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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멸망하다
sunapovllumi
함께 멸망시키다, 함께 멸망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나폴뤼미(Hdt. 이래)는 전치사 쉰($4862)과 아폴뤼미($622: 파괴시키다, 완전히 멸망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멸망시키다' destroy together, 중간태, '함께 멸망하다' perish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나폴뤼미는 신약성경에서 히 11:31에 한번 나오며, '함께 멸망하다'를 의미한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함께 보내다
sunapostevllw
함께 보내다 send wi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나포스텔로는 전치사 쉰($4862)과 아포스텔로($649: 보내다, 내보내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보내다' send with(Thuc., Xen., Dem., Plut.)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나포스텔로는 신약성경에서 고후 12:18에 한번 나온다: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서로 연결하다
sunarmologevw
함께 짜 맞추다, 함께 밀접하게 결합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나르몰로게오는 쉰($4862)및 하르모스($719: 접합 부분)와 레고($3004)의 합성어인 하르몰로고스(%711: 묶는, 결합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짜 맞추다, 서로 들어맞게 하다, 함께 밀접하게 결합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나르몰로게오는 신약성경에서 에베소서에만 2회 나온다.||(a)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전체 건물이 지어지는 분이며, 동시에 그것을 함께 결합시키는 모퉁이 돌이다. 따라서 여기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 즉 모든 건물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모퉁이 돌로 지니고 있는 성전에 비유되어 있다.||(b)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서 교회가 몸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각기 다른 기능과 직무들을 지닌 지체들이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음으로써 사랑 가운데 상징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잡아가다
sunarpavzw
힘으로 붙잡다, 붙잡아 끌고 가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나르파조(trag., Xen. 이래)는 전치사 쉰($4862)과 하르파조($726: 빼앗다, 잡아올리다, 꽉 움켜잡다, 잡아채다, 강탈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힘(폭력)으로 붙잡다, 붙잡아 끌고 가다'(Soph., Diod.)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나르파조는 4회 나오며, 누가의 기록에만 사용되었다.||(a) 눅 8:29에서 '힘으로 붙잡다'를 의미한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b) 행 6:12에서 '붙잡아 끌고 가다'를 의미한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c) 행 19:29에서도 '붙잡아 끌고 가다'를 의미한다: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d) 행 27:15에서 '끌려 가다'를 의미한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쉬나우크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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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자라게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나우크사노는 전치사 쉰($4862)과 아욱사노($837: 자라다, 자라게 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자라게 하다', 수동태로 '함께 자라다'를 의미한다.(Xen., Dem., Polyb., Plut.).||#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나우크사노는 신약성경에서 마 13:30에 한번 나오며, '함께 자라게 하다'를 의미한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매는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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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매는 것, 끈, 구속물, 차꼬.||#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쉰데스모스(Eur. 이래)는 둘이나 그 이상의 무엇을 함께 결합하는 '매개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연결하는 것, 연결고리(link), 이음매, 관절, 접합 부분, 묶는 수단, 끈, 사슬, 고리, 함께 동여 묶는 것, 꾸러미, 다발, 배를 매는 밧줄, 말의 고삐나 굴레'에 대해 사용되었다.|플라톤의 작품들에서 이 단어는 우주적 이원론을 극복하는 중재나 합일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특별한 중요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에서 이 단어는 비유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결속시키는 끈으로서의 '자녀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수사학에서 이 단어는 '접속어'를, 생리학에서 '관절'이나 '근육'을 가리킨다.|특별한 의미로 '사슬, 끈'이 있다.||#2. 70인역본의 용법.||쉰데스모스는 70인역본에서 10회 나오며, 6개의 히브리어형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단 5:6에서 넓적 다리 마디, 곧 '관절', 단 5:12에서 '연결이나 연상', 왕상 6:10에서도 '연결(점)', 욥 41:7에서 악어의 묘사에서 비늘의 밀접한 상호 '결합', 사 58:9에서 '멍에', 왕하 11:14; 렘 11:9등에서 '공모나 음모'(반역), 왕상 14:24에서 '제의적 남색'에 대하여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쉰데스모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타나며, 결합이나 연결하는 '끈'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행 8:23에서 쉰데스모스는 불의의 '끈'을 의미한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이 구절은 영혼을 속박하도록 불의로 만들어진 끈에 매여있는 것을 말한다.|골 2:19에서 쉰데스모스는 힘줄이나 인대라는 의미에서 '끈 band'을 의미한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엡 4:3이하에서 쉰데스모스는 평화의 '끈'을 의미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기독교 공동체는 평화(구원)의 끈을 통하여 성령의 하나됨(연합)을 지키는 것이다.|골 3:14에서도 유사하게 사랑이 쉰데스모스, 즉 신자들을 함께 묶고(참조: 호 11:4), 그들을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속박으로 언급되어 있다.|(참조: Fitzer; H. G. Link).
