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해설 190 페이지 > 기독정보닷컴

헛된 말
kenofwniva
잡담, 헛된 이야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노포니아(Diosc. )는 케노포노스(%516: 공허한 것을 말하는)에서 유래했으며, '잡담, 헛된 이야기'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노포니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디모데전·후서에만 사용되었다.|딤전 6:20에서 케노포니아는 불경스러운 '헛된 말이나 이야기'에 대해 사용되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딤후 2:16에서 마찬가지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헛 것이 되다
kenovw
비우다, 무효로 하다, 헛되게 하다, 멸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케노오(Herodotus 이래)는 케노스($2756)에서 유래했으며, `비우다' to make empty 를 의미하며,||(a) `내용물이나 소유를 빼앗기다, 비우다', 수동태로 `황폐하게 되다'.||(b) `무(효)로하다, 헛되게 하다, 파멸시키다', 수동태로 `무로 되다'란 의미를 나타낸다.||#2. 70인역본의 용법||케노오는 70인역본에서 렘 14:2; 렘 15:9에서 2회 나오며, 히브리어 아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아말은 `기운이 없어지다, 다 써버리다'를 의미하며, 고갈이나 빈궁한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케노오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기진한 상태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케노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a) 빌 2:7에서 케노오는 `비우다'는 첫 번째 의미를 나타낸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자기를 비어"에 해당하는 헤아우톤 에케노센은 문자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비웠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케제만(E. Kasemann)과 외프케(A. Oepke)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정한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자신의 현 상태를 초월하고자 열망한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적 형상과 존재 방식을 이기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에 의해 그것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입고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A. Oepke). 여기서의 주어는 선재하시는 주님이다. 주님의 본질은 동일하시지만 주님은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킨다.|그는 이에 대한 주석으로 고후 8:9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본다: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이어(E. Lohmeyer, Kyrious Jesus)와 예레미아스(J. Jeremias, TDNT)는 다른 견해를 취한다. 그들은 이 구절이 초대의 팔레스틴 교회와 사 53장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본다. 예레미아스는 이 표현이 사 53:12의 "정확한 역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이 때에 이 구절은 성육신 그 자체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포기와 십자가 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내어줌에 관한 언급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이 계속 발전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전자의 해석이 더욱 타당성있다. 왜냐하면 사 53:7에는 예수님의 인간됨에 관한 언급이 있고 사 53:8에는 예수님의 비하와 십자가 상에서의 죽기까지의 순종에 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가지 해석을 결합하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b) 롬 4:14에서 케노오는 `무효로 하거나 헛되게 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율법으로 후사가 될 수있다면 믿음은 무효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구원해주는 믿음의 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인화 교리에 의해 무효가 되어서는 안된다.|고전 1:17에서도 `무효가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적인 주제이며, 따라서 그 권능의 구성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정죄하면서 동시에 구원해 주는 십자가의 거치는 것은 세상의 지혜의 말로 헛되게 되어서는 안된다. 십자가를 말의 꾸밈과 기교로 전한다면 십자가의 효력, 즉 십자가의 구원의 내용, 그에 따른 걸림, 그리고 그와 관련된 하나님의 효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케노오는 고전 9:15에서("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와 고후 9:3에도("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 말한 것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같은 의미를 가진다.|바울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그의 생계를 도와 줌으로) 자신의 자랑의 근거를 헛되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주기를 원한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 대한 그의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위해서 헌금하기를 촉구한다.|(참조: Walter Bauer; E. Tiedtke; H. -G. Link; A. Oepke).
