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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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후서주석



성 경: [살후1:1]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인사말]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 이 세 사람은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이다. 그러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본 서신을 쓰는데 협력하였을 뿐이며 본 저자는 바울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에서와 달리 본 서신에서는 굳이 자신의 사도권을 언급하지 않고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그의 사도적 권위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가 세 사람의 명의(名義)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이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 인물(행 15:22)로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바나바를 대신하여 바울을 수행하였다(행 15:40). 그는 바울의 진실한 동역자로서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하였고 그를 도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함께 설립했으며 베뢰아와 고린도에서 복음을 함께 전하기도 하였다(행 17:1, 10;18:5).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이며 복음 전도의 동역자였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행 16:1;딤후 1:5) 바울의 2차 전도여행시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실라와 합류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를 직접 방문하여 그곳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오기도 하였다(살전 3:1, 2, 6). 바울과 함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파하고 함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고 가장 존경받는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깊은 관계를 갖고 서로 협력하였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도 서신을 쓰는 바울 자신만큼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샅로니가인의 교회 -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데살로니가에서 그의 복음 전도를 받은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개종하여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행 17:1-9).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 지역 교회에 불과하였지만 바울은 그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교회는 지역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띠지만 각각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살후1:2]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인사말]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바울의 서신서에서 서두의 인사말과 함께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본래 '은혜'는 헬라식 인사법의 표현이며 '평강'은 유대인 인사법의 표현이다. 혹자는 바울이 이 두 가지 인사법을 한데 결합시킨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P.J. Gloag).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써 사용하기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즉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데 그의 서신서인 고후 8:9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참여함을 뜻하며, 엡 2:8, 9에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진술한다. 이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며 이는 적대감이 그쳤거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좀더 깊은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행복 또는 화목을 말한다. 회개하기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이었지만(롬 5:10;골 1:2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다(롬 5:1).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셨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은혜' 와 '평강'의 상태에 이르기를 원했다. 이에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에서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성 경: [살후1:3]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우리가 - 여기서 바울은 일인칭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 암시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함께 협력하였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포함시키고 있다.

⭕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졌던 지대한 환심과 끊임없는 사랑을 나타내 주고 있다. 혹자는 본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책망하기전에 먼저 바울이 가졌던 그들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기 위한 형식적 인사라고 한다(P.J. Gloag).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넘치는 감정의 표현이다.

⭕ 이것이 당연함은 - 바울의 감사가 결코 막연한 인사 치레가 아니라 구체적 사실에 대한 감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구체적 사실은 바로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이었다. 여기서 '더욱 자라고'의 혤라어는 휘페라욱사네이(*)로 본절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로서 '풍성하게 성장하다',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에 대하여 이토록 감사한 배경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알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고(살전 3:5) 그들의 믿음의 부족을 온전케 하기위하여 주야로 힘써 기도한 사실(살전 3:10)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그의 기도가 응답되어 그들의 믿음이 그토록 놀랍게 성장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서로 넘치도록 기도했는데(살전 3:12) 그 응답으로 그들의 사랑이 모든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지고 있었으며 개인 서로간에도 오고가고 있음을 보고 감사하게 되었다. '풍성함'의 헬라어 '플레오나제이'(*)는 '풍부하다', '증가하다'의 뜻으로서 사랑에 대해서 사용될 때는 충만함에 이르도록 점점 더하여지는 것을 의미한다(TDNT). 이러한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은 그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한다. 즉 믿음은 사랑의 시작이며 근원이다. 또한 사랑은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고 성도들의 생활의 정점은 그 사랑안에서 완전케 된다고 할 수 있다(요일 4:20, 21).

성 경: [살후1:4]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중에서 -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때 당했던 고난과 핍박(행 17:5-7)이 바울과 그 일행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되고 있었다. '환난'(*, 들립세신)은 일반적인 시련으로 인한 고통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 디오그모이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고통을 말한다. '참는다'는 말은 현재 시상으로 핍박과 환난이 과거의 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바울이 편지 쓰고 있는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행 11:19),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요 16:33).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기도하고(살전 1:6), 투옥되기도 하며(행 20:23), 내적인 고민과 슬픔(빌 1:7), 또는 걱정과 두려움(고후 7:5)을 격기도 한다. 신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애매한 고난을 당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상급이다(벧전 1:7).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연단하며, 그러한 연단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벧전 1:7).

⭕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 '인내'(*, 휘포모네스)란 견뎌낼 수 없는 정도의 무게에서도 끝까지 참아내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 '인내'에 대해서 핀들레이(Findlay)는 "그것은 고난 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용맹스러운 군인처럼 강건하게 서서 버티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내는 믿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중에서 굳건한 인내를 발휘하게 된다.

⭕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을 끝가지 지켰다.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롬 16:1). 이와 같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극심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보여준 인내의 모습은 당시 고난을 받고 있는 많은 교회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성 경: [살후1:5]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이는 - 바울은 이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앞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내리면서 5절이하 10절까지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설명을 전개하고자 하고 있다. 즉 본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함축적으로 마무리 하면서 앞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전개하기 위한 전환점이 된다.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 현재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당하는 자신들의 환난과 핍박을 악한 박해자들의 번영이라는 현실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참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시행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은 구약 선지자 하박국도 하나님께 가졌던 적이 있다(합1:2-4). 그러나 바울은 미래에 각 개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표'(*, 엔데이그마)는 '분명한 표식', '증거'의 뜻으로 쓰인다. 즉 데살로니가에서 핍박받는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은 바로 그들이 장차 있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영광을 받는 증거가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극심한 핍박속에서 지켜 주신다는사실에 대한 보증이 된다.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함이니 - 본 구절은 앞문맥과 동격절로서 접속사 '이는'에 대한 수식적 설명이다. 본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참아낸다고 해서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나 공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엡 2:8, 9). 이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소유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모든 환난과 핍박가운데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벧전 1:5).

⭕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 본문은 현재 시제로서 과거의 고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뒤따른다(빌 1:29). 이 고난은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당하셨으며(벧전 2:21-25),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도 당하고 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실제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다(요 16:33). 그런데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받은 것이어야 한다.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된다(벧전 2:20).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이 정금보다 귀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되는 것이다(벧전 1:7).

