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74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도무지
kaqovlou
완전히, 전적으로, 전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카돌루(B1-D)는 카타($2596)와 홀로스($3650: 전부의, 완전한)에서 유래했으며, '완전히, 전(체)적으로, 전혀'를 의미한다(Xen., Pla., Dem. 등).||#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카돌루는 신약성경에서 행 4:18에 한번 나오며, '전적으로'를 의미한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무장을 하다
kaqoplivzw
완전히 무장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도플리조(Soph. 이래)는 '완전히 무장하다, 무기를 갖추다'를 의미한다(Xen., Plut. 등).||#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도플리조는 신약성경에서 눅 11:21에 한번 나오며, '완전히 무장하다'를 의미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분명히 보이다
kaqoravw
∼를 보다, 고찰하다 look a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도라오(Homer 이래)는 카타($2596: 아래로, ∼대하여)와 호라오($3708: 보다)에서 유래했으며,||(a) '내려다보다, 위에서 보다',|(b) '분명히 보다, 조사하다, 주의하다, 분명히 깨닫다, 이해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카도라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대체로 감각적인 지각을 가르치거나 신인동형동설론적으로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다보시는 것을 나타낸다(욥 10:4).||#3. 신약성경의 용법||카도라오는 신약성경에서 로마서에만 한번 나타난다. 롬 1:20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지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보이지 않은 것은 외적이며 보이는 것에 의해서 지각된다("그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질은 이미 일어났던 사건들 속에서 이성의 눈을 통해 지각된다"). 구문이 지적인 이해에 선행하는 감각적인 지각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동시에 이해를 수반하는 감각적인 지각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포이에마타(만드신 것)는 단순히 경험적인 현상이 아니라 감각적인 지각과 지적인 지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고려되어야만 하는 현상이나 과정(예: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이다. 이 문맥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참된 지각이 죄인들의 자연적인 이성에 의해서는 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참조: 롬 1:19). 참된 지각은 자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행위에 의존한다. 이러한 일은 특별 계시 뿐만 아니라 일반 계시의 수준에서도 필요하다(W.Michaelis).|(J.H.Thayer; Walter Bauer).
따라
kaqovti
~에 따라서, ~때문에, ~처럼.||카도티(카드 호 티)는 '~것에 따라서'를 뜻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a) '~하는 한에서는, ~에 따라서'(행 2:45; 행 4:35).|(b) '~것 때문에, ~때문에'(눅 1:7; 눅 19:9; 행 2:24).|(c) '~처럼, 바로 ~같이'(유딧 2:13; 유딧 2:15; 유딧 10: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aqwv"
~에 따라서, 바로 ~처럼.||불변사 카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이후 세속 헬라어 문헌에서 종종 나타난다. 70인역본에서 약 280회 나오며, 신약성경에서 180회 나온다.||(a) '~에 따라서, 바로[꼭] ~처럼, ~와 같이' 눅 6:31; 요일 2:27; 눅 11:30; 눅 17:26; 요 3:14; 고후 1:5; 고후 10:7; 골 3:13; 요일 2:6; 요 15:9; 요 17:18; 요 20:21; 요일 2:18; 요일 4:17; 고전 15:49; 눅 24:24; 마 21:6; 눅 28:6; 막 16:7; 눅 1:2; 눅 1:55; 눅 1:70; 눅 11:1; 요 1:23; 요 5:23; 요 15:8; 롬 1:13; 롬 15:7; 고전 8:2; 고전 10:6; 고후 1:14; 고후 9:3; 고후 11:12; 엡 4:17 등.||(b) '~에 따라서' 즉, '~에 비례하여, ~정도로'(막 4:33; 행 7:17; 행 11:29; 고전 12:11; 고전 12:18; 벧전 4:10).||(c) '~한 이상, ~이므로, ~사실에 따라'(요 17:2; 롬 1:28; 고전 1:6; 고전 5:7; 엡 1:4; 빌 1:7).||(d) 단순한 오스($5613)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① 간접 화법에서(행 15:14) 본 단어가 설명 보족어를 추가하는 구실을 함(요삼 1:3).|② 시간에 대해, '~때에, ~후에', 많은 사람들이 행 7:17을 여기에 포함시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카도스페르
kaqwvsper
~와 똑같이||카도스페르는 '바로 ~처럼, ~와 똑같이'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카도스페르는 히 5:4에 한번 나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카이
kaiv
그리고, ~와 and.||접속사 카이는 주로 '그리고, ~와, ~하고, 또' and를 의미한다.||#1. 카이는 계합 접속사로서 연결 역할을 한다.||(a) 단어들 또는 용어들을 연결하는 경우.|① 말을 연결한다(마 16:1; 눅 8:15; 히 1:1; 롬 9:4; 롬 7:12 등).|② 숫자를 연결한다(눅 13:4; 눅 13:11; 요 2:20 등).|③ 부분을 나타내는 단어들에 일반적 개념을 결합시킨다. 따라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고 한마디로 말하여, 요컨데' 등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행 5:29; 마 26:59; 히 9:10; 롬 1:20). '그리고 특히'라는 의미도 가진다(마 8:33; 막 16:7; 행 1:14 등).||(b) 문장을 연결하는 경우.|① 마 3:12; 행 5:21 등.|② 마 7:25; 마 14:9 이하; 막 1:12-막 1:14; 눅 18:32-눅 18:34; 요 2:13-요 2:16; 고전 12:5-고전 12:6; 계 6:2; 계 9:1-계 9:4 등.|③ 부정문에 긍정문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눅 3:14; 요 4:11; 요삼 1:10; 마 5:25 등).