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하시게 하노니
mavrtu"
증인 witness.||#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마르튀스(Pind., Hdt. 이래)는 인도 유럽 어근 스메르(smer: 기억하다, 기억하고 있다, 주의하다[실수나 위험을 피하거나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에서 유래했으며, 기억이나 회상으로 어떤 것에 대하여 알고 있고,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자, 즉 증인이다. 증인은 무시되거나 잊혀질 수 없는 어떤 일을 경험하고 이제 이런 점에서 다를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된 자로서, 기억이나 화상으로 그 경험의 내용을 말할 수 있고 말하는 자이다.|일반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1) 사건이나 사실들에 대한 법적 '증인'|(2) 사실들에 대한 '증인'이란 일반적인 의미로,|(3) 진리나 견해들과 신념들에 대한 '증인'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신적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증인으로 생각하고, 역경에서 - 고통을 감수하고 시련의 상태를 수용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 그들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관념들과 교리들의 진실성을 입증하거나 증거했다(참조: Epictetus, Dissertationes). 이 종류의 마르튀스가 비록 죽음까지도 불사할지라도, 후대 기독교인들의 순교자들의 개념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죽음이 진실의 증거가 될 가능성이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에픽테투스가 소크라테스를 마르튀스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2. 70인역본의 용법.||(a) 명사 마르튀스는 70인역본에서 약 55회 나오며, 히브리어 에드(증인)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마르튀스는 70인역본에서 범인에 대해 판결에 관한 증인(민 35:30; 신 17:6; 신 19:15; 신 17:7), 거짓 증인(시 27:12; 시 35:11; 신 19:16-21), 소유물 매매(렘 32:10, 렘 32:12, 렘 32:25, 렘 32:44) 및 구속 행위(룻 4:9-11와 같은 여러 가지 거래의 증인),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이스라엘(사 43:9-10; 사 44:8-9), 증인으로서 하나님 자신(삼상 12:5; 욥 16:19; 렘 29:23; 말 3:5)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b)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의 행위 안에는 고통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으며 유대주의에서는 이런 순교가 대단히 존경을 받았다(참조: 마카베오서, 특히 마카베오 사서 18: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르튀스(마르튀리아) 혹은 마르튀레오 그리고 심지어 마르튀리온과 같은 용어들이 결코 그런 신앙의 위인들에게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참조: H. Strathmannn, TDNT). 그 말들을 상세히 그리고 신중하게 분석하고 난 후에 브록스(N. Brox)는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구약성경과 후기 유대주의가 순교자라는 칭호의 기원일 가능성이 없으며" 또한 "순교자들과 예언자들을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Zeuge und Martyrer).||#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마르튀스는 신약성경에서 34회 나오며, 일반 헬라어 문헌과 거의 같은 용법으로, 확신할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한 증인이란 의미와 진리, 즉 확신하여 고백하는 진리에 대한 증인이란 의미를 지니고 발전했다.||(a) 일반적 용법.|사실들에 대한 증인. 이 용법은 막 14:63에서 나타나며,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고백 이후에 더 이상의 증인들에 대한 여하한 필요성도 찾지 못하고 있다: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행 6:13; 행 7:58에서도 의미가 동일하다.|히 10:28과 마 18:16에도 마찬가지다. 이 두 구절에서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요구하는 신 17:6과 신 19:15을 인용 내지 채용하고 있다.|딤전 5:19에 의하면 장로에 대한 고소도 동일한 원리에 따라야 한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바울은 고후 13:1에서도 이 원리에 호소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2회에 걸친 방문을, 사실을 명백히 확증한 두 사람의 증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이와 근소하게 상이한 용법은, 바울이 하나님을 자기의 끊임없는 기도 등에 대한 증인으로 부른 경우(롬 1:9), 혹은 그가 데살로니가인들(과 하나님)을 그의 비난할 데가 없는 행동에 대한 증인으로서 부른 경우이다(살전 2:10).|고후 1:23에서 그는 만일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자기에 대(항)해 증언해 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요청을, 이러한 호소로 삼는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 증인이 눅 11:48의 요점이다. 여기에서는 선지자들의 무덤 숭배가 그들에 대한 핍박을 입증해 준다.|마르튀스가 딤전 6:12에서도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디모데의 신앙 고백이 많은 증인들 앞에서 이루어진다(참조: 딤후 2:2).|히 12:1에서 경주를 지켜보는 증인들은 신앙 고백적 증인들이라고 여겨지지만(참조: 히 11:2) 이것이 사실적 증언의 요소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b) 누가의 특별용법.|눅 24:48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용법은, 직접적으로 알려진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의 증언을 포용하고 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단지 그 사실들의 의미가 진가를 인정 받을 경우에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증언은 믿음의 형태, 복음 전도자적 신앙 고백의 형태를 취한다. 