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54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두목
hJgevomai
지도하다, 생각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헤게오마이(Homer. 이래)는 기본 동사 아고($71: 인도하다, 데려오다, 끌어오다)에서 유래했으며,||(a) '인도하다, 이끌다, 지도하다'|(b) '생각하다, 상상하다, 믿다, ~로 간주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헤게오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70회 이상 나오며, 군대 지도자(마카베오일서 9:30), 국가의 지도자(겔 43:7), 국가의 통치자(미 5:1)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헤게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헤게오마이는 살전 5:13에서 '존중하다, 귀하게 여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b) ① 헤구메노이(복수)는 히 13:7, 히 13:17, 히 13:24에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들은 믿음의 본보기이자(히 13:7), 하나님에게서 책임을 위임 받은 정신적 지도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히 13:17). 이들은 성도 앞에 언급되어 있다(히 13:24).|② 눅 22:26에서 헤구메노스(분사)는 디아코논(섬기는 자)과 대조되어 있고 메이존 엔 휘민(너희 중에 큰 자)과 병행되어 있다. 그는 겸손해야만 한다.|③ 행 15:22에서 유다와 실라는 형제 중에 '인도하는 자들'로 불리운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c) 헤구메노이는 국가의 통치자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마 2:6에서(미 5:1이하 인용) 국가의 '통치자'를 나타낸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② 행 7:10에서 애굽의 '치리자'를 가리킨다: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③ 행 14:12에서 바울이 헤구메노스 투 로구라고 칭해질 때는 허메의 보편적 속성이 채택된 것이다: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참조: F. Buchsel; Walter Bauer; J. H. Thayer).
달게
hJdevw"
달게, 기쁘게, 기분좋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헤데오스(Soph., Hippocr. 이래)는 헤뒤스(%362: 달콤한, 향기로운, 즐거운)에서 유래했으며, '달게, 기쁘게, 기분좋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헤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막 6:20에서 헤데오스는 말을 '달게' 즉 잘 듣는 것을 나타낸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b) 막 12:37에서 헤데오스는 말을 '즐겁게' 듣는 것을 나타낸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c) 고후 11:19에서도 헤데오스는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벌써
h[dh
이미 already.||부사 에데(Homer 이래)는 시제를 나타내는 기본 부사로, '이미' already, '지금' now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약 61회 나온다.
헤디스타
h{dista
가장(매우) 기쁘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헤디스타는 헤데오스($2234: 달게, 기분좋게, 기쁘게)에서 유래된 최상급이며, '가장(매우) 기쁘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헤디스타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매우 기쁘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b) 고후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일락
hJdonhv
즐거운 것, 쾌락의 추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도네(Simon. 117, Hdt. 이래)는 어근 헤뒤스(%362: 달콤한, 즐거운)에서 유래했으며,||(a) 처음에 '맛이 좋은 것', 그 다음에 일반적인 오감에 '즐거운 것', 그 후에 '쾌락(즐거움)을 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b) 그 다음에 '쾌락의 추구'를 의미하게 되었다.||(c) 마지막으로 '욕망이나 기쁨(예: 기쁜 소식)을 타오르게 하는 것', 혹은 '쾌락'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쾌락은 여러가지 종류의 쾌락을 가리킨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헤도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민 11:8에서만 히브리어 타암(2940: 미각, 맛)을 번역하여, '맛 좋은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헤도네는 지혜서 7:2에서는 '성적 욕구'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헤도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헤도네는 벧후 2:13에서 '쾌락'을 나타낸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이 구절은 거짓 교사의 이 부류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의 헤도네는 일반적인 의미의 '쾌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육욕에 빠지는 것- 낮에 연락을, 즉 술취함과 방종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다(참조: 빌 3:19). 이것은 역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이생과 내세에서 최고의 것인 기쁨, 곧 완전과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친교로 증진되는 기쁨에 가장 뚜렷하게 대립된다.||(b) 헤도네는 쾌락의 추구를 나타낸다.|①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불화하는 것이며, 쾌락에 굴복하는 것은 그에게 불성실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기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②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c) 헤도네는 '육욕적 쾌락'을 나타낸다. 이 부류는 이중의 마음을 가진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①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여기서 말씀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싸운다. 그들은 잠시동안 말씀의 역사에 접하였으나 이내 곧 넘어져 버린다. 그 이유는 외적 압력 때문이 아니라 반대적인 충동 때문이다. 그들은 이 충동에 굴복한다.|② 약 4:3에서도 이중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나타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 즉 기도는 헤도네로 말미암아 불리한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는 만약 우리가 육체적 쾌락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는 나쁘게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방종한 세상적 정욕의 태도는 참된 기도의 자세에 거스리는 것이다. 참된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을 수 있는 것만을 구하는 것이다. 헤도네에 기초를 둔 기도는, 단지 새로운 헤도네로 인도하여 결국 사망으로 끝나게 하는 쓸모없는 순환을 할 뿐이다(약 4:1; 약 4: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Stahlin).
