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가다
gamevw
결혼하다 marry.||#1. 일반 헬라어 문헌||동사 가메오는 '함께 어울리다, 짝지우다'를 뜻하는 어근 감(%111)에서 파생되었다. 이 어근은 겐나오($1080:낳다, 생기다)와 관련되는 것이며, '결혼하다, 결혼을 축하하다. 성관계를 갖다'를 의미한다.|희랍신화에서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의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나, 역사시대의 희랍세계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우세했다. 결혼 윤리는 엄격했다. 호머 시대의 영웅은 가정의 훌륭한 경영자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신실하고 정숙한 여자 한 명을 아내로 삼았다. 헬라세계에서 결혼은 일부일처제였다. 반면에 남자는 많은 자유를 누렸다. 남자는 첩을 둘 수 있었으며, 창녀와 성관계를 가질 수도 있었다.||#2. 70인약본의 용법||동사 가메오는 70인역본에서 구약성경에서 에 10:3 결론 부분에만 나온다: "거기에 강이 되는 작은 샘이 있었다. 그리고 빛이 있었고, 해가 있었고, 많은 물이 있었다. 그 강은 왕이 결혼한 에스더였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가메오는 신약성경에서 30회 나온다. 이 어군의 용법은 일반 헬라어의 용법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혼외 관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지 않는다. 구약성경과 팔레스타인의 율법주의, 그리고 희랍의 헬라 문명에서 결혼 및 결혼생활은 자명한 제도였고, 그래서 그것들은 신약성경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약성경 기자는 남녀관계에 대한 문제들을 이 어군의 단어들보다도 다른 단어들을 휠씬 많이 다루고 있다.|제도로서의 결혼은 신약성경에 분명히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규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기초하고 있다. 남자와 아내의 연합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창 2:24이 그 출발점이 된다. 창 2:24에서는 창 1:28에 기록된 창조의 역사가 계속된다.||(a) 예수님에게 있어서 혼인은 인간 관계의 근원적 형태이다. 결혼의 근거는 창조이며, 결혼의 역사는 세 시기로 구분되고 이 시대와 더불어 끝날 것이다. 완전한 연합이 본래적 상태이다(막 10:6 이하). 죄로 인하여 이 완전한 연합이 와해되었 으며, 드디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줌으로써 이혼을 허용하게 된다. 신 24:1의 율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이혼을 허락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원칙적으로 율법이 허용해준 것까지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막 10:2 - 막 10:12). 오직 마 5:32과 마 19:9에만 음행의 연고가 있을 때 이혼이 허용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이혼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는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다(마 19:5 이하).|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이혼법, 심오한 이상, 네 가지 유보 조항으로 특징지워지는 새 시대를 여신다(막 1O:9-1O). 이 실제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혼은 가능하나 재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한 배우자를 또 다른 배우자로 대체하는 것은 간음이고, 또한 원래의 연합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마 5:32; 막 10:11; 막 10:12). 혼인이 실패하는 이유는 마음의 완악함이다. 따라서 새로운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마 5:27-마 5:28). 외적인 연합과 마찬가지로 내적인 연합이 요구된다. 친교(communion) 가 없는 성적 결합은 간음이다.||네 가지 유보조항은 다음과 같다.|1) 어떤 시대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상황의 심각성를 보지 못한 맹목성으로서, 경솔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이러한 한 시대는 노아의 때였으며, 이러한 다른 때는 시작되었다(눅 17:27).|2) 결혼은 때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준비를 방해할 수 있다(눅 14:20).|3)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위하여 독신의 은사를 받는다(마 19:12).|4) 새 시대에는 결혼하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막 12:25).|비록 예수님 자신께서 결혼하지 않으셨고 결혼은 지나가는 시대에 속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혼에 대하여 경고하거나 독신을 명령하지 아니하시고 창 2:24에 나오는 결혼제도를 인정하신다.||(b) 한 사람 이상의 남편을 가졌던 아내가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라는 사두개인의 질문을 받고서(마 22:23 - 마 22:33; 막 12:18 - 막 12:27; 눅 20:27 - 눅 20:38) 예수님은 하나님과 도래하는 나라에서는 제도로서의 결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서기관들이 제기한 문제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진술은 언제나 새로운 시대가 그의 인격 안에서 열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해되어 야만 한다(참조: 마 24:38; 눅 17:26). 다시 말하면 마 19:9 - 마 19:12와 같은 구절들은 단순히 구약성경의 결혼 율법의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이 율법의 바른 해석과 이 종말론적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것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마태의 관점에서 제 2의 모세, 즉 종말론적 시대의 율법 수여자였다.||고자에 관한 문제(마 19:12) 역시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은사를 지닌 사람들 중에는 시간의 긴박성 때문에 독신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절차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천국을 위하여"). 세례(침례) 요한과 바울은 독신으로 지냈다. 그들은 도래하는 나라에 비추어볼 때 결혼은 오직 일시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참조:고전 7:1 - 고전 7:9, 고전 7:26 - 고전 7:29)(W.Gunter).||(c) 바울은 고전 5장 이하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에서 결혼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바울은 고전 6:16 - 고전 6:17에서 창 2:24에 언급된 연합이 어떻게 간음을 배제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결혼 그 자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고전 7:3 이하에서 일단 결혼하면 부부는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잠시 동안 헤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로에 대한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고전 7:10 이하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호소하며 이혼을 거부하고 이혼 후의 재혼을 반대한다(참조:막 10:9이하; 병행구:마 19:6 - 마 19:9; 눅 16:18). 