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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vd
갓 Gad(인)||#1. 구약성경.||(a) 가드는 히브리어 가드의 음역이며, '행운'을 의미한다. 그의 이름은 갓의 탄생으로 말미암은 레아의 환성에서 유래한 것이다(창 30:11).||(b) 갓은 야곱의 일곱째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레아의 몸종이었던 실바이다(창 35:26). 그는 한 지파의 조상으로, 그의 이름이 지파의 명칭이다.||(c) 야곱의 임종시 갓지파에 대한 그의 유훈에서 군사적으로 용맹한 '반격자들'로 그 성격을 묘사한다(창 49:19). 모세 역시 임종시에 갓 지파를 암사자에 비유함으로 '그 용맹성과 감투성'을 칭송 및 예언하고 있다(신 33:20 이하).||(d) 출애굽 후 광야에서 실시했던 인구 조사에서 갓 지파의 병역의무자는 45,650명이었으며(민 1:24-민 1:25), 두번째 조사에서는 40,500명이었다(민 26:15-18).||(e) 갓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 가장 먼저 그들의 기업을 택했다(신 33:20-21). 가나안 정착시 갓 지파는 북으로 므낫세 반 지파, 남으로 르우벤 지파와 접하는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을 분배받았다(민 32:1-32). 이곳은 이전에 시혼 왕국의 땅이었다(수 13:24-28). 갓 지파의 땅은 매우 비옥했다.|사울 왕 재임 초에 유대인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피해 피난한 장소이며(삼상 13:7),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숨었던 장소이다(삼하 17:24).||(f) 갓 지파는 요단 서편 지역의 정복에 참가하였으며(민 32:16-32; 수 4:12, 13), 요단 동편 지파와 요단 서편 지파의 연합을 표시하는 기념비를 세웠다(수 22:10-29).|갓 지파는 헤브론 광야에서 사울을 반대하여 다윗에게 가담하였으며(대상 12:8-15, 37, 38), 르우벤 지파와 연합하여 하갈 사람을 정복하였다(왕하 10:32, 33).|갓 지파는 앗수르로 사로잡혀 갔고(대상 5:26), 모압 사람이 그 땅을 차지하였다(렘 49:1).|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땅의 각 분깃 가운데 갓 지파의 기업을 모든 지파의 최남단에 위치할 것이라고 그 영토의 재분배를 예언했다(겔 48:27, 29).||#2. 신약성경.||갓은 신약성경에서 계 7:5에 한번 '갓' 지파라는 말로 나타난다: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는 인 맞은 십사만 사천이란 무리에 포함된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D. H. Madving).
거라사인
Gadarhnov"
거라사인 Gadarenes.||형용사 가다레노스는 고유 명사 가다라(%534)에서 유래했으며, '가다라의'를 가리킨다.|가다라는 트랜스 요르다니아(요단 저편)의 한 도시로서 갈릴리 바다의 남단의 동남쪽으로 약 56㎞ 되는 곳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도시들 중의 한 도시이다. 이 도시와 부근 지방의 주민들은 주로 유대인들이 아닌 헬라의 이주민들이 그 주요한 구성원으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Jos War Ⅱ).||#1. 가다라의 역사와 고고학.||(a) 가다라의 역사. 가다라에 대한 언급이 요세푸스에 몇번 나타난다. 마카비 전쟁(Maccabean wars)에서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는 열 달 동안의 포위 끝에 그 도시를 탈환하고(Jos. Antiq., XII, iii. 3; Jos. War, I. iv. 2) 파괴하였다. 로마 점령 이후 그 곳은 B.C. 63년에 폼페이(Pompey)에 의해 재건되어(War. I. vii. 7) "자유의" 도시가 되었다. 가비니우스(Gabinius)는 그 곳을 팔레스틴의 다섯 점령 지역 중 하나인 주요한 도시로 만들었다.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은 B.C. 30년에 아구스도(Augustus)로부터 그 지역을 선물로 받았다(Jos. Antiq. XV. vii. 3; Jos. War. I, xx. 3). 헤롯은 그 도시를 가혹하게 다스렸고 그의 정책은 황제에 의해 지지받았다. (Jos Antiq. XV. x. 3). 헤롯이 죽었을 때에 그 곳은 시리아에 합병되었다(Jos Antiq. XVII. xi. 4; Jos War, II. xviii. 1). A.D. 68-70간의 반란 기간에 그 도시는 그 곳을 불태우고 그 지방 주민들을 약탈한 베스파시안(Vespasian)에게 신속히 함락되었다(Jos War, III. vii. 1). 그 후 다시 재건되어 그 곳은 그 도시에서 나온 동전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A.D. 240년까지 번창하였다. 그 동전들에서 배나 군함의 그림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해운업이 이 곳에서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곳에는 2세기부터 기독교 교회가 있었고 A.D. 325년부터 모슬렘의 정복시까지 주교의 영지였다.