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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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8:37
영혼의 양식 91-06호 1991.02.10.
성서일과 ; 왕하2:1-12, 고후4:3-6, 막9:2-9.
제목 ; 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은혜가 집에서 입고 온 웃옷이 맘에 들어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난, 이런 옷 입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한나가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아주 한심스럽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엄마 소원은 그거예요? 제 소원은 첫째로 세계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되는 것이며, 셋째는 우리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거예요. 교회가 성장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옷을 입고 싶은 것도)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해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한나가 생각할 때, 엄마가 말하는 소원이 너무나 형편없이 수준이 낮다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차원이 아주 다른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제 아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 입고 싶은 옷 한 벌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만, 과연 국민학교 5학년 짜리가 가지고 있는 소원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있는 것을 바라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는지요?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은 이미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을 발견 하셨기 때문에,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줄로 압니다.
구약 열왕기상 2장에 나오는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에게 무엇이 가장 값진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곧 자기와 헤어져 하늘나라에 들림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바짝 붙어 다녔습니다. 선생님이 자기에게,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갑절로 물려주시지 않으면 선생님과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엘리사의 주장이요 소원입니다.
김포에 엘리사와 같이 있던 엘리야는, “자네는 여기 남아 있게. 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서울에 가야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결코 안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몰라도, 절대로 선생님과 헤어질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서울로 갔습니다. 마침 서울에 있던 엘리야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선생님이 하늘로 들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고 묻지 엘리사는 “나도 알고 있으니 좀 조용히 있게”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여기있게.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대전에 가야되겠네” 하자, 엘리사는 조금도 변함없이 “안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몰라도 결코 헤어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을 더 바짝 따라다녔습니다. 할 수 없이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대전에 갑니다. 대전에서 다시 부산으로 가면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막무가내 엘리야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부산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데려 가실텐데, 내가 자네와 헤어지기 전에 무엇을 자네에게 해주면 좋겠는가?” 엘리사는 이에, “선생님,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갑절을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엘리야는 말하기를, “자네는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내가 떠나는 것을 자네가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리되지 않을 걸세”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스승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의 갑절이나 받겠다고 요구한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절로 위대해지겠다는 욕망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만큼 더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입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엘리야가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살려면,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고후 4:6) 에 있는 말씀을 보면, “믿는 자에게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마음속에 비추어지게 되면 무엇이 소중한지 알게 되고, 썩어질 세상의 것들은 미련없이 내던져 버리게 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며 애타게 기도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고 같은 구절은 (4: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았던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은 하나도 없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인자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기를 원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쁜 소식이 가리워졌다고, (고후 4:4) 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악신이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은 무엇입니까? (요일 2:16)에 보면, 이 세상 악신이란 “육신의 정욕과 자랑” 에 호소하는 물질 숭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는 마음, 지겨운 셋방살이를 면하고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문제는, 단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몇백 만원 짜리 옷을 사 입고, 필요 이상의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자랑을 위하여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름다워지려는 여인이 귀고리를 찾듯이, 현대인으로서 구비해야 되는 교양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식주 이상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삶의 근본 문제를 묻는 가치척도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사에게 있어서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따라 살면 복이 되거니와, 믿음 없이 살면 헛된 인생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믿음생활을, 어떤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음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를 통하여 얻어내려고 했던 영적인 능력보다는, 세상적인 욕구충족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1. 하나님의 것이 좋은 줄 알고 예수를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2월 8일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세경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원사 주지 이창기를 상대로 재판을 걸어 승소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씨의 부임은 종가집 며느리로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에 신원사를 드나들며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잘 모셔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 는 주지 이씨의 말에, 부인은 남양주 와부읍의 땅 300평을 남편 몰래 사서 신원사 신축부지로 시주하고 100만원의 돈까지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씨 부인은 단지 아들을 갖고 싶다는 소원 때문에 시주를 한 것이고, 주지는 김씨부인의 그러한 마음을 이용하여 시줏돈을 얻어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그의 남편이 소송을 걸어 승소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다.
