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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살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자살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자살하면, 구원을 잃는 것인가?


답변: 성경은 자살한 여섯 명의 특정 인물을 언급합니다. 아비멜렉(삿 9:45), 사울(삼상 31:4), 사울의 무기를 든 시종(삼상 31:4-6), 아히도벨(삼하 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가룟 유다(마 27:5)입니다. 이 중 다섯은 죄악을 지은 사례로 알려진 남자들이었습니다(사울의 무기를 든 시종에 대해서는 그의 성품을 판단할 만한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삼손의 죽음도 자신의 행위가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예라고 간주하지만(삿 16:26-31), 삼손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자살을 살인과 동일하게 보는데, 말하자면 스스로를 살인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시편 저자처럼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십니다(욥 1:21). 자살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는 죄가 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를 취해 자신의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등장한 몇몇 사람은 삶 속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솔로몬은 쾌락을 추구하다가 결국 “사는 것을 미워하는”(전 2:17)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우울증에 빠져 죽기를 바랐습니다(왕상 19:4). 요나는 하나님께 너무 화가 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욘 4:8). 심지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한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고후 1:8)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엘리야는 천사의 위로를 받고 쉼을 가진 후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책망과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는 깨달음과 함께 주께서 모든 것을 감당하실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자살은 죄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른 죄악들보다 더 악한 죄는 아닙니다. 또한 이 죄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살은 분명 유가족들에게 갚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칩니다. 누군가의 자살로 인한,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각 사람에게 주의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십니다(시 67:1).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는 약속 안에서 소망을 취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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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십일조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기독교인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하는가?


답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헌금 문제로 고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에 관한 성경적 권고를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기쁨과 축복을 의도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따금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구약에 나와 있는 개념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이 수고한 작물과 키운 가축들의 10%를 성막/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레 27:30; 민 18:26; 신 14:24; 고후 31:5). 사실 구약의 율법은 복수의 십일조를 요구했는데(레위인들을 위한 것, 성전과 절기들을 위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 이는 총 약 23.3%까지 달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십일조가 당시 희생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세금 걷는 방법 중 하나라고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신약 성경 어디에도 기독교인들이 율법적인 십일조 체계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거나 권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따로 구별해야 할 소득의 일정 비율을 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증은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고전 16:1-2). 개신교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구약의 십일조에서 10%의 수치를 따와서 기독교인으로서 헌금을 하는 ‘최소한의 권장’으로 적용하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은 헌금의 중요성과 혜택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10% 이상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보다 덜 드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각자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십일조 헌금에 참여하는 문제와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지런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무엇보다 모든 십일조나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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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종주의, 편견, 차별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사람을 피부색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는가? 


답변: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인종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인종은 인류입니다. 백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유대인은 다른 인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동등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창 1:26-27).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놓게 하셨습니다(요 3:16). 이 ‘세상’은 분명히 모든 민족 집단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편애나 차별을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신 10:17; 행 10:34; 롬 2:11; 엡 6:9), 우리도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4절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약 2:8).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인종” 집단으로 나누셨습니다.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 나라들을 보살피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러한 나라가 되는 대신에 그들의 지위로 인하여 교만하여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대감을 낳는 막힌 담을 허시고 이러한 분리를 종식시키셨습니다(엡 2:14).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모욕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요 13:34).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우리를 공정하게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똑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어떤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정도로 나타나는 인종 차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고질병입니다. 모든 민족들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인정 차별은 안 됩니다.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희생자들은 용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선언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신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훨씬 더 없습니다. 인종차별, 편견, 멸시를 행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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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낙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어떤 상황 가운데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가?


