53:7). (3)사자(미 5:8), 이리(마 10:16, 뱀(요 10:12),시랑과 곰 같은 원수 앞에서 떤다(렘 11:19;미 5:8). (4) 웅덩이에 빠지기 쉽다(마 12:11). (5)목자가 무관심하면 고통을 당한다(겔 34:5-8;마 9:36;막 6:34;요 10:13). 양을 기르기에 좋은 목장으로는 유대 산지, 네겝 남방, 모압, 하란 근방, 아나톨리아, 수리아 산지, 미디안, 요단 동쪽, 아라비아 등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잃은 양의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서식하는 양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비유의 목적은 잃은 양 하나를 다시 찾는 기쁨이 아혼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큰 것임을 말하는 것과 아울러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는데 있다. 물론 이 비유에서 양을 찾아 들판을 샅샅이 뒤지는 목자는 예수를 가리키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성 경: [눅15:4]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목장 주인은 그리 큰 부자는 아니다. 아라비아 유목민(遊牧民)의 목축 규모는 대개 20내지 200수 정도이다. 유대법에서는 보통 300수 정도를 쳐야 대규모 목축에 속했다. 비유에 나오는 이 사람은 몸소 양을 칠 형편이지 품꾼을 사서 거느릴 정도로 넉넉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한편 여기서 등장하고 있는 양 일백 마리에 대해선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하나님 곁에 안연히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지칭한다고 봄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초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백마리의 양이 아니라 잃은 양 한 마리이다.

⭕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대부분 팔레스틴 남북을 잇는 중앙 고원 지대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고지는 해발 평균이 5백 미터나 되기 때문에 일단 양이 목자를 떠나 길을 잃어버리면 사고를 당하기 쉽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목자(牧者)들은 서너명이 한 조가 되어 양떼를 보호했다. 이들은 저녁이 되어 양떼를 우리(fold)로 몰아넣을 때 잃어버린 양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양떼를 세어보았는데 만일 단 한마리의 양이라도 없을 경우 목자는 그 양을 찾아 온 지역을 찾아 다녔다. 한편 '잃다'라는 표현에 대해서 마태는 양 스스로가 양떼로부터 '벗어나다'의 의미인 '플라나오'(*)라는 말을 사용하여, 잃은 양 한 마리는 복음의 진리를 스스로 거부한 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에 누가는'파멸하다'의 뜻인 '아폴뤼미(*)를 사용하여 양이 '고의' 혹은 '악의'로 양떼를 떠나 사악한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양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미련하여 양떼들과 함께 올바로 목자를 따라가지 못했음을 암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잃어버린 양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나타낸다.

⭕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 예수께서 잃은 백성을 다시 찾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19:10)은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마 23:15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한 사람의 개종자(conyert)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열심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들의 종파를 열렬히 신봉할 지지자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목자되신 예수께서 양을 찾으시는 것은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지만(사53:6),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는 이 양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마 9:13;요 10:11).

성 경: [눅15:5]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 즐거워 - '카이로'(*)는 만족으로 인한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노래라도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홍분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본문은 죄인 하나가 참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이와 같은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바닷가의 모래알 처럼 미미(微微)한 존재인 인생들을, 하나님이 이렇듯 깊은 관심과 애정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당신의 주권적 은혜라 하겠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받은 성도의 존귀와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스바냐는 성도들올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 어깨에 메고 -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로 나아간 양이라고 하더라도 '찾은 양'은 그에게 크나큰 기쁨이 되었으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깃발과도 갈이 온 동네에 내보이고 싶은 자랑거리와도 같은 것이다. 복음 전도자의 열심과 수고로 얻게 된 성도들도 그 사역자의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 된다(빌 4:1;살전 2:19).

성 경: [눅15:6]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 나와 함께 즐기자 - 일은 것 즉 양, 은전, 아들을 찾았을 때 이웃들을 불러 모아 함께 즐긴다고 하는 이 기쁨의 잔치는 본장에 나오는 세 비유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내용이다(6, 9, 23절). 이 비유들의 정점은 잃은 것을 도로 찾은 것 보다도 찾은 이후에 이웃과 함께 공동의 향연(饗宴)을 즐긴다고 하는 것에 있다. 향연을 베풂으로써 개인의 기쁨은 공동체에게로 나아가고 함께 걱정했던 이웃들의 노고에 보답하게 된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에서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큰 기쁨이 된다.

성 경: [눅15:7]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잃은 양의 비유]

⭕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이 말은 백 마리 양이 모두 귀하지만 잃어버렸다가 찾은 양은 더 각별한 관심의 대상임을 의미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즉 탕자 비유에서, 큰 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탕자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수많은 고생을 겪었으므로 동정과 긍휼이 그에게 더 쏠렸다는것이다(31, 32절). 사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순서에 있어서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너나 할것 없이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15:8]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드라크마의 비유]

⭕ 열 드라크마 - 한 드라크마(Drachma)는 한 데나리온(Denarius)과 동일한 가치로서 오늘날의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 할 사항은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유대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결혼 지참금 형식(Jeremias)으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꿔어주는데 여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곤 하였다. 오늘날 근동지방에서 많은 여인들이 머리 장신구로서 걸치고 다니는 100개의 금화나 은화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한 장신구이겠지만 열 드라크마는 여인의 지참금이기 때문에 귀중한 재산이며 비상금이 된다. 그래서 유대 여인들은 잠을 잘 때에도 이를 결코 풀어 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결코 장신구의 역할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여인은 부지런히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 등불을 켜고 - 유대인들의 가옥 구조는 대개 창문이 없거나 있어도 환기만을 위한 조그만 창문이 하나 정도 있을 뿐이어서 그 안은 어두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 비유는 예수와 복음 전도자들이 하나님의 공의인 등불을 켜고(습 1:12) 구원할 죄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성 경: [눅15:9]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드라크마의 비유]

⭕ 찾은즉...함께 즐기자 - 경제적 손익(損益)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보다 잃은 돈을 찾지 않는 깃이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선물받은 열 드라크마중 하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이 본절을 통해서 드러난다.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한 사실을(마16:26) 확신한다면, 복음 증거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성 경: [눅15:10]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드라크마의 비유]

⭕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사자'의 뜻인 앙겔로스'(*) 는 '천사' 혹은 '사절'을 뜻한다(마2:13;막1:2). 죄인 한 사람의 회개는 개인의 기쁨일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기쁨이 된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협력이 수반됨과 아울러 여러 천사들의 협력 또한 함께 하므로, 한 죄인의 회개가 우주적 기쁨으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한편 성경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예고나 경고(창 18:9, 10;삿13:2-24;마 2:13), 인도와 교훈(창 24:7,40; 출14:19;마1:20,21), 혹은 보호(창 32:24-29;마 18:10) 등과 같은 여러 방편으로 성도들을 돕고 있다.

성 경: [눅15:11-32]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사복음서 중 오직 본서에만 기록된 이 '탕자의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비유는 세부 묘사가 매우 생생하며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동과 충격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 비유의 첫번째 부분(11-24절)은 앞의 두 비유와 같이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데 대한 기쁨을 말하고 있으며 두번째 부분(25-32절) 대조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앞 부분은 하나님이 인생의 죄악을 사하기 원하시되 신속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사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어 뒷 부분은 이기적 탐욕으로 가득한 입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오히려 비방하는 자들의 왜곡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두 비유가 일명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지만,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두 아들 모두가 소위 '잃어버린' 자들이라 할 수있다. 호색과 방탕으로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 하고서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가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모든 죄인들을 상징함은 분명한 사실이거니와, 큰 아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있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자'였던 것이다. 한편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타락한 과정을 거치고 다시금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과징은 각각 7단게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성 경: [눅15:12]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그 둘째가 - 서리나 죄인(1절) 또는 이방인과 같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게 된 자, 혹은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던 천민계층을 상징한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 이러한 요구는 둘째 아들이신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낸다. 신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 같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식에게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다.

⭕ 그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완전히 물려 받았고 큰 아들도 역시 자신의 몫을 양도받은 것 같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사용권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는 그의 재산을 아버지의 동의없이도 마음대로 처분한 것에 반해서 큰 아들은 그 사용권을 여전히 아버지에게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31절). 유대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 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상속자가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해도 그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다(Jeremias,Parabes of Jesus,P.128-29).

성 경: [눅15:13]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 '모아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쉬나고'(*) 에는 '거두어 들이다'의 뜻 외에도 '헌금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기도 한다(Greed). 이러한 둘째의 태도로 보아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일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큰 도시에 나가 장사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려고 했던 것 같다.

⭕ 허랑방탕하여 - NIV에는 '거친 삶을 사는 것'(wild living)이라 표현한다. 한편 여기서 그가 먼 나라로 떠난 것은 그가 얼마나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를 또한 그 계획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임을 잘 나타내 준다.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비해 버린 것은 그가 게획한 모든 생각들이 육적인 쾌락을 향해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청운의 꿈을 가지고 먼나라로 갔지만 그곳에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받아 타락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탕진허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 경: [눅15:14]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궁핍한지라 - 방탕한 아들에게는 (1) 가진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2)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기근까지 겹치는 어려움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 기근은 단지 한 지역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찾아왔던 그 나라 전체를 엄습했다. 이제까지 부족함이 없이 온갖 즐거움과 자유를 누렸던 그는 '비로소' 궁핍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닥친 이러한 어려움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었고 아버지의 집이 참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으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도록 결단하게 만드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성도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역 안에서(시 16:6)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함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음과 같다.

성 경: [눅15:15]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그 나라 - 유대 민족은 팔레스틴에 약 50만 명 정도만 남아 있었고 4백만명 정도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유대땅을 떠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셍활)을 살았다고 한다. 이 먼 나라(13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집트 혹은 이디오피아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며 확실한 것은 적어도 유대밖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 붙여 사니 - 이는 '더부살이하다'는 의미로 그의 밑바닥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동족은 종으로 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족속의 종이 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만약에 동족 중에서 그가 진 빚이나 형벌로 인해서 종으로 부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유대인에게는 50년 마다 모든 노예를 무조건 해방하는 것을 정한 희년(禧年)의 규정이 있었다(레 25:54).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벗어나 제마음껏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떠나갔지만 결국 종살이로 전락하고 말았다.이는 우리 신앙 생활 증에서도 혼히 체험되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요구되는 삶의 질서와 법도를 때로는 무시하며 거역함으로써 소위 자유로은 삶을 살고자 해보지만, 결국에는 세상과 죄악의 속박에 얽매여 마치 노예와도 같은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붙잡힌 바 됨으로써만 오히려 가능하다, 왜냐하면 오직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겠기 때문이다(요8:22).

⭕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불결한 짐승 중의 하나이다(레11:7;신 14:8). 따라서 그들은 돼지 고기를 먹지도 않을 뿐더러 돼지를 치는 것조차 꺼려하며 천시하였다.

성 경: [눅15:16]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쥐엄열매 - 이 열매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볼 수 있는 상록 교목(喬木)인 구주콩나무(carob tree)의 열매를 가리킨다. 구주 콩나무에는 8-30cm정도 되는 꼬투리가 맺히는데 그 안에는 5-15개의 열매가 들어있다. 혼히 이것은 세례 요한의 떡(ST.John's bread)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광야에서 살았던 세례 요한이 쥐엄 열매를 먹었다는 일설 때문이었다(마 3:4;막 1:6). 이 열매의 맛은 약간 단데 주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며 때로는 기근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으로 대용되기도 했다.

⭕ 배를 채우고자 하되 - 미완료형 '에페뒤메이(*)는 그가 배고픔을 채우지 못했음과 아울러 그 상태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임금으로 기본적인 생계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액수를 받았는데 물론 최저 생계비 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은 그 나라에 후년이 들었기 때문에 더한층 가일화되었을 것이다. 그의 상황은 오늘날의 저임금 노동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 주는 자가 없는지라 - 그가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민심은 그로부터 돌아섰다. 결국 이 말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따돌림을 받게 되어 실제적으로 배고퓸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게되었음을 나타낸다. 그가 한 때 돈을 뿌리며 호의호식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소유를 깡그리 탕진한 지금에 이르러 그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비웃음과 조소(嘲笑)를 받았으며 완전히 소외된 자(outcast)가 되었다. 한 사람도 그에게 동물에게 먹일 사료조차 주지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 나라가 극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말함과 아울러 굶어 죽어가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동정을 베풀지 않은 극단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굻주림과 철저한 고독이라고 하는 상황은 인간이 절대자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성 경: [눅15:17]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스스로 돌이켜(*, 에이스 헤아우톤 엘돈) - 문자 그대로'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징신을 제대로 차린 것을 말한다. RSV에 의하면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다'(come to himself)이다.이러한 표gus은 '회개'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를 나타내 주는 숙어이다 (Jeremias,parables,P.130). 또한 이 표현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자행자지하는 삶은 자신의 존재를 상실케 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상실한 삶이라 할 수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는 곧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 내 아버지에게는 - 그가 회개하게 된 동기는 배고픔이었으나 그가 되돌아 가기를 원하였던 곳은 아버지에게로였다. '아버지에게로'의 길은 자신의 교만과 허랑방탕한 삶에 대한 회개의 길이며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판단과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완전한 순종의 길임을 뜻한다.

⭕ 양식이 풍족한(*, 페리쓩온타이, 아르톤). - 직역하면 '빵으로 둘러싸이다'이다. 이것은 양식이 남아 돌아갈 정도로 가산이 넉넉함을 암시한다. 참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게 될 음식은 하나님에게만 있다(암 8:11-13;요4:14).

성 경: [눅15:18]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일어나 가서 - '곧 출발하리라'는 표현이다. 이러한 말은 그의 '스스로 돌이킴'이 결연한 의지를 동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란 마음의 번화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수반(隧伴)되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감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최초로 취해진 의지의 결단이었다.

⭕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여기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종종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란 단어를 사용했었다. 이 아들이 지은 죄악은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겠으나 그는 (1) 아버지의 재산을 마음대로 다 탕진해 버렸다. (2)허랑 방탕한 삼을 살았다. (3) 부정한 짐승과 접촉했다. 이러한 죄를 범하면서 그는 아버지에 대해 불효, 불순종, 불충, 불성실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토록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범죄했음을 겸손히 시인했다. 또한 본 구절은 사람에 대한 도리롤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범죄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을 교훈한다. 바울은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했다(엡 6 :1-3). 한편 아버지와 하나님이 따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한 행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을 그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과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시 103:13).

성 경: [눅15:19]

주제1: [죄인을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아버지의 아들이라...못하겠나이다 - '감당치 못하다'라고 하는 말은 '알맞지 않다'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의미로 이 작은 아들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이상 아들의 자격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패역된 죄를 저질렀음을 자책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상실되었을 것으로 단정하였다. 그는 이미 상속분을 다 받았으므로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제공과 같은 것도 이제는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그러나 부자 관계란 어떤 인의적 계약이나 재물의 수수관계에 의해 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밉든 곱든 자기 아들이며,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 품군의 하나 - 품군은 일시적인 기간만 고용되는 사람, 즉 날품팔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도 그리고 종으로서도 들어가 살 수 없고 다만 일시적인 고용인으로서 날품팔이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성 경: [눅15:20]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아직도...입을 맞추니 - 꿀어진 관계의 회복이 아버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K.H Rengstorf).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은 다음과 같다. (1) 아직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가 매일갈이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며 먼거리를 살펴보았음을 알 수 있다. (2)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측은히 여기다'의 뜻인 '스플랑크니조마이'(*)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한다. (3)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Jeremias) 행동하고 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신다. (4) 입맞춤은 삼하 14:33에 의하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한다. 또한 '입맞추니'의 뜻인 '카테필레센'(*)은 많은 입맞춤 즉 여러번 거듭한 입맞춤으로, 단 한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이다.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성 경: [눅15:21]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내가 하늘과...못하겠나이다 - 여러 고본(古本)들에는 19절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아들은 마음속에 깊이 각오한 회개와 겸비의 뜻을 그대로 아버지 에게 고하고 있다. 아마 그는 자신을 보고 기쁨에 겨워 입맞추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용서의 뜻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면목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적으로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나간 잘못을 철저히 뉘우치는 아들의 겸비함이 함께 어우러진 이 장면은 뜨거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성 경: [눅15:22]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제일 좋은 옷 -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이 아니라 극빈처럼 대우하였는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바로가 하사한 물품과 같은 것들이 지급되었다(창 41:42). 제일 좋은 옷이란 문자적으로 그 집에 있는 첫번째의 옷이다. 제일 좋은 옷은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큰 영예를 의미한다. 그 당시에는 훈장(勳章)이 없었을 시기였으므로 왕이 공로가 많은 신하를 포상할 때 귀중한 옷을 하사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공표하는 행위였다.

⭕ 가락지를 끼우고 - 가락지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인장 반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한을 아들에게 위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산을 아들들에게 모두 이어준 아버지가 이제 가지고 있는 권한은 맏아들의 재산에 대한 사용권 뿐이다. 따라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됨직하다(29,30절). 엄밀한 이해타산으로 따지면 그의 아우는 이제 가산(家産)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신을 신기라 - 신을 신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자유인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종들은 맨발로 다녔다. 먼 나라에 가서는 다른 사람의 머슴의 신세였던 그가 아버지께로 돌아와서는 다시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죄에게 종노릇을 하게 되는 반면에 하나님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자가 됨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옷, 가락지, 신)는 필요성 때문에 제공된 것이라기 보다는 아들을 존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Plummer).

성 경: [눅15:23]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살진 송아지를 - 헬라어 원문에는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관사'톤'(*)이 붙어있어서 그 송아지가 바로 준비해 둔 송아지임을 나타낸다. 당시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올 경우와 같은 특별한 때에는 자신이 키우던 짐승들 가운데 가장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 잡으라 - 여기서 '뒤오'(*)는 단 일회 '눕히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다른 곳에서는(22:7;행 14:13) '희생시키다'의 뜻도 사용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교부들(Irenaeus,Augustine,Jerome) 중에는 이 송아지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 구절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없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시51:16,17).

성 경: [눅15:24]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제2: [탕자의 비유]

⭕ 죽었다가...얻었노라 -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들 편에서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뜻하고 '잃었다 다시 얻음'은 아버지편에서의 아들과의 분리와 재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엡 2:1과 요일 3:4에 의하면 '허물과 죄로 죽은' 삶을 뜻한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된 죽음의 상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총에 의해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성 경: [눅15:25]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맏아들 -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사죄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전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율법에 충실한 자(출 4:22)로서 행동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맏아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작은 아들이 돌아온 사건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 밭에 있다가 - 밭에서 일한 것이 꼭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행한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상속을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서 밭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교리와 율법을 지지할 신봉자(信奉者)를 얻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다고 하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성 경: [눅15:26]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묻다'의 뜻인 '에퓐다네토'(*)는 미완료형로서 계속해서 묻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조사, 심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은 축하연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는 그 축하연이 너무나 빨리 진행되었기에 맏아들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26-31절의 대화로 보건대 맏아들이 그 잔치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가족과 그와의 관계가 다소 소원(疎遠)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는 맏아들의 아버지 집에 대한 무관심과 아울러 동생에 대한 불만 심지어는 적개심까지도 암시한다.

성 경: [눅15:27]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주제2: [탕자의 비유]

⭕ 다시 맞아들이게 됨 - '아폴람바노'(*)는 로버트슨 (Robertson)에 의하면 '다시'의 뜻인 '아포'와 '영접하다 '받다'의 뜻인 '람바노'의 합성어로 '다시 얻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가족 전체의 축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말이다.

성 경: [눅15:28]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저가 노하여 - '분노하다'의 뜻인 '오르기조'(*)는 '콧구멍을 벌름거리다'에서 온 말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격양(激昻)된 감정에서 나온 화가 아니라 깊이 쌓인 분노와 노여움을 암시한다.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예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원망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맏아들의 이러한 노여움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구원받게 됨에 대해 요나가 화를 내었던 것과 유사하며(욘 4:1)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 죄인들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의인인 체하는 자들의 노여움과 상통한다.

⭕ 들어가기를 즐겨아니하거늘 - 문자적으로는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의 의미로, 축하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절했다는 뜻이다. 이는 동생의 돌아음을 거부하는 행위를 나타낸다.

⭕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의 주도적인 사랑(initiative love)을 또다시 보여주는 말이다. 20절에서 그랬듯이 집으로 들어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다시 한번 집에서 나왔다. '권하다'(*, 파라칼레오)는 말은 '옆에 서서'를 뜻하는 '파라'(*)와 '말하다'를 뜻하는 '칼레오'(*)의 합성어로 옆에서서 다정히 이야기하거나 또는 친절한 말을 건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아버지의 권함이 계속되어졌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계속 권고하심을 상징한다.

성 경: [눅15:29]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으로 인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맏아들의 불만이 오래전 부터 지속되어온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섬긴다고 하는 표현 '둘류오'(*)는 상전에 더한 종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말로, 마치 종처럼 섬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 라는 인식과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한 죄로 단순한 의무감에서 하나님을 섬겨왔음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령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일은 뒷전으로 미룬 채 단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즉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을 지키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이를 이루는 것으로만 생각한 것을 의미한다. 빌 3:9에 의하면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하나요"라고 하였었는데, 이는 자기 의를 내세두는 우월감과 자만심을 단적으로 지적해낸 말이다. 맏아들의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내적(內的)으로는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아들' 에 해당한다 하겠다.

⭕ 염소 새끼라도 주어 -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하기를 주장하는 말이다.이 염소 새끼는 살진 송아지에 비해 싼 것에 속했다. 큰 아들의 불만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가 작은 아들만 편애(偏愛)한다는 항변이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 모두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했으며, 불쌍한 처지에 놓인 아우에 대해 철저한 이해 관계로만 반응하는 냉혈한이었다. 둘째로 그는 아버지가 공의에 어긋난 태도를 보인다고 항변했다. 이는 곧 그는 선하고 옳은 사람이며 아우는 정죄받아 마땅한 악인이라고 하는 위선적 편견으로서 바리새적 교만을 상징한다. 한편 맏아들이 아버지의 전재산을 상속하게 될 것(31절)을 깨닫지 못한 채 염소나 송아지(30절) 한마리로 인해 불평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 앞의 현세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적 독선에 빠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 경: [눅15:30]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이 아들 - 원문에 의하면 '당신의 아들'이다. 그는 돌아온 아들을 '동생'이라고 부를 것을 거절한다. 이는 자신과 동생과의 형제관계를 인정치 않으려는 강한 의도가 숨겨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경멸적인 어투로서(18:11;마20:12;행 17:8)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죄인'(sinner)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맏아들의 표현을 시정(是正)하여 '네 동생'이라고 하였다(32절).

성 경: [눅15:31]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영적인 특권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같이 맏아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무엇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장자로서 아버지의 재산의 3분의 2를 상속받을 수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집의 가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서(출 4:22) 구원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출 19:6;사 61:6) 이방인들을 구원에로 인도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의무와 권리를 망각하고 있었다.

성 경: [눅15:32]

주제1: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인자]

주제2: [탕자의 비유]

⭕ 마땅하다 - 이 말은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아버지의 변명의 말이 아니라 '너는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아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이는 죄인들이 예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원망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죄인들의 돌아옴을 기뻐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한다. 그리고 '마땅하다'의 뜻인 '에데이(*)는 미완료 시제로 필연성과 긴급성(the necessity and urgency)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 비유의 맏아들은 잔치에 참여해야 할 당위성을 갖고 있으며 더욱이 돌아온 동생을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들이도록 요청받고 있다.

성 경: [눅16: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리에 흔하였던 부재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에는 많은 의견듸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 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조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은 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 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 '청지기' 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짐작 된다.

⭕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 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퉁해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여진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사람들은 부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16:2]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파 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이다. 로고스는'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일까지 책임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수 있다. 한편 '셈하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된다.

성 경: [눅16:3]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는 일반적으로 정신 노동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 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 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 의식을 느낀 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 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 짓는다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성 경: [눅16:4]

주제1: [부(富)에 관한이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흥청 망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있다(창 1:28-31;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마 25:14,15;고전 6:20;벧전 4:10).

성 경: [눅16: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 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성 경: [눅16: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는 대략 23리터(l)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2,300 리터에 달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기름으로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롤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함으로써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자를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출 22:25;25:36, 37;신 15:7, 8;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 부분 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성 경: [눅16: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 히브리어 '코르'(*)에서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헥타아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이며 은화로는 25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 석 은 2,5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

⭕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해 준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정도인 20석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밀이 기롬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가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금액은 1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람이 약 16개월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정도로 부체를 탕감(蕩減)해 주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데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성 경: [눅16: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이 세대의미...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리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 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하지만 본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성 경: [눅16: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불의의 재물 - 혹자는 이 말을 금욕주의적인 쿰란(Qumran)종파의 이원론과 같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즉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히브리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부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기 보다는 '하늘의 보화'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세상의 재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 친구를 사귀라 - 재물이 선용(善用)되지 못하고 악용될 경우 황금만능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재물일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재물을 선용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친구를 사귄다'고 하는 말은 KJV에서는 '스스로 친구가 되게 하는 것'(make to yourselves friends)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친구들'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Danker), 예수께서는 물론, 누가 자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구제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는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길'(12:33;마 6:20)이 된다. 이 의미를 좀더 확대하면 '친구'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고도 볼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2:33; 마 :20;19:21;25:31-46).

⭕ 없어짙 때에 - 세상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부요함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 전혀 없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12:21). 한편 '없어지다'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 '에클레이포'(*) 는 일반적으로 부와 세상 재물이 다 소용없게 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후반부의 '영원한 처소'를 단순히 재정적(財政的)인 면에서 안전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도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한데 따른 것이다.

⭕ 영원한 처소로 - 일반적으로 장막의 뜻인 '스케네'(*)는 일시적인 거주지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영원한 것 즉 영구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의 초월적인 영원한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신 것은 아니다.

성 경: [눅16:10]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지극히 작은 것..,큰 것 - '지극히 작은'의 뜻인 헬라어 '엘라키스토스'(*)는 '작은'의 뜻인 '미크로스'(*)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잣은 것, 보잘것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큰', '많은'의 뜻인 폴뤼스(*)는 원급 형용사이다. 이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의 또다른 표현은 11절에 의하면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12절에 의하면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된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상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 즉 복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응 정도로 작은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상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는 것을 경고(警告)하셨다.

⭕ 충성되고 - 직역하면 '충성된 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충성된 자'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이 말이 어원은 '믿다, 옳게 여기다'의 뜻인 '페이도'(*)이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란 재물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고 또 보관하는 등의 경제 생활 영역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결국 본 주석에서는 비록 청지기의 죄가 간사한 것이긴 하지만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 열심과 지혜만큼은 칭찬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를 죄악된 술수로 규정할 뿐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청지기와 같은 식으로 처신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투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해석에 관해 정확한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전체적 문맥을 고려하건데 본 주석의 해석이 무난하리라 본다.

성 경: [눅16:14]

주제1: [부(富)에 간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돈을 좋아하는 자라...비웃거늘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노고에 비추어 그만한 물질적 대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당연한 측복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사회적 특권을 이용하뗘 축재하는 일을 당연시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척 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주관심사는 재물에 었었다. 이렇듯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15:1-16:13)로써 그들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한낱시골 출신의 이름 없는 선생인 예수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교만한 자들은 그 눈이 어두워져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18:11;욥 33:9;요 9:41;계 3:17).

성 경: [눅16:1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스스로 옳다 하는 -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의 뜻인 '디카이오오'(*)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정당화하려고 애쓰다'이다. 즉 이는 성도가 그의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을 통해서 인정받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는(롬 1:17) 대조적으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이를 정당화(justify)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 사람 앞에서...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으니 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원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메우 엄격하였으며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과 이스라엘의 종교를 지키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대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계의 다른 분파들인 사두개파(Sadducess)와 에세네파(Essenes)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멸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적인 율법의 수호자이며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로서 자처(自處)하여 일반 백성에게 존경을 받으며 국가로부터도 그에 합당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속마음을 다 아셨다. 즉 그들이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시 139:7-18).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영적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며 우리 종교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영적교만의 한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18:11;요 9:41).

성 경: [눅16:1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율법과 선지자 - 율법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그리고 선지자의 글은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대명사이다(마 5:17;7:12).

⭕ 요한의 때까지요 - 마 11:12 에는 '세례 요한때부터로 되어있으므로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의 구분속에서 세례 요한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상으로는 마태복음의 '때부터'의 뜻인 헤오스(*)나 누가복음의 '때까지'의 뜻인 '메크리'(*)는 모두 요한을 율법 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요한에 대한 본절의 언급과 관런하여 콘첼만(Conzelmann)은 구속사적 시대 구분이 이 부분에서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결국 역사는 (1) 율법과 선지자들의 활동시기와 (2) 예수 자신의 활동시기 (3) 또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성령 혹은 교회의 시기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로서 당신의 가르침 속에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4:43;6:20;9:2;13: 18;17: 21;21:31 등). 그 사상은 성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구약에는 '나라'라는 말 자체는 자주 언급되지 않으나 하나님 나라의 기본 개념 곧 여호와가 왕으로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이 저변에 깔려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왕하 19:15;시 29:10;33:13,14), 특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신 35:5;시 48:2) 묘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상의 모든 불의와 궁핍이 제기된 이상적인 미래의 왕국에 대한 비전도 제시되어 있다(시 146:10;사 24:23;34:12;52:7). 이렇듯 구약 속에서 그림자처럼 암시되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이다.

⭕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 마 11:12 에는 '침노를 당하다'라고 하는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본절에서의 '비아제타이'(*)는 '침입하다'의 중간태 형이다. 여기서는 능동태와 복음에 대해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적극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고 하는 표현은 만인에게 복음이 개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다시말해, 율법과 예언자들은 천국을 예언하는 일을 하였고, 세례 요한은 도래할 천국을 예비(豫備)하였으나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서 천국은 이미 도래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 천국을 붙잡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으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이 비록 종국적(終局) 완성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안에서 그와 더불어 하나의 강력한 현실로 세상에 들어왔고 따라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본절의 의미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가고 그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게속 율법 준수를 고집하는데 대한 깨우침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성 경: [눅16:1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한 획 - 마 5:18에 의하면 이는 '일점 일획'(一點一劃)이라 표현되어 있다. '획'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한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분 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히브리어 문자 중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를 가리키며 헬라어의 '이오타'(*)와 상응한다. 한편 '일획'이라 했을 때는 '벱;카프/달렛/헤;헷( ; / ; / ; )따위 등의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구별해주는 돌출 표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로 구약성경의 붓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 조차도 모두 권위(權威)를 갖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이 말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이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비록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 복음의 시대가 임했지만 구약의 예언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마 5: 18). 왜냐하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결실이므로 복음과 율법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 율법을 폐기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실 율법의 말씀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구원(救援)의 확실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갈 3:24). 이렇듯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 역할에 의해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성 경: [눅16:1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무릇...간음함이니라 - '음행한 연고'라고 하는 단서를 붙인 마 5:32절보다 본문은 훨씬 더 엄격한 인상을 준다. 당시 이론에 관한 견해는 매우 다양했으나 그중 보수적인 샴마이학파(School Hillel Shammai)의 진보적인 힐렐학파(the Hillel School) 의 견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자는 이혼 조건을 부정(不貞)이나 율법 파기 등에 국한시킨 반면 후자는 어떤 이유든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를 밝힐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특히 힐렐의 경우는 여자 음식 솜씨 여하에 따라 이혼도 가능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결혼 생활을 반영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갑자기 '이혼 문제'를 제기한 것은 특별히 '이혼 문제'를 통해서 율법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고 율법의 영구성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 19:6-8의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잘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보내라'(신 24:1-4) 한 말씀은 다만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서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고 지금은 복음과 메시야의 시대지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성 경: [눅16:1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한 부자가...연락(宴樂)하는데 - 이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는데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또한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이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 어렵다고 경계하신 예수의 말씀은(18:25)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의 이러한 냉혈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16:20]

주제1: [부(富)에 관한 안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나사로 - 이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 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 뿐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나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하는가 하면 나사로는 요 11장에 나오는 인물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요,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린 자의 이름과 같다.

⭕ 헌데를 앓으며 - 나사로는 몸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 에베블레토. '던져져 있는')이며 피부병을 앓는, 거지이다. 그의 병이 '궤양' 혹은 '종기'라고도 하지만 문둥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문둥병 환자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 대문 - '퓔로나'(*)는 보통의 대문과는 달리 장식이 된 높은 솟을 대문과 같은 것으로서 그 부자의 집의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성 경: [눅16:2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 대개의 유대인들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은 먹어서는 안 되며 도로 접시에 담지도 않는데 이는 전염병을 염려해서 생긴 습관이다. 오히려 그들은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린다(S.Kraub).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던져지다'의 의미이다. 즉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 바닥에 던진 것을 뜻한다.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여기서 개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기르는 개인 '퀴나리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뜻인 '퀴온'(*)이다. 이러한 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란 고대 유대교의 인과 응보(因果應報)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을 의미한다. 리펠드(Liefeld)에 의하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Vincent, Geldenhuys, Alford) 개들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고 해석한다.

성 경: [눅16:22]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천사들에게 받들려 -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행 27:23;히 1:14). 한편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한 자가 죽으면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한다. 아마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을 부자의 죽음과는 달리 거지인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 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들의 영혼이 도달하게 된 장소는 전혀 반대였다.

⭕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막 12:26;행 7:32)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 2 :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 7:10;마 25:31,46;롬 14:10;고전 15:44;히 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수 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23:43;고후 12:4;계 2:7;6:9-11; 7:9,10;20:13).

성 경: [눅16:23]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고통 중에 -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옥의 상태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묘사된다(막 9:43). 이 불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문자 그대로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축복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과는 정반대로 결핍 가운데서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부자의 돈을 매개로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더 큰 결핍과 소외에 직면케 된 것이다.

⭕ 눈을 들어...보고 - 예레미야스(Jeremias)는 말하기를 '의인들과 악인들이 저 세상에서 서로 마주 본다고 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에 잘 알려진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3:28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최후심판 이후에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장차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의 장면을 어느 정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성 경: [눅16:24]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요 8:39). 이 부자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횰을 얻기를 간구한다.

⭕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된다. 후기 유대 사상에 의하면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 고민하나이다 - '오뒤나오'(*)의 원래 뜻은 '괴로움을 겪다', '고통당하다'이다. 이 말은 '고통', '근심', '비탄'의 뜻인 '오뒤네'(*)에서 온 것으로, 고틔 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성 경: [눅16:2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얘 - '테크논'(*)은 일반적 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 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이며 여자 아이일 경우 '딸아'라는 말과 같다.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네 좋은 것...고난 - '네 좋은 것'(your good things,NLV)의 '네'라고 하는 소유 대명사는 12:21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나 나사로가 받은 고난(bad thing,NLV)앞에는 소유 대명사가 없음으로, 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안락인 반면 나사로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받은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악 또는 가난 등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자였음을 암시한다.

⭕ 위로를 받고...고민을 받느니라 - '위로를 받고'의 원어 '파라칼레오'(*)는 '옆으로 혹은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다. 이는 고통이나 슬픔을 당한 사람 옆에서 그를 격려,고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본 구절이,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는 고난을, 지상에서의 가난함이 저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 응보론적 논리를 가르치거나 부는 지옥을, 가난은 낙원을 예비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름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시는 자)에서 그 경건성을 추측할 수 있는 거지가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다. 한편 스탤톤(Stanton)에 의하면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고 한다. 즉 여기서 무조건 정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재물의 남용, 과소비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다. 이 비유는 그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었던 냉혹한 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눅16:2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정확한 의미는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구렁'의 원어 '카스마아(*)는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1)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과(2)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벧전3:18-20).

성 경: [눅16:2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나사로를...보내소서 -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퉁해서(물론 그 방법은 꿈이든지 환상일 수 있다) 산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 예를 구약의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에서 제시하기도 한다(삼상 28:8-19). 그러나 사람이 죽게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게와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한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볼 때(19-31절;23:43;고후5:1) 사울의 경우는 사단의 기만에 속은 예였다. 한편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여전히 그의 종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성 경: [눅16:2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증거하게 하여 - '증거하다'의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자세하게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확언이나 맹세 또는 경고 등을 의미한다. 이는 죽고나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만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눅16:2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모세와 선지자들...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들을지니라'의 원어 '아쿠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나타난다면 그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이러니(irony)를 주목해 보라.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성 경: [눅16:30]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죽은 자...회개하리이다 - 이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하고 만다.

