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공회가 고용한 매서인·전도부인, 효율적 전도와 성경 배포
각 지역 매서인·전도부인 흔적 찾아 남겨 후대에 귀감 되길

Ⅰ. 들어가는 글

조선 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말로 전해진 것은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몇 해 전의 일이다. 조선시대 말기 개신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전 해외(중국·일본)에서 복음을 접한 구도자들에 의해 국내에 복음이 전파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외국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복음이 조선에 전해지기에 앞서 조선인들은 먼저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보인 것이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우리말로 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그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국내에 반입되어 전파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독교를 믿으려는 한국인들이 생겨난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성경반포의 주역인 매서인들의 사역에 관해 지난 2020년 『매서인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라는 책을 발간한 바 있다. 교회 설립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복음이 전해지려면 토착 언어로 성경이 발간되어야 한다. 또한 발간된 성경은 효율적으로 현지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장 효율적인 성경 배포와 전도의 방법으로 대영성서공회를 위시하여 미국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서는 바로 매서인(Colporteur), 전도부인을 고용해 성경을 배포한 것이다.

필자는 이 논고에서 우리나라에 어떻게 성경이 배포되었고, 성경 배포의 주역들인 매서인과 전도부인들이 교회 설립과 성장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개괄적으로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설립과 교회 성장에 실질적 역할을 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원주 지방의 매서인과 전도부인들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다른 지역 교회에도 그들의 교회 설립과 성장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커다란 공헌을 한 매서인과 전도부인들의 사역 흔적만이라도 찾아 남겨 향후 교회 성장과 신도들의 신앙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Ⅱ. 성경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했나?

중국 북방선교부에 파송되어 있는 E. 브라이언트(E. Bryant)1) 목사의 관심에 성경은 조선 땅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82년에 파송된 하몬(Mr. Harmon)2) 씨는 조선 국경에서의 일을 착수하기 위해 잘 적응하고 있으며 브라이언트 씨의 경험 많은 지도로써, 그가 보기에는 조선의 문호가 점점 개방되면 믿는 사람들도 늘어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로스(Mr. Ross) 씨는 신약성서의 번역을 진행해 왔으며, 이미 여러 부분을 인쇄했는데, 주로 4복음서와 사도행전이다. 이들 중 일부는 로스의 개인적인 선교망을 통해 배포되었다.

1884년 3월 20일 자 목단(Mukden, 현 심양)에서 보낸 로스의 편지도 접수되어 월간 『리포터, Monthly Reporter』에 게재되었다. 그것은 성서공회에서 로스에게 인쇄할 수 있도록 한 번역본의 첫 결실로 조선인의 세례를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그가 보내온 보고이다.

“조선 왕실의 반대는, 내가 분명히 듣기로는 전적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있었던 가톨릭 신자들의 행위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구도자들은 평화로운 시민으로서의 성격과 천주교와의 차이점이 잘 알려져 위험 없이 최소한 2년 동안 조선땅 서부 지역에서 조선 기독교 사역을 해왔다. 나는 상하이에서 6개월 전에 나에게 도착한 구도자들의 위험에 대한 보고를 추적해야 할 출처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구도자들에 관한 한, 그들은 아무런 기반이 없다. 예전에 식자공(植字工, 김청송) 일을 하던 한 젊은이가 며칠 전 심각하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를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그의 특별한 부탁으로 그는 우리 복음서 두 상자를 가지고 조선땅에 가서 팔고 돌아왔다. 물론 그는 위험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그의 복음서 판매는 공공 거리가 아닌 개인 집과 주막에서 이루어졌다.”

매서인
▲매서인이 순행하는 모습.
1.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성경반포의 방식

 1911년 10월호에서 밀러 선교사(by Mr. Hugh Miller)는 다음과 같이 매서인과 전도부인들의 사역을 소개한다.

“성경이 인쇄소로부터 서울에 있는 성서공회에 도착하면 바로 반포가 시작된다.

성서공회에서 성경을 반포하는 데는 4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선교사들을 통한 방법
두 번째는, 성서공회 성경보급소에서 판매
세 번째는, 매서인(권서)을 통해서
네 번째는, 부인매서인(성경부인, 전도부인)을 통해서이다.”

Ⅲ. 매서인(권서, Colporteur) 그들은 누구인가?

