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진실이
기독정보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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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8:40
영혼의 양식 91-13호 1991.03.31.
성서일과 ; 사25:6-9, 고전 15:1-11, 요20:1-18.
제목 ;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진실이
미움은 싸움을 거쳐 죽음을 가져오고, 사랑은 평화를 이루어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미움은 거짓과 가깝게 지내고, 사랑은 진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의 정체를 드러내고 승리한 사건입니다. 자기들의 거짓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진실이신 예수님을 무덤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려 했으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해서 거짓된 무리들의 음모가 탄로나고 만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거짓된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무리들을 미워하거나 세상의 힘으로 물리치려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를 쳐서 저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무리들이 자기들의 거짓을 정당화하려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해치려 했을 때에, 예수님은 저들에게 대항하여 싸우지를 않고 고스란히 저들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저들 대신 죽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 편에 서서 살지 아니하고 거짓된 무리들과 한패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잘못된 길을 간다면, 예수님은 또다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사는 자가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33세라고 하는 아주 젊은 나이에, 장가도 들지 못하고 세상 재미를 거의 맛보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일생!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에는, 정말 예수님은 아주 가련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기적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았을 때에는 잠시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이제 막상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극형에 죽어 가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는 굉장히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 예수님을 보고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니거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가 옳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일생이 화려하거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으로 볼 때에, 예수님이 사기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통일교의 문선명이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데반집사의 죽음을 목도하고서는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워서 좇아 다니면서 괴롭혔는데, 스데반은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는 적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실제 마음으로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입으로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얼굴의 환한 빛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민을 했습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스데반에게 죽음 앞에서도 그런 용기와 평화를 갖게 했을까? 혹시 예수가 그를 미치게 한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이 아니라면, 예수의 가르침이 정말 훌륭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그처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믿어왔던 유대교 신앙이 예수의 가르침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사도바울은 이런 의심이 생기가, 그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경험을, 사도행전 9장에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고, 고린도전서 9장 1절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자, 더 깊은 고뇌와 혼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믿어왔고 정열을 다 바쳐 충성했던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심히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을 때에, 친구들의 비웃음과 사람들의 박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쉽게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다마스커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아나니아가 바울의 숙소에 나타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왔지만, 그것은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아나니아도 잘 알고 있는데, 원수와 같은 바울을 방문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잡혀서 죽을지도 모를 그 위험한 곳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확신을 얻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자신을 갖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박해자요 무익한 사람이었던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유익한 종이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믿고 자랑하던 모든 것과 함께 옛 사람 사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예수님과 함께 바울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자기와 믿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는 자기 자신이 그 박해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택했기 때문에, 바울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울은 거짓된 무리에 속해 있다가, 거기에서 뛰쳐나와 진리의 편을 택하여 온갖 고난을 당하였고 끝내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승리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실패한 인생이었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는,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하여 거짓되고 무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전 말씀드린 바울은 물론이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님을 뵙기 이전까지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것도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얼떨결에 말한 것이지, 진심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베드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비겁하고 교만에 차 있던 베드로가 겸손하면서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그처럼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곧 예수님의 참 모습을 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이전까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유대왕국을 다시 세우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왕이 되면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베드로가 가졌던 꿈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여 그 마음의 터전 위에 세우시는 영적인 나라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했으며 헛된 욕심을 품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베드로는 한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였는데, 수제자인 자기가 예수님의 마음을 그토록 몰랐다니, 그리고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까지 했으니, 자기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보면 얼마나 야단치실까? 언젠가는 말을 잘못해서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말씀으로 꾸짖으실까? 드디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에도 “안심하라” 는 위로의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걸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슈워츠코프 대장이 부시 대통령한테 사과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슈워츠코프 대장이 지상전 개시 후 1백 시간 만에 공격을 중지토록 한 부시대통령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부시대통령을 비난한 것에 대하여 사과발언을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슈워츠코프대장이 그런 발언을 한 후 후회를 하면서 아주 난처해 하는 것을 알고 부시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잊어버리라” 고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시대통령이 슈워츠코프대장을 야단치기보다는 격려를 해 줌으로써, 슈워츠코프대장이 자신의 잘못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부시대통령을 평소보다 더 존경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변화된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유익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얻으려는 것입니까? 짐작컨데 여러분의 믿음은 먼저 말씀드린 변화된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믿음,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름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되 세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자연히 잘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 가정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생활도 나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예수를 바로 믿게 되었을 때 오히려 전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었을 때의 축복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오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따라 참된 생명의 길을 가기보다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현실이 옳은 것인 줄 알고 잘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잘 분별해서 선택하여 살려하지 않고, 눈에 끌리는 대로 쉽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택하지 않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취했던 것처럼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안목의 정욕에 너무 쉽게 유혹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삽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됩니다.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스승까지 배신했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까? 육신의 욕심을 따르면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거짓을 택하기가 쉽습니다. 거짓된 삶은 죽은 인생입니다.
