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44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그대로
e[ti
아직, 여전히.||부사 에티는 '아직, 아직까지, 여전히'를 의미하며,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그리고 정도와 증가에 대해, 비교급과 함께 '한층 더, 더욱, ~도 또한, 게다가 또한'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부사는 93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예비 되다
eJtoimavzw
준비하다, 준비를 갖추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헤토이마조(Homer 이래)는 헤토이모스($2092: 준비된)에서 유래했으며, '준비하다, 준비를 갖추다, 예비하고 있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헤토이마조는 70인역본에서 약 170여회 나오며, 히브리어 쿤(예비하다, 세우다), 아사(6213: 행하다, 만들다, 준비하다), 아라크(6186: 배열하다, 정돈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준비하거나 예비하다'(창 43:16; 수 1:11; 대상 12:40; 사 14:21; 잠 21:31; 에 7:9; 시 78:19), '세우다'(왕상 2:24; 에 5:14), '베풀다'(에 6:14; 시 23:5), '갖추다'(잠 9:2 등), '만들다'(시 119:73)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헤토이마조는 신약성경에서 4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14:15와 눅 9:52에서 헤토이마조는 여격 목적어를 가지며 어떤 사람을 위해 식사나 숙소를 준비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눅 12:47; 눅 22:9; 눅 22:12에서 단독으로 사용된다.|유월절 음식을 예비하는 것에 대한 대화의 시작은 공관복음마다 문장 구조가 다르다. 막 14:12에서는 목적어 없이 나오고, 마 26:17에서는 부정사가 뒤따르는 여격 목적어를 가진다. 두 경우 모두 이 단어는 제자들의 질문에 나온다. 눅 22:8에서는 대격, 여격 목적어를 가진다. 여기에서 동사는 대화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나타난다.|계 8:6과 9:15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예비된 천사들이 나온다(참조: 계 9:7; 딤후 2:21).||(b) 헤토이마조로 나타내어지는 행동은 신약성경에서 좀처럼 특별한 도덕적 자세를 포함하지 않는다. 헤토이마조의 목적어가 사람이 되는 것은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 동사의 목적어는 무생물이며, 그 동사는 보통 변화시킨다는 의미의 준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생산품을 준비하는 것, 즉 '예비하는 것' 보다는 '만드는 것'을 나타낸다.|① 그러므로 물질적인 영역에서 헤토이마조는 그 밖에 전쟁을 위하여 말들을 의장하는 것(계9:7), 새 예루살렘에 설비를 갖추는 것(치장하는 것)(계 21:2), 식사를 준비하는 것(막 14:12, 15, 16 병행구절; 마 22:4; 눅 12:47; 17:8), 향유를 예비하는 것(눅 23:56; 눅 24:1), 길을 예비하는 것(계 16:12), 숙소를 예비하는 것(몬 1:22; 눅 9:52), 한 성을 건설하는 것(히 11:16), 처소(요 14:2; 요 14:3)와 안전한 장소(계 12:6)를 예비하는 것, 불타는 지옥과 천국을 건설하는 것(마 25:34; 마 25:41), 예수님 안에서의 구원을 예비하는 것(눅 2:31)과 하나님 안에 숨겨둔 복(고전 2:9)과 마침내는 예수님의 왕국에 앉는 지위를 결정하는 것(막 10:40 병행구절;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종교적인 수동성은 마태복음과 이후의 마가복음의 필사본에 의해 설명된다)을 표현한다.|롬 9:23과 엡 2:10에서는 영광 또는 선한 일을 위하여 미리 예비하심에 대한 지식을 표현한다.|막 15:1에는 헤토이마조가 해결책을 세우는 것을 나타낸다.|② 헤토이마조가 사람에 대해 사용된 곳은 다음과 같다: 군인들이 쓸모가 있도록 준비되어 임무를 보고해야 한다(행 23:23); 신부가 자신을 예비한다(계 19: 7); 천사가 예비하고 있다(계 9:15, 참조: 계 8:6).|③ 딤후 2:21에서 헤토이마조는 도덕적,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는데(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 그 중요성은 특히 메시아적 임무가 묘사된 눅 1:17에 나타난다: 회개하게 하는 직무를 통하여(참조: 눅 1:16) "세운(prepared)"(BAGD) 백성을 예비한다(making ready). 모든 공관복음서에 인용된 사 40:3은 이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인용된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참조: 눅 1:76)은 단지 이스라엘의 회개를 의미한다.|(참조: W. radl).
