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59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원(하는 것)
qevlhma
뜻 will, 의도, 의향 intent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델레마(Antipho soph 이래로)는 델로($2309: 바라다, 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본래 '소원, 목적'을 의미하며, 그 다음 '욕망'(성적 욕망도)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 인간의 '욕망', 왕의 '의지, 자아 의지'를 의미하게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a) 델레마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페츠(즐거워하다, 기뻐하다)와 라촌(기쁨, 호의, 뜻, 소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델레마는 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예:시 40[39]:8; 렘 9:23; 말 1:10)을 나타내나, 하나님의 뜻으로도 나타나며(시103[102]:7; 사 44:28), 특히 하나님의 뜻을 행함(예: 시 103[102]:21; 시 143[142]:10); 델레마가 사람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소원'(예: 시 107[106]:30), '뜻, 의지'(예: 왕의 뜻, 단 11:3, 70인역본)를, 또한 부정적으로는 '악의'(ill-will), '독단적인 행동'(렘 23:26; 집회서 32:17)을 나타내기도 한다.||(b) 헤르메스 문헌에서는 델레마는 상당수가 신의 선하고 주권적이고, 창조적이고, 자기 결정적인 의지를 가리켜 사용했다. 랍비들의 글에서 델레마는, 하나님의 의지는 종종(주기도문에서처럼) 그의 이름, 통치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델레마는 신약성경에서 62회 사용되며, 그 중에 60회는 단수, 2회는 복수(행 13:22; 엡 2:3)로 나타난다.||(a) 사복음서에서 델레마. 사복음서에서 마태와 요한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보다 자주 말한다. 그러나 마가는 막 3:35에서만, 누가는 눅 22:42에서만 말한다.|① 마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따라서|마 7:21-마 7:23은 유대교에서와 같이 마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이 토라와 일치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은 불법을 행한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인 목적을 나타낸다(참조: 마 22:34-마 22:40; 마 24:12).따라서 마 18:4에 의하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 26:42에서 하나님의 델레마(뜻)에 대한 예수님의 복종은 오직 겟세마네의 기사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병행구, 눅 22:42).|②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자의 뜻을 자기의 전생애의 기초와 내용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하신다. 요 4:34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5:30에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 판단하신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6:39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세주(소테르, 참조: 요 3:17)인 예수님이 생명을 약속 받은 자들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요 6:40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생명을 얻는 자들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깨닫고 그 구원을 간직한 자들, 즉 그를 믿는 자들이다("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외에도 요한은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요 9:31; 요일2:17) 인간의 뜻이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요일 5:14이하).|요 7:17에서 계시자의 정당성을 실현하는 유일한 기준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그러나 요한에게서 윤리가 신앙보다 우월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다시금 지식이 신앙에 순종하게 됨을 의미한다.||(b) 바울 서신에서 델레마는 가장 자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롬 2:18에서 하나님의 뜻을 토라와 동일시한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오직 여기서만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율법 학자는 그가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으므로 소경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그 자신의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바로 그 모순은 하나님의 뜻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그리스도는 새 세대의 여명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즉 성령을 받아 생각이 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롬 12:2).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합당한 행동을 해야한다(롬 12:2).|② 살전 4:3에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성화(기록)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③ 살전 5:18에서 하나님의 뜻은 항상 감사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④ 골 1:9; 골 4:12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성경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에 관계되어 있다. 즉 그것은 교리의 지식, 토라에 대한 성장과 관계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성장과 관련되어 있다.|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의 형상을 만든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의 생애의 희생(sacrifice )는 하나님의 뜻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고후 1:1; 골 1:1; 엡 1:1; 딤후1:1), 그의 사도직의 수행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었다(롬 1:10; 롬 15:32).|그렇지만 고후 8:5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뜻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⑥ 에베소 교회에서 축복의 주체는 전 인류와 우주 역사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이다. 이 행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넓으신 구원의 뜻에 맞추어 아들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엡 1:5)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그의 구원의 뜻의 신비를 드러내셨다(엡1:9).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그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참조: 엡 1:10).|이러한 구원의 뜻에 기초하여 그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창조의 지혜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떴는데 이는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나타난다. 이스라엘을 그의 자유로우신 예정 안에서 그의 기업이 되게 결정하시고 그의 모든 역사하심을 계승하도록 결성하신 것도 또한 그의 뜻과 일치한다(엡 1:11). 델레마 투 데우(하나님의 뜻)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미리 정하신 구원의 뜻을 나타낸다.||(c) 후기 사도들의 기록에서 델레마는 의심없이 하나님의 뜻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능력을 표현한다. 특별히 신 의지의 능력은 히 10:7, 히 10:9이하의 예수님의 수난에서 보여졌다. 그리고 벧전 3:17; 벧전 4:19에서 보여졌다. 그것은 항상 "미쁘신 조물주"의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인류를 향해 선을 도모하고(요일 5:14; 히10:10), 각 사람에게 그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추어 주는,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앞에 즐거워하는 것을 이루는 자의 뜻이다(히 13:21).|(참조: Walter Bauer; M.Limbeck; D.Muller; G.Schrenk ).
