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루비콘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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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루비콘 강을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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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루비콘 강을 건너다*

먼저 이 제목은 필자 개인의 사견임을 밝히면서 왜 이런 제목을 붙여야 했는지 그 이유를 피력한다.

 

1. 작금에 이 나라의 정치 상황에 대한 견해를 두고 이름이 꽤 알려진 목회자들 사이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가며 서로 헐뜯는데, 그들이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점입가경의 극치는 대형교회의 아무게 목회자가 모 전과자 정치인에게 안수를 받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도 교인들은 아무 반응이 없다. 이 정도면 그 목회자를 이단으로 단정해도 돼지 않을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려고 하면 그 나라는 이미 갈라진 것인데, 그래서야 그 나라가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느냐?[마 12:26]"

 

2. "목사와 목사 사모를 잘 섬겨야 복 받는다." 듣는데 의존해서 신앙생활 할 때 필자가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고, 그 후로도 지인들로부터 들은 말이기도 하다. 긴 말이 필요없다. 예의 바르지 않은 사기꾼 목회자가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의가 바르다면 어떻게 교인들 앞에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호칭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복 받으려고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교인들이 있다는 게 더 문제다. 목회자를 목회자로 대우하는 것과 목회자와 그의 아내를 섬기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목회자와 그의 아내를 잘 섬겨야 복 받는 게 아니라, 시편 1편에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말씀 대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 20:28]"고 말했고, 또 "나는 선한 목자[요 10:11, 14]"라고 했으니, 이렇게 말하는 목회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시 119:120] 않는 악한 목회자임이 분명하다. "양의 탈을 썼으나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있는 예언자(목회자)를 조심해라.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법이니, 너희는 그의 언행을 보고 보고 들으면 그 사람이 양인지 이리인지 분별할 수 있다.[마 7:15- 20]"

 

3. 필자가 극동방송 시청자 위원 이어서 오랫동안 목회자들의 기도 종결어미를 모니터한 결과 다음과 같이 무려 아홉 가지로 마무리했다. "기도합니다, 기도하옵나이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했사옵나이다, 기도드립니다, 기도드리옵나이다, 기도드렸습니다, 기도드렸사옵나이다, 기도올리옵나이다" 목회자들이 이렇게 기도하니까 교인들이 따라 하는 건 불문가지다. 이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 "그때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어서 사람들이 제멋대로(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뜻에 맞는 대로) 했다.

[삿 25:11] 이 말씀은 사사들을 내세워 하나님이 직접 백성을 다스리던 시대에 한 말이니까, 여기서 "왕이 없어서"를 "하나님이 없어서"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이런 다양한 기도를 들을 때마다 필자는 이 나라의 하나님은 말로는 살아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성경책 속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위 기도의 종결어미에서 "기도합니다"는 어문법적으로는 틀린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하다"는 앞에 오는 명사의 동작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공부하다, 운동하다, 세수하다, 산책하다, 기도하다"처럼. 그런데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즉 "기도합니다"라고 보고하지 않아도 기도하는 거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안다는 말이다.

 

"기도했습니다"는 어문법적으로 틀린 말이다. 과거 시제는 내가 하는 동작을 마치고 잠시라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과거 일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공부했습니다, 운동했습니다, 세수했습니다, 산책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처럼.

영어 기도의 마무리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Pray in Jesus name" 영어에서 과거 시제 "prayed"를 쓰는 경우는 "I prayed at today's service.(오늘 예배에 내가 기도했다)"처럼, 자기가 한 일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말할 때에 한해서만 쓴다.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나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상대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하나님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자. 기도는 지금 듣고 있는 하나님에게 현재형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더 나아가 말에는 느낌(뉘앙스)이 있다는 사실을 전능한 하나님도 당연히 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들어달라고 부탁한 다음에는 정중히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지 "부탁했습니다"라고 과거시제로 말하지 않는다. 과거시제로 부탁하면 "너, 내 부탁 안 들어주면 재미없어!" 이처럼 상대를 협박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 아홉 가지 기도 가운데 보고형 기도와 협박형 기도는 Different 기도가 아니라 Wrong 기도다. 어문법적으로 바른 기도는 "...드립니다, ...드리옵나이다, ...올리옵나이다"인데, 이 가운데 뒤 두 가지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부성 느낌이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 같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표현이 가장 바람직하다. 제사 규정이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했나? 기도도 구하는 내용을 바른 그릇에 담아 드려야 한다.

 

4. 지금 이 나라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을 복 주는 신이 아니라 복빌어 주는(祝福해주는) 신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와 축복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오는 첫 구절이 창 12:3이다. 필자가 소유하고 있는 열두 가지 한글 성경 가운데 히브리어직역성경을 제외한 열한 가지 성경은 모두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고"로 번역했다. 즉 사람이 사람에게 복 받도록 비는 건 祝福으로 쓰고 하나님이 주는 건 福으로 썼다.