박하
hJduvosmo"
박하 mi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헤뒤오스모스는 헤뒤스(%362: 달콤한, 즐거운)와 오스메($3774)에서 유래했으며,||(a) '향기로운(달콤한) 냄새가 나는'(Plin. jucundeolens).||(b) 실명사로서 '박하' garden-mint(strab. 8, 3, 14)를 의미한다. 조그마하고 향내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로서, 유대인들은 집이나 회당의 바닥에 이것을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미느타라 불렀다(참조: Buxtorf, Lex talm).||#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헤뒤오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a)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b) 눅 11: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더 중대한 사항을 무시하고 율법의 요구들(신 14:22-신 14:24) 보다 초과하여 박하와 운향(페가논)과 회향(아네돈)과 근채(퀴미논)와 같은 사소한 채소들(라카논)의 십일조를 드리는 그들의 염려를 개탄하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N. Hillyer).
에도스
h[qo"
관습, 습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도스(Homer 이래)는,||(a) '습관적 거처, 거주지, 빈번히 가는 곳, 습관적 양상'(Hom., Hes., Hdt.),|(b) '관습, 습관, 풍습', 복수로 '품행, 인격'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도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만 7회 나온다. 70인역본에서 에도스는 대개 '인간의 기본적 동기나 태도'(마카베오사서 1:29; 2:7; 2:21; 5:24), '마음가짐'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며(마카베오사서 13:27), 어떤 윤리적 혹은 심리적 충동으로 빚어진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혹은 덕으로부터 빚어지며(마카베오사서 13:27 위를 보라); 혹은 부정적으로는 일반적 기만의 태도로부터 빚어지기도 한다(집회서 20:26).||#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도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15:33에 한번 나온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에도스의 의미의 범위는 엄격한 구별없이 종교적 관습으로부터(종종 대중적 풍습과 구별할 수 없음) 개인적 습관에 이른다. 교회가 만약 주변 세계의 비도덕적 습관에 감염되도록 방치한다면 교회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H. Ecser).
돌아가리라
h{kw
오다 com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헤코(Homer. 이래)는 기본동사이며 '오다'를 의미한다. 형식적으로 현재 시제인 헤코는 비록 '오다'를 의미하여 현재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태를 나타내며, 따라서 완료의 의미를 지닌다.|파피루스에서 헤코는 '~에게 오다, ~에게 돌아오다, 결정하다, ~에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헤코는 70인역본에서 약 2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오심, 특히 예배 참예자에게 하나님께서 오심과, 역으로 예배의 참예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옴을 뜻하는 의식적으로 중요한 용어이다. 공간적인 용법뿐만 아니라 제의적인 용법도 70인역본에서 나타나는데, 예를들면, 기도나 희생제사에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 구속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해(때때로 종말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참조: 겔 7:2)이 그러하다. 구원의 시대에 이방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학 2:7). 또한 마지막 때가 올 것이다(겔 7:2이하). 극심한 재난(그리고 역시 좋은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온다. 요세푸스는 시간의 한 점(시각)이 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 용어를 사용한다(Jewish War 7, 323).||#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헤코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주요한 용법은 구원과 심판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오심을 나타내는 것이다.|예수님은 이방인들이 함께 할 장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하신다(막 8:11; 눅 13:29).|종말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그리스도는 도적같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참조: 계 2:25).|벧후 3:10은 주님의 오심에 수반될 무서운 사건들은 언급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계 18:8은 바벨론에게 올(임할) 재앙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멸망의 날이 예루살렘에게도 역시 임할 것이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눅 19:43). 요한은 에르케스다이와 마찬가지로 헤케인도 (신의) 현현(epiphany)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다.|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오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요 2:4에서는 그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을 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동시에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이 그에게 나아올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로마의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질문하기 위하여 왔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 28:23).|이 단어가 프로스키네인과 연결될 때 제의적 의미를 지닌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참조: J. Schneider; Walter Bauer; J. H. Thayer).