델레시스
qevlhsi"
뜻 will.||#1.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델레시스는 후기 코이네 헬라어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델레시스는 70인역본에서 하나님의 뜻이나 선하신 기쁨, 인간의 욕망, 왕의 뜻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특수한 용법으로는 '큰 기쁨, 환희, 감미로움'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델레시스는 신약성경에서 히 2:4에 한번 나타난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증거와 함께 또한 표적들과 기사들과 자기 뜻을 따라 나눠주신 은사들로써 증거하셨다.|(참조: G. Schrenk).
뜻대로
qevlw
바라다, 원하다, ~하고자 하다, 좋아하다, 기뻐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델로는 본래 특별히 호머(Homer) 시대와 초기 아티카(Attic) 시대의 비문들에서는 에델로(%413)로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준비하다, ~을 좋아하다(택하다), ~하고 싶어하다',|(b) '바라다, 원하다, ~하고자 하다',|(c) '마음에 두다'|(d) 결심과 동시에 결정된 것으로서 '하고자 하다',|(e) 뜻을 강요하거나 압박한다는 의미에서 '~하려고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델로는 70인역본에서 약160회 나오며, 히브리어 하페츠(즐거워하다, 기뻐하다, 44회; 예: 시 18[17]:19; 겔 18:23), 아바(~하려하다, 기꺼이 하다, 33회; 예: 신 10:10), 아멘(거절하다, 20회; 예: 창 37:35)을 번역하고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델로는 신약성경에서 207회 나오며, 용법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a) 하나님의 델레인. 하나님의 델레인의 특징은 확정적이며, 확실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마 27:43(시 22:8을 이용)에서 델로는 하나님의 바램 혹은 기쁨을 표현한다: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그 밖의 곳에서 창조(고전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나 구원(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가리킨다.|마 20:14-마 20:15의 비유에서 가리키는 바는 하나님의 자유재량권이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롬 9:16이하에서 바울은 이것이 구원과 심판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바울은 전혀 인간의 책임에 관한 문제를 논하려 하지 않았다(롬 10:16). 하나님의 행위를 결정하게 하는 것은 인간 의지(델레인)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의지에 대한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인간의 노력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인간의 반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의로 긍휼을 베푸신다(참조: 17절).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계획에 순응하시며 그것을 후회하시지도 않고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성취하신다(롬 10:18). 바울의 주석은 합리적으로 분석되어 있지 않으며 그 방법에는 고의적인 방해물이 놓여있다.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시다"(참조: 롬 9:24이하)라는 말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지금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이 멸하기로 되어있던 자를 포함하여(롬 9:22),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거침 돌이 이제는 바울로 하여금 오히려 그 거침돌 안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참조: 롬 9:33, O.Michel.).|롬 9:22의 "(하나님이) ~하고자 하사"는 양보("비록 하나님이 그들을 오래 참으셨을지라도")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인과관계(왜냐하면, ~할 작정으로)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낸 방법이었다(참조: G.Bornkamm ).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긴다는 것을 관용과 진노로 알게 하려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의 뜻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진노의 그릇"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은총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들을 참으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을 아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목표이다(딤전 2:4).|골 1:27에 의하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가 이방인들에게 선포된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으로 이것은 특히 골 1:27에서 강조되어 있다.|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모든 사차원의 시공(時空)은 하나님의 구원의 뜻에 대한 비밀이 그리스도 사건을 믿는 자들에게 밝혀지기로 한 때를 향하여 움직여 가고 있다. 당분간은 이러한 뜻이 믿는 자들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이해되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모든 인간의 구속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딤전 1:14).|이와 대조되는 것으로 눅 4:6에서 마귀의 거짓된 주장이 나온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하나님의 델레인은 또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표현하는데, 특히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마 9:13; 히 10:5, 히 10:8).|나아가 이 단어는 그의 백성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도하심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의를 행하기 위해 고난을 당해야 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b) 예수님의 델레인.|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지의 능력을 인정한다.