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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Lusiva"
루시아 Lysias(인)||$2804 클라우디오스를 보라.
뤼시스
luvsi"
해방, 면제, 석방release, 이혼 divor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뤼시스는 뤼오($3089)에서 유래했으며, 호머 이래로, 어떤 유대나 결속을 '푸는 것'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뤼시스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타나며, 전 8:1 페셸(풀이, 해석)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전 8:1(전 7:30)과 지혜서 8:8에서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시스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7:27에 한번 나타난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여기에서 뤼시스는 이혼을 말하지만 매여 있던 상태에서부터 놓여진 '자유나 해방'이란 의미가 강조되어 있다.
뤼시텔로오
luditelei'
세금을 지불하다, 유익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뤼시텔레오(Hdt. 이래)는 뤼시스($3080: 푸는 것)와 텔로스($5056: 끝, 목적, 통행료, 사용세)에서 유래했으며,||(a) 본래의 의미는 '세금을 지불하다, 비용을 돌려주다'|(b) '유용하다, 유익하다', 에($2228)가 뒤따른 경우 '보다 낫다(좋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뤼시텔레오는 신약성경에서 눅 17:2에 한번 나오며, 에($2228)와 함께 '보다 낫다'를 의미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루스드라
Luvstra
루스드라 Lystra(지)||뤼스트라는 루가오니아의 도시이며,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온다(행 14:6; 행 14:8; 행 14:21; 행 16:1; 행 16:2; 딤전 3:1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대속물
luvtron
석방금 price of release, 대속물 ransom, 속전 ransom pri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뤼트론은 뤼오(3089)와 접미어 - 트론(%774)으로 형성된 단어이며, 몸 값을 지불하여 해방시키는 것, 즉 '속죄 방법, 또는 속전'을 의미한다. 접미어 - 트론은 '이 동사의 행동을 성취시키는 도구나 방법, 즉 석방의 방법' means of releasing, 또는 '대가'payment 즉 '속전' price of releasing을 나타낸다(D. Hill, Greek).|뤼트론은 전쟁포로를 되찾기 위해, 노예를 석방이나 해방시키기 위해, 채무를 반제하기 위해, 또는 드물긴 하지만 신에게 진 빛을 갚기 위해 제의적으로 지불된 돈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속리, 보상'이란 의미로 나타난다(참조: W. Mundle; F. Buchsel).||#2. 70인역본의 용법.||뤼트론은 70인역본에서 19회 나타나며, 4개의 히브리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뤼트론은 6회, 코페로(덮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출 21:30; 출 30:12; 민 35:31, 민 35:32; 잠 6:35; 잠 13:8). 코페르는 신성한 율법에 따라 목숨을 잃거나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는 예물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속전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를 대신하는 사람들 곧 제사장들이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살인자를 위해서는 속전이 지불될 수 없었다(민 35:31이하).|뤼트론은 7회, '속전( ransom)'이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형들, 즉 파타(속량하다, 대속하다)에서 파생한 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뤼트론은 레 19:20과 민 18:15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이 단어는 대속 행위와 그 대가를 강조함으로써, 동사 파타의 의미를 보강해준다. 구속의 대가는 인간이나 짐승의 첫 소산과 같은 것들로 지불되어야만 했다. 첫 소산은 신성한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짐승의 희생제물로 지불되기도 하였으며(출 13:13, 출 13:15; 출 34:20) 혹은 때로 돈으로 지불되어지기도 하였다(출 30:13-16; 민 3:46-51; 민 18:15이하). 삼상 14:45이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요나단의 생명을 대속함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개연성이 희박하다(참조: H. W. Hertzberg). 레 19:20에서는 여자 종의 속량에 대해 사용되었다.|복수 뤼트라는 명사 게울라(대속)과 동사 가알(대속하다, 근친으로 행동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명사 게울라는 행할 자격이 있고 또 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친척에게 사용된 말이다(레 25:24; 레 25:26; 레 25:51이하). 대속자(고엘)는 원래 피의 복수자로서 살해된 희생자의 피와(민 35:19; 민 35:21; 민 35:24; 민 35:25; 민 35:27; 수 20:3; 수 20:5) 또한 팔린 가족 재산과(레 27:13; 레 27:15; 레 27:19 이하; 레 27:31; 참조: 렘 32:7, 이곳에서 70인 역자는 뤼트라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경제적 곤경으로 말미암아 비유대인에게 자신을 팔 수밖에 없었던 사람까지도 대속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다(레 25:48이하). 레 25:26, 레 25:51이하에 게울라는 대속의 가격을 나타낸다. 레 25:24에서 그 말은 '대속'(redemption)을, 그리고 레 25:29, 레 25:31이하, 레 25:48; 룻 4:6; 렘 32:8에서는 '대속의 권리'를 의미한다. 겔 11:15에 나오는 "너희 친속"은 직역하면 "너의 대속자들"(MT 안셰 게울라테카이다.|사 45:13에서 뤼트라는 메히르(구매 가격 purchase price)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트론은 신약성경에서 마 20:28과 막 10:45의 예수님의 말씀에 단 2회, 동일한 어법으로 나타난다.||(a) 막 10:45(마 20:28)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마 10:45에서 예수님께서 인자이시며, 그의 메시야 사역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내어 주시는 섬김이다(참조: 요 10:11, 요 10:15, 요 10:17).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인 순종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 - 즉 적어도 보편성을 암시하는 막연한 수 - 들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신다. 