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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를 대접하는
filovxeno"
낯선 사람(손님)을 사랑하는, 환대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필록세노스(Homer. 이래)는 필로스($5384: 가장 사랑하는, 친절한)와 크세노스($3581: 외국의, 외국인, 손님)에서 유래했으며, '낯선 사람(손님)을 사랑하는, 환대하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필록세노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목회서신과 베드로전서에만 사용되었다.|손 대접하는 일은 전체 교회에서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벧전 4:9), 특히 목회서신에서는 어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영접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감독만의 일이 아니다(딤전 3:2; 딛 1:8). 과부에게 조차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권면이 주어졌다(참조: 딤전 5:10).|(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Bietenhard).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filoprwteuvw
첫째가 되기를 원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필로프로튜오(Plut.)는 필로프로토스(%660: 첫째이기를 좋아하는)에서 유래했으며, '첫째가 되기를 원하다, 지도자가 되기를 좋아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필로프로튜오는 신약성경에서 요삼 1:9에 한번 나온다: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fivlo"
친구 frie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필로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a) 형용사로 '사랑받는, 친애하는, 사랑하는, 친절한, 친구다운, 애정 깊은'(Homer).||(b) 실명사로 '친구' friend.|① 문자적 의미(Plut., Mor.),|② 특별한 의미(제우스의 필로스라는 표현 등, Hdt., Piod.).||(c) 여성형 필레(%1014), (여성) 친구(X., Mem.)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필로스는 70인역본에서 약 180회 나오며, 주로 레아(7453: 친구, 신 13:7; 욥 2:11; 잠 3:29; 잠 6:1; 잠 6:3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아헤브(157: 사랑하다, 분사, 친구, 에 5:10; 에 5:14; 에 6:13; 렘 20:4; 렘 20:6), 메레아(4828: 친구, 동료, 삿 14:20; 삿 15:2; 삿 15:6), 샬롬(친한, 친구, 렘 20:10), 알루프(441: 친한, 친구, 잠 16:28; 잠 17:9), 하바르(2269: 친구, 동무, 단 2:17; 단 2:18)의 역어로 사용되어, '친구, 동무'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필로스는 신약성경에서 2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누가의 기록에서 필로스(와 필레).|① 누가는 눅 7:34의 노래에서만을 제외하고 예수님을 결코 필로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단어의 사용을 자제한다. 거의 항상 누가는 이 단어를 일상적인 세속 언어의 범주 내에서 사용한다. 단 세 번의 경우, 즉 눅 12:4; 눅 16:9; 행 27:3에서만이 특별한 신약성경 용법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대부분의 구절에서도 다소간의 신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필로스는 '친밀하거나 잘 아는 자'로서의 친구이다. 이 단어는 대개 복수형으로 나온다. 눅 14:12; 눅 15:6; 눅 15:29; 눅 21:16과 행 19:31에서 그렇다.|행 19:31에서 아시아 관원들은 바울이 잘 아는 사람들이다. 눅 7:34과 병행구의 친구(booncompanion)는 이 일반적인 용법의 특별한 형태이다. 눅 15:29도 참조하라.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오히려 '청년 시절의 친구'라는 의미가 있다.|누가는 이 단어를 '친밀한 사적 친구'(눅 11:5; 눅 11:8; 눅 23:12), '손님'(눅 11:6), 지도자 주위에 모이는 친구들 무리의 일원(눅 7:6; 행 10:24; 또한 행 16:39Cod. D)에 대해 사용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누가만이 필로스를 두 개의 연관성 깊은 용어들, 즉 슁게네스 및 게이톤과 결합시킨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필로스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행 10:24("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과 눅 15:6("그 벗과 이웃")이 그 예이다. 또 눅 15:9의 필레를 참조하라: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눅 15:9). 게다가 누가는 문체상으로 네 부류의 무리를 기술하기를 즐겨하는데, 눅 14:12; 눅 12:16에서 그러한 무리에 필로스를 둔다.||② 눅 14:12의 규칙에서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고대의 관습에 공공연히 대조된다. 고대의 관습에서는 모든 것이 호혜주의의 원리에 기초하나,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배척하신다: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눅 14:12b).|마 5:46 이하와 그 병행구들에 나오는 말씀들도 눅 14:12의 규칙에 정확히 일치한다. 몇몇 증거들은(%1015와 코이네 본문)는 마 5:47에서 아델푸스 대신에 필루스라고 읽는다. 대구법에 의하면 호이 필로이 휘몬은 아가폰테스 휘마스("너희를 사랑하는 자", 마 5:46)에 상응한다. 그리고 마 5:46에서 처음과 나중의 아가판이 서로 상응하듯이, 마 5:47에서 필론 에이나이와 아스파제스다이는 서로 상응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며, 모든 시대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겨온 우정과 사랑의 배타적 장벽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무너뜨리시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5:42-48과 병행구 및 눅 14:12-14과 함께 눅 14:21-23과 특히 눅 10:27-37).|눅 14:12에서도 우정(friendship)과 식탁 교제(fellowship)가 상호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눅 15:29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맏형이 들었을 때 그는 즉시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가 비록 원했으나 한번도 친구들을 위하여 열지 못한 그 잔치는 친교와 화해를 뜻하는 아버지의 잔치의 세속적 대응물이다.