|눅 9:54에서 제자들이 징벌의 기적을 그릇되이 기대한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막 14:12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즉각 따를 채비를 하고 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마 15:32이하에서 예수님의 델레인은 기적을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예수님의 뜻은 막 3:13에서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막 1:40-막 1:41; 마 8:2-마 8:3에서 병을 고치실 때 나타난다. 예수님의 뜻은 요 5:21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실 때와 요 17:23에서(기도 중에) 그의 영광의 환상을 제자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에서도 나타난다.|제자들의 미래는 전적으로 성자의 이 전능하신 뜻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이하).|②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의 소명에서 그의 뜻은 우리의 인간성을 그가 공유하심을 증거한다. 막 7:24에서 예수님의 뜻은 좌절되기도 한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실로 인간의 거부는 그의 구원 의도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마 23:37; 눅 12:49).|겟세마네의 기도는 독립적인 인간의 의지의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의지를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킨다(막 14:36; 막 26:39). 이 기도에서 어떤 불변의 권세에 침묵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그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 그 목표에 이르도록 돕는다는 능동적인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c) 바울의 델레인. 교회들에 대하여 사도로서의 권위적 행동을 행함에 있어서 그의 델레인을 표현한다. 바울은 가르침의 요점을 강조할 때(살전 4:13; 고전 10:1; 고전 12:1; 롬 11:25), 개인적인 진술을 할 때(롬 1:3), 논쟁에서 의도를 표현할 때(갈 3:2), 또는 목회 방향을 제시할 때(고전 7:32) 델레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d) 신앙의 델레인.|① 공관복음서에서 신앙적 델레인은 신앙적 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19:17에서는 유대적인 신앙의 추구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막 8:34에서는 제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10:35과 갈 4:21에서는 잘못 인도된 소원이 다루어진다.|다른 한편 마 15:28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향한 믿음을 암시한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막 10:51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요 5:6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더러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가 요구하신 것은 바로 믿음이다.|요 7:17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를 나타낸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15:7에서 효력있는 기도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자하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히 13:18에서는 성결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벧전 3:10에서는 참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참조: 마 7:12의 델레인의 한정적 역할).|계 22:17에서 생명수를 갈망하는 자는 그리스도께 옴으로, 즉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② 바울 서신에서 신앙적인 델레인은 행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들과 연결되어 나온다.|빌 2: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뜻하시고 행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고후 8:10-고후 8:11에서, (기부금, 즉 연보를) 주는 행위는 "마음에 원하던 것", 즉 준비한 뜻을 따르는 것이다: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대로 하라".|갈 5:17에서 원하는 것과 행함은 서로 작용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5이하의 주석에 나타난 원함과 행함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불일치점들이 있다. 일반적인 견해에 다르면 그 차이는 인간의 자아 속에 자리잡은 존재 때문으로 보여진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율법 안에서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계속 이루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육(Flesh)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있는 분열이 율법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데 …인간에게 있는 이 분열은 근본적으로 바로 그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O.Michel, op. cit., 186).|인간은 이 분열을 스스로 극복할 수가 없다(심지어 믿는 자도 그 분열에 빠져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 아래에 있을 때만 극복해 낼 수가 있다(롬 8:2). 율법 자체가 아닌 성령만이 의지에 작용하여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게 한다(참조: 롬 8:4). 자기 의를 추구할 때 의지는 사르크스(육)의 노예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지는 성령에 의해 자유하게 된다. 바울의 경우에 참된 의지의 자유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영적 의지가 법적 의지를 대신함으로써만이 얻어질 수 있다. 롬 9:16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의지와 노력은 하나님의 의지와 긍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롬 9:18, 롬 9:22).|③ 신앙적인 자발과 반대되는 거부는 마 21:30의 비유와 마 23:37의 예루살렘의 거부, 눅19:14의 배척, 요 5:40의 예수님께 오기를 거절하는 것, 행 7:39의 불순종, 계 2:21의 회개의 거부에서 볼 수 있다. 요 8:44에는 악을 행하려는 굳은 의지가 언급되어 있으며, 막 8:35에서는 가치를 잘못 판단하는 정신적 태도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D. Muller; G. Schrenk).