성 경: [눅16:3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중의 폐단을 제시하며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나는 현재적 사실로 그들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에서 지시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는다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 즉 요11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처럼, 누군가가 살아 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이 비유 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성 경: [눅17:1]

주제1: [성도의 생활과 인자의 재림]

주제2: [용서와 겸손에 대한 교훈]

⭕ 실족케 하는 것 - '스칸달론'(*)은 원래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놓는 '덫, 올무, 파놓은 함정'(snare) 등을 의미한다.본절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시 140:5). 이는 실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고의로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외식 행위(11:37-52)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 같다.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부터 성도들도 악의로든 혹은 그렇지 않든 간에 서로간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늘 주의하여 피차 덕을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겠다(롬 14:19).

⭕ 화로다 - '우아이'(*)는 슬픔이나 불쾌함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나 여기서는 비난이나 단순한 비탄의 절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심판 선언의 뜻으로 쓰였다. 즉 여기서의 화, 재난이란 '바다에 던지우는 것' 즉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가혹한 형벌(形罰)인 영영히 타는 불 속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6:24-26의 부요한 자에 대한 심판 선언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또한 이는 복있는 사람(마 5:3-12)의 '복'과 대조되는 말로서 불신자들 모두에게 미칠 지옥의 판결의 의미로 볼 수 있지만, 복음서에서는 특히 바리새인을 위시한 당시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직접 던져진 경고로 자주 나온다(11:42,46). 그들은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노라고 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뜨리는 격이었다(마 23:16).

성 경: [눅17:2]

주제1: [성도의 생활과 인자의 재림]

주제2: [용서와 겸손에 대한 교훈]

⭕ 이 작은 자 - '미크론 투론'(*)은 문자 그대로 어린이들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Manson), 제자들일 수도 있으며(Klostermann,Michel), 복음이 전파된 가난한 사람들일 수도(Kummel,Grundmann) 있다. 마 18:6에서는 이 말씀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과 관련되어서 나오고 있는데, 이때의 소자는 분명 문자 그대로의 '어린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에서 '작은 자'를 지시 대명사 '투톤'이 수식하고 있으며 또 제자들의 칭호가 5절에서 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사도'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12사도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 또는 제자가 되려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 중에서의 초신자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있다. 이제 막 믿음의 문턱에 들어선 새신자들은 대개 연약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지닌 상태기 때문에 이단 사설(異端邪說)에는 물론이고 복음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의해서까지 실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기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까지 말했다(고전 8:13).

⭕ 연자 맷돌 - 방아간에서 사용하는 회전형 맷돌. 곡식을 빻는데 사용하는 이 도구는 손으로 돌리는 맷돌에 비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나 말의 힘을 이용해서 돌린다. 본절에서의 연자 맷돌은 한 가운데 구멍을 뚫은, 맷돌의 윗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멧돌을 매어 바다에 빠뜨리는 것은 고대 로마, 그리스 등지에서 실제로 시행되던 사형법(死形法)의 일종 으로, 극악한 범죄로써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해친 자들이게 가해졌다고 한다. 본절에서 이 표현은 '작은 자'라는 표현과 대비를 이루어 타인을 실족케하는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가를 실감있게 나타내고 있다.

⭕ 나으니라 - 헬라어 '뤼시텔레오'(*)는 '지불하다'의 뜻인 '뤼오'(*)와 '세금'의 뜻인 '텔로스'(* 의 합성어로, '대가를 지불하다'(pay) 혹은 '유익하다'(profit)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비교를 나타내는 접속사 '에'(*)와 함께 쓰여 '... 보다 차라리...더 유익하다'의 뜻이 된다. 본절에서는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눅17:3]

주제1: [성도의 생활과 인자의 재림]

주제2: [용서와 겸손에 대한 교훈]

⭕ 스스로 조심하라 - NIV성경에 의하면 이 구절은 앞의 '실족'의 교훈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RSV성경에는 뒤의 용서의 교훈과 관련된 것으로 나와 있다. 학자들 중에도 이 구절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zahn, Stuhlmueller, Creed, Schulz), 아마도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하지 말며 또한 스스로도 실족되거나 당하지 말도록 조심하라고 하는 의미일 것이다. '조심하라'뜻의 헬라어 '프로세코'(*)는 '에... 대해서 몰두하다'의 뜻으로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살피는데 전력을 다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 경계하고 - '에피티마오'(*)는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 18:15-22를 보면 공동체의 어느 한 형제 혹은 자매가 범죄한 경우 일차적으로는 한 사람이 죄를 지은 당사자만 상대하여 권고하고 이차적으로는 두 세 사람이 권고케 하고 그래도 안되는 경우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안듣는 경우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다. 본절의 경계하라고 하는 말에는 마 18:15절의 이 네 단계를 모두 거쳐서 권고하라고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 용서하라 - '아피에미'(*)는 '죄과(罪過)를 모두 탕감해 준다'고 하는 뜻이 담겨겨 있다(마 18:27). 본절에서는 '아피에미'의 부정과거 명령형인 '아페스'(*)로 쓰이고 있어 한번 용서한 이상 어느 때라도 다시금 들추어 내는 일이 없어야함이 암시되어 있다.

성 경: [눅18:1]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항상 기도하고 - 이는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오직 기도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 갈파한 바 있거니와(살전 5:17), 이 말은 매 순간을 주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의 삶, 곧 생활이 바로 기도인 삶을 살라는 뜻이다. 조용한 시간을 별도로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지만, 구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천해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어떤 기도 제목을 놓고 간구하는 자가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여 지레 포기하거나 낙심(落心)하지 말라는 권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바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되 적절한 때를 좇아 최상의 것으로 응답하신다(11:9-13;시 19:14). 특히 본 비유가 종말론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성 경: [눅18:2]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 6절에서 예수께서 정의한 이 사람의 속성은 '불의함'이다. '불의'(unjust, NIV)라는 말은 '종교적인' 혹은 '경건한'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것으로서 세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사람은 완전히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소위 '속물'(俗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격은 이중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첫째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헬라어 동사 '포베오'(*)는 '무서워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공경',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의미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또한 그의 부패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두번째 성격은 그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고아나 과부같이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출 22:22-24;시 68:5;애 1:1)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재판관들의 이러한 모습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의 참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법과 공의를 외면한 채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에게는 아부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포학(暴虐)을 일삼는다.

⭕ 한 재판관 - 이 재판관은 유대인이 아닌 것같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인 시비는 여기서처럼 재판정에서가 아니라 장로에게 찾아가서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에 나오는 재판관은 예수 당시 통치자인 헤롯(B.C. 4-A.D.39)이 임명한 재판관이거나 로마에 의해 임명된 재판관일 것이다. 이 같은 재판관은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권력의 하수인이거나 권력과 야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로 정의에 입각한 법정신과 법관으로서의 의무마저도 잊어버린 자들이다(미 3:9-11).

성 경: [눅18:3]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한 과부 -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고 무력한 자의 표본이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러한 자들을 압제하지 말고 보호하라고 하는 명령이 반복되어 나타난다(출 22:22;신 10:18;욥 22:9;렘 22:3).

⭕ 가서 - '에르케토'(*)는 '가다', '오다'의 뜻인 동사 '에르코마이'(*)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끊임없이 되풀이하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도무지 의탁할 데가 없었던 이 여인으로서는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요하게 매어 달려 간청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암시한다.

⭕ 원한을 풀어 주소서 - 헬라어 동사 '에크디케오'(*)는 '원수를 갚다'는 말로 (1)가해자를 벌줌으로써 객관적인 공의를 세워주는 것 (2)악한 사람에 의해 탈취된 권리나 보상금 따위를 되찾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눅18:4]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듣지 아니하다가 - 원어상으로는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과부의 청원을 아예 무시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공정한 법집행 보다는 사리 사욕에만 밝았기 때문에 가난한 과부에게는 무관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인에게는 군침을 돌게하는 뇌물도 없었고 뒤를 돌봐줄 만한 세력가도 없었던 것이다.

성 경: [눅18:5]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번거롭게 하니 - '수고', '고난', '어려움'의 뜻인 '코포스'(*)는 단순히 성가시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 보다는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 즉 그 일 때문에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할 수 없게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 늘 - 헬라어 '에이스 텔로스'(*)는 '끝까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의 뜻이다. 재판관은 과부가 자신의 탄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판관인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그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 괴롭게 하리라 - 헬라어 '휘포피아조'(*)는 '아래'의 뜻인 '휘포'(*)와 '눈'의 뜻인 '화스'(*)의 합성으로 이루어 진 동사로서, 문자적인 의미로는 '눈 밑을 때리다' 또는 '눈이 멍들게 만들다'는 의미이다. 이는 동양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법(語法)으로, 얼굴에 먹칠을 당하는 것 곧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당하는 것, 또는 명예를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부의 필사적인 탄원(歎願)이 성가셔서 였든 혹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든 간에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 주었다는 데에 본 비유의 핵심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올바로 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해 볼 수 있다(마 18:19;요 15:7).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심치 말고 결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신실성을 굳게 믿어야 겠다(삼상 15:29).

성 경: [눅18:6]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불의한...들으라 - 비유를 끝내고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들려 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주기 위한 말씀이다.

성 경: [눅18:7]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밤낮 부르짖는 - 1절의 '항상 기도하고'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르짖다'의 뜻인 '보아오'(*)는 고뇌의 부르짖음 혹은 원조를 청하는 외침의 뜻을 의미하는 '보에'(*)에서 나온 말이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애원하는 태도를 암시한다.

⭕ 택하신 자들 - 이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자들을 나타낸다(마 24:31;막 13:27;계 17:14). 여기서 '택하신 자들'이란 주의 제자들로서, 과부나 고아와도 같이 예수의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사람도 의지할 자가 없는 무력한 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의지할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헬라어 문장 '마크로뒤메이 에프아우토이스'(*)는 주석하기에 매우 난해한 구절로 알려져 왔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 '마크로뒤메오'(*)가 '지체하다', '미루다'의 뜻인지 아니면 '참다', '견디다'의 뜻인지에 관한것에 있다. 또한 전치사 '에피'(*)가 '...을 향해서'일 수도 있고 '...때문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저희에게'란 구체적으로 택하신 자들인지 아니면 그의 원수들인지가 명확치 않다. 그리고 이 구절은 전체 문장과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인가하는 것도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 (1)바이스(J.Weiss), 벵겔(Bengel)등은 '택한 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오랜 참으심으로 그들에게 응답하신다'고 하는 의미로 (2)맨슨(J.W.Manson)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그들에게 내릴 진노(震怒)를 연기하신다'고 하는 뜻을 가진 원래의 아람어적 표현이 잘못 사용된 문맥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3)리젠펠트(H.Riesenfeld)와 예레미야스(Jeremias)등은 이 구절을 양보절로 이해하여 '비록 기다리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구하지 않겠는가'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앞 구절과 8절과의 관련성 속에서 본다면 어쨌든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구절인 것은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불의한 재판관처럼 오래 지체하거나 계속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의미이다.

성 경: [눅18:8]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불의한 재판관 비유]

⭕ 속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타케이'(*)는 일반적으로는 아주 짧은 간격 뒤에 곧 일어날 사건을 지시한다. 그러나 때로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흐른 후 '갑자기' 어떤 일이 발생하리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비교, 계 22:20의 '타퀴'(*). 어쨌든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 조속히 혹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을 시사한다.

⭕ 믿음을 보겠느냐 - 여기서의 믿음은 풀루머(Plummer)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로서의 인자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기도의 자세를 견지하는 실천적 믿음일 수도 있다. 또한 이 말은 인자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많은 주의 제자들이 박해의 시대 속에서 낙망하여 허탄함에 빠지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주의 재림이 늦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신령한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 있다. 이 점에 관해 주님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바 있다(마 25:5). 하지만 애굽에서의 오랜 종살이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끝내 출애굽을 명하셨으며(출 3:10) 또한 바벧론 유수(幽囚)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에 대한 언약이 끊긴 것으로 알고 소망을 잃었던 백성들에게 위대한 귀환은 기필코 성취되고 말았다(출 12:51).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계획을 만세 전으로부터 차질 없이 하나 하나 성취해 나가셨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8:9]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자기를 의롭다고...멸시하는 - 직접적으로는 예수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즉 당시 대다수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부장한 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았던 약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이 구절은 바리새인들과같이 독선적 아집에 사로잡힌 일반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사람들 중에는 양심이니 진리니 하는 것들을 아예 무시하고 육신의 정욕이 명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선악간 행위의 기준을 세워놓고 구도자적 삶을 지향하는 소위 종교성이 많은 이들도 있는 것이다(행 17:22).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폐단이 바로 종교적 독선(獨善)이다. 본절은 이들의 오류를 두 가지로 지적한다. (1)자기 의(義)를 내세움.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의(自己義)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 의를 자랑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 덧입음으로써만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롬 3:24). 이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열의에서라기 보다는 종교적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다른 사람을 멸시함. 자기 스스로 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만하는 자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공공연하게든 무의식적으로든 경멸하기 쉽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하며 타인의 저급한 상황을 멸시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긴다.

성 경: [눅18:10]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곧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행 2:15;3:1;10:9). 성전은 동,서,남쪽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의 유대인의 뜰에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편리한 시간을 택해 성전에 올라가기도 했다.

⭕ 바리새인...세리 -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뚜렷이 대조되는 신분은 극적(dramatic) 효과를 더해준다. 즉, 바리새인이 당시 유대교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반면 세리는 당시 천시되던 소위 '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이 인간적 판단과 얼마나 판이한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18:11]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서서 따로 기도하여 -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교만이 뚜렷이 암시되고 있다. 첫째 그가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성전에서 서 있는 자세로 기도하는 하나의 '습관'을 암시한다. 그가 드린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간절한 영혼의 기도가 아니라 세끼 밥을 먹듯이 습관에 매인 형식적 기도였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둘째 '따로'라는 말은 바라새주의의 발단은 이교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여 구별된 삶을 형성해 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별 그 자체가 잘못된 사상은 아니다. 그러나 본래의 그 선한 정신이 스스로만 의롭게 여기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 23장과 막 7장에서 뿐만 아니라 유대 문학에서 두루 발견된다. 누가의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터무니 없는 적대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5:17;6:2,7;7:39; 11:37-54;15:2;16:14등). 그는 외형적 율법적 죄를 범하지 않는데 대해 감사하는 자랑의 기도를 드렸으며 더욱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율법 준수의 자랑까지도 덧붙였다(민 18:21;신 14:11,23). 오늘날에도 이 같은 바리새적 교인이나 지도자들은 권력과 사회적 지위, 교회의 권위, 재력에 의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의로운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양심,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그들의 불의(不義)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렘 11:20; 23:24;암 9:3).

⭕ 토색...감사하나이다 - 그는 토색(討索),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으며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즉 자신에게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깨끗함 뿐임을 자랑했다. 유대법에 의하면 금식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은총을 원하는 자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도 금식을 행했으며, 예루살렘에 장이 서는 때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 큰 거리에 나와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였다(마 6:16-18 주석 참조). 이처럼 자신들의 의(義)를 자랑하는 자들은 오히려 의롭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와 무관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5:32).

성 경: [눅18:12]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본절은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문장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역시 앞절의 '당신에게 감사하나이다'라는 문구에 종속되어 있다. 그의 모든 기도문에 나오는 동사는 '일인칭 단수형'으로, 그의 기도가 자기의를 내세우는 독선적 아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넌지시 시사한다. 한편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10을 준 데서 발견된다(창 14:20). 그후 야곱도 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창 28:22). 하나님은 이렇듯 유래가 깊은 십일조 제도를 출애굽 당시에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율법 가운데 십일조에 관한 세부적인 기록은 레 27:30-33;신 12:5-18등에 나온다. 이곳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어 들이는 모든 산물 즉 곡물, 과일, 가축 등에서 1/10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후대에 이르러 유대교의 랍비들은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 더욱 철저하기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를 바치는 규정을 만들었다(마 23:23). 본절의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철저히 지킨 것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보답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십일조가 모든 소유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자기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고백하는 행위임(마 25:14-30)을 알지 못한 태도이다.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물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가 마땅히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신앙의 표시이다(욥 1:21;롬 11:36).

성 경: [눅18:13]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멀리 서서 - 바리새파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리 아마도 성전 밖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하였을 것이다.

⭕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정상적인 여러 자세 중 하나였다(시 123:1;막 6:41;7:34;요 11:41; 17:1). 이 세리는 기도의 정상 자세 조차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가슴을 치며 - 이 표현은 정확히 말하자면 죄의 근원지로서의 마음을 치는 깊은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말이다(23:48;마 11:19). 또한 헬라어 동사 '에튀프테'(*)는 '때리다', '치다'의 뜻인 '튀프토'(*)의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치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그가 세리라는 자기 직업을 통하여 범해온 죄 많은 생활들을 청산할 뿐 아니라 그동안 그가 사람들로부터 착복한 금액에다 율법에 명시된 배상액까지 부가하여 갚고자 하는 굳은 결의가 이 표현 속에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출 22:1-15).

⭕ 불쌍히 여기옵소서(*, 힐라스데티) - 이는 '진정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동시에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세리의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를 가리켜 '많은 죄인들 중의 한 명'이라고 칭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는 그의 겸손한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바리새인과 세리 중 세리가 더 의롭다는 절대적인 판결을 내리셨는데(14절) 이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의 참된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준다(요일 1:8,9). 한편 세리의 기도는 바로 시 51편의 서두의 인용이기도 하다. 세리의 기도의 호소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성 경: [눅18:14]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의롭다 하심을 받고(*, 데디카이오메노스) - '의롭게 하다'는 뜻의 이 단어는 여기서 완료 수동태 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리를 주권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고 확정하셨음을 암시한다.

⭕ 자기를 높이는 자는...높아지리라 - 인간의 높아지고 낮아짐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 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롬 9:21).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이웃을 존귀히 여기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을 높이는 길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에 따라 역사하신다고 생각했다. 한편 본문의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소망을 가졌다.

성 경: [눅18:15]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 만져 주심 - 이 구절과 유아 세례 문제를 굳이 결부시키는 것은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이 말은 속죄의 날 저녁에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축복의 기도를 받는 관습이 배경이 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2:28 주석 참조).

⭕ 어린 아기 - 평행 부분인 마 19:13과 막 10:13에서는 7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파이디아'(*)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갓난 아기' 또는 '젖먹이'를 뜻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다. 더욱이 누가는 이 말 앞에 접속사 '카이'(*)를 첨가하여 '젖먹이들까지도'라는 강조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예수의 은혜를 덧입고자 접근할 때에 예수의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위로 보아 아직도 그들은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린 아이를 어른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아직 성숙치 못하여 사람 취급도 받을 수 없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갓난 애들과 같은 그러한 계층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눅18:16]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구원 혹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는 어린 아이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확대시키고 게신 것이다. '이런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우톤'(*)은 '이런 종류의(이와 같은)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젖먹이가 엄마의 품을 의지하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자, 어린아이의 동심과 같이 깨끗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성 경: [눅18:17]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 받들지 않는 - '받들다'로 번역된 동사 '데코마이'(*)는 '받아 들이다', '영접하다', '손에 쥐다', '인정하다', '공인하다'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마샬(Marshall)은 '받들다'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다'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쉴라터(Schlatter)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이의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받들다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였다.

성 경: [눅18:18]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어떤 관원 -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 19:20)으로, 그리고 마가는 다만 '한 사람'(막 10:17)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관원'으로 해석된 헬라어 '아르콘'(*)은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된 정부 관리(authorities)일 수도 있고, 회당을 맡아보는 사람일 수도 있으며, 산헤드린(Sanhedrin) 회원을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배경을 '관원'이라는 말만으로 정확히 추정해 내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 선한 선생님 -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이 예수를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대문이다. 사실 이 관원이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며 '생명의 떡'(요 6:48)이자 '생명수'(요 7:38)이시다.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기도 했다(10:25). 이 말은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질문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그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다만 선행의 결과인 줄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아마 그는 정성을 다해 그 율법의 세부 규례들을 열심히 따랐으나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으며 이처럼 도덕적 행위나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었던 그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는 영생에 이르게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하고서 그 앞에 나아왔던 것이다. 여기서 '영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관원이 요구한 생명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죽음에 의해 차단이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요 3:3-15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성 경: [눅18:19]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말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있는 자로 여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문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하여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느냐는 약간의 비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Plummer). 아무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선의 기준을 훨씬 높이심. 이 관원이 예수를 '선하다'고 부르며 접근한 데에는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이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다(대상 16:34;대하 5:13;시 106:1;118:1,29). (2)당신의 신성을 증거하고자 하심. 이 관원이 예수를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는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는 탁월한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 경: [눅18:20]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계명을 아나니 - '알다'의 뜻으로 번역된 동사 '오이다'(*)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지키다', '따르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권고가 된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율법 준수를 거론하셨는데 이는 율법 준수에 대해 내심으로 자신 만만해하는 이 관원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을'(롬 3:20:갈 3:24)뿐이다. 이 사실은 마 5:17-48에 언급된, 율법 준수에 관한 새롭고도 차원높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관원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문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 간음하지 말라...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여기서 거론된 계명은 제5계명 부터 제9계명까지 언급되었다(롬 13:9;약 2:11). 십계명에 있어서 전반부 곧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규정이라고 한다면 5계명부터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여기 인용된 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계명인 바,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는 무관심한 당시 종교인들의 냉혈성을 지적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言語道斷)인 것이다(요일 4:20). 사실 당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의 대신(對神) 관계 또한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전 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성 경: [눅18:21]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어려서부터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 라고 해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소년 시절부터'를 가리킨다.

⭕ 다 지키었나이다 -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데 인간의 어려움이 있다. 예수께서는 가장 쉽게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 계명을 몇가지 인용하셨다. 그 관원은 자신의 행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며 회심전의 바울처럼(빌 3:6) 율법을 다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만 문자적으로만 지켜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원은 자신의 율법 준수의 헛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러한 율법 준수로도 영생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성 경: [눅18:22]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한 가지 부족한 것 - '헨 소이 레이페이'(*)의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관원의 생각을 그의 재산 문제로 돌리게 함으로써, 이제 열번째 계명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바울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관원의 경우 마지막 계명 하나를 어김으로써 첫번째 계명과 두번째 계명들을 어긴 결과가 된 것이다.

⭕ 네게 있는 것을...나눠 주라 -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명령은 그 관원의 자만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에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그는 기껏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마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인양 자부했는지 모르나, 예수는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헌신을 명하셨다. 특히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던 관계로 이 말씀은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마음 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의로심을 다 버릴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또한 본문의 이 명령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14:33의 말씀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 관원의 경우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데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원리라기 보다는 예수께서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의 탐심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려는 특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Liefeld). 결국 이 말씀은 단순한 청빈(淸貧)의 명령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였다(12:33).

⭕ 나를 좇으라 - 영생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관원이 자기의 모든 재물을 풀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예수를 좇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족한 것이 된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침을 준수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눅18:23]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 관원의 근심]

⭕ 심히 근심하더라 - 이 관원의 심각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명하신다. 이러한 양자 택일은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관원의 교만하고 안일한 내면 세계를 꿰뚫어 보신 예수의 영적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관원이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예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간구했다면, 이렇듯 극단적인 양자 택일의 도전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관원의 마음 속에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은 그의 마음이 영생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성 경: [눅18:24]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어떻게 어려운지(*, 포스 뒤스콜로스) - 이 말은 '얼마나 어려운지'가 보다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나아가 그일이 본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성경은 부자가 영생을 얻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힘든 이유는 (1)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함으로(시 52:1-6;잠 18:11;딤전 6:17), (2)부의축적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압제함으로(잠 18:23;렘 22:13-19;딤전 6:17-19;요일 3:17), (3)치부하고자 하는 탐심 때문에(12:15-21;16:13-31)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재물 뿐만이 아니라 천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맡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성 경: [눅18:25]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절에서 '낙타'와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로스'(*)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마 19:23;막 10:23).

성 경: [눅18:26]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도 '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다. 예수와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욥 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18:27]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는 부자 관원과 나누신 대화의 결론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따라서 예수는 관원이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관원이 설령 예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성 경: [눅18:28]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예수의 대답(27절)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관원이 하지 못한 그 일을 자신들은 해왔다고 하는 정열절 고백과 확인 요구의 말씀을 한다. 마 19:27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 말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란 말을 덧붙인다. 부자 관원과는 틀리다고 하는 자부심을 은근히 비춰주는 베드로의 말은 처음 그가 예수를 만나 따라 나설 때의 극적인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마 4:20).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예수의 공생애 당시만 하더라도 메시야관이나 천국관에 있어 많은 오해를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 나약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은 시행 착오를 무수히 겪어야 했던 것이다(막 14:66-72). 본절의 경우는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과시욕과 예수의 말씀에 담긴 속 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아둔함을 드러내 보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22절).

성 경: [눅18:29]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 마 19:29에 의하면 '내 이름을 위하여'이며 막 10:29에 의하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이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됨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계신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다.

⭕ 집이나...자녀를 버린자는 - 누가가 포기의 대상(물건, 사람)으로 삼은 것은 마가가 명시한 것과 다르다.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전토'(田土)를 생략하고 그 대신 '아내'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버려야 할 대상을 주로 인간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Marshall).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좇기위해 그들의 가정과 직업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금생과 내생에서 충분히 넘치도록 다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한 사람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게서 금생과 내생에서 그 자신과 안전된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가족의 친성(親性)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의 사랑을 얻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데 수반되는 희생 대가를 지불했다. 아울러 예수께서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보상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을 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가피한 포기나 헌신은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서가 아니라 구원에의 확신에 따른 자발적 순종의 표시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 경: [눅18:30]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영생에 관한 교훈]

⭕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 누가와 마태는 단지 '여러 배'(many times, NIV)를 받는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백 배'라고 하여 최상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마 19:29;막 10:30). 또한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복을 시사하지만, 누가는 현세의 보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다. 본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단지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상의 기준을 삼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면 성도들이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면 단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 장자가 되어도 불만과 번민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누림의 질에 있는 것이지 그 양에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는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고후 6:10).

성 경: [눅18:31]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세번째 수난 예고]

⭕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갈릴리를 출발하여 베뢰아를 통과하는 긴 여행은 이제 거의 목적지에 도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임박한 고난이 언급되어 있는 9:31부터 줄곧 이 예루살렘은 주께서 올라가시기로 계획하신 목적지요 또한 그의 인류 구원의 사역이 완성될 곳으로 거듭 암시되어 있다(9:51;13:22;17:11;18:31). 순례자들이 큰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갈 때에, 예배하기 위해 양이나 비둘기 등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가 듯이, 예수는 자신을 '세상 죄'를 대속할 제물로 바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사 53:10;요 1:29).

⭕ 선지자들로...응하리라 - 이 표현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며, 누가복음에는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선지자들로'로 번역된 '디아 톤 프로페톤'(*)은 선지자들이 예언선포의 주체자들이 아니라 대리자, 대언자임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성경의 성취사상'은 평행 구절인 마 20:18과 막 10:33에는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예수의 고난과 관련된 구약의 예언을 몇가지 예로 들어보면, 시 9:19;22:15;사 53:9;슥 12:10 등이다.

성 경: [눅18:32]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세번째 수난 예고]

⭕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 이 예언에서 누가는 맨 먼저 이방인들을 예수의 형(刑) 집행인으로 언급한다. 23장 내용을 보면 예수 무죄 방면을 위한 빌라도의 갖가지 노력들이 타복음서에 비해 밀도있게 기록되었음이 사실이다. 이렇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방인의 책임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함을 밝힌다.

⭕ 희롱, 능욕, 침 뱉음 - 이는 예수의 고난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23:11,36;마 27:30). 예수의 자의식 속에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더불어 십자가 수난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기를 보류하셨다. 이제 공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와 옴에 따라 이렇듯 구체적인 부분까지 언급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수난을 대속의 개념과 연결시켜 실로 적절하게 예언한 바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성 경: [눅18:33]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세번째 수난 예고]

⭕ 죽일 것이니...살아나리라 - 본 구절은 32절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골격을 이룬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은 성경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박해받는 교회에 평안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들의 삶의 상처를 치유하신다는 확신을 갖게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일 것이니'라고 하는 말 가운데서 우리는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예수께서 그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수난과 더불어 부활이 함께 예고된 사실 또한 중요한 의미를 전해준다. 부활이 없는 갈보리는 패배에 불과하며 반면 갈보리없는 부활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지 못한 부분적인 사랑만을 들려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진수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성 경: [눅18:34]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세번째 수난 예고]

⭕ 하나도...알지 못하였더라 - 예수께서 그의 수난과 죽음을 거듭 이야기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데 대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메시야에 관련된 그들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자신들이 메시야로 여기던 예수께서 그토록 비참한 수난을 당하리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2)그리스도의 수난은 일시적이나마 당시 제자들에게 숨겨졌던 사항이며 현재에 이르러 썩어질 구습을 좇는 모든 자들에게도 여전히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성 경: [눅18:35]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여리고(Jericho)는 요단강 서쪽 약 8km, 예루살렘 북동쪽 약 24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으로서 여호수아의 지휘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칼 한번 쓰지 않고 함락시킨 성읍이다(수 6장). 그런데 예수 당시에 이 성읍은 신.구 여리고로 나뉘어져 구(舊)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헤롯 대왕에 의해 신(新)여리고가 건설되었다. 헤롯대왕의 정책에 따라 신여리고가 나날이 발전함으로 구여리고는 계속 퇴락해가 예수 당시에 구여리고는 거의 황폐화되었다. 신여리고의 발전은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할 만큼 소문이 나 있었다. 어쨌든 여리고는 갈리리와의 연결로였으며 예루살렘의 관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은 곧 그의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 대해 평행 구절인 마 20:29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막 10:46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반되는 기록이 아니라 정확히 일치하는 기록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신.구 여리고 중 어느 한쪽에 먼저 들르셨다가 나오셔서 다른 한쪽으로 가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서 떠나시는 것을 기록했고, 누가는 예수께서 두 여리고 중 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 한 소경 - 마가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바디매오'이다. 그가 예수께 대해 보인 태도(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것)에 의하면 그는 분명히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으며 이미 그 마음에 예수의 메시야적인 능력에 대해 신뢰를 품고 있었던 것 같다.

⭕ 구걸하다가 - 당시 거지들은 종종 도시근처의 도로변을 따라서 구걸을 했다. 왜냐하면 도시의 도로변은 거지들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접촉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하였다(레 25:35-38). 따라서 거지들이 그들의 비참한 삶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나고픈 소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 소경 거지는 메시야에게서 그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부끄러움 없이 예수의 관심을 끄는 소리를 질러댔고 예수는 소경 거지에게 그의 믿음이 그를 보게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 믿음으로 부르짖는다면, 그는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성 경: [눅18:36]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무리의 지남을 듣고 - 예수께서는 수난당하실 장소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며 이 소경이 구걸을 하던 장소를 지나고 계셨다. 이미 예수의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여기 저기에서 몰려들었다. 그때 거지 소경은 사람이 몰려 웅성대는 것을 보고 궁금히 여기며 그 장소로 다가갔다. 그는 일단 사람이 많이 몰려 있으므로 구걸하기에 좋은 여건이 조성되어 많은 구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 경: [눅18:37]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예수께서 지나신다 - 이 말은 구원의 기회가 마냥 인생을 기다리고 잇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 있을 때에 열의를 다해 그분 앞에 나아가야 된다는 긴박한 뜻을 먼저 암시하는 표현이다. 만일 소경 거지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묵묵히 동냥이나 하며 앉아 잇었다면 그는 그토록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성 경: [눅18:38]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마 9:27;12:23;15:22;21:9).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사 11:1). 그런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6:2;25:16;31:9;51:1;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성 경: [눅18:39]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더욱 심히 소리 질러 - '소리지르다'의 뜻인 헬라어 '크라조'(*)는 본래 까마귀의 우는 소리에서 만들어진 의성어에서 유래한 말로,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들의 외침 소리와 같이 '악쓰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처럼 예수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된 그 소경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하는 구절이다.

성 경: [눅18:40]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예수께서...데려오라 - 아이러니칼(ironical)하게도 예수께서는 며칠 후에 빌라도를 통해서 본 구절에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듣는다(요 18:31). 압제자 빌라도 앞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서신 장면은 본장면과 잘 대비된다. 본문에서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의 모습을 갖고 우리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영접을 받으며 왕도(王都) 예루살렘에 입성한다(19:36-40). 아울러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행차하시는 가운데서 불쌍한 소경 거지를 보신 예수는 진실로 위엄있는 왕의 권위로 거지에게 거룩한 능력의 보화를 내리셨다. 반면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철저한 종의 형상으로, 또는 제단에 드려질 희생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공생애의 마지막, 이제 죽음의 장소를 향해 가시는 도중에서 다윗의 자손이며 왕이신 예수께서 거지 소경을 만난 사건은 실로 큰 의미가 있다.

성 경: [눅18:41]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네게 무엇을...원하느냐 - 그 소경이 원하는 바란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질문은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경의 믿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또는 고백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하신것이다. 예수께서는 병자든 죄인이든 항상 이러한 식의 질문을 하신 연후에 그 질문의 대답대로 이루어 주시곤 했다. 이는 병자, 죄인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깊은 배려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들이 자신들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거지 소경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얼마간의 적선 행위가 아니라 눈을 치유받는 일이었으며 나아가서는 영혼의 눈을 뜨는 일이었던 것이다.

성 경: [눅18:42]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네가 온전하게 되엇다'고 하는 의미인(Robertson) 이 말씀은 그 소경이 육체적인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 곧 메시야를 만나 죄의 구속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역사가 바로 소경 자신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의 기적 행위를 있게 하는 보조 역할로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7:50;8:48;17:19;마 9:22;막 5:34)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성 경: [눅18:43]

주제1: [기도와 영생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거지 소경을 고치심]

⭕ 예수를 좇으니 -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이 단순히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뒤를 좇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봄이 무난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주를 따르기로 했으며,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된 것 같다.

⭕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 평행 본문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소경이었던 본인과 그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잇는데 치유 기적 다음에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는 이러한 송영은 누가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5:26;17:18;행 2:47;3:9). 하나님께는 찬양을 돌리고 그리스도 예수에게는 큰 신뢰를 나타내 보이게 된 그들의 태도는 예루살렘 성전 안의 종교 당국자들, 교권주의자들의 태도와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다.

성 경: [눅19:1]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이 구절은 새로이 시작되는 삭개오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소경 치유 기사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즉 여리고에 '이르러' 생긴 사건(18:35)에 곧이어 여리고 안에서 새로운 사건이 전개됨을 보여준다. 누가는 '지나가다'(*, 디에르코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루살렘을 향한, 다시 말해서 고난을 향한 예수의 굳은 의지를 보다 확연히 드러내고자 한 듯하다. 한편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건을 다루는 본기사의 시간적 배경은 수난주간 전 목요일 쯤으로 짐작된다.

성 경: [눅19:2]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삭개오(*, 재카이오스) - 이 이름은 전통적 유대인의 이름으로서 본래의 뜻은 '청결한 사람' 또는 '의로운 사람'이다. 누가의 소개에 따르면 삭개오는 세리장(稅吏長)의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다. 세리장이란 곧 세관장을 의미하는데 여기고는 베레아 지방으로 부터 요단강을 건너가는 통상인들의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었을 것이고 그 세관에서는 주로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유입되는 향유 등 여러 상품에 대해 통관세를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은 발삼나무의 산지였기 때문에 특산물에 대한 세금까지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삭개오는 이 세관의 우두머리로서 세금 징수를 지휘했던 인물로 보인다. 당시 세리장은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의도에 다라 자율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할 수 있었고, 자기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누가는 삭개오를 소개할 때에 '부자'라는 말을 첨가시킨다. 이는 당시 세리에게도 '허가낸 도둑'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하물며 세리장이 받고 있는 원성은 더 높았을 것이고 또 그가 누리는 '부'의 원천이 부당한 착취에 있음을 암시한다. 삭개오에 대한 이와 같은 배경은 그의 직책이 관료라는 점과, 부자라는 점과 함께 18:18-30의 이야기 즉 부자의 구원에 대한 질문과 연결되고 있다(Danker). 그리고 당시 세리들이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삭개오의 구원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의 은혜를 확연히 드러낸다.

