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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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요한 계시록 주석



성 경: [계1:1]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 '계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류시스'(*)는 '본래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 보인다'는 말로 성경에서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엡1:17)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나타냄'(살후1:7; 벧전1:7)을 의미한다(Johnson, Lohmeyer). 본문에서 '아포칼류시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언급된 것은 본서가 여러 개의 예언과 환상으로 말하고 있으나 '말씀'이라는 하나의 일치점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투)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라고 주장한다(Hughes). (2)혹자는 주격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계시라고 주장한다(Kraft, Charle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Tenney, Morris).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 '그에게'는 앞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를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계시의 근원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Lenski, Johnson). 즉 성부 하나님은 모든 섭리의 계획자이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의 성취자이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속설(從屬說)을 뜻하지 않는다(요3:34,35; 5:20-24; 7:16; 8:28,29; 12:49; 14:10,24; 16:15; 17:8, Alford, Morris).

⭕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반드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이'(*)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낸다(Loh-meyer). 한편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한다(4:1; 22:6; 단2:28,29,45, Johnson). 여기서 '속히'(*,엔 타케이)는 본서에 7회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으며(2:16; 3:11; 11:14; 22:7,12,20)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시간적 성취의 관점으로 해석한다(Vincent, Hengstenbe-rg). (2)혹자는 종말론적 임박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계시의 성취의 진행과 확실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Alford, Johnson, Morris, Mounce). '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즉 '엔 타케이'는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낸다.

⭕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 본문은 계시의 전달 경로를 나타낸다. (1)하나님. (2)예수 그리스도. (3)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하였다. 여기서 세 번이나 언급되는 '그'(*, 아우투)는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 동사인 '에세마넨'(*, '지시하신 것이라')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모든 계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 계시를 전달받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 천사, 그리고 종 요한에게 전달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한편, '그 천사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 앙겔루 아우투'(*)는 '그 천사를 통해'라는 의미로 천사의 매개적 역할을 나타내며(22:6,16), '그 종 요한에게'의 헬라어 '토 둘로 아우투 요안네'(*)는 수단이나 기구를 나타내는 여격이 사용되어 요한이 계시 전달의 인간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낸다. 결국 본서의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기원하여 참됨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천사와 인간적 도구로 말미암아 수신자들에게 전달된다(Sweet, Moffatt, Ironside).

성 경: [계1:2]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동일한 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거되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즉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증거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본문에서 요한 자신이 본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동일시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신약 시대 사도들과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Johnson, Plummer).

성 경: [계1:3]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머리말]

본서에는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진술이 나타난다. (1)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2)주 안에서 죽는 자(14:13). (3)깨어 옷을 지키는 자(16:15 ). (4)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19:9). (5)첫 부활에 참여한 자(20:6). (6)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22:7). (7)두루마리를 빠는 자(22:14). 본절에 나타난 사람은 일곱 부류의 복 있는 사람중 첫번째에 해당된다.

⭕ 이 예언의 말씀을...복이 있나니. - '이 예언의 말씀'은 본서가 예언서임을 나타내는 것으로(10:11; 22:6,7,10,18,19) 본서의 말씀이 예언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영적, 윤리적 권면과 권고를 포함한 현재적 경고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과 관련하여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기술한다.

⭕ 읽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은 관사 있는 단수 분사로 초대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성경을 읽던 자를 나타낸다.

⭕ 듣는 자들(*, 호이아쿠온테스)과 지키는 자들(*, 테룬테스). 이 두 부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모두 복수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행하는 회중들을 나타낸다(눅4:16; 행13:15,21; 골4:16, Johnson, Zahn, Robertson). 요한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통해서는(느8:2,3; 눅4:16; 행13:15; 살전5:27)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 때가 가까움이라. - 본문은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이다.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보편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결정적인 섭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승천한 이후부터 다시 오실 재림의 때까지는 인간 편에서 볼 때 항상 임박한 긴장(緊張)의 시간이며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정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마24:3-51; 요21:22, Jo- hnson, Mounce).

성 경: [계1:4]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 본문에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요한'이라고 언급한 것은 서신을 받는 일곱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이 아시아 교회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Mounce). 한편 '아시아에'는 본래 로마의 영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아타톨리아 고원에 이르는 소아시아의 서편 지역을 가리킨다(Morris, Kiddle). 당시 아시아 주에는 '드로아'(행20:5), '골로새'(골1:2), '히에라볼리'(골4:13) 등 많은 교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일곱 교회에만 편지하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교회가 역사상의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Seiss, Kuyper). (2)혹자는 '일곱'이란 숫자가 완전 수이므로 계시록에 언급되는 다른 일곱이라는 문학적 양식을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Morris, Johnson, Moffatt, Greijdanus). (3)혹자는 일곱 교회가 처한 황제 숭배화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Mounce)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를 제외한 나머지 견해는 타당하다(레4:6,17; 8:11,33; 민19:12; 롬12:6-8; 약3:17, Ford, Vincent, Canon).

⭕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아포 호 온 카이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전치사 '아포'(*)는 보통 소유격 명사와 함께 쓰임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주격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이런한 표현 방법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영원불변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손상시키지 않고 경외하려는 동시에서 비롯되었다. 즉 이러한 표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잘 묘사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Greijdanus, Morris, Johnson, Ladd).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분이다(8절; 4:8).

⭕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 '일곱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천사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Mounce). (2)혹자는 성령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본절과 다음절에 나타나는 삼위일체론적 인사말에 어긋나며 본서에 나타나는 '영'은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나 마귀의 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것은 성령의 속성과 권능이 완전(完全)하고 성결함을 시사한다(3:1; 4:5,6; 5:5; 슥3:9, Johnson, Morris, Robertson, Barclay, Lenski, Ladd).

성 경: [계1:5]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 또 충성된 증인으로. - 본문은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첫번째 수식구로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충성된 증인으로(시89:37; 사55:4) 새 언약을 성취시킨 것이었음을 나타낸다(Morris, Johnson).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시킨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다(Ladd).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해와 고난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2:13; 11:3; 17:6, Mounce, Johnson).

⭕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먼저 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프로토토코스'(*)는 바울의 경우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한 반면(골1:15),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죽은 자들에 대하여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하고 있다(시89:27, Ladd, Mounce, Johnson).

⭕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는 문자적으로 '땅의 왕들의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모든 권세자들을 지배하시는 주권적 통치자이심을 시사한다(6:15; 17:14; 19:16; 시89:27; 빌2:9,10, Johnson, Mounce, mor- ris, Ironside).

⭕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선물을 의미하며(롬1:7; 고전1:3),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인들의 인사말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풍요로운 영적 상태와 화목을 가리킨다. 이 인사는 평범한 인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이 종적, 횡적으로 임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롬1:7; 고전1:3; 엡1:2; 벧후1:2, mounce, Craft, Martin, and Kiddle).

⭕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사랑하사'의 헬라어 '아가폰티'(*)는 현재 분사로 계속되는 사랑을 나타낸다. 이 '사랑'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Mounce). 한편 '해방하시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산티'(*)는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죄에서 해방하신 공효(功效)를 시사한다(5:9; 마20:28; 요8:34-36; 갈3:13; 딤전2:6; 히9:12; 벧전1:18,19, Moffatt, Mounce, Lenski).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바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된다(12:11).

성 경: [계1:6]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며(22:3; 엡1:6)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동적 사역으로 수행되나 근원적으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요6장). 한편 '나라와 제사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레이안, 히에레이스'(*, )는 문자적으로 '나라, 곧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제사장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이는 출19:6과, 벧전2:9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왕됨과 제사장됨을 시사한다(Beckwith, Morris, Lenski).

⭕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 '영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돝사'(*)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으로(출33:9; 겔1:28)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삼위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본문의 경우에는 관사와 함께 사용되어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찬양과 공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Mounce). 그리고 '능력'의 헬라어 '토 크라토스'(*)는 인간이 갖는 권리나 내적 능력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능력을 나타낸다(벧전4:11). 한편 '세세토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은 문자적으로 '세대들의 세대들에'라는 의미로 '영원성'을 나타낸다(18절;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10; 22:5, Lenski).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 수신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성 경: [계1:7]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본문은 단7: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확증하신 바며(마24:30; 26:64) 사도 바울에 의해 입증된 재림의 모습이다(살전4:17). 여기서 재림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구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위엄을 나타내는 초자연적 현상인 듯하다(Morris, Lenski, Johnson).

⭕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본문은 슥12:10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공개성을 나타낸다. 현재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실로 인식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그리스도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눈으로 확연히 보게 될 것이다(Ladd). 한편 '그를 찌른 자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Moffatt, Plummer, Johnson, Ladd). 그리스도는 이런한 자들에게도 자신의 재림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박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재림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적 주권을 소유한 분으로서 온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실 심판주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본문은 심판의 보편성을 나타낸다.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회개치 못한 다들의 비참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문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이 당할 두려움을 극명하게 시사한다(Morris, Mounce, Ironside).

⭕ 그러하리라 아멘. - '그러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이'(*)는 동의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아멘'(*)과 같다. 요한은 동의어인 '그러하리라'와 '아멘'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종말적인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한다(Greijdanus, Morris, Mounce).

성 경: [계1:8]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문안과 송영]

⭕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 '알파'는 헬라어 문자의 첫 글자며,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 되셔서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와 세대의 주가 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심판주로서 모든 주권을 소유하고 계신다(21:6; 22:13, Beasley-Murray,Charles, Robertson). 이러한 하나님이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다.

⭕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 본문은 4절의 반복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의 성품을(출3:14)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체 안에 존재의 기반을 가지고 계셔서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원 불변하신 심판자이심을 나타낸다(Johnson). 그 하나님은 장차 오셔서 자신이 섭리하신 심판을 이루실 것이다(Ladd).

⭕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전능한 자'의 헬라어 '판토크라토르'(*)는 본서에 9회나 언급되는 중심 단어로 문자적으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낸다. 이것은 곧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자가 분명히 가져야 될 속성이다(Johnson).

성 경: [계1:9]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나 요한은. - 요한은 다시금 자신을 밝혀 하나님과 자신과 수신자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자신을 '사도 요한'이라 밝히지 않는 것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친분이 있음을 암시한다(22:8, Johnson).

⭕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한편 '예수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예수'(*)는 문자적으로 '예수 안에서'란 의미로 '주 안에서'란 바울의 사상과 상통하며, 문법적으로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의 세 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환난'과 '나라' 그리고 '참음'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여기서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키며(요16:33; 행14:22; 딤후3:12)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말하며,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휘포'(*, '아래에')와 '메노'(*,'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섬 행(行)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Spitta). (2)혹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고 주장한다(Weiss, Bleek, Lucke). (3)혹자는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고 주장한다(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섬에 귀양갔다가 후에 귀환(歸還)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Irenaeus, Clement, Eusebius).

성 경: [계1:10]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 '주의 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퀴리아케 헤메라'(*)는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안식후 첫날'(막 16:2; 눅24:1; 요20:19; 행20:7) 혹은 '매주일 첫날'(고전16:2)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유대교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이 사도 시대부터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로 대치된 것을 가리킨다(요20:19; 행20:7; 고전16:2, Morris, Lenski, Ladd). 한편 '성령에 감동하여'의 헬라어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는 문자적으로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는 뜻으로 이는 단순히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황홀한 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암시한다(4:2; 17:3; 21:10; 행10:10; 11:5, Lohmeyer, Ladd, Johnson,Mounce).

⭕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나팔소리'는 구약 시대에 백성을 불러 소집하거나 군사적으로 경고할 때(겔33:6), 전쟁 때(겔7:14), 그리고 특별한 의미로 절기 때(레23:24) 사용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한 징표로 나타난다(마24:31; 살전4:16). 본서에서 70회나 사용되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본문의 '나팔소리'는 심령들을 일깨우는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된다(Morris, Mounce, Ladd).

성 경: [계1:11]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 '써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랖손'(*)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이는 특별히 히브리 예언 방식으로, 본서에서 12회나 반복되어 사용됨으로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권위로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 본문에 제시된 교회의 명칭은 1:4에서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교회에 보내진 특별한 메시지는 2,3장에서 동일한 순서로 나타난다('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2,3장의 주석 참조). 특별히 기록된 말씀을 일곱 교회에만 보내라고 한 것은 그 도시들이 소아시아 중서부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며(Zean) 동시에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가 보편적으로 모든 교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Mounce, Lenski).

성 경: [계1:12]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 요한이 처음으로 본 것은 슥4:2의 환상과 비슷한 일곱 금 촛대로 여기서 '촛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크니아스'(*)는 세워 놓거나 달아매는 '등잔불'을 가리킨다(출 25:31; 왕상7:49; 슥4:2). '일곱 금 촛대'는 스가랴서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반면에(슥4:2) 본문에서는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나아가 전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을 나타낸다(20절, Mounce, Johnson, Kiddle).

성 경: [계1:13]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 '인자 같은 이'란 단7:13,14을 반영한 것으로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고양시켜 표현한 것이다(행7:56).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은 물론 영광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Beas ley-Murray). 그리스도가 성전의 촛대 사이로 움직이시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적 임재와 교회의 머리되심을 시사한다(Moffatt, Mounce).

⭕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 '발에 끌리는 옷'은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착용한 예복으로(출28:4; 레16:4; 사6: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그의 권위와 위엄을 시사한다(Johnson, Mounce).

⭕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이 또한 대제사장 혹은 왕의 예복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출28:8; 29:5)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구약성경에 묘사된 대제사장과 왕의 모습을 빌어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내고 있다(Bruce, Johnson, Mounce, Morris, Ironside).

성 경: [계1:14]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본문은 단7:9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성경에서 흰 색깔은 항상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상징하기에 본문은 그리스도의 성결과 영원성 혹은 그의 영원한 신성을 상징한다(사1:18, Mounce, Kiddle).

⭕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이는 단10:6을 반영한 것으로 그분의 전지성으로 모든 악을 꿰뚫어 아시는 날카로운 공의의 눈을 상징하며(Vincent) 아울러 승리로 재림하실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한다.

성 경: [계1:15]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빛난 주석'의 헬라어 '칼콜리바노'(*)의 어원(語源)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혹은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로 이해된다(계2:18). 그리스도께서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초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힌 발'과는 달리 재림 때에는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할 것을 상징한다(단10:6, Lenski, Mounce).

⭕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 본문은 10절의 '나팔소리 같은'에 뒤이어 나타나는 음성에 대한 묘사로 겔43:2에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이 모든 죄인들에게 두려움을 줄 무서운 음성임을 시사한다(시29:3,4).

성 경: [계1:16]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오른 손'은 권세있는 능력 혹은 보호와 안전을 상징한다(출15:6; 사41:10; 행2:33). 그리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를 뜻하며(20절) 더 나아가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문은 일곱 교회 즉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보호하심 가운데 있음을 시사한다(Lenski, Johnson, Mounce).

⭕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는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사용된 비유이다(사11:4; 49:2; 눅2:35; 엡6:17; 히4:12). 혹자는 '날선 검'을 '율법과 복음'의 양면으로 해석하기도 하나(Tertullian, Victor) 본문은 단순히 날선 검의 심판적 기능을 묘사한 것으로 만국을 심판하시는 메시야의 심판권을 시사한다(19:15; 살후1:8, Charles, Mounce, Walvoord).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얼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프시스'(*)는 '외관'으로 이해되므로(Lenski, Mounce) 본문은 환상 전체에 대한 결론적 묘사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변화산에서 순간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마17:2; 막9:3, Plummer)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과 우월함을 시사한다(Johnson).

성 경: [계1:17]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 본문은 인간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보고 두려움과 떨림에 압도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는 계시를 받을 때 흔히 일어나는 모습으로(수5:14; 겔1:28; 단8:17; 10:15; 마176; 행26:14) 인간의 연약성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두려운을 시사하며 일반적인 공포와 전율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Greijdanus, Lenski, Moffatt).

⭕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흔히 제자들을 안심시킨 것과 같이(마14:27; 17:7; 막6:50) 인자한 모습과 음성으로 요한을 위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는 구문상 강조 용법으로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8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나타난 '알파와 오메가'와 동일한 것으로 8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자신의 칭호를 통해 위로하심으로 요한에게 절대적인 확신을 주고 있다(Mounce, Zahn, Ironside).

성 경: [계1:18]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 '곧 산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호 존'(*)은 앞절의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는 언급으로 늘 살아있는 '영원성'을 나타낸다(출3:14; 시42:2). 한편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명을 제한시킨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수여할 수 있는 구속사적 순종의 사건이다(요5:26, Lohmeyer).

⭕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두'(*)는 히브리어 '스올'(*)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육신의 죽음 상태와 무덤 혹은 죽은 영혼들이 가는 곳을 가리켰으며(왕상2:2,9; 욥3:13; 30:23; 시89:48; 사14:9; 겔32:28, Johnson, Greijdanus) 신약성경에서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행2:27,31), 혹은 죽어서 악인들이 거하는 곳을 의미하였다(20:13,14; 눅16:23).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죽음,부활을 통해 사망의 영역을 정복하시고(고전15:54,55, Vincent) 영원히 살아계셔서 죽음의 영역을 주관하는 열쇠 곧 권능과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성 경: [계1:19]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 본문은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 그리고 '장차 될 일'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서의 내용을 3구분하여 '네 본 것'은 1장의 '인자에 대한 환상'을, '이제 있는 일'은 2,3장에 있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현재 상태를, '장차 될 일'은 4-22장까지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Sweete, Lenski). (2)혹자는 본절의 주동사가 '기록하라'임에 주목하여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현재와 미래에 될 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Mounce, Moffatt, Johnso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요한이 보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본서의 전체이다.

성 경: [계1:20]

주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은 원래 '가둔다' 혹은 '닫는다'는 의미의 '뮈오'(*)에서 파생된 말로(10:7; 17:5,7) 단순히 '신비롭다'는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인 환상에 대한 내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셔야만 알 수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단2:7; 골1:26; 살후2:7, Charles, Robertson).

⭕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 '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앙겔로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교회에서 가장 우세하고 지배적인 정신(the prevailing spirit of the church)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2)혹자는 '교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leek, Sweete). (3)혹자는 일곱 교회의 감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Zahn, Weiss) (4)혹자는 이 사자가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점을 들어 교회에서 책임을 맡은 천사들이라 주장한다(Johnson, Moffatt, Charles, Rist).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단10:13,20.21). 한편 촛대로 상징된 일곱 교회는 일차적으로 소아시아의 선택된 교회를 말하나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세계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엡3:10).

성 경: [계2: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에베소'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상업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이며 유프라테스에서 라오디게아를 경유하여 에베소까지 이르면서 동방의 산물이 종착하는 곳이었다. (2)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Artemis) 여신상이 있어서 미신이 성행하였으며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다. (3)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스트라테고이'(Strategoi)라는 독자적 행정관이 있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 기관으로서 '불레'(Boule)라는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었다. 따라서 명목상 '버가모'가 소아시아의 수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에베소가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Mounce, Kraft, Kiddle). 이러한 에베소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또한 바울이 이 에베소 지역에 2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였고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목회 활동을 함으로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이어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행19장; 딤전1:3, Ironside). 한편 '사자'는 그리스도에 의해 책임을 갖고 교회를 수호하는 하늘의 천사들을 가리킨다(Johnson, 1:20주석 참조).

⭕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에베소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에서 '붙잡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톤'(*)은 단순히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동할 수 없도록 확실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통치하시며 지배하고 계심을 시사한다(1:13,16,20). 한편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역시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을 사랑하고, 능력 가운데 교회에 임재하고 계심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Clarke).

성 경: [계2: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행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는 포괄적인 의미로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말하며(요3:19,20; 5:36; 요일3:8), '수고'의 헬라어 '코폰'(*)은 단순한 노력의 차원이 아니라 고통스런 노동을 동반할 최선의 삶을 가리키고(롬16:12; 고전15:10), '인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넨'(*)은 '아래'를 의미하는 '휘포'(*)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는 확보 부동함을 나타낸다(약1:3, Lenski, Morris). 이런한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항목에 대해 혹자는 살전 1장과 연결시켜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해석하여 각각 독립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하며(Rist), 혹자는 '수고'와 '인내'를 '행위'의 내용으로 해석한다(Mounce, Johnson, Charles, Moffatt, Plummer). 두 가지 견해 중 헬라어 구문상 후자가 더 타당하다. 한편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는 단순히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알다')와는 달리 직관적으로 아는 생득적(生得的) 지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행하는 수고와 인내를 모두 알고 계심을 나타내므로 그리스도의 전능성을 시사한다(9,13절; 3:1,8,15, Sweete).

⭕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고상한 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여기서 '악한 자들'(*, 카쿠스)은 관사 없는 복수 명사로 문자적으로 '악한 것들'을 뜻한다. 이 말이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에베소에 있던 거짓 사도 혹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Mounce, Johnson, Ladd, Greijdanus). 이들은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자들로 본다(고후11:13-23, Spitta). (2)혹자는 바울의 제자들로 간주한다(Holtzmann). (3)혹자는 '니골라당'으로 본다(Bousset, Charles), 이 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6절에 에베소 교회가 미워하던 거짓된 자들인 니골라당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행20:28-30; 고후11:13; 갈1:8,9).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예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확신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였다(고후 11:13,15; 12:11). 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는 이런한 거짓된 자들의 거짓을 구별할 필요성이 있었고,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열매'를 통해(마7:20) 거짓을 분별하고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그들의 거짓을 드러냈다(고전14:29; 살전5:21; 요일4:1; Johnson, Mounce).

성 경: [계2:3]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 본절은 앞절에 나타난 사실을 반복하여 더욱 강조함과 동시에 에베소 교회의 신앙의 정절을 나타낸다. 당시 교회는 황제 숭배 강요 때문에 심한 박해 가운데 있었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들이 많았으나 에베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복음에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켰다.

성 경: [계2:4]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낸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혹자는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행20:35; 엡1:15, Vincent, Plummer, Charles, Moffatt, Rist, Kiddle). (2)혹자는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Barclay, Mounce, Ladd).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ff., Beasley-Murray, Johnson).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카스'(*)는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Alford, Johnson).

성 경: [계2:5]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명령어를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러한 세 가지 명령은 에베소 교인들을 보호하시려는 그리스도의 단호한 명령이며 권고이다.

⭕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 이것은 죄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되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생각하라는 명령이다. 여기서 '생각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계속하여 생각하고 회상하라'는 의미이다.(눅15:17-22). 에베소 교인들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그것을 어디에서 무엇으로 인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를 상고해야만 한다.

⭕ 회개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마3:2; 눅15:20).

⭕ 처음 행위를 가지라. - 에베소 교인들은 특별히 회개하여 돌아가되 무분별한 사랑이 아닌 그들이 가졌던 처음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Kiddle, Moffatt). 여기서 '가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에손'(*)은 '행하다'는 의미를 가진 '포이에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지금 즉시 행하라'는 말이다(마 3:8, Robertson, Johnson, Mounce). 에베소 교인들은 지금 즉시 처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졌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을 외면했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진술이다. '내가 네게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 소이'(*)는 미래적인 현재 능동태로 예언적인 사실의 확실성을 나타낸다(22:20; 요14:13; 요일2: 18). 그러기에 혹자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Clarke), 오히려 회개치 않을 경우 맞게 될 현재적 심판을 선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Charles, Alford, Plummer). 한편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에베소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Ramsay). (2)혹자는 당장 있게 될 지금의 심판을 말하는 것으로 에베소에서 교회가 없어지고 그 도시 전체가 황폐화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요 15:6; 엡1:22, Mounce, Greijdanus, Charle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현재에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성 경: [계2:6]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 '니골라당'에 관해서는 본서 이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것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1)역사적으로 이는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한다(Irenaeus, Tertullian, Alford). (2)언어적으로 '니골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콜라이톤'(*)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와 '없애다' 혹은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니카오'(*)의 합성어로 구약성경에 기록된(민22:12) '발람'(*, '백성을 이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발람의 행위와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로 추측한다(Bousset,Cha- rles, Trench, Ewald).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와 같이 니골라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른 자들로 이해된다(14,15절).

성 경: [계2:7]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에베소 교회]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본문은 예수께서 지상 사역 중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이며(마11:15; 13:9,43; 막4:9,23; 눅8:8; 14:35), 본서에서 일곱 교회를 향한 서신의 결론적 어구로 반복된다(11,17,29절; 3:6,13,22), '귀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에콘 우스'(*)는 개교회 전체에 속한 청중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11,17,29절; 3:6,13,22) 여기서 '귀'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통역하시는(Swete) 그리스도의 영이요(Beckwith) 예언의 영인(Kiddle) 성령의 권면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나타낸다. 한편 '교회들에게'(*, 타이스 여클레시아이스)는 복수로 각 교회들에게 보내진 서신 맨 끝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문구이다. 이는 이 편지들이 특정한 한 지역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보편적인 교회를 향해 보내진 것임을 시사한다(Le- nski, Hughes).

⭕ 이기는 그에게는. - 본문은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행하여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이기는 그에게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니콘티'(*)는 관사가 있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해서 이기는 자를 가리키며 본서와 복음서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문구이다(17,26절; 3:5,12,21; 5:5; 12:11; 15:2; 17:14; 요16:33; 요일2:13). 또한 이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와 사단의 타협없는 대결상을 잘 묘사한다. 즉 사단과 대결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를 나타낸다(Mounce).

⭕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 '낙원'의 헬라어 '토 파라데이소'(*)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로 일차적으로는 인류 최초의 거주지였던 에덴 동산을 암시하며(창2:8-10)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하나님 나라 자체를 의미한다(22:1-4,14; 눅23:43, Morris, Robertson, Johnson). 한편 '생명나무의 과실'은 죽음과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22:2) 영생(永生)을 상징한다(Johnson, Mounce, Ladd, Beasley-Murray). 그리스도의 권면대로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에베소 교인들은 첫창조 때에 에덴 동산이라 했으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할 예루살렘 즉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며,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생명나무 즉 영생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성 경: [계2:8]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서머나 교회]

⭕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80km 지점에 있었고, 당시 인구가 약 20-30만 정도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란 말 가운데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으로 이곳은 향료 수출지로도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호머(Homer)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다. 종교적으로는 이교 문화와 종교의 집합처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머나는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로 인해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황제 숭배가 성행하는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른 도시였다(Johnson, Kraft). 한편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본 서신 외에 잘 알려진 것이 없으며 다만 '폴리갑의 생애'에서 바울이 이곳에 전도하였다고 전한다(Eusebius). 그리고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B.C.155-166)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 '처음이요 나중이요'는 1: 17,18의 반복된 표현이다. 이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역사 전체를 지배하시며 태초에도 계셨으며 역사의 종말에도 계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낸다. 한편 '죽었다가 살아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에게네토 네크로스 카이 에제센'(*)은 두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된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이며 단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계시하신 것은 투옥과 사형의 핍박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Johnson, Lenski).

성 경: [계2:9]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서머나 교회]

⭕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들마신'(*)는 '무거운 물건 밑에서 눌려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외부적 핍박을 시사한다. 또한 '궁핍'의 헬라어 '프토케이안'(*)은 '외적 핍박으로 생긴 물질적인 빈곤'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당한 경제적 제재나 적대 감정을 가진 유대인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리킨다(Johnson, Ladd).

⭕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 서머나 도시 자체는 부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온갖 핍박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궁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부요하다고 인정하신다.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궁핍하나 내적으로 정결하고 부요함을 의미한다(눅12:21; 고후6:10; 딤전6:17,18; 약2:5). 이는 외적으로는 부요하나 내적, 영적으로 궁핍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정반대이다(3:17).

⭕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서머나의 유력한 위치에 오른 자들이 많아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방해하였다. 예를 들면 황제 숭배를 이용하여 거짓된 말로 로마 제국을 충동해서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을 처형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인 것을 천국 시민권으로 오해함으로 더욱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다. 실제로 초대 교회 여러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 가운데 유대주의는 가장 포괄적이며 무서운 기독교 진리의 훼방자였다(Moffatt, Johnson, Kraft).

⭕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했던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사실상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유대인은 혈통(血統)에 의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한 이면적 유대인이기 때문이다(롬2:28,29). 서머나의 유대인은 도리어 사단의 회였다. '사단의 회'는 자칭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여호와의 총회'라 했으나(민14:27,35) 그들의 실체는 사단의 자식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적대자임을 시사한다(요8;31- 47). 그들은 교회와 복음을 방해하며 교인들을 핍박하였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본서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13절; 3:9; 9:11; 12:9,10,12; 13:4; 20:7,10 Johnson).

성 경: [계2:10]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서머나 교회]

⭕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Johnson, Moffatt)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 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성 경: [계2:1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서머나 교회]

⭕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 본문은 앞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것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나타낸다. '둘째 사망'은 탈굼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에게는 아주 친숙한 용어였다(Johnson, Beasley-Murray).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육체적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分離) 곧 영원한 죽음을 가리킨다(Ladd). 그리스도인들의 최후에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불못 즉 영원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20:14; 21:8).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은 순교에 직면한 서머나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성 경: [계2:1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약 100km되는 곳에 위치한 수도로 주전 130년 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곳은 에베소와 서머나가 상업적으로 아시아의 중심 역할을 한 반면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아시아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의학교가 있었으며 장서 20여 만권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으며 책을 만드는 종이인 양피지의 생산지였다. 종교적으로 치료의 신으로 이해되었던 '아에스쿨라피우스'(Asclepius)라 불리는 뱀신과 주신인 '제우스'(Zeus), 그리고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등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지였다.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버가모 교인들에게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1:16의 반복이다. '검'은 권위와 능력을 가진 심판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버가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니골라당을 대적하여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16절, Mounce, Lenski).

성 경: [계2:13]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 '네가 어디 사는 것'은 단순히 버가모 교인들이 버가모에 살고 있는 것을 안다는 의미보다 버가모 교인들이 지금 처하여 있는 어려움을 안다는 의미이다. 버가모가 황제 숭배와 온갖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위로하신다. 한편 '사단의 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버가모 지역의 대표적인 우상 신전 중 특별히 제우스 제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Deissmann). (2)혹자는 버가모 도시 자체가 언덕처럼 생겨서 평원 위로 솟아오른 모습이 하나의 제단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본다(Wood). (3)혹자는 버가모가 이방신과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Johnson, Mounce, Alford). 세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사실상 버가모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모든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

⭕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 '굳게 잡아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이스'(*)는 '크라테오'(*, '붙잡다')의 현재 능동태 시상으로 '계속해서 굳게 잡았음을 의미한다(25절; 3:11). 따라서 이것은 여러 가지 우상과 황제 숭배의 강요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편 본절에는 고난과 순교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은 한 사람 안디바를 제시한다. '안디바'(*, 안티파스)는 '모든 것에 대적하는 자'란 의미로 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이름의 의미 자체가 밝히는 것처럼 어느 개인이 아닌 당시 순교자 전체에 대한 지칭이다. (2)당시 버가모에서 최초의 순교자든지 아니면 위대한 어떤 순교자를 지칭한다. 두 가지 추측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터툴리안은 '안디바'가 버가모 교회의 명성 높은 감독으로 황제 숭배 거절로 인해 불에 타 순교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Moffatt).

성 경: [계2:14]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본문은 버가모 교회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만 반면 부분적으로는 발람의 교훈을 좇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6절). '발람'은 어원적으로 '백성을 정복하라'는 의미의 '니골라당'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6절 주석 참조).

⭕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 분문은 버가모 교인들이 따랐던 발람의 교훈에 대한 설명이다. 발람의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사람들 잡혼(雜婚)을 하게 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에 타협케 한 것을 가리킨다(민22-25장; 31:8,16). 발람은 발락의 청구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정면으로 저주하지는 않았으나 모압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유혹하게 하여 음행케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중 수만 명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게 하였다. 이러한 '발람의 교훈'은 신약성경에서(벧후2:15; 유1:11), 혹은 유대 역사에서 늘 경계의 표적으로 언급되었다. 이처럼 당시 버가모도 특히 우상 숭배가 많은 지역이었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형식으로 세상과 타협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버가모 교인들이 우상 숭배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혼합화된 현상은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Bousset, Plummer, Johnson, Charles, Kiddle).

성 경: [계2:15]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이와 같이'는 앞절에서 언급된 발람의 교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언급되는 '니골라당의 교훈'과 '발람의 교훈'이 동일한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2:16]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 본절은 발람의 교훈과 동일한 니골라당의 교훈에 빠져있는 버가모 교인들에 대한 권면과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생겨날 일에 대한 경고이다. 그 권면은 '회개하라'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할 것을 의미한다. 만약 회개하여 신앙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심판이 임하게 된다.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에서 '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는 미래적인 현재 중간태 시상으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임하고 있다는 현재성과 김급함을 나타낸다(5절; 3:11; 11:14; 22:7,12,20, Johnson). 한편 '내 입의 검'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한다(19:15). 마치 하나님이 발람의 추종자들을 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민31:8) 우상이나 황제 숭배와 타협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한다(엡6:17; 히4:12).

성 경: [계2:17]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버가모 교회]

본절은 권면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 신앙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 '감추었던 만나'는 후손들을 위해 언약궤 안에 두었던 만나 항아리가(출16:32-34; 히9:4)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될 때에 예레미야 혹은 천사에 의해 감추어졌다가 장차 메시야 왕국에서 공개 된다는 유대 전설을 반영한 것으로(마카비하2:4-6; 바룩29:8) 이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지할 삶의 능력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Swete). (2)혹자는 '감추었던'이란 말은 이 세상에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보아 하늘에서만 먹는 양식으로 해석한다(Meyer). (3)혹자는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참된 양식으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Greijdanus, Charles, Johnson, 요6:33,39,48).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즉 '감추어진 만나'는 생명나무의 열매와 마찬가지로(7절) 하나님께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나라에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 승리한 버가모 교인들에게 두번째로 주어질 것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여기서 '흰'것과 '새'것은 장차 천국에서 맞게 될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서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1:14; 3:4,5,18; 4:4; 6:2,11; 7:9,13,14; 19:11,14; 20:11; 21:1,2,5 Trench, Charles, Plummer). 이 '흰 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혹자는 '흰 돌'을 이방의 미신 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황제 숭배 사상과 관련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offatt). (2)혹자는 만나가 하늘에서 내린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흰 돌로 본다(Rist). (3)혹자는 당시의 풍습에서처럼 재앙을 막기 위해 사용한 흰 돌에다 알 수 없는 이름을 새겨 넣은 것으로 본다(Holtz- mann). (4)혹자는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사용한 무죄 표시의 흰 돌로 해석한다(Clarke, Bengel). (5)혹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보석으로 본다(Trench). (6)혹자는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우승의 기념으로 새겨 주었던 흰 돌로 본다(Zahn).(7)혹자는 연회장에서 초대의 표시로 사용한 흰 돌로 본다(Plumptre, Johnson). 이 가운데서 여섯번째와 일곱번째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흰 돌'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는 상급이며,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케하는 상급이다. 한편 '새 이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석한다(Kiddle, Lohmeyer, Rist). (2)혹자는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상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Beasley-Murra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Johnson). 즉 세상에 감추어져 있으나 장차 드러나게 될 그리스도 자신의 이름이든지(3:12; 14:1), 아니면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이름을 나타낸다.

성 경: [계2:18]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두아디라'의 옛 이름은 '펠로피아'(Pel- pia) 혹은 '유힙피아'(Euhiooia)이며, 현재는 '아킷살'(Akhissar)로 불리운다. 이곳은 버가모와 서머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공업 도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전 190년 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태양신 '아폴로'(Apollo)와 '아데미'(Diana), '삼바다'(Sambatha) 등의 신전이 있었으며, 공업이 발달하게 된 동업 조합이 유명하였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곳 출신의 여인이었다(행16:14, Johnson). 한편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때 전도하였거나 루디아가 전달하여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두아디라에서 숭배하던 태양신 '아폴로'와 거짓 예언자 '이세벨'(20절)을 염두에 두고 경고하시는 것으로 그들의 우상 숭배와 행음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당시 청동업이 발달한 두아디라에 사는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생생한 화면처럼 느껴지는 계시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1:14,15 주석 참조, Johnson, Ramsay).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란 언급은 일곱 교회 서신의 서두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 중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이는 시2:7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의 위엄을 강조하며(Charles) 두아디라 지방의 우상이면서 제우스의 아들로 여겼던 아폴로나 황제와 대조를 이루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사한다(Mounce, Lenski).

성 경: [계2:19]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칭찬은 버가모 교회가 지닌 성숙함에 대한 것이었다. 본절에는 다섯 가지 칭찬 덕목이 나타난다.

⭕ 사업.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연이어 언급되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 등의 제반 덕목을 포괄한다.

⭕ 사랑. -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덕목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규범이다(마22:37-4-; 고전12:31-13:3).

⭕ 믿음. -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데 '믿음'보다 '사랑'의 덕목이 먼저 언급된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믿음보다 '사랑'을 강조한 듯하다. 그래서 말씀과 믿음의 바탕이 없는 사람들이 '이세벨'같은 이단을 수용한 듯하다.

⭕ 섬김과 인내. - 이는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덕목이다(롬15 :25; 고전16:15).

⭕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으로(4절) 두아디라 교회의 신앙 상태가 현저하게 진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에베소 교회가 믿는 도리를 강조하다 사랑을 잃었으나 두아디라는 사랑이 식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 사랑의 사업이 처음보다 더 많아졌음을 나타낸다.

성 경: [계2:20]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 구약성경에서 '이세벨'은 시돈의 왕녀였으나(왕상16:31; 왕하9:7)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되어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져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하게 함으로 영적 간음을 행하게 하였다. 두아디라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있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던 '이세벨'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다른 사본에 '이세벨' 앞에 '너의'(*, 수)가 있어 당시 두아디라 교회 교역자의 아내라 주장한다. (2)혹자는 특정 인물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인물로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세벨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단자라고 주장한다(Alford, Charles, Barclay, Walvoor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당시 두아디라에 성행했던 조합(組合)과 관련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고 성적 부도덕에 빠지는 일이 비일 비재했으며 그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이세벨이란 명칭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듯하다(Alford,Johnson). 사실상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정체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를 교회 내에서 활동하도록 용납함으로 범죄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이세벨을 징계했어야만 하나 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이세벨이 저지른 죄악은 두아디라 교인들을 유혹하여 행음케 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세벨의 행위는 에베소와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가르침과 유사하다(14, 15절).

성 경: [계2:2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 '주었으되...아니하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카...우 델레이'(*)에서 '에도카'는 부정 과거형으로 결정적인 경고의 기회가 주어졌음을 나타내며, '우 델레이'는 현재의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하여 회개하기를 원치 않음을 나타낸다.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졌다. 그러나 '이세벨'은 주어진 회개의 기회조차도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22,23절).

성 경: [계2:2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 '볼지어다'는 감탄사로 단호한 심판적 경고에 앞서 두아디라 교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침상'의 헬라어 '클리넨'(*)은 '잠자는 침상', '잔치용 상', '환자용 침상' 등을 의미한다. 본문에서의 '클리네'는 죄로 인한 심판과 관련되어 우상 숭배를 위한 상이나 음행을 위한 침상이 병상으로 바뀌어짐을 암시한다(Ramsay, Johnson, Ladd). 실지로 소아시아의 비문들은 음행의 결과로 질병에 걸려 죽은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Moffatt).

⭕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 '그로 더불어'는 이세벨과 짝한 것을 가리킨다. 이세벨과 뜻을 같이하여 음행하거나 우상 숭배한 모든 자들이 회개치 않는다면 이세벨과 동일하게 심판을 당할 것이다. 한편 '큰 환난 가운데'는 이세벨에게 주어진 심판, 즉 병상에 던져버림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인들을 유혹하여 행음케 하고 우상을 숭배케 했던 이세벨은 물론 이세벨과 마음을 같이하여 회개치 않는 범죄한 교인들에게도 동일한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성 경: [계2:23]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 '그의 자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실제로 음행한 자들의 자녀라고 주장한다(Holtzmann, Vincent). (2)혹자는 이세벨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는 모든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harles,Rist,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그의 자녀'를 이세벨과 행음하는 자 사이에서 생겨난 자녀로 보기는 어렵다(Ladd). 이러한 심판은 엘리야를 통해 이세벨에게 경고되고 성취되었던 형벌과 일치한다.(왕상21:21; 왕하9:6-37). 따라서 본문은 이세벨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을 보여 준다.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 '모든 교회'라는 언급은 본 서신이 특수한 상황 아래 있는 교회에 보내졌지만 보편적인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는 시7:9; 렘11:20 등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만의 신적 속성을 그리스도도 소유하심을 시사한다. '뜻'(*,네프루스)은 문자적으로 '신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과 감정의 총체'를 말하며, '마음'(*, 카르디아스)은 '감정'(롬9:2)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내적 생각과 사상과 감정 모두를 알고 계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자기 계시를 통해 두아디라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게 하고 회개케 하고자 하신다.

⭕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엄격히 드러낸 말로서 하나님이 인간의 중심을 살피실 뿐 아니라 그 행위에 따른 남김 없는 보응을 행하실 것을 가리킨다(렘17:10; 마 16:27; 롬2:6; 갈6:7).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기 전에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21절).

성 경: [계2:24]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일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 '사단의 깊은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구원을 얻으려면 신비한 지식을 터득해야 하며 자신들만이 그러한 지식을 가졌다고 하는 영지주의자들의 학설을 말한다고 해석한다(Alford, Clarke, Plummer, Vincent, Rist, Bruce). (2)혹자는 이세벨이 직접 '사단의 깊은 것'이란 말을 사용하였으며 마땅히 우상 숭배나, 음행, 또는 이교도들의 깊은 생활을 알아야 더 철저한 영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해석한다(Zahn, Boussett, Spitta, Johnson).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신약 호크마 9권의 공동서신 개론, '공동서신의 이단사상' 참조). 두아디라 교인들은 죄가 풍성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는 말씀을 이용하여 죄를 실제로 체험함으로 은혜를 더욱 값지게 느낄 수 있다는 이세벨의 유혹을 당하였다.

⭕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 '다른 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25절의 명령을 제외한 다른 것으로 본다(Beckwith, Walvoord, Holtzmann). (2)혹자는 행15장에 나타난 음행이나 우상 숭배에 관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이외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행15:28,29, Alford, Sweet, Vincent,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음행과 우상 숭배를 함으로 책망받았다(20절). 그러므로 '다른 짐'은 음행과 우상 숭배에 대한 교훈을 제외한 다른 교훈을 가리키는 듯하다.