기초
qehevlio"
기초의 of founda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데멜리오스(Homer)는 티테미($5087: 놓다, 두다)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단어는,||(a) '아래에 놓인, 기초로서 놓인, 기초에 속하는, 기초의'를 의미하며,|(b) 실명사로 '아래에 놓인 것, 기초, 주춧돌'을 의미한다.||이 단어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사용할 때에는 가령 집이나 도시나 큰 건물 따위의 기초를 가리키며, 전이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가령 법률 문서에서는 건물의 소유권을, 철학 사상에서는 철학 체계의 기초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절대적 확실성 및 모든 존재의 궁극적 기초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데멜리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기초를 놓다'를 뜻하는 야사드의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암 1:4-14; 암 2:2, 5에서는 '성채, 궁성'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르몬의 역어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서 '기초', '근거'를 말할 때, 그것은 결코 헬라적, 철학적 의미로 궁극적이고도 자족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집의 기초(왕상 7:9 이하; 렘 51:26), 도성(암 1:4 이하; 암 2:5), 산(신 32:22; 시 18:7), 땅(미 6:2; 잠 8:29), 하늘(삼하 22:8)의 '기초'에 대해 사용되었다. 그 요점은 이 기초들이 그 자체로는 안전한 것이 못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놓으신 것으로서(잠 8:29; 사 14:32; 참조: 욥 9:6), 다시 파괴될 수도 있는 것(신 32:22; 애 4:1; 시 18:7)이라는 점이다. 이 세계의 안정성은 이 세계 자체의 고유한 소유가 아니라 신비에 쌓여 있고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인 하나님의 기초를 놓는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만물의 기초는, 시편 18편(특히 시 18:7, 15)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떨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또한 땅의 기초의 영원성과 안정성도 흔들리게 한다.|사 28:16(참조: 사 54:11)은 '기초'라는 개념의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여호와 자신이 친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초와 모퉁이돌을 놓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 새로운 건축의 이미지는 장래의 새로운 큰 도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 안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시온은 열방을 위한 장소가 될 것이다(미 4:1 이하). 머지 않아(참조: 엡 2:20; 벧전 2:4 이하) 이 주춧돌(사 28:16)이 메시야(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데멜리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그 의미는 헬라어의 문헌의 용법과 같다.||(a) 누가는 데멜리오스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어떤 건물의 기초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였다.|① 눅 6:48; 눅 6:49,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② 눅 14: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③ 행 16:26,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b) 그러나 히 11:10과 계 21:14; 계 21:19에서 이 단어는 장래에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가리킨다.|① 히 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② 계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③ 계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c) 데멜리오스는 비유적으로 교회의 '기초'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롬 15:20에서 더 깊은 기독론적 내용과 교회론적 내용이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기초'로 묘사한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② 고전 3:11에서 역시 그리스도를 '기초'로 묘사한다: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③ 엡 2:20에서 사도와 선지자들을 '기초'로 묘사하고, 그리스도는 이 기초의 모퉁이돌이라고 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④ 딤후 2:19에서도 같은 맥락을 따라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이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적 용법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항상 그러한 비유가 설명하는 필연적인 주제라는 사실과 데멜리오스의 비유적인 의미의 결합으로부터 자연히 생겨난다. 건축 또는 세움의 사상은 신약성경에서 친숙한 사상의 하나이다. 교회와 공동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집이며, 끊임없이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세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이 집의 터(기초)이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주요한 제자들 중 몇몇, 특히 베드로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의해 건설되는 집이나 혹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구성원들에 의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되는 집이다. 그 기초는 그리스도이지만 사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참조: 마 16:18). 이 집은 하나님의 집이다. 이 개념과 그와 연관된 데멜리오스 사상의 뿌리는 구약성경이다(참조: 사 28:16; 계 21:14; 계 21:19).||(d) 히 6:1에서 데멜리오스는 가르침의 기초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완전히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데멜리오스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적 교리를 의미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기초 지식과, 좀 더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보다 진전된 통찰이 구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데멜리오스는 이러 저러한 그리스도교 교리 가운데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구별을 짓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울 서신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관계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참조: K. L. Schmidt; J. Blunck).