성 경: [살후1:6]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죄를 간과하지 않고 반드시 형벌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 이에 대해 레온모리스(Leon Morris)는 '이 진리는 어떤 철학적 견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에 뿌리 박고 있다'고 진술했다. '갚으시고'의 헬라어 '안타포두나이'(*) )는 '합당한 것을 돌려 준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살전 3:9에서는 '보답할꼬'라고 번역되어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롬 11:35), 본문에서처럼 부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롬 12:19;히 10:30). 아무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報應)의 원칙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으로(히 10:30) 반드시 그들의 행한 악을 따라 갚으신다(롬 1:27). 그러므로 핍박받는 성도들은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여야 한다'(살전 5:15). 그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태도로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야 한다(벧전 3:9).

성 경: [살후1:7]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우리와 함께 - 여기서 '우리'는 바울 자신과 실라와 디모데를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그외 동역자들도 그들과 같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고후 11:23-28). 그뿐 아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일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환난이나 안식에 동참할 수있음을 강조한다.

⭕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 '안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신'(*)으로 본래 팽팽하게 당긴 활의 줄을 원래의 상태로 느슨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역경에서 해방되다', '수고를 그치고 쉬다'는 휴식(休息)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바울은 그들이 믿음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결국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다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Calvin). '저의 능력의 천사들'이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있는 존재들로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들이다(마 13:49;24:31;살전 4:16). 성경은 종말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종종 심판과 천사들을 결부시켜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10절)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마 16:27,Gloag).

⭕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 여기서 '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 곧 대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 가운데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다. '하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라누'(*)로 여기에서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공중'(air, 행 11:6), '하늘'(sky, 계 6:14)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heaven,마 5:16;계 3:12) 곧 '하나님의 보좌'(마23:22;막 6:41)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이땅에 오셨고(요 3:13), 다시 그곳으로 승천하셨으며(벧전 3:22), 또 다시 재림하실때에 천사들을 대동하고 그곳에서 내려오실 것이다(마 24:30).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주고 있다(官村武天). 한편 '나타나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세이(*)는 일반적으로 '계시', '폭로', '드러냄'의 뜻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종말론적 의미로서(롬8:19;고전 1:7) 마지막 날에 감추었던 것이 숨김없이 드러나게 됨을 가리킨다(TDNT). 즉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는 비밀에 싸였던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숨김없이 밝혀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가 '불꽃 중에' 오신다고 진술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주권과 영광과 위엄을 나타낸다(출 3:2;사 66:15;계1:13-15).

성 경: [살후1:8]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 여기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이 말이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갈 4:8) 견해(Robertson). (2) 이 말이 이방인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누구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는 은혜와 지식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Leon Morris).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 구절 다음에 사용된 접속사 '카이'(*)가 어떤 의미로 사용 되었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한다. '카이'가 일반적으로 '그리고'란 의미로 사용되지만 '즉'이란 의미로도 사용된다. 만약 '카이'가 '그리고'의 의미라면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며 '즉'의 의미라면 두번째 견해가 타당하다. 그렇지만 본절에서 '카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분명하게 단정지을 수 없으므로 두 견해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 여기에서도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1) 유대인 선동가들과 이방인 읍장들이라는(6절;행 17:5-9) 주장(Robertson). (2) 전반절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병행 관계로 보고 앞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들었지만 그 궁극적 계시를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Leon Morris). 그렇지만 앞구절에서 설명한 바대로 접속사 '카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따라 본 구절의 해석이 달라지므로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 단정지을 수 없다. 아무튼 바울은 본절에서 구원의 종말적 계시를 거부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술함으로써 복음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형벌을 주시리니 - 본 구절은 히브리적인 표현법이다(Leon Morris). 구약성경에서 형벌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집행할 수 있는 그분의 전유물로 소개되어 있다(신 32:35). 그런데 그 형벌의 집행권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것은 그분이 하나님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성 경: [살후1:9]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이런 자들이 - 여기에 쓰인 헬라어 '호이티네스'(*)는 질적인 면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로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선행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븍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 여기서 '주의 얼굴'이란 '주의 임재' 또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떠난다'는 것은 악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게 되는 영광과 기쁨으로부터 단절,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Alford). 또한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난다'는 것은 형벌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금 악행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그 영광 앞에서 그 힘이 무력해질 것을 시사한다. 주의 영광스런 '능력'에 의해서 그들의 사악한 행동은 심판을 받고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날 것이다.

⭕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멸망'의 헬라어 '올레드론'(*)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란 의미로서 단순히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몰락하여 삶의 의욕이 송두리째 박탈된 상태를 말한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삶에 대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마 7:23;8:12;눅13:27). 한편 '형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켄'(*)은 단순히 범죄자에 대한 형벌을 가리키는 '콜라시스'(*)나 감정에 치우친 형벌을 가리키는 '티모리아'(*)와 달리 공의에 입각해서 충분한 심리(審理)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형벌을 가리킨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공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살후1:10]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그 날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테 헤메라 에케이네'(*)는 보통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사 2:11, 17). 성경에는 '그 날'의 시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오직 '그 날'은 하나님께 속한 권한으로(마 24:36) 언급되며 예수께서는 '그 날'에 대한 징조들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24:3-51;눅21:10-36). 한편 '그 날'은 악행하던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이 되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될것이다(7절;2:1;살전 4:17).

⭕ 강림하사 - 그리스도의 강림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므로 바울은 강림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대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라는 묵시 문학적인 용어로 묘사하였다.

⭕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 '성도들에게서'와 '모든 믿는 자에게서'란 구절 앞에 헬라어 성경에는 '엔'(*, ...안에서)이라는 전치사가 삽입되어 있다. 이대로 직역하게 되면 성도들이 영광을 반사(反射)하는 자가 될 것임이 강조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이 택한 백성의 삶 속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통하여 영광받으실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신다(시 89:7). 더욱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의 영광이 너무도 찬란하고 놀랍기 때문에 기이히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행하신 일로 인하여 그날에 성도들은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갈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그 영광을 소망하라는 암시와 함께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박해 속에서 낙심치 않고 믿음 위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확신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다.