비록 진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해방은 아주 분명히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한편 속전을 받는 자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다.||(b)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리적 차원을 명백히 부여하고 있다. 안티($473, for)는 '…에 유리하게' 뿐만 아니라, '…대신에'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과 누구도 그들을 위해 할 수 없는 것을 그들을 위해 행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전적으로 구약성경의 어느 한 본문(예: 사 53장)에 비추어 해석하거나, 그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된 역사(history)에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을 받아들이사, 죽음의 희생물이 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대리적으로 죽음을 당하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막 14:24). 예수님의 대리적 사역은 필연적인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c) 이러한 대리적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속전은 사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불되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 때문이다. 이 말씀의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실재를 죄인으로 판단하시고, 그에게 우리는 깊은데서부터만이 부르짖을 수 있는(시 130편) 시 90편의 하나님이시다.||(d)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상으로 해방시키지 않으시고 속전을 요구하시는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의로우신 뜻을 따르지 않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의무가 없으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뜻을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하심으로 그의 죽음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섬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우리를 위한 대리적 섬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 주셨다.||(e) 예수님께서는 물론 미리 죄를 사해 주셨다(막 2:5).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받아 들이시고(참조: 막 9:42이하), 죄 사함이 하나님의 기적임을 아시며(막 10:27),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죄의 심각성과 완전한 순종, 죄 사함의 참된 실재를 입증하시는 분으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순종으로부터 자신의 순종에로 들어올리시고 그리하여 단순히 희미한 죄의식을 가라 앉히는 대신에 중생(renewal)을 가져 오심으로 용서의 조건을 충족시키셨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것이 죄를 사하는 권세의 내적 조건이라는 것을 알면 속전이 요구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속전을 요구하는 이유가 미리 설명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이유가 명백해지는 까닭도 이해될 수 있다.||(f)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방인들을 보실 것으로 기대하시지만(마 8:11; 참조: 마 5:45), 그 자신이 그리스도요 재판관으로서 베푸시는 용서 이외의 다른 어떤 유효한 용서도 보지 못하셨다(마 25:31이하). 성부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은혜이다(눅 15:11이하).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한 죄인에 대해 기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선행이 예수님에게 한 일인줄 모르는 사람들도(마 25:37이하) 오직 그의 이름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의 용서하시는 사역에 힘입어서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g)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모든 사변적 해석들은 속죄를 통해 형성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갖는 결정적인 의미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의 심판과 축복의 산 결합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결합시킨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적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 결합의 실체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셨다. 이 속전으로 인하여 신자들에 대한 용서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신자들을 자유케 하여 그들 편에서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참 사랑으로 순종케 하도록 한다.|(참조: F. Buchsel).
구속되다
lutrovw
몸 값을 치르고 되찾다 to ransom, 속량하다 redeem.||#1. 일반 헬라어의 용법.||동사 뤼트로오는 '속전으로 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예를 들면 전쟁 포로를 석방하는 자들의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서부터 '속전을 받고 자유롭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이 단어는 또한 속전을 주는 자에 대해서 사용되었으며, 이것에서 '속전으로 사다'를 의미하게 되었다.|중간태로 '속전을 주고 사다'를 의미한다(참조: F. Buchsel).||#2. 70인역본의 용법.||뤼트로오는 70인역본에서 103여회 나오며 9개의 히브리어의 역어로 사용되었다.|이 동사는 70인역본에서 파다(몸 값을 받고 석방하다)의 역어로 40회, 가알(구속하다, 친족으로 행동하다)의 역어로 45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이 동사는 아랍(짐승의 목을 꺾다, 출 13:13?); 팔레트(석방, 해방, 시 32:1); 파차(나누다, 열다 open, snatch away, 시 144:10); 파락(멍에를 벗기다, 애 5:8)과 아람어 페락(단 4:24); 카나(얻다, 획득하다, 출 15:16 v.l.); 사가브(일어나다 시 59:1); 아람어 셰지브(구원자, 단 6:28[27])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뤼트루스다이(%775)가 고엘의 역어로 쓰인 주된 용법은 이사야 40장 이하에 나온다. 