예비한 것
eJtoimasiva
준비된 상태, 예비, 준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토이마시아는 헤토이마조($2090: 준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준비된 상태, 준비, 예비'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헤토이마시아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쿤(3559: 확고하다, 세우다, 예비하다, 정렬시키다)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시 10:17; 나 2:4; 시 65:9; 시 89:14).||#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헤토이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엡 6:15에 한번 나온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여기서 복음을 증거할 준비를 가리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갖춘
eJtoimo"
준비하고 있는, 준비되어 있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헤토이모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a) 능동태의 경우 '준비하고 있는',|(b) 수동태의 경우 '준비되어 있는, 준비가 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헤토이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견고하게 세워지다, 설비하다, 세우다, 만들다, 준비하다'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헤토이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베드로는 소아시아에서 시험을 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할 수 있었다(벧전 1:5).||(b)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는,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셨다"는 가르침과 상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르침의 기초를 형성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벧전 4:5; 참조: 마 25:34; 마 25:41).||(c)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하는 초청장(눅 14:17; 참조: 마 22:4; 마 22:8; 요 7:6,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이 발부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부적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d) 주님은 결혼식에 오는 신랑같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도록 권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마 24:44; 병행구 눅 12:40; 참조: 계 19:7; 계 21:2). 신랑이 도착했을 때 준비가 되어 있는 처녀들만이 잔치에 들어갈 것이다(마 25:10). 주인의 뜻을 익히 알면서도 준비를 하지 못한 종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참조: 눅 12:47).||(e)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가 "모든 선한 일"을 예비하고(딛 3:1),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벧전 3:15),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고후 10:6) 예비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S. Solle; W. Grundmann).
각오하여
eJtoivmw"
기꺼이, 쉽사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헤토이모스(Thuc. 이래)는 헤토이모스($2092: 준비된)에서 유래했으며, '즉시, 쉽사리, 기꺼이'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헤토이모스는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티드(6263: 준비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단 3:15).||#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헤토이모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기꺼이, 쉽사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a)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투옥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한다.||(b) 고후 12:14, "보라 이제 세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대면하기가 매우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c)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to"
년, 일년||명사 에토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년, 일년'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에토스는 48회 사용되었다.
잘 되리라
eu\
잘, 좋게 wel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유(Homer 이래)는||(a) '잘, 좋게' well(X., Cyr.; Demosth.),|(b) '좋게(선을) 행하다, 친절을 보이다'(X., Cyr.; Demosth.),|(c) '잘되다, 번영하다, 형통하다'(Pind., X., Mem.),|(d) '잘 행하다', 즉 '올바로 행동하다',|(e) 단독으로 '잘하였도다'(ps-X., Cyneg.) 등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유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은혜를 베풀다'(출 1:20), '선행하다'(집회서 12:2, 5), '잘되거나 번영하다'(창 12:13; 출 20:12; 신 4:40; 신 5:16)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유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유는 '잘하였도다, 훌륭하도다'를 의미한다.|마 25:21(마 25:23; 눅 19:17)에서 충성된 종에 대한 칭찬의 말로 사용되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b) 유는 포이에오($4160: 행하다)와 함께 '잘(선을) 행하다'를 의미한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막 14:7).||(c) 유는 '잘 행하다', 즉 올바로 행하다'를 의미한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행 15:29).||(d) 유는 '잘되다, 번영(형통)하다'를 의미한다: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이와
Eu\a
하와 Eve.||#1.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휴아는 히브리어 하우와의 음역이다. 70인역본은 이 하우와(하야: 살다, 생명을 가지다의 칼 완료 3인 단수)를 조에(생명)라고 번역한다.|하와라는 이름, 곧 하우와는 그녀가 "모든 산 자의 어미"(엠 콜 하이)였다는 사실에서 유래되고 있다. 미드라쉬 해석은 그 이름을 뱀을 뜻하는 아람어 히와와 연관시켰는데, 그러한 견해는 최근 다시 부활되었다.|쾰러와 바움가르트너(Koehler-Baumgartner; 280f.)는 아담의 아내에게 주어진 이름의 어원에 대해 아홉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첫번째 창세기 기사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다(창 1:27).|두번째 기사에서(창 2:18-창 2:25)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해 남자로부터 만들어졌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감언에 빠져들어 금지된 열매를 남편에게 주기 전에 먹은 것은 여자였다. 하와라는 이름은 타락 이후에만 언급되고 있다.|그녀는 가인(창 4:1)과 아벨의 어머니로 언급되어 있지만,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신구약 중간기의 문헌에서 그녀는 토빗서(Tob.8:6); 시빌 신탁(Sib.1:29); 필로의 저술(Philo.All,2, 81); 요세푸스 저술(Josephus, Ant, quities, 1, 49) 등에 언급되어 있다.||#2. 신약성경의 용법||휴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바울서신에만 나온다.||(a) 딤전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이 구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바울의 논증을(딤전 2:12) 지지하는 창세기 2장 이하를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기사는 아담이 먼저 지어졌고, 여자가 속임수에 빠졌다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그 이야기가 일상 생활과 교회의 생활에서의 성(性)의 역할에 대해 상징적인 것이다.||(b)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여기서는 뱀이 하와를 속인 것을 기독교 신자들이 타락할지도 모르는 한 예로 삼고 있다. 하와를 마리아의 표상으로 본 것은 성경에 관한 후기 문헌에서였다.|(참조: Walter Bauer, C.Brown).
