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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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9:00
영혼의 양식 91-35호 1991.09.01.
성서일과 ; 왕상2:1-4, 10-12, 엡6:10-20, 막7:1-8, 14-15, 21-23.
제목 ;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 가자
지난 여름 방학 때에 잠시 이곳에 와 있던 민구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민구의 얼굴을 보면, 양 눈 사이 (인중이라고 하나요?)가 솟은 부분이 없이 펑퍼짐하면서 넓습니다. 분명 우리네 보통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민구 어머니의 주장은 다릅니다. 항상 민구 얼굴만 봐 온 처제로서는 다른 사람의 그 부분이 너무 좁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기준이 될 수 밖에요.
이왕 민구네 이야기가 나왔으니, 욕을 왕창 먹을 생각을 하고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제가 친구 목사의 소개로 아내 될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후, 어느 날 다방에서 처음 그 처제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서혜숙씨와 친구 목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방에서 저와 헤어진 후, 혜숙씨는 동생한테 점잖은 충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 두 번 만나고 말 것도 아니고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인데, 언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처제의 눈에는 형부가 될 사람이 눈에 안 찼던 모양입니다.
세월은 흘러서, 그 처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한테 와서 남편 될 사람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자 하니, 신랑을 저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김새도 형부와 비슷하고, 사고 방식도 형부와 비슷하다” 고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나에게 낙제 점수를 주었던 그가, 이제는 어느 새 생각이 바뀌어 나를 기준 삼아 자기 신랑감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기준이자 모델이 되었습니다. 다른 왕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열왕기상 14장 8절의 말씀을 보면, 『너는 나의 종 다윗만 하지 못했다』고 여로보암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5장 11절에는, 『아사는 조상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곧바로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통하여 왕들을 평가할 때에 내내 다윗을 기준 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에 대하여 어느 정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완전 무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네 보다 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간음을 하고 살인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 뿐입니까? 아들 압살롬과 전쟁을 하여 그 아들이 죽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보다 더 훌륭했다고 하기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살인까지는 안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자들은 왜 다윗을,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을 까요? 다윗의 어떤 점을 근거로 해서 그를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의 기록자들은, 다윗이 국토를 넓힌 것 가지고 다른 왕들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다윗 왕이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또한 외교를 잘 했다든지, 내치를 잘 한 것을 가지고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비록 국가를 통일하는 큰 일을 했어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부리지 않았고, 죄를 지어 깊은 수렁에 빠졌어도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그 죄를 뉘우치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했습니다. 이점이 바로 성경 기록자로부터 다윗이 높이 평가받은 이유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만은 틀림없으나, 역사의 기록이 주가 아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훌륭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신앙적으로 더 훌륭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후계자를 뽑기 위하여 처음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집에 갔을 때, 이새는 다윗을 젖혀놓았습니다. 막내둥이고 아주 볼품없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을 자주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비록 못하고 볼품없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했습니다. 간음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자기 죄를 털어놓는 다윗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잘못과 허물이 많습니다. 혹 세상에서는 “누구보다는 내가 낫지!”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에게 둔다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불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줄을 서는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가만히 있지를 아니하고 자꾸 움직인다면 그 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가만히 있어야 줄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가치 기준의 혼돈에서 온 결과입니다. 군인들이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는, 비록 사는 형편은 어려워도 인간에게 무엇이 귀중한지는 알고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 농부일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는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질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못된 사람일지라도 마을의 어른이 나타나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비록 굶는 일이 있어도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중에서도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과 나누어먹을 줄 알았습니다. 간간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든지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천만이 넘는 숫자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는데, 과연 이 세상은 질서가 있고 예의가 바른 사회가 되어 있습니까? 마땅히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 살고 있습니까? 다윗이 실수를 했으나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서는 속히 자기 위치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깨닫고 그 즉시 자신의 본분을 찾아 행하고 있는지요?
