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73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정결한
kaqarov"
깨끗한 clean, 순결한 pur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카다로스(Homer 이래)는 어원이 불분명하다.||(a)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본래 뤼파로스($4508: 불결한, 더러운)에 반대되는 물리적인 의미에서 '깨끗한'(예: 맑고 깨끗한 물, Eur. Hippolytus).||(b) 플레레스($4134: 가득찬)에 반대되는 것으로, 사이에 끼인 것 없이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에서 '깨끗한'.||(c) 아카다르토스($169: 불결한)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의식적으로 깨끗한'.||(d) 종교적인 의미의 '도덕적으로 순결한'을 의미한다.||* 헬라어에는 '순결, 정결'을 의미하는 두 개의 형용사, 즉 하그노스($53)와 카다로스($2513)가 있다. 하그노스는 본래 '거룩한'을 의미하는 어떤 어근과 관계가 있는 말로 신이나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사물이나 사람(제사 물건이나 제사 직원)에게 속해 있는 질적인 '거룩함'이나 '순결함'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욱 일반적인 용어로는 카다로스와 이 단어의 동족어들이 있는데, 이 단어들은 사람이나 사물의 제의적, 육체적 혹은 도덕적 청결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어근으로부터 나온 단어들이 특히 제한되어 대개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a) 카다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160회 나오며 18개의 히브리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가장 많이 타오르(의식적으로 '깨끗한, 순결한')를 번역한다. 그리고 카다로스는 나키(순결한, 결백한, 욥 4:7), 자카크(밝다, 순결하다, 결백하다, 욥15:15)를 번역한다.||(b) 구약성경. 출산이나 죽음과의 접촉으로 인한 부정(레 12장; 민 19:11)은 부정을 가져오는 적극적인 힘이다. 이방 제의와 관련된 것이나 여호와께 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이다. 어떤 동물들은 의식적으로 부적당한 것으로 간주된다(참조: 레 11장; 신 14:7이하). 물론 위생학이 어떤 역할을 한다(레 11:29 - 레 11:30).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에 강조점이 주어지므로 정결의 개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발달한다. 씻음, 희생 제사 등에 의한 정결 의식은 잃어버린 정결을 회복시켜주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출 19:10; 민 8:15). 하나님의 거룩함은 도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의적 정결은 도덕적 정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제의적 개념들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순전히 제의적인 개념들을 응징할 정도로까지 정결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한다.||(c) 후기 유대교에서 일부 집단들은 이와 정반대의 극단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나 헬레니즘 유대교(참조: Philo)는 고대의 제의적 개념을 강력하게 영적화 한다. 정결에 대한 제의 규칙들은 지지된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들의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상징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 순결이다(F.Hauck)||#3. 신약성경의 용법|카다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카다로스는 물리적 정결을 나타낸다. 이 의미는 전통적 견해를 따르는 구절들에 나타난다. 즉 물리적으로 정결한 것은,|① 히 10:22에서 제의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② 마 23:26에서 의식적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③ 마 27:59에서 일반적인 존경의 목적에 적합한 것이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④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술들은 유대교와 매우 밀접하다(계 21:18; 계 21:23; 계 15:6; 계 19:8; 계 19:14). 정결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하며, 부정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없다(참조: 계 21:27).||(b) 카다로스는 제의적 정결과 깨끗함을 나타낸다.|① 롬 14:20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에서 음식을 금하는 것에 대한 논쟁에서 바울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으로 만물의 종교적 정결을 주장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②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바울이 그의 통찰력에 근거하여 공동체의 규정을 세운 목회 서신에서 만물이 창조로 깨끗하다는 원리는 종교적으로 깨끗한 자들, 즉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그들의 전 삶을 영위하는 구원 공동체의 회중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그들의 내적 존재가 더러워져 있는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하지 않으며, 하나님께도 부적합하다. 그렇다면 순결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지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사물에 따른 부정이나 순수하게 제의적 부정의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도덕적 영적 정결의 개념이 그러한 개념을 초월하며 대신한다.||(c) 카다로스는 도덕적 순결에 대하여 사용되었다.