|④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나온 논리적 귀결을 추가하는 구실을 한다(카이는 '결과'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러므로'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마 5:15; 히 3:19; 요일 3:19; 벧후 1:19등).|⑤ 어떤 수사학적 강조법으로서, 앞에서 말한 내용과 명백히 불일치하는 어떤 내용을 추가하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마 3:14; 마 6:26; 마 10:29; 막 12:12; 요 1:5; 요 3:11; 요 5:40; 요 6:70; 요 7:28 등).|⑥ 카이는 보조적 또는 설명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리고 실로, 즉, 다시 말하면'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롬 1:5; 행 23:6; 요 20:30; 행 25:7; 딛 1:10 등). '게다가 또'(행 22:25; 고전 2:2). '그리고 그것도, 게다가, 더욱이, 게다가 또한, 특히'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롬 13:11; 고전 6:6; 고전 6:8; 히 11:12).||(c) 카이...카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대등하게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복법이다. '~도 ~도, ~은 물론 ~도, ~뿐만 아니라 ~도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마 10:28; 막 4:41; 요 4:36; 롬 11:33; 빌 2:13; 빌 4:12 등).||#2. 카이는 부사의 성격을 띠고서 '또한, 역시'를 나타낸다.||(a) 단일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① '또한, 마찬가지로'(마 5:39 이하; 마 12:45; 막 2:28; 눅 3:14; 요 8:19; 롬 8:17; 고전 7:29; 고전 11:6 등).|② '~조차, ~까지'라는 의미에 상당한다(마 5:46 이하; 마 10:30; 막 1:27; 눅 10:17; 고전 2:10; 갈 2:17; 엡 5:12 등).|③ 비교를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더 한층, 더욱, 한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마 11:9; 히 8:6).|④ 분사와 함께 '비록 ~이라 할지라도'를 의미한다(눅 18:7RG).||(b) 대명사 및 불변사와 결합되는 경우에 '또한, 역시'를 의미한다.|① 비교의 부사와 결합한다(행 11:17; 고전 7:7; 고전 9:5; 롬 15:7; 고전 13:12; 고후 1:14; 엡 4:17; 엡 4:32; 엡 5:2; 기타; 롬 5:15; 롬 6:11; 고전 11:12; 요 6:11 등).|② "원인"을 나타내는 단어들에 추가되어, 앞에서 말한 내용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어떤 것을 표시해주는 구실을 한다(눅 1:35; 행 10:29; 히 13:12; 눅 11:49; 요 12:18).|(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야바
Kai>avfa"
가야바 Caiaphas(인)||카이아파스는 많은 학자들이 케파(돌, 바위, 반석)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혹자들의 견해는 카예파(억압, depression)에 상당하는 것으로 본다(잠 16:26의 탈굼에 카야파로 표기되어 있다.). 요세푸스(antt. 18, 2, 2)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다. 그는, A.D. 18년 가밋(Camith)의 아들 시몬이 해임된 후 유대의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이 직위에 임명되었으며(참조: Schurer, N.T. Zeitgesch.), A.D. 36년 시리아의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 의해 해임되었다. 비텔리우스는 대제사장 아나누스(Ananus, 즉 안나스 Annas, 가야바의 장인, 요 18:13)의 아들 요나단을 그의 후임자로 임명하였다(Joseph. antt. 18, 4, 3).|그러므로 가야바의 제사장직은 18년간 지속되었으며, 그의 전후의 사람들의 급속한 변동과는 대조적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한 대제사장이었다. 이것은 그가 판단력이 빠르며, 로마인들을 유화시키는데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 18:13에 의하면 그는 안나스의 사위였으며 안나스는 A.D. 15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하여 제사장직을 박탈 당했다.|신약성경에서 카이아파스는 9회, 복음서(마가 제외)와 사도행전에만 등장한다(마 26:3; 마 26:57; 눅 3:2; 요 11:29; 요 18:13; 요 18:14; 요 18:24; 요 18:28; 행 4:6).||(a) 마 26:57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병행구절인 막 14:53에서는 대제사장에게 끌려 갔다고만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그도 가야바인 것이다.||(b) 눅 3:2에서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세례(침례) 요한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서 같은 시기에 대제사장이 두 사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불트만은 말하기를 누가는 두 전통을 잘못 혼동하였기 때문에 그가 잘 아는 한 전통은 안나스로, 다른 전통은 제사장 가야바로 기록했다고 지적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누가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그것이 진정한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율법은 동일 시대에 두 대제사장이 있을 수 없고 대제사장은 한 시대에 하나만 있기로 한 것이다. 그 직무는 종신이고 그 계승은 세습이다. 그러나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선교 시대에 많은 불의가 대제사장과 관련된 것 같고 로마인들은 정치적 이유로 대제사장을 자주 갈았다. 로마가 팔레스틴을 통치하기 시작하자 대제사장직은 온갖 음모의 소굴이 되어 주전 27년으로 주후 26년 간에 28명의 대제사장이 갈렸다(W. Barclay). 그 결과는 자연 한 실제적 대제사장이 직무를 계속하고 있는데 또 다른 대제사장이 임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가 안나스와 가야바, 두 대제사장의 이름을 말한 것은 성전 안에서까지 이교도의 파괴적 세력들이 어떻게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종교적 혼란과 부패 및 대제사장들의 불의를 보이려한 것이다. 안나스는 몇 해 전에 면직되었으나 그 사위 가야바의 보필을 받으며 대제사장의 실제적 직무를 계속하여 행하고 있었다. 맨손(Mansos)은 '안나스는 대제사장의 직위에 앉아 있는 것과 꼭 같은 세력으로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불의한 대제사장들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곤욕을 겪도록 일한 장본인들이다. 