성 경: [계2:25]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너희에게 있는 것'은 두아디라 교인들이 처음에 가졌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진리와 소망과 특권을 가리키며(Ladd, Alford),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승리의 날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의 날을 의미한다(Morris, Johnson). 한편 '굳게 잡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사테'(*)는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 단번에 진리라 굳게 붙잡고 변치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두아디라 교인들은 이세벨의 유혹에 의해서 음행과 우상 숭배 그리고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이세벨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직 기독교의 진리를 굳게 변치 말 것을 권고하신다.

성 경: [계2:26]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 '이기는 자'와 '지키는 그에게'라는 언급은 일곱 교회에 보내진 서신의 공통적인 형식으로 진리를 굳게 붙잡으며 그리스도의 권면을 듣고 순종하는 승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또한 '끝까지'는 온전한 승리자가 되는 시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25절).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연속되는 사단과의 투쟁이며 그 가운데 인내해야 함을 암시한다. 한편 '내 일'(*, 에르가무)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과 연관된 것으로(23절) 이세벨주의자들의 교훈과 가르침에 정반대되며(22절) 이미 두아디라 교회가 시행하여 칭찬받는 것의 내용을 의미한다(19절).

⭕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첫번째 약속으로 시2:8,9을 반영한다. 시2편은 메시야의 주권 사상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처럼 세상 끝에 그리스도인들도 그 권세에 참여함을 시사한다(1:6; 3:21; 9:10; 11:6; 20:6; 22:14; 마28:28).

성 경: [계2:27]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본절은 시2:9의 인용으로 철저하게 정복하시는 메시야 그리스도의 권세의 실체를 나타낸다. '다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마네이'(*)는 '양을 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포이마이노'(*)의 미래 능동태로 뒤이어 언급되는 '깨뜨리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쉰트리베타이'(*, '산산 조각이 나다')와 대조를 이룬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 시에 행하실 권세가 한편으로는 '양을 치듯'하며,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깨뜨리는 심판으로서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Charles, Mounce, Lenski). 즉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악에 대해 심판함과 동시에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 승리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받은 것이'의 헬라어 '에일레파'(*)는 완료형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만국을 다스리는 절대적 왕권을 부여받았음을 암시한다(시2:1-5; 빌2:9-11).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기인한 것임을 자신이 소유한 권세의 신성(神性)을 강조하고 있다(눅22:29; 요17:18).

성 경: [계2:28]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에게 주신 두번째 약속이다. 여기서 '새벽 별'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이를 왕의 지배권을 상징한다고 보아(민24:17; 마2:2)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인내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스런 승리로 해석한다(Plumptre). (2)혹자는 영광의 상징이거나(Stuart), 구원의 상징으로 해석한다(Moffatt). (3)혹자는 22:16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자신으로 해석한다(눅23:43, Victor, Bleek, Charles, Johnson, Kiddle).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본문은 시2편을 반영하며, 그 의미 역시 시2편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승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으로 어두움에 대한 온전한 승리를 획득할 것이다.

성 경: [계2:29]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1)]

주제2: [두아디라 교회]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본문은 일곱 교회에 보내진 서신의 결론적 어구로서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권면과 인도에 귀기울여 청종해야 함을 강조하는 명령이다(7절 주석 참조).

성 경: [계3: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사데는 두아디라 남동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현재 터키인 루디아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상업적으로 번창한 도시였다. 특히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 금모래가 유명하여서 사치와 부의 도시로 전략하였고 무역의 요충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성채가 남쪽만을 제외하고 모두 암벽으로 되어 있어 난공 불락의 성을 이루고 있었기에 상당히 안일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사데 사람들은 그 안일함으로 인해 두 번 정복을 당하였다. B.C. 6세기 고레스(Cyrus)의 공격과 약 200년 후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침략이 그것이다. 종교적으로 사데는 시벧리(Cybele) 여신을 섬겼고 황제 숭배가 극심하였다. 한편 사데 교회의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요한의 전도로 세워졌고 2세기에 이르러 변증가며 주석가로 유명했던 멜리토(Melito)가 이 교회의 감독이 됨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로 말미암아 내적인 피폐로 안일과 부도덕의 모습이 교회에까지 침투하였다.

⭕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사데 교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키며(1:4,16,20, Lenski, Morris, 1:4 주석 참조), '일곱 별'은 교회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천사를 가리킨다(1:20 주석 참조). 한편 '가진'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천사의 역할을 주관하심을 시사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주된 일은 내적인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을 확증케 하는 일이다(요14:16).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부여하고 살리시는 성령과 교회를 지키는 천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제로는 '죽었다'는 선언을 받은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연관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고를 받아들여 회개한다면 언제든지 죽은 사데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으며,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소수의 사데 교인을 지키고 계심을 시사한다(4절, Mounce, M-offatt, Ramsay, Ford).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사데 교회의 '행위'가 사데 교회의 과거 업적을 말하는지 아니면 과거의 명성만 주장한 채 현재는 생명을 상실한 모습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다음 절에서 '온전한 것이 없다'는 선언으로 보아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Johnson). 실지로 사데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이단의 특별한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적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다. 사데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사실을 단적으로 묘사한 '죽었다'는 표현은 사데에서 약 11km 떨어진 언덕같은 수많은 묘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표현이 종종 전통만을 고집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Kiddle, Moffatt) 사데 교회가 외적인 형식과 모습은 갖추었으나 신령한 모습은 상실했음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성 경: [계3: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 '일깨워'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그레고논'(*)은 현재 미완료 시상과 현재 능동태 분사가 결합되어 계속적인 경성(警醒)을 시사한다(Moffatt, Beck, Robertson). 이는 사데 지역이 난공 불락의 천연 요새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안일에 빠져 두번씩이나 점령을 당했던 사데 지역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Mounce, Lenski). 그리스도께서는 '일깨워'라는 권면을 사데 교회에 하심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함과(3절) 동시에 사데 교회가 비록 죽음 직전에 있으나 완전한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Weymount). '죽게 된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에메론 아포다네인'(*)은 미완료 능동태 시상으로 사데 교회가 부분적으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Swete). 한편 '굳게 하라'의 헬라어 '스테리손'(*)은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아직 남아있는 영적 생명을 견고히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시사한다.

⭕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온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메나'(*)는 '충만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플레로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함이라기 보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온전함을 말한다. 이것은 비록 사데 교회가 외적으로 보기에 풍성하며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시기에 허망하였음을 시사한다(Greijdanus).

성 경: [계3:3]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 본문은 사데 교회를 향한 세 가지 명령이다. (1)생각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므네모뉴에'(*)는 '염두에 두다'란 의미의 '므네모뉴오'(*)의 현재 명령형으로 '항상 상태를 되돌아 보라'는 뜻이다(12:5). (2)지키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이'(*) 역시 '유지하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테레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이미 받았고 들었던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함을 시사한다. (3)회개하라. 이것의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돌이키다'는 의미를 가진 '메타노에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죄에서 돌이킬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단회적이며 시급한 돌이킴에 대한 명령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심판을 내다보며 죄로 부패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함을 나타낸다(Behm).

⭕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내가 알지 못하리라. - 본문은 마24:34과 살전5:2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죄 속에 머물러 생명력을 상실한다면 마치 도적이 밤에 들이닥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예기치 못할 때에 오셔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한편 '알지 못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메 그노스'(*)는 제2부정 과거 능동태 가정법을 동반한 이중 부정으로 강조적이다.

성 경: [계3:4]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 본문은 대부분의 사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으나 그 가운데 극소수의 예외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단순한 도덕적 순결로 해석한다(Moffatt). (2)혹자는 성적인 불결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해석한다(Zahn). (3)혹자는 구원받은 자가 사회적인 풍조와 혼합에 물들지 않는 기독교적 성결로 해석한다(고후7:1, Lenski, Johnson).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당시의 사데 교회가 처한 입장은 단순히 도덕적인 타락이나 성적인 범죄와 같은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내적이고 기독교적인 문제였으며, '옷이 더럽다'는 것은 기독교적 순결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고전8:7; 고후11:2; 유1:23). 이러한 옷에 대한 예는 양모 산업이 발달하여 옷에 대해 관심이 많던 사데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한편 '몇 명'의 헬라어는 '올리가 오노마타'(*)로 문자적으로 '몇 이름들'이다(행1:15; 계11:13). 이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하나님께 기억된 바 됨을 시사한다(Mounce, Ironside).

⭕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기다리니. - '흰 옷'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의'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2)혹자는 '최후에 그리스도인이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 성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3)혹자는 '죄나 이교도적인 혼합에서 분리시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enski). 세 가지 견해 중 첫번째와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외적인 겉모습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 정결과 이교(異敎)와의 분리된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Johnson). 한편 '함께 다니리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 그와 함께 교제함을 표현하는 것으로(창5:22; 요:6,7) 단순히 현재적인 교제는 물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교제를 시사한다(Ladd, Greijdanus).

⭕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 '합당한'은 종말에 있게 될 심판의 기준에 타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2:7,17,27,28)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누리는것을 시사한다(Clarke, Morris).

성 경: [계3:5]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본절은 사데 교인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세 가지 약속이다.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사데 교회의 경우 다른 소아시아의 교회와는 달리 외적 핍박이나 특별한 이단 그리고 신비주의가 언급되지 않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문맥과 사데 교회가 처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세상의 부패나 타협, 안일함에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한편 승리자에게 주어질 첫번째 약속은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흰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희게 되었으며(7:14)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의, 영광을 닮아(18절; 6:11; 7:9,13; 19:14) 하나님 나라에서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받음을 시사한다(4절 주석 참조, Ladd,Johnson).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 '생명책'은 신,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다(13:8; 17:8; 20:12,15; 21:27; 출32:32; 시69:28; 눅10:20; 빌4:3).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시민권을 소유한 자들을 의미하였으며(출32:32,33), 신약성경에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는 의미로 쓰여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워진 자들은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13:8; 17:8; 20:12,15; 21:27; 눅10:20; 빌4:3, Rosh).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에게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승리자를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롬8:38,39)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 의존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시민권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Johnson, Beasley - Murray).

⭕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세번째 약속으로 마10:32을 반영한다(막8:38; 눅9:26; 12:8). 이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공적(公的)으로 시인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시인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소'(*)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끝까지 자신을 의지하여 승리한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확인하실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계3:6]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사데 교회]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이에 대하여는 2:7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계3:7]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곳은 서머나와 루디아 왕국으로부터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로 '동방의 관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으나 지진이 잦아 피해가 많았다. 또한 많은 신전과 종교적 행사가 있어 A.D.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렸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이교 신전과 종교 행사가 많고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B. C. 159-138) 아시아가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堡壘)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이다(Lenski, Johnson). 한편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단지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A.D. 100-160) 큰 부흥을 이룬 듯하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역사도 있었으나 반면에 교회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다.

⭕ 거룩하고 진실하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기오스, 호 알레디노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자, 진실한 자'를 의미한다. '호 하기오스'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으나(사1:4; 5:19,24; 10:17,20; 12:6; 렘51:5; 겔39:7; 호11:9; 합3:3)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그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나타내고 있다(막1:24; 요6:39; 행2:27; 13:35; 히7:26)또한 '호 알레디노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온전하며 충성된 자.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한 충성으로 메시야적 직무를 수행하신 완전한 분이심을 시사한다(Hort) (2)진실한 자.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나(사65:16)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야로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는 분이시므로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언급되었다(Mounce, Ladd).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22:15-25을 반영한다. 이사야서에서 국고를 맡고 있는 셉나 대신에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 열쇠를 맡아 다윗의 집 전체를 관리하는 권세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에서 '다윗의 열쇠'는 다윗의 집 즉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로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영생의 수여권을 시사한다(Ladd, Beasley - Murray). 엘리야김이 다윗의 집을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한 바와 같이 스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열쇠를 소유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갈 수 없는 자를 결정하신다(Johnson). 한편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에 대한 해석으로 당시 빌라델비아의 정황을 반영한다. 당시 빌라델비아에 많이 거주하였던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다윗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 살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윗의 열쇠를 가진이'라고 계시한 것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선민 의식에 대한 반론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천국의 주권을 가진 메시야이심을 강조함으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위로하신 것이다(1:18; 마28:18; 엡1:22; 히3:6).

성 경: [계3:8]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 '열린 문'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남북으로 로마와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를 연결하는 빌라델비아의 지리적위치 때문에 이를 '선교의 문'으로 해석한다(Ramsay, Swete, Alford, Clarke, Charles, Holtzmann). (2)혹자는 '그리스도의 문'이나, '기도나 순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집접 나아가는 길'로 해석한다(Kiddle, Moffatt). (3)혹자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으로 해석한다(Ladd, Zahn, Rist, Beckwith). 이 가운데서 세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12절과 본서의 종말론적(終末論的) 성격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을 닫을 사람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칭찬하신 내용이다. '적은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크란 에케이스 뒤나민'(*)은 '능력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그 지역에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신분이나 지위 등의 외적 능력이 변변치 못함을 나타낸다. 한편 '지키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에테레사스'(*)는 반의적인 강조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켰다'를 의미한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유대인들이 가하는 시련과 온갖 유혹 가운데서도(9절) 진리의 편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았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3:9]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문제는 외적인 황제 숭배나 핍박같은 것도 아니었고 부도덕하게 혼합주의로 이끌어 가는 이세벨주의나 니골라당 같은 내적 문제도 아니었다. 그들이 처한 위기는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혈통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나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정함으로 사단을 추종하는 자들 즉 '사단의 회'가 되었다. 그들은 진정한 유대인이 혈통과 같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루어지는 이면적(裏面的)인 것임을 망각하였다(롬2:28,29).

⭕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 유대인들은 본래 이방인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와 굴복한다고 믿고 있다(사45:14; 60:1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믿는 바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이 내면적인 유대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와 굴복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것에 대해서 혹자는 유대인들의 회심이라고 해석하나(롬9-11장, Ladd) 문맥상 본문은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부인하는 '사단의 회'인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심을 나타낸다(Johnson, Mounce). 그리스도께서는 예수의 메시야성을 부인한 혈통적 유대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셔서, 이면적이고 영적인 유대인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굴복케 하심으로 메시야이신 당신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성 경: [계3:10]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나의 인내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인내함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을 기다리라'는 명령으로 해석한다(눅21:19; 히10:36, Lohmeyer, Vincent, Zahn). (2)혹자는 '인내로써 죄많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한다(살후3:5; 히12:3, Johnson, Charles, Ladd, Alford, Moffatt).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 '시험의 때'에 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혹자는 빌라델비아 지역에서 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개인이 혹은 교회 공동체가 겪는 고통으로 해석한다(Payne). (2)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Mo-unce, 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시험의 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면하게 하리니'와 상관 관계를 형성하여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낸다. '면하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레소 에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요17:15의 용례를 들어 전치사 '에크'(*, '...중에서 밖으로')가 사용된 것은 환난 가운데서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현재 처하고 있는 고통에서 보호받게 될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Charles). (2)혹자는 약1:27의 용례를 들어 전치사 '에크'를 '아포'(*, '...로부터')의 의미로 보아 환난에서 떠나 보호를 받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는 장차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환난 그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으로 해석한다(Moffatt, Rist).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시험의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 또는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Johnson).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사단의 역사로 인한 고난은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면하게 될 것이다.

⭕ 이는 장차 온 세상이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시험의 때'에 대한 보충문이다. 본서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대적한 비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6:10; 8:13; 11:10; 13:8,14; 17:8). 그러기에 본절의 '시험할 때'는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당하는 일반적인 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때를 가리킨다.

성 경: [계3:1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내가 속히 임하리니. - 본문은 본서의 중심 사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1)심판의 측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악한 자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목적으로 한다(마24:48-51; 살후1:7-9). 이는 에베소(2:5), 버가모(2:16) 및 사데 교회(3절)에 임하신 모습이다. (2)축복의 측면. 본문에서는 심판의 경고가 아닌 충성된 빌라델비아 교인들을 향한 축복의 재림의 약속을 나타낸다(2:16; 22:7,12,20, Johnson).

⭕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 '굳게 잡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테이'(*)는 현재 명령형 시제로 이제까지 빌라델비아 교회가 지켜온 믿음을 더욱 지속적으로 공고히 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면류관'은 경기장에서 승리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말은 경기장에서 선수가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히12:1-4) 빌라델비아 교인들도 지속적으로 영적 무장을 통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의 말씀을 지켜 승리해야 함을 시사한다('면류관'에 대해서는 2: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계3:1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 본문은 당시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성전 기둥'을 비유로 하고 있다. 당시 빌라델비아는 잦은 지진으로 건물들이 폐허가 되었으나 파괴된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신전의 돌 기둥뿐이었다(Ramsay, Johnson). 지진과 폐허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전 기둥을 본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은 승리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하고 요동치 않는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렘1:18; 딤전3:15, Charles, Mounce, Ladd).

⭕ 내가...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 본문은 빌라델비아 교인들 중 승리자에게 주어진 두번째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 종류의 이름을 부여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름을 부여받는 것은 당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있어서 친숙한 것이었다. 빌라델비아는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을 때 티베리우스(Tiberius)의 도움으로 재건된 후 '네오가이사랴'(Neocaesarea)라는 이름을 부여받았고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아'(Flavia)로 개명되었다(A.D. 70-79). 이러한 경험을 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이름을 부여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1)하나님의 이름.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졌다(민6:27).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나타낸다(22:4, Ladd, Morris, Johnson).

⭕ (2)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 하나님의 성인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의 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소유함을 시사한다(Mounce, Ladd, Morris).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것으로(빌3:20) 그때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주할 것임을 암시한다.

⭕ (3)나의 새 이름. - 그리스도의 새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새 이름, 곧 다른 모든 권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력과 인격 그리고 성품을 나타내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이긴자들에게 주어짐을 의미한다(19:12, Mounce, Morris, Beasley - Murray, Ladd) 다른 하나는 구속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나타낸다(사62:6; 65:15, Johnson).

성 경: [계3:13]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빌라델비아 교회]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2:7절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계3:14]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이다. 또한 맞은 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 세 곳은 바울 서신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골4:13,16). 이곳의 특징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마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아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로부터 항상 수로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아야 했다. 한편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하였으며(골4:12,13) 골로새 교회와 함께 바울이 지도하였다.

⭕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 '아멘이시요'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아멘'(*)은 문자적으로 '아멘인 자'를 의미하며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난다(사65:16). 이것은 70인역에서 '톤 데온 톤 알레디논'(*, '진실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he truth, RSV),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the God whose name is Amen, NEB)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며, 신실하심을 시사한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부각되고 있다(1:5,6; 고후1:20, Mounce). 한편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아멘이시요'와 동일한 사상을 내포하는 칭호로(Ford, Beasley-Murray, Morris)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신실하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시사한다(1:5,9;2:13;고후1:20, Johnson).

⭕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헬라어 '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에서 '아르케'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最高)의 근원을 나타낸다.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 즉 '알파와 오메가'에서 '알파'에 해당되는 것으로(Beasley - Murray)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란 의미가 아니라 창조자이며 창조의 근본이심을 나타낸다(잠8:22ff.; 요1:1-3; 고전1:30; 골1:15; 히1:2,3, Moffatt, Charles, Lightfoot). 또한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시사한다(Moffatt).

성 경: [계3:15]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음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차다'는 것은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약 16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들이 불신의 상태로 세상에 속하였음을 시사한다. '더웁다'는 것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 신앙을 위한 열정을 비유한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차지도 덥지도' 즉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도, 혹은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소유하지도 않은 상태로 미지근하였다(16절).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만하는 자들이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차든지 덥든지'하라는 요구는 양자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라기보다 '차든지'와 '덥든지'의 중간 상태를 택하는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에 대한 신랄한 책망이다(Johnson).

성 경: [계3:16]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 '미지근하여'라는 언급은 '차다', '더웁다'는 말과 관련되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무익하고 무력함을 나타낸다(Beckwith, Green, Rudwick).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미지근한 물을 토해 버리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미지근한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책망하신다.

성 경: [계3:17]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 '부요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루테카'(*)는 현재 완료형으로 이제 완전히 부요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의미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상당히 부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하다. 이러한 모습은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룬다. 서머나 교회는 외적으로 가난하였으나 영적으로 부요하였던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반대였다.

⭕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Mounce, Johnson). (1)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 '곤고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했을 경우를 묘사하는 것으로(시137:8; 롬7:24) 그 어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물질적 부와 정반대로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Lenski, Moffatt, Morris). (2)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 '가난'은 라오디게아인들이 금융업이 발달할 정도로 물질적인 부를 축척한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며(2:9), '눈먼 것'은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잇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 시각 장애자로 분별력을 잃은 것을 의미하고, '벌거벗은 것'은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영적으로 벗은 모습임을 시사한다(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여 전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Johnson).

성 경: [계3:18]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본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앞절과 동일한 방법으로 라오디게아에서 유명하고 풍부했던 것을 예로 들어 그들의 영적 무관심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불로 연단한 금, 곧 시련을 통한 믿음을 사서 영적으로 부요해지라고 권면한다(사55:1, Johnson).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라오디게아는 광택있는 검은 양모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양모가 아닌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의의 옷을 입고 영적으로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것을 가리라고 권면하신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역의 특산물인 안약을 사서 치유하라고 권면함으로 그들의 영적 시각 장애를 치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라고 권면하신다(골1:27; 2:3).

성 경: [계3:19]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 하나님의 사랑은 주로 '아가파오'(*, '사랑하다')로 표현되는데 본절의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로'(*)로 되어있다. 이러한 문자적인 차이로 인해서 혹자는 '아가파오'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반면에 '필로'는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사랑하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필로는 '아가파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Barclay, Charles).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필로'와 '아가파오'가 같은 뜻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요5:20; 16:27). 한편 '책망'의 헬라어 '엘렝코'(*)는 원래 '낮춤'을 의미하는 말로 '말로써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나타내며(눅3:19; 딤전5:20), '징계'는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한다(히12:5,7).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의 잘못을 방관(傍觀)하지 않으시며 사랑어린 책망과 징계로 인도하신다.

⭕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열심을 내라'의 헬라어 '젤류에'(*)는 현재 명령형이며,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손'(*)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두 개의 명령문의 시상 변화는 '단번에 결정적으로 회개하고 지속적으로 열심을 내라'는 의미를 갖는다(Moffatt, Rebertson).

성 경: [계3:20]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Mounce, Trench). 한편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으로 해석한다(마24:33; 약5:9, Swete, Beckwith). (2)혹자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Mounce, 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한다(Ladd).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Morris, Ladd, Johnson, 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신다(요14:23).

성 경: [계3:21]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본문은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은 그의 왕적 지위를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음으로 왕적인 지위를 누리시는 것처럼 승리자에게도 그와 동일하게 권세를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1:6,9; 2:26,27; 5:10; 20:4-6; 눅22:28-30; 롬8:17; 딤후 2:12). 한편 '보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드로노'(*)에는 '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가 아니라, '안에'를 의미하는 '엔'(*)이 사용되어 단순히 보좌에 앉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명예와 권세를 주시며 참여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시사한다(Plummer). 이렇게 그리스도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적인 통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성 경: [계3:22]

주제1: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2)]

주제2: [라오디게아 교회]

2:7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계4:1]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 '이 일 후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2,3장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계시가 종결된 바로 직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Johnson). (2)혹자는 장면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환상의 전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환상의 전환을 나타내는 묵시 문학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orris, Beasley-Murray, Robert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또한 이 말은 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7:1,9; 15:5; 18:1; 19:1) '내가 보았다' 혹은 '내가 들었다'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는 환상을 통한 계시의 사실성과 현장성을 나타낸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본서에서 '하늘'은 12:12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수로 사용되었다(3:12; 6:13; 12:7; 21:1). 그 의미는 다양하나 본문의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처소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곳을 의미한다(Morris). 한편 '열린 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라 에네 오그메네'(*)는 완료 분사형으로 문이 이미 열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며 환상을 통해 요한이 보게 될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문'은 본서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나라의 문'(3:8) 또는 '마음의 문'(3:20)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문'을 나타낸다(Ladd, Mounce, Swtet). 따라서 본문의 '문'은 문 자체보다 천상의 광경을 보여 주기 위한 것과 계시를 전달받는 자가 분명하게 경험했음을 부각시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겔1:1; 마3:16; 막1:10; 요1:51; 행7:56; 10:11).

⭕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 본문은 1:10에서 들었던 음성을 요한이 다시 들었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 음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포네'(*)에 정관사 '헤'가 있어 이전에 언급된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arles,Stier). (2)혹자는 '천사'라고 주장한다(Bousset, Plummer).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 '이리로 올라오라'는 마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는 명령과 흡사한 것으로(출19:24)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휴거의 상징이 아니라(Johnson, Ford, Walvoord) 환상 중에 더욱 분명한 계시를 전달받기 위해 계시 전달자가 초대 되었음을 시사한다(고후12:2, Hughes). 한편 '마땅히 될 일'은 요한에게 계속 보여줄 환상이 미래에 일어나지만 그 계시의 내용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약속임을 시사한다(1:19, Morris, Lenski, Hughes).

성 경: [계4:2]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데오스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는 문자적으로 '즉시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1:10) 천사으로 인도되어 새로워진 요한의 상태를 묘사한다(겔8:1-4; 11:1, Moffatt, Plummer, Ford). 이는 요한이 3장까지는 계시의 음성을 들었으나 이제는 직접 계시에 참여함으로 영감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음을 시사한다(요14:26; 고후12:2,3, Weiss, Swete).

⭕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 '보좌'는 간혹 하나님께서 하늘을 보좌로 삼으신 것을 묘사하기도 하며(사66:1; 마5:34; 23:22), 또한 하나님의 보좌가 천상 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나(왕상8:27), 본문에서는 영광과 심판을 동반한 하나님의 위엄과 권세를 나타낸다(왕상22:19; 사6:1; 겔1:26; 단7:9; 외경 I Enoch 18:14,19; Levi5:1; Moses4:2, Ford). 한편 '보좌 위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을 지칭한다. 왜냐하면 5절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다음 장에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나타나 1장과 유사하게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진술의 구조를 이루기 때문이다(1:4-6).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심으로 자신의 무한한 권능과 권세 그리고 통치하심이 완전한 것임을 나타내신다(Greijdanus, Lenski).

성 경: [계4:3]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 '모양'의 헬라어 '호라세이'(*)는 문자적으로 '보이는 것'이란 의미로 개역성경의 '모양'보다는 '보이는 것'이 더 나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모양'의 경우 하나님을 마치 물질적인 측면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9:17; 겔1:5,26). 한편 본절에 언급되는 3개의 보석 중 '벽옥'과 '홍보석'은 현재 어떤 종류의 보석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지 '홍보석'은 사데에서 주로 생산되며 진홍빛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보석은 분명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일진대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벽옥과 홍보석이 대제사장의 흉배에 붙이는 보석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출28:17-20)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Walvoord, Morris). (2)혹자는 벽옥이 하나님의 위엄, 거룩, 순결을 상징하며, 홍보석은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고 본다(Plummer, Mounce). (3)혹자는 벽옥이 하나님의 청결을, 홍보석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Barclay). 이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극대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Johnson, Mounce).

⭕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 '무지개'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녹보석에서 빛나는 일종의 무지개와 같은 후광으로 본다(Ladd). (2)혹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나 영광스런 권능과 의로움으로 해석한다(Lenski). (3)혹자는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빛나는 광채로 본다(겔 1:27, 28, John- son). (4)혹자는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성취를 약속하시는 것으로 본다(창9:12, 13, Morris, Caird). 이 가운데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녹보석'에 대해서 혹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나(Ladd)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21:19, Morris, Mou- nce).

성 경: [계4:4]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 '이십 사 장로'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다. (1)혹자는 구약의 열 두 족장과 신약의 열 두 사도가 합쳐진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21:12-14, Vincent, Plummer, Alford, Weiss). (2)혹자는 종말 때에 일어날 교회의 휴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alvoord). (3)혹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Hendriksen, S- wete, Wette). (4)혹자는 구약의 이십 사 제사장 반열을 나타낸다고 본다(대상21:1-19, Hilgenfeld). (5)혹자는 천상의 천사들을 가리키거나 혹은 천사장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pitta, Reuss). (6)혹자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나(Clarke, Rist) 유대인 교회를 의미한다고 본다(Wordsworth). (7)혹자는 바벨론 신전의 이십 사 성좌에 해당하는 유대 인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Beasley-Murray). 이런한 다양한 견해 중 어느 하나가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단지 여러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며 찬양하는 일에 종사하는 영적 존재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5:8,14; 11:16,17; 19:1-5, Charles, Mounce, Johnson, Stonehouse). 한편 본문의 '이십 사'라는 숫자는 본서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완전성과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12'의 곱절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한다.

⭕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 '흰 옷'은 성도나 찬사가 입고 있는 것으로 의와 청결을 상징한다(3:18; 7:14, Morris). 또한 금 면류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파누스 크뤼수스'(*)는 단순한 왕관이 아니라 승리의 화관으로(2:10)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도가 된 자들의 존귀와 승리를 상징한다(Trench).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금 면류관을 쓴 사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4:5]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보좌로부터 번개과 음성과 뇌성이 나고. - '보좌로부터'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중심성을 나타낸다.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현상들은 본서에서 성전과 연관되어 나타나(11:19, Johnson, Ford) 위엄과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장엄한 임재와 성도들에 대한 보호를 시사한다(출19:16; 욥37:14; 시29:3; 겔1:13).

⭕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 '일곱 영'은 충만히 임재한 성령을 가리킨다(1:4, bengel, Plummer, Vincent, Ladd). 이와 비교된 '등불'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파데스'(*)는 '촛대'를 의미하는 '뤼크니아이'(*, 1:20)와는 달리 '횃불'을 의미한다(겔1:13; 슥4:12). 이는 창조의 보존과 유지에 관여하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과 속성을 암시한다(1:4; 3:1).

성 경: [계4:6]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 '수정'의 헬라어 '크뤼스탈로'(*)는 원래 '얼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투명한 결정체를 가리키며(출24: 10; 욥37:8; 겔1:22), '유리'(*, 휘알리네)는 본래 '빗방울'을 나타낸다. 이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는 맑은 속성을 나타내는 듯하다. 여기서 '유리 바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악을 잡아 가두는 곳'으로 해석한다(Caird). (2)혹자는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시는 피'로 해석한다(Hendriksen). (3)혹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본다(Lenski). (4)혹자는 '보좌에서 베푸신 넓고 빛나는 장면의 장엄성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히4:13, Johnson, Mounce).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 '가운데'로 번역된 헬라어 '엔 메소'(*)는 '중앙'이란 의미가 아니라 '가까이에'라는 의미이며, '주위에'의 헬라어 '퀴클로'(*)는 단지 장소를 나타내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보좌를 중심하여 서로가 마주보거나, 그 주위를 둘러선 광경을 나타낸다(겔1:12, Brewer).

⭕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 본문은 이사야서의 스랍과 에스겔의 그룹들 가운데서 선지자가 본 네 생물의 형상을 반영한 것이다(사6:2; 겔1:5-25; 10:1 -22). 차이점은 본서의 네 생물이 각각 하나의 얼굴과 여섯 날개를 가진 반면 에스겔서의 네 생물은 각각에 얼굴과 네 날개를 가진 것이다. 여기서 네 생물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1)혹자는 초대 교회 때부터 사복음서를 의미했다고 주장한다(Irenaeus, Augustine, Jerome). (2)혹자는 신약 시대의 4명의 사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rot- ius). (3)혹자는 이스라엘의 네 진영을 의미한다고 본다(민2:2, Clark, Scott). (4)혹자는 피조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Greijdanus, Plummer, Alford). (5)혹자는 생명과 지능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기괴한 상징으로 해석한다(Moffatt). (6)혹자는 장로나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천상의 영적 존재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8절; 11:15, Mounce, Beckwith, Johnson). 이 견해들 가운데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적 존재들로서 네 생물이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8절). 한편 '눈이 가득하더라'는 무한한 지적 능력과 통찰력 및 지혜를 상징한다(겔1:18; 10:12, Beckwith, Johnson).

성 경: [계4:7]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 사도 요한이 본 네 생물의 형상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겔1:4,6,10,14에서 언급된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네 생물의 모습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혹자는 이 네 생물들이 피조물의 대표자로서 사자는 용기를, 송아지는 힘을, 사람은 지혜를, 독수리는 속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Swete). (2)혹자는 네 생물의 신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자는 '왕권'을(왕상7:29; 10:20; 대하9:18,19), 송아지는 '힘'을(왕상7:25), 사람은 '영성'을(창1:27), 독수리는 '신속한 행동'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피조물의 대표적인 네 생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피조물의 섬김과 경배를 시사한다(Ford, Mounce). 한편 초대 교부들은 네 생물의 모습을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와 연결지어 해석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본장 주제강해 '네 생물에 대하여'를 참조하기 바란다.

성 경: [계4:8]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 사6:2에서처럼 네 생물들이 여섯 날개를 가졌다는 것은 본래 '날개'는 속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Ford)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신속하게 성취함을 상징한다(시18:10; 겔10:16;, Mounce, Lenski). 한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통찰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 네 생물들은 쉬지 않고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거룩하다'라고 세 번 언급하는 것은 히브리식 최상급을 표현하는 것이며(사6:3), 유대교와 초대 교회에서는 삼위 일체와 관련하여 예배에서 의식상의 표현으로 나타났다(Mounce, Ford). 이러한 거룩에 대한 최상의 표현은 어떤 것에도 존재의 기반을 갖지 않으시고 자신에게만 절대적으로 의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함의 속성을 시사한다(출3:14, Johnson, Ford, Lenski). 한편 '전능하신 이여'는 1:8에서 이미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로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을 시사한다(창18:14, 렘32:27; 마19:26, R.Martin). 또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란 칭호도 이미 언급된 것으로(1:8)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하나님 칭호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처럼 시,공의 제한을 초월한 자임을 강조하며 섭리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한 찬양의 내용들은 피조물들이 영원토록 본질적으로 찬양해야 할 것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피조물의 사명을 암시한다(시148:1-14).

성 경: [계4:9]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 본절은 앞절에서 네 생물들이 찬양한 내용의 반복이다. '영광과 존귀와 감사'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대한 찬양이며, '세세토록 사시는 이'는 8절의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을 나타내는 칭호 중 '장차 오실 자'에 대한 강조와는 달리 하나님 자체의 본질적 영원성을 나타낸다. 한편 '돌릴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탄 도수신'(*)은 연속적인 반복의 개념보다는 '그들이 돌릴 때마다'라는 간헐적인 때를 의미한다. 이는 영적 존재인 네 생물의 주요 임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4:10]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 본문은 네 생물들이 찬양할 때에 하늘의 영적 존재들인 장로들도 함께 찬양함을 묘사한다. 여기서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엄 앞에 드리는 절대적 경외와 존경을 나타낸다.

⭕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본문 역시 절대적 권위와 위엄을 가지신 이에게 복종과 경배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본문의 '면류관'은 영적 존재인 이십 사 장로들이 승리하여 받은 화관으로 영광과 승리와 존귀를 나타낸다(4절; 2:10). 따라서 본문은 이십 사 장로들이 소유한 모든 영광과 승리도 모두 하나님께 돌려져야 함을 시사한다(시33:6-9; 102:25; 빌2:10,11, Johnson).

성 경: [계4:11]

주제1: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

주제2: [보좌에 계신 하나님]

⭕ 우리 주 하나님이여. - 본문의 찬양 칭호는 당시의 황제에 대한 절대권을 표시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환상 속에서 이십 사 장로들이 드리는 찬양 호칭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가 되심을 명백히 한다.

⭕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 이십 사 장로들의 두번째 찬양 내용은 9절에서와 같이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것에 대한 찬양이다. 단지 9절에서의 '감사'가 '능력'으로 바뀌어 나타날 뿐이다. 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증거하는 창조의 능력을 가리킨다.

⭕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 헬라어 본문에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 '때문에')가 있어 본문이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를 나타낸다. 여기서 '지으신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티사스'(*)는 히브리어 '바라'(*,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동사로(창1:1) 무(無)에서 유(有)로의 창조를 나타낸다. 이는 본문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 대한 이십 사 장로의 찬양임을 나타낸다(골1:16; 시148:5, Mounce, Lenski). 이처럼 창조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모든 피조물들의 감사의 기초가 된다(Bengel).

⭕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주의 뜻대로 있었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토 델레마 수 에산'(*)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뜻을 위해 있었고'라는 의미로 이는 창조 목적을 나타낸다. 즉,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있었고'의 헬라어 '에산'은 미완료 시제로 만물의 창조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의 현상이 하나님께 그 존재 기반을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Alford, Johnson). 한편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티스데산'(*)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시작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만물이 존재하고 창조되었음'을 나타내는 이십 사 장로의 찬양이다(Johnson, 고전8:6; 골1:16).

성 경: [계5:1]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 '오른손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 텐 뎌시안'(*)은 문자적으로 '오른손 위에'라는 의미로(1:16)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열려진 손바닥을 의미한다. 이는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시사한다(Mounce). 한편 '책'으로 번역된 헬라어 '비블리온'(*)의 모양에 관한 주장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양피지 같은 곳에 한장씩 기록한 일반적인 책의 형태(codex)로 본다(Zahn). (2)혹자는 고대에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던 '두루마리'(scrooll)로 본다(사34:4; 렘36:2; 히10:7, Charles, Ladd, Beasley-Murray, Walvoord, Ris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 안팎으로 썼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람메논 에소덴 카이 오피스덴'(*)은 문자적으로 '안쪽과 뒷면에 썼고'라는 의미로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용의 비밀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로는 한 면만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Zahn). (2)혹자는 공적인 내용을 양면에 기록한 사실은 내용의 양면에 완전히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Vincent). 이 가운데서 문법적인 면이나 내용면에서 후자가 더 타당하다(겔2:10). 안팎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하에 이루어진 선포가 시사한다(Mounce).

⭕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 '봉하였더라'의 헬라어 '카테스프라기스메논'(*)은 '위 아래로 봉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로마법에 따라 유언장에 일곱 명의 증인들이 봉인한 사실을 들어 본문이 '증거나 확증'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Zahn, Weiss). (2)혹자는 일곱 인을 일곱 교회와 일곱 영과 관련하여 해석한다(Milig- an). (3)혹자는 일곱이 완전 수를 상징하므로 책의 내용이 완전하며 어떤 인간에 의해서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내용이어서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밝히 보이실 수 있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Alford, Barclay, 롬16:25; 고전4:1; 엡3:3).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의 내용에 관한 견해는 다양하다. (1)혹자는 고대 로마의 유서 인봉 풍습과 관련하여 이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상속 유서로 해석한다(Zahn). (2)혹자는 세상 끝에 이루어질 심판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겔2:9,10, Walvoord). (3)혹자는 두루마리가 일곱 부분으로 인봉된 사실을 중시하고 한 부분을 개봉할 때마다 각기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여 그 내용을 세계 역사의 점진적인 전개로 본다(Weiss, Ellicott). (4)혹자는 매매 증서에 관한 내용으로 이해하여(렘32:10-14) 창세기에서 죄로 인해 상실된 창조물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다시 찾았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eiss). (5)혹자는 구약의 율법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L.Mowry). (6)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종말 즉,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성도들의 구원 그리고 만물의 비밀의 완성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6:4,6,8,10; 7:3-17, Ladd, Johnson). 여러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성 경: [계5:2]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 '힘있는 천사'에 대해서 혹자는 천사장 가운데 하나로(Clark, De Wette) 해석하며, 혹자는 가브리엘로 해석하기도 하나(Ford) 분명하지 않다. 한편 본문의 '합당하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앝시오스'(*)는 능력이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함이나 의로움과 같은 적합성(適合性)을 나타내는 것으로 봉인된 책을 열 수 있는 의로운 자격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수사학적 질문이다(Greijdanus).

성 경: [계5:3]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 '하늘 위', '땅 위', '땅 아래'는 빌 2:10과 병행을 이루는 표현으로 혹자는 '하늘 위'는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이 거하는 곳을, '땅 위'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이 거하는 곳을, '땅 아래'는 악한 영들이 거하는 음부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나 전 우주와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출20:4, Mounce). 창조물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낼 수 없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5:4]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렸더니. - '울었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라이온'(*)은 미완료 능동태 시제로 계속 울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직업적으로 애곡하는 자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으나(요11:33,35) 구약성경에서는 비참함을 선포할 때 사용되었다(왕상13:30; 렘22:18). 본절에서 요한의 울음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1)마땅히 보여줄 것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4:1) 더 이상 볼 수 없음으로 인해 생긴 두려움의 울음을 의미한다(Alford, Morris). (2)계시의 내용 가운데 구체적으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 수 없음으로 인해 계시를 알고자 하는 열정의 울음을 의미한다(Bengel).

성 경: [계5:5]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 본문은 요한이 책을 열기에 합당한 자가 없어서 울 때 장로 중 하나가 위로하며 한 선포이다. 인봉된 책을 열기에 합당한 자에 대한 칭호는 두 가지이다. 이 두 가지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 (1)유대 지파의 사자. 이것은 야곱이 유대 지파(the tribe of Judah)를 향해 했던 축복의 예언을 반영한 것이다(창49:1-28). 야곱은 유다를 가리켜 '사자 새끼'라고 하였으며 '실로가 오시기까지 홀이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창49:9,10). 이 약속은 승리하신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용되었으며(IV Ezra 11:37; 12:31, Testament of Judah 24:5), 신약성경에서는 '이기는 자' 혹은 '메시야의 특징'으로 나타난다(히7:14). 이 칭호는 고난당하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시며 지배하시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지칭한다.

⭕ (2)다윗의 뿌리. 이 칭호는 사11:1을 반영한다. 이사야서에서 메시야는 악을 징계하고 평화로운 이상 국가를 이루시며 다스리시는 왕으로 나타난다(사11:1-10). 이 메시야 칭호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더욱이 '뿌리'는 예수께서 비록 다윗의 인간적 혈통을 통해 오셨으나 그 근본 본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시사한다(사11:1,10; 마1:1). 한편 '이기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 에니케센'(*)은 문자적으로 '보라'는 의미의 감탄사 '이두'와 단회적으로 '이기었다'를 의미하는 부정 과거 시제의 '에니케센'으로 이루어져 '단번에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한 것'을 시사한다. 이는 곧 승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켜 미래에도 그러할 것임을 암시한다(Swete). 실제로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고 최후에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한 자이며 온전한 승리를 성취하실 자이다(1:18; 눅10:18; 요14:30; 16:33).

성 경: [계5:6]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내가 또 보니...어린양이 섰는데. - '어린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니온'(*)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된 '암노스'(*, '어린양')와는 달리(요1:29,36; 행8:32; 벧전1:19) 갓난 어린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서에서 29회 사용되었다. 이는 곧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희생을 시사한다(사1-3장, Johnson, Greijdanus). '사이에'는 공간적으로 구체적인 한 위치르 가리키기보다는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중보자임을 암시하는 표현이라 추측한다(4:2,4,6).

