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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조
sfavzw
죽이다, 살해하다, 도살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파조(Homer. 이래)는 기본어근으로 스파그(%716)에서 유래했으며, '죽이다, 살해하다, 살육하다, 도살하다'를 의미하며, 동물을 죽이는 것, 사람을 죽이는 것, 자살, 그리고 제의적 도살에 대해 사용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스파조는 70인역본에서 약 80회 나오며, 동물을 죽이거나 제물로 드리기 위해 도살하는 것,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왕상 18:40; 시 37:14), 인신 제물에 대해 사용되었다(삼상 15:33; 겔 16:17; 겔 23:39).||#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스파조는 신약성경에서 10회 나오며, 요한의 기록에만 사용되었다.||(a) 요일 3:12에서 스파조는 형제 살해, 즉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살해한 것을 가리킨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b) 스파조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 예수님을 묘사한다.|①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② 계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속전으로 언급되어 있다.|③ 계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④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c) 계 13:3에서 머리를 상하여 죽게 된 짐승을 언급하는데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 이것은 네로의 암살에 관한 언급일 수도 있다.||(d) 계 6:9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위한 순교자들의 죽음이 희생제물의 도살에 비유 되었는데, 희생제물의 피가 제단에서 흘러내렸던 것과 같이 순교자들의 영혼은 제단 아래 있었다.||(e) 계 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로마시가 불탄 후(A.D. 64) 네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도미시안은 이 박해를 더욱 심화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로마는 제국 전반에 걸쳐 모든 그리스도인 순교자로 인하여 비난 받아 마땅했다.||(f) 계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다른 말을 탄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권세를 부여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인간 역사를 사용하시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나가신다. 이 기사가 허락 받은 권세는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는 일인데 이것은 첫번 기사에 의한 정복적 대외 전쟁과는 달리 '내란'을 가리킨다. 이 기사는 큰 칼을 받았지만 살상의 명령은 받지 않았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즉 기사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것이다. 이 기사는 평화만을 제할 뿐 사람들이 파괴를 계속하는 것이다. (Leon norris)|(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스포드라
sfavdra
대단히, 심히, 크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스포드라(Pind., Hdt. 이래)는 스포드로스(%1007: 과도의, 지나친, 극단적인, 심한)에서 유래했으며, '대단히, 몹시, 심히, 크게' exceedingly, greatly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스포드라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형용사 뒤에 위치했다. 마 2:10; 막 16:4; 눅 18:23; 계 16:21.||(b) 동사들과 함께 사용되었다. 마 17:6; 마 17:23; 마 18:31; 마 19:25; 마 26:22; 마 27:54; 행 6: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스포드로스
sfodrw'"
심히, 몹시, 대단히.||#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스포드로스(Homer 이래)는 형용사 스포드로스(%682: 과도의, 지나친, 극단적인, 심한)에서 유래한 부사이며, '심히(몹시), 대단히'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스포드로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7:18에 한번 나온다: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인 맞다
sfragivzw
인치다, 봉인하다 sea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프라기조(Aeschyl. 이래)는 스프라기스($4973: 인, 인장, 봉인)에서 유래했으며,||(a) '인치다, 인을 찍다, 인으로 표하다, 날인하다',|(b) '봉인하다, 밀봉하다, 밀폐하다',|(c) '입증하다, 증명하다, 인정하다'를 의미한다.|일반 생활이나 종교 생활에서 인을 치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짐승은 의식에 사용하기에 깨끗한가 그러므로 희생 제물로 적절한가라는 것을 검사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참조: Hdt. 2, 38; BGU, I, 250). 사람들은 인을 새김으로써, 자신들이 그들의 신의 소유임을 나타내었다(Hdt. 참조: 마카베오삼서 2:29 이하). 사람들은 집과 같은 것들이 보존 구역으로 지정되었음을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기 위하여 그 곳에 인을 찍었으며, 비밀 내용을 지키기 위하여 문서에 인을 찍기도 했다. 이리하여 입이나 말들이 인쳐졌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참조: Diog. Laert). 즉 사람이 경험한 바를 비밀에 붙여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Yesbaert, op. cit., 221-226). 이것은 특히 '신비한 것'들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참조: R. Schippers)||#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스프라기조는 70인역본에서 약 3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하탐(인을 찍다, 봉인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편지(왕상 21:8), 왕의 교서(에 3:21; 에 8:8; 에 8:19; 단 6:17-18), 언약(느 10:1[H2]), 토지 구매 문서(렘 32:10; 렘 32:11; 렘 32:44), 책들(단 12:4)의 인봉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예언도 마치 봉인된 것 같다고 한다(사 29:11).|그러므로 인을 찍는다는 것은 인 아래 둠으로써(단 12:9) 비밀스럽게 봉합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단 12:9). 욥기에서 허물을 봉하는 것(욥 14:17)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사야는 그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봉했다. 즉 비밀리에 지켰다(사 8:16). 단 8:26에서 환상을 '감추는 것'을 나타낸다. 봉한 샘은 순결한 여인에 대한 비유이다(아 4:12).|이 단어는 또한 남자의 유출병이 그칠 때처럼 닫혀지는 것을 의미한다(욥 24:16).(참조: J. P. Lewis).||#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스프라기조는 신약성경에서 32회 중 요한계시록에 22회, 바울서신 6회, 요한복음 2회, 마태복음 1회, 디모데후서 1회 사용되었다.||(a) 스프라기조의 문자적 용법.|이 단어가 문자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① 마 27:66에서 예수님의 무덤이 인봉된 것을 언급한다. 그 때 누구의 인장이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처럼 예수님의 무덤의 입구에 인장을 찍었던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② 롬 15:28에서 바울은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한 헌금을 넣은 자루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던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사람이 주머니에 든 것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주머니를 봉하는 것처럼(참조: 토빗 9:5; 욥 14:7) 그가 헌금을 봉했다고 했을 것이다.||(b) 스프라기조의 비유적 용법.|① 요한은 스프라기조를 '인증하다, 증명하다, 확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요 3:33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자는 곧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정 내지 확증하는 자이다.|요 6:27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나님이 인자에게 인을 침으로써 그는 인자가 주는 영원한 양식이 진리의 양식이며, 썩지 않을 양식임을 증명하며 그가 인을 침으로써 그는 인자의 사역을 인증한다.|② 바울은 '인침'을 성령과 연관시켜서 사용한다.|엡 1:13에서 성령으로 또는 성령 안에서 "인침 받는" 것을 세례(침례) 사건 전체와 연관시키는 반면에, 고후 1:21 이하에서는 세례(침례)를 그리스도 안에서 기름 부음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성령의 보증을 받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세례 받을 때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처럼(참조: 눅 3:22; 눅 4:18; 행 10:37 이하, 기름을 붓다) 신자들도 그들이 세례 받을 때 역시 그러하다. 성령은 구속의 날까지 하나의 보증이다(엡 1:13 이하; 고후 1:22). 성령으로 신자들을 인침으로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기 소유로 삼는다.|엡 4:30에 의하면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 누가 자신의 것인지 표시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c) 스프라기조의 요한계시록의 용법.|① 스프라기조는 인봉할 말과 인봉을 금할 말에 대해 사용되었다.