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복음서(4권의 복음서)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사복음서(4권의 복음서)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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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가 아닌 네 권의 복음서를 주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지만(딤후 3:16),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배경과 성격이 다른 인간 저자들의 글을 사용하셨습니다. 각 복음서의 저자들은 각각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다른 측면으로 강조했습니다.

마태는 히브리 청중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의 목적 중 하나는 예수님의 족보와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를 보여 주면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대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의 강조점은 예수님이 약속된 왕, 곧 이스라엘의 왕좌에 영원히 앉으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입니다(마 9:27; 마 21:9).

바나바의 사촌인 마가(골 4:10)는 사도 베드로의 친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애에 일어난 사건들을 목격한 자였습니다. 마가는 이방인 청중을 위해 복음서를 썼고 이에 유대인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계보, 유대인 지도자와의 그리스도의 논쟁, 구약에 대한 잦은 언급 등이 빠져 있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종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많은 사람을 섬기려 하고 그분의 삶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분(막 10:45)임을 강조합니다.

전도자이자 사도 바울의 동반자였던 “사랑 받는 의사” 누가는(골 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유일한 이방인 저자입니다. 누가가 쓴 계보 및 역사적인 연구들을 사용해 온 사람들은 그를 부지런한 역사가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는 역사가로서 목격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를 차례대로 정돈하여 기록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말합니다(눅 1:1-4). 그는 높은 지위를 지닌 이방인 데오빌로의 유익을 위해 그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의 복음은 이방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으며, 그의 의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검증 가능한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었습니다. 누가는 종종 그리스도를 “인자”라고 부르며 그분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고, 또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많은 세부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쓴 요한 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 구별되며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는 “공관복음”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같이 다루고 있고 또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지상에서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활동과 특성으로 시작됩니다(요 1:14). 요한복음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세상의 구주"(요 4:42), "하나님의 아들”(반복적으로 사용됨), "주님이시요 하나님"(요 20:28)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내가 그니라”(I am)라는 진술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확증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진술입니다(비교, 출 3:13-14). 그러나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지 않던 그 시대의 종교 분파였던 영지주의의 오류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글의 전반적인 목적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네 가지의 구별되지만 동등한 정확한 설명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의 다양한 측면들이 드러납니다. 각 기록은 사람의 묘사를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좀 더 완전한 그림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함께 짜인 태피스트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요 20:30), 우리는 네 복음서를 통해 그분이 누구시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게 됨으로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2) 우리가 그들의 기록의 진실성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도록 하려 함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한 명의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 최소한 2-3명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법정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언급합니다(신 19:15).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에 관한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증거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유명한 인정받는 권위자, 사이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법적인 관점에서 네 복음서를 점검했습니다. 그는 네 복음서의 증인의 기록 유형을 보며 일치하는 구절들도 보고 또한 세부 내용에 있어서 각 저자가 다른 저자들과는 달리 어떤 세부 내용을 생략하거나 추가하는 것을 보고는 이러한 증거는 법정에서 강한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을만하고 독립적인 전형적인 자료라고 지적했습니다. 만일 모든 복음서가 똑같은 세부 내용으로 정확하게 동일한 정보를 똑같은 관점에서 담고 있었다면, 이는 결탁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즉, 저자들이 그들의 글을 믿을 만하게 조작하기 위해 사전에 함께 모여 "이야기를 바로 잡는" 시간을 가졌을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서들 간의 차이, 심지어 당장 보아도 모순처럼 보이는 세부 내용들은 각 기록의 독립적인 속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보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관점과 세부 내용의 기록 양과 기록된 사건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은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이며 신뢰할 만한 것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보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각 복음서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의 특정한 사건들에 대해 여러 기록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4장에는 5천 명을 먹인 사건과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은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마태의 기록에는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6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보내시면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마귀를 내쫓고 병을 치료한 후에 돌아오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여져서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합니다(마 14:15). 이에 예수님은 그 날 저녁에 그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면서 두 가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까지 자기들의 힘으로 바람과 파도와 싸우면서(막 6:48-50) 1) 자신들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과 2) 주를 부르며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살 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을 비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성경의 귀한 보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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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생의 목적을 찾는 방법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 삶은 허망하고 무의미한데…어떻게 하면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까?

답변: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삶의 목적과 성취와 만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영원히 보람이 있는 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고민해 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들이 세웠던 목표들을 달성했는데도 왜 그들의 대인관계가 나빠졌고 그들은 왜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한번은 자신의 운동 종목에서 최고 자리에 올랐었던 어느 선수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해주기를 바랐던 말이 있다면 무엇이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정상에 올랐을 때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미리 말해주었더라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목표들을 추구하느라 여러 해를 허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공허함을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인본주의 문화 속에서 많은 것들을 추구하며 거기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업의 성공, 부, 좋은 인간관계, 성적인 쾌락, 오락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 등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은 부와 대인 관계와 즐거움의 목표를 이루었는데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에서 깊은 빈 공간, 즉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느낀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공허함을 전도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 왕은 측량할 수 없는 부, 그 시대나 현 시대를 통틀어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지혜, 수백 명의 여자들, 다른 왕국이 부러워할 만한 왕궁들과 정원들, 가장 좋은 음식과 술 그리고 모든 형태의 오락들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한때 솔로몬 왕은 그의 마음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라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 아래의 삶”, 곧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전부로 여기는 삶은 허무하다고 요약했습니다. 왜 공허함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또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다”(전 3:11)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1:26). 이는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류가 죄와 죄의 저주를 받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창 2:18-25). 2)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주셨습니다(창 2:15). 3) 하나님은 사람과 교제하셨습니다(창 3:8). 4)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6). 이 사실들이 왜 중요할까요? 하나님은 우리 삶의 성취감을 주시고자 이런 각각의 일을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특히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은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과 그 결과 때문에 임한 저주로 인해 전혀 다른 영향을 받았습니다(창세기 3장).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의 하늘과 땅을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심으로 영원한 상태를 여실 것을 계시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구속받은 새 인류와 충만한 관계를 회복하실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쓸모없는 존재로 심판을 받아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계 20:11-15). 죄의 저주는 사라질 것이며 더 이상 죄, 슬픔, 병, 죽음, 고통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계 21:4).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계 21:7). 이렇게 우리는 원상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해 자신과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범했으며 교제는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제를 영원한 상태에서 온전히 회복하십니다. 모든 것을 성취했지만 죽음 뒤에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그 인생은 헛될뿐만 아니라 더욱 비참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눅 23:43) 이 땅에서도 만족스럽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원한 복과 ‘이 땅에서의 천국’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삶의 의미

