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57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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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의 명령형.||에토는 기본 동사 에이미($1510: 내가 있다, 나는 ~이다)의 명령형이다.|신약성경에서 에토는 2회 나온다.||(a)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b)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소리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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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케오(Hes. 이래)는 에코스($2279: 소음, 소리)에서 유래했으며,||(a) 자동사로, '소리가 나다' to sound, '울리다' ring, boon, peal,|(b) 타동사로 '소리나게 하다' to cause to sound; 중간태로 '노래 부르다' to sing를 의미한다.||에케오는 금속으로 된 방패의 쨍그렁 울리는 소리나(Herodutus) 여치류의 울음(Theocritus)을 묘사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케오는 70인역본에서 22회 나오며, 히브리어 훔(1949: 중얼거리다, 소리지르다), 하마(1993: 중얼거리다, 고함치다, 포효하다, 몹시 시끄럽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룻 1:19), 땅이 울리는 것(삼상 4:5), 현의 소리(사 16:11), 바다의 울부짖음(사 51:15), 적의 소동(시 83:2), 개의 짖음(시 59:6), 제사장의 방울의 딸랑거림(집회서 45:9), 나팔을 부는 소리(집회서 50:16)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케오는 신약성경에서 한번 고전 13:1에만 나온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랑이 없는 방언은 듣는 자에게 주의를 끌고 열중시키지만 도덕적·영적 가치는 지니지 않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칼코스는 대개 신전이나 신성한 나무에 걸려 있는 징으로 여겨지며 길게 울리는 음조의 이 악기는 황홀을 야기시키기 위해 주신제에서 사용되었다.(J. Schneider)|즉, 사랑없이(즉 모든 사람이 다 알아 듣고 유익이 되도록 하는 통역 없이, 참조: 고전 14:5-고전 14:12; 고전 14:19) 방언의 은사를 행사하는 것은 곧 이방인들의 제사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그는 방언의 은사를 기독교적인 사랑없이 행한다는 것은 결국 이교도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보다 더 일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 같다.(M. J. Harris)|(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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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소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코스(Pre - Socr. 이래)는 기본어 에케(%812: 소음, 소리)의 후기형이며,||(a) '소리, 소음'|(b) '소문, 보도'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코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누가복음, 사도행전, 히브리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21:25에서 파도의 노호성에 대해 언급한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b) 행 2:2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에 관하여 바람과 같은 '소리'를 나타낸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c) 히 12:19에서 시내산 사건 때의 소리를 언급한다: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d) 눅 4:37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나타낸다: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다대오
Qaddai'o"
다대오 Thaddaeus(인)||닷다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열 두 제자 중에 한사람이다(마 10:3; 막 3:18). KJV의 마 10:3에는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베오"라고 되어 있다. 눅 6:14-눅 6:16과 행 1:13에는 이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에 야고보의 "아들"(RSV) 혹은 "형제"(KJV) 유다가 들어가 있다. 누가는 아마도 진짜 이름을 기록한 것 같다. 다대오(아람어 "가슴" breast-nipple?)와 렙베오(아람어 "심장" heart)는 아마 배신자 가룟 유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복음서에 소개되어 쓰여진 유다의 호칭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라는 그의 이름은 오명에 따라 붙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요 14:22의 유다(가룟인 아닌)는 아마도 이 제자일 것이다.|(참조: A. M. Ross).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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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sea, 호수 lak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달랏사(Homer. 이래)는 헬라어로 대양(ocean), 즉 양양한 '바다'를 의미한다. '깊게 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달라에서 유래되었다는 어원상의 설명은 가설로서 남아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달랏사는 70인역본에서 370회 나오며 대부분의 경우에 '바다'를 뜻하는 얌을 번역한다. 구약성경에서 달랏사는 대양과 내륙의 호수를 구분해서 사용되지는 않는다. 지중해(수 1:4; 수 19:26, 70인역본; 겔 48:28)와 홍해(출 23:31; 민 33:10f, 삿 11:16; 왕상 9:26) 뿐만 아니라, 사해(창 14:3)와 게네사렛 호수(긴네렛, 민 34:11; 수12:3; 수 13:27; 참조: 마 4:18; 막 1:16), 즉 갈릴리 바다도 달랏사(thalassa)로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달랏사는 신약성경에서 9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일반적 의미로서 '바다' 마 9:42; 마 11:23; 눅 17:2, 눅 17:6; 마 23:15; 땅과 바다는 전 우주를 가리킨다, 행 4:24; 행 14:15; 계 5:13; 계 10:6; 계 14:7. 