답변: 성경은 낙태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낙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수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39장 13-16절은 우리를 지으시고 태에서 만드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할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은 태내에 있는 아기의 죽음을 초래한 자는 살인한 자와 똑 같은 처벌,곧, 죽음을 판결할 지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태내에 있는 아기를 다 성장한 사람처럼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창 1:26-27; 9:6)

기독교인의 낙태에 대한 입장에 대해 항상 제기되는 첫 번째 반박은,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입니다.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결과로서 임신한 것이 끔찍하기 때문에 그 해결로서 아기를 죽이는 것이 답이 되겠습니까? 죄를 덮기 위한 죄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는 아이를 임신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가정에 입양될 수도 있고, 또는 아이의 어머니에 의해 양육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면, 아기는 전혀 죄가 없으며 아이 아버지의 악한 행위 때문에 처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낙태에 대한 기독교인 입장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박은 “임산부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것은 낙태에 대한 문제를 답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첫째, 이런 상황은 오늘날 세계에서 행해지는 낙태의 10%보다 적은 경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낙태를 하기보다는 편의상 낙태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상황에 반하는 모든 의료적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어머니와 아이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십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오직 남편, 아내,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서 결정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어려운 상황을 접한 어느 부부라도 주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 지혜를 구하는(약 1:5)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수행되는 낙태의 95% 이상이 단지 아기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강간, 근친상간, 또는 임산부 건강의 위험하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 경우는 5% 미만입니다. 이러한 5%의 경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태가 결코 첫 번째 선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태내에 있는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낙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낙태가 다른 죄보다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요 3:16; 롬 8:1; 골 1:14). 낙태를 하였던 여성이나, 낙태를 권장했던 남자나, 심지어 낙태를 시술했던 의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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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사형제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어떤 죄를 저질렀을 때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는가?


답변: 구약의 율법은 살인(출 21:12), 유괴(출 21:16), 수간(출 22:19), 간음(레 20:10), 동성애(레 20:13), 거짓 예언자(신 13:5), 매춘과 강간(신 22:24) 등 여러 범죄들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받아 마땅할 때에도 자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삼하 11:1-5, 14-17; 12:13). 궁극적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롬 6:23).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롬 5:8).

바리새인들이 간음을 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그 여인을 돌로 쳐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거 답변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형을 거부하신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속여서 구약의 율법을 어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는 여인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이 없었습니다(간음하다 걸린 남자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제도화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예수께서는 몇몇 경우에 대해서는 사형을 지지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사형이 합당한 때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요 8:1-11). 사도 바울은 적절한 상황에 사형을 도입하는 정부의 권력을 분명히 인정하였습니다(롬 13:1-7).

그리스도인은 사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사형제도를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높은 표준을 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제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를 향해서든 가장 높은 표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십니다. 이 표준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또한 무한한 진노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진노가 완벽한 균형 속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사형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권위를 정부에 주셨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창 9:6; 롬 13:1-7).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형을 반대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형이 집행될 때 결코 기뻐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을 처형하는 정부의 권위에 맞서 싸워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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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우울증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우울증을 겪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답변: 우울증은 기독교인들이든 비기독교인들이든 상관없이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널리 퍼진 질환입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극심한 슬픈 감정, 분노, 절망, 피로 등, 그 밖의 다른 다양한 증상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즐겼던 것들과 사람들에 관한 흥미를 잃으면서 자신들이 쓸모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또한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흔히 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학대나 열등감 같은 심리적 문제와 같은 삶의 상황에 의해 촉발됩니다.

성경은 기쁨과 찬양으로 충만하라고 말하는데(빌 4:4; 롬 15:11),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삶을 살기를 의도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상황으로 말미암은 우울증을 겪는 자에게는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 즉, 기도, 성경 공부와 적용, 지원하는 단체, 믿는 사람들간의 교제, 고백, 용서, 상담 등을 통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우울한 감정은 종종 관심의 초점이 자신들로부터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맞추어질 때 치유 될 수 있습니다.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의사에 의해 진단을 받아야 하는 신체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삶의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완화될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항상 죄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울증은 오직 약물 치료 및 상담으로 치료해야 하는 신체 장애에 의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질병이나 장애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울증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은 부상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 기분이 아닐 때 조차도 자신들이 말씀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감정은 우리를 방황하게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유지해야 하고 시험과 유혹을 겪을 때 일수록 더욱 더 굳건히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0:13).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람은 여전히, 필요한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고통에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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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재정 관리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공적인 재정(돈)관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재정 관리에 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에 관해 반대합니다. 잠언 6장 1-5절; 20장 16절; 22장 7절, 26-2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성경은 반복해서 부의 축적을 경고하고 있으며 그 대신 우리가 영적인 풍요를 추구할 것을 권장합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28:20; 참조, 잠 10:15; 11:4; 18:11; 23:5).