기초를 두다
qemeliovw
기초를 두다,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데멜리오오(Xen. 이래)는,||(a) '기초를 두다(놓다), 기초를 닦다',|(b) 비유적으로(Diod.), '견고하게 하다, 강하게 하다, 확고하게 하다, 확실히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데멜리오오는 70인역본에서 41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사드(세우다, 기초를 두다, 고정시키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왕상 6:37; 학 2:8; 슥 8:9).||#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데멜리오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데멜리오오는 '기초를 두다(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②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b) 데멜리오오는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②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과 사랑으로 강하게 하실 때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실한 기초 위에 그의 집, 즉 교회를 세운다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 L. Schmidt).
하나님의 가르치심
qeodivdakto"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1. 헬라어 용법.||형용사 데오디다크토스는 데오스($2316: 하나님, 신)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은'을 의미한다(교회 문헌).||#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데오디다크토스는 신약성경에서 살전 4:9에 한번 나온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참조: 렘 31:34; 사 54:13; 요 6:45).|(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 Stauffet).
데오마케오
qeomacevw
하나님을 대적(대항)하여 싸우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데오마케오는 데오마코스($2314: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과 싸우는)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을 대적(대항)하여 싸우다'(Eur., Xen., Diod.)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데오마케오는 70인역본에서 외경 마카베오이서 7:19에 한번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데오마케오는 신약성경에서 행 23:9TR(공인본문)에 한번 나온다: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하나님을 대적하는
qeovmaco"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데오마코스(Scymnus)는 데오스($2316: 신, 하나님)와 마코마이($3164: 싸우다)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자)'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데오마코스(Symm.)는 70인역본에서 욥 26:5; 잠 9:18; 잠 21:16에 나온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데오마코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5:39에 한번 나온다: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qeovpneusto"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감동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데오프뉴스토스(Ps. -Phoc. 129, Plut.)는 데오스($2316: 신, 하나님)와 프네오($4154: 불다, 숨쉬다)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호흡을 받는'이란 문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감(감동)을 받은', '하나님에 의해 감동된'이란 의미를 지닌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데오프뉴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3:16에 한번 나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하나님이 성경에 숨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성경이 인간들의 어떠한 기록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명시해 준다.|존 웨슬레(John Wesley)는 '하나님의 성경은 성경의 기자들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의 기도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감동시키며, 초자연적 능력으로 말씀의 이해를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의 학습에 유익하며, 무식한 자에게 훈계가 되고 오류와 죄에 빠진 자들에게 견책과 확신의 말씀이 된다. 또한 어떠한 잘못에도 교정의 지침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로 교육하는데 더없는 기준이 된다'고 논평했다(참조: J. G. Gould).|(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하나님