기쁨소식을 전하다
eujaggelivzw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유앙겔리조/ 중간테 유앙겔리조마이는 유앙겔로스(%770: 사자)에서 파생되었으며, '사자로서 말하다, 사자와 같이 행동하다'를 의미한다.|이 동사는 주로 중간태로 사용되지만 능동태, 수동태로도 사용되었다. 인격의 여격이나 대격과 함께 사용되며, 메시지의 내용은 페리($4012)에 의해 소개되며, 때때로 전치사가 메시지의 수령자를 나타내기 위해 함께 사용되었다.||이 동사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데 사용되었다. 사자는 소식, 특히 승리나 어떤 다른 기쁜 사건의 소식을 배로, 말을 타고 혹은 빨리 달려서 가져오는 자이다.||이 단어는 구원과 같은 단어들과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며, 또한 운명이나 행운의 개념을 지니는 단어들과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사자는 신탁을 가지고 올 수도 있는데 이로 인해 이 단어는 '약속하다, 위협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이 동사는 또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는 '신령한 사람'의 출현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었다.||한편 이 동사는 종종 의미가 약화되어 앙겔로(알리다, 전하다)와 동의어가 되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 동사는||(a) '사자로서 말하다, 사자와 같이 행동하다',|(b)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c)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d) '약속하다, 위협하다',|(e) '알리다, 선포하다, 전하다'라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a) 유앙겔리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20회 나오며, 오직 히브리어 바사르(1319: 좋은 소식을 전하다, 기쁜 소식을 전하다, 소식을 받고 기뻐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유앙겔리조는 70인역본에서 아름다운 또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예: 왕상 1:42; 렘 20:15). 시 40:10; 시 68:12; 시 96:2 이하; 사 52:7에서 여호와의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승리와 왕적 통치를 전함에 사용되는 술어이다. 여호와의 즉위(즉위에 대한 시편들, 특히 시 96편을 참조)와 시온으로의 복귀(이사야서)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실명사적 분사로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전달자는 세계사의 이 신기원을 선포하고 그의 강력한 말로써 이 신기원을 개막시킨다. 평화와 구원이 이제 도래하고 여호와께서는 왕이 되셨으며(사 52:7; 사 40:9), 여호와의 통치는 전세계로 넓어졌다(시 96:2 이하). 이 "복음은 유력한 연설이요, 강한 말이요, 스스로 달성되는 언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달자들의 입에서 스스로 말씀하신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신다"(참조: 시 33:6).(G. Gloege). 선포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이 신기원의 여명이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들의 전달자의 특별한 의미를 이해하기는 용이하다. 현장에 그가 도착하여 자신의 전달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구원과 구속과 화평은 현실이 된다(사 61:1; 이곳에서 전달문과 임무 사이의 관계가 특히 두드러진다).||(b) 필로의 유앙겔리조(마이)의 개념은 헬라의 개념과 같다. 그는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아먼드 나무가 좋은 수확을 알리는 것 같이 시적으로 사용한다. 출 14:30에 대한 우의적 해석에서 이 동사를 '약속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요세푸스도 필로와 마찬가지로 이 동사를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에 대해 사용하며, 그의 저서 고대사(Ant. 5, 24. 277)에서 '약속하다'는 의미로도 사용했다. 그러나 필로나 요세푸스에게서는 이 동사의 구원사적 의미나 종말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이 동사에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바와 같은 기쁜 소식의 전달자라는 개념을 사용치 않는다.||(c) 랍비 유대교(주의)는 유앙겔리조마이를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지만, 때때로 '나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로도 사용했으며, 미래적 언급과 함께 '약속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했다.|그러나 메시야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이사야 40장 이하의 사자에 대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는 다양하게 기대되었다. 