|① 눅 11:41(참조: 마 23:25이하)에서 예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찾는 의식적이나 제의적 정결은, 그것이 오직 외적인 것들에만 고려한 것이므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순결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으로 이루어져 있다.|② 약 1:27에서 순수한 신앙심은 실천적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③ 벧전 1:22의 일반적 권고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영혼을 깨끗게 하고 순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을 할 것을 요구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목회서신은 딤전 1:5; 딤후 2:22에서 순결한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딤전 3:9; 딤후 1:3에서 선한 양심에 대하여 말한다. 즉 과거의 죄에서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께 전심으로 헌신하는 신자들의 내적 생명에 대하여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돌아온 순전함과 아무 거리낌이 없는 양심의 내적 통일을 표현한다: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행 18: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행20:26).|⑤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주제다. 요 15:3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깨끗해진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이러한 깨끗함은 말씀으로 말미암는다(참조: 요 17:14이하).|요 13:10이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세례(침례)를 가리키는 상징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용서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나타내는 본보기를 제공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정결
kaqarovth"
정결 cleanness, 순결 purit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다로테스(Xen., Mem. 2. 1, 22)는 카다로스($2513: 깨끗한, 정결한)에서 유래했으며, '정결, 순결'을 의미하며,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카다로테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온다. 출 24:10에서 토하르(정결, 정화)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하늘의 '깨끗함'(밝은 하늘)을 나타낸다. 지혜서 7:24에서 지혜의 '순결함'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다로테스는 신약성경에서 히 9:13에 한번 나온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여기서 옛 계명에 대한 새 계명의 우수성을 증거하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성경의 제의적 개념을 빌어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정화는 매년 반복해서 드리는 희생 제사에 의한 정화와 대조한다.|(참조: Walter Bauer; H.G.Link; J.Schattenmann).
의자
kaqevdra
자리 sea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데드라(Thu. 이래)는 카타($2596)와 헤드라(%61:자리)에서 유래했으며, '의자, 좌석'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데드라는 70인역본에서 16회 나오며, 모샵(자리, 회합, 주거), 야삽(앉다, 머무르다, 거주하다), 셰베트(자리, 좌석, 주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데드라는 신약성경에서 3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카데드라는 마 21:12에서 '의자'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병행구, 막 11:15).||⒝ 카데드라는 마 23:2에서 선생과 재판관처럼, 탁월한 지위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점유하는 존귀한 좌석에 대해 사용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전에 모세가 점유했던 좌석에 앉는 것, 즉 모세의 율법을 설명하고 옹호함에 있어서 스스로 모세의 후계자들로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앉다
kaqevzomai
앉다 s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케데조마이(Homer 이래)는 카타($2596: 아래로)와 헤조마이(%60: 앉다)에서 유래했으며, '앉다, 아래로 앉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데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7회, 마태복음에 1회, 누가복음에 1회, 요한복음에 3회, 사도행전에 2회 나온다.||(a) 카데조마이는 특별한 구별이나 영예를 나타낸다.|① 재판관들이 법정의 재판석에 앉는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② 예수님은 한 선생으로서 성전에 앉아 가르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마 26:55).||(b) 카데조마이는 실제적 이유로 인해 앉는 것을 나타낸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눅 2:46).||(c) ① 예수님이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셨다: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요 4:6).|②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앉아 있다: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요 11:20).|③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에 앉아 있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요 20:12).|④ 청년 유두고는 창에 걸터 앉아서 말씀을 들으며 졸다가 삼 층 누에서 떨어져 죽었다(행 20:9).|(참조: J.H.Thayer; Walter Bauer).