함께 갇히다
sundevw
함께 결박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쉰데오(Homer 이래)는 전치사 쉰($4862)과 데오($1210: 매다, 붙들어 매다, 묶다, 동여매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묶다, 함께 결박(구속)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쉰데오는 신약성경에서 히 13:3에 한번 나온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여기서 쉰데오는 '함께 결박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함께 영광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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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영광을 돌리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쉰독사조(Aristot.)는 쉰($4862)과 독사조($1392: 영광스럽게 하다, 영광스럽게 여기다)에서 유래했으며,||(a) '함께 인정(찬성)하다'|(b) '함께 영광 돌리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쉰독사조는 신약성경에서 롬 8:17에 한번 나온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기서 이 동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성경특유의 의미를 지닌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Kittel).
같이 된 종
suvndoulo"
함께 종된 자, 동료 노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쉰둘로스(Eur., Lysias 이래)는 쉰($4862)과 둘로스($1401: 종, 노예)에서 유래했으며, '동료 노예', '함께 종된 자'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쉰둘로스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본래의 의미에서 동료 종(노예):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마 24:49).||(b) '다른 이들과 함께 왕을 섬기는 자' (마 18:28; 마 18:29; 마 18:31; 마 18:33).||(c) '복음 선포 선교에서 그리스도의 종인 자의 동역자'|① 골 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② 골 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d) '다른 이들과 함께 동일한 주 예수를 인정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 6:11).||(e) '다른 이와 함께 메시야의 섭리(경륜)속에서 동일한 신적 권위에 복종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의 동료 종이 되는 천사들'|① 계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② 계 22: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달려와 모임
sundromhv
집합, 군집.||#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쉰드로메(Polyb., Diod. s.)는 쉰트레코($4936: 함께 달리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달림', 즉 '집합, 군집, 합류'(특히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의 모임)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쉰드로메는 신약성경에서 행 21:30에 한번 나온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일으키심을 받다
sunegeirw
함께 일으키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네게이로는 쉰($4862)과 에게이로($1453: 일어나다, 일으키다)에서 유래했으며, '어떤 자를 일어나게 돕다, 함께 일으키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네게이로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비유적 의미로 '영적 죽음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복된 새 생명에로 함께 일으키다'는 의미를 지닌다.||(a)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b)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c)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공회
sunevdrion
의회 council, 공회, 산헤드린 sanhedri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쉬네드리온(Hdt. 이래)은 쉰($4862: 함께, ~와 함께)와 헤드라(%1045: 자리)에서 유래했으며,||(a) 첫째로 '함께 앉은 자들의 자리'를 의미하며,||(b) 그 다음에 그들의 '회기' session, '회의, 의회' council, '통치 기구' governing body를 의미한다.|쉬네드리온은 로마의 세나투스(Senatus: 원로원회)의 역어로 (Polyb.), 공적 기관들(법정, 의회 등), '집회의 장소'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 및 유대 헬레니즘 문헌.||(a) 명사 쉬네드리온은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소드(회의, 의논, 조언, 모임, 집회, 잠 11:13; 잠 15:22; 렘 15:17), 마트(사람, 시 26:4), 딘(심판, 잠 22:10), 카할(모임, 집회, 회중, 잠 26:26)의 역어로 되었다. 따라서 70인역본에서 쉬네드리온은 '통치 기구'로서의 유대인의 어떤 쉬네드리온(공회)도 나타내지 않는다.||(b) 필로에서 쉬네드리온은 문자적 의미와 그리고 '마음이나 영혼의 쉬는 장소'라는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요세푸스에서 쉬네드리온은 '회합, 의회, 통치 기구', 그리고 특히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의 '최고의회'를 의미했다.||#3. 유대교의 쉬네드리온(산헤드린).||(a)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역사. 포로기 후에 유대 사회는 제사자들과 장로들이 지배했다. 제사장 신분의 귀족들과 여러 지파의 우두머리들은 예루살렘에 원로회의를 구성했는데, 그 회의의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이 예루살렘의 의회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Ⅲ세의 칙령에 처음으로 게루시아(%1046: 원로회의)라고 언급되었다(Jos. Ant., 12, 142). 분명히 이 통치 기구가 그보다 더 일찍이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본다.|이 의회는 하스몬 왕가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접수했을 때 그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BC 76-67년에 여왕 알렉산드라 치하에서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그 권한을 부여 받았다.