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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사리온
ojyavrion
(빵에 곁들여 먹는) 식용 물고기||#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옵사리온(Homer 이래)은 옵손(%14)에서 유래한 지소어이며, 무엇이든 빵과 함께 먹는 것, 특히 삶거나 구운 음식, 특히 '물고기'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옵사리온은 70인역본에서 토빗 2:2에 한번 나타나며, '음식'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옵사리온은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식사에 마련된 물고기 혹은 식사에 쓸 물고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요 6:9; 요 6:11; 요 21:9, 요 21:10; 요 21:13).|(참조: Walter Bauer; J.H.Thayer; J.A.Motyer).
다하여 가고
ojyev
오랜 시간 후, 늦게||옵세(Homer. 이래)는 오피스(%795: 간주하다)에서 유래한 시간의 부사이며 '오랜 시간 후에, ~의 훨씬 후에, 늦게'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옵세는 3회, 마 28:1; 막 11:19; 막 13:35에만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늦은
o[yimo"
늦은(비) late(ra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옵시모스(Homer 이래로)는 홉세($3796: 늦게)에서 유래했으며,|(a) '늦은',|(b) '늦은 비'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옵시모스는 70인역본에서 70회 나오며, 아필(늦은, 출 9:32)과 말코쉬(늦은 비, 신 11:14; 잠 16:15; 호 6:3; 욜 2:23; 슥 10:1; 렘 5:24)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이른 비가 곡식이 발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늦은 비는 비가 더 이상 오지 않게 되는 건기 이전에 곡식을 성숙케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늦은 비는 봄비이며, 수확 직전 3, 4월에 주로 내리며, 이른 비는 가을에 내린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옵시모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5:7에 한번 나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참조: L.L.Morris; J.H.Thayer).
저물 때
o[yivo"
늦은, 저녁.||#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옵시오스(Pind. 이래)는 옵세($3796: ...의 훨씬 후에, 늦게)에서 유래했으며,||(a) 형용사로서 '늦은' late을 의미하며,|(b) 명사로서 '저녁' evening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옵시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만 사용되었다.||(a) 옵시오스는 형용사로 '늦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막 11:11).||(b) 옵시오스는 명사로 '저녁'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마 8:16; 마 14:15; 마 14:23; 마 16:2; 마 20:8; 마 26:20; 마 27:57; 막 1:32; 막 4:35; 막 6:47; 막 14:17; 막 15:42; 요 6:16; 요 20:19).
얼굴
o[yi"
얼굴, 외모||#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옵시스(Homer 이래)는 옵타노($3700: 나타나다)에서 유래했으며,||(a) '보기' seeing, '봄', '시각' sight.|(b) '얼굴' face, '용모' countenance.|(c) '외모', '외관'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옵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옵시스는 얼굴을 의미한다.|①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②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b) 옵시스는 '외모'를 의미한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ojywvnion
삯 wages, 보수 paymen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옵소니온(Mehander 시대 이래)은 '음식물'을 뜻하는 옵손(%19)과 '사다'를 뜻하는 오네오마이(%20)의 합성어이며, 본래의 의미는 음식물을 사기 위해 지정된 것, 후에는 '돈', 다음에 '군대의 급여', 그 다음으로는 보다 일반적으로 관리의 '봉급이나 임금'을 의미하게 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옵소니온은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에스드라상 4:56에서 음식물을 살 때 필요한 '현금', 마카베오일서 3:28; 마카베오일서 4:32에서 일반적인 '급료'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옵소니온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만 사용되었다.||(a) 눅 3:14에서 세례(침례) 요한은 군인들이 그들의 급료에 만족할 것을 충고한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b) 롬 6:23에서 요점은 죄가 삯을 지불한다는 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문맥은 세가지 측면이 강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① 죄가 지불하고 제공하는 생계(subsistence)는 죽음이다. 타 옵소니아는 죄가, 죄를 위하여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자들에게 지불하는 식량이며, 생명을 위해 지급된 이 식량들은 사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는 생명을 약속하면서 사망을 준다.|② 옵소니온이 한번만 지급되는 급료가 아니고 계속되는 이상 사망은 단순히 생명의 끝이나 최종적 형벌이 아니라 죽음이 삶에 던지는 실제적 암영이다. 말하자면 사망은 우리의 현제적 삶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우리가 이미 받고 있는 현재의 급료이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이미 생명의 알라본(보증)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자에게 허락된 것과 같이 죄도 이미 사망의 잔으로부터 독약을 자기의 종들에게 준다. 이것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다(23절a).|③ 그러나 이 권리에 대비하여 우리가 하나님 밑에서 일함으로써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놓여있다(23절b). 이 권리는 강요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무엇을 주장할 권리는 없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영생을 받는 것이다.