고후 11:26; 롬 9:27(사 10:22); 히 11:12(창 22:17); 마 18:6.|요한계시록은 특히 유대 묵시적인 전통을 계승하여 바다를 마지막 날에 정복될 인격적 세력으로 생각하며(계 7:2이하), 그러므로 바다는 다나토스(죽음)와 음부와 마찬가지로 죽은자들을 내어주고(계 20:13), 마침내 존재할 권리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계 21:1). 유대교의 묵시에서처럼(참조: 단 7:3) 요한계시록에서도 바다는 귀신같은 괴물들의 집이다(계 13:1; 참조: 용이 물을 토함, 계 12:13이하). 최후의 날의 재앙에서 바닷물은 피로 변할 것이다(계 8:8이하; 참조: 강들과 샘들, 계8:10; 계 16:4); 건국 초기에 애굽에서의 재앙이 이곳의 배경에 드러나 있다(참조: 출 7:14이하). 바다의 불은(계15:2) 하늘의 뇌우와 더불어 번쩍이는 번갯불인데, 여기서는 → 심판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참조: R. H. Charles). 하늘의 바다에 서있는 승리자들의 광경은 홍해변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대한 승리를 찬송한 것을 상기시킨다(출 15).||(b) 특별한 의미에서 '바다'. ① 홍해, 행 7:36; 히 11:29; 고전 10:1이하. 각 경우에 홍해를 건너는 기적에 관한 것이다. 고전 10:1이하는 세례(침례)에 관한 언급으로 예표론적으로 해석한다.|② 지중해, 행 10:6; 행 10:32; 행 17:14; 행 27:30; 행 27:38, 행 27:40.||(c) 호수, 갈릴리 바다, 곧 게네사렛 호수, 마 4:18; 마 15:29; 막 1:16; 막 7:31. 동일한 호수, 요 21:1. 디베랴 호수, 마 8:24; 마 13:1; 마 14:24이하(바다 위로 걸어감); 막 2:13; 막 3:7 등.|(참조: Walter Bauer; J.H.Thayer; O.Bocher).
보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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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게 하다, 소중히 여기다, 양육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달포(Homer 이래)는 기본 동사이며,||(a) '따뜻하게 하다, 따뜻하게 유지시키다'(Homer).||(b) 부드러운 애정으로 '소중히 여기다', 애정깊은 돌봄으로 '양육하다'(Theocr., M. An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달포는 신약성경에서 2회 에베소서(1회)와 데살로니가전서(1회)에만 사용되었다.||(a) 엡 5:29에서 달포는 '소중히 여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b) 살전 2:7에서 달포는 '양육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다말
Qavmar
다말 Tamar(인)||#1. 구약성경.||다마르는 히브리어 타마르의 음역이며, '종려 나무'를 의미한다.|구약성경에서 세 사람이 다말이란 이름을 지니고 나타난다.||1. 야곱의 아들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2. 다윗이 마아가 사이에서 낳은 딸이며, 압살롬의 누이(삼하 13:1; 대상 3:2, 9).||3. 압살롬의 딸(삼하 14:27)이다.||신약성경에서 언급된 다말은 1번의 야곱의 아들 유다의 장자인 엘의 아내인 다말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 1:3). 엘의 동생 오난은 형이 죽은 후 수혼법에 따라 형의 씨를 받기 위해 형수에게 들어갔지만 오난이 그의 기업의 감소를 두려워하여 땅에 설정(泄精)하여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오난이 죽은 뒤 유다는 자기의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 하여 다말을 그 아비 집으로 보내며 셀라가 장성할 때 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고 유다는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올라 갔다. 자부 다말은 이 사실을 알고 자기의 정체를 숨겨 이방 신전 문 앞에서 창녀로 가장하여 유다를 유혹하였다. 유다는 나중에 며느리 다말이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자부가 보여주는 자기의 약조물을 보고서 자기가 자부에게 행한 잘못을 깨닫고 그녀를 용서하였다. 멀지않아 다말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의 어머니가 되었다(창 38장).||#2. 신약성경||신약성경 마 1:3에서 다말은 예수님의 조상이 된 베레스의 어머니로 나타난다.|구약성경은 죄를 다말보다는 유다에게 돌리고 있지만(창 38:26) 랍비 석의는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나 유다에 대해서도 변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담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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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다, 두려워 놀라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담베오는 담보스($2285: 경악)에서 유래했으며,||(a) '놀라다'(Hom., Soph., Eur.).||(b) '두려워 놀라다, 무서워하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현현과 기적은 놀라움 또는 두려움과 떨림을 일으킬 수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담베오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흥분이나 떨림(삼상 14:15, 라가즈: 7264), 두려움(삼하 22:5; 단 8:17, 바아트: 1204)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담베오는 신약성경에서 마가복음에서만 3회 나온다.||(a) 막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담베오는 예수님의 교훈과 이적에 대해 놀라는 것을 나타내며, 사건의 계시적 내용과 기독론적 의의를 강조한다.||(b) 막 10:24 이하,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엄격한 요구도 놀라움과 두려움을 야기시켰는데, 그 이유는 우리 인간들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참조: 눅 9:2-눅 9:10).||(c) 막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여기서 제자들이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놀라움과 두려움을 일으킨다. 이 경건한 두려움은 믿음의 예비적 단계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ertram).
