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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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히 여기다 wond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다우마조(Homer 이래)는 다우마($2295: 경이적인 일, 놀라움)에서 유래했으며, '기이히 여기다, 놀다다, 경탄하다'를 의미한다.||이 어군($2295, $2296, $2297, $2298)은 첫째로 놀람 즉, 비판적인 놀람이든 호기심을 지닌 놀람이든 간에 놀람의 의미를 지니며, 그 다음으로는 경탄 즉, 이례적인 것이나 신비로운 것, 예를 들면 종교적인 기적이나 신탁, 마술적인 행위나 방법들, 철학에서(아직 설명되지 않은) 특정한 현상들에 대한 경외나 두려움의 뉘앙스를 지닌 경탄의 의미를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다우마조는 70인역본에서 약 56회 나오며, 13개의 히브리 단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다우마조는 종종 프로소폰(얼굴 face)과 결합하여(히브리어, 나샤 파님처럼) '얼굴을 들다, 총애하다, 편파적이다'을 의미하며(잠 18:5; 욥 13:10), 신 10:17과 대하 19:7에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편파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쾌히 청을 들어주는 친절한 마음씨'(예: 창 19:21, 하나님에 대하여 말함), '고려하여 취하는 것'(신 28:50) 및 '존귀한 자, 매우 총애를 받는 자'(왕하 5:1, 수동태)를 의미한다. 그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용례에서 요지는 두려움의 요소가 다우마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다우마조가 히브리어 상당어 샤맘(무서워서 굳어지다, 레 26:32; 욥 17:8; 욥 21:5; 단 8:27) 혹은 타마(깜짝 놀라다, 공포에 사로 잡히다, 시 48:6; 렘 4:9; 히 1:5)의 의미로 사용된 구절에서는 이와 다르다. 특히 후자의 구절들은 어떻게 놀라움의 개념이 공포의 개념으로 옮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에게 묘사하듯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놀라움이다.|다우마조의 개념의 범위는 70인역본 본문의 욥 21:5과 욥 42:11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깜짝 놀라는 욥의 장면이 두려운 놀라움을 자아내나(욥 21:5),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경이적인 도우심도 또한 놀라움을 자아낸다(욥 42:11).||#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다우마조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공관복음.|① 대부분의 구절들은 이적 기사와 관련있는 공관복음서(특히 누가복음)에서 나온다. 이 용어는 기적이 그 목격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기술하기 위하여 사용된다(예: 막 5:20; 눅 11:14). 그러나 마 9:33에서 명백한 것은 신약의 구원 역사의 일부로서의 그 사건의 의의이다. 마 15:31도 마찬가지다. 이형(variant) 표기 에다우마산이 나오는 마 9:8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에 대하여 자신을 내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인격적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기쁨에 찬 놀라움을 표현하는데 이용된다.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도 놀라움(기이함)을 야기시킨다(마 8:27; 눅 8:25).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신 사건에서는, 이 용어의 의미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여 '경배하여'("절하며")라는 말로 대체한다(마 14:33). 마 21:20에서 제자들이 무화과 나무의 시든 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마 21:21-22의 예수님의 응답을 고려해 볼 때, 의심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행동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놀라움을 야기시킨다. 눅 4:22에서 청중들은 비록 여전히 비평적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설교의 매력 뿐만 아니라 그 은혜로운 내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금에 관한 논쟁에서 예수님의 지헤로우신 대답에 청중들은 놀라움(기이히 여김)을 발한다(마 22:22). 눅 11:38(바리새인), 막 15:5(예수님께서 그런 설득력 없는 고소에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실 때의 빌라도), 막 15:44(예수님께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그가 들었을 때의 빌라도)에서 이 용어는 놀람(surprise)을 가리킨다.|누가복음의 유아 기사에서(눅 1장과 2장) 다우마제인이 4회 언급된다.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오래 지체함과 그가 말을 못하게 됨이 백성들을 놀라게 하여(눅 1:21-22) 그들은 그것을 무언가 비상한 일이 일어났으며, 그가 환상을 보았다는 징조로 여겼다. 말을 할 수 없었던 부친이 세례(침례) 요한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백성들이 놀라와했다(눅 1:63). 