두루
kaqexh'"
잇따라, 연달아, 차례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카덱세스(Plut., Mor.)는 카타($2596)와 헥세스($1836: 다음)에서 유래했으며, '잇따라' one after another, '연달아' successively, '차례대로' in order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카덱세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온다(눅 1:3; 눅 8:1; 행 3:24; 행 11:4; 행 18:2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다
kaqeuvdw
잠자다 slee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① 동사 카듀도는 본래 문자적으로 '잠자다'는 의미를 가진다. 버질(Vergil; Aen., Ⅸ.)은 관심이나 염려를 풀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의 잠에 대한 경험을 묘사한다.|신 힙노스(Hypnos)에게 경의를 표하는 비문에는 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고대의 행동주의자들은 잠을 많이 자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일찍 일어났다. 해뜨기 전 이른 시간들은 지적인 생산(문학적 노작)을 하는 주요한 시간들이다. 위기에 처했을 때 평화롭게 잠자는 것(참조: 소크라테스)은 위대함의 표시였다.|② 인간 생활에서 잠자는 것은 초감각적 존재의 침투로 간주된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꿈을 과학적 근거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꿈은 대체로 번영이나 빈곤, 건강이나 질병 등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과 관계가 있었다. 신전에서의 수면에는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였다.|③ 잠은 비유적 의미로 주의집중의 부족이나 행위 능력이 부족한, 혹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가리키는 나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④ 잠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양면성을 포괄하기 때문에 삶 자체가 잠이 아닌가, 생명의 활동은 단순한 꿈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잠과 죽음은 동일시되기도 하며 따라서 불멸과 동일시되기도 한다.||(b) 신과 영웅에 대해.|① 호머는 신들이 잠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것도 이 잠이 영웅들의 잠처럼 확실하고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잠이라는 개념이, 자연의 의인화나 최고 의미에서의 신에 대한 언급이든지간에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다.|② 잠자는 신들에 대한 개념은 보다 덜 지적인 종교에서 나타나며, 죽음의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예를 들면 생명이 없으나 썩지 않는 아티스, 눈을 뜨고 잠자는 엔디미온, 크레타인들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제우스에 대한 숭배) 등이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듀도는 70인역본에서 36회 나오며, 주로 샤카브(7901: 눕다, 잠자려고 눕다, 휴식하다, 잠자다), 야샤브(3472: 앉다, 1회, 삼상 19:9), 야센(3463: 졸리는, 잠자는; 아 5:2)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잠자거나 눕거나 앉는 것, 무감각한 상태 등을 나타낸다.|70인역본에서는 의인들의 잠은 달콤하고(잠 3:24), 부자들의 사치스런 침상에 눕는 것을 비난한다(암 6:4). 잠자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이 오며(삼상 3:1 이하; 창 28:10 이하), 하나님의 심판에서 잠은 무감각 상태일 수 있다(사 5:20).||#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듀도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며, 주로 공관복음에 사용되었으며, 나머지는 바울 서신(4회)에 사용되었다.||(a) 문자적 의미.|①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잠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일반적인 사상(견해)을 찾으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이 세상과 삶에 대한 완전한 종교적 견해에 얼마나 관심이 적은가를 특별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신약성경은 잠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마 13:25; 막 4:27).|신약성경은 바울의 긴 설교 시간 동안에 한 청년이 깊은 잠에 빠져 지붕에서 떨어진 사실을 주저없이 말한다(행 20:9).|그러나 대체로 신약성경은 잠자는 것보다 깨어있는 것에 더 관심을 둔다. 예수님은 기도로 온 밤을 지새웠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눅 6:12; 막 1:35).|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였다(살전 2:9).|초기 공동체는 겟세마네에서 몇몇 증인들이 씨름한 잠을 거의 마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마 26:40 이하 병행구). 예수님은 그들을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셨다(마 26:41 이하와 병행구).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잠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역설적인 요구 내지는 책망의 물음으로 이해해야 한다(마 26:45a).|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활력이 넘치는 활동의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푹풍우 속에서 주무시는 놀라운 모습도 본다(막 4:33과 병행구).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잠은 공포감의 일소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에너지의 훈련된 집중을 증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밀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예수님은 격렬한 폭풍 속에서도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안전함을 아신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그들의 적은 믿음 때문이다(막 4:40과 병행구). 깨어있을 때나 주무실 때나 예수님의 평온한 확신은 하나님과의 깨어지지 않는 친교에 기초한다.|②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잠자고 있는 사람, 예를 들면 요셉(마 1:20; 마 2:13; 마 2:19; 마 2:22), 동방 박사(마 2:12), 빌라도의 아내(마 27:19), 바울(행 16:9; 행 18:9)에게 지시를 내리신다고 기록한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의 경험에 적용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사람들의 꿈의 생활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일반적으로 꿈에 대한 종교적 높은 평가는 신약성경의 신앙의 변두리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계시의 본질적 요소는 여기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적인 자기 현시에 놓여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꿈은 위험한 것이며,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망상이다(유딧 8).