이와 같이 악한 통치자들의 시대에 요한이 선교하기 시작했다.||(c) 요 11:47-53에 의하면 나사로가 살아난 후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것인지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백성이 망하지 않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고 말했다. 그의 제안은 산헤드린 공회에 받아들여졌다. 요한은 가야바의 말이 예언적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말은 가야바가 깨달은 것 보다 더 높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자는 제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만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요한이 가야바가 "그 해"에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세번씩이나 하고 있는데, 이것은 가야바가 해마다 대제사장으로 임명됐다는 것을 유대인에게 없는 습관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일들이 행해진 기억될만한 해라는 것을 지적한다.||(d) 요 18:13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보냈다. 이는 왜냐하면 그는 "그 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요 18:19-요 18:23을 보면 분명히 예수님은 안나스 앞에서 예비 심사를 받은 것 같은데, 이는 요 18:24에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 18:22에 보면 하속 하나는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 불렀다. 요한은 가야바가 대제사장이라고 기록했지만 분명 그 하속은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계속 불렀다(요 18:13). 요한복음은 가야바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야간 신문에 대하여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참고: 마 26:57-마 26:68; 막 14:53-막 14:65). 증인들이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드러내지 못했을 때 간사한 대제사장은 그 잡혀온 죄수로 하여금 자기가 메시야인지 아닌지 선언하도록 명하여 겉으로 그 대답에 자극을 받은 체하였다.||(e) 행 4:6에서 그의 이름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려고 모인 사두개인들 중에서 두 번째로 나타난다. 가야바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교리에 반대한 것 같이 이 일에 대해 초대 교회 박해 시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가야바 보다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은 안나스의 세력이 계속 강력하게 반영됐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아마 가야바는 행 5:17-행 5:21; 행 7:1; 행 9:1에 언급된 것과 같이 대제사장으로서 기독교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것 같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C. F. Pfeiffer).
카이게
kaivge
카이($2532)와 게($1065)를 보라.
가인
Kavi>n
가인 Cain.||카인이라는 이름은 금속세공업자를 뜻하는 아람어 카인과 어원이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유하다, 얻다'를 뜻하는 카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마도 '소유'를 의미할 것이다.||#1. 구약 및 유대교의 전통.||창 4:3 이하의 가인의 아벨에 대한 살인 기사는 두 형제의 신앙심과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다는 암시를 담고 있지 않다. 그 기사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며, 가인은 매우 화가 나서 그의 형제를 살해했다고 말할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유대교의 해석은 항상 이 이야기를 어떤 그럴만한 차이가 있다고, 즉 아벨은 경건한 자로 가인은 불경건한 자로 여겨졌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인간을 찻디킴(디카이오이)와 레샤임(포네포이)로 나누는 후기 유대교에서 지배적인, 이원적인 도식에 이르게 된다.|Tanch.(Buder) 16에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7제단을 쌓은 7명의 의인이 있었고 그들은 받아들여졌다. 1. 아담, 2. 아벨...등'. 유사하게 T. Sota, 4, 19에는 가인을 불경건한 자의 목록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차이는 또한 J. I. Gn. 4:8에 따르면 살인에 앞서 일어난 둘 사이의 언쟁으로부터 추론한다.|필로(Plilo)에서 그것은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의 체계로 짜여진다(아벨은 아레테[미덕]이고 가인은 카티아[사악]이다. Sacr. AC, 14; Det. Pot. Ins., passim).|창 4:4에서 어떻게 열납됨과 거절됨을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미해결인 채로 남아있다. 단지 데오도숀역과 교부들만이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아벨의 제물을 태웠으나 가인의 것은 태우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랍비의 기록들, 필로와 요세푸스는 이 설명을 알지 못하며, 또 이 설명은 중세의 유대교 해석학자들 이전까지는 발견되지 않는다.|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가?. 창 4:3에 대하여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왔는데 그것들은 질이 낮은 것들이었다'고 한다. Phil. Sacr. AC, 88도 비슷한 견해를 취한다: 아벨은 가인과 다른 제물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제물의 질은 제물의 받으심, 또는 거절에 대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생각되며, 이것은 함축적으로 그것을 바친 자의 질을 포함한다(참조: supra). 제물을 바친 자의 종교적 도덕적 태도가 결정적이라는 것은 오직 아벨이 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J. I. Gn. 4:8에만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다. '나의 행위의 열매가 당신의 것보다 나으며 당신의 것보다 앞서므로 나의 제물을 만족스럽게 받으신 것입니다.'||#2. 신약성경에서의 가인과 아벨.||유대교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의인 아벨을 언급한 마 23:35과 병행구절은 순전히 도덕적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고, 즉 그들의 행위에 의하여 그 형제들은 디카이오스($1342)나 포네로스($4190)라고 이해한다.