‘매서인’은 성경 반포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건 헌신을 한 사람들이다. 초기 매서인들은 선교사들의 우리말 성경번역 사역에 조사(助師/助事) 역할을 했고, 성경이 출간된 후에는 녹록치 않은 환경에서도 하루 100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걸으며 성경을 판매하며 전도자의 길을 걸었다. 선교 초기 성경보급의 선구자요, 초대교회 개척의 주역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매서인’,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일했던 선교사들이 기술한 ‘매서인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초대교회사(初代敎會史)일 뿐만 아니라 성경반포의 역사, 복음전도의 역사, 교회 설립의 역사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더 많이 발굴 복원해 그들의 복음 전파에 대한 사랑, 성경 반포에 대한 열정, 그리고 교회 설립에 대한 헌신을 기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성경과 관련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과 보급, 그리고 초대교회 설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매서인들에 대한 인식이 매우 저조함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누구도 ‘매서인’ 연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시기에 ‘권서(매서인)’들의 행적을 따라 10여 년 이상 자료와 씨름하며 전거를 제시하고 매서인에 대한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대한성서공회사 Ⅰ, Ⅱ』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다.

1. ‘매서인’은 어떠한 일을 하는가?

가. ‘매서인의 직분’ 구춘경3) 

1은) 이 책의 글은 하나님이 묵시(默示: 직접적(直接的)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慇懃)히 자기(自己)의 의사(意思)를 나타내 보임)로 보이신 성경이니,
2는) 매서인은 항상 겸손하여야 함
3은) 매서인은 온유한 말과 화평한 뜻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며,
4는) 매서인은 핍박을 당하더라도 내 마음을 항상 낮추고 의례히 내가 받을 본분인 줄 알 것이요,
5는) 매서인은 복음을 전하고 숙식할 때에 식비를 항상 넉넉하게 갚을지니,
6은) 돈이 없어 못 사는 지경에는 부득불 외상으로 주고 기한을 할 것이며, 또한 구차하고 불쌍한 사람이 보고자 하거든 거저 줄지니
7은) 매서인은 성서공회의 작정한 법대로 받고 가감하지 말지니
8은) 매서인은 이 책을 사 봄으로 자기 무거운 짐을 예수께서 벗기시고 영생하는 즐거움을 주시는 줄 알게 하실 것이요
9는) 매서인은 음악을 공부하고 찬미하라
10은) 매서인은 불가불 거래 회계를 소상분명하게 할 것이니

나. ‘책 파는 사람의 직분’ 김영달

성경이라 함은 거룩한 글이라 함이요, 복음이라 함은 복스러운 소식이라 함이요, 전도서라 함은 도리를 해석한 책이라.

매서인은 하나님의 명령서를 전하는 직분인데, 판다 함은 종이 값을 받는 것이오, 장사함은 아니라.

1은) 매서인은 학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고로 무식하고 성경 도리를 연달(練達: 익숙하고 통달(通達)함) 하지 못한 자 어찌 감당하리요.
2는) 믿는 마음이 견고함이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신 말씀을 굳게 믿을 것이오.
3은) 항상 기도하라.
4는) 지혜롭게 전하라. 사람의 성정(性情: 성질(性質)과 심정(心情))을 빨리 살펴 그 정형을 따라 전도하라.
5는) 복음을 전할 때에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여라.
6은) 열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일하여 전국 동포의 죽어가는 영혼을 깨우고, 악한 시대에 인심을 변하여 천국을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옵나이다.

2. ‘매서인’, ‘권서’ 사용 용례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와 초기 기독교 매체에 나타난 우리 ‘매서인’들의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성경 반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새로운 반포 시스템인 ‘콜포처(Colporteur)’라는 단어는 어떻게 우리말로 정착했는지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Colporteur’라는 단어는 초기에 ‘매서, 매서인’이라는 단어에서 ‘권서, 권서인’이라는 단어로 변하는 과정을 밟은 듯하다. 위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초기에 ‘매서인’ 활동을 했던 분들, 그리고 선교사들은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아래 〔표 1〕에서 보듯이 <권서에 관한 연구>에서 이만열 교수가 정리한 매서·권서 용례에 필자가 추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초기에는 ‘매서, 매서인’으로 통용되다가 1915년 <기독신보>가 발행되며 ‘권셔, 권셔인’이라는 말이 ‘매서, 매서인’과 함께 사용되었다.

