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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ejnneva
아홉||기수 엔네아(Homer 이래)는 '아홉'이며, 신약성경에서 눅 17:17에 한번 나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흔 아홉
ejnnenhkontaenneva
아흔 아홉.||기수 엔네네콘타엔네아는 '아흔 아홉'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잃은 양의 비유에서 길을 잃지 않은 양에 대해 사용되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 마 18:13; 병행구 눅 15:4).|눅 15:7에 의하면 이 아흔 아홉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말을 못하고
ejnneov"
말 못하는, 말할 수 없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엔네오스, 더욱 정확히는 에네오스이며, '소리없는, 말못하는, 벙어리의, 말할 수 없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에네오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9:7TR에만 나온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Nestle판에는 본 구절에서 에네오스로 표기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형용하다
ejnneuvw
끄덕이다, 몸짓으로 표현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엔뉴오(Aristoph., 등)는 엔($1722)과 뉴오($3506: 고개를 끄덕이다, 몸짓으로 신호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끄덕이다, 몸짓(신호)으로 표시하다(표현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엔뉴오는 3회 나오며, 히브리어 카라츠(7169: 좁게하다, 형용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눈'짓을 하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엔뉴오는 신약성경에서 눅 1:62에 한번 나온다: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친지들이 행한 것은 그를 향해서 끄덕거리고 몸짓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는 볼 수 없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C. H. Lenski).
엔노이아
e[nnoia
생각, 사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엔노이아(Eur. 이래)는 엔($1722: 안에, 위에, 에, ~말미암아, 에게)과 누스($3563: 마음, 이해, 이해력)에서 유래했다.|엔노이아는 본래 '사고 활동'을 의미했으나(Pseudo-Plato), 그 후 그 결과, 곧 '깨달음, 통찰력, 성격' 심지어 '신들의 성향'까지도 의미하고 있다(Xen., Cyr. 1. I, 1).|철학에서 엔노이아는 '관념' idea과 '개념' concept을 의미하고 있다(시간 개념 Plato, Timaeu 47a; 미에 대한 관념, Aristotle, Eth. Nic. 10, 10, p. 1179b, 15). 엔노이아는 개념적인 사고로서 이것 없이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Diogenes Laertius, 7, 42).|스토아 학파의 원리에 따르면 이러한 개념은 경험에서 비롯되며 사물의 본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에서 재생된 것이다.(예: Epictetus, Dissertationes 2. 17. 7).||#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엔노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서 엔노이나는 '의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의향(뜻)을 판단하는 것이다.||(b)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여기서 엔노이아는 '생각이나 사상'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Harder).
율법아래 있는
e[nnomo"
법 아래, 합법적인, 정식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엔노모스는 엔($1722: 안에, 위에, 에, ~말미암아)과 노모스($3551: 관례, 법, 율법)에서 유래했으며,||(a) '법 아래, 법에 묶인',|(b) '합법적인, 정규의, 정식의'(Pind., Aeschyl.)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엔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행 19:39에서 '합법적인, 정식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찌라".||(b) 고전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여기서 엔노모스는 '법 아래'를 의미한다.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성취되는 사랑의 계명은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다(참조: 갈 6: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H. Esser).
미명에
e[nnuco"
밤에 night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엔뉘코스(Il. Pind., trag., then Aesop, Fab.)는 엔($1722: 안에, 에)과 뉙스($3571: 밤, 밤에)에서 유래했으며, '밤에' by nigh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엔뉘코스는 신약성경에서 막 1:35에 한번 나온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에노이케오
ejnoikevw
~에 거주하다 dwell 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노이케오(Eur., Hdt. 이래)는 기본 전치사 엔($1722: 안에, 위에)과 오이케오($3611: 거주하다, 살다)에서 유래했으며, '~에 거(주)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노이케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온다(롬 8:11; 고후 6:16; 골 3:16; 딤후 1:5; 딤후 1:1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헤노테스
eJnovth"
통일 unit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노테스는 헤이스($1520)에서 유래했으며, '일치, 연합'(Aristot., plut.), 즉 '만장일치, 동의, 합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헤노테스는 신약성경 에베소서에만 2회 나온다.|(a) 엡 4:13에서 '믿는 것에 하나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b) 엡 4:3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에 대해 언급한다.|(참조: J. H. Thayer).
