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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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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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양식 91-16호                                            1991.04.21.

성서일과 ; 행4:8-12, 요일3:18-24, 요10:11-18.

제목 ; 진실한 사랑




요한일서 3장 18절에,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거짓된 사람인지 진실한 사람인지, 또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인지 마귀에게 속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그의 행동이 진실한가 아닌가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변함없이 꾸준한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생전에는 열심도 많고 신앙고백도 앞장서서 하고 해서 진실해 보였지만, 주님이 못박혀 죽게 되자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베드로는 진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부활한 다음, 자기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진실한 가를 알게된 다음부터는, 주님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섬강 버스 사고로 죽은 아내의 뒤를 이어 남편마저 자살하고 만 부부교사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고 장재인 최영애씨 인데, 이들은 대학에서 만나 결혼을하여 부부교사로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이들은 임지가 달라서 떨어져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자는 서울에서, 여자는 강원도 홍천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1일, 부인 최선생이 아들과 함께 남편을 만나러 서울로 오던 중, 여주 섬강 다리에서 교통사고로 죽게 된 것입니다.

남편 장선생은 아내에 대하여 시로 표현하기를, “불행한 사람과 만나서 고생만 한 고마운 여자”라고 썼습니다.  그러다가 아들의 시체를 강에서 찾아낸 후에, “삶에 대한 의무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산다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남편 장선생은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자살의 정당성은 둘째치고, 아무튼 장선생의 아내에 대한 참 사랑은 칭찬해 줄만한 사실입니다.  아내가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성격이 맞지 않느니 재미가 없네 하면서, 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하던 약속을 어기고 아내를 버리는 못된 남정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죽으면 좋아서 변소간에 가서 웃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세상 풍조에 비하면, 장선생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으며, 영화로 만들만한 소재로 생각되어 집니다.

다만 주를 믿는 우리가 볼 때에는, 좀 아쉬운 생각이 드는 장선생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분명, 목숨을 이어가는 것만이 제일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승화되지 못한, 가족애의 연계 선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이 자살을 찬성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장선생의 그 사랑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아내를 사랑했다면, 아내가 다 이루지 못한 스승의 길을 교단에서, 쓰러질 때까지 감당하는 것이 더 옳았을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요일3:21)에,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일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거짓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서, 닭 우는 소리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서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옳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믿는 대로 끝까지 지켜 나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양심과 반대가 되는, 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참 사랑을 느꼈을 때에는 죽기까지 주님만 사랑하고 복음 전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승화시켜 살았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욕심에서 주를 배신했던 베드로는, 회개하여 진리이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새로운 인생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요일3:22)에서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23절에 있는 말씀대로, “주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하되, 말로나 혀끝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꾸준하게 변함없이 몸으로 보여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저는 요즈음, 한돌교회와 성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 중에 있습니다.  정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교회를 위한 일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목자는 그의 양들이 따르지 않을 때, 그 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평소에는 주님을 잘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투듯이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고백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1. 거짓된 사랑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 크리스챤의 삶은 하나님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진실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거짓 웃음을 팔며 정말 좋아하는 양 가까이 사람들을 대하는 화류계의 여자들처럼, 인간관계가 순수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인간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말씀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심으로써 그의 진실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보장을 받고 죽으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진정 주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 까닭이었습니다.  (요10:18)이 말씀을 보면,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3가지 이유로 말씀드릴 수 있습 니다.  하나는, 주님이 착한 목자이기 때문에 양들인 우리 인간을 사랑해서이고, 둘째는, 주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또한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주님의 죽음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가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주님의 죽음은 일의 마침이 아니라,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끝내기가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을 걸고 진리를 증언하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행동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이 실패로 끝났는 줄로 알았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의 죽으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말씀이 옳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죄 없는 사람이었구나!”하고 고백했던 것입니다.(눅23:47)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진실함을 보아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작고 별 볼일 없는 일이지만 꾸준히 계속함으로써 그 성실성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또는 믿음의 형제를 성실하게 돌봄으로써 그 믿음의 신실함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들을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잘 사는 가정은 별로 없지만, 다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여기에다가 믿음 생활도 세상 살 듯이 열심히 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의사는 냉정해야 합니다.  동정심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면,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저는 좀 냉정하게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딸 하나만 둔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습니다.  “왜, 딸 하나만 낳았느냐?  그 딸 하나 있는 것 죽으면 어떻게 하려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두는 것이 순전히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자식만을 위하여 부모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가도, 이런 때는 그 정반대처럼 들리니, 과연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있는 것인지,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끔 우리 집사람은 걱정을 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꽤나 아내가 날 사랑하는구나 하고 호기심이 나서 더 들어볼라 치면, 그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내가 죽으면 오래 오래 자기 혼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입니다.

언젠가는 자기가 심히 아파서 앓아 누워 있을 때에 말하기를, “내가 죽을 것 같아요.  내가 죽으면 당신은 어떻게 살지?” 하고 정말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죽는 대로 새장가 들어 잘 살 테니 말이요”하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목사가 공개적으로 너무 심한 말을 해서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제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장재인 선생처럼, 아내가 죽었다고 해서 뒤따라 죽을 용기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말만 하지 맙시다.  교회를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몸으로 보여줍시다.  말로 앞세우지 말고 행동이 뒤따르도록 몸부림칩시다.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이 진실이지만, 행동이 이어지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살아보려고 교회에 나왔으니,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를 위하여, 곧 진리를 위하여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은,




2. 독생자인 주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함으로써 그의 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장재인 교사가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아내에 대한 참 사랑을 보여준 것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어떤 감동까지 줍니다만,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은 보다 더 승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이 아내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좀 더 큰 공동체나 높은 가치를 사랑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편협한 유대주의자 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주의 죽음은 그 편협성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죽으심이 화목제가 되어, 사람들 사이를 갈 막았던 불화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소개되는, 복음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사랑의 길은 나 중심에서 벗어나는데서 찾아야 합니다.  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모든 사랑은 거짓 사랑에 불과합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자식을 내 뜻대로 키워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 하여금 맘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는 일입니다.  자식에게 돈을 투자해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겠다는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어야 하고, 그 귀중한 가치를 위하여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자식으로 하여금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제시해 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써, 또한 그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끔 하신 것이 십자가의 희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주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시였고, 그것이 나중에는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표시가 된 것입니다.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아도 서로 믿지 못하면 남남이나 다름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죽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성도가 많을 때 행복하고, 성도는 믿고 따를 수 있는 목자가 있을 때 복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이처럼 서로 믿고 사랑할 수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기를 저는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3. 십자가를 통하여 보여주신 주님의 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주를 위해 몸바쳐 사는 진리의 길을 갑시다.




요한일서 3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되면, 그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으려면 계산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에서는 이처럼 계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삯꾼 목자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삯꾼 목자는 계산이 빠릅니다.  평소에는 양을 제일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온갖 이익을 다 챙기지만, 막상 위험이 닥치면 양일 버리고 도망쳐 버립니다.  필요하면 살살거리며 친절을 베풀다가도, 별일 없으면 발길을 끊어버리고 마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는 종종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계산을 버려야 합니다.  환경이 변해도, 꾸준하면서도 변함없이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부흥회가 끝난 직후에만 열심을 낼 것이 아니라, 과연 믿음의 길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계속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이 묻기를 “돈이 나보다 그렇게 더 중요하더냐?” 하시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나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더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삯꾼이 별게 아닙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진실과 진리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믿습니다.  진실과 양심을 저버리고 살면, 짐승과 다름없고, 비인간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 구실을 해 보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나 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의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본받아 이웃과 교회를 참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사는 복된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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