1917년 감리교 선교부에서 펴낸 영문 연례보고서에 보면 ‘Colporteur’의 우리말 번역을 ‘셔인, 녀전도인’으로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혼용되어 사용되어온 ‘매서, 권서’의 단어는 1930년대 이후에는 ‘권서’로 점차 정착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진행되어 우리나라에 ‘매서인’ 제도를 도입한 ‘대영성서공회’에서도 1938년 발행한 『민휴선생실기 閔休先生實記』에는 Colporteur의 표기를 ‘권서(勸書)’, ‘부인권서(婦人勸書)’로 한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넷포털 ‘네이버’를 통해 제공되는 ‘동아프라임영한사전’에서는 Colporteur의 번역5)을 ‘(종교)서적 행상인’으로, ‘다음’에서 제공하는 ‘Kakaoi’는 ‘서적행상인’으로 번역했다. 반면 AI 번역시스템인 ‘파파고’는 그냥 ‘콜포터’로 번역하여 아직까지도 ‘Colporteur’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성경을 판매하고 성경 읽기를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적당한 단어가 기독교 용어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에 필자는 ‘매서전도인’이 콜포처(Colporteur) 의미를 내포한 가장 적합한 단어가 아닐까 하고 제안한다.

매서 권서의 년대별 용례
2. ‘매서인’, ‘권서’ 사용 용례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와 초기 기독교 매체에 나타난 우리 ‘매서인’들의 활동을 살펴보기 전에 성경 반포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새로운 반포 시스템인 ‘콜포처(Colporteur)’라는 단어는 어떻게 우리말로 정착했는지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Colporteur’라는 단어는 초기에 ‘매서, 매서인’이라는 단어에서 ‘권서, 권서인’이라는 단어로 변하는 과정을 밟은 듯하다. 위의 글에서도 보았듯이 초기에 ‘매서인’ 활동을 했던 분들, 그리고 선교사들은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

아래 〔표 1〕에서 보듯이 <권서에 관한 연구>에서 이만열 교수가 정리한 매서·권서 용례에 필자가 추가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초기에는 ‘매서, 매서인’으로 통용되다가 1915년 <기독신보>가 발행되며 ‘권셔, 권셔인’이라는 말이 ‘매서, 매서인’과 함께 사용되었다.

1917년 감리교 선교부에서 펴낸 영문 연례보고서에 보면 ‘Colporteur’의 우리말 번역을 ‘셔인, 녀전도인’으로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혼용되어 사용되어온 ‘매서, 권서’의 단어는 1930년대 이후에는 ‘권서’로 점차 정착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진행되어 우리나라에 ‘매서인’ 제도를 도입한 ‘대영성서공회’에서도 1938년 발행한 『민휴선생실기 閔休先生實記』에는 Colporteur의 표기를 ‘권서(勸書)’, ‘부인권서(婦人勸書)’로 한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넷포털 ‘네이버’를 통해 제공되는 ‘동아프라임영한사전’에서는 Colporteur의 번역5)을 ‘(종교)서적 행상인’으로, ‘다음’에서 제공하는 ‘Kakaoi’는 ‘서적행상인’으로 번역했다. 반면 AI 번역시스템인 ‘파파고’는 그냥 ‘콜포터’로 번역하여 아직까지도 ‘Colporteur’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성경을 판매하고 성경 읽기를 권유하는 사람’이라는 적당한 단어가 기독교 용어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이에 필자는 ‘매서전도인’이 콜포처(Colporteur) 의미를 내포한 가장 적합한 단어가 아닐까 하고 제안한다. <계속>

[미주]
1) 대영성서공회 북중국지부 총무로 조선을 관장했음
2) 1882년에 북중국지부에 수석매서인으로 파견됨
3) 춘경(春景)은 호이며 이름은 연영(然英)이다. 1864년 서울에서 출생, 구한말에 잠시 관직에 있었으나 기울어져 가는 국세를 통탄하고 관직에서 사임하였으며,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기독교 신자가 된 후, 전덕기와 함께 상동교회 엡웟청년회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에 전념했다. 민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경기 이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하고 중군장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신학을 계속 연구하여, 1900년 감리교 순회전도사로 임명받아 민중계몽운동까지 벌였다. 1904년 이천교회에 시무하면서 구국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벌였다. 이 때 그는 매서인으로도 일했는데, 〈신학월보〉 1904년 3월호에 ‘매서인의 직분’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4) 위 〔표 1〕 자료는 대한성서공회, 『대한성서공회사 Ⅱ』, P.324이며, 신문 잡지에 나타난 용례는 필자가 발췌 정리한 것임
5) 최현배 선생은 그의 글 ‘기독교와 한글’에서 ‘번역(飜譯)’을 ‘뒤치기’라는 순우리말 단어로 사용하였다. 〈神學論壇〉 제7집,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회, 1962, P.60.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