현재의 삶과 영원한 삶을 사는 데에 진정한 의미를 찾는 길은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행 4:12; 요 1:12; 14:6). 구원과 영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얻게 됩니다. 일단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참된 의미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기 시작하고 그분에게 배우며 그분의 말씀 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기도 안에서 그분과 소통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과 동행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혹은 초신자라면), 당신은 아마 “그 말은 나에게 흥미롭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것처럼 들리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이 모든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선택’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공허함으로 끝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로 선택하거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는 충만한 삶, 우리의 마음의 소원함을 채워주는 만족과 충족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쉬운 삶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 모든 움직임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비싼 관람석을 살 것인지 아니면 적은 돈을 내고 멀리서 게임을 볼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 줄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직접 목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정 자신의 욕망을 쫓는 일을 그만둔, 주님께 온 마음을 바친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가장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아무런 후회 없이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창조주를 대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대가를 치르셨습니까? 치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해 다시는 굶주림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내가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인생을 망쳤는데… 당장 끝내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답변:
우리는 자살로 생을 마치려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많이 쓰이곤 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자살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절망감 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깊은 구렁텅이 속에 빠져있는 것 같으며 상황이 나아지리란 기대가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갖거나 이해해줄 것 같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살아갈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지금 당장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진실로 당신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잠깐 시간을 낸다면, 그분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아마도 과거의 쓰라린 상처들이 거절감과 버림받은 듯한 거대한 상실감을 가져왔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자기연민, 분노, 증오, 복수심 또는 불건강한 두려움에 빠져 당신의 가장 중요한 대인관계마저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자살하면 안 될까요? 당신의 삶 속에서 아무리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당신을 절망의 터널에서 놀라운 빛으로 인도하려고 당신의 허락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확실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거절과 모욕을 당할 때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53장 2-6절에 그분에 대해 ‘경멸받고 거부당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감당했던 슬픔들은 그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로 인해 찔리고 상처받고 짓밟혔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때문에 구속함을 받아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죄들을 사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인내하셨습니다. 당신이 짊어진 죄책감이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겸손히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시 50:15). 당신이 이제까지 저지른 일들이 아무리 고약할지라도, 예수님이 용서하지 못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분이 택하신 일꾼들 중에도 살인(모세), 살인과 간음(다윗 왕)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학대(사도 바울)와 같은 끔찍한 죄들을 저지른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안에서 용서받고 새로운 풍성한 삶을 발견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왜 자살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은 ‘부서진’ 것, 다시 말하면 지금 당신의 인생, 자살로 끝내고 싶은 그 인생을 고칠 준비를 하고 서 계십니다. 이사야 61장 1-3절을 보면 선지자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보세요. 그리고 그분을 믿어보세요. 예수님은 당신의 삶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기쁨과 존재 가치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을 살아가게 할 새로운 심령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상한 심령은 예수님께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2, 15-17).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이자 구원자, 목자로 받아들이시겠나요?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당신의 생각과 발걸음을 매일 그때그때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사 33:6).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여전히 크고 작은 갈등을 겪겠지만, 이제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잠 18:24)이십니다. 당신이 결단하는 이 시간에 주 예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기를 원한다면,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보세요. “하나님, 저는 제 삶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저질렀던 모든 죄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이 저의 구원자가 되심을 믿습니다. 저를 정결케 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며, 삶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소서.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저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이곳의 글을 읽고 예수님에 대한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합니다"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에 있어서 자주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맺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습니다. 특히 그들은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라고 하십니다.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첫 단계를 밟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일단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요 1:12)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43: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으시며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선행을 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2:15). 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순서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본받기를 거부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마음이 새로워지면 그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우리가 성경에 금지된 것을 구하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훔치는 것을 금합니다. 하나님이 도둑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기도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어렵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번에 한 걸음씩 보여주시고 우리는 한 걸음씩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이미 알고 있는 선을 행하기도 바쁘다는 것입니다(약 4:17).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구체적인 것들을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떤 차를 사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기면 우리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십니다(행 16:6-7).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갈수록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예들 들면 한 아이가 번화가를 가로질러 굴러간 공을 보지만, 그 공을 쫓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모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일일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뭐라고 이야기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영(성령)을 의지하면서 주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전 2:16)”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 또한 압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 11:5).

우리가 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갈망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바라시는 것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두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빚을 지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만일 어쩔 수 없는 경우 성경은 대출을 허용하는가?

답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로마서 13장 8절의 바울의 주장은 제 때에 갚지 않은 모든 형태의 빚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심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시편 37장 21절). 동시에, 성경은 모든 형태의 빚에 대해 명백한 명령을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빚에 대해 경고를 하고, 빚을 지지 않는 미덕을 칭찬하고 있지만, 빚을 금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자신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학대하는 대여자들을 신랄한 언사로 비난하지만, 빚진 자를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빌린 돈에 대한 어떤 이자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만, 성경은 여러 차례 빌린 돈에 대한 공정한 금리는 용납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잠 28:8; 마 25:27).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한가지 범주, 곧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준 대여금에 있어서는 이자를 부여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습니다(레 25:35-38). 이 법은 사회적, 재정적, 그리고 영적으로 많은 시사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두 가지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가난에 처해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어려운데,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은 수치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이 빌린 돈을 갚는 것 외에 무거운 이자를 물어야 한다면, 채무는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더 해가 될 것입니다.

둘째, 이 법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빚에 대한 이자를 포기한다면 이는 자비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돈을 빌려준 동안에는 그는 그 돈을 사용할 기회를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자를 부과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는 표현을 유형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노예들이었을 때 애굽으로부터 그들을 자비롭게 불러내어 그들이 소유할 땅을 주셨던 것처럼(레 25:3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가난한 시민들에게 비슷한 친절을 표현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매우 유사한 상황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궁핍한 사람들, 특히 믿는 동료 신자들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돈을 빌려줌으로써 도울 수 있으며, 이때 빌려준 그 돈은 그들의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이러한 선 상에서 두 명의 빚진 자들과 용서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관련하여 비유를 드셨습니다(마 18:23-35).

성경은 돈을 빌리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금하지도 않으며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지혜는 빚을 지는 것은 보통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빚은 본질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우리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몇몇 상황에서는, 빚은 “필요 악”일 수 있습니다. 돈이 현명하게 다루어지고 빚 상환을 감당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경우 금전적인 빚을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도 괜찮는가? 병원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 능력에 대해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인가?

답변:
의학적인 치료를 받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종종 ‘믿음의 말씀 운동(Word-Faith Movement)’에서는 의사와 상담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유하시는 것을 막는 믿음의 부족으로 간주됩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같은 단체들에서는 의사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 주신 영적 에너지의 사용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관점들은 논리가 매우 결여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차가 고장 난다면, 당신은 그 차를 정비공에 가지고 가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당신의 차를 고쳐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당신 집안의 수도 배관이 터진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물이 새는 것을 틀어 막아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배관공을 부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치유하시는 것처럼 차를 수리하거나 수도 배관을 그냥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유의 기적들을 행할 수 있고 행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도울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개개인들의 도움을 받지 말고 항상 기적을 기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의사들이 수십 차례 언급됩니다. 전후 문맥과 상관없이 의사들에게 가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을 뽑는다면 역대하 16장 12절이 유일합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문제는 아사가 의원들과 상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한” 것에 있습니다. 의사를 만날 지라도, 우리의 궁극적 믿음은 의사가 아닌 하나님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의학적 치료들”의 사용을 말하고 있는데, 싸맴(사 1:6), 기름(약 5:14), 기름과 포도주(눅 10:34),잎사귀(겔 47:12), 포도주(딤전 5:23), 그리고 유향, 특히 “길르앗의 유향”(예레미야 8:22) 등입니다. 또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사랑을 받는 의사”라고 부른 사림이었습니다(골 4:14).