|-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여기서 환상을 본 자에게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는 것을 금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졌으므로 그 말씀을 숨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반대 내용인 단 12:4).|-계 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여기서 인봉된 것은 감추어진 것이라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참조: 사 29:11). 이것은 난해한 구절이다. 하인리히 크라프트는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제 일곱 천둥이 말한다. 물론 예언자 요한은, 예언자인 그에게 이해되는 말인 일곱 천둥의 말 속에서 예언하라는 요구를 듣는다. 그러나 그는 이 요구를 따르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전달 내용을 "인봉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것을 밀봉하여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동일시 되었던 사자의 부르짖음과 천둥은 이 본문에서 분리되었다. 그것은 인용된 아모스 귀절 때문에 일어났을 것인데(암 3:8), 거기 나오는 병행마디 때문에 분리된 것같다. 그러므로 일곱 천둥은 주의 말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일곱 천둥은 하나님의 일곱 영의 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어째서 그 예언자는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언자 자신만이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둥이 말한 내용은 증거의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은 이 순간에도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좀 더 후에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주께서 이미 그것을 이전에 전달했음을 알게 된다. 그 경우에 연대기적인 진술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대기에 관한 것은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마 24:36). 그것은 예언자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밀이 미래에 관한 것임은 확실하다. 특히 7절이 그것을 시사한다. 일곱 번째 나팔은 이 순간에도 아직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때엔 더 이상 시간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결심이 실현된다.|그러므로 우리가 일곱 천둥의 인봉된 계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일곱째 나팔"이 울릴 때 일어나리라고 기대되는 사건들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의 글을 참고해 볼 수도 있다. 바울은 마지막 나팔에 대해 말하게 되었을 때(고전 15:51) 그 비밀을 밝힌다: '보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비밀)을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잠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올 때 (일)순간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요한과 바울은 같은 사건에 관해 말한다. 바울은 (일)순간을 말하고 요한은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말한다. 양자는 모두 마지막 나팔에 관해 말하면서 그때에 일어날 일을 비밀이라고 설명한다. 차이점은 단지, 바울이 비밀을 밝히는 데 반해 요한은 그 비밀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 뿐이다. 양자는 모두 시간이 더 이상 없으리라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그 사건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갑자기 단번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국제 성서 주석, 요한계시록).||② 스프라기조는 신자들의 인침에 대해 사용되었다. 계 7:2 이하는 네 명의 심판할 천사들이 활동을 개시하라는 허락을 받기 전에 신자들의 이마에 인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앞으로 세상에 임할 심판에서 신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계 9:4; 참조: 겔 9:4; 솔로몬의 시편 15:6 이하). 여기서 인이란 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시이므로, 보호자의 표시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은 심판에서 자기의 것을 지키시는 것이다. 인침을 받는 자의 숫자가 각 족속 당 12,000 즉 12X12,00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심판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참조: 계 14:2; 계 22:4)이 새겨진 인을 찍음으로써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과 신자들이 구별될 것이다(참조: 계 13:16 이하; 계 14:9; 계 14:11 등). 하나님의 표는 사람을 심판에서 보호하며 짐승의 표는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다 줄 것이다(계 9:4; 계 14:9 이하). 이것이 박해의 시련을 격으면서 살아나가는 공동체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곧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말해주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Schippers; J. P. Lewis).
인봉
sfragiv"
인, 인장, 봉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프라기스(trag., Hdt. 이래)는 기본어이며, '인, 인장, 봉인'을 의미한다.||(a) 이 명사는 인을 치는 도구(예. 인장 반지)와 그 도구에 새겨진 석판석(작은 활자), 그리고 그 인장의 날인 뿐 아니라 그 인장에 새긴 것(형상이나 이름) 모두를 뜻한다.||(b) 인장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널리 사용되었으며, (주전 3천년 전부터)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러했다. 인장이 지니는 실제적인 중요성은 법적인 것으로, 소유주는 자기의 소유물, 즉 가축들, 노예들에다 그의 부호를 새기고 그것으로 그의 소유물들이 도난 당하는 것을 방지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인장을 보호의 표시 또는 보증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인장이 문서(유언장, 판매증서 등)에 사용될 때는, 거기에 적힌 것을 인정한다는 하나의 표시였다. 인장이 찍힌 물건들은 인장 주인이 처리할 권리를 가지며, 이것은 개인에게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그 도시의 권력자들과 왕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인장은 그들의 권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c) 인장은 종교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짐승은 희생 제물로 적절한가라는 것을 검사 받아 표시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인을 새김으로써, 자신들이 그들의 신의 소유임을 나타내었다(Hdt.).|사람들은 집과 같은 것들이 보존 구역으로 지정되었음을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기 위하여 그곳에 인을 찍었으며, 비밀 내용을 지키기 위하여 문서에 인을 찍기도 했다. 이리하여 입이나 말들이 인쳐졌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참조: Diog. Laert.).||#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스프라기스는 70인역본에서 25회 나오며, 히브리어 호탐(2368: 인장, 인장 반지, 출 28:11; 출 39:30; 학 2:23등), 하흐(2397: 갈고리, 사슬, 출 35:22)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프라기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자주 나타난다.||(a)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인침'이라는 단어를 아브라함의 할례와 관련시켜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이유는 그가 세례(침례)를 일종의 '인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참조: 골 2:11이하. 여기서는 손으로 행하지 않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할례에 관하여 언급함). 롬 4:11을 할례의 인을 치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언약의 징표로 하여 그와 언약을 맺은 하나님 앞에서 조차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나님께서 확증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 구절은 가장 쉽게 이해된다(창 17:10이하). 따라서 여기서 할례는 하나님의 확증 표시를 의미할 것이다.||(b) 고전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여기에서 바울이 고린도 공동체를 그의 사도직의 인이라고 부를 때 그가 말하려고 한 바는 이 세상에서 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그의 사도적 권위의 합법성을 확증해 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이 그의 추천서이라는 것이다(참조: 고후 3:1-3)||(c)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스프라기스는 인의 각인, 즉 인에 새겨진 명각을 의미한다(참조: 출 28:36). 문제는 이 표가 찍힌 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가(참조: 고전 3:10이하), 교회인가(참조: 딤전 3:15), 사도의 증거인가(참조: 엡 2:20), 또는 거짓 선생들이 가르치는 것과 반대되는 진리인가(딤후 2:15-18)? 하나님은 인을 침으로써 그 터가 견고함을 보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불의를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2개의 각인은 70인역본의 민수기 16:5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콘첼만(H. Conzelmann)은 이것을 헬라어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은 초기 기독교도의 시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The Pastoral Epistles, Hermeneia, 1972, 112).