목자들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눅 2:18)와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서 시므온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들도 놀라움을 자아낸다(눅 2:33). 이 모든 사건에는 사람들로 기이히 여기게 하는 것이 있다. 누가의 부활절 기사는 이 단어를 두 곳에서 사용한다. 눅 24:12에서 베드로는 여인들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음을 보았다. 이에 그는 그 된 일을 놀라와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누가는 눅 24:41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이 얼마나 기쁘고도 놀라웠던지 믿을 수 없었던 것을 묘사하고 있다. 부활하신 주의 모습이 두려움을 자아내었다는 사실이 눅 24:37에 이미 언급되었다(참조: 요 21:12의 암시). 그러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활절의 기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눅 24:41; 마 28:8; 참조: 요 20:20).|② 예수님도 두 번 놀라시는데, 한 번은 나사렛 사람들의 믿음 없음 때문이요(막 6:6). 또 한 번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다(마 8:10; 눅 7:9).||(b) 행 2:7에 따르면 성령이 오실 때 모인 유대인의 무리가 놀라고 기이히 여겼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앉은뱅이의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운 놀람이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대제사장들에게 있어서 놀라움의 대상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과 또한 그들이 "학문 없는 범인"이라는 사실이다(행 4:13). 이 외에도 사도행전에서 구약성경의 기사들과 관계되거나(행 7:31; 참조: 단 8:27) 인용될 때에 이 용어가 나타난다(행 13:41; 참조: 합 1:5).||(c)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뜻으로는 드물게 사용된다. 예수님께서 배우지 아니하고도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심을 기이히 여김에 대해(요 7:15) 예수님은 그의 교훈이 그를 보내신 아버지로부터 옴을 지적하여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요 7:21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면서도, 그들이 그가 안식일에 행한 일을 기이히 여기고 노여워함을 지적하신다(참조: 요 7:23). 예수님의 일들이 불가피하게 놀라움을 자아낼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메 다우마세스("기이히 여기지 말라")라고 이의를 제기하신다(요 3:7, JB; 참조: 요 3:7).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관한 전혀 생소한 말에 감정이 상한 것은 아니고 단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전 5:9)하고 질문할 뿐이다: 그는 믿음으로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메 다우마세스가 요 5:28 이하와(청중은 죽은 자가 생명과 그들의 말로인 심판으로 부활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기지 말아야 하며, 아울러 이 말씀에 순응해야 한다) 요일 3:13에서도(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미워함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하니 그들이 능히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까닭임) 발견된다.||(d) 바울서신에서 두 구절을 언급하고자 한다. 갈 1:6에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토록 속히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놀라워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의 거짓 교리 선생들에 관하여 논하게 된다. 살후 1:10에서 수동태는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하나님의 영광의 종말론적 현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이 단어는 "영광을 얻으시고"와 병행되어 있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참조: 왕하 5:1; 사 61:6).||(e) 유 1:16의 언어는 70인역본의 용법대로(아첨하다) 사람들에게 나타난 편파성을(다우마존테스 프로소파) 표현하는 유대 기독교적 언어이다(참조: 요 3:13).||(f) 요한계시록은 이 단어를 4회 사용한다. 계 13:1 이하는 적그리스도의 화신인 짐승이 바다에서 등장할 때에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른다'. 이 이상히 여김으로 인하여 그 짐승과 그의 배후의 권세자 곧 용에게 경배하게 된다.|계 17:8의 기이히 여김(놀람)도 이 경배를 말하는 것이다. 묵시적 묘사의 모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Caesars) 숭배였다. 계 17:6 이하의 예언자의 기이히 여김은 이와 다르니, 이것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큰 바벨론"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참조: G. Bertram; W. Mund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