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76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고난을 받는
kakov"
나쁜 bad, 악한 evi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카코스(Homer 이래)는 결핍하여 있는 것을 표현하며, 무능력이나 연약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악과 같이 순수한 도덕적 의미 이상이다. 따라서,||(a) 카코스는|① '열등한, 변변찮은, 쓸모없는, 무능력한, 초라한',|② '도덕적으로 나쁜', '사악한',|③ '연약한, 약한 뼈'들에 대해 사용되었다.|④ '불행한, 좋지 않는, 파산적인, 악한'을 의미한다.||명사 토 카콘, 타 카카(복수)는 '악함, 고통, 불행(운), 파멸'을 의미한다||(b) 헬라 세계에서 카코스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견해가 발전하였다: 첫째, 악은 신의 필요에 의해 신에 의해 생겨났다. 둘째, 악은 부분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생겨났다. 이러한 견해들은 죄책과 운명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비극에서 중복되어 나타난다. 철학은 무지가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원론도 존재한다. 선은 필연적으로 악을 내포한다는 사상이나 영혼들은 형벌로서 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따라서 지상으로부터 초지상적 선의 세계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이론이 그러하다.||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인간이 무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악을 행한다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플라톤은 또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질료와 연관된 변증법적인 필연성에서 악에 대한 정서적 차원과 심지어는 우주적 차원을 발견한다(정신과 질료의 우주론적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체가 비난 받을 만한 무지가 도덕적 악의 원인이라는 사상에 보다 밀접한 입장을 취한다. 스토아주의 역시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사상을 거부한다. 스토아주의는 악을 선의 대응물로 상대화 시키고 악을 거짓된 세계관의 탓으로 돌리며, 전체의 완전이 곧 개인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일원론적 체계 속으로 가져오려 한다. 그러나 스토아주의는 악에 대한 심리학적 이원론을 피할 수 없다.|필로에게 있어서 악은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선을 선택할지라도 우리는 이생에서 항상 악과 싸움을 하고 있다. 악은 이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 실재이다. 그러나 악은 죄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차원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과의 결합으로 인해 극복된다. 플루타르크는 악을 악한 세상의 영혼에 귀속시킴으로 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제시한다.|플로티누스(Plotinus)는 이 불완전이라는 것이 바로 물질의 본성 속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물질의 본성은 결국 모든 것을 파생시킨 최고의 선과 빛에 대립이 되는 위치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도 역시 악은 빛의 결핍, 즉 지식의 결핍이 되는 것이다.|헤르메스 문헌들은 누스($3563)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근거한 절대적인 대조를 제시한다. 플로티누스는 유일자(the One)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료에서 악의 원리를 찾는다. 영혼은 질료 속에 침잠되어 있기는 하나, 여전히 신적인 것이며 신과의 합일을 향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영혼의 신과의 합일은 황홀경이나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악은 하나의 실재다. 그러나 악은 참된 존재가 없는 실재이다.|조로아스터교에서 우리는 대립되는 두 가지 원리들보다는 오히려 두 가지 대조적인 의지(즉 '신성')를 발견한다. 거짓의 영과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서 지배권을 잡기 위해 싸움을 한다. 우리가 전생에 선과 악 사이에서 행한 선택을 이생에서 행한다. 모든 악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악령으로부터 온다. 최후의 심판은 선인과 악인을 분리할 것이며, 최후의 싸움에서 악과 악인들은 정복되고 파멸된다. 조로아스터교에는 기독교 종말론과 유사점이 많다는 데서 특별한 흥미를 끈다. 그러나 전자는 신화일 뿐이요, 기독교는 역사인 것이다(W.Grundmann).||#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카코스는 70인역본에서 227회 나오며, 히브리어 라아를 번역하며, 존재에 객관적 고통을 주는 '악', '재앙', 사람들이 행하는 '죄악'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50회 나오며, 그리 중요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신정론의 문제를 대신하여 신약성경의 주요한 요지가 되었으며, 도덕적 개념으로서의 악은 하마르티아($266)와 포네로스($4190)보다 훨씬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a)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악의 자리로 생각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막 7:21, 막 7:23와 병행구 마 15:19).|악은 사람으로부터 온다. 그렇지만 인간의 배후에 있는 포네로스($4190)가 악의 궁극적인 중심지다.|약 1:13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은 모든 악한 것들과 무관하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이다.|약 3:8에서 야고보는 혀가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고 한다. 그러므로 벧전 3:10에서는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말한다.||(b) 카코스는 한정적으로 또는 인격체의 명사형으로(마 21:41; 마 24:48; 빌 3:2; 딛 1:12; 계 2:2), 그리고 사물에 대한 수식어로(막 7:21; 롬 13:3; 고전 15:33; 골 3:5; 계 16:2) 사용된다. 반면 악 또는 악한 것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중성 명사로 쓰이는데, 이런 경우에는 '불행', '상태가 나쁜', '고통'(눅 16:25; 행 16:28; 행 28:5), 또는 '악한 행위', '죄'(참조: 마 27:23, 병행구; 행 23:9; 요삼 1:11) 등의 의미로 해석되며, 바울에게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참조: 롬 7:19, 롬 7:21; 롬 12:21; 롬 13:4; 롬 16:19). 