성 경: [눅19:3]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아마 호기심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삭개오도 이미 예수께 관한 소문을 못들었을리 없고 특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일어났던 소경 치유 기적과 그를 따르는 군중(18:35-43)에 대해서 듣고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확인하고, 또 만나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많아서 앞을 가려 예수가 보이지 않았고 둘째는 설상 가상으로 키가 작아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일행이 걸어갈 때 그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둘러싸고 함께 걸어가고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삭개오의 호기심은 더욱 고조되어 예수를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 여기서 나타난 장면 묘사에서 상징적인 두 가지 의미를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를 만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외적 요인 즉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방해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예수를 만나려고 모여든 무리가 예수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볼래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도 먼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이기심 때문에 새롭게 교회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문을 막고 있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예수를 가로막아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암시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내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카가 작은 점이다. 키가 작다는 말은 볼 수 있는 위치에 못미친다는 말인데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영적 결핍에 있다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기적 교만, 세상적 욕심, 진리에 대한 경멸심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이 두가지의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선결 과제(先決課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성 경: [눅19:4]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앞으로 달려가 - '앞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프로스텐'(*)은 본래 장소를 나타내는 부사였다. 여기서는 전치사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어디를 향해 앞으로 달려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문맥상 뽕나무를 향한 것이었고 예수의 일행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앞질러가 기다리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된 삭개오의 한계 즉 예수를 만날 수 없게 하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을 극복하려는 삭개오의 의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에게 관계된 외.내적 한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향해 달려가는 용기가 참다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 뽕나무 - 이는 단순한 뽕나무(*, 모론)가 아니라 무화과를 의미하는 '쉬케'(*)와 합성된 '쉬코모레아'(*)라는 뽕나무이다. 따라서 17:6에서 언급되는 뽕나무(*, 쉬카미노스)와는 다른 나무이다. 이 뽕나무는 '애굽 무화과' 또는 '무화과 뽕나무'라고도 불리워지며, 열매는 무화과이고 잎은 뽕잎인 나무로서 요단강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이 나무는 그 가지가 넓게 퍼지고 아래로 늘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이 뽕나무 위로 올라가게 됨으로써 예수를 만나기 위해 자기의 한계성(限界性)을 극복해 내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성 경: [눅19:5]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우러러 보시고 - 헬라어 '아나블레포'(*)는 '위'(up)라는 전치사 '아나'(*)와 '보다'의 동사 '블레포'(*)가 합성된 복합어로서 '쳐다 본다'(look up)는 뜻이다. 예수는 뽕나무에 앉아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셨다.

⭕ 삭개오야 - 뽕나무 위에 올라 앉아있는 삭개오에게 예수는 직접 이름을 부르셨다. 예수가 신적 전지성에 의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 수도 있고 혹은 삭개오의 이름이 이미 여리고 땅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무리들 중에서 삭개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본문에서 누가의 관심은 에수의 초자연적 능력보다는 예수가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른 사실 자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겠다.

⭕ 내려오라...유하여야 하겠다 - 예수의 인격적 초대는 단순한 부름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의 집에 함께 머무르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이야기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의 한계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사실 호기심이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만남은 예수가 인격적으로 삭개오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제안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특히 '...해야 하겠다'는 표현은 신적 필연성(必然性)을 강조함과 아울러 예수의 주권적 의지를 뚜렷이 드러내준다(4:43).

성 경: [눅19:6]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급히 내려와...영접하거늘 - 예수의 인격적 초청에 대한 삭개오의 응답은 전격적인 것이었다. 즉 '급히 내려와'라는 단어와 '즐거워하며'라는 단어, 그리고 '영접하거늘'이라는 단어는 예수의 제안을 더할나위 없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는 매우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의 인격적 부르심과 삭개오의 전격적인 영접은 구원의 눈부신 접촉점이 되고 있다. 이같이 누구에게든 향하고 있는 예수의 초청을(요 6:35;7:37)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고 영접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삭개오가 이같이 기쁜 마음으로 승낙한 것은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명성에 대한 권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또 삭개오는 평소에 자신의 세리장이라는 직책과 정당하지 못한 세금 징수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소외된 아픈 심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한 자책감으로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름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어둠 속에 비추어지는 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그 명성 높으신 예수가 초청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고 또 자신을 초청했다는 사실은 7절에 언급된 바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지옥같은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생생한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5절에서 언급한 '오늘'은 구원의 즉각성(卽刻性)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단어는 '급히 내려와'라는 말과 맛물려 구원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성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또 9절에서 다시 '오늘'이라는 말이 언급되어 구원의 즉각성을 재삼 강조한다.

성 경: [눅19:7]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으므로 예수의 행위는 당연히 문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죄인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식사한다는 사실은 죄인의 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5:29,30). 한편 이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가지 악한 본성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 묻은 티를 흉보는 비판 심리이다(마 7:3).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근거한 교만과 자기의를 과시하는 형식주의로 인해 타인을 비판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둘째는 타인의 잘됨을 시기하는 심리이다. 본문의 '뭇 사람'은 죄인에 불과한 세리장이 예수의 관심과 호의를 받게 되자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같다.

성 경: [눅19:8]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서서 주께 여짜오되 - 앞절의 내용으로 보아 삭개오가 말하고 있는 장소는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것이다. 아마 식탁이나 탁자 주위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일어서서 말하는 행위는 말하는 사람의 진지함과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엄숙성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 주여 보시옵소서 - 이미 삭개오는 예수께 대한 호칭을 신앙적인 의미의 '주'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또 삭개오는 '보시옵소서'(*, 이두)라는 말로서 자신의 의지의 단호함과 실천 가능성에 있어서 자신 만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같은 말은 6절에서 언급된 바 있는 그의 기쁨과 결부되어 나오는 즐거운 선언임을 느낄 수 있다. 즉 강요에 의한 타율적 선언이 아니라 기쁨에 의한 자율적(自律的) 결단인 것이다.

⭕ 내 소유의 절반을...주겠사오며 - 삭개오는 당시 랍비들에 의해 제시된 구제비 곧 소유 혹은 수입의 20%보다 훨씬 많은 파격적 액수를 제시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태도는, 영생을 사모하여 예수께로 나아왔으면서도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하여 집으로 돌아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적이다(18:18-23).

⭕ 만일 뉘 것을...사 배나 갚겠나이다 - 여기서 '만일'로 시작되는 가정문은 삭개오가 부당하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취한 사실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정문을 이끌고 있는 '에이'(*)라는 단어를 '...하는 무엇이든지'라는 의미의 관계 접속사(everythint that...)로 해석하여 '토색한 것은 무엇이나'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에이'는 '멘'(*)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어 '확실히' 또는 '틀림 없이'라는 뜻으로 서약문에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삭개오의 진술은 자신이 부당하게 취한 모든 것은 본래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이나 돌려준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삭개오는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에게 본래의 것의 4배를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으로 취한 것을 돌려 줄때에는 1/5을 덧붙여 상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레 6:5;민 5:7). 또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은 4배로 갚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출 22:1;삼하 12:6). 따라서 삭개오의 이같은 선언은 당시 율법이 정하는 도적질에 상당하는 배상을 하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삭개오 자신이 그같은 정도의 죄를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이같은 삭개오의 파격적(破格的)인 행위는 자기 중심적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이 방향을 바꾸는 전격적인 회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회개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참회나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실천적 행동을 동반해야 한다. 회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13:1-9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눅19:9]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삭개오의 선언에 대한 예수의 응답 역시 즉각적인 것이었다. 즉 구원이 오늘 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죄인에게 구원을 선언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실로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선언은 삭개오의 헌신적 자아 부인의 선언에 따른 직접적 결과임에 분명하다. 구원은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자아 부인의 실천적 결단을 통해 경험되는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배타적인 대접을 받아온 삭개오를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게 한 형제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삭개오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삭개오야말로 참된 믿음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당시 종교적 복권은 곧 정치.사회적 복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전인적 인간 구원을 의미한다.

성 경: [눅19:10]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수를 영접한 삭개오]

⭕ 인자의 온 것은...구원하려 함이니라 - 삭개오에 대한 구원 선언 후 그 선언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즉 이미 앞절의 주석에서 밝힌 바 있듯이 잃어버린 자에 대한 구원이란 소외되고 비뚤어진 인간을 다시 공동체로 복귀시켜 당당하고 품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말은 온갖 죄악과 허물로 말미암아 혼돈과 파멸에로 향하는 인간들을 구해내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로 인도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같은 선언은 사실 에수의 전체적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 삶이 불가능한 귀신들린자(마 17:18), 문둥병자(17:14), 벙어리,귀머거리(막 9:25), 소경(막 8:23) 등과 같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며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고 공동체로 복귀시키는 모든 행위는 땅위의 평화(平和)를 위한 사랑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사람다와질 수 있도록 하는 예수의 구원 행위는 오늘의 기독교가 우선적으로 따라야 할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선언이 이미 5:31,32에서 언급되었는데 결국 삭개오는 이와 같은 선언의 실천적 모델(model)이 된 셈이다.

성 경: [눅19:11]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 여기서 '저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전후 문맥상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던 예수의 일행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며 장소도 역시 삭개오의 집 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삭개오에 대한 파격적 구원 선언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시키고자 하는 의지 천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는 새로운 비유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시작되는 열 므나의 비유는 달란트의 비유(마 25:14-46)와 비슷한 내용이나, 주제에 있어 차이가 있다. 즉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들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는데 강조점이 있는 반면, 본비유의 강조점은 당시 무리들의 그릇된 천국관과 그릇된 메시야관을 지적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 비유를 말하게 된 이유로 누가는 청중들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 도래에 대한 관심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목전(目前)에 다가온 사실을 들고 있다. 따라서 비유의 초점은 종말적 사건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된 예수의 선언, 즉 '오늘 이 집에 구원일 이르렀다'는 말을 열 므나의 비유에 나타난 심판의 엄격성과 대조시켜 구원에 이르기 위한 실천적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 이 비유를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베풀었다는 점에서 장차 당할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부활과 재림과 연결지어 말함으로써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인내할 수 있도록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의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역시 비유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종말적 관심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의 언급처럼 예수께서 비유를 베푸시게 된 배경이 곧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금방 도래하는 것인줄 생각했기 때문이라면, 예수는 종말적 심판의 때가 당장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려 하신 것이다. 즉 비유의 내용상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로부터 예수의 재림까지는 상당한 간격이 있음을 예시하고 있는데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은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에의 길로 접어드는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눅19:12]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어떤 귀인이 - 여기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달란트 비유(마 25:14-46)에 나오는 '어떤 사람'과는 달리 '귀인'이라고 언급되는데 '귀인'(*, 유게네스)은 '가문이 좋은 사람' 또는 '마음이 고상하고 귀한 사람'을 뜻하며 비유적으로 예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 이와같은 배경 설정은 당시에 널리 알려진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Archelaus)가 아버지의 왕권을 물려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던 이야기와 비슷하다(Josephus). 즉 헤롯 대왕은 죽기에 앞서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인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에게 분할해 주었는데 이러한 일은 로마 정부의 공식적 승인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유대 지방을 분할받은 아켈라오는 로마 황제의 인준(認准)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한편 유대인들은 아켈라오를 매우 혐오했던 터라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보내었으나 아켈라오의 왕위 취득을 저지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같은 사건이 예수 탄생 직후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예수 자신 뿐만 아니라 누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들어 이 비유가 그 정치 야사에서 따온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열 므나의 비유가 어디까지나 비유인 만큼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였든 간에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본비유의 강조점 곧 당시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의 잘못된 기대에 대한 예수의 교정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첫째, 귀인을 예수로 비유했을 때 왕위를 받으러 간다는 말은 재림할 때 세상의 심판주로 오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예수는 종말적 심판자나 통치자가 아님을 암시하며 이는 11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의 생각 즉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리라는 기대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 된다. 둘째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갔다고 했는데 이 말은 왕위를 받고 돌아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所要)됨을 암시한다. 이는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적 경과가 있음을 가리킨다.

성 경: [눅19:13]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 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유였으리라 짐작된다.

성 경: [눅19:14]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고 핍박한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특히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외식 행위를 비난하고 그 기득권을 위협하는 예수를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로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추종했던 유대 군중들도 유대 민족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소망이 사라지게 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던 것이다(마 27:20,21).

성 경: [눅19:15]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와서 맨 먼저 한 일은 떠날 때 종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돈으로 어떻게 장사를 했는지 종을 불러모아 확인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장사한'이라는 말은 13절에서 언급된 '장사하다'라는 말 즉 '프라그마튜오마이'(*)에 전치사로 쓰이는 '디아'(*)를 접두어로 붙여 '디에프라그마튜산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디아'는 '두루 두루 통하여'(through)의 뜻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장사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한 내용 전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유에 담긴 종말론적 의미는,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사람들이 일평생 행한 바 선악간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날에는 은밀히 지은 모든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며(전 12:14), 반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베푼 자비로운 행위들이 크게 보상받게 될 것이다(마 6:3,4). 특히 받은 바 은사를 잘 활용하여 맡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수여될 것이다(약 1:12).

성 경: [눅19:16]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주의 한 므나'라는 점이다. 즉 주인이 떠날 때 주었던 그 돈은 자기의 돈이 아니라 주인의 돈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고백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응당 취해야 할 자세를 함축한 '청지기'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경제적 도구들은 물론이고 주어진 시간과 재능, 건강 그리고 심지어는 생명마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남겼다'는 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대의 노력으로 창조적이며 생산적으로 살아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윤을 남긴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장사 내용, 즉 삶의 과정(過程)이다.

성 경: [눅19:17]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 달란트 비유에서의 마태의 묘사와 비슷하다(마 25:21). 즉 마태와 누가가 소개하는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과 보상을 공통되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작은 것'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미크로스'(*)의 최상급인 '엘라키스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종에게 맡겨진 한 므나가 '지극히 작은 것'(very small, smallest)임을 강조한다.

⭕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 달란트 비유에서는 더 많은 것을 맡긴다고만 했기 때문에 무엇을 많이 맡기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누가는 구체적으로 밝힌다. 본절에 내포된 교훈은 다음 두 가지이다. (1)하나님나라에서 누리는 축복은 성도들이 기울인 모든 노력을 합한 것보다 월등하게 많다. 열 므나와 열 고을을 비교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또한 이 종이 한 일은 주인의 지시를 받은 한 '종'으로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충성에 따른 축복은 열 고을을 '다스리는' 당당한 '권세가'의 신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온갖 수고와 충성을 다한 성도는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하는 위대한 권세를 소유케 될 것이다(계 22:5). (2)심은대로 거둔다는 법칙이다(고후 9:6). 열 므나 남긴 자에게는 아홉 고을이나 열한 고을도 아닌 꼭 열 고을이 주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없는 큰 축복임에 분명하지만, 천국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사람 중에는 본문의 종처럼 칭찬과 상급을 받는 영예로운 자가 있는가 하면 불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처럼 부끄러운 처지의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고전 3:15).

성 경: [눅19:18,19]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 이는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는 칭찬과 보상인데 역시 남긴 만큼 즉 다섯 므나를 남겼기 때문에 다섯 고을을 맡기게 된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돈을 맡길 때 능력별로 맡기고 보상은 일괄 적으로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한 반면 여기서는 일괄적으로 한 므나씩 맡기고 보상할 때에는 능력급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누가는 보상과 실천적 과정에서 쏟은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이 비유의 독특한 점은 '장사하다'는 말과 남긴 업적에 비례(比例)하여 보상을 베푸는 방법에서도 알수 있듯이 매우 상업적 성격이 짙은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 상업 관계를 사용하여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하고 이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배려로 보여진다.

성 경: [눅19:20]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주의 한 므나...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 열 명의 종 중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하면서 마지막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열 명의 종을 다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 비유가 세 가지 형태의 종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 것이기 때문이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종들은 이 세가지 종류의 표본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세 사람의 종이 공통되게 고백하고 있는 말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한 므나'가 주의 것이라는 청지기적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돈을 수건에 싸두고 보관만 했지 장사는 하지 않았다. 한편 달란트 비유에서는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수건에 싸서 돈을 보관한 것으로 묘사된다. 땅에 묻어서 돈을 보관하는 방법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Jeremias)수건에 돈을 싸서 보관하는 방법도 랍비 문서에서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 돈을 보관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성 경: [눅19:21]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이는...거두나이다 - 변명은 그의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주인에 대한 오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스스로 느낀 인상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중대한 실책을 범했다. 그의 곡해(曲解)사실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그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단정했다. '엄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우스테로스'(*)는 엄격하고 날카롭다는 뜻이다. 이 세번째 사람은 주인을 이렇듯 까다롭고 무서운 사람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주인의 일을 방관하는 입장에 서려 했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 경우에 당할 주인의 호된 책망이 두려워 아예 일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의 두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이 주인은 무작정 화를 내는 자가 아니라 공의를 소중히 여기며, 종이 기울인 노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풍성한 상급을 주시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다. (2)그는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두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것은 노력없는 대가를 요구하고 투자 이상의 것을 얻으려는 착취자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는 고리대금업자를 가리키는 말로 볼 수도 있다(마 25:24 주석 참조). 그리고 심지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이란 농경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악질적(惡質的)인 지주 계급을 묘사한다. 이는 이 종이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즉 그는 주인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오해하고 장사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자신이 땀흘려 일해서 남겨 봤자 주인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서 장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종은 얄팍한 이해타산에 눈이 어두워 더 큰 것을 놓치고 만 셈이다. 결국 그는 주인이 준 한 므나를 주인의 것으로 알면서도 청지기직의 참된 의미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며 주인의 번영이 곧 자기의 성공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성 경: [눅19:22]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 17절의 '착한 종'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종'이라는 말로 저주섞인 응답을 하고 있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네로스'(*)의 원뜻은 '병든'으로서 죄에 오염되어 영적 중태(重態)에 처한 인생의 참경을 암시한다. 한편 이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와 비슷한 반응인데 누가는 독특하게 종이 주인에 대해 진술했던 그 말로 판단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종이 이렇듯 심판에 처하게 된 근본 원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인의 성품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 혹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느냐'고 하는 문제는 인생의 결말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마 16:15,16).

성 경: [눅19:23]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그러면...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 종의 잘못된 변명에 대해 상식선에서 반박하고 있는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는, 은행에라도 맡겨두어 주인이 돌아왔을 때 원리금(元利金)을 찾을 수 있게 했었어야 했다는 뜻이다. 둘째로는 무노동으로 이윤을 얻으려 했다면 은행에 맡겨두고 이자를 취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실속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되물으면서 돈을 종에게 맡긴 것은 단순한 자기 이윤 추구의 목적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마 25:27 주석 참조). 다시 말해서 돈을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 경: [눅19:24]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곁에 섰는 자들 -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미 열명의 종들이 와 있었을 것은 틀림없지만(15절) 같은 종에게 돈을 빼앗으라고 명령할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아마도 열명의 종들 이외에 주인의 심복 또는 하인에게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주인은 이미 왕위를 받은 상당한 권력자였고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심복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 이 말에 함축된 의미는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경우 이미 열 므나를 갖고 있고 열 도시의 통치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한 므나를 준다는 것은 걸맞지 않기 대문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초점은 한 므나를 빼앗긴 자에게로 모아지는데, 장사하여 남기지 않는 자 즉 받은 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지 않고 고의로 사장(私藏)시켜 버리는 자는 있는 것마저도 모두 빼앗겨 살 가치 조차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다. 그 구체적 대답이 26,27에서 언급되고 있다. 한편, 이같은 원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기술을 배워 계속 활용하고 닦아가면 그 기술을 더 많은 곳에 사용할 수 있으나 그 기술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사용치 않으면 이미 획득한 기술마저도 녹슬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성 경: [눅19:25]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주인의 지시를 받은 자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달란트 비유에서는 없는 말인데 문맥상 어색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미 열 므나를 받은 자는 열 도시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는데 굳이 열 므나를 소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는 분명하다. 즉 '저희'는 상급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액수에만 집착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의 율법주의적 태도를 암시한다.

성 경: [눅19:26]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빼앗기리라 - 이는 격언구에 가까운 말이며 달란트 비유 외에 8:18;마 13:12;막 4:25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적 현상을 정당화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안된다. 이 비유가 경제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고 이 비유가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말적 심판에 도래하는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미 16,17절에서 보았듯이 본 이야기의 초점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 있고 심판의 대상은 전체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력히 주지시킨다.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이것은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일회성의 삶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매진해야 한다. 또한 본문은 천국에서 축복을 누릴 자의 삶은 이 땅에서도 표시가 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생명의 향기에서(고후 2:15), 성령으로 충만한 자의 구체적 삶 속에서 맺어지는 신령한 결실이다(엡 5:9;약 3:17,18).

성 경: [눅19:27]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열 므나의 비유]

⭕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 달란트 비유에서 마태는 그 종을 내어 쫓아 슬피 울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마 25:30) 여기서는 그같은 내용이 없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 대한 저주로 옮겨가고 있다. 새로운 저주의 대상은 14절에서 언급된 내용 즉 주인이 왕위를 받기위해 먼 나라로 떠났을 때에 그의 왕 즉위를 반대하여 밀사를 보냈던 사건과 관련된다. 이 주인은 그들을 가리켜 '원수들'이라고 지목하며 매우 단호하고 분노에 찬 감정을 표시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왕위 즉위에 대한 반대자는 반역자 또는 역적(逆賊)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사실 곧이어 언급되는 사형 선고는 그에 응당하는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거부하고 죄악된 옛 생활을 계속 고집하는 자 또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나기 전의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다(엡 2:3).

⭕ 내 앞에서 죽이라 - 이같은 단호한 선언에는 단순하게 개인의 왕위에 반대한 사실에 대한 앙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방해하는 세력의 종말을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다. 사실 이같은 이야기는 아켈라오가 왕위를 받고 돌아온 후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학살했던 사건과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 함축된 의미는 그 초점이 복수에 맞춰져 있다기 보다는 주인의 뜻을 바로 깨달아 어찌하든 작은 일에나마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한편 이같은 비유가 A.D. 70년에 디도(Titus) 장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에 대한 암시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지나친 추측에 불과하다.

성 경: [눅19:28]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이 말씀을 하시고...앞서서 가시더라 - 누가는 므나의 비유와 예루살렘 입성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고'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뒤이어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10:32에도 나온다. 이는 장군이 부대 앞에서 진두 지휘함으로써 부대의 사기를 높이듯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단호하게 걷는 장면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는 주께서 십자가 수난을 겪으시기에 앞서 맞이하신 마지막 한 주간의 생애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성 경: [눅19:29]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 - 감람원이라는 산은 '감람산' 또는 '올리브산'이라고 하는 에루살렘 교외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이 산은 남.북으로 약 4km의 길이가 되며 예루살렘보다 약간 높은 나즈막한 산이다. 이 산에 벳바게(*, 벳파게)라는 지명이 언급되는데 신.구약 성서 전체에 걸쳐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마 21:1;막 11:1). 탈무드에서는 이 곳이 감람산 서쪽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도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베다니(*, 베다니아)라는 지명과 함께 사용된 점으로 보아 베다니 근처, 혹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마을 이름인 것같다(Lightfoot, Godet). 한편 사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다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5km, 그리고 여리고로부터 약 24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현재는 '엘 라자리'(El Azariyeh) 혹은 '라자리에'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듯하다(요 11:1-44).

⭕ 제자 중 둘 - 본문에서 어느 제자를 보냈는지 알 길이 없으나 22:8에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점을 보아 역시 여기서도 베드로와 요한인 듯하다.

성 경: [눅19:30]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너희 맞은편 마을 - 29절의 언급 내용으로 보아 벱바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ruce).

⭕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 이같은 묘사는 슥 9:9의 예언의 성취라 볼 수 있다. 즉 예수는 기치창검(旗幟槍劒)의 군대를 거느린 무력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화평을 선포하는'(슥 9:10) 평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구하신 것은 제물에 바치는 정결한 짐승을 구별하는 종교적 의식법에 맞추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민 19:2;신 21:3;삼상 6:7). 따라서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종교적 신비감까지 느끼도록 함으로써 그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지시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주신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적 예지의 표현은 한층더 예루살렘 입성의 진지함을 증폭시켜 준다.

성 경: [눅19:31]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주가 쓰시겠다 하라 -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예수 자신을 지칭하는지 또는 나귀의 본래 주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지 분명하게 밝힐 길이 없다. 그러나 33절에 나귀의 주인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나귀의 주인은 아닌듯하다. 혹자는 미리 나귀 주인과 약속하여 나귀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나귀의 주인이 예수였다고 본다(Wycliffe). 그러나 그런 추측은 적절치 못하다. 현재 나귀를 사용할 사람이 예수라는 점에서 '주'를 예수 자신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무리가 없다. 따라서 단순히 나귀의 소유주라는 의미의 '주'보다는 신앙적 의미에서 '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눅 12:41 주제 강해 '주의 호칭과 예수' 참조). 이와 같은 이해는 30절에서 언급된 엄숙한 분위기와 잘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종교적 신비감(神秘感)을 읽을 수 있다.

성 경: [눅19:32]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예수가 예견하신 대로 나귀가 묶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귀를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것인지 또 멀리서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지시했던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 능력으로 된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중 예수의 신비적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묘사는 예지 능력 자체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기 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의 종교적 엄숙성 또는 예언 성취의 경이감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 21:4 주석 참조).

성 경: [눅19:33]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그 임자들이...푸느냐 - '임자들'이란 나귀 주인을 가리키는데 평행 본문 막 11:5에서는 '거기 섰던 사람 중 어떤 사람'이라고 다소 불명확하게 언급한다. 또한 그들이 묻는 물음도 누가는 남의 것을 왜 푸느냐는 식의 물음인데 반해 마가는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는가'하고 물음으로써 소유권에 대한 전제 없이 나귀새끼의 용도에 대해 묻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어쨌든 이야기의 전개는 예수께서 예견하신대로 되어갔다. 그리고 본절의 물음은 무슨 권위로 남의 짐승을 가져가느냐는 의미일 수도 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한 나귀를 끌고 가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성 경: [눅19:34]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고 - 이 말에 대해 나귀의 주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은 곧 주인들이 제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암시를 준다. 따라서 주인들이 이미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쨌든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초능력적 예지(豫知) 능력 또는 철저한 예언 성취 등을 알게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예루살렘 입성이 신적인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눅19:35]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 나귀 등에다 겉옷을 걸친 것은 안장 대신 사용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왕이나 귀인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존경의 표시로도 간주될 수 있다(왕하 9:13). 그리고 타복음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예수 스스로 나귀 위에 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태웠다고 묘사한다. 이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 또는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존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왕상 1:33).

성 경: [눅19:36]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겉옷을 나귀가 지나가는 길 위에 까는 행위는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이다(왕하 9:13). 여기서 '저희'는 제자들을 받는 말인데 마가와 마태는 많은 사람 또는 무리의 대부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 마가는 겉옷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도 길에 펼쳤다고 했고(마 21:8;막 11:8) 요한은 그것을 종려나무 가지라고 밝혔다(요 12:13). 또한 요한복음은 환영의 무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요 12:12,13,18) 공관복음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무리들은 대체로 갈릴리에서 부터 따라온 순례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계신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환호(歡呼)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를 정치적, 민족적 메시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성 경: [눅19:37]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이미 감람산에서...능한 일을 인하여 - 다른 복음서에 없는 자세한 장면 묘사이다. 이제 감람산 기슭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군중들은 이미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동행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여리고에서부터 동행한 사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벳바게와 베다니 사람들도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뭏든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며 찬양하는데 그 찬양은 예수의 모든 능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베다니를 오는 동안 나사로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요 12:17,18) 그외에도 예수의 허다한 권능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보고 들었음에 분명하다.

⭕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 이 구절 역시 누가의 독특한 묘사로서 깊은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즉 예수의 활동을 하나님의 활동과 일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그동안 행하셨던 치병 활동이나 모든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적인 활동 등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며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였다는 고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묘사는 예수가 군중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공개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 경: [눅19:38]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같은 구호는 시 118:26에서 따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왕이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를 왕으올 묘사하는 것은 이미 '므나의 비유'에서 예견되었거니와 여기서도 예수를 왕권적 권위를 지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편에서 사용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라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이지만, 메시야 예언과 관련된 경우에는 예수의 승리의 입성(入城)을 예표한 것이다.

⭕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 - 이 구절은 2:14에서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과 흡사한데 여기서는 땅에서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 평화라고 표현함으로써 어색한 느낌을 준다. 이 표현 역시 다른 복음서와 다른 독특한 표현이다. 즉 마태와 마가는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마 21:9;막 11:10) 누가는 호산나라는 말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본절의 뜻에 관해, 구원이 아직은 하늘에만 나타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W.Forester) 또는 사람을 위해 예비한 하늘의 평화라고 말하기도 한다(Easton, Plummer). 또 사람들에게 줄 평화가 예수께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J.H.Davies), 예수께서 왕으로 높여짐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임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J.H.Marshall). 이중 마샬(Marshall)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충하면 탄생 때에 천사들이 땅위의 평화를 노래했던 것처럼 이제 예수가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가져다준 평화가 곧 하늘의 평화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 경: [눅19:39]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사용한 '선생'(*, 디다스칼로스)이라는 호칭은 군중들이 외치는 '주'(*, 퀴리오스)와 대조되고 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한 요청은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여기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본다(7:36;11:37;13:31; 14:1). 즉 군중들의 환호는 흥분된 것이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고 이같은 메시야적 행진이 계속되었을 때 예수의 신변에 물리적 위협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흥분된 군중을 자제시켜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환호의 물결이 시위의 양상을 띰으로써 예루살렘에 주둔(駐屯)한 로마 군대와 부딪히게 될 상황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2)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이 호의적인 반응이라기 보다는 예수께 드린 찬양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서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찬양이 신성 모독의 소리로 들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전후 문맥상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나,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신성한 하나님의 역사를 무지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막으려 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마 16:21-23 주석 참조).

성 경: [눅19:40]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입성]

⭕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격언구 형태의 이 구절은 합 2:11에서 언급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묵살하는 것인데 첫째, 예수를 메시야로 환호하는 저들의 찬양이 정당함을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 반드시 그렇게 찬양되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 대한 메시야적 찬양은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제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계획하에 필히 이루어질 사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 찬양은 계속 선포되어야 할 내용이므로 응당 찬양해야 할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의미도 함축(含蓄)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메시야 찬양 때문에 물리적 위협이 닥쳐온다고 해도 계속 외쳐야 할 것이며 메시야의 행진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시사함으로써,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물리적 위협이나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주의 복음을 굽힘없이 선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 경: [눅19:41]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멸망 예언]

⭕ 성을 보시고 우시며 -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은 슬퍼하고 비통하여 우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성에 가까이 이르러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이 묘사는 누가만의 증언이다. 예수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복음서 중에서 여기와 요 11:35에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울었던 것, 모두 두번 나오는데 히 5:7에서도 예수가 통곡하여 울었다는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같은 묘사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이 있은 후에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그 울음의 의미를 더 의미심장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점에서 이 눈물은 예루살렘의 장래를 애통해하는 메시야적인 눈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울음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보면서 인류의 아픔을 보고 온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난까지도 생각하면서 우는 메시야적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 이유는 42:44절에서 언급되지만 당시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던 고난 즉 로마로부터의 압제와 억압, 그리고 자기 문화와 종교의 헬라화 또는 타락, 그럼에도 소수 특권 계급의 끊임없는 자기민족 착취와 지배 등은 실로 암담(暗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고난받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고난은 인류사적 맥락과 일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눈물은 자기 민족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당하고 있는 보편적 고난과 죄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19:42]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멸망 예언]

⭕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 이 말은 탄식조의 문장인데 예루살렘을 인격화하여 '너'라고 호칭하면서 외치는 소리이다. 즉 예루살렘을 너라고 부른 것은 예루살렘안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며,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각 민족간의 역사적 정황은 각각 다르지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고난과 죄성을 통칭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본 구절의 핵심은 '평화'이다. 이미 38절에서 '하늘에는 평화'라는 찬양이 있었고 예수의 탄생 때 천사들의 노래가 땅위의 평화를 선포한 바 있듯이(2:14) '평강의 왕이신' 예수의 활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바는 땅 위의 평화였다고 할 수 있다(사 9:6).

⭕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 그들은 평화의 길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길이 있는데도 자기 눈이 가리워져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암시를 준다. 다시 말하면 이 전에 수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해 평화의 길을 제공받았고 예수의 활동을 통해 하늘 나라의 길을 밝히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눈 안에서 그 길을 숨겨 버렸다는 것이다.

성 경: [눅19:43]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멸망 예언]

⭕ 날이 이를지라 - 여기서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는 복수 형태로서 5:35;17:22;21:6;23:29에서도 언급되는데 모두 종말의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종말적 심판의 때가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이 예언은 훗날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사면으로 가두고 -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예언이다. 즉 A.D. 70년에 디도(Titus)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위한 방책(防柵)을 둘러 쳤다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언급된 '토성'은 헬라어로 '카랖스'(*)로서 본래는 '말뚝'이라는 뜻이다. 즉 토성은 말뚝으로 친 공격용 방책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언과 역사적 사실이 일치된 이유 때문에 누가복음의 저자가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한 후 누가복음을 완성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러나 한편 예수가 직접 이 예언을 못했을리도 없다. 예수의 통찰력이라면 당시 그 도시가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방치될 때에는 그와같은 종말을 맞이하리라는 점을 불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성 경: [눅19:44]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예루살렘 멸망 예언]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 이 말은 성곽과 성전의 완전 파괴를 의미한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언급이 21:6에서도 나오는데 물론 성전을 상대로 한 말이다. 한 도시가 거주민의 완전한 파멸과 건물의 완전한 파괴로 더이상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그림을 보는 듯한 이 묘사는 전술하였듯이 단순히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지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같은 예언은 평화의 길을 걷지않고 주의 길을 거부(拒否)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도시와 민족의 최후를 말해주는 것이며 종말적 심판의 때에 이와같은 파멸을 당하게 되리라는 궁극적이고 우주적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이와 같은 완전 파멸을 맞게 되는 이유를 '권고의 날'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바, 권고의 날은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신때', 혹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 라는 뜻이다(AV, RSV, 공동번역).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호소했지만 그들이 믿지도, 듣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파멸이 오게 된다는 말이다.

성 경: [눅19:45]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성전 정화]

⭕ 성전에 들어가사 - 이야기가 많이 비약되고 있다. 즉 성 밖에서 갑자기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옴으로써 마가가 전하는 보다 세세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마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다시 성 밖으로 나와 머문 후 다시 들어가 성전 숙정 작업을 했다고 묘사하나(막 11:11-15) 누가는 이와 같은 행적을 생략하고 있다. 한편 본절과 다음절에 묘사된 성전 숙정사건은 요 2:13-22의 사건과는 별개의 것이며 마 21:12,13과 막 11:15-18만 평행되는 내용이다.

⭕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 누가는 성전 숙정 사건을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환전상이나 비둘기 파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나 예수께서 의자를 둘러 엎어 분노를 표시했다는 말도 없다. 그러나 당시 성전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방인 구역에서 상인들이 희생 제사를 위한 제물용 짐승이나 필요한 기름, 포도주 등을 팔았다. 그리고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세겔의 성전 세금을 유월절 때에 성전에 납부해야 했는데 이때 당시 통용되던 헬라, 로마 또는 수리아니 애굽의 화폐를 세겔로 바꾸어주는 환전상이 영업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영업을 허가해 준 종교 지도자와 상인이 야합(野合)하여 비싼 가격으로 짐승을 팔고 환전 수수료를 고액으로 받아내었다. 때문에 성전은 뇌물 수수의 장소, 장사꾼의 장터가 되고 말았다. 이같은 성전의 상황은 당시의 종교적 부패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같은 상황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성 경: [눅19:46]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성전 정화]

⭕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 사 56:7의 인용구이며 세 복음서 모두 이 말을 인용하고 있다. 기도한다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을 향한 가장 기본적 예배의식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성전이 기도처가 못된다는 말은 곧 성전의 종교성이 상실되었으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앞절의 상황 묘사처럼 더이상 성전이 아니라 부패의 온상이며 위선과 욕심의 투기장이 되고 장사꾼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렘 7:11의 인용구로서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인용하고 있다. 사실 성전이라 함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연결된 제정 일치의 사회에서는 나라 전체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온 민족의 정신적 지주요 종교적 핵심인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선언한 예수의 발언은 결국 정치 지도자를 포함하여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존(旣存)의 권위 체계를 깡그리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41절에서 예수가 비통해하며 울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종교의 타락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종교의 중심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구하는 길은 모두가 회개하여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 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과연 민족과 세계의 평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는지를 묻게 하는 충격적 말씀이다. 또한 예수처럼 살기로 고백하며 예수의 길을 가는 기독교인이 타락한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외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게 하는 말씀이다.

