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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Anna
안나 Anna(인)||안나는 히브리어 한나(은혜; 참조: 삼상 1:2)의 음역이다.|안나는 신약성경에서 눅 2:36 이하에 한번 나온다.||(a) 예루살렘의 나이 많은 여선지자로서 예루살렘 성전에 아기 예수님이 모친과 함께 나타나셨을 때 뵈었다. 안나는 아셀 지파 사람 바누엘의 딸이었다. 비록 그녀의 아셀 지파가 앗수르에 포로로 붙잡혀가서 결코 공식적으로 귀환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가족은 그 족보를 기억하여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안나는 결혼한지 7년 만에 젊은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외로운 과부로 84년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므로 안나의 결혼할 때의 나이가 15세였다고 하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뵈올 때의 나이는 106세가 되는 것이다.||(b) 안나는 하나님의 집을 사랑한 여인이었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란 말은 반드시 안나는 성전-부속 건물 중, 어느 하나에 방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안나가 항시 공적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눅 24:53과 비교). 안나의 삶은 장소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생활 태도에 있어서나 철저히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생활을 하였다. 안나는 성전을 하나님이 특별히 계시는 보좌라고 생각하고 그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안나의 심정을 다니엘이 저 이방에 있으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고 그곳을 향해 기도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더 가까이 하는 것이 안나의 마음이었다.||(c) 안나는 자제와 영교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었다.||(d) 안나는 다른 성도와의 교통을 기뻐하는 여인이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뵈었을 때,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하여 말했다. 우리는 안나가 선지자로서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구주를 기다리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쳤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안나는 그들에게 그렇게도 오래 기다리던 구주가 마침내 오셨다고 말했다. 이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성도의 교제이다. 그들은 같은 주님의 종들이요, 같은 피를 받은 형제요, 같은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들이다. -아멘-
안나스
#Anna"
안나스 Ananas.||안나스는 히브리어 하난, 곧 자비로운, 인자하신(참조: 느 8:7)을 의미한다. 안나스는 유대 대제사장으로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의 제사장의 무리의 실제적인 우두머리로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다.|안나스는 셋(Seth, 요세푸스는 '세티' sethi로 기록)의 아들이며, 주후 6년 혹은 7년에 퀴리니우스(Quirini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관직은 로마 행정 장관이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하기도 했기 때문에 안나스는 주후 15년에 유대의 행정관리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면직되었고, 안나스 대신에 파비(Phabi)의 아들, 제 1 이스마엘(Ismael)이 임명되었으며, 그 후에 안나스의 아들 엘레아살(Eleazar)이 임명되었다. 맨 후자에게서 그 직분은 시몬(Simon)에게로 위임되었고, 주후 18년에 시몬에게서 가야바에게로 위임되었다. 그러나 안나스는 그가 직분을 넘겨준 후에도 계속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J. H. Thayer).|안나스가 능수능란한 외교가였다는 것은 그의 아들 중 5명(Jos., Antiq., XX. 9. 1)과 사위 가야바(Caiaphas, 요 18:13)가 거의 중단되지 않고 대제사장직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그의 계속적인 영향력에 대한 또 다른 표시로 그가 공직을 박탈당한 후에도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불리었으며, 제사장의 무리들이 나오는 곳에는 맨 먼저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행 4:6에는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요 18:13; 요 18:24에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언급되어 있다. 안나스는(요 18:19; 요 18:22) 대제사장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특히 눅 3:2에서는 마치 그들이 대제사장직을 공동 보유하는 것 같이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더 이상 그 직위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는 경우와는 실질적으로 다르다. 나이와 능력과 영향력으로 보아 안나스는 실질적인 대제사장이었고, 가야바는 명목상의 대제사장이었던 것 같다.|안나스는 사두개파에 속하며, 그 파당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만하고 눈치 빠르고 야심을 품은 대단한 부자였던 것 같다. 그와 그의 가족은 강탈과 탐욕으로 이름이 났다. 