|요일 3:12에서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한다. 두 형제의 악하거나 의로운 행위에는 오직 그들의 진정한 본성이 표현되어 있었다.|믿음과 불신앙간의 유사한 절대적인 대조와 함께 히 11:4은 믿음의 증인들의 명단에 아벨을 포함시킨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받으심으로 그는 의롭다고 증거하셨다.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셨는지 우리는 들은 바가 없다.). 그 구절의 끝맺는 말 "저가 죽었으나 말한다"는 것은 창 4:10을 지적한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살해된 아벨의 피는 살인이 살인자의 죽음으로 속죄될까지 복수를 부르짖는다. 이 근본적인 사상은 히 11:4에 의해 아벨이 아직도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에서 그의 무죄한 죽음에 대한 완전한 보상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한다(참조: 계 6:9-계 6:11). 히 12:24에서도 유사하게 아벨의 피가 예수님의 피에 대한 표상으로 역할할 수 있다. 속죄하는 예수님의 뿌린 피는 속죄를 요구하는 아벨의 그것보다 더 강하게 말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uhn).
가이난
Kai>navn
가이난 Cainan.||카이난은 히브리어 카이난(창제조자; 또는 소유자, 소유)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가이난'으로 번역했다.|구약성경에서 가이난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2명 나오며, 둘 다 신약성경에 나타난다.||#1. 에노스의 아들이며 아담의 증손자.||가이난은 아버지 에노스가 90세에 출생했으며, 70세에 마할랄렐을 낳았으며, 그 후 840년을 더 살았다(창 5:9-14). 대상 1:2에는 영어식 발음인 '게난'(Kenan)으로 표기되었다.|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눅 3:37).||#2. 아박삿(Arphaxad)의 아들이며 살라의 아버지,||신약성경에서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눅 3:35-눅 3:36).|(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새로 되는
kainov"
새로운 new.||#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카이노스(Aeschyl., Hdt. 이래)는 '새로운'을 의미하며,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형태에 관하여, '새로운'을 의미하며, 즉 '갓 만들어지거나 형성된 것, 사용하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b) 내용에 관하여, '새로운'을 의미하며 즉 '새로운 종류의, 전혀없는, 신기한, 전대미문의 것'을 표현한다.||(c) 일반적 용법에서 카이노스는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 곧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란 뜻을 나타낸다. 반면에 네오스($3501)는 아직 없었던 것, 막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뜻하는 시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오래 사용될수록 개념상의 차이는 점차 약화되어 갔다.||#2. 70인역본의 용법||(a) 카이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하다쉬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통 '새로운 것, 전에는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예: 출 1:8, 새 왕; 신 20:5, 새 집; 수 9:13, 새 포도주 부대; 왕상 11:29, 새 의복).||(b) 카이노스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구원에 대한 경험의 문제를 제기하고 또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활동을 알리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메시지에서 주로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 새로운 활동은 시내산의 언약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께서 자신의 뜻을 이스라엘의 심령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순종을 야기시키실 새로운 언약의 확립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이 여호와께서 인간 안에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언급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겔 11:19; 겔 18:31; 겔 36:26). 사 43:18이하에서 옛적 일과 새 일을 대조시키고 있다(참조: 사 42:9; 사 48:6).|그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시는 여호와의 새로운 활동을 이 민족과 모든 창조 질서를 포용하는 새로운 창조로 이해하는 것이다(사 43:16-사 43:21). 사 65:17이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선포한다(사 65:17이하).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선포에서 여호와께서 미래에 행하실 행동으로 기대되고 약속되는 "새 일"은 인간 자신의 내적 부분들로부터 새 세계라는 우주적 범위에까지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는 경험되고 기대된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시편 중에 있는 새 노래를 크게 부름으로써 응답한다(시 33:3; 시40:3; 시 144:9; 시 149:1이하).||#3. 신약성경의 용법||카이노스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용법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카이노스는 형태에 관하여 '새로운', 즉 '갓만들어진, 최신의, 사용하지 않은 것'을 나타낸다.|① 마 9:17에서, 갓 만들어진 새 부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병행구, 막 2:22; 눅 5:38).|② 눅 5:36에서 갓 만들어진 새 옷에 관하여 사용되었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병행구, 막 2:21)|③ 요 19:41에서 새 무덤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병행구, 마 27:60)|④ 막 14:24에서 새로 이루어진 '새 언약'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병행구, 눅 22:20, 고전11:25; 고후 3:6; 히 8:8; 히 9:15).