성 경: [눅19:47]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성전 정화]

⭕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 앞절에서 보여준 예수의 파격적 언행에 이어 예수는 성전 안에서 매일 가르침을 행했다고 묘사하는 바, 이는 예수의 호된 비난과 공격 대상이 성전 자체가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종교적 부패상(腐敗狀)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예수의 그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들이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성전 안에 가르침을 들으러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48절 주석 참조).

⭕ 대제사장...서기관...백성의 두목들이 - 예수를 제거시키려는 구체적 음모가 비로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 살해 결의의 결정적 원인은 성전에서 행한 예수의 언행이 자신들에 대한 치욕스러운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지만 대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의 언행과 민중들에 대한 예수의 영향력 때문에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5:21;6:2; 11:53,54;13:14). 여기서 언급되는 '백성의 두목들'이란 백성의 지도자라는 말인데 장로가 아니면 산헤드린(Sanhedrin)의 어느 한 분파일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19:48]

주제1: [인자의 예루살렘 입성]

주제2: [성전 정화]

⭕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 지도자들은 예수를 당장 제거시키고 싶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어떻게 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때가 유월절이 가까와져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의 활동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성전을 충만하게 채웠을 것이고 반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위기감에 쫓기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열심당(Zealots)의 활동을 두려워했던 그들은 지방으로부터 열심당원들이 유입되어 예수와 함께 민중 봉기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해서 사태의 긴박감을 절감하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집권자들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도 필사적으로 진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 대한 적대감이 정치적, 종교적 양 측면 모두에서 한껏 고조되어 바야흐로 촉발(觸發) 직전의 뇌관(雷管)과도 같은 상태에 있었다.

성 경: [눅20: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하루는 - 이는 19:47의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그 '날마다' 중 어느 날 하루 일어났던 사건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처음 성전에서 가르치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 이들은 유대의 종교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의 보전, 교수(teaching)및 종교 의식 집행, 성전 관리와 같은 모든 종교 문제와 관할권은 이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며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은 그들의 권위와 고유 권한을 침해한 행위로서 마땅히 그들로부터 이의를 제기받을 만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그들이 예수가 율법을 제정하신 입법자이자 성전의 실체인 메시야(히 9:11-28)이심을 바로 알았더라면 감히 그 같은 이의(異意)를 제기하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있던 이들 종교자들이 도리어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대적하였으니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함께 멸망당하고 마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19:41-44;21:5-28).

성 경: [눅20: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 두번째 질문은 그런 언행의 자격이 있다면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 그 여부를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산헤드린에서 예수에게 공적인 권한을 부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공격하는 질문이다.

성 경: [눅20: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신다. 이는 '대답하기 이전에 나도 한 마디 묻겠다'(I'll ask a question before I answer, LB)는 뜻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구절에서 한가지 조건을 덧붙이고 있다. 즉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투를 볼 때 예수의 대응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적 모습을 읽게 된다. 반면 누가는 조건적 제안이 아닌 단순한 질문만을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누가는 여기서 성전 숙정 작업 때 예수께서 의자를 뒤엎는 장면을 삭제한 것처럼 예수의 이미지에 거치른 면보다는 부드러운 면을 강조하려한 듯 하다.

성 경: [눅20: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이 질문은 사실상 예수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처럼 대답 대신에 질문을 하신 의도는 단순히 그들의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1)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2절)를 판단하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들어 질문한 것은 이미 세례 요한의 활동이 당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고 이에 선지자로서 공인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자신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9:7에서 언급된 바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보고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예수의 활동과 요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관지어 이해했다. 따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의 활동과 자신의 활동을 일치시켜 유대 지도자들에게 그 권위를 되묻고 있다. 즉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 받았다는 자명한 여론을 갖고 있었기에 그 여론을 근거로 대적들의 판단에 맡기신 것이다. (2)대적들의 음흉한 계교를 역으로 공격하시기 위함이었다. 즉 대적들이 예수께 권세의 출처를 물은 것은 그것을 바로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의 무자격성을 드러내어 배척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는 대답하기 힘든 본문과 같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이 질문 속에는 주님의 권세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비롯되었노라고 하는 강한 암시가 들어 있다.

성 경: [눅20: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예수의 질문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응은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 대표들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의논하는 그들의 갈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들이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할 경우 자신들의 입장 문제이다. 즉 세례 요한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온 권세인줄 알았다면 왜 자신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헤드린 대표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또 국가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불경건함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성 경: [눅20: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 그들은 자기들의 체면 때문에 요한의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민중들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고민은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은 민중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이 민중들로부터 돌에 맞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민중들로부터 별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침으로써 세례 요한이 백성들로부터 받았던 열렬한 지지를 동일하게 얻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와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여차할 경우에는 민중 봉기(民衆蜂起)의 위험가지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은 함부로 예수를 대할 수 없었고 요한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면 초가(四面楚架)의 위기를 느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은 유대 지도자들로 하여금 예수 살해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성 경: [눅20: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알지 못하노라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서로 토론하여 얻어낸 결론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이었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지혜로운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의 권위를 하늘로부터 왔다고 인정해도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가 되고 사람으로 부터 왔다고 해도 민중들의 분노가 문제가 되니 자신들의 현명치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최선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끝내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악한 무리들이 참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몰랐기 때문에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영적 무지자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신 그들이 예수의 신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종교적 기존 권익을 고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대답을 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탐욕자로 종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사기꾼이라는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함으로써 예수와의 대결에서 완패를 시인한 셈이 되고 말았다.

성 경: [눅20: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 나도...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 세 복음서가 똑같이 이와 같은 대답을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경우 반문하기 전에 예수께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경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대답못한 그들에게 예수께서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대표를 전면 무시하는 공격적 발언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절의 말씀 속에는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더이상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의사 표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0: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 이 비유는 19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당시 집권자들을 향한 비판적 공격이 되는 내용이다. 여기서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스'(*)는 평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오클로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말이다. '라오스'는 불특정한 대중, 다수의 사람 등으로서 이해되며 일반적인 사람들(people)을 가리키는 집단적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비유가 성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는 특권층, 집권자, 산헤드린 대표 등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향해 주는 비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한 사람이...농부들에게 세(貰)로 주고 -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건은 당시 팔레스틴의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듣는 이들에게 별 무리없이 쉽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팔레스틴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외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혹은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땅를 사둔 자들도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부재 지주로 인한 갖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곤 하였던 것이다. 세(貰)로 주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다만 성도는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내지는 종의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또 타국에 갔다는 말은 주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포도원을 경작하라고 맡겼다는 뜻인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맡은 바 사명을 추구해 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어지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적 맥락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성 경: [눅20:1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때가 이르매 - '때'(*, 카이로스)는 시간(time) 또는 어느 한 시점(point of time)이나 시기(period of time)를 뜻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를 따 들이는 추수의 때 곧 종말적 심판의 때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성도에게는 풍성한 결실과 완성의 때이지만 불신자에게는 파멸의 때이다.

⭕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 9절에서 언급된 사실대로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고 농부들에게는 세로 빌려준 것이기 때문에 추수 때에 소작세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다고 묘사된다. 이것은 소작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 보다는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유를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잘 유지되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소작료를 잘 내는 것은 주인과 소작인간의 관계가 좋다는 말이되고 소작료를 거부한다는 말은 주인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종이 온 것은 주인과 소작인의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 유지시키고자 함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선지자들의 주 임무 역시 백성들의 죄악을 회개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다.

⭕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는 주인과의 계약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는 의사 표시이다. 아울러 이는 9절에서 언급된 포도원의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음에도 그 소유권을 빼앗아 자기들이 갖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모욕을 당했던 선지자들을 연상시키게 한다(렘 7:25,26;25:4;슥 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놀라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불신앙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물론 이 같은 비유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에게로 돌아가는 화살이기도 하다.

성 경: [눅20:1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 마가복음과 본서는 종의 파송을 단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마태복음은 복수로 계속 언급한다. 아마 마태는 많은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농부들의 죄악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 농부들이 종을 대하는 태도가 점점 거칠고 잔인해진다. 여기서 '능욕하다'라는 말은 예수가 체포되어 당하던 모욕을 연상하게 한다(22:63-65;마 26:67-68;막 14:65). 마가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묘사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마 27:29;막 15:7). 따라서 종이 받는 수난은 마지막 상속자가 받는 죽음으로 집중되고 있으며(14절) 이 같은 수난의 묘사는 곧 닥치게 될 예수의 죽음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20:1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다시 세번째 종을 보내니 - 농부들은 주인과의 관계를 끊고 계약도 파기하며 주인의 종까지 모욕을 주고 돌려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세번째로 그 농부들에게 종을 보내는데 이것은 (1)주인이 농부들에게 보내는 끊없는 신뢰이며, (2)농부들이 회개하여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시이고, (3)농부들의 배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끝없는 배신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 종이 받는 상처가 점증되고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내어 쫓아 버렸다'는 표현은 사용함으로써 농부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진 살기등등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세번째 종 이 외에 많은 종들이 다시 왔음을 밝히면서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고 묘사한다. 마가의 진술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고 보여지는 것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증명하듯이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이 많이 죽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애굽에서의 유배 생활 중에 돌에 맞아 죽었으며 이사야는 톱에 켜여져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는 14절에서 상속자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말하기 위해 종들을 고난 받는 것으로만 묘사한 듯 하다. 또한 누가는 종과 상속자의 죽음을 따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고 또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이 행했던 잔인한 반역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 예수의 죽음까지 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0:1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 주인은 세번째 종이 상처를 입고 쫓겨오게 되자 비로소 애절한 탄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누가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주인의 직접 애절하게 탄식하는 모습과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겠다는 결심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누가에 의하면 주인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하는데 이 탄식은 소작세를 받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안타까움도 아니고, 주인이 보낸 종들의 수난 때문만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어떻게 해야 강퍅해진 농부들의 마음이 변하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험(冒險)이었다. 왜냐하면 종을 세 번 보내기까지 횟수가 거듭될 수록 농부들의 마음은 굳어지고 종들에 대한 수난도 갈수록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을 모냈을 경우 이번에는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인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라는 단어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only-beloved). 이 단어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서도 사용되었다(3:22). 따라서 이 같은 묘사는 누가의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즉, 주인의 탄식과 자신의 아들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는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유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알레고리적(allegorical)으로 일치시켜져 왔다.

성 경: [눅20:1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의논하여 - 이 표현은 (*, 디알로기조마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하되'(*, 레고)보다 훨씬 정밀한 묘사이다. 즉 그들이 서로 모여 자신들의 이익을 어떻게 하든 수호하기 위해 골똘히 대책을 숙의(熟議)하였다는 뜻이다. 이 같은 누가의 독특한 묘사는 결국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어떻게 꾸몄는지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 농부들이 의논한 결과는 아예 상속자들 죽여버림으로써 포도원의 소유권을 영구히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의 소유권이 자기들에게 넘어온다고 믿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농부들은 아들이 자기들에게로 온 것은 주인이 아들에게 소유권을 넘겨 주었다고 믿었거나(E.Bammel) 아니면 아들이 올 때 본래의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그 소유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부들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주인이 죽은 것도 아니고 상속자 아들을 죽였다고 그 소유권이 자기들에게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핍박자들을 사주(使嗾)하였던 사단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보장받으려 하였으나,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는 다시 살아나사 사단의 무리들을 물리치셨다. 또한 본문은 농부들의 죄악된 탐욕을 여실히 보여준다. 9절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주인과 농부의 관계는 소유주와 소작인의 관계이다. 이것은 서로 간의 계약으로서 농부들이 일정한 세액을 납부하기를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 계약을 파기하고 소유권을 부당하게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약을 인간이 먼저 파기했으며, 청지기적 신분을 망각한 인간의 탐욕이 온갖 범죄의 원인임을 말해준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어쨌든 이 비유는 농부로 비유된 당시의 종교.정치 지도자들 또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세상을 추구하려 한 죄악을 폭로한다.

성 경: [눅20:1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 이 구절은 비유의 클라이막스(climax)라고 할 수 있는데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아들을 죽인 다음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 죽인 것으로 묘사한다. 이 구절은 아들이 포도원 안이 아닌 밖에서 죽었다고 묘사함으로써 예수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사실을 암시한다. 포도원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 및 그들에게 약속된 모든 축복으로부터 차단시키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을 추진해 나갔으며, 예수는 이 모든 궤계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받으셨던 것이다(히 13:12).

⭕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 이 구절은 청중들로부터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성 질문이다. 즉 결론이 어떻게 날지 자명해진 시점에서 질문을 함으로써 청중 모두가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하며 곧이어 내릴 결론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태는 청중들이 결론을 직접 말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1:41).

성 경: [눅20:1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 여기서 주인이 내린 두 가지 조치가 언급되는데 이는 농부들이 저질러온 죄악에 대한 심판의 징벌로서 그들을 진멸시키겠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이는 첫째, 농부들이 상징하는 산헤드린의 대표들에 대한 전면적인 응징(應懲)을 선언하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거부하고 공격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도 하다. 두번째, 다른 사람에게 포도밭을 맡기겠다는 가언을 하고 있는데 포도밭을 이스라엘이라고 했을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같은 사실이 실제로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성취된 바 있다. 나아가 이 비유를 신앙의 문제로 연결지어 해석할 경우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장소와 시간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하나님의 아들(요 1:1-12)을 끝내 배척하는 자는 인간적인 파멸 뿐만 아니라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될 것이라고 경고로서 이해된다.

⭕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 그와 같이 무서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소원을 표현하는 누가만의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부정적 소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독특한 표현으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롬 3:4,6,31). 즉 청중들이 안타깝고 간절한 바램으로 요청하는 말이다.

성 경: [눅20:1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이다.

성 경: [눅20:1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악한 농부의 비유]

⭕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 심판과 돌을 연관지어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사 8:14,15과 단 2:34,44,45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표현은 항아리 따위의 물건이 돌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듯이 사람도 산산이 부서져 파멸에 이른다는 말이다. 문맥상으로 여기서 돌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형국에 처해질 사람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깨어지겠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들라스데세타이'(*)는 '산산이 부수다'는 뜻의 '쉰들라오'(*)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으로 예수와 그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의 말로(末路)가 어떠할 것인지를 잘 나타낸다.

⭕ 이 돌이...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 이 표현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반대 형식으로 묘사된 심판 계시이다. 즉 사람이 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에게 돌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의 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도록 완전한 파멸을 강조하는 말로서 앞의 묘사에 비해 심판의 철저함과 적극성이 강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악인들이 자기 모순 속에서 스스로 멸망하는 심판을 나타내며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마지막 날 예수께서 친히 불신의 세력을 철저히 파멸시키실 것을 뜻한다. 이 같은 비유는 초기 기독교인 들에게 자신들에게 임한 핍박과 고난을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인내케 하며 또한 종말의 때의 통쾌한 승리를 약속하는 복음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눅20:1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 두려워하더라 - 19:47,48에서 언급된 내용과 비슷하다. 19:47,48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감동되어 있는 군중들 때문에 예수를 죽이지 못한다고 하는 똑같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에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예수는 일반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셨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해 본질적으로 오해하고는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전폭적인 지지의 환호를 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기득권자들은 예수의 언행이 매우 도전적이고 선동적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성 경: [눅20:2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 마태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라고 문장의 주어를 밝히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주어를 밝히지 않는다. '엿보다'라는 말은 주의깊게 몰래 지켜보는 것을 뜻하며 문맥상으로 볼 때 예수의 약점을 책(責)잡아 공격하려고 '호시 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라는 뜻이다.

⭕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 2절에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해 처음 짜낸 묘안은 종교적 가르침의 권위를 문제삼으려 그를 책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문제로 예수를 문제삼았다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1-8절) 허다한 군중들이 예수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힘으로 예수를 처치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당시 죄수에 대한 사형권은 로마 정부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에 설령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법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조작한다해도 함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의 정치적인 힘을 빌어 예수를 제거하고자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 정탐들을 보내어...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 1,2절에서 산헤드린의 대표들이 직접 예수를 심문하듯이 공격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정탐이라고 표현되는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나타난다.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을 종합하면 산헤드린 대표들이 보낸 정탐꾼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이었다(마 22:15;막 12:13). 이 두 당파는 대개의 경우 서로 뿌리깊은 반감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치 단결하고 있다. 예수는 이들에게 있어 기득권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요 공통의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실로, 그들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른 발을 지닌 악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잠 1:16).

성 경: [눅20:2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우리가 아노니...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 정탐꾼들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당신'이라고 호칭했던 것과는(2절) 달리 '선생님'이라는 정중한 말을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들어 칭찬한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간교한 술책(術策)의 일환이었다.

⭕ 사람을...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20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즉 자신들이 예수의 말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특히 예수의 가르침이 참으로 정직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된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둘째는 이 같은 칭찬의 말을 통해 예수를 인정하고 추종하는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여 예수를 안심시키고 자기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가려는 유도성 질문을 하기위한 연막(煙幕)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20:2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 - 여기서 특별히 가이사(Caesar)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를 무력적으로 지배하면서 높은 세금을 징수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깊은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같은 민족 감정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말하게 함으로써 예수를 로마 쪽이나 유대 쪽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진퇴 양난식(進退兩難式)의 교묘한 질문이다. 민족 감정으로 첨예하게 드러나 있는 지배국에 대한 세금 납부 문제는 초기 단계에 이미 유대인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 바있다(I.H.Marshall). 예수 당시에 유대인의 반(反) 로마적 감정은 세금 징수 문제에 있어 큰 반발심으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정탐꾼은 자신들이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인 것처럼 가장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당연하게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대로 친로마적 발언을 한다면 예수를 환호했던 대다수 무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0절의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반로마적 대답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언급된 '가이사'(Caesar)는 '시이저'라고도 발음되는데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서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부터 유래되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대인들이 납부해야 할 세금은 인두세, 관세 등 각종 세액이 있었는데 그 세금은 수입의 1/3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로마가 요구하는 세금 중 인두세(人頭稅)가 악명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인두세는 14-65세까지 해당되는 모든 남자와 12-65세까지 이르는 모든 여자에게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다.

성 경: [눅20:2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그 간계(奸計)를 아시고 - 예수의 판단 형식을 빌어 질문하는 자들의 의도를 말해주는 이 구절은 20절의 설명을 상기시키며 사람의 깊은 의중을 간파하시는 예수의 전지성을 보여준다. 마가는 '간계'대신 '외식'으로 또한 마태는 '악함'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예수를 책잡으려는 정탐꾼들에 대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가와 마태는 이 같은 평가 후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묘사하여 공개적으로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폭로하신 사실까지 언급하였다.

성 경: [눅20:2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 이같은 예수의 요구는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의 정당성에 관한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인데 이 요구로 보아 한 데나리온은 일상적으로 지니고 다닐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의 화폐인 것으로 보인다. '데나리온'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로마 화폐이다. 헬라 화폐 '므나'의 1/100에 해당되며 유대 화폐 '세겔'의 1/4정도에 해당되는 단위인데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다. 또 잘 알려진 헬라 화폐 '달란트'의 1/6,000에 해당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예수가 여기서 한 데나리온을 요구한 것은 아마도 당시에 로마에서 부과하던 인두세가 백성 한 사람당 한 데나리온씩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던 데나리온 하나를 보이라고 하셨던 것같다.

⭕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당시에는 어느 나라가 새로 세워지거나 왕이 새로 즉위하면 새 왕의 화상(畵像)을 넣은 돈을 만들었다. 또한 그것들이 유통되는 곳에서는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데나리온 주화에는 당시 황제 가이사 디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그 주화의 글귀는 황제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여신으로서 묘사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로마 주화에 그려진 황제의 얼굴은 종교적 권위가 부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E.Stauffer).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화폐를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꺼려했었다.

성 경: [눅20:2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양극적 언급을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롬 13:1-7과 더불어 그리스도 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삶의 실제적인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문화.종교 문제까지 위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성 경: [눅20:2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세금에 대한 시험]

⭕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 예수를 제거시키기 위한 또 한 차례의 노력과 음모가 실패로 끝나는 장면이다. 그들이 예수를 책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첫째, 예수의 답변이 책잡기 위해 질문했던 자들의 수준을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하였고 둘째, 예수의 답변이 단순히 세금을 내고 안내고 하는 문제를 넘어서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될 근본적 문제를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주위에 함께한 무리들이 예수의 발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경청하고 있었으며 그 분위기가 압도적인 것이어서 더이상 말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의 답변에 기이히 여겼다고 언급되는데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놀라다' 혹은 '칭송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답변이 합리적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어서 청중들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지혜에 놀랐다는 말이다.

성 경: [눅20:2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 본문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의 명을 받고 고의적인 공격 의도로 왔는지 아니면 종교상의 진지한 논의를 위해 왔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들도 예수께 대한 공격적 의도로 질문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태는 '그 날에'라는 단어를 사용해 앞서 소개되었던 세금에 관한 논쟁과 같은 날에 이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마 22:23). 한편 사두개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 기원된(삼하 8:17) 집단으로서 하스모니안 시대 때(B.C.166-163) 구체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들은 특히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전승 문서들은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 사회내의 소수 집단이었지만 부유한 지배 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적 세력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현실주의자라는 별명과 함께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유지했던 무리들이었는데 예루살렘 함락(A.D. 70)과 함께 몰락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 중 독특한 것은 부활과 영(spirit)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Josephus, Antiq., 13.10.6).

성 경: [눅20:2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 이 사람들도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적대적 감정이 없는 듯이 말문을 열고 있지만 실상은 이어지는 질문을 통해 선생으로서의 주님의 권위를 깡그리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부활을 인정하신다고 판단하고서 나름대로 철저한 반대 논리를 펴고자 했다. 기실 그들은 부활에 관한 문제를 놓고 바리새인 등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첨예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 대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논거로서 언급한 내용은 신 25:5-10에 나타난 계대 결혼(繼代結婚)에 관한 법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남편이 자식 없이 죽을 경우 시동생과 그 과부가 재혼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재혼을 통해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자손을 잇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모세 율법과 부활 교리와의 모순점을 신랄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관습을 근거로 들고 나왔다.

성 경: [눅20:29,30,31,32,3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그들이 계대 결혼과 부활의 모순을 말하기 위해 전제된 이야기가 29-32절의 내용이다. 즉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서 결혼한 맏형이 죽게되자 전통과 율법에 따라 동생이 형수의 남편이 되었는데 그러기를 일곱 회나 반복하여 이 여인은 일곱의 남편이 생긴 셈이되었다. 마침내 이 여인도 죽었는데 문제는 모두 죽어서 다시 부활했을 때 한 여인이 일곱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있다. 그렇다면 부활 후 어느 한 사람이 진짜 남편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일처제가 옳다고 생각되는 상황하에서 일곱 명의 형제 중 누가 그 여인의 남편이 되겠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었는지 가상적인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생이 미망인인 형수의 남편이 되어야 하는 고대 이스라엘의 수혼(嫂婚) 제도의 상황하에서 이 질문은 상당히 진지하고 흥미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논쟁의 승리를 확신하고서 아마 속으로 예수를 비웃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따라 일곱 형제 중 어느 한 명을 택하여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것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거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 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식의 객관적 자세에서 나온 진지한 물음이 아니라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아예 단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이 물음에는 마치 그 미망인이 부활시에는 반드시 일곱 형제 중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된다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느낌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현세의 삶과 동일선상에 두고자 하는 전제 자체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눅20:3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 이 부분은 타공관 복음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문장인데 대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사두개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을 잘못 알아 부활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신 것으로 묘사된다. 본절에서도 예수는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시지 않고, 곧 그들의 질문에 끌려다니는 입장에서 벗어나사 부활후 상태에 관한 진실을 본질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대적들의 무지와 악한 계교를 자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끔 하는 방법을 취하셨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 전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고 올바른 진리를 선포하는 이 놀라운 신적 지혜 앞에서 대적들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0절). 한편 본문의 사두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일반적 부활관을 염두에 두고 예수를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 부활관에 따르면,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경은 부활 이후의 삶을 현세의 삶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묘사한다.(고전 15:35-49;빌 3:21;요일 3:2).

성 경: [눅20:3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저세상과...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 부활하여 새롭게 사는 세계를 저세상으로 표현한다. 즉 이세상과 저세상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사두개인이 질문한 내용이 일차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부활한 새로운 세계는 이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이다. 여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은 부활 후 거하게 될 세계 곧 천국이 모든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의 세계임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바, 행 13:46에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I.H.Marshall). 여기서 언급된 합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의(義)로 옷입게된 자들을 가리킨다(롬 1:17).

성 경: [눅20:3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천사와 동등이요 - 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바 곧 부활한 저세상에서는 결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출산을 통한 종족(種族) 보존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생명을 받아 불멸의 존재로 새로 탄생하는 성도들로서는 더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수효가 창세때로부터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듯이 부활의 생명을 받는 자들의 수효도 만세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더이상 수효를 보충해야 하는 부족함이 야기되지 않는다. 아울러 본문은 부활한 성도의 삶의 양태가 현세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성 경: [눅20:3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칭하였나니 - 사두개인들이 모세 율법을 근거로 삼아 예수를 시험하였듯이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을 변호하셨다. 즉 본문은 출 3:6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음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며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이 몸은 비록 죽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새생명에 참예케 될 것임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들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유한한 인생의 눈으로 보면 육신의 죽음이 곧 존재의 끝으로 보이지만 신령한 믿음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 뿐인 것이다.

성 경: [눅20:38]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26).

성 경: [눅20:39]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며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경쟁적 차원에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말미암아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 했던 일(27-40절) 외에는 이 두 그룹은 항상 마찰을 빚어왔다. 본 구절에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자신들과 사상적 숙적(宿敵)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의 그릇된 주장들을 여지없이 훼파해 주신데 대하여선 크게 기뻐하였다.

성 경: [눅20:40]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부활에 대한 시험]

⭕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이 진술 역시 누가만 언급하고 있는데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던 논리가 예수 앞에서 단번에 무너지는 장면이다. 결국 본장에서 등장한 산헤드린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그리고 사두개인 등 모두가 예수와의 논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 민족의 지도층으로서 한 민족을 이끌어가는 주도 세력 또는 집권 세력인데 그들이 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예수의 신적 지혜와 권위를 더욱 부각시킨다.

성 경: [눅20:41]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성 경: [눅20:42]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시 110:1을 인용하여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이라고 부른 사실을 언급한다. 한편 마가와 마태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다윗의 말에 신적인 권위가 부여되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본문의 구약성경 전체가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단적 실례를 보여준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수많은 메시야 예언들(사 7:14;호 11:1) 외에도 구약의 실재 인물을 통해(창 14:18-20), 구약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호 11:1), 구약의 각종 의식과 규례를 통해(히 8-10장) 혹은 선지자들의 상징적 행동을 통해(슥 11:12,13)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예언들이 바로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

성 경: [눅20:43]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때까지 - 마태와 마가는 '발아래 둘 때까지'라고 표현했다. '발등상'은 헬라어로 '휘포포디온'(*)으로서 '발판' 곧 발을 올려 놓는 '대'(footstool)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임하게 되실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원수'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꾀어 범죄케하고 세상 끝날까지 세상을 미혹케할 사단을 지칭하며, 따라서 이 사단이 심판주의 발 아래 짓밟히게 됨으로써 창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성 경: [눅20:44]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다윗과 예수]

⭕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 다윗이 메시야를 주님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문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그 '인성'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그의 '신성'에 대하여는 알지 못했다. 시 110편을 인용한 주님의 지혜로운 질문은 그의 대적자들을 침묵케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신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한 목적도 내포한다. 예수가 그의 성육신하신 몸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었으나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사실상 다윗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같은 예수의 반문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던 형식주의 신앙과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및 왜곡된 선민 의식을 깨뜨리려는 의도까지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 한 가문이나 한 민족을 구원하고자 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성 경: [눅20:45]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이 같은 교훈은 이미 앞에서 주어진 것(11:39-52)일 뿐 아니라 마 23:5-7;막 12:38-40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다른 평행 구절의 내용보다 훨씬 축약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말씀이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에게(45절) 주어진 것이나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있을 당시 주위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많은 무리들과 줄곧 예수를 따랐던 자들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무리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눅20:46]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 이 표현은 서기관들의 위선에 대한 묘사이다.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서기관들은 율법 교사로서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는 율법에 대한 지식이 남보다 월등하다는 우월 의식과 함께 교만스러운 자기 과시욕의 표현이었다.

⭕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 시장은 대중적 장소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그곳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자기의 권위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서기관들의 허영을 비판하는 말이다. 회당의 상좌(上座)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 서기관들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항상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명예욕에 대한 비판인데 높이 되고자 하면 끝이 되어야 하며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막 9:35)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삼가라는 경고의 말씀은 비단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욕심을 향해 꾸짖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 경: [눅20:47]

주제1: [인자 살해 음모의 노골적 전개]

주제2: [서기관에 대한 경고]

⭕ 저희는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키며 -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에 이어 구체적 죄상을 폭로하는데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착취하는 자로 묘사된다. 당시 과부들은 고아들과 함께 경제 능력이 없는 자로서 보호 대상자였다. 본문은 약자의 재산을 착취하는 행위가 흔히 있었던 것임을 반증해 준다. 이 구절이 뜻하는 구체적 사실은, 서기관들이 그들에게 위임된 율법적 판결권을 남용하였거나(Jeremias),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과부들의 재산에 손실을 가한다거나(T.W.Manson), 타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는 법적 대리인으로서 착취한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J.D.M.Derrett).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 중의 하나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형식적으로 짜여진 기도문이 많았으며 길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 기도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율법적으로 가장 정통한 율법학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기도를 오해하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이 같은 기도는 하나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외식으로 하는 기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물론 이 비판은 오늘날의 기독교인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 지식을 남용하고 권력과 종교적 율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행위는 다른 죄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말이며 더욱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악행을 범하면 하나님 앞에 더 중한 판결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12:48).

성 경: [눅21:1-4]

⭕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 - "마샬"(Marshall)은 요세푸스(Josphus)의 "유대 고대사"를 참고로하여 예루살렘 성전에는 귀중품을 관리하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금방"(金房)이라 불리는 방이 하나 있어서 여기에는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열세 개의 헌금통이 있었다고 한다. 계속해서 "마샬"은 본문에서 말하는 이 "연보궤"도 아마 열세 개의 헌금통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 열세 개의 헌금통을 보관하는 이 금방(金房)은 "여인들의 뜰"을 지나서 있었는데, "헨드릭슨"(Hendricksen)은 아마 예수께서 이 여인들의 뜰에 앉아 계셨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에 대해 "쉐크"(노다)는 예수께서는 이 헌금궤를 보관하고 있는 방 가까이에 앉아 계셨으며 당시에는 헌금의 종류가 무척 많아서 험금을 할 때는 액수와 용도를 말했기 때문에 예수는 이 과부의 헌금이 어떤 명목으로 얼마나 그려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의 주장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께서 분문을 말씀하실 때의 상황과 분위기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두 렙돈" - 막 12:42에 의하면 두 렙돈은 한 고드란트이다. 그리고 네 고드란크는 한 앗사리온, 또 열여섯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참조, 마 20:9,10). 결국 두 렙돈은 하루 품삯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돈으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액수이다.

성 경: [눅21:5-9]

⭕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 - 여기서 "헌물"을 가리키는 단어 "아나테마"는 "하나님께 봉헌되어지도록 결정된 것"(Hendricksen)으로 스펜서(Spence)는 "거룩한 헌물"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성전은 예루살렘 제 3 성전으로 이 성전은 헤롯 대왕에 의해서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을 가리키는데, B. C. 19년에 짓기 시작한 이 성전은 예수 당시까지도 준공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흰 대리석과 또 여러 부호들이 드렸던 휘황찬란한 귀금속과 보석들로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드렸던 휘황찬란한 귀금속과 보석들로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하고 화려함을 이야기했다는 뜻이다.

⭕ 내 이름으로 와서. - 마샬(Marshall)은 원어 "에피 토 오노마티"를 ⑴ 내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⑵ 내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면서 ⑶ 내가 재림 주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의 3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비텐하르트(Bietenhard)의 견해를 좇아 두 번째 해석이 가장 적당하다고 말한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도 그의 유대 고대사XX. 8에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실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행 21:38에 언급된 드다(Theudas)의 출현이다(Spence).

성 경: [눅21:10-11]

⭕ 민족이 민족을.....일어나겠고. - 겔덴휴이즈(Geldenhuys)는 이 구절에 대한 실례로 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발하는 유대 민족의 대대적인 반란과 폭동을 들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에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런 폭동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유대 민족의 움직임은 결국 A.D. 66 년에 독립 전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유대 전쟁사"에서, 그리고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Tarditus)는 "연대기"에서 예수 사후의 기간을 전쟁과 폭동의 기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헨드릭슨(Hendricksen)은 이 구절을 예언의 성취라는 입장에서 현대를 조명하면서 어떤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유럽에서는 지난 300년 동안에 300차례나 전쟁이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 처처에 큰 지진과.....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 요세푸스는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나타날 징조라고 말한다. 징조가 나타나는 시기는 사실 확실치 않으나 이러한 징조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흔히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이런 징조는 재난의 시작일 알리는 것이지(참조, 막 13:8), 이런 징조가 나타났다고 해서 주의 재림이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Marshall).

성 경: [눅21:12-13]

⭕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실례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행 9:1 ; 22:19에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회당에 끌려가서 매질을 당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고후 11:24에는 바울도 그리스도를 인하여 많은 매를 맞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행 12:1에는 세베대의 아들이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가 헤롯 아그립바 Ⅱ세 앞으로 불려 나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헨드릭슨(Hendricksen)이나 마샬(Marshall)은 이 일들이 큰 전쟁이나 하늘로서 나타나는 무서운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전에"라는 말을 시간적으로 보지 않고, "보다 중요한"이란 뜻으로 이해를 한다. 즉 그는 "이 모든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둁은 너희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 "전에"라는 표현을 시간적으로 이해해야 될지 아니면 "스펜서"의 의견대로 "보다 중요한"으로 해석해야 될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두 의견이 다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성 경: [눅21:14-15]

⭕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 원어 "프로메레타오"는 "앞"을 가리키는 전치사(프로)와 "연습하다"는 뜻의 "메레타오"의 합성어로 "사전에 준비하다"라는 말이다. 렌스킨(Lenski)는 "제자들은 왕이나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타당하고 매를 맞아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옥에 같혀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과 신분이 높은 사람들 앞에서 변론해야 할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염려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 구제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원어는 "스토마 카이 소피안"인데 "입과 지혜"라는 말이다. 플러머(Plummer)는 "스토마"를 "말의 재간"으로 또 "소피아"를 "할 말을 조리 있게 간추릴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이 구절을 "말하는 지혜"로 해석한다. 한편 마샬(Marshall)은 말주변이 없는 모세에게 말의 지혜를 불어넣어 주신 하나님을 상기 시키면서 본절을 설명하고 있다(참조, 출 4:10-17 ; 겔 29:21).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언약은 분명히 사실로 증명되었다(행 7:25,26장).

성 경: [눅21:16-19]

⭕ 심지어 부모와....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친척, 벗들로부터 박해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참조, 마 10:21,22 ; 막 13:12). 또한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법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박해받게 되는 경우를 보여 주고 있다(참조, 겔 38:21 ; 말 4:6 ; 비교, 창 4:8 ; 27:41 ; 히 1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눅 14:26,27에서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벵겔(Bengel)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상할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Sine praemio). 이상근 박사나 "헨드릭슨(Hendricksen)도 이 구절을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렌스키(Lenski).나 겔덴후이스(Norval Geldenhuys)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밖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플러머(Plummer)는 16절이 제자들의 순교를 지적한 것이라면 본절은 그 죽음이 제자들오부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그 정신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마샬(marshall)도 이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좀 더 타당한 듯 하다.