가시채
kevntron
몰이 막대가, 찌르는 것, 쏘는 것.||#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켄트론(Homer 이래)은 켄테오(%222: 따끔하게 찌르다)에서 유래했으며,||(a) 동물의 '쏘는 것' sting(Aristot., Aelian.),||(b) '몰이 막대기' goad, 즉 채찍과 같이 사용하는 뾰족 막대기(Pind., Pyth., Aesechyl.)을 의미한다.||(c) 이 단어는 비유적으로,|① 고통이나 고문,|② 박차, 자극, 갈망이라는 뜻으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다.||(d) 수사학적으로 콤파스의 '끝'이나 원의 '중심'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켄트론은 70인역본에서 5회 나오며, 잠 26:3에서 샤바트(막대기, 매)를 번역하여 '막대기'를, 호 13:14에서 코테브(파멸)을 번역하여 죽음의 '쏘는 것'을, 마카베오일서 14:19에서는 벌의 '침'을 나타낸다|필로는 하나니믈 고삐와 채찍을 가지고 전차를 모는 자에 비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용어를 중심(우주의 중심인 지구)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요세푸스는 욕정(참조: Antiquities 7. 169) (다말에 대한 암논)이나 매력(참조: Jewish War)의 켄트론을 언급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켄트론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사도행전에서 1회, 고린도전서에서 2회, 요한계시록에서 1회 사용되었다.||(a)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켄드론("가시채")을 뒷발질하는 것이 네게 고생이라고 말한다.|유대 세계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황소를 모는 막대기를 의미하지만 바울(또는 누가)은 여기서 헬라 속담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스킬루스(Aeschylus, Ag 1624)에서 '가시를 발로 차지 말라'를 격언이 나온다. '이는 가시채를 발로 차다가 찔려서 심한 상처를 입은 소에서부터 나온 속담이다'(page.). 이러한 표현은 헬라파 아그립바에게 말할 때 매우 적절하다. 이 속담(또한 복수형으로)은 A.D. 1세기 경에 자주 인용되었던 것이다.||(b) 고전 15:55; 고전 15:56,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사 25:8; 호 13:14을 인용하며, 사망의 켄트론("쏘는 것")이 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망이 막대기를 가지고 있는 폭군이나, 창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는 군인, 또는 독침을 가지고 있는 짐승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독침을 가지고 있는 곤충과 같다는 것이다. 사망의 능력이 근거하고 있는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제거될 때, 사망의 쏘는 것은 소멸되며 사망은 무력해진다.||(c) 계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이 구절은 5번째 나팔 소리에 따라 진행되는 일을 묘사한 것이며, 요엘의 유사한 묘사를 강하게 상기시킨다. 무저갱으로부터 "황충이...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계 9:3). 그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가지지 않은 자들을 괴롭힐 권세를 받았다.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 괴롭게 함과 같더라"(계 9:5). 계 9:7-계 9:10.이 무시무시한 생물에 대한 상상의 묘사가 나오며, 마지막 계 9:10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즉 그 꼬리에)"라고 표현되어 있다. 즉 그들은 전갈과 같이 쏘는 침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위험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 꼬리에는 다섯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계 9:10). 따라서 이것은 반은 메뚜기이고 반은 전갈이며 그 위험스런 무기는 켄트론, 즉 동양인들이 전갈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유인 독침을 가진, 동양적 환상의 산물인 우화적이고 악마같은 생물로 생각할 수 있다(L. Schmid).|(참조: P. J. Budd; L. Schmid; Walter Bauer; J. H. Thayer).
백부장
kenturivwn
백부장 centurion||$1543 참고요.*
케노스
kenw'"
헛되이 vain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케노스(Aristot. 이래)는 케노스($2756: 공허한, 텅빈)에서 유래했으며, '헛되이' vainly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케노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4:5에 한번 나온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keraiva
작은 뿔, 점.||#1. 헬라어의 용법.||명사 케라이아(Aeschyl. Thu. 이래)는 케라스($2768: 뿔)에서 유래했으며, '작은 뿔, 점'을 의미하며, 헬라어 문법가들이 뿔인 액센트와 판독 부호들에 대해 사용되었다.|구약성경에 있어서 케라이아는 '갈고리' 즉 와우, 글자 위에 '점'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케라이아는 문맥 관계와 의미를 밝혀주고 읽기에 영향을 준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이아는 신약성경에서 마 5:18; 병행구 눅 16:17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토기장이
kerameuv"