||요한계시록에서 스프라기스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d) 스프라기스는 말씀의 인봉에 관해 사용되었다.|① 계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여기서 환상을 본 자에게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는 것을 금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가까워졌으므로 그 말씀을 숨기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반대 내용인 단 12:4).|② 계 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이것은 인봉된 것은 감추어진 것이라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참조: 사 29:11). 최후 심판의 시작을 예고하는 우뢰의 메시지는 환상을 본 자의 귀에만 들렸을 뿐이며 그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것을 전달해서는 안된다.||(e) 스프라기스는 일곱 인이 찍힌 책에 대해 사용되었다. 계 5:1에서는 보좌에 앉은 이의 오른손에서 양 쪽에 일곱 인이 찍힌 두루마리 책을 요한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린 양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열어볼 수 없을 것이다(계 5:2-10).|두루마리에 씌어진 내용은 두루마리의 양면에다 기록할 만큼 방대한 것이었다(참조: 겔 2:9이하).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으며, 심지어 환상을 본 사람에게 까지도 감추어진 것이다(참조: 단 12:4; 단 12:9).|고대 문서의 내용은 모든 인봉을 뜯고 난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각 인을 뗄 때마다 최후 대변동의 일면이 드러나기 때문에(계 6:1; 계 6:3; 계 6:5; 계 6:7; 계 6:9; 계 6:12; 계 8:1), 그 두루마리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이러한 사상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양만이 최후 사건을 일으킬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f) 스프라기스는 신자들의 인침에 대해 사용되었다. 계 7:2이하는 네 명의 심판할 천사들이 활동을 개시하라는 허락을 받기 전에 신자들의 이마에 인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앞으로 세상에 임할 심판에서 신자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계 9:4; 참조: 겔 9:4; 솔로몬의 시편 15:6이하). 여기서 인이란 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표시이므로, 보호자의 표시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은 심판에서 자기의 것을 지키시는 것이다. 인침을 받는 자의 숫자가 각 족속 당12,000 즉 12×12,000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심판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름(참조: 계 14:1; 계 22:4)이 새겨진 인을 찍음으로써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과 신자들이 구별될 것이다(참조: 계:13:16이하; 계 14:9; 계 14:11등). 하나님의 표는 사람을 심판에서 보호하며 짐승의 표는 사람에게 심판을 가져다 줄 것이다(계 9:4; 참조: 계 14:9이하). 이것이 박해의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나가는 공동체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곧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보호를 말해주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Schippers).
발목
sfurovn
발목 ankl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퓌드론(PFlor., Hesychius)은 스퓌론(%683: 발목)에서 유래했으며, '발목' ankle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퓌드론은 신약성경에서 행 3:7에 한번 나온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거의
scedovn
거의, 대체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스케돈(Homer 이래)은 에코($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가까이, 바로 가까이에',|(b) '거의, 거반, 대체로'(Soph.).||#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스케돈은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거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b) 행 19:26,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c)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형적
sch'ma
태도, 형상, 모양||#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케마(Aeschyl., Thu. 이래)는 에코($2192: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태도, 자세' 예를 들면 행동거지, 행위, 교만한 태도나 겸손한 태도에 대해|(b) '형태, 형상, 모습, 모양' 예를 들면 춤추는 모양, 국가의 형태, 정체, 전투대형에 대해|(c) '생활 양식'|(d) '의복, 복장(옷차림)'|(e) 수사학, 천문학, 기하학, 문법에서 '형식, 외형, 삼단논법의 형식, 별자리'|(f) '상태나 상황, 또는 꾸밈, 구실'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스케마는 70인역본에서 사 3:17에 한번 포트(6596: 구멍, 돌쩌귀, 여성의 외음부)의 역어로 사용되어 예루살렘의 타락한 여인들의 오만한 '태도'를 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케마는 신약성경에서 바울서신에 2회 나온다.||(a)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선언했을 때 스케마가 바울에게 얼마나 실제적인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b)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이 세속적인 삶의 도덕적 성격(Lohmeyer)이나 예수님의 외모(Dibelius)나 그분이 인성을 지녔다는 사실 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성이 누구든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방법(Kasemann)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휴리스코($2147: "나타나셨으매")의 의미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G. Braumann; J. Schneider).
찢어지다
scivzw
쪼개다 split, 찢다 tear, 나누다 divide , 분리하다, 따로 떼어놓다 separate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키조(Homer 이래)는||(a) `쪼개다'(나무를), `분리시키다'(우유를),|(b) `나누다, 분리하다',|(c) 비유적으로 `의견의 분열'을 나타낸다.||#2. 70인역본의 용법||스키조는 70인역본에서 12회 나오며, 히브리어 바카(쪼개다, 분리하다, 분쇄하다, 찢다)와 카라(찢다, 찢어 산산조각내다)를 번역하였다.|따라서 스키조는 70인역본에서 나무(창 22:3), 바위(사 48:21), 산(슥 14:4)를 `쪼개다', 또는 바닷물을 `가르다'(출 14:21), 옷을 `찢다'(사 36:22; 사 37:1)와 같은 `쪼개는 것, 찢는 것, 분리하는 것'을 표현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스키조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a) 스키조는 `찢다, 째다'를 의미한다.|① 눅 5:36에서 옷을 `찢은 것'을 나타낸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금식 문제에 관한 기사에서 예수님은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새 옷을 더욱 찢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의 형식은 기독교와 유대교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새것과 낡은 것을 합치려는 시도는 어떠한 것이라도 둘 다 망치게 될 것이다.|② 요 21:11에서 어획과 관련하여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을 묘사한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③ 요 19:24(시 22:18 인용)에서 예수님의 옷을 `찢지' 않은 것을 묘사한다: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④ 마 27:51에서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병행구, 막 15:38; 눅 23:45).|예수님의 죽음은 성소의 안쪽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는 징조로 나타나 있는데, 이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것이었다(출 26:31-출 26:35; 출 40:21). 이것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감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게 된 것이다.|(참조: 히 6:19-히 6:20; 히 9:8; 히 10:19-히 10:20).|이 상징적 사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옛 제의가 종결되고 하나님께 이르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b) 스키조는 막 1:10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묘사한다. 하늘이 갈라진 것은 예수님의 세례(침례)의 특징으로 역사의 전환점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하나의 징조다.|(참조: 요 1:51; 행 7:56; 행 10:11; 행 22:1).|이것은 사 64:1의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를 암시하는 표현이다.||(c) 스키조는 사도행전에서 두 번 의견의 분열을 나타낸다. 그 한 경우는 이고니온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행 14:4).|다른 한 경우는 산헤드린과 관련된 것이다(행 23:7).||(d) 스키조는 마 27:51 후반절에서 쪼개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 J. Harris; C. Maurer).