⭕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에스파그메논'(*)은 완료 수동태 서술 분사 구문으로 과거에 십자가에 죽었으나 지금은 살아계신 것을 시사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기도 하며(Minear), 혹자는 그리스도의 몸에 이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묘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harles, Mounce). 이러한 사실을 종합할 때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을 구원하며,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현재는 중보자로서 계셔서 십자가의 대속 사역의 효력을 영원토록 발휘하심을 나타낸다(5:9,12; 6:4,9; 13:3; 18:24, Hughes, Ironside).

⭕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 '일곱 뿔'에서 '뿔'은 힘을 상징하며,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기에 어린양이 소유한 '일곱 뿔'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결하신 권세와 능력을 시사한다(민23:22; 신33:17; 삼상2:1; 왕상22:11; 시75:4; 빌2:9-11). 앞서 언급된 죽음을 당한 적이 있는 어린양과는 달리 '일곱 뿔'을 가진 어린양에 대해 혹자는 묵시적 개념에서 도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에녹1서 90:37; the Testament if Judah 19:8ff. , Charles, Mounce, Beasley-Murray). 한편 '일곱 눈'은 성령을 상징한다(1:4; 4:5). '눈'은 지혜와 통찰력을 상징하는 것으로(슥3:9; 4:10) 성령께서 특수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여(행2장)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일체된 사역을 행하심을 시사한다(요14:26; 15:26; 16:8,13-15).

성 경: [계5:7]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 '취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일레펜'(*)은 생생하고도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며(Vincent) 동시에 세상의 모든 통치가 어린양을 통해 성취됨을 시사한다. 이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성취시킬 권위와 권한을 부여 받으셨음을 암시한다(사9:6,7; 슥9:10, Johnson, Ford, Plummer).

성 경: [계5:8]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 어린양이 세상의 구속을 위한 왕권을 위임받자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일제히 어린양 앞에 순복하였으며 그의 권위와 능력을 찬양하고 경배 자세를 갖춘다. 여기서 '각각'이 누구를 한정하는가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혹자는 경배와 찬양은 생물 보다는 인간이 해야 할 직무임을 강조하여 이십 사 장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Alford, Charles, Vincent). (2)혹자는 이십 사 장로들과 네 생물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Spitta, Clarke). 본서에서 네 생물의 경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타당하다.

⭕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 '거문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몇개의 현이 달린 전통적인 악기로서(14:2; 15:2; 시33:2; 98:5; 147:7) 일반적으로 찬송을 가리킨다. 이는 어린양이 하나님과 함께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심을 시사한다. 한편 금대접에 담긴 '향'은 성도들이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혹자는 이것이 교회가 오랫동안 해 온 기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Ladd). 본절에서 기도를 어린양께 바치는 것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중보자가 되심을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5:9]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 '새 노래'는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시33:3; 40:3; 96:1; 98:1). 여기서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넨'(*)은 '시간적이며 근원적인 면'에서 새로움을 나타내는 '네오스'(*, '새로운')와는 달리 '질적인 면'에서 새로운 것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새 노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구원의 새로운 완성에 대한 노래이다. 앞장에서 하나님이 창조 역사로 인해 찬양받으셨던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 어린양은 구속의 역사로 인해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의 찬양을 받는다(Lenski, Ladd, Morris). 한편 '노래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두신'(*)은 현재 시상으로 계속적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나타낸다(Alford).

⭕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 '합당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앝시오스'(*)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이 인봉을 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음을 시사한다(2절). 즉 일찍이 역사 가운데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이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영원한 조건을 갖추었음을 시사한다(Morris, Hughes).

⭕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 요한은 예수의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임을 나타낸다. '죽임을 당하사'의 헬라어 '에스파게스'(*)가 부정 과거 수동태이며(고전6:20; 7:23; 갈3:13; 벧후1:21) '피로 사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라사스...엔 토 하이마티'(*)가 대가를 나타내는 전치사 '엔'과 '구속하다'는 의미를 가진 '아고라조'(*)의 부정 과거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과 죽음으로 단번에, 결정적으로 택한 자들을 사신 것을 나타낸다(Johnson, Vincent, Morris). 한편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라는 표현은 인종적, 집단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보편적인 인류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시사한다(12절; 1:5; 7:14; 12:11; 13:18; 14:4; 15:3; 19:7; 21:9; 22:3, Johnson, Mounce, Ladd). 그러나 '가운데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는 민족이나 인종의 차별이 없는 보편 구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엡1:5) 선택한 사실을 가리킨다.

⭕ 하나님께 드리시고. -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죄인들을 구속하신 목적이다. 그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와 그의 백성이 되게 하며 그에게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고전6:19,20).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성도들은 하나님께 소속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 경: [계5:10]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 '나라'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집합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리킨다(1:6; 20:6). 또한 '제사장을 삼으셨다'는 말은 옛 언약 하에서 특별히 선택된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제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개인이 직접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며, 섬기고 찬양함을 시사한다(히13:15,16, Swete, Mounce, Johnson).

⭕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 '땅'은 종말론적 성취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온전히 왕 노릇할 것을 의미함은 물론 현재에 그리스도인이 왕 노릇하는 것도 내포한다(Johnson). 한편 '왕 노릇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류슈신'(*)에 대해서 미래형으로 취한 사본도 있으며(*, P, Nestle 26 ed), '바실류우신'(*)으로 현재형을 취한 사본도 있다(A, Q). 미래형을 취할 경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릴 것을 기대하면서 구원받는 자들이 함께 그 통치의 기쁨을 누릴 것을 대망하는 것을 나타내며(2:26,27; 20:4; 22:5) 현재형을 취할 경우 그것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왕적 통치를 나타낸다. 두 가지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요컨대 '왕 노릇하리로다'는 말은 '미래적 현재'로 온전한 왕 노릇을 기대하면서 현재에 참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Johnson, Mounce).

성 경: [계5:11]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 본절에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찬양하는 이들은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에서 많은 천사들로 확대된다. '만만이요 천천이라'는 말은 단7:10을 반영한 것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무리를 묘사한다. 이는 이 무리들 가운데 계신 자의 무한한 영광과 권능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에게도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시사한다(시68:17; 히12:22, Johnson, Morris).

성 경: [계5:12]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 본절은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내용으로 7:12과 유사하다. 이 찬양의 내용이 13절과 7:12에서는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어린양께 돌려지고 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어린양이 동일(同一)함을 나타낸다. 한편 찬양의 내용은 일곱 가지이며 이것들이 하나의 관사 '텐'(*)으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속성을 시사해 준다(대상29:10-12, Johnson, Mounce).

⭕ 능력. - 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리스도께도 속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시다(고전1:24).

⭕ 부. - 이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약1:11), 또한 그리스도께 속한 것으로(고후8:9; 엡3:8)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진 것이다(요1:16).

⭕ 지혜. -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지혜로서(고전1:24) 모든 지혜를 소유하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주신다(고전1:30; 골1:9).

⭕ 힘. - 이것은 '능력'이 외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악이나 대적자를 멸망시키심을 시사한다(눅11:22).

⭕ 존귀와 영광. -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으로 존귀와 영광을 소유하신 분이었으나 세상에 종의 형체로 오셔서 낮은 자리에 임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존귀와 영광을 입으셨다(요1:14; 빌2:1-11; 히2:9).

⭕ 찬송. - 앞서 언급된 여섯 가지가 그리스도의 속성과 본질을 잘 나타내는 반면 본문은 천사들과 성도들의 고백을 나타낸다(벧전1:3).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같이 동일하게 모든 피조물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시사한다.

성 경: [계5:13]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 본절은 앞절의 찬송에 대한 모든 피조물들의 화답송으로 만물이 속한 전우주의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다(Swete, Caird). 여기서 '만물이 가로되'는 창조주와 창조물이 구분되지 않는 범신론적 사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우주에 속한 만물의 반응울 나타낸다(롬8:19).

성 경: [계5:14]

주제1: [인봉된 책과 어린양]

주제2: [인봉한 책과 어린양]

⭕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 피조물의 찬송에 호응하여 네 생물과 장로들이 아멘과 경배로 하늘의 찬송을 끝맺는다. '가로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곤'(*)은 네 생물이 12절의 일곱 가지 찬송과 13절의 네 가지 찬송에 모두 아멘이라고 화답하였음을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6:1]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첫째 인의 재앙]

⭕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 본절과 다음절은 첫째 인에 해당된다. '어린양이...그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테 에노잎센 토 아르니온'(*)은 마지막 인을 뗄 때까지(8:1)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문구이다(3,5,7,9,12절). 이는 그 어떤 인간도 뗄 수 없는 (5:3) 종말의 비밀을 어린양 자신이 여심으로 어린양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주체이심을 나타낸다.

⭕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우뢰 소리같이'는 하늘의 소리를 가리킨다(4:5; 요12:29). 한편 '오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쿠'(*)가 누구를 향한 명령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요한에게 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Plummer). 그러나 본서에서 요한이 자신을 향해 '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듀로'(*)를 사용하고 있어(17:1; 21:9) 받아들이기 어렵다. (2)혹자는 그리스도에게 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Alford, Swete).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일곱 인을 떼시는 주체가 어린양이므로 네 생물이 그리스도를 향해 '오라'고 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혹자는 말 탄 자에게 명한 것으로 본다(Weiss, Robertson, Morris, Ladd, Johnson, Mounce, Charl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네 생물의 '오라'는 초청에 말탄 자가 등장하여 즉각 행동하기 때문이다.

성 경: [계6:2]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첫째 인의 재앙]

⭕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 요한이 첫번째 인을 떼고 난 후에 본 환상은 흰 말의 모습이다. 이는 슥6:1을 반영한다. 그러나 스가랴서에서는 색깔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반면 본서에서는 말 탄 자와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흰색은 승리와 정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땅에 심판을 위한 재앙을 내리려는 의도를 암시한다.

⭕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 본절에서 흰 말이 나오고 그 탄 자가 활을 가지며 승리를 상징하는 면류관(*, 스테파노스)을 가진 것으로 보아 말 탄 자가 승리자요 정복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로마 제국이나 로마의 정복자로 해석한다(Spitta, Bengel, Ramsay). (2)혹자는 메시야로 해석한다(Lange, Clarke). (3)혹자는 복음과 그리스도라고 해석한다(1:14; 2:17; 3:4,5; 19:11-16; 20:11, Zahn, Alford, Greijdanus, Augustine, Ladd). (4)혹자는 적그리스도와 악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Bruce, Swete, Walvoord, Caird, Beckwith). (5)혹자는 장차 나타나게 될 어떤 정복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Mounce, Morris, Barclay). 이 견해들 중 처음의 두 견해는 과거적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문맥상 본문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3-8절, 16,17절).

⭕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이기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콘'(*)은 '니카오'(*, '정복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심판의 현재성을 시사한다. 또한 '이기려고'의 헬라어 '카이 히나 니케세'(*)는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 능동태 가정문으로 궁극적인 승리를 시사한다.

성 경: [계6:3]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둘째 인의 재앙]

⭕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 둘째 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스프라기다 텐 듀테란'(*)은 문자적으로 '그 두번째 그 인봉'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첫번째 인을 단지 '일곱 인 중에 하나'라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시간적 순서를 분명히 나타낸다. 또한 비록 둘째 인을 뗀 자를 언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처음 인을 뗀 어린양이 둘째 인도 떼었음이 분명하다.

성 경: [계6:4]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둘째 인의 재앙]

⭕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 '붉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프포스 퓌르로스'(*)는 '피 혹은 불같이 붉은 색체의 말'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붉은 색은 전쟁 혹은 살륙을 암시한다(12:3; 왕하3:22,23; 슥1:8; 6:2).

⭕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 본문은 말탄 자의 사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붉은 말'이 상징하는 전쟁이나 살륙의 의미와 일치한다. '허락을 받아'는 무서운 모든 전쟁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의도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베인 텐 에이레넨'(*)은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 부정사 구문으로 '화평을 제거하기 위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붉은 말을 탄 자의 사명이 전쟁이나 살륙을 통해서 화평이 사라지게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 '서로 죽이게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히나 알렐루스 스팥수신'(*)은 목적을 나타내는 미래 능동태로 철저하게 끝까지 전쟁을 완수할 것을 묘사한다. 한편 '큰 칼을 받았더라'는 '큰 무기'를 받은 것을 묘사한다. 이것 역시 전쟁이나 살륙을 암시한다. 이 전쟁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종교적인 핍박'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2)혹자는 적그리스도에 대항한 전쟁으로 해석한다(Bede, Grotius). (3)혹자는 전쟁을 통한 복음의 전파로 해석한다(Greijdanus). (4)혹자는 로마의 내란으로 해석한다(Ellocott). 이러한 견해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여하튼 붉은 말의 사명은 전쟁과 살륙을 통해서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계6:5]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셋째 인의 재앙]

⭕ 셋째 인을 떼실 때에...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 '검은색'은 슬픔과 기근을 나타내는 것으로 셋째 인의 재앙은 기근을 상징한다(렘4:27,28, Vincent, Bengel). 한편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는 말은 전쟁 후에 식량을 저울에 달아 배급하는 절박한 기근의 상황을 묘사한다. 이러한 상황은 유혈의 전쟁이 가져다 주는 필연적인 결과이다(겔4:9).

성 경: [계6:6]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셋째 인의 재앙]

⭕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 '나는 듯하는 음성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포넨'(*)은 어떤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접속사로 본서의 독특한 문체 중의 하나이다(19:1,6, Beckwith). 이 음성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어린양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Bousset). (2)혹자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Morris). (3)혹자는 생물들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Alford, Swete). 세 가지 견해 중 처음 두 가지 견해가 타당성을 지닌 듯하다.

⭕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 '한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나리우'(*)는 가격을 나타내는 소유격으로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마20:2). 또한 '되'의 헬라어 '코이니케스'(*)는 건강한 남자의 하루 식량을 나타내는 고대 단위이다. 본문에 나타난 이런한 가격은 당시의 보통 시세의 12배 또는 최고 16배가 되는 가격으로(Cicero, Ver. iii. 81, Beckwith, Rist) 전쟁과 살륙의 재앙이 있은 후 초래된 심각한 기근의 상태를 시사한다(마24:7).

⭕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말라 하더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도미티안(Domitian)황제 때에 내린 포도원 폐쇄 명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h- arles). 그러나 이 명령은 곧 강력한 반대로 인해 취소되었다. (2)혹자는 '감람유'와 '포도주'는 사치품으로 가난한 자는 굶주림의 고난을 당하나 부자들은 여전히 사치를 즐긴다는 의미로 해석한다(Hendriksen). (3)혹자는 '감람유'와 '포도주'를 성찬과 관련지어 해석하여 이를 믿는 자들에 대한 기근의 면제를 약속한 것으로 해석한다(Lilje). (4)혹자는 '감람유'와 '포도주'를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으로 보아(신7:13; 11:14; 호2:8,22) 본문은 기근의 한계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Mounce, Ladd, Johnson, Morris).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따라서 본문은 기근의 피해가 심각하게 증대되고 있긴 하나 본격적인 재앙은 아님을 나타낸다.

성 경: [계6:7,8]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넷째 인의 재앙]

⭕ 넷째 인을 떼실 때에...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 '청황색'의 헬라어 '클로로스'(*)는 누르스름한 녹색으로 창백한 모습을 암시한다. 이는 전쟁과 기근으로 인한 사망의 공포를 나타낸다(Ladd, Morris).

⭕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란 표현은 의인화된 표현으로 근본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나토스'(*)는 70인역에서 '온역'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데베르'(*)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예언하신 것(눅21:10,11)과 에스겔의 예언과도 부합되는 것으로(겔14:21), 흔히 전쟁과 기근에 이어 나타나는 재앙이다(Johnson, Mounce). 한편 '음부'의 헬라어 '하데스'(*)는 부정 접두어 '아'(*)와 '보이다'라는 의미의 '이데인'(*)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전쟁과 기근과 온역과 같은 온갖 재앙의 결과를 의미한다(1:18 주석 참조, Swete).

⭕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 '땅 사분 일'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처음의 세 인에서 사분의 삼은 멸망하고 남은 사분의 일이라고 주장하다(A- lford). (2)혹자는 땅 전체의 사분의 일로 부분적인 멸망이라고 해석한다(Hengstenbe- rg). (3)혹자는 땅 위의 전면적인 환난이 일어나되 그 가운데서 사분의 일이라고 해석한다(Mounce, Ladd, Ellicott). 마지막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것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한정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권세를 얻어'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가 땅의 사분의 일을 통제하는 막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시사해준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 넷째 인으로 인한 환난의 구체적인 방편은 겔14:21을 반영한 것으로 앞서 언급된 세 인에 의해 실행된 환난보다 강한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검'은 '전쟁'을 상징하며, '흉년'은 '기근'을 말한다. '사망'은 죽음의 특수한 형태인 '온역'을 말하며(2:23; 겔14:21), '짐승으로 인한 죽음'은 전쟁 이후에 나타난 황폐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사망을 의미한다.

성 경: [계6:9]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다섯째 인의 재앙]

⭕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에 대한 묘사이다(1:9). 공관복음에서는 복음 증거로 인한 순교가 여로 모양으로 예고되었으나(마24:9,10; 막13:9-13; 눅21:12-18) 본문에서는 이미 성취되고 있다. 그 순교자들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13:15),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18:24)로서 일반적으로 역사상에 있는 순교 사건들 가운데 죽임을 당한 자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종말에 핍박을 당한 자들을 가리킴과 동시에 종말에 핍박을 당해서 죽게 될 순교자들을 암시한다. 한편 '영혼들'은 순교당한 '목숨'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들이 비록 순교를 당했으나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여진 것을 의미한다(Johnson).

⭕ 제단 아래 있어. - '제단'에 대하여는 몇몇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순수한 상징으로 해석한다(Alford). (2)혹자는 하늘에 있는 제단으로 해석한다(Jeremias, Delitzsach). 이 중에서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를 통해 하늘의 제단이 여러번 언급될 뿐 아니라(8:3,5; 9:13; 11:1; 14:18; 16:7) 땅의 제단은 하늘 제단의 모형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출25:9; 민8:4; 히9:23). 한편 '제단 아래 있어'라는 표현은 순교자들의 순교가 하나님께 드린 산 제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적대한 자들의 흉칙한 박해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복음을 위해 종말에 교회가 순교의 각오를 새롭게 갖도록 한다(Ladd, Morris).

성 경: [계6:10]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다섯째 인의 재앙]

⭕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 '거룩하고 참되신'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교자들의 확신과 신뢰를 시사한다(Morris). 한편 '대주재여'의 헬라어 '호 데스포테스'(*)는 원래 종이 주인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절재적 권력과 소유권을 가진 자에 대한 호칭이다(딤전6:2; 딛2:9). 이러한 호칭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과(눅2:29; 헹4:24) 그리스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벧후2:1; 유1:4). 본문에 사용된 이 칭호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하나님을 지칭한다(Johnson, Morris, Robertson).

⭕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세상에 거하는 자들이다(3:10; 11:10; 요8:23, Burrows, Morris, Mounce). 한편 '신원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디케이스'(*)는 구약 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형벌과 보복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개인적인 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복의 권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롬12:19). 본문에 나타난 신원 역시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를 핍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보응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중심 사상 가운데 하나이다(눅23:34; 롬12:19).

성 경: [계6:11]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다섯째 인의 재앙]

⭕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 '흰 두루마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톨레 류케'(*)는 '비품을 마련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스텔로'(*)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옷들을 차려 입는 것'을 의미한다(3:4; 4:4; 7:9,13; 19:14; 막12:38).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에게 흰 두르마기를 주시는 것은 영생과 승리를 보장하심을 시사한다(Mounce, Johnson, Walvoord).

⭕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 '잠시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 크로논 미크론'(*)은 시간의 연속을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동일한 사건의 연장 속에서의 휴식을 의미한다. 이는 복수를 신원하는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으로부터의 휴식을 나타낸다(14:13). 한편 '쉬되'에 대하여 혹자들은 '잠시 동안'과 연결지어 '탄원하기를 쉬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며(Bengel, Bousset), 혹자는 천상계의 축복 가운데 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Morris, Swtet, Plummer).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천상에서의 '잠시 동안'이란 시간의 개념이 인간들에게는 영원과 같은 긴 시간이 될 수 있으며(20:3), 의로운 자들의 쉼은 자연히 천상에서의 축복이기 때문이다(14:13, Johnson). 한편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이들 모두가 동일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순교한 자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unce, Alford). (2)혹자는 순교치 않은 일반 성도들과 순교한 신자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차기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어떤 사본에는 '플레로도신'(*, '완성되었다')으로 되어 있어 미래부정을 의미하는 부정 과거 가정법으로 해석된다(*, P). 이는 '가득차게 될 것'이란 의미로 '가득 채워질 때까지', 혹은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기까지'를 의미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본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교자들의 수가 채워져야 종말이 온다는 숫적 개념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교회가 더 많은 순교를 각오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시사한다(7:14; 롬11:25, Ladd. Johnson).

성 경: [계6:12]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자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자연의 질서가 대혼란에 빠지며 마지막 날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 '큰 지진'에 대한 경고는 종말의 현상 중 하나로 이미 예시되었고(8:5; 11:13,19; 16:18; 겔38:19; 욜2:10; 암8:8; 학2:6; 마24:7,8; 막13:8, Charles) 하나님의 형벌로도 나타난다(사2:19). 한편 여섯째 인을 뗀 이후의 자연의 혼란에 대한 해석의 방법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이들을 마24장과 관련하여 사실적으로 해석한다(Barclay, Wa- lvoord). (2)혹자는 이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Clarke,Ironside,Mounce,Marshall). 이 두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 '총담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샅코스 트리키노스'(*)에서 '샅코스'(*)는 '사코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물건을 담는 자루' 혹은 '머리에 쓰는 질 나쁜 옷감'을 의미한다. 이는 검정색 염소 털로 만든 옷으로 슬픔을 표시하는데 사용되곤 하였다(사50:3, Mounce). 해가 자신의 빛을 상실하고 슬픔을 상징하는 총담같이 검게 되었다는 것과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은 종말의 현상을 묵시적으로 나타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을 우주적 대이변의 심판을 시사한다(사13:10; 렘4:23; 겔32:7,8; 욜2:31; 3:15; 람8:9; 미3:6; 마24:29).

성 경: [계6:13]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 본문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겨울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무화과로 비유된다. '선 과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스 올륀두스 아우테스'(*)는 잎이 나오기 전에 겨울에 맺히는 푸른 무화과로 약한 바람에도 모두 떨어지는 설익은 무화과를 가리킨다. 선 과실과 같이 별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구약 성경에서도 비슷한 예가 제시되고 있다(사34:4; 나3:12, I Enoch 2:1; 41:5; IV Ezra 4:15).

성 경: [계6:14]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 '떠나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코리스데'(*)는 '분리하다'는 의미를 지닌 '아포코리조'(*)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말지 않은 두루마리 종이를 반으로 자르면 한쪽으로 말리는 현상을 나타낸다(사34:4). 이는 종말에 있을 하늘의 대변동에 대한 비유로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엄중성을 나타낸다.

⭕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 본무은 전혀 움직임이 없던 산과 섬들도 지각의 변동으로 요동하는 현상을 묘사한다(렘4:24; 나1:5). 이러한 종말의 양상은 상징적이든 축자적이든 큰 재앙과 고통을 나타낸다(Mounce, Johnson).

성 경: [계6:15]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본절은 종말의 대변동을 맞아 각 계층의 사람들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일곱 계급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은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 됨을 시사한다(Mounce, Johnson).

⭕ 땅의 임금들과. - '땅의'라는 언급은 인간들이 처한 모습이 불신앙 상태였음을 묘사해 준다(Jub. 23:19; II Baruch 70:3,4,6; I Enich 62:3). 한편 '임금들'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을 가리킨다.

⭕ 왕족들과 장군들과. - '왕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메기스타네스'(*)는 최상급을 나타내는 헬라어 '메기스토스'(*, '가장 큰')에서 파생된 단어로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18:23; 막6:21, Swete, Mounce). 한편 '장군들'의 헬라어 '호이 킬리아르코이'(*)는 보병 약 600명을 지휘하는 '군단의 지휘관'으로(막6:21; 19:18) 군대의 권력을 가진 자들을 지칭한다.

⭕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 본문은 앞서 언급된 권력을 지닌 지배층과는 달리 자기 만족적이며, 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력한 계층을 가리킨다(13:16; 19:18).

⭕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 '각 종과 자주자'는 사회적으로 자신의 인권이나 자유가 없는 계층과 대개 상업에 종사하는 일반 서민을 가리킨다. 설사 이들이 지배 계급이나 경제적 부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의 종이라면 천지가 대변동하는 종말에는 동일하게 공포와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한편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는 종말에 나타날 고통과 심판을 피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심판의 괴로움을 암시한다(사2:10,19,21; 호10:8; 눅23:30; 히11:38).

성 경: [계6:16]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우리를 가리우라. - '이르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구신'(*)은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극적이며 생동감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종말에 심판을 당하는 자들이 산과 바위에게 비참한 재앙을 가리워 달라고 하는 요구는 종말의 재앙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시사해 준다(호10:8, Joh- nson, Mounce). 혹자는 본절이 수신자들을 경책하기 위한 요한의 삽입구라고 주장하나(Caird)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사실적이며(롬1:18), 동시에 종말적인 사건임을 볼 때 인정할 수 없다. 한편 '우리 위에 떨어져'로 번역된 헬라어 '페세테 에프 헤마스'(*)는 부정과거 명령문으로 '지금 당장 떨어져라'는 긴급함을 나타낸다. 이는 10절의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신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무생물들에게 호소하는 비참함을 보여준다.

⭕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는 심판의 날에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창3:8, Swete). 한편 '어린양의 진노'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본서에서 유일하게 언급된다. 어린양이 상징하는 온유와 진노가 역설적으로 결합되었다 하여 혹자는 '하나님의 진노'(11:18; 14:10,19; 15:7; 16:1,19; 19:15)를 대신해서 후대에 삽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Weiss, Spitta).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시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 어린양은 희생과 온유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더 깊고 영구적(永久的)인 분노를 나타내는 '오르게스'(*)와 연결시킨 것은 철저한 악의 종말을 극명하게 나타낸다(5:5; 마25:41).

성 경: [계6:17]

주제1: [일곱 인의 재앙]

주제2: [여섯째 인의 재앙]

⭕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 '그들의 진노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오르게스 아우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동격으로 언급된다(22:3,13; 살전3:11; 살후2:16). 이런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악에 대한 보응이다(Mounce). 한편 '큰 날이'의 헬라어 '헤 헤메라 헤 메갈레'(*)는 문자적으로 '그 큰 그날'이란 의미로 '큰'이 강조된 표현이다. 이는 악의 무리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공포로 인해서 외쳐진 용어로(Beckwith)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임을 시사함과 동시에(욜2:11; 습1:14; 유1;6) 하나님의 진노의 범위가 전 우주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 누가 능히 서리요. - 본문은 심판으로 인한 멸망이 너무 엄청나므로 그 어떤 죄인도 피할 길 없이 무력함을 나타낸다(나1:6; 말3:2).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티스 뒤나타이 스타데나이'(*)는 부정과거 수동태 부정사 구문으로 수사의문문이다. 이는 본문을 말한 주체가 15절에 언급된 모든 계층을 대표한 인간들임을 나타낸다(Swete). 이것은 그들이 피할 길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7:1]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선별된 십 사만 사천]

⭕ 이 일 후에. - 이는 환상의 새로운 국면의 시작으로 본장이 여섯째 인의 재앙과 일 곱번째 인을 떼는(8:1) 그 사이에 일어나는 것임을 나타낸다.

⭕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 '네 천사'는 바람을 맏은 천사로서 이들은 자연계를 다스리는 천사들이다(Mounce), 한편 '땅 네 모퉁이'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한 사 11:12의 '땅 사방에서'와 동일한 의미의 표현으로 온 세상을 가리킨다.

⭕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 '바람'은 파괴나 전쟁의 재앙을 상징한다(렘 49:36-38;51:1). 그러기에 '땅의 사방의 바람'은 종말에 온 세상에 임할 커다란 재앙을 암시한다(왕상 19:11; 욥 1:19;21:18; 시 1:4;14:18; 단 2:35;7:2). 한편 '붙잡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툰타스'(*)는 '단단히 붙잡다'는 의미를 가진 '크라테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해서 재앙을 행사치 못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Charles).

⭕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불지 못하게 하더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프네에 아네모스'(*)는 현재 능동태 가정법으로 '바람이 계속해서 불지 못하도록'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인치기까지 재난을 중지시킨 사실을 암시한다(2, 3절).

성 경: [계7:2]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선별된 십 사만 사천]

⭕ 또 보매 다른 천사가. - '다른 천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하나(Walvoord, Ladd) 앞서 언급된 '네 천사'외에 또 다른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Johnson, Mounce, Morris, 8:3 주석 참조). 본절에서 다른 천사의 역할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인을 쳐 보호 받도록 하는 것이다(3절).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묵시 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이교의 죽음은 우상에 반하여 창조자의 살아 계심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4:9, 10;15:7; 마 16:16;26:63; 히 3:12). 요한은 이 표현을 사용하여 비록 다른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친다 할지라도 그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한편 '인'의 헬라어 '스프라기다'(*)는 자신의 문서나 노예, 혹은 소유물 등에 소유권이나(엡 1:3), 보증(고전 1:22)을 나타내는 표시를 뜻한다. 이는 짐승의 표와 대조를 이루어(13:16)인을 맞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소유사 되며(14:1)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호나 안전을 보장받는 자임을 시사한다.

⭕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 '해 돋는 데로부터'의 헬라어 '아포아나톨레스 헬리우' (*)는 문자적으로 '동쪽으로부터'를 의미한다.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에 대한 해석은 다석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에서 올라온다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겔 43:4, Swete). (2) 혹자는 메시야가 동방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ibylline 3:652, Erbes, Lohmeyer). (3) 혹자는 '동쪽'이 묵시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자세한 묘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Mounce). (4) 혹자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동쪽에서 별을 보며 박사들이 온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마 2:1, Barclay, Morris). (5) 혹자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고 가리킨다(De Wette, Hengstenberg).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성 경: [계7:3]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선별된 십 사만 사천]

⭕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 '우리 하나님의 종들'에 대하여는 몇몇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하나님의 종'들(1:1;2:20;19:2, 5;22:3, 6)과 '우리 하나님'(10, 12절;12:10;19:1, 5)을 합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ngel). (2) 혹자는 하나님께 봉사함에 있어서 천사들과 비할 수 있는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Robertson). 두 가지 견해 중 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인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마에 '인침'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공개적으로 임할 마귀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의 종들이 보호받는 것으로 해석한다(Charles, Clark). (2) 혹자는 이기는 자가 받게 될 흰 돌(2:17) 혹은 성전의 기둥으로 해석한다(Rist). (3) 혹자는 성령 혹은 초대교회 이후의 세례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인'은 소유나 보호를 나타내는 것으로 (9:4;14:1;겔 9:1-7;딤후 2:19) 짐승의 미혹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대상에서 벗어나 승리와 보호를 약속받는 것을 시사한다(13:7;16:2;20:4, Johnson).

⭕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해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아디케세테'(*)는 강한 부정 명령의 능동태 가정법으로 '해하기 시작하지 말아라'는 의미이다. 이는 인침을 받은 자는 짐승의 미혹에 기만당하지 않고 종말의 재앙에서 보호 받아 승리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성 경: [계7:4]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선별된 십 사만 사천]

⭕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 '인맞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에스프라기스메논'(*)은 완료 수동태 분사로 더이상 변함이 없는 완료된 수를 요한이 들었음을 나타낸다.

⭕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해석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로 취급하여 유대인 성도들로 해석한다(Bengel, Clarke, Walvoord). (2)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가 아닌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De Wette, Ladd, Johnson, Moffatt, Charles, Plummer, Vincent, Kiddle, Ris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예수를 따를는 자를 참이스라엘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4:4;15:1ff. ;21:9-12). 더욱이 5-8절까지 언급된 12지파명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12지파명과 다르다.

⭕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 '십 사만 사천'이 누구를 나타내는가에 대한 견해는 세가지이다. (1) 혹자는 순교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Kiddle, Caird). (2) 혹자는 '이스라엘'자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십 사만 사천'도 문자적으로 인치심을 받고 보호함을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한다(갈 6:16, Walvoord, Richardson). (3)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십 사만 사천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로 해석한다(롬 2:28, 29;9:6, 7, Alford, Swete, Beckwith, Vincent).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144,000에 대한 상징적 숫자 해석은 (3 4)2 103 = 144,000이다. 3은 하나님의 수이며 4는 땅의 수로서 곱한 수가 완전수인 12이며, 이 12의 제곱과 충만수 10의 세제곱이 곱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충만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Lohmeyer, Ladd, Johnson).

성 경: [계7:5,6,7,8]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선별된 십 사만 사천]

⭕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일만 이천이라. - 요한은 인맞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열거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이름과 순서와 내용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Ladd, Lohmeyer, Hendriksen). 왜냐하면 12지파의 순서가 창세기나 에스겔서와 다를 뿐만 아니라 기록된 방식이 독특하여 영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12지파와 본문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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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겔 48 : 1 - 8, |

| 7 : 5 - 8 | 창 49 : 1 - 27 | 23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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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다 | 르 우 벤 | 단 |

+------------+-----------------+----------

| 르우벤 | 시 므 온 | 아 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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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 레 위 | 납 달 리 |

+------------+-----------------+----------

| 아 셀 | 유 다 | 므 낫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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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달리 | 스 불 론 | 에 브 라 임 |

+------------+-----------------+----------

| 므낫세 | 잇 사 갈 | 르 우 벤 |

+------------+-----------------+----------

| 시므온 | 단 | 유 다 |

+------------+-----------------+----------

| 레 위 | 갓 | 베 냐 민 |

+------------+-----------------+----------

| 이사갈 | 아 셀 | 시 므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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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불론 | 납 달 리 | 잇 사 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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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셉 | 요 셉 | 스 불 론 |

+------------+-----------------+----------

| 베냐민 | 베 냐 민 | 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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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차이점에서 비롯된 본문의 특징은 다섯 가지이다. (1)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먼저 등장하는 것과는 달리(창 35:22-26;신 33:5-25) 본문에서는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는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신 것을 반영하고 있다(창 49:10;대상 5:2;히 7:13, 14, Johnson, Mounce, Morris). (2)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단'(*)이 부주의로 '만'(*, man, '사람')으로 기록되었거나(Spitta, Bleek) 혹은 우상 숭배로 인해서 고의적으로 제외되었거나(창 49:17;삿 18:18, 19, 30;왕상 12:29, 30, Clarke), 아니면 렘 8:16을 확대 해석하여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는 랍비들의 해석과 연관되어 제외되었다고 한다(Weiss, Charles, Alford, Walvoord). (3)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생략되고 대신 요셉이 삽입되어 있다. 이는 에브라임도 단 지파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로 인히서 생략되었고(호 4:17) 단 지파의 생략으로 12숫자를 맞추기 위해 요셉이 삽입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Johnson, Mounce). (4) 레위 지파의 삽입이다. 요셉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나뉘어 12지파에 들어가고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빠져 제사장 지파로서 신분이 격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에 본문에서는 레위 지파가 삽입되어 혈통적 제사장 지파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5) 모든 지파에 '중에 일만 이천'이 반복된다. 이는 12의 1,000배로 완전하고 큰 숫자임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중에'(*, 에크)를 반복하여 인맞은 자들이 선택된 무리임을 암시해준다(Johnson).

성 경: [계7:9]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앞서 언급된 십사만 사천과 본절 하반절에서 언급되는 '셀 수 없는 무리'를 연결하는 표현이다(5:9 주석 참조). 이렇게 요한이 중복적 으로 표현한 것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영적인 의미의 수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구원의 문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Morris).

⭕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 본문이 누구를 의미하는가에 대하여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큰 무리'가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수로 상징된 자들과 동일인이라고 해석한다(Beckwith, Morris, Eller). (2) 혹자는 십 사만 사천과 구별하여 십 사만 사천은 유대인을 가리키고 본문은 큰 환난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Lamp). (3) 혹자는 본문이 큰 환난 때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순교자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iddle, Moffatt). 세 가지 견해중 첫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 '흰 옷'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옷으로(3:4 주석 참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구속받았음을 나타낸다. '종려 가지'는 일반적으로 승리나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된다(요 12:13, Trench, Vicent, Alford).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 하심에 대해 기쁨으로 찬양할 것이다.

성 경: [계7:10]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 본문은 허다한 무리들의 찬양이가(9절). '구원하심'의 헬라어 '소테리아'(*)는 허다한 무리 자신들의 업적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어린양의 구속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킨다(Caird, Weymouth). 허다한 무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을 성부와 어린양에게 돌린다(5:13;19:1).

성 경: [계7:11]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 '주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클로'(*)는 문자적으로 '원형으로'라는 뜻으로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들을 옹위하는 모습을 묘사한다(5:11 주석 참조).

⭕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엎드려 얼굴을 대고'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산...에피 타 프로소파 아우톤'(*)은 경건한 예배의 행위를 나타낸다(4:10;5:14;11:16;19:4, 10;22:8, Charles).

성 경: [계7:12]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 본문은 모든 천사가 구속된 자들의 찬양에 대해(10절) '아멘'으로 화답하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으로 5:12절의 찬양과 대조를 이룬다. 5:12절의 찬양과 대조해보면 본문의 찬양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5:12, 13의 찬미는 어린양에게 바쳐졌으나 본절은 하나님께 드려진다. (2) 찬양 내용 중에서 5:12의 '부'가 본절에서는 '감사'로 대치되어 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속하신 것에 대한 것이다. (3) 본문에 '세세토록'이란 말이 삽입되어 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임을 강조한다. (4) 본문에는 두 번의 '아멘'이 사용된다. 처음의 '아멘'은 큰 무리의 찬송에 대한 응답이며 마지막의 '아멘'은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영광스런 예배의 모습을 암시한다(5:12-14, Morris, Mounce, Lohmeyer).

성 경: [계7:13]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 '장로 중에 하나'는 본서 가운데 나타나는 교회를 대표하는 장로들이 아니라 어떤 천상적인 존재인 듯하다(4:4 주석 참조, Johnson). 한편 '응답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크리데'(*)는 '아포크리노마이'(*,'대답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사실을 나타낸다. 이는 예언서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답 형식으로(렘 1:11;겔 37:3;슥 4:2, 4, 5) 질문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답하는 히브리어 중복성(Hebrew redundancy)을 나타낸다(Swete).

성 경: [계7:14]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내가 가로되.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카'(*)는 완료 능동태로 생생한 증언을 나타낸다(Swete).

⭕ 내 주여. - 이는 천상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Vincent).

⭕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 '당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수'(*)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바로 당신'이란 의미이다. 이 말에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진지한 고백뿐 아니라 존경과 두려움의 감정이 내포되어 있다(Plummer, Swete).

⭕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 '큰 환난'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몇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모든 시대의 성도가 겪는 보편적인 환난으로 해석한다(Morris, Alford, Greijdanus, Niles). (2) 혹자는 종말에 겪을 환난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3:10;단 12:1;막 13:19, Charles, Walvoord, Mounce).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큰 환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들리프세오스 테스 메갈레스'(*)에는 정관사 '테스'(*)가 사용되어 그것이 특정한 사건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어린양의 피에.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하이마티투 아르니우'(*)는 수단을 나타내는 여격 구문으로 그들의 사죄 받음이 인간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피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사 1:18;히 9:14;요일 1:7, Swete, Milligan). 한편 '씻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뤼난'(*)과 '희게 하였느니라'의 헬라어 '엘류카난'(*)은 모두 부정 과거 시제로 단회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 사역이 단회적이면서도 그 효력은 영원함을 나타낸다. 허다한 무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성 경: [계7:15]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문자적으로 '이것 때문에'라는 의미로, 본문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한 결과임을 나타낸다.

⭕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 본문은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자가 누리게 될 특권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은 오직 어린양의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다(히 10:19).

⭕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 본문은 21:22에 '성전이 없다'는 말씀과 상치되는 듯하다. 그러나 본절에서 17절까지는 21, 22장에 나오는 구속받은 자들과 연관된 것이기에(21:3, 4,6)본문의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Johnson). 한편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우신'(*)은 '봉사한다'는 의미를 가진 '라트류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은 물론 '제사장들의 특별한 제사적인 예배'를 의미한다(마 4:10;히 8:5). 이것은 본문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이 제사장의 중보나 제물의 필요없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배하며 섬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벧전 2:9). 그렇나 섬김과 예배는 '밤낮'없이 행해진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21:25;22:5). '밤낮'은 쉼이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나타낸다(20:10, Mounce).

⭕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지속적으로 그를 경배하고 섬기게 된다.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 '장막을 치시리니' 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노세이'(*)는 미래시상으로 이래에 함께 거하실 것을 나타낸다. 이는 광야에서 여러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출 13:21;대하 7:1-3). 즉 본문은 하나님께 구속 받은 자들과 함께 거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성취를 나타낸다(겔 37:27;슥 2:10, Morris, Johnson, Mounce).

성 경: [계7:16]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 본문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귀환할 때의 이사야의 진술을 반영한 것으로(사 49:10)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한 축복을 나타낸다. '주림과 목마름'은 단순히 육체적 빈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갈급의 상태를 나타낸다. 구속 받은 자들은 그러한 주림과 목마름이 더이상 없는 완전히 충족된 상태를 누리게 될것이다(마 5;6;요 6:35).

⭕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 '아무 뜨거운 기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카우마'(*)는 '불에 타다'라는 의미를 가진 '카이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고통스러운 열기를 말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고통이나(Morris) 혹은 넷째 대접의 재앙을 가리킨다(16:9, Mounce). 한편 '상하지 아니할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메 페세'(*)는 '떨어지다'의 의미를 지닌 '피프토'(*)의 부정관사 시상으로 강한 이중 부정이다. 이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지상에서와 같은 고통스러움이 결단코 없을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성도들이 전형적인 육체의 모든 고통에서 장차 해방될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Moffatt, Ford).

성 경: [계7:17]

주제1: [환난에서 구원받은 자]

주제2: [흰 옷 입은 무리]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 '보좌 가운데 계신'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보좌와 이심 사 장로들과의 중간 위치를 가리키나 위치적인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임'을 상징한다. 한편 '저희의 목자가 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마네이 아우투스'(*)는 '보살피다'는 의미의 '포이마이노'(*)에서 파생된 미래 능동태로 문자적으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적 사역을 실제로 행하실 것을 약속해 준다(요 21:16;행 20:28;벧전 5:2, Swete, Ford).