담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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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 경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담보스(Homer 이래)는 타프(%364)에서 유래했으며, '놀램, 두려움, 경악'을 의미한다.|플루타르크는 담보스를 미신과 연관시킨다. 참된 경건(신앙심)은 합리적인 토양에서 자란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담보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깊은 잠'(삼상 26:12; 타르데마: 8639), 놀람(전 12:5; '공포'를 뜻하는 하트하트: 2849), 두려움이나 전율(겔 7:18; '저를, 몸서리'를 뜻하는 팔라추트: 6427)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담보스는 신약성경에서 누가의 기록에서만 3회 나온다.||(a) 행 3: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놀라는 것은 보는 것과 관련되지만 외적 형태보다 신현현의 요소가 놀라움과 두려움을 야기시킨다.||(b) 눅 4: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담보스는 사건의 계시적 내용과 기독론적 의의를 강조하며, 또한 기적들의 신빙성을 증거하는 역할도 한다.||(c) 눅 5: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여기서 담보스는 기적의 신빙성을 증거하는 역할을 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ertram; W. Mundle).

qanavsimo"
죽음의, 치명적인, 죽음의 독.||#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다나시모스(Aeschyl. 이래)는 다나토스($2288: 죽음)에서 유래했으며,||(a) '죽음의, 치명적인'(Soph., Eu., Pla. 등),|(b) '죽음의 독' deadly poison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다나시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막 16:18에 한번 '죽음의 독'을 의미한다: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하시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죽이는
qanathvforo"
죽음을 가져오는, 치명적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다나테포로스(Aeschyl., Hippocr. 이래)는 다나토스($2288: 죽음)와 페로($5342: 데리고 가다, 나르다, 낳다)에서 유래했으며, '죽음을 가져오는(초래하는), 치명적인'을 의미한다(Aeschyl., Pla., Arist. 등).||#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다나테포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3:8에 한번 나오며, '죽음을 초래하는'을 의미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사망
qavnato"
죽음 dea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다나토스(Homer 이래)는 드네스코($2348: 죽다)에서 유래했으며, '죽는 것,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생명을 멸한다. 하데스에 있는 죽은 자들의 유령 같은 존재는 참된 생명이 없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필멸의 육체를 벗어남으로써 생명을 성취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영혼은 불멸하리라는 소망이 생겨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다나토스는 신약성경에서 12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신약성경에서 다나토스는 '죽는 것' dying(히 7:23)이나 '죽어 있음' being dead(빌 1:20)을 의미한다. 죽음은 우리 인간의 몫이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음이 없다(딤전 6:16). 죽음은 결코 영웅적인 어조로 표현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희생적 죽음(고후 4:12)이나 순교(계 2:10) 까지도 그렇다. 죽음은 조에($2222)를 부적절한 조에($2222)로 만드는 불유쾌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역은 죽음을 멸하는 것이다(딤후 1:10). 죽음은 마지막 원수이다. 죽음의 타도와 더불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고전 15:26; 계 20:14). 죽음은 신약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단순한 자연적인 현상으로 중립화되지 않는다. 죽음은 항상 죄와 연관되며 하나님의 참 존재인 조에($2222)와 대립된다.||(b) 죽음은 죄의 결과요 형벌이다. 죽음의 기원은 사변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비록 바울은 죽음을 하나의 우주적 권세로 보기는 하나, 죽음은 책임을 묻는 행동의 결과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이하). 아담이 오직 "생령"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자연적 필멸성을 암시하는 것같다.|그러나 사망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다(롬 5:12; 롬 5:17). 이 사실이 우리를 변명해 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우리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불가피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데 이바지할 뿐이다. 율법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무시하듯이(롬 1:32)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잠자는 죄를 깨우며, 그 형벌로써 죽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롬 7장; 고후 3:7). 바울은 우리의 죄악된 존재를 사르크스($4561)라고 부른다. 죽음은 물질도 아니요, 영혼의 감옥도 아니며, 귀신의 권세도 아니다. 이것은 부패한 영역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상실된 자아이다(롬 2:28-29).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죽음의 지배를 당하게 되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자기 노력은 동일한 악한 범주에 우리를 빠뜨린다(롬 7:10). 요한의 메시지도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예수 안에 있는 계시 밖에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따라서 마땅히 죽음에 넘겨진다. 죄는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견지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자신(자아)은 그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하고(롬 5:31 이하) 스스로 자유롭다고 상상하며(롬 8:33) 나름대로의 영광의 표준을 가진다(롬 5:41 이하).