2. 하나님은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면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더 어긋난 길로 깊이 빠져 버립니다. 종기가 생기면 가만히 내버려둬야지 자꾸 건드리면 더 크게 번지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잘못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사람들을 보내어 타일러도 보고 전쟁을 일으켜 경고도 했지만, 끝내 그 잘못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거짓됨이 드러날까봐 예수님을 잡아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세상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과 권력, 또는 무력을 가지고 자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방법을 가지고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십시다. 예수님은 거짓된 사람들이 돈과 권력, 그리고 칼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려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바울을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바울을 이긴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의 뺨을 때려서 그 잘못을 깨닫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적을 베풀어서 베드로의 잘못을 알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안심하라” 이 한마디 말씀입니다. 만져보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도마에게도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도마의 손을 당신의 허리에 난 창자욱과 손에 난 못자국을 만져보게 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 는 말씀을 (요 20:29)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신다” 고 (사25: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백성들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까? (사25:9)의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같은 은혜가 내린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무리들에게 아픔을 당하고 곤욕을 겪는 진실한 백성들이지만,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부활의 승리로 이끌어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증거하는 삶을 살자.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려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과 걱정을 하면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합니다. (롬8:5)에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롬8:6)에,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영으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정성을 기울여야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은 잠시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잠시 후면 아무 쓸데없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는 잠시 즐거웠으나, 얼마 후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되어 평생토록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유익에 따라 사는 육적인 생활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라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할 때에 생명의 주가 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된 우리의 사명을 부활하신 주님을 몸으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형제를 찾아가서 “안심하게!” 하고 진심으로 용서하며 위로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거짓은 물러가고 진실과 사랑이 입맞추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
성서일과 ; 사25:6-9, 고전 15:1-11, 요20:1-18.
제목 ;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진실이
미움은 싸움을 거쳐 죽음을 가져오고, 사랑은 평화를 이루어 생명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미움은 거짓과 가깝게 지내고, 사랑은 진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가 거짓의 정체를 드러내고 승리한 사건입니다. 자기들의 거짓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진실이신 예수님을 무덤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려 했으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해서 거짓된 무리들의 음모가 탄로나고 만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거짓된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무리들을 미워하거나 세상의 힘으로 물리치려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자기를 쳐서 저들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무리들이 자기들의 거짓을 정당화하려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해치려 했을 때에, 예수님은 저들에게 대항하여 싸우지를 않고 고스란히 저들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저들 대신 죽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 편에 서서 살지 아니하고 거짓된 무리들과 한패가 되어 진리를 거스르는 잘못된 길을 간다면, 예수님은 또다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대신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사는 자가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뜻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사는 길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33세라고 하는 아주 젊은 나이에, 장가도 들지 못하고 세상 재미를 거의 맛보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일생!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에는, 정말 예수님은 아주 가련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기적을 베풀고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의 추종을 받았을 때에는 잠시 주목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이제 막상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극형에 죽어 가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는 굉장히 불쌍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 예수님을 보고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합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니거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가 옳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일생이 화려하거나 멋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으로 볼 때에, 예수님이 사기꾼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통일교의 문선명이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가두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데반집사의 죽음을 목도하고서는 번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워서 좇아 다니면서 괴롭혔는데, 스데반은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는 적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실제 마음으로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입으로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얼굴의 환한 빛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민을 했습니다. 도대체 그 무엇이 스데반에게 죽음 앞에서도 그런 용기와 평화를 갖게 했을까? 혹시 예수가 그를 미치게 한 것은 아닐까? 미친 것이 아니라면, 예수의 가르침이 정말 훌륭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그처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기가 믿어왔던 유대교 신앙이 예수의 가르침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사도바울은 이런 의심이 생기가, 그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경험을, 사도행전 9장에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고, 고린도전서 9장 1절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자, 더 깊은 고뇌와 혼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믿어왔고 정열을 다 바쳐 충성했던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심히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을 때에, 친구들의 비웃음과 사람들의 박해를 받을 생각을 하니, 쉽게 결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다마스커스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아나니아가 바울의 숙소에 나타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왔지만, 그것은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아나니아도 잘 알고 있는데, 원수와 같은 바울을 방문한 것입니다. 