|⑤ '새' 하늘, '새' 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벧후 3:13; 계 21:1.|⑥ '새' 예루살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3:12; 계 21:2.|⑦ '새'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엡 2:15; 엡 4:24.|⑧ 계 21:5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만물을 새롭고 더 좋은 상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⑨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 마 26:29; 막 14:25.||(b) 카이노스는 내용에 관하여 '새로운', 즉 '새로운 종류의, 전례가 없는, 신기한, 전대미문의 것'을 표현한다.|① '새' 교훈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막 1:27; 행 17:19.|② '새' 계명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요 13:34; 요일 2:7이하; 요이 1:5.|③ '새' 이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2:17(참조: 사 62:2; 사 65:15).|④ '새' 노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계 5:9; 계 14:3(참조: 시 143:9; 사 42:10; 시 32:3; 시 39:4).|⑤ '더 새로운'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행 17:21.|⑥ '새로운'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갈 6:15; 고후 5:17.|⑦ '새' 방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막 16:17.|(참조: Walter Bauer; J.H.Thayer; H.Haarbeck; H.-G.Link; C.Brown ).
새로운 것
kainovth"
새로움 newness.||#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이노테스(Thu. 이래)는 카이노스($2537)에서 유래했으며,||(a) '새로움'을 의미하며,|(b) '사용하지 않은 놀라운 것'이라는 이차적 의미도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카이노테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새로운 것'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왕상 8:53; 겔 47:12).||#3. 신약성경의 용법||카이노테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로마서에만 나온다.||(a) 롬 6:4에서 카이노테스는 '새' 생명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침례)의 상징은 두 측면이 있다. 곧 소극적인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 그리고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이고(롬 6:1), 적극적인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과 세례(침례)로 상징되는 무덤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상징화되는 우리의 새 생명이다(메이어). 여기서는 우리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더 깊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상징은 실제가 아니라 실제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obertson ).||(b) 롬 7:6에서 카이노테스는 영의 '새로운 것'을 묘사한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는 죄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뿐만 아니라 생활과 예배에 새로운 성질을 부여해준다.|(참조: Walter Bauer; J.Behm ).
그러나
kaivper
비록 ~일지라도, 그러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접속사 카이페르(Homer 이래; Od., Did., Syll.)는 카이($2532: 그리고, 또, 역시)와 페르($4007: 실로, 참으로)에서 유래했으며, '심지어, 비록 ~일지라도, ~이긴 하지만, 그러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접속사 카이페르는 신약성경에서 5회 사용되었다(빌 3:4; 히 5:8; 히 7:5; 히 12:17; 벧후 1:12).
가끔
kairov"
시간 time, 시점 a point of time, 순간 mome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명사 카이로스는(Hesiod Works 694에서 처음) 본래 '올바른 치수, 정확한 비율, 편리한 것, 적절한 것, 결정적인 것’을 뜻하였다.|물리적, 시간적, 사전적 내용과 아울러 카이로스는 '올바른 지점, 적합한 장소'를 뜻하는 처소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물리적, 시간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 카이로스는 사람이 결단을 해야하는 중대한 상황, 사람이 숙명적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긍정적으로, 그것은 기회 (참조: Aristotle, Eth.Nic. 1,4,p.1096) 혹은 '이익'을 나타내며, 부정적으로는, ‘위험’을 나타낸다(P1ato,Log. l2,945c).|카이로스의 물리적 의미로는 '중요성 importance, 규범 norm’(예: Aesch., Ag 7871)및‘지혜로운 중용 wise moderation’등이 있다(soph., QT l5l6).|시간적 의미에서 카아로스는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의 순간'(soph., El. l 292)을 묘사한다.|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른 시간 개념들과 동의어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아주 일반적인 '때나 기간($5550), 년의 계절(예: plato, Leg. 4, 709c), 시간이나 때 hour($5610: 호라), 지금($3568: 뉜), 오늘($4594: 세메론)' 과 같은 '현재의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특히 크로노스와 관련하여 크로노스는 모든 가능한 카이로이를 포함하며, 보다 광범위한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카이로스가 사용되는 곳에서 역시 종종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하다. 소포클레스( sophocles )의 문구처럼(Elect. 1292) 카이로스 크로누를 말할 수 있으나 크로노스 카이루를 말할 수는 없다’(R.C. Trench Synonyrns of the New Te stament, [1880] 1953, 2l0; 눅 I:57; 갈 4:4) .||(b) 다음으로, 카이로스는‘결정적인 순간 decisive moment'(Soph의 시대로부터)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도 3가지 의미, 긍정적 의미, 중립적 의미,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가장 알반적이다.