아래서 보다 충분히 설명한다(E.Achilles).||(c)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임할 일시적인 파멸이나 영원한 파멸을 가리켜 타 카카(개역: "고난")를 사용한다. 나사로는 지금 타 카카를 가지고 있으며, 부자는 후에 타 카카를 갖는다(눅 16:25). 멸망과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은 이생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의 요점은 기계적인 보상(선에는 악 악에는 선)이 아니라, 신뢰와 순종에로의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며, 단지 일시적 운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d) 바울은 롬 13:3-롬 13:4에서 이 세상에는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악을 제어하는 임무를 위탁하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e) 바울은 롬 7:19, 롬 7:21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선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제적으로 직면한다. 악은 "한 다른 법"처럼 그 안에서 그의 의지를 지배한다고 했다(롬 7:21, 롬 7:23). 그러므로 악이란 인간의 존재와 특성의 한 표현이다. 인간의 악한 성품은 행위로 나타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롬 2:9). 여기서 악은 도덕적인 악 이상이다. 악에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 즉 불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양면성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선에 동의하나 우리는 선한 의도를 행동으로 옮길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선 대신 끊임없이 악을 행하기 때문에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힘으로써 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온갖 희망은 좌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악에 대해 거둔 그리스도의 승리로써만 가능한 것이다.||(f)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이전의 불가능하였던 것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새로운 실재는 악한 것에 대해 우리가 미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왜냐하면 사랑은 악을 생각지도 않으며(고전 13:5) 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롬 13:10). 악이 친교를 해치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사랑은 참된 교제를 다시 가능하게 해 준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E.Achilles).
죄인
kakou'rgo"
악행하는 자 evil-doer, 비행자 delinque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카쿠르고스(Soph., Hdt. 이래)는 실명사로 '잘못을 행하는 자, 범죄인, 악인, 악한'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카쿠르고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죄인'(잠 21:15), '악인'(집회서 11:33)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쿠르고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고전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카쿠르고스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강도를 행악자로 표현한다: "(눅 23:32 - 눅 23:33; 눅 23:39).||(b) 딤후 2:9에서 카쿠르고스는 '범인'이나 '죄인'을 의미한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카쿠르고스처럼 차꼬에 채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자기 자신과 그의 주님과 닮은 점을 발견한다.|(참조: J.H.Thayer; W.Grundmann).
학대(를) 받다
kakoucevw
학대하다, 괴롭히다, 압제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쿠케오(Teles. 이래)는 카코스($2556: 나쁜, 악한)와 에코($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학대하다, 압제(박)하다, 괴롭게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카쿠케오는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에만 2회 나온다.||(a) 히 11:37에서 카쿠케오는 경건한 유대의 고난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b) 히 13:3에서 카쿠케오는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을 묘사한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악감을 품게 하다
kakovw
해하다 harm, 비참하게 하다 embitt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카코오(Homer 이래)는 카코스($2556)에서 유래했으며, '해치다, 학대하다, 부당하게 대우하다, 해롭게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카코오는 70인역본에서 약 65회 나오며, 이스라엘에 대한 '학대나 압제'(민 20:15; 출 5:22이하; 신 26:6; 수 24:5), 이사야에서 주의 종의 '고난'(사 53:7)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카코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벧전 3:13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다.||(a) 행 7:6에서 카코오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압제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행 7:19에서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b) 행 12:1에서 카코오는 교회에 대한 박해를 나타낸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4:2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c) 행 18:10에서 바울을 해롭게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d) 벧전 3:13에 의하면 의에 대한 열심이 있는 곳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해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참조: Walter Bauer; J.H.Thayer; W.Grundmann).