|쉬네드리온이라는 용어가 예루살렘 의회에 대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 가비니우스(Gabinus, BC. 57-55) 통치 아래 있을 때였는데, 황제 가비니우스는 팔레스타인을 5개의 쉬네드리아(%1047)로 나누었다(Jos. Ant., 14, 19; Bell., 1, 170). 그 후 가이사의 통치 시대에 예루살렘 회의는 다시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때 쉬네드리온은 특별히 예루살렘 의회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심지어 이 용어를 히브리어 아랍 형태의 산헤드린으로 대체했던 유대인 자신들까지 쉬네드리온이라고 불렀다.||(b)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구성. 산헤드린은 71명의 의원, 즉 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중 지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은 대제사장이었다. 원래 사두개파 제사장계 귀족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라 여왕의 시대에 이르러 그 의원 자격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포함된 것이다.||(c)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권한.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최고의 유대인 의회로서 유대인들의 모든 세속적 일들과 종교적 일들을 관할했다. 산헤드린의 이런 권한은 헤롯이 예루살렘 산헤드린과 전혀 협의하지 않고 갈릴리에서 형 집행을 명령했을 때 해명을 하도록 그를 소환한데서도 볼 수 있다. 헤롯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산헤드린에서 의장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산헤드린을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하고 회의를 열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제사장직이나 최고회의 따위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왕의 재판을 실시하였다(Ant., 14, 167; 15, 273 이하 등). 산헤드린의 권한은 법률상의 권한은 남았으나 사실상 법 집행은 통치자 홀로 행사하였다(참조: 막 6:17-29; 행 12:2).|주후 6세기 이후 유대를 다스릴 로마 총독이 임명되고 유대인 통치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산헤드린의 업무 영역은 유대에 국한되었으며, 통치 권력은 주로 총독에게 부여되었다. 예루살렘보다 오히려 가이사랴에 주로 소재하였던 총독(procurator)은 산헤드린으로 하여금 원주민과 관련된 사안들을 처리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 산헤드린의 권력의 범위가 어느 정도였으며, 총독은 스스로 어떤 권리를 보유하였을까? 분명히 산헤드린은 제의 공동체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토라를 어기 범죄들을(사형을 제외하고) 처벌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성전 벽을 넘어 신성한 경내에 들어간 이교도를-심지어 로마인까지도- 죽음에 처하는 벌을 가할 권리도 허용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을 부여 받았다고 해서 총독의 통치 아래서 유대 법정이 중범죄에 대해 선고하고 집행하는 권한을 유지했다고 추론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요 18:31과 모순된다. 본문에 따르면 사형 선고는 총독이 내릴 수 있었고 유대인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고하고 몇몇 형 집행이 주후 60~70년에 유대 법정의 지휘로 이루어졌다.||① 간음을 행한 한 제사장의 딸이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Aanh., 7, 2). 이 사건은 아마도 아그립바 Ⅰ세의 짧은 통치기 동안에 있었는데(A.D. 41-44), 이 시기에 유대인은 독립 정부를 회복했었었다.||② 야고보의 죽음(행 12:2)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시기에 있었다.||③ 베스도(Porcius Festus)가 죽고 후임자가 아직 지명되지 않았을 때 대제사장 안나스가 기회를 포착하여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산헤드린에 의한 유죄 판결을 내려 그를 돌로 쳐서 죽게 하였다(Jos. Ant., 20, 200). 이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후에 안나스는 문책을 받고 직위를 박탈 당했다.||④ 행 7:54-8:2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스테반의 순교는 분명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난 폭도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만일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형(Lynch Law)을 중지하거나 자주적인 보호를 허락하지 아니했다면 그들의 허용은 결코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검의 권세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그들의 것이었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로마 총독들의 지배를 받는 전체 기간 동안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이 좌절되었다. 탈무드 전승이 유대인들이 성전 파괴 전 40년 동안 생사 권세가 박탈 당했다고 말할 때 이 상황을 회상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우수리 없는 수 40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분명히 유대에서 로마 총독 정치의 시작을 가리킨다. 주후 66년 가을, 유대인의 반란이 시작되어 이 총독 정치가 무력에 의해 종식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유대 법정이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열심당원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공포 통치 동안에 이 권리를 무시무시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로마 총독들이 유대를 다스리는 기간 내내 헤롯의 통치 아래 실시된 바와 같이, 산헤드린은 사형을 가할 권리는 박탈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요 18:31에서 유대인들이 총독 빌라도에게 한 말은 당시의 법률적 상황과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d) 예루살렘 밖의 유대인 산헤드린.|거룩한 도성 밖에서는 위대한 산헤드린의 형태를 따라 소규모의 공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자치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도록 로마 당국이 허락한 것이었다(Mak. 1, 10). 이러한 소(小) 산헤드린 제도는 토라에 기록된 명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쉬나에는 성인 남자 120인 이상이 거주하는 마을에는 23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산헤드린이 존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Sanh., 1, 6). 