성 경: [살후1:11]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이러므로 - 본절은 헬라어 접속사 '에이스 호'(*)를 사용하여 앞문단 전체(5-10절)에 언급된 내용을 압축하면서 동시에 이후에 진술될 내용이 앞 진술의 결론적 교훈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에이스 호'는 '이 목적을 위해서'라는 뜻으로 직역될수 있다. 골 1:29에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고, 그들의 영적 상태에 관한 관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나가며(엡4:13-16),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기초하여 간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구원을 얻기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Thomas L. Constable).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세오스'(*)는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복음의 특권을 얻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롬 11:29;엡 1:18) 본절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부여되는 특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 모든 선을 기뻐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안 아가도쉬네스'(*)는 직역하면 '선의 욕구'란 의미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중 한 부분이며(갈 5:22, 23) 올바르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활동적인 성품을 뜻한다. 그래서 혹자는 본 구절에 대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 있는 선한 의지를 일깨우셔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으로 해석한다(Leon Morris). 이 해석은 다음에 이어지는 '믿음의 역사'란 표현과 부합된다.

⭕ 믿음의 역사 - 살전 1:3에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나오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졌던 처음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Robertson). 믿음은 결코 정지(停止)하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동적인 행위를 동반한다(약2:20-26). 이에 대해 혹자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획득하고 그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Leon Morris). 본절에서 '믿음의 역사'란 믿음을 통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맺은 열매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

⭕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 바울은 앞에서 언급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즉 모든 선한 성품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모든 선한 마음과 믿음의 일 둘 다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했다.

성 경: [살후1:12]

주제1: [핍박에 대한 격려]

주제2: [환난에 대한 격려]

⭕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 본 구절은 어려운 문장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본 구절에 대하여 크게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하나님과 주'는 헬라어로 '데우'(*)와 '퀴리우'(*)인데 이 두 단어 중에 하나님앞에만 관사가 사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이며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될 경우 본 구절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Robertson). 혹자는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고유명사처럼 관사가 없이 사용될 수 있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서로 구분하여 해석하기도 한다(Leon Morris, Gloag).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1절;2:16;살전 1:1;3:11 등에서 성부와 성자가 서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본 구절은 후자의 견해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는 그리스도를 지칭할 경우,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위엄과 주권과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란 표현은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밀접한 통일성을 나타내는 말이다(요 15:1-11).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성도들은 주안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속에 계시고 그들이 주 안에 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롬 6:11, 23;고전 1:5).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롬 4:16;11:5, 6;엡 2:5, 8).

성 경: [살후2:1]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 - '강림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루시아스'(*)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 혹자는 재림이 환난 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환난과 주의 날이 동시에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한다(Thomas).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환난을 받지 않고 '안식'을 누리며(1:7),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되리라(1:10)는 것이다. 그런데 본장 전체의 내용은 전자의 견해와 같이 환난 후에 예수의 재림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는 마 24장에 언급된 종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된다. 따라서 첫번째 견해를 취하는 것이 무난하다.

⭕ 우리가 그 앞의 모임에 관하여 - 예수의 재림 때 성도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그분 앞에 모이는 사건(살전 4:17) 곧 '휴거'를 가리킨다. '모임'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피쉬나고게스'(*)로 신약성경에서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동사형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선택자들을 모으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어졌다(마 24:31;막 13:27). (2) 명사형으로 신자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다(히 10:25). 그런데 여기서는 종말 사건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단어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기쁨을 맛보며 동시에 영원히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Morris).

성 경: [살후2:2]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 바울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전달되었던 것 같다(Thomas). 그 경로중의 첫번째는 예언이라는 영적 은사와 관련된 초자연적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 예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지지받고 있었고(살전 5:19,20) 주의 말씀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Bruce). 또한 그 경로 중 두번째는 '말'이었다.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구'(*)는 여기서 어떤 사람들을 통해 전달된 내용이나 교훈을 가리킨다. 그래서 영역 성경 중 NIV는 '전언'(report)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마치 바울과 직접 대화한 것처럼 하여 그 내용을 전하려 했음을 암시한다(Lightfoot). 즉 어떤 이들이 직접 바울의 입으로부터 나온 '재림'에 대한 말을 들었다는 소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경로중의 세번째는 '편지'(*, 에피스톨레스)였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 내용을 잘못 이해했거나거짓 교사들의 위조 편지를 받고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다(Morris).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앞서 열거한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미혹당했는지 혹은 세 가지 모두에다 미혹당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이 세 가지 모두를 단호히 부정하고 있다(Thomas).

⭕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 '이르렀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스테켄'(*, '존재하다')은 고대 동사로 임박성(臨迫性)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현존함을 나타내는 말이다(Thomas, Morris). 즉 '주의 날이 벌써 왔다'(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는 의미이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예수의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믿는 자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은 어떤 면에서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딤후 2:18)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사상을 가르치는 자들은 아마 오순절 설령 강림을 예수의 재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의날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살전 5:1)을 바울에게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주장에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거짓 풍문에 흔들리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동심하거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 투 노오스'(*)는 문자적으로 배가 안전한 닻에서 떨어져 바람이나파도에 밀려 요동하는 것처럼 갑작스런 열광이나 황홀 때문에 균형을 잃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을 뜻한다. 즉 그들이 갑작스런 흥분에 사로잡힐 가능성에 대해 주의시킨 것이다(Morris). 한편 '두려워하거나'로 번역된 헬라어'메데 드로에이스다이'(*)는 예수께서도 막 13:7에서 사용하셨던 동사로서 무서움에 사로잡힌 상태나 걱정하는 상태를 묘사한다(Morris). 보다 구체적으로 이 동사는 현재 계속되는 동요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서 신경과민에서 비롯되는 흥분상태 즉 갑작스런 충격을 받은 후에 뒤따라오는 동요를 의미한다(Milligan). 이처럼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렀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물리치고 확실한 진리 위에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 것을 강권(强勸)하고 있다.

성 경: [살후2:3]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미혹하지 말라 - 바울은 경고의 범위를 확장시켜서 어떤 종류의 계교(計巧) 귀기울이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단호히 거부할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강권하고 있다. '미혹하지말라' 원어 '메 여사파테세'(*)는 영이나 말 그리고 편지 등을 통한 거짓된 가르침과 그외의 어떠한 것에라도 사로잡히는 일은 기만당하는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배도하는 일 - 바울은 주의 날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두 가지 현상을 인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 먼저 바울은 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마 24:11, 23, 24). 여기서 '배도'(*, 아포스타시아)는 정치적, 군사적인 반란을 의미하는 말로서(Bruce), 이것은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의 세력이 출현할 것을 의미한다(딤전 4:1-3;딤후 3:1-9;4:3,4).

