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
skhnhv
천막 tent, 장막 tabernacle, 처소 dwell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네(Aeschyl., Soph., Thuc. 이래)는 시장의 노점, 천막 설비, 극장의 무대, 수레 덮개, 배의 갑판 위의 선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언제나 '천막'을 의미한다.|후에는 '거처나 숙박소'라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이 단어에는 무상함, 덧없음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데모크리투스는 '세상은 천막이며, 인생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와서 보고, 그리고 떠나간다'라고 말했다(Piels, Ⅱ, 165, 7).||#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스케네는 70인역본에서 약 4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헬(천막, 장막, 처소, 성막)의 역어로, 그 다음으로 미쉬칸(거처, 장막, 거주지)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천막, 장막, 회막, 거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네는 신약성경에서 20회 나오며, 그 중에 히브리서에 10회 나온다.||(a) ① 스케네는 행 7:43과 행 15:16의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사용되었다. 누가는 행 7:42 이하에서 암 5:25-27의 70인역본을 따르므로 행 7:43에서 텐 스케넨 투 몰록("몰록의 장막")을 언급한다. 암 5:26[70인역본]에서처럼 행 7:43에서 스케네도 회막(tabernacle)과 같은 제의적 장막이다: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참조: 행 7:44).|행 15:16은 암 9:11 이하(70인역본)를 인용하여 다윗의 무너진 스케네를 언급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누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회복은 아모스가 약속하였고 지금 성취되고 있는 다윗의 스케네의 회복이다. 이 예언의 첫 부분이 유대 기독교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면(행 15:16), 두번째 부분도 성취되고 있으며(행 15:17) 따라서 이방인 선교가 정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② 이 두 인용문 외에도 스케네가 특히 회막(tabernacle)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언제나 구약성경이 고려된다. 행 7:42 이하를 뒤따라 행 7:44은 광야 시기의 "증거의 장막"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셨다고 언급한다.|행 7:45에서는 조상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으로 회막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덧붙인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참조: 행 7:46의 스케노마).||③ 계 11:19에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계 15:5에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으로 묘사된다.||(b) ① 히브리서는 스케네 투 마르튀리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스케네에 대해서 말하며, 참된(알레디네, 히 8:2) 혹은 하늘의(참조: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히 8:1) 스케네와 지상의 스케네를 구별한다. 히 8:2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하늘의 스케네에 대해 말한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야곱의 장막(민 24:5)에 대해 사용된, 민 24:6[70인역본]의 문구는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 바뀌며, 하늘의 성소를 가리킨다. 기자는 호 퀴리오스에 우크 안드로포스("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를 부가하여 단지 "참 장막"을 세운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한다. 역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확실히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되 자기 자신을 그것을 세운자로 간주하지 않으시는, 지상의 회막에 대해 말한다. 이는 바로 모세이다. 그는 "장막을 지어야"만 했다(히 8:5). 따라서 회막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참조: 히 9:24의 "손으로 만든 성소"). 그러나 하늘의 스케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다(히 9:11). 그것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을 의미한다. 동일 구절에서 그것은 같은 의미에서 "더 크고 온전한" 것으로 불리운다.||② 하늘의 스케네와 지상의 스케네의 관계에 관하여, 우리는 히 8:5의 출 25:40의 인용으로부터 회막이 하늘의 스케네의 형태를 따라 만들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말씀에서는 하늘의 원형이 독자적 중요성은 지니지 않은 채 단지 지상의 모형의 모델 역할만 하는 반면에 히브리서에서는 하늘의 스케네가 그 자체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늘의 스케네가 회막의 투포스($5179)로서 회막보다 먼저 있었다는 사실은 하늘의 스케네가 모든 시대 이전에 아주 오래전 실로 선재했다는 증거로 히브리서에서 이용된다.|사실 하늘의 스케네는 히브리서에서 아이오니오스($166: 영원한, 영속하는) 혹은 아이오니아(복수)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레디네($228의 여성)로 불리는데,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늘의 스케네가 성격상 영원하다는 것을 오로지 의미할 수 있다. 하늘의 스케네의 영원성은 유대교 병행구들에서보다 히브리서에서 보다 강력하게 부각된다. 유대교에서는 회막이 하늘의 스케네에 완전히 일치하나, 히브리서에서는 회막이 원형의 "그림자 모형"에 불과하다.||③ 히 9:1에서 장막(tabernacle)은 하기온 코스미콘("세상에 속한 성소") 즉 지상의 성소로 묘사된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히 9:21에서 레 8:10 이하, 15에 기초하여 장막의 성화에 관해 간략히 기술한다. 히 9:2 이하에서는 장막의 내부 설비에 대해 기술하며 성소와 지성소는 각기 프로테("첫째")와 듀테라("둘째", 히 9:7) 스케네로 구별된다. 여기서 프로테/ 듀테라는 공간적 언급이며, 따라서 프로테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서만 발견되는 드문 의미, 즉 전면의(front)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를 첫 장막과 둘째 장막 혹은 전면의 스케네와 후면의 스케네로 구별하는 것은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입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부적절하다고 거의 말할 수도 없고, 또한 히 8:5과 히 9:21에서 기자가 하나의 장막을 개개의 스케네로 언급한다는 억측을 내릴 수도 없다.|히 9:8에서도 프로테 스케네("첫째 장막")는 장막의 전면 부분이다. 여기서 히브리서는 지성소와 구별되는 특별한 성소의 존재에서 한 가지 증거를 발견한다. 즉 지상에 세워진 장막 바로 그 자체는 참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첫 장막의 파라볼레($3850: 곁에 놓기, 비교)의 중요성이 놓여 있다(히 9:9).||④ 히 9:11에서 하늘의 성소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아 보인다. 확실한 것은 히 8:2과 히 9:8에서 단일 개념이 하늘의 성소 전체 즉 타 하기아를 포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히 9:11에서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성소에 들어가셨다(에이셀덴 에이스 타 하기아)는 것과 그가 그의 죽음으로 그렇게 하셨다("오직 자기의 피로", 히 9:12)는 것이다.