||(b) 가다라는 오늘날의 무퀴스(Muqeis), 또는 움 케이스(Umm Qeis)로서 야르묵(Yarmuk) 강의 남쪽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그 페허는 두 개의 원형 극장의 자취와 바실리카(초기 기독교 교회당), 사원, 주랑들, 대저택, 수로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며 그 모든 것은 그 도시의 크기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보여 준다.|요세푸스는 다른 가다라를 "베레아(Perea)의 수도"라고 언급하고 있으나(Jos. War, IV. vii. 3), 요세푸스는 그것을 거라사(Gerasa)와 혼동한 것 같다.||#2. 신약성경||신약성경에서 가다라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마 8:28의 두 명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돼지들을 갈릴리 바다에 빠뜨리신 것에 대한 기사이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만하더라". 그 병행절수들(막 5:1; 눅 8:26; 참조, 37절)은 한 명의 귀신들린 자를 언급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각각의 복음서의 언급에는 명칭의 철자에 문자적으로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의 "Gadarenes(가다라)"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Gerasenes(거라사인의)"라는 읽기는 정확한 본문상의 증거를 따른 것이며 장소를 확인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일치의 문제는 각각의 언급이 가다라인-거라사인들의 지방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해결된다.|지리학적 역사적 근거들은 그 지역의 지명들이 아마도 중복되었음을 보여준다; 가다라는 인접한 지역의 주요 도시이고, 반면 거라사는 가다라보다 작은 마을들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마태는 구체적으로 가다라라고 언급하고 마가와 누가는 보다 막연하게 거라사라고 언급한다. 세 번째로 Gergesenes("겔거사인")이라는 읽기는 비록 그것이 불충분한 사본상의 증거를 가지며, 공관복음의 본문들을 조화시키려는 명백히 최근의 혼란스러운 노력이기는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곳이 겔거사 동리 부근이라는 가장 합당한 위치를 제시한다. 지형도에는 갈릴리 바다의 동남쪽 해안을 따라 죽 늘어선 언덕들이 나타나 있지만, 그 지역을 방문한 지리학자들은 돼지들이 익사한 사건이 일어난 곳은 오늘날의 케르사(Kersa)인 겔거사 근처에 길게 펼쳐진 가파른 해안선일뿐이라고 말한다(참조: 거라사, 겔거사).|(참조: J. C. Deyoung; W. A. Thomson; A. Plummer).
국고
gavza
국고.||#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가자는 헬라어와 라틴어(Cic. Off. 2, 22)에 의해 차용된 바사어이며, '왕의 국고, 보물, 재산'(Polyb., Diod., Plut. 등)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가자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에 4:7에서 '왕의 부고, 사 39:2에서 '보물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외경 에스드라하 5:17; 7:2에도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가자는 신약성경에서 행 8:27에 한번 '국고'라는 의미로 나온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사
Gavza
가사 Gaza(지)||#1. 고대 및 구약 시대.||가자는 히브리어 앗자(5804: 강한, 요세화된)를 음역한 것이다.||(a) 가사의 위치 및 특성.|본래 이 지역에는 아랍인들이 현저하게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현대의 중동에서는 가제(gaze)라는 발음이 보다 널리 사용된다(팔레스틴 남서쪽에 있는 5개의 주요한 팔레스틴의 도시들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가사는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지중해로부터 조금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다).||고대 구약시대의 가사는 예루살렘의 남서쪽으로 약 5 마일, 지중해로부터 약 3 마일 거리의 내륙에 위치하였다. 블레셋의 한 다른 중요한 도시인 아스글론(Ashkelon)의 남쪽으로 약 12마일 거리에 있었으며, 남서쪽과 서쪽으로 지중해에 인접한 사막을 거쳐 펠루시움(Pelusium)과 이집트의 델타(Delta)에 이르는 중요한 대상로와 군사로의 길목에 있었다. 가사를 통하여 군사 원정이 이집트로부터 팔레스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나라에까지 이루어졌다.|이 성읍은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요새화 되었다. 비록 바사의 유격대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알렉산더 대제는 이 성을 두 달 동안 포위 공격한 후에 점령하였으나 멸망시키지는 못했다([Joseph. antt. 11, 8, 4]; Diod. 17, 48; Plut. Alex. 25; Curt. 4, 6). 