토기장이 pott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뮤스는 케란뉘미($2767: 섞다, 혼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토기장이, 도공'을 의미한다(Hom., Hes., Arstph., Plat., Plut., 등).|토기장이는 마을마다 잘 알려진 인물이었으며, 큰 도시에서는 수공업자 조합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토기장이들의 거주지구를 케라메이코스라고 불렀다(Menceles Barcaeus 3등). 도공 기술을 배우는 중에 있는 견습생의 미숙한 작품에서 보여진 기술 부족에서 생겨난 속담이 있었다: "큰 술동이를 만드는 토기장이의 기술을 배웠구나". 이 속담은 중요한 기술들을 배우지 않은 채 가장 어려운 일들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Plato, Protagoras 324등). '부유한 토기장이'라는 속담은 깨지기 쉽거나 불확실한 어떤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Diogenianus 5, 97, 98).||#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뮤스는 70인역본에서 14회 나오며, 히브리어 요체르(토기장이, 옹기장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왕을 위해 일하는 유다 자손 중에 옹기장이가 있었다(대상 4:23). 구약성경에서 토기장이에 대한 언급은 일반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2:9; 사 29:16; 사 4:25; 사 45:9; 렘 18:2, 렘 18:3, 렘 18:6).|하지만 토기장이의 기술이 이스라엘과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비유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유형은 사 35:9에 있는 신탁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구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미칠 화를 선포한다. 진흙덩이를 반죽하고 있는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묻는다거나 아직 굽지 않은 동이가 완성된 동이로 만들어주질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은 사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수 없다고 논증하려는 사람들은 이처럼 어리석다는 것이다."|여호수아 벤시라(Joshua ben Sira; BC.200)는 토기장이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을 하였다(집회서 38:24-34). 그는 토기장이가 녹로에서 일하는 과정 뿐만 아니라 유약을 바르고 가마를 깨끗이하는 것의 중요성도 관찰하였다(집회서 38:29-30). 토기장이가 그의 일에 전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그의 목적을 추구해가는 것을 적절히 묘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집회서 33:13). 그릇을 완성하기 위하여 가마가 하는 일은 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추리가 개성을 시험할 때 갖는 태도를 직유한다(집회서 27:5).||#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뮤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토기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 27:7; 마 27:10에서 케라뮤스는 "토기장이의 밭"이라는 문구에 나타난다: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토기장이의 밭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돌려준 은 30으로 대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죽은 나그네의 묘지로 삼고자 샀던 밭이다(마 27:3 - 마 27:10; 행 1:18). 그 밭에는 깨진 질그릇 조각이 버려진 무덤이 있었다. 위치는 힌놈의 골짜기 남쪽이며 그곳은 예레미야 시대에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던 곳이다(참조: 렘 18:2; 렘 19:2).||⒝ 롬 9:21에서 케라뮤스는 토기장이를 하나님에 비유한 변론에 나온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 비유에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에 비유되는데, 자신이 지은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토기장이가 똑같이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있다는 유추(analogy)로 확인되고 있다.|이 구절의 해석은 그 전후 문맥(참조: 롬 9:19 - 롬 9:24)을 고려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인간의 소원 여하를 불구하고 주권적으로 통치하시고 성취시키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신앙과 불복종을 책망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을 폐하신 것이 아니냐?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를 벌하신다고 하면 그는 불의하신 분이 아닐까?|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을 가지고 답변하였다. 그는 누구나 잘 아는 토기장이의 예를 인용하였다. 만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토기장이와 그가 진흙으로 만드는 그릇의 관계와 같다고 할 것 같으면, 어찌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의 과오를 운운할 수 있을까? 토기장이는 같은 진흙을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쓰는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드는 권한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욕돌리는 자에게 엄격함을 보이시고 자기의 택한 은혜의 대상자에게 긍휼을 보이시려고 선택하셨다고 해서 인간이 그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정죄할 수 있을까?