처음에 이 개념은 하나님께서 애굽 등에게 이스라엘을 위한 속전을 주신다는 것을 시사하였으나(사 45:13),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아무런 속전도 지불할 필요가 없으시며, 오히려 이방인들을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취득물로 주신다는 보다 대담한 사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구속은 아무 속전도 받지 않고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뤼트루스다이(%775)가 피드욘의 역어로 사용될 경우에는 대속제물에 의한 장자의 속량이나 노예 상태에서 해방, 특히 출애굽의 해방(신 7:8, 등)을 나타낸다. 이사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명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실 때 속전을 지불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뤼트루스다이(%775)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 단어를 충분히 포괄할 수 있다. 뤼트루스다이(%775)는 죄로부터가 아니고 주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및 의인들의 구원에 대해 매우 많이 언급하는 시편들(시 144:10; 시 26:11; 시 31:5, 등)에서 두 히브리 단어를 대신하여 사용된다. 죽음은 최후의 위기이며,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곧 죽음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할 수 있으나(시 103:4), 그것은 또한 죽음을 맛보지 않는 구속일 수도 있다(시 49:7이하). 여기에서 어떠한 속전도 소용이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음부에서 영혼을 구해내실 수 있다. 죄로부터의 구속이라는 개념이 약한 것은 코페르 어군이 의식적 속죄라는 부가적 요소를 지닌 이러한 영역에 적용된다는 사실 때문이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트로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사용되었다.|뤼트로오는 눅 24:21에서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한 말에 나타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여기서 뤼트루스다이(부정 현재 중간태)는 메시야를 통하여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일반적 기대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속전의 개념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뤼트로오는 딛 2:14에서 시 130:8의 사상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참조: 겔 37:23; 신 14:2).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목적은 바로 우리들의 구속 때문이라고 밝혀주며,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대속물"(막 10:45)이라고 하신 말씀을 반영한다. 우리의 구속은 모든 불법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자유하는 것이다. 바레트(Barrett)는 "이 자유는 죄의식보다 실제적 죄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선한 행위를 향한 정결과 운동력을 제공해 준다(참조: J. G. Gould).|이 구절은 또한 기독교인의 생활이 무신앙과 세속적 정열을 버리고 경건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뤼트로오는 벧전 1:18 이하에서 신자를 속박하고 있는 것과 구속의 수단에 대해 사용되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망령된"과 "헛된"이란 말은 우상숭배를 일컫는 말이며(레 17:7, 70인역본: 렘 8:19; 행 14:15; 참조: 롬 1:21),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 없는 생활은 망령되고 헛된 생활이다. 금과 은에 대한 은급은 사 52:3을 연상시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구속의 방법으로서의 피에 대해서는 엡 1:7; 히 9:12, 히 9:22; 계 1:5; 참조: 계 5:9을 참조하라. 어린 양에 대한 비유적 표현은 사 53:7을 연상시킨다. 유월절 어린 양과 짐승 희생 제물들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출 12:5; 행 29:1; 레 22:17-25; 겔 43:22이하; 참조: 히 9:14).|속량의 개념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들에는 값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전 6:20; 고전 7:23).|(참조: C. Brown; F. Buchsel).
구속됨
luvtrwsi"
구속 redemption, 해방 liberat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뤼트로시스는 뤼트로오($3084)에서 유래했으며, '속량함, 구속'을 의미한다(Plu. Arat. 11).||#2. 70인역본의 용법.||뤼트로시스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온다. 뤼트로시스는 레 25:29, 레 25:48; 사 63:4에서 게울라(구속의 권리, 속전, 친족)의 역어로, 그 밖의 경우에 그 단어는 파다(몸값을 받고 석방하다)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레 25:29, 레 25:48에서 그 단어의 의미는 '팔렸던 재산의 속량된'이다. 시 49:8에서 시편 기자는 죽음으로부터의 대속은 없다고 말한다. 사 63:4에서 이교도들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속의 해"로 나타난다. 시 111:9은 이스라엘의 구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며 시 130:7은 죄로부터의 구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민 18:16에서는 초태생을 위한 대속과 관련되어 있다(시 49:8).||#3. 신약성경의 용법.||뤼트로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구속 또는 의무의 면제'를 의미한다.|눅 1:68에서 뤼트로시스는 원수들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히 9:11-12에서 뤼트로시스는 죄로부터의 구속을 포함하여,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구속을 뜻한다. 이 단어의 개념은 법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의적이므로, 속전 개념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속죄일 의식의 견지에서 이해된다. 비록 피뿌림이 속죄를 이루기는 하지만(레 17:11) 속죄일의 희생제물은 엄밀히 말해 속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히 9:22, 히 9:25이하에 비추어 힐(D. Hill)은 '속죄일 의식에서 소와 염소들의 피가 일년 동안 지은 죄로부터 이스라엘 회중을 정결케 하고 자유롭게 한 것처럼 위대한 대제사장 자신의 피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가져오는 수단이며(대가는 아님) 모든 사람과 하나님(14절)의 영원한 새 관계의 수단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참조: C. Brown; F. Buchsel).