그러나 바울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네 가지 조항을 보다 강하게 강조한다. 결혼은 하나님께 향한 참된 헌신을 방해할 수 있으며(고전 7:5; 고전 7:32 이하), 임박한 환난의 때에는 적합하지 않다(고전 7:26; 고전 7:28 - 고전 7:29). 바울은 금욕주의적인 시험에 찬성하지 않고 과부들은 자유하여 재혼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나 바울 자신이 그의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독신의 은사를 가지기를 원했다(고전 7:1 - 고전 7:2,고전 7:7 - 고전 7:8, 참조: 고전 9:5; 고전 9:12; 고전 9:15 이하). 후에 비록 과부가 재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젊은 과부는 문제가 되는 행위를 하느니 차라리 재혼하라고 권면 받는다(딤전 5:5 이하; 딤전 5:11; 딤전 5:14). 딤전 4:3에서는 병적이라 할 만큼 지나치게 결혼을 금지한 거짓 교사들을 공격하고 있다.|(참조: E.Stauffer).||(d) 바울의 호소는 불신자와의 혼합결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관점이 된다(고전 7:12 - 고전 7:l6). 불신 배우자는 결혼을 지속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한편 기독교 신자인 배우자는 그 결혼을 지속시킬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즉 불신 배우자만이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런 혼합결혼이 믿는 배우자에 의해 성화된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능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은총은 불신 배우자의 불신앙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약의 관계 안으로 자녀를 이끄는 수단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불신 배우자를 구원으로 이끌 수도 있다.|(참조: W.Gunter).||(e) 고전 7:36 이하에서 딸의 결혼에 관한 말은 언제든지 문제로 되어 있다.|* 적혼기를 지난 미혼녀 딸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 문제로써 이 부분을 해석해 온 것이 전통적 견해이다. 바인(Vine)은 시사하기를 여기 관계된 기사는 딸이 결혼하는 것을 거부했을는지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딸의 결혼을 거부하는 일은 공정치도 않고 지혜롭지도 못한 행동이라고 그 아버지는 드디어 결정하게 된다. 완고한 거절이 딸을 반역하는 길, 혹은 아마 부도덕한 길로 몰아 넣게 될 것이라고 아버지가 단정하게 되었다. 그 딸은 결혼 의사를 표시했을 것이며 자제할 만한 능력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경우에 그 아버지는 혼인하게 해야 한다.|* 고려 중에 있는 본 구절에 관한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약혼 남녀에 관련된다는 것이다. 동일한 문제들을 같이 분담키 위해서 그들은 같이 살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성적 관계에 들어가는 일은 피한다. 바클레이는 시사하기를 그 약혼 남녀는 사실상 결혼했던 것이다. 그러나 육감적 결혼이 아닌 영적 결합에 대하여 그들은 의견을 일치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처음 결심은 육적 결혼을 위한 의욕 까닭에 폐기된다. 죄짓는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그들이 결혼을 해도 좋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해석하기를 이것은 아버지와 딸의 경우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결혼해서 부부로서 같이 사는 일이 죄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나 혹 그 약혼 남녀가 그대로 있기를 굳게 결심한다면 이 일 역시 실제적인 기독교 윤리의 한도 내에 있는 것이다.|딸이 결혼하는 일을 아버지가 거부한다고 하면 네 가지 조건에 의해 결정해야 된다.|첫째로 딸이 독신 생활하는 일(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는 일)이 좋겠다고 확신해야 한다.|둘째로 아버지는 딸이 결혼에 관해서 특별히 흥미를 가지는 일이 없든가 또는 성적 감정으로 괴로움을 갖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세째는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자유가 있을 때,|네째로 일단 결정을 내리면 마음을 굳게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하며 미정된 상태에서 그 문제를 방임해서는 안된다.|그 딸이 결혼하든지 독신으로 머물러 있든지 간에 실제적 결과를 동반하는 것 뿐이지 영적인 우월성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잘한다"와 "더 잘한다"(고전 7:38)는 본장의 결론이다. 잘한다는 결혼이 더럽히는 일도 아니고 거룩치 않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 잘한다는 일종의 사도적 판단인데 독신 생활이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환란을 피할 수 있고 주를 섬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얻게 되는 까닭이다.||(f) 가메오는 고전 7:39 이하에서 그리스도인의 재혼에 대한 언급에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 바울은 독신 생활을 권장하고 있으나 결혼에 관해서 높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게 결혼이란 것은 일생 동안의 협정이었다.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 그러나 남편이 죽게 되면 그 과부는 아주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다. 그러한 종류의 재혼의 경우에 바울이 제한한 또 하나의 조건은 그리스도인 즉 주 안에 있는 자와 합해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서까지도 바울은 첨가해서 말하기를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 즉 독신으로 있는 일이 더욱 복된 일이라는 것이다.|바울은 편협한 금욕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고도 있지만, 사실상 그는 기독교의 일반 법칙으로서 결혼을 권장하고 있으며, 독신 생활을 윤리적이거나 영적으로 우월한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결혼에 관해서 여기에 표현된 바울의 견해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제시한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독신으로 머무는 일을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막으려고 바울은 편지를 쓴 것이다. 환난이나 위급한 때에는 독신으로 있는 것이 책임도 덜하고 세상에 관한 일반적 사건들에 관한 염려를 덜하게 된다고 한다. 결혼과 재혼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상식적인 견해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결혼, 재혼 문제를 결정하는데 바울은 개인적 선택 여하에 일임해 버리고 영적인 강약 문제로 그 결정 표준을 삼지는 않았다(D.S.Me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