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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성경사전
어떤 기관에 희망, 소원 따위를내어 해결해 주기를 요구하는 일.
양반의 집 수청방에 있으면서여러 잡일을 맡아보거나 시중을 드는 사람(창15:2;마20:8; 눅16:1-8). 경륜 참조.
원래 이 말은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원소를 뜻하며 상징적으로 종교의 기본원리나 유대인들의 의식의 기본 조건 등을 뜻한다(갈4:3, 9; 골2:8, 20; 히5:12). 이런 것들은 약하고천한 것으로 아이들에게나 적합하며 관능적이다. 따라서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떠나 좀 더 성숙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신 것. 메시아 예언의 두 줄기 참조. 예수님은 주전4년경에 이 땅에 오셔서 주후 30년경에 십자가에서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다. 그분의 초림은 나사렛에서 무명으로 사시던 처음 30년과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고 드러나게 사역을 하신 공생애의 3년(혹은 3년 반)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충만한 때에 모세의 율법 밑에서 여자의 씨로 태어나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시며 완전한유대인으로 사셨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신약시대를여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셨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신약시대는 십자가사건 이후부터이다. 칠십 이레, 재림, 상속 언약 참조.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선도 참조(64).
오두막. 이것은 주로 기둥을 세우고 초록색 나뭇가지로 지붕을 만드는 형태로 만들어졌다(창33:17; 욥27:18). 장막절 혹은 초막절이라는이름은 유대인들이 이 명절의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는 데서 유래되었다(레23:40-42; 느8:14). 장막절참조.
풀과 나무.
기독교로 개종한 지 얼마 안되는 신자(딤전3:6). 바울은 초신자가 목사가 되는것을 금하였다.
첫 열매 명절.첫 열매 참조.
서로 잇는 재목의 한쪽을 홈에 끼어넣을 수 있도록 뾰족하게 만든 부분(출26:17, 19).
뒤쫓아 구함.
행복을 빎.
이집트 탈출 참조.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모임에서 내쫓고 영적인 권리 등을 박탈하는 일.유대인들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았다(요9:22; 12:42; 16:2). 출회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잠정적으로 모임과 사회에서내쫓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모임에서 내쫓고 그들의특권을 빼앗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필요한 경우에출회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인정되었다(마18:15-18; 고전5:1-13; 16:22; 갈5:12;딤전1:20; 딛3:10). 유죄로 판명난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못했고 신자들의 모임에서 끊어졌다.아나테마 참조.이러한 출회 조치는 결코 당사자가 하나님의 법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았고 또한 사람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 상대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지 않았다.또한 교회의 이런 결정은 결코 과거 천주교회에서했듯이 적개심에 근거해서 저주나 박해를 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단지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부터 물러나고 그와 교제하지 말고 먹지도 말라고 권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회개하면 다시 그들을 받아들일 것도 언급했다(살후3:6, 15; 요이10-11; 고전5:1-5; 고후2:5-11).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병 고침을 받은 후 기뻐하는 대목에(행3:8) 나오는 ‘기뻐서 뛰놀다’(눅6:23)라는 히브리 표현은 현대식 춤이라기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춤추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에게는 춤추는 것이 대개 종교적인 기쁨과 감사의 표현이었다(삼상18:6-7). 그가 골리앗이라는 블레셋 투사를 죽이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도시에서나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춤추는 일은 또한 가정에 경사가 있을 때에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어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종교적으로춤을 출 때에는 대개 작은북이 의식을 인도했고 인도하는 사람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이 스텝을 맞추며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홍해의 기적 이후에 미리암이 이스라엘 여인들을 인도하여 노래하고 춤을 춘것과 다윗이 사람들을 인도한 것을 보기 바란다(출15:20-21; 삼하6:14; 시150:4).성경에 있는 이런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춤추는 일은 대개 종교적 성격을 띠었으며 즐거운 날에 이루어졌고 남녀 중 한 그룹이행했으며 야외에서 낮에 이루어졌다. 남녀가 한데어울려 춤을 춘 일은 없었으며 오락으로 춤을 춘 일도 없었다. 오락과 관련해서는 미갈이 말한 ‘헛된 자들이 춤추는 것’(삼하6:20)과 욥이 언급하는 ‘불경건한 가족들이 춤추는 것’(욥21:11) 그리고 헤로디아의딸이 춤춘 것(막14:6)을 예외로 들 수 있다. 그 당시로마와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연회에서 춤추는 것이여가를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들은 남녀가 어울려 술을 먹으며 춤을 추었다. 또한 로마와동방의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사람들이 고용되기도 했는데 물론 그들은 대개 좋지못한 성격을 가진 여자들이었으며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벌어진 춤판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춤 역시 외설스러웠다(사23:16).