엘리
hjliv
엘리, 나의 하나님.||엘리는 히브리어 엘리의 음역이며, '나의 하나님'을 의미한다.|엘리는 신약성경에서 마 27:46에 한번 나온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헬리
@Hliv
헬리 Heli(인)||헬리는 신약성경에서 눅 3:23에 한번 예수님의 계보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로 나온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엘리야
@Hliva"
엘리아 Elijah (인)||#1. 구약과 후기 유대교.||엘리아스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엘리야후와 엘리야로 나타나며, 그 의미는 '여호와는 엘, 즉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를 의미한다.|엘리야에 대하여는 왕상 17:1에 "길르앗 디셉의, 디셉 사람"이라는 언급 외에 그의 배경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다.|엘리야의 예언 사역은 왕상 17-19장; 왕상 21장; 왕하 1-2장에 기록되어 있다. 엘리야는 아합과 아하시야의 동시대에 살았다.||후기 유대교에서 엘리야 이상으로 영향을 미친 성서의 인물은 없다(참조: 왕상 17-18; 대하 21:12이하; 말 3:23-24; 집회서 48:1이하; 이디오피아 에녹서 89:52 등; 마카베오일서 2:58; 필로, 요세푸스, 랍비 문헌, 엘리야 묵시록). 엘리야가 이렇게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의 신비로운 승천(왕하 2:11)과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다(말 4:5-6). 엘리야의 기적들은 전설의 풍부한 자료들을 제공해주며, 그의 승천은 그가 초자연적인 도움을 준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묵시록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중개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의 서기관의 역할을 한다.||(a) 엘리야의 돌아옴.|① 말 4:5-6에 의하면, 엘리야는 우는 제사장직을 정화하고(말 3:2이하) 화평을 세움으로써(말 4:6) 하늘의 왕의 길을 예비하는(말 3:1) 메시야적 인물로 돌아올 것이다. 집회서에서 엘리야는 열 두 지파를 다시 세울 것이다(말 48:10). 랍비들에 따르면 엘리야는 군사적인 구원자로서 갇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한다.|② 후대의 문헌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이 아닌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다(참조: 많은 랍비 문헌과 Justin Dialogue). 다메섹 문서는 진리의 교사(진리 자체를 세우는 자를 뜻하는 단어)의 도래를 기대하며, 어떤 이는 이 진리의 교사는 엘리야와 동일시 된다. 이 문서는 또한 과거와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해 언급하며, 저기에서 예견된 진리의 교사가 엘리야가 아니라 메시야인 것 같다.|③ 또 다른 일반적인 견해는 엘리야가 마지막 때의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참조: 슥 4:1이하). 아마도 이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말 3:1과 말 4:5-6의 말 2:4-5(언약의 천사와 레위와의 언약)과의 결합인 것 같다.|신약성경에서 세례(침례)요한은 제사장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계 11:3이하의 엘리야와 모세는 두 감람 나무(참조: 슥 4:3, 슥 4:11이하)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스가랴의 감람 나무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장직과 왕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b) 돌아오는 엘리야의 임무. 엘리야의 도래는 구원의 시대를 알리는 것이다. 그의 임무는 백성의 회복이다.|① 회개를 촉구하고 율법의 논쟁되는 문제를 해결함으로 화평의 관계를 세우는 내적 회복.|② 피의 정화를 이루고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는 외적 회복.|③ 구원의 선포, 적그리스도와의 투쟁, 메시야를 소개함(그러나 나중의 두 가지 임무는 단지 오래된 랍비 문헌 이외의 문헌에서만 나타난다).||#2. 신약성경.||(a) 신약성경에서의 역사적 엘리야. 신약성경에서 약 29회 언급되는(모세 [73회]와 다윗[59회] 다음으로 많이 나옴) 엘리야는|① 삼년 반 동안의 가뭄과 기근을 선언하고(눅 4:25; 약 5:17; 계 11:6; 참조: 왕상 17:1), 어떤 특별한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인으로서 효과적인 기도를 하므로 그 기근을 시작하고 끝냈으므로 주목 받으며(약 5:16-17);|② 이방인을 향한 사역의 본보기로서 제시되며(눅 4:25-26);|③ 그가 받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인에 대한 보증(롬 11:2이하, 참조: 왕상 19:5과 유사한 표현, 눅 22:43)과|④ 왕하 1:10, 왕하 1:12에서 그가 적대자들에게 임하게 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주목 받았는데 눅 9:54에서 세베대의 아들들이 그 사건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는 그의 구원하시는 사역과 조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셨다.||(b) 신약성경에서의 엘리야에 대한 후기 유대교 개념.|① 필요의 때에 도우는 자로서의 엘리야에 대한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신앙으로서만 인식된다(막 15:35-36; 마 27:47, 마 27:49).