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깨쳐 올곧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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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0 19:01
영혼의 양식 91-36호 1991.09.08.
성서일과 ; 사35:4-10, 약1:17-27, 막7:31-37.
제목 ; 지혜를 깨쳐 올곧게 살자
지난 88서울올림픽에 참가란 프랑스 선수중에는 자기 나라 국기 색깔인 홍백청(紅白靑) 삼색을 물들인 머리를 한 선수가 있어서 카메라맨들의 집중 플랫쉬를 받았다고 합니다. 키가 208㎝인 이 선수는 환영객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카메라 플랫쉬가 연달아 터지자, 놀란 나머지 황급히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려다 출입구에 설치된 200㎝높이의 출입자 검색대에 머리를 부딪혀 많은 사람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머리 모양이나 키가 보통 사람과는 좀 유별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게 되었을 것입니다. 간간이 이런 별다름이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웃음을 선사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요즘의 여성분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기분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부자연스러움이 아닌, 정말 부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젊은애들 이상하게 하고 다는 것은 그 시절에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 이상함에서보다 자연스러움에서 멋을 찾아야 할 분들이 그런다는 데에 좀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이셰도우라는 것과 메니큐어 입니다. 아이셰도우는 서양 여인들의 푸른 눈에서 반사되어 나타나는 눈언저리의 푸르름 현상을 동경하여 생겨난 화장술입니다. 그리고 메니큐어는, 손으로 주물러 맛을 내는 한국 음식과는 달리 도구로만 음식을 만드는 서양 여인들이나 연예계 여인들이 하는 것을 선망하여 손톱을 길게 해서 칠하고 있는 줄 압니다.
어쨌든 아이셰도우나 메니큐어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은 줄로 압니다만, 그렇게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아니, 민족성이나 한국 여인 나름대로의 멋,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도외시한, 생각 없는 여인들의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주된 목적입니다. 어른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인간은 그 지으신 이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대원리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부조화요, 부자연스러움입니다. 부자연스러움의 결과는 무질서요, 파괴와 자멸입니다.
아무리 물질 문명이 발달하고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몰라보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그와 같은 인간들은 짐승 이하의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상실한 것은 아담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본래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기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서양 여인들이 동양 여인의 아름다움을 흠모한 나머지, 코를 납작코로 만든 결과 동양 여인처럼 아름답지도 못하게 되었거니와, 서양 여인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움도 잃어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결과는 메마름과 갈등입니다. 동정심이 사라지고 경쟁의식만이 날카롭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몰라보니 자기 자신도 자식으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 서로 찌르고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엄한 법을 많이 제정하여도 양심이 바르지 못하면 다 소용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양심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으니,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제 물건 제 자리에 갖다 놓고 깨끗이 닦아 내듯이, 예수님은 세상의 어지러워진 것들을 정리정돈 하시고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쳐 놓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모가 앉을 자리에는 부모를 앉히고, 자식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자식을 앉혀 놓으려 하십니다. 그래서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세상을 만드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지로 하려 않습니다. 억지 자체가 자연스러움이 아니기에,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를 통하여서만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소경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고, 귀머거리가 귀가 열려 듣게 되었습니다. 온전치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1. 세상에 사로잡혀 불완전한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을 받고 온전해질 텐데,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타나 보이는 모습은 진지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어려움이라도 당하면 주께 열심히 매달리는 듯 싶지만, 평소에 온전하게 살고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경건성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물이 더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명령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선악과가 더 현실적으로 가깝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일이 『과연 먹음직하고 보이기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따 먹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성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보장하시며 책임져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꽃이나 새보다도 훨씬 더 귀한 인간을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누가 먼저 차지할 것인가 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의리와 인정은 보따리에 싸서 장롱 속에 넣어두고, 어떻게 하면 남보라는 듯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궁리를 하다 보니 거짓말을 자연스러이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고, 후일에 심판이 있으리라느 말씀은 들었기에, 예수는 믿되 마음은 세상에 다 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한마디로 인간성 상실입니다. 귀는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입은 있어도 하나님의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돈에 포로가 되어 있든지, 자식에게 포로가 되어 있든지, 아니면 직장에 포로가 되어 사람답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가지 아는 것은, 사람이 짐승과는 뭔가 달라도 특별히 다르게 창조되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줄 아는 짐승이라는 점입니다. 무엇을 생각합니까? 멋과 맛입니다. 멋이란 자연스러움에서 생기는 것이고, 맛이란 뜻을 의미합니다. 멋있다고 할 때, 그것에는 의미, 곧 뜻도 부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멋있게 살 때, 왜 사는 지 그 이유 곧, 뜻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러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일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원래의 상태대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2. 탄식하면서 긍휼을 가지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6장에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고 벙어리는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과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부자연스러움, 부정과 부패를 없애 버리시고 새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새 것은 삐걱거리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납니다. 신선하고 상쾌합니다.