그후 주전 96년에 유대의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이 성을 1년 동안 포위 공격한 후에 멸망시켰다(Joseph. antt. 13, 13, 3). 가비니우스(Gabinius)는 이 성을 주전 58년에 재건하였다(Joseph. l.c. 14, 5, 3). 결국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성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으며(Joseph. l.c. 15, 7, 3), 그가 죽고 난 후 시리아에 합병되었다(Joseph. l.c. 17, 11, 4).|지리학적 특성으로서 구약 시대의 가사는 비옥한 평지 위로 100피트쯤 솟아 오른 언덕에 있었다. 이 곳은 많은 인구를 위한 충분한 농산물과 육체적 필요를 위해 마련한 15개의 맑은 우물들 때문에 도시가 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이 도시가 대상들의 무역의 중심지이며 군대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한 것은 필연적이었다.||(b) 구약성경에서 가사의 역사.|구약성경에서의 최초의 언급은 가나안 사람들의 영토가 북쪽의 시돈에서부터 팔레스틴의 남서쪽에 있는 그랄과 가사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분명히 모세의 시대 이전에, 가사와 팔레스틴 남단에 살던 초기의 다른 거주민들은 아위라 불리웠다(신 2:23; 참조, 19-23절). 그 후 여호수아의 시대에 아위 사람들은 가나안인들과 함께 여전히 팔레스틴의 남부와 제휴하였으나 그 때는 블레셋 사람들이 가사와 주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수 13:3, 4).|여호수아가 가사를 정복했으며(수 10:41), 아낙 사람이 가사로 피난하여 거하였다(수 11:22), 가사는 유대 지파에 할당되었으며(수 15:47), 유다가 가사를 점령했다(삿 1:18).||가사에는 다곤의 신당이 있으며(삿 16:23, 24), 삼손이 눈을 뽑힌 후 가사로 끌려가 그곳의 옥에서 맷돌을 돌렸다(삿 16장).|솔로몬왕이 가사를 다스렸으며(왕상 4:24), 바로가 블레셋을 정복했다(렘 47:1-5).|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가사에 대해 예언했다(암 1:6, 7; 습 2:4; 렘 25:20).||#2. 신약성경.||가사는 신약성경에서 행 8:26에 한번 나온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빌립은 가사의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국왕의 내시를 만나 전도하여 그에게 세례(침례)를 주었다.|(참조: W. H. Mare; Walter Bauer; J. H. Thayer).
연보궤
gazofulavkion
보물실 treasure room, 금고, 보고, 국고 treasur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가조퓔라키온은 가자($1047)와 퓔라케($5438)에서 유래했으며, '보물실(treasure room), 보고, 금고, 국고'(treasury)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가조퓔라키온은 70인역본에서 26회 나오며, 성전의 뜰에 세워진 방이나 광을 뜻하는 히브리어 리시카와 니쉬라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성전 예배에 필요한 신성한 예물과 성물을 보관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 등이 거주하기도 했다(느 13:7; 느 10:37이하). 그리고 가조퓔라키온은 게나짐(gnazim: 왕궁의 보고)의 역어로 1회 사용되어, 보물 특히 공적 보물의 저장소, 국고를 나타낸다(에 3:9), 에스드라상 8:18, 44; 마카베오일서 3:28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보물과 공적 기록들(마카베오일서 14:49; 참조: Grimm ad loc.)을 저장하고 과부와 고아의 재산(마카베오이서 3:10; 참조: Grimm ad loc.)을 저축해 둔 신성한 국고에 대해 사용되었다(마카베오일서 14:49; 마카베오이서 3:6, 28, 40; 4:42; 5:18). 요세푸스는 헤롯 성전의 여인의 뜰에 있는 두 개의 가조퓔라키아(복수형)와 토 가조퓔리키온에 대해 언급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가조퓔라키온은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복음서들(마가, 누가, 요한)에만 사용되었다.|신약성경에는 귀중한 것을 보관하는 성전금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막 12: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병행구, 눅 21:1). 여기에 가조퓔라키온은 성전에 있는 열 세개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 중의 하나를 언급하였다. 이것들에는 자금의 용도를 표시해주는 부호가 부착되어 있었다.|요 8:20에서 예수님께서 성전 경내에 있는 금고 가조퓔라키온에서 가르치고 계셨을 때, 아마 연보궤가 놓여 있던 여인들의 뜰에 서 계셨을 것이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참조: J.H.Thayer; D.H.Madvig).