⭕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 '생명수 샘으로'의 헬라어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은 어순상 '생명의'(*, 조에스)를 강조한다. 이는 다함이 없는 생명의 근원을 시사한다(21:6;22:1, 7;요 4:12, 14:7:38).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을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 본문은 사 25:8을 반영한다.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의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레이프 세이'(*)는 문자적으로 '...으로부터 제거해 버리다'라는 의미의 미래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구속 받은 자들을 고통과 아픔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시사한다(21:4). 이것은 장차 구속받은 자들이 누릴 영원하며 절대적인 희락과 평강의 축복을 나타낸다.

성 경: [계8:1]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일곱째 인의 재앙]

⭕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 재앙을 동반한 여섯 가지 인(印)과는 달리(6장) 본문에 나타난 일곱째 인은 직접적인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을 동반하는 일곱 나팔을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은 같은 사건이 반복되어 묘사된 것이라 주장한다(Hendriksen, Davis, Ladd, Mounce,Plummer). 그리고 그 근거로 두 재앙이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환난을 견디고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의 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6:12ff. ;11:15). (2) 혹자는 두 재앙이 단지 시간적으로 연속적인 사건일 뿐 별개의 것이라 주장한다(Beckwith, Tenney, Blanchard).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일곱 나팔의 재앙들은 일곱 인의 재앙보다 심판의 정도가 더 격렬하고 광범위하며 두 재앙 사이에 순서와 내용상 차이점이 많으며 또한 여섯째 인의 재앙까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데 반해 일곱 나팡의 재앙은 인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7:1-8;9:4).

⭕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라. - '반시 동안즘'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헤미오론'(*)은 '반'을 나타내는 헬라어 '헤미'(*)와 '시간'을 나타내는 '호라'(*)의 합성어로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사용된다. '반시동안'이라 함은 비교적 짧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를 통해서 재앙의 긴박감과 극적인 면을 강조하고자 한 듯하다(Mounce). 한편 '고요하더니'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 혹자는 평안과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Victorinus). (2) 혹자는 안식일의 휴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de, Scroggie). (3) 혹자는 이스라엘 즉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찬양을 듣기 위한 침묵이라고 주장한다(Charles, Rist). (4) 혹자는 핍박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절규를 듣기 위한 침묵이라고 주장한다(6:10, Beckwith, Barclay). (5) 혹자는 보다 격렬하고 광범위한 재앙을 가져다 주는 일곱 나팔의 진노가 임하기 이전의 긴장감과 경외심을 나타내기 위한 침묵이라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Mounce, Greijdanus). 다섯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7:3절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인을 받기까지 심판이 연기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백성의 신원(神寃)의 기도를 들으시고 권능의 심판을 행하실 것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고 있다(합 2:20;습 1:7;슥 2;13, Morris, Mounce, Ladd).

성 경: [계8:2]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일곱째 인의 재앙]

⭕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 '시위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스테카신'(*)은 '히스테미'(*,'서다')의 완료 능동태로서 '서있는'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봉사할 채비를 갖추어 하명(下命)을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왕상 17:1;18:15;왕하 3:14;5:16). 한편 '일곱 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스 혀타 앙겔루스'(*)는 정관사 '투스'가 사용되어 일곱 나팔을 받는 본절의 천사들이 특정한 집단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위경에 보면 일곱 천사장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다(Tobit 12:15; I Enock 20:2-8). 그 이름은 우리엘(Uriel), 라피엘(Raphael), 라구엘(Raguel), 미카엘(Michael), 사라카엘(Saraqael), 가브리엘(Gabriel), 레미엘(Remiel)이다. 그러나 일곱 천사장이 본문에 나타난 일곱 천사와 동일하다고 볼 이유는 없다. 위경에 따르면 이 '일곱 천사장'들은 '성도들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하나 본문에 나타난 천사들은 일곱 재앙을 담은 대접과 연관된 천사들로서 종말을 예고하기 위해 부름받은 천사들이다(Morris, Mounce).

⭕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 '나팔'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만들도록 지시하신 것으로 백성을 소집하고, 모든 지파를 진행하게 하며, 전쟁을 알리고 절기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민 10:3-10). 또한 이스라엘 군대를 인도할 때와 왕들의 대관식에도 사용 되었다(레 23:24;민 29:1;수 6장;왕상 1:34, 39;왕하 9:13). 신약성경에서 '나팔'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마 24:31;고전 15:52;살전 4:16) 특히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7-12절;9:1-21). 이런 것으로 보아 일곱 나팔은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이고도 주권적인 임재를 나타낸다(창 19:16;, 19;사 27:13;욜 2:1;습 1:16;마 24:31;살전 4:16).

성 경: [계8:3]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금향로]

⭕ 또 다른 천사가 와서. - '다른 천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alvoord, Hendriksen, Bede, Ellicott, Ladd). (2) 혹자는 '천사'라고 주장한다(Mounce). 두 가지 견해중 전자가 타당하다. 후자의 견해에 따르는 자는 다니엘에게 기도의 응답을 전해주는 가브리엘 천사의 경우를 예로 들어 천사가 중재 사역을 행한다고 주장하나(단 9:20;10:10;히 1:14) 본절에서는 중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외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천사의 중재 사역은 나타나지 않으며 7:2에서 인치는 '다른 천사'역시 그리스도로 이해되는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 하다.

⭕ 제단 곁에 서서. - 본문의 '제단'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시아테리우'(*)는 '향단'을 가리킨다(6:9;14:18;레 16:12). 본절에 나타난 천사의 행동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 제단에서 숯불을 취하는 동작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본문의 향단은 '성소 안의 향단'을 의미하는 듯하다(출 30:1-10;녹 1:9;히 9:4, Mounce).

⭕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 '금향로' 의 헬라어 '리바노톤 크리순'(*)에서 '리바노톤'은 두 가지 의미 즉, '향로'와 '유향'이라는 의미를 지니나 '금'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향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성막의 향로는 금으로 되어 있다(왕상 7:50). 한편 '향'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단순히 '향'을 의미한다고 본다(Kraft). (2) 혹자는 '향'이 성도들의 기도로된 것이기 때문에 '기도'라고 주장한다(Bruce, Swete). 이 두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5:8에서 '향을 담은 대접들'을 '성도들의 기도'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계8:4]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금향로]

⭕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 '천사의 손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천사는 위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중재적 기능을 의미하기보다는(Tobit 12:15; I Enoch 9:3)성도를 위해 봉사하는 기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Morris, Mounce). 한편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는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가 공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열납하시는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여기서의 기도는 아마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단의 세력들을 응징해 줄 것에 대한 기도인 듯하다(6:10, Ladd).

성 경: [계8:5]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금향로]

⭕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 본절은 세마포를 입은 사람이 그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그의 손에 움켜쥐고 그 성에 쏟아 붓는 에스겔의 환상과 유사하다(겔 10:2-7). 향로에 담긴 이 '불'은 성도들의 기도가 드려진 그 제단에서 담아온 것이므로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순교자들의 신원(6:10)의 기도에 대한 부분적인 응답으로 (Mounce, Ladd, Morris) 일곱째 나팔을 불때(11:15)와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16:17)같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심을 시사한다. 그러한 응답은 경외심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 즉 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곧 심판하실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8:6]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 일곱 나팔 재앙들은 재앙의 내용상 두 가지로 나뉜다. 처음의 네 재앙들은 자연계에 대한 심판이고 나머지 세 재앙은 인간에게 직접 향하는 심판이다. 그리고 재앙의 목적면에서 본다면 처음의 재앙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연들을 파괴하는 것이고(9:20) 나머지는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심판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할지라도 그 심판이 최후의 심판이 아니며 징계를 통해 단지 경고하실 뿐이다(Morris). '예비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토이마산'(*)은 '헤토이마조'(*, '준비하다')의 부정과거 능동태로 천사들이 그 신호를 알고 있어서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모순은 일곱 나팔 소리들이 회개치 않는 인간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겔 33:3, Ladd, Kraft, Morris).

성 경: [계8:7]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 '쏟아지매'의 헬라어 '에블레데'(*)는 부정 과거 수동태 단수로서 '우박과 불 그 자체가 땅에 쏟아졌다'를 의미한다(Swete). 이에 대하여는 첫째 나팔의 재앙의 대상과 관련하여 세 가지 견해로 나뉜다. (1) 혹자는 본절의 쏟아짐은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악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떨어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ordsworth). (2) 혹자는 역사성을 부인하고 영적인 재앙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3) 혹자는 이것이 애굽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 중 일곱번째 재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 대한 재난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Ladd, Mounce, Hendriksen, Kraft).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재앙의 내용상 구약의 심판을 위한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상황들과 유사하며, 목적상 불신자들에 대한 최후 심판의 전조로서 자연계를 파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겔 5:2;마 24:29, 30). 본문의 첫째 나팔 재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할 때에 애굽인 들에게 내린 10가지 재앙 중 일곱번째와 유사하나(출 9:13-26) 애굽인들에게 내린 일곱번째 재앙에 없던 '피섞인'이란 표현이 첨가되어 있다. '피섞인'에 대해 혹자는 지중해에서 볼수 없는 사하라 사막의 붉은 색을 띤 모래에 의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주장하나(Swete) 그것은 차라리 나팔 재앙이 훨씬 더 극한 심판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시 46:2;사 34:3;54:10;겔 38:22;욜 2:30;미 1:4, Morris, Hendriksen). 한편 '삼분의 일'이란 7-12절에서 12번 나온다. 이는 어떤 특정한 수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닌 일부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 일부분은 비록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의 형벌이긴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아니며 오직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케 하려는 의도를 암시한다(시 2:9;겔 5:2, Mounce).

성 경: [계8:8]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 본절의 둘째 나팔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애굽인들에게 내린 첫째 재앙과 유사한 것으로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출 7:14-25). '불붙는 큰 산'의 출처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실제로 일어난 지역의 화산을 의미한다고 주장 한다(Lilje).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실제로 본서가 기록되기 약20년 전에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Pompeii)와 헤르큘라니움(Herculaneum)을 파괴한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2) 혹자는 위경에서 언급된 '불타는 큰 화산과 같은 일곱 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I Enoch 18:13;Sibylline Oracles 5:158, Rist). (3) 혹자는 렘 51:25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Bengel, Grotius). 앞에 언급된 두 가지 견해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으나 다음 절에 언급된 전쟁과 연관된 것으로 보아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다는 것'은 전쟁과 재앙의 참혹성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사건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행될 재앙의 전조에 불과하다(Mounce).

성 경: [계8:9]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 - '바다 가운데 피조물'은 물고기를 의미하며 (습 1:3),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군함이나 상선이 침몰하는 것을 가리키거나(Mounce) 심한 풍랑으로 인해 배가 파선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Johnson). 이러한 재앙은 종말론적 심판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진노가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시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단적인 세력에 대해 내리는 심판이다(겔 33:3).

성 경: [계8:10]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세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 고대에서 빛을 발하며 떨어지는 별이나 운석은 멸망의 전조로 생각되었으며(Mounce) 또한 성경에서도 종종 인간들에게 임할 고난이나 심판에 대한 예언이 '떨어지는 별'로 상징되고 있다(겔 32:7;욜 2:10;마 24:29). 이와 같이 본문에서 물을 오염시키는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애굽에 내려진 첫째 재앙처럼(출 7:20)하나님께서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재난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 강에 대해 재앙을 주는 사건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일이다. 그래서 혹자는 요한 당시에 강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본문이 강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Morris).

성 경: [계8:11]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 강과 물샘에 떨어진 별의 이름인 '쑥'은 근동 지방에서 자라는 '아르테메시아 압신디움'(Artemesia absinthium)이라는 아주 쓴 물풀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서 슬픔과 고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잠 5:3, 4;애 3:19;암 5:7) 우상 숭배에 대한 징계로 이해되었다(신 29:17, 18;렘 9:14-16;23:15).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는 본문의 '그 물들이 쓰게 됨'과 동일한 의미로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 재앙은 앞서 언급한 두 재앙과는 달리 인명 재난이 기록되어 있어 하나님의 진노가 점점 강렬해짐을 나타내며 자연계에 대한 심판을 통해서 인간이 회개하지 않은 경우 하나님께서 더 심각한 재난을 통해서 회개하도록 유도하심을 암시한다(9:20;출 9:14, Morris, Ladd, Mounce, Lenski).

성 경: [계8:12]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 '침을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게'(*)는 재앙을 당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 재앙은 삼 일 동안 애굽 전역에 걸쳐 내려진 '흑암의 재앙'과 연관되며 여섯째 인의 재앙과도 유사하다(6:12;출 10:21-23;욜 2:31;암 8:9). 성경에서 '어두움'은 주의 날의 심판을 행하시기 위해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현과 연관된다(사 13:10;겔 32:7, 8;욜 2:10;3:15;암 5:8;마 27:45;막13:24).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빛 즉, 해, 달, 별에 대한 재앙으로 초래된 어두움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사단의 세력들에게 가하실 가혹한 심판을 시사한다(Mounce, Ladd, Hughes).

성 경: [계8:13]

주제1: [일곱째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

주제2: [네 나팔 재앙]

⭕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 본절은 일곱 나팔의 재앙 중에서 앞의 네 가지 나팔 재앙과 뒤의 세 가지 나팔 재앙 사이에 행해지는 계시이다. '독수리'는 성경에서 재앙에 대한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렘 48:40;겔 17:3;호 8:1;마 24:28)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수행하는 사자 역할(12:14)이나 하나님의 보좌 주의에 둘러선 네 생물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기도 한다(4:7). 본문의 독수리 역시 하나님께서 이후에 행하실 강력하고 참혹한 심판에 대해 선포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누구나 볼 수 있는 공중에 독수리가 출현한 것은 남은 세 가지 나팔 재앙으로 인해 일어날 재앙의 신속성과 확실성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화'가 세 번 반복된 것은 앞으로 있을 세 가지 나팔 재앙과 병행되는 표현이다. 남은 세 가지 나팔 재앙 중 처음 두 가지 재앙은 9장에서 나타나는 반면에 세번째 나팔 재앙은 구체적인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11:14, 15). 단지 세번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후 하늘에서 찬양의 소리만 나타날 뿐이다(11:15-19). 그래서 혹자는 12:12에 나타나는 사단의 패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orris, Mounce). 이러한 남은 세 가지 나팔 재앙이 임할 대상은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단의 세력에 동조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무리들이다(3:10;6:10; 11:10; 13:8;17:2, :add).

성 경: [계9:1]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 '별하나'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 혹자는 네로 황제 아니면 역사상 나타난 왕이나 군주와 같은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ymouth, Hengstenberg). (2) 혹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Torrance). (3) 혹자는 배교한 거짓 교사나 선지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ordsworth). (4) 혹자는 단순히 천사라고 보아 '별이 떨어지다'르 '천사가 내려오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I Enoch 86:1-3;88:1, Charles, Mounce, Ladd, Johnson). (5) 혹자는 타락한 천사인 사단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Terullian, Bede, Alford, Walvoord). 다섯 가지 견해 중 서로 상반된다 할지라도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성경에서 별은 천사나 하늘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표현하고 있으며(민 24:17;삿 5:20;욥 38:7;단 8:10)또한 사단을 암시하기도 한다(사 14:12). 예수께서도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눅 10:18).

⭕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 '무저갱'으로 번역된 헬라어 '투 프레아토스테스 아뷔스수'(*)에서 '아뷔스수'는 부정 접두어 '아'(*)와 '깊이'를 의미하는 헬라어 '뷔도스'(*)의 합성어로서 '깊이가 없는'이란 뜻을 지닌다. 이것은 성경에서 '물을 가두어 둔 곳'(창 1:6, 7;시 107:26),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모두 갇히는 장소로 여겨졌다(시 74:13;사 51:9;암 9:3). 본서 내에서도 무저갱은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있던 처소였으며 (11:7)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 동안 사단이 일시적으로 갇혀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20:7). 이러한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자가 상반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천사이든 아니면 사단이든 간에 하나님에게서 열쇠를 받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과 섭리하에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9:2]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 '연기'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산의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올라와서 해를 가리고 땅의 공기를 어둡게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지만(출 19:18) 앞절에서 설명된 '무저갱'의 사단적 성격과 본절 이후에 진술된 무저갱에서 나온 사자의 형상이나 그의 행위로 보아 하나님의 현현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이런 연기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 빛을 발하는 모든 것들이 어두워진 것처럼 앞으로 시행될 불의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어두워지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코토데'(*)는 '스코토오'(*, '어둡게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로 무저갱으로부터 나온 연기로 인해 '어두워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연기에 의한 어둠이 해와 공기를 감싼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따라 7절 이하에서 펼쳐질 인간 세상에 대한 사단의 포괄적인 영향을 시사한다(Hughes, Kraft).

성 경: [계9:3]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 구약성경에서 황충은 멸망하기 직전 나타나는 심판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어그러진 길로 나아갈때나 백성들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출 10:1-20;신 28:42;왕상 8:37;시 78:46;욜 1:2-2:11). 그러나 본절의 황충은 사단의 권세를 상징하는 '전갈의 권세'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를 실행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실제적인 메뚜기가 아니라 마귀의 권세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한편 황충이 받은 '전갈의 권세'에서 '전갈'은 사막과 같은 따뜻한 지방의 돌 사이에 서식하며 꼬리에 강한 독을 품고 있는 침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전갈은 뱀처럼 사람에 대해 적대적이고 어둠의 권세를 대표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눅 10:19;11:12;계 9:3, 5, 10)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 말기에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사나운 뱀과 전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신 8:15). 이로 보아 본절에서 이러한 전갈의 권세를 받은 황충은 악과 불의로 가득찬 인류를 파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이다(Hughes, Beasley-Murray, Ladd, Morris, Kraft).

성 경: [계9:4]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 본절은 황충이 수행해야 할 특별한 임무를 나타낸다. 황충이 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이 애굽에게 내린 재앙이나 요엘서와 같이 곡식이나 나무, 풀 등을 해하는 것이다(출 10:15;욜 2:3). 그러나 본절에서의 황충은 전혀 다른 임무, 즉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치는 것이다. 황충의 심판을 받는 기준인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표증이다(Swete, Mounce, Ladd). 즉,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새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인은 다섯째 나팔의 황충 심판을 피하게 되나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의 표징을 받지 못한 자들은 다섯째 나팔이 울릴 때 황충으로 인한 심판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애굽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할 때 자신들의 집 문설주와 문 인방에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재앙에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상기시킨다(출 12:1-28).

성 경: [계9:5]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굅롭게 함과 같더라. - 1절과 3절의 '받았더라'(*,에도데)와 함께 본절의 '못하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크테이노신'(*)은 이 재앙이 사단의 권세를 받은 황충에 의해서 행해지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서 행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황충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만을 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생명의 해함'도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시사한다(창 2:17;약 4:13-15).

⭕ 다섯 달 동안. - 이 기간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특정한 수로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뜻한다고 주장한다(Ladd, Mounce, Kraft, Morris). 이들은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다섯'이라는 숫자는 대개 '다섯 개'라는 특정한 수의 개념을 나타내기보다는 '약간'혹은 '적은'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일년 중에 메뚜기가 생존해 있는 봄에서 늦은 여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ohnson, Charles). (3) 혹자는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창 7:24;마 25:15;눅 14:19;16:28, Lohmeyer, Rissi). 세 가지 견해중 앞의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이러한 한정된 황충 재앙의 시간은 고통 가운데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기간이며 무한정 계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냉엄한 심판의 기간이다(20, 21절, Ladd, Mounce, Kraft, Morris).

성 경: [계9:6]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서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 '사람들'의 헬라어 '호이 안드로포이'(*)는 관사 '호이'가 사용되어 특정한 사람들, 즉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무리들'을 가리킨다. 한편 '구하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뒤메수신'(*)은 매우 강렬한 욕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들이 마치 전갈에 쏘인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욥이 갑자기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악창까지 앓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것을 연상시킨다(욥 3:20-22, Mounce, Kraft, Morris, Hughes, Beasley-Murray). 그러나 그들은 죽을 수 없다. 단지 그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통의 심판이 존재할 뿐이다.

성 경: [계9:7]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본절에서 10절까지는 황충의 모양에 대한 기술이다. 이러한 황충의 모습은 욜 2:4을 반영하고 있다.

⭕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 본문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말들처럼 재앙을 시행하려는 황충들의 준비가 완벽하게 무장되었음을 시사한다(Mounce, Ladd, Johnson).

⭕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 본서의 다른 구절에서는 '면류관'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반면에 (4:4; 6:2) 본문에서는 명확하지 않게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something like crowns of gold, NIV)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혹자는 메뚜기 가슴의 녹황색을 가리킨 듯하다고 주장하나(Charles) 분명하지 않다. 여하튼 이것은 황충이 자신들의 임무를 완전하게 이루어 낼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dd, Mounce).

⭕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 이것은 황충이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가진 것을 암시한다. 황충이 인간의 지능과 명철을 가지고 사단의 모습을 취한 것은 그의 모습과 행위가 기묘하고 간악함을 시사한다(Ladd, Mounce).

성 경: [계9:8]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 본문의 머리털에 대해 혹자는 황충의 더듬이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며(Johnson), 혹자는 성경에서 '머리털'이 '힘'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삿 16:13, 19;삼하 14:25, 26)'긴 머리털'이 단순히 성적이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활동하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Mounce, Hughes, Beasley-Murray).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 본문은 요엘서에서 침략국이 '수사자의 이와 암사자의 어금니'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것을 반영한다(욜 1:6). 이것은 요엘서와 마찬가지로 황충의 탐욕성, 잔인함을 시사한다(Ladd, Kraft, Morris).

성 경: [계9:9]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 '흉갑'으로 번역된 헬라어 '도라카스'(*)는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으로 철로 만들어졌다(17절;엡 6:14;살전 5:8). 황충의 이런 모습은 약점을 찾을 수 없는 황충의 강력함을 시사한다(Ladd, Mounce).

⭕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 본문은 욜 2:4, 5과 연관된 것으로 황충들이 함께 날 때 나는 소리가 전쟁에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수많은 병거들의 소리와도 같고 그 수가 엄청나며 그 공격이 신속하고 강함을 시사한다(Ladd, Mounce, Morris).

성 경: [계9:10]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 7-9절까지는 과거 시제가 사용된 반면에 본절에서 '있어'의 헬라어 '에쿠신'(*)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황충의 모습이 더 생생함을 암시하고 있다(Morris, Mounce). 한편 '쏘는 살'에 해당하는 헬라어 '켄트라)(*)는 새의 발톱이나 곤충의 침, 혹은 황소를 모는 막대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행 26:14;고전 15:55). 이것은 모든 찌르는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말로 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황충이 전갈의 권세를 받아 마치 전갈처럼 꼬리에 있는 침으로 쏨으로써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자들로 죽지도 못하고 헤어날 수도 없는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성 경: [계9:11]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 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 잠 30:27에 나타난 황충에게는 임금이 없으나 본절에 언급된 심판의 도구인 황충들에게는 무저갱의 사자가 임금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임금의 이름인 '아받돈'(*)은 지혜 문학에서만 사용되어온 낱말인 히브리어 '아바돈'(*)의 음역으로(욥 28:22;31:12;시 88:11;잠 15:11), 본절에서 '파괴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아플뤼온'(*)과 동일시되고 있다. '무저갱의 사자'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볼루온'이 헬라의 신 아폴로(Apollo)나 이 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황제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Bleek, Beasley - Morris). 이들은 아폴로의 현현으로 불리기를 좋아한 도미티안 같은 로마황제를 당시에 그렇게 불리기도 했다는 것과 B.C 5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아볼루온과 동일한 어원인 아폴로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이름으로 사용하여 왔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상에 재앙을 내리는 하나님의 선한 천사라고 주장한다(Stack, Billerbeck). 성경 다른 곳에서는 '사단의 사자'라는 표현이 많이 있지만(마 25:41;고후 12:7;계 12:9)이 '무저갱의 사자'라는 표현은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기에 이들은 유대인 전승에서 무저갱과 음부를 지키는 천사인 하나님의 선한 천사 '예레미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3) 혹자는 '나폴레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Volkmar). (4) 혹자는 '사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Alford, Barclay).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무저갱의 사자'가 본절에서 히브리어로 '파괴'를 뜻하는 '아바돈'일 뿐만 아니라(욥 26:6;28:22;시 88:11;잠 15:11) 헬라어로 '파괴자'를 뜻하는 '아볼루온'으로 문맥상 '파괴'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Morris, Ladd).

성 경: [계9:12]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다섯째 나팔 재앙]

⭕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 앞장에서 다섯째 나팔을 불기 이전에 세 가지 화가 있을 것을 이미 예고한 바 있다(8:13). 본절의 '첫째 화'는 1-11절에 언급된 다섯째 나팔의 심판을 가리키며, 앞으로 올 두가지 화는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나팔에 의해 소개되는 심판을 의미한다(13절ff.;11:14, 15;12:12, Hughes, Ladd). 한편 '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두'(*)와 '이르리로다'의 헬라어 '에르케타이'(*)는 모두 현재 시제로 심판의 보다 생생한 장면을 나타낸다(Morris).

성 경: [계9:13]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 '하나님 앞'은 여섯째 천사의 나팔에 의해서 시행되는 심판이 하나님의 주권과 용인(容認)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한 음성이 난 '금단' 은 8:3에 나오는 금향단, 곧 성도들이 구원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해 신원하고 부르짖는 기도의 단이다. 그리고 네 뿔에서 나는 음성은 모든 성도들이나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6:10)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듯하다(Mounce, Ladd,Morris).

성 경: [계9:14]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인 가나안의 동쪽 경계선이었다(창 15:18). 유브라데 경계 건너편에 앗시리아 등 이방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구약성경에서 이 강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상징되었다(사 7:20;8:7;렘 46:10). 그래서 이방들이 침략하는 것이 유브라데 강이 흘러 넘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사 8:7). 이러한 의미에서 볼때 재앙이 선포되기까지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던 '네 천사'가 풀린다는 것은 마치 유브라데 강이 넘치는 것처럼 심판의 재앙이 임함을 암시한다(Ladd, Mounce, Kraft, Morris). 한편 '네 천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7:1-3에 나오는 천사들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Wordsworth). (2) 혹자는 악한 천사라고 주장한다(Lang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듯하다. 왜냐하면 본절의 네 천사가 결박당해있는 것으로 보아 네 모퉁이에 서 있는 7:1의 '네 천사'들과는 동일하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박당해 있어 결박이 풀릴 때까지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악한 존재들 이며 15절의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으로 보아 마병대들을 이끄는 악한 천사라고 볼 수 있다(Ladd, Mounce, Hughes, Beasley-Murray).

성 경: [계9:15]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 '그 년 월 일 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호란 카이 헤메란 카이 메나 카이 에니아우톤'(*)은 시간을 나타내는 네 개의 단어가 하나의 관사 '텐'에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때를 시사한다. 이것은 재앙을 수행할 악한 천사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며, 모든 종말적 사건들의 전개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Ladd, Mounce). 한편 '삼분의 일'이란 표현은 여섯번째 나팔 재앙이 처음 네 가지 나팔 재앙들과 연결되어 일어나는 재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비록 이 재앙에서 인류의 삼분의 일이 살상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아 있게 됨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재앙은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Kraft, Ladd).

성 경: [계9:16]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 마병대의 수 '이만만'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여섯째 나팔의 재앙 때 실제로 2억의 군대가 동원되어 중동 지역에서 전쟁일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Walvoord). (2)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을 멸상시키기로 목적하는 사단의 세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5:11;단 7;10, Plumm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실제로 2억의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우며 구약성경에서 '천천'이나 '만만'은 문자적인 특정한 수를 의미하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시 68:17, Mounce, Ladd).

성 경: [계9:17]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 구약에서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는 자신의 환상을 자주 언급 하는데 비해(단 7:2;8:15;9:21) 요한은 본서에서 본절 이외의 다른 곳에서 환상을 보았다는 언급(I saw in my vision, NIV)을 하지 않는다. 본문을 통하여 요한은 자신이 보는 광경이 실제의 기병대를 보고 있음이 아니라 미래에 되어질 종말적 상황의 서술임을 밝히고 있다(Ladd).

⭕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 말과 그 탄 자들이 다 각양 색깔의 흉갑을 입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대 마병과 기사의 무장 형태로 보아 탄 자만 무장을 한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다. 한편 세 가지 빛깔의 흉갑은 전후문맥의 환상 기술 방식이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 흉갑의 색깔이 반드시 세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이며 흉칙함을 암시하는 듯하다(Johnson, Mounce).

⭕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 '말'을 '불과 유황을 내뿜는 괴물'로 기술하는 표현 양식은 고대 신화에서 흔히 등장한다(욥 41:19, 20;합 1:8). 이것은 괴물의 잔인함과 파괴력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Ladd).

성 경: [계9:18]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 '불과 연기와 유황'은 여섯째 나팔 재앙 가운데 행해지는 살육의 수단으로 본서에서 자주 나온다(20절;11:6;15:1;18:4, 8;22:18). 불과 연기와 유황에 의해 살육 당하는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상하게 한다(창 19:24). 한편 '저희 입에서 나오는'은 이 재앙의 근원이 사단적인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Hughes, Ladd, Beasley, Murray, Morris)

성 경: [계9:19]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 본절이 전체적으로 묘사하는 형상은 10절에 언급된 '전갈'같은 꼬리로 찌르는 황충과 유사하다. 12:9에서 마귀는 '예 뱀'으로 불려지며 고대 신화에서 뱀과 마귀는 흔히 연관되어 불려진 것으로 보아 본문은 그 말들의 사단적 성질을 강조하기 위해 표현된 독특한 비유인듯하다(Morris, Mounce, Ladd).

성 경: [계9:20]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 '우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돌라'(*)는 '형상', '모습'을 뜻하는 '에이돌론'(*)에서 파생된 말로 금이나 은, 동, 돌, 혹은 나무로 만든 귀신의 형상을 가리킨다(요일 5;21). 이러한 우상은 보지도, 듣지도, 걷지도 못해서 생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힘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신 4:28;시 96:5;106:37;115:4, 8;135:15-18;단 5:23). 이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곧 귀신들을 숭배하는 것이다(신 32:17;고전 10:20, 21).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애굽이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어난 수 많은 역병들을 경험했음에도 그 마음이 완악하여섯 귀신과 우상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처럼(출 7:14, 22;8:32;9:7, 12, 34;10:20; 11:10) '불과 연기와 유황'의 재앙을 겪으면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의 심판을 당하는 자들을 목격하고도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우상 숭배에 몰입한다(Beasley-Murray, Mounce, Ladd, Morris).

성 경: [계9:21]

주제1: [다섯째 나팔의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

주제2: [여섯째 나팔 재앙]

⭕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 '복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마케이온'(*)은 본절에서 '마약', '마술', '술수'를 의미한다(21:8;22:5;사 47:9, 12;갈 5:20). 한편 '음행'의 헬라어 '포르네이아스'(*)는 '살인'(*, 포논), '복술'(*, 파르마케이온), '도적질'(*, 클렘마톤)이 복수로 사용된 것과는 달리 단수이다. 이것은 아마도 '음행'이 다른 죄에 비하여 작은 죄임을 나타낸다기보다는 '모든 성적인 죄'를 통칭하는 표현인듯하다(Morris). 여섯째 나팔 재앙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살아 남은 자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거절하고 상실한 마음대로 행하여 우상 숭배는 물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서슴없이 행한다(롬 1:18-32). 성경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21:8;롬 1:18ff., Mounce).

성 경: [계10:1]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 본절은 여섯째 나팔 재앙과 일곱째 나팔 재앙 사이의 환상이다. '힘센 다른 천사'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larke, Hendriksen, Vincent, Welhausen, Scott, Kraft). 왜냐하면 이 천사가 가진 구름, 무지개, 해, 불기둥 등의 위엄과 영광이 1:15, 16과 11:12에서 표현된 예수의 형상과 비슷하고, 성경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구름으로 옷입으신 분'(시 104:3) 혹은 '머리에 무지개가 있으신 분'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4:3). (2) 혹자는 '가브리엘'일 것이라고 주장한다(Charles). 그것은 '힘센'(*, 이스퀴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바르'(*, '강력한')를 단 8:16에 나오는 가브리엘 (*)과 연결시킨 추측이다. (3) 혹자는 지금까지 요한이 언급한 천사와는 다른, 단지 새로이 등장하는 천사라고 주장한다(Lenski, Ford, Mounce, Morris, Ladd).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첫번째 주장의 경우 본절의 천사는 신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그리스도도 본장에서 결코 천사로 불린 적이 없기에 받아들이기 힘들며 또한 두번째 주장의 경우 '가바르'가 가브리엘에게 사용되었다고 해서 본절의 힘센 천사와 연결되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인정하기 어렵다. 한편 '구름, 무지개, 해, 불기둥'과 같은 표현은 힘센 천사의 천상적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며 약속된 재앙이 실현될 것을 나타낸다(Ladd). 이와 같은 천사의 모습은 자신이 전할 메시지. 즉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을 반드시 성취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상기시키고 확신시키기에 합당하다(10:7, Farrer, Mounce).

성 경: [계10:2]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그 손에 펴놓인 작은 책을 들고. - '펴놓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오그메논'(*)은 완료 분사로 그 내용이 원하는 사람들에겐 누구에게나 밝혀져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작은 책'에 해당하는 헬라어 '비블라리디온'(*)은 다른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낱말로서 초기 헬라어에서도 전혀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요한이 새로 만든 말인 듯하다. '작은 책'의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이 '작은 책'이 하나님의 단편적인 뜻을 담은 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oltzmann). 그는 5:1의 책과 비교하여 5:1의 책이 구속사에 있어 하나님의 전반적이고도 포괄적인 계시를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1-11장) 이 작은 책은 하나님의 지엽적인 뜻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12-22장). (2) 혹자는 보다 범위를 줄여 본서 11:1-13의 예언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harles, Lohmeyer, Behm, Lohse, Kiddle). 이들은 5장에서 말한 책은 6:1-8:5 말씀을 집약하고 있으며 본문의 '작은 책'은 11:1-13에 나타나는 교회의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3) 혹자는 본절이 단지 요한이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상징적 설명이라고 주장한다(Ladd). 즉 겔 2:9-3:3까지의 내용이 본문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고 요한이 종말의 서막을 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지자적 임무에 관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작은 책'에는 장차 되어질 예언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11절), 요한의 경험이 에스겔이나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될 때 가졌던 경험들과 동일한 점 등을 미루어 보아 만백성들과 열방들 그리고 열왕들에게 예언해야만 하는 선지자적 직무의 재확약으로 보이며 본절과 11장이 내용상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1장 이하의 교회의 핍박에 관한 예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 본문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이러한 천사의 모습이 그가 전해줄 메시지의 보편성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Ladd, Johnson). (2) 혹자는 단지 오른쪽은 웅장한 모습을 그리고 왼쪽은 편재(omnipresence)하는 모습을 암시할 뿐이라고 주장한다(Ford).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본문에 나타난 천사의 장대한 모습은 그가 가져온 메시지가 온세상에 전파되어야 하는 포괄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0:3]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 '부르짖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카타이'(*)는 소의 울음, 사자의 울부짖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사용되기도 하였다(호 11:10;암 3:8, Kraft). 이비유는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사 42:13;렘 25:30;욜 3:16;암 1:2) 천사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듣는 자로 주목하고 주의깊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듯하다(Mounce, Ladd).

⭕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 그 외침은 일곱 우뢰가 응답할 만큼 강한 촉구의 음성이었다. '일곱 우뢰'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이 혀타 브론타이'(*)는 정관사 '하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일반적 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을 말하려 한 것이라 추측되나(Mounce, Ladd)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시 29:3-9의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 활동과 연관되어 여호와의 신비스런 사역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묘사인 듯하다.

성 경: [계10:4]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 '인봉하고'의 헬라어 '스프라기손'(*)은 '숨기다'라는 뜻으로 본절이외에 22:10에서도 나타난다(5:1;단 12:4, Morris, Ladd, Kraft). 요한에게 기록하는 것을 금지시킨 이 음성은 그 내용이 감추인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감추신 내용을 의도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넘어서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로부터 하늘의 엄청난 계시를 보고 들었던 바울도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지 않았다(고후 2:2-4, Hughes).

성 경: [계10:5]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내가 본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 '손을 드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맹세할 때 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이 소돔 왕이 주는 전리품을 거절할 때와 모세의 노래에서 하나님스스로 하시는 맹세, 다니엘서에서 세마포를 입은 이가 맹세하는 모습에서 나타난다(창 14:22;신 32:40;단 12:7, Beasley-Murray, Ford, Hughes). 본절에서 나타난 천사는 육지와 바다에 적용될 그 맹세의 말씀을 엄숙하고 중차대하게 하기 위해 거룩한 맹세의 자세를 갖추는 것으로 보여진다.

성 경: [계10:6]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 본절은 맹세의 형태를 취하여 종말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천사의 선포이다. 맹세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칭호는 두 가지이다. (1)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이 칭호는 죽음의 무서운 위협에 처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Mounce) 하나님께서는 계시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자에게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시사한다. (2) 창조하신 이 천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드러냄으로 종말에 구속과 심판의 역사를 행하실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심을 강조한다(Beasley-Murray, Mounce).

⭕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 이렇게 확증된 맹세는 지체되지 않는다. 단 12:6이하에서는 '이 기사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라는 질문에 세마포 입은자가 '한 때 두 때 반 때가 지나면 종말이 온다'고 애매한 답을 한데 반해 본문에서는 요한에게 '지체하지 아니하리라'는 확실한 답이 주어진다. 이 대답은 일곱째 나팔(11:15)로 시작되는 일곱대접의 재앙을 통해(16장) 하나님의 심판이 본격화됨을 시사한다.

성 경: [계10:7]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개역성경 본절에서는 강한 반의 접속사 '알'(*, '그러나')이 생략되어 있다. 이 '알'은 더 이상 지체되지 않고 임할 종말의 긴박성을 강조한다(Morris).

⭕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 본절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심판을 성취시키는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은 선지자에게 전하신 복음과 동일시된다.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하여 일관되게 종말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속과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이 메시지가 곧 복음이었다. 하나님은 종말의 때 지체 없이 이 복음을 성취하실 것이다.

성 경: [계10:8]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 본절은 요한에게 일곱 우뢰가 말한 것은 기록하지 못하도록 금했던 그 음성이 이제는 다른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이다. 본장에서 세 번씩이나 묘사되어 있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는(2, 5절) 그 천사의 손에 놓인 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그 천사의 손에 있는 책은 5장에 기록된 일곱인이 찍힌 두루마리와는 달리 펴놓여 있어서 그 책의 내용이 숨겨져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Morris, Kraft, Mounce). 요한에게 전해진 그 계시의 말씀은 온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하는 말씀이다(Ladd).

성 경: [계10:9,10]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내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본문은 겔 2:8-3:3과 비교되는 구절로 에스겔처럼 요한은 말씀이 적힌 책을 취해 먹도록 명령받는다. 이것은 그 책이 요한이 선포해야 할 말씀임을 시사한다. 선포해야 할 메시지를 취하여 먹을 때 나타난 현상, 즉 '입에는 꿀같이 다나...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요한뿐만 아니라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도 겪었던 공통적인 현상이다(렘 15:16, 19;겔 3:3, Ladd, Mounce). 여기서 '입에 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일이 기쁜 일임을 나타내며 '배에 쓰다'는 것은 그 메시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고통을 느깨게 됨을 상징한다(Ladd, Kraft, Morris). 즉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는 것은 큰기쁨이 되지만 그 내용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담고 있으므로 전파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시사한다. 이처럼 요한은 계시의 말씀을 애해하고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상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다 겸비하였다(엡 5:9, Hendriksen, Ladd, Kraft, Mounce, Morris).

성 경: [계10:11]

주제1: [작은 두루마리]

주제2: [천사와 작은 책]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저가 내게 말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구신'(*)은 문자적으로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단수로 언급된 반면에 본절에서는 복수로 언급된다. 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지금까지 한 천사가 말해 왔으므로 복수로 보는 것은 오역이라고 주장한다(Morris, Kraft). (2) 혹자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이나 천사나 천둥들의 소리라고 주장한다(Charles). (3) 혹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자주 발견되는 숙어로서 3:16에서처럼 불확정 복수를 표기하여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Ford).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에게'의 헬라어 '에피'(*)는 '대항하여'(against), '전에'(before), '관하여'(about) 등을 의미한다. 본절의 '에피'는 히브리어에서 '많은 백성들에 관하여'로 자주 번역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관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나은 듯하다. 그럴 경우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들에 관하여'로 번역될 수 있으며(Swete, Ladd), 이것은 바다와 땅을 밟고 선 천사에 의해 전해지고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선포될 예언의 말씀이 장차 되어질 사건들과 종말에 대한 구체적 계시이며 그 예언의 대상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전 인류임을 시사한다.

성 경: [계11:1]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1, 2절은 겔 40-48장을 반영한다.

⭕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척량하되. - '갈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라모스'(*)는 물건이나 건물 같은 것은 재는 도구로 '길고 곧을 장대'를 가리킨다. 에스겔도 갈대로 성전을 척량하였다(겔 40:2ff.). 한편 구약성경에서 '척량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재건이나 보존을 의미한다(렘 31:39;슥 1:16;2:1-5). (2) 파괴를 의미한다(삼하 8:2;왕하 21:13;사 28:17; 34:11;애 2:8;암 7:7-9). 본문의 '척량'은 두 가지 의미 중 전자에 해당된다(21:15-17, 24, 27, Johnson, Beasley-Murry, Hendriksen, Ladd).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척량되지 않은것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척량은 척량 대상이 설사 고난받을 지라도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있음을 시사한다. 요한이 척량해야 할 것은 세 가지였다.

⭕ 하나님의 성전. - '성전'의 헬라어 '나온'(*)은 마당과 행각을 포함한 성전 전체를 가리키는 '히에론'(*)과는 달리 제사장들만이 들어가는 성소를 가리킨다(Johnson, Ladd). 요한이 척량한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이 아니라 지상의 성전으로서 혹자는 유대인들의 실제 성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Holtzmann, Walvoord) 그리스도인 공동체 즉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전 3:16;6:19;고후 6:16;엡 2:21,Johnson, Morris, Hendriksen, Charles, Plummer, Beasley-Murray).

⭕ 제단. - 이것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향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리키는 듯하다(8:3;9:13, Hendriksen, Mounce, Hughes).

⭕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종이나(히 13:10, Johnson)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언약 백성을 의미한다(1:5;5:10, Hughes, Morris, Mounce).