쉬네드리온이라는 용어는 이들 소규모의 공회를 입증하는 것이다. 사형에 처할만한 범죄의 경우에 23인 모두가 판결을 승인해야 한다고 미쉬나는 규정한다. 이 공회들에 관해서는 비록 검(무력)의 권리는 로마 당국에 의해서만 행사되었다 하더라도 사법권은 그들에게 속한다는 주장을 유대인들이 고수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점에 따르면 사형은 가능한한 드물게 부과해야만 한다. 7년 동안에 단 한번 사형을 판결한 한 산헤드린이 "파괴적인" 의회로 간주되었다(Mak. 1, 10).|공회는 한 주일에 2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열렸다(ket., 1.1). 어떠한 상황에서도 안식일이나 절기에 회의를 소집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Sanh., 4, 1; Beza[Yom tob]. 5, 2). 에세네파도 역시 자체적인 사법권을 행사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 중형을 선고하고 심지어 모세를 모독한 죄에 대해서는 사형을 부과하기까지 하였다(Jos. Bell., 2, 145). 각 계급의 100인 이상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형이 선고되었다.||#4. 신약성경에서 쉬네드리온.||(a) 복음서에서 쉬네드리온.|(1)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 쉬네드리온.|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예상해야 한다고 미리 경고하신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마 10:17 병행구 막 13:9). 여기서 공회(산헤드린)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앞에 소환될 유대인의 지방 법정이다. 그들은 저희 회당에서 매질 당하는 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제자들의 유대 공동체와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끊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전히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에서 유대 당국에 예속되어 있다.||② 마 5:21 이하에서 옛 사람들에게는 살인하면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면 심판을 받으리라고 말하신다: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가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마 5:21 이하). 여기서 쉬네드리온은 단수이므로 거룩한 성의 최고 법정을 가리킨다. 고대의 법률적 문체로 힘차게 표현된 이 진술은 성난 말은 산헤드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는 살인 행위에 맞먹을 만큼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의 예수님.|예루살렘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눈에 띄지 않게 체포할 적절한 기회를 잡는대로 빨리 그를 잡아서 죽이기로 결의하였다(막 14:1 이하와 병행구; 참조: 막 11:18과 병행구).|요한복음에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남긴 충격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소집하였다고 한다(요 11:47). 이 모임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말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모든 사람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요 11:50). 오늘날 이 기사는 요한복음에만 독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모였다는 사실을 전하는 공관복음의 기록과 조화를 이룬다.|마가와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신 후 대제사장 앞에 끌려 왔으며, 그는 유월절 늦은 저녁에 서둘러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막 14:53 병행구 마 26:57).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막 14:55 병행구 마 26:59). 예수님에 대해 거짓 증거한 자들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돕지 못하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및 병행구). 예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시고, 또 단 7:13과 시 110:1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대답을 강조하시자 대제사장은 산헤드린 회원이 이 명백한 블라스페미아($988: 중상, 비방)에 대하여 판결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 14:64 병행구 마 26:66). 예수님에 대한 핍박의 결국에 산헤드린은 만장일치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공관복음에서 이 기사에 관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에서 할라카(Halachah)의 몇 가지 규칙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① 중대한 심리는 오로지 주간에만 열어야 하는데(Sanh., 4. 1) 여기서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재판하기 위해 밤에 모였다.|② 법적 소송 절차는 안식일이나 절기에 행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는 유월절 전야에 있었다.|③ Sanh., 4. 1은 재판 당일에는 절대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없고 다음 날에 언도하도록 규정하나, 여기서 산헤드린은 예수님에게 즉석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④ Sanh., 7. 5에 따르면 마땅히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신성모독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는 것이지만, 여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⑤ 재판은 산헤드린의 정규 집회장이 아닌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렸다. 그밖의 다른 자료들은 산헤드린의 모임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린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복음서 기자가 기술한 이 소송 사건은 이 점에서 유대인 법률 관습에서 벗어난다.|그러나 우리가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후에 미쉬나를 편찬한 바리새파 랍비 할라카가 주후 70년 이전 시기의 산헤드린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의 산헤드린은 여전히 사두개인의 법률적 이해에 따라 행했다. 바리새인들은 어쨌든 부당한 유죄 판결이 행해지지 않도록 법규에 대해 항상 관대한 해석을 표명했다. 