병(자)
kakw'"
심히, 비참하게, 잘못, 악하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카코스(Homer 이래)는 카코스($2556: 나쁜, 악한)에서 유래했으며, '나쁘게'를 의미하며, 따라서||(a) 육체적 의미로, ① '앓다, 아프다, 병들다'(Homer).|② '심히, 비참하게'(Aeschyl., Polyb.).||(b) 도덕적 의미로, '잘못, 악하게'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카코스는 70인역본에서 15회 나오며, 히브리어 칼랄(7043: 보잘것없다, 하찮다, 가볍다, 저주하다), 알라르(779: 저주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저주하다'(레 19:14; 레 20:9; 사 8:21; 출 22:27)를 나타내며, 할라(2470: 약하다, 아프다, 병들다)의 역어로 '연약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신체적 의미에서 '병들다, 앓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①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② 마 8:16(막 1:32; 막 1:34),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③ 마 9:12(막 2:17; 눅 5:31),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④ 마 14:35(막 6:5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와서".|⑤ 막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⑥ 눅 7: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b) 신체적 의미에서 '심히, 비참하게'를 의미한다.|① 마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② 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③ 마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c) 도덕적 의미에서 '잘못, 악하게'를 의미한다.|① 요 18: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② 행 23: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③ 약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괴로움 받음
kavkwsi"
혹독한 대우, 학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카코시스(Thu. 이래)는 카코오($2559: 학대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혹독한 대우, 학대'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카코시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7:34에 한번 나온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alavmh
줄기, 대, 짚.||#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칼라메(Homer 이래)는 칼라모스($2563: 갈대)에서 유래했으며, 곡물이나 갈대의 '줄기, 대, 짚' straw, stalk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칼라메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3:12에 한번 '짚'을 나타낸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여기서 건축 재료는 분명히 상반되는 두 종류이다. '값비싸고 내구성이 있는 것과 무가치하고 소멸될 것이다. 한편은 건전한 교리와 풍성한 경험에 기초한 원숙하고 견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은 보잘 것 없는 지푸라기 같은 의견, 나무 조각과 같은 인간의 마구잡이식 지혜로서, 원숙치 못하고 견고하지 못한 교회원을 가리키는 것이다.(D. S. Metz).|(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갈대
kavlamo"
갈대, 갈대 지팡이, 척량 막대기, 갈대 붓.||#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칼라모스(Pind., Hdt. 이래)는 기본어이며, '갈대'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갈대' a reed(Theophrastus),|(b) '갈대로 만든 막대기, 갈대 지팡이나 막대기'(Arem),|(c) '척량 갈대 또는 척량 막대'(PRyl.),|(d) '필기자의 갈대, 갈대펜, 붓'(Pla., Phaedr., Plut., Demosth).||#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칼라모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카네(7070: 식물의 '줄기, 대, 갈대'), 그리고 에트(붓, 펜; 시 45:1; 1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칼라모스는 70인역본에서 '갈대'(사 42:3), 척량 갈대나 막대(겔 40:3이하; 42:16이하), 붓(시 45:1; 마카베오삼서 4:20)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칼라모스는 신약성경에서 12회 나오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칼라모스는 '갈대'를 의미한다(마 11:7; 마 12:20; 눅 7:24).||(b) 칼라모스는 '갈대 지팡이나 막대기'를 의미한다(마 27:29이하; 마 27:48; 막 15:19; 막 15:36).||(c) 칼라모스는 '척량 갈대나 막대'를 의미한다(계 11:1; 계 21:15 이하).||(d) 칼라모스는 '필기자의 붓'을 의미하다(요삼 1: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부르심을 받다