성 경: [계11:2]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 헤롯 성전의 뜰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성전 안에 있는 뜰로서 제사자의 뜰, 남자의 뜰 혹은 이스라엘이 뜰, 여자의 뜰이며, 둘째는 성전 밖의 뜰로 이방인의 뜰이다. 이 두부분의 뜰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어서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Johnson). 이러한 두 부분의 뜰 중에서 본문의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의 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버림받은 회당이나(Swete) '남은 자'를 제외한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Morris). (2) 혹자는 교회 내에 있으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거짓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ohnson, Mounce, Hendriksen, Kissle).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한마디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Beasley - Murray). 이러한 이방인의 뜰은 척량 대상에서 제외되어 앞절에서 언급된 척량 대상과는 달리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고 파멸을 당할 것이다.

⭕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 '이방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드네신'(*)은 문자적으로 '민족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교도들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듯하다(18절;2:26;19:15;20:3;21:24, 26;22:2). 한편 '주었은즉'의 헬라어 '에도데'(*)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이방인이 스스로 성전 밖 마당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Morris).

⭕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 '거룩한 성'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혹자는 '성' 혹은 '유대인'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Holtzmann, Walvoord, Beckwith, Ladd, Rissi). (2) 혹자는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21:2, 10;22:19, Johnson, Moun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핍박을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마흔 두 달'은 단 7, 9장을 반영한 것으로 본서 내에서 '일천 이백 육십 일'(3절;12:6),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하나님의 성소와 유대인을 핍박하는 것을 나타내며(단 8:10, 13; 마카비하 8:2), 본서에서는 거룩한 성에 대한 박해(2절), 두 증인이 예언하는 때(3절), 여자를 광야에서 보호하시는 때(12:6, 14), 짐승이 자신의 권세를 행하도록 허락하신 때(13:5)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마흔 두 달'이 교회에 대한 짐승의 핍박 기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기간임을 시사한다(Mounce). 이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보호는 결코 고난과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붙들어 주신다는 의미이다(Morris).

성 경: [계11:3]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두 증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1) 혹자는 에녹과 엘리야라고 주장한다(에녹서 90:11, Tertullian). (2) 혹자는 모세와 엘리야라고 주장한다(Charles, Smith, Gundry, Barclay). (3) 혹자는 미래의 두 예언자라고 주장한다(Beckwith). (4) 혹자는 베드로와 바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5) 혹자는 교회 안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라고 주장한다(Rissi). (6) 혹자는 일천 이백 육십 일과 같이 정해진 기간 혹은 교회의 전기간을 통해 증언하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Morris, Johnson, Minear, Beasley - Murray, Hendriksen).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증인의 수가 둘이라는 사실은 실제 증인의 수를 의미하기보다는 증인이 증거하는 증언의 진실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Hughes).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 증인이 둘이라는 사실은 증언의 진실성을 의미하고 있으며(신 19:15;요 8:17, 18)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 둘을 함께 보내셨다(막 6:7;눅 10:1). 한편 '굵은 베옷'은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입던 옷으로(사 20:2;슥 13:4) 회개나 애곡을 나타낸다. 이것은 두 증인의 사역이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도록 하여 더이상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그리스도를 주로 확신하도록 하는 것임을 시사한다(Hughes, Beasley-Murray, Johnson).

성 경: [계11:4]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 '이 땅의 주 앞에'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나타낸다(Morris). 한편 본절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앞절에서 언급된 '두 증인'에 대한 묘사이다. 이것은 스가랴의 환상을 암시한다(슥 4:1-14). 스가랴서에서 두 감람나무는 기름부음을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를 가리킨다(슥 3:1;4:6, 7, 14). 요한은 이 스가랴의 환상을 이용하여 두 증인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권위를 소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있음을 암시한다(Ladd). 또한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서로 상관 관계를 갖고 있다. 즉 감람나무의 기름을 통해서 촤대는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워진(Swete, Mounce) 이러한 교회와 그 증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마 5:14-16) 세상의 참빛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요 1:4, 5, 9) 발해야 한다(Hughes, Johnson).

성 경: [계11:5]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 본절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호하신 왕하 1:10과 렘 5:14을 반영한다.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두 증인들이 선포한 예언의 말씀을 암시한다(렘 5:14).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두 증인을 해하려 할지라도 원수들의 손에서 두 증인을 보호하시고 말씀의 선포가 지속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두 증인의 입으로 선포하는 불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그 원수들을 철저히 파멸시키신다.

성 경: [계11:6]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본절은 앞서 언급된 두 증인에 대한 설명이다.

⭕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 본문은 선지자 엘리야가 기도로 비를 오지 못하게 한 사실을 암시한다(왕상 17:1).

⭕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 이것은 모세가 애굽에서 행한 열 가지 재앙을 암시한다(출 7:20;8:12). 이러한 사실로 인해서 혹자는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harles, Smith, Barclay). 그러나 누가가 침례 요한에 대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자라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눅 1:17) 본절에서 암시한 모세와 엘이야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과거에 사역하던 역사적 인물의 재출현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Ladd). 단지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을 소유한 교회나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Johnson, Beasley-Murray, Hughes).

성 경: [계11:7]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 '증거를 마칠 때에'에서 '마칠'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레소신'(*)은 부정 과거 시상으로 두 증인이 소기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거나 증거하기를 다마쳤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두 증인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계속적으로 그들을 해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성취하기까지 해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사단도 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 '짐승'은 본서에서 제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짐승'의 헬라어 '토 데리온'(*)에는 관사 '토'가 붙어 있어 수신자들이 적그리스도인 짐승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더불어 이 짐승이 13장과 17장에 언급된 짐승임을 암시한다(Beckwith, Mounce, Johnson). '짐승'의 기원은 단 7장이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제국을 상징하는 네 마리의 짐승 중에서 마지막 네번째 짐승은 열뿔을 가졌으며 그 중에서 더 큰 뿔 하나가 자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세상에 환난을 초래한다(단 7:1-25). 이러한 짐승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를 지칭 하였으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말론적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적그리스도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것은 그 근원이 사단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서게 하며 멸망당하도록 하는 존재임을 시사한다(9:1-11;17:8). 한편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는 단 7:21을 반영하는 것으로 두 증인이 개인적인 두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전 백성 즉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킴을 암시한다(Beasley-Murray). 적그리스도는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줄이며 억압하고 핍박한다(6:9-11).

성 경: [계11:8]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 본절의 '큰 성'은 증인들이 적그리스도의 공격을 당하여 죽임을 당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서 내에서 흔히 '바벨론'으로 지칭된다(16:19;17:18;18:10, 16, 18, 19, 21). 혹자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는 표현으로 인해서 문자적인 예루살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Ladd). 그러나 그것은 문자적인 예루살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Alford, Mounce). 왜냐하면 요한이 그 성을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에 비유하기 때문이다. 본절에 나타난 '큰 성'은 단순히 예루살렘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백성을 핍박하는 사단의 도시나 음녀의 어미들이 있는곳을 가리킨다(Johnson, Morris, Beasley-Murray).

⭕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 '영적으로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예언의 언어로'('in the language of prophecy', Knox)나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는' ('is called by those with spiritual understanding', Phillips) 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큰 성은 두 가지로 불려진다. (1) 소돔. 이 곳은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척한 도시였다(창 19:4-11). (2) 애굽. 이 곳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노예로 만든 도시였다. 두 도시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여 멸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증인들을 죽이고 핍박한 큰 성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1:9]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중에서'에 대한 혹자는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Ladd), 하나님을 거스려 대적하고 불신앙에 사로잡힌 세상 모든 사람들과 구조를 의미한다(Hughes, Morris). 한편 시체를 장사지내지 못하는 것은 당시 적에게서 당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과 수치였다(왕상 21:24;렘 8:1), 2;14:16). 짐승은 증인들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 못하게 함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였으며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였다(Morris, Mounce).

⭕ 사흘 반 동안. - 이것은 짐승이 증인들의 시체를 모독하고 멸시하는 기간을 나타낸다. 즉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증인들이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증거한 기간과는 달리 매우 짧은 기간임을 시사한다(Ladd, Mounce, Hendriksen).

성 경: [계11:10]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 '땅에 거하는 자들'은 이방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큰 성과 동일한 의미이다(3:10;6:10;8:13;13:8, 14;17:8, Mounce, Morris). 이들은 두 증인들이 소멸하는 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할 때 양심이 괴로워 증인들을 미워하였다. 그러기에 증인들의 죽음과 시체가 거리에 장사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선물을 교환한다. 이렇게 선물을 교환하는 것은 당시의 관습으로 그들이 증인들의 죽음을 기뻐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과 축제는 삼일 반 즉 극히 짧은 기간으로 끝나게 되며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임을 인식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떨게 될 것이다.

성 경: [계11:11,12]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 본절은 에스겔의 환상을 반영한다(겔 37:5, 10 -12). 여기서 '생기'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창 2:7;6:17;7:15, 22)두 증인들의 생명의 부활을 의미한다. 사단과 그 무리들은 두 증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을 당하던 짧은 기간 즉 삼 일 반 동안만 즐거워할 수 있을 뿐이다. 삼 일 반이 지난 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기를 통해서 두 증인이 부활하여 서게 됨으로 조롱하던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사단의 핍바과 고난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일지라도 그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다시 부활하여 일어서게 됨을 암시한다(Morris, Mounce, Johnson).

⭕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 '구름'은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 그리고 영광을 의미한다(Johnson).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으며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것과 마찬가지로(마 24:30;행 1;9-11) 두 증인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 한편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는 두 증인의 승천은 공개성(公開性)을 시사한다. 두 증인의 승천은 절대로 감추어진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사실이다(Morris, Swete).

성 경: [계11:13]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두 증인]

⭕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 본문은 두 증인의 승천 때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묘사이다. '지진'은 종말에 나타날 징조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의미한다(6:12;겔 38:19, 20;마 27:54). 두 증인의 부활때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죽은 '성 십분의 일'의 인구 '칠 천'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당시 예루살렘 성의 인구가 55,000-95,000명이었음을 추측하여(J.Jeremias) 예루살렘 성 주민의 일부가 죽임을 당하였고 그 결과로 유대인이 회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add). (2) 혹자는 인류 전체의 일부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일부에 대한 징계로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Johnson).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은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비유된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8절). 한편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는 것은 16:9에 나타난 반응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단순한 두려움이나 뉘우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의미한다(Ladd, Johnson, Morris, Mounce).

성 경: [계11:14]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일곱째 나팔 재앙]

⭕ 둘째 화는 지나 같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 '둘째 화'는 여섯째 나팔에 해당되는 화를 의미한다(9:13-11:14). 이 둘째 화 다음에 지체 없이 속히 임할 '셋째 화'는 일곱째 나팔과 연결된다. '일곱째 나팔'은 10:7 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감추신 비밀에 대해 보여준다.

성 경: [계11:15]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일곱째 나팔 재앙]

⭕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 '큰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하늘의 천군 천사'의 음성인 듯하다(Morris, Mounce).

⭕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 본문은 시 2:2을 반영하는 것으로 큰 음성을 통해 이루어진 선포이다. 여기서 '우리 주'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의미하나 본서 내에서는 빈번히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1:8, Ladd, Morris). 이것은 본문이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이 사단이나 군왕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선포임을 시사한다(Swete, Johnson, Beasley-Murray). 이제는 이 세상을 더이상 사단의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1:6, 9;5:10;12:10;19:6;20:4;22:5). 한편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게네토'(*)는 단순 과거 시상으로 이 세상의 주권이 사단에게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로 전도되었음을 시사한다(12:10;19:6, 16;요 12:31, Ladd, Morris).

⭕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 '그가...왕노릇하시리로다'의 헬라어 '바실류세이'(*)는 단수이다. 이것은 사단에세서 이 세상의 주권을 되찾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주권의 단일성을(unity)을 시사한다(Mounce, Lohmeyer, Beasley-Murray).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신 왕으로서 단일한 주권을 가지시고 이 세상을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이다.

성 경: [계11:16,17]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일곱째 나팔 재앙]

본문은 이십 사 장로의 찬양이다. 이러한 이십 사 장로의 찬양은 여섯째 인의 심판이 지난 후 나타났었다(7:2).

⭕ 감사하옵나니 옛적에고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시도다. - '잡으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에일레파스'(*)는 완료 시상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에 대한 칭호는 두 가지이다. (1)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본 칭호는 앞서 언급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칭호(1;8;4:8)와 대비를 이룬다. 앞서 언급된 칭호에서는 '장차 올 자'라는 칭호가 있는 반면에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의 오심이 성취되어서 이미 오셨고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음을 시사한다(Morris, Johnson, Mounce). (2) 전능하신 이. 분 칭호는 앞서 언급된 '큰 권능을 잡으시고'와 연관된 것으로 하나님의 권한과 힘에 대적할 자가 없음을 시사한다(1:8, Morris, Mounce).

성 경: [계11:18]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일곱째 나팔 재앙]

⭕ 이방들이 분노하매...하더라. - 본문은 시 2:2과 병행된다. 열방들은 서로 의논하여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으신 종을 대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대적과 분노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원인 제공의 역할만 하게 되었다(시 2:5, 12).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보상은 세 범주의 존재들에게 주어진다.

⭕ (1)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 '죽은 자'는 20:11-15과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인류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의 여부가 정해지게 된다(Ladd, Johnson).

⭕ (2)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칭찬과 보상받을 자에 대해 세 부류 즉 1. 종 선지자(18:20), 2. 순교자나 모든 시대의 믿는 자를 의미하는 성도들(5:8;8:3;13:7, 10;15:4;16:6;18:20, 24), 3.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14:7;15:4)로 나타난다. 이러한 세 부류의 차이를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요한이 이렇게 설명한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보상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시대의 믿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Morris).

⭕ (3)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은 바벨론이나 짐승 혹은 거짓 선지자나 용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의 무리를 나타낸다(16:13;19:2, 11;20:10. Beasley - Murray, Johnson). 이러한 자들은 그날에 멸망을 달할 것이다.

성 경: [계11:19]

주제1: [두 증인과 일곱째 나팔]

주제2: [일곱째 나팔 재앙]

⭕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성전은 지상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전이다. 하늘이 열리면 보여진 언약궤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 그들에게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약속의 상징이었다. 언약궤는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침략과 성전의 손실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외경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회복 때까지 언약궤를 숨겨둔 것으로 되어 있다(마카비 2서 2:4-8).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도래 시에 언약궤의 회복을 통해 구원을 소망하는 유대인들의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Mounce). 그러나 본절의 언약궤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지상성전의 언약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과 백성간의 새 언약을 암시한다(Johnson). 옛 언약하에서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언약궤가 있는 지성고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그를 의지함으로 수시로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하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9:11, 12;10:19-22). 그러므로 본절의 언약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Johnson, Morris), 한편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들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임재 시에 나타나는 그의 권능과 엄위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4;5;6:12;8:5;16:17-21) 하나님의 임재와 그 백성에 대한 보호를 시사한다(Johnson).

성 경: [계12:1]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한 여자가 있는데. - '큰 이적'(*, 세메이온 메가)에서 '이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표징'(sign, NIV)을 뜻한다. 요한은 '큰 표징'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본절의 '한 여자'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Johnson). 요한이 본 여자의 환상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 여자가 '마리아'를 의미한다고 본다(Ignatius, Plummer). 그러나 이 여자가 사단인 용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과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 핍박받는다는 이야기가 본장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의 모친 마리아로 보기가 어렵다. (2) 혹자는 이 여자가 '유대민족' 또는 '유대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ffatt, Walvoord).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본절의 두 별은 열 두 지파를 의미하는데(창 37:9-11),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황도대(zodiac, 21:13 주석 참조)의 12궁을 열 두 지파로 보았으며 그들 지파의 깃발이 12궁의 이름과 일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본문의 내용을 선명하게 해주며 최근에 와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내증(內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큰 결점이다. 즉 메시야가 탄생한 후에도 용이 여자를 핍박한다는 사실이 곧 유대 민족에 대한마귀의 공격을 언급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3) 혹자는 이 여자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본다(Mounce, Johnson, Morris, Alford, Bengel, Charle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여자의 모습을 세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 해를 입은. -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 혹은 광채(1:16)를 암시하기도 하며 빛을 입은 그녀의 품성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 이는 영원성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으며(시 72:5;89:37), 그녀의 통치성(統治性)을 나타내기도 한다.

⭕ 그 머리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 이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21:12)나 열 두 사도 (21:14), 혹은 그 둘을 모두 암시한 표현으로 왕권을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12:2]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 여인이 낳은 '아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여자를 유대교로 보고 아이를 기독교로 보아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Walvoord, Moffatt). (2)혹자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Ladd). (3) 혹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된 교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harles, White).세 가지 견해 중 뒤의 두 가지 견해가 타당성을 지닌다. 성경에서 '여인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창 3:15;갈 4:4) 문맥상 아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5, 10절). 또한 17절에서 여인이 또다른 자손 곧 성도들을 낳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아이'는 그리스도는 물론 그의 지체된 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는 자주 등장한다. 즉 그리스도의 철장 권세가 교회에게 전이되며(5절;2:26), 여인인 교회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 생명을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인내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히 6:7, Kiddle, Johnson).

성 경: [계12:3]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 '또 다른 이적'은 1절에 언급된 '이적'과 같은 개념으로 '큰 붉은 용'을 가리킨다. 이 '큰 붉은 용'은 곧 사단이다(9절).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인 '큰 붉은 용'을 상징적으로 '라합'(욥 26:12;사 51:9), '하마'(욥 40:15-24), '리워야단'(사 27:1) 등으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용'을 수식하고 있는 '큰'은 사단의 굉장한 권세를 나타내며, '붉은'(*,퓌르로스)은 지옥과 피의 빛깔로(6:4) 사단의 살인하는 성격을 나타낸다(요 8:44, Mounce). 한편 용의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쓴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용인 하에 세상을 지배하는 와의 권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3:1;19:12, Mounce, Hendriksen). 또한 '뿔'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단의 거대한 파괴력을 나타낸다.

성 경: [계12:4]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 '하늘 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사단에게 굴복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ilje, Johnson). (2) 혹자는 용의 추종 세력으로서 하나님께 대적한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Hughes, Mounce).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벧후 2:4;유 1:6, 9). 용이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던진다는 것은 자신의 추종 세력 즉 마귀들로 하여금 엄청난 세력으로 세상을 향해 공격하도록 하였음을 암시한다(8:7-12;9:15, 18).

⭕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 용이 아이를 삼키고자 한 것은 역사적으로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햄과 까 지경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아들을 모두 살해한 사건을 위시하여(마 2:16ff.)예수의 생애 동안 그를 죽이려 시도했던 것(눅 4:28-30)을 포함하며 마침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사건을 상징하는 듯하다(Hughes, Johnson). 즉 사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한다(Ladd).

성 경: [계12:5]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여자가 아들은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이라는 표현은 시 2:7-9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실 왕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신다(사 9:6). 이러한 왕 노릇은 그를 따르고 충성을 다한 그리스도인에게도 부여된다(2:27;19:15).

⭕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본문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본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탄생과 승천에 대해서만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삼카려 하는 사탄의 위협속에서도 탄생하셨으며 승천하셔서 사단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성취하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그의 지체된 교회도 이미 승리에 동참하였으며 장차 사탄으로부터 온전한 승리를 쟁취하고 들어 올려질 것이다.

성 경: [계12:6]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 여자가 광야로 도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한 견해는 여섯 가지이다. (1) 혹자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예루살렘 침공을 피하기 위하여 A.D. 66년 벧라(Pella)로 탈출한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하였다(Eusebius, Methodius). 벧라는 지금의 타바캇 파힐(Tabaqat Fahil)을 가리키는 곳으로 갈릴리 바다 남쪽약 32km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2) 혹자는 이 여자를 예수의 모친 마리아로 보아 이 도피가 예수께서 태어날 당시 애굽으로 피난하셨던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clay). (3) 혹자는 교회가 핍박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를 유지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Lilje). (4) 혹자는 핍박으로 인해 숨어 있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wete). (5) 혹자는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가 보전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alvoord). (6) 혹자는 교회가 핍박을 피하여 보호와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ird, Farrer, Ford, Johnson, Mounce). 여러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 '일천 이백 육십 일'이라는 기간은 핍박의 기간으로(11:2;13:5 주석 참조)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하신 양육기간으로 나타난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을 피난시켜 양육하며 핍박에 대항 할 수 있는 능력과 인내를 허락하신다(Mounce).

성 경: [계12:7]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 미가엘과 용의 싸움에 대한 묘사는 용이 여자를 핍박하여 그녀로 하여금 광야로 피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Johnson). 유대 전승에 따르면 사단은 본래 천사였으나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이유로 인해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은 함께 하늘에서 쫓겨나 공중에서 활동한다(위경 에녹 2서 29:4, 5). 이러한 사단 무리와의 전쟁은 천사장인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에 의해서 수행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전투에서 싸워 승리하는 자는 그리수도가 아니라 미가엘이라고 주장한다(Mounce). 그러나 10-12절로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면 사단을 궁극적으로 패배하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였다. 따라서 본절의 사단과의 싸움은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 즉 인간으로 오심과 사역, 그리고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되어 있다(13절;마 12:28, 29;눅 10:18;요 12:31;행 10:38;딤후 1:10;요일 3:8, Johnson, Ladd)

성 경: [계12:8]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 사단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그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해 왔었다. 그러나 사단과 그의 사자들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하늘에서 그들의 처소를 박탈당하고 만다. 혹자에 의하면 이 사단과의 전투는 단기간에 걸친 전투라기보다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싸워온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Hughes). 전투기간이 짧든 길든 간에 본절에 강조되어 언급된 것은 사단이 땅으로 내어 쫓긴 사실이다(9절).

성 경: [계12:9]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 '큰 용'의 다른 명칭인 '옛 뱀' 은 창 3:1 이하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든 뱀을 가리킨다. 또한 '큰 용'은 마귀 및 사단으로 나타난다. '사단'(*, 사타나스)은 원래 '대적'(對敵)이라는 뜻을 지니며 '마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참소자나 중상하는 자를 의미한다(욥 1:6-11;슥 3:1-10). 이들의 역할은 온 천하를 두루 다니며 사람들을 꾀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하는 것이다(2:20;13;14;18:23;19:20;20:3, 8, 10;마 24:24;고후 11:3;딤전 2:14). 이러한 사단이 땅으로 내어 쫓기는 것은 종말의 시작을 암시한다(눅 10:18, Lije).

성 경: [계12:10]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 '우리 하나님'의 헬라어 '투 데우 헤몬'(*)은 뒤에서 나오는 세 단어 '구원과 능력과 나라'를 모두 수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가 역사 속에 실재로서 나타나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단을 패배시키셨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권세와 통치하심에 참여하게 된다(5:9;시 2:8;마 28:18;요 17:2, Mounce, Johnson). 한편 사단의 결정적 패배에 대한 증거는 참소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쫓겨난 것이다. 사단은 참소자로서 성도들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서 고발하였다(욥 1:6-12;2: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 사역을 성취하시고 사단을 패배시켰기 때문에 사단의 고발은 더이상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연히 그의 활동 무대였던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눅 10:18).

성 경: [계12:11]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본절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 자들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성도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1:5), 나라와 제사장과 왕의 권세를 부여한(5:9, 10)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 곧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였으며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증거함으로 사단을 이기었다. 한편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말은 성도들이 순교하기까지 어린양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며 그에 대해 증거하였음을 시사한다. 성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사단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가 심자가에 죽으심으로 승리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죽음으로써 사단을 이긴 것이다(1:9;6:9;14:12;20:4). 즉 사단이 성도들을 죽임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을 격파하고 승리하는 순간이다(롬 8:35-37 주석 참조. Hughes).

성 경: [계12:12]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 사단의 패배와 하늘로부터 쫓겨남은 두가지 현상을 일으킨다. 하나는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 즉, 천사들은 즐거워하게 된다(Ladd, Mounce). 여기서 '거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케눈테스'(*)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영원히 거주하는 것을 시사한다(Morris). 또 다른 하나는 땅과 바다가 화를 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최후의 심판이 얼마남지 않았으므로 사단이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짐에 따라 그가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의 필사적인 활동으로 인해 교회는 전에 없는 극도의 핍박과 시련을 당하게 된다. 이때 성도들도 핍박을 당하게 되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사단은 이미 패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Morris). 본문에서 요한은 성도들에게 사단이 최후 투쟁을 시도하는 이 기간에 굳건히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Mounce).

성 경: [계12:13]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용이 자기의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 본문은 다시 9절과 연결된다. 여인이 낳은 아이를 삼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4, 5절), 하늘의 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내어 쫓긴 용은 이제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게 된다. 여기서 '남자를 낳은 여자'는 '참이스라엘' 즉 혈통을 따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배성이 된 영적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Morris). 한편 '핍박하는 지라'의 헬라어 '에디와센'(*)은 문자적으로 '추격하다'라는 의미로 여인을 향한 용의 이러한 추격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빠져나올 때 바로가 그 뒤를 추격해 온 것과 유사하다(출 14:8, Johnson, Mounce, Hughes). 이러한 사단의 추격은 교회가 당한 고난을 상기시킨다.

성 경: [계12:14]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는 출 19:4의 반복이다(Hughes, Johnson). 여기서 '독수리의 날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한다(출 19:14;신 32:10, 11;사 40:3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어 시내 광야에 이른 것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한 것으로 표현한 바와 같이 본문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일천 이백 육십 일'(6절), '마흔 두달'(11:2)과 동일한 기간이다. 이 기간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폭정하에서 유대인들이 핍박받았던 3년 6개월과 일치한다. 그러나 본절에서의 기간은 하늘 전쟁에서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난 사단이 분풀이하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양육하시는 시간을 나타낸다.

성 경: [계12:15]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하되. - 용은 바다의 짐승(욥 7:12;렘 51:34-42;겔 29:3-6), 악어(시 74:12-19;겔 29:3) 등으로도 불려졌기 때문에 그 입에서 물을 토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물을 강같이 토한다'는 것은 홍수같은 것을 의미한다(Mounce). 성경에서 홍수는 주로 심판과 환난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인데(시 69:15;90:5;사 59:19;렘 46:7;단 9:26;암 9:5) 본절에서는 사단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려고 저지르는 온갖 형태의 파괴를 상징한다. 이러한 '홍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초대교회를 말살하려고 했던 '핍박'이나(행 8:1-3, Preston, Hanson)혹은 마지막 때에 택함 받은 자들까지도 넘어지게 하는 '미혹'을 의미할 수도 있다(13:14;마 24:24;살후 2:9-11, Mounce).

성 경: [계12:16]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 '땅이 ...강물을 삼키니'는 팔레스틴 땅이 주로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떤 큰 홍수가 일어난다 해도 얼마가지 않아 땅 위의 물을 모두 흡수하게 되는 지리적 환경을 반영한 것으로 출 15:12에 진술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보호를 시사한다. 애굽의 군대들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을 해하고자 하는 사단의 수많은 궤계에서 성도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실 것이다.

성 경: [계12:17]

주제1: [여자와 용의 환상]

주제2: [여자와 용의 환상]

⭕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모래 위에 섰더라. - '여자의 남은 자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남은 자손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Glasson). (2) 혹자는 여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남은 자손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alvoord). (3) 혹자는 여자는 '팔레스틴의 교회'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남은 자손은 로마 제국 도처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4) 혹자는 여자는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 전체'를 상징하는 반면 남은 자손은 신앙 공동체 중에서 사단의 핍박으로 인해 '순교당하는 개인으로서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wete, Caird, Kiddle).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자체를 파멸시킬 수는 없으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성도 개개인들'은 핍박하고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 개개인을 향한 가단의 공격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결코 사단의 승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사단이 예수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매달았을 때 그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단이 성도 개개인을 핍박하고 순교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은 결국 성도들에게 궁극적인 믿음의 승리를 안겨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성 경: [계13:1]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 11:7에서는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다. 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에 대한 환상은 17:9-13과 단 7장을 배경으로 한다. 다니엘에서 나오는 짐승들은 역사상 일어났던 지상의 제국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각각의 나라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적인 정붇들마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바다'는 모든 나라들과 그 정부를 총칭한 것으로 볼 수있다(17:15). 한편 '바다'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짐승은 구약 성경의 리워야단을 연상시킨다(시 47:13, 14). 구약성경에서 인용된 리워야단과 라합, 뱀 등의 짐승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애굽과 앗수르 등의 열강들을 의미한다(사 27:1;51:9;겔 32:6-8).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본절의 짐승은 당시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단순히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기 보다는 인류 역사상 정치 제도를 통해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Johnson, Hendriksen).

⭕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 본문에서 나타난 짐승들의 모습은 12:3에 나오는 용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단지 차이점은 본문의 짐승들은 뿔들에 면류관이 얹혀 있는 반면에 12:3의 용에게는 머리에 면류관이 씌워 있다는 것 뿐이다. '열개의 뿔'은 단 7:7을 반영한 것으로 다니엘서에서 이뿔들이 열 왕(王)을 상징하듯이 본문의 열 뿔도 열 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17:12). 이러한 열뿔이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왕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17:12 Mounce). 또한 '일곱 개의 머리'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12:3) 짐승의 권세가 용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시사한다(13:4). 한편 '참람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스'(*)는 '훼방하는' 또는 '모독하는'이란 의미로 혹자는 이것이 로마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de, Hengstenberg). 즉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는 자신을 신으로 공경해 주기를 원하였으며 네로는 주화에다가 자신을 세상의 구세주로 새겨넣었으며 도미티안은 로마 인들로부터 "우리의 주(主)이시며 하나님"(Dominus et Deus noster)으로 불리운 사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이 단순히 로마 황제들만을 상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강력한 권세를 자랑하며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를 드러낼 악의 세력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Ladd, Johnson, Mounce, Hendriksen). 요컨대 이런 세력은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에 대한 망언을 일삼는다.

성 경: [계13:2]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 본문은 짐승의 형상에 대한 묘사이다. 짐승의 형상은 단 7장에 언급된 세 마리의 짐승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즉 '표범과 비슷하고'는 다니엘이 본 세번째 짐승과 같고, '곰의 발'은 두번째 짐승을 나타내며 '사자의 입'은 첫번째 짐승을 나타낸다. 이러한 짐승의 모습은 그 짐승의 흉포스러운 성격과 외형을 나타낸다. '표범'은 신속함과 무자비함을, '곰'은 힘과 끈기를, '사자'는 권세와 지배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요한이 본 짐승이 전에 있던 어떠한 나라나 권력보다도 더욱 무서운 권력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임을 시사한다(Alford, Hughes).

⭕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 짐승은 용, 즉 사단으로부터 그의 권세를 부여받았다. 여기서 용과 짐승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용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하고 땅으로 쫓겨났었다(12:9). 지상으로 쫓겨난 용은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짐승으로 비유된 세상 권력에게 양도하여 그것을 도구로 삼아 교회와 성도들을 조직적으로 핍박하게 될 것이다(엡 6:10, 12).

성 경: [계13:3]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라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 상처를 입은 머리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이 머리가 네로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Weiss, Moffatt). 네로는 A.D.64년에 교회를 가혹하게 핍박하였다. 폭군 네로는 그의 통치 말기에 실정으로 말미암아 근위대와 원로원에서 쫓겨나 치욕적인 죽음을 강요받았는데, 그는 그 죽음을 거부하고 68년 6월에 교외 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그가 너무도 극악 무도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사실로 믿지 않았으며, 공식적인 장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동방의 파르디아(Parthia)로 갔다가 다시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왕권을 회복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네로 재현설'이라 하는데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본문의 상한 머리 하나가 네로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가톨릭 교회의 초기 교황들, 즉 그레고리 7세에서 이노센트 3세까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3) 혹자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머리의 회복이 아니라 짐승의 회복으로 상처의 회복은 네로의 죽음 이후 혼란되었던 로마를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 A.D. 69-79)이 바로잡아 질서를 회복한 사실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본문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여 단지 짐승이 그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4) 혹자는 일곱 머리를 어떤 개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계속해서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적인 정부들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예를 들어 교회를 극심하게 박해하던 네로 황제가 죽은 뒤 다시 도미티안 황제가 교회를 핍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짐승이 다시 회복된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본문은 비록 사단의 세력이 한순간 약해지고 치명타를 입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끝까지 성도들과 교회들을 핍박하여 미혹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성 경: [계13:4]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용이 짐승에세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 세상 권력을 상징하는 짐승을 경배하며 짐승에게 권력을 부여한 용을 경배하는 것은 세상 권력을 신격화하여 숭배하며 그에게 권력을 부여한 사단, 즉 용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로마 제국과 같이 세상 권력을 신격화 하는 배후에 사단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Cullmann). 한편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는 하나님에 대한 찬미 구절인 출 15:11의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시 35:10;113:5)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짐승을 하나님과 비교한 불경스럽고도 참람한 표현이다(Swete). 이제 이 짐승은 인류 전체체계 숭배를 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자신이 최고로 강한 자임을 과시한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어 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그에게 경배한다.

성 경: [계13:5]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은 단 7:8의 넷째 짐승으로부터 돋아난 뿔에게 주어진 '큰 말하는 입'과 유사하다. '참람된 말'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을 가리킨다(6절;단 7:25;11:36). 한편 '마흔 두 달'은 짐승이 교회를 핍박하는 기간을 상징한다(11:2, 3;12:6, 13, Mounce, Johnson). 이때 짐승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을 미혹하게 된다(15절 ;11:2 ,9). 짐승이 이러한 권한은 용에게서 주어진다. '받으니라'는 짐승이 행하는 권세가 용에게서 받은 것으로 용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모든 권세와 주인이신 하나님의 허락하에 주어진 것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3:6]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 '훼방하되'의 헬라어 '에이스 블라스페미아스'(*)는 '신성을 모독하기 위하여'라는 의미로 짐승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시사한다(살후 2:4).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러한 행위들은 역사속에서 자주 나타났다. 즉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신성 모독이나(단 7:25;11:36), 로마의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한 사건들은 요한에게 있어서 적그리스도적인 일이었으며 지극히 참담한 행위였다(Morris). 이러한 행위들은 당시 뿐만 아니라 역사상 사단에게 종속된 수많은 짐승들에 의해서 계속 자행되고 있다. 한편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와 성도들을 가리킨다(Morris, Ladd). 성도들은 하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으며(빌 3:20)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 2:6;골 3:1). 하나님을 따르고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 역시 사단과 짐승이 훼방하는 대상이다.

성 경: [계13:7]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 '성도들과 싸워'는 사단과 성도의 물리적인 전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을 의미한다(2:16;11:7;12:7, 17;16:14;17:14;20:8;고후 10:4). 또한 '이기게 되고'는 근본적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성도들을 핍박하여 고난과 수교를 당하게 하는 것을 나타낸다(마 10:28). 짐승은 용으로부터 모든 족속, 백성, 방언 및 나라를 다스리는 우주적인 권세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사단의 세계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단은 우주를 지배하는 권세를 받아 메시야처럼 군림하려고 시도한다(눅 4;4-7). 그러나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일시적으로는 짐승의 세계를 지배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이 승리하며 짐승은 패배하여 멸망당하게 된다(11:7).

성 경: [계13:8]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생명책'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출 32;32, 33에서 모세가 금신상을 만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때 자신의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빌 4:3) 본서에서는 여섯 번 나타난다3:5;13:8;17:8;20:12, 15;21:27). 본절과 21:27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으로 표현되어 있어 어린양의 죽음이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함을 암시하고 있다(5:9, 10). 한편 헬라어 문법상 '창세 이후로'는 '녹명되지 못한'을 수식할 수도 있고 '죽임을 당한'을 수식할 수도 있다. (1) '녹명되지 못한'을 수식할 경우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창세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 즉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게 된다. 이 경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보호되고 있음을 암시한다(8절; 17:8;벧전 1:20). (2) '죽임을 당한'을 수식할 경우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사실임을 강조하게 된다. 헬라어 문법상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내용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못할 경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Johnson, Mounce). 어린양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역사하신 구속사역에 참여하고 응답하는 자들, 즉 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결국 짐승의 추종자가 되어 짐승과 그에게 권세를 부여한 용을 경배하게 된다.

성 경: [계13:9]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누구든지 귀가 있으면 들을지어다. - 본문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며(2:7, 11, 17, 29;3:6, 13, 22) 예수께서도 동일한 어구를 사용하신 적이 있다(마 11:15;막 4:9). 요한은 본절을 진술함으로써 앞으로 언급하게 될 내용에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성 경: [계13:10]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첫번째 짐승의 환상]

⭕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본절의 '사로잡는 자는...칼에 죽으리니'는 렘 15:2;43:11의 반영으로 그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칼에 죽이리니'를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박해자들에 대한 진술로 이해한다(Weiss, Clarke). (2) 혹자는 '사로잡는 자'와 '칼로 죽이는 자'를 박해를 당하는 성도의 행위로 해석하되 전자는 성도가 사로잡혀야 함을 암시하고 후자는 박해자들에 대해 성도들이 칼로 대적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는 경고로 해석한다(Morris, Mounce, Ladd). (3) 혹자는 '사로잡히게 될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임을 당할 자는 칼에 죽으리니'라고 이해하여 성도들이 사로잡히고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ohnson, Charles, Lohmeyer, Moffatt). 이들 세 가지 견해 중 두번째와 세번째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9절과 본절 하반절이 성도의 인내와 충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마지막 때가 가까워 사로잡히거나 칼에 의해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기억하고 저항하지 말고 잘 순종하며 인내해야 한다. 즉 성도들의 고난과 순교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마지막 환난을 침착하게 견디면서 하나님을 향한 각자의 인내와 충성심을 표명(表明)해야먈 한다(2:10;3:5, 10;빌 1:28).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믿음과 인내이다.

성 경: [계13:11]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내가 보매 또 단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 하더라. -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새끼 양처럼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데' 이는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를 흉내내려는 사단의 음모라고 할 수 있다(8절;5:6;14:1). 이 두번째 짐승이 등장함으로써 사단의 세력은 용, 바다 짐승, 땅의 짐승이라는 삼두체제로 구성된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 권세를 가지고 밖으로부터 교회를 핍박한 국가나 정치 체제로 이해되나 본절에서 나타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양의 탈을 쓰고 내적인 방법, 즉 거짓 교리와 이단 사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인본주의로 교회를 타락시키는 존재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본서의 다른 곳에서 이땅의 짐승을 거짓 선지자라고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16:13;19:20;20:10).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고 경고하셨다. 한편 '용처럼 말하더라'는 짐승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으로 비록 그가 그리스도처럼 가장할지라도 그 속은 사단의 궤계로 가득차 있으며 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외부적인 핍박에 대해서 도 인내할 준비를 해야 되지만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같은 내부적 도전에 동요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말씀에 근거한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롬 16:18;고후 11:14).

성 경: [계13:12]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 용이 자신의 권세를 바다 짐승에게 준 것처럼(4절), 땅의 짐승도 바다 짐승으로 부터 권세를 부여 받는다. 따라서 이 두 짐승은 용, 즉 사단의 도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들이다(Hughes). 땅의 짐승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3절 주석 참조), 곧 바다 짐승에게 경배케 하는 것이다(14, 15절).

성 경: [계13:13]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 둘째 짐승은 기적을 흉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을 섬기도록 미혹한다(막 13:22;살후 2:9). 둘째 짐승이 행하는 이적 가운데 하나는 불이 하늘로 부터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이 이적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이 내려오게 한일을 암시할 수도 있으며 (왕상 18:38),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을 암시할 수도 있다(11:5). 여하튼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든지 간에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용과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막대한 권능을 행하며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이적을 베풀어 사람들을 미혹함을 시사한다(Ladd, Morris, Johnson). 이와 같이 사단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도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자신들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이적을 베풀 수 있다(16:14;19:20;신 13:1-5;마 7:22;24:24).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적 자체가 성령의 증거가 아님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요 16:13;고후 11:14).

성 경: [계13:14]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 '땅에 거하는 자들'은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13:8;17:8) 불신자들을 지칭한다(6:10;11:10).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이적들에 현혹되어 그를 추종하게 되며, 거짓 선지자는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3절 주석 참조)의 형상을 만들어 숭배할 것을 추종자들에게 요구한다. 이것은 초역사적인 것으로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 곧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전 세계적인 우상 숭배를 시사한다(Johnson).

성 경: [계13:15]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 우상이 이적을 행하고 말을 한다는 것은 고대 문헌 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몬 마구스(Simon Magus)는 동상들에게 생명을 준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로마의 종교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은 마술을 행하고 입을 벌리지 않고 말하는 술법을 사용하여 황제의 동상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고 권력자들과 야합하며 생활하였다(행 13:6-8;16:16). 그러나 본절에서 언급되는 짐승의 우상이 생기를 얻는 것과 로마의 제사장들이 기만하는 행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전 세대에 걸쳐 거짓 선지자들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여(마 24;24)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며 지상의 정부 권력이 사단의 도구가 되어 교회를 더욱 탄압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Hendriksen). 즉 우상에게 '생기'(*, 프뉴마)를 주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과 짐승의 미혹케 하는 행위와 우상 숭배 행위가 활발하여 극에 달함을 암시한다(Johnson).

성 경: [계13:16]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 둘째 짐승은 우상 숭배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 여기서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는 수사적인 표현으로서 서로 대조를 이루는 어휘를 열거하여 인류 사회 전반을 나타내고 있다(11:18;19:5, 18;20:12). 한편 '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라그마'(*)는 문서상의 공식적 증거물로 남는 '명각'(銘刻)이나 뱀에 물린 '상처', 황제의 '날인' 또는 주인이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하여 짐승이나 노예에게 찍는 '낙인'등을 가리킬때 쓰는 단어이다. 표는 본서에서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표시하시는 인이며(7:3) 또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나타난 짐승의 표이다. 하나님의 인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본문의 짐승의 표도 문자 그대로 몸에 인을 찍어 증명한 표라기 보다는 짐승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인듯하다(Johnson, Ladd). 한편 '오른손'은 신체적 활동을 대표하는 것이며, '이마'는 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 신분 등을 의미한다(Hendriksen). 즉 '이마'나 '오른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전심으로 짐승에게 충성함을 시사한다.

성 경: [계13:17]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 본문은 짐승의 표 대신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적인 제재가 가해질 것을 가리킨다(Johnson, Mounce). 이처럼 사단은 세상 권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삶의 가장 기본적 단위가 되는 경제 활동까지도 방해하여 성도들의 생활을 위협한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 성도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성도들이 '비방과 환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였다(2:9;3;8;롬 15:26;히 10:34).