잘못하면, 잡혀서 죽을지도 모를 그 위험한 곳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손을 얹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확신을 얻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자신을 갖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박해자요 무익한 사람이었던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유익한 종이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믿고 자랑하던 모든 것과 함께 옛 사람 사울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예수님과 함께 바울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자기와 믿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고 해서 핍박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는 자기 자신이 그 박해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유대교를 버리고 예수를 택했기 때문에, 바울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울은 거짓된 무리에 속해 있다가, 거기에서 뛰쳐나와 진리의 편을 택하여 온갖 고난을 당하였고 끝내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예수님처럼 비참한 최후를 마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승리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아니면 실패한 인생이었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는,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하여 거짓되고 무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전 말씀드린 바울은 물론이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한 예수님을 뵙기 이전까지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것도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얼떨결에 말한 것이지, 진심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베드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비겁하고 교만에 차 있던 베드로가 겸손하면서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그처럼 달라질 수 있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곧 예수님의 참 모습을 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기 이전까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단지 유대왕국을 다시 세우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메시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왕이 되면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속셈에서 예수님을 열심히 좇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베드로가 가졌던 꿈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성도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여 그 마음의 터전 위에 세우시는 영적인 나라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했으며 헛된 욕심을 품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베드로는 한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였는데, 수제자인 자기가 예수님의 마음을 그토록 몰랐다니, 그리고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까지 했으니, 자기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보면 얼마나 야단치실까? 언젠가는 말을 잘못해서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말씀으로 꾸짖으실까? 드디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밖에도 “안심하라” 는 위로의 말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걸프 주둔 미군 사령관인 슈워츠코프 대장이 부시 대통령한테 사과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슈워츠코프 대장이 지상전 개시 후 1백 시간 만에 공격을 중지토록 한 부시대통령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부시대통령을 비난한 것에 대하여 사과발언을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슈워츠코프대장이 그런 발언을 한 후 후회를 하면서 아주 난처해 하는 것을 알고 부시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잊어버리라” 고 위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시대통령이 슈워츠코프대장을 야단치기보다는 격려를 해 줌으로써, 슈워츠코프대장이 자신의 잘못을 더 깊이 깨닫게 하고 부시대통령을 평소보다 더 존경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변화된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세상적인 유익을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얻으려는 것입니까? 짐작컨데 여러분의 믿음은 먼저 말씀드린 변화된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믿음,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름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참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목적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를 믿되 세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자연히 잘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어려움이 떠나지 않는 가정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생활도 나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예수를 바로 믿게 되었을 때 오히려 전보다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었을 때의 축복은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오늘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따라 참된 생명의 길을 가기보다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현실이 옳은 것인 줄 알고 잘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잘 분별해서 선택하여 살려하지 않고, 눈에 끌리는 대로 쉽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택하지 않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취했던 것처럼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안목의 정욕에 너무 쉽게 유혹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삽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됩니다. 육신적인 생각 때문에 스승까지 배신했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까? 육신의 욕심을 따르면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에, 진리보다는 거짓을 택하기가 쉽습니다. 거짓된 삶은 죽은 인생입니다.
2. 하나님은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보고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면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더 어긋난 길로 깊이 빠져 버립니다. 종기가 생기면 가만히 내버려둬야지 자꾸 건드리면 더 크게 번지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잘못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사람들을 보내어 타일러도 보고 전쟁을 일으켜 경고도 했지만, 끝내 그 잘못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거짓됨이 드러날까봐 예수님을 잡아죽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세상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돈과 권력, 또는 무력을 가지고 자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방법을 가지고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십시다. 예수님은 거짓된 사람들이 돈과 권력, 그리고 칼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려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바울을 용서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바울을 이긴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의 뺨을 때려서 그 잘못을 깨닫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적을 베풀어서 베드로의 잘못을 알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안심하라” 이 한마디 말씀입니다. 만져보아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도마에게도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도마의 손을 당신의 허리에 난 창자욱과 손에 난 못자국을 만져보게 함으로써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 는 말씀을 (요 20:29)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신다” 고 (사25:8)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백성들의 부끄러움을 벗겨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까? (사25:9)의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 믿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같은 은혜가 내린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무리들에게 아픔을 당하고 곤욕을 겪는 진실한 백성들이지만,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부활의 승리로 이끌어 내신다는 말씀입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증거하는 삶을 살자.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려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과 걱정을 하면서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합니다. (롬8:5)에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경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롬8:6)에,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영으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정성을 기울여야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은 잠시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잠시 후면 아무 쓸데없는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는 잠시 즐거웠으나, 얼마 후 그들은 벌거벗은 수치를 알게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되어 평생토록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유익에 따라 사는 육적인 생활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라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할 때에 생명의 주가 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그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된 우리의 사명을 부활하신 주님을 몸으로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형제를 찾아가서 “안심하게!” 하고 진심으로 용서하며 위로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거짓은 물러가고 진실과 사랑이 입맞추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