마가복음 5장 25-30절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을 찾아 갔고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썼지만 의사들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의 옷 자락만 스쳐도 치유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옷 자락을 만졌고, 그리고 치유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왜 죄인들과 함께 하느냐고 질문하자 답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우리는 이런 구절들로부터 몇 가지 원칙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1) 의사들은 하나님이 아니므로 전능한 존재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의사들은 어떤 때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다른 때에는 가진 돈을 소진하게 만들 뿐 아무런 결과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2) 의사들을 찾아서 일반적인 치료를 받는 것은 성경이 책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의학적 치료를 호의적으로 봅니다.

3) 어떠한 육체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구해야 합니다(약 4:2; 5:13).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바라는 대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시지만(사 55:8-9),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사랑 가운데 행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시 145:8-9).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의사를 찾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약을 개발하고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런 지식과 능력을 몸을 치유하는데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는 의사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 및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수단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궁극적인 믿음과 신뢰는 의사들이나 약이 아닌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마다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약 1:5).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은 운동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운동 및 신체 단련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하는가? 몸매 관리는 성령의 전(우리 몸)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답변:
인생의 많은 부분들처럼 운동 역시 지나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영적인 것에 집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몸매와 모양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을 방치합니다. 이러한 치우침은 성경적인 균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은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이 운동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오히려 운동은 중요하며 경건은 더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우선 순위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영적인 진리를 예시하면서 육체적인 훈련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을 ”상을 얻기 위해” 달음질하는 것과 비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상은 변색되거나 바래지지 않을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다시 한번 운동 경기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도다.” 이 성경 구절들은 육체적인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지만, 바울이 영적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운동 경기에 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육체적인 운동과 심지어 경기마저 긍정적인 관점으로 보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지닌 영적인 존재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존재의 영적인 면이 더 중요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건강이든 육체의 건강이든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운동하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자신의 몸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고전 6:19-20). 동시에 성경은 헛된 영광의 무의미함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16:7; 잠 31:30; 벧전 3:3-4). 운동을 하는 목적이 몸의 상태를 개선시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주목하고 칭찬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보다는 운동의 목적은 우리의 육체적 건강을 개선시켜 우리가 영적인 목적에 헌신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육체적 힘을 키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성경은 법정 소송 및 고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송사해야 하는가?

답변: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로가 다툼이 있더라도 법정에 가지 말라고 훈계하였습니다(고전 6:1-8). 기독교인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차이점들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패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고 그것들을 해결할 능력도 없다면, 어떤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송사가 적절한 행위가 될 수 있는 몇몇 경우들도 있습니다. 화해를 위해서 성경적인 모범을 따랐는데도(마 18:15-17) 해를 끼친 쪽에서 여전히 잘못을 행하는 때는 경우에 따라 송사가 정당화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지혜를 구하는 많은 기도(약 1:5) 및 영적 지도자와 상의를 나눈 후에 행해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6절의 전체 문맥은 교회 안에서의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에 연관된 것들에 관한 판결을 말하면서 법정을 언급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법정은 교회 밖에 있는 인생 문제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는 법정으로 끌고 가서는 안되며, 교회 안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22장은 바울이 체포되어 그가 범하지도 않은 죄에 대해 부당하게 기소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를 체포하였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행 22:24-25). 바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의 법과 그의 시민권을 이용하였습니다. 올바른 동기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행하는 한 법정 체계를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바울은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신자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법정으로 데려감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것보다 우리가 이용당하거나 심지어 피해를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법정 싸움입니까 아니면 한 사람의 영원한 영혼을 위한 싸움입니까?

요약 하면, 기독교인들끼리 교회 문제를 가지고 법정까지 가야 합니까? 절대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끼리 세상의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 법정까지 가야 합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피할 수 있다면 법정에 가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문제들을 가지고 비기독교인들을 송사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는데, 피할 수만 있다면, 가지 마십시오. 하지만 우리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그러한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법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군복무를 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군복무를 고려해 보아도 괜찮은가?

답변:
성경은 군복무에 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군대에 대한 많은 성경의 묘사들은 단지 비유들이지만, 몇 구절들은 이 질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이 군복무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기독교인들은 군인이 되는 것에 대해 성경 전반에 걸쳐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복무가 성경적 세계관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복무의 첫 번째 사례는 구약에서 발견되는데(창세기 14장),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의 왕, 그돌라오멜(Chedorlaomer)과 그의 연합국들에 의해 납치되었을 때 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훈련된 318명의 남자들을 모아 엘람족속을 물리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고 보호하는 고귀한 임무에 참여했던 무장된 군인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 훗날에 이스라엘 국가는 상비군을 구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전사이시고 그들의 군사력과 관계없이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느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군대를 발전시키는데 느리게 만든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의 정규군의 성장은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 강력한 중앙 정치 체계가 구축된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사울은 처음으로 상비군을 형성하였습니다(삼상 13:2; 24:2; 26:2).

다윗은 사울이 시작한 것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군대를 늘렸고 또한 그에게만 충성하는 수행 병력을 만들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병력을 고용하였으며(삼하 15:19-22), 그의 군대의 직접적 지도권을 총사령관인 요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다윗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또한 군사 정책에 있어서 더욱 공격적이 되었고, 암몬 같은 이웃 국가들을 흡수하였습니다(삼하 11:1; 대상 20:1-3). 다윗은 24,000명으로 구성된 12개의 군단들이 돌아가면서 일년에 한 달씩 복무하는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역대상 27). 솔로몬의 통치 기간은 평화스러웠다 하더라도, 그는 군대를 더 확장하였고 전차들과 기병대를 보충하였습니다(왕상 10:26). 상비군은(솔로몬이 죽은 후에 왕국이 분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유대 왕국)이 정치적 독립체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때인 주전 586 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께서는 로마의 백부장(백 명의 군사들을 책임지는 장교)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놀라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백부장의 반응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뿐만 아니라 권위에 대한 그의 분명한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마 8:5-13). 예수께서는 그의 직업을 배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많은 백부장들은 기독교인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그리고 좋은 성품의 남자들로 칭찬받고 있습니다(마 8:5; 27:54; 막 15:39-45; 눅 7:2; 23:47; 행 10:1; 21:32; 28:16).

장소들과 명칭들은 변경될 수 있으나, 우리의 군대는 성경의 백부장들처럼 존중 받아야 합니다. 군인의 위치는 매우 존중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인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군사 된 자”(빌 2:25)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성경은 또한 투구, 창, 검 등, 군인의 무기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하면서 주안에서 강해지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군사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엡 6:10-20).

그렇습니다. 성경은 군복무에 대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격과 존엄성과 명예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나라를 섬기는 기독교인 남자들과 여자들은 그들이 수행하는 시민의 의무가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의해 용납되고 존중 받는다고 확신해도 됩니다. 명예롭게 군복무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존중과 감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삶의 목적을 찾는 방법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인생이 허망하고 무의미한데…어떻게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나요?