바리새파의 견해가 미쉬나의 법률 조항을 지배했으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통용되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유일한 한 가지 사실은 안식일과 절기에 법률 행위의 엄격한 금지가 단지 랍비 할라카에 귀속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정확하게 집행된 보다 옛 할라카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사법적 절차는 안식일, 절기, 그리고 그러한 날들의 예비일에 엄격히 금지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심리에 관한 공관복음의 기사는 법률이 요구하는 규율과 아주 모순되는 것 같다.|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사에 대한 평가는 예수님께서 돌로 죽임 당하지 않고 십자가형을 당하셨다는 사실, 다른 말로 그는 로마 법률에 따라 재판 받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시작해야 한다. 빌라도는 한 유대인에 대한 선고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시행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의 불평에 근거하여 그가 직접 예수님에게 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였다. 총독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산헤드린이 사형 선고를 감히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최고의 합법적 사법권은 총독에게만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막 15:55-65의 기사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 증거와 기독교 고백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은 유대인의 입술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또 다른 문제는 왜 그 긍정적인 대답이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 공동체가 회당과 대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쉽사리 이해된다. 사실 예수님이 메시야시다는 고백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신랄한 논쟁의 쟁점이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에게 핍박 당한 이유였던 것이다.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묘사함에 있어서, 공동체는 예수님의 처형에서 유대 당국의 역할을 강조하고 교회와 회당 사이의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사건의 역사적 과정은 아마도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회원 중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양자 모두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다는 점에서 일치된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피고인의 진술을 간략히 들은 다음 정치적 반역자로 처형하도록 총독에게 넘겨주었다(막 15:1과 병행구). 이 경우에 유대 법정과 로마 통치자는 합세하여 나사렛 예수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누가의 기사는 마가의 기사보다 본질적으로 더 간결하다. 누가복음은 산헤드린의 심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이 밤에 체포되었으며 산헤드린 모임이 이른 아침에 있었다고만 한다(눅 22:66). 예수님께서 그가 메시야이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을 때, 그의 진술 사실은 기록되었으나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눅 22:71). 누가의 기록에서 이러한 사건의 순서는 누가의 독특한 자료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마가의 기사를 축약한 것이다.|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체포되신 후 우두머리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의 집으로 먼저 끌려 와서 그에게 심문을 받았다(요 18:12-23).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 심문에 참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게 산헤드린이 행한 심리나 선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소송은 빌라도 앞에서였고, 그는 유대인들의 압력 때문에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다(요 18:28-19:16).||(b) 사도행전에서 쉬네드리온.|쉬네드리온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그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하는 법정으로 언급된다. 만일 산헤드린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이 충분히 사실이라면 사도행전 기자가 다소 자유롭게 기사를 전개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사두개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예루살렘 행정의 일부인 반면(행 4:1; 행 5:17; 행 23:6) 바리새인들은 호의적으로 묘사된다(행 5:34-39; 행 22:30-23:10). 공판에 대한 계속적인 보고에 의하면 그 강도가 점점 강해진다.||①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으로 산헤드린 앞에 서게 되었을 때(행 4:5-7) 그들은 엄중한 경고를 듣고 방면된다(행 4:5-22).|② 두 번째 재판에서는 가말리엘의 변호(행 5:34-39)로 단지 채찍질과 잠잠하라는 경고만 듣고 석방된다(행 5:17-42).|③ 그러나 그 다음의 스데판의 재판-여기서 성전에 관한 말이 한 역할을 한다(행 6:14, 참조: 막 14:58과 병행구)-은 일반적인 소요로 끝나고 피고인은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한다(행 6:8-8:1).|④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천부장은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에 관하여 더 많은 정보를 원했으며 산헤드린을 소집하였다(행 22:30). 바울은 대공회 앞에 서서(행 23:1) 신속하게 상황을 요약하고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 받노라"(행 23:6)라고 말함으로써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켰다. 사두개인들이 바울을 반대하는 한편 바리새인들은 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로마 관원에 의해 밖으로 인도되어 나왔다(행 23:10). 천부장은 바울을 산헤드린 앞에 다시 데려와서 죽이고자 원하는 유대인들의 계획된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행 23:15; 행 23:20)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어(행 23:26-30) 총독으로 하여금 유대인에 의해 고발된 이 로마 시민에 대한 소송 건을 결정짓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바울은 산헤드린에게 스데반처럼 죽임을 당할 운명을 모면하였다.|(참조: Lohse; I. H. Marashall).