곧 알려지지 않는 인물로, 또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또는 메시야 자신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통치의 위대한 시대에 대한 기대는 생생한 것이며, 비록 그 메시지가 먼저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산 자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또한 온 세상의 주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유앙겔리조는 신약성경에서 53회 나오며, 마태복음에 한번, 누가복음에 10회, 사도행전에 15회, 바울 서신에 21회, 히브리서에 2회, 베드로전서에 3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2회 나타난다. 이 동사는 마가복음, 요한복음, 에베소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또는 유다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동사도 실명사도 요한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특히 인상적이다. 그럴 만한 어떤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다. 유앙겔리조(마이)가 생략된 것은 전체 요한복음의 특성과 조화되는 것 같다. 구원의 때에 대한 극적이고 역동적인 선포가 유앙겔리제스타이(현재 부정사 중간)로 일어날 때 그것은 실현된 복음의 종말론에 알맞지 않다. 유앙겔리조(마이) 안에 메시야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요한의 복음은 성취의 평온을 반영한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세례(침례) 요한에 대한 논쟁을 언급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유앙겔리제스타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타당해지는 것 같다.||(a) 예수|예수님은 기대되는 마지막 때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다. 세례(침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서 그는 마 11:5(= 눅 7:22)에 대답하신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 전체 문장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는 말에서 그 문장의 절정을 이룬다. 그 메시지는 새 시대를 실현하며, 메시야 시대의 성취의 표징을 가능하게 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법칙을 작용시킨다. 이것은 더 이상 어떤 사본(MSS)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세례(침례) 요한에게 주신 대답은 이제 때를 갈망하던 시대가 동트고 있으며 종말의 좋은 소식이 신명기의 날로부터 기대된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말씀이 이제 선포되고 있으며 그 말씀은 능력이 있고 말해진 것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말씀과 기적, 기쁜 소식과 죽은 자의 부활은 메시야 시대의 징조이다. 유앙겔리제스타이는 또한 눅 4:18; 눅 4:43과 눅 16:16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발견된다. 눅 4:18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의 그의 설교에서 사 61:1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이 전파된다(눅 16:16). 눅 8:1은 예수님을 천국의 고지자요 사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수님의 전 사역을 요약한 것이다.|엡 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예수님의 땅으로 오심, 그의 생애와 죽음은 위대한 평화의 메시지, 위대한 평화의 선포이다. 그의 현시는 단지 그의 설교뿐만 아니라 그의 전 사역이 유앙겔리제스타이라는 말로 묘사된다. 문맥은 이것을 보여준다. 엡 2:16에서 언급한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엡 2:14에서는 그는 화평이시며 그의 현시는 화평의 선포이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이루신다.|그는 죽은 자에게까지도 그 좋은 소식을 전한다(벧전 3:6; 참조: 벧전 3:19).||(b) 세례(침례) 요한.|이 단어는 눅 3:18에서 세례(침례) 요한의 활동에 대해서 쓰인다: "또 기타 여러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엘리야인 그(눅 1:17; 마 11:14; 마 17:12)는 복음 전도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박하였음을 선포한다. 그는 메시야를 알리는 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 눅 16:16에 그는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경계이시다. 마 11:9에 따르면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이지만 여전히 율법과 선지자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처럼 천사에 의해 전해진다(눅 1:19). 이것은 메시야적 구원의 암시이다. 눅 1:15-17; 눅 1:68-79에 따르면 그는 메시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그 길을 예비한다. 그는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이며 그 결과 갈망하던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오는 자이다. 그의 메시지는 그래서 좋은 소식이다.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그는 복음 전도자이다. 그의 이야기는 복음의 시작이다(마 1:1; 행 10:36 이하).||(c) 증인의 무리들, 제자들, 사도들, 복음 전도자들.