답변:
성경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분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하였고 또한 발견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현명했던 솔로몬은 오직 이 세상에서만 산다고 가정할 때 삶의 헛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전도서에서 결론적 발언을 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솔로몬은,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의 한 부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적의 다른 부분은 이 땅 위의 삶을 거시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과 달리, 다윗 왕은 장래의 때의 만족을 찾았습니다. 그는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고 말했습니다. 다윗에게 온전한 만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하나님과의 교제) 그분과 같이 되어진 상태로(요일 3:2) 자신이 깨어날 그 날(내세의 삶)에 임할 것이었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아무 것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여 그들 뒤에서 부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는 사악한 사람들을 자기 자신이 부러워하는 유혹에 어떻게 빠졌는지를 말하고는 그들의 궁극적 결과를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5절에서 그들이 추구했던 것과 대조되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아삽에게 있어서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면하기 전에 종교적으로 그가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해 말하였고,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함에 비해 배설물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9-10절에서 말하길, 설령 고난과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 그분의 의를 취하는 것,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목적은 비록 고난이 따를지라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그분을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갖는 것이고 그분과 교통하며 사는 것입니다(딤후 3:12). 궁극적으로, 그는 자신이 “죽음 자들로부터의 부활”의 한 부분이 될 때를 바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으로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우리의 삶의 목적은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과 교제를 누리는 것, 2)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 3) 일하는 것, 그리고 4) 땅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는 깨어졌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는 경직되었으며, 일하는 것은 항상 좌절감을 주는 것처럼 보이고,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는 모습을 유지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때에만 삶의 목적이 다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그분을 친밀히 앎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따를 때 하나님은 즐거워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참되고 지속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기를 원하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동업해도 괜찮은가?

답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일반적인 질문입니다. 이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성구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 6:14)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자주 인용됩니다. 이 구절이 결혼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결혼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유형의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 친밀한 친구, 그리고 많은 경우 동업자와 같은 것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신자와 불신자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의 동기, 목표 및 방법은 불신자의 동기, 목표 및 방법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인생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소망은 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기껏해야 그러한 목표에 무관심합니다. 만일 사업에서 그리스도인의 방법과 목표가 불신자의 방법과 목표와 동일하다면, 그는 자신의 우선 순위를 재평가하고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은 계속해서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나눌 때 사귐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동업자는 서로 뭔가를 나누어야 하는 그러한 관계로 연결됩니다. 즉,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속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귐’입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사업을 통해 주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면 불신자인 동업자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항우울제 및 기타 정신과 약물을 복용해도 되는가?

답변: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공황장애, 불안장애, 공포증,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의료 전문가들은 앞에서 언급된 질병들이 사람의 정신에서 시작되었다고 믿지만 화학적 불균형이 원인인 때가 있습니다. 정신에서 시작된 문제가 화학적 불균형을 유발하여 문제가 지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약물은 종종 불균형을 막기 위해 처방되고 그 다음으로 심리적 질병 증상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의학 지식을 점점 많이 알아가도록 허락하셨고 종종 약을 사용하여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치유를 위해 사람이 만든 약을 필요로 하십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학이 발전하도록 허락하셨고, 우리가 의학적인 처방을 사용하지 않아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치유 목적으로 약을 사용하는 것과 일상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약을 의존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대한 의사로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분만이 진정으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요 4:14). 우리는 우리의 치유를 위해 가장 먼저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황 발작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는 약은 환자가 두려움의 근본 원인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 허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환자가 진정을 찾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이 병의 진정한 원인을 다루는 대신에 약만 복용합니다. 이것은 책임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치료를 부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거나 과거 사건을 잊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약을 복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로운 상담을 받을 경우 일반적으로 약의 필요성이 줄게 됩니다.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항우울제를 장기간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조울증과 정신 분열증과 같은 심리적 장애는 당뇨병을 위한 인슐린처럼 장기적인 약물 사용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위치는 확증되었고 하나님은 질병을 야기시키는 마음과 정신의 문제를 치료하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염려를 다룰 때 신자의 삶에 있어서 두려움과 그 요인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다음 성구들을(잠 29:25; 마 6:34; 요 8:32; 롬 8:28-39; 12:1-2; 고전 10:13; 고후 10:5; 빌 4:4-9; 골 3:1-2; 딤후 1:6-8; 히 13:5-6; 약 1:2-4; 벧전 5:7; 벧후 1:3-4; 요일 1:9, 4:18-19) 읽고 묵상함으로 치유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확신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진리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약과 의사를 통해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향을 취하시든 우리의 궁극적인 신뢰는 오직 그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마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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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리스도인이 보험에 가입해도 되는가?

답변: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보험 가입에 관한 질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보험에 가입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요? 이것은 건전한 의문이며, 성도들은 성경을 검토하여 성경적으로 변호할 수 있는 답변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보험을 드는 문제는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동의합시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부터 원리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신자들마다 서로 다른 개인적인 확신을 갖게 될 수 있지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4장은 그러한 경우는 타인의 확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4:5). 로마서 14장 23절은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지 믿음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보험에 드는 것은 확신의 문제입니다. 보험을 드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보험 들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해야 하고, 보험에 들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 다르게 확신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를 인도하는 성경의 원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에 있는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라서 법이 자동차 보험과 같은 보험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가족의 미래 이익을 미리 계획해야 하며 보험을 드는 것이 그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앞서 계획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의 예기치 못한 조기 퇴직을 위한 준비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생명 보험은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부족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신중한 계획과 현명한 기금 마련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의 조건과 확신은 이 분야에서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앞선 계획을 옹호하십니다. 요셉의 이야기와 그의 현명한 계획은 애굽 나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스도의 혈통을 구원했습니다(창 41장).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분께 부르짖으며 이 분야 및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약 1:5). 히브리서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질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야고보서 4장 17절은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구절인데, 만일 우리가 선을 행할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또 다른 구절은 디모데전서 5장 8절인데,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한다면 가족부터 섬기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보험을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정신과 의사 및 심리상담사를 보러가도 되는가?

답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는 정신 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의 역할을 혼동하며, 그들을 심리 치료사, 정신 분석가 또는 정신 건강 상담원과 같은 다른 정신건강 전문가들과 혼동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여러 다른 교육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며 그들은 다양한 치료 방법을 사용합니다. 심리학자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하고, 주로 연구, 대학 수준의 수업, 그리고 개인 상담을 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그들은 많은 인지 및 감정 평가를 위한 테스트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처방전 특권은 2002년 뉴멕시코에서 심리학자들에게 제공되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한 심리학자 그룹들이 그러한 특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편, 정신과 의사는 실제로 정신 질환을 전문하는 의사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건강을 위한 약리학적 치료에 대해 고등 훈련을 받았으며 약물을 처방하는 주요 정신건강 전문가입니다. 일반 의사와 간호사 역시 심리 치료를 위한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난독증 테스트나 상담을 위한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은 심리학자에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와 연결되기 전에 심리학자 또는 다른 상담 전문가를 만납니다. 일부 정신과 의사는 상담을 실시하지만 일부는 단지 치료를 수행하는 다른 전문가와 협력하여 약물 치료를 관리하고 감시합니다. 어떤 직업에서든 마찬가지로 일부 심리학자 및 정신병 의사는 기독교인이며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이 이러한 전문직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이 죄는 아닙니다. 둘 다 합당하며, 유익을 제공합니다. 정신건강 전문가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는지,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우리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신 및 정서 문제에 관한 세속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이론이 많이 있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많은 경건한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 지식을 표현하고 경건한 성품을 보이는 기독교 신자 전문가를 찾는 것이 최선입니다. 우리가 받는 그 어떤 상담도 세상의 모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통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어져야 합니다.