김씨부인은 믿음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본받아 정성으로 드린 시주가 아닌 것입니다. 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 구제를 위하여 시주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얻으려면 부처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꼬드겨서 시주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물질도 많겠습니다만, 하나님께 조건부로 드리는 깨끗치 못한 헌금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렇게라도 헌금을 하게 되면 좋은 믿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그것이 축복이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예 헌금을 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의 소유자보다는, 억지라도 헌금을 하게 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는 극히 드물고, 마음에도 없는 헌금을 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102장)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아니하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사람들이 세상 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더 좋은지를 알면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돈의 능력이 현실적으로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김씨부인도 많은 돈을 시주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요. 세상에서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으니까, 부처님도 돈을 좋아해서 돈을 바치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사는 방법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 흔히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개인적인 행복입니다. 아무 탈없이 건강하고 평안히 지내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여자 성도님께서 “나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자녀들이 잘 자라서 손자 손녀를 골고루 낳고 잘들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돈도 벌고 집도 사며, 또한 자녀들을 극성스럽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극히 찾아보기가 힘드니 웬일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큰 착각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로써 영적인 욕구를 달성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엡 3:20)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세상 것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영적인 능력을 구하지 않거나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 것도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 것에만 마음을 쓰게 되면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인 능력을 열심히 구하면 그 능력뿐만 아니라 세상 것도 적절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의 초점을 세상에 두기 보다는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보면, 영육간에 골고루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능력을 얻어 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2. 예수님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로 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듣고 난 후에, 당신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2차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기 전에,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산상변화사건” 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구조는, 신앙고백 - 수난예고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 - 다시 수난예고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제자 앞에서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나머지 그곳에다 집을 짓고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겪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당장 그 영광을 누리고 싶어라 그냥 거기 눌러 살자고 예수님께 부탁을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신 부활의 영광을 맛보려면, 또한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도 당해야 합니다. 그 고난이란, 세상의 것을 완전히 부정해야 하는 아픔입니다. 내 뜻이나 생각은 뒤로하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하는 수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이나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유다서 24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앞에 흠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가도록 해 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마지막날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나서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 거룩한 주님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3.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주를 따름으로써 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엘리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은 것처럼, 오늘 우리 또한 주님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꼭 붙잡고 살 수 있으려면, 손에 쥔 세상 것을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가 처음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소를 그냥 두고 따랐다고 (왕상 19:20) 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기는 했으나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때에는 어린 소녀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나약한 인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했을 때에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거하는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고후 4:4) 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의 악신” 이란, 바로 자기 자신속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교만한 자아” 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필요한 두 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여러분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시는지 꼭 한 번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을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늘 새롭게 변화하는 믿음생활에 있습니다. ♥
성서일과 ; 왕하2:1-12, 고후4:3-6, 막9:2-9.
제목 ; 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은혜가 집에서 입고 온 웃옷이 맘에 들어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난, 이런 옷 입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한나가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아주 한심스럽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엄마 소원은 그거예요? 제 소원은 첫째로 세계가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되는 것이며, 셋째는 우리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거예요. 교회가 성장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옷을 입고 싶은 것도) 저절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해요.” 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한나가 생각할 때, 엄마가 말하는 소원이 너무나 형편없이 수준이 낮다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차원이 아주 다른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제 아내가 갖고 있는 소원이 입고 싶은 옷 한 벌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지 않습니다만, 과연 국민학교 5학년 짜리가 가지고 있는 소원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있는 것을 바라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는지요?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은 이미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을 발견 하셨기 때문에,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줄로 압니다.
구약 열왕기상 2장에 나오는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에게 무엇이 가장 값진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곧 자기와 헤어져 하늘나라에 들림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바짝 붙어 다녔습니다. 선생님이 자기에게,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갑절로 물려주시지 않으면 선생님과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엘리사의 주장이요 소원입니다.
김포에 엘리사와 같이 있던 엘리야는, “자네는 여기 남아 있게. 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서울에 가야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결코 안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몰라도, 절대로 선생님과 헤어질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서울로 갔습니다. 마침 서울에 있던 엘리야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선생님이 하늘로 들림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고 묻지 엘리사는 “나도 알고 있으니 좀 조용히 있게”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다시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여기있게.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대전에 가야되겠네” 하자, 엘리사는 조금도 변함없이 “안됩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면 몰라도 결코 헤어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을 더 바짝 따라다녔습니다. 할 수 없이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대전에 갑니다. 대전에서 다시 부산으로 가면서 엘리야는 엘리사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엘리사는 막무가내 엘리야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부산에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나를 데려 가실텐데, 내가 자네와 헤어지기 전에 무엇을 자네에게 해주면 좋겠는가?” 엘리사는 이에, “선생님,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갑절을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엘리야는 말하기를, “자네는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는군. 