qeov"
하나님 God, 신 go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데오스는 기본어이며, '하나님' God, '신' god를 의미한다.||(a) 헬라의 신개념.|일반 용법에서 데오스는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사용되며, 명확하게도 사용되고 막연하게도 사용되어 신들, 신, 그 신, 신성(godhead) 사이에 의미상의 구별이 거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데오스는 일신론적 의미에서의 단일한 특정 인격체를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세계의 단일성을 표현한다.|헬라의 신개념은 본질적으로 다신론적이지만, 이는 많은 개개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신들의 질서정연한 전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견해는 사실상 데오스라는 말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로서의 제우스가 이러한 사상을 표현해준다. 제우스는 데오스의 첫 문자와 마지막 문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경건한 자들은 때때로 그를 단순히 신과 관련시킨다. 신들에 대한 다수 개념에서부터 신들의 계보와 계급이 발전된다. 우리는 높고 낮은 신들, 신들의 집안, 그리고 만신전을 본다. 제우스, 아폴로 등은 신이라고 불리우며, 우주도 역시 신이라 불리운다. 데오스는 자연적(원시적인 힘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가장 깊은 본질은 신이다. 헬라인이라면 요일 4:16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할 것이다.|그러나 본체(reality)는 다중적이며, 따라서 데오이(신들)가 사용된다. 영웅들, 비범한 사람들, 탁월한 통치자들도 신이라고 불리운다. 따라서 황제 제의에서 데오스는 관직의 명칭이다.|끝으로 철학자들은 데오스를 형이상학적 힘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종종 그들은 데오스를 신성, 선, 존재, 운명 등의 상당어로 사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화의 신적 인물들의 영적화 및 도덕화를 보게되며, 이는 저들의 위엄은 강화시켜주지만, 인간과의 관계에서와 신화적 존재와의 관계에서 근접성은 상실시킨다. 그러나 신의 형태는 비록 변화할찌라도 신 개념의 내적인 골자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다.||(b) 헬라의 신 개념의 내용.|신들은 하나의 주어진 요인(factor)이다. 신들은 비록 영원한 것들이긴 하지만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게된 것들이다. 신들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혼돈과 투쟁하여 원시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힘들을 통제하여 다스리는 질서요 형태(그러므로 세상의 의미)이다. 신들은 예를 들면 국가에서의 질서와 같은 인간적 질서와 동일시 된다. 그들의 영원성은 영원한 젊음을 포함한다. 신들은 우월한 능력과 지복을 누리지만 도덕적 진지성은 결여한다. 이들은 무한한 존재들이지만 우리들과 동일한 종류의 존재들이다. 그들 마저도 변경시킬 수 없는 비인격적 운명과 달리, 이 신들은 의미있는 계획과 목적을 가진다. 신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그들의 위엄은 가장 고귀한 생물체의 위엄이다), 그들의 감정과 관습도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참조: E. Stauffet, TDNT).||#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데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0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엘로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밖에 15개 이상의 단어들의 역어로도 사용되었다.|엘로힘은 창세기와 성경의 첫 주제이며, 구약성경에서 사용 횟수가 두 번째로 많은 명사로, '하나님, 신, 신들'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 1:1에서는 '우주의 주권적인 창조주 하나님' 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엘로힘의 어원에 대해서 어떤 학자들은 엘(하나님, 신. 강한 자)의 추정 어근인 울(강하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다른 학자들은 엘로아흐[하나님, 신]의 추정 어근인 알라(두려워하다)에서, 또 다른 학자들은 엘과 엘로힘은 모두 엘로아흐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한다.|보다 적절한 견해는 엘로힘이 엘로아(와 함께 알라)에서 유래하여 히브리 성경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엘로힘은 복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구약성경에서 복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단일 이방신을 가리키는데도 복수형 엘로힘이 사용되었다(예: 삿 11:24; 왕상 11:5; 왕하 1:2).|일반적으로 엘로힘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될 때 복수 어미는 일반적으로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며, 진정한 복수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명사 엘로힘이 항상 단수 동사, 그리고 단수 형용사나 대명사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창 1:1에서 바라 역시 3인 단수 완료형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 복수형은 완전을 나타내는 형태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그리고 그 단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시라고 이해한 것이다.