심리학자 또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지할 것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다양한 신앙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조차도 완벽한 해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 지식의 어떤 영역에 대해서는 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병에 대해 첫 번째 해답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진리로 우리 자신을 무장시키는 것은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지를 분별하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엡 6:11-17; 고전 2:15-16). 모든 신자는 각각 자신의 영적 성장과 분별력을 위해 성경을 연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할 것이며,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엡 5:1-2; 골 3:3).

-Got Questions Ministries

질문: 그리스도인이 비디오 게임을 해도 괜찮은가?

답변:
거의 2,000년도 전에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비디오 게임을 해도 되는지 여부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성경 원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활동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면 우리는 한동안 그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음식, 영화, 텔레비전, 음악, 비디오 게임 등,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백성을 섬기는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것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일부는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로 하여금 처음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골 3:5, 계 2:4). 아래 질문은 비디오 게임, TV, 영화 또는 기타 이 땅에서 추구하는 것들에 관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입니다.

1. 비디오 게임이 내게 덕이 됩니까? 아니면 단지 오락일 뿐입니까?

덕이 된다는 뜻은 유익을 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디오 게임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지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데 도움이 됩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10:23-24; 롬 14:19). 하나님이 우리에게 휴식의 시간을 주실 때, 우리는 고상한 활동을 찾아서 즐겨야 합니다. 우리는 칭찬받을 만한 활동보다 허용 가능한 활동을 택합니까? 우리가 좋은 것과 더 나은 것과 최선 사이에서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최선을 택해야 합니다(갈 5:13-17).

2. 비디오 게임은 자신의 의지에 순종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까?

주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가장 큰 계명으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우리의 뜻은 죄로 인해 오염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의지를 굴복시켜야 합니다(빌 3:7-9).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을 변화시킵니다(시 143:10). 점진적으로, 우리를 향한 주의 열망은 또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지루하고 부끄러운 일로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고독한 수도원에 있는 수도승이나 화를 잘 내는 교회 관리인을 떠올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을 삶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가장 즐겁고 모험 넘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에이미 카마이클, 코리 텐 붐, 조지 뮬러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성도들은 세상과 자신의 죄성과 마귀로부터 오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소유를 많이 갖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분의 뜻이 불가능하고 너무 거룩해서 아무런 재미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일을 수행 할 수 있는 힘과 그것을 기뻐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실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나이다”(시 40:8; 참조, 히 13:21).

3. 비디오 게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일부 비디오 게임은 폭력, 음란, 어리석은 결정들을 멋진 것으로 묘사합니다(예를 들면, "나는 경주에서 벗어났으니 내 차를 망가뜨리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활동과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데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고전 10:31).

4.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이 선행을 낳습니까?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참조, 딛 2:11-14; 벧전 2:15). 게으름과 이기심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 곧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합니다(고전 15:58; 참조, 갈 6:9-10).

5.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이 절제를 드러냅니까?

많은 사람들이 비디오 게임이 중독이나 강박 관념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결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상을 얻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운동 선수와 비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서 영원한 보상을 얻으려는 더 큰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제를 행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고전 9:25-27).

6.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합니까?

당신은 당신의 제한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시간을 선하게 사용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2; 참조, 골 4:5; 약 4:14; 벧전 1:14-22).

7. 빌립보서 4장 8절의 시험을 통과 했습니까?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비디오 게임을 할 때 당신의 마음이 경건한 것에 집중합니까 아니면 세속적인 것에 집중합니까?

8.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에 맞습니까?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이 어떠할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4). 서양 문화는 이 묘사에 어울립니다. 우리는 놀기를 좋아합니다. 불신자들은 죽음 이전에 즐길 인생 외에 더 높은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영화, 스포츠, 음악과 같은 오락물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락은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전 2:1).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처럼 세상의 오락에 물든다면, 우리가 참으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새생명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큰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Paul considered knowing, loving, and obeying God to be his highest priority. “I consider everything a loss compared to the surpassing greatness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whose sake I have lost all things. I consider them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I want to know Christ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sharing in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Philippians 3:7-10). Will playing video games be showing my love for God or my love for the things of the world? (1 John 2:15-17). 바울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노라”(빌 3:7-10).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나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을 사랑합니까?(요일 2:15-17)

9. 비디오 게임을 하면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땅에서 충실할 경우 하늘에서 영원한 보상을 받을 소망이 있습니다(참조, 마 6:19-21; 고전 3:11-16). 만일 우리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땅의 쾌락보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섬기기 위해 나의 자원과 시간과 마음을 희생할 것입니다(골 3:1-2, 23-24). 만일 우리의 재물 또는 활동으로 인해 영원한 상을 잃게 된다면, 그것들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눅 12:33-37)?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하나님과 그들 자신의 욕망을 둘 다 섬겨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마 6:24)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과 휴식의 시간을 통해 기쁨을 주십니다(전 5:19; 마 11:28-29; 골 3:23-24). 우리는 노동과 여가의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휴식을 위해 시간을 따로 갖게 될 때(막 6:31), 우리는 덕이 되는 활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단순히 "게임을 해도 될까" 보다는 "게임이 과연 최선의 선택일까"라고 스스로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에게 덕이 되고,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가요? 우리는 단지 허용 가능한 활동이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활동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디로 인도하시든, 다른 무엇보다 더 열정을 다해 그 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영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희생은 아주 사소한 일들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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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투표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가?