하나님만이 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번역이 원뜻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이다. (히브리어직역성경의 "내가,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심각한 오역이다.)

 

이렇게 우리말 성경은 읽는 순간 바로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으나, 히브리어나 영어 성경은 "축복과 복"을 각각 한 단어인 '바라크'와 'Bless'로 쓰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 주는 신이라는 걸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고"는 우리말 성경의 백미 가운데 백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복 빌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건 예수님 이름이 아니라 "부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인가? 말은 意識이다. 따라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위에 명예의 신, 권력의 신, 富의 신, 건강의 신, 출세의 신이 따로 있다고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말을 빌리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조지 오웰이 이렇게 말했다. "말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세상 사람들처럼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목회자의 변은, 말은 생명체라서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변하는 말을 수용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말이 변하는 건 맞지만 교회는 변하는 말 가운데 기독교나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은 바로 사용하도록 계도해야지 수용해서는 안된다. 변하는 말을 다 수용해도 된다는 목회자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물론 아직은 축복과 복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만큼 널리 사용하지는 않지만 안티 크리스천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부른다. 세월이 지나 이 말을 두루 사용하게 되면 이 말도 수용하겠는가?

변하는 말에는 隱語와 俗語도 있는데 이 말도 다 받아들여야 되는가?

 "심판 날에는 자기가 지껄인 터무니없는 말에 대해 낱낱이 해명해야 하고, 그에 따라 무죄와 유죄를 판결받게 된다.[마 12:36,37] 정말 무서운 말이다.

 

5. 성경에 오늘날 교회의 목사 역할을 하는 직분(직책, 은사)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직분은 "사도, 선지자(전도자), 교사, 능력(기적) 행하는 사람, 병 고치는 사람,돕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방언하는 사람[고전 12:8]"과 "사도, 예언자(선지자), 전도자, 목자, 교사[엡 4:11]"가 전부다. 그런데 엡 4:11에서 목자로 번역해야 할 것을 여덟 개 버전(1937년 발행, 가족, 개역개정, 맛싸, 새번역, 우리말 비전, 조선어, 헬라어 직역)이 목사로 번역하고 목사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제시한다. 세 개 버전(공동, 킹제임스, 현대어)은 원뜻에 맞게 목자로 번역했다.

 

목사로 번역한 것이, 목사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제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엡 4:11에서 목사나 목자로 번역한 헬라어가 "포이멘"이고, 이 단어가 모두 스물한 번 나오는데(마 9:36, 25:32, 26:31. 막 6:34, 14:27. 눅 2:8,15,18,20. 요 10:2,3, 4,11,12,16. 엡 4:11. 히 13:20. 벧전 2:25, 5:4. 계 7:17) 엡 4:11을 제외한 다른 곳에 목자 대신 목사를

대입하면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일하게 엡 4:11 한 절에서만 목사로 번역해도 말이 성립되는데, 이걸 빌미잡아 목사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는 근거로 삼기 위해 목자를  목사로 대치한 것이다.

 

영어성경 Easy to Read 버전과 현대어성경은 각각 헬라어 원뜻을 살려 엡 4:11 뒷부분을 이렇게 번역했다. "Some people to have the work of caring for and teaching God's people." "양을 치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 참고로 1925년에 발행된 한자 성경에서 "목회자"로 쓴 것을 1937년에 발행된 한글 성경에서 "목사"로 바꿔 쓴 것은,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상놈이 성경을 가르쳐야 되는 경우 교육 효과를 고려해 고육지책으로 신분을 높여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루터의 종교개혁 전에 로마 황제와 사제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다가왔다.[마 3:2]"를, 일반백성들에게는 성경이 보급되지 않았고 그들만이 성경을 가졌기에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천국 가지 못한다."로 둔갑시켜 혹세무민하며 면죄부를 팔았다. 한국 교회는 루터의 종교 개혁을 계승하는 교회이고, 그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다. 일 년에 한 번 종교개혁주일에만 돌아가는 게 아니라 매일 돌아가야 한다. 교인들이 성경을 깊게 읽지 못한다는 전제로 교인들을 속이면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계 21:8]

 

무엇보다 여호와를 牧者[시 23:1], 예수님이 스스로 나는 선한 牧者[요 10:11,14] 라고 했는데, 사람인 牧會者가 자기 자신을 牧者보다 높은 호칭인 牧師로 부르는 건, 황당무계하고 불경스러운 일이며 선한 양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다 형제다.[마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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