성 경: [눅21:20-22]

⭕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 말지어다. - 여기서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유대의 거의 대부분 지역이 산간 지방에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거나 아니면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도망하라는 뜻이다(Novral Geldenhuys, Marshall). 한편 예루살렘은 68년에 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포위당한 적이 있으나, 네로의 죽음으로 인한 로마의 국내 문제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다시 70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인 티투스(Titus)에 의해 3일 만에 포위, 공격을 당하였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의 책 "교회사"에는 당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많은 성도들이 전쟁이 나기 전에 베뢰아 지방의 펠라(Perean Pella)에 피신처를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한다는 생각은 구약 시대 때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사상이다(참조, 창 19:17 ; 삼하 17:9).

⭕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악을 자행하고서도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에 대해 선지자들이 외친 심판을 가리킨다(Albert Bames). 이 심판은 바벨론에 의해 한 차례 이루어졌으나 계속되는 예루살렘의 행악은 다시 한 번 더 심판을 재촉하였다(참조, 레 26:31-33 ; 신 28:49-57 ; 왕상 9:6-9 ; 시 79:1-13 ; 사 29:2-4 ; 단 9:26,27 ; 미 3:12).

성 경: [눅21:23-24]

⭕ 그날에는...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렌스키(Lenski)는 환란으로 인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아이를 배거나 젖먹이를 가진 여인들이 당할 고통을 측은히 여기는 예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헨드릭슨(Hendricksen)은 예수의 이와 같은 연민의 정이 왕위를 탈취한 뒤 그를 왕으로 인정치 않는 성읍을 파괴하고,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던 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과 너무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참조, 왕하 15:13-16).

⭕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 요세푸스(Josphus)는 "유대 전쟁사"에서 이때의 유대인 사망자를 110만 명으로 그리고 포로를 9만 7천 명으로 밝히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이방인의 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그레이다너스"나 "렌스키", "스펜서, "헤드릭슨"은 모두 다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또는 이방인들이 개종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기간"으로 설명한다. 한편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때"가 언제일런지는 불확실하나 확실한 것은 이빙인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황폐케 한 뒤에 반드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에 의해 다시 재건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 경: [눅21:25-26]

⭕ 일월성신에는....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 마 24:29과 막 13:24에는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하여 본문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월성신과 관련된 지이조가 구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참조, 산 13:10 ; 겔 32:7,8 ; 율 2:10 ; 3:15 ; 암 8:9). 한편 하비(Harvey)는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는 시 65:6-8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바다에서 인간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 붙드셨던 바다를 놓았기 때문에 땅에 있는 민족들이 두려워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헨드릭슨(Hendricksen)도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일월성신에 변화가 생기면 달에 영향을 받는 바다도 조수(潮水)가 일정치 않게 되어 바다도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알버트 반즈(Albert Barnes)는 이르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바다에 풍랑이 일고 해일이 일어나 육지를 뒤덮는 것처럼 그렇게 재난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양쪽의 엄청난 재난에 대한 예고라는 사실만은 인정하고 있다.

⭕ 하늘의 권능들. - 원어로 "하이 가르 뒤나메이스 톤 우라논"인데, 여기서 "뒤나메이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여기서는 25절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천체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Plummer).

성 경: [눅21:27-28]

⭕ 인자가 구름을 타고.....오는 것을 보리라. - 러셀(Russel)은 키크(Kik)와 타스커(Tasker)의 견해를 지적하면서 이 구절을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앞 구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주적인 현상을 정치적인 재앙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이해하면서 이 구절을 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해석한다. 또한 현대 신학자인 테일러(Taylor)나 헤긴스(Heggins), 페린(Perrin) 같은 학자들도 이 구절은 구약의 여러 구절들 특히 단 7:13과 같은 구절들이 혼합되어 인용된 것으로 단 7:13의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예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즉 이들은 당시의 성경 기자가 본 구절을 확대 해석하여 기록했다는 것이다. 한편 위의 학자들이 이 구절을 상징적 해석 내지는 아예 무시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샬(Marshall)이나 이상근 박사, 헨드릭슨(Hendricksen)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즉 예수의 초림은 은밀하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분의 재람은 영광스럽고 공개적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사상은 마 26:64 ; 살전 4:7 ; 계 1:&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 일어나 머리를 들라. -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우주적인 징조들(Klostermann, Marshall, 이상근)이 나타나면 공포에 질려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주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뜻이다(Vincent, Lenski).

성 경: [눅21:29-31]

⭕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 마 24:32-34과 막 13:28-30에는 무화과 나무만 언급되고 "모든 나무"에 관한 기사는 빠져 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무화과나물를 마 21:9에서 예수께서 저주하여 말라 죽은 무화과로 해석하여 유대인으로, 또 "모든나무"는 이방인으로 간주 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은 저주를 받지만 마지막 날에는 회복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해석이다. 누가가 모든 나무를 삽입시켜 기록한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가 없는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Jeremieas, 이상근).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겨울철에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봄이 온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무화과의 잎사귀가 계절의 시작을 알려 주듯이 우주적인 징조(25,26절)가 나타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 자연히 아나니 - 원어 "브레폰테스 앞헤아우톤"은 "스스로 본다"는 뜻이다. 즉 무화과나무의 잎사귀가 연해지고 싹이 돋으면 누가 그르쳐 주지 않아도 여름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Lenski, Marshall). 한편 누가는 이러한 표현에다 "이미"라는 시기를 나타내는 부사 "에데"를 덧붙여서 이미 그 시기가 가까이에 당도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눅21:32-33]

⭕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대"와 "모든 일"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종말에 나타날 우주적인 징조를 가리키는 데에 거의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Geldenhuys는 이를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세대"에 대한 해석이다. 원어 "게네아"에 대해서 웑멜(Kummel)은 동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 해석하여 예수 시대의 유대인으로 해석한다. 또 렝스토르프(Rengstorf)는 조상이 같은 민족으로 해석하여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 클로스터만(Klostermann)은 누가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엘리스(Ellis)는 예수께서 재림할 즈음에 사는 마지막 세대로, 미카엘리스(Michaelis)는 단순히 "행악하는 자"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가 어떤 세대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종말이 도래할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다는 "마샬(Marshall)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한편 테일러(Taylor)는 원래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후대에 와서 여러 성경 기자와 또 학자들에 의해 예수의 재림으로 곡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성 경: [눅21:34-35]

⭕ 방탕함과 술취한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 여기서 "방탕함"을 가리키는 원어 "크라이팔레"는 원래 "술취한 상태"(Marshall)인데, 의학적으로는 "술이 취해서 속이 메스꺼운 상태"(Norval Geldenhuys)를 가리킨다. 한편 알버트 반즈(Albert Bames)는 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 렌스키(Lenski)는 이용어가 술이 취한 상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며 특별한 의학적 용어는 아니라고 말한다. 마샬(Marshall)은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는유적으로 이해하여 세상의 염려로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심으로써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말한다. 또한 여기서 "마음이 둔하여 지다"는 말의 원어 "바레도신 휘몬 하이 카르디아이"에서 "바레오"는 "내리누르다"는 뜻이다(참조, 눅 9:32 한글 개역 성경에는 "곤하여"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피곤이 내리누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마샬(Marshall)은 심리적으로 침체된 상태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세상 일에 연연함으로써 의기 소침해져서 하늘의 징조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도 이를 마음이 둔하여진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성 경: [눅21:36-38]

⭕ 인자 앞에 서도록. - 이 말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마샬(Marshall)이나 파라(Farrar), 엘리코트(Ellicott)는 인자를 심판자로 해석한다. 반면 알포드(Alford)는 죄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구세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분문에서 "인자 앞에 선다"는 말은 렌스키(Lenski)나 알버트 반즈(Albert Bames)의 견해대로 인자를 심판의 주로 보는 동시에 구원의 주로 인정하는 편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 한편 퇴트(Todt)나 헤긴스(Heggins)는 이 구절을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누가의 창작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를 누가의 창작으로 볼 만한 뚜렷한 이유는 없다(Colpe).

⭕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 원어로는 "아그뤼프네이테 데 엔 판티 카이로 데오메노이"인데, 여기서 "항상", "언제나"를 가리키는 "엔 판티 카이로"가 "깨어 있으라"(아그뤼프네이테)를 수식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며"(데오메노이)를 수식하는지 확실치 않다. 찬(Zahn)은 전자를 지지하고, 바클레이(Barclay)는 후자를 지지하나 이스턴(Easton)은 양자를 다 수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편을 수식하든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아무튼 누가는 기도에 대해 특별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참조, 눅 18:1 ; 비교, 살전 5:17).

성 경: [눅22: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 이 구절은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묘사하는데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누가의 경우 21:38의 이야기와 무관한 듯하게 이야기를 출발시키면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동일(同一)한 절기로 묘사한다. 한편 마태의 경우 앞장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유월절' 이틀 전임을 묘사한다.(마 26:2). 그리고 무교절에 대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아 시간적 정확성이 누가에 비해 두드러져 보인다. 마가의 경우도 누가와 같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앞절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하면서 '유월절' 이틀 전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마가는 누가와는 달리 두 절기가 동일하다는 의미보다는 두 개의 절기가 같은 날에 있다는 듯 언급한다(막 14:1).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구분 문제, 둘째, 시간 표현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정확한 것인가이다. 첫째, 유월절과 무교절은 분명히 구분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조상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해방절이라고 할 수 있다(출 12:1-14). 유대인들은 한 해의 첫 달이 되는 1월 곧 니산(아빕)월(태양력 4월) 10일에 어린 양을 식구 수대로 취하여 14일까지 양을 보관하였다가 1월 14일 저녁 해질 무렵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날 밤에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을 함께 먹되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날 밤에 애굽에 내렸던 장자의 재앙을 유대인들만은 피할 수 있었고 마침내 출애굽시 장정(長征)에 오르게 되었다. 유월절은 바로 출애굽에 있었던 이러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유월절은 밤에 양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나물을 먹는 니산월 14일 밤을 가리킨다(출 12:8-11). 한편 무교절은 출 12:15-20에 근거한 것으로서 유월절 밤 즉 니산월 14일 밤 교병을 먹는 것으로 시작하여 일주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식사하면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유대인들의 날자 계산법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되는 까닭으로 무교절은 15일부터 21일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유월절은 14일 저녁 식사와 함께 끝나고 무교절은 그 식사 때에 무교병을 먹음으로써 시작되는 셈이다. 즉 유월절과 무교절의 시작은서로 맞물려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가의 '유월절과 무교절'이란 표현과 마태의 '유월절'이라는 표현은 서로 문제가 없고 다만 이틀이라는 시간상의 문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이란 누가의 표현은 무교절에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무교절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고 또 유월절이 끝남과 동시에 무교절이 맞물려서 시작되므로 유월절은 곧 무교절의 시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문제는 마태.마가의 시간과 누가의 시간 표현이다. 마태의 경우는 예수가 직접 이틀 후면 유월절이라고 하신 말씀을 언급하는데 이 날은 세 복음서 모두 예수를 죽일 음모가 있었던 날을 지시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마태와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니산월 빕일이 되고 누가의 경우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누가는 그 음모가 있었던 날을 정확하게 규명(糾明)하기가 어려워 '가까우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리라 여겨진다.

성 경: [눅22:2]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 예수를 죽이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 자들은 19:47, 48 ; 20:19에서 보여진 인물과 동일하다. 따라서 예수에 대해 가장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은 종교 그룹 가운데서 최고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서기관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므로 바리새파도 포함된다. 이들은 산해드린 의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예수 살해 음모는 종교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들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부터 더욱 바짝 긴장하였고 한시바삐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본격적인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며 이들의 음모가 결국은 구체적 실행 단계로 옮겨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된다.

⭕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 예수의 활동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19:37-40 ; 21:38) 염두에 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이 같은 묘사가 20:19에서도 나온다. 예수에 대한 민중들의 열광이 집권자들에게는 체제 도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섣불리 예수를 처형시켰다가는 많은 백성들로부터 거센 대항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대적들은 온갖 허위 선전을 통해 군중들을 회유하고 선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23:21), 그리고 한편으로는 유월절이 이르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에게 넘기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은 유월절이 다가오자 더욱 근심하였다. 유월절이 되면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군중들의 전폭적(全幅的)인 지지를 받던 예수가 붙잡히게 되면 백성들이 순례자들과 합세해 크나큰 폭동을 일으킬까 염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전에 예수를 조용히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

성 경: [눅22:3]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 예수를 배반하는 유다에 대한 묘사는 공관 복음서가 공통되게 다루고 있지만 배반하는 주체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는 누가가 독특하다. 즉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스스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긴 것으로 묘사하지만 누가는 12제자 중의 하나인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감으로써 유다의 배반이 시작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에 의하면 사단이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요 13:2에서는 '마귀가 벌써...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아마도 누가와 요한은 유다의 배반이 유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사단의 짓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대적은 궁극적으로 사단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같다. 이 사단은 첫 사람 아담 부처를 유혹하고 죄악에 빠뜨린 것을 비롯하여(창 3:1-13) 인류 역사를 통털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離間)시켜 왔으며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들마저 멸망에 빠지게 하려고 안감힘을 다 쓰고 있다(벧전 5:8). 따라서 인류 구속의 대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야말로 사단의 눈에는 가장 무서운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시종일관 예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에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승리였을 뿐 예수는 부활을 통해 피와 죽음과 세상을 정복하시고 사단의 머리를 깨뜨렸을 것이다(창 3:15).

성 경: [눅22:4]

주제1: [가룟 유다의 배반]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 군관들 - '군관들'(*, 스트라테고이스)이란 성전 수위대장을 지칭하는 말인데 단수로 사용되었을 때는 제사장 다음가는 직책인 성전 지배인을 가리킨다(행 4:1 ; 5:24, 26). 여기서는 복수로서 수위 대장을 가리키며 무력적 힘을 집행할 수 있는 권력자를 지칭한다. 마태와 마가는 대제사장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를 체포한다는 생각에서 볼 때 누가의 진술이 훨씬 자연스럽게 보인다.

⭕ 방책(方策)을 의논하매 - 마태의 경우를 보면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테니 얼마의 돈을 주겠느냐고 흥정했다(마 26:15). 방책이란 돈에 대한 흥정, 6절의 표현처럼 민중들이 없을 때 체포할 것 혹은 48절의 언급처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할 것 등에 대한 의논을 포함할 것이다. 어쨌든 가룟 유다의 확연한 배신으로 인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호기를 만났고 예수의 공생애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성 경: [눅22: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룟 유다의 배반]

⭕ 저의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 지라 - 의논 대상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이나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표현은 마가와 동일하다(막 14:11). 그러나 마태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은 30을 달아서 유다에게 직접 주었다고 언급한다(마 26:15). 여기서 은 삼십은 구약의 예언(슥 11:12)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의 죄과를 담당하셨다는 메시야적 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은 삼십, 즉 은화 30세겔(shekel)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사장과 성전 수비대장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 대한 그들의 사악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마태의 표현을 보면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며 예수를 넘겨 주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나타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급박(急迫)하게 진행시켰던 상황과 유다의 배신이 시기적으로 정확히 맞아떨어져 이 가운데 사단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알게 해준다.

성 경: [눅22: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가롯 유다의 배반]

⭕ 무리가 없을 때 - 이러한 방법은 대제사장들과 의논하여 나왔을 공산이 크다. 2절에서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들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민중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기회나 민중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한편 가롯 유다의 배신이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유다 개인의 측면에서 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귀결로 이해될 수 있다. 유다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하는 탐욕이 있었으며(요 12:4-6) 더욱이 그가 예수를 따른 동기는 다분히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 왕국을 기대한 데 있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2: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 - 마태는 '무교절 첫날'이라고 언급하고(마 26:17) 마가는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고 묘사한다(막 14:12). 유월절의 끝남과 무교절의 시작은 시간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가의 진술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1절 주석 참고). 즉 니산월(4월) 14일 해질 무렵에 양을 잡았으므로(출 12:6) 해가 지면 유대인의 계산법에 의해 15일이 시작되어 무교절의 첫날이 된다.

성 경: [눅22: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예수께서...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지시하는 이 구절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다. 이러한 묘사는 19:29에서도 나타나듯이 누가의 독특한 의도를 암시한다. 즉 예수의 주도로 일이 이루어지며 제자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가서'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명하시는데 10절에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가라고 한 장소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비해야 할 것은 식사를 할 장소와 잡아야 할 양 그리고 무교병과 쓴나물 및 고기를 구울 수 있는 도구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출 12:8).

성 경: [눅22: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여짜오되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 이 질문을 한 자는 예수의 지시를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마가는 제자 중 두 명이라고 언급하였다(막 14:13). 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유월절 식사를 할 장소에 대해서였다. 유대에서 유월절 행사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유월절 음식 역시 예루살렘 성 안에서만 먹어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 때만 되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모여들었다. 따라서 유월절때 예루살렘 성 안에서 유월절을 먹으며 거할 장소를 얻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의 여관(旅館)은 모두 꽉 찼을 것이고 집집마다 사람으로 만원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방을 구하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2:1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 성 안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로 보아 현재 머무는 장소가 성 밖 어느 곳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 진다. 즉 예루살렘 성 외각 지대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감람산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21:37을 보면 예수께서 밤이면 성에서 나오셔서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감람산 기슭의 베다니 마을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Meyer).

⭕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성안 어느 지점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넓은 성 안에 들어가서 물 한 동이를 들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만 막연하게 언급하셨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제자들이 왜 비밀스럽게 그 사람과 만나야 했는지이다. 아마도 성 안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유다가 배신을 한 상황에서 그리고 적대자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행동에 비밀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식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경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혼잡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조용하고 엄숙하게 지내기 위해 비밀리에 장소를 물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본문은 매사의 앞을 내다보실 수 있는 예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을 엿보게 한다.

성 경: [눅22:1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그 집 주인에게 - 여기서 말하는 주인과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제자들을 인도한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 또는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알 수 없다. 또 그 집이 마가의 집일 것이라고 행 1:13 ; 12:12를 근거로 하여 추측하기도 하며 물동이를 가지고 가던 사람이 마가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다만 전승으로 전해질 뿐이다.

⭕ 선생님이 - 이 묘사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나귀 새끼를 구하러 보내면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지시한 장면과 비슷하다(19:31). 직접화법으로 인용되는 문장이므로 '선생님'은 예수 자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시할 때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칭하면서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신생님이라고 호칭했다면 또는 가상의 인물을 가리켜 선생이라고 호칭했다면 아마도 유월절 식사를 비밀리에 하기 의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10절 주석 참조).

⭕ 객실이 어디있느뇨 - 마치 암호(暗號)를 전달하는 듯한 이 어투는 실상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말이다(I.H. Marshall). 이 집이 여관업을 하는 집인지 아니면 민박하는 집인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객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탈뤼마'(*)는 여관이나 여인숙의 방보다는 개인 주택의 객실을 의미한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2:7).

성 경: [눅22:1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 집주인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하는 이 묘사는 이미 유월절을 위한 준비가 갖춰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집주인이 자리를 베풀었다는 말은 헬라어 '에스트로산'(*)을 번역한 말인데 본래 자리를 펴거나 까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완료 분사 수동형으로 이미 융단을 깔고 식탁과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나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미리 부탁을 받고 식사준비를 해두었거나 아니면 언제든지 손님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자리를 펴고 예비된 큰 다락방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방만 예비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서 예비하라'라는 지시로 볼 때 음식까지 준비된 것이 아니라 방만 준비된 것으로 이해함이 적절할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사람들인 까닭에 예루살렘에 집이 없었으므로 잘 아는 사람의 다락방을 빌리려고 한 것이다. 이 다락방의 주인은 필시 예수를 잘 아는 사람이 분명하며 예수에게 매우 호의적(好意的)이었을 것이다. 전하는 정확한 자료가 없지만 예수께 호의적이었던 이 사람의 방은 예수 부활 후 설령 강림 후 복음운동의 주요 기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 경: [눅22:1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유월절 준비]

⭕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 예수께서 일러준대로 모든 일이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이 같은 묘사들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 단순한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신비적 힘이 작용하여 더욱 그 엄숙함과 신비성이 고조된 최후의 만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모든 일에 신적인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성 경: [눅22:1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때가 이르매 - 유월절 식사의 때 즉 니산월 14일 저녁 해질 때를 가리킨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식사의 때를 언급하는 것은 최후 만찬의 엄숙성과 다른 유월절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임을 암시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라고 보여진다.

⭕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예수께서 유월절 식사를 할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제자'(*, 마데케스)라는 말 대신 '사도'(*, 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사도는 제자들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서 대표, 사자 등의 뜻을 지니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예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누가는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월절 식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락방에 '함께 앉았다'고 묘사하는 헬라어는 '아나피프토'(*)의 제2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눕다', '비스듬히 기대다'이다. 아마도 식사하기 위해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그들의 습관에 따라 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본래 유월절 식사는 일어서서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든채로 급히 먹는 것이었으나(출 12:11) 당시는 약식화(略式化)되어 일반 식사와 동일한 형식을 취했다 한다.

성 경: [눅22:1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 식사 때(니산월 14일 해진 뒤)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하루 전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 시간이면 이미 붙들리시어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9:14). 여기서 예수는 유월절 식사를 자신의 고난과 결부시키고 있는데 이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가 단순히 출애굽을 기념하는 식사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앞둔 비장한 각오와 결단이 서려있는 기념적인 식사임을 알 수 있다.

⭕ 너희와 함께 -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누는 의미심장한 친교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죽음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자 하는 심정은 이제까지 함께 활동해 온 지난 날의 모든 추억들을 제자들의 마음속에 되살리고 자신의 일을 제자들이 실천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자들과의 영원한 연대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을 것이다.

⭕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유월절의 식사는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뿌린 후 고기를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서 '유월절을 먹는다'는 말은 '유월절 식사를 한다'는 말인데 '먹다'의 목적어인 '유월절'에 대해서 다른 해석도 있다. 즉 유월절을 식사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식사를 먹는다는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I. H. Marshall). 따라서 유월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카'(*)는 어린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C.K. Barrett, Jeremias). 그래서 식사의 종교적 해석을 시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유월절 식사는 전체적 정황을 볼 때 기념적 성격을 갖는 식사이므로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종교적 식사보다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예수 자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새로운 차원의 식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식사는 다름아닌 예수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는바, 장차 이루어질 그의 죽음을 의식하시고 제자들과 더불어 사전에 기념을 한 선견적 식사였다. 예수는 이 같은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다'는 말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간절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기 때문에 10-12절에서처럼 그는 어렵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고 비밀스럽게 식사 장소를 마련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고(요 14-16장) 성찬 예식을 제정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이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이다.

성 경: [눅22:1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 앞절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고자 간절히 원했던 이유는 이 유월절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기한을 정하고 있는데 그 기한은 유월절이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기까지이다. 여기서 두 가지로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에서 드러났듯이 유월절이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제라는 점이다. 먼저 유월절의 의미가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공동체 국가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아직도 유대 민족은 참다운 유월절을 성취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지배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을 이 피지배자의 위치에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은 분명히 유월절이 아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지도자들은 민중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집권자들의 착취가 민중을 억압하는 상황에서는 유월절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의 죄악성이 뿌리채 뽑아져 변화된 사람이 살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된 유월절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는 그 날까지 유월절 식사를 않겠다는말을 함으로써 참다운 유월절을 기대하도록 제자들을 이끌고 계신 것이다(Jeremias, Ellis 등). 둘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주의 만찬의 친교를 통해 '새로운 유월절'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다음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참예하게 될 만찬은 유대의 전통적 유월절이 아니다. 만민이 참여하게 되는 성찬식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만찬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성찬 예식의 전조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행 10:41). 이 새로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 지금까지 실시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성 경: [눅22:1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서는 먼저 떡을 떼어 축사한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누가는 첫 순서로 잔을 받아 사례한 것으로 묘사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잔을 한번밖에 언급하지 않은 반면 누가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한다. 그리고 누가는 두번째 잔을 언급하면서 잔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는 가장(家長)이 잔을 들어 축사하고 식구들에게 잔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따라서 누가가 첫번째로 언급한 잔은 유월절 식사의 첫잔 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가 언급한 잔은 누가가 20절에서 언급한잔과 의미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식사 후에 마시는 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유월절 식사때는 포도주를 모두 4잔을 마시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누가는 첫째 잔과 마지막 잔을 언급했고 마태와 마가는 마지막 잔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Edersheim).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잔에 대한 의미 부여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다. 그렇다면 세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 식사 순서에 관한 진술에는 모순이 없다. 다만 잔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제를 의미하나 식사 후의 잔(20절)은 특별히 예수의 수난과 그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 너희끼리 나누라 - 사례한 잔을 제자들에게 주며 서로 나누라고 하는 이 장면은 마치 예수는 마시지 않고 제자들에게만 잔을 넘겨 준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런데 15절에서 '먹기를 원했다'는 예수의 간절한 희망을 보거나 당시 같은 잔을 여러 사람이 나누었다는 예레미야스(Jeremias)의 진술이나 관례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잔을 마셨다는 쉬어만(Schurmann)의 주장을 볼때 예수가 먼저 잔을 마시고 제자들에게 차례대로 마시게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 경: [눅22:1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 포도주를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기한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16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식사에 대한 것과 비슷한 어투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구절 역시 두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유월절의 포도주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월절의 포도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월절의 포도주를 나누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눅22:1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 유월절 식사중 두번째 순서에 대한 언급이다. 누가는 17절에서 포도주를 가지고 행한 의식에서 사용된 단어 '사례하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테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축복'이라는 뜻의(마 26:26 ; 막 14:22) 헬라어 '율로게오'(*)를 사용한다. 이는 '찬양한다'(praise),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축복, 축원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카리스테오'나 '율로게오'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축복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큰 빵을 '쪼갠다'는 의미의 '크라오'(*)는 신약 성경에서 식사 때 빵을 나누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24:30 ; 마 14:19 ; 15:36 ; 26:26 ; 막 8:6, 19 ; 14:22 ; 행 2:46 ; 20:7, 11 ; 27:35 ; 고전 10:16 ; 11:24). 큰 빵을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나누어 준 것인지 포도주처럼 자신의 것만 떼고 나머지를 제자들에게 돌려 차례대로 먹게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강조되는 점은 한 개의 빵덩이를 여러 사람이서 나누었다는 것이다.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것'(*, 투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빵, 즉 유월절 식사용 무교병을 가리킨다. 여기서 빵과 일치시킨 '몸'이라는 단어 '소마'(*)는 인간의 전체적인 육체를 뜻한다(Dalman, Behm, Cranfield, Kummel, E. Schweizer). 예수는 자신의 몸 전체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온인류의 희생물로 드리고자 하셨음이 분명하다. 요 6:51에서는 같은 의미의 말을 언급하면서 '소마' 대신 '사릍스'(*) 곧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초대 교회에서 살과 피를 통해 죽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사실과 연관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가 빵 한 개를 여러 사람에게 나눈것은 자기의 몸, 곧 살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이 상징적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예수 자신이 여러 사람을 위해 희생됨과 동시에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먹는 사람 입장에서 볼때 그 빵 즉 예수의 살을 먹는 모든 사람은 예수의 희생, 즉 그 삶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빵이 먹는 사람의 살이 된다는 의미에서 빵과 사람이 하나로 일치되듯이 예수의 살 곧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하나가 되어 예수와 일치된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 나를 기념하라 - 예수는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 '기념하라'는 단어 '아남네시스'(*)는 명사형으로서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한다. 따라서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찬식의 목적은 그와 같은 기억을 되살려 세상에 널리 알리는 선교에 있으며,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선교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오늘날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된다. 이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단순한 애찬식 정도의 감사의 예전으로 지켜져 왔으나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이며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어 성만찬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신학적 차이로 인해 카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주장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서 성찬식 때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는 순간 그것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예수께서 성찬식에 육체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것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카톨릭측의 화체설은 너무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성찬식 때마다 떡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에 너무 큰 의미를 두어 그 의미를 와전시킨 것이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주제 강해 '성찬식의 유래'를 참조하라.

성 경: [눅22:2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 여기 언급된 잔은 유월절 식사 중 마시게 되는 4잔 중 식사 후에 분배되는 마지막 잔으로 보인다. 잔은 단순한 그릇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잔 속에 담겨진 포도주를 가리킨다. 이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이 된다는 묘사는 출 24:8과 비슷한 내용이다. 그러나 누가는 여기서 '새로운'(*, 카이노스)이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계약과 예수께서 세우시는 언약을 구분시키고 있다. 즉 더 이상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구원이 약속되는 새 계약이 성립되었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예수의 희생과 구원의 능력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것이 성찬 예식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성찬 예식은 예수의 말씀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보여 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기념하고 체험케하는 것이다.

⭕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 '붓다'로 번역된 헬라어 '여퀸노메논'(*)은 '여케오'(*)에서 유래한 말인데 '피를 흘린다', '피를 쏟는다'는 뜻과 '술을 붓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붓는다'라는 말은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는 피흘림과 그 죄를 상징하는 포도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성 경: [눅22:2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그러나 보라 -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를 암시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과 대립되는 문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그러나'(*, 플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앞절에서 언급한 '너희를 위해 흘리는 피'로 세운 계약이 지금부터 언급되는 배반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즉 구원의 약속은 배반자를 제외시킨다는 말이다. 배반자에 대한 예고를 강조하기 의해 '보라'(*, 이두)라는 누가만의 강조법을 사용한다.

⭕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 배반자가 제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는 이 같은 누가의 암시는 마태와 마가의 진술과 차이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배신의 예고가 마태와 마가에서는 식사 시작 또는 식사 중에 나타난 것으로 묘사된 반면(마 26:21 ; 막 14:18), 누가는 식사를 마친후에 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 13:26에서는 빵을 한 조각 찍어 준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식사 초반 또는 식사 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는 이 배반의 예고를 다른 복음서들보다 비교적 짤막하고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유다를 직접 지목하고 마태와 마가는 제자 중의 한 명이라고 언급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언급없이 암시적으로만 묘사한 점으로 보아 제자의 배신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식사 후에 배열함으로써 성만찬 예식과 예수에 대한 유다의 배반을 구분하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서 배반자는 '나를 파는 자'(*, 파라디도미)로 묘사되었는데 5, 6절에 이미 언급된 유다의 배신과 돈을 받기로 약속된 이야기를 전제한 것이다. 누가는 파는 자의 손이 함께 상 위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언급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배반자가 예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특히 마태의 경우는 그릇에 예수와 함께 손을 넣은 자가 유다임을 유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을 통해 밝힌다(마 26:25). 반해 식탁 위에 손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손을 가리킬 수 있지만(B. Lohse) 더 확장된 의미로 볼 때 식탁은 식사를 나누는 장소이므로 친교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Rehkopf). 이는 예수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라는 시 41:9의 말과 일치되는 바, 예수의 배신당함이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졌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든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 사실을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케 하시려는 의도였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므로 길이 참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인간 편에서는 다만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선택에의 책임이 뒤따른다.

성 경: [눅22:2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하는 유다의 행위가 이미 예정된 일이었음을 앞절에서 암시한 후 여기서는 자신의 고난이 또한 예정된 것으로서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한다. 예수는 여기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9:22). '작정된 대로 가거니'라는 말은 가장 가까운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고난이 변경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배신과 고난 그리고 죽음이 예측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견되고 있었으며 그러나 예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운명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한대로 의연히 그 길을 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 누가는 앞절에서처럼 예수를 팔 사람을 불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라고 분명하게 저주받을 사람을 지목한다. '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아이'(*)는 저주문에 사용되는 단어이다(10:13 ; 마 11:21 ; 18:7 ; 막 13:17). 이와 같은 저주는 마 27:3-5에 보면 유다가 목매어 죽음으로써 또는 행 1:18, 19절의 언급처럼 몸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 죽음으로써 실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22:2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최후의 만찬]

⭕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 예수가 특정인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 12명 중 어느 누구가 배신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언급함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혼란이 온 것을 보여준다. 12명의 제자 모두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들 중에서 누가 배반할 자인지를 찾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에 논쟁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Surely not I. Rabbi?, NIV)라고 자수하는 듯한 말을 하고 곧이어 예수가 긍정함으로써 논쟁하나 장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마 26:25). 누가는 유다 한 사람보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 전체의 반응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을 유다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눅22:2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누가 예수의 배반자인가에 대해 논쟁한 직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배신자가 누구냐는 심각한 물음에 대한 해결점 없이 갑자기 자신들의 자리다툼으로 이야기가 전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 후 곧바로 감람산으로 간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마 26:30 ; 막 14:26) 누가가 언급한 이 구절의 위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제자들 간에 자리다툼이 있었다는 암시는 9:46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마가도 9:33-35 ; 10:35-41에서 두 차례 인급한 점으로 보아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가에 대한 문제로 갈등(葛藤)이 여러 번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의 배신에 대한 언급과 고난이 임박했다는 분위기에서 9:46과 마찬가지로 자리 다툼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또 접속사 '카이'(*)를 사용하여 앞절과 연결하고 있으며 앞절의 '서로 묻되'(*, 쉬제테인)라는 단어와 상응하여 '다툼'(*, 필로네이키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 본문을 누가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제자들간의 갈등 묘사라고 볼 수 있으며 문장의 위치에 대한 의심도 해결이 된다. '다툼'(dispute)이라는 단어는 22절의 '서로묻되'라는 말 보다 강한 의미로서 '싸움'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따라서 이 같은 강조는 제자들이 배신자에 대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신들의 위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소극적 논쟁에서 '내가 더 크다'라는 적극적 논쟁으로 전환함으로써 제가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회피하고 자신들의 이기적 야욕(野慾)을 드러낸 것이다.

성 경: [눅22:2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 이 구절은 마 20:25 ; 막 10:42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바라며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정치 권력의 예를 들면서 교훈을 베푸신다. 누가가 언급한 '이방인의 임금들'이란 국가의 공권력(公權力)을 장악한 통치자와 그 관료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이방인들의 통치자들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 상황하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로마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미의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주관하다'의 헬라어 '퀴리유오'(*)는 '주인(*, 퀴리오스)이 된다'는 뜻으로서 주인이 노예를 지배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집권자와 민중은 주인과 종의 관계로 되어 있다는 비판적 의미의 말이다.

⭕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 여기서 말하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헬라어 '유에르게테스'(*)는 '좋다'는 뜻의 '유'(*)와 '공적 행동'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곤'(*)이 합쳐져서 된 복합어로서 '선한 일을 위해 힘쓰는 자' 또는 '박애주의자' 등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이 같은 칭호는 이집트나(Ptolemy , Ptolemy) 시리아(Antiochus ) 로마(Trajain) 등지에서 폭군적 지배자들에게 붙여졌고 유다에서도 오니아스 세 대사제(Onias )에게 이 칭호가 붙여졌다(I. H. Marshall).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의 백성 위에 군림하고 최상의 군주로 행세하는데서 그들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며 백성들로부터 칭송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 같은 칭호를 스스로 사용한다. 이 말 역시 폭군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꾸며지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다.

성 경: [눅22:2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 여기서 가리키는 '너희'는 제자들이지만 앞절에서 말한 '이방인들'(Gentiles)에 대칭되는 말이라는 점에서 누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즉 세상의 인간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되어 있고 그 지배자의 횡포가 오히려 정당화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한 것으로 25절에서 제사한 이방인들의 집권자들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누가는 이 말을 소개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즉 이는 당시 교회 내에 자리의 높고 낮음에 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큰 자'(the greatest)에 대비되는 '젊은 자'는 헬라어 '호 네오 테로스'(*)를 번역한 말인데 본래의 뜻은 '아주 어린 자'(youth)를 뜻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큰 자'와 대칭되어 아주 어리고 보잘 것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 지니라 - 참된 지도자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세상의 지배 구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서 나타나는 교권적(敎權的)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뒤엎고 모두가 서로 섬기는 위치에서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 같은 요청이 인간의 모든 공동체가 바르게 유지되고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성 경: [눅22:2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그냐 - 섬김을 받는 자와 섬기는 자를 대비시킨 반문 형식의 이 비유는 앞절의 내용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즉 큰 자가 작은 자로, 지도자가 섬기는 자로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破格的) 명제와 현실적 가치 기준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26절의 내용을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앉아서 먹는 자'는 일반적으로 유대 생활 속에서 종을 둔 주인 또는 앞절에서 언급했던 지도자, 집권자들과 시중을 받으면서 음식을 먹는 손님을 뜻한다. 그리고 '섬기는 자'는 식사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26절에서 언급된 '젊은 자'에 상응하는 말이다. 이와갈은 대비적 비유를 이야기한 후 예수는 너무도 자명한 대답인 앉아 먹는자가 크다고 말하면서 대비적 효과는 고조시키고 있는데 곧이어 언급되는 문장을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

⭕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26절의 내용을 결정적으로 보증하고 확신시키는 이 말은 제자들의 다툼에 대한 훈계의 결론에 해당된다. 특히 예수를 배우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한 이 말은 곧 제자들에게 규범이 되고 모범이 되는 스승을 배워야 함과 아울러 그를 따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친다. 여기서 예수는 지금 자신이 제자들 속에서 섬기는 자로 있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먹는 비유를 들었다는 점에서 예수가 제가들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같은 추측은 17-20절까지의 내용을 전제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한 예수의 역할은 섬기는 자의 모습을 통해 메시야적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예수 사역의 의미를 제시해 주었다는 의의가 있다(I. H. Marshall, J. Weiss). 그래서 바이스(J. Weiss)는, 예수가 시중든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자신은 섬김을 밭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마 20:28). 예수께서는 먼저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뿐아니라(요 13:4) 사랑하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다.