kalevw
부르다, 이름 짓다, 초대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칼레오(Homer 이래)는 '부르다' call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a) 칼레오는 사람을 호명하는 경우이든(Homer, Il.)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경우든 간에, '이름을 붙이다(짓다, 명명하다)를 의미한다. 수동 분사 칼루메노스(Hdt., 6, 61)가 인명이나 지명에 사용될 때는 '불리워지는' called, '소위' so called를 의미한다. 이름은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수동 부정사 칼레이스다이는 사실상 에이나이($1511: to be)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예: Homer, Od.).||(b) '초대하다' invite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집으로 초대하다, 어떤 연회에 초대하다(Homer, Od.) 등이다.|이러한 문맥에서 분사형 클레토스는 '초대받은, 환영받은, 손님'(Homer, Od., 17, 386)을 의미한다. 그 초대 자체가 특별한 영예가 되었을 경우, 이 단어는 '선택된'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Homer, Il).||(c) 칼레오마이는 증인들 또는 어떤 사람의 적을 법정 앞에 '소환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Dem., Xen., Hell.).||(d) 칼레오는 매우 드물게 신의 부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신비 종교(예: 이시스의 신비 종교) 및 70인역본과 특히 신약성경의 용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칼레오는 '요구하다'(Herm., 119B Ⅲ, 10 이하), '위탁(위임)하다'(CPR 18, 9)라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e) 헬라 사회가 '부름' calling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몰랐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 vocation의 개념이 없다. 직업에 있어서 사람이 하는 행동은, 에르곤(일하다), 포노스(짐), 에팡겔리아(동의, 약속), 프라그마(행위, 일), 테크네(기술), 스케시스(상황, 조건, 상태) 또는 탁시스(순서, 질서) 등으로 불렸다. 육체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가 모색되기도 했지만 '소명' vocation 의식은 사제들에게만 국한, 남아 있었으며 지적인 일이나 행정 업무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어느 정도 존재하였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칼레오는 70인역본에서 약 30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카라(부르다, 불러내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칼레오는 '이름을 짓다, 명명하다'라는 의미로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사물의 이름을 짓는 것(예: 창 1:5; 창 1:8 이하, 낮, 밤, 하늘, 땅; 창 2:19, 짐승들) 혹은 사람의 이름을 명명할 경우(예 창 25:26, 야곱; 창 29:32-35; 창 30:6-24, 야곱의 아들들), 도성(예: 삼하 5:9, 다윗의 성), 또는 특성, 속성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예: 사 35:8에서는 길, 출 12:16에서는 어떤 날을 거룩하다고 부른다; 사 56:7에서는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불림) 등이다. 유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제사장"(사 61:6)이나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호 1:10)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을 "다른 이름"(사 65:15)으로 칭한다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새로운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b) 칼레오는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 61:2과 렘 34:17에서 면제년 선포에 관해 사용되었다.||(c) 칼레오는 '부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것(창 24:58), 통치자가 신하를 부르는 것(출 1:18; 삿 12:1), 모세가 장로들을 부르는 것(출 12:21; 출 19:7) 등이다. 이러한 부름은 항상 명령이지 단순한 초청은 결코 아니었다(욥 13:22). 이러한 부름에는 상대가 듣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요망이 들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사 65:12).||② 그는 기근(시 105[104]:16)과 칼(렘 25:29)을 부르신다.||③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는 것을 표현한다. 이 경우 인간은 그 부름에 응답하기 전에 그가 들은 부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소에서 조차 이 부름에 준비되어 있지 못하여 이 부름과 여타의 음성을 얼마나 구별하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 사무엘의 부름의 기사에 극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삼상 3:4-10). 