|그리고 이 복수형이 사용된 이유의 또 하나는 성경 자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창세기 1장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단일성을 나타내면서도 위격의 복수성(삼위일체)을 허용해 줄 수 있는 용어의 필요성을 찾아보게 된다(창1:2, 26). 엘로힘이란 어형이 히브리어에서만 나올 뿐, 다른 셈어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심지어 성경 아람어에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엘로힘이 삼위일체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이심을 지칭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명임을 확증해 준다.|참 하나님으로서의 엘로힘은 인간에게 계시된 모든 신적 활동의 주체이자, 인간에게 받는 모든 참된 존경과 경외의 대상의 역할을 하신다. 이 한분의 신 외에는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사 41:4; 42:8; 43:10 이하). 이방신은 신이 아니다(레2:11). 그는 우주의 전능한 창조주(사 45:18), 우주를 지배하는 주권자(창24:3, 9; 신4:39; 10:17), 심판자 하나님(시50:6; 58:11; 75:7), 구원자 하나님(시 18:46; 신8:15; 렘20:24등),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사 30:18; 65:16; 렘10:10; 삼상6:20)등으로 나타난다. 엘로힘은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등)이 되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엘로힘이 나오는 3, 4개 구절이 문제가 된다. 시8:5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는 "천사", NIV는 "하늘의 존재들(heavenly Beings), 공동(하느님), 표준새, NASB, RSV 등은 "하나님"으로 번역했다.|출 26:6에서 엘로힘을 개역, 현대인, KJV,NIV,LB는 "재판관들", GNB는 "예배 처소", 표준새, 공동,(N)RSV는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이상의 구절에서 엘로힘은 그 문자적 의미대로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한다.|끝으로 엘로힘은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들(출 23:13; 24,32,33 등)에 대해 사용되었지만 이 경우 이스라엘의 엘로힘과는 다른 저속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데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31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데오스는 신적 존재 일반에 대해 사용되었다(행 28:6; 고전 8:4; 살후 2:4; 행 12:22; 갈 4:8).||(b) 데오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요 1:1; 요 20:28; 히 1:8; 히 1:9; 요일 5:20; 롬 9:5; 딛 2:13 등).||(c) 데오스는 참 하나님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관사를 가지는 경우(마 1:23; 막 2:12; 눅 2:13; 요 3:2; 행 2:22; 갈 2:6 등).|② 관사가 없는 경우(마 6:24; 눅 2:14; 요 1:18; 롬 8:8; 롬 8:33; 고후 1:31; 고후 5:19; 고후 6:7; 살전 2:5 등).|③ 호격으로 나타나는 경우(막 15:34; 눅 18:11; 히 1:8; 히 10:7 등).||(d) 데오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사람에 대하여(요 10:34; 요 10:35),|② 아무개가 전적으로 자신을 바쳐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사는, 그러한 인격이나 사물, 식욕, 배에 대해(빌 3:1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Quell).
하나님을 공경하는
qeosevbeia
경건, 하나님을 경외함, 종교, 신앙.||#1. 일반 헬라어의 용법||데오세베이아는 데오세베스($2318)에서 유래했으며, 경건, 하나님을 경외함, 종교,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데오세베이아는 참된 경건이란 의미에서 신들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오세베이아는 유세베이아와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보다 좁은 개념을 가진다. 데오세베이아는 내적 태도나 성향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경건의 실행이나 이행, 또는 예배의 형태로서 경건한 행위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데오세베이아는 70인역본에서 8회 나오며, 정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주를 경외한다'는 의미로 나온다(창 20:11; 욥 28:28).||#3. 신약성경의 용법||데오세베이아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2:10에만 나온다: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을 고백하는 여자들은 선한 행위로 그들의 고백을 입증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친다.|(참조: G.Bertram; J.H.Thayer).