마가복음 7장 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1.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크리스챤들이 그런 것은 아닌지요?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나 자신이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의 말씀을 나단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있어야 할 위치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따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가정에서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 다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목사관과 중학교 운동장은 담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큼직한 개구멍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운동을 하러 갈 때면 그 개구멍이 저를 유혹했습니다. 비록 운동하러 가는 길이지만, 그 개구멍을 통하여 가면 곧장 빨리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곤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빙돌아 교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에서 충동질하기를, “우리 저리로 갑시다” 하면서 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저는 그 때마다 가장으로서 체통을 차리느라, “안 되지, 그리고 가면 개가되고 마는 게야!” 하면서 단호히 유혹을 뿌리치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 개구멍이 사라져서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쉽고 빠른 길을 가기 위하여 개 같은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멀고 힘들지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사회 풍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이 달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 방식에 젖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 어떻게 벌었던지 돈만 많이 벌어 가지고 으르렁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으시대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삶의 기쁨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사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지만 남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의례 응접실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기 마련입니다. 한번도 보지 않은 전집류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 위한 책들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장식품으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해야 할텐데,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없으면 하지 않다가 사람들이 나타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며 외우는 것도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613개의 율법을 달달이 외우기는 했을지언정, 그 율법의 기본 정신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7장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들어 예수님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는 법을 어기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손을 씻고 음식 먹는 것을 나쁘다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그 비판적인 자세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꼬투리 잡고 늘어지는 그들의 마음 자세가 더 나쁘다는 것을,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작 깨끗이 해야 할 마음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있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형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사야 29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아니하고 인간 중심의 의식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말은 하나님 공경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랑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속은 썩어 냄새가 나는데 겉은 번지르한, 거짓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에 나타난 결과보다는, 바른 마음의 자세를 지닌 성실한 생활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왕상2:4)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사실 처음부터 둘 사이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토끼가 잠을 자서 그렇지, 토끼에게는 거북이가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아예 처음 시작할 때에 토끼는 잠을 잘 것을 전제하면 몰라도, 양자가 경쟁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끼는 토끼대로의 재능을 주시고 거북이는 거북이 나름대로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토끼의 특기인 달리기 경주에 거북이를 붙인다는 그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고 하는 목표 달성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그 일에 대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 4절에, 『행실을 조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성실히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하게 할 것이라고, 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삶의 자세를 바로 가지고 있으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자세는 엉터리로 가지고 있으면서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요행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고 시기하며 중상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의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처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실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징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부족한 만큼의 일을,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또 그 만큼의 일을 맡겨야 합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에게 맞는 일을, 여자에게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는 분복(分福)을 허락하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주어진 것에 대하여 잘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3.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살아갑시다
다윗이 그렇게 허물이 많아도 멸망의 길로 빠지지 아니하고 성군(聖君)의 칭호를 받을 만큼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국토를 크게 넓히는 큰 일을 하고서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지었을 대에는 쉽게 좌절을 하거나 더욱 타락하는 길로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그 즉시 회개하고 돌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을 열심히 갔습니다.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헛디뎌 웅덩이에 빠지는 실수를 했지만,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갈 길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 율례와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 다윗에게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앙적인 유산을 잘 물려주기 위하여, 임종을 앞두고 그러한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①늘 깨어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②악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행실을 조심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애써 노력할 때에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③말씀으로 잘 무장하고 악마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의 세력은 바로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욕심을 품게 되면 내가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아주 큰 세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깨우쳐서 말씀으로 내 속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대장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장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면 주님의 길을 잘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성서일과 ; 왕상2:1-4, 10-12, 엡6:10-20, 막7:1-8, 14-15, 21-23.
제목 ;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 가자
지난 여름 방학 때에 잠시 이곳에 와 있던 민구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민구의 얼굴을 보면, 양 눈 사이 (인중이라고 하나요?)가 솟은 부분이 없이 펑퍼짐하면서 넓습니다. 분명 우리네 보통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민구 어머니의 주장은 다릅니다. 항상 민구 얼굴만 봐 온 처제로서는 다른 사람의 그 부분이 너무 좁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기준이 될 수 밖에요.