단지 하나님의 부름이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하신다는 것 때문에 이 세상 주권자들의 요구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엘리야[왕하 1:3, 9]와 모세[출 3:4; 출 5:2]). 이 부름 때문에 종종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기도 할 것이다.(참조: L. Coenen).||#3. 신약성경의 용법.||칼레오는 신약성경에서 14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칼레오는 ① 목적의 대격과 서술 대격을 수반할 때는 '~라고 부르다, 이름 부르다. 명명하다, 이름 짓다(붙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10:25; 마 22:43; 마 22:45; 마 23:9; 눅 1:29; 눅 20:44(=마 22:45), 행 14:12; 롬 4:17; 롬 9:25(=호 2:25), 히 2:11; 벧전 3:6; 마 1:21; 마 1:23(=사 7:14); 마 1:25.|눅 6:46에서는 대격과 호격이 뒤따른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시는 경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과(눅 1:31)과 요한(눅 1:13)의 이름을 지어주심으로써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그들의 삶을 그가 주관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다(L. Conen).||② 수동태로 '불리워지다, 일컬음을 받다, 명명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23; 마 5:9; 마 21:13; 마 23:7; 마 23;8; 마 23:10; 마 27:8; 막 11:17; 눅 1:32; 눅 1:35; 눅 1:36; 눅 1:60; 눅 1:12; 눅 1:76; 눅 2:4; 눅 2:21; 눅 2:23; 눅 6:15; 눅 7:11; 눅 8:2; 눅 9:10; 눅 10:39; 눅 15:19; 눅 15:21; 눅 19:2; 눅 19:29; 눅 21:37; 눅 22:25; 눅 23:33; 요 1:42; 행 1:12; 행 1:19; 행 1:23; 행 3:11; 행 7:58; 눅 8:10; 행 9:11; 행 10:1; 행 13:1; 행 15:22; 행 15:37; 행 27:8; 행 28:14; 행 28:16; 행 28:1; 롬 9:26; 고전 15:9; 히 3:13; 약 2:23; 요일 3:1; 계 1:9; 계 11:8; 계 12:9; 계 16:16; 계 19:11; 계 19:13.||(b) 칼레오는 '~에 부르다, 초대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 2:7; 마 20:8; 마 22:3; 마 22:4; 마 22:8; 마 22:9; 마 25:14; 막 3:31; 눅 7:39; 눅 14:7; 눅 14:8; 눅 14:9; 눅 14:10; 눅 14:12; 눅 14:13; 눅 14:16; 눅 14:17; 눅 14:24; 눅 19:13; 요 2:2; 요 10:3; 행 4:18; 행 24:2; 고전 10:27.||(c) 복음서의 몇몇 구절과 바울 서신에서 자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부르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부르신다(마 2:15).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다(마 4:21; 병행구 막 1:20).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신다(마 9:13; 병행구 막 2:27; 눅 5:32).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즉 구원으로 부르신다(롬 8:3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부르셨다(롬 9:7; 히 11:18).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다(롬 9: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그의 아들과 교제케 하신다(고전 1: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평안(고전 7:15), 은혜(갈 1:6), 자유(갈 5:13), 그의 나라와 영광(살전 2:12), 거룩(살전 4:7; 참조: 살전 2:13-14), 영생(딤전 6:12), 빛(벧전 2:9)으로 부르시며, 그와 동시에 고난에 참여하도록(벧전 2:20-21) 부르시기도 하신다. 그리스도 자신도 부름을 받았다(히 5:4).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히 11:8),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며(계 19:9), 단순히 "부름받은 자"로 기술할 수도 있다(계 9:15).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름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제자가 되는 것 뿐만 아니라 구원의 축복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의 배후에는 심판과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체 사역이 있다. 이러한 부름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르시거나 복음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살후 2:14). 따라서 이 단어가 이러한 용법으로 사용될 때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참조: K. L. Schmidt).