성 경: [눅22:2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나의 모든 시험 중에...함께 한 자들인즉 - 이 구절은 마지막 작별 인사와도 같은 암시를 준다. 이제까지의 공성애 활동을 하는 동안 동고 동락(同苦同樂)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들의 고생을 격려하고 계신다. 24절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제자들의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리켜 자신의 모든 시험 때에 함께 하여 준 고맙고 장한 제자들로 묘사하며 제자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수는 제자들을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모범자들로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들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했던 그 길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갈 것을 격려 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이 예수와 같은 길을 가야 한다는 진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 페이라스모스)이란 '유혹'이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공생애 기간 동안 겪어온 수많은 '위험들' 또는 '고통'과 '시련들'(trial)을 뜻한다.

성 경: [눅22:2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한과 과업을 넘겨 주기전에 그 권한과 과업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여기서 언급한 '나라'는 헬라어로 '바실레이아'(*)이다. '바실레이아'는 국가의 구성 요소인 영토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통치적인 개념 즉 왕권(kingship)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영토적인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통치적인 왕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론 이 왕건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하늘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왕권을 지상에서 받았으므로 이미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예수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있음을 뜻하며 그 선포 내용에 대한 보증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다.

⭕ 나도 너희에게 맡겨 - 이제 하늘로부터 온 그 권한과 권위가 제자들에게로 옮겨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도 그렇게 위임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위임이 하나님의 위임임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건설과 하나님 나라 선포 활동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 뒤에도 중단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눅22:3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내 나라에 있어 - 25-29절이 섬기는 자의 도리를 말한 반면 본절은 그 역할과 사명을 다한 제자들이 받을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데 종말적 심판의 때에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마 19:28절에서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라고 언급되는바 이는 세상이 변혁된 새세계 곧 종말론적(eschatological)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임을 암시한다.

⭕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 그 날에는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함께하는 잔치가 벌어진다. 16절에서 하늘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먹지 않겠다는 예수의 말을 생각하면 이 잔치는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해방(解放)과 구원의 유월절 축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 마 19:28에서는 '열 두 보좌'라고 말함으로써 분명히 제자가 모두 참여 할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자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느 진술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누가는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포함시킬 수 없어 슷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I.H. Marshall). 그러나 숫자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한다. 즉 열 두 지과는 곧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통치 구조의 변혁이다. 즉 25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통치 구조는 사라지고 26절에서 언급된 형태의 통치 구조가 실현되어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형태의 통치는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여기서 섬기는 통치가 확장되어가고 선포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암시되고 있다.

성 경: [눅22:3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청구 하였으나 -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였듯이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격려와 보상에 대한 약속을 한 직후 베드로의 배신(背信)을 예고한다. 그러나 독특한 점은 유다의 배신 예고에서는 언급한 바 없는 사단의 역할에 대해서 예수가 직접 언급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배신에 대한 저주와 경고라기 보다는 애정을 담고 있는 충고와 걱정이다. 특히 여기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두번씩 반복하여 부름으로써 충고의 간절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단이 청구했다'는 표현은 배신의 행위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적(他者的)인 악령의 힘에 의해 이끌리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까부르듯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니아조'(*)는 '체를 흔들다', '체를 치다'는 뜻이다. 본절에 은유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의 정확한적용례(paradigm)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대체로 다음 새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는, 알곡과 쭉정이를 걸러내는 시련을 통하여 참된 제자와 거짓 제자들을 분리한다는 견해이다(Jeremias). 둘째는, 사단이 시련의 체를 통해 제자들을 참소(讒訴)할 증거들을 찾고 있다는 견해이다(Foerster).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욥을 시험하여 악한 증거를 찾아 욥을 공격하고자 했던 사단의 시도를 상기케 한다(욥 1:6-12). 셋째는, 여기서 체를 흔드는 것은 제자들을 구분하여 걸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의 믿음을 입증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Lanrange, Fuchs, Schurimann). 이 세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있다. 곡식을 체질하는 것은 원래 쪽정이를 날려 보내기 위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전후 문맥으로 보아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는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거니와 문제는 제자들이 시련의 와중에서 서느냐 아니면 넘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성 경: [눅22:3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 여기서 배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배신의 책임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굳세지기를 기도했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믿음이 떨어질때 예수께 대한 배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를 시사해 준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우두머리의 위치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베드로에게 가장 큰 신뢰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 한다. 여기서 '돌이킨 후'의 헬라어 '에피스트레포'(*)는 '회개한다', '돌아선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베드로가 변절(變節)할 것이라는 직접적인 예고없이 '회개하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변절을 간접적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서 제자들을 향해 슥 13:7을 인용하여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여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마 26:30-32 ; 막 14:26-28) 누가는 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누가는 제자들의 자랑스럽지 못한 변절의 모습을 축소하고 완곡한 형태로 수정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2:3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 베드로는 예수의 말 속에서 암시된 뜻을 이해하고 예수와 함께 끝까기 같은 길을 가겠다고 호언(豪言)한다. 마태와 마가는 다른 사람이 다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남과 비교하여 강경하게 장담한다(마 26:33 ; 막 14:29). 전체적으로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충성하겠다는 장담과 변절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베드로의 변절을 강조한다.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부드럽게 묘사한다.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성격이 매우 급한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자랑하기를 즐겨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충성스러웠고 주를 사랑하고 남 사랑하는 마음이 강하고 아울러 훌륭한 통찰력(通察力)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굴하지 않겠다는 자기 과신(self-confidence)에 빠진 베드로는 끝내 난관에 부딪혀 예수를 부인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성 경: [눅22:3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예고]

⭕ 베드로야 - 요 1:42에 의하면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가 직접 지어준 '반석'이란 뜻의 이름이다. 이렇게 예수 자신이 직접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른 것은 이곳에만 나타나는데 각별한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변할 수 없는 굳고 단단한 의지로 믿음을 지켜야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는 듯하다.

⭕ 오늘 닭 울기 전에 -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변절의 정확한 시각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이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언급된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월절을 하루 넘긴 니산월 15일이다. 또 유대인의 시간 분배가 해질녘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15일 새벽 닭 울기 전이라고 보면 된다. 막 13:35에 보면 시간을 한밤중과 닭 울 때, 그리고 새벽을 따로 구분하는데 동틀 새벽 이전의 깊은 새벽이 닭 울 때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닭 울기 전이므로 새벽 3시경으로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시각은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는 독특하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이라고 언급한다(60절 주석 참조).

성 경: [눅22:3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검을 사라]

⭕ 전대와 주어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 - 본서에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여 보낸 적이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12제자를 파송해 보냈고(9:2-1) 또 한 번은 70인을 선택하여 두명씩 짝지어 파송했다(10:1-5).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도록 요청하는이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신다. 즉 전대, 주머니 그리고 신이라는 어휘는 10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하며 9장과는 옷과 식량에 대한 언급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예수가 지시하는 기억은 70인 파송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0장에서는 12제자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제외된듯 하지만 사실 제자들이 함께 선교에 참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제자들은 당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활동을 했을 때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예수와 일치된 견해를 보여준다. 이 말은 선교 활동 당시 전도를 받은 사람들의 친절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이며(10:7) 그들이 예수와 제자들의 활동을 환영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성 경: [눅22:3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검을 사라]

⭕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성 경: [눅22:3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자]

⭕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성 경: [눅22:3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천국에서 큰 자]

⭕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 '검을 준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이 체포될 것을 언급한 예수께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칼(sward, NIV) 두 자루를 예수께 보여 주는 것이었다. 제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의 체포에 대해 칼로서 저항하자는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칼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칼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칼은 50절에서 제사장의 귀를 친 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칼의 주인은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가 된다. 그러나 칼 주인과 칼 사용자를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중거는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6:15과 행1:13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 중에 갈릴리에 근거지를 둔 무력 혁명 단체인 셀롯 당원(Zealots) 시몬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칼이 시몬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것도 증명되지 않은 추측이다. 당시 여행자들이 호신용 칼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칼은 단순한 호신용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족하다 하시니라 - 칼을 내민 제자에 대한 예수의 이 대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칼 두 자루는 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예수 자신이 체포와 수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저항 의지를 보여준 것은 예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의 의지를 묵살하는 뜻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역설적인 꾸지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장소를 기도하는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도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성 경: [눅22:4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 그곳에 이르러 - 습관적으로 왔던 장소임을 말해주는 '그곳'은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로 추측된다(마 26:36 ; 막 14:32). 이곳은 제자들과 함께 습관적으로 모여 기도하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위험을 피하여 은둔하던 장소이기도 하다(Leaney).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기도하시면서 사역을 준비하셨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이제 그는 이 땅에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는 마지막 기도를 잠으로 대신한다(45, 46절).

⭕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 여기서 시험이란 곧 닥칠 체포와 고난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체포되신 후, 이로 인해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이미 아셨고 따라서 그들이 낙심하고 절망하며 시험에 들지 않기를 주의시키신다. 아울러 예수 자신도 심각한 고난과 시험을 직면하여 함께 기도하신다.

성 경: [눅22:4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 사자가 하늘로부터...힘을 돕더라 - 예수의 고뇌에 찬 모습과 그 두려움은 심장의 파열로 죽음에 이를 지경으로 묘사한다. 마태는 예수의 고뇌를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기록한다. 예수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늘의 도움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이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로부터의 사자(angel, NIV)가 예수를 도왔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천사가 예수를 도왔다는 기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언급되었다(마4:11 ; 막 1:13).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후 기진하셨을 때 천사가 그를 도와, 기력을 회복하시고 성령충만한 사역을 하셨으며 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아울러 이곳에서도 예수께서 고뇌(苦惱)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기도하시며 기진하시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도와 끝까지 고난의 길을 다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성 경: [눅22:4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고뇌의 기도]

⭕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일어나' 라는 말대신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그 말씀을 하신 후 세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와서 자는 것을 보시고 돌아가 다시 똑같은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와 자고 쉬라는 말을 하신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의 체포 순간까지 예수와 연대(連帶)하지 못하고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강조된다. 반면 누가는 이 같은 모습을 언급하고 싶지 않아 세 차례의 기도와 책망을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제자들은 지난 밤의 긴장되고 무거운 만찬과 예수의 고별의 말씀들과 예수께서 배반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흥분 등으로 매우 긴장된채 밤을 맞이하여 기도에 들어갓다. 아울러 그들은 기도하며 예수의 죽음에 대해 인식하면서 슬픔 감정과 함께 심신이 피로하였을 것이다. 이런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그들은 기도하면서 쉽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밤은 그들이 쉽게 잠들 만큼 평온한 밤이 아니었다. 그 밤은 온통 죽음의 권세가 온 세상을 짖누르고 있었으며 예수는 온몸으로 이 세력과 홀로 맞서고 계셨다. 이러한 예수를 두고 제자들은 잠들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예수의 힘이 되어 주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이전에 수많은 밤을 지새며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이 밤에 단 하룻밤 몇 시간 동안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다. 결국 이들의 잠이 그들에게 엄청난 시험과 좌절과 절망으로 나타났으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 빠지게 하였다.

성 경: [눅22:4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한 무리가 오는데 - 유다가 오는데...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일단의 무리들이 유다의 인솔로 예수께 다가오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이 장면을 다가오는 '무리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사람들임을 밝히면서 그들의 손에는 칼과 몽치가 들렸다고 언급한다. 아울러 추측컨대 이 일단의 무리들 가운데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는 로마 병정들과 성전을 경비하는 유대 병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유다가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으며 누가는 유다에 대한 배신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온다고 기록하는데 누가는 '유다라 하는 자가' 온다고 경멸적 표현을 함으로써 유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눅22:4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유다가 예수께 입맞추기 위해 가까이 올 때 예수께서는 유다의 심증을 꿰뚫어 보셨다. 덧붙여 마태와 마가는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위해 검을 들고 따라온 병사들과 입맞춤을 신호로 체포한다고 약속했음을 밝힌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실제로 유다는 인사와 한께 입맞춤을 하게 되고 곧이어 예수를 체포하게 된다. 반면 누가는 입맞춤을 시작하려 했을 뿐 성공하지 못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유다의 속임수에 넘어가 체포된 것이 아니며 유다의 행위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점과 예수가 직접 유다의 이름을 부르는 탄식조의 어투를 통해 유다의 배신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겟세마네 동산은 깊은 밤인데다 감람나무로 인해 더욱 어둑캄캄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한다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체포자들은 예수를 쉽게 알아내어 체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고, 그 신호는 가룟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으로 결정되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행해야 할 입맞춤을 가룟유다는 파렴치(破廉恥)한 배반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성 경: [눅22:4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 '좌우'(jesus' follows, NIV)란 예수 주위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지칭한다. 제자들은 유다와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을 보고 예수의 예언대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태와 마가는 이러한 언급 없이 무리들이 예수를 잡았다고 말한다. 역시 누가의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위험을 함께 느끼며 반응을 보이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제자들은 예수에게 38절에서 보여 주었던 칼로 적들을 향해 대항할 것을 요청한다. 본문은 질문 형태이지만 50절에서 칼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질문 속에 칼을 사용해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같은 제자들의 행위를 의분(義憤)에 찬 긍정적 행동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성 경: [눅22:5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 칼을 사용한 사람이 요 18:10에 따르면 베드로였다. 그리고 요한은 종의 이름이 '말고'(Malchus, NIV)였음을 밝힌다. 이 같은 상황은 매우 긴박하고 전면적인 싸움의 단계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드로가 보여 준 행동은 용감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자신의 스승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스승을 보호하고 위기 상황에서 구출하겠다는 기특한 마음에서 나온 의리있는 행동으로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다함없는 충성이요 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獻身)의 사랑이었다.

⭕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칼을 내리친 결과 그 종은 오른쪽 귀가 떨어졌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라고 밝히지 않고 단순히 귀가 떨어졌다고 밝힌다. 반면 누가와 요한은 오른쪽임을 밝혀 사건의 정확성을 보강한다. 한편 대제사장의 종처럼 신체의 어느 부위가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시중들고 봉사하는데 부적격자로 판명이 되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을 못했다(Jos., Antiq. 14:366). 그리고 유대 사상에 의하면 종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그 종의 주인이 공격을 받고 모독을 당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종 말고가 귀를 잘린 것은 그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종으로 활동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직업을 잃어버리고 생계를 위협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울러 자신의 종이 공격을 받아 간접적으로 모독을 당한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의 제자들을 탄압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같은 사실들을 너무도 명확히 아셨으며 그래서 종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고 제자들의 공격을 만류하셨던 것이다.

성 경: [눅22:5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이것까지 참으라 - '이것까지 참으라'라는 말을 KJV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하며 RSV는 '이만큼 해두라'(No more of this)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준다. 즉 '이것까지'라는 말은 '헤오스 투투'(*)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참으라'는 뜻의 '에아오'(*)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참뜻을 몰랐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체포가 어떤 의미를 주며 그의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따라서 제자들의 이런 무분별한 저항은 오히려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이 표현의 중심은 치료하는 기적에 있지 않고 치료하는 행위에 있다. 즉 '참으라'고 한 말에 대한 구체적 행위로서 적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다. 즉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들의 흥분을 막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도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진술이다. 한편 마태는 예수께서 검을 도로 꽂으라고 지시하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교훈과 함께 당신이 힘이 없어 잡히는 것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어투로 묘사한다(마 26:47-56). 한편 예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출 21:24)는 구약 율법의 말씀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 5:39)는 사랑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으셨으며, 또 이를 몸소 실천하셨다. 따라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시는 사랑의 완성을 보여 주셨다(23:34). 그는 실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원형이었다.

성 경: [눅22:5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들의 정체를 언급하는 이 구절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는 무리가 등장하는 초기에 무리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파송된 사람들이라고만 언급한다(마 26:47 ; 막 14:43). 그러나 누가는 무리의 정체를 예수가 체포되는 순간에 언급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밝히며 서기관들 대신 성전의 군관들(the officer of themple guard, NIV)을 언급한다. 누가가 성전의 군관들을 언급한 것은 4절에서 유다가 예수를 팔기 위해 의논한 대상이 대제사장들과 군관이었다고 언급한 것과 일치된다. 아울러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제사장들이 직접 체포하러 오면서 성전 수비대를 이끌고 온 것은 타당하다. 따라서 누가의 진술이 설득력이 매우 강하다. 한편 이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몄다. 간악한 질문을 통해 책잡으려고 하는가 하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모함하고, 귀신들렸다고 비방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 그들의 비방과 함정에 넘어가지 않고 복음을 전하셨다. 그런데 이제 때가 이르자 유대의 사악한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는 죽음의 무리들에게 넘겨지게 된다.

⭕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 이 구절은 37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 자신이 불법자와 동류(同類)로 취급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확인하는 말이다. 즉 예수는 범죄자로서 공권력에 의해 체포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된 이후 3년 동안 틈만나면 예수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고, 또 그들은 군중들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밤에도 정당한 근거가 없어 강도를 잡듯이 중무장하고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야심(夜深)한 시각에 나타났던 것이다.

성 경: [눅22:5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잡히신 예수]

⭕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의 말씀대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낮에 선전에서 가르치실 때 공식적으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성전에서 낮에 예수를 체포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할 정당한 사유가 없었으며 아울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체포한 뒤의 군중들의 반응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성전에서 예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가룟유다의 배반과 유대 지도자들의 기회 선택이 안성맞춤으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 앞에서 상기시킨 말, 즉 예수의 활동에 열광적으로 따랐던 민중들의 열기에 상대적으로 지도자들이 위축되고 두려워했던 때는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빛이 득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이제 사태가 역전되어 다시 어둠이 득세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마태와 마가는 이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서 언급하고 있는데(마 26:56 ; 막 14:49) 누가는 3절에서 유다의 배신이 사단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 바 있듯이 예수의 체포 역시 악의 집단적 세력에 의한 것임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어둠의 시대가 주는 고통과 치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의 자세는 초대 교회가 경험할 박해가 마땅히 겪게될 제자됨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어둠의 세력에 의한 것이라면 승리의 심판자로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도 고난과 박해, 그리고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성 경: [눅22:54]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예수를...대제사장의 집으로 - 이 구절은 예수를 체포한 주동 세력이 대제사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때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다(마 26:57). 그는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A.D. 18, Valerius Grat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비텔리우스 총독(A.D. 36)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18년간 대제사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그의 장인인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을 역임했었다. 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 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한편 여기에 나타난 누가의 표현에 의하면 체포와 연행의 순간에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음을 묘사한다. 톡히 마가는 한 젊은이가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표현을 통해 상황의 급박성과 제자들의 도망침을 구체적으로 강조한다(마 26:56 ; 막 14:51, 52).

⭕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 누가는 베드로의 행동에로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어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여 연행(連行)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대제사장의 집까지 그 뒤를 따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다른 제자들처럼 역시 베드로도 도망하였다가 멀리서 에수를 좇아 대제사장 집의 뜰까지 들어간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을 노출시킨다.

성 경: [눅22:5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한 비자(婢子) -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한 일행이었음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어린 여종이었다.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이 여종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막 14:66) 요한은 문지키는 여종이었다고 언급한다(요 18:17). '한 비자'라는 표현은 당시에 어린아이와 여성들은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보잘 것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제자들 중에서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와 대비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강조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의 보도와는 순서적으로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마당에 들어와 불을 쬔 후 곧이어 공회의 심문이 있고 희롱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소개된 다음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을 소개하는데 누가는 곧바로 대제사장의 집에서 베드로가 부인을 한 후 사람들로부터 예수가 희롱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공회의 심문(審問)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상 누가의 방식이 더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신분이 발각된 때가 예수의 심문과 희롱이 있은 후보다는 뜰 가운데 불쬐는 하인들 속에 들어갔을 때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기 때문이다.

⭕ 주목하여 가로되 - 어린 여종이 다른 곳에서 불쬐는 베드로에게로 가까이 왔는지 아니면 본래 베드로가 들어가기 전부터 불을 쬐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후자가 적절하다고 본다. 이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종은 베드로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말을 하는데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하고 있다.

⭕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 어린 여종은 베드로를 지시하면서 그리고 눈을 베드로를 향해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폭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대명사 '그'(*, 아우토)는 예수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베드로에게 직접 '너'라는 2인칭을 사용하여 심문하듯이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함께 있었다'는 말은 체포 현장에 있었다는 뜻보다는 그 이전의 활동 현장에서 목격하였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성 경: [눅22:5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베드로가 부인하여 - 베드로는 여자 하인이 폭로한 사실에 대하여 부정하며 어린 여종이 '그'라고 지칭한 예수를 '저를'(*, 아우톤)이라는 같은 인칭 대명사를 받아 답하고 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진술과는 차이가 있는데 본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어린 여종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묘사하여 베드로가 거짓말을 매우 능청스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성 경: [눅22:5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 두번째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을 언급하는 이 구절은 공관 복음서 전체가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다. 첫째, 누가는 베드로가 처음 부인을 한 후 조금의 시간이 흘렀음을 언급하는 반면 마태는 베드로가 앞문까지 나갔다고 말하며 마가는 앞뜰로 나갔다고 언급한다. 둘째, 폭로자에 대한 언급인데 누가는 '다른 사람'이라고 불특정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다른 비자'라고 하여 처음 폭로한 자와 구분하고 있으며 마가는 단순히 '비자'라고만 하여 첫번째 폭로자와 구분되는지 아니면 다른 비자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누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장소의 이동 없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반대로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베드로가 첫번째 공격을 받고 그 공격을 피하여 장소를 옮겨간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 너도 그 당이라 - 첫번째 여종과는 달리 두번째 사람은 베드로를 향해 2인칭 '너'(*, 쉬)라는 말로 직접 심문하듯 폭로하고 있다.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처음의 누가처럼 '이사람'이라는 말로 베드로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를 가리켜 '그 당이라'(*, 여스 아우톤)고 공격하는데 여기서 '여스'(*)는 '에크'(*)가 모음 단어 앞에 올 때 변화된 형태로서 그 뜻은 속격으로 어디에 '속한' 파당적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 베드로의 두번째 부인은 단순하게 부정만 하고 있는데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하여 부정하며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며 극구 부인을 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성 경: [눅22:5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한 시쯤 있다가 - 두번째 베드로의 부인이 있은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부인이 너무 완강했으므로 더 이상 사람들이 증거없이 주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또 한 사람이 - 누가는 세번째 폭로자를 두번째와 다른 또 한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곁에 있던 사람들이라고 복수형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6:73 ; 막 14:70).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을 언급하면서 베드로의 정체를 폭로 한 자가 예수 체포 당시 베드로의 칼에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임을 밝히고 있다(요 18:26). 말고의 친척은 자신이 예수를 체포하는 현장에서 베드로를 목격했다고 폭로한다.

⭕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 세번째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내세워 매우 구체적 증거와 함께 강경하게, 그리고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다. '장담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스퀴리제토'(*)라는 말은 '확실하게 주장한다'. '자신있게 주장한다'의 뜻을 갖고 있다. 특히 마태는 베드로의 말소리가 예수와 한 통속임을 증명한다고 증거를 대고 있는데 아마도 누가와 마가가 공통되게 예시하는 증거인 베드로가 갈릴리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준인 듯하다. 즉 베드로는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성 경: [눅22:6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 베드로의 세번째 부인은 마태가 언급한 첫번째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비슷하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세번째 부인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여기서도 드러나는 사실은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베드로의 배신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반면 누가는 베드로의 변절을 가능한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 닭이 곧 울더라 - 이 구절은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의 예언이(34절) 적중되어 완성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극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세 번의 부인을 닭이 울음으로써 끝마치는데 마가만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막 14:30에서 예수가 언급한 '닭이 두번 울기 전'이라는 예언과 일치되고 있다.

성 경: [눅22:6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내시니 - 예수가 돌아서 베드로를 응시한다는 이 구절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누가만의 자료이다. 여기서 '보다'(*, 에네 블려센)는 '뚫어지게 바라보다'는 뜻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담아 응시하는 모습을 말한다. 예수는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때 자신이 베드로의 변절에 대해 예언했던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베드로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 보았을 것이다. 예수가 보낸 그 눈길은 베드로에 대한 질책의 눈길보다는(Schneider) 베드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눈길이었을 것이다.

⭕ 베드로가 주의 말씀...하심이 생각나서 -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가 했던 말씀이 생각났는데 그 말씀은 34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예고이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을 생각했다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의 눈길과 마주친 사실을 부각하는데 아마도 누가는 베드로의 참회가 예수와의 인격적 교감에 영향 받았음을 암시하려는 듯하다. 이 같은 추측은 누가가 베드로의 변절보다는 참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 초기 기독교의 박해 가운데서 변절자에 대한 정죄보다는 참회의 회개를 통한 새사람 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눅22:62]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베드로의 부인]

⭕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막 14:72과 그대로 일치하는 이 구절은 베드로의 변절에 관한 이야기의 마무리로서 극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베드로가 문밖으로 나와 '통곡했다'는 표현은 참회에 대한 더 이상 할 수 없는 극적이 표현으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밖으로 나갔다'는 베드로의 행동은 세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배신했던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며 변절의 과거 모습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변절자로서 불신앙 속에 있는 사람에게 베드로처럼 배신의 자리를 떠나 눈물로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누가는 전하려 한 듯하다.

성 경: [눅22:63]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모욕당하시는 예수]

⭕ 지키는 사람들이 -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성전 수비대의 사병일 수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예수를 희롱하고 때린 사람들을 대제사장이라고 밝히는데(마 26:65-68 ; 막 14:63-65) 누가의 묘사가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I. H. Marshall).

성 경: [눅22:64,65]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모욕당하시는 예수]

⭕ 선지자 노릇하라 - 예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히라고 요구하는데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말이다. 마태의 경우는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소리치는데 당시 민중들이 예수를 '그리스도', '선지자'로 고백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구절이다. 마태나 마가의 묘사처럼 주먹으로 치며 얼굴에 침 뱉고 손바닥으로 때렸다는 말없이 누가는 간단하게 때리고 욕했다는 말로만 표현하는데 누가는 예수의 치욕스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공관 복음서 모두 예수가 희롱을 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 53:3에서 예언된 메시야의 수난 모습에 누가의 묘사가 가장 잘 어울린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희롱받는 모습을 예언의 성취로서 보았음에 틀림없다.

성 경: [눅22:66]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날이 새매 - 누가는 매 사건마다 시간적 구분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유월절 식사 때는 초저녁이었고 식사 후에 상당한 시간 동안 마지막 가르침을 행하셨으며 감람산으로 이동하여 기도하는 동안 시간은 상당히 흘러 예수 체포의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연행되고 공의회 대표들이 모여들고 베드로가 세차례에 걸처 부인하는 동안 또다시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묘사한 후 닭 울음 소리로 동틀 무렵 전의 새벽 시간을 암시했다(60절). 그 다음 베드로의 참회(懺悔)후 약간의 시간이 경과된 것을 암시하면서 날이 밝아왔음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날짜는 니산월 십오일로서 유월절 다음날 무교절의 첫날 아침이 된다.

⭕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 52절에 의하면 예수를 체포했던 자 중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직접 예수를 연행하여 가야바의 집으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가야바의 집으로 공의회 대표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말을 언급하고 한밤 중에 가야바의 집에서 공의회가 열린 것으로 묘사한다(마 26:57-68 ; 막 14:53-65). 그런데 누가의 표현을 보면 시간적인 차이도 있지만 장소에도 차이가 있는 듯하다. 누가는 예수가 대제사장 집에서 산헤드린 곧 공회로 끌려갔음을 보도하기 때문이다. 마태나 마가의 진술보다 누가의 사건 전개가 더 설득력을 갖는데 이유는공회(公會)는 낮에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보도의 신빙성 문제도, 한밤중에 심문한 내용을 예비 심문으로 마 27:1과 막 15:1에서 짤막하게 언급된 죽이기로 의논했다는 보도를 누가의 언급과 같은 정식 회의로 본다면 해결된다. 어쨌든 누가의 이야기가 더 명료하고 사실적이다. 여기 언급된 '공회'(*, 쉬네드리온)는 장로, 서기관, 대제사장들로 구성된 유대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데 대제사장이 의장이 되어 유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처리하지만 사형(死刑)에 관한 문제는 로마 총독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어용 기관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공식 회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2:67]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 이미 한밤중의 회의에서 가야바가 이와 동일한 질문을 한 바 있다(마 26:63). 따라서 이 질문은 이미 확정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재차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질문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나 마태와 마가는 의장격인 대제사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마 26:62 ; 막 14:60). 또 누가는 마 26:59-61과 막 14:55-59의 내용 즉 예수를 죽이기 위해 증인들을 동원하여 개재판하는 장면도 생략했다. 세 복음서 모두 질문의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인데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통해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여김을 받으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권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보고 듣고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는 커녕 백성들을 미혹하는 이단자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스스로 진리의 파수꾼으로 자처했지만 실상은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나머지 진리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나아가 일반 백성들을 선동하여 비진리쪽으로 돌아서도록 유도하는 가증한 거짓 선생들이었다(11:52). 한편 본구절의 내용은 각 복음서마다 약간의 표현 차이가 있다. 누가는 단순히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고 있고 마가는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기록함으로써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비교적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필요성이 없음을 예수는 질문자의 불신앙을 들어 단정하셨다. 이미 예수는 이 재판이 공정한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 따라 꾸며지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또 그리스도임을 증명해 보이는 따위의 요구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임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에 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이기로 결심하여 음모를 꾸민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명의 말도 소용없음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성 경: [눅22:68]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 실제로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메시야와 관련된 질문을 수차례 던지신 바 있으나 그들은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20:3-8:41-44). 이 같은 표현은 상호간에 대화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관계 단절을 상징하는 말이다. 서로간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지는 분명하다. 그들과 더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질문자의 말에 대하여 분명하게 긍정하신 것으로 묘사한다(마 26:64 ; 막 14:62).

성 경: [눅22:69]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 예수는 질문자들이 이해할 수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이 말씀을 하신다. 마태와 마가에서 약간의 내용상 차이는 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고 있다. 차이점을 보면 먼저 누가는 이후에 되어질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으나 마태와 마가는 단 7:13의 내용인 하늘 구름을 타고 올 것이라는 재림 약속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볼 것'이라는 예언을 첨언(添言)함으로써 재림이 임박함을 시사하고 있다(마 26:64 ; 막 14:62). 누가의 관심은 강도와 같이 불법자 취급을 당하고 이제까지 모욕받아온 사실에도 불구하고이 시간 이후부터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 후로'(*, 아포 투 뉜)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후를 가리키며 부활을 통한 승리의 확증을 지시한다.

성 경: [눅22:70]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 예수의 말을 들은 후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타낸 반응은 예수의 말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언급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들에게는 예수의 발언이 신성모독(神聖冒瀆)으로 들렸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 간접적인 시인이지만 예수는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아들임을 시인하고 있다. 예수의 이 같은 긍정은 대적들에게 자신을 변호하거나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드러 내는 주권적 선포의 의의를 지닌다. 예수는 지상적, 정치적 차원의 메시야가 아니라 세세토록 온 세계를 권능으로 통치하며 만물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구속주로서의 메시야이신 것이다.

성 경: [눅22:71]

주제1: [인자의 체포당하심]

주제2: [심문당하시는 예수]

⭕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 예수의 발언에 대한 공의회의 반응은 몹시 신경질적이었는데, 누가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는 확실한 증거가 예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고 선언하는 공회의의 획신에 찬 결정을 소개하면서 공회의 회의를 마무리짓는다. 그들의 확신에 찬 증거는 신성모독적인 예수의 발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이 상황을 더욱 격렬하고 신경질적인 장면으로 묘사하는데 대제사장이 자기의 옷을 찢고 예수가 참람한 말을 했으므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선언한다. 이같는 언급은 레 24:16을 근거로 한 것이다. 마 27:1과 막 15:1에서는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빌라도에게로 끌고갔음을 언급하는데 여기서도 누가는 산헤드린 전체 회원이 정죄(定罪) 한 듯한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의 보도가 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산헤드린의 권한에 있어서 사형 결정권은 로마 당국에 있으므로 산헤드린의 결정은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에서 언급한 사형에 대한 언급은 공식 선고가 아니라 그들의 희망 사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 법정으로 예수를 끌고 간다.

성 경: [눅23: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무리가...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 산헤드린 회의가 동틀 때 시작되었으며 공회 결정 후에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려왔기 때문에 그 때는 이른 아침을 지난 오전의 어느 시각일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는 A.D. 26-36년에 걸쳐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으로서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를 통치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그 이유는 유월절을 맞이해 각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끌고간 자들에 대해 누가는 언급할 뿐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말하지않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에 따르면(마 27:1,2; 막 15:1)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 즉 산헤드린 대표들이 끌고 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누가가 언급한 '무리'도 역시 문맥상 공회에 참석한 사람 모두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무리' 앞에 '온'이라는 뜻의 헬라어 '하관'(*)을 사용하여 '온 무리'(공동 번역)라고 표현한다. 또 누가는 예수를 단순히 '끌고 가다'(*, 아고)라고 표현하는데 비해 마태와 마가는 '결박하여, 끌고갔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누가가 예수께서 희롱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마가 마태와는 대조적으로 간결하게 언급한 것처럼(22:63-65), 여기서도 예수의 치욕적인 모습에 대한 묘사를 피하려는 듯한 누가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성 경: [눅23: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고소하여...그리스도라 하더라 - 세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예수를 고소한 것으로 언급하는데 상황 묘사에 있어서 누가의 표현이 마태와 마가의 표현과 차이가 있다. 첫째, 누가만이 예수를 고소한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즉 (1) 민심을 현혹(眩或)하여 질서를 위협하고 (2) 로마 당국에 바치는 세금을 거부하도록 백성을 선동하며 (3) 자칭 왕이요 메시야라고 지칭하여 왕권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은 사회.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이같은 음모는 이미 예수가 성전에서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 의해 모의된 바이다(20:20). 고소자들이 종교적 이유를 뺀 이유는 종교 문제는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기 때문에 빌라도의 관심 밖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에게는 종교 문제가 호소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 사회.정치적 이유는 총독으로서 빌라도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법적인 제판이 가능하리라고 그들은 판단하여 사회.정치적 이유만을 강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차이점은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직접 심문하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11-12; 막15:2-3). 그러나 누가는 고소자들에 의해 나열 될 죄목 중 마지막 항목인 자칭 왕이라는 말에 대해 빌라도가 예수에게 확인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여기서 누가의 묘사가 더 합리적이고 사실적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왔으면 이유를 먼저 밝히는 것이 당현하며 마태와 마가의 경우처럼 예수를 끌고 오자마자 빌라도가 먼저 '네가 왕이냐?'고 묻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는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어준 것이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꾸며진 일임을 더욱 선명히 부각(浮刻)시키고 있는 셈이다.

⭕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 예수에 대한 두번째 죄목인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해도 민중들이 무서워 못할 정도로 예수의 인기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첫번째로 제시한 죄목인 민심 교란죄는 해당될 수 있으나(19:42-21:38의 내용은 민중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예수가 성전을 장악하여 혁신적인 가르침을 행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25에서 예수는 분명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로 대답하여 대적들로 하여금 책잡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3: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대표들로부터 고소를 접수하고 재판을 진행하면서 예수를 심문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는데 고소자들이 제기한 세번째 죄목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 세 가지는 공히 로마 황제 가이사에 대한 반역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세번째 '왕이냐?'라는 문제만 확인하면 세 가지 죄목에 대한 판결도 자연히 내려질 수 있는 것이다.

