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이 없는 청년들에게

조회 수 1910 추천 수 2 2023.04.30 05:13:11

구원의 확신이 없는 청년들에게 

(한국의 한 기독 청년의 간증문)

 

 

제가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과정”을 적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저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오직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선하심만이 드러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전 어렸을 때부터 궁금한 게 참 많았습니다. 특히나 근본적으로 인생의 의미에 관한 호기심이 참 많았습니다. 나무에 지저귀는 새도, 옆집 강아지 바둑이도, 길가에 심어진 나무도,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왜 모든 생명은 시작과 끝이 있어야만 하는 걸까? 부모님께서 사랑하셔서 내가 태어난 건 알겠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지? 같은 궁금증을 좀처럼 없애기 어려웠습니다. 또 제가 제 부모님에게서 왔다면 그 위로도 제 조상님들이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인류의 시작은 누구였으며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대체 어떻게 시작이 된 걸까?”에 대한 질문도 항상 갖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론 어렴풋이 절대자 또는 인간보다 상위에 있는 초월자가 존재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제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확신은 없었습니다. 

 

저는 성장기 시절을 국외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미션스쿨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성경 과목이 있었는데, 그때 당시의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나 성경 이야기 자체만으로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기쁜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약 10년간 배우며 고등학교 3학년 때 당시 선교사 자녀로 있던 학교 후배가 제게 성경 공부 모임으로 초대했습니다. 대학교 입시 원서도 다 넣었겠다, 원래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흔쾌히 응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당시 저는 성경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좋아했지만, 교회라는 단체에 대한 혐오가 있었고 특히나 기독교인들에 대한 혐오도 있었습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이미지가 성경에서 말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남들에게 소개한다면 그는 완벽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제 나름의 기준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하튼 금요일 배구 동아리가 끝나고 그 후배 집으로 가서, 선교사님을 만나고 몇몇 학생들과 모여 선교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날의 강해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교였고, 선교사님께선 교회의 존재 목적과 성도의 의무에 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날 전 10년 동안 학교에서 성경을 배워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의 따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들으며 무언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마음이랄까요. 집에 가면서도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마음이었습니다. 이후 정기적으로 성경 공부 모임을 하며 주일 예배로 전환된 이후에도 계속 그 가정에서 예배를 이어 나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전 이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 착한 일 열심히 하면, 날 좋게 봐주셔서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외조부의 영향으로 전 어렸을 때부터 탈선하지 않고 착실하게 사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성장기에 엇나가는 주위 목사나 선교사님들의 자녀를 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가 저들보다 더 의롭지 않을까?”라며 스스로 제가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제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위 제 주위에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생과 제 인생을 비교해 봤을 때,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술, 담배나 성적으로 문제없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제가 그들보다 훨씬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당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들보다 훨씬 예뻐하시고 아끼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음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 

 

이 말씀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행동만 적당히 그럴듯하게, 하나님 보시기에 “애는 인성이 괜찮구나” 싶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근데 웬걸,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었다고 마음에 이미 간음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잘 압니다. 길가다가 옷을 야하게 입은 여성을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제 본성을 저는 압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자라고? 그럼 나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 텐데? 난 평생을 간음한 자로 사는 건가? 아무리 반성해도 내 본성은 변하지 않고 다음에도 똑같이 여성을 보면 음욕을 품을 텐데? 율법 아흔아홉 개를 지켜도 하나만 실패하면 죄인인데 그럼 난 평생 죄인인가?”

 

마치 저에 대해 죄인이라고 선고하는 것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저 자신의 정욕을 알기에 이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좌절, 그리고 난 앞으로도 똑같이 음욕을 품어 간음한 자가 될 것이라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다면 오늘 내가 죽으면 난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만약 내가 오늘 죽게 된다면, 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제 본성 때문에 전 평생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자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나마 자신의 언행이 일치되어 보이는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네가 오늘 죽으면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해?”라고 물으니 왜 그런 걸 묻느냐는 것처럼 “난 천국 가지”라고 답했습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죽어본 것도 아닌데?”라고 묻자 “증명할 순 없는데 하나님 말씀을 믿으니 난 천국 가”라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습니다. 저는 본성적으로 보거나 들을 수 없거나 증명할 수 없으면 안 믿는 편입니다. 근데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자기가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믿으니까 천국 간다니, 너무나도 안일하고 멍청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평생의 인생이 걸린 일인데 그냥 믿으니까 자기는 천국에 간다고?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좌절과 구원에 관한 의문만 품은 채 대학교를 진학하여, 한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9월 즈음에 전교인 수련회를 떠났는데, 누가복음 15장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죄인의 회개에 대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는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의 비유, 두 번째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의 비유, 세 번째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의 비유였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누가복음 15장을 펴서 다시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가 양을 찾았을 때, 드라크마 하나를 잃은 여인이 이를 찾았을 때, 예수님께선 하늘에선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으로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목자가 양을 찾고 드라크마를 여인이 찾았는데 죄인이 회개한다는 말씀이 나온다니.. 하지만 이 모든 말씀은 인간의 회개하는 마음과 구원에는 전부 하나님 중심의 역사가 있다는 뜻으로 귀결됩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죽기 전에 먼저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패륜이었습니다. 버젓이 잘 살아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으라고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둘째 아들은 이를 요구하고 아버지는 그의 분깃을 줍니다. 먼 나라에 가서 이를 다 허비하고, 흉년이 들자 돼지를 치게 되었는데 그가 얼마나 궁핍하였는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못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엔 일꾼들조차도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차라리 아버지께 가서 빌고 나를 종으로 받아달라고 할까?” 궁핍해지고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합니다. 