복음은 역사적 계시이므로 사실들의 증언과 진리의 증언은 동일하다. 사상이나 신화가 아닌, 사실들이 쟁점이다. 이 사실들을 증언하는 자들은 그것들을 통하여 살았다(눅 24:47; 행 1:8). 그들은 또한 그 사실들을 이해하였다. 성령을 받을 때 그들은 이로써 세계를 향한 증인들로서 나갈 수 있는 채비를 갖추게 된다.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자들은 복음 전도자 바울 및 바나바와 대조되는 자들로서(눅 24:32), 특별한 의미에서의 그의 증인들이다(행 13:31).||(c) 누가복음에 나타난, 사실적 증인과 신앙 고백적 증인의 시초적 분리. 그러나 누가는 바울(행 22:15)과 스데반(행 22:20)을 여전히 증인들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비록 행 1:8의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그가 행 9:3이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우는 제외하고), 그의 선교사역 중에서 사실들에 대한 증인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실들의 의미에 대한 증인이다. 즉 예수님에 '대한'(to) 증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위한(옹호하는)"(for) 증인이다(행 22:15). 이제는 신앙 고백적 요소가 사실적 요소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신앙 고백 그 자체는 그리스도의 삶, 죽음 및 부활의 역사적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스데반도 역시 주요한 의미에서는 신앙 고백적 증인이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러한 증인이 된다. 즉 자신의 죽음에 의해 자기의 신앙 고백의 진지성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행 22:20의 용법은, 피에 의한 증인 즉 순교자를 뜻하는 마르튀스의 후기 용법을 위해 그 기초를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d) 베드로전서.|벧전 5:1에 독특한 양면적 용법이 존재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첫째의 명백한 의미는 목격자이다. 그러나 그 연장선상에서 그 위에 동참의 뜻도 시사한다. 기자는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고난이 무엇을 수반하는지를 알고 있다(참조: 벧전 4:13).||(e) 계 3:14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계 11:3에는 예루살렘에서 1,260일 동안 증거하고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아니라 그들의 예언적 활동 때문에 증인들이다. 유사하게 2:13에서 안티바가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증인으로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라는 의미에서 증인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이것은 계 17:6에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말한 것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여기에 "증인들"이란 말은 후기의 순교자들이란 의미를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순교한 성도들이 따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주석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증인들에 대한 참된 개념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것이다.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자들은 단순히 자기들의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언급되어 있다. 자기들의 신앙 때문에 죽을 처지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으로 불리워지지 않는다. 그 명칭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역에 종사하는 자들을 위해 구별해둔 것이다.|증인은 이제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있게 선언하는 자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을 행하는 자마다 증인이 아니다. 그 명칭은 죽임을 당함으로 그들의 증거의 궁극적 중대성을 입증하는 자들을 위해 구별해둔 것이다. 이들은 충성된 증인들이며, 오직 충성된 증인은 완전한 의미에서 증인들이며, 참된 증인들이다. 요한계시록의 증인의 개념은 사도행전 22:20의 증인의 개념과 동일하다.|이 빛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충성된 증인"(본절과 3:14)으로 불리워진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문구는 시 89:37에서 취한 것이다: 하늘의 충성된 증인. 시편에서 그것은 하나님께 적용되며, 본문에서 메시야에 적용된다. 그 의미는 1:1, 2에서 볼 수 있다.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해준 계시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부른다(1:2). 그는 이 책무를 확실하게 수행하신다. 이것은 인사에(1:5), 마지막 편지의 시작에(3:15) 강조되어 있다.|그러나 이것은 "충성된 증인"이란 의미를 다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와 관련하여 뿐만 아니라 더욱 일반적으로 그 타이틀(title 칭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났으며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함이로다"(요 18:37). 그는 죽으심으로 이 소명에 충성하신 것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그의 칭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른 것을 생각할 때, 순교자 안티바가 동일한 칭호를 가졌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은 기독교 증인의 모델(model)이다(H. Strathmann).|모든 고백과 증거 행위의 배후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참된 증인으로 임재하여 계신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의 표준으로서, 하나님의 영(영)을 지닌 자로서, 종말론적 증인과 심판자로서 공동체의 고백과 증거를 지지하신다(참조: O. Michel).|(참조: A. A. Trites; H. Strathmann;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