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라고 부르짖을 때, 구경꾼들은, 그가 엘리야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도움이 오지 않을 때 예수님의 메시야라는 주장은 잘못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는 친히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인은 필요의 때에 그의 도움을 구한다.|②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는 복음서의 모든 곳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막 9:11등). 세례(침례)요한이 엘리야(요 1:21), 혹은 심지어 특히 예수님의 기적을 고려하여(눅 9:7-8) 예수님(막 6:15)이 엘리야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엘리야는 회개를 설교함으로(계 11:3) 회복의 임무를(막 9:12) 수행하는 선구자(막 9:11)로 기대된다. 막 9:11의 'must'("[와]야 하리라")는 이러한 기대가 성경적 근거를 가진 생각임을 보여준다.||(c) 엘리야 기대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해와 세례(침례)요한에서의 그 성취.|① 세례(침례)요한이 스스로를 엘리야로 생각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는 확실히 자신을 엘리야의 선구자로 보지는 않았다. 세례(침례)요한이 바로 돌아온 엘리야라는 것을 지지해 주는 증거로서 회개의 설교, 그의 옷차림(막 1:6), 눅 1:14이하에 표현된 전망을 들 수 있다. 한편 털옷은 선지자의 일반적인 옷이다(슥 13:4). 그리고 사람들과 심지어 요한의 제자들의 견해가 반드시 요한 자신의 견해인 것은 아니다(참조: 요 1:20-21). 요한이 바라는 바는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익명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요 1:23; 참조: 사 40:3).|② 예수님께서 메시야시라는 것을 반대하는 서기관들의 견해는 엘리야가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막 9:11에서 제자들도 참조하라). 예수님은 세례(침례)요한이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했다는 것을 막 9:13에서는 암시만을 비추시고,마 11:14에서는 분명하게 말씀 하심으로써 이에 답하신다. 그러나 마 11:14의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는, 이러한 해석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경 아래 두시고, 정치적이 아닌 종교적 회복을 내다보시며, 종말의 가까움을 깨달으시고, 요한의 처형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임박한 십자가형을 직시하시기 때문에, 중요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신약성경은 엘리야에 대한 대망을 요한이 성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막 1:2)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의식적으로 고백한다.||(d) 변화산에서의 엘리야의 외모. 이 기사(막 9:4-5과 병행구절)는, 더 오래된 랍비 자료가 모세와 엘리야를 이런 식으로 연관시키지 않기 때문에 흥미롭다. 해석상의 여러 이론이 제시되어 왔다. 예를 들면,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을 대표한다거나, 천상의 휘장을 벗기는 자라든가, 선구자, 혹은 동방 왕의 두 호위자들, 혹은 두 명의 페르시아 사자, 선봉자들, 동료들, 상제들(신들)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묵시 문헌들은 분명히 두 명의 선구자를 언급한다(참조: 막 9:4-5). 그러나 그들은 대개 막 9:4과 계 11:3이하에서처럼 모세와 엘리야가 아닌 에녹과 엘리야이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는 아마도 선구자들로서, 그들의 출현은 마지막 때의 개시를 선포하는 것 같다. 고난 당하는 인물로서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알려준다(참조: 막 8:31이하; 눅 9:31).||(e) 고난 당하는 엘리야.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 엘리야는 미래에 올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계 11:3이하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두 명의 회개의 설교자로서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삼일 반 후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계 11:6의 가뭄과 물이 피로 변함을 참조하라[왕상 17:1과 출 7:17]). 이와 유사한 언급이 「엘리야 묵시록」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적그리스도와의 싸움, 순교, 시체들의 수치, 부활에 대해 언급하지만 모세 대신 에녹이 언급되어 있다. 차이점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두 증인이 적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전승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전승이 고난 당하는 선구자의 개념(막 9:12-13)이 예수님 당시에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수난의 예언의 역사성은 지지 받게 된다.|(참조: J. Jeremias; Walter Bauer; J. H. Thayer).