성 경: [계13:18]

주제1: [두 짐승의 등장]

주제2: [두번째 짐승의 환상]

⭕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 짐승의 수인 666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1) 숫자 풀이를 통한 해석이다. 혹자는 '그 수를 세어 보라...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이것이 누구의 이름을 가리키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왔다(Barclay, Abbott, Gunkel). 이러한 해석은 666이 수많은 사람들, 즉 로마 황제 칼리굴라, 트라얀, 배교자 유리안, 반달족, 교황 베네딕트 9세와 바오로 5세, 마호메트, 마틴 루터, 존 칼빈, 그리고 나폴레옹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 중에서도 숫자에 의한 해석법을 취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은 666이 '네로 황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일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네로 황제의 히브리음이 네론 가이살(NRON KSR)로서 각 철자 자체가 내포하는 숫자, 즉 50 + 200 + 6 + 50 + 100 + 60 + 200을 모두 합치면 666이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이 666은 아라비아 숫자를 1에서 36까지 합한 수이기도 한데 본서에서 짐승의 활동이 36번 나오고 있다고 지적된도 한다(Abbott, Gunkel). (2)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해석이다. 숫자의 상징적인 의미의 예로서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십사 장로, 십사만 사천 명의 인 맞은 자, 새 예루살렘 성곽의 144규빗 등을 들수 있다. 이와 같이 666은 어떤 사람 이름의 알파벳 숫자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완전수인 7에서 1이 모자란 불완전한 수 6을 3번 포개 놓은 것으로 이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완전에 대한 마귀적인 모방, 현혹성, 저주 등을 의미하며 우상 숭배와 신성 모독을 상징한다고 본다(Irenaeus, Minear, Newman, Hendriksen, Ladd, Morris, Walvoord, Johnson, Seiss, Gaebelein).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이 옳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으나 666을 이름의 암호로 보기보다는 상징적인 숫자로 보는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듯하다.

성 경: [계14:1]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

⭕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의 모습은 12:17에 묘사된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의 모습과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시온 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약간씩 차이가 났다. 즉 포로 시대 이전에는 유다의 전영토와 이스라엘 전족속을 의미했고 포로 시대 이후에는 성전과 예루살렘성을 가리켰다. 또한 구약성경과 예언서에서 시온은 메시야가 오셔서 구속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는 장소를 상징했다(시 48:1;사 24:23;욜 2:32;미 4:1, 7). 이러한 배경을 지닌 '시온 산'이 본문에서 어디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실제적으로 지상에 있는 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2) 혹자는 영적인 세계인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거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Kiddle, Bengel, Plummer). 이들은 히 12:22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에서 '시온'을 '하늘의 예루살렘'과 관련시켜 이해한다. (3) 혹자는 지상에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 또는 천년 왕국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Beasley - Murray, Beckwith, Charles). 이들은 히 12:22의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갈 4:26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무두 하나님이 계신 하늘 시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땅에 거하는 구속 받은 성도들에게 이 땅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의 전형이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 그와 함께 심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 본문의 십사만 사천 명은 7:4절에 언급된 십 사만 사천명과 같은 무리들로 단순히 유대 지파나 유대인 성도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Ladd, Mounce, Caird). 이 무리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13:16)과는 달리 이마에 아버지와 어린양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어서 그들이 짐승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임을 시사한다. 본장에서 십사만 사천 명을 구성하는 무리들은 본서 7장의 무리와 동일인들이지만 사건은 7장보다 훨씬 진전되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져 있다. 즉 7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치심을 받으며 순교당한 무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장에서는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의 종말론적인 나라에서 부활하여 어린양과 함께 있는 것을 나타낸다.

성 경: [계14:2]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

⭕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 본절에서 요한이 들었던 '소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넨'(*)은 1:15절의 '음성'과 동일하다. 혹자는 구원받은 무리인 십 사만 사천 명이 합창하는 찬양의 소리라고 주장하나(Mounce) 천사들의 큰 합창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5:11;6:1;19:1, 6, Johnson). '많은 물소리'는 크고 우렁찬 소리를, '큰 뇌성'은 위엄과 승리를, '거문고 타는 소리'는 아름다운 선포와 조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의 찬양은 크고 위엄차고 듣기에 아름다운 소리일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을 환영하는 천사들의 노래로 볼 수 있다. 이는 지상에서의 승리와 하늘 나라에서의 기쁨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성 경: [계14:3]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

⭕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 본절의 '새 노래'는 5:9의 '새 노래'와 병행을 이룬다. 이 노래를 '새' 노래라고 한 것은 이 노래라 오직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창조된 무리들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Ladd). 이 노래는 죄 가운데 있는 옛 사람들은 배울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식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생명이 새로워진 새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다(2:17;롬 8:1-6;12:2).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십 사만 사천 인'은 '구속함을 얻은 자'(*, 호이 에고라스메노이), 즉 지상의 모든 족속 중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께 '사서 드려진'(*, 에고라사스, 5:9)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인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7:4-8)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다(7:14).

성 경: [계14:4]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여자와 성관계를 맺지 않은 독신 남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Kiddle, Glasson). (2) 혹자는 간통이나 간음과 같은 부적합한 성관계를 갖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harles, Alford). (3) 혹자는 성전(聖戰)을 위해 나가는 군인과 연관시켜 해석한다(신 23:9, 10;삼상 21:5;삼하 11:11). (4) 혹자는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켜 우상 숭배와 배교를 하지 않은 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larke, Johnson, Plummer, Ladd, Morris).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과 백성간의 관계를 흔히 남녀 관계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순결한 처녀로, 신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묘사하고 있다(왕하 19:21;사 37:22;렘 18:13;암 5:2;고후 11:2).

⭕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따라가는 자' 는 막 8:34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지상에서 생활하셨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나타낸다(Beasley-Murray). 혹자는 이것이 십 사만 사천명의 무리가 순교(殉敎)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추종하였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ounce). 한편 '처음 익은 열매'는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성물'(sacrifice)을 의미하였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첫 수확물'을 뜻하였다(Beasley-Murray). 이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출 23:19;느 10:35;잠 3:9;약 1:18).

성 경: [계14:5]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십 사만 사천 명의 성도]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 새 예루살렘성에 참예하지 못하고 영원한 유황 불못에 던져져 둘째 사망에 참예하는 자들 중에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이 있다(22;15). 반면에 본문의 십 사만 사천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이는 습 3: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들이 '흠이 없는 자' 즉 생활이 정결한 자이며 지상에 있는 동안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간직한 자들임을 시사한다(히 9:14;벧전 1:19).

성 경: [계14:6]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 8:13에서 독수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땅에게 거하는 자들에게 화(禍)를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게 본절에서는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며 '큰 음성'(7절)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이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본서에서 이곳에만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리는 복음이 아니라 7절에서 언급된 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며 그의 심판을 알리는 내용이다. 천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인정할것을 불신자들에게 선포하고 있다(Morris, Mounce).

성 경: [계14:7]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 '큰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듣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Morris).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곧 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실 것임을 암시한다(13:7).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천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직도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계14:8]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었던 자로다 하더라. - 둘째 천사는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들었던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한다. '큰 성 바벨론'은 단 4:30을 반영한다. 이는 세상 권세의 모형이며 불신과 부도덕이 팽배한 대도시를 상징한다(사 14장). 구약에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적이었으며사 21:9;렘 50:2;51:8) 본절에서 바벨론은 하나님께 반항하며 대적하는 배도적인 국가를 상징한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제국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권력을 사용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정황과 묵시문학적 표현 방법으로 보아 바벨론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Morris, Swete). 그러나 바벨론이 단순히 로마 제국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로마 제국은 물론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핍박하는 권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한다(Johnson, Morris).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오이누 투 뒤무테스 포르네이아스'(*)는 병렬로 된 두 개의 문장, 즉 '음행의 포도주'와 '진노의 포도주'로 번역될 수 있다. 이는 렘 51:7, 8을 반영한 것으로 사단으로 인한 악이 모든 나라들로 취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14:9]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 6절에서 선포하고 있는 천사의 메시지는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본절도 6절부터 계속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이것 역시 불신자들을 향한 천사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본절은 혹자의 주장대로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계속하면'이란 의미를 지닌다(Beasley-Murray). 즉 7절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하라는 천사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설사 불신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회개와 믿음으로 천사가 전하는 용서와 구원의 '영원한 복음'(6절)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짐승에게 경배할 경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10절)를 마시게 될 것이다.

성 경: [계14:10]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포도주 잔'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욥 21:20;시 75:8;사 51:17;렘 25:15-38).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즉, 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는 독주에 해당할 만큼 그 농도가 짙어 사람들이 그것을 마시게 되면 금방 취하여 인사불성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맹렬하여 한번 당하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파괴력으로 번죄한 인간을 엄하게 심판하신다(신 75:8;사 51:17). 한편 본절에서 '진노'로 번역된 헬라어들은 비록 개역성경에서는 동일하게 번역되었으나 서로 다른 두 개의 단어이다. 처음 '진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무'(*)는 뒤에 나오는 '진노'의 헬라어 '오르게스'(*)보다 감정적으로 격한 것을 나타내며 '오르게스'는 감정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분노를 나타낸다. 대개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 후자이며 '뒤무'는 본절과 롬 2:8절에서만 사용된다. 이렇듯 '진노'에 대해 다른 두 단어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분명한 사실로 엄중하고 공의로움을 시사한다(Ladd).

⭕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하였던 자들에게 내려질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주 나타난다(19:20;20:10;21:8). 이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형벌이가도 하다(20:10, 15;사 34:9, 10;눅 16:23).

성 경: [계14:11]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과 연결된 표현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관한 것을 온전한 기독교 교리로 보지 않고 '준 기독교적'(sub-christian)인 것으로 본다(Glasson). 이들은 배교한 자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저버린 자들이 받게 될 고통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Preston, Hanson). 그러나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함을 예수께서 치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막 9:43, 48;눅 16:19-31, Mounce). 짐승을 경배하며 그를 끝까지 따라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성 경: [계14:12]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짐승과 함께 그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고난에 처하게 되는 반면에(10, 11절) 성도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인해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으며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본절에서 성도들에게 인내로 하나님과 예수께만 충성할 것을 권면한다. 그 충성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예수'(*)는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믿음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성 경: [계14:13]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세 천사의 경고]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본절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번째 복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의미한다.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Mounce). 본절의 '자금 이후로'는 두 가지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1) '자금 이후로'가 무엇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죽는'을 수식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Plummer). 2. 혹자는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를 수식한다고 주장한다(Mounce). 두 가지 견해 중 문맥상 뜻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가 타당하다. (2) '자금 이후로'에서 '자금'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1.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ffatt). 2. 혹자는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ckwith). 3. 혹자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최후의 심판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 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예수께 대한 '믿음'(12절)을 가리킨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단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성 경: [계14:14]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또 내가 보니 희 구름이 있고 구름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에 대해서 혹자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심판하러 오시는 재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dd, Charles, Johnson). 한편 '흰 구름'은 마 17:5의 '빛난 구름'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심판하시기 위해 재림하신다(1:7;마 24:30).

⭕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 '금 면류관'은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 사단을 이기신 스리스도의 승리와 세상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통치권을 나타낸다(6:2;19:12). 또한 '손에 이한 낫을 가지신 것'은 욜 3:12-14을 반영한 것으로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권을 의미한다. 성육신과 부활로 사단에게 승리를 거두시고 복음을 선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세상에 대한 종말적인 심판을 통해 추수하시려 재림하신다(15절;마 13:37-43;요 4:35-38).

성 경: [계14:15]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 추수하라는 명령을 그리스도에게 전달하는 '또 다른 천사'(7:2;8:3;14:6)는 '성전'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수에 대한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7:15). 또한 '또 다른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음을 나타낸다(Ladd, Mounce). 한편 본문에 나타난 추수 비유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호 6:11;욜 3:13).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바벨론을 심판할 때 사용되었으며(렘 51:33),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도 최후의 심판을 추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마 13:30, 39). 그러나 비록 추수 비유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한다 할지라도 본절에서는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을 모으는 것 즉 백성의 구원을 묘사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포도 수확의 비유로 묘사되기 때문이다(17-19절).

성 경: [계14:16]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부려서 일을 하실 수도 있으나, 혹자의 지적대로 성도들을 거두어 들이는 일은 친히 낫을 휘두르신다(Ladd).

성 경: [계14:17]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 성도들의 수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다(16절).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한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은 천사가 수행하게 된다(18절). 여기서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왔다는 것'은 15절과 마찬가지로 불신자에 대한 심판의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을 암시한다.

성 경: [계14:18]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 또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오는데 이 '제단'은 6:9과 8:3-5의 기록으로 보아 의인의 기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Morris). 이것은 핍박받는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그 최종적인 결과로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일어남을 암시한다(Mounce, Morris, Ladd). 한편 이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에 대한 설명은 주어져 있지 않다. 외경에 따르면 천둥, 바다, 우박, 눈, 비등의 자연을 천사들이 각각 받아서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I Enoch 60:11-20). 여기서 언급된 천사는 8:3-5에 기록된 대로 향로에 단위의 불을 담아 땅에 쏟는 천사와 동일한 천사인듯하다. 불이 신약에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마 18:8;눅 9:54;살후 1:7)불 가진 천사는 아마도 심판을 유도하는 듯하다.

⭕ 이한 낫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 포도를 추수하는 것은 성경에서 심판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 63:2-3;욜 3:13). 여기서 '포도가 익었느니라'는 악한 자들의 불신과 죄악이 절정에 달하였고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신원의 때인 최후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14:19]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천사가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전지매. - '땅의 포도'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며 짐승과 사단을 추종하는 모든 불신자들을 지칭한다(Mounce). 이러한 포도는 수확의 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게 된다. 수확된 포도를 포도주 틀에 넣고 포도즙을 짜는 행위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대적에게 맹렬하신 진노를 발하시는 것의 비유로 나타난다(19:15;사 63:3;애 1:15;욜 3:13). 이것으로 보아 본절은 짐승과 사단의 추종자들이 이 땅 위에서 성도들을 무참히 핍박하여 피를 흘리게 했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당할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계14:20]

주제1: [격려와 공의로운 심판]

주제2: [최후 심판에 대한 예고]

⭕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 '성'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구약의 예언, 즉 최후의 전쟁이 예루살렘 근처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기록에 따라 이 성이 예루살렘성을 가리킬 것이라고 주장한다(Beckwith, Ford, Swete). (2) 혹자는 사도 요한이 본서 다른 곳에서도 '성'을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1:1, 2;20:9) '하나님의 성' 혹은 '새 예루살렘성'을 뜻한다고 주장한다(11:1;21:2, 10, Beasley-Murray, Kiddle, Charl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성'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가 거하는 곳을 가리키므로 '성 밖에서'라는 말은 구속받은 성도의 무리에 들지 못하고 멸망가운데 처하였음을 나타낸다(Johnson, Charles). 한편 '피가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는 위경에도 나오는 표현으로(에스더하 15:37) 악인이 당할 극심한 고통을 가리킨다. 또한 피가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다'는 말은 320Km에 해당하는 1,600 스다디온 만큼 대적자들의 피가 흘러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함을 의미하며(Ladd, Johnson) 동시에 땅의 수인 4의 제곱에 완전수인 10의 세제곱이 곱해지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도 예외없이 전세계의 '성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미치게 됨을 시사한다(Morris, Mounce).

성 경: [계15: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 '이적'의 헬라어 '세메이온'(*)은 본서에서 세번 나타난다(12:1, 3). 이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곱 천사가 행할 일곱 대접 재앙을 가리킨다(6-8절;16장, Ladd, Johnson). 일곱 대접 재앙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 이어 나타나는 셋째 화로서(11:14) 마지막 때에 심판을 종결짓는 절정의 사건이다(Hughes, Johnson). 한편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테'(*)는 '완성하다' 혹은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는 이번 진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에 경종을 울리는 마지막 재앙이며 이후에는 오직 마지막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 경: [계15:2]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보니...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유리 바다 가에 서서. - 본절에서는 '유리 바다'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혼용되고 있다. 이 '유리 바다'는 4:6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의 유리 바다는 4:6과는 달리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 (1) 불이 섞인. - 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리 바다의 장엄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으로 눈부신 순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Hughes, Johnson). 2. 혹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Swete, Morris, Hendrikse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2) 짐승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은 짐승에게 절하여 경배하거나 짐승의 수인 666을 받는 것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온 자들로서 짐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다(13:13-18;14:12, Ladd, Johnson). 그들은 하늘의 홍해라 할 수 있는 유리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다(Swete, Beasley-Murray).

⭕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 이것은 짐승을 이긴 자들의 기쁨의 찬양을 시사한다. 그들은 거문고를 가지고 승리의 기쁨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역사하신 구속의 승리를 경배하며 찬양한다(5:8;14:2).

성 경: [계15:3,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하더라. - 본문은 짐승을 이기고 유리 바다 곁에 서 있는 자들이 찬양한 노래이다.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두 가지의 노래 즉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가 다른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Ladd). 래드는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한 것이며 어린양의 노래는 짐승의 핍박과 위협으로부터 구원된 자들의 노래라고 주장한다. (2) 혹자는 한 종류의 노래라고 주장한다(Mounce, Beasley-Murray, Hughes, Morris). 이들은 두 가지의 노래가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어린양의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나 또는 모세의 출애굽의 구원이 어린양의 구원을 예표하는 모형이라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하나의 찬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전자의 경우 어린양의 노래를 짐승의 핍박으로부터의 구속으로만 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모세의 노래에 대해서 혹자는 신 32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Beckwith) 혹자는 홍해에서 수장을 통해 애굽 사람들의 추격을 퇴치하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출 15:1-18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easley-Murray). 그러나 본문의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가 출 15장과 신 32장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한 것으로 유대인 회당과 초대 교회에서 불리어진 것이었다(Johnson).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며 완전한 주권을 소유하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모든 자들을 진노로 심판하셔서 멸망시키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셔서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신 것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본문과 구약성경의 인용 구절들을 대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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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의 노래 | 본 문 | 구 약 성 경 본 문 |

| 어린양의 노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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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하나님 곧 전능 | | 암 4:13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 하신 이시여' | | 말 1:11 | '만군의 여호와' |

+----------------------+ +--------------+---------------------

| | | 시 139:14 |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

| '하시는 일이 크고 | | | 영혼이 잘 아나이다' |

| | | 시 111:2 |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

| 기이하시도다' | | | 이를 즐거워 하는 자가 |

| | | | 다 연구하는도다' |

+----------------------+ +--------------+---------------------

| '만국의 왕이시여' | 3 절 | 렘 10:7 | '열방의 왕이시여' |

+----------------------+ +--------------+---------------------

| | | 시 145:17 | '여호와께서는 그모든 행위 |

| '주의 길이 의롭고 | | | 에 의로우시며' |

| | | 신 32:4 |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 |

| 참되시도다' | | | 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

| | | |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

+----------------------+-------+--------------+-------------------

| | | 렘 10:7 | '열방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 |

| | | | 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

| '주여 누가 주의 | | 시 86:9 |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 |

| 이름을 두려워하지 | | | 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 |

| 아니하며 영화롭게 | | | 하며 주의 이름에 영화를 |

| 하지 아니하오리이 | | | 돌리리이다' |

| 까' | | 말 1:11 | '해 뜨는 곳에서 부터 해 |

| | | | 지는 곳 까지의 이방 민족 |

| | | |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

| | | | 것이라' |

+----------------------+ +--------------+--------------------

| | | 삼상 2:2 |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 |

| | | | 가 없으시니' |

| '오직 주만 거룩 | 4 절 | 시 99:3 |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

| | | | 찬송할 지어다 그는 거룩 |

| 하시니이다' | | | 하시도다' |

| | | 시 111:9 |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 |

| | | | 시도다' |

+----------------------+ +--------------+--------------------

| '주의 의로우신 일이 | | 시 98:2 |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

| 나타났으매' | | |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 |

| | | | 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

+----------------------+ +--------------+--------------------

| '만국이 와서 주께 | | 시 86:9 |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 |

| 경배하리이다' | | | 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 |

| | | | 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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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계15: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때에 법궤가 있었던 성막을 상기시킨다(출 25:16, 21;민 17:7;18:2). 그러나 옛 언약 하에 있었던 광야의 성막은 참 형상이며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을 예표하는 그림자이다(히 8:5). 참 실체인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 사실은 이미 11:19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며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Ladd).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확실성은 백성에 대한 구속의 완전함과 확실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대적한 악에 대한 진노의 심판 또한 확실한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계15: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 '성전으로 부터 나와'는 일곱 대접 재앙을 실현할 일곱 천사의 출현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한편 본절에 나타난 천사의 모습 중에서 '맑고 빛난'은 천사의 고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하며(단 10:5, Mounce)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는 구약 시대의 왕적인 직분과 제사장적 직분을 상징하는 것으로(출 28:4ff.)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대리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성 경: [계15: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 '세세에 계신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주권이 영원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권한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rris, Mounce). 하편 '대접'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알라스'(*)는 문자적으로 연희에서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나(암 6:6) 혹은 희생 재물의 피를 담기 위해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그릇을 의미한다(출 27:3). 이러한 '피알라스'는 5:8에서 순교자들의 신원하는 기도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노를 담은 대접에 사용되어 성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성도들의 탄원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게 하는 역할을 함을 시사한다(Ladd).

성 경: [계15: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의 준비]

주제2: [준비된 일곱 대접 재앙]

⭕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 '연기'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었다(출 19:18;40:34;대하 7:1-3;사 6:4). 본절에서 연기는 일곱 재앙을 통해서 악을 완전히 심판하시기 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시사한다. 한편 일곱 재앙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성전에 들어갈 자가 없다는 사실은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경외스러운 나머지 감히 접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대하 7:1-3;합 2:20, Mounce, Johnson). (2) 모든 피조물이 온전히 깨끗함을 입는 마지막 심판의 때가 지나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Hughes).

성 경: [계16: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은 사 66:6과 유사하다. 이 '큰 음성'에 대해 혹자는 3인칭으로 언급된 것을 이유로 일종의 천둥이라고 주장하나(Farrer) 하나님의 음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Morris, Ladd, Mounce). 왜냐하면 15:8에서 일곱 천사의 재앙이 마치기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 경: [계16:2]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 '헌 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코스'(*)는 출 9:8-11에 나오는 여섯번째 재앙인 '독종'이나 욥의 몸에 난 악창(욥 2:7)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첫번째 대접 재앙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려간 여섯번째 재앙과 같은 종류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애굽 사람들에게 독종이 발생했던 것과 같이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도 이런 재앙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재앙은 이미 욥이 고백한 바와 같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 준다(욥 2:7, 8, 13).

성 경: [계16:3]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 바다를 피로 변하게 하는 두번째 재앙은 애굽의 하수가 피로 변해 하수의 고기들이 죽고 물에서 악취가 나는 재앙과 유사하며 둘째 나팔 재앙(출 7:20, 21)과도 유사하다(8:8, 9). 그러나 둘째 나팔의 재앙은 바다 피조물 가운데 삼분의 일만 당하는 제한적인 것인 반면에 둘째 대접 재앙은 바다 가운데 거하는 모든 생물에게 미치는 것이다. 바다가 죽은 자의 피와 같이 응고되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는 상태로 변하게 되면 그 가운데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게 된다.

성 경: [계16: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 둘째 대접 재앙은 강과 물 근원에 떨어진다. 이 재앙은 셋째 나팔 재앙과 병행을 이룬다(8:10, 11). 또한 이것은 모세를 통해 나일 강과 애굽의 모든 물의 근원을 피로 변화 시켰던 첫째 재앙과도 유사하다(출 7:17-21;시 78:44). 물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다. 이러한 물의 근원과 강을 피로 변하게 하는 셋째 재앙은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임을 시사한다(Johnson).

성 경: [계16: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 '물을 차지한 천사'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유대인들이 모든 자연적인 힘 즉 바람, 해, 비, 물 등에 그것을 다스리는 천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근거로(에녹 1서 66:2) 물을 주관하는 천사라고 해석한다(7:1, Ladd). (2) 혹자는 앞절에 언급된 대접을 쏟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enski). 두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는 어렵다. 한편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선포한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은 1:4과 병행된다. 이 호칭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며 감정닿은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분이 아니심을 시사한다. 또한 '거룩하신 이'에서 '거룩'은 본절과 15:4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셔서 죄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Morris, Mounce)

성 경: [계16: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심판(4, 5절)이 의로운 이유이다. 이것은 사 49:26을 반영한다. 여기서 '마시게 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도카스 페인'(*)은 완료형으로 '마시도록 주어진'이란 의미이다. 이 완료형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래된 결과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하나님은 대적자들이 자신의 백성을 괴롭히고 핍박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한 대가로 저희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엄중한 심판을 행하신다.

성 경: [계16: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 제단의 말하는 음성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정당함을 다시한번 확언한다. 여기서 '제단'은 핍박을 받아 순교당한 영혼의 기도(6:9, 10)와 성도들의 기도와 연관되어 있다(8:3-5).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핍박받는 성도들이나 순교한 자들의 신원에 부응하는 응답임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한 분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당성과 정당성을 지닌 것이다(Ladd).

성 경: [계16: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 넷째 나팔 재앙에서는 해가 빛을 잃고 천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진 반면(8:12), 넷째 대접 재앙은 해가 오히려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불로 태운다. 이것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해가 어떤 뜨거운 기운에 상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7:16). '불'은 성경에서 흔히 심판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전 3:13;벧후 3:7). 본절에서 해로 하여금 불을 내어 태우는 심판을 할 수 있도록 권세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시사한다(Ladd, Mounce).

성 경: [계16:9]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원진지라 이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 본절은 해가 뜨거워서 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 반응은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완악하고 교만한 태도 뿐이다. 이 사실은 혹자의 지적대로 그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짐승의 본성을 그대로 닮았음을 시사한다(Caird). 이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를 회개하고 창조주를 받아들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계속해서 하나님을 모독, 훼방한다(사 52:5;롬 1:25;2:24).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는 짐승의 표를 받고 경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회개치 않고 오히려 거스려 훼방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향해 고의적으로 대적한 짐승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최후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14:10, 11;롬 1:21-23).

성 경: [계16:10]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 여기서 '짐승의 보좌'는 사도 요한 당시 세상 권력이 중심이 되어 우상 숭배를 강요하였던 로마 제국을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Plummer). 그러난 그 보좌는 단순히 로마제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보좌'는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 권세를 숭배케 한 모든 곳을 가리킨다(Johnson). 왜냐하면 본절의 '보좌'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로논'(*)이 버가모 교회의 '사단의 위'(*, 호 드로노스 투사타나)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2:13). 한편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는 애굽이 당했던 아홉번째 재앙을 상기시켜 준다(출 10:21-29). 이 어둠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9:2을 근거로 하여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연기로 인해 어두워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Charles). (2) 혹자는 국가적인 내전(內戰)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Kiddle). (3) 혹자는 교회를 핍박하는 로마 황제의 파멸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Caird). (4) 혹자는 어두움이 가시적이나 물질적인 것이 아닌 영적이며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Johnson).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21:25;22:5;요 8:12;12:35, 36, 46;요일 1;5-7;2:8-10;솔로몬의 지혜서 17:21). 이러한 어두움 속에서 짐승의 추종자들은 자신의 혀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야할 만큼 혹심한 고나난을 겪게 된다.

성 경: [계16:1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 본절은 다섯째 대접 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낸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칭호는 단 2:44에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이다(Morris).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나라를 멸하시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새로운 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다섯째 대접 재앙을 받은 자들은 온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교만하게 행한다.

성 경: [계16:12]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 여섯번째 재앙은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어 온 천하의 임금들이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려고 아마겟돈이라는 곳에 모이는 것이다(14절). 이 여섯째 대접 재앙과 여섯째 나팔의 재앙(9:14)은 유브라데 강을 중심으로 벌어질 전쟁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 그러나 두 재앙 사이에 차이를 보이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는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던 네 명의 천사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 위하여 놓여지는 반면(9:14)여기에서는 동방의 왕들, 즉 지상의 통치자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점이다. 동방의 왕들이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다는 말은 사도 요한 당시 크게 유행하던 소문, 즉 죽은 네로 황제가 다시 살아 파르티아 군대를 거느리고 유브라데 강을 건너 로마로 침공해 올 것이라는 네로 재생설을 그 배경으로하고 있다(Morris). 유브라데 강 동쪽 에는 우수한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인(Parthinans)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기원 1세기 어간에 이들이 로마를 침공할 것이라는 우려가 항상 있었다. 이러한 우리는 네로의 재생 신화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는데, 즉 자살했던 네로가 다시 살아나 파르티아 유목민들의 수장이 되어 로마 제국을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그 당시에 널리퍼져 있었다(Sibylline Oracles 4:115-139). 그러나 본절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 실제적인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Johnson, Minear). 이것은 오히려 세상의 종말론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동방의 왕들, 즉 악의 세력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마지막 최후의 결전에 임할 태세가 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계16:13]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 요한은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환상을 본다. 여기서 '더러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다르타'(*)는 '불결한'이란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마귀를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막 1:23;3:11;5:2). '더러운 영'을 내놓는 '용'은 머리를 일곱 개 지닌 사단을 가리키며(12:3, 9) '짐승'은 13:1-10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나타내고 거짓 선지자는 13:11-17에 언급된 '땅에서 나온 짐승'을 의미한다(Mounce, Ladd). 한편 '개구리'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부정한 동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레 11:10, 41)모세를 통해 애굽에 내린 재앙 중 하나이고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재앙을 가져오는 동물로 묘사되어 있다(출 8:5-11;시 105:30). 이방 세계에서는 개구리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 개구리는 '아리안'(Ahriman)으로 불리어 졌는데 주정적으로 평가되어 재앙을 가져오는 자인 동시에 흑암 권세의 대리자로서 빛의 사자인 오르무드(Ormud)와 싸우는 존재로 생각 되었다(Moffatt). 반면에 애굽인들은 개구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여 풍요하나 다산의 여신인 헥트(Heqt)로 생각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런 신들을 '귀신' 즉 사단의 사자 또는 우상 숭배와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로 생각하였다(9:20;19:2;고전 10:20, 21). 본문에서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입으로 토해놓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은 14절에서 '귀신의 영'으로 진술되는 것으로 보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미혹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이다. 즉 '귀신의 영'은 땅의 왕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거짓 예언자들처럼 이적을 행할 뿐만 아니라 온갖 거짓말과 유혹하는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결합시키려고 한다.

성 경: [계16:14]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 본절은 13절의 '더러운 영'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 이적을 행하여 세상 임금들을 현혹한다. 구약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을 찾아볼 수 있다. 즉 거짓말하는 영이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 아합 왕을 꾀어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왕상 22:19-23). 예수께서도 종말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것을 예언하셨다(마 24:24). 또한 바울은 악한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임하게 될 것을 예고하였다(살후 2:8-10). 한편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생소한 표현이다. 이와 동등한 표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그리스도의 날'(빌 1:10), '주의 날'(살전 5:2) 등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마지막 날을 가리킨다(Morris, Ladd). 이 날에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귀신의 영'은 세상의 임금들을 미혹한다.

성 경: [계16:15]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본절은 마 24:42-44과 병행된다. 계속적으로 귀신의 영이 미혹하여 전쟁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 본절이 삽입되어 있는 것은 마지막 대전쟁이 임박할 때 성도들이 극적인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함이다. 결국 이 경고의 의미는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만 함을 권면하는 것이다(마 24:43;살전 5:2).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적 같이'오신다는 경고는 사데 교회(3:2-4)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3:18) 주어졌던 것이다. 이 경고는 두 교회의 우상 숭배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함을 강조한다(Johnson). 한편 본절에서의 '복'은 본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복가운데 세번째 복에 해당된다(1:3;14:13;19:9;20:6;22:7, 14). 본절은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사단의 기만과 핍박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늘 깨어 있어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실 것을 시사한다.

성 경: [계16:16]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 '아마겟돈'의 보다 정확한 음역은 '하르 므깃도'(*)인데 '하르'(*)는 '작은 산'을 의미하며 '하르므깃도'는 '므깃도 산'을 가리킨다. 이 '므깃도 산'에 대한 견해는 여섯 가지이다. (1) 혹자는 갈릴리의 고대 도시 므깃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indsay, Seiss, J.B. Smith, Walvoord). (2) 혹자는 갈멜 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ohmeyer, Farrer). (3) 혹자는 '집회의 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사 14:13, Bruce, Torrey, Rissi). 이것은 14:12-15의 기록에서 바벨론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보좌로 상징되는 북극 집회의 산에 오르려고 하는 것과 본절의 '아마겟돈'이 관계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사본의 증거가 부족하며 전후 문맥과 서로 모순되고 있다. (4) 혹자는 예루살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슥 14:2;욜 3:2, Charles). (5) 혹자는 '약탈의 산'이나 '멸망의 산'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Caird, Kiddle). (6)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이 견해에 따르면 '므긷도'는 군대를 소집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가다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를 명사형으로 고치면 접두어 '마'(*)가 붙어 '마게드'(*)가 되며 이는 '군대를 소집하는 곳'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에서 접미어 '오'(*)가 붙어 '마게돈'(*)이 되면 '군대를 소집하는 장소'가 된다. 이는 곧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14절)와 같은 말로 그리스도의 재림때 있을 심판을 위하여 열방을 한 곳에 모으는 예언적인 성취를 암시한다(욜 3;12)는 것이다. 여섯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러므로 '아마겟돈'이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것으로 어떤 지리적인 실재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과 대결하여 그들을 패배시킬 종말론적인 전쟁 또는 그 장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11-21).

성 경: [계16:17]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 '공기 가운데'는 용과 짐승의 권세를 잡고 있는(엡 2:2) '공중'을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사단의 권세를 잡고 있는 공중에 대접을 쏟는 것은 짐승과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결정적인 타격(打擊)이 가해짐을 시사한다(벧후 3:10). 한편 '되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넨'(*)은 '성취하다' 또는 '완성하다'의 뜻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진노를 나타내는 말이며 인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성 경: [계16:18]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 본절의 대천재지변과 유사한 현상은 일곱번째 나팔 재앙 후에도 동반되었었다(11:19). 이러한 현상은 대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Moffatt) 하나님의 심판으로 행해진 재난이 그 절정에 달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Hughes). 요한은 일곱번째 대접 재앙으로 인해 생긴 번개와 뇌성과 지진이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재앙보다도 심하고 극렬한 것이라고 진술함으로 결정적인 재앙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6:19]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 '큰 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네 가지 주장이 있다. (1) 예루살렘성을 가리킨다(11:8). (2) 혹자는 로마 제국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18:10, 16, 18, 21, Mounce). (3) 혹자는 지리적인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하게 무신론적 사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Morris, Kiddle, Bruce). (4) 혹자는 뒤에 언급되는 바벨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문맥상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만국의 성들'은 짐승을 따르던 지상의 모든 국가들을 나타내는 말로서(17:12-14), 그것들이 무너졌다는 말은 전세계에 걸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멸망함을 시사한다.

⭕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 바벨론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과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으며(18:2), 땅의 왕들이 그와 함께 음행토록 했으며, 상인들도 그의 세력을 인해 치부하게 하였다(18:3). 이러한 바벨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그에 따른 응분의 진노를 부으신다.

성 경: [계16:20]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 여섯째 인이 떼어졌을 때에도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 옮겨졌다(6:14). 이러한 표현에 대해 혹자는 엄청난 지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나(Mounce), 혹자는 최후 심판에 일어나는 대격변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여하튼 이것은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인하여 지상의 피조 세계가 파국을 맞게 됨을 시사한다.

성 경: [계16:21]

주제1: [일곱 대접 재앙]

주제2: [일곱 대접 재앙]

⭕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 '달란트'(*, 탈란티아이아)는 시대에 따라서 그 무게가 같지 않았으나 대략 60파운드에서 100파운드 정도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무게의 우박이 재앙으로 주어진다. 구약성경에서도 우박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적들을 심판하신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수 10:11).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짐승을 경배하는 불신자들은 우박의 재앙으로 더욱 마음이 강퍅해진 애굽 왕 바로와 같이(출 9:35) 회개치 아니하고 그 재앙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

성 경: [계17:1]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곤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 본절에서 요한에게 음녀를 보여주는 '일곱 천사 중의 하나'는 어린양의 신부를 보여주는 천사와 동일하다(21:9). 그 천사는 음녀와 어린양의 신부를 소개하여 음녀와 대조를 이루는 어린양의 신부의 정결함과 고귀함을 드러낸다.

⭕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 '음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과 짝하여 사는 이스라엘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며 그러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행위는 음행이라 불리운다(사 1:21;렘 13:27;호 2:5;3:16, 17)나 니느웨(나 3:4)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절의 음녀는 바벨론을 가리킨다(5, 18절). 바벨론인 음녀에 대한 해석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로마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Mounce). (2) 혹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Ford). (3) 혹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 숭배를 하는 초역사적 세상의 권력이나 근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Morris).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는 실제로 역사적인 바벨론의 지리적 상황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유브라데스 강을 따라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그러나 음녀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물 위에 앉은'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한다. 여기서 '물'은 15절에 언급되는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 즉 세상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음녀가 물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음녀가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Mounce, Johnson).

성 경: [계17:2]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 '땅의 임금들'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나타낸다. 이들은 음녀와 야합하여 음행 곧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였다. 한편 '땅에 거하는 자들'은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을 의미한다(8절). 음녀의 유혹은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에게 뻗쳤으며,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통치자들은 물론 백성들 전체까지도 유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포도주에 취하게 만든다.

성 경: [계17:3]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 본절의 '성령으로'는 요한이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상태를 나타낸다. 요한의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사건은 본서에서 네 번 나타난다(1:10;4:2;21:10). 요한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로 가게 된 목적에 대해 혹자는 음녀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Caird), 음녀에게 내려질 심판을 보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Mounce, Beasley-Murray).

⭕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 '붉은 빛 짐승'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가리킨다(13:1주석 참조). 이 짐승이 사단의 용과 동일한 붉은 색깔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12:3) 짐승의 사단의 권세를 위임받은 존재임을 시사한다. 또한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다는 사실도 음녀와 짐승 그리고 사단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은 13:1에서 언급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13:1에서는 짐승의 머리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으나 본절에서는 몸 전체에 있다. 이것은 짐승의 참람된 행위를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Beasley-Murray, Ladd). 여기서 참람된 이름들은 혹자의 주장과 같이 로마의 황제들이 자신들을 신격화 하여 사용한 칭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Mounce). 그것은 전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훼방하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가리킨다(Ladd).

성 경: [계17:4]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 '자주빛과 붉은빛 옷'은 비싼 염료로 만들어진 왕의 옷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삿 8:26;단 5:7)권위와 엄위를 나타낸다(나 2:3). 이러한 빛깔의 옷은 음녀가 어린양의 신부와 대조를 이루듯이 어린양의 신부가 입고 있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와 대조를 이룬다(19:8). 또한 음녀는 단순히 비싼 염료로 만든 화려한 색깔의 옷만을 입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가장 사치스러운 금과 보석 그리고 진주와 같은 각종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다.

⭕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 음녀는 비싼 옷과 각종 보석으로 치장했을 뿐만 아니라 손에 금잔을 가지고 있다. 음녀가 들고 있는 금잔에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렘 51:7을 반영한다. 여기서 '가증한 물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델뤼그마톤'(*)은 우상 숭배에 관련되어 사용되며, '더러운 것들'의 헬라어 '아카다르타'(*)는 신약성경에서 악한 영이나(마 10:1;12:43) 우상 숭배(고후 6:17), 그리고 제의적인 음행(엡 5:5)에 사용된다. 음녀가 들고 있는 금잔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음녀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짐승과 사단을 숭배하도록 하는 존재임을 시사한다(Ladd, Johnson).

성 경: [계17:5]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는 당시 로마의 창녀들이 자신들의 이름이 기록된 띠를 두른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Charles, Swete, Johnson).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머리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과(7:3;9:4)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이 이마나 손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과 유사하다(13:16, 17;14:9;20:4). 한편 '비밀이라'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음녀의 문자적인 이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Tischendorf). (2) 혹자는 영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음녀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ffatt, Ladd, Mounce, Morris). 이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11:8에서 '소돔과 애굽'에 대한 설명으로 '영적으로 하면'(*, '프뉴마티코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Johnson). '비밀'은 음녀가 잘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이 잘 분별하기 어려움을 암시한다(Moffatt).

⭕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 본문은 음녀의 이름을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1) 큰 바벨론. 이는 음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14:8;16:19 주석 참조, Morris, Mounce). (2) 땅의 음녀들과 것들의 어미. 이것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증거한다. 음녀인 '큰 바벨론'은 세상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행하게 하고 범죄와 모든 악한 일을 조장한다.

성 경: [계17:6]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큰 음녀의 환상]

⭕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 여자는 음행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동참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을 죽이기까지 핍박한다. 본문에서 '성도'와 '예수의 증인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기 보다는 순교하기까지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듯하다(Mounce). 그들은 모두 위협속에서도 짐승을 경배하기는 커녕 오직 예수만을 증거하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한편 '취한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뒤우산'(*)은 구약성경에서 피에 굶주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나타내는 어구이다(사 34:5, Ladd, Charles, Johnson). 이것은 짐승을 숭배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한 극심한 박해를 시사한다.

⭕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 본문은 요한이 음녀의 환상을 보고 느낀것을 나타낸다. 요한은 아마도 1절에서 천사가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여 주리라고 한 것과는 달리 음녀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기까지 하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경악한 듯하다(Ladd, Morris). 음녀의 멸망을 보기를 기대했던 요한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고 음녀가 여왕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것을 보았을 때 당황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 경: [계17:7]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 천사는 당황해 하는 요한에게 다시 한번 놀랄 만한 일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음녀가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일곱 머리'는 9-11절에, '열 뿔'은 12-14절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음녀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짐승을 타고 있다는 사실은 음녀가 짐승의 권세를 받아 음행을 강요하고 치부하며 성도들을 핍박하였음을 시사한다(Ladd).

성 경: [계17:8]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 본절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대조를 이룬다(1:4, 8;4:8). 본절에 나타난 짐승의 모습은 전에 죽었다가 이제 영원히 사시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흉내낸 모습이며 13:3, 14을 부연한 것이다(1:18;2:8). 혹자는 이 짐승이 네로 황제의 회생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Moffatt, Rist). 이 견해는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지는 모르나 요한이 본절에서 의미하는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견해는 아니다. 설사 네로 황제 회생설을 내포하고 있다 할지라도 '짐승'은 그것을 넘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 숭배를 요구하는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Johnson). 한편 짐승의 모습 중에서 '시방 없으나 '는 짐승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 이전에는 막강한 권력을 행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실을 의미한다(Johnson). 그러나 짐승은 다시 '무저갱' 곧 악이거주하는 곳에서 나와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하게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영원한 멸망, 즉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다(20:10).

