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다
peinavw
굶주리다 hung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a) 동사 페이나오(Homer 이래로)는 '굶주리다'를 의미하며, 전의된 의미로는 '열열히 어떤 것을 열심히 욕구한다'(생의 필요로서)를 의미한다(Xenoph. Sym., 4, 36등). 페이나오(와 딥사오 $1372; 딥소스 $1373; 리논 $3043)의 의미 영역은 단지 욕구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지적인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까지 확대되었다(Plato와 Xenophon이후). 이 단어들은 사람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예컨대 자유, 명예, 명성, 부, 칭송, 깨달음 따위에 대한 열정적인 갈구를 표현한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 굶주림과 목마름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기도 한다.|고대 종교에서 신들을 예배하는 중요한 이유는 땅위 풍부한 양식의 공급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정복 후에 풍요의 신 바알을 되풀이하여 채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흉년과 기근을 신들의 진노의 탓으로 여겼다.||(b) 고대에서 자기가 통치하는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통치자의 책무였다(예: 애굽의 바로). 통치자들은 식량을 공급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때문에 헬라 세계에서 신과 같은 영예를 누렸다.||(c) 헬라의 철학자들은 대개가 육체의 욕구에 얽매이지 말라고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들은 금욕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인생의 파란많은 우여곡절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자 노력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이것은 신으로부터 멀어진 물질계에 속한다)를 부정함으로써 세상과의 감각적 접촉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영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함이다(참조: L. Goppelt; W. Bauder).||#2. 70인역본 및 유대교의 용법||(a) 페이나오는 70인역본에서 약 47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라에브(굶주리다)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다(창 41:55; 삼하 17:29; 시 34:10; 잠 19:15; 사 8:21등). 그리고 아예프(피로하다, 기진하다, 지치다, 신 25:18; 사 5:27; 사 28:12), 야에프(피로하다, 기진하다)의 역어로서도 사용되었다(사 40:28, 사 40:29, 사 40:31).||(b) 필로(Philo)의 작품에는 헬라적 요소와 유대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그는 영혼을 만족시킨다는 보다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절제와 신체 단련이 필요하다고 권면한다(Spec. Leg. 2, 201). 다른 한편, 그는 굶주림을 가리켜 "모든 악들 중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불렀다(Spec. Leg. 2, 201; 참조: TDNT Ⅵ 14).||(c) 랍비 유대교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의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겨우 율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한 동기로서만 작용한다(예: Pss. Sol. 5:1-12; 10:1-6; 13:7-10). 랍비들은 여전히 곤궁의 때를 벌로서 내려진 불행으로 또는 기껏해야 정결케 하기 위한 불행 정도로만 이해하였는데, 사람들은 선한 일로 이 불행에 대처하고자 하였다(참조: SBⅡ 643이하; Ⅳ 536-558).(참조: W. Bauder; L. Goppelt)||#3. 신약성경의 용법||페이나오는 신약성경에서 23회 나오며, 문자적,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a) 공관복음.|① 페이나오는 예수님의 육체적 굶주림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4:2; 눅 4:2에서 페이나오는 40일간 금식하시고 난 후의 예수님의 주림을 묘사한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2).|예수님 자신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친히 자기의 사역을 인하여 굶주림을 겪으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시련을 통하여 가르침받는 신앙을 지지하셨다(신 8:3). 예수님이 굶주렸을 때 마귀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이용하여 기적을 행하고 그렇게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라는 것이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굳게 시험을 견뎌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마 4:4; 눅 4:4; 신 8:3).|마 21:18이하, 병행구 막 11:12이하에서 페이나오는 이른 아침에 길 갈 때의 예수님의 굶주림을 표현한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주림을 채워주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이렇게 함으로써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저주가 내려질 것인지에 관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주셨다.|② 페이나오는 사명 감당을 위해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굶주림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12:1이하(병행구, 막 2:23이하; 눅 6:1이하)에서 페이나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굶주려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를 두둔한 말씀에 나온다.