나이
hJlikiva
나이 age, 수명 life-span, 키 statur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헬리키아(Homer 이래)는 헬릭스(같은 나이의, 성숙한)에서 유래했으며,||(a) '나이 age'를 의미하는데, 육체적 성숙의 나이, 분별 연령, 성년, 또는 노인에 대해 사용되었으며,|(b) '시대, 시기, 세대',|(c) '키나 몸의 크기, 성장'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헬리키아는 약 23회 나오며, 히브리어 코마(키)의 역어로 1회 사용되었다(겔 13:18). 그리고 이 단어는 단 1:10에서 히브리어 길(나이)의 역어로 1회 나오는데 여기서 다니엘의 동년배의 동무들을 표현한다.|70인역본에서 헬리키아는 주로 고전 헬라어 용법의 (a)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대 사회의 일반적인 추세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도 노인들은 대단히 존경하였는데(레 19:32) 이는 그들이 지혜와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욥 15:10; 집회서 6:34이하; 25:4이하). 그러므로 노인들이 처음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행했다는 사실에는 하등의 놀라울 바가 없는 것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헬리키아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눅 19:3에서 헬리키아는 삭게오의 작은 "키"를 묘사한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b) 마 6:27(눅 12:25)에서 헬리키아는 키보다는 나이나 수명을 의미한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사람은 자신의 육체적 나이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인간이 아무리 근심하고 염려한들 자신의 수명을 조금도 연장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c) 눅 2:52에서 헬리키아는 키보다 '성숙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여기의 헬리키아는 NASV, NIV에서 '키 stature', NRSV에서 '연령 years'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자라다 increase'라는 동사로 번역된 헬라어 플로코프토(진행하다, 진보하다)를 고려한다면, 본문의 헬리키아는 '성숙한 단계' 즉, '온전한 사람의 단계까지 자란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G.Stahlin, TDNT Ⅵ 712이하).|요 9:21; 요 9:23에서 헬리키아는 '성숙 maturity'을 의미한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히 11:11에서 헬리키아는 '한창 또는 장년의 나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d) 엡 4:13에서는 헬리키아는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여기에서 '장성한'에 해당하는 헬리키아는 역시 성숙(maturity)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으며, 이 성숙은 아네르 텔레이오스, 즉 성장한 사람이나 온전한 사람(엡 4:13)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쉽게 영향을 받고 동요하는 네피오스 즉 연소자와 다른 것이다. 성숙의 정도는 곧 정해진 목표를 함축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뜻하는 목표란 신자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워진 교회를 위한 것이다(엡 4:12).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의 분량에 따라서(엡 4:7) 나름대로의 영향력으로 공헌하는 것이다(엡 4:16). 그러나 목표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데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엡 4:13 전반부). 왜냐하면 이렇게 될 때 만이 몸 전체가 성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엡 4:13). 따라서 헬리키아에는 키나 크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온전한 사람(mature manhood)이라는 의미가 선포됨을 알 수 있다.|(참조: J. Schneider; R. Schippers).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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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큰, 얼마나 작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헬리코스(Soph. 이래)는 헬릭스(%455: 같은 나이의, 성숙한)에서 유래했으며,||(a) 본래의 의미는 '~만큼이나 나이든(또는 성숙한)'이며,|(b) 일반적으로, '얼마나 큰', '얼마나 작은'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헬리코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골로새서와 야고보서에만 나온다.||(a) 골 2:1에서 헬리코스는 '얼마나 큰'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b) 약 3:5에서 헬리코스의 첫번 것은 '얼마나 작은'을, 두번째 것은 '얼마나 큰'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헬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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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sun||#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헬리오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태양' sun을 의미한다.||(a) 헬라어 문헌에서 헬리오스는 천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70인역본에서 헬리오스는 고전 헬라어 용법과 매우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70인역본에서 헬리오스는 일출, 일몰 그리고 한낮을 나타내는 시각이나, 계절의 시기를 표시하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 외에 "해 아래에서"라는 더욱 특수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전도서에서 헬리오스는 현실세계 속에서의 삶을 나타낸다. 