쟁론
scivsma
쪼개기 split, 잡아 찢기 tear, 분열 divis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키스마(Aristot. 이래)는 스키조($4977)에서 유래했으며, 일반적으로 복수형태를 취하여 드물게 사용되며,||(a) `찢어진 것, 갈라지거나 터진 틈, 균열',|(b) 은유적으로 `분열, 불화, 분쟁', 따라서 `파벌, 도당'을 나타낸다.||#2. 신약성경의 용법||스키스마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스키스마는 마 9:16에서 `찢어진 것'이나 `찢어진 틈'을 의미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병행구, 막 2:21).||(b) 스키스마는 예수님을 인한 `논쟁'을 묘사한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세 가지 경우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①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것이다: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요 7:43).|②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기적적으로 고친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요 9:6).|③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다: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요 10:19).||(c) 스키스마는 고린도전서에서 분쟁(파벌의 경향)을 나타낸다. 주후 55년경 고린도 교회 내부에 언쟁(에리데스, 고전 1:11) 뿐 아니라 당을 짓는 경향(스키스마타, 고전 1:10; 고전11:18)이 생겨났다. 이것은 교리상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학적인 집단화 현상 또는 교회 지도자 중 다른 사람에 비해 어느 한 사람을 편애하는 것에 근거한 것이었을 것이다(참조: 고전1:12; 고전 3:4; 고전 11:17-고전 11:22, 고전 11:33-고전 11:34).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러한 분쟁은 한 주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부인하는 것이며(고전 1:10; 고전 1:13) 그들이 분쟁(스키스마)이 없는(고전 12:25) 한 몸의 지체(고전 12:12-고전 12:26)임을 부인하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M. J. Harris; C. Maurer).
노끈
scoinivon
줄, 끈 rop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코이니온(Hdt. 이래)은 스코이노스(%684: 골풀)의 지소사이며,||(a) 본래 '골풀로 만든 줄 또는 끈',|(b) 보편적으로 '줄, 끈'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코이니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b)의 의미로 사용되었다.||(a)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b) 행 27:32, "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비다
scolavzw
열중하다, 시간을 바치다, 비어있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스콜라조(Aeschyl., Thu. 이래)는 스콜레($4981: 틈, 여가, 논쟁, 토론)에서 유래했으며, '시간을 가지다,여가를 가지다'라는 의미에서||(a) 사람에 대하여, '바쁘다, 전념하다, 열중(몰두)하다, 헌신하다, 시간을 바치다'(Lucian.),||(b) 장소에 대해, '점유되어 있지 않다, 비어있다'(Plut.), 비어 있는 백부장의 직책에 대해(Eus. h.e. 77, 15), 교회 문헌에서 공석인 교회 직분들에 대해, 또한 직책이 없는 직무자들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참조: Soph.).||#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스콜라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온다.||(a) 마 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여기서 스콜라조는 집이 '비어 있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b)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스콜라조는 '기도에 시간을 바치거나 열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스콜레
scolhv
학교, 교습원 school.||#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스콜레(Pind. 이래)는 기본어이며,||(a) '일이 없음, 틈, 여가',|(b) 교사들과 생도가 만나는 장소인 '학교, 교습원'(Dionys., Isocr., Demosth., Plut.)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스콜레는 신약성경에서 행 19:9에 한번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구원
swvzw
구원하다 save, 해받지 않게 하다 keep from harm, 보존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a) 동사 소조(호머 이래로)는 일차적으로 '구원하다'(save)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신이나 사람이 심각한 위험에서 힘으로 구해내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위험은 전쟁 중이나(예: Homer, Ⅱ. 15, 290이하; Plato, Symp. 220b) 또는 바다에서(Homer, Od. 5; 130; Lucian, Dialogi Deorum 26, 2)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위험은 질병일 수도 있다(SIG3 Ⅱ620, 13이하; Ⅲ1173, 9). 이 경우 '치료하다'는 의미를 가진다.|전쟁이나 항해에 관해서 소조는 '지킨다, 보호한다'를 의미할 수도 있다.||(b) 소조는 '지키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생명을 지키는 것, 사면, 보호하는 것이나 궁핍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나 불로부터 지키는 것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포도주나 재물을 지키는 것, 턱수염을 보존(손상되지 않게)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c) 소조는 '이익을 주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건강이 좋다, 이익을 주다'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소테리아는 '안녕, 복지, 평화, 부요, (곡식이나 열매)의 성장, 건강'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d) 소조는 '내적 존재를 보존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내적 존재나 본질을 보존하는 것을 가리키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철학에서 이 단어는 특히 내적 건전이나 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에 대하여 사용되었다.||(e) 종교적 문맥 안에서 신들은 삶에 따르는 여러갖지 위험들로부터 인간들을 구한다. 이 신들은 인간들을 위협하는 악운을 쫓아낼 수 있는 구원자(→soter)요 보호자로 간주되었다.||(f)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신적 계시에 의해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참조: Corp. Herm. 1, 26; 1, 29; 7, 1이하).||(g) 신비 종교들에서 구원은 신비 제의의 행동을 통해 죽고 소생하는 신의 경험에 동참하는 전수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주후 4세기의 라틴 작가이며, 신 플라톤 주의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비 제의의 반대자였던 율리우스 휘르미쿠스 마테르누스(Julius Firmicus Maternus)는 "구원 받은 신성의 전수자들"에 대해 말했다. 이 전수자는 신적 본질에 참여하여 이렇게 해서 죽음을 초월한는 생명을 얻는다(Apul., Met. 11, 21). 세례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이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아주 신빙성이 없다. 적어도 이 관습이 사도 교회보다 훨씬 후기에 실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h) 철학과 종교 분야에서 소조(sozo)와 소테리아(soteria)는 '만물들에 대한 신적 보존'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저작(Leg. 10,903b)에서 이러한 종류의 질서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였다. 렙티스의 코르누투스(Cornutus of Leptis)에 의하면 제우스는 만물을 생성케하고 보존하는 자(소제타이[sozetai])라고 한다(Theologia Graeca 2[3, 9]). 주후 2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생명에 대한 보다 높은 신적 질서와 보존(소테리아[soteria])에 대한 삿ㅇ으로 자신의 정신을 위로하였다(Meditaions 10, 1, 3). 헬라 로마 시대, 즉 운명에 대한 신앙이 신적 조화의 신앙을 대신할 때에 신들의 소제인(sozein)은 불가사의한 재난으로부터 구원하고 지키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TDNT Ⅶ 969).||(i) 영지주의에 관한 기록은 후기 기독교의 연금술 문헌에 나타나 있는데, 이 문헌을 통해서 볼 때 영지주의자들은 지식(그노시스)이 인간을 구원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이 지식은 계시나 중개자에 의해 영지주의자들에게 전달되었다(Corp. Herm. 1, 26; 1, 29). 그 내용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간의 구원이다(Corp. Herm. 7, 11).||#2. 70인역본의 용법||소조는 70인역본에서 330여회 나타나며, 15개 히브리어의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동사는 주로 야샤와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약 150회 사용되었으며, 이 어군은 '구해내다, 구원하다, 돕다, 안전하게 하다, 구원, 구출, 구원행위'라는 의미를 가진다.|그 다음으로 말라트(니팔: 미끄러지다, 피하다; 피엘: 구해내다, 구원하다)의 역어로 약 43회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소조는 신약성경에서 108회 나오며, '구원하다,||(a) 육체적 생명의 구원.|소조는 육체적 생명에 대한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행 27:20; 행 27:31에서 소조는 바울의 난파에 대한 기사에 선원들을 구원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소조는 베드로의 외침에 나온다. 마 8:25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대목에서의 "주여 구원하소서"하고 울부짖는다.|마 14:30의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대목에서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는다.|소조는 많은 구절들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도 신적 구원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방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조종하였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29이하, 병행구. 마 27:39이하; 참조: 막 13:2; 막 14:58; 요 2:19).