|③ 페이나오는 장래의 새로운 질서에서 가난한 자, 곧 굶주린 자의 전도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눅 1:53(시 107:9)에서 페이나오는 오시는 메시야를 통하여 역사의 진노와 인간 생활에 이루어질 강력한 전도를 노래한 대목에 나타난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6:21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하고 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신자는, 마치 자기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굶주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현재의 사물의 질서는 타락한 세상의 질서이다. 장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의 편에 서서 행동하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오실 날을 내다보면서, 그들을 가리켜 이미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르신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 때의 선물을 주실 것이다. 현재의 세상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고, 따라서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굶주림이 없게될 것이다(눅 6:21). 하지만, 지금의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약속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슬퍼하고 울게 될 것이라고 위협을 받고 있다(눅 6:25). 이와 같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축복 및 저주 선언(눅 6:21, 눅 6:25)은 가난한 자가 지금 겪고 있는 굶주림과 수탈을, 지금 잘 먹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겪게 될 장래의 굶주림과 대비시키고 있는데,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장래의 구원에 관한 약속이 주어지고, 지금 부유한 자들에게는 약속이 없는 저주가 선언되고 있다.|눅 1:51-눅 1:53에서 신섭리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들 중에 일어나는 운명의 변동이다.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권에 있는 자들은 교만한 자, 세력있는 자, 부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권에 있는 자들은 비천한 자, 주린 자들이다.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을 생각지 않은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강한 팔로 깨뜨림을 당할 것이며, 가난한 자와 낮은 자를 학대하는 권세있는 자들은 진실로 미천한 자들이 높은 것들에 오르는 동안 권세와 높은 지위를 박탈당하며, 주리는 자, 곧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영적 양식을 갈망하는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나 스스로 만족히 여기며 교만하는 부자들은 마음의 공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호사로 딩구는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이 새로운 질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④ 마 5:16에 나오는 페이나오를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해석한다.|유대교의 율법주의의 독선(self-righteousness)과는 대조적으로, "의에 주림"은 하나님에 대한 절실한 요구와 그에 따른 갈망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주린 사람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기대하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마 6:33). 그들에게 약속된 주림의 충족은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게다가 다른 모든 것이 그들의 소유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⑤ 마 25:35, 마 25:37; 마 25:42에 의하면 굶주림(페이나오)은 사랑을 실천할 좋은 기회이다. 타인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충족시켜 주는 일은 자비로운 행위들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데, 이 자비 행위는 세상 심판 때에 판단 기준으로 설정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자신을 숨기고, 즉 "곤궁의 옷으로 가장하고",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마 25:37, 마 25:42).||(b) ① 롬 12:20에서 이 자비의 행위는 심지어 자기의 원수에게도 베풀어야 한다고 명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그러나 고전 11:21, 고전 11:34에서 페이나오는 열광주의자들이 무시한 빈궁한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을 때, 열광주의자들은 몰인정하게도 그들 가운데 있는 주린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② 빌 4:12에서 페이나오는 바울이 자족하는 비결을 말하는 대목에 나온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굶주림은 반드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의 징표는 아니다. 그것이 고통을 주기는 하겠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는 못한다(롬 8: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금욕주의나 높은 지식에 의거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c) 요한의 기록에서 굶주림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요 6:35에서 페이나오는 결코 주리지 않은 삶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예수께서는 주림이 충족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 곧 생명을 주시는 자와의 접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림과 목마름의 충족에 관한 이 모든 말씀에서 약속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만 완전히 주어질 것이다.|계 7:16에 의하면, 그 때에는 지상에서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요구들이 끝나버릴 것이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참조: 계 21:6; 계 22:17=사 49:10; 사 55:1; 눅 1:53; 눅 6:21 병행구 마 5:6).|(참조: L. Goppelt; W. Bau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