|롬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사 52:7은 메시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사자들에 관한 것이다. 행 10:36과 엡 2:17 모두 사 52:7을 단수로 인용한다. 바울은 신명기, 이사야에서 성벽을 지키는 자, 여호와의 오심의 목격자가 복음 전도자가 된다는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미 예수님의 일생 동안 열 두 제자들이 그 땅을 두루 행하여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었으며(눅 9:1-6),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예수님 자신처럼 이적을 행한다. 사도들의 전도 활동은 오순절 이후에 시작된다.|행 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예루살렘에서의 박해의 결과로 복음은 보다 더 멀리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은 말씀을 전한다(행 8:12; 행 8:35; 행 8:40).|그 메시지는 먼저 유대인에게 전파되고 다음으로 헬라인에게도 전파된다(행 11:20).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도자가 된다(행 14:7; 행 14:15; 행 14:21; 행 16:10; 행 17:18; 롬 15:20; 고전 15:1; 고전 15:2; 고후 10:16; 고후 11:7; 갈 1:8; 갈 1:11; 갈 4:13).|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심을 받는다(갈 1:16). 이것은 그의 "은혜"이다(엡 3:8). 그는 사도로서의 그의 전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유앙겔리제스타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전 1:17). 선지자처럼(렘 1장; 렘 20:9; 암 3:8; 겔 3:17 이하) 그는 하나님의 강제 아래 있어서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이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유앙겔리조마이는 전도의 조건이다.|행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그러나 그 메시지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진다(롬 1:15, 참조: 롬 11장; 고전 9:12-18; 갈 4:13; 딤후 4:5). 같은 복음이 전도와 회중적인 설교로 선포된다. 바울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동일한 메시지가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교도에게도 퍼져 나간다(롬 1:15; 행 14:15).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 메시지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갈 1:16), 그의 수난과 부활(벧전 1:11 이하; 행 17:18), 천국(행 8:12), 그리스도를 증거해주는 구약성경(행 8:35), 말씀(행 15:35), 그리고 믿음(갈 1:23)이다. 병행되는 말로는 설교하는 것, 가르치는 것,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 있다. 유앙겔리제스다이는 단순히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표징을 수반하는 능력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처럼(벧전 1:12) 병고침(마 4:23), 기쁨(행 8:8), 구원(고전 15:1-2), 그리고 중생(벧전 1:23 이하)을 가져온다. 유앙겔리제스다이는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면서, 그와 아울러 구원의 제공과 구원의 능력을 지닌다. 두 가지 특별한 용법을 주목해보자. 살전 3:6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은 디모데가 가져온 기쁜 소식의 주제이며, 히 4:2; 히 4:6에서 구약성경의 선포는 약속이라는 그것의 요소에 포함된다.||(d) 하나님|신약성경의 절수들에서 하나님은 좋은 소식을 선포하시는 분이시다. 행 10:36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가 선포되도록 하신다. 평화를 선포하는 말씀은 두루 전파된 말씀(레마)이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생애,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판톤퀴리오스("만유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먼저는 유대인들에게 다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화평과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계 10:7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의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그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셨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정복한 후에 메시아의, 주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때문에 좋은 소식이다.||(e) 천사들.|가브리엘은 사가랴에게(눅 1:19) 세례(침례) 요한의 탄생을 선포한다. 한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눅 2:10). 두 경우 모두 그 메시지는 복음이다. 왜냐하면 갈망하던 마지막 때, 메시아적 구원의 도래가 선포되기 때문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Friendrich).