답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은 기독교 원칙을 지지하는 지도자를 뽑기 위해 투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든 것을 완전하게 주관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딤전 2:1-4). 하나님은 때때로 정치와 지도자와 관련해서 우리가 그릇된 지도자를 택한 사실에 대해 못마땅해 하십니다(호 8:4). 이 세상에서 죄가 주관하는 증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많은 고통은 사악한 지도자들 때문에 생겨납니다(잠 28: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명령과 모순되지 않는 한 합법적인 권위에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행 5:27-29; 롬 13:1-7). 우리는 거듭난 신자로서 창조주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하는 지도자를 선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삼상 12:13-25). 생명, 가족, 결혼 또는 신앙에 대해 성경의 명령을 어기는 후보자들 또는 공약은 절대로 지지되어서는 안됩니다(잠언 14:34). 그리스도인들은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현실을 감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함으로 올바른 투표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압제와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미워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소리를 묵살시키는 정권 하에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변화 시킬 힘이 없습니다. 이 신자들은 생명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미국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및 가족이 해를 입을 두려움 없이 지도자에 대해 말하고 선택할 수 있는 복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최근 선거를 보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5명 중 약 2명이 투표권을 양보하고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투표권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1/5은 등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공공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이름과 메시지를 완전히 몰아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투표는 경건한 정부를 지지하고 보호하며 보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출하거나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수용하는 지도자들은 우리의 자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은 예배와 복음 전파의 권리를 보호하거나 그 권리를 제한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의를 향하도록 이끌 수도 있고 도덕적인 재앙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민의 의무를 완수하라는 명을 따르기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마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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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예수님은 채식을 하셨는가? 기독교인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답변:
예수님은 채식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물고기와(눅 24:42-43) 어린 양을(눅 22:8-15) 먹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셔서 군중들에게 물고기와 빵을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그분이 채식주의자였다면 이상한 사건일 것입니다(마 14:17-21). 예수께서는 환상 가운데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행 10:10-15).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에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창 9:2-3). 하나님은 결코 이 허락을 취소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관건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강요하거나 그들이 먹거나 먹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은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홍수 이후에 인류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창 9:3). 구약 율법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특정 음식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레 11:1-47), 고기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고기를 포함하여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 하셨습니다(막 7:19). 어떤 것에 대해 하나님이 먹도록 허락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먹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용납될 것입니다(살전 5:1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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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성형수술 및 미용시술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

답변: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성형 수술이나 미용 수술을 받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성형 수술 그 자체가 잘못이라고 알려주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술을 수행할지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은 있습니다. 신체를 바꾸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육체와 정신에 부작용의 위험이 항상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수술과 관련된 모든 대안과 위험과 부작용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칼 아래에" 두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수술을 원하는 동기를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유전적 또는 후천적인 신체적 기형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고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너무 크거나 기형인 코처럼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매우 불편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약간 비정상적인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다는 아닐지라도 많은 성형 수술이 감정적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주의를 끌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얻기 위해 시행되고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미용 수술 절차는 유방 확대 및 올리기, 지방 흡입(체지방 제거), 주름 제거 수술, 쌍꺼풀 수술, 엉덩이 및 기타 신체 올리기, 다리 정맥 치료, 보톡스 및 지방 주사, 코와 얼굴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매년 약 2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수술을 받으면서 돈을 쏟아 붓고 시간과 편안함을 희생합니다. 사람이 허영심 때문에 수술을 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허망하거나 자만하지 말고(빌 2:3-4)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딤전 2:9). 또 다른 우려는 비용일 것입니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고려 사항이며, 성형 수술의 비용이 결코 가족의 필요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돈을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잠 11:24-25; 눅 16:10-12).

성형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기 전에 꼭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수술에 대해 하나님과 상의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염려와 걱정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 가야 합니다(벧전 5:7). 우리는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가장 숙련된 외과 의사조차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성형 수술을 해도 결과적으로 노화를 막지 못합니다. 올려진 신체 부위는 다시 처지게 될 것이고, 미용 수술에 의해 바뀐 얼굴 모양도 다시 주름살을 띄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내면의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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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가?

답변: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결정은 삶의 궁극적인 선택입니다.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많겠지만, 다음의 네 가지 이유로 일반적인 범주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며 자신의 공로로 자신들에 대해 성공적으로 변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거부 또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2-43절을 보면,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동료들 사이에서의 지위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요 12:43) 그들의 눈을 가리는 세상 지위 및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택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3)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세상이 제시하는 것들이 영원한 것보다 더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16-23절에서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이 땅의 소유를 내려놓고자 하지 않았습니다(참조, 고후 4:16-18).

4)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도하려는 성령의 시도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지도자인 스데반은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 7:51)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 23-27절에서 복음을 거절한 무리들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의 거부는 영원한 재앙을 낳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고 어떤 이유이든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은 지옥의 바깥 어둠 속에서 영원을 직면하게 되어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마 25:30)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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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은퇴에 관한 기독교의 입장는 무엇인가?

답변:
그리스도인들은 은퇴 연령이 가까워질 때 종종 은퇴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에서 은퇴할 때 기독교 봉사에서도 은퇴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은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까?

1) 어떤 나이에 도달하면 은퇴해야 한다는 성경적인 원칙은 없지만, 성막에서의 레위 사람들의 모범과 사역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레위 사람은 25세에서 50세 사이에서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순서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50세가 되면 정규적인 일에서 은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형제들을 도울 수는 있었어도 계속 제사장의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민 8:24-26).

2) 비록 우리가 우리의 직업(심지어 기독교 전임 사역)에서 은퇴할지라도, 또한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바뀔지라도 우리는 결코 주를 섬기는 일에서 은퇴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2장 25-38절을 보면 충실하게 주님을 계속 섬겨온 매우 연로한 두 사람(시므온과 안나)의 본을 접하게 됩니다. 안나는 금식과 기도로 매일 성전에서 일을 한 늙은 과부였습니다. 예를 들면, 디도서 2 장은 나이든 남자와 여자가 젊은 남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3) 노년기는 오직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향락을 위해 사는 과부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딤전 5:6).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은퇴를 가능한 만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퇴직자가 골프, 사회적인 기능 또는 즐거움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러한 것들이 어떤 나이에서든지 사람의 주된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고린도후서 12장 14절은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저축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축’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것은 자녀, 손자, 증손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영적 유산입니다. 후손들의 세대는 가족 중에 나이든 어른들의 충실한 기도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기도는 아마도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가장 열매를 맺는 사역의 출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의 직장 주소만 바뀌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사람이 "은퇴 연령"(그 나이가 무엇이든지 간에)에 이르면 직업은 변할 수 있지만 주님을 섬기는 일은 변하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연관지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어르신 성도들”입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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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답변:
그리스도인이 독신으로 지내는 문제와 성경이 결코 결혼하지 않는 신자들에 관해 말한 것은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7-8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어떤 사람은 독신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은 결혼의 선물로 받는다고 말한 사실을 주지하십시오. 거의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결혼 및 가정과 연결된 추가적인 문제와 스트레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결혼했다면, 그는 그처럼 유용한 복음 전파자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부로서 그리고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팀으로 더 잘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더라도 죄는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자를 찾고 자녀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기도하면 응답하실 것입니다(마 7:7).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주의 선한 역사를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구하면 주께서는 또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독신은 저주가 아니며 독신 상태에 있는 사람은 “뭔가 잘못된 사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혼을 하며, 성경 역시 대부분의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독신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2 등급’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7장이 지적하는 것처럼, 독신은 더 높은 소명입니다. 인생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혼에 관해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그것이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열매들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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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답변:
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많은 부부 및 가족들에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여성의 역할에 관한 지침이 있습니다. 디도서 2장 3-4절에서 바울은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들에게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늙은 여자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성경은 젊은 여성의 책임은 아이들과 관련된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한편, 늙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늙은 여자는 그녀의 시간을 주님의 인도하심과 자신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31 장은 "고귀한 성품의 아내"에 대해 말합니다. 저자는 11절부터는 이 여인이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그녀는 자기의 집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16, 18, 24, 25절은 그녀가 대단히 부지런해서 밤 늦게까지 가내 수공업을 하여 가족을 위해 추가 수입을 제공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이 사업 활동을 하는 동기는 사업이 목적이 아니라 가정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자기의 경력을 더하거나 이웃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부양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직업을 가진 이유는 부차적인 것으로서 그녀의 진정한 부름, 곧 남편과 자녀와 가정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자가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성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이 자녀와 남편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 그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할 수 있고 여전히 자녀와 남편을 위해 따뜻하고 안정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녀가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은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원리를 염두에 둔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가 있습니다.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은 비난 받아서는 안되며, 가정에서 청지기 직분에 힘쓰는 여성 역시 결코 무시 받아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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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자살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자살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자살하면, 구원을 잃는 것인가?


