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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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Elijah (인)||#1. 구약과 후기 유대교.||엘리아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엘리야후와 엘리야로 나타나며, 그 의미는 '여호와는 엘, 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를 의미한다.|엘리야에 대하여는 왕상 17:1에 "길르앗 디셉의, 디셉 사람"이라는 언급 외에 그의 배경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다.|엘리야의 예언 사역은 왕상 17-19장; 왕상 21장; 왕하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엘리야는 아합과 아하시야의 동시대에 살았다.||후기 유대교에서 엘리야 이상으로 영향을 미친 성서의 인물은 없다(참조: 왕상 17-18; 대하 21:12이하; 말 3:23-24; 집회서 48:1이하; 이디오피아 에녹서 89:52 등; 마카베오일서 2:58; 필로, 요세푸스, 랍비 문헌, 엘리야 묵시록). 엘리야가 이렇게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의 신비로운 승천(왕하 2:11)과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다(말 4:5-6). 엘리야의 기적들은 전설의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해주며, 그의 승천은 그가 초자연적인 도움을 준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묵시록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중개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의 서기관의 역할을 한다.||(a) 엘리야의 돌아옴.|① 말 4:5-6에 의하면, 엘리야는 우는 제사장직을 정화하고(말 3:2이하) 화평을 세움으로써(말 4:6) 하늘의 왕의 길을 예비하는(말 3:1) 메시야적 인물로 돌아올 것이다. 집회서에서 엘리야는 열 두 지파를 다시 세울 것이다(말 48:10). 랍비들에 따르면 엘리야는 군사적인 구원자로서 갇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한다.|② 후대의 문헌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이 아닌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참조: 많은 랍비 문헌과 Justin Dialogue). 다메섹 문서는 진리의 교사(진리 자체를 세우는 자를 뜻하는 단어)의 도래를 기대하며, 어떤 이는 이 진리의 교사는 엘리야와 동일시 된다. 이 문서는 또한 과거와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해 언급하며, 저기에서 예견된 진리의 교사가 엘리야가 아니라 메시야인 것 같다.|③ 또 다른 일반적인 견해는 엘리야가 마지막 때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참조: 슥 4:1이하). 아마도 이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말 3:1과 말 4:5-6의 말 2:4-5(언약의 천사와 레위와의 언약)과의 결합인 것 같다.|신약성경에서 세례(침례)요한은 제사장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계 11:3이하의 엘리야와 모세는 두 감람 나무(참조: 슥 4:3, 슥 4:11이하)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스가랴의 감람 나무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직과 왕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b) 돌아오는 엘리야의 임무. 엘리야의 도래는 구원의 시대를 알리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백성의 회복이다.|① 회개를 촉구하고 율법의 논쟁되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화평의 관계를 세우는 내적 회복.|② 피의 정화를 이루고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는 외적 회복.|③ 구원의 선포, 적그리스도와의 투쟁, 메시야를 소개함(그러나 나중의 두 가지 임무는 단지 오래된 랍비 문헌 이외의 문헌에서만 나타난다).||#2. 신약성경.||(a) 신약성경에서의 역사적 엘리야. 신약성경에서 약 29회 언급되는(모세 [73회]와 다윗[59회] 다음으로 많이 나옴) 엘리야는|① 삼년 반 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선언하고(눅 4:25; 약 5:17; 계 11:6; 참조: 왕상 17:1), 어떤 특별한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효과적인 기도를 하므로 그 기근을 시작하고 끝냈으므로 주목 받으며(약 5:16-17);|② 이방인을 향한 사역의 본보기로서 제시되며(눅 4:25-26);|③ 그가 받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에 대한 보증(롬 11:2이하, 참조: 왕상 19:5과 유사한 표현, 눅 22:43)과|④ 왕하 1:10, 왕하 1:12에서 그가 적대자들에게 임하게 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주목 받았는데 눅 9:54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 사건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는 그의 구원하시는 사역과 조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셨다.||(b) 신약성경에서의 엘리야에 대한 후기 유대교 개념.|① 필요의 때에 도우는 자로서의 엘리야에 대한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신앙으로서만 인식된다(막 15:35-36; 마 27:47, 마 27:49).