내가 떠나는 것을 자네가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리되지 않을 걸세”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스승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능력의 갑절이나 받겠다고 요구한 것은,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갑절로 위대해지겠다는 욕망에서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만큼 더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입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선생님이 하시던 일을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엘리야가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만큼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야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영적인 능력을 지니고 살려면,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타는 심정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고후 4:6) 에 있는 말씀을 보면, “믿는 자에게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마음속에 비추어지게 되면 무엇이 소중한지 알게 되고, 썩어질 세상의 것들은 미련없이 내던져 버리게 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하여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며 애타게 기도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고 같은 구절은 (4: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보았던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을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은 하나도 없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인자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닮기를 원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쁜 소식이 가리워졌다고, (고후 4:4) 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악신이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은 무엇입니까? (요일 2:16)에 보면, 이 세상 악신이란 “육신의 정욕과 자랑” 에 호소하는 물질 숭배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싶다는 마음, 지겨운 셋방살이를 면하고 내 집을 갖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문제는, 단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몇백 만원 짜리 옷을 사 입고, 필요 이상의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뽐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자랑을 위하여 갖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아름다워지려는 여인이 귀고리를 찾듯이, 현대인으로서 구비해야 되는 교양으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식주 이상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삶의 근본 문제를 묻는 가치척도입니다. 예를 들면, 운전사에게 있어서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따라 살면 복이 되거니와, 믿음 없이 살면 헛된 인생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믿음생활을, 어떤 사람들은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음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를 통하여 얻어내려고 했던 영적인 능력보다는, 세상적인 욕구충족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1. 하나님의 것이 좋은 줄 알고 예수를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2월 8일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세경이라고 하는 사람이 신원사 주지 이창기를 상대로 재판을 걸어 승소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씨의 부임은 종가집 며느리로 딸만 다섯을 낳았는데,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에 신원사를 드나들며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잘 모셔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 는 주지 이씨의 말에, 부인은 남양주 와부읍의 땅 300평을 남편 몰래 사서 신원사 신축부지로 시주하고 100만원의 돈까지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김씨 부인은 단지 아들을 갖고 싶다는 소원 때문에 시주를 한 것이고, 주지는 김씨부인의 그러한 마음을 이용하여 시줏돈을 얻어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그의 남편이 소송을 걸어 승소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다.
김씨부인은 믿음으로 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본받아 정성으로 드린 시주가 아닌 것입니다. 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 구제를 위하여 시주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얻으려면 부처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꼬드겨서 시주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물질도 많겠습니다만, 하나님께 조건부로 드리는 깨끗치 못한 헌금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렇게라도 헌금을 하게 되면 좋은 믿음으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그것이 축복이 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예 헌금을 하지 못하는 굳은 마음의 소유자보다는, 억지라도 헌금을 하게 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는 극히 드물고, 마음에도 없는 헌금을 하여 시험에 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102장)
그런데 사람들은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아니하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사람들이 세상 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얼마나 더 좋은지를 알면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돈의 능력이 현실적으로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김씨부인도 많은 돈을 시주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요. 세상에서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으니까, 부처님도 돈을 좋아해서 돈을 바치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사는 방법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 흔히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개인적인 행복입니다. 아무 탈없이 건강하고 평안히 지내는 것을 큰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여자 성도님께서 “나는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자녀들이 잘 자라서 손자 손녀를 골고루 낳고 잘들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보통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행복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돈도 벌고 집도 사며, 또한 자녀들을 극성스럽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극히 찾아보기가 힘드니 웬일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아주 큰 착각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질로써 영적인 욕구를 달성하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얻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엡 3:20)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세상 것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영적인 능력을 구하지 않거나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 것도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 것에만 마음을 쓰게 되면 영적인 능력을 얻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인 능력을 열심히 구하면 그 능력뿐만 아니라 세상 것도 적절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의 초점을 세상에 두기 보다는 하나님께 두시기 바랍니다. 생활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다보면, 영육간에 골고루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적인 능력을 얻어 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2. 예수님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로 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듣고 난 후에, 당신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그리고, 2차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기 전에,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산상변화사건” 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구조는, 신앙고백 - 수난예고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 - 다시 수난예고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제자 앞에서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십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서 예수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한 나머지 그곳에다 집을 짓고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 말씀은 장차 예수님께서 겪으실 고난과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어떤 과정을 겪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당장 그 영광을 누리고 싶어라 그냥 거기 눌러 살자고 예수님께 부탁을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신 부활의 영광을 맛보려면, 또한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도 당해야 합니다. 그 고난이란, 세상의 것을 완전히 부정해야 하는 아픔입니다. 내 뜻이나 생각은 뒤로하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하는 수련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이나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유다서 24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앞에 흠없는 사람으로 기쁘게 나가도록 해 주실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마지막날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나서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 거룩한 주님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3.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타는 마음으로 주를 따름으로써 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엘리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은 것처럼, 오늘 우리 또한 주님을 단단히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꼭 붙잡고 살 수 있으려면, 손에 쥔 세상 것을 버려야 합니다. 엘리사가 처음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소를 그냥 두고 따랐다고 (왕상 19:20) 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기는 했으나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 때에는 어린 소녀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는 나약한 인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했을 때에 예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거하는 담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고후 4:4) 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의 악신” 이란, 바로 자기 자신속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교만한 자아” 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필요한 두 가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예수님처럼 죽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여러분을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시는지 꼭 한 번 경험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을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늘 새롭게 변화하는 믿음생활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