복음
eujaggevlion
기쁜 소식 good news, 복음 gospe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유앙겔리온은 유앙겔로스(%908)에서 유래했다. 유앙겔로스는 사자를 뜻하며, 승리의 소식이나 기쁨을 일으키는 정치적 또는 개인적 소식을 가져오는 자이다. 헬라 시대에 이 단어는 신탁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앙겔리온은 형용사와 명사로 사용되며, 다음 의미를 지닌다.||(a) 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을 의미하며, 또한 '기쁜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승리의 소식'이나 전달문을 나타내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전달문은 주로 승리의 전달문이지만 기쁨을 가져오는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전달문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이러한 전달문들은 신들의 선물로 간주된다. 전달문을 받았을 때, 감사함으로 또한 신들로 하여금 그 선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신들께 희생제를 드린다.|이러한 희생제의 배후에는 정령(精靈) 신앙자 자신의 종교적 제의의 불신이 존재한다. 이 전달문에 대하여 신들게 빨리 감사를 드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전달문이 말하는 행운을 잃을지도 모른다(J. Schniewind, Euangelion, 1931, 182).||(b) 유앙겔리온은 '신탁의 말'(미래의 어떤 사건에 대한 약속)을 의미하며, 이러한 유앙겔리온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c) 유앙겔리온은 황제 숭배에서 중요하다. 황제 숭배의 지역에서 신적 통치자의 탄생 소식, 통치 시대의 도래, 또는 즉위, 그리고 또한 그의 말들, 포고령, 행동들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세상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소망하여온 바의 성취를 가져오는 기쁜 소식들이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유앙겔리온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어 베소라(기별, 소식)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기별이나 소식'(삼하 4:10; 삼하 18:4; 삼하 18:25)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유앙겔리온은 신약성경에서 7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유앙겔리온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사용하셨다.|① 막 1:15; 막 8:35; 막 10:29; 막 13:10; 막 14:9; 막 16:15; 마 4:23; 마 9:35; 마 24:14; 마 26:13(막 1:1; 막 1:14)에서 예수님에게서 유래한다. 예수님께서 사 35장과 사 61장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의 말씀들이 자신의 말씀과 행동들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셨다는 것은 가능한 설명이다(참조: 마 11:5 이하=눅 7:22).|② 실제로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님께서 친히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단어가 예수님의 메시지의 본질적 요소를 적절히 표현한 말인가 하는 것이다.|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말씀과 행동에서 기쁜 소식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막 1:14)의 도래를 인식하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막 13:16).|이 기쁨의 메시지는 이미 그것을 전하는 전달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 곧 이 전달자는 예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참조 비교: 눅 11:20; 마 5:1 이하).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이 전달문을 전하는 자와 원작자로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 전달문의 주제, 곧 이 전달문이 말하는 주인공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님의 강림과 관련된 구원의 메시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유앙겔리온이라는 술어를 취한 것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b)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용어를 확립시켰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바울에 있어서 유앙겔리온은 그의 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이것은 익숙한 기쁜 소식을 의미하였으니,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에서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이다(롬 1:1 이하; 고전 15:1 이하). 이 사건이 이미 구약성경에서 약속되어 있는 한, 구약은 이 복음에 속한다(에팡겔리아). 약속은 유앙겔리온과 언어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며 또한 율법과 복음의 알력이 이 술어에 관련되어 바울의 기록들에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그러나 유앙겔리온은 바울에 의하여 사용된 바와 같이 전하여지는 내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선포의 행위, 과정, 그리고 실행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전도의 내용과 전도의 과정은 하나이다.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나열되는 때(고전 9:14; 고전 9:18)를 제외하고는 사고에 있어서 분리되지 않는다(롬 1:1). 왜냐하면 선포라는 바로 그 행동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실제가 되며 또한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순하게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구원의 역사이다(G. Friedrich, TDNT). 선포의 행위는 동사 유앙겔리조마이($2097)에 의해서만(참조: 고전 1:17) 나타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를 나타내는 명사로 사용되는 유앙겔리온에 의하여서도 나타내어진다. 따라서 고후 8:18에서 유앙겔리온은 복음 전도를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구절에 나오는 소유격(예: 롬 1:1; 롬 15:16; 고전 9:12; 고후 2:12)은 목적어와 주어로 취급되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께서는 모두 복음의 내용이요 창시자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뚜렷한 구별을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때때로 바울은 한면을, 또 어떤 때는 다른 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언제나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고후 11:7, 갈 1:11의 유앙겔리제스다이; 갈 2:2, 살전 2:9의 케뤼쎄인; 고전 9:14의 카탕겔레인; 살전 2:2의 랄레인), 이 복음은 능력으로 충만해진다. 