왕(삼상25:30; 삼하6:21), 요셉같은 백성의 통치자(창41:43), 다니엘(단2:48; 5:7),마을의 지도자(삿9:30; 대하29:20; 느3:9), 고위 상담자(삼하8:18; 20:26), 큰 집의 청지기(마24:45, 47;눅12:42), 일꾼의 감독(창47:6), 왕의 재산 관리자(대상27:31), 잔치를 주관하는 자(요2:8-9), 회당을다스리는 자(막5:36) 등이 치리자라 불렸다.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됨.
조롱, 책망, 수치를 당하는 것(딤전3:7).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들로 인한 수치를 당하였으므로 그분을 따르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치욕을 지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후12:10; 벧전4:14). 모세는 이집트의 보화보다그리스도의 치욕을 선택했다(히11:26).
병 고침.
왕이 내리는 명령.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불리는 명예를 얻었다(사41:8; 약2:23). 하나님은 사람이 친구에게 하듯 모세에게 이야기하셨다(출33:11).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다운 친구 관계일 것이다(삼상18:1-4).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명예와 복을 주셨다(요15:15). 그분께서는 유다를 가리켜서도 친구라고 하셨지만(마26:50) 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동반한 무리를 뜻하며 그것은 우정 관계를 나타내는단어와는 다르다(마20:13; 22:12 참조).
남자 친척. 구약에서 친족은종종 ‘무를 권리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스라엘은 궁핍할 때에 자기나 가족 혹은 땅을팔 수 있었으므로(레25:39-43) 다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친족으로서 그들을 무를 사람 즉 친족 구속자가 필요했다(레25:25).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룻4). 예수님은 바로인류의 친족 구속자로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속하기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히2:11-12, 17).
처음부터 이 수는 한 주의 날 수를나타내었으므로 성경에서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특별히 완전한 수라는 의미가 여기 담겨 있다. 정결한짐승은 일곱 마리씩 방주에 들어갔고(창7:1-24) 요셉 당시 이집트의 풍년과 흉년은 각각 7년씩이었다(창41:1-57). 유대인들에게는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며 일곱째 해가 안식년이고 7년이 일곱 번 지나면희년이 되었다. 무교절과 장막절 즉 그들이 가장 크게 여기는 명절의 기간은 각각 이레씩이었고 그들이바치는 희생 예물의 수도 많은 경우 일곱 마리로 제한되었다. 금 등잔대의 가지도 일곱이고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제사장이 여리고의 성벽을 7일 동안돌았다.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 일곱 등잔대, 일곱별,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재앙, 일곱 천사가 나온다. 이같이 7은 십진법에서 10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수라 할 수 있다(마12:45; 삼상2:5;욥5:19; 잠26:16, 25; 사4:1; 렘15:9). 또한 일곱 번이일곱 개 있는 것은 완전한 것, 충만한 것 등을 뜻하였다(창4:15, 24; 레26:24; 시12:6; 79:12; 마18:21).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수도 없이 많은 것을뜻한다(마18:22).
성경의 가장 놀라운예언 중 하나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대언자 다니엘에게 주신 ‘70이레’ 혹은 ‘70주’(seventy weeks)라불리는 예언이다.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죄들을 끝내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단9:24).다니엘은 유다 왕국의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은 자기가말한 것이 70년이 아니라 70년이 7개 있는 490년이며 또 하나님께서 이 기간에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것을 세고 계신다고 말했다. 칠십 이레 선도 참조(78).이 490년의 처음 69이레 즉 483년은(69x7=483)주전 454년경에 아닥사스다 왕이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느2:1-8)와 통치자 메시아가와서 죽은 때 즉 주후 30년까지의 기간을 나타낸다.하루를 1년으로 계산한 예는 민14:34에서 찾을 수있고 또 창29:27을 통해 이레가 7년을 뜻함을 알 수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면서 늘490년이라는 주기를 이용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부터 가나안 정착까지, 여호수아부터 왕국까지,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바빌론 포로까지의 기간이 모두490년이다.이 사실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주전 4년에 태어나셨고 주전 1년 다음이 곧바로 주후 1년이 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약속된 메시아가 오는 해는 주후 30년이 된다. 그때 예수님의 나이는 서른세 살 반이었고 바로 그 해에 그분께서는 유다의 약속된 통치자즉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 그분께서는 자기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셨는데 그렇게 된 것은 기록된 대로 ‘자기 자신을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단9:26).이 주목할 만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됨으로써다니엘이 예언한 490년의 기간 중 처음 483년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으로부터 명백하게 알수 있듯이 그 483년 후에 남은 마지막 7년은 즉시연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다.“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이 예언은 메시아가 끊어진 뒤 수세기가 흘러간후인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 마지막 때는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 중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해’ - 이방인들을 향한 것이 아님 - 예비된마지막 한 이레 즉 7년을 가리키며 이때를 보통 ‘7년환난기’라 부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회복을 보여 주기 위한 이정표인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앞부분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은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환난기 참조.