|눅 23:39에 의하면 그들은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조롱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음에 대해 부르짖은 예수님의 외치심을 듣고서 즉시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라고 말하였다.|요 12:27의 게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여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기도하셨다.|이 기도는 히 5:17에서 반영되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이 구절들에서 문제의 구원은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수난 사화에는 하나님께서 그런 구원을 능가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아래에서는 신학적 의미를 다룬다.||(b) 공관복음에서 ① 소조는 예수님의 치유의 이적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런 기사들에서 치유는 항상 전인(全人)에 대한 것이다. 개인의 믿음은 치유의 성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유효하게 만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눅 8:48; 눅 17:19; 눅 18:4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병행구. 막 5:34; 눅 8:48; 눅 7:50). 이 곳에서 소조는 '낫게하다', 악과 육체적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 기사에 대해 주석하면서 힐(D. Hill)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여인을 낫게 한 믿음은 자신의 실존과 행동에 비추어 예수님만이 자신의 상황을 처리하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하는 고백이다. 이 신뢰는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그녀의 질병을 추방하시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병을 고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지, 여인의 행동이나 믿음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이 치유 행위는 사도들의 행위로 계속되었다. 이 병고침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행 4:9이하).|치유에는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행 14:9이하에서 바울은 앉은뱅이를 고칠 때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했다.|약 5:15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② 소조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설명에 나타난다.|마 1:21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구원할 자이심이라"는 문구는 문자적으로 '구원할 것이다'이다.|예수님께서는 여호호수아의 형상으로도 나타나신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옛 이스라엘을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의 대행자이었는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자이시다.|막 8:35과 병행구, 마 16:25; 눅 9:24에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자기 → 십자가 Cross를 지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선언하셨다.|막 13:20의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어늘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는 말씀은 메시야적 환란에서 구출과 메시야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을 가리킨다.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인다. 예수님이 말씀은 법정 앞에 선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곳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사람은 석방될 것이며 반면에 '예수님과 복음'을 긍정하는 사람은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 생명의 약점을 완전히 통찰하셨으나 주님을 부정함으로 자신의 존재의 안전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를 하신다. 역설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자는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두 구절의 말씀, 곧 막 13:13(병행구, 마 10:22)의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은 의지(뜻)를 강조하고 있다(24절처럼). 결정은 항상 우리 인격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동사 소조는 위험에서 '구출함으로 구원한다'라는 뜻 뿐만 아니라 '안전한 상태에 보호한다'는 뜻을 포함한다.|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즉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무서운 어리석음이다. 그는 그의 의지에 의해 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런 자가 속세의 모든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의 목숨을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다(R.CH.Lenski).|소조는 막 10:26; 병행구, 눅 18:16(참조: 마 19:26)에서 낙타와 바늘 귀에 대한 말씀에 이어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병행구). "구원은 완전히 인간의 가능성들을 초월한다; 공로나 공적에 근거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다. 더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법칙도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행동에 의해 제한된 것이다"(W.L.Lane, Op. cit., 370).|그러나 눅 19:9이하에 보면이 구원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들을 통하여 현실적 사실이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b) 사도행전에서 소조는 13회 사용되었다. 원시 교회의 선포에서 소조(sozo)와 소테리아(oteria)가 → 복음 Gospel의 기초이며, 내용이며, 목표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상요됨으로써 그 단어들은 중요시되었다. 이 단어들은 예수님의 전도의 본질적 특징을 요약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행 4:12에서 베드로는 모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일 없음이니라"라고 선언하였다. 이 때에 베드로는 성전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 이름 Name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이유로 체포된 후에 변론하고 있었다(행 4:9이하; 참조: 행 3:6). 베드로는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일으키사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신" 종으로서의 예수님을 설교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행 3:26). 행 4:12에서 베드로는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는 절대적이고 우주적 요구라고 주장하였다. 먼저 유대인에게 전달되었고(행 13:26) 다음으로는 이방인에게 전달된(행 16:17등) 사도적 케리그마는 구원이 다른 모든 방법을 배제한다(행 13:38; 행 15:10이하). 왜냐하면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16:31). 신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은 죄의 용서와(행 10:43; 참조: 행 26:18)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존재한다.|사도행전에서 구원에 대한 진술들은 당면한 현재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구원은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요구와 함께 제공되었다(행 2:40). 미래 구원에 대한 언급은 욜 2:32(MT 욜 3:5)를 언급하고 있는 행 2:21에서 발견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 선지자는 종말을 언급하였고 따라서 이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종말이 이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엘이 말한 "이름"을 여호와의 이름이었던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 이 말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방법으로 예수님 안에서 몸소 현재하고 계신다(참조: C.Brown).||(c) 바울서신.|바울에게 있어서 소조는 분명히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만으로 제한하여 사용되었다. 바울이 다른 위험들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을 가리킬 때는 뤼오마이를 사용하였다. 구원의 대상은 프쉬케(: 목숨)이 아니라 인간의 전(全) 존재거나 프뉴마(: 영)이다(고전 5:5).|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메시지는 케리그마를 통해 인간들에게 전해졌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참조: 엡 1:13; 롬 1:16).|십자가의 도는 특히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고전 15:2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다(엡 2:8).|바울의 선교 활동의 목표는 구원이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바울은 복음 선포를 통해 가능한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자 하였다(롬 1:15; 롬 11:14; 고전 9:22; 고전 10:33; 살전 2:16; 참조: 도한 고전 7:16). 믿음을 통해 구원 받은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과 대조되었다(고전 1:18; 고후 2:15). 사도 바울은 구원이 인간들에게 제시되고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통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구원은 죄의 용서, 화해, 칭의와 달리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 롬 5:9, 롬 5:10에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과 "화목하는 것"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미래)와 구별된다.|고전 3:15의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와 고전 5:5의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구절들도 마찬가지이다.|그리고 마음으로 믿고,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롬 10:9; 롬 10:13)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살후 2:10). 