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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149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요한은 무저갱의 실체를 무시무시한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운명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이 팔십 초니까 칠십이 넘은 제가 팔십 살까지 살 확률은 50% 정도 되고, 구십 살까지 살 확률은 20~30%나 될까요? 아주 간혹 백 살 넘게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축하하고 부러워합니다. 물론 건강해야 하겠지요.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진 상태에서 평균 수명만 늘어나는 건 별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친구는 물론이고 자식도 다 죽었는데 자기만 건강하게 이백 살까지 살아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 상황은 정말 끔찍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신으로부터 죽지 않는 징벌을 받은 이가 너무 괴로워서 다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숙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사실입니다. 맞는 말일까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다는 위 구절의 묘사는 무저갱, 즉 지옥에 대한 묵시적 표상입니다. 단순히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오늘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태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삶을 고통스럽게 경험하거나 허무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꾸로 자기 안에 갇히거나 쾌락에만 몰두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경우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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