속량하는 자
lutrwthv"
구속자 redeemer.||#1. 일반 헬라어 용법.||뤼트로테스는 뤼트로오($3084)에서 유래했으며, '구속자, 해방자'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뤼트로테스는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가알(구속하다, 친족으로 행동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뤼트로테스는 시 19:14; 시 78:35에서 하나님에 대해 2회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트로테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7:35에 단 한번 나타난다.|뤼트로테스는 스데반의 설교에만 나오며 여기에서 그 말은 모세에게 적용된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참조: 출 2:14). 이 논증의 요점은 유대인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오랜 시기를 지내오는 동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지도자들과 구원자들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있다. 그러나 사실 유대인들이 우수한 지도자와 구원자로 간주하였던 모세는 이 두 가지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곧 그는 한편으로 통치자와 구원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당했다(참조: 행 7:52).|(참조: C. Brown; F. Buchsel).
등경
lucniva
촛대 candlestick , 등경 lampstand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뤼크니아(Plat. 이래)는 뤼크노스($3088: 등[불])에서 유래했으며, `등경, 등잔, 등대, 촛대'를 의미한다.|등불은 빛을 확산시키기 위해 등경이나 촛대 위에 올려 놓는다.||#2. 70인역본의 용법||뤼크니아는 70인역본에서 약 40회 나오며, 히브리어 메소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메소라는 등대 곧 등불이 놓인 대(특별한 등불의 자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대개 장막이나 성전의 `등대'를 의미한다.|따라서 뤼크니아는 대부분 장막과 성전 안에 있는 `등대'(출 25:31-출 25:35)를 뜻하며 가정집의 `촛대'(왕하 4:10)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크니아는 신약성경에서 12회 중 공관복음서에 4회, 히브리서 2회, 요한계시록 7회 사용되었다.||(a) 마 5:15(병행구, 막 4:21; 눅 8:16; 눅 11:33)에서 예수님은 빛을 발산하기 위해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신다.||(b) 계 1:12, 계 1:13, 계 1:20에서 일곱 교회는 일곱 개의 황금 초대로 상징되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계 1:12)|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13)|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계 2:5에 보면 증인들의 행위(빛)는 촛대와 불가분의 관련을 가진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그리스도의 증인들의 빛이 흐려지거나 심지어는 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은 오로지 회개에 의해서만 새로워질 수 있다.|히6:2에서 성전에 있는 일곱가지의 `등대'를 언급한다: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c) 계 11:4에서 뤼크니아는 두 증인을 나타낸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참조: 슥 4:2, 슥 4:11).|(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W. Michaelis; H. -C. Hahn).
뤼크노스
lucno"
등불 lamp, 빛 ligh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뤼크노스(Homer 이래)는 어근 류크(leuk: 빛)에서 유래했으며, 빛, 등[불]을 의미하였고 그 후에 거의 변함없이 일종의 기름등[불]을 의미했다. 등은 본래 위가 열린 사발 모양이었다가 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막힌 등이 생겼다. 등은 대개 빛을 좀 더 잘 확산시키기 위하여 등잔(대) 위에 올려 놓았다.||#2. 70인역본의 용법||뤼크노스는 70인역본에서 약 47회 나오며, 히브리어 네르(38)와 니르(2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네르와 니르는 기름과 빛을 내도록 불붙이는데 이용되는 심지가 들어있는 작은 사발 모양의 물건을 가리킨다(H.Porter). 구약성경에서 등은 보통 비유로 나온다. 그것은 수명(삼하21:17), 하나님의 도움의 근원(욥 29:3), 그리고 율법(시 119:105)을 나타낸다. 악한 자의 등불은 꺼질 것이다(욥 18:6).||#3. 신약성경의 용법||뤼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14회, 그 중 4복음서에 10회, 베드로전후서에 1회, 요한계시록에 3회 사용되었다.||(a) 마 5:15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이 빛을 발산하기위해서 그것을 등경 위에 두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병행구, 막 4:21; 눅 8:16; 눅 11:33). 이것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 한 법을 지적해 준다.|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그의 제자들의 세상에서의 역할에다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이 어둠을 밝히듯이 제자들은 그들의 처한 상황에 광명을 주도록 힘써야만 한다. 등불은 말 아래나 은밀한 구석에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모호한 태도를 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의 특성은 사람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가르칠 가능성도 있으며, 이것은 제자들의 사명의 공개적 증거도 암시하고 있다.||(b) 마 6:22(병행구, 눅 11:33이하)에서 눈을 몸의 `등불'로 묘사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인간의 건강은 빛의 축복이 그에게 임하는 가에 따라 좌우된다"(W.Michaelis). 힐(D.Hill)에 의하면, 눈에 관한 언급 바로 뒤에 나오는 하플루스(haplous : 순수한, 순전한)는 목적의 순수함, 혹은 한결같은 충성심을 뜻하는 히브리어 탐(tam, 아람어로 selim )의 영향을 받은 말이라고 한다. 힐(D.Hill)은 필손(F.V.Filson)의 다음과 같은 주해에 찬성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재산, 양자 모두에 관심을 쏟는다면, 그는 결코 순수한 이상을 가지지도 못할뿐더러 분명한 방향도 목적도 없는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c) 눅 12:35의 권면에서 켜진 등불을 준비의 상징으로 나타낸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d) 눅 15:8에서 여인이 등불을 켜고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열성과 근면을 묘사한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e) 요 5:35에서 예수님은 세례(침례) 요한을 켜서 비취는 `등불'에 비하셨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 자신은 빛(포스)로 묘사하는 반면에 그의 선구자 요한을 타오르며 비취는 등불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선구자의 사명의 위대성을 증거하신다. 요한이 빛 자체라고 불릴 수는 없지만(참조: 요 1:8), 그는 빛에 대하여 충실히 증거하였다.||(f) 벧후 1:19에서 더 확실한 예언을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로 묘사한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이 표현은 예언자 말씀의 직무를 특징 짓는다.||(g) 계 18:23에서 바벨론은 멸망할 때,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리라'는 경고를 받는다. 반면에 계21:23에 의하면 어린양 자신이 천국 도성의 등불이 된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또한 그 때에는 모든 등불이 쓸모없게 될 것이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오직 하나의 참 빛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기독교인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참조: J. H. Thayer; Walter Bauer; W. Michaelis; H. -C. Hahn).