따라서 구원은 분명히 포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롬 8:24의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테 갈 엘피디 에소데멘[te gar elpidi esothemen])"(NEB)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현재 구원과 미래 구원 간의 내적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였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최후의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를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더구나 마지막 판정도 그 때에 선고된다(고전 3:15; 고전 5:5; 참조: 고후 5:10).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운"(롬 13:11) 미래의 구원은 기독교인들이 지향해 나가는 목표이다. 현재의 모든 경고와 징계와 징벌은 우리가 이 종말론적 구원을 잃지 않아야 하는 목적 때문이다(참조: 고전 5:1-고전 5:13; 고전 9:24-고전 9:27; 고후 2:10).|그러므로 미래, 곧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참조: 빌 2:12).|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고 난 후에 이 미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롬 11:25이하). 이 궁극적이며 종말론적인 구원 때에(빌 2:12; 살전 5:8; 살후 2:13) 우리는 첫째로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게 되며(롬 5:9; 고전 3:15; 고전 5:5; 참조: 살전 1:10; 살전 5:9;→분노 anger) 둘째로는 하나님의 →영광 Glory(독사[doxa])을 부여받게 된다. 다음으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 형상 Image을 본받게 되며 태초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신자들을 택하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행위는 그 결말에 이르게 된다(참조: 롬 8:29; 살후 2:13).|목회 서신들에는 구원에 대한 언설들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그 언설들은 구원의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해 준다.||(d) 옥중서신에서 소조는 에베소서에서 2회 나온다.|엡 2:5에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그의 "은혜"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자발적인 것이다.|두번째로 강조되어 있는 것은 이 구원이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신약성경은 현재(고전 1:18; 고전 15:2; 고후 2:15), 혹은 미래의 경험(롬 5:9, 롬 5:10)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구원이란 현재의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죄의 실제 자체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으로부터의 분리, 혹은 무조건적 속죄로서의 구원에 대한 표현에는 완료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완성된 행위를 의미하며, 그 결과로 일어나는 계속적이고 영속적인 행위까지도 의미하게 된다(로빈슨).|엡 2:8에서는 5절에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사역(事役)이다.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것을 받은 인간 편에서 하는 일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로서 규정지을 수 있을 뿐이다(롬 3:22; 롬 3:25; 갈 2:16; 벧전 1:5 등). (참조: F.Foulkes).|목회서신에서 소조는 7회 나타나며, 구원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해 준다.|① 하나님께서는 만인 구원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지식 Knowledge)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② 예수님의 임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딤전 1:15). 이 고백 언설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 간증으로 강조된다. 즉 자신ㄴ이 은혜의 구원하는 능력을 경험하였고,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하는 간증이다.|③ 구원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수많은 구절들에서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딤후 1:9).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역사하는 이 부르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딛 3:5에서도 우리의 행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심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에서 구원은 세례(침례)와 성령을 통한 삶의 갱신과 연결된다.|④ 딤후 4:18에는 장차 임할 구원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주님의 왕국 안으로 구조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이곳에서 왕국은 에프라니온: 하늘의로 칭해지니 곧 종말론적인 나라이다). 딤후 2:10에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이니 곧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딤전 4:16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청중들에게 그가 가르침과 생활엣 단련된 신실성을 나타낸다면,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마랗고 있다. 딤전 2:15에서 바울은 여인들이 어머니로서의 정절을 잃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부권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기 위해서 혹은 육체에 대해 멸시하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또한 13절 이하의 이와에 관한 언급을 고려하여, 창 2:3, 창 2:16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 쓰여진 것 같기도 하다.||(e) 공동서신에서 소조는 9회 나타난다. 베드로전서에서 소조는 벧전 3:21과 벧전 4:18에만 나온다. 벧전 3:21에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세례(침례)로 표현한다. 세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지배를 당하는 사망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구원한다고 한다. 이 의미에 있어서 세례는 노아와 그 가족을 "물로 말미암아"(벧전 3:20) 구원함에 대한 원형(antitype)이다.|벧전 4:18은 잠 11:30의 인용이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칭의된 죄인이 심판을 통하여 불가피한 고통과 손실을 겪으며 어렵게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태도와 생활의 악한 행위에서 이중적으로 잘못된 불경건한 죄인들의 종말은 어떠하겠는가? 여기서 구원은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참조: A.M.Stibbs).|벧후 3:15에서 독자들은 재림이 지연되는 주요 이유인 하나님의 참으심을 그들의 최후 구원의 동기로 받아들이라고 권고받는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그들이 성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궁극적 구원은 보장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종말론과 윤리학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야고보서에서 오직 동사 소조만 5회 나오며, 언제나 최후 심판 때의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약 5:15의 경우는 예외이며, 맨 앞에서 다루었다.|유다서에서 소조는 2회 나오는데 유 1:5에는 출애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그러나 유 1:23에서는 그 기반을 현재 여기에 두고 있는 심판 때의 구원이 다루어져 있다: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f) 히브리서에서 소조는 2회 나온다. 히 5:7에서 소조는 하나님 아버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7:25에서 소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중개자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초림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희생 제물의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미래적 구원 활동을 위한 기초를 구축하셨다. 영원히 사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g) 요한의 기록에서 소조는 요한복음에서 56회 나오며, 요한 서신과 계시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으메서 4회는 구원의 행위를 전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요 3:17과 요 12:47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심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요 5:34에서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 대해 적용되고 요 10:9에서는 신자들에게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구원의 중보자이시다.|그리고 2회(요 11:12; 요 12:27)는 육체적이며 감정적인 위급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낸다.|신약성경 1(a)를 참조.|(참조: J. H. Thayer; W. Foerster; C. Brown; J. Schneider)

sw'ma