|진실로 하나님의 피조물로써의 인간은, 설혹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변하기 쉽고 또한 엄격하시더라도 그를 불의로 정죄하기 위하여 인간 자신이 심판 자리에 앉기 어렵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취급하시는 그 실제 방법에 대하여 불의로 하나님을 정죄할 자가 누가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아니하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참으시고 용납하였으며, 또한 그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택함을 입은 자비의 대상자들에게는 그의 영광의 모든 풍성하심을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주권은 구원받아야 할 자를 결코 정죄하는 일이 없으며, 도리어 멸망 받을 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시고, 또 믿음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방인을 구원하신다고 해서 그를 불의하다고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C.R.Erdman).|롬 9:19 - 롬 9:33에 오직 함축된 의미는 클레멘트이서에서 명백하여지는데, 여기에서 토기장이의 비유가 새로운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말해진다. 즉, 토기장이는 불에 굽기 전까지는 그가 만들었던 그릇이라도 다시 만들 수 있다(클레멘트이서 8:2). 이런 근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응답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회개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참조: W.L.Lane; C.R.Erdman)
질그릇
keramikov"
|토기장이의, 흙으로 만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케라미코스(Aristoph., Hippocr.)는 케라모스($2766: 진흙 토기, 기와)에서 유래했으며, '토기장이의, 토기장이에게 속하는', '흙으로 만든'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케라미코스는 70인역본에서 단 2:41에만 나오며, 아람어 페할(옹기장이, 토기장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3. 신약성경의 용법||케라미코스는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에 한번 나타난다.|계 2:27에서 케라미코스는 주님을 끝까지 믿는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능력에 대한 언약에 나온다: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여기서 케라코스는 '흙으로 만든'이란 의미보다 '토기장이의'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KJV; NASB).|그는 철장을 가지고 열왕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할 능력을 약속 받았다. 철장에 대한 설명은 보기에 목자의 참나무 곤봉 같은 것으로 그 끝이 쇠로 씌워져 있다. 그리고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은 시 2:9에 자세한 언급이 있는데,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나라들을 지배할 절대권을 약속 받는다.|새 질서는 먼저 옛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앞선다(참조: 계 11:15). 문맥상 그 약속은 옹호의 보증과 역할의 전도를 규정하며, 이런 일로 인하여 굴욕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주님의 절대적 권위에 참여하게 된다. 두아디라에는 토기장이의 조합이 있었다는 것이 비문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In scriptions Graecal ad res Romanas pertientes 4, 1205).|(참조: J.H.Thayer; W.L.Lane)
동이
keravmion
토기, 동이, 단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미온(호머에서부터)은 질그릇, 특히 포도주나 물을 담아 두는 흙으로 만든 '동이나 항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깨진 토기류'라는 말은 오스트라시즘(ostracism, 패각 추방; 사기 그릇 조각, 조가비 따위에 위험 인물의 이름을 써내는 비밀 투표로 10년[후에 5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것)이라는 일상 용어가 되었다(Strabo 7, 3, 9; Comica Adespota 33).||#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미온은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히브리어 바트(액량되, liquid measure)와 가비아(컵, 사발, 그릇)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서 케라미온은 일정한 도량의 토기, 사발, 항아리나 동이를 의미한 것 같다. 사 5:10에서 하나님은 열흘 갈이 포도원에서 포도주가 겨우 한 되(바트) 나오리라고 경고한다. 포도주로 가득찬 동이들을 소유하는 것은 부와 축복의 증거였다. 렘 35:5에서 케라미온이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가비아)"로 표현되어 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미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동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막 14:13에서 케라미온은 유월절 식사를 위한 준비와 관련되어 나온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병행구, 눅 22:10).|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자는 한 남자였다.|(참조: W.l.Lane; J.H.Thayer).
기와
kevramo"