이사야 36장의 말씀을 계속 보면,
『여호와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 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 없이 스러지리라.』마가복음 7장에도 보니, 예수님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옛 모습을 되찾아 주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 모습이든지 겉 모습이든지 온전치 못한 것은 온전하게 해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되찾으셔서 자연스럽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맛나게 해 주십니다. 동정심과 애타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넣어 주셔서 사람 사는 맛을 나게 해 주십니다.
3. 경건한 생활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룸으로 끝없이 행복한 생활을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겉모습을 단장하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속 모습 단장하는데 온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얼굴 치장, 집 치장은 이제 그만 하고 마음치장을 하십시오. 마음치장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화장수(化粧水)인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일에 건성으로 오지 마시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사랑의 나무, 생명의 나무가 심어질 때, 그 나무에는 경건이라는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경건은 거룩한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연스러운 생활입니다. 깨끗한 생활입니다. 떳떳한 생활입니다. 추한 냄새가 아닌 향기가 나는 생활입니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과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살아야 한다는 명예심으로 더러워졌던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깨끗해졌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합니다.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은 내버립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의 말씀을 보니,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여러분 속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오. 그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읍시다. 내 자신의 힘으로 경건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을 열어 보십시오. 숨을 들이쉬기 바랍니다. 새로운 공기가 여러분 가슴속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성령은 오셔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인간답게 살도록, 자연스럽게 살도록, 멋과 맛이 있는 아름답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서 욕심을 없애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욕심 때문에 생겼던 죄도 사라지고 맙니다. 욕심은 경건한 삶을 망치는 적입니다. 독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거짓된 생활을 버리고 진실된 삶을 사십시오.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생활을 이제 더 이상 계속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자연스러운 생활, 온전하고 멋있는 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을 진짜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바람맞혔습니까? 지금부터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셔서 끝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넘치기를 빕니다. ♥
성서일과 ; 사35:4-10, 약1:17-27, 막7:31-37.
제목 ; 지혜를 깨쳐 올곧게 살자
지난 88서울올림픽에 참가란 프랑스 선수중에는 자기 나라 국기 색깔인 홍백청(紅白靑) 삼색을 물들인 머리를 한 선수가 있어서 카메라맨들의 집중 플랫쉬를 받았다고 합니다. 키가 208㎝인 이 선수는 환영객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카메라 플랫쉬가 연달아 터지자, 놀란 나머지 황급히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려다 출입구에 설치된 200㎝높이의 출입자 검색대에 머리를 부딪혀 많은 사람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머리 모양이나 키가 보통 사람과는 좀 유별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게 되었을 것입니다. 간간이 이런 별다름이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웃음을 선사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요즘의 여성분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는 있을지 몰라도, 기분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부자연스러움이 아닌, 정말 부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젊은애들 이상하게 하고 다는 것은 그 시절에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 이상함에서보다 자연스러움에서 멋을 찾아야 할 분들이 그런다는 데에 좀 이상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이셰도우라는 것과 메니큐어 입니다. 아이셰도우는 서양 여인들의 푸른 눈에서 반사되어 나타나는 눈언저리의 푸르름 현상을 동경하여 생겨난 화장술입니다. 그리고 메니큐어는, 손으로 주물러 맛을 내는 한국 음식과는 달리 도구로만 음식을 만드는 서양 여인들이나 연예계 여인들이 하는 것을 선망하여 손톱을 길게 해서 칠하고 있는 줄 압니다.
어쨌든 아이셰도우나 메니큐어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사람도 없지 않아 많은 줄로 압니다만, 그렇게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아니, 민족성이나 한국 여인 나름대로의 멋, 아니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도외시한, 생각 없는 여인들의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주된 목적입니다. 어른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인간은 그 지으신 이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세상을 조화롭게 하는 대원리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부조화요, 부자연스러움입니다. 부자연스러움의 결과는 무질서요, 파괴와 자멸입니다.