가이오
Gavi>o"
가이오 Gaius(인)||가이오스는 '기쁜, 나는 기쁘다'를 의미하며, 보통 사용되는 이름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이름으로 부른 서너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1. 에베소 폭동에 연루된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바울과 함께 여행한 바울의 동료이며, 에베소의 소요 기간에 아리스다고와 함께 폭도들에게 붙잡힌 사람이다: "온 성이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들어 가는지라"(행 19:29).||#2. 마게도냐에서 바울과 동행한 더베의 그리스도인.||행 20:4,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가이오는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분명히 바울과 함께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 각 교회들의 대표자들이었다. Codex D에 나오는 변형된 읽기 두베리오스는 그가 도베리오(Doberius) 출신 마게도냐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으로 그는 위의 1에서 말한 사람과 동일인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3. 고린도의 한 그리스도인.||바울이 평상시의 관례와 달리 세례를 주었다고 이름을 말한 두 사람 중 하나(고전 1:14; 고전 1:17).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의 식주인이었던 가이오와 동일인이다(롬 16:23). 그가 또한 "온 교회의" 식주인이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그의 넓은 집에서 모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데살로니가의 감독이었다. 혹자는 그를 행 18:7의 디도 유스도와 동일인일 것이라고 한다.||#4. 요한삼서의 수신인.||요한은 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은 그의 접대로 인해 그를 칭찬하였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위한 그의 계속적인 후원을 요청하였다. 그를 위해서 말한 자들 중 누구와도 동일시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요삼 1:1-요삼 1:3).|(참조: E. J. Goodspeed, "Gaius Titius Justus", JBL; D. E. Hiebert).

gavla
젖 milk.||#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갈라(호머 이래로)는 기본 어근 글락(%859) 혹은 글라그(%860)에서 유래했으며, '젖'(milk)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갈라는 70인역본에서 38회 나오며, 대부분 할랍(젖, 우유, 신우유, 치즈)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2회만 헬렙(살찐, 시 119:70; 겔 34:3, 할랍으로 판독하기도 함)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갈라는 신약성경에서 5회 나오며, 모두 '젖, 우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 고전 3:1-2에서 "젖"은 기본적인 복음을 의미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히 5:12이하에서도 비슷하게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초보를 의미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참조: 히 6:1-히 6:2).|젖은 성숙한 신자들에게 적합한 단단한 음식과 대조된다.||(b) 벧전 2:2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갓난 아이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줄 것이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이 단어의 비유적 용법은 신화적, 마술적, 종말론적 개념에 근거하는 것 같으나 아마도 70인역본의 용법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젖은 약속의 땅의 한가지 특징이며(출 3:8), 축복의 일반적 표시이고(욥 29:6), 종말론적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욜 3:18). 그러므로 벧전 2:2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용법은 분명히 신비 혹은 성례전으로서의 복음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이것을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 신비주의로부터 구별한다(H. Schlier,Ⅰ, 645-647).|(참조: J. H. Thayer; E. Yamauchi)
갈라디아 사람들
Galavth"
갈라디아 사람 Galatian.||갈라테스는 갈라티아($1053)에서 유래했으며, '갈라디아 사람'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갈 3:1에 한번 나온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다시 바울의 경악감과 의문(참조: 갈 1:6)을 나타낸다. 그들은 영적인 사실에 대하여 소경이었다. 유일한 변명은 분명히 어떤 마술사가 그들에게 마술을 건 것이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영적으로 소경된 그들에게 충격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의 눈 앞에 밝히 보였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공공연한 선언을 통하여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밝히 제시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이 환상이 황홀하고 치명적인 마술사의 응시에서 저들을 구원했어야 했으나 그것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참조: R. E. Howard).