|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와, 각각 연관된 두개의 어원론적 어군의 존재는, 헬라인들이 그 진행에 인간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인 크로노스를 인간의 결정이 영향을 미치는 독특한 기간이나 시점인 카이로스와 구별하였음을 시사한다.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의지인 카이로스 사상($2540-thinking)은 크로노스 사상($5550-thinking) 에서 자라날 수 있는 운명론적인 위험을 저지하거나 막는다.|카이로스는 헬라인에게 대우주적 시간($5550)의 끝없이 흐르는 흐름에서 그의 개인적 삶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시점을 의미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Eth.Nic.1,4p.1096a)는 '시기에 있어서 좋은 것을 카이로스라 일컫는다'라고 카이로스를 높이 평가했다. 카이로스는 '좋은 실행의 때(시간)'이다(Philo).|운명의 순간에 확고하게 키(helm)를 잡는 자는 행운(fortune)으로 몰아간다. 때때로 종교적 뉘앙스도 찾아볼 수 있다(아르스토텔레스의 진술) : 카이로스는 크로노스 데온 곧 형편 좋은 상황과 동일하지 않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한(순간적인) 카이로스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역사해야만 하는 언제나 새로운 시점이다.|이러한 관계에서 카이로스는 때때로 튀케(%36: 운명)와 관련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튀케(%36)는 우연성으로 특징지울 수 있으며, 사람은 그것에 수동적으로 굴복당한다. 그렇지만 카이로스는 사람으로부터 결정적 행동을 요구하는 운명(destiny)이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도전을 통하여 인생을 결정한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카이로스를 붙잡는 것이며, 카이로스를 유용하는 것이며, 심지어 카이로스를 빼앗는 것이다(Delling, TDNT).|행위를 요하는 시점이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시간(크로노스)의 신속한 흐름이라는 배경하에서였다. 시간의 공간에서 개개인들의 많은 결단이 내리어지며, 인간은 시간의 공간을 담대히 활용하여야 한다. 자기의 카이로스를 놓치거나 회피하는 자는 자신을 파괴한다. '일을 적시에 행하지 않는다면 망치게 된다는 데에 의심이 있을 수 있는가?’(Plato, Rep. 2, p. 370b). 때를 놓치고(파라 카이론) 받은 것 역시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Theogris in Griechische Lyrik, I08/l18).|그러므로 카이로 그노디(시기를 인식하다)(Pittacus, Diels -Kranz, I, 64)를 명심하고 모든 활동에서(공중 연설에서, Democ., Frag. 226; 자선행위에서, Frag 94) '적시 안타'를 노리는 것이 중요하다.||운명의 기로(岐路)에서 카이로스는 인간에 대해 윤리적 결정을 요구한다. 카이로스(좋은 기회의 시간)를 잡는 것은 솔직히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이로스가 분명하게 될 때 헤도네($2237) 즉 정욕에 대한 자기 정복적 투쟁에서 인간은 카이로스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Ench, 34). 하나님은 사람이 카이로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밝히기 위해(Dissertationes, Ⅲ,10,8), 매일 인격의 형성에 기여를 요구하기 위해 그를 소환하신다(Dissertationes, Ⅳ,4; 45f).|여기에서 카이로스는 이성의 덕으로 알려진 도덕적 필요성이 될 수 있다. 후대에 카이로스를 신들의 하나로 숭배를 한 적이 있었다(Paus., V, 14, 9).||(c) 호기의 포착(카이론 람바네인 혹은 크레스 다이)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에서(Epictetus와 후대의 Seneca)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성적 도덕적 필수요소(Dissertationes 2, 7, 3참조)라 생각되는 것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에서(Epictetus, Dissertationes 1, 1, 6) 인간은 시간을 붙잡음으로써 그 압제하는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초시간적인 숙명에서 싹트는 현재의 의무들을 위해서만 산다. 그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거의 갖지 않는다"(M.Pohlenz, Die Stoa, 1, 19542, 47). 시간(크로노스)을 전적으로 이차적 중요성의 문제(아디아 프호론)로 보는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 카이로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사라지고, 초시간적 순간으로서의 카이로스만 있다(참조: R.Bultmann).||#2. 70인역본의 용법||카이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카이로스가 크노로스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카이로스는 70인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에트(시간, 독특한 사건의 시점, 198회), 모에드(시점, 31회), 케츠(6회), 욤(날, 3회)을 번역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점'을 나타낸다. 첫째로 시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윤리적인 요구보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때를 가리킨다(참조: 욜 39:18; 민 23:23; 전 3:11; 단 2:21). 하나님은 최종적인 축복의 때를 주시며, 죽음의 때를 정하시며(전 7:17), 최후의 때, 즉 심판의 때를 가져오신다(애 1:21). 전도서 기자는 그가 지나온 카이로이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한다(전 3:10이하). 대상 12:23 등(결정적인 상황)과 집회서 4:20(적당한 순간; 참조: 학 1:2)에서는 이 단어는 보다 비종교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b) 카이로스는 일반적으로는 순수한 시간적 의미로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창 17:21, 창 17:23 등에서는 '시점'을 나타내고, 겔 12:27 등에서는 '일련의 기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어가 절기나(출 34:18; 레 23:4; 민 9:3, 민 9:7, 민 9:13; 대상 9:25 등) 정규적인 생물학적인 시간이나(스 16:8; 레 15:25; 욥 39:1; 삼상 1:20 등) 기상학적 시간(신 28:12) 또는 다른 자연적 사건들(시 1:3; 욥 38:32)에 대해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카이로스는 인생의 시기적 구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더욱 보편적 용법은 신학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3. 