아무리 물질 문명이 발달하고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몰라보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외면한다면, 그와 같은 인간들은 짐승 이하의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상실한 것은 아담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다가, 본래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기능마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서양 여인들이 동양 여인의 아름다움을 흠모한 나머지, 코를 납작코로 만든 결과 동양 여인처럼 아름답지도 못하게 되었거니와, 서양 여인 나름대로의 자연스러움도 잃어버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결과는 메마름과 갈등입니다. 동정심이 사라지고 경쟁의식만이 날카롭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몰라보니 자기 자신도 자식으로부터 홀대를 받게 되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 서로 찌르고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엄한 법을 많이 제정하여도 양심이 바르지 못하면 다 소용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양심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으니,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청소하는 사람이 제 물건 제 자리에 갖다 놓고 깨끗이 닦아 내듯이, 예수님은 세상의 어지러워진 것들을 정리정돈 하시고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쳐 놓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부모가 앉을 자리에는 부모를 앉히고, 자식이 앉아야 할 자리에는 자식을 앉혀 놓으려 하십니다. 그래서 조화롭고 자연스러운 세상을 만드시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지로 하려 않습니다. 억지 자체가 자연스러움이 아니기에, 마음 문을 열어 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를 통하여서만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소경이 눈을 떠서 보게 되었고, 귀머거리가 귀가 열려 듣게 되었습니다. 온전치 못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1. 세상에 사로잡혀 불완전한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면 고침을 받고 온전해질 텐데,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기를 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타나 보이는 모습은 진지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어려움이라도 당하면 주께 열심히 매달리는 듯 싶지만, 평소에 온전하게 살고자,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경건성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물이 더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옛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명령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선악과가 더 현실적으로 가깝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일이 『과연 먹음직하고 보이기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따 먹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성까지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보장하시며 책임져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들꽃이나 새보다도 훨씬 더 귀한 인간을 먹여주고 입혀줄 것이니,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누가 먼저 차지할 것인가 하고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의리와 인정은 보따리에 싸서 장롱 속에 넣어두고, 어떻게 하면 남보라는 듯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궁리를 하다 보니 거짓말을 자연스러이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고, 후일에 심판이 있으리라느 말씀은 들었기에, 예수는 믿되 마음은 세상에 다 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한마디로 인간성 상실입니다. 귀는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입은 있어도 하나님의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돈에 포로가 되어 있든지, 자식에게 포로가 되어 있든지, 아니면 직장에 포로가 되어 사람답게 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가지 아는 것은, 사람이 짐승과는 뭔가 달라도 특별히 다르게 창조되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각할 줄 아는 짐승이라는 점입니다. 무엇을 생각합니까? 멋과 맛입니다. 멋이란 자연스러움에서 생기는 것이고, 맛이란 뜻을 의미합니다. 멋있다고 할 때, 그것에는 의미, 곧 뜻도 부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멋있게 살 때, 왜 사는 지 그 이유 곧, 뜻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러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일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원래의 상태대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그 모습을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2. 탄식하면서 긍휼을 가지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36장에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오시어 보복하시고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고 벙어리는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과 짧은 생각에서 비롯된 부자연스러움, 부정과 부패를 없애 버리시고 새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새 것은 삐걱거리지도 않고 냄새도 안 납니다. 신선하고 상쾌합니다.
이사야 36장의 말씀을 계속 보면,
『여호와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 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 없이 스러지리라.』마가복음 7장에도 보니, 예수님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시고 고쳐 주십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옛 모습을 되찾아 주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 모습이든지 겉 모습이든지 온전치 못한 것은 온전하게 해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되찾으셔서 자연스럽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맛나게 해 주십니다. 동정심과 애타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넣어 주셔서 사람 사는 맛을 나게 해 주십니다.
3. 경건한 생활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룸으로 끝없이 행복한 생활을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겉모습을 단장하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속 모습 단장하는데 온 마음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얼굴 치장, 집 치장은 이제 그만 하고 마음치장을 하십시오. 마음치장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화장수(化粧水)인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일에 건성으로 오지 마시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단비가 내리고 사랑의 나무, 생명의 나무가 심어질 때, 그 나무에는 경건이라는 열매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경건은 거룩한 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연스러운 생활입니다. 깨끗한 생활입니다. 떳떳한 생활입니다. 추한 냄새가 아닌 향기가 나는 생활입니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심과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살아야 한다는 명예심으로 더러워졌던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깨끗해졌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말하기를 더디하고 듣기는 속히 합니다.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은 내버립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의 말씀을 보니,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버리고 여러분 속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오. 그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읍시다. 내 자신의 힘으로 경건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듭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도와 주셔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을 열어 보십시오. 숨을 들이쉬기 바랍니다. 새로운 공기가 여러분 가슴속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성령은 오셔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인간답게 살도록, 자연스럽게 살도록, 멋과 맛이 있는 아름답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서 욕심을 없애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욕심 때문에 생겼던 죄도 사라지고 맙니다. 욕심은 경건한 삶을 망치는 적입니다. 독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거짓된 생활을 버리고 진실된 삶을 사십시오.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생활을 이제 더 이상 계속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자연스러운 생활, 온전하고 멋있는 생활을 위하여 하나님을 진짜 사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얼마나 바람맞혔습니까? 지금부터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셔서 끝없이 행복한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넘치기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