|눅 15:6; 눅 15:9에서 잃어비린 양을 찾은 행운아가 벗들을 불러 모은 것도 역시 잔치를 열기 위해서이다. 눅 7:34과 병행구에서는 비록 나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동일한 문맥과 사상을 보여준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이 악명 높은 죄인들과 함께 상에 앉는 사실이 그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의 특별한 근거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받으신다. 눅 7:37-50에서 보면 죄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입맞추는데, 이것은 감사를 나타내는 사랑의 표현이다. 우정과 식탁 친교의 밀접한 관계는 매우 일찍이 손대접에서 볼 수 있다.|이것은 눅 11:5-8에서 비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필로스가 4회 나오며, 3회는 거의 '선한 이웃'이라는 의미로(눅 11:5; 눅 11:8), 한 번은 환대의 개념에 매우 근접하는 '손님'의 의미로(눅 11:6) 나온다. 환대의 두 관계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한다. 이웃이자 주인으로서 친구는 한 친구를 위하여 쓸모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계는 적용, 즉 친구는 간청할 수 있고 또 친구는 간청 받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눅 11:1-13) 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③ 기쁨은 우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친구는 즐거운 일에 초대된다(눅 15:6; 눅 15:9; 눅 15:29). 하지만 이와 반대되는 일, 즉 친구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특히 그것이 역경일 때-이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눅 12:4). 우정은 봉사, 관심, 희생, 심지어 생명 그 자체까지도 바치는 희생을 의미한다. 눅 11:5-8에 나오는 간청하고 간청 받는 친구의 비유는 이것을 분명히 한다. 환대의 견지에서든 친절(neighbourliness)의 견지에서든 친구는 폐가 될 때에라도 친구로부터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벗들은 분명 직무를 행하고 있다(눅 7:6). 반대로 백부장 고넬료는 그의 삶 가운데 최고의 경험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그에게 왔을 때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행 10:24).|누가의 주목할만한 기록에 따르면 바울의 친구인 에베소의 아시아 관원들은 아시아 지방의 이교 대제사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친구의 생명을 구하고자 개입하였다(행 19:31).|이곳과 아마도 행 27:3에서만 바울의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다.|누가는 한 번, 행 9:25에서 바울의 마데타이를 언급하는데, 이들은 아마도 (젊은)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밖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 제자들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은 필로스나 마데테스 같은 용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아델포스나 테크논을 사용한다. 바울이 자기 주변애 모여든 큰 무리의 친구들 가운데 우두머리였다는 사실은 누가의 기록으로부터 유추된다.|행 27:3에서 바울의 친구들은 누가의 어법이 지적해 주는 바와 같이 바울을 대접한 시돈 사람들도, 바울이 시돈에 머무르는 동안 우호적으로 돌보아주었던 그의 개인적 친구들도 아니다. 오히려 이 친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사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핀 자들이다(예: 고후 11:9; 빌 4:10; 빌 4;16; 빌 4:18).|신자들을 가리킬 때 "친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누가의 기록에서 뿐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나타난다(요 11:11; 요 15:13 이하). 친구라는 단어는 첫 제자들이 사용한 것 같은데 예수님의 친구이며, 피차간에 친구인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친구들이며, 하나님 가족의 일원들이기도 하다. 만약 그 단어의 기존 용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그 단어는 행 2:44 이하에 묘사되어 있는 바와 같은 초대 교회의 생활을 표현하게 된다.||④ 누가복음에서는 우정의 다양한 긍정적 측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발견된다. 누가복음에서 '메시야 화'에 관한 주제에서 부모와 자식과 형제의 사랑이 거꾸로 미움으로 바뀔 뿐만 아니라(참조: 막 13:12과 마 10:21) 친구가 원수로 변한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 이하). 이 역전의 주제는 그 자체로는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생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시의 이교 사상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도 친구의 신뢰할 수 없음에 대한 염려와 경고와 불평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⑤ 예수님은 눅 12:4에서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필로이)이라고 부르신다. 여기서 필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가족에 대한 비유의 하나이다. 여기서의 친구 관계는 동등한 친구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학생 사이의 친분으로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장래 과업과 운명에 대해 가르치고 계신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장래의 일과 운명에 대해 알려주실 때 필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눅 12:4 이하; 참조: 요 14:26).||⑥ 몇몇 비유와 비교에서 하나님이 사람들, 특히 제자들의 친구라는 사상이 암시된다. 비록 눅 11:5-8의 비유는 참된 친구라면 자기 친구의 요청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을진대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신속하게 응하시겠느냐로 결론을 맺지만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시고 진정 요청 받기를 원하시는 가장 좋으신 친구라는 사상이 여전히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친구들이라는 상응하는 사상을 가진다.|동일한 개념이 눅 14:11의 비유에서도 암시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구들을 높이시는 종말론적 연회의 주(Lord)요 호스트이시다(눅 14:10). 