양심
suneivdhsi"
의식 consciousness, 양심 conscienc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쉬네이데시스(Domoc.이래)는 쉬네이도($4894: 함께보다,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의식, 양심, 성실함'을 의미한다.||디오, 스트라보, 플루타르크 등 저술가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들을 회고해 볼 때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의거하여 그의 양심이 선한(아가데, 혹은 오르데)지 악한(데이네 혹은 포네라)지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한 양심은 평강을 누리는데 반해 악한 양심은 양심의 소유자를 사정없이 괴롭혀서 그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이에 관한 일례는 모친 살해죄를 지은 오레스테스(Orestes)의 비극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양심을 자신을 파멸시키는 질병으로 보고 있다. 헬라 문헌에서 에리니에스(Erinyes)는 악한 양심의 병폐를 신화적으로 구현한 것이었다.||기독교 이전의 헬라 문헌은 거의 오로지 악한 양심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반해 로마인들, 특히 시세로(Cicero)는 자주 선한 양심과 심지어 깨끗한 양심과 가장 좋은 양심에 관하여 언급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양심은 자주 비난과 좌절의 성격을 띠고 나오는 실패와 악에 대한 회고적 지식인 것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고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로마 관리와 법률가의 윤리적으로 견실한 구조속에서는 그에 적절한 의무감이 쉽게 생겨난다.||양심에 있어서 한 인간 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깃들어 있다. 즉 인간은 동일한 사물들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며,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세력들,즉 질서를 지향하는 세력과 무질서를 지향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갈등은 과거의 무질서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시작되며, 따라서 양심은 미래에 대한 준비보다 과거에 대한 평가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갈등이 존재론적인 것일 경우, 자아 성찰에 있어서 지식이 크게 작용하는 반면에 그 갈등이 윤리적인 경우에, 그 자아성찰에 있어서 도덕적 양심이 크게 작용하며, 이 두 요소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특히 후기 스토아(Later Stoa) 학파(Seneca)에서 양심의 회고적 특성은 피타고라스 학파(Pythagoreans)의 영향을 받아 약화되었다. 양심은 신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감시인(에피트로포스; 라틴어 테스티스 "증인" Witness)으로 생각되었다. 양심의 역할은 순리대로 살도록 인간을 인도하고 그의 도덕 발달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양심 속에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방향 표지가 들어 있다(M.Poblenz, Die Stoa, Ⅰ, 1948, 320). 양심의 임무는 여전히 주로 이미 일어난 일 혹은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사람의 비판적 항소법원의 임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양심이 규범적 안내자가 되는 근거가 되었다.|(참조: C.Maurer, TDNT, Ⅶ 907).||#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쉬네이데시스는 70인역본에서 3회만 나온다. 전 10:20에서 마음을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상 문제가 있는 듯하며,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의미한다. 지혜서 17:11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양심'을 가리키며, 이 구절에서 나쁜 양심은 사법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 재판관과 형집행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은 양심에 해당하는 용어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헬라인들과 다른데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언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 문제가 더 중요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말씀(시 139편)을 통하여 왔으며, 책임있는 행위를 가능케 하였던 이 말씀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신 30:14), 선과 악은 이 말씀에 의하여 인지되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으며(시 14: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고, 양심은 자아를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이스라엘인은 자기의 자의식을 탐색하는 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책임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인간은 하나님께 신앙 고백을 하고 그의 율법을 순종으로 준행하고자 하였다.|이것은 구약성경의 고통하는 양심이 실체에 대하여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그 본래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양심의 소리는 인간에게 그의 처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거룩한 재판관의 소리이다. 양심의 기능은 마음(히브리어 렙)에 속해 있다. 이것은 내적 불화로 나타난다. 구약성경은 이것을 인정한다(창 42:21; 삼상 24:5; 삼상 25:31).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내적인 불화와 갈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정죄하고 참회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회개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도 하였다(시 51편).|지혜서 17:10에서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 여기에서 양심은 '한 사람 속에서 검사와 판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필로는 "로마인 세네카(Seneca)가 들은 것만큼이나 높이 외치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M.Pohlenz) 그에게 있어서 양심은 자율적 항소 법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형성된 규범적 실체인 것이다. 양심의 임무는 엘렌케인(유죄를 선언하다, 꾸짖다, 들춰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여 참회케 하는 것이다. '양심(영혼에서 산출되는 엘렌쿠스[elenchus])은 일단 깨어나게 되면, 고소자로 등장하여 양심 소유자를 기소하여 죄를 씌우고 수치를 당케 한다. 반면에 양심은 그를 바로 잡아주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는 재판관으로서 지시하며, 양심은 설득하고 나면 기뻐하고 누그러진다'(Decal., 87).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계속적으로 그 죄인을 괴롭힌다. 양심은 자비하신 하나님 품으로 이 죄인을 이끌기 위하여 이 모든 일을 수행한다. 필로의 양심 교리의 구약성경적 기반은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참조: H.C.Hahn).