||(c) 고전 9:7에서 옵소니아는 바울이 자신의 전도 사역에 대한 보수를 나타낸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이것은 자신의 전도 사업을 군사적인 임무에 비교함으로써 군인의 급료에 비유한 것일 뿐 아니라, 회중들에 대하여 사도의 합법적인 요구를 암시한 것이다.|바울은 교회들이 그에게 배푼 후원에 대해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그의 사역이 일종의 전쟁이라는 것, 그는 생계의 후원을 요구할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베풀어진 교회의 어떤 후원도 바울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될 수 없으며, '급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시한다.|고후 11:8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참조: J.H.Thayer; Walter Bauer; O.Becker; Heidland).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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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를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문구는 요한계시록에만 5회 나온다(계 1:4; 계 1:8; 계 4:8; 계 11:17; 계 16:5). 요한계시록은 출 3:4(에고 ... 호 온, 나는 존재하는 자이다)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다시 언급한다. 그러나 무시간적인 현재 서술법에 새로운 두 절을 더하여 페르시아의 세-시제-형식(three-tense-schema)을 따라 세겹 문구를 만들었다. 신약성경에서 호 온은 계시록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이며, 호 온 카이 호 엔( 11:17; 계 16:5)과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계 1:4; 계 1:8)와 호 엔 카이 호 온 카이 에르코메노스(계 4:8)의 형식으로 나온다.|이 문구는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진술에서(계 1:8), 예배에서(계 4:8; 계 11:17; 계 16:5), 여기 인사에서(계 1:4)에서 나온다. 이것은 호 온의 비변화성과 일종의 불변화사로서의 엔 사용을 설명한다. 언어학적으로 이것은 곤란하지만 자유 분방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칭호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올무에 걸리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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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무를 놓다, 덫으로 잡다.||#1. 헬라어 및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파기듀오(성경에만 나옴)는 파기스($3803: 덫, 올가미, 함정)에서 유래했으며, '올무를 놓다, 덫을 놓다, 덫 안으로 유혹하다, 덫으로 잡다'를 의미한다.|70인역본에서 삼상 28:9에서 히브리어 나카쉬(미끼를 놓다, 미끼로 낚아들이다, 쏘아 떨어 드리다)의 역어로, 전 9:12에서 야코쉬(때려 눕히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파기듀오는 신약성경에서 마 22:15에 한번 나온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바치는 세금 문제를 질문함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고 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파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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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무, 덫 snare, trap.||#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기스(Aristoph. 이래)는 페그뉘미($4078: 튼튼하게 하다, 붙들어 매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이 단어는 '붙들어 매거나 단단히 붙잡는 것', 특히 '올가미, 올무, 덫, 그물, 쥐덫'을 나태내기 위해 사용되었다.||(b) 이 단어는 상징적으로 사람들 유혹하는 위험한 피조물로서 여인에 관해 사용되었다.||(c) 종교적 문구로는 '아테'(: 현혹이나 멸망 또는 죄로 이끄는, 그리이스 여신)의 그물에 붙잡히다 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60회 나오며, '올무, 함정, 그물'(시 69:22; 시 140:5; 호 5:1 이하)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전이된 의미들은 교활한 요소나 파괴적인 요소를 강조한다(시 35:7). 간혹 파멸의 돌발성이 전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후에 이 용례는 보다 전형화 되어, 우상 숭배나 "불경건한 자들의 올무들"에 대하여 사용된다(예레미야, 시편, 잠언). 잠 13:14에서는 하나님의 형벌 자체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키스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로마서, 디모데전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예수님의 종말론적 대화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이 올무와 같이 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신다. 세상 일로 바쁜 자들에게는 그 날이 가져오는 멸망이 닥쳐올 것이다.||(b) "마귀의 올무"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 나온다.|① 딤전 3:7에 의하면 감독에 의한 나쁜 행위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감독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경멸 당하고, 그는 사탄에게 손쉬운 먹이이므로 사탄은 그를 그의 힘으로 붙잡아 회중을 위한 봉사에 부적당하게 만든다.|② 딤후 2:26 이하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다. 그들이 저항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마귀가 그들을 속이고 마귀의 뜻대로 행하도록 올무를 놓았기 때문이다.|③ 딤전 6:9은 그런 사람들은 올무에 떨어진다고 말한다. "시험과 올무와 정욕"의 결합은 여기서도 역시 '마귀의 올무'의 사상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시험과 올무와 정욕을 만들어 내는 자는 마귀이다.||(c)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시 69:22 인용).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밥상, 즉 "그들의 생계 수단과 행하는 것 모두"를 올무와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셨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난 받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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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suffering. 