아마도 눅 16:9의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친구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아가페)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친구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초대 공동체는 마 11:19과 병행구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에서 '죄인들을 위한 그의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죄인의 친구로 만드시는 그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반포된 수수께끼'라는 통찰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보았다.||(b) 요한의 기록에서 필로스.|신약성경에서 요한만이 필로스를 특별한 "신랑의 친구", '최상의 사람'이라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요 3:29). 이것은 세례(침례) 요한에 대한 은유로서 예수님과 요한의 친밀한 관계 및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사심없는 복종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이 최상의 사람의 임무는 가장 비이기적인 우정(친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많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요한은 친구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누가와 놀랄만큼 유사하다. 우정과 기쁨의 밀접한 연관성은 신랑 친구의 모습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요 3:29).|우정(친교)와 식탁 교제 간의 연관성이 또한 베다니의 가정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눅 10:38-42; 요 12:1-8). 누가는 결코 그 오라비와 누이들을 예수님의 필로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요한은 종종 그들과 예수님간의 친교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한다(요 11:3; 요 11:5; 요 11:11; 요 11:36). 여기서 동사 필레오(요 11:3와 요 11:36)를 사용함으로 개인적 친밀함을 보여주는 한편, 요 11:11의 "우리 친구 나사로"라는 표현은 제자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요 11:11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을 "친구들"이라고 불렀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친구로서의 그들의 지위는(요 15:13-16) 예수님의 선택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예수님은 그의 둘로이(종들)를 필로이(친구들)의 상태로 높이셨으니, 이것은 퀴리오스(주님)의 자유로운 선택이 의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친구들을 택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들을 택하신다. 예수님의 엔텔레스다이(%1016)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요 15:14), 이것이 두 대등한 존재 사이의 우정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매우 뚜렷하게 밝혀준다. 그는 여전히 퀴리오스이시다. 그러나 그의 엔톨레($1785: 계명)는 그가 친히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사랑(참조: 요 15:17)의 계명으로 정의된다(참조: 요 15:10).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그들의 동류로 만드신다. 이것이 바로 요 15;15 하반절의 요점이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다른 곳에서도 역시 제한 없이 자신을 함께 나누는 일은 진정한 우정의 표시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똑같이 행해야만 하며, 특히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된 사랑(참조: 요 15:10) 안에서 그리해야 한다(요 15:13, 참조: 요일 3:16).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말씀에서 아마도 요한은 우정에 관한 고대의 법칙을 성경적 언어로 표현하여, 그것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에 적용하고, 또한 제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정의 법칙은 요한이 단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하는 대속에 관한 신약성경 사상에 기여한다(요일 3:1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와 같이 친구(혹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요구는 이미 기본적으로 요 15:12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고한 사랑에 관한 이 말씀(요 15:13)은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이 친구에 관한 말씀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은 구원론적인 의미이고 그 다음은 권고의 의미를 지닌다.|누가와 마찬가지로 요한은 필로이를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자기 칭호로 사용하는데 익숙하다.|요한삼서는 친구들의 서로간의 인사로 끝맺는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요삼 1:15). 여기서 친구들, 즉 예수님에 대한 관계로 인해 친구가 된 동료 신자들간의 상호 위로를 권면한다.|요 19:12에서는 필로스(한글 개역, "충신")가 정치적 용어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왕궁 직위와 연관되지만 이 비난은 빌라도와 황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판단을 표현하는 것이지, 빌라도가 그 직위를 외면한다는데 대한 것은 아니다.||(c) 야고보서에서 필로스.|약 4:4에서 세상과 친구되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언급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2:23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이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표현의 근거는 헬라나 이집트의 용법이 아니라 구약의 용법이다. 창 15:6과의 연관성은 "하나님의 친구"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과 연결시키며, "칭함을 받았다"는 수동태는 벗의 칭호를 주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참조: C. Brown; G. Stahlin; Walter Bauer; J. H. Thayer).