갈라디아
Galativa
갈라디아 Galatia||#1. 갈라디아의 역사||갈라디아는 파프라고니아, 본도, 갑바도기아, 루가오니아, 부르기아, 비시니아를 접경으로 하는 소아시아의 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B.C. 278년에 소아시아로 건너와서 얼마 동안 떠돌다가 마침내 위에 언급한 지역에 영구 정착하여 헬라인들과 통혼했던 갈 부족(Gallic tribes)에서 그 지방명을 따왔다. B.C. 189년부터 이 지방은 로마에 예속되었으나 그들 나름대로의 우두머리의 다스림을 받았다. 그러나 B.C. 24년에 그들의 지방은 정식으로 로마 영토가 되었다(참조: Joseph. antt. 16, 6; Strabo 12, 5; Flor. 2, 11).||#2. 신약성경의 갈라디아||갈라디아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온다.||(a) 갈라디아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연보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1). 어려움 중에 있는 교회를 위해 후한 헌금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교제의 특권이며, 중대한 일이며, 이러한 헌금은 하나의 명령이다. 엑셀(J. S. Exell)은 '영감을 받은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최고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고 주석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것이 생길 때는 그리스도인은 구제의 손길을 펼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명한 것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게도 명한다(D. S. Metz).||(b) 베드로는 갈라디아로 흩어진 택한 자들에게 편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c) 갈 1:1; 갈 1:2에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 언급한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갈라티코스
Galatikov"
갈라디아의 Galatian||갈라디코스는 갈라티아($1053)에서 유래했으며, '갈라디아의, 갈라디아에 속한'을 의미한다.|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 2회 나온다.|바울은 소아시아의 한 영토인 그곳 교회들을 방문했다.||(a) 첫번째 방문,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행 16:6).||(b) 두번째 방문,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행 18:2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잔잔한
galhvnh
고요함, 고요.||#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갈레네(Homer 이래)는 어원이 불확실하며, '고요함, 고요'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갈레네는 신약성경에서 3회 나오며, 바다가 고요해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막 4:39; 병행구 8:26; 눅 8:24).|(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갈릴리
Galilaiva
갈릴리 Galilee||#1. 갈릴리(지방, 영토)||갈릴리는 팔레스타인의 북부지역, 요단의 서편을 가리켜 구약성경에서 다소 막연하게 사용하게 된 명칭이다. 갈릴리는 히브리어 명칭으로, 왕하 15:29에서 '하갈리아', 수 20:7; 수 21:32에서 '하갈릴', 왕상 9:11에서 '에리츠 갈릴'로 표기되었다. 그 의미는 '원', 혹은 '순회'라는 뜻이다.|갈릴리는 원래 가나안을 분배할 때 스불론지파(수 19:10-16), 아셀 지파(수 19:24-30), 납달리지파(수 19:32-39)에게 할당되었으나, 삿 4장, 5장에 기록된 유혈 전쟁에도 불구하고 이 지파들 중 어느 지파도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삿 1:30-33). 히브리 왕조 시대에 갈릴리는 시리아 전쟁으로 고통 당했다. 갈릴리는 벤 하닷에게 유린되었으며(왕상 15:20) 그 후 아람왕 하사엘의 지배를 받았다(왕하 12:18; 왕하 13:22). 주전 734년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위해 대로를 건설하였고(왕하 15:29) 많은 거민을 포로로 잡아갔다. 사 9:1(ASV 난외)에서 갈릴리는 "열방의 지역"으로 지칭되어 있다. 마케베오일서 5:15은 갈릴리를 "이방인들의 갈릴리"라고 부름으로써 이 지역의 이방인들과의 혼합성을 지적하였다. 일부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돌아와 갈릴리에 정착하였다.|갈릴리는 다양한 정치적 운명을 겪는 가운데 주민들이 혼합되었으며,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 및 방언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그들의 언어 습관을 통하여 갈릴리인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마 26:69-73; 막 14:70; 요 7:41); 아람어를 사용하는 갈릴리인의 발음은 특이했다. 특히 후음이 그러했다.|갈릴리 지역의 정확한 경계는 시대마다 다르다. 그리스도 시대에 갈릴리는 잘 구획된 로마 속주였다. 