고통 affliction, 불행 misfortune.||#1. 고전 헬라어 문헌||명사 파데마는 보다 덜 사용되기는 하지만, 파도스($3806)와 같이 파스코($3958)의 역사(歷史)의 과정을 밟아 왔다. 이 명사는 첫째로 어떤 사람에 닥치고 그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사는 대부분 malam partem에서 '불행, 고난'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명사는 마데마(배우는 것, 지식, 가르침)와 함께 배운 것과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Xenoph.Cyr.,Ⅲ,1,17; Aristoph. Tes., 199 등). 이 명사는 또한 malam partem에서 주로 외부의 사건들로 야기된 육체적, 정신적 상태, 즉 '고난의 상태, 슬픈 심정, 슬픔' 등을 의미하며, 간혹 파도스의 동의어로 '감정'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는 이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필로는 '질병'이란 뜻으로 사용했으며, 요세푸스도 마찬가지다. 요세푸스는 또한 우주의 '운행 과정'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했다(Antiquities I.156).||#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데마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히 2:9을 제외하고 언제나 복수로 사용되었다. '정욕, 충동'의 의미로는 드물게 나타나지만(갈 5:24; 롬 7:5), 주된 의미는 '고난'이다(롬 8:I8; 고후 1:5 - 고후 1:7; 빌 3:1O; 골 1:24; 딤후 5:11; 히 2:9 - 고후 2:10; 10:32; 벧전 1:11; 4:13; 5:1,9).||(a) 갈 5:24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는 말은 골 3:5을 생각나게 한다. 이 단어는 성적 영역 뿐만 아니라 갈 5:19 - 갈 5:21에서 언급한 것들을 다 포괄한다. 본문은 기반을 살크스에 둔 모든 충동들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고, 따라서 죽어 없어진 것이다는 것을 단순히 강조하는 것이다.|롬 7:5 에서 파데마타는 기독교 이전 세대에 "육신에 있을 때"의 특징이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에 속한 삶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일어나서 지체들 중에서 역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톤 하말티온("죄의")이란 말은 정욕의 성질을 묘사한다.||(b) 고후 1:5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하고, 고후 1:6에서 독자들에게 같은 고난을 견디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고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고난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은 은총이며(빌 1:29), 모든 사람에게 복(福)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빌 3:10 - 빌 3:11에서 그리스도의 파데마타는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지만, 이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열정적인 신비주의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견디고 있는 실제적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속이나, 모방 흑은 비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길이 고난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참조:행 9:16; 행 14:22).|골 1:24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사도의 고난 사이에 병행을 볼 수 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제자들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없다는 것은 선하게 되어야 하는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고난은 가혹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롬 8:18은 고난이 장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c) 히 2:9에서 죽음의 고난에 대해 언급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같은 말의 반복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처음 언급을 강조하는 것이며, 단수형은 다나토스가 단수형인 것에 맞춘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복수형은 십자가에 달리신 전체 과정을 언급한다(히 2:10).|베드로전서에서 파데마타(파데인과 같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는데, 벧전 1:11의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는 말에서 볼 수 있다. 벧전 5: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에서 저자가 자신을 증인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한다고 할 때에는 계속되는 말 "영광에 참여할 자"에서 보듯이 수난을 목격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견지에서 말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 익나티우스의 서머나인에게 보내는 서신 5.1은 파데마타를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타내는데 사용했고, 클레멘트일서 2.l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데 사용했으며, 아데나고라스의 탄원 28.4은 이 단어를 '운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파데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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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받는, 고난을 받을 만한.||#1. 