||(b) 은유적 의미.|① 이 용어는 코이마오($2837)보다는 비록 덜 자주 사용되지만, 죽음을 뜻하는 완곡어로 사용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이 용법에 특별한 기독교적 요소는 없다.|한 가지 예외는 마 9:24과 병행구이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여기서 복음서 기자가 죽음으로부터 실제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진정한 것일진데, 원래부터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지 어떤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고대의 사상에 비추어 가장 그럴듯한 의미는 소녀의 영혼이 몸을 떠났으나 아직 가까운 근처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되불리워졌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확실히 일반적인 죽음이 단지 잠자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② 카듀도의 특별 용법은 특별히 다가오는 재림에 비추어 신자들에게 기대되고 심지어 요구되어야 하는 믿음의 생활에 전심전력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가리키며 영적 혹은 비영적인 것에 대해 사용된다. 살전 5:6의 "자지 말라"는 요구는 그저 일반적인 지혜로운 한마디의 충고가 아니다.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는 단순한 격려의 말도 아니다. 문맥이 매우 명백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상황은 종말론적이다(참조: 살전 5:7). 비록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마 25:5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잠자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처녀들도 역시 잠을 자기 때문이다. 잘못은 바로 그 때 바로 그 장소에서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거저 기다림으로써가 아니라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구원받는다. 기다림에 대한 순간적인 해이가 우리를 정죄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분발할 수 없는 무능함이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참조: A. Oepke).
선생
kaqhghthv"
지도자 guide, 선생 teacher.||#1. 고전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카데게테스는 카데케오마이(%398: 앞서 가다, 인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인내자, 인도자, 지도자'(Numen. ap. Ath.),|(b) '교사, 선생'(Dion., Thuc., Plut.)을 의미한다.||문학이나 파피루스나 비문같은 문헌에서 카데게테스는 '개인 교사, 스승, 유급 교사'라는 의미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철학은 카데게테스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라고 했다. '므네사르쿠스는 그의 스승 필로(Philon)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Philoni tou kathegete, Numenius, frag. 28; ed. des Places, p.80). 1 세기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청년 데온(Theon)은 선생들의 부족에 대해 언급했다(P.Oxy. 2190, 7, 15, 24); 2-3세기에 한 어머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프톨레미(Ptolemy)가 다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떠나서 학문을 돌볼 교사가 없어졌으므로 그녀의 아들에게 다른 교사를 찾기 위해 그녀의 파이다고고스($3807)와 협력할 것을 권한다. 그런 교사는 물품과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다. 하드리아(Hadrian)의 시대, 이집트 테베의 율리아 파시클레시아(Julia Pasicleia)는 선생 아카레스토스(Acharestos)의 아내이다(Dittenberger, Or. 408).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는 그의 선생 세쿤도(Secundus)를 위해 동상을 세운다(SEG XXIII, n. 115; 참조. 117, 6). 참으로 제자들은 자주 그들의 카데게테스를 기념하여 장례시 비석을 세우거나 비문을 짓는다; 예를 들면 리카오니스(Lycaonis)와 갈라디아(Galatia)에서 시데리온(Siderion)과 디아두메노스(Diadoumenos)가 그들의 카데게테스인 포스포로스(Phosphoros)를 위해 그것을 세운다(MAMA VII, 358); 로마에서 '선하고 훌륭한 후원자이며 선생인 황제의 의사를 위해 집을 재건축한다'고 한다.|구약성경에서 최상의 것은 '가르치는 이'(잠 5:13; 합 2:18)를 칭하는 말이며, 메시야적 중요성(사 30:20; 욜 2:23)을 지니는 모레흐인 것 같다. 우리는 새 언약파의 의의 선생, 공동체의 개인 교사요 지도자,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그의 마음의 길로 인도하고"(CD 1. 11; 4QpPs 37) 그를 겸손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1QH 18. 14) "은혜의 아들들의 아버지"(1QH 7. 20)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르게는 선생이라고 불리는 모레흐 하세데크를 상기하게 된다.||#2. 신약성경의 용법.||카데게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마 23:10에 2회 나오며, 마 23:8TR(공인본문)에 한번 나온다. 그리스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이 용어의 학구적 의미에서 선생이라고 불리워지는 지도자들, 아버지들, 장로들,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을 부추겼다는 비난의 한 가운데서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실 때에, 다른 복음서에는 비슷한 구절이 없는 삼중의 금지를 언명하신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호 디다스칼로스/ TR, 카데게테스)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카데게타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카데게테스)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마 23:10). 여기서 사용된 세 용어(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같은 뜻으로서 '선생(master-teacher)'을 의미하며, 카데게테스도 '지도자, 안내자(guide, conductor)'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교사, 영적 지도자'(educator, spiritual director)를 의미한다.|교리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와 대조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의 삼중의 헤이스 에스틴("하나이요")을 세우신다. 신뢰해야할 오직 한 분의 선생, 영적 생활을 위한 오직 한분의 지도자가 계시다(참조: 요 14:5; 요일 2:27).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SpicQ).