그들의 부(富)의 주요 수입원은 성전의 희생 제사물, 즉 양, 비둘기, 포도주, 기름 등을 판매한 이익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모두 감람산 위에 있는 네 유명한 안나스 아들들의 매점에서 조달되었으며 성전 구내에도 지점(支店)을 가졌던 것 같다. 대절기들 동안에 그들은 그들의 상품에 높은 독점 가격을 매길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자들로 안나스 및 그들을 비난하셨고(막 11:15-막 11:19), 탈무드에는 '안나스의 가족에게 화 있을진저, 독사의 자식들에게 화 있을진저'(Pesa. 57a)라는 저주가 기록되어 있다.|안나스는 복음서에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우리 주님에 대한 심리와 죽음에 대해 역할한 부분에 대해 주로 사건의 과정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 같다. 르낭(Renan)은 '안나스는 그 무서운 드라마 주역으로 가야바나 빌라도 이상으로 인류의 저주를 받아야 한다'(Life of Jesus)고 강조했다. 가야바는 당시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에게 선고를 내린 옛 예루살렘 공회의 명목상의 우두머리였으나 늙은 안나스가 판정권을 가졌다. 요 18:12 이하에 따르면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 '그는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나타나는 점에서 그 사람의 성격과 그 심판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Westcott, in loc.). 안나스(만일 그가 요 18:19-요 18:23에 나오는 대제사장이라면)는 예수님에게 제자들과 그의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이 심문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후에 행할 재판의 자료를 모으기 위한 단순히 비공식적이고 임시적이며 대제사장의 개인적인 심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목적을 위한 어떠한 것도 끄집어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안나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회의 정식 재판(正式裁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선고(宣告) 받은 표시로 결박을 했다(Westcott).|안나스는 분명히 그 후의 재판 진행에도 관여했을 것이지만 오순절 이후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의 복음을 가르친 것에 대한 자신들을 변호하던 예루살렘의 공회의 모임에 그가 참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행 4:9)(D. M. Edwards)|(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ISBE).
아노에토스
ajnovhto"
현명치 못한, 어리석은.||#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노에토스는 부정 접두사 %107와 노에토스($3539)에서 유래했으며,||(a) 수동태로 '생각지도 않는, 의심스러운(Homer),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Plat.).||(b) 능동태로 '현명치 못한, 분별이 없는, 어리석은'(Hesych.).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이해나 판단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노에토스는 70인역본에서 9회 나오며, '어리석은, 분별없는'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윌(잠 17:28)과 이우웰렛(잠 15:21)을 번역한다. 아노에토스는 모로스(집회서 21:19; 집회서 42:8)와 병행하여 도덕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로 '분별없는, 어리석은'이란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노에토스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에만 사용되었다.||(a) 롬 1:14에서 아노에토스는 생각하는 능력이 개발되지 않은 단순하고 교육이 부족한 자에 대해 사용되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b) 눅 24:25에서 아노에토스는 해로운 종교적,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c) 갈 3:1; 갈 3:3에서 아노에토스는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나타낸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d)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이전의 종교적, 윤리적 표시로서 '어리석음'을 나타낸다.||(e)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자를 사로잡은 욕망들은 의미가 없거나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Behm; G. Harder).
분기
anoia
어리석음 fol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노이아는 부정 접두사 %107와 노오스(%412: 정신, 지각)에서 유래했으며, '이해력 부족, 분별못함, 어리석음'(Plat.)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a) 명사 아노이아는 70인역본에서 13회 나오며, 히브리어 이우웰렛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도덕적 의미에서 '이해력 결핍, 어리석은 것'을 의미한다(잠 14:8; 22:15).||(b) 아노이아는 마카베오이서 4:6, 40; 14:5; 15:33에서 발견되며, '사악한 것'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노이아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누가복음과 디모데후서에만 사용되었다.||(a) 눅 6:11에서 아노이아는 병적인 광기로 차 있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b) 딤후 3:9에서 과거와 현재의 잘못을 나타낸 지독한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Behm; G. Harder).