고전 헬라어 문헌||파데토스는 파스코($3958)의 동사적 의미를 지니는 형용사로서 '외적 영향에 개방적인', 더욱 특별히 '외적 영향에 굴복하는'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파데토스는 '파데(정욕)에 개방적인'을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파데토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6:23에 단 한번 나타난다: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이 말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행 26:23이 눅 24:26; 눅 24:46; 행 3:18; 행 17:3에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이상, 파데토스의 의미는 그곳의 파데인에 의해 정의되며, 명백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의미는 수동적으로 수난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색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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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sufferrng, 수난, 욕정 passion.||#1. 고전 헬라어 문헌||명사 파도스는 파스코($3958)에서 유래했으며, 파스코의 과정을 밟아 왔기 때문에 그 의미 또한 다양하다. 파도스는 첫째로 '경험'을 의미한다(Aesch.Ag.,177). 이 명사는 추가어 없이 '불행, 재난, 실패, 패배, 병'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또한 이 명사는 '분위기나 기분, 느낌, 감정' 등의 의미를 지니며, 매우 흔하게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두 가지로 사용된다(Aristot.Eth.) 그리고 이 명사는 '열정, 충동',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 변경, 과정'(Plat. Resp, Aristot.Metaph.), 수사학에서 감정의 표현으로서 '정념'(精念)을 의미한다(Aristot.Rhet.).|파도스는 특히 스토아 철학자들 중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 곧 '정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3958 파스코.||#2. 70인역본의 용법||파도스는 70인역본에서 65회 나오며, 욥 30:31에서만 히브리어 에벨(슬픔, 비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내 수금은 [애곡성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이 되었구나". 그외 구절에는 정확한 상당하는 히브리어가 없다. 잠 25:20에서는 '병이나 상함'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3. 신약성경의 용법||파도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는 바울만이 파도스를 사용했는데, 골 3:5; 살전 4:5에서는 단수로, 롬 1:26에서는 복수로 나타난다.||(a) 롬 1:26에서 파데 아티미아스("부끄러운 욕심")는 동성연애의 악덕을 나타낸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b) 골 3:5의 문맥에서 파도스의 의미는 '성애적 욕정'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c) 살전 4:5에서도 요점은 '성적인 욕정'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d) 사도교부들은 파도스를 '간통'이나 '나쁜 성미'등에 대해 사용되었다(Hermas Mandates 4.1.6, Similitudes 6.5.5). 그러나 또한 '고난'과 '죽음' (Barnabas and lgnatius), 즉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익나티우스의 글에서 예수의 파도스에 대한 강조는 원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의 일부이고, '죽다'는 의미에서의 파데인(%692)의 용법에서 발전한 것이다.|(참조: W.Michaelis; J.H.Thayer; B.Gartner).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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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안내자, 몽학선생||#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이 명사는 파이스($3816: 아이)와 아고($71: 인도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아이를 책임진 사람, 관리자, 가정교사, 어린 아이나 소년이 학교에 오고 갈 때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의 행동일체를 보살피는 사람'을 뜻하는데 주로 '노예들`이 이 일을 하였다.||#2. 신약성경의 용법.||바울은 율법의 교육적 기능을 언급한다(갈 3:24 이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해주는 파이다고고스(관리인, 몽학선생 taskmaster)이다. 파이다고고스와 디다스칼로스($1320:교사)는 구별된다. 여기에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아동들을 맡아 돌보며(참조: PIut., Mor. 4t, b), 그들을 때리는 노예를 염두에 두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궁극적인 개념으로 사용할 것인지는 더 이상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사람을 지칭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한다. 랍비 문헌에서 파이다고고스는 외래어로 자주 등장한다(S.Kranss, Griechische und lateinische Lehnworter im Talmud, Ⅱ, 1899, 42I).|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는 것, 그리고 인간의 불복종을 드러내는 것(즉, 죄를 죄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며, 율법은 본래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롬 7:12). 그러나 새 시대를 열어 놓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율법의 기능이 끝이 났다(갈 3:25). 율법은 어린 아이 곧 미성년자일 동안에 필요한 파이다고고스이다. 미성년일 때는 율법 아래 있으며 실제로 노예의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어린아이는 이제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로 된다(갈 4:l). 그는 믿음으로 가장 훌륭한 몽학선생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아버지의 장성한 아들이 되며, 아버지와 새로운 친분 관계를 가지게 된다.|여기서 사도 바울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죄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가 그 계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따라서 그가 또한 자신의 죄도 인정할 때, 그는 그리스도께로 인도 받아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아래 있기 때문이다(롬 13:1Ob; 참조: 롬 10:4).|한편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초등학문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율법을 반대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율법은 교육적 역할을 하고 있는 몽학선생이다. 따라서 그는 구약을 그리스도의 빛에서 해석하며 회중의 생활에서 결정이 필요한 경우에만 율법에 호소한다.|(참조: D.Furst; G.Bertram).