이런 용법은 헬라 저술가들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70인역본과 헬라문학에서는 일출이 동쪽 방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와 태양의 빛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언급된다.|해의 영속성과, 그것이 나타내는 고정된 질서가 때로 강조되기도 한다. 70인역본을 통해서 볼 때 해는 하나님의 창조물, 즉 낮을 주관하도록 만들어진 더 큰 빛이다(창 1:16).||(b) 헬리오스의 비유적 용법은 고전 헬라어와 70인역본에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우월성, 영원성, 미, 강함'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삿 5:31; 시 89:36; 아 6:10; 지혜서 7:29; 집회서 23:19; 26:16; 58:7).|헬리오스는 --> 의와 관련 있는 의미로도 사용된다(지혜서 5:6).||(c) 해의 두드러진 특질, 즉 삶 특히 농경에 기본적으로 미치는 태양의 영향력과 날마다 계속되는 해의 천체운행 - 이 모든 것들은 원시 사회 사람들의 보편적인 태양 숭배를 잘 설명해 준다. 해는 자주 신격화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태양이 샤마쉬(Shamsh)로, 헬라 세계에서는 헬리오스로, 로마 세계에서는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로 신격화 되었다.|구약성경은 해와 달과 별들에 대한 숭배를 엄격하게 금함으로써 널리 유포된 이 관습에 저항하는 입장을 분명히 취하였다(신 4:19; 신 17:3; 참조: 왕하 23:5, 왕하 23:11; 렘 8:2; 겔 8:16). 말 4:2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라는 성구에서 우리는 70인역본 기자들이 태양을 의인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70인역본은 시 84:11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라는 성구의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 헬리오스라는 말의 사용을 피한다.||(d) 특히 신약성경 배경에 중요시 되었던 70인역본의 특별한 문구들은 묵시적인 색채를 띠는 것 같다.|① 비록 심판 신탁들이 특히 역사에서 예기된 심판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 할지라도, 동시에 그것들은 진노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암시와 예시이다. 해의 어두워짐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전조나 그 심판에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으로 매우 자주 언급되었다. 몇몇 성구들에서 임박한 역사적 심판은 사 13:10에서 바벨론, 에 32:7에서 애굽, 요엘 2:10, 요엘 2:31; 요엘 3:15에서 예루살렘, 미 3:6에서 예루살렘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점차 종말론적인 주의 날에 대한 표현으로 변해갔다. 이런 경향은 위경(예: Ass. Mos. 10:5; Sib, 3:801이하)과 신약성경에서 그와 동일한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해의 어두워짐 외에 다른 변칙적 현상들, 예를 들면 해가 뜨지 않는다든가(욥 9:7);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춘다든가(합 3:11); 대낮이나(암 8:9) 혹은 백주에(렘 15:9) 해가 진다든가 밤에 해가 뜬다든가(에스드라하 5:4) 하는 현상들도 심판의 징조인 것 같다. 이 성구들의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례히 수치를 느끼고 슬퍼하고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② 심판에 뒤따라 오는 종말론적 축복으로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영광이 될 것이다"(사 60:19이하).|③ 또 한편 약속된 새로운 실재의 비길데 없는 영광에 대한 암시로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는 기록이 있다(사 30:26). 이것은 심판과 축복에 대한 비유이다. 고전 문헌에서 가장 유사한 것은 어두워진 해를 가이사의 죽음이나, 옥타비아누스(Octavian)와 마크 안토니(Mark Antony)사이의 전쟁과 같은 비극적 사건들에 결부시킨 로마 저술가들의 작품들(예: Pliny, Nat. Hist. 2, 30; Plutarch, Caesar 69, 3; Dio Cass. 45, 17, 5)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72-74:78; 슬라브어 에녹서 11-16; 헬라어 바룩서 6-9에는 해와 달에 관한 천문학적이고 유사 종교적인 견해가 언급되어 있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헬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헬리오스의 일상적인 용법에 따라|① '시간의 표시자'(막 1:32, 병행구 눅 4:40; 막 16:2; 엡 4:26)|② '방향의 표시자'(계 7:2, 계 16:12; 항해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행 27:20)|③ '태울듯한 열기의 원천'(마 13:6, 병행구 막 4:6; 약 1:11; 계 7:16; 계 16:8)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④ '해 아래에서의 삶'이라는 구약성경의 개념에 따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신다"고 가르치신다.|⑤ 고전 15:41에서 부활한 몸의 본질에 관한 논증에서 바울은 해, 달, 그리고 별들의 대조적인 영광에 대해 말한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행 13:11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 체험으로 인하여 해를 볼 수 없는 소경이 되고 만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b) 헬리오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마 17:2의 변형기사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고 언급한다.