카데코
kaqhvkw
적합하다, 필요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데코(Aeschyl., Hdt. 이래)는 카타($2596: 아래로, …에 대하여, 맞서서, …에 따라서)와 헤코($2240: 이르렀다, 왔다, 참석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내려오다', 그 다음에 더욱 일반적으로 '~에게로 오다'(Thuc., Aeschin. 등).|(b) '적당하다, 적합하다, 어울리다, 필요하다'(P. Tebt., Xen.)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데코는 70인역본에서 약 30여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다바르(1697: 말, 일), 미쉬파트(4941: 판단, 재판, 공의, 법령, 권리)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당한 일'(출 5:13), '법령'(레 5:10), '권리'(신 21:17), '마땅한 것'(겔 21:32)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데코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a)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여기서 카데코는 '적합하다'(혹은 '합당하다'를 의미한다.|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연적인 인간이 판단하기조차 불쾌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결정은 도덕적인 감각의 완전한 상실을 가져온다. 즉 자연 법칙에 어긋나는 악덕, 따라서 이방인들도 건전한 자라면 합당치 못한 행위로 간주하는 그런 유형의 행동을 행하게 한다.||(b) 행 22:22,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여기서 카데코는 '필요하다'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Schler).
앉아 계시다
kavqhmai
앉다 s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데마이(Homer 이래)는 카타($2596)와 헤마이(%59:앉다)에서 유래했으며, '앉다, 아래에 앉다'를 의미한다. 앉는다는 것은 종종 고대 사회에서 영예와 권위의 표시였다. 예를 들면 왕이 신하들의 알현을 받기 위하여 자리에 앉았으며 법관이 판결을 내리기 위하여 자리에 앉았고 선생이 가르치기 위하여 자리에 앉았다. 고고학적인 발굴에 따르면 신들은 앉아 있는 반면에 인간들은 서서 기도한다. 그리이스-로마 세계에서 행해진 식사 때의 일반적인 관습은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라 식탁의 세 측면 둘레에 놓여져 있는 평상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식사하는 것이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데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220회 나오며, 대부분 히브리어 야삽(앉다, 남아있다, 머무르다, 거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사람들이 앉는 서로 다른 많은 상황에 대해 적용하는 다음의 용례는 의미있는 것이다.||(a) 왕이 권력의 상징인 그의 보좌에 앉는다. 왕의 오른편에 앉는다는 것은 최상의 영예에 대한 표시인데(시110 [109] :1) 왕이신 하나님도 하늘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왕상 22:19).||(b) 법관 또는 재판관은 재판하기 위하여 자리에 앉는다(출 18:13 - 출 18:14; 단 7:9-단 7:10).||(c) 선지자는 장로들 가운데서 자리에 앉는다(왕하 6:32; 겔 8:1).||(d) 다윗이 "여호와 앞에 앉았다"(삼하 7:18)는 것은 왕을 위하여 마련된 특권임이 분명하다.||(e) 앞에 나온 모든 것에서 보면, 앉는다는 것은 영예와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한 경우에 보좌나 앉는 자리가 사용되었음이 일반적으로 명백하다. 반대로 땅에 앉는다는 것은 굴욕의 상징이다. 이것은 고통받는 자(욥 2:8), 탄원자(삼하 7:18)의 특징적인 태도이다.||(f) 구약시대는 대부분 식사 때 식탁에 앉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예: 삼상 20:5, 삼상 20:18; 왕상 13:20).||#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92회 중, 복음서에 47회, 요한계시록에 33회, 사도행전에 7회, 서신에 4회 나온다.