파이다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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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 아이, 젊은이 you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다리온(Arstph. 이래)은 파이스($3816)의 지소어이며, 일반적으로 파이디온($3813)처럼 '어린 아이' a little child(참조: Plato), '젊은이' young man(참조: 토빗서 6:2이하)를 의미하며, 젊은 종이나 노예(Xenoph., Agesilaus, Aristoph.)를 의미하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파이다리온은 70인역본에서 약 22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나아르(소년, 젊은이, 종)를 번역하며, 그리고 옐레드(아이, 아들, 젊은이; 32회), 그리고 2개의 히브리어(4회)를 번역한다.|따라서 파이다리온은 70인역본에서 '갓난 아이, 어린 아이, 소년, 젊은이'를 의미한다. 또한 이 단어는 '사환, 부하, 종' 등으로서 나이 어린 자들의 봉사 능력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파이다리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만 나온다.||(a) 파이다리온은 마 11:16에서 장터의 아이들을 나타낸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b) 파이다리온은 요 6:9에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바친 '소년'을 표현한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참조: J.H.Thayer; C.Brown).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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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양육, 훈련, 훈(징)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파이데이아는 파이듀오($3811)에서 유래했으며, 이 명사는 아주 오래 전인 주전 6세기의 문서들에서 '교육'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며, 이 단어는 5세기의 소피스트들이 지상 목표로 삼았던 교육의 발전과 문화발달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후에 이 단어는 성인교육까지도 포괄할만큼 의미가 확대되었고, 일반적으로 학문적 수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70인역본에서 파이데이아는 모두 103회 나오는데, 히브리어 상당어를 가진 47회 중에서 대부분 무사르(징벌, 훈계)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7회). 그러나 이 단어는 또한 보다 지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하며, 지혜, 지식,그리고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의 '교양'을 의미하기도 한다'(G.Bertram, TDNT V 604).||#3. 신약성경의 용법.||파이데이아는 신약성경에서 `훈련, 훈계, 징계'를 의미하며, `교육'을 함축한다.||(a) 히 12:5 이하에는 잠언 3:11 이하에서 인용한 인용문이 나온다. 주의 징계는 그의 사랑의 징표요,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용기를 잃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교육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녀 교육 방법은 하나님의 인간 교육 방법을 강하게 반영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계속 보존케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징벌을 하신다. 사람은 이 징계에 저항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며, 하나님의 부성애를 의심한다(히 12:6).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거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행동이 경험되는 것은 바로 이 징계 속에서이다. 고난이나 징계는 아버지가 책임있는 사랑 안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 보면, 징계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됨의 보증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에 대한 보증이다. 여기서 기독교인을 영적 투쟁을 위하여 강하게 하는 훈련만은 아니다. 아버지가 주는 징계나 고난의 경험은 기독교인을 그리스도 곁에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경험은 그에게 그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람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조차, 참된 아들의 지위가 아버지가 그를 교육하고 '징벌하는'데서 드러나기 마련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기르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 하겠는가?|육신의 아버지는 궁극적인 통찰력 없이 자녀를 징계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으나,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거룩함에 참예케 한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하신다(히 12:10). 이 징계의 목적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히 12:11),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교육 행위,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교육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스토아주의자들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하였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은 인간의 자기 완성에 있다.||(b) 엡 6:4에서는 가정에서의 교육에 관해 말한다. 여기에는 모든 기독교 교육의 기본 원칙이 서술되어 있다. 자기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자녀에게 주는 바울의 권고 뒤에, 아비들은 자기 자녀를 "오직 주의(퀴리우) 교양(파이데이아)과 훈계(엨트레페테)"로 양육해야 한다는 아버지에게 주는 권면이 따르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속격 퀴리우(주의)는 주격 속격인 동시에 제한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속격이다. 옌트쉬(W.Jentsch)는 사람이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이 배후에 계신다는 의미에서 '주의'로 해석한다. 옌트쉬는 이 표현이 교육은 하나님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주님이 아버지를 통하여 행하시는 교육이다. 주님은 이 목적을 위하여 훈련과 교육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일반적 방법들을 사용하신다(참조: D.Furst).|그리고 파이데이아는 행동으로 교육(교훈 또는 징계 discipline)하는 것이고 누데시아($3559)는 말로 교육(권면 admonition)하는 것을 나타낸다.||(c) 딤후 3:16에서 성경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은 "의로 교육"과 병행을 이룬다. 따라서 파이데이아는 `훈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의로움을 실현시켜야 한다. "의로 교육"은 의가 생활의 영역에 실현되는 행위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참조: G. Bertram; D. Fu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