잠언 6장 6-11절은 게으름 및 필연적으로 따를 재정적 파탄에 대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일하는 근면한 개미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우리가 뭔가 유익한 것을 해야 할 때 게으르게 누워서 잠을 자는 자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사람”은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쉬려고 하는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은 분명합니다. 빈궁과 곤핍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전도서 5장 10절에 의하면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부를 절대 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더욱 더 움켜지려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1절은 또한 부를 갈망하는 덫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성경적인 모범은 부를 쌓기 위해 남은 것을 취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격려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1-13절에서 형편없는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권면처럼 우리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요약하면, 성경은 돈 관리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해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모아야 하지만 그것을 축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돈을 써야 하지만 신중하고 절제 있게 써야 합니다. 우리는 즐겁고 희생적으로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돈을 써야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분별 있게 써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쓸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 관리에 있어서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는 현명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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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신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 치유의 역사가 있는가? 치유는 우리가 많은 믿음을 가져야만 가능한가?


답변: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53장 5절은 치유에 대한 핵심 구절이지만, 종종 오해되거나 잘못 적용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나음을 받았다”는 말은 영적인 치유 및 육체적인 치유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과 베드로전서 2장의 문맥을 보면 이 치유는 영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이 구절은 죄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아픔과 질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들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말는 것이지, 육체적으로 치유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고는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믿음을 둘 때 육체적인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올바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아픔, 질병, 고통, 죽음은 오늘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을 것이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육체적인 문제(질병, 아픔, 부상)로 말미암아 죽을 것입니다. 우리를 육체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온전한 육체적인 치유는 천국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아픔, 질병, 병마, 고통,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계 2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적인 상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롬 12:1-2). 그렇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될 천국에 우리의 마음을 쏟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우리 모두가 갈망해야 하는 참된 치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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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전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전쟁을 정죄하는가 아니면 허용하는가? 어떤 상황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가?


답변: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기 20장 13절, 즉,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읽고 오해한 후, 이 명령을 전쟁에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전에 계획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 15:3; 수 4:13).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범죄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1:12, 15; 22:19; 레 20: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살인 외에는,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죽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필요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결백한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민 31:2)고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20장 16-17절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사무엘상 15장 18절은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완벽하게 일치하십니다(요 10:30).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은 오로지 구약 성경에서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말 3:6; 약 1:17).

예수님의 재림은 극도로 과격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은 ‘공의’(11절)로 심판하시며 전쟁을 치르시는 승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전쟁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유혈이 낭자할 것이고(13절) 잔혹할 것입니다. 새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17-18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대적에게 동정을 갖지 않으시고,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유황으로 불타는 못”에 처넣을 것입니다(20절).