복음은 믿음을 창조하고(롬 1:16 이하; 빌 1:27), 구원과 생명(롬 1:16), 또한 심판까지도 가져온다(롬 2:16).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참조: 롬 1:17), 소망의 성취를 가져오며(골 1:5; 골 1:23), 사람들의 생활에 개입하며 교회를 창조한다. 이 복음은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라(갈 1:11)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사자(使者),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후 10-13장; 갈 2:7 이하, 이곳에서 전달문의 선포라는 뜻의 유앙겔리온은 분명히 아포스톨레의 목적과 내용으로 규정되고 있다. 곧 유대인과 또한 이방인을 향한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적 임무를 말하는 것이다). 전령과 성벽 위의 파숫군이 하나님의 강림을 선포한다고 하는 사 40:9; 사 52:7; 나 1:15와 똑같이 전달자는 복음을 선포한다(롬 10:15). 바울은 특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롬 1:1; 참조: 갈 1:16). 그러므로 "복음의 참예자"로서(고전 9:23) 그는 "자신의 복음"을 말할 수 있었다(롬 16:25; 고후 4:3). 이 말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전파되었고(갈 1:6-9; 고후 10:13-16) 이제는 유대 율법의 경계를 부수고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이 되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하나의 복음을 나타내었다(갈 1:16; 갈 2:7; 갈 2:8; 롬 1:15). 한편 바울의 반대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갈 1:6-10; 고후 11:4). 그들은 바울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도권과 복음의 전파는 함께 속한 것이므로 바울과 그의 사도권에 대한 모든 공격은 거꾸로 복음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강요되는 것처럼-(참조: 고전 9:16)-주님을 전하는 것이다(참조: 고후 10:18; 고후 4:5; 갈 1:10).||(c) 공관복음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앙겔리온은 교회에서 전파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사건에 대한 좋은 소식에 주어지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세하게 표현될 때에, 각각의 복음서 기자들은 다양한 강조들을 한다. 이것들은 그들 각자의 신학적 입장에 영향을 받는다.|① 마가복음 기자는 바울의 유앙겔리온 용법과 매우 유사하게 사용하는 입장을 취하며 막 1:1과 막 1:14를 제외하고는 항상 유앙겔리온을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그가 유앙겔리온을 편집적인 구절에서 사용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가 유앙겔리온을(아마 바울에게서 취하며) 공관복음서 형태로 도입한 사람이었다고 추론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복음의 내용이며 창시자로 본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예수님께서는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 곧 복음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서도 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막 8:35; 막 10:29). 이 복음의 내용은 개인적인 사건들을 수반한 예수님의 역사이다(참조: 막 14:5).|마가복음 기자는 이 사건들을 단순하게 역사적인 관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에 대한 기사를 사용한다. 복음은 영광스러운 신적 구속자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감추어진 영광을 소유한 고난받는 인자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향한 길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기자는 유앙겔리온을 자신이 기록한 책 전체에 대한 일종의 책명처럼 사용한다(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의미는 이 이야기들이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보고문이 아니라 교서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들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선포하며,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을 주시고 강건하게 하시는 좋은 소식인 것이다(막 1:15).|② 마가복음의 유앙겔리온의 이 용법과 대조되어 마태복음 기자는 "천국 복음"(마 4:23; 마 9:35), 또는 "이 복음"(마 26:13; 참조: 마 24:14)과 같이 수식함이 없이는 전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강조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면(前面)에서 이제 예수님에 대한 개념이 복음의 전달자요, 선포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가르침 가운데 주로 나타나게 된다(마 4:23; 마 9:35; 마 24:14; 그러나 마 26:13에서 "복음"은 수난 기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이 복음을 전하는 한, 예수님 자신도 복음의 내용이 되신다(참조: 특별히 마 24:14; 마 26:13).|③ 사도행전에서 유앙겔리온이란 술어는 행 15:7과 행 20:24에서만 발견된다. 아마도 이것은 누가복음 기자의 특별한 구상과 관계된 것일 것이다.|곧 예수님의 시대는 교회 시대와 구별되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의 전도와 사도의 전도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에 따른 그의 구상일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기자는 사도의 전도를 유앙겔리온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행 15:7; 행 20:24). 그러나 예수님의 전도는 유앙겔리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관계에 있어서의 교훈적인 것은 막 10:29의 유앙겔리온이 눅 18:29에서는 바실레이아로 대치되는 것이다.|유앙겔리온 또는 유앙겔리조마이를 사용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위에서 말한 바울의 개요를 따르고 있다. 이 단어들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이 능력의 복음의 특별한 국면들을 분명히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복음은 전도자요, 사도요, 교사인 바울에게 위탁되었다(딤후 1:11).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딤후 2:8)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는 일회적인 과거 사건으로 제한되지 않고 현재에 능력으로 충만된 말씀으로 경험되며 그러므로 또한 이 복음은 인간의 사슬에 얽매일 수 없다(딤후 2:9). 이 복음은 거듭남과 새 생명을 낳으며(벧전 1:23-25) 평화를 가져오며(엡 2:17; 엡 6:15) 가까이 있던 자와 멀리 있던 자들, 곧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함께 이끌며(엡 3:1-9), 구원을 주며(엡 1:13),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딤후 1:10).|(참조: U. Becker; G. Friedrich; Walter Bauer; J. H. Thayer).