||(a) 카데마이는 중성적 의미로 '앉다, 아래에 앉다'를 의미한다.|예수님은 해변이나(마 13:1) 산 위(마 5:29; 마 24:3; 막 13:3; 요 6:3)에 앉으시기를 좋아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자연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본다.|베드로는 그의 주님의 운명에 대한 소식을 얻기 위해 대제사장 집 뜰에 앉아 있었다(마 26:58; 마 26:69; 눅 22:55이하; 참조: 에 5:13).|이상하게도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 밑에 앉아 있었다(마 27:36).|구약성경에 보면 식사 시에 때때로 앉아서 먹었다(참조: 창 27:19, 겔 44:3).|그러나 신약에서는 식사할 때 일반적으로 기대었다(마 9:10).||(b) 앉은 것은 특별한 구별이나 영예의 표시이다.|① 신적 존재. 예수님께 있어서 보좌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다(마 23:22).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묘사한다(계 14:2이하; 계 5:1이하; 계 6:16; 계 7:10이하; 계 19:4; 계 20:11; 계 21:5; 참조: 사 6장).|② 통치자들. 메시야적인 왕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이는 그의 영광의 표시이다(골 3:1). 그는 그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했으므로 그는 지금 최고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으며 모든 반대 세력들이 마지막으로 멸망할 때까지 앉아 계실 것이며, 또 그가 다시 강림하실 것이다(히 1:13; 마 26:64; 막 14:62).|③ 재판관들. 애굽의 신들이 재판을 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처럼 인간 재판관들도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는 표시로 앉아 있다(마 27:19; 행 23:3).|④ 교사들. 고대의 많은 교사들처럼 예수님도 랍비들의 관습에 따라(막 2:6; 눅 5:17) 가르치기 위해 앉으신다(마 13:1; 마 13:2; 마 15:29; 마 24:3; 막 4:1; 막 13:3; 요 6:3). 하나님(계 28:11)과 그리스도께서는(참조: 마 25:31) 심판을 베푸실 보좌에 앉을 것이다.|⑤ 집회. 고대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집회의 예로는 원로원, 산헤드린, 그리스도교회 회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계 4:4에서는 천국의 상원이 언급되어 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참조: 계 20:4). 이들은 또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도 묘사된다.||(c)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앉아서 드렸다. 초대 교회에서 앉는 것은 일반적이었다(행 2:2; 행 20:9; 고전 14:30; 약 2:3; 아마도 계 4:4).||(d) 앉는 것은 심리적 태도를 나타낸다.|① 슬픔이나 애도의 표시로서 앉는 것, 어둠 속에 앉는 것은 슬픔이나 애도의 표시이다(눅 1:79; 마 4:16; 참조: 사 9:1). 예수님을 애도하는 여인들이 그의 무덤을 향해 앉아 있었다(마 27:61; 참조: 겔 8:14). 회개하는 자들은 회개의 표시로 재에 앉는다(눅 10:13; 참조: 욘 3:6). 일반적으로 거지들은 구걸하기 위해 땅에 앉아 슬픔을 표현한다(마 20:30; 막 10:46; 눅 18:35; 요 9:8; 행 3:10; 행 14:8).|② 실제적 이유 때문에 앉는 것. 어떤 사람들은 실제적 이유로 인해 앉거나 앉아있다: 학자들(막 3:32; 막 5:15; 눅 8:35), 세리들(마 9:9), 환전상들(요 2:14),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마 11:16; 눅 7:32).||(e) 비유적 의미들.|① 카데마이는 눅 21:35에서 '거하다'를 의미한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② 카데마이는 '타다, 여행하다'를 의미한다(요 12:14이하; 행 8:28, 행 8:31; 계 6:2, 계 6:4이하; 계 6:8; 계 9:17; 계 17:3; 계 19:11; 계 19:18이하; 계 19:21).|(참조: Walter Bauer; J.H.Thayer; R.T.France; C.Schneider).