ajnoivgw
열다 ope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노이고(Homer이래)는 아나($303)와 오이고(%40:열다)나 오이그뉘미(%41:열다)애서 유래했으며, '열다, 장애물을 제거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상징적으로 '대양(high seas)에 이르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노이고는 70인역본에서 약 170회 나오며,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 파타흐(열다), 그 다음으로 파카흐(열다, 10회), 파차(자물쇠를 '열다', 6회)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노이고는 70인역본에서 '눈이나 귀를 여는 것'(창 21:19; 사 35:5; 사 37:17), 용기, 무덤(출 21:33; 삿 4:19; 시 5:9), 창문이나 문(삼상 3:15; 왕하 13:17; 사 22:22; 사 26:2), 책(느 8:5)를 여는 것, 태(창 29:31)를 여는 것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노이고는 신약성경에서 77회, 요한의 기록에 가장 많이 나오며(계시록에 27회, 요한복음에 11회), 그 다음으로 누가의 기록(사도행전에 16회, 누가복음에 7회), 마태복음(11회), 바울서신(5회) 순으로 나온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태복음. 마 2:11에서 동방박사들이 보배함을 열어 예물을 예수님께 드렸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 5:2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앉으사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마 13:35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셈어의 관용법으로서 '말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여셨고(마 9:30; 마 20;33),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마 3:16). 하늘을 여신 분은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의 나라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마 7:7, 참조: 마 7:13이하). 그러나 적절한 때에 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나라가 열리지 않을 것이다(마 25:11). 여기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열고 닫을 수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소유하신 종말적 주님이시다.|마 27:52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난 사건을 언급한다. 마 17;27에서 물고기 입을 열어 얻는 돈에 관하여 언급한다.||(b) 누가복음의 용법|누가복음에서 아노이고는 특별히 때(time)와 관련되어 있다.|눅 1:64에서 스가랴의 입이 열린 것도 적절한 때이다. 서판에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기록했을 때 입이 열렸다. 눅 3:21에서 하늘이 열린 것도 예수님께서 세례(침례) 받으신 직후였다(참조: 마 3:16).|눅 11:9이하에서 예수님은 문을 주관하는 분으로서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을 약속하신다.|눅 12:36에서는 종은 주인이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 주기 위해 항상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눅 13:25에서는 주인은 너무 늦게 문을 닫은 후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주소서" 부르짖어도 열어주시지 않는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구절들은 여는 때와 열 수 있는 권한이 하나님과 주님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c) 사도행전의 용법.|① 행 8:35에서 '입을 연다'는 관용구를 사용한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여기서 '입을 연다'는 말은 '말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다.|행 10:34; 행 18:14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② 행 8:32에서는 사 53:7을 인용하여 예수님께 적용한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빌립은 이 말씀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해 주었다.|③ 행 9:8에서 바울은 하늘의 빛을 본 후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 9:40에서 베드로의 기도로 살아난 다비다는 눈을 떠 베드로를 보았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④ 행 26:18에서 누가는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선교 임무를 언급하면서 영적으로 은유를 사용하였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을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이 말씀은 종의 선교(사 42:6, 사 42:17)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⑤ 행 5:19; 행 12:10; 행 16:26이하에서 문은 신적인 섭리에 의해 열린 감옥문이었다. 이는 사도들을 투옥 시키거나(행 5:23), 의심 가운데서 교회 성도에 의해 잠겨져 있는(행 12:14; 행 12:16) 인간에 의한 닫힌 문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의 문을 여시는 것처럼 "믿음의 문"도 여신다.|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신의 첫번째 선교 여행을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행 14:27).||(d) 요한복음의 용법.|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을 여신 것을 언급한다. 이와 같은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요 9:10; 요 9:14; 요 9:17; 요 9:21; 요 9:26; 요 9:30; 요 9:32; 요 10:21).|② 예수님은 목자이시며,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준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③ 요 1:51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문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약속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 문을 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e) 요한계시록의 용법.