몸 bod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소마(Homer 이래)는 소스(%1057: 온전한 entire)에서 유래한 것 같으며, 혹자들은 어근 sla, sko(덮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a) '사람이나 동물의 죽은 육체, 시체'(Homer),|(b) '사람이나 동물의 살아있는 몸, 인체의 몸통, 온몸'(Hes.),|(c) 확대된 '전인'(The whole person),|(d) '노예들'(복수 소마타)(Herodos),|(e) 식물들의 몸(Apollon. paradox 7; Aristot.),|(f) 하늘의 천체들(ps-Aristot., De mundo 2)|(g) 신체라는 의미와 일치하는 요소(element), '형태, 모습'(소크라테스 이전 작가들) 등을 의미한다.|(h) 몸의 개념과 병행하여 영혼의 개념이 발달함에 따라 몸을 사슬 또는 무덤으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멸망하는 것은 불멸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 개념들은 플라톤에게서 더욱 발전되었다. 곧 몸은 단지 선재한 영혼의 거처에 불과하며 죽음은 영혼을 몸으로부터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다(Phdr., 64c. 67a; Grg. 524b). 몸이라는 상징은 우주(cosmos)에도 적용되었다. 우주는 신의 영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지도를 받는다. 제우스(Zeus)는 모든 것을 자신 안에 감추어 놓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하게 했다(Orphicorum Fragmenta 21a). 이와 유사하게 사람도 소우주(microcosm)로 대표될 수 있다(Dem., Frag. 34; Diels-Kranz Ⅱ, 153, 8, 12 이하).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이 우선이며 몸에 의하여 영혼은 특별한 것이 된다고 주장했다(An.). 따라서 육체와 영혼의 결속은 분리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국가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기적 조직체라는 의미로 소마를 사용하였다(Pol.).|스토아 철학자들은 몸과 정신의 전통적 이분법(dichotomy)을 계속 주장하였다. 엄밀히 말하여 에픽테투스(Epictetus)는 몸(body)이라기보다는 육(살 Flesh)과 영혼을 구분했다. 영혼은 생기를 주는 본질(animating principle)로서 그 위치는 마음도 되고 머리도 될 수 있다(Cleathes, 참조: TDNT Ⅶ 1033). 영혼은 몸 전체에 속속들이 침투하여 그 감각을 인상에 전달한다. 그러나 소마에 있어서 전체라는 기본 개념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스토아 철학자이며 황제인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까지도 인간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너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몸(body)과 프뉴마(영, 영혼)와 누스(마음, 이성)이다'(참조: M. Polhlenz, Die Stoa). 신 플라톤 사상과 더불어 이 사상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몸을 영혼(soul)과 반대되는 것으로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참조: TDNT Ⅶ 1042 이하).||#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소마는 70인역본에서 약 130회 이상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바사르(살, 드물게 친족, 몸), 네벨라(시체), 아람어 게솀(몸)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몸(민 8:7; 레 15:11; 레15:16; 레 15:19 등), 전인간(욥 7:5), 성기(레 6:3; 레 15:2 이하), 시체(왕상 13:22 이하)' 등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소마는 신약성경에서142회 나오며, 바울 서신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약 90회), 베드로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각각 1회씩 사용되었다. 나머지는 사복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에 고루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 소마는 구약 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넓은 범위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a) 소마는 인간과 동물의 몸을 의미한다.|(1) ① 소마는 '죽은 몸, 즉 시체'를 의미한다, 눅 17:37; 마 27:52; 마 14:12; 막 15:45; 행 9:40; 요 19:31; 마 27:58 이하; 눅 23:52; 눅 23:55; 요 19:38; 요 19:40; 요 20:12; 유 1:9.|② 제물로 드린 동물의 몸, 히 13:11.|③ 죽은 몸이 살아날 수 있다는 사상은 "성전된 자기 육체"(나오스 투 소마토스 아우투)(요 2:21)라는 표현 배후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요한의 저술에는 소마가 죽은 몸, 종(slave)을 의미하지는 않는데 이 경우만 그렇게 적용한 것이다(참조: 계 18:13).||(2) 소마는 '살아있는 몸'을 의미한다.|① 약 3:3에서 '동물의 몸'을 의미한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② 눅 11:34; 눅 12:23; 고전 6:13 등에서 '사람의 몸'을 의미한다.|③ 히 13:3에서 몸은 고생을 수반하는 지상의 삶을 함축한다: "자기도 함께 갇힌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④ 고전 5:3; 고전 7:34에서 '몸인 육체'라는 의미로 '영혼의 도구'임을 나타낸다.|-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 7:34,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⑤ 살전 5:23에서만 바울은 그 당시에 통용하던(예배?) 언어에 따라 사람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는 방식으로 언급한다: "또 너희 온 영(프뉴마)과 혼(프쉬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⑥ 롬 12:4 이하와 고전 12:12-26에서 몸을 그 여러 지체들과 결부시키고 있는 묘사를 채택하고 있다.|⑦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타 스티그마타 투 예수)은 예수님을 섬김으로 받은 상처 자국으로 해석해야 한다(갈 6:17; 참조: 고후 12:24 이하; 갈 2:20). 이 흔적과 할례로 인하여 생긴 흔적을 은연 중에 대조하고 있는 것 같다. 갈라디아서의 주목적은 갈라디아 교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할례당의 여러 주장들을 논박하는 것이다.|⑧ 고전 9:27에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다. 절제와 목표를 향한 투신의 필요성을 운동 세계에서 끌어온 비유를 통하여 강조한다.|⑨ 고전 13:3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몸을 불사르게 한다는 것은 순교를 의미한다. 화형시키는 순교는 네로(Nero) 이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참조: Tacitus, Ann., 15, 44) 안티오쿠스(Antiochus) 치하에서는 순교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언어가 사용되었다(마카베오이서 7:37; 마카베오사서 18:3; 참조: 단 3:6).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한 것이라는 자기 희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참조: Berrett).|⑩ 히 10:10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을 성전 희생 제사과 대조한다. 이 구절은 시 40:6 이하의 사상을 채택한 것이다. 히 10:5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는 시 40:6의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에 대한 해석적 주해로 여겨진다.|브루스(F. F. Bruce)는 히 10:5의 번역을 해석적 의역(意譯)으로 본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그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의 이 시편 기자의 순종을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이 말씀을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순종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 이 개념을 확대한다(히 10:5; 히 10:10).|이 구절에서 몸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아마도 벧전 2:24의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를 제외하고는 그 외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것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구절들에서 몸은 단지 예수님의 육체적인 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드리신 것까지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희생 제사에 있어서 단순히 짐승들의 물질적 몸 뿐인 것과는 대조된다.||(3) 소마의 복수 소마타는 '노예들' slaves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계 18:13에서 한번 이 의미로 나온다: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4) 롬 4:19(아브라함의 몸은 "죽은 것 같았"다)과 고전 7:4(아내와 남편은 각기 서로의 몸을 주장한다)에서 몸은 성(sex)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간음에 대한 경고(롬 1:24; 고전 6:13-20)는 이 구절들에서 단순히 육적인 의미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육체의 행위는 단지 사람이 범하는 죄에 영향을 미칠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에 속하는 전 인격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바울의 질문에 의해 지지된다(고전 6:15; 고전 6:19 이하).||(5)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는 인간이라는 특수화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존재는-심지어 프뉴마(영 spirit)의 영역에 있어서까지-소마적(somatic)인 존재이다.|① 롬 6:12과 롬 12:1과 같은 문구는 소마가 단지 외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참조: R. Bultmann).|② 몸은 말하자면 사람의 본질적 자아 또는 영혼에 추가된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사람은 소마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곧 소마다"(R. Bultmann). 소마는 하나의 전인(全人),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소마는 행위 객체로서의 인간으로도, 또한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한 실례를 들자면 고전 9:27에 나오는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루어 복종시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의 몸을 거칠게 다룬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거칠게 다룬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 하나님을 섬김으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다(롬 12:1).|③ 롬 8:13에서 바울은 그의 처신에서 단 한번 소마가 행위의 주체라고 언급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몸의 행위(육신을 따라 사는 것과 동일시 되어 있다. 롬 8:12; 참조: 롬 8:5 이하)는 몸으로 하는 행동임을 시사한다. 이곳에서 몸은 자아, 곧 죄악된 인성(人性)을 가진 "나"와 동등하다. 이와 동일한 사상이 몸과 욕망(desire)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곧 기독교인은 죄의 권능에 의해 지배받기도 하는 몸의 사욕(desire)들에게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롬 6:12). 몸의 사욕과 육체의 소욕은 동의어이다(갈 5:16 이하; 갈 5:24).|④ 롬 7:14에서 바울은 소마를 '나(I), 인격(person)' 그리고 '사르크스(살 flesh)'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는 육신(사르키노스)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몸은 정욕(desire)과 순종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죄의 몸"(롬 6:6)과 "죄 있는 육신"(롬 8:3)은 차이가 없다. 