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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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8:39
영혼의 양식 91-12호 1991.03.24.
성서일과 ; 사50:4-9, 빌2:5-11, 막11:1-11.
제목 ;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람바네데” 병원에서 죽어 가는 생명들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족하여 각지로 다니면서 모금운동을 벌여 병원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모금을 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역에는 많은 친척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이 영접을 나와 있었습니다. 열차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1등과 2등실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기다렸습니다. 슈바이처 박사 정도면 당연히 1등 아니면 2등칸에서 내릴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맨 뒷칸의 3등 열차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영접객들은 달려가서 박사를 붙들고는 “아니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하고 원망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4등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칸을 탓다오.” 더 낮은 자리가 있었다면 그것을 탔을 것이라는 겸손한 태도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면서 또한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날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고난의 시작을 의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윗 임금과 같이 왕으로 등극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적인 왕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고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면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처럼 화려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습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동화속에 나오는 한편의 그림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예수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 일을 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제자들도 때때로 “그 나라가 언제 옵니까?” 하고 물어볼 정도로, 예수님이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세우시려는 나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슈바이처 고향사람들이 슈바이처가 1등실을 타고 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슈바이처는 3등실을 타고 왔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큰 권력을 가지고 큰 소리 땅땅치며 오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에 속했던 십자가형을 예수님은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뭐라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아주 더럽고 흉칙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던 그 많은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함께 죽겠다고 한 제자까지도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볼품없이, 그리고 외롭게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탓노라고 한 슈바이처보다도, 예수님은 더 낮아지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빌 2:8)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같은 성경 (2:9)에서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늘 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제 실속만 차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밟히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앙갚음을 해야 속시원해 하는, 그런 사람들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사야 50장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솜씨를 익혀 준다고 했습니다. 고달픈 사람을 격려할 수 있도록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일깨워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역하거나 꽁무니를 빼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욕설과 침밷음을 당해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없음을 알고 지켜 주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는 비록 업신여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믿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 한 것은 인간성 회복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기죽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당당한 모습을 지니고 사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려한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하고서도 큰 소리침으로써 자신의 헛점을 감추어 보려는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비록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으나 욕을 먹어도 하나님의 진실을 믿기 때문에 말없이 그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겉모양은 좀 누추하지만 속이 꽉찬 인간입니까? 아니면 손에 별로 든 것이 없으면서도 큰 소리치고 난체함으로써 한 몫 하려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의 모습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어디 내놓고 “내가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1. 믿음이 부족하여 겸손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교포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도산 선생은 안타까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거드름이나 피우는 양반의 후손들, 자기 게으른 탓은 하지 않고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도산 선생은 저들의 의식구조부터 뜯어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산 선생은 저들이 보는 앞에서 손수 비질과 걸레질을 하고 유리창을 닦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변소를 깨끗이 청소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교포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차츰 도산 선생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함께 나서서 부지런히 일도 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 사람을 우습게 여기던 미국인들이 점점 조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도산 선생, 이미 조선 내에서 뿐만 아니고 외국 교포들 사회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지만, 도산 선생은 그 명성을 뒤로 하고 직접 궂은 일에 뛰어듦으로써 교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 애국지사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처럼, 도산 선생은 신분을 꽤나 따지던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직접 천한 일을 함으로써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제자인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는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를 져야 했던 예수님,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살 말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무슨 불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에 너무 민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주님의 일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3등실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변소 청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체면보다는 내실을 더 중요시 했기 때문입니다. 곧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사람들 눈치보고 사는 것이 제일이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교회를 찾은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만 합니까? 구체적인 실예를 자세히 드는 것은 피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나라사람, 특히 우리 크리스챤들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세상의 복보다 더 귀한 것인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듯이 뽐내고 자랑하는 것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지 말고 숨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삶의 보람과 기쁨을 얻으려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일을 우리는 찾아서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해지려면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고, (빌 2:3)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모습을 생각하면 이기심이나 허영심과는 너무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예수님이 조금치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따른 것이지, 조금이라도 예수님이 자신을 생각했다면 정말 부끄럽고 힘든 짊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2.