엔오르키조
ejnorkivzw
언명하다, 간청하다, ~에게 맹세케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엔오르키조는 엔($1722: ~안에, ~위에, ~에)과 호르키조($3726: 맹세하다, 간원하다, 언명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에게 언명하다, 간원하다, 맹세 아래 두다, 맹세시키다, 진지하게 간청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엔오르키조는 신약성경에서 살전 5:27에 한번 '~에게 언명한다'를 나타낸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에노클레오
ejnoclevw
어지럽히다, 괴롭히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노클레오(Aristoph., Hippocr. 이래)는 엔($1722)과 오클레오($3791: 어지럽히다, 괴롭히다)에서 유래했으며, '소란이나 소동을 일으키다(선동하다), 어지럽히다, 괴롭히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노클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9회 나오며, 히브리어 할라(2470: 약하다, 아프다, 병들다; 창 48:1; 삼상 19;14; 삼상 30:13; 말 1:13)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병들다'란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노클레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6:18에서 '괴로움을 받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b) 히 12:15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믿음과 경건, 특성을 부패시키는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여기서 에노클레오는 공동체의 평온을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J. Moffatt).|(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들어가게 되는
e[noco"
죄가 있는, ~에 복종하는, ~할 책임있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에노코스는 에네코($1758)에서 유래했으며,||(a) '굳게(단단히) 잡은' held fast, '죄가 있는' quilty, '~에 복종하는, 종속된' subject to, '~할 책임있는, 면할 수 없는' liable to, '어떤 것이나 형벌을 받을 만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에노코스는 70인역본에서 17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담(1818: 피), 담 베노쉬(피가 머리로 돌아가는 것)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노코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피흘리는 죄를 범한 행동 때문에 사형(죽음) 선고를 받은 사람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창 26:11에서 사라를 범하는 자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을 나타내며, 출 22:2에서 강도에 대해 피흘린 죄 있는 것을 나타내며, 레 20:9-27에서 남색, 근친상간, 동성애, 점 등의 경우에,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 35:27에서 피의 복수에 대해, 신 19:10에서 '살인죄'에 대해, 수 2:19에서, 정탐군들이 라합 앞에서 취한 피의 서약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사야 54:17에서 에노코스는 이스라엘과 법적인 쟁론을 함으로써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에노코스는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온다.||(a) 히 2:15에서 에노코스는 종살이(종이 신세)로 '잡혀 있는' 것을 나타낸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구절은 에노코스가 법적 의미를 함축하지도 않고 비유적 의미도 지니지 않고 나타나는 유일한 곳이며, 문맥상 분명히 부정적 의미로 종살이에 '잡혀 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 종살이는 사망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 사망의 주인은 마귀인데, 예수님께서 이 사망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셨고 사망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탄과 사망의 세력이 종국적으로 패패했으며, 인류가 구속되었다.||(b) 에노코스는 막 14:64(병행구 마 26:26)에서 법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여기 최고 법정의 신문에서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기소된다(이에 어울리는 옷을 찢는 제스츄어). 레 24:10-16; 민 15:30 이하에 따르면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처해진다. 법정의 위원들은 예수님이 마땅히 죽을만하다는 법적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만, 산헤드린의 결정은 유죄의 결정으로만 받아들여야지 집행의 선고로 이해해서는 안된다(참조: 민 15:1). 형사 소송 절차에서 형을 선고하는 권한이 유대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집행의 선고는 빌라도에게 달려 있었다. 이야기가 마가의 기사 세계에서 마태가 묘사하는 세계로 이동할 때 마가의 본문과 비교하여 마태의 본문에서 더 강한 양식화(stylization)가 나타난다. 마가는 아마도 역사적 근거에 기초한 기사적 보고를 제공한다.||(c) 에노코스에 여격이 뒤따르는 경우는 마 5:21 이하에만 나타난다.|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여기서 여격은 적절한 심판 법정을 가리킨다. 확실히 믿을만한 이 대조법에서(마 5:21a; 마 5:22a) 예수님은 철저하게 무제한적인 이웃 사랑의 윤리를 제시한다.|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무자비한 행동에 대한 최후 심판정이 된다.|크리시스는 지방 법정을 의미하며, 그 과정은 지방 법정(크리시스)에서 최고 법정(쉬네드리온)에 이르고, 그 다음에 지옥(게헨나)에 이르며, 여격으로 언급된다. 범죄의 정도가 약한지 큰지는 법정의 성격과, 그에 수반되는 형벌의 가혹성에 반영되어 있다(참조: A. Schlatter; D. Hill).|범죄에 대한 이 진술에서 일관성 없는 클라이막스와 법정 소송 절차는, "미련한 놈"(fool)을 불신앙자들을 경멸하여 지칭하는 말로 이해할 때 분명해진다(참조: 시 14:1; 시 94:8 등). 요지는 인간 관계를 해치는 자는 인간의 심판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지럽히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d) 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여기서 떡과 포도주를 합당치 않게 취하는 자는 그 안에 임재해 있는 주님의 살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말씀으로 끝난다. 주님은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셨다; 반대적인 행동 곧 자기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는 행위(참조: 마 5:21 이하)는 결국 죄가 된다. 여기에서도 에노코스란 말은 생사 문제에 대해 사용된다.||(e) 막 3:29에서도 에노코스는 형벌을 뜻하는 속격과 함께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이 논박할 여지가 없는 예수님의 말씀은 막 14:64을 배경으로 할 때 올바른 관점에서 이해된다. (인간에 대한) 모든 잘못과 심지어 (하나님을 거스르는) 모독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다. 오직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사함받을 수 없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려 하는 구체적 형태의 준비로 주어지는 것이다)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파멸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모든 메시지의 으뜸인 예수님의 선포와 일치한다. 심판은 확실히 무시되지 않고 내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결정의 자유는 문제가 되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이다.||(f)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본문은 내용상 5:17-마 5:19과 부합한다. 고전 11:27에서 이 단어의 법적 용법은 신학적, 상징적 개념의 수준에 이른다. 여기서 율법 위반자에 대해 에노코스를 사용한다. 비록 모든 개개의 죄가 대수롭게 않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죄들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전적으로 유죄케하므로 '심판'(judgment)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참조:R. Kratz; F. Thiele; Walter Bauer; J. H. Thayer).