하나님은 결코 전쟁을 옹호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때로는 더욱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은 필요합니다. 만일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폐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더 오래 동안 흑인들이 노예로서 고통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전쟁은 끔찍한 일입니다. 어떤 전쟁들은 다른 전쟁들보다 더 ‘정당’하지만 전쟁은 항상 죄의 결과입니다(롬 3:10-18). 동시에 전도서 3장 8절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죄와 미움과 포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원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신 정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 또한 삼가해야 합니다(롬 13:1-4; 벧전 2:17). 전생 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경건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 군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며, 분쟁의 빠른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양쪽 모두에 있어 시민들의 최소한의 인명 피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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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책임의 중요성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오늘날 세상에는 이미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더 많은 유혹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유혹에 직면할 때 영적 전쟁을 수행함에 따르는 짐을 나누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돕기 위한 "책임 동반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직면 할 때 의지할 수 있는 형제나 자매가 있으면 좋습니다. 다윗 왕이 저녁에 홀로 있을 때, 사탄이 그를 유혹하여 밧세바와 간통죄를 짓도록 하였습니다(삼하 11 장).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과 전쟁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 주위로부터 가능한 많은 도움을 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이는 전쟁에서 우리를 격려할 수 있는 다른 신자에게 우리의 형편을 알려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싸우는데 필요한 모든 힘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 유혹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언제 약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혼한 부부가 언제 싸우는지 알며, 행여 그들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원하는 때를 압니다. 사탄은 언제 아이가 부모에게 벌을 받고 앙심을 품는지 압니다. 그는 사람들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집에 오다가 술집에 들르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어디서 도움을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약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잠언 27장 17절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친구의 얼굴이란 친구의 방문 또는 위로의 표현, 그리고 도덕적인 지원을 말합니다.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한 때가 언제입니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친구와 전화하여 안부를 물은 때는 언제입니까? 사탄과 대항하여 전투하면서 때때로 우리가 놓치는 요소는 친구들의 격려와 도덕적인 지원입니다. 서로 영적으로 책임을 지면 이러한 누락된 요소를 채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요약합니다.(히 10:24-25) 그리스도의 몸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서로를 세워줄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고 말하며 암시적으로 책임을 묻습니다.

함께 책임을 나누는 것은 죄와 싸우는 전투에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책임 동반자가 그 전투에서 당신을 격려하고, 책망하고, 가르치고, 당신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고 형편을 알려주고 또한 자백할 수 있는 책임 동반자를 갖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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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분노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분노를 다루는 것은 중요한 생활 기술입니다. 기독교 상담자는 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50 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분노 문제가 있다고 보고합니다. 분노는 의사 소통을 파괴하고 관계를 끊을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건강을 파괴합니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책임지는 대신에 분노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분노와 다툽니다. 고맙게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경건한 태도로 분노를 다루는 방법과 분노의 죄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원칙이 있습니다.

분노가 항상 죄인 것은 아닙니다. 보통 “의분”으로 불리는 성경이 인정하는 분노의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시 7:11; 막 3:5). 성도들도 분을 내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엡 4:26). 신약 성경에 나오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는 "분노"로 번역됩니다. 하나는 "열정, 에너지"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끓어 오르다"를 의미합니다. 성경적인 분노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에너지입니다. 성경적인 분노의 예로는 다윗이 나단 선지자가 전하는 불의한 사건에 대해 듣고 분노한 점이며(삼하 12장), 일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더럽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분노입니다(요 2:13-18). 이러한 분노는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원칙을 보호하려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한 가운데 우리는 내게 가해진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는 경고 깃발이라고 불리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려고 시도하거나 위반했을 때 분노가 우리를 깨워줍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돌보십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항상 상대를 위해 일어서지는 못합니다. 즉, 때때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일어서야 합니다. 피해자가 종종 느끼는 분노를 고려할 때 이러한 분노는 특히 중요합니다. 학대, 폭력 범죄 등의 피해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침해를 당한 것입니다. 종종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는 분노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충격에서 벗어나면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희생자가 참으로 다시 회복되고 용서를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충격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불의한 행위를 충분히 이겨내기 위해서는 그는 때때로 분노를 겪어야 합니다. 충격에서 회복되는 것이 복잡한 양상을 띄우기 때문에 어떤 분노는 오랫동안 지속되며 특히 폭행 희생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희생자들은 그들의 분노 과정을 지나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용서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이는 종종 긴 여정입니다. 하나님이 희생자를 고치실 때 뒤따르는 희생자의 감정에는 분노가 포함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죄 속에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분노는 교만에 의해 일어날 때 비생산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왜곡하거나(고전 10:31) 계속 분노가 남아있음으로 인하여(엡 4:26-27)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죄로 바뀔 때 나타나는 분명한 표시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문제를 공격하는 대신 나쁜 행위를 한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19절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썩은 말과 파괴적인 말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불행히도, 독한 말은 타락한 인간의 공통된 특징입니다(롬 3:13-14). 분노를 절제 없이 끓어 오르도록 내버려두면 그 분노는 죄가 되며 많은 상처를 발생시키는 각본으로 이어지고(잠언 29:11) 결국에는 대대적인 파괴를 낳습니다. 종종 통제 불능의 분노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화가 난 사람이 진정되기를 거부하고 앙심을 품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 분노는 죄가 됩니다(엡 4:26-27). 이러한 분노는 우울증을 야기할 수도 있고, 중요한 문제와 무관한 사소한 것들에 대해 과민반응 중세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에서 나온 분노와 그러한 분노를 잘못 다루는 것은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잠 28:13; 요일 19). 이 자백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우리의 분노로 상처받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분노를 변명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죄를 가볍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을 하였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 로마서 8장 28-29절, 창세기 50장 20절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지나는 모든 상황과 사람을 주권적으로 다스린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거나 의도하지 않으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발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더라도 그분은 항상 백성의 유익을 위해 신실하게 그들을 구속(redeem)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십니다(시 145:8, 9, 17). 이 진리가 우리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움직일 때까지 이 진리를 묵상하면 해를 가한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함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학대하는 그러한 불의한 경우에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50장 19절과 로마서 12장 19절은 우리가 하나님 역할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공평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또한 모든 것을 공정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창 18:25).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음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창 50:21; 롬 12:21). 이것은 분노를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마음에서 흘러나오듯이 우리의 마음은 행동에 의해 바뀔 수 있습니다(마 5:43-48). 즉,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행동하는 방식을 바꿀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 소통을 함으로써 성경적으로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그리고 25-32절에는 소통을 위한 4가지의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1) 정직하게 말하십시오(엡 4:15, 25).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2) 현 상태를 유지하십시오(엡 4:26-27). 우리가 통제력을 상실할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면 안됩니다. 인내의 한계에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하십시오(엡 4:29, 31). 이때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잠 15:1).