매일
kaqhmerinov"
매일의 dai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카데메리노스(Theophr. 이래)는 카타($2596)와 헤메라($2250: 날, 낮, 하루)에서 유래했으며, '매일의' daily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카데메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6:1에 한번 나온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앉게 하다
kaqivzw
앉다 sit, 앉게하다 cause to si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디조(Homer 이래)는 카데조마이($2516)의 다른 형태이며,||(a) '앉다, 아래에 앉다',|(b) '앉게하다'를 의미한다.|→ $2521 카데마이 참조.||#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디조는 70인역본에서 20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야삽(앉다, 남아있다, 거하다, 머무르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칼형을 번역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디조는 신약성경에서 4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카디조는 중성적 의미로 '앉다'를 의미한다. 마 5:1에서 예수님은 산 위에 앉으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b) 카디조는 특별한 구별이나 영예를 나타낸다.|①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로서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 곧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히 1:3; 히 8:1; 히 10:12; 히 12:2).|② 그리스도는 메시야 왕으로서 하나님과 나란히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왕은 이기는 신자들에게도 그와 함께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주신다(계 3:21).|그러나 적그리스도도 보좌 위에 앉을 수 있다(살후 2:4).|③ 신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이러한 존귀한 자리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이 개념에 대한 놀랄만한 확장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사적인 권리로써 이 영예의 자리를 요구했으나(막 10:37 - 막 10:40) 거절 당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앉으시는 그 보좌의 자리를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까지 한다(계 3:21; 마 19:28).|④ 인간 재판관들도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는 표시로 앉아 있다(요 19:13; 행 25:6; 행 25:17; 행 12:21). 신적 재판관은 최후의 심판 때에 앉으신다(마 19:28; 마 25:31).|⑤ 고대의 많은 교사들처럼 예수님도 랍비들의 관습에 따라(마 23:2) 가르치기 위해 앉으신다(마 5:1; 막 9:35; 눅 5:3; 요 8:2).|⑥ 고대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한 집회의 예로는 원로원, 산헤드린, 그리스도교회 회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계 20:4에서는 천국의 상원이 언급되어 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참조: 계 4:4). 이들은 또한 예배하는 자들이라고도 묘사된다.||(c)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앉았다. 고대의 신전들에서는 서 있는 것이 관습이었으나 장시간의 밀의 예배를 드릴 때는 앉을 필요가 있게 되었다. 회당에서 예수님(눅 4:20)과 바울(행 13:14; 행 16:13)은 앉아 있다.|마 23:2에서 회당의 장로의 우두머리를 위하여 마련된 특별석("모세의 자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d) 사람들은 실제적 이유로 인해 앉거나 앉아 있다. 마 13:48에서 어부들이 앉아서 고기들을 분류했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눅 16:6에서 앉아서 문서를 쓴다: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e) 카디조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카디조는 '머무르다'를 의미한다(마 26:36; 눅 24:49; 행 18:11).|② 카디조는 '거하다'를 의미한다(눅 21:35).|③ 카디조는 '말을 타다', '여행하다'를 의미한다(막 11:2; 막 11:7; 눅 19:30).|④ 카디조는 '임명하다'를 의미한다(고전 6:4; 엡 1:20; "세우다").|⑤ 카디조는 '앉아서 숙고하다'를 의미한다(눅 14:38; 눅 14:31).|⑥ 카디조는 '내리다, 머무르다'를 의미한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3).|(참조: Walter Bauer; J.H.Thayer; C.Schneider; R.T.Frame).