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라고 부르짖을 때, 구경꾼들은, 그가 엘리야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움이 오지 않을 때 예수님의 메시야라는 주장은 잘못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는 친히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인은 필요의 때에 그의 도움을 구한다.|②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는 복음서의 모든 곳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막 9:11등). 세례(침례)요한이 엘리야(요 1:21), 혹은 심지어 특히 예수님의 기적을 고려하여(눅 9:7-8) 예수님(막 6:15)이 엘리야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엘리야는 회개를 설교함으로(계 11:3) 회복의 임무를(막 9:12) 수행하는 선구자(막 9:11)로 기대된다. 막 9:11의 'must'("[와]야 하리라")는 이러한 기대가 성경적 근거를 가진 생각임을 보여준다.||(c) 엘리야 기대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해와 세례(침례)요한에서의 그 성취.|① 세례(침례)요한이 스스로를 엘리야로 생각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는 확실히 자신을 엘리야의 선구자로 보지는 않았다. 세례(침례)요한이 바로 돌아온 엘리야라는 것을 지지해 주는 증거로서 회개의 설교, 그의 옷차림(막 1:6), 눅 1:14이하에 표현된 전망을 들 수 있다. 한편 털옷은 선지자의 일반적인 옷이다(슥 13:4). 그리고 사람들과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의 견해가 반드시 요한 자신의 견해인 것은 아니다(참조: 요 1:20-21). 요한이 바라는 바는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익명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요 1:23; 참조: 사 40:3).|② 예수님께서 메시야시라는 것을 반대하는 서기관들의 견해는 엘리야가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막 9:11에서 제자들도 참조하라). 예수님은 세례(침례)요한이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을 막 9:13에서는 암시만을 비추시고,마 11:14에서는 분명하게 말씀 하심으로써 이에 답하신다. 그러나 마 11:14의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는, 이러한 해석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경 아래 두시고, 정치적이 아닌 종교적 회복을 내다보시며, 종말의 가까움을 깨달으시고, 요한의 처형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임박한 십자가형을 직시하시기 때문에, 중요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은 엘리야에 대한 대망을 요한이 성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막 1:2)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의식적으로 고백한다.||(d)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외모. 이 기사(막 9:4-5과 병행구절)는, 더 오래된 랍비 자료가 모세와 엘리야를 이런 식으로 연관시키지 않기 때문에 흥미롭다. 해석상의 여러 이론이 제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을 대표한다거나, 천상의 휘장을 벗기는 자라든가, 선구자, 혹은 동방 왕의 두 호위자들, 혹은 두 명의 페르시아 사자, 선봉자들, 동료들, 상제들(신들)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묵시 문헌들은 분명히 두 명의 선구자를 언급한다(참조: 막 9:4-5). 그러나 그들은 대개 막 9:4과 계 11:3이하에서처럼 모세와 엘리야가 아닌 에녹과 엘리야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아마도 선구자들로서, 그들의 출현은 마지막 때의 개시를 선포하는 것 같다. 고난 당하는 인물로서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알려준다(참조: 막 8:31이하; 눅 9:31).||(e) 고난 당하는 엘리야.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엘리야는 미래에 올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계 11:3이하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두 명의 회개의 설교자로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삼일 반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계 11:6의 가뭄과 물이 피로 변함을 참조하라[왕상 17:1과 출 7:17]). 이와 유사한 언급이 「엘리야 묵시록」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적그리스도와의 싸움, 순교, 시체들의 수치, 부활에 대해 언급하지만 모세 대신 에녹이 언급되어 있다. 차이점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두 증인이 적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전승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전승이 고난 당하는 선구자의 개념(막 9:12-13)이 예수님 당시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수난의 예언의 역사성은 지지 받게 된다.|(참조: J. Jeremias;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