진흙 clay, 토기 earthenware, 기와 a roof ti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모스는 케란뉘미($2767: 섞다, 혼합하다)에서 유래했다. 케라모스가 비록 토기를 의미하고, 호머 시대부터는(Iliad 9, 469; cf Herodotus 3:96) 총칭적인 의미로 '토기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또한 복수의 형태로는 '기와류'를 의미하게도 되었다. 케라모스는 B.C. 3세기에 델로스(Delos)에다 지은 신전 건축과 관련된 기사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C.Michel, Recueil d'). 플루타르크(Plutarch)에 의하면, 헬라 문명기에는 이런 의미가 일반화 되었다: 죽은 자는 정상적인 길을 통해서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사상이 있어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돌아올 때는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뚫고 집안에 들어가야 했다(Quaestiones Rom.5). 한편 그때 사람들의 특징으로서, 악령들, 질병, 죽음도 지붕을 통해 집에 들어온다고 믿었다(Gellius, 10, 15, 8).||#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모스는 70인역본에서 삼하 17:28에만 나오며, 히브리어 야차르(형성하다)의 분사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질그릇'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5:19에만 나오며 '기와'를 의미한다: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네 사람은 중풍병에 든 친구를 데리고 군중들 사이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자 그 집 벽에 설치된 옥외 계단으로 지붕까지 올라가서 방에 계신 예수님 앞에 내리기 위하여 지붕을 뜯었다. 팔레스타인의 지붕은 진흙을 바른 가벼운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붕을 뜯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참조: W.L.Lane)
섞다
keravnnumi
섞다, 혼합하다 mix.||#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케란뉘미는 기본어 케라오(%89: 섞다, 혼합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섞다, 혼합하다'를 의미한다. 본래 토기장이의 진흙을 준비하기 위하여 물과 흙을 섞는데 필요한 어떤 일이었을 것이다.|그러나 다른 자료들로 보면 그것은 주로 포도주에 물을 타는 의미로 사용되었다(Odyssey). BC.1세기부터 한 의학적인 처방이 옥시린쿠스 파피루스(Oxyrhynchus Papyri[건포도주와 꿀과 솔방울을 섞어서 마시게 하라])에 보존되었으며, 그때부터 이 동사를 토기장이의 기술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고집스런 경향이 나타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케란뉘미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히브리어 마사크(섞다, 혼합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케란뉘미는 잠 9:2, 잠 9:5에서 혼합한 포도주, 사 5:22에는 독한 술에 대하여 사용되었고, 사 19:14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술취한 자처럼 애굽은 비틀거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케란뉘미는 신약성경에서 2회, 요한계시록에만 나온다. 케란뉘미는 '혼합하거나 섞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신약성경에서는 토기장이의 기술과는 관련이 없다. 더 오래된 헬라어와 70인역본의 용법과 같이 케란뉘미는 술에 물을 타는 것을 의미한다.||(a) 계 14:10에서 케란뉘미는 물을 붓는다는 어감을 주며,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언급하고 있다.||(b) 계 18:6에서는 바벨론의 운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이 동사가 나오는데, 술취하여 비틀거리게 하고 모든 감정과 재능을 해하게 하는 갑절의 포도주를 섞는다는 비유로 상징적으로 설명한다(참조: 사 19:14; 솔로몬의 시 8:14).|(참조: C.G.Lloyd; W.L.Lane)

kevra"
뿔 hor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케라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a) 동물의 '뿔'(Homer 이래),|(b) 모양 뿔 같은 '모서리, 끝, 정점'(Apollon., Rhod.),|(c) 비유적으로 '용기'나 '완고'를 의미한다.|(d) 그리고 고대 종교에서 뿔은 신의 '힘'이나 인간의 '힘'을 상징하였다. 예를 들어 앗시리아의 군주들과 바벨론의 제사장들은 대개 신들을 단장했던 것과 비슷한 두개의 뿔이 달린 관을 썼다. 알렉산더 대제는 뿔 달린 관을 쓴 자로 알려졌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케라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10회 나오며, 거의 모두 히브리어 케렌(7161: 뿔)의 역어로 사용되었다.||(a) 70인역본에서 케라스는 '짐승의 뿔'을 의미하며(신 33:17), 특히 묵시 문헌과 후기 유대 문헌에서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단 7:7; 단 8:3; 에디오피아 에녹서 90:9 등).||(b) 제의 문맥에서 케라스는 뿔과 같은 모퉁이나 돌출부를 가리킨다(출 27:2; 레 4:7; 시 118:27).||(c) 상징적으로 케라스는 하나님과 사람의 능력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시드기야의 예언 행위에서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표현하며(왕상 22:11), 여호와께서 "구원의 뿔(케라스 소테리아스 무)"로 지칭될 때(시 18:2=삼하 22:3), 하나님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며 적의 공격에서 그것을 지켜주는 힘이 있는 분으로 생각된다. 케라스는 자주 인간의 육체적 힘과 우월성을 나타낸다(미 4:13). 그러나 또한 일반적으로 행복을 나타내기도 한다(삼상 2:1). 