4) 선하게 행동하고 악한 말에 대꾸하지 마십시오(엡 4:31-32). 우리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우리의 첫 번째 충동은 종종 죄악 된 충동입니다(31 절). "열까지 세면서" 시간을 버는 것은 경건한 방법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생각할 기회를 주고(32 절), 분노가 지닌 에너지가 더 큰 문제를 만드는데 사용되지 않고 도리어 문제 해결에 쓰이도록 생각하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더 엄격한 경계를 둠으로써 미리 분노를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고전 2:15-16; 마 10:16). 우리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필요가 없습니다(마 7:6). 때때로 우리는 위험한 사람을 인식할 때 분노를 통해 반응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용서할 수 있지만, 다시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분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행해야 합니다(롬 12:18).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 방식이나 반응 방식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해야 할 부분에서 변경을 가할 수 있습니다. 성질을 극복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불경건한 분노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분노함으로써 분노가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 또는 분노가 생길 때마다 올바르게 대처함으로써 그 대처가 습관이 되어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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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 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한 마땅한 경의를 표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 (시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의 장소를 제공합니다(잠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 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장 10절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주실지를 상기시켜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 이 몇 구절들은 많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받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측면을 다룹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편 11절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할 때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욥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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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인내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될 때는 인내심을 보여주는 것은 쉽습니다. 인내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우리의 권리가 침해 당했을 때, 가령 다른 차량이 도로에서 우리를 차단할 때, 우리가 불공평하게 대우받을 때, 동료가 우리의 신앙을 조롱할 때 등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짜증나는 일들과 시련에 직면하면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함은 거룩한 분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내가 칭찬받을 만한 덕목으로서(살전 5:14)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들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갈 5:22)라고 말합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적절한 시기, 전능하심,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내가 소극적인 기다림 또는 친절한 관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약에서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대부분은 적극적인 강력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2장 1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경주하는 사람이 소극적은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서 누가 와서 찔러주어야 달리고 또한 아무렇게나 경주를 해도 친절하게 눈 감아주는 그러한 사기꾼을 기다립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서 “인내”로 번역된 단어는 “견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인내로 경주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인내는 시련을 견뎌내거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면서 목표를 향해 끈기 있게 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는 하룻밤 사이에 발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은 인내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은 우리가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야고보서 1장 3-4절은 시련은 우리의 인내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시기를 신뢰함으로 더욱 발전하며 강해집니다. 심지어 우리의 인내심은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시 37:7)를 만날 때 더욱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내는 결국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약 5:7-8) 보상받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5).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예들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특징이 인내인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할 때 오래 참음의 본으로 선지자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약 5:10). 그는 또한 욥의 인내 및 주께서 보상으로 주신 결말을 언급합니다(약 5:11). 아브라함 역시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히 6:15).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은 오래 참는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주께서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히 12:2).