신약성경의 용법||1. 카이로스에 대한 이해.|헬라어에는 '시간'에 대한 3가지 중요한 용어가 있다. '매우 긴 시간,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아이온 속에 크로노스가 있고, 크리노스 속에 카이로스가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부분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특히 '일정적인(calendrical) 의미로 인생의 시간의 한정된 지속에 대한 진술'이 있는 곳에서 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시간의 기간 period of time'을 나타내는 반면, 카이로스는 자주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간(때), 종말론적으로 찬 때'을 가리키며(Baumgarten 187), 따라서 '위기의 시간(때),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라는 의미도 지닌다.|카이로스는 인간의 카이로스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양분되는데, 인간이 인간을 본위(本位)로 한 자리에서 인간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되는 인간의 카이로스로는 세속사(世俗史) 곧 인간의 일반 역사가 형성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는 구속사(救贖史)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가 이루어진다. 끝없이 흘러내려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 하나 하나의 합(合)이 '구속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경우 카이로스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행 l:7).|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전적으로‘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해서만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일체는 곧‘구속사’였다.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과 인간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의 대조를 요 7:6-요 7:8이 잘 보여주고 있다.-“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카이로스) 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예수의 형제) 때(카이로스)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카이로스)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 하노라.”|여기서 '너희 때'란, 아직 결정적인 신앙이 없이 세상에서 자기 본위로 살고 있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때'인데, 이는 곧‘인간의 카이로스(카이로스)'를 말씀하신다. '나의 때'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시는데서 만이 행하게 되는 '예수님의 때'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을 향하여 인간 본위로 사는 너희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때는, 너희들의 뜻에 의하여 항상 열려 있으나 하나님 본위로만 사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야 하는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만 이어지는 삶을 지향(指向)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오승태, 福音).|카이로스는 구원사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심판의 때"와 "마지막"의 개념을 표현하는 확립된 용어이다.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는 때때로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점'(참조, 막 1:15), 예를들면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아니했다(눅 19:44; 참조: 막 12:56; 마 16:3-마 16:4).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그의 죽음의 때(time)이다(마 26:18). 이 용어는 귀신을 제어하는 메시야적 권능의 시작(마 8:29), 신자들에 대한 박해(벧전 4:17), 막는자의 능력의 옮김(살후 4:17), 신자들의 판단(고전 4:5), 죽은 자에 대한 일반 심판(계 11:18)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카이로스는 요한 계시록의 독자들의 생각을 이러한 주제들로 향하게 한다(J.M FORD).|그러나 위기나 심판의 때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카이로스라는 시간을 바로 인식하여, 보다 가까와진 '세상의 종말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새로운 각성을 하고, 그리고 이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2.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의 용법|명사 카이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①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싯점'을 의미하며, 항상 명시적이 아니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행 24:25는 예외).|모든 기독교적 시간 개념의 결정적으로 새로운 구성하는 요소는, 예수님의 강림과 더불어, 다른 모든 시간에 특성을 부여하는 카이로스가 동텄다는 확신이다. 막 1:15은 이것을 프로그램적인 방식으로 명백하게 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은 '성취의 시간이 동텄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곧 그 결정적인 도래를 개시하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시간을 활용하라 그것은 생사(生死)의 문제이다'(J.Jeremias)는 것이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이다. 선지자들이 바라던 은혜의 때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실현되었다(롬 3:21; 벧전 1:11). 예수님의 삶 및 특히 고난과 죽음과 더불어 옛 시대는 지나갔으며, 진정한 하나님의 의의 뉜 카이로스(롬 3:26)와 더불어 신기원, 말하자면 '시대의 성취'가 동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5:21; 요 3:16; 요 10:27 이하). 