깨어져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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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 취소하다, 폐지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뤼오(Homer 이래로)는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뤼오는 감옥으로부터 석방, 닫힌 것을 여는 것, 기초의 파괴, 차고를 푸는 것'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호머 작품에서(Od. 5, 397; 13, 321) 이미 뤼오는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구원'에 대해 사용되었다. 곧 곤경과 궁핍으로부터의 구원이란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죄와 연결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수많은 복합어형들이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발견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뤼오는 70인역본에서 32여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뤼오는 파타(열다)의 칼, 나팔, 피엘형의 역어로(창 42:27; 욥 39:5; 시 102[101]:20; 사 5:27; 사 14:17; 사 58:6; 렘 40[47]:4), 나타르(자유롭게 하다, 노예들을 자유케 하다)의 히필형의 역어로(시 105[104]:20; 시 146[145]:7), 나샬(신을 벗다)의 역어로 사용된다(출 3:5; 수 5:15).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에서 뤼오는 셰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풀린'이란 의미를 지닌 과거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단 3:92[25], 70인역본과 Theod.). 그리고 비유적으로 셰라(매듭을 풀다, 즉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다)의 역어로 사용된다(단 5:12). 사 40:2, 즉 예루살렘이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메시지에서 그 단어는 라차(기뻐하다,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다)의 나팔형을 뜻하기도 한다. 뤼오는 또한 나사(들어 올리다, 제하다, 욥 때문에 죄를 제하시는 주님께 사용된 말이다, 욥 42:9), 그리고 세타르(하나님전의 파괴에 사용된 말이다, 스 5:12)의 역어로 한 번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오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타난다.||(a) 뤼오는 묶인 또는 매인 어떤 인격체나 사물을 '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뤼오는 '신들메를 푸는 것'(막 1:7; 눅 3:16; 요 1:27; 행 13:15; 행 7:33; 참조: 출 3:5), '나귀새끼를 푸는 것'(마 21:2; 막 11:2, 막 11:4, 막 11:5; 눅 19:30이하; 눅 19:33), 그리고 '바울의 결박을 푸는 것'(행 22:30)에 대해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 11:44에서 이 단어는 나사로의 수의를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b) 뤼오는 '석방하다,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눅 13:16에서 뤼오는 십팔년 동안 사단에서 매인바 된 여인을 매임에서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불평하는 자들의 위선을 강조하는 말유희를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눅 13:15에 동일한 단어가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풀어내는 자들에 대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질문하셨다.|막 7:35에서 동일한 동사 뤼오가 말씀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사용되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테일러(V. Taylor)는 마가의 이 말에는 치유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다이스만(A. Deissmann)은 호 데스모스 테스 글로세스(혀의 맺힌 것)는 이러한 언어 장애가 마귀의 영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개념을 예증해 주는 전문적인 표현이었다고 주장한다.|뤼오는 행 2:24에서 "사망"으로부터 풀어지거나 자유로와진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여기서 뤼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뤼오는 마 16:19에서 맨 것을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매는 것과 푸는 권한이 베드로에게 부여되었고 마 18:18에서는 제자들과 교회 전반에 부여되었는데, 이 말들은 랍비식 용법과 대조된다(참조: 데오 = 아람어 야살[매다 bind]; 뤼오 = 아람어 셰라[풀다 loose]). 가르치는 자로서의 랍비들의 권위는 특정한 일들을 그들이 금하거나 허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나타내어 진다. 그들은 파문을 시킬 수 있었다. 즉 어떤 사람을 회당에서 제적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랍비 기록들에 비교적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결정들은 하늘에서, 즉 하나님과 함께 효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었다(SB I 738이하; 702이하). 분명히 이 권세는 어떤 유대적 제도들과도 아주 무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자체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계 9:14-15에서 뤼오는 천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이 일로 인해 무시무시한 대군이 놓임을 받게 되었다. 이 강은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경계, 곧 약속의 땅의 이상적인 한계를 나타낸다(창 15:18). 이 지역으로부터 구약성경 시대에 대 침략이 있었다.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북 왕국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 유다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계속 나타나는 악한 세상을 대표한다(참조: 계 17장 이하). '넷'이라는 숫자는 아마 '완전'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천사들은 특정한 무리로서 여기 외에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천사들은 자연력을 억제하는 계 7:1의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로 보기도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이곳에 나타난 천사들의 속성이 악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부적당한 것 같다. 