철학
filosofiva
지혜에 대한 사랑, 철학||#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필로소피아(Pla., Isocr., Philo)는 필로소포스($5386: 철학자)에서 유래했으며, '지혜에 대한 사랑이나 추구' the love or pursuit of wisdom, '철학' philosophy를 의미한다. 헬라 문헌에서 이 단어는 어떤 기예나 학문이나 지식에 대한 열정, 혹은 숙련성에 대해 사용되었다.|헬라니즘의 철학에 있어서 필로소피아는 거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의 목표는 행복이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필로소피아는 70인역본에서 외경 마카베오사서에만 5회 나온다(1:1; 5:10; 5:22; 7:9; 7:21). 필로에서 필로소피아는 종교와 같은 뜻이다. 그는 모세의 율법을 '조상의 철학'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구원의 길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모든 유대인들을 철학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Mar. Nom. 39).|요세푸스에서 유대종교와 철학은 동일하다. 따라서 그는 그 사회의 세가지 철학종파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를 제시했다(War 2,119; Ant. 18).|철학과 유대종교는 마카베오사서에서도 동일시된다. 전제군주 안디오쿠스는 유대주의를 "앞뒤가 뒤 바뀐 엉터리 철학"이라고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마카베오사서 5:10). 이와 반대로 순교자들은 "신의 철학"(마카베오사서 7:9)의 표본들로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필로소피아는 신약성경에서 골 2:8에 한번 나온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이 필로소피아의 특수한 성질은 동격인 카타 타 스토이케이아 투 코스무("세상의 초보학문을 따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로서 특징 지워져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초등학문은 이 골로새 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소 아시아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여기에서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세계 법칙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철학적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Being)의 자연적 구성 요소들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능력들(골 2:18)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고정된 개념아래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다. 이 철학을 대표하는 관점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은 세상의 이러한 요소들의 단일성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초등학문의 체현(embodiment)이라는 것이다.|종교적, 역사적 배경은 영지주의화된 유대교일파에 있다. 이 일파의 사상에서는 유대와 이란-페르샤 사상과 그리고 아마 갈대아 점성학까지도 밀접하게 엮어져 있었으며, 기독교와 결합되어 있었다. 특히 이란의 사상에는 우주의 요소들로 구성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어떤 신(a divinity)에 관한 신화가 존재한다.|그러므로 이 골로새 철학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 행위의 완성을 구하지 않고 이러한 세상의 초등학문의 완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논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골 2:8의 철학에 관한 경고는 헬라 고전 철학에 대한 언급도, 헬레니즘의 학문철학을 말한 것도 아니며, 영지주의에서 표현된 공통적인 사변적 교리에 관한 언급이다.|성경은 철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철학의 자기 평가에 대한 오류를 거부한다(H. Weigelt).
철학자
filovsofo"
철학자 philosophe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필로소포스(Xin., Pla. 이래)는 필로스($5384: 가장 사랑하는, 친절한)와 소포스($4680: 숙련된, 능숙한, 지혜로운)에서 유래했으며, '철학자, 지혜 또는 학문의 추구에 열중하는 자'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필로소포스는 4회 나오며, 단 1:20에서 아람어 아샤프(술객, 마술사)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문맥으로 보아 분명히 '마술사'를 가리킨다. 필로소포스는 외경 마카베오사서 1:1; 5:35; 7:7에도 나온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필로소포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17:18에 한번 나온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연설하기 이전부터 바울과 대결했다. 한 무리(누가는 에피쿠로스 학파라고 생각했을 것임)는 사도의 메시지를 어리석게도 반대한 반면 다른 이들(스토아 학파)은 기독교의 선포에 어떤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도 또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사도의 메시지를 거부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 Weigelt; O. Michel).