우리는 그리스도의 특징인 인내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첫째,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일반적으로 "왜 나입니까?"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빌 4:4; 벧전 1:6). 둘째, 우리는 그분의 목적을 추구합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증거를 삼으시려고 우리를 어려운 상황에 두십니다. 또 다른 때에는 우리의 거룩한 성품을 위해 시련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목적이 우리의 성장과 주의 영광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시련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과 같은 그분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다음에 당신이 교통 체증 가운데 있을 때, 친구에게 배신 당할 때, 또는 당신의 증거로 인해 조롱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자연스러운 반응은 스트레스, 분노 및 좌절로 이어지는 성급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연적인 반응’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후 5:17). 그 대신 우리는 아버지의 능력과 목적에 대한 완전한 신뢰 가운데 인내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주의 힘을 얻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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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염려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명령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우리의 모든 필요와 걱정을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가져가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옷과 음식과 같은 육체적인 필요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십니다(마 6:25-34).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의 삶에 염려가 있어서는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 및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염려와 걱정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감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염려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맡기면,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빌 4:7).

물론 구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걱정과 염려가 삶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분께 삶을 바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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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음식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교인이 먹으면 안되는 음식도 있는가?


답변: 레위기 11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셨던 규제 음식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음식규제법은 돼지 고기, 새우, 갑각류 및 해산물, 대부분의 곤충, 죽은 고기를 먹는 새들 및 기타 여러 동물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전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음식규제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모든 국가와 구별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을 마친 후에 예수께서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막 7:19).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사도 베드로에게 이전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던 동물들을 이제는 먹을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구약의 율법(롬 10:4; 갈 3:24-26; 엡 2:15)을 성취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법도 포함됩니다.

로마서 14장 1-23절은 모든 사람이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믿음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음을 가르쳐줍니다. 결과적으로, 만일 우리가 먹는 ‘부정한’ 음식으로 인해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될 권리는 없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에게는 다른 사람의 믿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은혜의 새 언약 안에서는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먹는 음식보다 우리가 먹는 양에 더 큰 관심을 나타냅니다. 몸의 식욕은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비유됩니다. 만일 우리가 먹는 습관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마음의 욕구(정욕, 탐욕, 불의한 증오, 분노)와 같은 여러 다른 습관들을 다스릴 수 없고 우리의 입을 비방과 싸움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식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소욕들을 통제해야 합니다(신 21:20; 잠 23:2; 벧전 1:5-7; 딤후 3:1-9; 고후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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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귀신 또는 유령현상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유령(귀신)이 존재하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령(귀신)’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이 용어가 "영적인 존재"를 의미한다면 대답은 당연히 "그렇습니다". 만일 이 용어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의미한다면 대답은 "아닙니다". 성경은 선한 영적 존재와 악한 영적 존재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지구상에 머물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선언합니다. 즉, 사람이 죽은 이후에 그 영혼에게 발생하는 일은 심판입니다. 이 심판의 결과로 신자에게는 천국이(고후 5:6-8; 빌 1:23), 불신자에게는 지옥이(마 25:46; 눅 16:22-24) 결정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유령’의 형태로 이 땅에 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귀신과 같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절대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는 영적인 존재가 실제로 있음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존재들을 천사들과 마귀들이라고 말합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천사들은 의롭고 선하며 거룩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거역한 타락한 천사들로 사악하고 속이며 파괴적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에 따르면 마귀는 "빛의 천사"와 "의의 종"으로 가장합니다. 유령(귀신)으로 등장하여 죽은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마귀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령현상과 가장 유사한 성경의 예는 마가복음 5장 1-20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귀의 한 무리가 어떤 사람을 장악한 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덤에 출몰하게 합니다. 이 경우 유령의 출몰은 없었습니다. 이 경우는 일반 사람이 마귀가 들린 경우로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공포가 되었습니다. 마귀들은 오직 "죽이고 훔치고 파괴"합니다(요 10:10).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만 할 수 있다면 가능한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령현상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 좀비, 도깨비로 불리든, 악령의 활동이 실제로 발생하면 이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유령(귀신)이 긍정적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을까요? 죽은 자를 소환하여 그들로부터 진실하고 유용한 정보를 얻어내는 심령술사는 어떠냐고요? 다시 말하지만, 마귀의 목표는 속이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에 심령술사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라면 마귀는 기꺼이 맞는 정보를 알려줄 것입니다. 하지만 사악한 동기로 제시하는 정보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사람들을 그릇되게 이끌고 부패시키고 파괴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돈을 받고 당신의 집에 있는 유령을 제거해 주겠다는 사람들과 "유령 사냥꾼" 사업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심령술사, 죽은 자와의 교통, 타로카드 및 영매들이 점점 정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영적인 세계를 의식합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영의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에 영의 세계가 자신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분명히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영적인 기만들을 보며 웃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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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험담(가십)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구약에서 “험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비밀을 드러내는 사람, 남의 이야기와 추문을 돌아다니며 전하는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험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밀 정보를 갖고 그 정보를 알 필요도 없는 무관한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험담은 두 가지에 있어서 정보를 나누는 것과 구별됩니다.