⭕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 - 바울은 주의 날에 이르지 아니함을 증명하기 위한 또다른 한 가지 현상으로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지 아니하였음을 들고있다. 역사속에서 사단의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요일 2:18)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 결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이 인물을 어떤 특정한 인물과 동일시하기 보다는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특히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안드로포스'(*)는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사단 자신이 아닌 사단의 일을 수행하는 인간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다(Lenski). 또한 바울은 '멸망의 아들'을 '불법의 사람'과 동의어로 언급했는데, 이는 '멸망되기로 예정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호칭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지칭하실 때에도 사용하셨다(요 17:12). 이 말은 '불법의 사람'이 아무리 흉악한 계획과 성도를 괴롭히는 일을 행할지라도 종말에는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 나타나기 - 바울은 앞서 주의 재림을 나타낸 동사(1:7)의 헬라어 '아포칼뤼프데'(*, '나타난다')를 여기서 다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동사에 사용된 부정 과거 시제는 미래적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에 사용되어 불법의 사람이 역사의 정해진 시간에 발생할 결정적인 사건과 연관되어 나타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Constable). 이런 진술을 통해 바울은 주의 날이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의 초기 단계를 특징짓는 이 두 가지 뚜렷한 현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Thomas).

성 경: [살후2:4]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대적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안티케이메노스'(*)로 '대적자', '배반자'라는 의미를 지니며(Robertson), 종종 사단에게 적용되었다(딤전 5:14).

⭕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타 레고메논 데온'(*)은 이방신들 뿐만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신을 가리킨다(Bruce).

⭕ 숭배함을 받는 자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바스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고 섬기는 대상들을 가리킨다(행 17:23). 본문에 사용된 이러한 용어들은 단 11:36-39에 나오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극에 달한 교만과 그의 신격화 행위를 연상케 한다.

⭕ 하나님 성전에 앉아...하나님이 하느니라 - 적그리스도는 교만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언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많은 사람이 미혹될 것이다(마 13:14). 한편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지 '기독교 교회'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미래에 다시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Thomas, 단 9:26, 27;마 24:15;막 13:14).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진술은 일차적으로 로마 황제의 신격화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Lightfoot). 실제로 역사상 로마 황제 가이우스 갈리굴라(Caius Caligula)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한 동상을 건립하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감행한 적이 있었다. 신약 성경 요일 2:18의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라는 사도 요한의 진술을 볼 때 당시에 적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언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는 적그리스도가 극명하게 나타날 미래의 시기까지 기다려야만 한다(Calvin, Thomas). 그때에 적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에 앉히는 이교적 행위를 통해 적그리스도임을 완전하게 드러낼 것이다(Lenski).

성 경: [살후2:5]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 바울의 참을 수 없어 하는 어조가 본구절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는 격노(激怒)하기 보다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가르쳤던 진리들을 상기시킴으로 그들을 바로 잡으려 하고 있다(Calvin).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난 문제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이미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 가르치고 경고하였던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말한 것'(*, 엘레곤)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수있다. 즉 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의 시제로 바울이 그런 사실에 대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계속 언급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공동 번역은 본 구절을 '내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종종 말하곤 했다'(I used totell you these things)라고 번역했다. 또한 이 동사의 시제는 만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가르쳤던 내용을 다시 생각했더라면 그같은 거짓 풍문에 미혹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Thomas). 이와 같이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자신이 과거에 가르쳤던 것들을 기억하여 깨닫기를 소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은 바울이 가르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참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거짓 가르침을 경계할 수 있었다.

성 경: [살후2:6]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저의 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토 헤아우투 카이로'(*)로 직역하면 '저 자신의 때에'란 의미이며 '적당한 때에'(at theproper time, NIV)라고 의역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불법의 사람을 정하신 때에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Robertson). 즉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주 예수의 나타나실 때를 정하신 것처럼(1:7), 불법의 사람이 일어날 때를 정하셨다. 그러나그날은 미래에 속하기 때문에(2, 3절;살전 5:2) 아무도 알 수가 없다(Thomas).

⭕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막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였는지 추측할 따름이다. '막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카테콘'(*)은 본구절에서는 중성 분사로 언급되었으나 7절에서는 남성 분사로 '막는 자'(*, 호 카테콘)로 언급되었다. '막다'의 뜻은 첫째, '좋은 것을 굳게 붙잡는다'(살전 5:21), 둘째, '억제한다', '방해한다'(몬 13)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후자(後者)의 의미로 쓰여졌다. '막는 것'이 남성과 중성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석상의 난점(難点)이 있어왔고 주석가들의 주장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주석가들의 '막는 것'에 대한 주장을 열거해 보면 (1) 로마 제국과 황제(George,Ladd),(2) 로마정부에 나타났던 법과 통치(Morris), (3) 유대 국가(Warfield), (4) 바울 자신(Cullmann), (5) 어떤 악마적인 힘(Moffatt), (6) 복음(Calvin), (7) 하나님 또는 성령(Strobel, Thomas)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장들 중 어느 하나로 결정지을 수 없으나 다음의 근거로 (7)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막는 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잘 알려졌었다(Thomas). 그들은 불법의 사람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령을 의지했었다.(13절;살전 1:6;4:8;5:19). 그리고 성령은 더욱 선하신 목적을 위해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는 자로 역사하셨던 적이 있었다(행 16:6) 둘째, 절대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의 세력까지도 제어하실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욥 1:6-12;2:1-6) 필요에 따라 사단의 세력조차도 유효 적절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출 10:1).

성 경: [살후2:7]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 '비밀'에 해당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이전에 감취어졌으나 이제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Bruce). 그런데 본절에서는 '불법'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불법의 사람이 숨어 있다가 은밀히 활동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불법의 사람을 활동케한 주체는 사단이다(Morris). 이 사단의 세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지만(렘 23:25-27) '막는 자' 때문에 현재로는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내에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교사들도 바로 이러한 세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불법'의 비밀은 배도가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날 때(3, 8절)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막는 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Thomas).