답변: 성경은 자살한 여섯 명의 특정 인물을 언급합니다. 아비멜렉(삿 9:45), 사울(삼상 31:4), 사울의 무기를 든 시종(삼상 31:4-6), 아히도벨(삼하 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가룟 유다(마 27:5)입니다. 이 중 다섯은 죄악을 지은 사례로 알려진 남자들이었습니다(사울의 무기를 든 시종에 대해서는 그의 성품을 판단할 만한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삼손의 죽음도 자신의 행위가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예라고 간주하지만(삿 16:26-31), 삼손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자살을 살인과 동일하게 보는데, 말하자면 스스로를 살인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시편 저자처럼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십니다(욥 1:21). 자살은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는 죄가 됩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를 취해 자신의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등장한 몇몇 사람은 삶 속에서 깊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솔로몬은 쾌락을 추구하다가 결국 “사는 것을 미워하는”(전 2:17)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움과 우울증에 빠져 죽기를 바랐습니다(왕상 19:4). 요나는 하나님께 너무 화가 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욘 4:8). 심지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한때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고후 1:8)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엘리야는 천사의 위로를 받고 쉼을 가진 후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책망과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는 깨달음과 함께 주께서 모든 것을 감당하실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자살은 죄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죄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른 죄악들보다 더 악한 죄는 아닙니다. 또한 이 죄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살은 분명 유가족들에게 갚고 지속적인 악영향을 끼칩니다. 누군가의 자살로 인한,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와 같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각 사람에게 주의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십니다(시 67:1). 그리고 우리 모두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는 약속 안에서 소망을 취하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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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십일조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기독교인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하는가?


답변: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헌금 문제로 고민 합니다. 어떤 교회들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에 관한 성경적 권고를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기쁨과 축복을 의도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따금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구약에 나와 있는 개념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의 요구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들이 수고한 작물과 키운 가축들의 10%를 성막/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레 27:30; 민 18:26; 신 14:24; 고후 31:5). 사실 구약의 율법은 복수의 십일조를 요구했는데(레위인들을 위한 것, 성전과 절기들을 위한 것,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 이는 총 약 23.3%까지 달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십일조가 당시 희생 제사 제도를 관장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세금 걷는 방법 중 하나라고 이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신약 성경 어디에도 기독교인들이 율법적인 십일조 체계를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거나 권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따로 구별해야 할 소득의 일정 비율을 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증은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고전 16:1-2). 개신교 교회의 일부 사람들은 구약의 십일조에서 10%의 수치를 따와서 기독교인으로서 헌금을 하는 ‘최소한의 권장’으로 적용하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은 헌금의 중요성과 혜택에 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때로는 10% 이상을 드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보다 덜 드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각자의 능력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달라집니다. 모든 기독교인이 십일조 헌금에 참여하는 문제와 얼마를 드려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지런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무엇보다 모든 십일조나 헌금은 순수한 동기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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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종주의, 편견, 차별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사람을 피부색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는가? 


답변: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인종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인종은 인류입니다. 백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유대인은 다른 인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류의 다른 족속들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동등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창 1:26-27).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놓게 하셨습니다(요 3:16). 이 ‘세상’은 분명히 모든 민족 집단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편애나 차별을 보이지 않으시기 때문에(신 10:17; 행 10:34; 롬 2:11; 엡 6:9), 우리도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4절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약 2:8).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인종” 집단으로 나누셨습니다.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 나라들을 보살피는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러한 나라가 되는 대신에 그들의 지위로 인하여 교만하여져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대감을 낳는 막힌 담을 허시고 이러한 분리를 종식시키셨습니다(엡 2:14).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에 모욕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요 13:34).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우리를 공정하게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똑 같은 높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그분께 한 것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멸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어떤 사람을 해치는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들과 다양한 정도로 나타나는 인종 차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고질병입니다. 모든 민족들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인정 차별은 안 됩니다. 인종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희생자들은 용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선언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당신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훨씬 더 없습니다. 인종차별, 편견, 멸시를 행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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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낙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어떤 상황 가운데 낙태가 허용될 수 있는가?


답변: 성경은 낙태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낙태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충분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수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태에 짓기 전부터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39장 13-16절은 우리를 지으시고 태에서 만드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할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21장 22-25절은 태내에 있는 아기의 죽음을 초래한 자는 살인한 자와 똑 같은 처벌,곧, 죽음을 판결할 지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태내에 있는 아기를 다 성장한 사람처럼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창 1:26-27; 9:6)

기독교인의 낙태에 대한 입장에 대해 항상 제기되는 첫 번째 반박은,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경우는 어떻게 하는가?” 입니다.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결과로서 임신한 것이 끔찍하기 때문에 그 해결로서 아기를 죽이는 것이 답이 되겠습니까? 죄를 덮기 위한 죄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강간 및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는 아이를 임신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가정에 입양될 수도 있고, 또는 아이의 어머니에 의해 양육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면, 아기는 전혀 죄가 없으며 아이 아버지의 악한 행위 때문에 처벌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낙태에 대한 기독교인 입장에 반대하는 두 번째 반박은 “임산부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것은 낙태에 대한 문제를 답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첫째, 이런 상황은 오늘날 세계에서 행해지는 낙태의 10%보다 적은 경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낙태를 하기보다는 편의상 낙태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상황에 반하는 모든 의료적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어머니와 아이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으십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오직 남편, 아내,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서 결정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어려운 상황을 접한 어느 부부라도 주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 지혜를 구하는(약 1:5)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 수행되는 낙태의 95% 이상이 단지 아기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강간, 근친상간, 또는 임산부 건강의 위험하기 때문에 낙태를 하는 경우는 5% 미만입니다. 이러한 5%의 경우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태가 결코 첫 번째 선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태내에 있는 아기가 태어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합니다.

낙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낙태가 다른 죄보다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요 3:16; 롬 8:1; 골 1:14). 낙태를 하였던 여성이나, 낙태를 권장했던 남자나, 심지어 낙태를 시술했던 의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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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사형제도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어떤 죄를 저질렀을 때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는가?


답변: 구약의 율법은 살인(출 21:12), 유괴(출 21:16), 수간(출 22:19), 간음(레 20:10), 동성애(레 20:13), 거짓 예언자(신 13:5), 매춘과 강간(신 22:24) 등 여러 범죄들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받아 마땅할 때에도 자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삼하 11:1-5, 14-17; 12:13). 궁극적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롬 6:23).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롬 5:8).