바울이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 7:24)하고 외칠 때 그는 산산이 부수어진 인간의 인격(character)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 표현을 몸(body)에 대하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육체 안에 죄의 권세가 있음을 보았으며 또한 멸망이나 생명을 의미하는 육체와 영이 있음을 보았다. 인간의 육체가 본래 선이나 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현된 구체적인 존재 영역인 것이다.|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몸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유대의 인간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생명은 오직 몸 안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헬라 인간론의 원리에 따라 인간을 영혼과 몸으로 구분하는 어떠한 구분도 하지 않고 있다(참조: 고후 5:1-10). 부활에 대한 이 강화에서 바울은 지상의 몸, 또는 "육의 몸"을(고전 15:44, 소마 프쉬키콘)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과 대립 관계에 둔다. 이것들은 인간 앞에 놓여 있는 두 가지 가능성들이다. 전자는 인간의 지상 존재를 대표하는 것이며 후자는 부활 이후의 생명을 대표한다. 이 표상(image)들이 시간과 공간의 용어들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신령한 몸이 물질적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의 목적은 인간의 본질적 존재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본질적 존재는 역시 공간과 시간을 나타내는 용어를 이중으로 사용하여 몸 안에 있는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나', '인격'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하여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ㅔ 형테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 15:38; 고전 15:42; 고전 15:44). 지상의 몸과 하늘의 몸의 연속성은 변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은 "신령한 몸"(고전 15:44)에 대한 자신의 개념에서 시간적인 면을 강조했을 것이며 그러면 프뉴마의 본질을 이루는 몸에 사상이 속한 것이다.|그러나 바울은 하늘의 소마를 구성하는 영적 본질에 대한 묘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권능인 성령을 통해 이 소마를 결정하신다는 사실에 있다(참조: 고전 15:50). 따라서 부활 후에는 이 소마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이것은 더 이상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바울이 고전 13:13에서 발전시키고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한 이해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지상 존재는 역설적인 모순으로 특징 지워진다(고전 13:3).|이생에 있어서 모순되거나 단편적이지 않은 단 한 가지는 현재와 동시에 장차 올 세상에서도 완전한 사랑 뿐이다. 바울은 지상의 몸과 하늘의 몸 사이의 연속성을 이러한 개념들로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의 인격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의 인격은 그 자신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인 것이다.||(b) 소마는 '식물들의 몸'과 '천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고전 15:37에서 '식물들의 몸'에 대해 언급한다: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② 고전 15:40 이하에서 하늘의 몸들에 대해 언급한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바울은 여기서 하늘에 속한 형체, 하늘의 몸들, 즉 하늘의 발광체들 및 천사들의 몸과 땅에 속한 형체, 지상의 몸들(인간, 동물, 식물의 몸)을 구별한다.||(c) 소마는 골 2:17에서 그림자와 대조하여 그림자를 던지는 몸 즉 사물 그 자체(실물)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d) 소마는 집단이나 단체, 이 의미로 교회에 대해 사용되었다.|(1) ① 바울은 소마 크리스투(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말한다(고전 12:27; 롬 12:5; 엡 4:12 등). 바울은 기독 교회의 본질적인 특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몸이라는 상징을 사용한다. 고전 12:12-30에서 바울은 여러 다른 지체들이 가진 다른 기능들의 필요함을 몸의 통일성에다 근거를 둔 헬라의 조직체 사상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참조: 고전 12:14-26). 그러나 기본적인 특징이 헬라적 상징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지체들이 전체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체들의 여러 다른 기능들에 있어서 이들의 단체적 성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여러 지체들의 과제다. 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② 세례(침례)로 인한 결합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몸이 공동체(교회) 그 자체를 구성하며 또한 입교 의식(세례)에 의하여 성장하는 공동체의 산물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의 한 지체인 개개인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을 주심이 세례(침례)와 연관되어 있다(고전 12:13). 교회는 종말론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한다.|③ 주의 만찬은 몸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다(막 14:22-25; 마 26:26-29; 눅 22;19 이하; 고전 10:16 이하; 고전 11:23-26).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설교에서 이교도의 여러 관습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주의 만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죽으심은 "너희를 위한" 명백한 구원 행위이며 주의 만찬에 의해 그렇게 선포된다(고전 11:26). 여기에는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나 또는 물질이 중심인 것이 아니라 주의 만찬이 그리스도의 축복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는 그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임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제(fellowship) 행위가 중심이다. 주의 몸과 피를 범한다는 것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거스리는 행위를 의미한다(고전 11:27).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에 분명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확실한 표적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내어 주셨다라고 선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상징이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2)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다른 바울 서신들과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상징을 말한다. 골 1:15-20의 찬양에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해석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천지 만물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노래하는 하나의 가사를 인용한다. 첫째 소절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시는 대리자라 일컫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자로서의 자기의 뜻 가운데서 스스로 나타나신다(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 계 3:14 참조).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또한 모든 천사들과 보이지 않는 세력들(보좌들 등. 요 1:3; 히 1:2 참조)도 역시 창조하셨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 즉 우주적 유기체의 근원이요 유지자요 조종자로 지칭되신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관련시켜 설명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여기서 이 우주적 상호 관계는 이미 목표에 다다랐다: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그리스도를 세상의 머리로 생각하는 사상은 이러한 관련 속에서 골 1:18의 교회에 대한 언급에 의해 정확하게 주장되어 있다. 그의 몸은 교회이며 이 교회에서는 세상에서 몸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이러한 복종을 명한다. 만일 이곳의 상징적 개념들이 옳게 해석된다면 교회와 세상은 영원히 반대 관계에 놓여진 두 개의 고정된 큰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실재적인 여러 가능성을 깨닫고 실현시키는 것, 즉 세상에서 살아갈 믿음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골로새서와는 대조적으로 에베소서에서는 처음부터 몸의 개념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시다.|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는 것은 방어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바울 이후의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제시해 주기 위하여 다시 사용된다. 고전 12장에 나오는 여러 가르침 중에서 조화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이제는 머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지도적 지위는 주권과 동시에 약속 모두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 교회를 거짓 교훈과 분열로부터 보존하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이 사랑과 진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도적인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영(refleclion)으로써 나타내어야 한다. '여기에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하나는 조화와 사랑이 있는 몸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각각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 교회에는 명령받은 것을 말하고 행하는 가운데 즉 진리 가운데서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룬다. 또한 모든 미혹에 빠져서 주관적 견해들의 독단적인 주장도 있다'. 교회는 세상에 그 소재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향하여 나아가시는 교회임이 분명하다. 교회에서 하는 복음 전파는 우주적 불안에 대한 답변이다"(E. Schweizer, TDNT Ⅶ, 1080).|(참조: E. Schweizwe; S. Wibbing;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