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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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4.27 2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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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곳저곳에서 생성형 인공지능(AI)에 대한 우려 섞인 글들을 접하게 된다. 글들을 읽으며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하더라도 그 발전 속도를 멈출 수 없다. 그것이 기술이 가지는 특성이자 지금까지의 발전의 역사였다.

나는 내가 접하거나 접했던 거의 모든 일들을 AI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확인하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위치를 파악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AI는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내가 오래 전에 관계를 끊은 사람의 경우도 AI는 기억하고 그 사람을 내 곁으로 소환한다.

그런 AI는 그러나 현재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AI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는데 인간은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AI는 거의 모든 인간의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창작 영역과 같은 곳에서도 AI는 이미 인간을 능가하고 있다. AI는 창작이라는 것의 의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최근 한 작곡 공모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AI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왔던 창작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AI의 창작은 음악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이 인간 고유의 창작 영역이라고 여겼던 모든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 마디로 AI가 예술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아직 전체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의 우려는 그런 AI가 사람을 대적하는 경우를 상정한다. 만일 AI가 인간에게 적대적이라면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화될 것이다. 아니 이미 현실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문명의 기기를 사용하는 인간 전체의 일거수일투족을 AI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AI는 이미 치명적인 지배력을 지닌 것이다.

그런 AI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이미 사라졌다. 아무리 인간이 문명의 잔재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곳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해도 AI는 그런 인간들 역시 다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AI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지닌 것이다.

그런 AI를 어떤 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어도, 그것이 불가능하고 AI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어도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공상과학 영화에서 벌어진 일(모든 것을 통제하는 독재자)들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생각을 알고 그것을 통제하는 전능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AI의 발전 속도라면 이 같은 상상이 현실이 될 날이 멀지 않다.

기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변화를 유발한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을 전후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단히 많이 나타났다. 이들 대부분은 새롭게 출현한 사회가 과거의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새로운 사회에서 많은 것들이 운명을 달리하고 있다. 위계적 구조와 중앙 통제, 포디즘(컨베어 벨트)과 같은 것들은 낡은 것들이 되었다. 따로 존재하는 기술이 사라졌다. 완전히 이질적인 기술들까지 연결되어 사회 전체에 편재하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그것을 엘륄은 기술 체계라고 명명했다. 기술 시대가 기술 체계로 발전했고 AI는 그것을 실감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AI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엘륄은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기슬 체계를 파국의 전조로 파악했다. 그는 기술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목적지 없이 무한 질주를 하고 있으며, 그 속도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이 모든 현상의 끝이 어디일까를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지구가 언제까지 이러한 기술을 견뎌낼 수 있을지를 우려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인간의 미래다. 인간이 기술의 발달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기술이 인간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이 인간의 모습을 띠어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점점 더 기계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이러한 현실에 점점 더 비관적이 되었다.

오늘날 기술은 필연의 질서의 극치를 보여준다. 기술은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제거한다. 기술이 발전하는 방향에서 인간의 자유는 사라진다. 그것이 비인간화라는 사실을 인간은 인식하지 못하고 기술이 제시하는 필연의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 오늘날 기술은 그 자체로 새로운 형태의 선을 창조했다.

기술은 선이다. 기술에 참여하라!

기술이 선과 악의 판단의 기준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기술로 평가된다.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마저 기술의 체계에 종속된 것이다. 기술은 이전의 최고의 우상이었던 국가를 제치고 마침내 최고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인간은 그러한 기술 체계가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기술이 정상이 된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기술에 의해 가려진다. 이러한 기술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오히려 비정상이다. 기술 체계 안에 머무는 것이 정상이고, 벗어나는 것이 비정상이다. 기술이 모든 것을 가리는 기준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술은 성공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물질적이고 결과주의적인 것을 의미한다. 성공하기 위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조정된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의 질서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다시 기술 체계라는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진 새로운 필연의 질서 속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 받아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 도달했다.

돈이라는 필연의 질서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좌절했다. 그런데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필연의 질서인 기술 체계가 현실로 다가왔다. 그것을 파국으로 인식한 엘륄의 우려에 우리는 공감하게 된다.

도래한 기술 체계로 인해 더욱 강화된 필연의 질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응을 강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세상의 상황이 변하고, 필연의 질서가 강화되고, 순응주의가 강력해져도 그것에 순응하지 않아야 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능한 안전을 도모할 것은 강요한다. 그러나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이 주는 안전 대책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내 아내는 늘 실손보험을 안 든 것에 대해 후회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필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비 순응일 뿐이다.

바울의 ‘자족의 비밀’은 과거의 대응책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최상의 대비책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하고, 또 우리가 마땅히 살아내야 할 행동 양식과 생활양식에 대해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그 비결은 어렵지 않다. 복잡하지도 않다. 그것은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AI가 발전하고, 기술 체계가 공고해져도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는 여호와의 불성곽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것을 넘어 세상의 희망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자유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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