따라서 결단의 중대성이 새로이 커진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러 오신 그 독특한 카이로스를 알지 못했다(눅 19:44). 무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성격을 깨닫지 못하였다(눅 12:56).|②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가 모든 구체적 오늘(Today)을 하나님의 구원의 빛 속에 담그듯이(눅 13:32; 눅 19:5, 눅 19:9; 눅 23:43; 눅 2:11) 승귀하신 분과의(참조: 눅 22:69) 신앙의 관계를 통해서 그의 구속하시는 능력이 이제로부터 계속하여 인간들의 생활 속에서 유효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다'(R.Bultmann; 참조: G.Delling). 부활 이래 다음과 같은 선포가 중요성을 지닌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카이로스 유프로스데크토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참조: 사 49:8).|예수님의 카이로스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말미암아(Stauffer) 구원을 제공하는 지금(Now)은 계속하여 새롭게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Word)의 선포의 "지금"(now)은 계시자(Revealer)의 도래의 "지금"과 정확하게 상응하며, 이는 또한 일정한 시간의 한 역사적 사건의 "지금"이며, 기회의 "지금"이며, 한 주어진 시간에 구체적 사건으로서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예수님이 계시자가 되는 그 "순간"(moment)인 것이다(Bultmann).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에 순종한 것과 같이(참조: 마 4:20, 마 4:22; 막 1:18) 각 사람도 이 선교적 선포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과 장소는, 사랑의 시간이요 이 사랑을 경험하는 장소임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 주어진다(Fuchs). 그들은 오늘을 내일로 연기함으로써 이 결단을 회피치 말아야 할 것이며(Philo, Sacr. 69 참조), 그들이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다시 말해 하나님 없는 존재에로 그들의 뜻을 강화시키지 말아야 할지니(참조: 히 4:7, 히 4:15) 이는 그들이 예루살렘처럼 "화"(Woe)의 평결하에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눅 19:44).|③ 종말과 현재의 성취의 동시성은 사랑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신자는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시기를 분별해야 한다(눅 12:56),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이다(롬 13:11). 신앙은 시간을 마음대로 현명하게 활용할 윤리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갈 6:10; 골 4:5). 진실로 그와 같은 책임이 있으니, 선지자들은 "시간을 사라"(엡 5:16)는 명령법 어구와 더불어 역사적 시간을 할당 받았다. 이 시기는 복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지만(막 10:30), 고통의 시기이다(롬 8:18).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순간에(눅 8:13) 타락하지 않도록 서로를 권면해야 한다(딤전 4:1; 참조: 히 3:12이하).|④ 예수님 자신의 삶은 카이로스의 요구에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은 때를 분별하고 따라서 결정하신다(요 7:6, 요 7:8). 이 카이로스가 단순히 호의적인 기회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오는 그 때를 기다리며, 따라서 참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지막 특히 카이로스 하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신 카이로스를 보고, 붙잡고, 받아들이며 때가 가까왔다고 말씀하신다(마 26:18). 따라서 그 때는 "적절한 때"이다(롬 5:6).||(b) 때때로 카이로스는 특별히 그 내용과 관하여 '특별한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점'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되나 사람이 한 결정이라는 의미는 크게 약화되어 있다.|따라서 하나님은 로고스가 출현할 때(딛 1:3),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때(딤전 2:6),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딤전 6:15), 그의 백성들의 수확시기(갈 6:9)를 정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다른 카이로이 중에는, 즉 하나님의 계획의 전개에 있어서의 특별한 시점들로는 귀신들을 제압하는 메시야의 권세의 시작(마 8:29), 임박한 심판의 시작(벧전 4:17), 카테콘("막는 것")의 권세를 제거하기 시작하는 때(살후 2:6), 최후의 심판의 시작(고전 4:5; 계 11:18) 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때를 헤아릴 수가 없다(막 13:33; 살전 5:1; 행 1:7); 하나님만이 그러한 때를 주관하신다. 카이로스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될 수도 있다(눅 21:8; 벧전 5:6; 계 1:3). 그러나 카이로스는 또한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시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딤후 4:6; 눅 1:20).||(c)① 카이로스는 '짧은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눅 21:36; 엡 6:18,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롬 9:9(창 18:10에 근거)에서 한번 특별한 '기간, 기한', 마 24:45; 눅 12:42에서 '일정한 시간', 막 12:2과 병행구에서 '정한 때', 마 13:30; 마 21:34; 막 11:13; 행 14:7에서 자연적 사건들의 '때'을 나타낸다.|② 카이로스는 '시간의 연속이나 얼마간의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를들면, 사람이 '정한 시간'(살전 2:17; 고전 7:5), '불확정한 시간'(눅 8:13), 하나님이 정한 시간(눅 21:24; 고전 7:29; 계 12:12), '생의 일부분'(히 11:11), 연대(행 17:26; 엡 1:10),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 생의 부분(엡 2:12), 현재 시간(막 10:30)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G.Delling; H.C.H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