성 경: [살후2:8]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그때에 - 이 '때'는 '막는 것'이 사라질 때를 가리킨다(Calvin). 즉 '막는 자'가 떠날 바로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날 것이다(Bruce). 막는 자 때문에 지연되었던 그의 때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일어날수 없다. 그리고 불법의 사람은 미래의 한기간에 악한 일을 하도록 보장받을 것이며 정해진 그 때에 더 이상 은밀히 활동할 필요없이 공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 종말에 나타날 불법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의 최후가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뉴마티 투 스토마토스'(*)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그가 갖고 있는 저항(抵抗)할 수 있는 능력을 문자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Gloag). 즉 주님의 입김만으로도 적그리스도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힘찬 표현이다(Milligan).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입김은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욥15:30).

⭕ 강림하여 나타나심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곳에서 각기 별도로 사용된 단어 '에피파네이아'(*, '나타남')와 '파루시아'(*, '강림')가 이곳에서는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Robertson).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생생한 표현으로 재림 사건이 역사 가운데서 실제로 발생하여 결국 불법의 사람의 파멸을 몰고 온다는 것을 암시한다(Moffatt).

성 경: [살후2:9]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 불법한 자의 활동은 사단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불법한 자가 나타나 초자연적 행위를 세가지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먼저 '능력'이 언급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뒤나메이'(*)로 불법한 자의 배후에있는 이적을 행하는 힘을 가리킨다. 이 말은 내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헬라어 '엑수시아'(*)와는 달리 외적으로 나타난 능력을 가리킨다. 두번째로 '표적'(*,세메이오이스)은 불법한 자의 행동들이 의미있게 보이는 표시와 증거를 말한다. 세번째로 '기적'(*, 테라신)은 사람들이 불법한 자의 행동을 통해서 갖게 되는 경이감(驚異感)을 말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불법한 자가 사단의 능력을 따라서 사용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도 성도의 구원과 자신의 복음을 확증케하시기 위해서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사용하셨다(Calvin). 그러나 이제 그것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불법한 자에 의해서 미혹과 파멸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질 것이다(마24:24).

성 경: [살후2:10]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 불법의 사람이 사단의 역사를 따라 능력과 표적과 기사를 행사하지만 그의 힘이 결코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에게 미혹당하는 사람만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P.J. Gloag). 그들이 멸망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치 않고 그가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 거부한 결과에 기인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른다.

⭕ 진리의 사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아가펜테스 알레데이아스'(*)는 복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적그리스도들이 주장하는 거짓이나 속임과 반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 알레데이아)는 복음의 진리(갈 2:5;골 1:5)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진리를 말한다(롬 1:25, Morris). 바울은 본절에서 악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이 아무 까닭없이 멸망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들의 잘못보다는 하나님의 잔혹성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불평을 못하도륵 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고 있다.

⭕ 받지 아니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에덱산토'(*)는 '환영하지 않았다', '영접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멸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 경: [살후2:11]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 바울은 본문에서 진리를 거부한 자들의 운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진리를 거부한 자들이 거짓을 믿게 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Morris). 여기서 '유혹을...역사하게 하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네르게이안 플라네스'(*)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신'(send powerful delusion, NIV)으로 직역할 수 있다. 이는 그들에게 일어난 미혹이 불가항력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바울은 '에네르게이안'(*)이란 동사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임한 미혹이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단지 수동적으로 그 미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해 따라가는 것을 말한다(Morris). 요컨데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拒否)했기 때문에(10절) 선을 버리게 되고 악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한편 본절에는 '유혹'이나 '거짓'과 같은 악의 세력 등이 임의대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주권적으로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官村武天).

성 경: [살후2:12]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거짓 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6).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보다는 불의를 사랑하고 거짓을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임한 불의의 결과를 맛보도록 내버려 두셨다(롬 1:18-25). 한편 불의를 좋아하는 것은 불의 안에서 기쁨을 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인생의 그릇된 태도를 의미한다(Bruce). 그들에게 올 궁극적인 결과는 심판밖에 없다. 그리고 '심판을 받게하려'의 헬라어 '히나 크리도신'(*)은 '체로 걸러내기 위해', '심판하기 위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결과를 나타낸다. 여기서 진리는 복음의 진리를 나타낸다(Morris). 결국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운명 속에는 이미 유죄(有罪) 선고가 포함되어 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정죄가 암시되어 있다(Thomas).

성 경: [살후2:13]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위로와 기도]

⭕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할 근거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마땅히'란 수식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감사가 의무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아주 드물게 쓰인 '헤일라토'(*, '선택')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동사는 70인역(LXX)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신 7:6, 7;10:15, Morris). 한편 '처음부터'(*, 아파르켄)는 '영원 전부터', '창세 전부터'(엡 1:4)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 '거룩'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결과이다(살전 4:7;5:23).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성령의 현재적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되어지는 것으로(Bruce)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중 일부이기도 하다(Gloag).

⭕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요 - '진리를 믿음으로'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진술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함을 의미한다. '진리'(*, 알레데이아스)에 대해 브루스(Bruce)는 하나님의 계시와 복음안에서 알려준 구원의 방법을 의미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그렇지만 본 구절에서는 보다 좁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 곧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성 경: [살후2:14]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위로와 기도]

⭕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 '우리 복음'이란 1:8의 '우리 주 예수의 복음'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Bruce). 1:8에서는 '우리가 믿는 주 예수의 복음'이란 의미를 지닌 반면 본 구절의 '우리 복음'은 '우리가 전파한 복음'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사역을 통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부르심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케 하려는 것이다(Morris).

⭕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얻게 된 영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미래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세 전에 작정하셨으며(엡1:4) 그 완성은 예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다(1:10, 12). 결국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특권과 축복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점이다(Thomas).

성 경: [살후2:15]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위로와 기도]

⭕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 바울은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행해야 할 실제적인 의무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다. '굳계 서서'로 번역된 헬라어 '스테케테'(*)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쓰여졌다. 이것은 1-10절에 언급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임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악의 세력이 크다고 두려워하거나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부여잡고 담대하게 대처하라는 뜻이다.

⭕ 유전을 지키라 - 여기서 '유전'(*, 파라도세이스)은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수 있다(Calvin). 또한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세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율법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되고 사도에게 계승된 복음의 진리를 가리킨다(3:6, 7;마 28:20;고전 11:23;15:3). 좀더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의 사실을 기초한 것이다(Morris). 그러므로 본 구절은 복음의 전승을 강조한 표현으로서 비록 사람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되었지만 그 복음은 신적 근원을 가진 것으로 그러한 복음에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성 경: [살후2:16]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위로와 기도]

본절은 바울의 기도문으로 살전 3:11과는 달리 하나님이 그리스도보다 뒤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성부와 성자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로 보는 그의 기독론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정도로 존귀를 받으실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Thomas).