이 지역은 상부 갈릴리와 하부 갈릴리로 구분되었으며, 하부 갈릴리는 에스들론 평원 일부와 요단강, 갈릴리 바다를 포함하며 보다 낮고 평평하다. 상부 갈릴리는 봉우리가 2000~4000피트에 이르는 산과 산악 고원 지대였다(마 28:16). 나사렛은 이곳의 중심에 위치하였으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방대한 범위의 지리적 환경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강에 의해 물을 풍부하게 공급 받는 갈릴리는 매우 비옥하였다. 골짜기마다 풍성한 곡물과 목초지가 있었고 향료, 올리브 및 고산지대에서 나는 다른 열매들이 많이 산출되었다. 갈릴리 지역은 도로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구약성경의 "바다의 길"(사 9:1)은 하부 갈릴리를 통과하였다. 애굽과 아라비아와 시리아 상인들이 대상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이 길은 오늘날에도 따라갈 수 있는데, 나중에 이 길 위에 로마 도로가 포장되었다.|그리스도 시대에 갈릴리인들의 생활을 특징짓는 물질적 풍요와 넓은 시계는 예수님의 비유에 반영되어 있다(마 20:1-8; 마 21:33; 마 25:14; 막 4:3; 마 13:34; 눅 13:6-9).|예수님 당시에 갈릴리는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바스가 통치하였다(B.C. 4 - A.D. 39)(눅 23:5-7). 헤롯 안티바스는 분봉왕으로 임명된 후에 락카드(Rakkath) 지역 근처에 수도를 세우고 왕에게 입은 은택을 기념하여 디베랴로 명명하였다.|갈릴리에는 가나안 땅을 분배할 당시에 60개 이상의 성읍이 있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갈릴리의 성읍으로는 하솔(삿 4:2); 디베랴를 세우기 전 갈릴리 수도였던 셉포리스(Sepphoris),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하리라(마 5:14)고 하신 말씀에 나온 그 동네와 유사한 사베드(Safed),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농업 마을인 가나(요 2:1-11), "도피성" 가데스(요 21:32); 바니아스(Banias)에 인접한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동네 나사렛(눅 2:39; 눅 2:51); 그 유적지가 오늘날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가버나움(마 4:13; 마 9:1; 눅 10:15); 고라신(마 11:21); 벳새다 혹은 율리아스(눅 9:10; 요 1:44)등이 있다.|갈릴리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와 나라에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하였으나(요 4:45), 순수한 혈통을 지닌 보다 엄격한 정통파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건방진 모욕으로 멸시 받았다. 일상적으로 헬라 및 로마인의 생활과 접촉하는 유대교와 갈릴리인 사이의 이 묘한 긴장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초기에 제자들을 모았던 것이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작은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은 모두 갈릴리인이었다.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자 중 하나는 막달라 출신이었다. 처음의 12제자 중에서 유일한 유다 출신 가룟 유다가 제외되고 이제 100% 갈릴리인으로 이루어진 사도의 무리가 오순절에 구경꾼들의 중언으로 확증된다(행 2:7). 예수님은 이 갈릴리사람들이 가진 더 큰 경험과 더 넓은 사고방식에 호소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하여 "그의 이야기를 기쁘게 들은"(막 3:7) 큰 무리를 모았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갈릴리인들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사역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복음서에 기록될 수 있었다. 갈릴리인 베드로가 겪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한 경험으로 기독교는 승리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막 14:28; 요 21:1-23).|빌라도가 예수를 심리할 때 피고인이 '갈릴리인'인지 물었을 때(눅 23:6), 그는 이전에 문제를 일으킨 갈릴리인들에 대한 자신의 인기를 떨어뜨린 판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눅 13:1-3), 이 나사렛인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헤롯 안티바스에게 넘겨주고자 하였던 것이다.|주후 6년에 갈릴리인 혁명가 유다(행 5:37)는 "우리에겐 하나님 외에 주가 없다"고 가르쳤다.|"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는 비웃음은 드보라, 요나, 엘리사를 간과한 것이었으며, 갈릴리인들의 문화적, 종교적, 애국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대도시의 관료적인 유대인의 선입견을 드러낸 것이었다.