좋은 감람나무
kallievlaio"
재배된 올리브 cultivated-olive.||#1. 일반 헬라어의 용법||명사 칼리엘라이오스는 칼로스($2570: 아름다운, 좋은)와 엘라이아($1636: 올리브)에서 유래했으며, '정원에 재배되는 올리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칼리엘라이오스는 롬 11:24에 한번 나타난다.|→ $65 아그리엘라이오스.|(참조: J. H. Thayer)
칼리온
kallivon
더 좋은, 부사적으로 '더 잘'||칼리온은 칼로스($2570: 아름다운, 좋은)에서 유래한 비교급 형용사이며, '더 좋은'을 의미하며, 중성이 부사적으로 사용된다.|신약성경에서 칼리온은 행 25:10에 한번 나온다. 여기서 칼리온은 부사적으로 사용되어 '더 잘'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
kalodidavskalo"
좋은 교사||이 형용사는 칼로스($2570: 좋은)와 디다스칼로스($1320: 교사)에서 유래했으며, `좋은 교사'를 의미한다. 신약성경 이외에는 입증되지 않은 이 단어는 딛2:3에만 나온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나이 든 여자가 되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늙은 여자들은 특히 젊은 여자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참조: K.Wegenast)
칼로이리메네스
Kaloi; Limevne"
좋은 항구.||칼로이 리메네스는 칼로스($2570: 좋은, 아름다운)와 리멘($3040: 항구, 포구)에서 유래했으며, '아름다운 항구'라는 의미를 가진다.|이 항구는 신약성경에서 행 27:8에 한번 나온다: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이 항구는 그레데섬 남쪽 해안의 라세아라는 도시 근방의 작은 만이다.|아마도 좋은 정박지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운 것 같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EBD).
칼로포이에오
kalopoievw
선을 행하다 do goo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칼로포이에오(Etym., Plond.)는 칼로스(2570: 좋은, 아름다운)와 포이오(4160: 만들다,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올바른 일을 행하다, 선을 행하다, 잘 행하다, 올바르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칼로포이에오는 신약성경에서 살후 3:13에 한번 `선을 행하다'라는 의미로 나온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참조: J.H.Thayer; Walter Bauer).
미석
kalov"
선한, 좋은, 아름다운, 고상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칼로스(Homer 이래)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칼리아(Kalya: 건전한, 강력한, 강한, 탁월한)와 기원상 관련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단어는||(a) '조직상 건강한, 적합한, 유용한, 쓸모있는'을 의미하며, 알맞은 피난처(Homer), 건강한 몸(Plato), 순수한 금속(Theognis), 흠없는 희생 제물(Xenophon), 알맞거나 편리한 장소(Xenophon),||(b) 미학적으로 '아름다운'을 뜻하며, 따라서 '마음에 드는, 매력적인, 사랑스러운'이란 의미도 지닌다.||(c) 사람의 내적 성질에 적용될 때 이 단어는 '도덕적으로 선한'이란 의미를 가진다(Sophocles, Pindar).||칼로스의 개념은 헬라 사상의 역사 과정에서 '탁시스' 질서와 '쉼메트리아'(symmetria: 대칭, 균형)와 연결되어 총괄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로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외적 현상이든 내적 성향이든 간에 건전함, 건강, 완전함, 질서의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헬라 세계에서는 이 용어를 특히 신의 세계에 적용한다(W. Grundmann, kalos, TDNT, Ⅲ537).||#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칼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25회 나오며, 15개의 히브리어 단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칼로스는 야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예: 창 12:14; 창 29:17; 창 39:6; 창 41:2), '아름다운'을 나타낸다. 그러나 대부분 토브('유용한, 선한'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유용한'(예: 창 2:9), 더욱 자주 '도덕적으로 선한'을 의미한다(잠 17:26; 잠 18:5 등).|칼로스가 도덕적 선으로 나타나는 곳에는 토브의 역어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로스는 창조 기사에서 질서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창 1:4; 창 1:10; 창 1:12; 창 1:21; 창 1:25; 창 1:31), 미학적인 의미는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b) 대부분의 경우에 칼로스는 구약성경과 유대의 윤리적 체제에서 '도덕적 선'을 의미하며 아가도스($18)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민 24:1; 신 6:18; 신 12:28; 대하 14:1; 잠 3:4; 사 1:17; 암 5:14 이하; 미 6:8 등). 칼로스는 타락 기사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창 2:17; 창 2:18; 창 3 5 이하; 창 3:22).||(c) 칼로스가 아가도스와 병행하여 사용될 때, '사랑스러운', 또는 '기뻐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시 135:3). (참조: G. Bertram).