⭕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 본문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창세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로 정의되고 있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란 표현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충성을 다하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과는 달리 그 짐승을 좇아 우상 숭배를 일삼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시사한다(3:5 주석 참조). 이러한 불신자들은 짐승의 시방은 없다가 장차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미혹되어 짐승에게 충성을 하게 된다.

성 경: [계17:9]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지혜있는 뜻이 여기에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본절은 7절에서 언급된 짐승의 모습 중에서 '일곱 머리'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일곱 머리'와 동일시 되고 있는 '일곱 산'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로마에 있는 일곱 산을 가리킨다고 보아 로마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unce). (2) 혹자는 단순히 짐승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3) 혹자는 일곱 제국과 그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4) 혹자는 다음 절에 언급되는 일곱 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inear, Johnson). 네 가지 견해중 어느 하나가 맞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성 경: [계17:10]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 '일곱 왕'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로마 황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라서 로마 황제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아우구스투스(Augustus), 티베리우스(Tiberius), 가이우스(Gaius), 클라우디우스(Claudius), 네로(Nero),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베스파시안(Vespasian), 티투스(Titus), 도미티안(Domitian)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경우 이미 망한 다섯 왕이 어느 황제부터인지가 불분명하다. 또한 다섯 왕이 이미 망하였고 하나는 활동한다는 진술에 따라 본서의 기록 시기인 도미티안에 맞출 경우 중간에 있는 황제들 예를들면 갈바(Galba), 오토(Otho), 비텔리우스(Vitellius) 등을 생략해야 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2) 혹자는 일곱 제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Walvoord, Hendriksen). 이 견해에 따르면 일곱 제국은 애굽, 니느웨,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일곱째는 로마 멸망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일어난 모든 적그리스도 국가와 권세이다. 그러나 이 견해도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가, 특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치세할 때 일어난 엄청난 박해 사건을 제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3) 혹자는 '일곱'이 완전한 수이고 상징적인 수이기에 역사 전반에 걸쳐 짐승과 연관되어 나타난 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ohnson, Minear).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잠간 동안'은 일곱째 왕의 등장과 지배를 나타낸다. 일곱째 왕은 하나님께서 짐승을 치시기 전에 잠깐 동안 집권할 것이다(12:12;20:3, Johnson).

성 경: [계17:11]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 '여덟째 왕'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혹자는 네로가 다시 환생한 도미티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asley - Murray). (2) 혹자는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짐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inear, Farrer, Johnson).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에서는 도미티안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을 서로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짐승은 어린양에게 패하여 죽은 것처럼 보이고 시방은 없는 것처럼 보이나 10절에서 하나가 아직 살아있다고 언급된 바와 같이 아직도 살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다. 이런 짐승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능력과 부활을 모방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나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된다.

성 경: [계17:12]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 짐승의 모습 중 '열 뿔'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장차 열개의 동맹국으로 살아난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Walvoord). (2) 혹자는 네로 회생설을 근거로 하여 네로가 끌고온 파르티안 군대의 장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Bousset). (3) 혹자는 로마의 황제의 휘하에 있는 분봉왕이나 총독 혹은 위성 국가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larke, Edwald). (4) 혹자는 '열'을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짐승의 권세를 따르는 세상의 통치자들이나 권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Ladd, Johnson).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들은 짐승과 연합하여 어린양에게 대적할 땅의 임금들이다(19:19-21). 한편 '일시 동안'은 일곱째 왕의 '잠깐 동안'과 동일한 의미이다(10절). 그들이 짐승과 더불어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그후 그들은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14절).

성 경: [계17:13]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 본절은 열 왕들이 짐승을 향해 취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들은 짐승의 강압에 의해서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바치며, 한마음을 가지고 충성을 맹세하여 짐승과 더불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한다(14절).

성 경: [계17:14]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 본문은 짐승과 열 왕들이 연합한 목적을 나타낸다. 그것은 어린양을 대적하기 위함이다. 본절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19:17-21에 나타난다. 짐승은 열 왕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나 결국 패배를 당하게 된다.

⭕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 본문은 어린양을 대적한 짐승과 열 왕들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것은 그들이 대적한 '어린양'이 '만주의 주이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란 칭호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칭호로 사용되나(신 10:17;시 136:2, 3;단 2:47) 본절과 19:16에서는 어린양 의 칭호로 기술된다. 이 칭호는 어린양이 온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왕이심을 시사한다(19:16 주석 참조). 어린양께서 온 세상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왕이기 때문에 짐승과 열 왕들이 연합하여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 전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 짐승과 열 왕이 연합하여 어린양을 대적한 전투에서 승리는 당연히 어린양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오직 어린양 혼자만이 그 승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짐승의 핍박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충성을 다한 백성들도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하게 된다.

성 경: [계17:15]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 본절은 1절과 연결된다.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지배를 받는 온 세상을 의미한다. 음녀의 영향력에는 예외가 없다. 온 세상의 모든 구조와 백성들 전체가 음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1절 주석 참조, Johnson).

성 경: [계17:16]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 본절은 사단의 세력, 즉 짐승과 열 왕그리고 음녀 사이에 일어날 분열을 나타낸다.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배반하여 공격하고 멸망시키는 것은 에스겔의 오홀리바에 대한 비유를 연상시킨다(겔 23:11-35). 여기서 '벌거벗게 하고'는 고가의 자주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한 음녀의 모습과 대조되는 표현이다(4절). 또한 '살을 먹고'는 맹수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들은 열 왕과 짐승이 음녀에게 행한 미움과 공격이 매우 심하여 음녀가 철저하게 파괴됨을 시사한다.

성 경: [계17:17]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하나님의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 까지 하심이니라. - 본절은 열 왕과 짐승이 음녀를 배반하여 멸망시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서 악의 세력을 사용하심을 시사한다(렘 25:9-14). 하나님은 사단의 세력들 사이에 일어난 분열, 즉 열 왕과 짐승이 연합하여 자신들의 편이었던 음녀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심으로 (롬 2:24) 음녀가 멸망에 이르도록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단의 세력이 멸망을 당하리라는 예언이 성취될 때까지 지속된다(Mounce, Ladd, Johnson).

성 경: [계17:18]

주제1: [음녀와 짐승]

주제2: [환상의 해석]

⭕ 또 내가 본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 본절은 음녀의 정체에 대한 진술이다. 음녀는 큰 성 바벨론이다(18:2). 음녀인 큰 성은 당시 로마를 가리킬 수 있으나(Morris, Mounce)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초자연적인 사단의 악한 제도를 가리킨다(Ladd, Johnson).

성 경: [계18: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 '다른 천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단순히 앞장에서 언급된 천사와 구별짓는 말에 불과하다. 이 천사가 가지고 있는 '큰 권세'는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나타내며 천사가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기에 합당한 큰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9:3, 10, 19). 한편 천사에게서 나오는 영광으로 인하여 땅이 환해졌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 인간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영광의 빛을 입으신 하나님에게 나온 천사가 영광으로 땅을 환하게 비추는 것은 자연 스러운 일이다(시 104:2;딤전 6:16).

성 경: [계18: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 '힘센 음성'은 19:6과 유사한 표현으로 앞절에서 언급된 다른 천사가 '큰 권세'를 소유한 사실과 병행을 이루며 동시에 그가 선포한 내용, 즉 바벨론의 멸망이 확실한 사실임을 암시한다. 한편 '무너졌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센'(*)은 부정과거 시제이다. 이는 비록 바벨론의 멸망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임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Morris, Mounce).

⭕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 본문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사 13:20-22) 큰 성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된 모습을 나타낸다. 한편 '모이는 곳'이 되었다는 말은 큰 성 바벨론이 완전히 패망하여 사단의 하수인인 귀신들이나 악령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전락하였음을 시사한다(Johnson, Swete).

성 경: [계18: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 본문은 큰 성 바벨론이 멸망당하는 이유이다. '음행'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가리킨다(렘 3;2;호 4:10). 큰 성 바벨론은 자신이 범죄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모든 나라들로 자신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짐승을 숭배토록 한다. 그 결과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인하여 그 화려함이 사라지고 폐허가 되어 오직 더럽고 악한 영들과 짐승들만이 거하는 처소로 변하게 된다(2, 18).

⭕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 본문은 17:2절을 반영한다. '땅의 왕들' 곧 세상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한 제도의 원형인 큰 성 바벨론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며 악한 행위를 일삼는다. 이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음행 뿐만 아니라 큰 성 바벨론과 야합하여 부와 사치를 즐기는 것을 가리킨다(9절).

⭕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 본문은 상인들의 치부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큰 성 바벨론의 또 다른 멸망 이유인 '사치'에 대해 진술한다. 큰 성 바벨론은 방탕하고 호화스러운 생활은 이와 결탁한 상인들에게도 부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고, 상인들은 그 이익으로 인해서 분에 넘치는 부를 누리게 된다.

성 경: [계18: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 '하늘로서 다른 음성'은 '내 백성 아'라는 진술로 보아 하나님의 음성인듯 하나 사실상 하나님의 음성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다른 음성'의 주체에 대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나(Charles) 천사의 음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Mounce).

⭕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 본절은 바벨론을 향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메시지를 반영한다(렘 50:8;51:6-9). '나와'이 헬라어 '여셀다테'(*)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을 나타낸다(창 12:1;렘 51:45, Mounce).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큰 성 바벨론의 죄악인 음행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젖어들지 말고 빠져 나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명령하신다(Kiddle). 이러한 명령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는 짐승에 의해서(13:7, 8) 모든 백성들이다 순교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함은 물론(Ladd) 이러한 짐승의 핍박과 유혹에 넘어가 큰 성 바벨론에 참여하는 백성들은 큰 성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 되며 그로 인해 큰 성 바벨론 이 당할 멸망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큰 성 바벨론에서 나와 구별될 것을 명령하시며 경고하신다. 이 경고에 대해 혹자는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한 마지막 회개에의 촉구라고 해석하나(Caird)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도리어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의 유혹을 당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명령과 경고이다(Johnson).

성 경: [계18: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 본문은 렘 51:9을 반영한다. 큰 성 바벨론의 죄는 하늘에 미칠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그의 죄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관영하고 팽배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 즉 죄를 기억하셔서 진노의 포도주를 부어 심판하실 것이다(2, 6절;16:19).

성 경: [계18: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 본절은 하나님의 보응의 심판에 대한 진술이다. 여기서 '갑절을 갚아주고'의 해석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큰 성 바벨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최대한의 형벌이나 심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갑절을 갑아주고'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 합당한 징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렘 16:18;17:18, Beckwith, Ladd).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음녀의 큰 성 바벨론은(17:18) 하나님을 대적한 죄는 말할 것도 없고, 만국을 미혹하여 사람들로 하나님과 어린양을 대항하게 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며 분에 넘치는 사치에 빠져 교만에 이르게 한 죄에 대해 응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앞절과 본절에서는 성경의 복수에 대한 진술을 엿볼 수 있다.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약성경에 나타난 복수법을 시행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축복을 기원해야 하며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롬 12:14, 17).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복수의 심판까지도 백지화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벨론의 죄악을 기억하시고 공정히 판단하셔서 마지막 날에 심판으로 보응하실 것이다(신 32:35;렘 51:24, 36;롬 12:19;벧전 3:9).

성 경: [계18:7]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어주라. -본문은 큰 성 바벨론의 죄에 대한 진술이다. 바벨론의 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를 영화롭게 한 것', 즉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치'이다. '사치하였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트르레니아센'(*)은 극에 달한 방탕한 생활을 가리킨다. 바벨론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피조물에 불과하면서도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방탕한 생활로 악의 선봉자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은 그러한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신다.

⭕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 본문은 바벨론의 교만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사 47:7-9을 반영한다(겔 28:2;습 2:15). 바벨론은 스스로 왕임을 자처하며,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풍요로운 물질을 의지하여 절대로 애통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 장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바벨론의 교만과 물질은 '하루 동안'에 패망할 만큼 하찮은 것이다. 교만과 사치에 빠진 바벨론은 철저하게 파괴되며 멸망당하게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

성 경: [계18: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천사의 바벨론 멸망 예고]

⭕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 '하루 동안'은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벨론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을 시사한다. 바벨론에게 순식간에 임할 재앙은 네 가지이다. 네 가지 재앙은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에 대한 보응이다.

⭕ (1) 사망. - 이것은 바벨론이 스스로 '과부가 아니다'라는 자랑에 대한 보응이다.

⭕ (2) 애통. - 이것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풍부한 물질만을 의지하며 즐긴 것에 대한 심판이다.

⭕ (3) 흉년. - 이것은 12, 13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바벨론의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징계이다.

⭕ (4) 불에 살라지리니. - 이것은 성경에서 자주 진술되는 바와 같이 성의 멸망을 나타낸다(9, 18절). 바벨론은 하나님의 네 가지 재앙을 통해서 완전한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 이것은 바벨론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바벨른은 스스로 가장 강력한 왕임을 자처했으며 절대로 자신에게 애통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여 자기 도취에 빠졌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숭배하도록 하였다. 스스로 가장 강한 자임을 자처한 바벨론의 자랑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바벨론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한 바벨론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신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벨론을 심판하신 하나님만이 전능하신 분이며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

성 경: [계18: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 본절은 바벨론과 야합하여 정도에 넘치는 세상의 사치를 즐기고 하나님을 떠나 대적하던 세상의 통치자들이 애통해하는 모습이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바벨론 성이 불살라져 재와 연기만 남는 것을 보면서 애통해 한다. 이들은 바벨론과 연합하여 사치를 즐겼으며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에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의 파괴가 곧 자신들의 파괴임을 알았던 것이다.

성 경: [계18:1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그 고난을 무서워하며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멀리 서서'는 바벨론 성이 불살라져 파멸당할 때의 열기가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불의 심판에 의한 바벨론 성의 파멸은 감히 가까이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가공할 것이었다. 한편 본절에서 '견고한 성 바벨론'과 '일시간'은 서로 대조되어 바벨론 성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강도를 강조한다. '일시간'은 8절의 '하루동안'과 병행되는 표현이다. 땅의 왕들이 보기에 아주 견고해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안전을 보장해 줄 것처럼 보였고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파괴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바벨론 성은 하나님의 가공스런 심판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파괴된다.

성 경: [계18:1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 땅의 상인들은 바벨론의 사치에 부응하여 부를 축적하였다(3절). 그러나 바벨론 성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을 때 상인들은 과거에 바벨론과 더불어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즐긴 만큼 애통함을 당해야만 한다. 여기서 '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우신'(*)은 단순히 흐느끼는 정도의 울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성 통곡을 의미한다. 상인들이 대성 통곡하고 애통해하는 이유는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던 기반이 상실 되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슬픔과 애통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경: [계18:12,13]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본문에 기록된 상품들은 겔 27:4-24에 진술된 두로의 애가에 나타난다. 본문에 나타난 상품들은 일곱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강해에 나와 있는 도표 <상인들이 로마에서 장사한 상품들과 그 특징>을 참조하라.

성 경: [계18:1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 '맛있는 것들'로 번역된 헬라어 '타리파라'(*)는 외국에서 들어온 값비싸고 기름진 음식을 가리키며, '빛난 것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람프라'(*)는 값비싼 옷감이나 옷 그리고 수입된 나무나 보석 등으로 만든 장식품을 가리킨다(Morris, Mounce). 바벨론이 도취되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자랑하고 즐기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인해 사라져서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성 경: [계18:15]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 본문은 11절과 연관된 것으로 바벨론으로 인해서 부를 축적하고 사치하던 상인들의 애통함에 대한 진술이다. 그들도 바벨론과 짝하여 사치하며 음행을 일삼던 땅의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9, 10절) 바벨론이 파멸당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울며 애통하게 된다.

성 경: [계18:16]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 본절에 언급된 바벨론의 치장 품목들은 17장에서 음녀가 자신을 치장한 품목들과 유사하다(17:4). 이 사실은 17장에서 언급된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이 동일함을 시사한다(17:18). 한편 본절에 언급된 상인들의 애통함의 이유와 9, 10절에 언급된 땅의 통치자 들이 애통해 하는 이유는 서로 대조를 이룬다. 바벨론 성과 연합하여 사치와 음행을 일삼던 땅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견고한 성이 되어 영원히 안전과 사치를 보장해 줄 것 같았던 바벨론 성의 멸망을 애통해 한 반면에(10절) 본절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팔았던 사치스런 품목들이 일순간에 사라짐에 대해 슬퍼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 모두가 철저하게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입장에서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계18:17,18]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 본문은 상인들의 통곡을 진술한 것이다. 상인들은 자신들을 치부할 수 있도록 해준 바벨론의 부가 파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은 배를 타고 다니는 손님들을 가리킨다. 한편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에 대해서 혹자는 어부나 바다에서 나는 진주를 채취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Lenski) 아마도 바다 무역과 관련하여 일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며 앞서 언급된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의 반복인 듯하다(Mounce). 앞절에서는 상인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며 애통해 했으나 본절에서는 상인들의 상품을 운송하는 해운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벨론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애통해 한다.

성 경: [계18:19]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애통은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의 애통보다 훨씬 더 강하다.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는 겔 27:30의 두로의 애가에서도 나타나는 표현으로서 깊은 슬픔을 상징하는 행위이다.

⭕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 본문은 해운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애통해 하는 이유이다. 그들의 애통 역시 상인들의 애통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해운업에 종사하던 자들은 바벨론이 환락과 사치에 빠져서 엄청난 양의 고가품들을 수입할 때 운송해 줌으로 치부해 왔으나 이제는 더이상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 주던 바벨론이 순식간에 멸망하였기 때문이다(Beckwith, Morris).

성 경: [계18:20]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애곡하는 무리들]

⭕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 앞서 사단에게 속한 자들 곧 땅의 왕들, 상인들, 그리고 해운업에 종사하는 자들이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 자신들의 이익이 사라진 것을 보고 애통해 한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 '기뻐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본문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 반면에 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천사들을 암시하는 듯하다(Ladd, Morris).

⭕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 본문은 천사들과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바벨론의 멸망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이다.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증오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것이다. 바벨론의 불의한 핍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당하는 부당함에 대해 신원하셔서 바벨론의 죄에 대해 멸망의 심판을 행하신 것은 지극히 공의로운 것이며 이제까지 부당했던 모든 일들을 의롭고 질서있게 잡아가시는 정당한 행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공의로운 행위가 성취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은 의의 승리 때문이다.

성 경: [계18:21]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

본절에서 23절까지는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을 받은 바벨론의 최후에 대한 묘사이다. 본문에서는 '결코 다시'라는 표현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와 바벨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 엄하여 더이상 회복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라. - '한 힘센 천사'는 본절 외에 본서에서 두 번 나타난다. 5:2에서는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가리키는 자로 나타나며, 10:1에서는 요한에게 예언한 책을 가져다 주는 자로 나타난다. 혹자는 이러한 두 말씀과 본문을 연결시켜 본절의 힘센 천사의 등장이 처음에 인봉되었다가 요한에 의해서 선포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Caird). 한편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기록한 말씀을 돌에 묶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 예레미야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를 연상시킨다(렘 51:63). 이 상징적 행위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의밀한다.

성 경: [계18:22]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

⭕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 본절은 바벨론이 심판을 당하여 더이상 바벨론에서 음악이 들려지지 않음을 나타낸다. 바벨론은 사치에 빠져 자주 연주회를 즐겼으며, 그 결과 연회를 위한 음악가들의 재능은 높이 평가되고, 음악가들은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음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 스스로를 하나님의 위치에 놓고 즐거워 하던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더 이상 사치와 향락에 빠질 수도 교만해질 수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당한다.

⭕ 물론 어떠한 세공 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 12, 13절에 언급된 바벨론의 사치 품목 중에서 고가의 장식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세공업은 산업에서 중요한 요소였던 듯하다. 세공업자들은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바벨론이 그렇게 자랑하던 사치와 부 그리고 경제가 모두 파괴되었음을 암시한다.

⭕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 '맷돌 소리'는 식사와 연결된 일상 생활을 나타낸다. 이러한 '맷돌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바벨론의 모든 일상 생활조차도 파괴되어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한다(Morris, Ladd).

성 경: [계18:23,24]

주제1: [바벨론의 멸망]

주제2: [바벨론의 멸망]

⭕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 '등불 빛'이 비취지 않는다는 것은 세공업자들이 밤샘작업을 하던 것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거나(Mounce) 혹은 밤에 빛이 없어 바벨론 전체가 암흑에 휩싸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Ladd).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결혼식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한편 다음에 언급되는 것은 바벨론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세 가지이다.

⭕ (1)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 '땅의 왕족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메기스 타네스 테스 게스'(*)는 문자적으로 '땅의 위대한 자들'이란 의미이다. 이는 바벨론의 상인들이 자신들의 치부로 인하여 교만해짐을 시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자랑하고 그것을 최고로 여겨 하나님앞에서도 서슴지 않고 교만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러한 교만을 간과하지 않으시며 그 교만에 응당한 심판을 행하신다.

⭕ (2)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 바벨론은 자신들만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것이 아니라 열국들을 미혹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토록 하여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였다(9절;17:2, Caird, Ladd, Mounce).

⭕ (3)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 바벨론의 죄는 단순히 열국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여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였다(6:10). 하나님은 이러한 무죄한 피를 흘린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억울함을 신원하시는 심판을 바벨론의 행하심으로 멸망시키신다.

성 경: [계19:1]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본절에서 8절까지는 18:20의 응답이다.

⭕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 '허다한 무리'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2) 혹자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Ladd).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본장에 나타난 찬양은 18:20의 응답이며 18:20에서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라고 부르고 있고 본서에서 순교자를 비롯한 하나님의 성도들과 천사들이 함께 찬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7:9). 이러한 허다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 성취된 구속 사역과 그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7:10;12:10).

⭕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할렐루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렐루이아'(*)는 히브리어 '할렐루야'(*)를 음역한 것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의미이다(시 111:1;112:1;113:1). 이것은 전형적인 히브리어 어구로 초대 교회의 예배가 유대교의 회당과 성전 예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Johnson). 한편 '구원과 영과의 능력'은 허다한 무리들이 찬양하는 주재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비롯한 악의 무리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그 세력에서 온전히 구원하여 주신 것과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과 거룩하심과 영광을 찬양한다.

성 경: [계19:2]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갚으셨도다. - 본절은 앞절에서 행한 찬양의 근거를 제시한다. '참되고 의로운지라'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본서의 앞부분에 언급된 찬양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참되고 의로우심'은 계속적으로 나타난다(15:3;16:7).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마음까지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가 행하신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 것이다(겔 11:5;요 2:25;요일 3:20).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음녀의 죄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음녀의 행위'는 온 세상을 미혹하여 부정한 죄를 짓게 한 바벨론의 행위를 가리킨다(14:8;17:2;18:3).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변질 시키고 창조주께서 행하신 사역을 파괴하려는 행위이다.

⭕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 본문은 다섯째 인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 들이 하나님께 신원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잠간 동안 기다리라고 말씀하였으나(6:9-11) 이제는 순교자들의 신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Ladd).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다(신 32:43).

성 경: [계19:3]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 본절의 '할렐루야'는 1절과 같은 의미로 하늘에서 행해진 찬양의 재연(heavenly encore)이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사 34:10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바벨론이 온전히 멸망당할 것을 상징한다. 한편 '하더니'속에 내포되어 있는 '카이'(*, '그리고')가 혹자의 주장대로 히브리 어법상 상황을 이끄는 절(circumstantial clause)이라면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는 상반절에 나타난 '할렐루야'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된다(Charles, Mounce).

성 경: [계19:4]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은 5:9, 10에서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양의 구속하심에 대해 찬양하였으며 '이십 사 장로'는 11:17, 18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심판하심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반면에 이들은 14:3의 구속받은 자들의 찬양에는 침묵을 지키다가 본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찬양에 화답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심을 강조하고 있다(Beasley-Murray). 한편 '아멘 할렐루야'는 시편 4권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시 106:48, Mounce, Johnson, Beasley-Murray).

성 경: [계19:5]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 '보좌 에서 난 음성'은 '보좌'로 인해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어린양의 음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그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어린양의 음성을 의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본다면 '우리 하나님께'라는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으며 어린양의 음성으로 볼경우 역시 '우리 하나님'이라는 표현보다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요 3:12;요 20:17). 그러기에 학자들에 따라 이 음성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보좌 가까이에 있는 장로들이나 네 생물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혹자는 천사의 음성이라고 주장한다(Mounce).

⭕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 본문은 시 113편과 115편을 반영한다. 즉 '하나님의 종들...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시 113:1을 인용한 것이며,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는 시 115:13을 인용한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들'은 순교자와 같은 특별한 그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문구인 '경외하는'과 '무론 대소하고'가 믿는 자들의 상황이나 지위 고하, 신앙의 성숙도와 관계없이 보편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성 경: [계19:6]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 요한은 자신이 들은 음성에 대해서 헬라어 '호스'(*, '같고')를 세 번 사용하여 어느 한 가지로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그 소리가 장대하며 웅장함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찬양하는 자들에 대해 혹자는 천사의 무리라고 주장하고(Ladd) 혹자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한다(Johnson). 본절의 찬양자들은 1절과 연관된 것으로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 '전능하신 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서 외에서는 단 한번 밖에 나타나지 않으나(고후 6:18) 본서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하나님의 칭호이다(1:8;4:8;11:17; 15:3; 16:7;21:22). 이 칭호는 요한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우리 주 하나님'(out Lord and God)이라고 부른 것과 상관성을 갖고 있다. 요한은 '전능하신 이'라는 칭호를 신약성경의 다른 성경보다 현저하게 많이 사용하여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하고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통치하시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은 행위의 시작을 강조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시작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렇듯 요한은 부정 과거 시상을 사용하여 앞으로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 완전하고도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다(Ladd).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한 모든 적을을 정복하실 주줬을 소유하고 계심을 강조한다(Johnson).

성 경: [계19:7]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의 헬라어 '카이로멘 카이 아갈리오멘'(*)은 본절 외에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나온다(마 5:12).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핍박을 당하고 욕을 당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큰 상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들에게 주어질 큰 상은 바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의 참여이다(Mounce, Morris).

⭕ 어린양의 혼의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혼인'에 대한 비유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나 시온이 하나님의 아내로서 나타난다(렘 2:2;호 2:14-22).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내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불성실함과 신실하지 못함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혼인잔치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으며(마 22:2-14;25:1-13;눅 14:15-24) 바울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즉 혼인 관계로 비유하였다(고후 11:2;엡 5:25-27). 한편 '아내'로 번역된 헬라어는 '헤 귀네'(*)이다. 혼인 잔치가 배설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뉨페'(*, '신부')를 사용하지 않고 '귀네'를 사용한 것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결혼법상 약혼한 사이 곧 신부도 아내로 불리고 있다(마 1:20). 또한 본서에서도 '귀네'와 '뉨페'는 서로 혼용되어 동일한 것으로 묘사된다(21:2, 9, 10). 본절에서 요한은 이제 약혼의 기간이 지나 완전하며 종말론적인 어린양과의 혼인이 성취될 때임을 선언하고 있다(Johnson, Ladd).

성 경: [계19:8]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음녀의 복장 즉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과 대조를 이룬다(17:4;18:16). 여기서 '빛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람프론'(*)은 영광과 광채를 묘사하며(마 13:43) '깨끗한'의 헬라어 '카다론'(*)은 정결과 충성 그리고 신실함을 나타낸다(21:18, 21, Johnson). 어린양의 아내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는 이 세마포는 오직 남편되신 어린양의 피로 정결케 되었다(7:14, Ladd). 한편 '옳은 행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타'(*)는 문자적으로 '법령' 혹은 '옳은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복수이다. 이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법령'이라 다의미로 받아들여 믿는 자들을 의롭다 칭해주시는 칭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이견해에 따르면 복수가 나타내는 것을 믿는 자들개개인이라고 한다. (2) 혹자는 믿는 자들의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Mounce, Johnson, Ladd). 두 가지 견해중 후자가 타당하다. 본절의 '디카이오마타'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의 반응으로서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해 인내로써 충성과 신실함을 지켜온 것을 시사한다. 즉 이것은 남편되신 어린양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유지한 사실을 가리킨다(14:12).

성 경: [계19:9]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 '청함을 입은 자들'의 헬라어 '케클레레노니'(*)는 '칼레오'(*, '부르다')의 완료 수동태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 때만 가능함을 시사한다(17:14;마 22:3;눅 14:17). 혹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을 앞절의 아내와 구분하여 앞절의 '아내'는 교회 혹은 순교자를 가리키며 본절의 '청함을 입은 자'는 구약 시대와 천년왕국 시대의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Walvoord, Charles) '아내'와 '청함을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Beasley - Murray, Ladd, Mounce). 한편 본문의 '복'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개의 복 중에서 네번째에 해당된다(1:3;14:13;16:15;20:6;22:7, 14). 이 복은 인내로써 어린양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은 자들의 멸망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로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 '이것은'은 17:1-19:8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큰 음녀의 종말과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참여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예언을 의미한다(Johnson, Beasley - Murray). 한편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는 천사가 전하여준 17:1-19:8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22:6에서도 나타나 본서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며 확실한 사실일을 강조한다.

성 경: [계19:10]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감사 찬양]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 본문은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 천사를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이 비판하였던 것으로 보아(골 2:18) 요한이 천사를 숭배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혹자는 요한이 천사가 전하여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경외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경배하려 했다고 주장하며(Ladd) 혹자는 하나님으로 오인하여 경배하려 했다고 주장하나(Morris) 분명하지 않다.

⭕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 '예수의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 '텐 마르튀리안 예수'(*)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께서 전하여 주신 증거로 해석한다. (2)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에 관한 증거로 해석한다.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즉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로 증거하신 것을 가리킨다. 천사는 자신이 요한을 비롯한 많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증거하신 것을 받은 존재임을 드러냄으로 요한이 경배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편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1) 천사 자신이 경배를 받을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2) 예수의 증거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2) 천사는 요한에게 자신이 경배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요한과 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받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에게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암시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 본문에 대한 해석 역시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예수의 증거'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대언의 영은 오직 예수에 관한 증거만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Eerdman, Ladd). (2) 혹자는 '예수의 증거'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예수께서 증거하신 것이 대언하는 영의 주요 관심사이며 핵심일 뿐만 아니라 대언의 영에 의해서만 성취됨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주장한다(요 16:12 - 14,Mounce, Beasley-Murra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성 경: [계19:11]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하늘이 열린 것'은 본서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모든 것을 요한에게 계시하시는 장면을 나타낸다(11:19). 본절에서는 영광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와 그의 승리를 계시하고 있다(Ladd, Beasley-Murray). 본문에서 '백마와 탄 자'는 첫째 인을 뗄 때 나타난 말과 기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6:1, 2)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add, Johnson, Mounce). 왜냐하면 이어서 언급되는 그의 이름들과 모습은 본서 내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Morris). 또한 그리스도께서 타신 말의 색깔인 흰색은 승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며 승리하실 것을 암시한다.

⭕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 본문은 백마를 탄 자 즉 그리스도의 칭호이다. 이것은 3:14에서 언급된 '아멘이시요'의 해석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칭호 즉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사 65:16, 'the God whose name is Amen', NEB)이 3:14과 본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것을 신실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하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 께서는 지상에서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이다.

⭕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공의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대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기준을 의미한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 11:3-5에 나타난 메시야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진실됨을 시사한다(2절;15:3;16:5, Beasley - Murray). 한편 '심판하며 싸우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이 카이 폴레메이'(*)는 모두 현재 시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의 사역이 영원한 것이며 대적자 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전투와 심판이 지속적인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Ladd).

성 경: [계19:12]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 '그 눈이 불꽃 같고'는 1:14;2:18과 병행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내면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의 심판의 공정함을 암시한다. 사람의 경우 모든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의 판단과 그에 따른 심판은 공의로울 수 밖에 없다. 한편 '면류관'의 헬라어 '디아데마타'(*)는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을 의미하는 '스테파노스'(*, '면류관')와는 달리(2:10;3:11;4:4, 10;6:2;9:7;12:1) 왕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왕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용의 머리에 일곱개의 면류관이 있고(12:3) 짐승의 머리에 열개의 면류관이 있는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13:1)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왕으로서 온전한 주권과 왕권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 고대 신화에서 이름을 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나 신의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는 본서에 계시된 여러 가지 이름 외에도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갖고 계신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능력과 권세를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Johnson, Morris)

성 경: [계19:13]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시는 '피 뿌린 옷'에 묻은 '피'에 대해서는 네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순교의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aird). (2) 혹자는 그리스도와 대적자들의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wete). (3)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으로서 흘리신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Johnson). (4) 혹자는 대적자와의 싸움에서 대적자들이 흘린 피가 그리스도의 옷에 묻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dd, Mounce, Beasley-Murray).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두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세번째 견해의 경우 본서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되 피는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가리키고 있으며(1:5;5:9;7:14;12:11) '입었는데'(*, 페리베블레메노스)가 완료 시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온전히 이루신 승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19, 20절). 그리고 네번째 견해의 경우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15절)가 나타내듯이 그리스도께서 대적자들을 마치 포도주틀에 넣어 짜듯이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 또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칭호는 요한복음과 연결된 것으로 중재자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거하신 중재자이시며(요 1:1, 14;요일 1:1) 본절에 진술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과정인 재림을 통해 대적자들을 멸망시키시고 그 백성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우주적인 중재자이시다(Beasley-Murray, Mounce).

성 경: [계19:14]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하늘에 있는 군대들'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천사들과 함께 오는 것으로 보아 천사들이라고 주장한다(시 103:21;148:2;마 13:41;24:30, 31;눅 2:13, Ladd, Rist, Barclay, Swete, Beasley-Murray). (2) 혹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대적자들과 전투하는 것으로 보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5:1, 2;17:14, Johnson, Barker). (3) 혹자는 천사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lford, Mounce, Plummer).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피 묻은 옷을 입고 계신(13절) 반면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짐승을 비롯한 대적자들과의 싸움에 참가하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권능을 목격하며 그 승리에 참여할 뿐임을 암시한다. (Beasley-Murry, Ladd, Morris, Mounce). 그러기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갖고 있을 무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나타나지 않는다.

성 경: [계19:15]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본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세 가지로 진술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심판의 모습 역시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적자들과의 전투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 본문은 사 11:3-5 을 반영하는 것으로 1:16과 병행된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 즉 말씀에 대해서 혹자는 구원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복음으로 이해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대적자들이 회개함으로써 그들이 정복되는 것으로 이해하나(Swete) 본장 어디에서도 대적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이한 검인 말씀은 대적자들을 심판하시는 도구이다. 더욱이 말씀을 통한 심판은 교회를 향한 메시지에서도 나타난 것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니골라당이 회개치 않을 경우 반드시 말씀으로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신 바 있다(2:12, 16).

⭕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 본문은 시 2:9의 반영으로 본서 2:27;12:5에서 병행되고 있다. '철장으로 다스리심'은 그리스도의 강력한 능력과 확고한 심판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은 물론 온 세상을 지배하시는 절대적 권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시사한다.

⭕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 본문은 사 63:1-6을 반영한다. 본문에 나타난 포도 수확의 모습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 대적자들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을 나타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짐승을 비롯한 모든 대적자를 완전히 파멸시키심을 시사한다.

성 경: [계19:16]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그리스도의 재림]

⭕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이름이 넓적다리에 쓰여 있다고 주장한다(Charles). (2) 혹자는 말을 탄 자의 다리까지 내려오는 웃옷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Mounce). (3) 혹자는 웃옷과 다리에 다 쓰여있다고 주장한다(Morris). (4) 혹자는 다리까지 내려온 웃옷에 의해서 가려지기 쉬운 허벅다리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Lohmeyer, Swete).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것은 17:3절의 짐승의 몸에 기록된 참람된 이름들과 대조를 이우는 것으로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대적하는 이름이 기록된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에는 하나님의 칭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칭호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칭호로 진술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난 것으로(신 10:17;에녹 1서 9:4) 종말에 대적자들을 파멸시키고 온 세상을 지배하시며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권력을 시사한다.

성 경: [계19:17,18]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본문은 겔 39:17-20에 나타난 곡의 종말론적 멸망을 인용한 것이다.

⭕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 '하나님의 큰 잔치'는 7-9절에 언급된 믿는 자들이 참여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대조를 이룬다. 본절의 '하나님의 큰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같이 하나님께서 배설하는 잔치이나 자신을 대적한 모든 자들을 멸망시키는 잔치이며 의로운 믿는 자들에게는 즐거운 축제이나 대적자들에게는 공포의 잔치이다.

⭕ 왕들의 고기와...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 여기서 '모든 자'는 짐승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킨다(Beasley - Murray, Ladd, Mounce, Morris). 이러한 대적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그들의 시체가 새들의 먹이로 되는 것이다. 당시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면에서 대적자들의 시체가 새의 먹이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가혹성과 엄격함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것이며 완전한 멸망에 이르는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계19:19]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 본절은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모든 모습을 진출한 것으로 16장에 예시된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다(16:13, 14, 16;17:2, 18;18:3). '땅의 임금들'은 시 2:2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과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짐승과 악의 무리에 동조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한다. 한편 짐승과 연합한 모든 대적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늘의 군대를 향한 전쟁을 일으키나 본문에는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은 14, 15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하늘의 군대들이 실제로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며 단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에 참여할 뿐임을 암시한다.

성 경: [계19:20]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지우고. - 본절과 다음절은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이다. 짐승과 그 무리들은 패배하여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던 자들이다(13:13, 14;16:13). 그들은 그렇게 미혹된 자들에게 짐승의 표를 찍어서 자신들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며(13:16, 17) 그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늘의 군대에게 대적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옛 뱀이요 사단인 용은 천년 왕국이 지난 후에야 유황 불못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으나(20:2, 10)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아마겟돈 전쟁의 패배 후에 바로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지게 된다. 여기서 유황은 당시 사해와 같은 곳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황 불붙는 못은 신약성경에서 종종 나타나는 게헨나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Johnson, Ladd, Mounce).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게 힌놈'(*)에서 비롯된 것으로 물록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인간을 불에 태우는 의식을 지낸 곳이었다(왕하 16;3; 23:10;렘 7:31). 이러한 게헨나는 악한 자들이 죽어서 가는 것을 가리킴과(마 5:22) 동시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받는 장소로 이해되었다(에녹서 27:1;56:3;90:26). 이렇게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졌다는 사실은 그들이 완전하게 멸망당하였음을 시사한다(Ladd, Morris).

성 경: [계19:21]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 본절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 당해 그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한 무리들의 멸망에 대한 묘사이다.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은 15절의 반복으로 그리스도의 선포의 말씀에 의해 심판을 시사한다.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은 짐승의 추종자들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멸망당하고 그들의 시체는 새의 먹이가 된다.

성 경: [계20:1]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 '무저갱'의 헬라어 '아뷔스수'(*)는 70인역에서 심연의 물이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창 1:2;7:11;시 71:20;107:26) 마귀를 가두는 곳이나(눅 8:31;벧후 2:4;유 1:6) 음부의 지하세계를 가리킨다(롬 10:7, Johnson, Ladd). 이곳은 사단과 짐승을 비롯한 마귀의 세력이 거하는 처소이며(9:1;11:7) 천년 동안 사단이 갇히는 감옥이다(20:3). 한편 '쇠사슬'에 해당하는 헬라어 '할뤼신'(*)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주의 사자에 의해서 풀려날 때 손에서 벗겨진 '쇠사슬'(*, 할뤼세이스)과 같은 단어이다(행 12:7). 천사가 가지고 있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사슬은 사단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무저갱에 거주하는 사단의 세력과 권세가 제한될 것을 암시한다(Morris, Mounce).

성 경: [계20:2]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본문은 12:9과 동일한 표현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악한 자에 대한 호칭을 네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 용을 잡으니. - '용'은 구약성경에서 리워야단, 라합, 악어, 뱀 등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욥 40:15;시 74:14;89:10;사 27:1;51:9;암 9:3)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며 그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이 있다(12:3). 이는 하늘의 대적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Beasley-Murray) 하나님을 대항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존재를 가리킨다(Mounce).

⭕ 옛뱀. - 이것은 창 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이던 뱀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속이는 자를 의미한다.

⭕ 마귀요 사탄이라. - '마귀'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문자적으로 '비방하는 자'를 의미한다. 또한 '사단'(*, 사타나스)은 '대적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래 고유명사가 아니었으나 후에 고유명사로 바뀌었다. '마귀와 사단'은 사람들의 죄를 하나님에게 고소하는 고소자나 비방하는 자이다(Beasley-Murray).

⭕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 '잡아'의 헤라어 '에크라티센'(*)은 '힘'을 의미하는 '크라토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능력을 행하여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26:50). 이것은 '결박 하여'와 '던져'(30절)라는 표현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늘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같은 사단의 영향력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Hendriksen) 속이는 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제한하고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Walvoord, Mounce, Ladd). 한편 '일천 년 동안'은 10 10 10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문자적으로 일천년을 의미하기 보다는 일정한 기간을 나타낸다. 학자들에 따 라 일천년에 대한 견해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네 가지 견해, 즉 (1)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3) 역사주의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lism), (4) 무천년설(Amillennialism)로 나뉜다. 네 가지 견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본장 부제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계20:3]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 본절은 천사가 천년 동안 사단을 무저갱에 가두는 이유를 밝힌다. 여기서 '만국'은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앞장에서 메시야와 적그리스도의 전쟁에 인류가 참가하였으며 적그리스도를 따르던 왕들과 군대는 메시야에 의해 패배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19:1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 다시 '만국'이 언급된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두 가지 견해를 주장한다. (1) 혹자는 19장에서 언급된 저그리스도와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라고 주장한다(Moffatt, Ladd). (2) 혹자는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남은 자라고 주장한다(Caird, Mounce).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는 사단을 천년동안 구속하는 것이 형벌이 아니라 사단의 영향력을 상실하여 사단으로 하여금 더이상 미혹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천년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함에 있음을 시사한다(Ladd, Mounce, Johnson, Morris).

⭕ 그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 본문은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낸다(1:1;4:1;막 8:31;13:7;눅 24:26, 44). 사단이 무저갱에서 잠간 동안 풀려나는 것은 사단을 무저갱에 구속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촉진 시키는 것으로 세상의 종말을 초래하기 위함이다.