|① 계 3:20에서 그리스도께 대하여 문을 여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이 글은 미온적 신앙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이처럼 이 구절 자체가 교회 전체에 보내진 글이지만, 이 구절의 단수 주어는 개개인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이 구절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상은 잔치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상이다(참조: 사 25:6이하; 마 8:11; 마 22:1-마 22:14); 막 13:29; 막 14:25; 눅 12:34이하; 눅 22:28 이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참조: 요 6:35; 요 6:53 이하), 또 예수님과 함께 거한다(참조: 요 14:2 이하; 요 14:23)는 약속의 말씀도 있다.|②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을 열 수 있는, 하나님께 속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7; 계 3:8). 여기서 열린 문의 은유적 표현은 선교 언어의 전문 용어가 아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말은 엘리아김에게 주어진 약속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데, 그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권한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참조: 사 22:22).|이 말은 계 1:18의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는 말씀의 뜻과 같이 하나님과 영생에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참조: 마 16:19). 죽임 당한 어린 양, 곧 보좌에 앉으신 영화로운 주님만이 홀로 일곱 인(印)이 있는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 두루마리에는, 수많은 종말적 사건들과 아울러 마지막 날들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 5:2-계 5:9). 여기에서 지상에 계실 때의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묘사되었다.|③ 하나님은 하늘(계 19;11)과 성전(계 11:19)과 거룩한 하늘의 장막(계 15:5)을 여시는 분이시다. 한 천사가 무저갱을 여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이다(계 9:2). 영광 중에 계시는 주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는, 하나님께 속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f) 바울 서신의 용법.|① 롬 3:13(시 5:9의 인용구)에서 아노이고는 열린 무덤을 묘사한다. 바울은 거기에 있는 일련의 인용구들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지만 간악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라고 말한다.|② 고전 6:11에서 바울은 "고린도인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라고 기록한다. 바레트(C.K.Barrett)는 이 구절을 '내가 나의 혀를 나와 함께 달려가게 해 왔다' 즉 '내가 완전히 자유로이 너희에게 말해 왔다'라고 해석했다.|바로 뒤의 후반절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아무런 비밀도 감추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과는 상관없이 여기에서 여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인 것이다.|③ 고전 16:9에서 바울을 위하여 문을 여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열매가 있는 효과적 선교 사역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후 2:12; 골 4:3에서도 동일한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H.Thayer; C.H.Peisker; C.Brown).
다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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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짓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노이코도메오(Hdt. Aristoph. 이래)는 아나($303: 다시)와 오이코도메오($3618: 집을 짓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시 짓다, 재건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노이코도메오는 70인역본에서 약 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바나(1129: 세우다, 짓다, 건축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어 그런 의미를 나타내었다(느 2:5; 잠 24:27; 렘 1:10).||#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노이코도메오는 신약성경에서 행 15:16에 한번 나오며, '다시 짓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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엶, 열기 opening.||#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노익시스는 아노이고($455)에서 유래했으며, '여는 것'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노익시스는 신약성경에서 엡 6:19에 한번 나온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에보트는 "입을 벌려"라는 말은 매우 중대한 사실을 말하고자 할 때 쓰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복음의 말씀으로 영원한 구원을 인간에게 확신시켜야 할 자신의 막중한 책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인 복음에 대해 담대히 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참조: 시 51:15). 그래서 이러한 자기를 위해 기도하여 주기를 요청했다.|(참조: F.Foulkes; J.H.Thayer).
