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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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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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양식 91-17호                                                    1991.04.28.

성서일과 ; 행8:26, 요일4:7-12, 요15:1-8.

제목 ;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반면에, 악마의 본체는 미움과 거짓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일서 4장 7절에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이라고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는 거짓없이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요한일서 기자는 계속 말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고,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주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신물이 날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요 부의 요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 다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자칫 엉뚱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챤이 지녀야 할 사랑의 성질은 무엇이며, 무엇에 대하여 사랑을 기울여야 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 사랑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말로써만 아닌 실제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우리를 위하여 바치심으로써 그 참 사랑을 증명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아니면 어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순수하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려는 말씀의 내용은, 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마리도 줄여서 말씀드린다면, 예수님의 희생은 인간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사도행전의 말씀은,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여기던 이방 사람들 중의 하나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빌립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어주는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일본 사람을 우리는 안방으로 모셔다가 우리의 가장 귀한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얼굴을 다시 대하기조차 싫은 사람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의 선물을 전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런지요.

  아무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다시 친하게 해 주었고 사람들 사이의 모든 담을 허물어 버려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웃 사람에게 또는 지겹도록 미운 형제를 찾아가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아야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삶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나 중심에서 살아감으로 툭하면 서로 싸우고 미워하던 생활 방식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함으로써 서로 화해하고 사랑하며 아끼는 생활로 변화된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성(聖) 프랜시스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프랜시스는 본래 부자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고 난 후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홀로 떠돌아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어느 땐가, 프랜시스는 어느 도시의 변두리를 말(馬)을 타고 지나는데, 문둥병자 하나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프랜시스는 그 병자 앞을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그냥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다시 문둥병자에게 가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주었습니다. 그 병자는 황송해 하면서, 썩어 진물이 흐르는 더러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때, 프랜시스는 내민 문둥병자의 손을 덥석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문둥병자 거지는 더욱 더 황송해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랑을 지닌 프랜시스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기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합니까?




  1. 주님을 떠나 있어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랜시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도 형식적인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참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형편은 어떤지요?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한밤 중, 잠결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습니다. “누굽니까?” 하고 물으니,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문 두드리는 소리만이 더욱 요란하게 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어 3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혹시 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문을 성큼 열지를 않고 다시 한 번,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나요!” 하는 소리가 처음으로 들렸습니다. 누군지 짐작은 갔으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도대체 누군지 확실히 말해야 할 게 아니요?”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나, 아무개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문을 열어 주었더니, “나, 목사님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면서 문턱에 앉으려 했습니다. 날씨는 추운데 문을 열어 놓은 채,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안 들어오겠다는 것을 억지로 끌고 서재실로 들어 왔습니다.