⭕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 모리스(Morris)는 종말론의 내용을 많이 지닌 본 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는 매우 비중있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에 따라 본절의 두 수식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영원한 위로. 하나님의 위로가 성도들을 강건하게 하며 영원히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이다. (2) 좋은 소망.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소망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약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상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있어서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모리스(Morris)의 설명은 문맥상 매우 적절하다.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로나 소망은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하며 굳건한 믿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한다.

성 경: [살후2:17]

주제1: [주의 재림에 대한 훈계]

주제2: [위로와 기도]

본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두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할수 있다. 하나는 주의 날에 관한 잘못된 지식으로 혼돈과 고민에 빠져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것이며 또 한가지는 모든 선한 일과 말에 있어서 그들을 강하고 견고하게 해주시는 것이었다(Constable). 여기서 바울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 1:3-7)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롬 1:11)을 향하여 그의 소원을 간구하고 있다.

⭕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 '위로하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칼레사이(*)는 지금 그들이 당하는 박해와 신앙의 혼돈을 잘 극복하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위로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 '모든 선한 일과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과 말로서(Hendriksen). 성도들의 삶 전체가 선한 행위를 나타내야 함을 가리킨다. 이렇게 될때 성도들은 어떤 위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할 수 있다.

성 경: [살후3:1]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기도의 부탁]

⭕ 종말로 -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토로이폰'(*)으로 '나머지에 관하여'(for the rest), '마지막으로'(finally)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편지의결론 부분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으며(고후 13:11;빌 4:8;살전 4:1)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빌 3:1;딤 4:1).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맡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을 위한 기도를 특별히 부탁하고 있다. 그것은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다른 곳에서도 복음의 진보가 계속되게 하는 것이었다(Bruce). 여기서 '달음질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트레케'(*)는 경주와 관련된 용어다. 바울은 때때로 자신의 사도적 노력을 경주로 비유하였다(고전 9:24;갈 2:2;빌 2:16).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또한 '영광스럽게 되고'란 표현은 승리에 대한 묘사로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말씀의 영향력에 중점을 둔 말이다. 이렇게 두 동사가 함께 사용된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본문이 유일한 예이며 그 의미는 "계속해서 달려가서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Robertson). 그래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승리의 질주를 하여"라고 본문을 번역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이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계속적인 복음의 진보로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Morris).

성 경: [살후3:2]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기도의 부탁]

⭕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본 구절은 바울이 대적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서 복음에 응답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칼빈(Calvin)은 본구절을 '신앙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하여 그 대적자들이 외견상 경건의 흉내를 내면서도 실제로는 그것과 거리가 먼 자들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그래서 헨드릭슨(Hendriksen)은 '믿음의 결여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복음 자체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고 진술했다. 한편 '믿음'(*, 피스티스)이란 명사가 본 구절에서 관사(*, 헤)와 함께 사용되어 기독교의 '그 믿음'을 가리키며(갈 1:23), 복음에 대하여 믿고자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Bruce).

성 경: [살후3:3]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기도의 부탁]

⭕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 본 구절은 믿음이 없는 바울의 대적자들에 대한 묘사(2절)와 대조적으로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Thomas, Hendriksen). 바울은 하나님의 참되심(롬 3:4)이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로서 '미쁘사'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바울의 신앙 고백적 표현으로서 그의 서신을 통해 자주 언급되고 있다(고전 1:9;10:13;살전 5:24). 이와 같이 바울이 주님을 신실한 분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보다 타인에 대해서 더 많은 염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이다(Calvin).

⭕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 본 구절은 바울이 주기도문 중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를 회상한 것으로 짐작된다(Bruce, Robertson). '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포네루'(*)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세 가지 견해로 나타난다. (1) 이 명사를 남성으로 취급하여 '악한 자'(the evil one) 곧 사단의 대리자로 보는 견해이다(Calvin, Meyer, Bengel). 그 이유는 이 말이 롬 12:9와 살전 5:22에는중성 형용사로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는 남성형용사로 쓰인 것이 중성 형용사로 쓰인것보다 4배나 많기 때문이다(Lightfoot). (2) 이 명사를 중성으로 취급하여 롬 12:9에서처럼 '악'(evil)로 보는 견해이다(AV, RSV). (3) 이 명사를 중성(악, evil)인지 남성(사단, the evil one)인지 분명히 단정하지 못하는 견해이다(Bruce, Robertson). 이상과 같은 주석가들의 견해에서 첫번째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본 서신과 첫번째 서신에서 사단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이다(2:9;살전 2:18;3:5).

성 경: [살후3:4]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기도의 부탁]

⭕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안에서 확신하노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도적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갈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 확신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될 것을 말하고 있다(Bruce). 즉, 그의 확신은 계속적이며 진행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Morris). 이와 같은 그의 확신은 '주 안에서'라는 신앙의 기초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롬 14:14;갈 5:10;빌 2:24). 그들은 주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가 그들에게 권고한 것을 행할 것이다. 나아가서 그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완성시키시는 주님의 신실성(빌 1:6)에 의해서도 그들은 바울의 명령을 준행하게 될 것이다.

성 경: [살후3:5]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기도의 부탁]

⭕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 본 구절은 앞뒤 사상을 연결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Morris). 즉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의 사도적 가르침을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계속 행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지 아니하고서는 그 가르침을 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인도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카튜뒤나이'(*)는 미래 능동 희구법으로서(눅 1:79;살전 3:11), 장래에 대한 강한 소원을 나타낸다. 이것의 원래 뜻은 길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리고 '직행하게 하다'의 뜻이다. 한편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스'(*)는 속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바울은 주님만이 사람들의 속사람을 주장하시며 변화시키는 분임을 믿고 있기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도록 주님께 호소한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텐 아가펜 투 데우'(*)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냐로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사랑'(Calvin, Meyer, Hendriksen)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바울이 그 서신서에서 사용하였던 표현 양식이기 때문이다(롬 5:5,8;8:39;고후 13:13).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문맥상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이라고 주장한다(Alford, Hiebert).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의 개념으로 분리된 의미가 아니라 이 두 가지 개념 모두를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지배 원리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것을 말한다.