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을 가르쳐 주시고, 낮아져서 겸손히 말씀대로 사는 이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해져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로다!” (막 11:10)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의 나라가 다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예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른 사람들이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길을 간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회복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항하는 죄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는 겸손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 생각이나 내 감정은 억누르고, 하나님이 진실한자의 편이 되어 도와주실 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 50:7-8)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때리고 욕하며 억울하게 모함을 해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도와주시고, 죄없음을 알아주시며 옆에 계실 줄을 믿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인간성은 회복됩니다. 옛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여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면, 새 아담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게 되자 시기심을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지니고 있으면서도, 저들한테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요, 죽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의롭게 여겨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로마를 총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정복했음을 세계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인 로마사람을 죽임으로써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순교를 당함으로써 로마를 이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의 세상을 원합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죽이지 않는,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먼저
3.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세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심히 바보스럽고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힘든 일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적당히 믿어야지, 곧이 곧대로 믿게되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일에 부딪쳐 살다보니 자꾸만 믿음이 흔들리고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어떻게 살아야 값진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 구조는 비슷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무력이나 권력, 또는 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고, 또 그런 힘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 복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것처럼, 오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세상의 평화는 무기의 힘도 아니고 돈의 힘으로도 이룰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예수의 십자가로써나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신 자신이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는 더 널리 확대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돌보는 생활을 함으로써,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진리의 길을 배우고 들었습니다. 이 길이 복이 되는 줄을 여러분의 양심은 분명히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래서 최후의 승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성서일과 ; 사50:4-9, 빌2:5-11, 막11:1-11.
제목 ;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람바네데” 병원에서 죽어 가는 생명들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족하여 각지로 다니면서 모금운동을 벌여 병원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모금을 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역에는 많은 친척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이 영접을 나와 있었습니다. 열차가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1등과 2등실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기다렸습니다. 슈바이처 박사 정도면 당연히 1등 아니면 2등칸에서 내릴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맨 뒷칸의 3등 열차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영접객들은 달려가서 박사를 붙들고는 “아니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하고 원망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4등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3등칸을 탓다오.” 더 낮은 자리가 있었다면 그것을 탔을 것이라는 겸손한 태도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이면서 또한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날이지만, 동시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고난의 시작을 의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윗 임금과 같이 왕으로 등극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적인 왕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고 지긋지긋한 종살이를 면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고 예수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그처럼 화려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우습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동화속에 나오는 한편의 그림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예수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큰 일을 하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제자들도 때때로 “그 나라가 언제 옵니까?” 하고 물어볼 정도로, 예수님이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세우시려는 나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슈바이처 고향사람들이 슈바이처가 1등실을 타고 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슈바이처는 3등실을 타고 왔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큰 권력을 가지고 큰 소리 땅땅치며 오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더욱 비참한 모습으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에 속했던 십자가형을 예수님은 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뭐라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아주 더럽고 흉칙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던 그 많은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함께 죽겠다고 한 제자까지도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볼품없이, 그리고 외롭게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4등칸이 없어서 3등칸을 탓노라고 한 슈바이처보다도, 예수님은 더 낮아지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빌 2:8)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같은 성경 (2:9)에서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의 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늘 나라는 겸손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제 실속만 차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밟히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앙갚음을 해야 속시원해 하는, 그런 사람들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사야 50장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솜씨를 익혀 준다고 했습니다. 