바리새인들이 간음을 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그 여인을 돌로 쳐야 하냐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거 답변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형을 거부하신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속여서 구약의 율법을 어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는 여인에 대해서는 진정한 관심이 없었습니다(간음하다 걸린 남자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사형을 제도화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예수께서는 몇몇 경우에 대해서는 사형을 지지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사형이 합당한 때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요 8:1-11). 사도 바울은 적절한 상황에 사형을 도입하는 정부의 권력을 분명히 인정하였습니다(롬 13:1-7).

그리스도인은 사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사형제도를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 높은 표준을 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제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를 향해서든 가장 높은 표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완전하십니다. 이 표준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또한 무한한 진노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진노가 완벽한 균형 속에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사형이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권위를 정부에 주셨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창 9:6; 롬 13:1-7).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형을 반대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형이 집행될 때 결코 기뻐하지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을 처형하는 정부의 권위에 맞서 싸워서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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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우울증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우울증을 겪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답변: 우울증은 기독교인들이든 비기독교인들이든 상관없이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끼치는 널리 퍼진 질환입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극심한 슬픈 감정, 분노, 절망, 피로 등, 그 밖의 다른 다양한 증상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즐겼던 것들과 사람들에 관한 흥미를 잃으면서 자신들이 쓸모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또한 심지어 자살 충동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흔히 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혼, 또는 학대나 열등감 같은 심리적 문제와 같은 삶의 상황에 의해 촉발됩니다.

성경은 기쁨과 찬양으로 충만하라고 말하는데(빌 4:4; 롬 15:11), 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삶을 살기를 의도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상황으로 말미암은 우울증을 겪는 자에게는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 즉, 기도, 성경 공부와 적용, 지원하는 단체, 믿는 사람들간의 교제, 고백, 용서, 상담 등을 통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바깥쪽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우울한 감정은 종종 관심의 초점이 자신들로부터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에 맞추어질 때 치유 될 수 있습니다.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의사에 의해 진단을 받아야 하는 신체적 상태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삶의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완화될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내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항상 죄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우울증은 오직 약물 치료 및 상담으로 치료해야 하는 신체 장애에 의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떤 질병이나 장애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울증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은 부상 때문에 의사를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울증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럴 기분이 아닐 때 조차도 자신들이 말씀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감정은 우리를 방황하게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을 유지해야 하고 시험과 유혹을 겪을 때 일수록 더욱 더 굳건히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고전 10:13).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람은 여전히, 필요한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고통에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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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재정 관리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공적인 재정(돈)관리의 비결은 무엇인가?


답변: 재정 관리에 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에 관해 반대합니다. 잠언 6장 1-5절; 20장 16절; 22장 7절, 26-2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네게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성경은 반복해서 부의 축적을 경고하고 있으며 그 대신 우리가 영적인 풍요를 추구할 것을 권장합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28:20; 참조, 잠 10:15; 11:4; 18:11; 23:5).

잠언 6장 6-11절은 게으름 및 필연적으로 따를 재정적 파탄에 대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먹이를 저장하기 위해 일하는 근면한 개미를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또한 우리가 뭔가 유익한 것을 해야 할 때 게으르게 누워서 잠을 자는 자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태한 사람”은 일하기 보다는 차라리 쉬려고 하는 게으르고 태만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은 분명합니다. 빈궁과 곤핍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는 전도서 5장 10절에 의하면 만족할 수 있는 충분한 부를 절대 가질 수 없으며 끊임없이 더욱 더 움켜지려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6-11절은 또한 부를 갈망하는 덫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성경적인 모범은 부를 쌓기 위해 남은 것을 취하는 자가 되기보다는 주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고 격려합니다.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6장 1-13절에서 형편없는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11절). 우리는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권면처럼 우리 자신의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요약하면, 성경은 돈 관리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해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모아야 하지만 그것을 축척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돈을 써야 하지만 신중하고 절제 있게 써야 합니다. 우리는 즐겁고 희생적으로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돈을 써야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분별 있게 써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쓸데 없는 것에 돈을 낭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돈 관리에 있어서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는 현명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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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신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 치유의 역사가 있는가? 치유는 우리가 많은 믿음을 가져야만 가능한가?


답변: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53장 5절은 치유에 대한 핵심 구절이지만, 종종 오해되거나 잘못 적용이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나음을 받았다”는 말은 영적인 치유 및 육체적인 치유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과 베드로전서 2장의 문맥을 보면 이 치유는 영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이 구절은 죄와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아픔과 질병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들에서 “나음을 받았다”는 것은 용서받고 구원받았음을 말는 것이지, 육체적으로 치유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적인 치유와 영적인 치유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고는 않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믿음을 둘 때 육체적인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올바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치유하십니다. 아픔, 질병, 고통, 죽음은 오늘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을 것이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육체적인 문제(질병, 아픔, 부상)로 말미암아 죽을 것입니다. 우리를 육체적으로 치유하시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온전한 육체적인 치유는 천국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에는 더 이상 아픔, 질병, 병마, 고통, 죽음이 없을 것입니다(계 2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체적인 상태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롬 12:1-2). 그렇게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육체적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될 천국에 우리의 마음을 쏟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은 우리 모두가 갈망해야 하는 참된 치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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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성경은 전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전쟁을 정죄하는가 아니면 허용하는가? 어떤 상황에서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하는 것이 옳은가?


답변: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기 20장 13절, 즉,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읽고 오해한 후, 이 명령을 전쟁에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사전에 계획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살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치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 15:3; 수 4:13).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범죄에 대해 사형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1:12, 15; 22:19; 레 20: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살인 외에는, 모든 상황들에 있어서 죽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필요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때로는 악한 사람들이 결백한 사람들에게 큰 해를 입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민 31:2)고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20장 16-17절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사무엘상 15장 18절은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완벽하게 일치하십니다(요 10:30).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은 오로지 구약 성경에서만 허락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말 3:6; 약 1:17).

예수님의 재림은 극도로 과격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은 ‘공의’(11절)로 심판하시며 전쟁을 치르시는 승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전쟁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유혈이 낭자할 것이고(13절) 잔혹할 것입니다. 새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17-18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대적에게 동정을 갖지 않으시고,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여 “유황으로 불타는 못”에 처넣을 것입니다(20절).

하나님은 결코 전쟁을 옹호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십니다.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때로는 더욱 큰 악을 방지하기 위해 전쟁은 필요합니다. 만일 히틀러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폐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었다면, 얼마나 더 오래 동안 흑인들이 노예로서 고통을 받아야 했겠습니까?

전쟁은 끔찍한 일입니다. 어떤 전쟁들은 다른 전쟁들보다 더 ‘정당’하지만 전쟁은 항상 죄의 결과입니다(롬 3:10-18). 동시에 전도서 3장 8절은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죄와 미움과 포악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롬 3:10-18)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원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신 정부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 또한 삼가해야 합니다(롬 13:1-4; 벧전 2:17). 전생 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경건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 군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며, 분쟁의 빠른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양쪽 모두에 있어 시민들의 최소한의 인명 피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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