이왕 민구네 이야기가 나왔으니, 욕을 왕창 먹을 생각을 하고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제가 친구 목사의 소개로 아내 될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후, 어느 날 다방에서 처음 그 처제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서혜숙씨와 친구 목사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방에서 저와 헤어진 후, 혜숙씨는 동생한테 점잖은 충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 두 번 만나고 말 것도 아니고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인데, 언니, 잘 생각해서 결정해!”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처제의 눈에는 형부가 될 사람이 눈에 안 찼던 모양입니다.
세월은 흘러서, 그 처제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한테 와서 남편 될 사람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자 하니, 신랑을 저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생김새도 형부와 비슷하고, 사고 방식도 형부와 비슷하다” 고 말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나에게 낙제 점수를 주었던 그가, 이제는 어느 새 생각이 바뀌어 나를 기준 삼아 자기 신랑감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기준이자 모델이 되었습니다. 다른 왕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열왕기상 14장 8절의 말씀을 보면, 『너는 나의 종 다윗만 하지 못했다』고 여로보암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상 15장 11절에는, 『아사는 조상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곧바로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통하여 왕들을 평가할 때에 내내 다윗을 기준 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윗에 대하여 어느 정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은 결코 완전 무결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네 보다 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간음을 하고 살인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그 뿐입니까? 아들 압살롬과 전쟁을 하여 그 아들이 죽기까지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보다 더 훌륭했다고 하기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최소한 우리는 살인까지는 안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기자들은 왜 다윗을,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을 까요? 다윗의 어떤 점을 근거로 해서 그를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의 기록자들은, 다윗이 국토를 넓힌 것 가지고 다른 왕들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다윗 왕이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또한 외교를 잘 했다든지, 내치를 잘 한 것을 가지고 기준 삼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비록 국가를 통일하는 큰 일을 했어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부리지 않았고, 죄를 지어 깊은 수렁에 빠졌어도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그 죄를 뉘우치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했습니다. 이점이 바로 성경 기록자로부터 다윗이 높이 평가받은 이유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것만은 틀림없으나, 역사의 기록이 주가 아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훌륭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신앙적으로 더 훌륭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후계자를 뽑기 위하여 처음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집에 갔을 때, 이새는 다윗을 젖혀놓았습니다. 막내둥이고 아주 볼품없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행동을 자주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나,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비록 못하고 볼품없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했습니다. 간음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단 선지자 앞에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자기 죄를 털어놓는 다윗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잘못과 허물이 많습니다. 혹 세상에서는 “누구보다는 내가 낫지!” 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에게 둔다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불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줄을 서는데, 맨 앞에 있는 사람이 가만히 있지를 아니하고 자꾸 움직인다면 그 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 앞에 있는 사람이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가만히 있어야 줄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가치 기준의 혼돈에서 온 결과입니다. 군인들이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는, 비록 사는 형편은 어려워도 인간에게 무엇이 귀중한지는 알고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 농부일지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는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질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못된 사람일지라도 마을의 어른이 나타나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비록 굶는 일이 있어도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중에서도 먹을 것이 생기면 이웃과 나누어먹을 줄 알았습니다. 간간이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든지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천만이 넘는 숫자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는데, 과연 이 세상은 질서가 있고 예의가 바른 사회가 되어 있습니까? 마땅히 인간이 행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자기 위치를 지켜 살고 있습니까? 다윗이 실수를 했으나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서는 속히 자기 위치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바로 깨닫고 그 즉시 자신의 본분을 찾아 행하고 있는지요?