복음 전하는 자
eujaggelisthv"
복음 전도자||#1. 헬라어 용법.||명사 유앙겔리스테스는 유앙겔리조($2097: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복음 전도자,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유앙겔리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복음 전도자'를 의미한다.||(a) 행 4:11에서 빌립에 대해 사용되었다.||(b) 딤후 4:5에서 디모데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c) 엡 4:11에서 한 무리의 복음 전도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복음 전도자들은 헬라인들의 경우처럼, 신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참조: 롬 10:15). 이 용어는 사도들도 행한 한 기능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복음 전도자들이 사도인 것은 아니며, 이 기능은 세 가지의 모든 언급 가운데 사도들의 기능보다 낮은 것이다. 이 용어는 선교적 선포 뿐만 아니라 회중적 선포도 나타낸다(참조: 딤후 4:5). 초대 교회에서 복음 전도자들은 사도들의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이 단어는 또한 복음서의 저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Friedrich).
기쁘시게 하다
eujarestevw
~에 즐거움을 가지다, 만족하다, 기쁨으로 행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유아레스테오(Diod. 등)는 유아레스토스($2101: 만족한, 기꺼운)에서 유래했으며,||(a) '기뻐하다',|(b) '~에 즐거움을 가지다, 만족하다',|(c) '기뻐하여 행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유아레스테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히브리어 할라크(1980: 가다, 오다, 걷다; 창 5:23, 24; 창 6:9; 창 48:5; 사 56:13 등), 샤라트(8334: 섬기다, 봉사하다; 창 39:4)의 역어로 사용했으며, 기쁨으로 섬기거나 행하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유아레스테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히브리서에만 사용되었다.||(a) 히 13:16에서 (b)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b) 히 11:5-히 11:6에서 (c) 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Foerster).
기뻐하는
eujavresto"
기꺼운, 마음에 드는 acceptable, 기쁘게 하는 pleasing.||#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유아레스토스는 유($2095: 잘 Well)와 아레스코($700: 기쁘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만족스러운, 마음에 드는, 기분 좋은, 기쁘게 하는'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유아레스토스는 70인역본에서 마카베오이서 14:9에만 한번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유아레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타난다. 유아레스토스는 딛 2:9에서 오직 한번 사람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종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유아레스토이(기쁘게하는 자들)가 되어야 하고, 주인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야 하며, 언제든지,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로서,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그분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고 권면 받는다(참조: 엡 6:6).|다른 곳에서 유아레스토스는 항상 인간 행위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단 한번 빌 4:18에서 유아레스토스는 회상적으로 사용되어 평가나 판단을 묘사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바울은 빌립보인들의 선물에 감사한다. 이 선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물이다.|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항상 기독교인 행위의 목적이다. 롬 12:1이하에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도록 권면 받는다.|롬 14:18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 칭찬을 받게 된다.|골 3:20에서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권면 받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고후 5:9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기독교인은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시험해 보아야 한다(엡 5:10).|그러므로 히 13:21에서 보여주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간구해야 한다.|(참조: H.Bietenhard; W.Foerster)
기쁘시게
eujarevstw"
기꺼이 받을만하게, ~을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유아레스토스(X. Mem., Epict.)는 유아레스토스($2101: 만족한, 기꺼운)에서 유래했으며, '기꺼이 받을만하게, ~를 기쁘게 하는 방법으로'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유아레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히 12:28에 한번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으불로
Eu[boulo"
으블로 Eubulus(인)||유불로스는 '좋은 조언의'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에서 '으불로'로 음역했다.|신약성경에서 으불로는 딤후 4:21에 한번 나온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으불로는 바울이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바울과 함께 했던 친구이며, 디모데에게 문안했던 사람이다. 그의 헬라어 이름은 아마도 그의 태생이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분명히 그는 로마 교회의 교인이었으며 그 외의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름은 파피루스와 비문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