계명
e[ntalma
계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엔탈마는 엔텔로($1781: 명령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계명', 즉 '종교적 계율'을 의미한다. 일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엔탈마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히브리어 미츠와(4687: 명령, 법령)의 역어로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욥 23:12; 사 29:1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엔탈마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인간의 '계명'에 대해 사용되었다.||(a) 마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병행구 막 7:7).||(b) 골 2: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장례
ejntafiavzw
장례를 준비하다 prepare for buria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엔타피아조(Anth. 이래)는 '장례를 준비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비교적으로 드물게 쓰이며, 특히 토장하거나 시체를 방부보존할 경우에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엔타피아조는 70인역본에서 차 50:2에 2회 나오며, 히브리어 하나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히브리어는 '(향을 넣어) 방부 보존하다'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엔타피아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및 70인 용법이 암시하는 의미를 가진다.|요 19:40에서 엔타피아조는 '장례를 준비한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니고데모는 장사를 위하여 상당한 양의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다. 이는 분명 일반적 관습과 일치하는 행동이다(참조: 요 11:44). 그러나, 그가 많은 양의 순수한 향료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값진 헌신 행위를 입증하는 것이다.|마 26:12에서 엔타피아조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 여기서 예수님은 그녀의 선물을 자신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니고데모와 이 여자의 행동은 유사하다.|공관복음이든 요한복음이든 복음서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즉, 이 행위들은 의의가 깊은 것이므로 복음서에 그 기사를 포함시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의 깊은 그 몰약의 선사를, 아기 예수께서 받은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참조: 마 2:11). 즉, 그것은 일찍이 예수의 장례의 상징이자 부활의 예기(expectation)를 시사해 준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애굽 사람들처럼 향료로써 시체를 방부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시체에 몰약과 향기 높은 향료를 넣는 것은 시체의 보존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유대인의 사고에 있어서 이것은 부활의 필수 요건이었다. 예컨대 마리아와 니고데모는 그들이 이해하였던 것 이상의 의의깊은 행위를 수행하였던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C. J. Hemer).
엔타피아스모스
ejntafiasmov"
매장 준비 laying out for buria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엔타피아스모스는 '매장(장례) 준비'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비교적으로 드물게 쓰이며, 특히 토장(inhumation)하거나 시체를 방부 보존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엔타피아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고전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요 12:7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선물을 자신의 장례 준비 문제에 적용시켰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하라".|막 14:8에서 마찬가지이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선물을 자신의 장례 준비의 날에 방부처리할 일을 미리한 것으로 말씀하셨다. 공관복음이든 요한복음이든 복음서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즉, 이 행위들은 의의가 깊은 것이므로 복음서에 그 기사를 포함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의 깊은 그 몰약의 선사를, 아기 예수께서 받은 그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참조: 마 2:11). 즉, 그것은 일찍이 예수의 장례의 상징이자 부활의 예기(expectation )를 시사해 준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애굽 사람들처럼 향료로써 시체를 방부처리하지는 않았으나, 시체에 몰약과 향기 높은 향료를 넣는 것은 시체의 보존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유대인의 사고에 있어서 이것은 부활의 필수 요건이었다. 예컨대 마리아와 니고데모는 그들이 이해하였던 것 이상의 의의깊은 행위를 수행하였던 것이다.|(참조: J.H.Thayer; C.J.He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