  어디를 쏘다녔는지 발은 온통 젖어 더럽게 되어 있고, 입에서는 술을 잔뜩 먹어 술 냄새가 풀풀 났습니다. 하는 이야기는 횡설수설,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을 늘어 놨습니다. 그래도 나는 목사요 상대는 성도라는 생각에, 꾹꾹 참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은, 그만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랜시스는 문둥병자의 손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는데, 저는 그가 이야기 할 때마다 풍기는 술 냄새가 고약스러워 고개를 돌렸습니다. 방황하는 영혼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위로해 주기보다는, 꼭두새벽에 찾아와 저를 괴롭히고 있는 그가 속히 떠나 주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순간에, 제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한밤 중 새벽에 달게 자는 사람을 깨웠다는 미운 생각과 더러운 냄새를 풍기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싫은 생각이 가득하여, 방황하는 영혼을 가슴에 꼭 품어 안지를 못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생각에,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귀찮고 피해만 주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반면에, 어지간히 속을 썩이고 말을 뜨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이기 때문에 관계를 청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왜 내 주위에는 향기가 나고 고마운 사람보다는, 냄새가 나고 더러우며 손해만 주는 사람뿐일까 하고 불평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보다는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이 사람은 이래서 싫어집니다. 그래서 양파 껍질 벗겨내듯이 사람들을 벗겨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남는 것은 나 혼자. 아니, 나 자신까지 싫어지면 어떻게 하지요? 그 때는 죽는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이 세상에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은 무슨 파, 누구의 제자라고 하면서, 서로 나뉘어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이요 의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이야 사람 취급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유대 사람인 빌립이 아프리카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열매입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어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고 형제의 정을 나누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가까이하고 저들을 이해함으로써 화목을 도모할 때,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바라볼 때, 자녀들이 서로 재산 싸움을 하면서 다투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대단히 슬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서로 싸움을 하고 죽이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람들을 멀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욕심으로 생기는 차별의식과 편견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차별의식과 편견을, 주님을 떠난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면 참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떠나게 되느냐? 욕심 때문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것, 그 형제가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피해 의식이 형제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 것은, 유대 나라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많은 나라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침략을 많이 받다보니, 중국인은 되놈이요, 만주족은 오랑캐이고, 일본인들은 왜놈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만이 가장 착한 나라여, 우리 나라 사람만이 착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바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불쌍하게 죽어 가면서도 불평을 할 줄 모르는 예수가 가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더욱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잘 쓰시던 신통력을 단 한 번 사용치 않으시고 그냥 맥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이 이해가 가지 않아 미워졌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도리질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실패한 분입니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와 싸워서 승리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과 싸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한방 칼 한 번 쓰지 않으시고 대 로마 제국을 죽어서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도 아니었고 헛된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2.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 죄대신 제물 삼으시사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 대신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은커녕, 자존심만 상해도 원수처럼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만 기분 나빠도 교회를 아예 빠져버리고 마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 곁을 떠난 것은 우리였습니다. 별 다른 이유 없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 친구들을 더 가까이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바쁜 중에도 계모임이나 결혼식은 틀림없이 참석해야 하지만,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진리를 떠났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용서를 잊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하나님 찾기를 망설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먼저 찾아 오셔서 우리의 손목을 잡고 가슴에 안아 주셨습니다. 좁쌀 영감처럼 속이 좁고, 밴댕이 속처럼 좁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1절에,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어지간히 잘 따지고 논리를 잘 내세웁니다만, 하나님은 조금치도 따지지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사실 따지기로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뭘 잘 안다고 이론을 내걸겠습니까? 욥이 결론 내린 것처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는 법입니다. 어떤 노인네들은 아예 허리를 구부리고 다님으로써 겸손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좀 잘났다고 뽐내기도 하고 좀 안다고 아는 체도 했지만, 세상을 많이 살면 살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내세울 것이란, 죄 밖에 없습니다. 좀 내가 잘했다 싶어 내세우려 하면, 뒤따라 생각나는 것은 많은 허물과 부족입니다. 내 재능이나 노력에 비하면 결과가 너무 형편없지 않나 생각도 해 봅니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가지고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서 무슨 불평이냐는 생각이 또한 듭니다. 게으르다 못해 태만하고서 하는 말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변명하고 있는 나 자신이 미워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나의 부족과 허물을 일일이 따져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그래도 한 말씀하시기를, “당신 너무 했잖소! 용서는 합니다만, 정말 못내 섭섭했다오” 라고 했을 법 합니다. 그런 예수님은 일언반구(一言半句), 베드로를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게!” 이 말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그 누구를 향하여 그 자잘못을 따져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물 많은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 죄를 묻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어찌 형제의 잘못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고 하신 말씀, 이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희생정신이 있어야 용서와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수고를 했는데 보답이 이것뿐이냐고 하는 억울한 마음,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얼마인데 이익이 이것뿐이냐고 하는 피해의식, 왜 내가 손해를 보며 기분 나쁜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 결코 남에게 지고는 살 수 없다는 질투심이란 마음이 나를 병들게 하고 용서와 사랑이 없는 메마른 인생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 평화를 맛보려면 이러한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3.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벽들을 허물어 버리지 않으면, 우선 답답한 것은 내 가슴입니다. 미운 사람을 자꾸 만들어 갈수록 괴로운 것은 내 마음입니다. 억울한 마음 불평과 불만을 자꾸 가슴속에 쌓아 가면, 그로 말미암아 나는 병들어 죽게 됩니다. ‘너는 틀려 먹었다’ 고 하면서 원수를 맺고 미워하게 되면, 공교롭게도 자주 만나게 되어 기분 나쁜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가 미워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또 그곳에도 미운 사람은 틀림없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을 넓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을 고쳐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사는 일입니다. 욕심은 가질수록 손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편협한 마음을 버리게 되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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