이 천사들이 결박된 것을 보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자원해서 수행하는 그런 선한 천사로 볼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이 천사들이 놓임을 받은 것처럼 파괴력을 지닌 악한 세력들도 놓임을 받았다. 이 환상의 정확한 의미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해석하는 방법에 달려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환상들을 연속적인 것으로 다룬다. 이 경우에 이 환상은 어떤 특별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 병행되는 요한계시록 해석에 따르면 수많은 연속적인 환상들은 진행하는 역사의 다른 국면들과 관련된다. 이런 경우에 이 환상은 인류가 전쟁을 벌여 대파괴와 생명의 상실의 시기로 떨어지는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이 때는 회개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계 9:20 이하). (참조: L. Morris; R. Earle; C. Brown).|한편 이 형벌에 대해 보다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이 형벌의 목적은 사람들로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계 9:21). 그러므로 전체 심판은, 이 세상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가하여지며, 또한 말하자면 내세에서 갖게 될 그들의 운명을 그들로 미리 맛보게 하는, 영적 재난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짓는다. 죄는 흔히 바로 뒤에 불안과 고난을 초래한다. 평안과 만족이 혹시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독침이 유력한 것은 아마도 그 효능이 흔히 일반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자의 공포, 도둑의 수치, 부정한 자의 굴욕과 신체적 고난, 주정뱅이의 섬망증은 아주 실제적인 고통들이다. 그러한 고통들의 수는 "이만만"(이억)으로 묘사될 만큼 실로 매우 많다(계 9:16). 그것들은 인간들의 더 많은 부분이 아닌 일부분을 멸망시킨다(계 9:15, "삼분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들 대다수는 회개에 이르지 아니한다! 그러한 형벌은, 계 9:17과 계 9:18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예시된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지옥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이것은 다른 심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역사하는 기간은 세상의 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에 미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왔다. 그들은 "유브라데"로부터 일어난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강을 그들의 원수들이 생겨나는 자연적인 근원으로 간주했다고 많은 저술가들이 지적한다(사 7:20, 사 8:7, 렘 46:10을 보라). 실로, 유브라데는 유대 나라의 국경으로 간주되었다(창 15:18; 신 1:7; 신 11:24; 수 1:4; 삼하 8:3; 대상 5:9). 따라서, 유브라데로부터 나온 자들은 흔히 원수들이었다. 이 표현은 전체적인 묘사를 채우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뒤 따르는 형벌들은 그것들의 자연적인 근원, 즉 인간들의 죄들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계 16:12, 거기에서 유브라데는 확실히 악의를 가진 군대들이 나오는 근원으로 언급되고 있다). (A. Plummer).|계 20:3, 계 20:7에서 뤼오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사단의 결박과 풀어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c) 뤼오는 수많은 구절들에서 '깨뜨리다, 해체(해산)하다, 파괴(멸망)시키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계 5:2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의해 개막된 역사의 두루마리는 아무도 펴거나 뗄만한 자가 없는 일곱인으로 봉하여져 있다. 그러나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5).|행 27:41에서 뤼오는 바울이 로마로 결박되어 타고 가는 배의 고물이 깨어지는 것, 행 13:43에서 뤼오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의 집회가 파하는 것, 요 2:19와 엡 2:14에서 뤼오는 허물거나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요 2:19에서 뤼오는 → 성전과 관련되어 두 번 사용된다. 성전 정화에 대한 요한의 기록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표적을 구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걸렸다는 유대인들의 말을 주석함에 있어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인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지적한다(요 2:21). 제자들은 이 사실을 부활 후에 이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제자들은 차례로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 2:22).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앞에서 예수님이 재판 받으실 때에 거짓 증인들은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에고 카탈뤼소 톤 나온 투톤 톤 케이로포이에톤 카이 디아 트리온 헤메론 알론 아케이로포이에톤 오이코도메소라고 주장했다(막 14:58; 참조: 단축된 병행구 마 26:61 여기에도 카탈뤼소가 나온다). 성전 그 자체의 무너짐은 막 13:2 병행구 마 24:2; 눅 21:6에 예언되어 있다. 도드(Dodd)는 요한이 사용한 조건적인 의미를 지닌 명령형 동사(즉 "만일 너희가 헌다면… ")와 비문어적인 엔 트리신 헤메라이스라는 구절은 원시 셈인들의 강화 형태를 시사한다고 제안한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302). 불트만(Bultmann)은 에게이로가 '건물을 세움'에 대해 사용되는 것처럼 뤼오와 카탈뤼오는 '건물의 파괴'에 대해 자주 사용되었다(마 27:40; 막 13:2; 막 14:58; 막 15:29; 거짓 증인들과 십자가 사건 때의 방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행 6:14)고 지적하였다(The Gospel of John, 1971, 125). 그는 이곳에는 단순한 조건절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문체인 반어적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참조: 암 4:4; 사 8:9이하). 곧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성전을 대신하였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강화는 첫 번째 성전의 멸망과 마찬가지로(왕하 25:9, 왕하 25:13-17) 이 성전의 멸망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유대인들의 불순종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성전을 헐겠다고 위협했다고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이 바로 거짓 증인들이었음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오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의 주요 골자이다(참조: 요 2:20; 요 3:3 이하; 요 4:10 이하, 요 4:32 이하; 요 6:32 이하; 요 7:34 이하; 요 14:4 이하, 요 14:7 이하, 요 14:22 이하; 요 16:17 이하).