데오세베스
qeosebhv"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1. 일반 헬라어의 용법||데오세베스는 데오스(하나님, 신)와 세보(%65: 경외하다,예배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소포클레스(BC.496-406) 때부터 나타난다.|이 단어는 참된 경건을 의미하며, 따라서 '신들을 예배하는 것'은 헬라 종교의 본질, 핵심과 목적이다.|이 단어는 윤리적 영역에서 진리, 의, 선양과 같은 표현들과 관련될 때 제의적 의미보다 윤리적 의미를 더 지닌다.|일반적으로 데오세베스는 인격에 대해 사용되며, 사물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다.||#2. 70인역본 및 유대교의 용법||(a) 데오세베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히브리어 예레 엘로힘(하나님을 두려워하는)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참된 신앙심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욥 1:1; 욥 1:8; 출 18:21).||(b) 데오세베스는 유대인들이 참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는 몇몇 비문들에서도 발견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추종자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는 그들이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데오세베스는 신약성경에서 요 9:31에만 나온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라고 하는 덧붙여진 언급은 요한복음의 이 진술이 구약성경적-유대적 전통에 굳게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은 유세베스와 포부메노스의 결합된 의미로 표현되고 있다(행 10:2).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즉 사람이 그에게 존경과 예배와 제사를 드림으로써 경배 받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합당한 거리가 유지되기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참조: G. Bertram; J. H. Thayer).
하나님의 미워하는(혹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qeostughv"
하나님을 미워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데오스튀게스는 데오스($2316: 신, 하나님)와 스튀게오(%327: 미워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신(god)이 미워하는'||(a) (Eur., Tro., Cycl. 등), '신이 버린',|(b) '하나님을 미워하는'(ADebrunner, Griech.).||#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데오스튀게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30에 한번 나온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이 악덕의 목록에서 데오스튀게스는 능동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증한(미운)'이란 의미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이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데오테스
qeovth"
신성 deit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데오테스(Plut.)는 데오스($2316: 신, 하나님)에서 유래했으며, '신성' deity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데오테스는 신약성경에서 골 2:9에 한 번 나온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본질, 곧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를 가지신 인간의 모습으로 현재하신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데오빌로
Qeovfilo"
데오빌로 Theophilus.||데오빌로스는 데오스($2316: 하나님)와 필로스($5384: 사랑하는, 친구)에서 유래했으며, '하나님의 친구'라는 의미를 지닌다.|데오필로스/ 데오빌로는 신약성경에서 누가의 기록(눅 1:4; 행 1:1)에만 나온다.|누가가 그의 서책을 증정하는 데오빌로에 대하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문(행 1:1)을 떠나서 전혀 알 길이 없다. 데오빌로가 실재 인물인지 아닌지는 논의가 된다. 이 이름이 데오스와 필로스의 합성어라고 한다면 어떤 개인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신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데오빌로를 신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기독교인 독자들의 상징적 이름이라 하기도 하며, 신을 경외하는 기독교적 교육을 받은 이방인 집단이라고도 한다.|그러나 분명히 "각하"란 용어는 그 당시 로마 제국의 높은 관직에 있는 고관에 쓰인 말이다. 누가는 후에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에게도 "각하"란 칭호를 사용했다. 이 경우에 데오빌로는 고유인칭 대명사이다. 그러면 데오빌로는 기독교에 관심이 많은 어떤 로마의 고관으로서, 기독교에 이미 입교한 신자로서, 기독교에 입교한 이방인 집단의 중심 인물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추측이지만 스트리터는 데오빌로를 도미디안 황제의 조카요, 상속자인 풀라비우스, 클레멘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아내는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순교 당했다. 누가가 그의 서책을 데오빌로 개인에게 증정했을지라도 그것은 역시 그를 중심한 신앙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누가는 데오빌로에게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을 상세히 기술하여 증정함으로 "그 배운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었다. 문제는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건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았으며 그것들 중에서 많은 구전과 전설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기독교 초보자들을 혼동시킬 수 있는 결점과 불완전을 포함하고 있었다.|그러므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그의 서책을 증정한 목적은,|(1)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이미 듣고 알고 있는 신앙에 더욱 굳은 확신을 주고,|(2) 그것으로 어떤 그릇된 전승들에 동요되지 않고,|(3) 어떤 전승들에 대하여 의심이 난 것들과 알고 싶어한 것들이 분명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이다.|(4) 그리고 누가는 아마 인간의 기억의 연약과, 한 역사가 다만 구전과 보도에 의했을 때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것에 첨부와 변경, 삭감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모양을 흐리게 하거나 다르게 만들게 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진실로 누가복음은 데오빌로와 함께 모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역사적 사실의 반석 같은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데오빌로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고 교회의 선교에 많은 공헌을 했으리라고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