⭕ 네 말이 옳도다 - 원문상으로 이 대답은 긍정인지 부정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쉬 레게이스'(*)를 마샬(I.H.Marshall)은 '그 말은 네 말이다'라고 번역하며 KJV나 RSV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옮겼다(Thou sayest it, KJV; You have said so, RSV).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인데 네가 생각하는 대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빌라도의 질문을 가볍게 지나쳐 버리면서 무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예수는 산헤드린의 체포와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의 공정성(公正性) 내지는 합법성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생각하는 왕이라는 개념과 그들이 왕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염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피하려고 질문과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한 듯하다. 실로 예수는 온 우주와 만물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모든 권세를 소유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나(계 17:14) 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말하는 왕권이란 현세적 정치적 의미에만 국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는 22:67, 68에서 언급한 바처럼 대화가 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는 이 말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라 질문자의 판단으로 이해하라는 암시로 여겨진다.

성 경: [눅23: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 빌라도의 무죄 판결을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잇다. 빌라도는 예수가 반역을 도모한 흉악한 범죄자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즉 예수가 군대를 조직하거나 무력적(武力的) 힘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증거나 조짐을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빌라도의 처신이 우유부단했다는 사실을 한층 더 뚜렷이 부각시킨다. 즉 무죄함을 알고도 대제사장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즉적으로 석방 의사를 나타낸 것으로 묘사하였다(마 27:13-18; 막 15:4-10). 마태는 독특하게 빌라도의 판결에 그의 아내가 개입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아내가 꿈에서 이 재판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입하지 않도록 종용했다고 소개한다. 따라서 마태는 빌라도의 무죄 판결이 합법적 공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암시한다. 반명 누가는 빌라도의 판결이 지니는 객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 경: [눅23: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고소자들이 승복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언급된 '더욱 굳세게'라는 헬라어 '에피스퀴오'(*)는 '역설하다', '강해지다'(grow strang) 또는 '고집하다'(insist)의 뜻을 가진 말로서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 예수의 활동이 고소자들의 입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 이 말은 예수의 행동 반경이 유대 전체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며 예수의 영향력이 유대 전역에 미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예수의 활동 영역은 유대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요 4:1-42)와 갈릴리, 베레아(막 10:1), 데가볼리(막 5:20), 가이사랴 빌립보(막 8:27), 이두매, 두로, 시돈(막 3:8) 등 이방 지역까지 포함하는 팔레스틴 전역이었다.

⭕ 갈릴리에서부터...소동케 하나이다 - 다시 한번 예수가 민중을 선동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활동 영역이 '온 유대'임을 보충하여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중앙인 예루살렘까지 진입해 왔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심된 단어인 '소동케 하나이다'는 헬라어로 '아나세이오'(*)인데 '흔들다', '충동하다', '동요시키다', '선동하다'의 뜻을 갖고 있다.(막 15:11). 누가는 2절에서 '백성을 미혹'하였다고 표현하여 예수가 단순히 백성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가르쳤다고 하는 반면(*, 디아스트레포) 여기서는 그 의미가 한층 고조된 표현인 '아나세이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도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판결에 대해 불복(不服)하고 더욱 거세게 예수를 고소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임을 밝힌 것은 당시 폭력 혁명을 추구하던 헤롯당 저항 운동의 근거지인 갈릴리와 관련지으려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를 폭력적 반란을 일으킬 선동자라는 인상을 빌라도에게 강하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23: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 빌라도가 고소자들의 제 고소를 듣고 나타낸 반응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놀라운 어투이다. 즉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로운 사건 전개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헤롯에게로 넘길 수 있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즉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 아래있기 때문에 갈릴리는 사람인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면 쉽게 자신의 난처함이 해결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안드로포스 갈릴라이오스(*)는 촌놈이라는 뜻을 내포한 경멸적(輕蔑的) 표현이다(I. H. Marshall). 빌라도는 갈릴리라는 말에 예수가 시골에서 올라온 별 것 아닌 청년쯤으로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예수를 대한 듯하다. 한편 6-12절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중 본서만이 나오는데, 누가는 이미 앞에서도 두 공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헤롯 안티파스에 관해 언급했다(3:1; 9:7-9; 13:31).

성 경: [눅23: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심문]

⭕ 헤롯의 관할 - 헤롯은 B.C.4-A.D.39까지 갈릴리 지방과 베레아 지방을 통치했던 분봉왕 안티파스(Antipas)를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빌라도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헤롯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보고자 했으며 그가 관연 누구인지 알고자 했었다(8절; 9:7-9).

⭕ 헤롯에게 보내니 - 여깃 '보내니'라는 동사가 '아니펨포'(*)라는 것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되는데 이 단어의 뜻이 '위로'(*, 아나)라는 뜻과 '보내다'(*, 펨포)라는 뜻이 결합된 복합어이기 때문이다. 즉 '위로 올려 보내다'라는 뜻이라면 빌라도 보다 헤롯이 상부에 있다고 생각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헤롯은 빌라도 총족 아래 있는 분봉왕이었다. 따라서 단어는 단순히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반대로 헤롯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보낼 때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도 누가는 이 단어를 단순히 '보내다'(send)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관에게 보냈다는 주장은(Meyer, Farrar) 적절하지 못하다.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것은 첫째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골치아픈 문제에서 손을 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헤롯의 관할 사건을 자신이 처리함으로써 헤롯을 소외시키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配廬)로 생각할 수 잇다(12절 주석 참고).

⭕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 누가는 헤롯 안티파스가 자기의 관할 구역이 아닌 예루살렘에 마침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이유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하다. 즉 종교적 이유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성 경: [눅23: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 빌라도가 예수를 헤룻에게 보내었을 때 헤롯의 반응은 의외로 '심히 기뻐하는'(*, 에카레 리안) 것이었다. 누가는 기뻐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헤롯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고 싶어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누가는 이같은 헤롯의 마음을 9:9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죽었던 세례 요한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말하거나 엘리야나 옛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 되살아 온 것이라고 믿었다는 소문 때문에 헤롯은 예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9:7-9). 또 하나의 이유는 소문에 들은대로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음을 누가는 덧붙이고 있다. 고대의 왕들은 자신의 즐거움읊 만끽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 재주를 공연하게 했다. 헤롯 또한 이런 류의 호기심을 갖고서 예수를 마술사 내지는 특출한 재주꾼으로 취급하였던 것 같다. 그는 예수로부터 심심풀이용 오락과 유흥을 기대했을 뿐 영적인 은혜나 심오한 사상 등에 대한 진지한 소원은 전혀 결여한 상태였다.

성 경: [눅23: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여러 말로 물으나 - 누가는 헤롯이 예수를 호의적(好意的)으로 맞이했음을 언급한 후 예수에게 많은 질문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6절에서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는 '묻되'라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여기서는 '여러 말로 물었다'고 말한다. 이는 헤롯이 예수를 오랬동안 보고 싶어한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누가는 헤롯이 무엇에 관해 질문하였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마도 고소 내용과 자기의 관심사에 대해서 함께 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헤롯의 질문은 오랫동안 진행 되었고 고소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10절).

⭕ 아무 말도 대잡지 아니하시니 - 어떤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마태와 마가도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가 침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마 27:12-14; 막 15:4,5). 이 같은 예수의 침묵에 대해 사 53:7의 예언의 성취라는 해석이나(J. Jeremias) 정직한 질문이 아닐 때에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원칙이 복음서 안에서 일관되고 있다는 주장(Hooker)도 설득력이 있다(22:67,68 주석 참조). 헤롯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수다스러운 질문의 홍수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조용하고 위엄있는 침묵으로 맞서셨다. 아무튼 예수는 빌라도나 헤롯, 그리고 고소자들의 언행에 대해 대답할 가치 조차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빌라도에게 '네가 말한다'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한 것도 침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3절 주석 참조).

성 경: [눅23:1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힘써 고소하더라 -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했을 때 무리들이 더욱 격렬(激烈)하게 고소한 묘사를(5절) 연상하게 하는 이 구절은 헤롯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예수를 헤롯에게 데려왔을 때 고소자들은 이미 이유를 말했을텐데 또다시 '힘써'(*, 유토노스) 고소하는 것은 고소자들이 빌라도의 무죄 판결에 대해 거세게 불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3절) 호의적인 헤롯의 심문 과정을 고소자들이 참을 수 없어 다시 강력하게 정죄를 촉구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소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도 빌라도 법정에서는 단지 '무리'라고 언급된 데 비해 여기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헤롯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과 또 빌라도의 심문이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헤롯마저 그러하자 온갖 허위 사실들을 총 동원하여 예수를 고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성 경: [눅23:1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헤롯이...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 이같은 헤롯의 행위는 22:63-65에서 언급된 희롱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8-10절의 내용과 15절에서 빌라도가 언급한 내용 즉 헤롯이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헤롯이 정죄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고 다면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는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헤롯의 태도가 8절과 달리 돌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9절에 언급된 예수의 태도에 대해 헤롯은 예수께 대해 심한 불쾌감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은 예수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자신의 질문에 대해 대답조차 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은 분봉왕이기는 하지만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인 헤롯에게는 자신에 대한 무시 내지는 모독으로 생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는 10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고소자들이 거세게 정죄하기를 촉구하였고, 특히 고소자의 신분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점이 헤롯에게 큰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하다. 즉 최고의 종교 지도자인 자들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율법학자 서기관들의 요구를 헤롯은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신정국(神政國)으로서의 전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정치와 종교의 밀착된 야합이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이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이 예수에게 무시당했다는 굴욕감과 막강한 종교 세력의 압력 때문에 예수가 죄없음에도 멸시하고 희롱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고 멸시하기는 했지만 고소자들의 요구대로 구체적 죄목을 붙여 정죄하지는 못하였다.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재판을 넘겨주는데 '빛난 옷'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다. 이는 부자나 천사들이 입는 옷임을 암시하기도 한다(행 10:30; 약 2:2,3; 계 15:6;19:8)(I. H. Marshall). 무슨 색깔의 옷인지도 밝히지 않았는데 상황은 다르지만 요 19:2에 의하면 붉은 옷을 입혔다고 언급되는데 그렇다면 왕들이 입는 옷이라고도 볼 수 있다(Klostermann). 그러나 단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빛나는 옷이 귀하고 위엄있는 옷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예수의 치욕적(恥辱的)인 희롱과 극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가장 귀한 사람 복장을 갖추게 하여 멸시하고 희롱하는 효과를 극적으로 나타내 보이고자 한 듯 하다.

성 경: [눅23:1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헤롯 안티파스의 심문]

⭕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빌라도와 헤롯이 어떻게하여 원수지간이 되었는지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서 예수를 넘긴 '당일'(*, 엔 아우테 테 헤메라)에는 친구가 되어 서로 협조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13:1에서 언급한 바처럼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실에 대해 헤롯이 자기 관할에 대한 월권으로 생각하여 빌라도를 미워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Farrar). 그렇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넘겨 준 것은(6,7절) 헤롯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빌라도의 배려로 보일 수 있으며 화해의 제스쳐라고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친구가 되었다는 말은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에게 내린 결정이 같은 내용이었다는 의미와 예수를 서로 넘겨줌으로써 서로를 존중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마도 누가의 의도는 예수의 무죄에 대한 확증으로서 원수지간이었던 빌라도와 헤롯이 공통되게 예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을 강조학 있는 듯하다. 그러나 누가의 의도와는 일치되기 어렵다고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역설적으로 비꼬아 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이제까지는 원수로 지내던 자들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서로 미루면서 책임을 회피(回避)하려는 태도를 비판하고 두 사람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해석 보다 설득력이 약하다.

성 경: [눅23:1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너희가 이 사람을...끌어왔도다 - 빌라도는 입회한 모든 이들에게 그것을 확인시키고 있는데 고소 이유는 2절에서 고소자들이 언급한 세 가지 고소 이유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백성을 미혹한 죄이다. 즉 백성들을 거짓으로 속여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독특한 것은 3절에서 빌라도가 문제시한 것은 '유대인의 왕이냐?'하는 문제였는데 여기서는 백성을 현혹시킨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왕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자신이 무죄 판결을 내렸고 헤롯도 그 판결에 사실상 동의했다는 점에서 고소자들이 제시한 다른 죄목을 다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 누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독특한 강조법 '보라'(*, 이두)로 말을 시작하고 있다. 한편 '사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크리노'는 기소 중인 죄수를 법적으로 심사한다는 의미의 법정 용어이다(고전 9:3). 빌라도는 입회인들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심문했던 사실(3절)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이 말은 4절에서 언급된 자신의 무죄판결을 다시 확인시켜줌과 아울러 이제까지의 재판 과정을 사실대로 입회인들에게 열거하여 앞으로 있을 판결에 참고하라는 암시이다.

성 경: [눅23:1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으고 - 헤롯으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빌라도는 다시 분명한 판결을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동원시킨 듯 하다. 즉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이라고 표현된 일반 공직자들 즉 관료 행정적인 지도자들(*, 아르콘) 그리고 일반 '백성'(*, 라오스)을 불러 모으고 공식 재판을 열 채비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입회하다록 한 것은 자신의 판결이 공정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인식시키고 판결 뒤에 올지 모르는 잡음을 없애고자 하는 빌라도의 숨은 의도인 것으로 보여진다.

성 경: [눅23:1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헤롯이...보내었도다 - 이 구절은 원문상 8-10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전제로하여 '너희들이 헤롯에게로 가서 예수가 죄없음을 확인하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빌라도는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비추어 볼 때 예수를 선동가 내지는 모반 지도자로 선고 할 증거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판결이 초래할지도모를 만일의 사태를 염려하여 헤롯을 끌어들이고 있다.

⭕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역시 무죄였는데 4절에서 내렸던 무죄 판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칭 왕이라는 문제에 대한 판결 때에는 무죄 사실을 분명히 선포한데 반해 여기서는 백성을 미혹케한 죄를 언급하면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살해를 주도하는 세력들을 의식한 타협적 자세를 제시한다.

성 경: [눅23:1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발라도의 2차 심문]

⭕ 때려서 놓겠노라 - 빌라도가 제시한 타협안은 채찍으로 때린 후 석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빌라도의 결정은 고소를 해온 대제사장과 그 일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이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였다. 어쨌든 빌라도는 무려 네 차례에 걸쳐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죄없는 자를 벌함으로서 로마의 영광인 공정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재판관으로서의 기본적인 공정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편, 네 차례의 석방 노력이란 (1) 이 고소는 종교 문제이니 유대인들에게 해결하라고 했던 점(요 18:31; 19:6,7) (2) 이 사건을 헤롯에게로 넘기려 했던 점(7절) (3) 유월절 특사(特赦) 대상으로 추천한 사실(막 15:6) 그리고 (4) 태형만 내리고 석방하겠노라고 제안한 점이다.

성 경: [눅23:1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 빌라도의 석방 제안에 대한 고소자들의 반응은 격양된 아우성으로 터져 나왔다. 여기서 언급된 '무리'란 1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빌라도가 모이게 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발자인 대제사장 일파들인 것으로 보인다. 마 27:20과 막 15:11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권하고 충동질하여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소리를 지른 것으로 언급된다.

⭕ 이 사람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놓아주소서 - 무리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것에 반해 그들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고 정확한 것이어서 미리 준비된 듯한 인상을 준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의 충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마가의 말이(막 15:11) 설득력을 갖는다.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하면서 예수는 죽이라고 외치는 이같은 요구는 대제사장들이 오랫동안 노려왔던 욕심이었다(19:47; 20:19; 22:2-6). 여기서 누가는 무리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는 제안을 먼저 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마태는 빌라도가 예수를 석방시키기 위해 명절 때마다 최인 하나를 놓아주던 관례를 적용하고자 제안한 것으로 언급한다(마 27:17). 죄수 석방에 대한 결정권은 로마 총족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가 먼저 제안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는 모인 무리들이 바라바와 같은 살인범을 석방하라고 외치기보다는 차라리 예수와 같은 선량한 자의 석방을 선택하리라고 내심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중 심리를 자극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내고 있다.

성 경: [눅23:1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대분분의 많은 사본들은 17절을 생략하고 있지만 일부 사본들에서는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은 '절기가 되면 반드시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절기법이 있음'을 밝히는 것인데 이는 마 27:15과 막 15:6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필사자들이 덧붙인 것으로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M. Metzger, I. H. Marshall). 그러나 누가의 문맥에서는 17절이 생략된 채 18절과 곧바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사실적으로 군중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어 자연스럽다.

성 경: [눅23:1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이 바라바는 -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바라바는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며 살인을 서슴지 않은 혁명가였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있던 유대에는 독립을 위한 반란이 많았으며 반란의 지도자들은 영웅시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사랑과 인내를 가르치는 예수보다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바라바가 더 귀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물론 군중들은 예수께서 수많은 권능을 행하실 때에는 한껏 예수를 좇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체포당하신 처지가 되자 이내 예수를 배격하게 되었다.

성 경: [눅23:2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예수를 놓고자 하여 -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 무리들에게 다시 제안하고 있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하며 반대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 많은 죄악성을 부각시킨다.

성 경: [눅23:21]

주제1: [인자의 죽음과 수난]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 18절에서 언급된 무리의 반응처럼 또 다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을 묘사하고 있다. '소리질러'의 원어 '에페포눈'(*)은 ...에게 크게 부르짖어 외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빌라도를 향해 거세게 항의하는 것이며 미완료 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무리들이 계속하여 소리질러 항의한 것으로 보인다.

⭕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 그들의 항의가 18절에서보다 더욱 거칠어 졌음을 시사하는 이 구절은 운율을 담은 연호와 같은 형식을 취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두번 반복한다. 따라서 무리들의 요구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거세지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처음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자하는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음모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같은 음모가 대제사장에 의한 것임을 마가는 밝혔다(막 15;11). 한편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민 21:9; 시 22:15; 슥 12:10 등에 예언되어 있는 바 처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허용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이 실제적으로 진행된 것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의 손을 통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대속의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신 것이지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자들은 구세주를 살해한 범인들 중에 속하게 된 셈이다.

성 경: [눅23:2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되 - 16,20절에 이어 빌라도가 세번째로 예수를 석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데 누가는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는 빌라도의 의지를 강조하고자 '세번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같은 누가의 강조는 빌라도를 호의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로마 정부와의 대립적 관계를 가급적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이 고위직의 로마인으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1:1-4).

⭕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 사무적이 아닌 안타까운 주관적 감정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예수의 석방을 위한 빌라도의 노력이 인간적인 정의감에 바탕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즉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해야 할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는데 무리들이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빌라도 자신의 양심으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일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세번째로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빌라도는다시 한번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분명하게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티아'(*)은 죄가 될만한 근거 또는 원인을 말한다.

성 경: [눅23:2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 세번째의 빌라도 선언 역시 무리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으며 계속해서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저토록 요구하는 십자가 처형은 본래 카르타고에서 생겨난 처형법이었는데 로마 제국에서도 중죄인에 대해 이 형벌을 사용한 것 같으며 본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도 십자가 처형이 잘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잔혹한 처형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주장은 마침내 관철되었다. 누가는 그들의 아우성이 '이겼다'고(*, 카티스퀴온) 표현하는데 강조점은 빌라도가 무리들의 힘에 밀렸다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보다는 오히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지도자들에게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성 경: [눅23:24,2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빌라도의 2차 심문]

⭕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빌라도가 대제사장 및 그 일파들의 음모와 거센 항의와 요구에 불복하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허락하여 넘겨 주었다는 말로 예수께 대한 재판은 종결되었다. 여기서 예수를 넘겨받은 자는 예수를 죽이라고 요구했던 유대인들인데 비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이 총독의 군병으로 언급되고 있다(마 27:27; 막 15:16). 이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 속에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를 위한 노력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누가에게서도 군병이 개입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36절) 누가의 강조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형에 처했다는 점에 있다. 또 누가의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 묘사는 예수를 고소자들에게 넘겨준 이유를 설명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마가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예수를 넘겼다고 언급하는 반면(막 15;15) 누가는 어쩔 수 없어 예수를 내어 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를 죽음에 내어준 동기야 어떠했든지간에 빌라도가 자신의 양심과 법의 공정성을 묵살한 채 부화뇌동했던 사실은 명백한 과오요 죄악이었다 하겠다. 그에게 있어 예수는 비록 무죄한 자였으나 민중의 폭동을 무릅쓰고라도 구할 만한 가치는 없는 자였다.

성 경: [눅23:2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 제판이 끝난후 예수를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가는 장면이다. 빌라도가 예수를 넘겨주었던 때와 같이 '저희'가(25절) 예수를 끌고 갔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끌고 갔다'이다. 36절에 '군병들'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군병들인 듯하나 누가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반면에 마가는 빌라도의 군병임을 암시하고 있으며(막 15:16) 특히 마태는 '총독의 군병'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마 27:27). 이와 같이 누가가 예수를 끌고 간 자들을 모호하게 언급한 것은 빌라도에게 보였던 호의적 입장과 같이 로마인들이 예수의 사형집행에 깊이 관여했다는 인상을 가급적 피하려고하는 의도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 27:27-31과막 15:16-19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면, 즉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인계받은 다음 희롱하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장면을 누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 앞에서 언급한 누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하여 준다.

⭕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서 현재 리비아의 트리폴리(tripoli)를 말한다. 세 복음서 모두 시몬이 우연히 지나다가 이 일을 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구레네 사람들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있었고(행 6:9)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 구레네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행 2:10; 11:20) 시몬은 해외에 거주하는 유대인 즉 디아스포라였던 것으로 보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는 언급하지 않지만 마가는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밝히고 있는데(막 15:21) 아마도 두 자녀가 당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또 누가와 마가는 시몬이 시골로부터 오던 중이라고 언급하며 여기서 말한 시골(*, 아그로스)는 농촌이나 들판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성 밖에서 오던 중이라는 의미로 보이며 따라서 이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 밖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 마태와 마가는 공통되게 '예수의 십자가'라는 말을 함으로써(마 27:32; 막 15:21) 이제까지 십자가를 예수가 져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형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는 점에서(Plutarch) 예수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군인들이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행군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밤새껏 심문당하고 희롱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예수를 좇게 하더라 - 이는 누가만의 표현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아마도 누가는 이 구절을 삽입하면서 참다운 제사장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12제자들이 모두 예수의 곁을 떠난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시몬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제자이며 참다운 기독교인의 자세임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눅 9:23 주석 참조).

성 경: [눅23:2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백성과...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 - 예수가 가는 고난의 행렬을 말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내용으로 본서에만 나온다(27-32절). 여기서 여자들만이 애통하여 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같이 애통하여, 울었다. 즉 본문 번역을 '백성과 여자들의(*, 라우 카이 귀나이콘) 큰 무리가 가슴을 치며 울면서 뒤따랐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누가는 이같은 무리 속에서 특히 여자들의 애통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가 갖고 있는 여성에 대한 독특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1:26-56; 2:36-38; 7:36-50; 8:1-3, 43-48; 13:10-17; 24:1-10). 여자를 다른 복음서와 달리 부각시키고 있는 누가의 의도는 당시 천대받던 여자들이 제자의 길을 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과 하늘나라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천대받는 자의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막 9:35-43 주석, 눅 18:16-17과 22:24-27 주석 참조). 뿐만 아니라 이는 여성의 인격적 지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성 경: [눅23:2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예루살렘의 딸들아 - 뒤따르는 무리들 특히 여자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여 우는 것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31절까지 묘사되며 19:41-44에서 언급된 내용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울며 십자가 뒤를 따르는 여자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있지만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사 1:8; 10:32; 37:22; 미 4:3; 슥 2:10; 9:9)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 이 말을 하기 전 예수는 자신을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바 이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통하고 슬퍼해야만 할 일이 전제되는 것인데 예수는 구원사적 의미에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 구원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는 애통해하는 관심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정작 마음 아프고 가슴칠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성이다. 이같은 예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 언급이 19:41-44에 나오고 있다. 또 십자가상에서 기도한 내용, 즉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가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무지(無知)였다.

성 경: [눅23:2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보라 날이 이르면 -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하신 단어 '보라'(*, 이두)로 시작되는 구절이다. '날이 이르면'이라는 표현은 종말에 관한 언급 때 사용되는 상투어 '때가 이르리니'(17:22), '그 날에'(17:31; 21:23)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메라이'(*) 앞에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 '날'이 언제인지 한정짓지 않는다. 따라서 이 '날'을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을 예언한 것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를 종말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그 종말은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 역사 속에서 내리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로도 이해할 수 있다. '날'이 복수로 언급된 사실은 한 시점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최종적 종말의 때까지 계속되는 현재적 심판의 날들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 준다.

⭕ 수태 못하는 이와...복이 있다 하리라 - 21:23에서 예수께서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수태 못하고 해산하지 않고 젖 먹이지 못한 여인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축복 선언을 하신다. 결과적으로 21;23에서 처럼 아이 밴 여인들과 젖먹이를 둔 여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저주이다. 이렇게 완곡어법을 쓴 것은 계속적으로 저주하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저주 선언은 다산(多産)과 많은 자녀가 축복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가치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며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 날에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을 의지하여 전혀 새롭게 변혁된 사람만이 요구되고 살아 남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실제의 한 예로서 A.D.70년에 로마 장군 디도(D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여자들과 아이들이 미처 도피하지못하여 많은 화를 입었다.

성 경: [눅23:3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신들에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 심판과 저주의 날에 저주를 받게 되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산이 무너져 자신들을 덮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묘사의 강조점은 그날의 심판과 저주의 가공할 무서운 상황에 있는데 이 호소의 목적은 호 10:8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가려주고 막아 달라는 뜻이다. 반대로 둘째는 고통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산이 무너져 내려 자신을 덮어 죽임으로써 고통을 잊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계 6;16). 아무튼 강조점은 심판과 저주의 무서운 고통에 있다.

성 경: [눅23:3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 격언구 형식의 이 구절은 28-30절까지의 내용을 압축 요약한 것이다. 푸른 나무는 싱싱하고 힘찬 것으로서(시 1:3 참조) 무죄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늙고 힘 없는 것으로서(렘 5:14; 유 12절 참조) 거짓되고 죄악스러운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푸른 나무를 예수로, 마른나무를 불의한 유대인으로 대비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Bengel, Meyer, Godet, Bruce). 혹자는 푸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융성 시기로 보고 마른 나무를 예루살렘의 쇠퇴기로 비유하여 그 멸망을 예고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Gilmour). 또한 쉥크(Schenk)의 경우는 일반적인 죄인들과 예수를 처형하고 선지자들을 처형했던 죄많은 유대인들을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유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본절은 심판의 엄격성과 가공할 위력을 보여 주려는데 강조점을 둔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 경: [눅23:3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골고다의 길]

⭕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가 사형장으로 끌여 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한다. 이 두명의 사형수는 십자가상에서 신학적으로 의미 심장한 질문과 대답을 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다(39-43절). 뿐만 아니라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 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한다. 아울러 이는 22:37과 사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를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두 행악자가 구체적으로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한다. 아마 살인과 방화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이다(41절 참조).

성 경: [눅23:3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심자가 처형]

⭕ 해골이라 하는 곳 - 예수가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정확한 지명은 언급되지 않고 '...라 불리워지는 곳'이라는 불명확한 어투가 사용된다. 이 어투와 같이 이 장소가 어디를 말하는지 고증하기가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다(Bengel, Goldet, Plummer). 다만 분명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이다(히 13:12). 부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마 27:33; 막 15:22) 누가만은 헬라어로 번역하여 '해골'이라는 뜻을 지닌 '크라니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점으로 보아 누가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이방 나라들에 대한 배려를 엄두에 두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 누가는 예수의 양 쪽에 범법자 두명이 같이 못박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 레스타이)들이 양 쪽에 못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치욕스러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가 '강도'라는 말 대신 다소 부드러운 표현인 '행악자'(*, 카쿠르구스)를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 십자가에 못박고 - 마침내 예수가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박히는 모습이다. 누가는 못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마태는 못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Passover)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에(38절) 언급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하다.

성 경: [눅23:34]

주제1: [인자의 수단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신다. 이 기도문은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으며 본문에 대한 진정성 시비가 문제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본은 본문 구절을 괄호 안에 넣어 언급하는 반면 대다수 사본은 본문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J. Weiss, Klostermann, Easton, Creed, Schenk).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인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본 구절을 28-31절에 언급된 내용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다(행 3:15).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은 사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소위 예수의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첫번째에 해당한다. 가상칠언의 내용을 한마디씩으로 요악해보면 (1) 용(容, 본절) (2) 낙(樂, 43절) (3) 자(子, 요 19:26) (4) 기(棄, 마 27:46; 막 15:34) (5) 갈(渴, 요 19:28) (6) 성(成, 요 19:30) (7) 혼(魂, 46절) 등이다.

⭕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본다(Blinzler). 뿐만 아니라 시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성 경: [눅23:3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 로마 군병이 언급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를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 상에 붙어있는 죄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사람 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capital punishment)으로부터 면죄(amnesty)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하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그리고 장로들이 함께 조롱하면서 종교적인 문제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 보자며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증명되는지 보자고 하며 희롱한 것으로 묘사한다(마 27:42-44). 아마도 마태는 유대인을 의식하여 문제 곧 종교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또 마태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언급하여 이방인에게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성 경: [눅23:3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 누가는 십자가 형장에 있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마치 백성들은 조롱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다. 반면 마태와 마가는 지니가는 사람도 예수를 모욕하며 조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도 누가의 의도가 넌지시 드러나는데 누가는 예수에 대한 모욕 행위의 내용과 범위를 가능한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지도자들의 모욕 장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구하다'라는 말은 예수의 활동 가운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W. Foerster).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기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다. 구약의 외경 에녹서에서는 이 말이 '하늘의 인자'를 가리키며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본절에서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누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눅23:3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신 포도주를 주며 - 군병드이 예수께 신 포도주를 준 사실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이다. (2) 요 19:28에 나와 있듯이 예수께서 '목 마르다'(I am thirsty, NIV)고 하신 사실을 고려하건대 목을 축이기 위해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3) 또 하나는 사형 집행자가 관례에 따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무적으로 주었다는 주장(Zahn, Farrar)도 가능하다. 이 견해는 마취 효과를 내는 쓸개를 포도주에 탔다고하는 마태의 기록이나(마 27:34), 시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마시게끔 했다는 다른 두 공관복음서상의 기록 등에 의해 뒷받침 받는다. 그러나 시 69:21의 성취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이다.

성 경: [눅23:3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십자가 처형]

⭕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 -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이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국어로 씌어져 있었다. 즉 히브리어, 로마어, 헬러아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된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oaradoxical)으로 예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이다.

성 경: [눅23:3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 예수의 좌우에서 못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다. 두 죄수에 대한 누가의 언급은 이미 32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시(注視)될 필요가 있다. 엘리스(Ellis)는 두 죄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 이야기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마태와 마가는 두 죄인이 같이 예수를 욕했다는 사실만 언급하고 만다(마 27:44; 막 15:32). 범죄자가 예수를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rengstorf).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하다.

성 경: [눅23:40]

주제1: [인자와 수난의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 예수를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의 본성이 규명된다. 예수를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동일한 죄를졌다는 말로 역이해 될 수 있으나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족으로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경: [눅23:4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 예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한다. 이 죄인은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하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예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Bormhauser, E. Lahse),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다. 즉 예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이다. 또한 누가는 '아토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옳지않은',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가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성 경: [눅23:4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띤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나라에'라는 표현 중에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엔'(*)은 '...안으로'(into) 혹은 '...와 관련하여'란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이 죄수는 예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았던 것이다. '밈네스코'(*)는 '좋은 것을 기억하라'는 뜻으로서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이다.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다.

성 경: [눅23:4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좌우편의 두 강도]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 파라데이소스)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pardes)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 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 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I. H. Marshall).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J. Jeremias).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연관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눅23:4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제 육세쯤 되어 - 예수의 운명에 대한 묘사에 앞서 그 시각을 언급하면서 누가는 정확한 시각을 지시하지 않고 어림잡은 시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쯤'이라는 비교 부사 '호세이'(*)를 사용하고 있다(3:23; 9:14,28; 22:41,59 비교). 반면에 마태는 '제 육시로부터'(마 27:45) 마가는 '제 육시가 되매'(막 15:33)라고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다. 막 15:25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시각이 제 삼시였는데 그렇다면 예수는 못에 박힌 채 세 시간을 달려 있었던 셈이 된다. 현대의 시간 구분에 따르면 오전 아홉시부터 정오까지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신 시각은 제 구시이다.

⭕ 해가 빛을 잃고 - 세 복음서 모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고 공통되게 기록하며 누가만이 이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 표현이 천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밝은 때라고 할 수 있는 제 육시경부터 제구시까지 어둠움이 임했던 사실로 볼 때 단순히 구름이 가려 어두워진 것은 아니라 하겠다. 한편 이 어두움에 관해 혹자는 가견적(可見的)으로 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이적으로 보는가 하면(Luther, Calvin, Zahn), 또는 어떤 사람은 이것이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으심을 슬퍼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Morris). 이중 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성 경: [눅23:4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 세 시간에 결쳐 어두움이 깔린 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언급된 '휘장'(*, 카나페타스마)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친 휘장인 것으로 보인다(출 26:31-33).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또는 안식일과 제사 때마다 들어갔으며(출 27:21; 30:7; 레 4:7; 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 16:1,2; 히 9:7). 이유는 성소에는 제사장들의 제사 도구와 예물이 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에(레 16:2) 지성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누가는 휘장이 찢어짐을 '찢어졌다'(*, 에스키스데)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누가는 휘장의 '한가운데'(*, 메손)가 찢어졌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마태와 마가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언급하는데 이러한 세 복음의 표현은 휘장이 완전히 찢어졌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사실은 예수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히 10:19-22).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예수의 육체와 동일시하였다. 구약 시대에는제사장이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적(中保的)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이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히 3:1)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벧전 2:9). 또한 이는 위선과 형식주의로 부패해진 유대교의 가증스로움에 대한 심판 경고라는 측면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성 경: [눅23:49]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 -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의 측근자와 고향 사람들을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마무리 짓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아는 자들'은 예수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 특히 예수의 제자들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에 관해서는 마태와 마가는 몇몇 여인들의 신분을 밝히며 구체적으로 언급하나 (마 27:55,56; 막 15:40,41) 누가는 여기서 어떤 여인들인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이미 8:2,3에서 여자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에 더이상 밝히지 않은 듯하다.

⭕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관망의 의미로 해석되거나 두려워하는 비겁함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무서워하며 멀직이 따라갔다는 말처럼 그들도 예수의 일당이라고 붙잡힐까 하는 두려움으로 예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 보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다소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떠나갔지만 이들만큼은 떠날 수 없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흠모했던 분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예수의 처형대(處刑臺)로 쫓아가고 싶었으나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어 또 주위의 일정한 공간을 경비하고 있었으므로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 경: [눅23:4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아버지여...부탁하나이다 - 운명 직전에 부르짖으신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다. 누가의 표현은 마태나 마가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누가는 예수의 운명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뒤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와 마가는 예수가 죽은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27:50,51; 막 15:37,38). (2) 마태와 마가는 십자각 위에서 예수가 두번 크게 소리지른 것으로 밝히면서 첫번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밝혔지만 운명 직전에는 크게 소리만 질럿다고 언급한다(마 27:46,50; 막 15:34,37). (3) 마태와 마가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신포도주를 예수에게 준 사실과 희롱하는 장면을 언급하지만(마 27:47-49; 막 15:35,36) 누가의 경우 전혀 그러한 언급이 없다. 이 같은 차이는, 누가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차이는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상징적 사건을 예수의 죽음 전에 기록함으로써 예수께서 구속 역사를 온전히 완수(完遂)하신 후 운명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이같은 추측은 요 19:30에서 언급된 바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후 운명하신 사실과도 잘 어울린다. 두번째 차이는, 마태와 마가의 표현에 나오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순종하는 예수의 모습과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 할 죽음에 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세번째 차이 역시 희롱당하는 수치스런 예수의 모습을 가급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 운명하시다(*, 여세프뉴센) -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표현할 때만 사용된 이 단어는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숨을 쉬다'라는 뜻인데(막 15:37 주석 참조) 마태는 독특하게 '영혼이 떠났다'(*, 아페켄 토프뉴마)라고 언급한다.