|엡 2:14에서는 약간 다른 점을 나타내기 위해 뤼오가 사용되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메소토이콘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단지 이 구절에만 나오며 일반 헬라어에서도 드물게 사용되었고 70인역본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의 뜻은 '칸막이 또는 장벽'으로 분명히 성전의 '돌벽'을 지칭한다. 이 돌벽에는 푯말들이 붙어 있는데 그 푯말들 중, "어떤 것에는 헬라어로 또한 어떤 것에는 로마어로 "이 성소 안에 이방인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함"이라는 정결법이 선포되어 있었다(Josephus, War, 5,5[194]). 바울이 에베소인 드로비모를 이 벽을 넘어 들어오게 하였다는 거짓 죄목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고소를 받아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행 21:29-30). 엡 2장의 문장은 분명히 소 아시아의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인들의 습관에 대한 어떤 지식을 전제로 삼고 있으며 이 장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이제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는(엡 2:21) 단언에서 절정을 이룬다. 엡 2:14은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 신자나 이방인 신자 간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절들에 나온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이하). 이방인에 대해 보호하는 벽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사상은 아리스테아스(Aristeas) 139에 나타나 있다; "이제 현명한 율법 부여자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하나하나를 잘 관찰하여 견고한 방책과 철벽으로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들이 다른 이방인과 결코 섞이지 않고 심신을 정결하게 유지하며 모든 헛된 생각에서 해방되어온 피조물을 지배하는 유일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 복음서들과는 달리, 엡 2:14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이 동사의 주어이시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장벽 훼파는 예수님의 화해적 죽으심의 결과이다.|벧후 3:10-11에 뤼오는 마지막 대화재를 묘사하고 있다. 켈리(Kelly)는 벧후 3:11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것을 그는 "허물어지고 있다"로 번역한다; 한글개역 "풀어지고")가 "문맥에서 암시되는 미래적 세력을 갖고 있거나 또는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이 용해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함으로써 자신의 소환의 긴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이라(더욱 개연성이 있음)"고 제안하였다(Op. cit., 366).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d) 뤼오는 '취소(무효로)하다, 권위를 박탈하다, 없애다, 폐(지)하다, 타파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가르침이나 행동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 5:19에서 예수님은 이 계명들 중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뤼세(뤼오의 과거 가정 능동태)하는 모든 자에게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뤼오를 KJV, NRSV, NIV, 공동, 새 번역은 '부수거나 어긴다(breaks)는 의미로, NASB는 '취소나 폐지한다'(annuls)는 의미로 번역했다. 어느 의미를 취해도 좋은 것이다.|마 5:20에서는 이것이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 결부되며 산상수훈은 이 계명들이 어떻게 버려졌는가 하는 실례들을 나타내는 데로 이어진다. 곧 살인과 분노요(마 5:21이하; 참조: 출 20:13; 신 5:17; 신 16:8); 간음과 음행이요(마 5:27이하; 참조: 출 20:14; 신 5:18); 맹세요(마 5:33-37; 참조: 레 19:12; 민 30:3; 신 23:21; 마 23:16-22; 약 5:12); 정의와 복수요(마 5:38-42; 참조: 출 21:24; 레 24:20; 신 19:21; 잠 24:29; 눅 6:29 이하; 롬 12:17; 벧전 2:19; 벧전 3:9); 이웃 사랑인 것이다(마 5:43이하; 참조: 레 19:18; 잠 25:21이하; 눅 6:27이하; 32-32-구약성경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타르굼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유대교적 종파주의자들의 표적일 것이다. M. Smith; W. D. Davies).|이 모든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버리기는커녕 율법을 인정하시며 또한 율법을 사람의 외적 행동에 적용하실 뿐만 아니라 내적 마음가짐에까지 적용하신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또한 마 7:12; 마 11:13; 마 22:40을 참조하라. 위선으로 율법을 우롱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서는 마 15:1-11; 마 23:1-39을 참조하라.|요 5:18에서 뤼오는→안식일 Sabbath을 범하는 것 및 타파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 옆에서 삼십 팔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그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론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답변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아담의 죄악 된 시도 같이 들렸다(창 3:5이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특별하게는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행하는 이 치유의 사건 속에서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대답을 하셨다.|요 7:23에서 뤼오는 율법을 폐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 하느냐." 어느 정도의 아픔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남성의 성기에 행해지는 할례 의식과 고통을 제거하는 전신의 치료 사이에는 풍자적인 점이 있다. 