||(c) 신약성경은 때로 죽음을 순전히 파멸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때로는 장래의 고통을 포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참조: 막 9:48). 그러나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한다. 따라서 육체적인 죽음 뒤에 심판과 부활이 따른다. 신약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하여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심판을 통하여 최종적인 죽음이 된다(두번째 사망, 계 2:11; 계 20:6; 계 20:14; 계 21:8). 하지만 지금도 죽음은 생명에게서 그 참된 성질을 빼앗아 가버린다. 죽음은 두려움을 준다(히 2:15). 죽음은 그림자와 어두움을 던져준다(눅 1:79). 죽음은 육적인 것을 지배하여 왕노릇을 한다(롬 8:6).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우리는 내일 죽을 터이니 잘먹고 마시자 할찌도 모른다(고전 15:32). 죽음은 불확실을 가져온다(마 6:25 이하). 인간의 행위는 처음부터 죽은 것이다(히 9:14).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이다(마 8:22; 참조: 롬 7:10; 롬 7:24; 요 5:21).||(d)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사망 자체를 멸하시는 종말론적 사건이다(딤후 1:10; 히 2:14). 그리스도의 죽음은 독특한 죽음이다. 그것은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를 죄로 삼으셨으며(고후 5:21; 롬 8:3; 갈 3:13-14),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며, 죽음을 그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따라서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으로 만드신다.|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와 죽음을 몰아내며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솟아오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에게 붙잡혀 매이지 않으시며(행 2:24) 다시 살아나사(롬 8:34) 이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계 1:18).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고 그것을 다시 취하신다(요 10:18). 그는 스스로 낮추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다(빌 2:6 이하). 따라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의 죽음을 그들 자신들의 죽음으로 삼는 자들을 위하여 사망을 이기신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시다(골 1:18; 계 1:5).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죽는다(살전 4:15 이하). 그러나 결국에 그들은 부활함으로 죽음을 정복할 것이다(고전 15:26; 계 21:4). 그러므로 심지어 지금도 죽음은 그 쏘는 것(고통)을 상실한다(고전 15:55). 불신자들에게는 닥쳐올 죽음이 전체 삶을 부정하지만, 신자들에게는 대망의 부활이 전체 삶에게 새로운 성격을 부여해준다. 신자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요 6:50).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요 5:24). 이 생명은 그들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딤후 2:18; 고린도교인들의 그럴듯한 믿음을 참조하라). 그러나 사망의 파괴는 복음에 기초한 소망 가운데 이미 일어난다. 이것은 믿음의 순종 안에서 일어난다. 믿음의 순종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롬 6:3-4).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성의 결단으로 붙들어야 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롬 6:11). 따라서 죄와 죽음의 파괴는 절제하는 생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의 이행으로 나타난다(롬 8:2 이하). 신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하여 산다. 따라서 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롬 14:7 이하; 고후 5:14-15). 십자가에서 세상은 신자들에 대해 못박혔고, 신자들은 세상에 대해 못박혔다(갈 2:19-20; 갈 6:14).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한 선포는 합당한 행동을 요구한다(고전 11:27 이하; 참조: 고전 5:7-8). 그러나 이 행동 자체가 죽음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목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미 도달되었다. 따라서 자랑은 배격되며(롬 3:27),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는다(롬 7:6). 율법을 다시 부과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갈 2:19 이하). 기독교인이 걸어야 할 길은 이 죽음에 참예하는 것이다(빌 3:9; 빌 3:14). 이러한 참예는 또한 매일 죽는 것으로서, 고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런데 매일 죽는 가운데서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거나(참조: 특히 골 1:24) 저들에게 본을 보여주게 된다(벧전 2:18 이하). 죽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확실한 위로의 근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살전 4:16). 그리하여 우리는 복되다(계 14:13).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다(행 21:13).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요 21:19). 여기에서 죽음이 이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행함과, 고난과 죽음을 인간의 영적 태도로 보는 새로운 이해 그 자체가 죽음의 정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완성(consummation)을 향하여 가는 움직임의 일부이다. 우리는 죽으나, 우리의 생명은 감취어져 있다(골 3:3). 우리의 현재의 생은 잠정적인 것인 까닭에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나 주님의 재림을 고대한다(고후 5:1 이하). 그러나 이 일시적인 생도 주님을 섬긴다(비록 죽는 것이 얻는 것이긴 하지만, 빌 1:21). 그러므로 죽음과 삶 모두 다 상대적인 것이다(롬 8:38). 하지만 이는 신자들에게만 그러하니, 불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최종적인 죽음을 가져온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사망을 퍼뜨리는 것이며(고후 2:16), 따라서 그들은 사망에 거한다(요일 3:14).|(참조: E. Bultmann).
