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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인트의 책 이야기 Jul 29. 2022

돈으로 보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머니로드』 - 돈의 흐름을 바꾼 부의 천재들 

      _장수찬 / 김영사               




돈 공부는 빠를수록 좋다. 돈의 흐름을 안다는 것은 경제와 금융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다. S&P 글로벌 금융 문맹률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금융문맹률이 33%라고 한다. 142개국 가운데 81위이다. 특히 연소득 3천만 원이하 저소득층, 18~29세 젊은 층 그리고 70세 이상 고령층의 금융 이해도가 평균보다 낮았다. 그 결과는 오늘날 사회문제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청년을 대상으로 한 불법 대출 피해와 고령층의 디지털 금융 소외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역사 커뮤니케이터인 저자는 조선시대 돈의 흐름과 함께 국정의 운영, 문관과 무관의 관계, 부와 권력, 부의 흐름을 바꾼 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슷한 시기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가와 서양의 역사도 곁들인다. ‘돈의 흐름’을 타이틀로 했지만 조선시대를 기점으로 한 작은 역사서이다. 저자는 돈이 만들어낸 세상을 이해하려면, 돈이 탄생한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명나라에 병력을 요청한다. 우여곡절 끝에 명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보다 시장경제가 앞섰던 명나라의 군병들은 조선의 물물경제 시스템에 당혹해한다. 당시 명군은 금속화폐인 은화를 가지고 다녔지만 조선의 화폐는 볼 수 없었다. 명나라 지휘부는 당황했다. 전장에서 병사들이 입고 마시는 군량 조달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정부에 군사에 대한 보급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관리들의 굼뜬 태도뿐이었다. 보급이 어렵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명나라 조정은 재빨리 인근의 요동 상인들을 조선에 보내 심각한 보급 문제를 해결하려했다. 이를 기점으로 그 후 각지의 명나라 상인이 조선에 진출하는 뜻밖의 시발점이 된다. 명나라가 조선에 풀어놓은 은화를 통해 조선의 천민 계층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화폐의 매력에 푹 빠진다. 조선후기 왜은의 유통과 상평통보(常平通寶)발행 역시 명나라 상인들이 영향을 준 ‘은본위 경제권’ 경험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에 돈을 벌고 부를 성취하는 방법은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신분제 사회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이다. 당시 조선에는 ‘손부수(선전관, 부장, 수문장)삼천’이라는 인사제도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군 장교를 육사와 비육사 출신으로 나눠 커리어를 부여하는 것과 유사하다. 조선시대에는 선천(선전관 직책의 추천)을 얻어야 엘리트 군인으로 대접받았다. 이들이 청요직(핵심 직책)과 꽃보직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군대가 출판은 물론 화폐주조까지 그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같은 군영에서 화폐를 제조할 적엔 최대 50~60%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주전 이익을 크게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노임을 싸게 부를 수 있고, 분업화한 장인으로 구성된 군수공장이 있으며, 연료인 숯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위치라는 3박자를 모두 갖춘 데가 군대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화폐(상평통보)가 등장하고 사회 깊숙이 침윤하자 노동소득이 아닌 자본소득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이 속출한다. 이들은 화폐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싼값에 거둬들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더 나아가 상품 경제 발달로 지역명을 달고 상품화한 쌀이나 채소가 등장했다. 이를 잘 마케팅하고 판매해서 큰돈을 번 농사꾼이 각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생기면 꽉 막힌 신분제도에 동요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1784년(정조8)5월 전라도에 사는 장익복이라는 사람이 무려 재산 2천 석을 나라에 바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다. 흉년이 들어 나라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자 장익복이 평민부자라는 명목으로 의연금을 낸 것이다. 거금의 의연금 덕분에 그의 신분에 조금 변화가 온다. 전주 감영 소속 군속에서 무관직인 방답진 첨사로 임명된다. 어느 날 임금의 부름이 있었다. 정조를 알현하는 영광을 누린다. 종3품 첨사직을 얻는다. 장익복은 3년 후에 다시 곡식 2천석을 나라에 바친다. 장익복은 궁성을 경비하는 위장 직책이 주어졌다. 6년 후인 1793년 그는 곡식 3천 석을 나라에 바친다. 정조는 그의 충심에 감동해서 국왕 대리인이자 지방 사또인 장기현감에 제수한다. 시골농사꾼 장익복이 여기가지 오는데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가 수령 자리를 얻는데 들어간 비용은 곡식 7천 석이다. 오늘날의 시가로 따지면 약 1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장익복은 장기현감 직을 무사히 마쳤고 더 이상 벼슬길에도 나가지도 않았다. 고향 전주로 돌아온 장익복은 지역유지로서 기부활동에만 전념하면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나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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