|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부 갈릴리의 고지대 사람들이 유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년 동안 로마 군대에 맞서 버티는 동안 150,000명의 갈릴리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예루살렘이 끝내 멸망하자(주후 70년) 거처를 잃은 랍비 학파들이, 경멸 받던 갈릴리에서 도피처를 찾았으며, 사베드(Safed)와 디베랴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미슈나와 "예루살렘 탈무드"가 그리스도교 시대의 초기에 갈릴리에서 쓰여졌다.||#2. 갈릴리 바다||갈릴리 바다는 북팔레스타인에 있는 심장 모양의 담수호. 요단강 수로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에서는 갈릴리 바다(마 4:18, 마 15:29; 막 1:16; 막 7:31; 요 6:1); 디베랴 바다(요 6:1; 요 21:1); 게네사렛 호수(눅 5:1); 4회는 "호수"(눅 5:2; 눅 8:22 이하; 눅 8:33); 몇 회는 "바다"(요 6:16-25)라고 언급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 이 호수는 "긴네렛(하프) 바다"(민 34:11; 수 13:27) 혹은 "긴네롯"(수 12:3)으로 알려져 있다.|이 호수의 길이는 약 13마일, 너비는 8마일이고 표준 해수면 아래 680피트에 있다. 가장 깊은 곳의 깊이는 약 200피트에 이른다. 호수의 동쪽에는 2,000피트 높이의 산맥이 연안에서부터 솟아 있는 반면 서쪽 산맥은 비교적 덜 가파르다.|북쪽 방향으로는 북서쪽의 비옥한 게네사렛 초목 평야와 북동쪽의 엘 바딜라(티 Batila) 초목 지대가 완만하게 펼쳐진다. 요단강은 꼭대기가 눈으로 덮여 있는 헬몬산과 레바논에서 물을 공급 받아 이 호수로 흘러 들어 간다. 플리니(Pliny)는 이 바다가 "활기에 찬 마을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고 함으로써 신약성경이 이 호수에 대해 제공하는 인상을 확증한다.|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는 마을 가운데 가버나움(마 4:13; 요 6:17); 벳세다(막 6:45); 고라신(눅 10:13); 막달라(눅 5:39); 가다라(막 5:1)가 있다.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예수님 당시에 번성했던 마을 가운데 시나브리스(Sinnabris)와 트리케아([Tarichaea] 문자적으로 절이는 마을[Pickle town])가 있다. 이 마을에서 생선을 염장하고 말리고 보존하여 스페인(Spain)과 같이 먼 곳의 시장에 까지 배로 운송했다.|아마도 팔레스타인 경제사에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산업도시 중의 하나일 것이다.|디베랴 교외에서 솟아나는 유황 온천은 몇 세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의학적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다. 헤롯은 이 유익한 물이 솟는 곳 근처에 왕국을 지었다. 이곳은 이러한 치료용의 목욕과 해수면 아래 위치한 이 호수의 열대성 기후로 인해 건강을 위한 유흥지로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치료의 손길을 얻기 위해 이 호숫가에 몰려든 수 많은 병자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막 1:32이하; 막 6:53-56).|배는 고기를 잡거나 호수가 마을들 사이의 교통 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배를 만드는 목수였기 때문에 거주지를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다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배(막 4:38)나 항해(막 4:35), 그리고 고기잡이(요 21:6)와 친숙해 있었다. 호수 주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육지와 멀리 호수 위로 솟아 있는 산맥과 고원 지대 사이의 기온차로 인해 호수에는 사나운 폭풍이 자주 발생한다(마 8:24). 바람은 연안에 인접한 산맥 때문에 호수 가장 자리로부터 몰아치다가 호수 중심에서 약해지고, 종종 맞은편 연안에서 사나워진다. 보다 덜 막혀 있는 북쪽 변두리가 폭풍을 자주 만난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거라사로 가는 도중에(마 8:23; 막 4:37; 눅 8:23; 눅 8:26), 그리고 벳세다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마 14:24; 막 6:48; 요 6:17이하) 폭풍을 만났다.|오늘날의 성지 순례자들은 갈릴리 바다와 그 성스러운 기슭을 방문하였을 때 받은 영적 감동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일출 때 해가 동쪽 연안의 언덕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깊은 곳"에 던져 내리는 작은 낚시 바늘을 비추는 것을 보았을 때나, 장엄한 일몰 시에 오래 전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발에 걸리는 돌 한 개를 주워서 가지고 노는 동안 청 초록색의 바닷물이 살아있는 빛깔로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나, 그 갈릴리 연안과 바다물은 평강과 폭풍, 성공과 불운의 대기에 젖어 있으니,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활동적이고 광범위한 부분을 특징 지워주는 것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HBD; ISBE).