죽는데 내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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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다 kil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다나토오(Aeschyl. 이래)는 다나토스($2288: 죽음)에서 유래했으며,||(a) '죽이다, 죽음에 넘겨주다, 사형에 처하다',|(b) 비유적으로 '파멸시키다, 멸절시키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다나토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다나토오는 '죽이다'를 의미한다.|① 막 13:12,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②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b) 다나토오는 '죽음에 넘겨 주다'를 의미한다.|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c) 다나토오는 '사형에 처하다'를 의미한다.|막 14: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d) 다나토오는 롬 8:13에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E. Bultmann; Walter Bauer; J. H. Thayer).
장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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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하다 bur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답토(Homer 이래)는 '매장하다, 묻다'를 의미한다. 일반 헬라어에서 답토는 원래 장례 의식을 명예롭게 치루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를 처분하는 방법은 각가지였는데, 호머(Homer, Od, 11, 52)는 이 단어를 휘포 크도노스('땅, 아래')와 플루타르크(Plutarch, Mor. 286f)는 퓌리(불)와 함께 사용되었다.|전자는 땅에 매장하는 것이고 후자는 화장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답토는 70인역본에서 약 150회 이상 나오며, 창 50:26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어 카발(매장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토장 혹은 동굴이나 돌무덤에 안치하는 형식은 모든 시대에 걸친, 유대인의 보편적 관습이었다. 매장지는 일반적으로 가족 공용의 소유지였으며(창 23:4 등등), 그곳은 죽은 자들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는" 곳이었다(창 25:8 등등). 사울과 그의 자식들의 화장(삼상31:12)은 예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처우는 수치스러운 욕(암 2:1) 혹은 준엄한 형벌(수 7:25)로 간주될 수 있다. 율법은 처형된 범죄자를 당일에 매장하도록 요구하였으며(신21:23), 전쟁에서 죽은 적들까지도 매장하였다(왕상 11:15 등등). 매장이 거부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모욕이다(신 28:26; 왕상 13:22).||#3. 신약성경의 용법||답토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장사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a) 신약성경의 구절들은 매장에 대한 당시의 습관과 인식을 예증해 준다. 장례 의무는 죽은 자의 가족 혹은 가장 가까운 동료에게 있었다(마 8:21, 22=눅 9:59, 60; 마 14:12). 죽은 자의 장례는 최대한 신속히 시행되었다(행 5:5이하, 추측하건대, 기독교 공동체의 젊은 사람들에 의하여).||(b) 예수님의 장례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전 15:4에서 바울은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예시된 바 있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확증이었다. 시 16:10은 사도행전에 기술된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본문이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적용될 수 있는 분은 다윗이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 다윗의 육체는 부패되었고(행 13:35-행 13:37), 그의 무덤이 그 당시까지 남아 있었다(행 2:27이하). 장사에 대한 중심적인 본문인 신 21:22-신 21:23도 마찬가지로, 새롭고도 놀라운 각도에서 적용되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즉, 죄를 짊어지신 예수를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자로써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행 5:30; 행 10:39; 행 13:29; 갈 3:13; 벧후 2:24).|(참조: Walter Bauer ; C.J.Hemer).
데라
Qavra
데라 Terah(인)||다라는 히브리어 테라(여행 또는 여행시의 휴지)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데라'라고 음역했다. 이하 데라.||#1. 구약성경.||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다. 데라는 여호수아가 언급한 일 이외에도(수 24:2) 연대가 명단에 기록되어 있다(대상 1:26).|데라는 세 아들 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두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은 페르샤만 인근의 유브라데스 강 저지대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우르 지방에서 살았다.|데라는 우르를 떠나 유브라데 강을 따라 북쪽으로 약 800㎞에 있는 하란성에 도착하여 살았다.|수 24:2, 15에 의하면 데라는 우상숭배자였다. 난나르(Nannar, 셈어로 '죄'라는 의미)는 데라 시대에 우르와 하란에서 숭배한 주신(主神)이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데라는 신약성경에서 눅 3:34에 한번 나온다: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