성 경: [계20:4]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않은 자들이 있어...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인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 - 본서에서는 '보좌들'에 대해서 많이 언급된다. 사단의 보좌(2:13)와 짐승의 보좌(13:2;16:10)를 제외한 나머지 보좌는 하늘에 있는 것으로 하늘에서 통치 함을 암시한다. 한편 보좌들에 앉은 자에 대해서 이어서 나타나는 언급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표를 받지도 않은 자들'이 동일한 부류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Mounce, Morris). 이들은 그 근거로 13:15을 제시한다. (2) 혹자는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과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표를 받지도 않은 자들'은 두 부류로서 예수에게 신실하게 충성한 무리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Barclay). 왜냐하면 이들은 죽기까지 충성한 자들로서 2, 3장에서 언급된 이기는 자들과 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인해서 죽임과 온갖 고난을 당하였다. 한편 '영혼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카스'(*)는 6:9에서 언급된 제단 아래서 신원하는 순교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된 것으로 순교자들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목 베임을 당해 죽었으나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자들임을 시사한다.

⭕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 본문은 5:9, 10의 반복으로 단 7장을 반영한다. 다니엘서에서는 옛적부터 계신 자가 성도들을 위하여 신원할 뿐만 아니라 때가 되어 나라를 성도들에게 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단 7:18, 22, 27).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든 당하지 않았든 간에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권을 가지고 천년 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 한편 '살아서'의 헬라어 '에제산'(*)은 육체적인 부활을 지칭할 때 사용된 단어로 (1:18;2:8;13:14;마 9:18;요 11:25;행 1:3;9:41;롬 14:9)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통치할 것을 시사한다(Johnson, Ladd, Mounce).

성 경: [계20:5]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에 대해서 혹자는 순교하지 않은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Ladd). 왜냐하면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나머지 죽은 자들' 곧 순교하지 않은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둘째 사망에 참여하게 된다(6절). 이 경우 순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둘째 사망에 참여하게 된다는 모순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살지 못하더라'의 헬라어도 역시 '우크 에제산'(*)으로 불신자들은 천년이 지나기까지 육체적인 부활을 하지 못할 것임을 암시한다.

⭕ 이는 첫째 부활이라. - '첫째 부활'이라는 어구는 비록 본장에서 '둘째 부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할지라도 '둘째 부활'이 있음을 전재하는 것으로 4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에게 충성한 자들과 순교자들의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한다(Irenaeus, Justine, Walvoord, Ladd, Morris, Johnson).

성 경: [계20:6]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최후의 결전]

⭕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복이 있으며 거룩한 자들이다(Beasley-Murray). 본절은 그들이 복이 있는 근거에 대한 진술이다.

⭕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 '둘째 사망'은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육체의 사망을 가리키는 체째 사망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불신자들이 맞게되는 사망이다. 이것은 불못에 던지우는 심판을 가리킨다(14, 15절;21:8). 체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복이 있는 것은 둘째 부활과 전혀 상관이 없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체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권리를 소유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다.

⭕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 체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왕권을 소유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통치하게 된다(4절).

성 경: [계20:7]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사단의 멸망]

⭕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 본절은 3절의 반복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다스리는 정해진 기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그 기간이 지난 후 잠깐 풀려나게 된다. '차매'로 번역된 헬라어 '텔레스데'(*)는 어떤 목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기간에 도달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옥'은 무저갱을 의미한다.

성 경: [계20:8]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사단의 멸망]

⭕ 나와 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곧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니라. - 본절에서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 되고 있는 '곡과 마곡'은 겔 38, 39장에 나타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곡은 회복한 이스라엘을 침략하기 위하여 부쪽 지방인 마곡에서 오는 메섹과 두발의 왕을 의미한다(겔 38:2, 6). 그러나 이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과 메시야를 대적하는 열방들로 나타난다(시 2편). 시편과 마찬가지로 본절의 '곡과 마곡'은 에스겔과 같이 어떤 특정한 왕이나 지역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Johnson, Mounce, Beasley-Murray). 왜냐하면 본절에서 곡과 마곡을 말할 때 특정 지역과 특정 사람을 가리키는 '땅의 사방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아마도 천년왕국 기간 동안 마음 속으로 메시야를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다(Johnson, Ladd). 만약 그들이 천년왕국 기간 동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죄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Ladd). 단지 사단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하고 범죄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Beasley-Murray). 한편 '미혹하고'는 사단이 무저갱에서 천년만에 풀려나와 행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사단이 '속이는 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이다(3절;12:9;13:14;19:20). 사단은 무저갱에서 천년동안 갇혀있으면서도 속이는 자로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무저갱에서 풀려나자 마자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여 세사의 종말을 초래하게 한다.

성 경: [계20:9]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사단의 멸망]

⭕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 사단과 대적자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에워싼 곳에 대해서 요한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 (1) 성도들의 진. - '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렘볼렌'(*)은 군사 용어로 군대의 영문 안이나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진영을 의미한다(출 14:19;민 2:2;신 23:14;행 21:34, 37;22:24;히 11:34;13:11, 13). 이것은 사단의 활동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Mounce, Johnson, Morris, Beasley-Murray).

⭕ (2) 사랑하시는 성. - 이것은 어떤 장소적인 의미를 지녀서 유대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성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시 78:6-8;87:2, Backwith) 다음장에서 언급될 거룩한성 예루살렘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21:10).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고 사랑함을 받는 백성들을 가리킨다(Bruce, Morris, Beasley-Murray). 한편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는 에스겔의 환상을 반영하는 것으로(겔 38:22;39:6)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신속한 심판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심판자는 쿰란 문서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쿰란 종파에 속한 사람이나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단과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Ladd, Morris).

성 경: [계20:10]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사단의 멸망]

⭕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서 소멸되나, 사단은 본절에서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받는다. 사단은 대적자들과는 달리 '불과 유황 못', 즉 '불못'에 던져겨 영원한 파멸을 맞이하게 된다.

⭕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불과 유황 못'에는 사단이 던져지기 이전에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19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재림 때에 사단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키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패망하여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졌다(19:19, 20). 한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는 사단의 멸망이 단순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영원한 멸망을 시사하는 표현이다(Morris, Ladd, Mounce).

성 경: [계20:11]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최후 심판]

⭕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 '크고 흰'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권능과 영광, 거룩, 그리고 위엄을 나타낸다. 한편 '그 위에 앉으신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다. (1) 심판하시기 위해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심판의 권한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위임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5:22;고후 5:10;딤후 4:1). 또한 에녹서에서도 메시야께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위경 에녹 1서 45:3;51:3;55:4;61:8). (2) 보좌에 앉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셨으며(4:2, 9;5:1, 7, 13;6:16;7:10, 15;19:4;21:5) 존절에 반영되고 있는 단 7:9, 10에서도 역시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자주 심판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둘 다에게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그 위에 앉으신 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체성과 단일성을 나타내는 듯하다(Mounce). 즉 본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보다는 심판자의 심판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 본문은 '여섯째 인'을 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해가 검어지고 별이 떨어지며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리는 것'을 상기시킨다(6:12-14). 이것은 타락하고 썩어진 피조물의 종말에 당할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모두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암시한다(Mounce, Ladd, Morris). 타락한 첫 창조의 피조물들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해방되고 새롭게 창조될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 8:19-23). 이러한 사실은 본문이 단순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내로운 창조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나타내고 있음을 시사한다(21:1;사 11:6-9;65:17;벧후 3:13).

성 경: [계20:12]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최후 심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혹자는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혹자는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행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 (1)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단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 (2)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단 12:1;눅 10:20;빌 4:3).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13:8;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성 경: [계20:13]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최후 심판]

⭕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 '바다'는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있던 곳을 가리킨다. 당시에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왕상 13:21, 22;14:11;렘 8:1, 2). 반대로 버려져 있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가장 친절한 행위이며 신앙의 행위로 인정되었다(Beasley - Murray).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서 죽은 시체의 부활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부활하며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한편 '사망과 음부'는 죽음의 영역을 묘사하는 것으로 죽은 자들의 실재와 사람들이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Johnson). '사망'은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야생 짐승에 의해서 당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또한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데스'(*)는 중간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거하는 장소로 나타내기도 하며(행 2:27, 31) 의롭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나타내기도 하고(눅 16:23) 무덤과 동일시 되기도 한다(6:8). 이러한 음부에 대해서 혹자는 단순히 죽은 자들이 거하는 처소라고 주장하나(Kiddle) 불의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의인화된 사망과 음부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시며 통치하신다(1:17, 18, Beasley-Murray). 본문에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실 때에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이 육체로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을 시사한다.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 본문은 앞절의 반복이다. 흰 보좌 앞에 펼쳐진 책, 즉 모든 사람들이 행한 행위에 대해 기록한 책대로 보좌에 앉으신 이는 그들의 행위를 심판하신다.

성 경: [계20:14]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최후 심판]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본절의 '사망과 음부'는 의인화된 표현이다(6:8). 이 '사망과 음부'는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 불못에 전지워져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같이 동일하게 유황 불못에 던지워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신 후에는 더이상 사망이 필요없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21:4. Johnson). 즉 이것은 사망이나 애통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암시한다(21:4;고전 15:16). 한편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불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첫째 사망과는 달리 오직 불신자들만이 겪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둘째 사망이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6절). 본절에서 이러한 둘째 사망은 불못과 동일시되고 있다. '불못'은 일반적으로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게 힌놈'(*)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 힌놈'은 예루살렘 성 밖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예루살렘 성의 쓰레기를 태우기 위해 늘 불이 붙고 있었다. 또한 몰렉 우상을 숭배하면서 인간을 희생 재물로 드릴 때 불로 태운 곳이기도 하다(왕하 16;3;21:6).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골짜기를 살육의 골짜기로 부르고 있다(렘 7:31-32).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이러한 불과 하나님의 심판이 연결되어서 '게 힌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으로 인식되었다(사 66:24). '게 힌놈'과 같은 의미를 지닌 불못은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최후의 패배를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20:15]

주제1: [그리스도의 재림과 짐승의 멸망]

주제2: [하나님의 최후 심판]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 - 본절은 앞절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첫째 부활에 참여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둘째 사망인 불못이 전혀 주관할 수 없다. 단지 둘째 사망이 주관하고 지배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 보다는 짐승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 뿐이다. 그러한 불신자들은 사단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겪는 영원한 멸망의 길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성 경: [계21:1]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 '새 하늘과 새 땅'은 사65:17과 66:22을 반영한다. '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논'(*)은 '시간적으로 최근이나 새로운'을 의미하는 헬라어 '네오스'(*)와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Johnson). 그러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갱신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새 질서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임재하사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도덕적이며 영적인 것이다(3절;벧후 3:13, Beasley-Murray, Johnson, Mounce).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앞서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본절의 강조점이 '새 하늘과 새 땅에의 거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음을 나타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범죄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이 하늘과 땅은 죄와 사망이 온전히 사라지는 종말론적 구속의 날을 고대한다(롬 8:31). 한편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것으로 '바다' 역시 지리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다(Johnson). 구악성경에서 '바다'는 악과 연관되어 비유되고 있으며(사 57:20), 본서에서는 사단이 나오고(13:1) 죽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20:13) 이해된다. 이러한 사실은 '바다'가 악을 가리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문의 '바다도 있지 않더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옛 질서, 즉 타락과 죄와 사망으로 가득찬 질서와는 엄격하게 분리된 새 질서임을 시사한다(Ladd).

성 경: [계21:2]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같더라. - 본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사용된 '새' 역시 앞절에서 사용된 '카이넨'(*)으로 지상의 옛 예루살렘과는 달리 질적으로 변화된 하늘의 예루살렘을 암시한다. 본절에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두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능력과 수단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곳은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거처이다(Morris, Johnson).

⭕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본문의 남편과 신부의 비유는 새 예루살렘이 지리적인 것이거나 공간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남편과 신부' 의 비유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19:7사 61:10) 신부인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백성간의 교제를 암시한다(Mounce, Kiddle, Ladd, Johnson).

성 경: [계21:3]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본절은 레 26:11-13의 내용을 반영한 것으로 새 예루살렘이 강림한 의미를 나타낸다(Ladd, Mounce).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 '장막'의 헬라어 '헤 스케네'(*)는 히브리어 '미쉬칸'(*)을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겔 37:27).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에스케노센)에 사용되어(요 1:1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하셔서 함께 거하심을 시사한다(Mounce, Ladd, Beasley-Murray).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하심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요 1:18;14:8, 9) 이제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백성 가운데 임하셨음을 나타낸다(22:4). 이러한 임하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 본문은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신 목적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간의 밀접한 교제를 시사한다. '하나님의 백성'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오이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의 백성들'이란 의미로 복수이다. 이는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민족을 초월하여 새롭게 변화된 백성임을 시사한다(Morris, Beasley-Murray).

성 경: [계21:4]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눈물, 사망, 애통, 아픔'은 '처음 것'과 같은 의미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이전에 죄와 사망으로 인해 부패되고 변질되었던 옛 질서의 산물이다. 이 산물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소원(疏遠)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임재하셔서 처음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과 백성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을 것이다(7:16, 17;사 35;10;고전 15:54).

성 경: [계21:5]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 본문은 본서에서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나타낸다(1:8). 이것은 만물을 새롭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을 나타낸는 선언이다.

⭕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본문은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될 것을 확증하는 선언이다. 여기서 '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오'(*)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실 새로운 창조 행위에 대해 예언적으로 선언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포이오'는 현재 시상으로 미래에 이루실 새로운 창조 행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신 구속에서 비롯되었으며 현재에 생명을 부여하는 복음에의 초대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Beasley-Murray).

⭕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 본문은 앞서 선언된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의 확증이다. 즉 앞의 선언은 모든 주권을 소유하시고 보좌에 않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실되심에 의해 보증된다.

성 경: [계21:6]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이루었도다. - '이루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고난'(*)은 복수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이런 것들이 다 이루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제까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들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Mounce).

⭕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이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칭호이다(1:8;22:13;사 44:6;48:12). 이 칭호 중에서 '알파와 처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자로서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심을 나타내며 '오메가와 나중'은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셔서 온전히 새롭게 하실 분이심을 시사한다(Johnson, Ladd, Morris).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칭호를 밝히심으로 '이루었도다'라는 선언을 보증하고 계신다.

⭕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 '목마름'의 비유는 성경에서 영적인 갈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다(시 42:1;63:1;사 55:1). 하나님은 구속하여 영생을 누리도록 하시는 샘물이시다(요 4;10, 14). 그는 자기 백성의 필요와 갈급함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생명수' 즉 구원 혹은 영생을 수여하시는 분이다(7:17;22:1, 17;요 7:37-39;롬 3:24, Johnson, Beasley-Murray, Hendriksen). 한편 '값없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가 대가를 바라거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과 호의로 베풀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계21:7]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 '이기는 자'는 2,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를 상기시킨다. 일곱 교회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며 믿음을 지킨 자들 곧 이긴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유업으로 상속되고 있다(2:7, 11, 17, 26;3:5, 12, 21). 한편 '이것들'은 앞에서 언급된 것으로 만물이 새롭게 변하는 것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생명수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Beasley-Murray). 이기는 자들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시 36:8;슥 14:8;요 4:10).

⭕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 본문은 메시야에 관한 암시인 삼하 7:14에서는 '아비'라고 되어 있으나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으로 바꾸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변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만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며 동시에 본절의 이긴 자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긴 하나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부자(父子) 관계가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Beasley-Murray).

성 경: [계21:8]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하늘과 새 땅]

⭕ 그러나...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본절은 앞서 언급된 이기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하여 영생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는 것과는 반대로 영벌에 처할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은 둘째 사망과 동일한 것으로(20:14, 15)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이 당할 심판을 나타낸다. 요한은 둘째 사망에 참여할 자들을 여덟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 두려워하는 자들. -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당하는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기보다는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들이다(마 8:26;13:21;막 4:40). 즉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이다. 요한은 '두려워 하는 자들'을 언급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둘째 사망을 벗어나 승리하기 위해서는 짐승과 사단의 핍박과 위협을 인내로써 이겨내야 함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 믿지 아니하는 자들. - 본문은 그리스도를 영접지 아니한 불신자들이나 혹은 믿음이 신실하지 못하여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신앙을 버리는 자들을 가리킨다(마 7:21-23;고전 6:6;7:12;10:27;14:22).

⭕ 흉악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브델뤼그메노이스'(*)는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사용된 '브델륏소마이'(*, '몹시 싫어 하다')의 분사형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더럽게 된 자나 혹은 황제 숭배와 같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여 부정하게 된 자들을 가리킨다(롬 2;22).

⭕ 살인자들. - 이들은 짐승의 조종 하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살인한 자들을 가리킨다(13:15;행 7:54-59).

⭕ 행음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노이스'(*)는 문자적으로 '간음한 남자들'을 의미하나 일반적으로 성적인 범죄를 행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Johnson).

⭕ 술객들. - 마술이나 점 등에 빠진 자들이나 우상을 만드는 자들을 가리킨다(13:15;행 19:19).

⭕ 우상 숭배자들. - 앞에서 언급된 '행음자들이나 술객들'이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본문에서 우상 숭배자들을 다시 언급한 것은 이 죄가 불신자들의 죄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거짓된 신들이나 사물을 놓고 숭배하거나(롬 1:23)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 - 이들은 진리를 떠나 악과 불의에 동참하여 거짓을 조장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진리를 강조하여(요일 2:21-23;3;19;4:6) 진리를 떠나는 거짓이 반드시 정죄를 받아야만 하는 행위임을 명시한다(27절;2:2;3:9;22:15).

성 경: [계21:9]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 본문에 나타난 천사는 17:1에서 나타난 천사와 동일한 듯하다(Mounce). 이 천사는 17:1에서 심판을 받을 큰 음녀를 소개한 것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를 소개하여 큰 음녀와 대조시키고 있다. 큰 음녀는 땅에 속하여 심판을 받을 대상인 반면에 어린양의 아내는 하늘에서 내려오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거할 귀하고 정결한 존재이다.

⭕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하여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19:6-8).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로서 표현하는 이러한 비유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며(사 54:6;호 1, 2절) 신약성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나타낸다(마 25:1-12;막 2:19, 20;요 3:29;고후 11:2;엡 5:25-27). 신랑과 신부의 비유는 신부의 사랑이나 신부 자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되신 하나님의 신부에 대한 선택과 사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Beasley-Murray).

성 경: [계21:10]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본절 역시 17:1-5과 병행된다. 요한은 17장에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심판받을 큰 바벨론 성을 보나, 본절에서는 높은 산으로 이끌려 올라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게 된다. 이러한 병행은 의도적인 것으로 멸망당한 큰 바벨론 성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요한이 '높은 산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것은 에스겔이 높은 산에서 본 성전 환상을 반영한다(겔 40-48장). 여기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장차 영광을 받게 될 교회를 시사한다(Johnson, Hendriksen). 한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은 2절과 병행을 이루는 표현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21:11]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 이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소유한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겔 43:5).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되었다가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위에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원한 빛이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성취를 시사한다(사 60:1, 2, 19).

⭕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에서 '벽옥'은 불투명한 보석인 반면에 '수정같이 맑더라'는 투명한 것을 나타내 해석상의 어려움을 갖는다. 그래서 혹자는 벽옥이 다이아몬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unce, Morris, Johnson). 여하튼 본문의 촛점은 그 성이 보석과 같이 빛난다는 점에 있다. 한편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좌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며(4:3) 하나님의 본성과 연관되어 사용되었다(23절,Morris).

성 경: [계21:12,13]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 이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성 전체의 범위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침략자로부터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심은 물론 성 밖에 있는 자들과 구분하고 계심을 시사한다(22:15;사 26:1;슥 2:5, Morris, Beasley-Murray).

⭕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 '열 두 문'에 있는 열 두 천사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문을 통제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것을 나타낸다(사 62:6, Ladd, Mounce, Morris, Johnson)

⭕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 문들 위에 있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은 겔 48장에 나타난 종말론적 예루살렘 성의 환상과 연결된다(겔 48:30-34). 에스겔서에 따르면 새 성전 문에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여호와 삼마'가 그 성읍의 호칭으로 부여된다. 이는 본서에 나타난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관련된 것으로(3절;22:3, 4)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을 시사한다. 한편 '열 두 지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Mounce, Johnson).

⭕ 동편에 세 문, 불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사방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 이것은 겔 48:16-19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단지 차이점은 본서와는 달리 북편이 동편 앞에 기술되어 있는 것 뿐이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혹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12궁도(宮圖)로 이루어진 '황도대'(黃道帶)와 동일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순서를 뒤바꾼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Caird, Mounce).

성 경: [계21:14]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 앞절에서 거룩한 성 옐살렘에 있는 열두 문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진술과 병행하여 본절에서는 성의 기초석 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을 언급한다.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은 문 위에 새겨진 열 두 지파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세워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눅 9:12;요 20:24;엡 2;20, Morris, Johnson, Mounce, Ladd). 열 두 지파와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병행되어 나열된 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과 신약시대의 교회의 통일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신약 시대와 구약 시대를 총괄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Mounce).

성 경: [계21:15]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본절에서 17절까지에 나타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척량은 겔 40:3 이후에 나타나는 새 성전 척량을 배경으로 한다.

⭕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 11장에 나타난 성전 척량은 요한이 하는 반면에 본절에 나타난 성전 척량은 천사가 직접한다. 본절의 성전 척량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 보존됨을 나타낸다. 또한 에스겔서의 성전 척량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겔 43:12)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하는 성의 거룩함과 어린양의 신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Mounce, Johnson, Hughes).

성 경: [계21:16]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1500마일(2,200km)이다. 이것은 12 1,000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온전한 숫자라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성이 12각형으로 되어 있어 12 12,000이 되어 이스라엘의 거룩한 수인 144,000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Farrer). (3) 혹자는 거룩한성 예루살렘의 완전함과 거대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ckwith, Mounce, Ladd, Johnson).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장광이 같다'는 말은 성전(겔 45:2)과 재건하는 성전(겔 48:20)에 대한 에스겔의 묘사에도 나타난다. 요한은 아마도 에스겔의 묘사를 상기했을 것이나 그것에서 더 나아가 '높이'도 '장과 광'과 같이 길이가 동일함을 기술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정입방체로 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정입방체'는 성막 안에 있던 지성소의 크기가 10 10 규빗이며(J.Rouw) 성전안의 지성소가 20 20 규빗이어서(왕상 6:20) 정입방체였던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그의 완전한 통치가 실현되는 곳임을 시사한다(Mounce, Morris, Johnson, Ladd). 더 나아가 이러한 사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으며 성전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해석될 수 있다(22절, Beasley-Murray).

성 경: [계21:17]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 '일백 사십 사 규빗'이 성곽의 높이를 가리키는지 혹은 두께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높이이든 두께이든 간에 그 숫자는 상징적인다. 144는 12의 제곱으로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관되어 완전함과 안전함을 시사한다(Johnson, Morris, Mounce). 한편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말은 천사가 척량한 치수가 특수한 방법에 의한 계산된 치수가 아니라 사람이 척량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계산된 것임을 의미한다.

성 경: [계21:18]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 성곽의 재질은 벽옥이다. 이 벽옥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양과(4:3)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11절). 따라서 벽옥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시사한다(Johnson, Beasley-Murray, Mounce). 한편 성의 재질은 맑은 유리와같은 정금이다. 이것은 지성소와 성소의 나머지 전체가 금으로 되어 있던 솔로몬 성정을 상기시킨다(왕상 6:20-22). '맑은 유리와 같은 정금'은 아무런 흠과 티도 없는 신부의 순결과 아름다움을 의미한다(엡 5:27, Beasley-Murray, Walvoord, Mounce, Johnson).

성 경: [계21:19,20]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열둘째는 자정이라. - '성곽의 기초석'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열 두 개의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14절). 이 열 두 개의 보석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두로 왕의 옷에 치장된 보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겔 28:13). 히브리 성서 본문(MT)에는 아홉 가지 보석만 나타나 70인역에는 열 두 가지 보석으로 나타나고 있다. (2) 혹자는 필로(Philo)와 요세푸스(Josephus)가 언급한 것처럼 황도대(黃道帶)를 이루고 있는 12궁(宮)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harles, Morris, Caird). 이들은 요한이 황도대와 순서를 거꾸로 기술하여 이교도의 예배식을 비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3) 혹자는 비록 순서는 다르다 할지라도 출 28:17-20에 나타난 대제사장이 흉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Johnson, Beasley-Murray, Mounce, Swete, Ford).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성취되며(요 4:21)구약 시대에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주어졌던 권한들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주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 본문의 보석을 연결하여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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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두로왕 옷의 | 황도대의 | 대제사장의|

| | 보석 | 12궁 | 흉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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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 옥 | 홍 보 석 | 자 수 정 - 백 양 궁 | 홍보석 |

| | (sardius) | (Ram) | |

+---------+--------------------+-------------------------+-

| 남보석 | 담 황 옥 | 청 옥 - 금 우 궁 | 황 옥 |

| | (topaz) | (Bull) | |

+---------+--------------------+-------------------------+-

| 옥 수 | 녹 보 석 | 비 취 옥 - 쌍 자 궁 | 녹주옥 |

| | (emerald) | (Twins) | |

+---------+--------------------+-------------------------+-

| 녹보석 | 석 류 석 | 담 황 옥 - 거 해 궁 | 석류석 |

| | (carbuncle) | (Crab) | |

+---------+--------------------+-------------------------+-

| 홍마노 | 남 보 석 | 녹 옥 - 사 자 궁 | 남보석 |

| | (sapphire) | (Lion) | |

+---------+--------------------+-------------------------+-

| 홍보석 | 벽 옥 | 황 옥 - 처 녀 궁 | 홍마노 |

| | (jasper) | (Virgin) | |

+---------+--------------------+-------------------------+-

| 황 옥 | 히아신스석 | 홍 보 석 - 천 칭 궁 | 호 박 |

| | (ligure) | (Balance) | |

+---------+--------------------+-------------------------+-

| 녹 옥 | 마 노 | 홍 마 노 - 전 갈 궁 | 백마노 |

| | (agate) | (Scorpion) | |

+---------+--------------------+-------------------------+-

| 담황옥 | 자 수 정 | 녹 보 석 - 인 마 궁 | 자수정 |

| | (amethyst) | (Archer) | |

+---------+--------------------+-------------------------+-

| 비취옥 | 황 옥 | 옥 수 - 마 갈 궁 | 녹보석 |

| | (chrysolite) | (Goat) | |

+---------+--------------------+-------------------------+-

| 청 옥 | 녹 옥 | 남 보 석 - 보 병 궁 | 호마노 |

| | (beryl) | (Water - Carrier) | |

+---------+--------------------+-------------------------+-

| 녹 옥 | 줄 마 노 | 벽 옥 - 쌍 어 궁 | 벽 옥 |

| | (onyx) | (Fishes) | |

+---------+--------------------+-------------------------+-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첫째 견해의 경우 사단을 상징하는 두로 왕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기초석을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Feinberg, Gaebelein), 둘째 견해의 경우 이교도의 예배식을 비난하기 위하여 당시의 점성학에서 비롯된 황도대를 이용했다는 것 역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한편 열 두 보석의 특징에 대하여는 본장 강해를 참조하라.

성 경: [계21:21]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 열 두 개의 진주로 이루어진 열 두 문은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12, 13절) 사 54:12을 반영한다. 랍비의 글에 따르면 가로와 세로가 30 규빗이 되는 진주와 보석들로 예루살렘의 문을 만들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Baba Bathra 75a). 이러한 진주는 당시에 부요와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장관을 묘사한다(Mounce). 한편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이루어진 길은 18절에서 언급된 성의 재질과 동일한 것으로 어떠한 흠도 찾을 수 없는 신부의 순결성과 아름다움을 나타낸다(Johnson).

성 경: [계21:22]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주

제2: [새 예루살렘]

⭕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구약 시대에 성막이나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제를 나누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에 계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더이상 가시적인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셔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시기 때문이다(Johnson). 그래서 요한은 본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 경: [계21:23]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 본절은 사 60:19, 20을 반영한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성전이 따로 없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신 곳이다(22절). 그곳에는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직접 자신의 광채로서 비취시기 때문에 해와 달과 같은 처음 하늘에 있는 자연적인 것은 전혀 불필요하다(슥 14:7). 혹자는 해가 하나님의 광채로, 어린양의 광채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나(Bousset) 용납하기 어렵다. 한편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요 1:9;3:19;8:12;12:35).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근원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신 존재임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성 경: [계21:24]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이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 본절은 사 60:1-11을 반영한다. '만국과 땅의 왕들'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이것들이 보편적 구원(universal salv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arclay, Caird). (2) 혹자는 어린양을 따르던 구속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한다(Lenski, Kiddle, Johnson, Ladd, Morri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비록 본서에서 '만국'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할지라도(17:2) 세상의 만국을 속여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했던 옛 뱀은 이미 패배하였고(12:9) 멸망당하였기 때문에(20:2, 3) 본절의 만국과 땅의 왕들은 짐승과 바벨론을 대항하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충성하여 구속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수 있다(1:5;11:2, 18;15:2). 한편 '빛'은 앞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의 광채를 의미한다(23절).

성 경: [계21:25]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는 사 60:11을 반영한것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생활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완전하게 안전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Mounce). 한편 '밤이 없음이라'는 상반절에서 '낮'만 언급된 이유이다. 본절의 '밤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첫 창조의 때와 같이 자연의 빛에 의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는 세계임을 의미한다(23절). (2)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밤이나 어두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분리된 것을 나타내므로(마 6:23;8:12;22:13;25:30) '밤이 없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임재해 계심을 의미한다.

성 경: [계21:26]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 본절은 24절의 반복이다.

성 경: [계21:27]

주제1: [새 하늘과 새 땅]

주제2: [새 예루살렘]

⭕ 무엇이든지...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 23절과 26절에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만국과 땅의 왕들에 대해서 언급한 반면에 본절에서는 들어오지 못하는 자에 대해 세 부류로 기술하고 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이 배척당하는 것은 그들이 적그리스도의 품성과 생활 방식을 좇아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다(8절;17:4, Beasley-Murray).

⭕ 속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논'(*)은 '모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킨다(8절;22:15, Johnson).

⭕ 가증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델뤼그마'(*)는 우상 숭배자나 배교자들을 가리킨다(17:4;단 9:27;12:11;마 24:15).

⭕ 거짓말하는 자. - 이는 본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나타내며 거짓 선지자를 암시하기도 한다(2:2;3:9;14:5).

⭕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 본문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어린양의 생명책'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임을 암시한다(3:5).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하여 믿음을 소유하고 영생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성품과 뜻에 일치하는 자들이다(Beasley-Murray).

성 경: [계22:1]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 '생명수의 강'은 창 2장과 겔 47장을 반영한다. 에스겔서에 따르면 물은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와 바다 곧 사해에 도달하여 사해의 죽은 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생물이 살 수 있도록 한다(겔 47:1-12). 이러한 배경을 가진 '생명수의 강'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죽음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2) 혹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풍성한 삶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arclsy). (3) 혹자는 성령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wete, Walvoord). (4) 혹자는 영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네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에스겔서에서의 물은 성전 문지방에서 비롯되나 본절의 생명수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성전임과 동시에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시사한다(21:22).

성 경: [계22:2]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 생명수가 흐르는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다. 이 생명 나무는 두 가지 배경을 갖고 있다. (1)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따 먹을 수 없게 된 생명 나무를 가리킨다(창 3:22). 이 경우 에덴 동산에서는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그것이 회복되어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2) 에스겔의 환상에 보인 성전에서 나와 흐르는 강가에 있는 각종 실과 나무를 가리킨다(겔 47:12).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을 가진 생명 나무는 앞절의 생명수와 같이 영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Morris).

⭕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본문은 겔 47;12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는 문자적인 의미의 열매가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의 생명력이 왕성하여 영생을 의미하는 실과가 풍성함을 시사한다(Johnson, Morris, Mounce). 왜냐하면 그곳에는 해와 달이 없고 대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빛이 되시므로 달마다 지속적으로 열리는 실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해 있다'는 겔 47:12을 반영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강조하는 반면 본문에서는 잎사귀 자체의 치유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 치유할 수 있는 잎사귀가 존재하는 것은 단순히 새 예루살렘에 질병과 고통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나무에 참여하면 전혀 고통이나 부족함이나 질병이 없는 완전함을 누리는 것을 시사한다(Mounce, Ladd). 즉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여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났음을 암시한다(마 11:29;롬 8:12, 19-23;갈 2:19).

성 경: [계22:3]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데마'(*)는 저주를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에서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창 3:14-20의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며 동시에 슥 14:11의 성취이다. 저주 상태에서 회복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나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함께 임재해 주심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고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된다.

⭕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 '그'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며 둘째는 어린양이고, 셋째는 둘 다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그'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토'(*)는 단수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하나의 단일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Beasley-Murray). 한편 '섬기며'의 헬라어 '라트류수신'(*)은 예배 행위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참여하는 모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예배하며 경배함을 시사한다(Ladd, Johnson, Morris).

성 경: [계22:4]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을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심지어 모세에게도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출 33:20, 23).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대면한 것이 곧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었다(요 14:7, 9;17:3).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된다. 한편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13:16). 여기서 이마에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 예루살렘에 참여한 자들이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소유가 되며 그를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12, Mounce, Morris, Ladd).

성 경: [계22:5]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 본문은 21:23, 25의 반복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이상 밤이 존재하지 않는 낮이 계속된다(슥 14:7). 왜냐하면 그곳을 등불이나 햇빛에 의해서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하나님 자신이 그곳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원한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영원한 영과의 빛이 비취심을 시사한다.

⭕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축복이다. 이것은 3:21에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자유와 권위를 갖게 될 것을 시사한다(마 20:25-27).

성 경: [계22:6]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 본문은 19:9을 반영한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는 1-5절까지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본서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서 내용에 대한 확증을 시사한다(Swete, Beasley-Murray).

⭕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은 본서에 나타난 계시의 주체이다. 여기서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톤'(*)은 복수로서 성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영들, 즉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본서의 내용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모든 시대, 즉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영감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기토록 하셨다. 한편 '속히 될 일'은 계시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것은 1:1의 반복으로 시간상으로 곧 이루어질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르렀을 때 지체없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언의 내용은 1: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를 통해서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졌다.

성 경: [계22:7]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 '내가 속히 오리니'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반복이다(2;16;3:11). 본절의 '속히'는 앞절의 '속히'와 동일한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지 않으시고 오실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후반절에서 언급할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최대의 응답이다. 한편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은 본서에 언급된 일곱 가지 복 중 여섯째 복이다. 이것은 첫째 복을 언급하고 있는 1:3의 반복으로 예언의 말씀을 곧게 붙잡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 인내하여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이다.

성 경: [계22:8]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옆드렸더라. - '보고 들은 나 요한'은 요한 자신이 이제까지 언급한 모든 예언의 내용들이 황홀경이나 어떤 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들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사한다(Mounce). 한편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는 행동은 앞서 19:10에서도 진술된 바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계시를 전달받는 요한의 겸손한 자세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dd). (2) 혹자는 계시를 받을만큼 높은 영적 능력을 소유한 요한 자신도 유일하게 경배를 받을 대상인 하나님 대신에 좋은 것 그 자체를 경배하려는 미묘한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웠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ohnson). (3) 혹자는 당시 흔히 있었던 천사 숭배가 잘못된 행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Morris).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성 경: [계22:9]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 본문은 19:10의 반복이다. 천사는 요한의 경배 행위를 제지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권면한다. 19:10에서는 천사가 자신을 '요한과 예수의 증거를 받은 형제들'과 동일시하나 본절에서는 '요한과 선지자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천사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그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 즉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과 같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기에 설사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여 준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경배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계시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경배 대상이 된다.

성 경: [계22:10]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 '인봉하지 말라'는 10:4에서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사 8:16;단 8:26;12:4, 9).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서 혹자는 죄인들이 더이상 구원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Swete) 재림의 때가 가까워 더 많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임을 나타낸다. 그 명령은 이 예언의 말씀을 더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는 의미로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교회가 알 필요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Johnson, Morris). 한편 '때가 가까우니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본서의 예언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무리, 즉 적그리스도와의 전투를 시사함은 물론 역사의 매순간에 하나님과 사단의 영적 전투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때가 가까우니라'는 재림의 임박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대성을 암시한다.

성 경: [계22:11]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 혹자는 본절이 더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Charles, Swete). 그러나 17절에서 회개의 초청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본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Beasley-Murray, Ladd). 본절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본절은 지금 이때에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Morris, Mounce).

성 경: [계22:12]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는 7절의 반복이다(3;11). 이와 같이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연결된 재림은 사 40:10의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는 권능의 손을 휘둘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한편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처럼 행위에 근거한 판단이나 심판은 성경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2:23;잠 22:12;렘 17:10;롬 2:6;벧전 1:17). 이것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묘사할 때에도 (20:13)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본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의로운 자에게 주어지는 '상'(*, 미스도스)은 많은 핍박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인내로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13:10;14:12, Ladd). 의로운 자에 대한 보상은 상대적으로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를 추종하고 따른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나 짐승과 사단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만을 가져다 준다.

성 경: [계22:13]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 이 칭호는 하나님의 칭호이나(1:8;21:6) 본절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난다(1:17;2:8). 이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심판을 하시는 심판자로서의 권위와 능력의 근거를 시사한다. 본절에 나타난 세 가지 표현, 즉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그리고 '시작과 끝'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로서 완전한 심판자가 되심을 시사한다(1:8, 17;2:8;21:6 주석 참조).

성 경: [계22:14]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1;3;14:13;16:15;19:9;20: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7: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 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한 반면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저인 행위를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3:10) 핍박과 환난 가운데 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요일 1:7, Morris, Ladd, Mounce).

⭕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본문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복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생명 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성 경: [계22:15]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 '개들'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이미 21:8에서 언급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자들의 명단에 있는 자들과 동일하며 더욱이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그들이 미혹하여 속이는 자인 사단과 근본이 동일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이다. 신 23:18에서는 남창을, 마 15:26에서는 이방인을, 빌 3:2, 3에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한는 자들을 가리킬때 사용되어 이 '개들'이 하나님의 뜻과 통치하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킴을 시사한다. '개들'과 불못에 들어갈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두루마기를 빨아 구속에 참여한 자들과는 달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하며 둘째 사망에 참여하는 자들이다(20:13-15). 한편 혹자는 본절에서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이미 현재에 결정된 사실로 이해한다(Caird). 그러나 이것을 현재 사실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14절에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미래에 그 복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아 본절도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Mounce, Ladd).

성 경: [계22:16]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 본문은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그 신빙성이 분명함을 강조한다. 예언의 말씀은 그리스도에게서 사자 곧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교회들에게 증거한 것이다(1:1). 여기서 '너희에게'로 번역된 헬라어 '휘민'(*)은 복수로 1:1에서와 같이 요한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요한을 비롯한 모든 구속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은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한 예언이다. 이 사실은 본서 내용이 심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하여진 예언이 아니라 교회로 환나과 핍박 가운데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할 수 있도록 위로와 권면의 내용이 내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는 5:5의 반복이다. 이것은 사11:1, 10에 진술된 약속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나 구약을 성취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이심을 시사한다(마 1:1;9:27; 15:22;21:9;롬 1:3;딤후 2:8 주석 참조). 한편 '광명한 새벽별'은 민 24:17을 반영한다. 민수기에 언급된 '야곱에서 나온 한 별'은 사실상 다윗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상반절의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와 연결되어 그리스도를 지칭한다(Bruce, Mounce). 이것은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유일한 주이시며 그의 메시야적 통치를 통해 죄로 어두운 세상을 물리치고 오직 의와 평강만으로 다스리는 종말론적인 새 시대의 여명이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속 사역을 통해 구원하시고 재림하셔서 심판하심으로 사단과 짐승의 핍박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던 어둠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시대의 빛을 가져다 주신다(Beasley-Murray, Ladd, Morris, Beckwith).

성 경: [계22:17]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 '성령과 신부'는 한 목소리로 초청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시며(19:10), '신부'는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를 가리킨다(19:7). 성령은 교회에게 예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도록 영감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설교나 전도의 과정 속에서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해 사람들의 양심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증언하신다(요 16:8-11). 그러기에 성령과 교회의 증거는 한 가지이며, 둘이 연합하여 오직 예수에 대해 세상에 선포하며 증거하게 된다(Beasley-Murray). 성령과 교회가 연합하여 행하는 초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더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지속된다.

⭕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본문에서는 네번의 초청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앞의 두 가지 초청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뒤의 두 가지 초청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에의 초청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본문의 초청 전체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한다(Johnson, Mounce). 그러나 이 주장은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에 나타난 네 번의 초청 중에서 뒤에 나타난 두 가지 초청에 비추어 전반부의 두 가지 초청을 해석하여 네 가지 초청 전체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에로의 초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Ladd, Morris, Beasley-Murray). 여기서 본문에 나타난 세 번의 '오라'는 현재 시제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더이상 회개할 수 없을 때가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초청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속적인 초청의 말씀을 듣고 갈급하여 생명수를 마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무료로 생명수를 공급받아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1절;21:6;사 55:1;요 4;14;7:37, 38).

성 경: [계22:18,19]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요한은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요한은 이 경고를 통해서 본서의 내용이 자신의 상상이나 꿈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인 예언임을 밝힐 뿐만 아니라 예언의 말씀의 권위를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경고는 신 4:2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해 요한 자신에게 전하여 준 계시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확증을 강조하는 진술 방법이다.

⭕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 '듣는 각인에게'는 1:3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서가 수신자들 공동체 내에서 크게 읽혀져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질 것을 시사한다. 함편 요한은 본문에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본서 이외에 어떠한 것이라도 더할 경우에 대해 진술한다. '기록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그람메나스'(*)는 완료 시제로 이미 완전히 기록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더이상 가감할 것이 없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은 말씀에 '더한 자들'에게 모든 재앙이 '더하여질 것'이라는 수사학적인 비교를 통해 완전한 본서의 예언을 변절시키기 위해 더하는 자들에게 내릴 심판의 엄중함을 경고한다.

⭕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본문은 앞절과는 대조적으로 완전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여 버리는 경우에 대한 묘사이다. 본문 역시 완전한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에게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하는 축복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수사학적인 비교를 사용하고 있다. '생명 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은 구속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축복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서에서 언급된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들에게 영생의 축복을 가리킨다. 요한은 본서에 언급된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자들에게 영생의 축복에서 제하여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유황 불못에 던져져 둘째 사망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성 경: [계22:20]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마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 다'는 아람어 '마라나타'(*)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성 경: [계22:21]

주제1: [마지막 위로와 경고와 축복]

주제2: [예수 재림의 임박함]

⭕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 본서 전체를 매듭짓는 본절의 축복은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흔한 결론이 아니라 할지라도, 본서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회중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서신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연스러운 결론이다(1:4). '모든 자들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판톤'(*)에 대해서 혹자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나(Metzger)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Swete, Beasley-Mur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