||#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쉰네이데시스는 신약성경에서 30회 나오며, 복음서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사본들에는 요 8:9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1. 바울서신의 용법.|(a) 쉬네이데시스는 바울 서신의 여러 구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고전 8:7이하; 고전 10:25이하). 이것은 고린도교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던 주장을 암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 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자아 인식'을 의미하였다. 즉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 인식인' 것이다.|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두가지 사항을 피력하고 있다. 한편으로,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바르트가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이라 부른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보다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다.|바울의 결정적 진술은 쉬네이데시스에 어떤 제한을 두는데, 그것은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아직 우상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참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이질적인 양심에 의해 통제되는 것에서 자유해야 한다. 바울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이라 부른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하여, 더 민감한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써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피어스(C.A.Pierce)의 '신약성경에서 양심'(1955)이란 연구 논문은 이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피어스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릇된 일을 행할 때 느끼는 고통이라는 도덕적으로 나쁜 부정적 의미를 지닌 일상적인 헬라어였다고 주장한다. 피어스는 이 용어가 양심을 표어로 사용한 고린도 교회를 경유하여 신약성경으로 들어왔다고 암시한다. 이는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이 용어가 나오지 않으며 고린도서와 후기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 당시의 여러가지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특히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양심에 호소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고기를 먹는 관습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바울은 양심만이 변함없고 오류를 범치않는 안내자라는 사상을 비난하고 있다. 고전 4:4에서 바울은 우데 가르 에마우토쉬노이다(나는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NEB)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여 이는 양심 그 자체로는 그가 행했을런지도 모를 어떤 비행에서 그를 무죄 방면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양심이 죽었거나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해서 양심에 거리끼지 않을 수 있다. 행동의 옳음과 잘못을 결정하는데는 다른 요소들이 있다. 기껏해야 양심은 저지물에 불과하다.|후기 서신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예법에 관한 고린도 교회의 긴급한 문제들에 비추어서 양심의 한계점을 설명하고 있다. 연약한 형제는 우상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는 강한 형제의 본을 따라서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 정해진 분명한 행동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연약한 것이다. 그는 그 고기를 먹고 나서 양심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고전 8:7, 고전 8:10, 고전 8:12).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민감하여 동시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양심이다. 이 딜렘마로부터 헤어날 길은 '지식'에(고전 8:11이하) 의거하여 즉 양심에 의해 고통 당하지 않는 "강한" 형제를 모방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고전 10장에서 양심은 다시 종속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기독교인의 행동 동기로 사랑이 언급되어 있다(고전 10:23이하).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양심의 문제를 거론하기를 피해야 한다(고전 10:27, 고전 10:28, 고전 10:29). 이 문제는 보다 약한 사람과 그의 양심에 대한 관심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다. 신자는 시장에서 무엇이든 사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식물의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약한 형제가 고기가 우상에 바쳐진 것이었다고 말하면 그것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이는 고기를 먹는 사람의 양심을 더럽힌다거나 반신반의하는 습관에 젖어 듦으로써 그의 영성을 약화시키는 경우가 아니라 민감한 사람의 양심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는 경우이다.|환언하면, 어떤 사람이 우리가 양심을 행동의 길잡이라고 부르는 것을 오로지 고통을 피하려는 수단으로만 삼는다면, 양심은 대단히 불완전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어쨌든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양심은 지식에 의존한다(고전 10:25이하). 이유는 양심 그 자체만으로는 그 고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심은 오로지 그 양심 밖에 있는 도덕적인 원칙들과 관련하여 효과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청결한 양심은 의로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고전 4:4). 반면에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은 다른 근거들 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을 뿐인 딜렘마(dilemma)로 고통을 당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8장과 10장). 행동을 위한 궁극적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다(고전 10:31이하; 참조: 고전 13:1 - 고전 14:1).||(b) 롬 13:5에서 "양심을 인하여"라는 문구는 세 가지의 가능한 해석을 할 수 있다.