 

참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꾸짖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멀리서 그의 아들을 오는 것을 보고 이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이 너무 큰 죄를 지어 다시는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지 못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기뻐하며 종들에게 자신의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으니 잔치를 벌이자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회개라고 생각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는 이미지를 상상합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구원을 받으려면 정욕의 문제에 대해 회개해야겠다, 내가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 내게 구원을 베푸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 비유에 나온 양은 목자를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갔습니다. 드라크마가 여인에게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아냈습니다. 회개하는 데에 있어서 양과 드라크마는 스스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돌아온 패륜아를 안 받아주면 그만이었습니다. “내 장자와 행복하게 살 테니 너는 꺼지라”고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멀리서 오는 아들을 보고 직접 그를 향해 달려가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스스로 나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수련회에서 저에게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제 정욕의 죄를 스스로 이겨낼 수 없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결국은 똑같이 또 음욕을 품음을 예수님께선 제게 알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음욕을 안 품으려고 노력하고 착한 일을 하려 노력해도 할 수 없음을 제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제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깨달아졌습니다. 난 정말 내 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구나. 평생을 아무리 노력해도 난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구나. 난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날 구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구나. 목자가 양을 찾아갔듯이 나도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구원하시기를 바랄 수밖에 없구나. 전 제 구원에 숟가락도 못 얹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정말 제 모든 걸 내려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습니다. 예수님 전 당신이 필요합니다. 내가 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압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난 여전히 똑같이 매일매일 죄에 빠지는, 본성부터 악한 사람임을 내가 압니다. 그러니 예수님 날 구원하옵소서. 당시 처절한 마음을 예수님께 정말 진심으로 고백했습니다. 

 

이후 말씀을 통해 더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26절은 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로마서 7장 7절에선 또 율법이 없으면 죄를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예수님께선 완전하게 지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말입니다. 제가 지킬 수 없는 정욕에 관한 문제도 예수님은 완전하게 지키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이 이를 말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2~3절이 이를 대변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착하게 살면,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제 생각은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으로 완전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을 때도 분명히 읽었던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을 완전히 깨달은 건 제가 제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나서였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 어떤 사람도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나 말씀을 잘 지켜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단호히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가 믿음으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며 가르치신 사실은,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나에게 찾아오셔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내 죄를 내가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신 이도 예수님이시고, 죽음이라는 죗값을 대신 받으신 이도 예수님이심을, 하나님께선 제게 알게 하셨습니다. 

 

첫 학기를 그렇게 보내며 학기가 끝날 때쯤 저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봤습니다. “오늘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고 말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천국 갈 자신이 없어서 걱정했겠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하나도 걱정이 안 되었습니다. 말씀에 의하면 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난 믿으니까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웃기지 않습니까? 제 친구들이 저에게 믿으니까 천국 간다고 했을 땐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는데, 정작 제가 그런 말을 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머리에 스치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구원하셨구나.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삶에 관한 의문, 죄에 대한 문제, 죽음 이후에 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서 모두 해결해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가끔 제게 물어봅니다. “넌 진짜로 예수라는 사람이 실존했고 너를 위해서 대신 죽어줬다고 믿어?”라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서는 사실 믿는다는 말보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 걸”이라는 대답을 자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은 진짜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전 압니다. 말씀을 통한 삶을 살며 제 인격이 바뀌고 제 인생이 변화하는 걸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처럼 의욕이 앞서는 고백일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그렇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은 진짜이십니다. 

 

아쉽게도(?) 저의 이야기엔 초자연적인 환상이나, 체험, 꿈 같은 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구원해주실 때에 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믿고 싶어도 안 믿기던 말씀을 믿게 하셨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표현을 해보자면, 정확히는 “알게”하셨습니다. 

 

혹시나 구원에 관한 고민을 하시는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이런 인생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꼭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씀을 가까이하시길 바랍니다. 조금 건조한 이야기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난다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어려우신 분들에게 꼭 예수 십자가 생명의 말씀이 들리고 믿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4/3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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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국 방문 중에 이 홈피의 회원인 한 기독 청년을 만나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과정과 자신이 깨달은 믿음에 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방식은 개인별로 다 다릅니다. 청년의 회심 과정은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에 의한 구원”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였고 그 간증을 듣는 내내 저의 가슴도 함께 뜨거워졌습니다. 간증문을 써달라고 부탁해서 지금도 이 청년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갈등을 하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그는 과거에 지었던 윤리적 죄들을 회개하여 고친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고, 그 일은 평생을 두고도 아예 불가능하다고 절감했음, 선언합니다. 대신에 자기는 오직 하나님의 조건 없는 용서만 필요한 철저한 죄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그런 완전한 절망 가운데 있던 그를 하나님이 수련회라는 기회를 통해 먼저 찾아와서 말씀으로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심으로 구원해주셨다고 간증합니다. 이 글을 읽는 영적 방황 가운데 있는 청년들이 구원의 방식은 각기 달라도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그처럼 정확히 깨달아서 함께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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