|② 요한이 환상 중에 본 그리스도의 얼굴도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라는 말로 묘사되어 있다.|③ 계 10:1의 힘센 천사에 관한 기록에서도 그 천사의 얼굴이 해에 비유된다: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④ 계 19:17에서 하나님의 큰 잔치를 알리는 천사는 "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⑤ 계 12장에 모든 국가들을 통치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아이를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그 여인(사 66:7 이하의 시온과 동일시 되는 것 같다)은 "해를 입은"(계 12:1) 여인이라고 묘사된다.|⑥ 예수님은 마 13:43에서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신다.|⑦ 행 26:13에서 바울이 눈멀기 전에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하늘에서 비쳐온 그 빛은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묘사되고 있다.||(c) 헬리오스는 비교적 자주 묵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요한계시록에는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종말론적 언급들이 가장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계 6: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빛의 삼분의 일이 감소되었다(계 8:1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가 열려진 무저갱으로부터 나오는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진다(계 9:2).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해가 어두워지며"(마 24:29, 병행구 막 13:2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보다 덜 세밀하기는 하지만 해에는 징조가 있겠다(눅 21:25)는 말씀도 같은 어조를 띤다. 비록 그 단어들이 본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을지라도 그 말들이 종말론적인 의미로 들리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행 2:17-21에 인용되어 있는 엘 2:28-32의 인용문에서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라는 구절(행 2:20) 등이 어떻게 문맥 속에 있는 그대로 이해될 수 있는가? 그 인용문 전체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오순절날 성령을 받는 사건 속에서 경험된 종말론적 성취를 확실히 의미한다. 베드로는 그 인용문의 후반부(행 2:19-20)를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단순한 상징으로 여겼던 것 같다(J. D. G. Dunn은 우주적인 징조들을 "예언의 본질에 속하지 않았거나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성취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묵시적인 단계의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해가 빛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눅 23:45(참조: 마 27:45, 병행구 막 15:33에 기록되어 있는 어두움)을 기록한 누가와 그 성구를 읽은 독자들은 그 사건을 요엘의 예언(F. F. Bruce)과 더욱 결부시킨다. 그러나 행 2:19-20을 도래할 심판(여기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날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곳(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의 의미와 일치한다. 그 요점은 종말론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심판이 종말론의 일부분이라는 데 있다(누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베드로의 경우에 그렇다). 그러므로 경고와 회개에의 부름은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졌다(행 2:38, 행 2:40; 행 3:19, 행 3:23). 요엘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행 2:21; 참조: 행 4:12), 구원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허용된다.|② 헬리오스는 종말론의 영광스러운 면을 묘사하는 데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부터 오고 있는 도시로 묘사된다. 그 도시는 해의 비췸이 필요 없는 그러한 광휘의 도시이다(계 21:23). 그 곳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신약성경은 헬리오스라는 말을 경우에 따라서는 영광을 의미하는 말로, 경우에 따라서는 심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 신약성경에서 계시의 두드러짐, 성취 그리고 예기된 종말이라는 말에 부여된 헬리오스의 상징적 표현은 특히 중요시된다.|(참조: D. A. Hagner; Walter Bauer; J. H. Thayer).

hJlo"
못 nai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헬로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못' nail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헬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요 20:25에 2회 나온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헬로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사용된 못을 나타낸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생긴 못자국을 그가 보고 만질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그리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을 것이라고 말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D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