고달픈 사람을 격려할 수 있도록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아침마다 우리의 귀를 일깨워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역하거나 꽁무니를 빼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욕설과 침밷음을 당해도 얼굴을 가리우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없음을 알고 지켜 주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는 비록 업신여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믿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 한 것은 인간성 회복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뽐내고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기죽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겸손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당당한 모습을 지니고 사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려한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하고서도 큰 소리침으로써 자신의 헛점을 감추어 보려는 거짓되고 가증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비록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으나 욕을 먹어도 하나님의 진실을 믿기 때문에 말없이 그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겉모양은 좀 누추하지만 속이 꽉찬 인간입니까? 아니면 손에 별로 든 것이 없으면서도 큰 소리치고 난체함으로써 한 몫 하려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의 모습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어디 내놓고 “내가 크리스챤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1. 믿음이 부족하여 겸손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교포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도산 선생은 안타까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거드름이나 피우는 양반의 후손들, 자기 게으른 탓은 하지 않고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도산 선생은 저들의 의식구조부터 뜯어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산 선생은 저들이 보는 앞에서 손수 비질과 걸레질을 하고 유리창을 닦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변소를 깨끗이 청소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교포들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차츰 도산 선생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함께 나서서 부지런히 일도 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 사람을 우습게 여기던 미국인들이 점점 조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도산 선생, 이미 조선 내에서 뿐만 아니고 외국 교포들 사회에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지만, 도산 선생은 그 명성을 뒤로 하고 직접 궂은 일에 뛰어듦으로써 교포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도산 선생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 애국지사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처럼, 도산 선생은 신분을 꽤나 따지던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직접 천한 일을 함으로써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제자인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는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를 져야 했던 예수님,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살 말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무슨 불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에 너무 민감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주님의 일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으니,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3등실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의식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변소 청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체면보다는 내실을 더 중요시 했기 때문입니다. 곧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사람들 눈치보고 사는 것이 제일이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교회를 찾은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의식하며 살아야만 합니까? 구체적인 실예를 자세히 드는 것은 피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우리나라사람, 특히 우리 크리스챤들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세상의 복보다 더 귀한 것인줄 안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듯이 뽐내고 자랑하는 것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지 말고 숨어서 주의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삶의 보람과 기쁨을 얻으려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일을 우리는 찾아서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해지려면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고, (빌 2:3)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모습을 생각하면 이기심이나 허영심과는 너무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예수님이 조금치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따른 것이지, 조금이라도 예수님이 자신을 생각했다면 정말 부끄럽고 힘든 짊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2.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을 가르쳐 주시고, 낮아져서 겸손히 말씀대로 사는 이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해져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로다!” (막 11:10)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의 나라가 다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예수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따른 사람들이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길을 간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회복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반항하는 죄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는 겸손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 생각이나 내 감정은 억누르고, 하나님이 진실한자의 편이 되어 도와주실 줄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 50:7-8)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때리고 욕하며 억울하게 모함을 해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도와주시고, 죄없음을 알아주시며 옆에 계실 줄을 믿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인간성은 회복됩니다. 옛 아담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여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면, 새 아담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인기를 끌게 되자 시기심을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지니고 있으면서도, 저들한테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요, 죽는 것이 사는 길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의롭게 여겨 다시 살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로마를 총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정복했음을 세계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인 로마사람을 죽임으로써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순교를 당함으로써 로마를 이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의 세상을 원합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죽이지 않는, 서로 돕고 사는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를 믿는 우리가 먼저
3.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세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심히 바보스럽고 미련한 일입니다. 그리고 힘든 일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적당히 믿어야지, 곧이 곧대로 믿게되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일에 부딪쳐 살다보니 자꾸만 믿음이 흔들리고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어떻게 살아야 값진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 구조는 비슷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무력이나 권력, 또는 돈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고, 또 그런 힘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면 복된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것처럼, 오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세상의 평화는 무기의 힘도 아니고 돈의 힘으로도 이룰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예수의 십자가로써나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신 자신이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는 더 널리 확대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돌보는 생활을 함으로써,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진리의 길을 배우고 들었습니다. 이 길이 복이 되는 줄을 여러분의 양심은 분명히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래서 최후의 승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