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qavnato"
죽음 dea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다나토스(Homer 이래)는 드네스코($2348: 죽다)에서 유래했으며, '죽는 것,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생명을 멸한다. 하데스에 있는 죽은 자들의 유령 같은 존재는 참된 생명이 없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필멸의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생명을 성취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영혼은 불멸하리라는 소망이 생겨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다나토스는 신약성경에서 12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신약성경에서 다나토스는 '죽는 것' dying(히 7:23)이나 '죽어 있음' being dead(빌 1:20)을 의미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몫이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음이 없다(딤전 6:16). 죽음은 결코 영웅적인 어조로 표현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희생적 죽음(고후 4:12)이나 순교(계 2:10) 까지도 그렇다. 죽음은 조에($2222)를 부적절한 조에($2222)로 만드는 불유쾌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역은 죽음을 멸하는 것이다(딤후 1:10). 죽음은 마지막 원수이다. 죽음의 타도와 더불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고전 15:26; 계 20:14). 죽음은 신약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으로 중립화되지 않는다. 죽음은 항상 죄와 연관되며 하나님의 참 존재인 조에($2222)와 대립된다.||(b) 죽음은 죄의 결과요 형벌이다. 죽음의 기원은 사변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비록 바울은 죽음을 하나의 우주적 권세로 보기는 하나, 죽음은 책임을 묻는 행동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하). 아담이 오직 "생령"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자연적 필멸성을 암시하는 것같다.|그러나 사망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롬 5:17). 이 사실이 우리를 변명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불가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듯이(롬 1:32)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잠자는 죄를 깨우며, 그 형벌로써 죽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롬 7장; 고후 3:7). 바울은 우리의 죄악된 존재를 사르크스($4561)라고 부른다. 죽음은 물질도 아니요, 영혼의 감옥도 아니며, 귀신의 권세도 아니다. 이것은 부패한 영역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상실된 자아이다(롬 2:28-29).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죽음의 지배를 당하게 되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자기 노력은 동일한 악한 범주에 우리를 빠뜨린다(롬 7:10). 요한의 메시지도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예수 안에 있는 계시 밖에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따라서 마땅히 죽음에 넘겨진다. 죄는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견지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신(자아)은 그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하고(롬 5:31 이하) 스스로 자유롭다고 상상하며(롬 8:33) 나름대로의 영광의 표준을 가진다(롬 5:41 이하).||(c) 신약성경은 때로 죽음을 순전히 파멸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때로는 장래의 고통을 포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참조: 막 9:48). 그러나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한다. 따라서 육체적인 죽음 뒤에 심판과 부활이 따른다. 신약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하여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심판을 통하여 최종적인 죽음이 된다(두번째 사망, 계 2:11; 계 20:6; 계 20:14; 계 21:8). 하지만 지금도 죽음은 생명에게서 그 참된 성질을 빼앗아 가버린다. 죽음은 두려움을 준다(히 2:15). 죽음은 그림자와 어두움을 던져준다(눅 1:79). 죽음은 육적인 것을 지배하여 왕노릇을 한다(롬 8:6).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우리는 내일 죽을 터이니 잘먹고 마시자 할찌도 모른다(고전 15:32). 죽음은 불확실을 가져온다(마 6:25 이하). 인간의 행위는 처음부터 죽은 것이다(히 9:14).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마 8:22; 참조: 롬 7:10; 롬 7:24; 요 5:21).||(d)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사망 자체를 멸하시는 종말론적 사건이다(딤후 1:10; 히 2:14). 그리스도의 죽음은 독특한 죽음이다. 그것은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를 죄로 삼으셨으며(고후 5:21; 롬 8:3; 갈 3:13-14),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며, 죽음을 그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따라서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으로 만드신다.|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와 죽음을 몰아내며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솟아오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에게 붙잡혀 매이지 않으시며(행 2:24) 다시 살아나사(롬 8:34) 이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계 1:18).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고 그것을 다시 취하신다(요 10:18). 그는 스스로 낮추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다(빌 2:6 이하). 따라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의 죽음을 그들 자신들의 죽음으로 삼는 자들을 위하여 사망을 이기신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시다(골 1:18; 계 1:5).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죽는다(살전 4:15 이하). 그러나 결국에 그들은 부활함으로 죽음을 정복할 것이다(고전 15:26; 계 21:4). 그러므로 심지어 지금도 죽음은 그 쏘는 것(고통)을 상실한다(고전 15:55). 불신자들에게는 닥쳐올 죽음이 전체 삶을 부정하지만, 신자들에게는 대망의 부활이 전체 삶에게 새로운 성격을 부여해준다. 신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요 6:50).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요 5:24). 이 생명은 그들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딤후 2:18; 고린도교인들의 그럴듯한 믿음을 참조하라). 그러나 사망의 파괴는 복음에 기초한 소망 가운데 이미 일어난다. 이것은 믿음의 순종 안에서 일어난다. 믿음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롬 6:3-4).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의 결단으로 붙들어야 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롬 6:11). 따라서 죄와 죽음의 파괴는 절제하는 생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의 이행으로 나타난다(롬 8:2 이하). 신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하여 산다. 따라서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롬 14:7 이하; 고후 5:14-15). 십자가에서 세상은 신자들에 대해 못박혔고,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못박혔다(갈 2:19-20; 갈 6:14).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선포는 합당한 행동을 요구한다(고전 11:27 이하; 참조: 고전 5:7-8). 그러나 이 행동 자체가 죽음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도달되었다. 따라서 자랑은 배격되며(롬 3:27),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는다(롬 7:6). 율법을 다시 부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갈 2:19 이하).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길은 이 죽음에 참예하는 것이다(빌 3:9; 빌 3:14). 이러한 참예는 또한 매일 죽는 것으로서,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런데 매일 죽는 가운데서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거나(참조: 특히 골 1:24) 저들에게 본을 보여주게 된다(벧전 2:18 이하). 죽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확실한 위로의 근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6). 그리하여 우리는 복되다(계 14: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다(행 21:13).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 21:19). 여기에서 죽음이 이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행함과, 고난과 죽음을 인간의 영적 태도로 보는 새로운 이해 그 자체가 죽음의 정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완성(consummation)을 향하여 가는 움직임의 일부이다. 우리는 죽으나, 우리의 생명은 감취어져 있다(골 3:3). 우리의 현재의 생은 잠정적인 것인 까닭에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나 주님의 재림을 고대한다(고후 5:1 이하). 그러나 이 일시적인 생도 주님을 섬긴다(비록 죽는 것이 얻는 것이긴 하지만, 빌 1:21). 그러므로 죽음과 삶 모두 다 상대적인 것이다(롬 8:38). 하지만 이는 신자들에게만 그러하니, 불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최종적인 죽음을 가져온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사망을 퍼뜨리는 것이며(고후 2:16), 따라서 그들은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참조: E. Bult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