뿔을 높이거나 파괴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흔히 나타나는 비유인데,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이다(시 75:4-5).||(e) 후기 유대교에서 양의 뿔이 자란다는 것은 양의 힘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야는 크고 검은 뿔을 가지고 있는 흰 수소에 비유되기도 한다. 제단의 뿔(출 27:2)은 뿔 모양의 제단의 모서리를 가리킨다(참조: 계 9:13).||#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케라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누가복음에서 1회를 제외하면 모두 요한계시록에만 사용되었다.||(a) 눅 1: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메시야를 통해 도우시고 복주실 그의 능력을 발휘하시는 역사의 주님이시다. 이 사가랴의 찬양에서 "구원의 뿔"이란 시 18:2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 의미는 "구원의 능력"이다. 동사 '들어 올리다'(에게이렌)는 삼상 2:10에 나오는 '높이다'(휩소세이)와 유사하다. 즉 역사 속에서 활약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구원을 가져오신다. 누가는 시 132:17로 소급되는 "그 종 다윗의 집에"라는 말을 첨가하여 메시야를 '구원의 뿔'로 명시한다. 사가랴는 여기서 하나님을 역사 가운데서 자기의 능력을 증거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서 인류를 위하여 구원을 가져오는 능력을 일으키신 분으로 찬양한다.||(b) 뿔의 상징은 요한계시록의 비유적 표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계 13:11의 다른 짐승의 두 뿔은 단순히 어린양의 외형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양의 옷을 입은 이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단 8:3에서 수양의 두 뿔을 언급하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뿔의 이미지는 알레고리적으로 사용된다. 뿔의 이미지는 뿔이 달린 동물들과 유기적(organic) 관련성은 없지만 독립적인 상징적 의미(significance)를 지닌다.||계 5:6에서 어린양은 일곱개의 뿔을 가지고 있고, 계 12:3; 계 13:1; 계 17:3; 계 17:7; 계 17:12; 계 17:16의 용과 짐승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뿔의 비유적 의미에 의하면, 어린양의 일곱 뿔은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큰 용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열 뿔을 가졌다. 짐승의 경우에 뿔들은 일곱개의 머리 앞에 언급되고, 그 뿔에 면류관을 썼으나, 용의 경우에는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 이 작은 차이점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다.||계 17:12 이하에서 계시록 자체가 말해주는 바는, 열 뿔은 장차 올 열 왕이며, 그들은 짐승과 함께 잠시동안 왕의 권세를 받을 것이며, 짐승에게 그들의 권세를 넘겨줄 것이며, 또 짐승과 함께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어린양과의 전쟁을 감행할 것이라는 것이다.||숫자 10에 있어서 계시록은 단 7:7을 따르고, 왕들과 관련하여서는 단 7:24과 단 8:20 이하를 따른다. 일찌기 랍비 문헌에서는 열 뿔 중 몇 개는 주후 3세기의 몇 몇 특정 왕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히브리 아라스 묵시록(Hebrew Elas Apoclaypse)에서도 마찬가지 견해를 취한다. 산리안 에스라 묵시록(Syrian Eza Apoclaypse)은 머리에 12개의 뿔과 꼬리에 9개의 뿔을 가진 용에 의거한 오마이야드(Omayyad) 통치를 가리킨다. Barn. 4.4 이하에서는 다시 다니엘의 열 뿔에 대한 예언을 암시하지만, 그 해석은 불확실하다. 만약 짐승이 역사상의 Nero redivivus와 관계가 있다면 계시록의 뿔들은 당시의 방백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가장 타당성 있는 것으로 페르시아의 총독들일 것이다. 그들은 네로가 돌아오는 것을 도왔으며, 보복으로 로마를 멸망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그러나 또 다른 가능성은 일곱 머리와 함께 열 뿔을 시저 이후의 로마 황제의 두번째 목록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비록 이것들이 짐승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마귀적 세력들로 본다. 페르시아 총독들이나 로마 황제의 두번째 목록의 견지에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분명히 잘못이다. 뿔의 진짜 역할은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양과의 전쟁에서 짐승의 손에 그들의 능력을 맡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페르시아 총독들의 역할은 무엇인가?|따라서 열 뿔의 의미는, 열 왕들로서 그들은 용과 짐승의 입에서 나온 영들에 의해 아마겟돈에서 그리스도와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받은 온 세상의 임금들과 동일시된다는(계 16:14; 계 16:16)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계시록이 열 뿔에 대하여 말하는 바는, 마지막 때의 모든 통치자들과 그들에게 속한 자들은(참조: 계 19:17 이하)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공개적 싸움에서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전 인류의 힘을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도록 만들자인 사탄을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사탄 역시 열 뿔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참조: W. Foerster; Walter Bauer; J. H. Thayer; H. G. Link; J. Schattenmann).