||#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9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칼로스는 신약성경에서 '선한'을 뜻하기 위해 아가도스($18: 선한, 좋은, 104회)만큼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신약성경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a) 공관복음서의 용법.|① 세례(침례) 요한의 설교에서 "좋은 열매"에 대한 비유를 본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병행구 눅 3:9). 열매가 단수라면 그것은 새로운 삶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개개의 선한(혹은 악한) 행위들을 더 이상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없다(KRV Study Bible).||② 예수님의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에서도 '좋은 열매'가 나타난다(마 7:17; 마 7:18; 마 7:19; 마 12:33). 좋은 열매가 나는 것은 나무가 전체적으로 건강한 경우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예수님의 선포에 뿌리를 박고 그것으로부터 살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다.|사람이 자기 밭에 뿌린 "좋은 씨"는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말씀이다(마 13:24; 마 13:27; 마 13:37; 마 13:38).||③ 그물로 잡아 그릇에 담은 좋은 것들은 메타노이아($3341: 마음의 변화, 회개)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게 된 사람들을 의미한다(마 13:48). 선교라는 그물은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을 공동체에 끌어들인다. 여기서 칼로스는 항상 하나님의 바실레이아(나라)를 지향한다.||④ 마 5:16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요구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고 애썼던 구식 '율법의 공적'이 아니라(참조: 롬 3:10; 롬 3:28; 갈 2:16), 지금 동터 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걸맞는 삶과 행동거지를 가리킨다. 즉 마 5:3-12과 마 5:21-48에 제시된 척도에 따르는 삶과 행동거지이다(참조: 엡 2:8-10).||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기름 붓는 기사에서(막 14:6)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수난을 알아채고, 그에게 행한 그 사랑의 행위를 제자들의 기름을 판 돈으로 행할 수 있는 자선보다 중요하고 훌륭한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그의 육체에 미리 기름을 부음으로써 그의 수난의 길을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란 오로지 이 역사적 계기 안에서만 제공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일을 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으나 구제는 언제나 할 기회가 있는 것이다.||(b) 요한복음의 용법.|① 요 2:10에서 칼로스는 다른 종류보다 '더 우수한, 상질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여기에서 '상질의 포도주'는 종말론적인 기쁨과 삶의 풍요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상징이다(욜 3:18; 암 9:13; 창 49:10-12).||② 요 10:11; 요 10:14에서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묘사한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이것은 헬레니즘의 목신(牧神)들 및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들(지도자들)과 대조되는 독특한 주장을 전달한다. 그 주장의 근거는 선한 목자가 그의 양떼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그는 양떼들을 이리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다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양떼들로 하여금 그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친교에 참여케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이 선하고, 능력이 있으며, 찬양을 받을만한 참 목자임을 입증하신다.||③ 요 10:32; 요 10:33에서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행한 많은 선행들에 관해 이야기한다.|예수님은 그의 선행 중에서 어떤 것 때문에 백성들이 나를 돌로 치려고 하느냐라고 묻는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선하다. 그렇지만 그가 한 일들에는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메시야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백성들이 그를 돌로 치려한 것은 그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의 메시야적 주장 때문이었다.||(c) 바울 서신의 용법.|① 바울 문헌에서 최초의 용법은 독립적이며, 이 단어는 토 아가돈(선 good)과 동의어이다. 롬 7:18; 롬 7:21에서 이 단어는 우리가 내적으로 행하기를 원하는 선을 나타낸다: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그러나 이 선은 육신의 법과 상충하므로 우리는 칼론을 성취할 수 없다.|고후 13:7에서 동일한 의미에서 이 단어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사용된다: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이 가능성은 그리스도인 전체 삶을 채우는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갈 6:9).