|①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을 수도 있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이나,|② 양심이 제시하는 확신, 도덕적 고려에 따라 행하는 것이나,|③ 국가와 하나님의 뜻 사이의 결속 때문에 행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롬 13장은 고전 10장과 달리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행위와 자아 인식의 합일 안에서의 긍정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롬 13:6에 비추어 볼 때 "양심을 인하여"라는 문구는 ③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신자들은 국가를 단지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하여야만 하는 것으로서, 벧전 2:19도 역시 이 점을 나타내 주고 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c) 양심은 다른 구절들에서 심판관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① 하나님에 근거한 자의식(自意識)은 그 자체 좋은 긍정적인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그가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한다고 확신시킨 그의 양심의 증거를 자랑하였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참조: 요일 3:19이하). 이러한 양심의 증거는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 판단이 바울의 선교적인 삶과 사역의 성실성을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다(고후 4:2; 고후 5:11). 이러한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단지 악한 고소적 양심을 회피하는 것만이 열망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삶의 일치를 확인하는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한 것이다.|② 롬 9:1에서 바울이 그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줄 증인으로서 그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여기서 양심이 사도의 큰 슬픔을 언급할 때 이 소리는 단지 고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확인될 때 맹세의 의미를 지닌다.|③ 롬 2:15에서 이방인들의 양심은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여기서 비록 인간의 양심이 죄를 고소할 뿐 아니라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지라도 양심은 사법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양심의 고소적 역할은 다소 약화되어 있는데, 이는 율법이 그 무엇보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신랄한 고소자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율법마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기각되기 때문이다.||2. 다른 서신들의 용법.|이 서신들에는 양심에 대하여 그것을 아가도스($18: 선, 행 23:1; 딤전 1:5; 딤전 1:19; 벧전 3:16; 벧전 3:21), 카다로스($2513: 정결, 딤전 3:9; 딤후 1:3), 칼로스($2570: 좋은, 히 13:18), 아프로스코포스($677: 거리낌이 없는, 행 24:16), 포네로스($4190: 나쁜, 악한, 히 10:22)와 같은 특별한 성격에 의해 특징 짓는다.||(a) 사도행전. 행 24:16은 사실상 행동 규칙을 정하고 있다: "나(바울)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마찬가지로, 바울은 유대 지도자들이 모인 회합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b) 목회 서신들은 선한 양심을 크게 강조한다. 이 서신들은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딛 1:15)과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것과 대조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선한 양심"(딤전 1:19; 벧전 3:16)을 가져야 하며, "청결한 양심으로 섬겨야"(딤후 1:3) 한다. 따라서 선하고 청결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특색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판단과 믿음의 판단이 일치하기' 때문이다(W.Schrage).|딤전 1:5은 "청결한 마음" 및 "거짓 없는 믿음"과 함께 양심을 활동 중에 있는 사람의 근원으로 지적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양심은 "믿음의 비밀"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될 수 있다(딤전 3:9). 이것은 세례(침례)의 본질인(벧전 3:21) "청결한 양심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이다. 같은 구절에서 청결한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부되어 있다.||(c) 히브리서. 히 9:14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죽은 행실에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선언한다. 이 대목에서 신약성경의 양심에 대한 이해가 기독론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볼 수 있다. 대제사장이 매년 한번씩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속죄일 의식의 상징을 사용해서 히 10:22은 신자들에게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스스로 새 생활에 들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후기 유대교는 계속 제사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히 9:9; 히 10:2).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 13:18). 이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희생만으로 인한 것이다.|이와 같이 이해한 양심에 대한 기독교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권능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변화된 것이다.|(참조: H.C.Hanh; C.Maurer; Walter Bauer; J.H.Thayer).
쉬네이돈
suneivdw
알다, 인식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네이돈은 전치사 쉰($4862)과 에이도($1492: 보다, 알다)에서 유래했으며,||(a) '함께 보다(보았다)',|(b) '마음으로 보다(보았다)', '알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깨닫다, 파악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네이돈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만 사용되었다.||(a) 행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쉬네이돈은 '알고 있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행 14:6에서도 이 단어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b)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여기서 쉬네이돈은 '인식이나 의식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행 12:12에서도 이 단어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쉬네이미
suvneimi
~와 함께 있다 be with.||#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쉬네이미(Homer 이래)는 기본 전치사 쉰($4862)과 에이미($1510: 내가 있다, 존재하다, 나는 …이다)에서 유래했으며, '함께 있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쉬네이미는 신약성경에서 2회 누가의 기록에만 사용되었다.||(a) 눅 9: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b) 행 22:11,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