내용이 부실하고 히브리전통본문과 상이한 점이 많아 신뢰하기 어려운 그리스어 구약성경. 이것은 보통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누군가가 상상 속에서 꾸며 낸 책이다. 이것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히브리어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고문서에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 그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역본이 유대인들의 공식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발되었으며 그들은 주전 250년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일을 한 것으로추측된다. 이 편지가 ‘칠십인역’이라는 불가사의한문서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인데 그 이유는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성경 전체를 번역한그리스어 필사본이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하다.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대라는 요구를 받은 학자들은 주후 200년경 오리겐이 지은 헥사플라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칠십인역’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되었으며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100년 이상 지나서 기록되었다.‘칠십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육난성경인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에다 스스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넣지 않고 ‘칠십인역’을 필사해 넣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정당하지않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72명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기록되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된다.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교는 단 한 번도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외경, 정경 참조.만일 유다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제멋대로 첨가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조금만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임을 알 수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와필로가 그리스어 모세오경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들마저도그것을 구약성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수용된 어떤 역본으로 언급하지 않았다.한편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모순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 편지의저자가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을 ‘칠십인역’의 복사본으로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한편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신약에 나오는 구약인용 구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칠십인역’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칠십인역’이란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을 가리킬 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약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가상의 ‘칠십인역’ 혹은 오리겐의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동원해 구약성경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이다.끝으로 학자들이 ‘칠십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저버리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히브리어를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 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한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성경의 공식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번에 성경 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킬 수 있다.지금까지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전통 마소라 사본과 충돌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오리겐 같은 성경 비평학자들을 높이세우는 ‘칠십인역’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보존, 알렉산드리아, 마소라 참조.
일곱 이레(週)가 지난뒤 지키는 첫 열매 명절(출34:21). 오순절 참조.
구약에서 아픈 사람의 침은 부정한것으로 간주되었고(레15:8) 침을 흘리는 것은 미친사람의 증세였다(삼상21:13).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경멸의 표시였다(민12:14; 욥30:10). 이사야 대언자는 예수님이 이처럼 경멸당할 것을 예언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사50:6; 마27:30; 막15:19).
침례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밥티조’, ‘밥티스마’, ‘밥티스테스’ 등이며 이 단어들은모두 그리스어 ‘밥토’에서 나왔다. 신약성경에서115회 사용된 ‘밥토’는 ‘물로 뿌리는 세례’를 의미하지 않고 ‘물 속에 담그는 침례’를 의미한다. 침례를주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나 세례를 주는 데는 많은물이 필요 없다(요3:23). 또한 침례를 받으려면 물있는 곳에 가야 하지만 세례를 받으려면 물을 가져와야 한다(행8:36). 또한 침례를 받으려면 ‘물 속으로’(into the water) 내려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으며 침례를 받은 후에는 ‘물 속에서’(out of the water) 나와야 하지만 세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행8:38-39).성경은 한결같이 침례가 ‘물 속에 잠기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며 불 침례와 성령 침례 역시 ‘잠기는 것’으로 규정한다. 마3:11-12를 그릇되게 해석하여 성령 침례가 곧 불 침례이므로 뜨거운 불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침례자 요한은 이 구절에서 결코 그런 것을 뜻하지 않았다. 문맥과 함께 이 구절을 읽어보면 성령 침례를 받는 자는예수님의 곳간에 즉 천국에 들어가지만 불 침례를받는 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들어감을 알 수있다. 이처럼 성경은 분명하게 침례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 몸이 물 속에, 성령님 안에, 불속에 잠기는 것’임을 보여 준다.