우애하는
filovstorgo"
친철하게 사랑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 및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필로스토르고스(Xen. 이래)는 필로스($5384: 가장 사랑하는, 친절한)와 스트로게(%755: 가족간의 사랑)에서 유래했으며, '친절하게(상냥하게) 사랑하는' tenderly loving, '애정 깊은' affectionate를 의미한다.|필로스토르고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서 한번 나온다(마카베오사서 15:13).||#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필로스토르고스는 신약성경에서 롬 12:10에 한번 나온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여기서 바울은 교회에서의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사랑이란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자녀를 사랑하는
filovtekno"
자녀를 사랑하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필로테크노스(Eur. Hdt. 이래)는 필로스($5384: 가장 사랑하는, 친애하는, 친절한)와 테크논($5043: 아이, 어린이)에서 유래했으며, '자녀를 사랑하는, 아이를 사랑하는'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필로테크노스는 신약성경에서 딛 2:4에 한번 나온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필로티메오마이
filotimevomai
열망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필로티메오마이(Andoc., Pla. 이래)는 필로티모스(%661)에서 유래했으며, '영예를 좋아하다, 영예를 구하다, 야망을 가지다,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다, 열망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필로티메오마이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열망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롬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b)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c)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필로프로노스
filofrovnw"
친절하게, 후한 대접으로.||#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필로프로노스(Soph., Hdt. 이래)는 필로프론($5391)에서 유래했으며, '친절하게, 후하게, 후한 대접으로'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필로프로노스는 신약성경에서 행 28:7에 한번 나온다: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여기서 필로프로노스는 '후한 대접으로'를 의미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필로프론
filovfrwn
친절한, 우애적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필로프론(Pind., Xen. 이래)은 필로스($5384)와 프렌($5424)에서 유래했으며, '친절한, 마음씨 고운, 우애적인'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필로프론은 신약성경에서 벧전 3:8에 한번 나온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여기서 필로프론은 '친절하거나 우애적인'이란 의미를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요하다
dimovw
망을 씌우다, 침묵시키다, 잠잠코 있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피모오(Aristoph. 이래)는 피모스(%1009: 입마개, 재갈)에서 유래했으며,||(a) '재갈을 물리다, 부리망(입마개)를 씌우다'.|(b) 비유적으로 '침묵하게 하다, 말 못하게 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피모오는 70인역본에서 한번 히브리어 하삼(2629: 망을 씌우다)의 역어로 한번 사용되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신 25:4). 이 단어는 마카베오사서 1:35에서 '저지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피모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피모오는 '망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고전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②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b) 피모오는 '입을 막다, 말 못하게 하다, 침묵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②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c) 피모오는 수동태로 '말못하게 되다, 잠자코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② 막 1: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③ 막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④ 눅 4: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블레곤
Flevgwn
블레곤 Phlegon (인)||필레곤은 '불태우는'을 의미하며, 신약성경에서 이 이름은 롬 16:14에 한번 나온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며, 바울이 로마서에서 문안한 사람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불에서 나다
flogivzw
불을 붙이다, 불태우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플로기조(Soph. 이래)는 플록스($5395: 불꽃)에서 유래했으며, '불붙이다, 점화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플로기조는 신약성경에서 약 3:6에 2회 나온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불꽃
flovx
불꽃, 불길.||#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플록스(Homer 이래)는 플레고(%662: 불태우다)에서 유래했으며, '불꽃, 불길, 화염'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플록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눅 16:24에서 불꽃, 고뇌하는 자에 대해 언급한다: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b) 행 7:30에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난 천사에 대해 말한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c) 히 1:7에서 천사를 불꽃으로 삼는 것을 언급한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참조: 시 104:4).||(d) 요한계시록에서 눈이 불꽃같은 인자를 언급한다.|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② 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③ 계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e) 살후 1:7에서 불꽃 중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P. Katz).
망령되이 폄론하다
fluarevw
근거 없는(허튼) 비난을 발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플뤼아레오(Hdt. 이래)는 플뤼아로스($5397: 종알거리는)에서 유래했으며, '무의미한, 말을 하다, 쓸데 없는 말을 하다, 터무니없는(허튼) 말을 하다'(Hdt., Xen., Plat.), '근거없는(헛된) 비난을 받다'(Xen. Hell)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플뤼아레오는 신약성경에서 요삼 1:10에 한번 나온다: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여기서 플뤼나레오는 '근거없는(허튼) 비난을 발하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