마가복음 7장 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1.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크리스챤들이 그런 것은 아닌지요?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나 자신이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의 말씀을 나단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있어야 할 위치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길을 따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가정에서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 다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목사관과 중학교 운동장은 담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랬는지, 큼직한 개구멍이 하나 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운동을 하러 갈 때면 그 개구멍이 저를 유혹했습니다. 비록 운동하러 가는 길이지만, 그 개구멍을 통하여 가면 곧장 빨리 갈 수 있다는 계산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곤 합니다. 그렇지 않고 빙돌아 교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에서 충동질하기를, “우리 저리로 갑시다” 하면서 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저는 그 때마다 가장으로서 체통을 차리느라, “안 되지, 그리고 가면 개가되고 마는 게야!” 하면서 단호히 유혹을 뿌리치곤 했습니다. 이제는 그 개구멍이 사라져서 천만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쉽고 빠른 길을 가기 위하여 개 같은 방법을 취하기보다는, 멀고 힘들지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사회 풍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이 달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 방식에 젖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 어떻게 벌었던지 돈만 많이 벌어 가지고 으르렁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으시대며 사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삶의 기쁨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사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지만 남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아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집에 가보면 의례 응접실에는 많은 책들이 꽂혀 있기 마련입니다. 한번도 보지 않은 전집류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 위한 책들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장식품으로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해야 할텐데,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이 없으면 하지 않다가 사람들이 나타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배우고 가르치며 외우는 것도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613개의 율법을 달달이 외우기는 했을지언정, 그 율법의 기본 정신은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7장에서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들어 예수님을 공박하고 있습니다. “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되어 있는 법을 어기느냐?” 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손을 씻고 음식 먹는 것을 나쁘다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그 비판적인 자세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꼬투리 잡고 늘어지는 그들의 마음 자세가 더 나쁘다는 것을,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작 깨끗이 해야 할 마음은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있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형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사야 29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아니하고 인간 중심의 의식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말은 하나님 공경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랑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속은 썩어 냄새가 나는데 겉은 번지르한, 거짓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에 나타난 결과보다는, 바른 마음의 자세를 지닌 성실한 생활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왕상2:4)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사실 처음부터 둘 사이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다가 토끼가 잠을 자서 그렇지, 토끼에게는 거북이가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아예 처음 시작할 때에 토끼는 잠을 잘 것을 전제하면 몰라도, 양자가 경쟁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끼는 토끼대로의 재능을 주시고 거북이는 거북이 나름대로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토끼의 특기인 달리기 경주에 거북이를 붙인다는 그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고 하는 목표 달성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그 일에 대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윗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그렇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 4절에, 『행실을 조심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여 성실히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마음과 정성을 다 기울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하게 할 것이라고, 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삶의 자세를 바로 가지고 있으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자세는 엉터리로 가지고 있으면서 좋은 결과를 기다리는 요행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고 시기하며 중상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의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처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실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징벌을 베풀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부족한 만큼의 일을, 능력이 많은 사람에게는 또 그 만큼의 일을 맡겨야 합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에게 맞는 일을, 여자에게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는 분복(分福)을 허락하신 줄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잘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주어진 것에 대하여 잘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불평만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하나님께서는 있는 것조차 빼앗아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의롭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3.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 굳세게 살아갑시다
다윗이 그렇게 허물이 많아도 멸망의 길로 빠지지 아니하고 성군(聖君)의 칭호를 받을 만큼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국토를 크게 넓히는 큰 일을 하고서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또한 큰 죄를 지었을 대에는 쉽게 좌절을 하거나 더욱 타락하는 길로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듣자마자 그 즉시 회개하고 돌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그 길을 열심히 갔습니다.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헛디뎌 웅덩이에 빠지는 실수를 했지만,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갈 길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 율례와 가르침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 다윗에게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신앙적인 유산을 잘 물려주기 위하여, 임종을 앞두고 그러한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주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으려면,
①늘 깨어 꾸준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②악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행실을 조심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 악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애써 노력할 때에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③말씀으로 잘 무장하고 악마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의 세력은 바로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욕심을 품게 되면 내가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아주 큰 세력은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깨우쳐서 말씀으로 내 속에 있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대장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장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면 주님의 길을 잘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