성 경: [눅23:47]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백부장이...정녕 의인이었도다 - 백명의 군대를 지휘하는 백부장의 고백을 통해 예수의 의로움을 증언하는 내용으로서 앞서 41절에서 사형수가 고백했던 예수의 의로움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사형 집행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의 이같은 고백은 이제까지 당했던 예수의 수치스러움과 고난이 정당(正當)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를 의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 된 일'(*, 토 게노메논)이란 세 시간에 걸쳐 해가 빛을 잃고 땅에 어둠이 덮인 사건과 휘장이 찢어진 사건을 말한다(44-46절). 한편 마태는 휘장이 찢어진 사건 외에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려 부활하는 성도와 예수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마 27:51-53) 이같은 일을 보고 백부장외 예수를 지키던 사람까지 함께 고백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은총과 신적 능력의 나타남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반응이다(2;20; 5:25; 7:16; 13:13; 17:15; 18:43). 또 평행본문 마 27:54; 막 15:39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반면 누가는 '의인'(*, 디카이오스)이라고 말하는 데 이방인을 주로 염두에 둔 누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의인'이라는 법정 용어가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성 경: [눅23:48]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운명하심]

⭕ 구경하러 모인...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 백부장의 증언을 소개한데 이어 누가는 사형 집행을 구경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있다. '구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리아'(*)는 신약 성경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며 일반적으로 극장의 쇼(show)를 구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무리들 중 대부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생각하고 몰려들었지만, 너무도 참혹한 예수의 모습과 형 집행 과정에서 되어진 여러 사건들을 목격하고는 저마다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돌아갔던 것이다. 과연 아들이 예수께 대항하며 소리쳤던 전날의 과오(過誤)를 뉘추치며 진정한 회개를 나타내었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아팠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 장면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당시의 상황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행 2:22-24).'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행 2:23)고 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며 회개의 길로 돌아섰던 것이다.

성 경: [눅23:50]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 -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태나 마가와 달리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가는 안식일 전 날 저문 때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금요일 마지막 시간에 가까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막 15:42). 대신 누가는 장례가 끝났을 때를 '안식일이 거의 된'(54절) 시각이라 밝히고 있다. 어쨌든 예수의 장례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치러진 것으로 보이며 누가에 의하면 제 9시경부터 첫 시까지(현재 시간 개념으로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약 세 시간 동안인 듯하다. 누가는 요셉을 등장시키면서 유대 민중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산헤드린의 회원이라 소개했다. 3년 동안 예수께 훈련을 받고 많은 권능을 목격했던 열 두 제자들은 거의 다 도망해 버린 상황에서 예수 살해 음모의 주역이었던 산헤드린에 속한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내러 나타난 것 또한 의외의 사실이다. 그는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결연히 장사를 지원하고 나섰다.

성 경: [눅23:51]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 - 이 구절은 요셉에 대한 첫번째 언급에서 소개된 '공회 의원'이라는 신분에 대해 해명(解明)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희의 결의'는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사살을 말한다(22:66-71). 그리고 '행사'(*, 프랖시스)는 예수에 대한 사형 집행을 성사시키게 했던 공회 의원들의 모든 음모와 실행을 뜻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셉이 공회의원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할 때 가담하지 않았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에 대한 사형 결정에 반대한 공회 의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요셉이 부자이며 예수의제자라고만 언급하고 공회의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는데(마 27:57) 아마도 마태는 산헤드린 전체가 이의 없이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실을 말하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26:59).

⭕ 아라마대(*) - 요셉의 출신지인 듯한 이 지명은 유대 땅에 속한 곳으로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렌티스(Rentis)로 추정되며 삼상 1:1에 언급되는 사무엘의 출생지 '라마다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 요셉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마가의 표현과 동일하다(막 15:43). 마태는 이 말 대신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하는데 따라서 세 복음서 모두가 요셉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였음을 공통되게 언급한다. 그는 2:25,38에 언급된 시므온과 안나처럼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을 굳게 확신하였기에, 모든 사람이 절망과 비탄 가운데 빠져드는 순간에도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성 경: [눅23:52]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빌라도에게...시체를 달라 하여 -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사형 집행 후 시체 처리에 관한 권한이 로마군 통독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53절에서 '내린다'(*, 카다이레오)라는 표현을 볼 때 아직 시신이 십자가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마가복음에서도 역시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상태로 묘사되었다(막 15:44-46). 또 마가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사실에 대해 매우 용기있는 행동임을 '당돌하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라고 밝혀진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22:50-62에서의 베드로의 부인(否認) 참조)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였다. 마가에 따르면 발라도가 요셉의 요구에 대해 보인 첫 반능은 '벌써 죽었을까?'하는 것이었다(막 15:44). 따라서 요셉의 요구는 상식보다 빨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의 주검을 공중에 방치되도록 버려둘 수 없다는 애타는 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눅23:53]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 십자가 위에 달려있던 예수의 주검을 요셉이 직접 내려받고 유대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세마포로 시체를 감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시체 처리 방법이다(요 11:44; 19:40) 세마포로 싸기 전 시체를 깨끗이 씻었을 것으로 보인다(행 9:37). 한편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시체를 대개 매장하지 않은 채 버려두어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했다. 그러나 유대법상으로는 죽을 죄를 지어 사형당한 죄인을 나무에 매단 후 당일에 반드시 장사 지내도록 되어 있었다(신 21;23).

⭕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 -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한번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매우 고급스럽고 정결한 무덤임을 암시한다. 아마도 요셉은 이 무덤을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을 위한 무덤으로 조성해 놓았던 것같다. 요 19:41에서는 예수를 장사 지낸 무덤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곳에 있는 동산에 위치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의 부유층만이 가질 수 있는 동산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3:54]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 예수의 장례가 매우 촉박하게 끝났음을 시간적 묘사를 통해 언급하고 있다. 즉 안식일이 박두함으로 인해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시체에 향유를 바르지 못한 것은 시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를 현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금요일 오후 6시경이 된다. 그러나 요 19:39-42에 따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근쯤 갖고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유대법에 따라 여유있게 장례를 치른 것으로 언급된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장례도 매우 긴장속에 치러졌음을 강조하기 위해 시간의 촉박성과 장례 과정에 중요한 향료와 향품을 준비하지 못한 것처럼 묘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를 장사지낸 일에 니고데모가 협력한 사실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몰약과 침향만 가지고 왔던 사실 및 요셉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공의회 의원이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들 두 사람이 사전에 예수의 시신을 장사지내기 위해 서로 의논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성 경: [눅23:55]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 - 장자지낸 무덤에서 예수의 시체를 확인한 증인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잘 알고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여자들은 49절에서 언급된 인물들인 것으로 추정되며 24:5,10절에 언급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과 동일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특히 마가는 무덤을 확인했던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동일한 인물들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갈릴리 여인들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의 얼굴을 잘 안다는 점에서 예수의 시체를 잘 알고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무덤을 잘못 보았다는 말이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부활 후 빈 무덤에 대한 증언도 역시 확실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증(保證)하게 된다. 이렇듯 예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던 까닭에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였으며 또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24:1-7).

성 경: [눅23:56]

주제1: [인자의 수난과 죽음]

주제2: [장사되심]

⭕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 갈릴리 여자들이 무덤으로부터 떠나 그들의 숙소로 돌아가 시체에 바르지 못한 향유와 향품을 준비해 두었다고 언급하면서 그 시각이 안식일 전이었던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막 16:1에서는 안식일이 지난 뒤 향품을 샀다고 언급되고있다. 당시 상황이 매우 촉박(促迫)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가의 증언이더 사실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거의 안식일이 다 되었다는 점(54절)과 무덤이 성 밖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 향품을 산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이기 때문이다. 또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던 당시 사람들과 특히 유월절과 무교절을 낀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안식일은 더우 엄격하게 지켜졌을 터이므로 향품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으리라고 봄이 합리적이다.

⭕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 마태, 마가, 요한 모두 안식일을 건너 뛰어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누가는 계명을 따라 하루 쉬었음을 말함으로써 하루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같은 누가의 언급은 당시의 철저한 율법 준수를 보여주고 예수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이야기의 진행이 긴장되고 급박했던 반면 부활을 앞둔 하루의 공간이 침묵과 적막감에 휩싸인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같은 하루는 죽음을 넘어서고 부활을 앞둔 새로운 긴장의 공간이 되고 있다.

성 경: [눅24:1-5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예수의 부활(1-49절) 및 승천(50-53절)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잇는 최종 메시지이긴하지만 누가의 기록은 (1) 예수의 부활이 허구(虛構)가 이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2)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保惠師)에 대한 예수의 약속 및 승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된다.

성 경: [눅24: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 안식 후 첫날 새벽 -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있는 부활의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안식후 첫날'(on the fisrst day of the week, NIV)는 셈족어의(Semitic) 영향을 받은 것으로(Josephus)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표현이었다(요 20:19; 행 20:7; 고전 16:2). 하지만 이날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유대인의 전통을 깨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행 20:7).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기원이다. 한편 '첫날 새벽'은 토요일 저녁 여섯시경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시경까지가 첫날이므로 일요일 새벽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막 16:1,2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토요일 밤에 향품을 사 두었다가 해돋는 대로 무덤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23:56에서 언급된 향품은 안식일 다음날의 첫시간대인 토요일 밤에 준비한 것이며 무덤으로 간 시각은 일요일 새벽 동틀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4: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 돌이...옮기운 것을 보고 - 본서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적이 없었지만 마 27:66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을 지키게 하였다고 언급되었으며 막 15:46에서도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언급이있다. 그리고 마가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누가 특유의 간결성과 사건 전개의 극적 효과를 상기시켜 준다. 즉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무덤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함으로서 그들이 받은 충격과 놀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 부활 사건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적적 사건이었음을 복선적으로 암시해 준다(Grundmann). 한편 마태는 무덤의 돌문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에 의해 지진과 함께 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28:2) 이는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한 마태의 독특한 저작 의도를 반영해 준다.

성 경: [눅24: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 부활에 대한 두번째 암시를 주고 있으며 첫번째 암시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 토 소마 투 퀴리우 예수)는 23:52의 '예수의 시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 표현같다. 즉 어떤 사본들에는 '주'(*, 퀴리우)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냥 '예수의'(*, 투 예수)만 언급되고 있으나(Marshall), 다른 많은 사본들에는 '주 예수'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같은 차이는 필사자들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 앞에 '주'라는 말를 덧붙인 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행 1:21; 4:33; 8:16). 따라서 23:52의 '예수의 시체'는 부활 이전의 표현이고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는 부활한 에수를 의식하여 나타낸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성 경: [눅24: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을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근심한 것은 아마도 마 27:64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에수의 시체가 안 보이는 고로 여인들이 심히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곁에 나타난 두사람의 정체에 대한 간접적 묘사인 이 구절은 천사를 암시한다. 막 16:5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언급되고 마 28:2,3에서는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언급된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어법이다(행 10:30). 이 같은 표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묘사되고(9:29) 승천(昇天) 사건 때에도 묘사된다(헹 1:10). 그런데 '천사'를 누가는 '사람'으로, 마가는 '한 청년'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천사의 수효가 두 명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승천에서 나타난 두 사람과 병행시키려는 누가의 독특한 의도로 보여진다(Stuhlmueller). 그러나 요 20:12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누가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I. H. Marshall). 부활에 대한 중대한 증언을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설 때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이 한 사람보다 더 확실성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신 19:15)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성 경: [눅24: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에 나타나 여인들의 반응은 놀랍고 '두려운'(*, 엡포보스) 것이었다. 이 같은 두려움은 경이로운 사건에 대한 놀라움의 표시로서 초자연적 신비감을 강조한다(37절; 행 10:4; 4:24; 계 11;13). 그 놀라움의 표시로 여인들이 얼굴을 땅에 대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누가만의 표현이다. 마 28:4에서는 '놀라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함으로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종말적 두려움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한 경이감(驚異感)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언급하는 '두려워', '놀라지 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역시 두려움에 대한 강조를 약화시키는 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 두 명의 천사가 동시에 말한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가 '한 사람의 천사'혹은 '한 사람의 청년'을 언급한 것이 누가의 '두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한 것은 한 사람이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티'(*)는 의문 대명사 '누구'(who)라는 뜻과 의문 부사 '왜'(why) 또는 '무엇'(what), '어느 것'(which)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며 여기서는 '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미와 함께 부활의 당연함과 그것이 예정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격언조의 이 구절은 상징적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죽은 자 가운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톤 네크론'(*)은 '죽은 자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의 무덤 안에 여러 '시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무덤' 그 자체를 상징한다. 다시말해서 무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구절은 예수가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는 2,3절에 이어 세번째로 예수의 부활을 단계적이면서 간접적으로 시시하고 있는 바, 그 자신 특유의 치밀한 구성력(構成力)을 보여준다.

성 경: [눅24: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세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예비적 언급이 있은 다음 비로소 두 천사의 말에 의해 부활이 직접적으로 선언된다. 그런데 누가는 먼저 무덤안에 예수가 없음을 전제하고 나서 부활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덤 안에 예수가 없음을 말하였다(16:6). 즉 마가는 부활을 강조하고 그 증거로 빈무덤을 제시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 부활의 산증거로서 빈 무덤을 강조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은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은 데 대한 여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인들이 발견한 바대로 시체가 없다는 점을 먼저 확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 갈릴리에 계실 때...기억하라 -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갈릴이 여인들이었음을 23:55에 이어 두번째 언급하고 있는데 10절에 따르면 여인들의 수는 최소한 5명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믿을 수 없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이미 예견된 일이었음을 평소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던 여인들(23:55)을 통해서 확증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억하다'(*, 므네스데테)고 요청하는 내용은 9:22에서 예수 자신이 언급하셨던 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빈 무덤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언급이 없는 데 비해 누가는 치밀한 설득을 통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성취 측면을 확연히 드러낸다.

성 경: [눅24:7,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두 명의 천사가 예수께서 생전에 직접 하셨던 말을 여인들에게 상기시켜주자 여인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두 천사가 직접 언급한 내용은 9:22의 에언이엇다(9:22 주석 참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예언을 천사들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누가의 표현 의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총제적인 예언의 성취라는 맥락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의 이 같은 표현 의도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중심한 대적들의 묵살 음모라는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둘 때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마 28:13에 따르면 예수의 대적들은 당시 예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날조(捏造)하며 이를 소문으로 퍼뜨렸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는 대적들의 이 같은 음해적(陰害的) 행위와 소문에 대한 치밀한 반론으로서 이같은 상세한 묘사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임과 그 사실이 이미 예언되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두 천사가 직접 들려 주었을 때 여인들이 비로서 기억했다는 언급을 통해 9:22나 18:33에서와 같이 평소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 경: [눅24: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부활을 확인한 여인들은 성안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성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확인한 바를 전하였는데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건 즉 시체가 없어진 사실과 천사를 만났던 사실만을 전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막16:8에서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마가의 표현은 놀라움에 강조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마 28:8)와 누가는 여인들이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부활한 후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을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마 28:7; 막 16:7) 누가는 이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마태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으로만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제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로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직후 죄책감으로 목매여 자살하였다(마 27:3-5). 누가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열한 명의 제자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4:1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이 여자들은 -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인한 갈리릴 여인들의 이름을 이제야 밝히고 있는데 마가는 무덤으로 가기 전에 이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막 16:1). 그러나 이름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누가 이외에도 마태와(마 28:1) 마가(막 16:1) 그리고 요한(요 20:1)에 의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며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에 의해서 나음을 받은 여인이다(8:2).

⭕ 요안나 -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8:3)로서 예수와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이며 마가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마리아 헤 야코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직역하면 '야고보의 마리아'가 된다. 이는 곧 아고보의 아내를 의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마가가 언급한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막 15:40절과 47절을 본다면 '야고보의 마리아'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더불어 무덤에 따라갔던 갈릴리 여인들이며(23:55, 24:1) 이로써 부활의 증인이 이름을 밝힌 세 명의 여인 외에 더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가가 언급한 세 명(16:1)보다 확대된 숫자이다.

성 경: [눅24:1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사도들은...믿지 아니하나 - 여인들로부터 부활 사건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의심과 불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즉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여겼다. 즉 너무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보여왔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소에 가르쳤던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9:45; 18:34) 정작 예수의 부활이 그들의 눈앞에서 실현되었어도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 역시 여인들처럼 예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6절 주석 참조).

성 경: [눅24:1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니 - 누가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의 불신에 대비되게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권위를 높이려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많은 사본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요 20:3-10에 근거한 삽입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Metzger)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Lagrange, Jeremias, Gundmann, Ellis, danker, Morris 등).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는 빈 무덤 속에 남아 있는 세마포만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그 된 일'은 여인들과 베드로가 직접 확인한 빈 무덤을 뜻한다. 한편 요 20:1-10에 언급된 평행 본문은 누가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요한에 의하면 베드로 혼자 무덤에 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한 명이 함께 갔고 그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에 도착하였으며, 베드로가 본 것은 세마포 뿐만 아니라 머리 수건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무덤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제자도 무덤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언급된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 이외에 익명의 사랑받는 제자를 예수 부활 사건의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열 한 사도 외의 다른 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한 것으로 언급한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일부의 몇몇 여인들만 목격한 것이 아니요 평소 그분께 관심을 가졌던 제자라면 누가나 가보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객관적, 실체적 사건이었으니 이로써 하나님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성 경: [눅24:1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그 날에 - 헬라어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보라'(*, 이두)라는 단어로 이 무장을 시작하고 있으나 91:20,31,36; 13:35; 18:31 등)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여기 언급된 '그 날'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안식 후 첫날'(1절)을 가리키는데 관찰자의 시점이 옮겨갔다. 즉 앞에서 언급한 관찰자의 시점은 예수가 부활한 당일이었으나 현재의 관찰자는 먼 훗날 시점에서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 저희 중 둘이(*, 두오 여스 아우톤) - 여기서의 인칭 대명사 '아우톤'(*)은 앞에서 언급된 어떤 이를 지시하는지 불분명하나 여인들과 열한 사도를 제외시킨다면 9절에 언급된 모든 '다른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부활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림들이다.

⭕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이 장면 묘사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긴박한 사건 묘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 즉 유월절 축제와 예수의 체포, 그리고 사형 집행과 빈 무덤의 발견으로 나타난 부활의 충격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달리그 사건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이 장면 묘사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데 이사람들은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위해 예수와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대가 좌절(挫折)된 경험을 안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언급된 '엠마오'(*)라는 지명은 정확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분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 십 오리 즉 1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십 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혀세콘타'(*)의 정확한 거리는 약 11.2km이다. 이 정도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지명이 학자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욥바(Joppa)로 가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암와스'(Amwas)로 보는 경우인데(Lagrange, Metzger) 거리가 누가의 언급보다 배가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둘째, 유력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 약 6km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A.D.69-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식민자가 되었던 '칼로니에'(Kaloniye)이다(Weiss, K.Lake, Harrey). 이 지명 역시 거리의 차이가 문제인데 누가가 언급한 거리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혹자(Benoit 등)의 말처럼 누가가 왕복거리로 언급했다고 추정한다면 그리고 하루에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첫째 지명보다는 둘째 지명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눅24:1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이 모든 된 일을 -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예수의 성전 숙정을 비롯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대두된 부활 문제를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성 경: [눅24:1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두 사람이 열심히 지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을 때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함을 언급한다. 문맥으로 보아 예수께서 처음부터 동행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는 분명히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쉼포류오마이) 모습이었다.

성 경: [눅24:1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생전(生前)에 가까이 있어서 예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옆에 다가선 예수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크라테오)라는 말은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하는데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 변함없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사람의 의식과 시각이다. 즉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부활한 예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왔을 때 보통 사람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성 경: [눅24:1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 비로소 부활한 예수와 길가는 두 사람과의 대화가 예수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예수의 질문 내용은 두사람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성 경: [눅24:1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이며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등)이 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근일'(近日)(*,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은 여러 날 동안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성 경: [눅24:1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무슨 일이뇨 - 글로바의 흥분된 반응에 대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되묻는다. 이 같은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즉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직접 듣고자 했던 것이다.

⭕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지자'(*, 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9:19).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여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성 경: [눅24:2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두번째로 그들은 예수의 처형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능력있는 권능의 선지자 예수를 죽이게 한 주범들이 자신들의 종교, 정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임을 천명한다.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예수를 처형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특히 두 사람이 '우리들의' 지도자임을 밝힌 사실은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성 경: [눅24:2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세번째 견해는 에수에게 걸어던 기대였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루어지기를(막 1:150 기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추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 그들의 실망은 예수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어투로 보아 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째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사흘 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성 경: [눅24:2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뜨거워지고 있다. 앞절에서 표현되었던 실망감에 덧붙여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면서 10절에서 언급되었던 여인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들 중'(*, 여스 헤몬)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성 경: [눅24:2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한' 일은 1-8절에 언급된 내용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어지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1절 주석 참조).

성 경: [눅24:2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 여인들에 이어 빈 무덤을 확인하였던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12절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즉 11,12절에서는 제자들이 여인들의 증언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과 베드로만 무덤에 간 것으로 언급된 점이 본문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두어 사람'(some of our companions, NIV)은 요 20:3-8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을 삽입된 문구로 볼 수 있는데(J. Weiss)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의 화자(話者)가 열 두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 중'이란 9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열 한 사도와 그 외의 사람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2절에 언급된 베드로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12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술을 통해 예수의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들만의 증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확인 증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빈 무덤 사건을 점한 이들의 관심은 부활 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같은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안목(眼目)이나 믿음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예고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9:22; 18:32,33)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결론을 얻게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눅24:2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예수에 관한 사건들로 인해 실망과 좌절에 빠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예수의 반응은 책망을 하는 투이다. 예수의 책망은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된다. 첫 마디는 '미련하다'(How foolish you are!, NIV)라는 책망인데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진술했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한 셈이 된다. 두번째는 선지자의 말을 '더디게'(*, 브라데이스)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신뢰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지만(18:31; 22:37 주석 참조),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歎息)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의 활동이 끝장나고 그 추종자들에게 실망과 절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예수가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30,31절).

성 경: [눅24:2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 관념을 앞절에서 일축(一蹴)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반문 형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문의 대답이 자명함을 전제로한 질문인데 27절의 장면처럼 구약성경에 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을 나타낸다(시 22:6-8, 18; 27:12; 41:9; 사 50:6; 53:3-9; 슥 11:1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하지 않고 영광만을 생각하는 오류(誤謬)를 범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만 참여하려는이기적 야욕(野慾)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영광 이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반드시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영광은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 인자(人子)의 영광이다(9:26; 21:27; 빌 2:5-11; 딤전 3:16; 벧전 1:11,21). 약한 사람들로부터 힘없이 처형당해 죽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게 된다는 암시이다.

성 경: [눅24:2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가 고난 받아야 하는 필연성에 관련된 예언들을 하나 하나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용된 자료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글'이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선지자의 글'이란 '예언서'를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그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일반을 가리킨다 하겠다.

성 경: [눅24:2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 엠마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들이 도착하려고 했던 장소에 거의 다 왔음을 말하고 있다.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는 '도착 했다'와 '거의 다달았다'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도착 시간에 대한 언급은 출발 시각처럼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29절의 내용을 보면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요일 즉 안식후 첫날이 거의 끝나는 시각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 13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물고자 하였을 것이고 예수는 목적지가 엠마오가 아니어서 더 걸어가려 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쉽게 가능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가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는데 있기 보다는 29절에 나오는 내용, 즉 예수가 그들 두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동기가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본래 예수는 엠마오에서 유숙(留宿)하려는 계획이 없었음을 암시하여 두 사람의 강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성 경: [눅24:2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저희가 강권하여...유하사이다 -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비아조마이'(*)는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懇請)으로 봄이 적절하다. 예수가 글로바의 일행과 엠마오에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권이 있었다'는 것은 사양하는 말도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이 예수를 붙잡고 머물기를 간청한 이유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여행이 어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고(32절)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예수를 강권하였을 것이다.

성 경: [눅24:3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 저녁 식사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절에서 날이 저물고 기울었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점심 식사라는 주장은(Bornhauser) 적절하지 못하다. 이 저녁 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집인지 아니면 여관이나 민박하는 집에서 만찬을 베푼 것인지는 정확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여관이나 민박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저녁 식사는 일상적인 평범한 식사이었음에 틀림없다.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매 - 이 같은 식사 장면은 오병 이어의 기적(9:10-17)과 유월절 식사를 연상케 한다(22:14). 글로바 일행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열두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한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식사를 주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들판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던 그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31절에서와 같이 이 두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 요인(要因) 중의 하나가 이 식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성 경: [눅24:3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 글로바 일행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는데(16절) 예수와의 저녁 만찬 도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개역 성경에서 '밝아졌다'(their eyes were opened, NIV)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 디아노이고)의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앞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떡을 떼어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신비적 능력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I. H. Marshall). 이와같이 글로바 일행이 부활한 예수를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훌륭한 선생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29절 주석 참조). 이는 이제까지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해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떡을 떼는 만찬(晩餐)을 친교하고 할 수 있다면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는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암시한다. 첫째, 부활한 예수는 시.공(時空)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되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된다. 둘째는,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고유한 일정한 모습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만난다는 점이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한 바처럼 낯선 길손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 있고(창 18:1-15)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도 있다(마 25:31-46). 따라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무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사건인 동시에 어느 대상에 국한됨이 없이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경험되고 찾을 수 있는 내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 경: [눅24:3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성 경: [눅24:3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곧 그 시로 일어나 예수살렘에 돌아가 - 두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이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시각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 같은 행동의 즉각성은 회개하는 자세의 모범이 되기도 하고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회개는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에서 전격적으로 변혁(變革)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들은 발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 예루살렘에 글로바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 열 한명의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있다. 이 사람들은 9절에 언급되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을 것으로 족히 짐작된다. 여인들과 제자들 중 베드로가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의무심에 차 잔뜩 흥분과 조심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몰랐었다. 그러나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베드로의 증언(34절)이 더욱 확실한 것임을 은연 중 믿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그들의 의심과 의혹(疑或)을 완전히 떨어버리지는 못한 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 경: [눅24:3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 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성 경: [눅24:3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글로바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자들로부터 들은 소식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이었다. 11절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은 빈 무덤을 부활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몬이 부활한 예수를 경험하였다는 증언 때문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몬은 베드로를 말하는데 언제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전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전 15:5에서 바울이 증언할 뿐이다. 아무튼 그들은 최초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엔 쉽게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열 두 사도 중 하나요 평소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을 때에는 달랐다. 베드로의 증언은 그들 무리 가운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였고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33절). 한편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37,41절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상히 여기는 제자들의 양상과 부합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염두에 두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즉 그들 앞에서 처참히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타셨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주(主)의 출현에 간담(肝膽)이 서늘해지거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여태껏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제자들에게 확증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사건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경이와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37,41절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본절 내용과는 다른 경험을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에 투영(projection)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본절과 상치되지 않는다.

성 경: [눅24:3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 두 사람도...말하더라 - 베드로가 경험한 사실을 듣고 글로바 일행도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말하면서 길에서 예수와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사실과 떡을 떼며 확인했던 예수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told what had happened, NIV)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확인해 주고 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부활한 예수에 대한 체험을 확신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성 경: [눅24:3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공포에 싸여 무서워 했지만 베드로나 글로바 등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놀랐으리라는 생각이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체험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번째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놀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그들이 그렇게 놀라고 무서워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가 '영'(*, 프뉴마)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육체가 없는 유령(幽靈)과 같은 존재로 오해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떤 사본에서는 본절의 '영' 대신 '유령'(*, 판타스마)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성 경: [눅24:3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어찌하여...의심이 일어나느냐 - 예수의 출현에 대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왜 의심하고 무서워 하느냐'는 반문 형식으로 책망하신다. 이 말은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모습을 부활한 예수로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생각하며 부활한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가 말했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성 경: [눅24:3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내 손과 발을 보고 -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고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37,38절) 예수는 자신이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그 예수이며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임을 확인시키고자 증거를 제시하신다. 증거로 제시된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인데 왜 그것이 증거가 되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요 20:25-27에 못박았던 자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나를 만져 보라 - 두번쩨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은 육신의 실재(實在)이다. 이것은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적 말씀이니 유령은 살과 뼈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살과 몸을 직접 확인시킴으로써 유령이 아님을 선언하신다. 이 같은 부활 증명은 영적인 부활이냐 아니면 육적인 부활이냐 하는 문제를 연상시킨다(고전 15:31-52).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영적 부활이냐 육적 부활이냐 하는데 있기 보다는 부활은 완전히 새롭고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타난다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바 처럼 부활은 영과 육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이지 영이냐 아니면 육이냐 하는 일차원적인 선택적 사고로 부활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육체를 확인 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육적인 부활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고 부활이 유령이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이 아님을 확인 시키고자 하는데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성 경: [눅24:4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 손과 발을 확인한 제자들의 반응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 기쁨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감격과 놀라움(amazement)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의심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놀라와하며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의 기쁨에 강조점이 있다. 이제 제자들은 의심과 두려움의 고개를 넘어서 기쁨과 놀라움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같은 누가의 묘사는 매우 극적이고 치밀한 문학적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 부활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자들의 기쁨이 터져 나올 때 식사를 제안함으로써 제자들의 확신을 움직일 수 없는 믿음으로 굳히려 하고 있다.

성 경: [눅24:4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손과 발을 보이시나 - 예수가 증거로 제안했던 것은 손과 발 그리고 자신의 육신을 직접 만져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과 발만을 보여준 것으로 당시 상황 묘사를 끝내고 있으며 보기만 했는지 직접 만져 확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요 20:20에서는 손과 옆구리만 언급하고 있으며 요 20:24-27에서는 도마의 요구에 의해 예수께서 직접 만져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도마 역시 적접 만져 확인하였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본문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본문이 삭제되고 없고 또 어떤 사본에서는 괄호에 묶어 언급하고 있다(I. H. Marshall). 아마도 요한복음과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 삭제(削除)하였을 수도 있고(Jeremias) 앞절(39절)과 중복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삭제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K. Aland). 그러나 요한복음과의 일치성이 문제되지않고 앞절과 중복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 확인시켰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일치하고 있는데 누가는 목격자들의 충격과 의심이 큰만큼 부활한 예수가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단계적으로 확인시켜 나가고 있다.

성 경: [눅24:4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구운 생선 한 토막 - 제자들이 제공한 먹을 것은 구운 생선(broiled fish) 한 마리였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꿀찍은 떡이라는 구절을 첨가시키고 있다(Metzger). 아마도 필사자들이 요 21:9에 제시된 음식인 물고기와 떡을 염두에 두고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M. Alford). 또한 이 같은 물고기를 언급한 것 때문에 장소를 갈릴리로 볼 수 있는데(Creed, Klostermann 등) 내륙 지방 예루살렘에도 소금절인 생선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Jeremias) 예루살렘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성 경: [눅24:4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 잡수시더라 - 예수가 생선을 제자들 앞에서 먹어 보임으로써 예수 자신이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사실(30절)을 두번 언급하면서 누가는 예수가 유령이 아니라 분명 죽었던 나사렛 예수가 되살아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점에서 누가의 독특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성 경: [눅24:4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최종 확인 후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이 언급되면서 누가복음 대단원의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말했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9:31; 18:31-33; 22:37)를 상기키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을 언급하고 있다.이 같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거듭 설명한 것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원사적(救援史的) 맥락에서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누가는 본문 서두에 '이것들은 내 말들이다'(*, 후토이 호이 로고이 무)라고 말한 후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되는 관계절을 통해 성경의 에언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지시대명사 '이것'(*, 후토이)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의 체포에서부터 부활까지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의 세계화와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결과요 하나님의 뜻임을 확언하는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성 경: [눅24:4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이 구절 역시 27절에 언급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며 38절에 언급된 예수의 책망과 대응된다. 즉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마음이 '열리다'(*, 다아노이고) 곧 전적인 신뢰와 깨달음으로 전환되었다는 극적인 대비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글로바 일행과의 만남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 25절의 '마음에 더디 믿는'이라는 표현과 31절의 '저희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서로 대비되어 부활 확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장면은 그동안 있어 왔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한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교훈과 행동에 대해 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11,25,37,38절; 8:9,25; 18:34; 22:24) 제자들이 비로소 성경의 예언이 뜻하는 바와 예수의 삶과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되고 에언된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가 예수의 모든 삶을 통해 완전히 성취(成就)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성 경: [눅24:4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또 이르시되 - 자신에관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번째는 구체적 성경의 근거를 들고 있다. 때문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후토스 게그라프타이)라는 인용 도입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것은 자신이 직접 예언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이다(9:22; 18:31-33).

성 경: [눅24:4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성 경: [눅24:4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 -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렘 31:34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누가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이름'(*, 오노마티 아우누)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즉 예수의 이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 메타노이아) 운동은 이미 세례 요한에서부터 예견되었고(막 1:15) 그의 모든 사역, 심지어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 전생애를 통해 계속된 것이었다. 이 죄사함을 위한 회개 운동은 죄의식을 높이고 참회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이 있기 보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당된 존재로서 그리고 전혀 새로운 방향을 향해 근본적(根本的)으로 변혁된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추구하는 것이었다.

⭕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 본문은 사 2:3; 미 4:1,2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상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 복음서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죄사함의 회개운동 곧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세계를 향해 확장 선포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보다 '모든 족속'(*, 판타 타에드네)에 있는데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선민 의식을 깨치고 보편적 구원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같은 만인 구원 사상은 공관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선언하고 있으나 특히 누가는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행 1:8).

성 경: [눅24:4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예수의 마지막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보라'(*, 이두)라는 단어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지 않다. '약속'(*, 에팡겔리아)은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행 1:4; 2:33; 갈 3:14)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행 1:4,5; 2:1-4을 참고한다면 '성령'을 약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위로부터'(*, 여스휘푸스)오는 '능력'(*, 뒤나민)이다. 앞에서 약속한 것이 '성령'임을 전제할 때 이는 성령의 성격에 대해서 암시한 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언급은 증인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힘입어 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능력을 얻기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이 사실은 행 2:1-4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이유는 47절에서 언급했듯이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 나감을(행 1:8)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 경: [눅24:5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누가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작별 장면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나감'(*, 여사고)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사고'는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언급한 70인역의 용어라는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출애굽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Lohfink). 이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로 나갔는데 이 장소는(19:29 주석 참조) 승천의 장소로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다. 행 1:12에 따르면 승천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언급되는데 장소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다.

⭕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모습은 예수를 사제적인 모습으로 기리려고하는 누가의 의도로 볼 수 있기도 하나(Lohfink) 누가는 사제의 모습으로 예수를 묘사하려려 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I. H. Marshall). 이 같은 축복의 장면은 증인들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그 같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 경: [눅24:5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 누가는 예수가 축복을 할 때 그들로부터 떠났음을 하늘로 '올리워갔다'(*, 아네페레토)는 승천의 묘사로 그리고 있다. 개역 성경은 이 문구를 괄호로 묶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8,19과 행 1:2,9에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삭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 후 사십 일 간 지상에서 머물렀다는 행 1:3의 언급과 모순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승천일이 부활한 날 밤이거나 그 이튿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에 관한 기사는 같은 저자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불일치(不一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막 16;19에서는 누가복음과 일치되고 있다. 모든 점을 염두에 둘 때 50-53절의 기록은 앞의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승천에 관한 기사는 분명하게 일치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성 경: [눅24:5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 승천하는 예수가 '예배'(*, 프로수퀴네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神性)이 인정되고 예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거니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이적적 권능으로 인식되고 제자들이 존재하는 근본 의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에게 경배하고'가 괄호로 묶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는 이제부터의 복음의 내용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상고하게 될 것임을 이 구절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행 2:22-24).

⭕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17절; 요 20:19)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실이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53절과 함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을 암시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성 경: [눅24:5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매우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안에서 예수의 명령대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에게서 성전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과(19:47; 21:37,38) 관련 지어볼 때 기독교의 발생이 구약 전통(傳統)과 성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점이다. '찬송하니라' 대신에 '축복하다'(*, 율로군테스)는 말로 언급되었든 또는 '찬양하고 축복하다'(*, 아이눈테스 카이 율로군테스)로 되어 있든 각 사본마다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에 관한 사건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또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치면서 자신의 책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근거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