그리스도인의 침례는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 매장,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면서 특별히 성도들도 예수님과 똑같이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임을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규례이다. 그러나 세례에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다가 일어나는 것 즉 사망과 매장과 부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골2:12). 세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부활이 상징적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롬6:3-4).세례에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새로이 옷 입어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는 것이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갈3:27).어떤 이들은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침례 중생 교리를 믿고 가르치며 특히 유아세례를주는 천주교회에서는 이 의식을 통해 사람이 거듭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 중생을 지지하지 않으며 다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통해자기의 거듭남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들, 마귀와마귀의 천사들 및 사람들 앞에서 증거로 보인다고말한다. 즉 믿고 거듭난 뒤에 침례를 받는 것이지침례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행8:12).천주교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교리문답서 공부를 위한 학습 기간을 두는 전통을 세웠으며 이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세례를 준다. 또한천주교인들은 세례가 ‘은혜를 가져다주는 대성사’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침례가 은혜를 가져다주는 성사가 아닐 뿐더러 구원 또는 은혜도 가져다주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엡2:8-9).성경은 이 같은 천주교의 관행과는 달리 누구든지믿으면 곧바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이디오피아 내시는 믿음 고백과 함께 즉시 침례를 받았고 사도행전 16장의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도믿은 즉시 침례를 받았으며(13-14절) 같은 장에 나오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믿은 즉시 침례를 받았다(33절).위에서 보았듯이 어떤 사람은 요르단 강에서, 어떤 사람은 광야의 오아시스에서, 어떤 사람은 집에서 침례를 받았다. 즉 몸을 담글 수 있는 곳이면 강이든 호수든 바다든 침례 탕이든 상관이 없다. 침례가 교회의 회원권과 관련이 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아니면 지역 교회에서 침례를 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침례를 행할 때에 침례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은 편한 옷을 입고 물 속에 들어가고 침례를 주는사람은 먼저 침례를 받는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보는 데서 믿음의 고백을 할 것을 요청한다. 침례를받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침례를 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침례를 준다. “○○○형제님의 믿음 고백과 우리 주 예수님의명령에 따라 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침례를 줍니다.” 이렇게 선포한 뒤에 침례 받는 사람을 뒤로 눕혀 물 속에 잠근 뒤 그를 물 속에서 들어올린다. 이렇게 해서 이 형제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매장되었고 새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잠을 자거나 쉬는 자리. 동방에서는예나 지금이나 방의 사방에 넓고도 낮은 ‘지금의 소파와 비슷한 형태의 침상’이 있어서 낮에는 거기서쉬고 밤에는 잠을 잤다(출8:3; 삼하4:5-7). 어떤 경우에 이 침상은 몇 계단 위로 높은 데 두기도 하였다(왕하1:4; 시132:3). 침상은 그 주인의 위상에 따라여러 형태의 덮개로 덮었고 장식을 사용했다. 가난한 사람은 간단한 매트와 양가죽 혹은 겉옷이 침상의 전부였는데 특히 후자는 낮에 사람을 감싸는 데적합했다(출22:27; 신24:1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고치신 사람들이 자기들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마9:6; 막2:11).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침대 틀 같은 것은 거의 알려지지않았고(신3:11; 삼상19:15; 암6:4) 유대인들은 밤에신발과 겉옷을 벗고 잠을 잤다.
공덕을 일컬어 기림.
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것 혹은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서 죄로 인한 결과들에서 벗어나 무죄가 되는 것.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죄로 말미암은모든 형벌에서 구조되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 당사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마치 죄가 없는 자처럼 거룩한 자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죄들의 용서와 형벌의 면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를 입어 그분의사랑을 영원히 받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여기에는사람의 행위가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를무죄로 만드는 일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는 전혀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만 보신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셨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더 이상 정죄가 없다(롬8:1).우리가 주님을 구원자로 맞이하는 순간 칭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은 우리의 구속자 주님이 무한대로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다. 칭의는 사람이 얼마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혹은 얼마나 거룩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칭의와 함께 성화 즉 거룩함 가운데서 자라는 일이 시작되지만 칭의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일이고 성화는 평생동안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차이가 있다. 한편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는 동안 완전 성화를이루어 죄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화참조. 우리 주님이 주시는 칭의의 선물은 거룩한 삶을 사는 촉진제가 되며 이 일과 함께 양자 삼으심과양심의 평안과 성령님의 열매가 우리 삶에서 생긴다(롬3:20-31; 5:1-21; 8:1-4; 10:4-10; 갈2:16-21; 엡2: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