1. 의도: 험담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보이도록 함으로 자기들을 높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일종의 지식을 아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공유되는 정보의 유형: 험담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실패에 대해 말하거나 그들이 허락하거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창피하고 부끄러운 내용을 들춰냅니다. 비록 그러한 험담이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더라도 여전히 험담은 험담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인류의 죄악 된 본성과 불법을 드러내며 하나님이 그분의 율법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어떻게 부으셨는지를 언급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죄의 본성에 넘기셨습니다. 이때 죄의 목록에는 험담과 비방이 포함됩니다(롬 1:29b-32). 우리는 이 구절에서 험담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으며, 험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에 빠졌던 또 다른 그룹은 (현재도 여전한) 과부들입니다. 바울은 과부들에게 게으름과 험담하는 습관을 즐기는 것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 5:12-13)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서로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또한 다른 여성들과 긴밀하게 일하기 때문에 왜곡된 상황에 대해 듣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반복해서 말을 듣고 말할 때는 왜곡이 더욱 심하여집니다. 바울은 과부들이 자신들의 게으름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고,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는 습관을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게으른 손은 마귀의 작업장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게으름을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 20:19).

여성만이 험담의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비밀스럽게 들은 것을 반복만 하더라도 험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잠언에는 험담의 위험성과 그로 인해 받는 잠정적인 피해를 다룬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2-13).

성경은 우리에게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고 말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험담으로 시작된 오해 때문에 우정에 금이 갑니다. 이러한 험담에 관여한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친구들 사이에서 분노와 괴로움과 고통을 유발합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험담에 전문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릴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나 잘못이 드러났을 경우, 그들은 혐의를 부인하며 변명과 합리화로 답변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동을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죄의 심각성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7-8).

혀를 지키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합니다(잠 21:2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혀를 지키고 험담의 죄악된 행위를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주님께 맡기면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험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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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질투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질투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이런 종류의 질투는 죄이며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자신의 욕망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전 3:3). 갈라디아서 5장 26절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완벽한 사랑을 소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 우리가 내 자신과 나의 바람에 집중할수록 하나님께 덜 집중하게 됩니다. 진리를 향해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 없으며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치료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마 13:15).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도록 허락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갈 5:22-23).