|더 큰 장막은 교부들의 생각과 달리(참조: 또한 히 10:20) 거의 그리스도의 몸과 인성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우 타우테스 테스 크티세오스)은 이 경우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더 큰 장막이 하나님의 참된 처소인 타 하기아와 구별되는 하늘의 영역(참조: 히 4:14의 우라노이)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늘의 성소도 역시 장막과 비교할 때 더 크고 더 완전하나 참된 성소, 지성소와 여전히 구별되는 전면의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이 이 성소 혹은 지성소에 임재하시는 사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것 같고 확실히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히 8:1은 하나님의 보좌가 알레디네 스케네("참된 장막") 안에 직접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지 않는다(히 8:2, 그러나 참조: 히 9:24). 히브리서에서 하늘의 성소는 하나님의 스케네로 불리우지 않는다(참조: 계 21:3).||⑤ 히브리서 기자가 8장 이하에서 선행하는 해설에 대해 히 13:10에서 테 스케네 라트류온테스("장막에서 섬기는 자들")를 사용하고 오이 토 뒤시아스테리오 파레드류온테스("제단을 모시는 이들", 참조: 고전 9:13) 등등을 선호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그는 분명히 구약성경의 제의의 제사장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참조: 히 8:5; 히 9:9; 히 10:2의 라트류에인). 그러나 히 8:5; 히 9:2 이하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회막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면 제사장들이 스케네를 섬긴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⑥ 스케네는 히 11:9에서도 나온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여기서 아브라함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한다. 비록 파로이케오("우거하여")가 진술의 주요 동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장막에 거함이 아브라함의 외방의 신분을 생생하게 증거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복수형 스케나이는 아브라함이 항상 진행 중에 있었으며 그와 그의 후손들이 계속하여 새로운 장소에 장막을 세워야만 했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창 12:8; 창 13:12; 참조: 창 26:25; 창 33:19; 창 35:21). 확실한 도성에 사는 것(히 11:10)은 장막에 거하는 이생(this life)과 대조된다. 장막은 신자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는 표시이다.||(c)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계 15:5에서 하늘의 "장막의 성전"에 대해 말하고, 계 13:6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훼방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장막"을 훼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스케네는 계 15:5에 언급된 긴 형태의 축약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계 15:5의 표현은 계 11:19의 나오스 투 데우("하나님의 성전")와 계 13:6의 스케네가 합성된 것이다. 계 13:6을 고찰할 때, 계 7:15에서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하늘의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순교자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라"고 언급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반면에 스케노오("거하시리라")는 계 21:3의 상응하는 진술에서 나오스("백성")가 아니라 스케네와 결합되며, 계 7:15에서는 나오스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나오스와 스케네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다른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참조: 계 15:5), 계 11:19에서는 언약궤와 성전이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관련 구절들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서 스케노오는 "지속적으로 거하다"를 의미함이 틀림없으며, 스케네 역시 지속적인 체제를 암시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계 13:6에서 단어의 선택을 결정한다. 만약 여기서 토 오노마 아우투 카이 텐 스케넨 아우투("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에 투스 엔 투 우라노 스케눈타스("하늘에 거하는 자들")가 첨가되어 있다면 계 12:12의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에 근거하여 계 13:6의 동격에서도 역시 하늘에 있는 완성된 자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격도 하늘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오노마("이름")와 스케네와 관련되기도 한다.||(d) 눅 16:9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을 친구를 사귀는 데 사용하라고 권하는데, 그렇게 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그 사람이 죽거나 세계의 종말이 임할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또는 그의 천사나 혹은 그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들)이 그를 "영원한 처소"(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는 "영원한 초막"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히 아니다)로 영접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두명의 천상의 방문객 모세와 엘리야에게 스케나이 셋을 짓자고 제안한다(눅 9:33 및 그 병행구). 여기에서 그가 영구히 보존하고 싶어하였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목격한 그의 경험이다.||(e) 변모 기사에서도 히브리서에서도 하나님이 스케네에 거하심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 21:3에서 우리는 이 사상을 보게 된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여기서 구약성경의 예언, 특히 슥 2:14 이하; 슥 8:3, 8; 겔 37:27의 영향이 뚜렷이 보인다. 개개 표현의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이 구약성경 구절들도 요한계시록의 구절도 그 때에 인간들이 장막에 거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중앙에 하나님의 장막이 있는 거대한 하늘의 진영에 대한 개념은 없다. 계 21:3은 독자에게 계 15:5 보다는 오히려 계 13:6과 특히 계 7:15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를 나타내는 생생한 은유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계 7:15의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와 계 21:3의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를 비교하고, 아울러 선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및 그 다음의 "저희와 함께"(단지 "저희"로 읽어서는 아니된다면)를 비교하면, 하나님과 새 세상에 속한 모습을 지닌 사람 사이의 더 가까운 관계에 강한 강조점이 주어진다. 여기서도 역시 세키나 개념과의 일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경의 병행구절들이 암시하고 계 21:2이 확증하듯이 스케네 데우("하나님의 장막") 배후에 놓인 사상은 새 예루살렘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의 개념이다(계 21:1).|요 1:14의 스게눈("거하매")에서 발견되는 기독론적 언급은 계 21:3의 약속을 결여하고 있다. 그 대신에 그것은 미래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하며, 이 전망은 신약성경에서 스케네의 역사(history)의 절정(climax)으로 간주하는 것도 당연하다.|(참조: W. michaelis; M. J. Ha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