예수님의 태도에는 치유하시는데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똑같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요 10:35 이하에서는 이 문제가 성경으로까지 확대된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신들"에 대한 말씀은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라는 시 82(81):6을 인용문으로 채택한 앞 절에 대한 언급이다. 이 구절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본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주제로 하여 상당히 논의해 왔다(참조: L. Morris).|고전 7:27에서 뤼오와 단 하나의 명사 뤼시스가 이혼과 관련되어 나온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다우베(D. Daub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대적인 용법에 따라, 남편과 "헤어진" 아내에 대해 코리제스다이를 사용하고 또한 아내를 "버린"남편에 대해 아피에나이(aphienai)를 사용하는 바울의 용법과 비교해 볼 때(참조: 고전 7:10이하), 뤼시스(석방)는 이혼을 나타내는 다소 비전문적인 단어이다(New Testament and Rabbinic Judaism, 1956, 363). 아마 바울은 정식 이혼 뿐만 아니라 별거와 또한 배우자의 죽음까지도 포괄하는 보다 더 일반적인 술어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폴뤼오는 이혼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5:31이하 병행구; 눅 16:18; 마 19:3-9 병행구 막 10:2-12). 바렛(C. K. Barret)은 '고전 7:27에는 기존 상황 속에서 인간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해야 하는 엄격한 규정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충고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The First Epistle to Corinthians, BNTC, 1968, 175). 한편 이 규정은 헤어지지 말고 결혼 안에서 화해를 구하라는 주님의 훈령과, 또한 구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고전 7:10이하). 그리고 고전 7장에 나오는 결혼 문제 전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분명히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인데 반해(참조: 고전 7:29이하) 바울이 재림을 제외하고는 수시로 병경되는 상황들을 상상하였는가 하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내에게서 놓인(렐뤼사이 아포 귀나이코스)"(고전 7:27) 자들이 결혼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고전 7:28). 또한 이것은 고전 7:2-7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고려해 볼 때 정말로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C. Brown; F. Buchsel; J. H. Thayer).
로이스
Lwi?"
로이스 Loiss(인)||로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1:5에 한번 그의 이름이 나타난다. 로이스는 디모데의 조모이며,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의 모인듯 하다. 그의 가족은 루스드라에서 살았다(참조 행 16:1). 로이스는 아마도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기간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 같으며(행 14장). 경건한 유대인 여자였다.|바울은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믿음이 먼저 그의 조모 로이스와 그의 모친 유니게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참조: PEB; Walter Bauer; J. H. Thayer).

Lwvt
롯 Lot(인)||#1. 구약성경.||(a) 롯은 히브리어 로트(덮개, 베일)에서 유래했으며, '롯'을 가리킨다.||(b) 롯은 하란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조카이다(창 11:27-31).||(c) 그는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다가(창 11:31)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창 12:4-5).||(d)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창 13:1) 애굽에서 나와 벧엘에 거하였다(창 13:3).||(e) 그는 부자였으며(창 13:5, 6), 그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다투었고(창 13:7),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헤어져서 소돔에 거하였다(창 13:8-13).||(f) 그는 그돌라오멜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아브라함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창 13:8-13).||(g) 그는 천사들을 영접하였고(창 19:1-4), 그들을 통하여 소돔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았다(창 19:15, 29).|그러나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창 19:26).||(h) 그는 그의 딸들과 근친상간을 하였으며(창 19:30-38), 본의 아니게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창 19:37, 38).||#2. 신약성경.||롯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베드로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17:28; 눅 17:29에서 '롯의 때'를 상기시킨다: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b) 벧후 2:7 이하에서 롯을 의인으로 인정한다: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TB).
마앗
Maavq
마앗 Maath(인)||마아드는 히브리어 마아트(작다)의 음역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 마앗으로 번역했다.|신약성경에서 눅 3:26에 한번 그리스도의 조상 중 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마가단
Magdalav
막달라 Magdala, 마가단 Magadan.||막달라는 갈릴리 호수의 서안에 위치한 장소로, 디베랴에서 북으로 약 3마일 거리에 있으며, 게세니우스(Gesenius)에 의하면, 납달리 지파의 요새화된 도시 미그달 엘(즉, 하나님의 탑, 수 19:38)과 동일한 곳이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서 마그달(Magdal) 또는 미그달(Migdal), 지금의 '메드셸(Medschel) 또한 '메디델'(Medjdel), 고대 탑의 유적을 가진, 초라한 회교 마을이다(마 15:39TR). 다른 독구는 %767(Magadan)이다. 이 두 어형 중 어느 것이 복음서 기자에 의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본가들에 의해 보다 친숙한 어형인 $3093로 매우 쉽게 변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막달라로 추정된 지역은 그리스도께서 4,000명을 먹이신 장면과 마태의 기록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휴식을 취하시러 예수님께서 배를 대신 장소에 근접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