질투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3:5). 우리는 질투와 싸우기 위해서 내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성경 공부, 기도, 성숙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내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마음은 변화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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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게으름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뉴턴의 첫 번째 운동 법칙은 움직이는 물체는 움직이는 성향이 있고 멈춘 물체는 안정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법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프로젝트를 부지런히 완료하지만 다른 이들은 무력감을 극복할 동기가 필요할 만큼 무관심을 보입니다. 이런 일부 사람들의 삶의 스타일은 게으름인데, 게으름은 사실 모든 사람들이 받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께서 인간을 위해 일을 정하셨기때문에 게으름이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성경은 게으름에 대해 많은 말을 합니다. 잠언은 특히 게으름과 관련한 지혜와 게으른 사람을 향한 경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잠언은 게으른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그는 잠을 좋아합니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잠 26:14). 게으른 자는 변명을 합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그는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9).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지만 사실은 어리석습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잠언은 또한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끝이 정해져 있다고 알려줍니다. 게으른 사람은 종(또는 채무자)이 됩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의 장래는 어둡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잠 20:4). 그는 가난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게으름이 생길 여지가 없습니다. 새로운 신자는 성실하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는 내용을 배웁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가 하나님이 그의 변화된 삶으로부터 아무런 열매를 기대하지 않으신다고 그릇되게 믿으면 게으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리스도인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약 2:18, 26). 게으름은 하나님의 목적인 선행을 위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심으로써 육체의 게으른 성향을 극복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을 주십니다(고후 5:17).

새로운 본성을 가지면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구세주를 향한 사랑으로부터 근면과 열매를 맺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게으름과 다른 모든 죄를 향한 우리의 옛 성향은 경건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로 바뀌었습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통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또한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4-35).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지런히 견디면 우리의 수고가 주님께 보상받을 것을 압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 삼는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심지어 천국에서 더 이상 저주에 의해 지장을 받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은 계속될 것입니다(계 22:3). 질병과 슬픔과 죄, 심지어 게으름이 없는 상태에서 성도들은 영원히 주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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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교만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의 종류(잠 8:13)와 잘된 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긍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기 의로부터 나오는 교만은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 교만이 주를 찾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싫어하십니다. 시편 10편 4절은 교만한 자들은 자신에게 빠져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은 하나님과 멀다고 설명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런 종류의 거만한 교만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겸손한 정신의 정반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철저하게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한편, 교만한 자들은 자신의 교만에 의해 눈이 가려져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는 교만의 결과에 대해 듣습니다. 잠언 16장 18-19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교만 때문에 하늘에서 내쫓겼습니다(사 14:12-15). 그는 우주의 합당한 통치자이신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기적인 대담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때에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서는 자들에게는 그 앞 날에 오직 재앙 밖에는 없습니다(사 14:22).

많은 사람들이 교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죄를 시인하고 우리 힘으로는 전혀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랑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고후 10:13).

교만은 왜 그렇게 죄가 됩니까? 교만은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의 영광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만 속한 영광을 취하여 내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자기 숭배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붙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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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답변:
많은 사람들은 자긍심을 "자신의 기술, 성취, 지위, 재정적 자원 또는 외모에 근거하여 느끼는 가치"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종류의 자긍심은 사람을 독자적이고 교만한 마음으로 이끌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둔하게 만들면서 자아 숭배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의 자원들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교만에 기초한 가치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낮은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시편 16편 2절은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라고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짐으로 자기 가치와 자긍심을 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사실 때문에 우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낮은 자긍심은 교만의 반대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낮은 자긍심은 교만의 한 형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도록 하여 관심을 갖게 하고 위로하도록 하기 위해 낮은 자긍심을 갖습니다. 이는 낮은 자긍심은 교만만큼이나 “나를 보세요”라고 선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동일한 목표, 곧 자아 도취, 자아 집착, 이기심를 이루는데 있어서 다른 길을 택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아에 대해 죽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관심을 우리를 창조하시고 붙들어주시는 위대한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셔서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셨을 때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하셨다고 말합니다(엡 1:14). 이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가 건강한 자긍심을 가지면,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는 죄에 관여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빌 2:3). 로마서 12장 3절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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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 Questions Minis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