갈릴리 사람
Galilai'o"
갈릴리 사람 Galilean||갈릴라이오스는 갈릴라이아($1056: 갈릴리)에서 유래했으며, '갈릴리 사람, 갈릴리의 원주민'을 의미한다.||갈릴라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1회 나오며,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만 사용되었다.||(a)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사람들이 베드로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했다.|① 마 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② 막 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③ 눅 22:59,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b)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다: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 하여"(눅 23:6).||(c)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요 4:45).||(d) 사람들이 사도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행 2:7).||(e)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1-눅 13:3).||(f)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부활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갈릴리 사람을 불러 말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g) 행 5:37에서 "갈릴리 사람" 유다에 대해 언급한다: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 갈릴리 사람 유다는 열심당원의 지도자로서 로마 제국이 유대에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주후 6-7년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자 이 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이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갈리오
Gallivwn
갈리오 Gallio||갈리온은 '우유를 먹고 사는 자'라는 뜻이며, 한글개역성경에서 '갈리오'로 음역한다. 신약성경에서 행 18:12; 행 18:14; 행 18:17(3회)에 나타난다: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재판 자리로 데리고 와서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하니라".||갈리오는 A.D. 51-52 또는 52-53년에 고린도에 주재하고 있던 아가야의 지방 총독(KJV '총독 대리', 행 18:12-행 18:17)이다.|수사학자 안네우스 세네카의 아들이며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인 그는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Marcus Annaeus Novatus)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자 루시어스 주니어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의 양자가 되어 양부에게서 행정과 정치 교육을 받았다(Tac. 16, 17). 그는 매우 상냥한 사람이었다. 세네카는 그의 논문 "de vita Beata"를 그에게 헌정하였고, Naturales Quaetiones의 서문에서 그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델피(Delphi)의 비문은 그가 로마 황제 글라우디우스로부터 26번째 대갈채를 받은 후에 아가야 지방의 지방총독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의 재직 기간은 51-52년 혹은 52-53년이다. 플리니(Pliny)에 의하면 아가야의 기후는 갈리오 자신의 말과 그를 병들게 했다. 그는 그의 재직 기간이 끝난 후 폐출혈에서 회복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이 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네로 통치 초기에 원로원 의원(consul suffectus)이 되었다. 그는 그의 형제와 함께 네로를 타도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고 일시적으로 용서를 받았으나 그 후 이내 네로의 명령으로 자살을 강요받았거나 사형되었다(Dio Cassius, History 62.25. Seutonius, Rhetoric).||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고린도에 주재하는 동안, 유대인의 무리가 사도 바울을 재판 자리 앞으로 끌고 와서 그가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하였다. 갈리오는 우선 로마법에 따라, 이 사건을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도록 허용하지 않은채 기각하였다. 유대인 무리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렸을 때에도 갈리오는 자기의 특권을 사용하지 않았다(행 18:12-행 18:17).|(참조: A. Rupprecht)
가말리엘
Gamalihvl
가말리엘 Gamaliel.||가말리엘은 히브리어 가멜리엘(1583)의 음역이며, '하나님은 나의 보상자시다' 또는 '보수자 하나님'을 의미한다.||가말리엘은 신약성경에서 2회, 행 5:34과 행 22:3에 나오는 유명한 현인이다.||가말리엘은 그들의 미쉬나(Mishnah)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타니임, 즉 교사들의 대가족의 우두머리였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한 사람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 "장로 가말리엘"로 알려져 있으며 A.D. 1세기에 살았었다.|전승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다른 사람 아닌 원로원 의원 힐렐(Hillel)이었다고 한다. 힐렐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있지만 이러한 진술들은 믿을만한 문헌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종종 그와 같은 가말리엘이란 이름을 가졌고 첫 번째 산헤드린 원로인 듯한 그의 손자와 혼동된다.|장로 가말리엘은 토라(Torah)에 관한 랍비의 주석서 미쉬나의 많은 구절에 인용된다. 그의 법적 행동들은 이중 명의로 된 이혼 증서를 무효로 하는 일과 많은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 가루를 반죽의 문제와 자비를 위한 여행시의 안식일 금령의 범위 등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매우 실제적인 성격을 띤 일들이다. 그러나 다소 전설적이며 미신적인 어떤 요소들도 역시 그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에 귀착된다.|그는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랍바/온(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다(참조, 요 20:16). 그에 대한 기억은 랍비의 전승에서 가장 큰 찬사와 존경의 하나가 되어왔다.||초기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말한 그의 정확한 의견은 교계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A.D. 70년 가말리엘이 그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함으로서 많은 논쟁을 일으킨 중세 초기의 문서 클레멘타인 승인(Clementine Recognitions)이라는 위전의 전승은 전혀 근거가 없다.||사도행전에서의 첫 번째 언급에서 그는 사로잡힌 사도들에 관하여 온건한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34-행 5:39).||두 번째 경우는 바울이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말리엘이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할 때에 바울에 의해 언급된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확정적이지 않은, 미쉬나에 나타난 가말리엘의 무미건조한 진술을 고려해 보면, 하나 하나의 그의 법규가 근본적인 동기에 있어서 개방적이고 인도주의적이었던 것 같으며, 이것은 사도행전에 인용된 연설과 그가 유대인들에게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 바울의 호의적인 진술과 잘 일치한다.|바울은 그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경우 가말리엘의 방침이 군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로서 언급했을 것이다.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에 관한 가말리엘의 능력과 통찰력을 비방하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스승의 제자는 새롭게 번성하는 "도"를 박해하는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그의 새로 발견된 믿음이 그 유대인 현인과의 연합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단절시켰기 때문에 다시는 가말리엘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참조: W. WHITE, J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