내리우다
kaqivhmi
내리다, 내려 보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디에미(Homer 이래)는 카타($2596: 아래로)와 히에미(%239)에서 유래했으며, '내려 보내다, 내리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디에미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5:19에서 카디에미는 지붕을 벗기고 병자를 담은 침상을 달아 '내리는 것'을 묘사한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b) 행 9:25에서 카디에미는 성에서 바울을 담은 광주리를 달아 '내리는 것'을 묘사한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c) 행 10:11에서 카디에미는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을 묘사한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행 11:5에서 마찬가지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되게하다
kaqivsthmi
인도하다, 임명하다, 지명하다, 책임을 지우다, 만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카디스테미는 카타($2596:아래로, ∼에 대하여)와 히스테미($2476: 서다, 두다, 놓다)에서 유래했으며, '내려 놓다, 그 자리에 두다'를 의미한다. 이 기본 의미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이 의미는 이 단어의 신약의 용법을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것이다.||(a) '인도하다, 가지고 들어오다, 데리고 오다'(Hom.Od.,13,274; Hdt.,1,64 등).||(b) '임명하다, 책임을 지우다, 지명하다'. 특별히 직무나 지위에 임명하는 것을 나타낸다(P.Hibeh,29,21, 주전 3세기 전).||(c) '∼하는 것이 생기게 하거나 일어나게 하다, 어떤 사람을 어떤 것이 되게하다, 그를 어떤 위치나 상태에 두다', '어떤 것이 되다, 어떤 것이다, ∼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2. 70인역본의 용법||카디스테미는 70인역본에서 가장 통상적인 의미는 '어떤 곳에 두다'는 의미와 '어떤 직분에 임명하다'는 것이다(참조:신 17:15; 삼상 8:1; 시 105:21).||#3. 신약성경의 용법||카디스테미는 신약성경에서 22회 나오며, 위의 a,b,c 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카디스테미는 행 17:15에서만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 나타난다. 베레아의 그리스도인 몇 사람은 바울을 인도하여 아덴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특히 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여서 예의있고 사려깊은 행동이었다. 그들은 그 다음에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에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베뢰아로 돌아왔다.||(b) 카디스테미는 b의 의미로 행 6:3에서 집사들에 대해, 딛 1:5에서 장로들에 대해, 히 5:1; 히 8:3에서 대제사장들에 대해, 마 24:45과 유사 구절들에서 한 가정의 관리자에 대해 '직무나 지위에 임명하거나 책임을 지운다'는 의미로 나타낸다.||(c) 카디스테미의 c 용법은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롬 5:19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곳에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대조되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한 행동은 모든 사람을 얽매는 결과를 낳았다. 이곳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나타난다(카테스타데산).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그들은 의인으로 간주될 것이다(카타스타테손타이).|롬 5:19절에서 한 쌍의 사실들의 대조는 각각 카디스테미로 묘사된다. 바울은 이 동사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 이 같이 표현하는 신인동형론적인 방법은 두가지의 대조되는 국면, 곧 죄인의 실존과 칭의를 나타낸다. 그 결정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에서 나타난다(빌 2:5 - 빌 2:11을 참조). 이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서는 실제적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인간"의 대표자인데 이것은 그의 불순종을 인하여 인간이 죄인이 된 사실을 예증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reality)은 믿음으로 보여진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그의 상실의 상태로부터 구원받은 자에게 계시되는 것이다.|(참조: S.Wibbing).|벧후 1:8에서 카디스테미는 참된 실현이나 달성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런 것이(타우타) 게으르지 않고(우크 알루스)...되지(카디스테신:되게 한다)". 약 4:4에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엑드라 데우 카디스타타이)"라는 말에서 카디스타타이는 에스틴($2076: 이다)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그는 하나님 앞에 원수이며, 또한 그는 실제적으로 이 원수이다는 것을 그 스스로 입증한다.|약 3:6에서도 카디스타타이가 나타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이 구절은 '그래서 혀는 불이며, 그것은 불의의 세계로서 우리 지체 중에 현존하고 있어서 온 몸을 더럽힌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문자적으로는 '그래서 혀는 불, 곧 불의의 세계이다. 이와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는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 의미는 에스틴($2076: 이다)보다 카티스타타이가 확증의 측면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참조: S.Wibbing; J.H.Thayer; A.Oepke).
카도
kaqov
~대로, ~만큼.||부사 카도(Lys., Pla. 이래)는 '~것에 따라 (일치하여)'를 의미하며,||(a) 종류와 양식에 대해, '~대로, ~같이, 알맞은대로, ~해야 하는 대로'를 표현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b) 정도에 대해, '~만큼, ~하는 정도'를 표현한다.|① 고후 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②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카돌리코스
kaqolikov"
일반적인, 우주적인, 보편적인.||형용사 카돌리코스는 카돌루($2527: 일반적으로, 대체로)에서 유래했으며, '일반적인, 우주적인, 보편적인'(Aristot., Polyb. 등)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카돌리코스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의 서신들의 표제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표제가 붙은 것은 이 서신들이 어느 한 교회만을 대상으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