⭕ 그리스도의 인내 -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넨'(*)은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람의 특징을 지적하는 단어이다(Grim-Taylor). 본 구절도 앞 구절과 같이 두 가지, 곧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의 인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모든 박해를 참고 견디신 그리스도의 인내를 의미하며, 이차적으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인내하는 태도를 가리킨 것으로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Morris).

성 경: [살후3:6]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명령함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진정한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그 명령의 절박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그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Morris). 그러므로 이 명령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인만큼 반드시 정중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Calvin).

⭕ 규모없이 행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탁토스 페리파툰토스'(*)로 '빈둥거리며 무질서하게 노는 것'을 특별하게 지칭하는 단어이다(Morris). 여기서 헬라어 '아탁토스'는 원래 군사 용어로 '대열을 이탈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Robertson).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릇된 재림관과 임박한종말의 지나친 강조로 인해 불성실하며 무위 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살전 5:14).

⭕ 우리에게 받은 유전 - '유전'(*, 파라도신)은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교훈', '가르침'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에 대해서는 2:15주석을 참조하라.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체류할때 그들을 향해 선포했던 복음을 비롯하여 본 서신을 통해 제시한 교훈과 권면까지도 포함한다(살전4:11, 12;5:14).

⭕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여기서 의미하는 '떠남'은 출교(excommunication)와 같은 공적 추방이 아니라 개인적인 교우 관계를 멀리하라는 말이다(Calvin). 즉 이것은모든 교제의 단절이 아니라 의심받고 있는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멀리 떼어 놓으라는 의미이다(Morris). 이러한 바울의 경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어 부패하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성 경: [살후3:7]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을 이미 알고 있음을 '너희가 스스로'(*, 아우토이)라는 강조적 대명사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Morris). 즉 그들에게 보여준 바울 자신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로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데이 미메이스다이 헤마스'(*)로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본받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의미한다(Robertson). 그렇지만 이것은 선택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기에 개역성경은 명령조의 표현으로 번역했다.

⭕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 이것은 6절 및 12절에 대조되는 구절로 규모 없이 행함에 대한 바울의 분명한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Robertson). 또한 본 구절은 바울의 삶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이고 간결한 표현이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의 모범적 삶을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성 경: [살후3:8]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양식을 값 없이 먹지 않고 -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으로서 단지 식사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생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삼하 9:7). 여기서 '값 없이'로 번역된 헬라어는 '도레안'(*)으로 문자적으로는 '선물로', '선물하는 방식으로'라는 의미이지만 선물 자체가 값 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본 구절과 같이 번역할수 있다(마 10:8;롬 3:24).

성 경: [살후3:9]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 '권리'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수시안'(*)으로 '능력' 또는 '권위'를 의미한다(Morris). 문자적으로는 내가 하고 싶어하면 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여 법적 권리와는 대조되는 의지적 '권리'를 가리킨다(Mill-igan). 이 '권리'는 예수께서 친히 그의 제자들의 위임식 때 주신 것이며(마 10:9,10;눅 10:7, 8), 바울도 실제로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Bruce). 왜냐하면 복음 사역자들이 당시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같은 권리를 고린도 교회에 주장하기도 하였다(고전 9:1-18). 그러나 바울은 한정적인 조건을 달아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경우에만 교회들이 자신을 돕는 것을 허락했다(고후 11:7-11;빌 4:15b).

⭕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수고하고 애썼던 것은 그의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Morris). 즉 모든 믿는 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모범은 잘못된 종말사상에 미혹되어 게으름과 나태에 빠진 자들에 대한 교훈적 의미를 지닌다(10절). 그러나 바울은 복음 전도자의 자급 자족(自給自足)의 원리가 다른 사역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실제 사용한 권리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복음 사역자들이 누릴 권리에 누를 끼치지 않게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Calvin).

성 경: [살후3:10]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 이러한 바울의 명령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수 있고'(창 3:19)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 짐작된다(Bruce).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함축성있는 교훈을 통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Morris). 바울은 여기서 자신과 그의 동역자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했음을 들어, 노동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좀더 설득력 있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남께서는 게으르고 나태한 행동을 싫어하신다(시 128:2;잠10:4). 그리고 노동은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창 1:2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교리로 자신들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제의 떡을 나눌 자격이 없다.

성 경: [살후3:11]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우리가 들은즉 -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오멘'(*)은 현재 시제로 바울과 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을 과거에 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듣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소문은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로 온 여행자들에 의해 전해진 소식으로서 '주의 날'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잘못된 종말사상을 가리킨다.

⭕ 너희 가운데...일만 만드는 자들 - 바울은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 명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바울이 비난하는 대상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을지라도 본절에 언급된 구체적인 사실로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만 만드는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에르가조메누스'(*, '참견하다')는 신약성경 중 본문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모페트(Moffatt)는 '일에 참견하기만 하는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와같이 데살로니가 교인 중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개도 일하지 말고 재림을 준비하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성 경: [살후3:12]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권하기를 - '명하고...권하기를'이란 표현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엄하게 경고조로 말하는 반면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훈계조로 호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Hendriksen).

⭕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 여기서 '종용히'로 번역된 혤라어는 '메타 헤쉬키아스'(*)로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썽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행동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이다(Bruce). 그렇다면 본구절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종말 사상으로 인해 야기된 현재의 동요와 흥분된 상태를 멈추고 자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스스로 일을 하며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아량이나 관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직 자신이 일한 것의 대가만을 기대해야 한다. 이렇게 될때 데살로니가 교회가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살후3:13]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 갈 6:9에서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권면한 후 글을 맺기 전에 본 구절과 같은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바울은 게으른 자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성도들은 요동하지 말고 각자 행동에서 하나님 계명에 의하여 최고 선을 행해야 함은 물론 어떤 어려운 국면에 처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낙심치 말라'는 이와 같은 의미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엥카케세테'(*)로 '겁내다', '시들다', '약해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동사는 데살로니가의 경건한 교인들이 게으른 자의 행동으로 인해 실족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의미를 지닌다(Calvin). 한편 '선을 행하다가'는 헬라어로 '칼로포이운테스'(*)인데 신약성경 중 본문에서만 사용되었다(Bruce). '칼로포이운테스'란 말은 단지 '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좋은 일, 명예로운 일을 행하라'라는 의미로서 모든삶의 국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말하며, 악행과 대조되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영광이 되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을 가리킨다(롬 7:21;고후 13:7;갈 6:9).