아노미아
ajnomiva
불법, 악행, 죄.||#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노미아(Eur., Hdt. 이래)는 아노모스($459: 무법한, 불법의)에서 유래했으며,||(a) '법이 없음, 무법',|(b) '법에 대한 위반, 불법'(행위),|(c) '악행, 죄'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노미아는 신약성경에서 1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아노미아는 죄스러운 행위를 의미한다.|① 롬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② 히 10:17,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이 두 구절에서 아노미아, 즉 죄스러운 행위는 반드시 율법이 고려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b)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포 파세스 아노미아스("모든 불법에서")는 과거에 애굽의 속박(출 15:13)과 바벨론(사 44:22-24)에서부터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사상은 범죄나 유죄에서가 아니라 죄의 세력에서 구해내는 것이다(W. Lock).||(c)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아카다르시아("부정")와 '아노미아'("불법")는 이방 또는 이교도 생활의 특성을 묘사한다. 문맥을 보면 이 죄의 형태는 인격화되어 있다. 그것들은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가진다. 그리고 '에이스 텐 아노미안'("불법에 이른 것")은 그 지배력의 영향을 묘사한다. 즉 '불의의 실행'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A. C. Headlam).||(d) 고후 6:14에서 의와 아노미아가 서로 배타적임을 나타낸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e)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배도하는 일은 불법의 사람의 출현과 반드시 동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법의 사람은 초자연적 또는 신비적 국면을 띠고 있다. 그 불법의 사람이 현재는 숨기워져 있으나 갑자기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불법의 사람의 특징은 무법자이며 멸망의 운명을 지닌 자이다(A. E. Airhart).||(f) 살후 2: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불법은 사회와 개인 속에서 비밀로 활동하는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이다. 그것은 사탄의 세력이며, 강력한 세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제어당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나타날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때까지는 비밀에 속한다. 하나님께 도전하는 바로 이 세력이 "불법의 사람"을 낳으며, 배도하는 대역사를 일으킨다(참조: 살후 2:3).(A. E. Airhart).||(g) 마 23:28에서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는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자들에게 특별히 말하는 것이다.|그러나 마 7:23; 마 13:41; 마 24:12에서는 율법과 별 관련성이 없다.||(h)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 "불법을 행하는 자"는 시 6:8의 "행악하는 너희"와 맥을 같이 한다. 아노미아는 그 반대인 디카이오쉬네(의, 마 5:6)와 대조되어 있다. 후자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과 일치되며, 전자(아노미아)는 그것과 충돌된다(R. C. H. Lenski)||(j) 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이 문구를 자유로이 바꾸어 말한다면 '죄를 범하는 그는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는 것이다. 참으로 죄는 하나님에 대해 반역일 뿐이다'가 될 것이다.|(참조: W. Gutbrod; Walter Bauer; J. H. Thayer).
법 없는
a[nomo"
(율)법이 없는 (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노모스(Soph., Hdt., Thu. 이래)는 부정 접두사 %107와 노모스($3551)에서 유래했으며, '법이 없는'을 의미하며,||(a) 객관적으로는 '법이 없는'을 의미한다.||(b) 주관적으로는 '법에 주의하지 않는, 법이 없는 것 같이 행동하는'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에 악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이 선언된다. 이 경우에 더욱 일반적으로 아노모스는 '불의'라는 의미일 수 있다.||(c) 유대교에서 호 아노모스나 호이 아노모이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용어이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때때로 순전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a) 롬 2:12의 아노모스 헤마르톤("율법이 범죄한")에 노모 헤마르톤("율법이 있고 범죄한")이 뒤따를 때, 첫 번째 어구는 단순히 죄가 율법에 대한 지식없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b) 고전 9:21에서 바울이 자신을 맞춘 아노모이(율법이 없는 자들)는 그들이 사실상 율법을 모르고 그래서 그들이 율법에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과 구별된다.||(c) 아노모이도 역시 눅 22:37(인용문처럼, 막 15:28도)과 행 2:23(여기에서 이방인에 대해)에서 보다 약한 의미로 사용된다.||(d) 그렇지만 고전 9:21에서 아노모스가 얼마나 강하게 심판을 수반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바울이 직접으로 그가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지만, 이 이유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말미암아 명백한 오해에 대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e) 만일 아노모이가 심판을 수반하게 된다면 신약성경에서의 얼굴도 항상 명확하게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일 것이다. 이것은 딤전 1:9에서 명백하다는 단지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율법에 의해 심판 받는다는 것은 이 특별한 어구에가 아니라 전체 문장에 내포되어 있다.||(f) 벧후 2:8에서도 그 의미는 보편적이다. 소돔 사람들은 그들의 사악한 행실로 롯을 괴롭혔다.||(g) 살후 2:8에서도 역시 아노모스는 "율법의 위반자"가 아니라 단지 "행악자"로 번역해야 한다.