쥐엄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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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뿔, 캐롭나무의 열매||명사 케라티온(Aristot., Polyb.)은 케라스($2768: 뿔)의 지소사이며,||(a) '작은 뿔' little horn.||(b) '캐롭나무 열매, 캐롭 꼬투리' carob pods를 의미한다.|이 열매는 성 요한의 빵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메뚜기'의 알주머니와 닮은 그 열매의 꼬투리가 세례(침례) 요한의 음식의 일부이었다는 관념에서 그렇게 불리운 것이다. 이 열매는 모양이 뿔 같으며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돼지를 살찌게 하는 데 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의 음식의 품목으로 사용되었다.|신약성경에서 케라티온은 눅 15:16에 한번 나온다: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얻고자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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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다, 이익을 얻다||#1.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켈다이노(Hes., Hdt. 이래)는 켈도스($2771)에서 유래했으며, '이익을 얻는다, 이익이 되게 하다, 어떤 것으로 어떤 것 또는 사람을 얻다'를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손해를 피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득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떼어두다, 비축하다, 피하다'를 의미하기도 한다.|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켈다이노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약 4:13에서 켈다이노는 '이익을 얻다'를 의미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익을 얻으러 나가는 자나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인생관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오만한 자기 중심에 떨어져 죄에 빠지게 된다.|마 16:26(병행구, 막 8:36; 눅 9:25)에서 켈다이노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것은 자기 보존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근거를 찾는 자에 대하여 경고한다.|그런 의미에서 약 4:13의 경고와 유사하다. 만일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면 세상의 통치권과 모든 권력을 가지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람은 그 목숨을 얻기 위하여 그것을 잃어야만 한다.||(b) 켈다이노는 선교 용어로서 '얻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임무를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고전 9:19에서 켈다이노는 (그리스도를 위해) '얻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여기서 '얻는다'는 것은 고전 9:22의 '구원하다'와 일치하며, 이는 선교 사업의 목표이다.|마 18:15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목자와 같은 돌봄과 관심으로 죄에 빠진 형제를 권고하고, 그렇게 하여 그를 "얻으라"고 말한다.|벧전 3:1에서 아내들은 도를 순종치 않는 남편들을 그들의 행위로써만 "얻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c) 마 25:16에서 켈다이노는 '무엇을 얻다'를 나타낸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행한 업적이나 특수한 인간 행위에 대한 보수로서 지불되거나 벌어들이게 되는 보답과는 대조적으로 이익은 그리스도의 숨은 일에서 나온다. "달란트"를 얻기 위하여, 이 달란트가 사람이나 그리스도로 이해되든 않든 간에, 인간은 그리스도의 선물과 위임이 필요하다. 오로지 그를 통하여서만 인생은 그 목표에 도달한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만 전도자가 헛되이 찾던,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의 충만인 페리세이아($4050)가 있다.|빌 3:8에서도 켈다이노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d) 행 27:21에서 손해나 상해를 '피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참조: J.H.Thayer; H.Schlier; B.Siede).
유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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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 gain.||#1.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켈도스(Homer 이래)는 '얻음, 이익, 유익, 이득'을 의미하며, '이익을 얻으려는 욕망'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으며, 복수형은 '교활한 꾀, 속임수'라는 의미도 지닌다. 이 단어는 매우 드물게 현명한 조언, 간사한 공격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켈도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만 나온다.||(a) 딛 1:11에서 자신의 이익(나쁜 의미)을 얻기 위해 거짓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b) 빌 1:21에서 바울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자체는 이익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순교의 삶의 종말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와 더불은 삶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 그와 함께 하는 것만이 이익이다.|그러므로 빌 3:7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그의 생활의 여러 가지 '유익'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바울은 여기서 이익을 인간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과는 구분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특권들, 즉 상속받은 것이거나 얻은 것이거나 간에 자신의 할례,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이라는 점, 삶에서의 그의 행동, 율법을 고수하는 그의 충실함 등을 차례차례 열거한다.|바울에게 "이익"이 되어온 이러한 종류의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이득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전적인 잃음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명성과 업적의 법에 묶여 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참조: 빌 3:9)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이익을,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세워지기 위하여,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한다.|(참조: J.H.Thayer; B.Siede; H.Schl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