성 경: [살후3:14]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 '이 편지'는 본 서신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명령하거나 권면한 모든 교훈을 가리킨다. 한편 '순종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파쿠에이'(*)로 원래 '듣다'라는 의미인데(행 12:13), 주인의 명령을 듣고 다음에 그 들은 것을 행동에 옮긴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바울은 앞에서 그의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기원된 것임을 언급하였다. 따라서 그의말에 순종치 않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Calvin).

⭕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여기서 '지목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이우스데'(*)는 '상징', '표적', '징후'라는 명사 '세메이온'(*)에서 파생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중 본문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당시 영수증이나 공문서의 서명에 일반적으로통용된 단어이다(Milligan). 문자적으로는 '불순종하는 자에게 표를 붙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지목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자들의 행동을 주목하여 본 후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멀리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또한 '사귀지 말고'의 번역된 헬라어는 '메 쉬나나미그뉘스다이'(*)로 '아무도 친밀이 교제하지 말라'는 의미로서(Frame),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권고했던 징계인 출교(고전 5:9-13)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불순종의 정도가 고린도 교인들처럼 극도로 패역하고 완악하지 않았기에 바울은 징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선도하는 입장에서 또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차원에서 징계를 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Morris).

⭕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나 엔트라페'(*)이다. 여기서 '엔트라페'(*)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1) 중간태로 '어떤 사람에게 대들다' 혹은 '모욕을 주다'라는 의미이다. (2) 수동태로 '수치를 당하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타당하다고 본다(Robertson). 바울이 이러한 징계를 사용하고자 한 목적은 이처럼 죄인을 회개의 부끄러움으로 인도하여 그를 돌이키도록 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Morris). 그렇지 않으면 수치가 죄악을 깨닫는 첫 단계이기에 게으른 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써 교회에 더 이상의 혼란과 불순종의 파급을 피하며 이러한 본보기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Calvin).

성 경: [살후3:15]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성도의 규모있는 생활]

⭕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 앞절과 본절에서 징계자에 대한 바울의 일관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규모 없이 행하고 빈둥거리며 참견만 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무조건 배척하기 보다는 기독교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라고 권고한다(Bruce). '권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데테이테'(*)는 '훈계',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장로들에 의해서 행해질 수 있다(살전 5:12, 13). 이처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징계는 형제같이 생각하고 권면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딤후 2:25), 의를 배우며(사 26:9), 참된 사랑을 발견하게 하는데 있다(히 12:6). 그러나 이 징계가 받아들이지 아니할 경우 공식적인 출교(excommunication)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마18:17;고전 5:11-13).

성 경: [살후3:16]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끝인사]

⭕ 평강의 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퀴리오스 테스 에이레네스'(*)는 신약성경 중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공통적으로 '평강의 하나님'(*, 호 데오스 테스 에이레네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롬 15:33;16:20;빌 4:9). 그러나 이 두개념은 큰 차이가 없다. '평강'(*,에이레네)은 모든 사람의 안녕과 질서를 의미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들(게으름과 불순종)을 해결할수 있는 열쇠가 된다(Thomas). 이 같은 평강은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일 뿐이다. 그리고 '평강의 주' 만이 실제로 신자들 사이에 화평을 주는 동시에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데 기초가 되신다(엡 2:14-18).

⭕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기서 '때마다'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 판토스'(*)는 신약성경 중에서 종종 합성되어 '디아판토스'(*)로 사용되었다(막 5:5;눅 24:53;행 2:25). 이 단어는 '계속적으로'(continually)라는 의미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어의 평강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변치않는 영원한 평강을 가리킨다(Morris). 즉 주의 평강이 계속 유지되고 단절이 없기를 요구하는 것이다(요 14:27;16:33;골 3:15). 한편 '일마다'로 번역된 헬라어 '엔 판티 트로포'(*)는 '모든 면에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때마다'란 표현과 함께 강조적인 표현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의 평강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주의 평강은 외부의 상황과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평강이다(Morris).

⭕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 바울은 주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증하신 약속을 간구하고 있다(Thomas).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신다(마 28:20;히 13:5). 실제로 주의 평강은 주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마 1:23). 성도들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음과 그가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심을 알 때에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소유하게 된다(요14:27). 한편 본문에서 '너희 모든'(*, 판톤휘몬)이란 표현이 경건한 자들만을 가리키는지 게으름을 피우며 바울의 가르침을 불순종한 자들도 포함하는지 본 문맥에서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하는 대상이 데살로니가 교인 전체이므로 양자를 모두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들뿐 아니라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경: [살후3:17]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끝인사]

⭕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 이것은 바울 서신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표현 양식으로 본 서신이 그의 친서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대필자로 하여금 자신의 편지를 쓰게 한 후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자신의 독특한 필체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Morris). 본 서신도 마찬가지로 대필시켰지만 인사말만은 친필을 사용했다. 빌레몬서와 같은 짧은 서신에 있어서는 전문(全文)을 바울 자신이 직접 쓰기도 했다(몬 1:19). 그러나 고린도전서(고전 16:21)와 골로새서(골 4:18)는 본서와같이 끝부분에 자신의 친서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친필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의 이름으로 위조된 편지를 구분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Thomas).

⭕ 편지마다 표적이기로 이렇게 쓰노라 - 여기서 '표적'(*, 세메이온)은 '서명'(signature)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의 증거를 나타내는 이적을 가리킬 때 '표적'으로 번역되었다. 아무튼 이전의 그의 편지에서 뿐 아니라 이후에 쓰여질 모든 편지에서 그의 서신의 진위를 구분할 수 있는 증거임을 뜻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바울의 서명과 같은 효력을 지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은 앞에서 지적한 위험(2:2) 즉 그의 이름을 도용한 위조 편지가 교회안에 들어오는 것을 암시적으로 경계시키고 있다(Calvin). 당시 거짓 교사들이 사도들의 이름을 도용해 위조 편지를 발송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교회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수신자들이 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친필로 마지막 부분을 쓰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살후3:18]

주제1: [기도의 부탁과 마지막 권면]

주제2: [끝인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 지어다 - 본절은 그의 다른 서신서 마지막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축도이다. 이 축도는 그가 데살로니가에 첫번째 보낸 서신(살전 5:28)과 비교해 볼때 '무리'앞에 '모든'이 첨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동일하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모든'을 의미하는 헬라어 '판톤'(*)이 삽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