율법 없이
ajnovmw"
율법 없이||#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노모스(Eur., Thu. 이래)는 아노모스($459: 율법이 없는)에서 온 부사이며, '법이 없이, 법에 대한 지식이 없이'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부사 아노모스는 70인역본 마카베오이서 8:17에 한번 나오며, '불법으로'나 '부정(당)하게'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2:12에 2회 나온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일으켜 세우다
ajnorqovw
(다시) 세우다, 회복시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노르도오(Eur., Hdt. 이래)는 아나($303)와 오르도오(%563: 바로 세우다, 세우다)에서 유래했으며,||(a) '다시 세우다, 세우다',|(b) '바로 서게 하다, 회복시키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노르도오는 70인역본에서 17회 나오며, 쿤(3559: 확고하다, 세우다, 예비하다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견고하게 하거나 세우다'는 의미를 나타내고(삼하 7:13; 7:26; 대상 17:12; 22:10; 잠 24:3; 렘 10:12), 또한 '일으키다'를 나타낸다(시 145:14; 146:9).||#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노르도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아노르도오는 퇴락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6).||(b) 아노르도오는 바로 서게 하거나 회복시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눅 13:13에서 아노르도오는 귀신들려 꼬부라진 여인이 몸을 '바로 펴서 서는 것'을 나타낸다.|② 히 12:12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힘을 회복시켜 세우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거룩하지 아니한
ajnovsio"
거룩하지 않은 unholy, 불경건한 impious.||#1.헬라어 문헌의 용법||아노시오스는 부정 접두사 %107와 호시오스($3741)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a) 고대의 법을 위반한 `불경건한' 행위와|(b) `불경건한'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아노시오스는 외경에서 헬라어 문헌의 용법과 같이,||(a) `불경건한' 행위(지혜서 12:4),|(b) `불경건한' 사람(마카베오이서 7:34; 8:32)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노시오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신성한 의무를 거절하는 `불경건한'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딤전 1:9에서는 '신앙이 없는 ungodly' 것을, 딤후 3:2에서는 '경건이 없는 impious' 것을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F.Hauck).
참으심
ajnochv
억제, 오래참음, 관용.||#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노케(X. 이래)는 아네코($430: 참다, 견디다)에서 유래했으며,||(a) '억제, 연기, 중지',|(b) '오래참음, 온화, 관용'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노케는 신약성경에서 로마서에만 2회 사용되었다.||(a) 롬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관용과 오래 참으심을 언급하면서 유대인 신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b)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이 과거의 죄들을 간과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묵인하셨다는 것이며, 용서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오래 참으시는 그 관용으로써 그와 같이 행하셨다는 뜻이다. 결국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묵과하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가 모두 그리스도께 쏟아졌다(참조: M. Black, Romans).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의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율법 시대를 종결 시키기까지, 그 진노를 억제해 오셨던 것이다.|(참조: U. Falkenroth; C. Brown)
안타고니조마이
ajntagwnivzomai
∼를 대항하여 싸우다 fight again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안타고니조마이(Xen., Plat., Dem)는 안티($473)와 아고니조마이($75)에서 유래했으며, `∼를 대항하여 싸우다, 투쟁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안타고니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외경 마카베오사서 17:4에 한번 나오며, `싸우다'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안타고니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히12:4에 한번 나오며 `싸우다'를 의미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바꿈
ajntavllagma
교환, 바꿈 exchang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안탈라그마(Eur. 이래)는 안티($473)와 알랏소($236: 바꾸다)에서 유래했으며, '구입 대금, 동등한 것, 대신 주는 것'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안탈라그마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오며, 히브리어 메히르(4242: 가격, 급료)의 역어로 '값'(왕상 21:2; 욥 28:15; 렘 15:13)을 테무라(8545: 교환, 보수, 보답, 보상)의 역어로 '교환하는 일'(룻 4:7)을 코페르(3742: 몸값, 속전)의 역어로 '뇌물'(암 5:12)을 할라파(2487: 변화, 교환, 교체)의 역어로 '변함'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안탈라그마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마 16:26(병행구, 막 8:37)에만 사용되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시 49:4에서 끌어낸 결론이며, 사람에게서 그의 생명을 빼앗으므로 모든 것을 잃게 되어 교환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심판의 무한한 중대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그러한 무한한 가치를 다룬 것이 아니며,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에 대한 것도 확실히 아니다. 그것은 소유와 향락에 대한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