(참조: 롬 12:17, 여기서 칼론은 찬양을 받는 것이다)||② 다른 한편 이 단어는 '옳은, 좋은, 칭찬할만한, 귀중한' 것에 대해서 사용된다(부정사와 함께 칼론 에스티). 예를 들면 고전 7:1; 고전 7:8; 고전 7:26에서 부부 관계의 자제나 처녀성에 대해 그렇게 사용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갈 4:18의 좋은 일에 대한 열심, 롬 14:21의 형제를 위하여 먹는 것을 삼가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③ 롬 7:16에서는 형용사로 율법에 대해 사용된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고전 5:6에서는 고린도인들의 자랑에 대해 사용된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바울 문헌에서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바울은 교회에게 사랑의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한 일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궁핍한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롬 12:20)., 대접하는 것(롬 12:13; 고전 16:11)이 선한 일에 속한다.||(d) 목회 서신의 용법.|① 목회 서신에서 카로스는 더욱더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Julicher는 그의 Einleitung에서 '목회서신에서 칼로스가 독립적으로 24회 사용되고 10개의 바울 서신들에게 단 6회만이 사용되었으며, 게다가 바울은 거의 항상 명사로 사용하는 반면에 목회서신에서는 형용사로 20회 사용되고, 특히 에르가(디도서에서 4회)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② 딤전 5:10; 딤전 5:25; 딤전 6:18; 딛 2:7; 딛 2:14; 딛 3:8; 딛 3:14에서 카라 에르가(선한 행실)가 언급되어 있고, 딤전 3:1에서는 칼론 에그론(선한 일)이 언급되어 있다. 카라 에르가는 그리스도께서 마음 먹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그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 사랑과 자비의 일이다. 그 결과는 믿음에 기초한 사랑에 의해 만들어지는 삶의 양식(mode)이다(특히 딤전 5:10 이하). 딛 3:8은 카라 에르가에 대해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르다우며 사람들에 유익하니라".|중보 기도는 모든 사람과 국가와 권위를 가진 자들을 위하여 필요하며, 또 평안한 생활을 위해 필요하다. 이것은 선한 것이다. 따라서 이 권면은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 2:3)라는 말로 끝맺는다. 여기서 칼론은 70인역본에서처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그 독특한 색채를 취한다.||③ 또 칼로스는 군사적인 이미지와 연관된다. 디모데(서신의 수신자)는 딤전 6:12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후 2:3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딤전 1:18 이하에서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딤전 1:18 이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기자는 딤후 4:7에서 자신에 대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한다.||④ 기자는 서신의 수신자 디모데에게 이전에 많은 증인들 앞에서 증거한 칼레 아몰로기아("선한 증거")를 회상시킨다: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셨다"(딤전 6:12 이하). 그런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선한 증거(또는 고백)을 해야 한다.||⑤ 그리고 칼로스는 칼로스 노모스, 즉 구약성경(딤전 1:8), 감독이 지녀야만 하는(딤전 3:7) 칼레 마르튀리아("선한 증거"), 집사들이 칼로스 디아코네인으로 마땅히 얻는 바드모스 칼로스("아름다운 지위", 딤전 3:13), 서신의 수신자(디모데)가 공동체를 올바르게 지도하면 될 칼로스 디아코노스("선한 일군", 딤전 4:6), 복음인 칼레 디다스칼리아("선한 교훈", 딤전 4:6), 사람이 선한 일로써 이루는 칼로스 데멜리오스 에이스 토 멜론("장래에 좋은 터", 딤전 6:19), 디모데게 복음을 통하여 받은 칼레 파라데케(딤후 1:14, "부탁한 아름다운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판크티스마 데우)이 선하다고 한다(딤전 4:4). 이러한 구절들에서 칼로스는 대체로 옳은 행위, 올바른 가르침, 세상에 합당한 태도와 같은 것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선한, 올바른, 탁월한, 질서정연한'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지향한다. 목회 서신에서 이러한 용법이 사용된 이유는 명확하다. 이 단어는 헬레니즘의 대중 언어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헬라니즘의 가치 감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제 2세대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특징 짓는 것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e) 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용법.|공동 서신과 히브리서의 용법은 동일한 노선을 따른다. 따라서 칼로스는 벧전 4:10에서 "선한 청지기", 약 2:7에서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 약 3:13에서 "선행", 벧전 2:12에서 "선한 일", 히 13:18에서 "선한 양심"에 대해 사용되었다.|비록 어구 자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행위로서의 선한 일은 특히 야고보서에서 훈계의 주제이다(약 1:27; 약 2:15; 약 2:16).|(참조: G. Bertram; E. Beyret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