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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에폽튜오
ejpopteuvw
보다, 관찰하다 observe.||#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폽튜오(Homer 이래)는 에피코레게오($2023)에서 유래했으며, '보다, 관찰하다, 조사하다'를 의미한다. 70인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에폽튜오는 신약성경에서 2회, 베드로전서에만 나타난다.|벧전 2:12에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주목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3:2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볼 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참조: J.H.Thayer; Walter Bauer; W.Michaelis).
친히 본자
ejpovpth"
구경꾼, 즉 관찰자, 목격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폽테스(Aeschyl. 이래)는||(a) '감독, 조사자',|(b) '구경꾼, 즉 관찰자, 목격자'를 의미한다. 밀의 종교에서 에폽테스는 '환상에 참여자'를 가리킨다.||#2. 70인역본의 용법||에폽테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항상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에스텔 5:1; 마카베오이서 3:39; 7:35; 마카베오삼서 2:21).||#3. 신약성경의 용법||에폽테스는 신약성경에서 벧후 1:16에서 한번 '관찰자나 목격자'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참조: J.H.Thayer; Walter Bauer; W.Michaelis).
할 수 있나니
e[po"
'말' word.||명사 에포스(Homer 이래)는 '말' word을 의미하며, 주로 정신적 상태에 대한 명백한 표현으로서의 '말'을 가리킨다.|신약성경에서 에포스는 히 7:9에 한번 '말'이란 의미로 나온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천(부,국)
ejpouravnio"
하늘의 heavenl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에푸라니오스(Homer 이래)는 에피($1909: 위에 on, upon)와 우라노스($3772: 하늘)에서 유래했으며, '하늘의, 하늘에 있는' 즉 '신성한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에푸라니오스는 70인역본에서 7회 나오며, 시 68:15에서 히브리어 삿디(7706: 전능자), 단 4:23에서 셰마이야(8065: 하늘)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하늘에 계신자, 곧 '하나님이나 전능자'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에푸라니오스는 신약성경에서 19회 나오며, 형용사와 실명사로 사용되었다.||(a) 에베소서에서 공식 문구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하늘에 속한")'가 나타난다.|①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② 엡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③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④ 엡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유사한 구절들과 비교는 그 의미를 보여 준다. 엡 1:20(비교: 엡 2:6)에서 규칙적으로 동일한 구절의 다른 인용에서와 같이(참조: 하나님의 보좌) 시 110:1의 카디제인 엔 덱시아 아우투(그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는 '우라노스(하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엡 1:20이 정확히 같은 의미의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를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엡 3:10; 엡 6:12에 따르면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즉 하늘에 있는 '아르카이'(정사들)와 엑수시아이(권세들)은 우라노이(하늘들)에 거주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골 1:16; 참조, 엡 3:15 등. 이 모든 구절들에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는 실질적으로 간결한 '엔 토이스 우라오이스'(하늘에서)와 완전한 동의어이다. 하나님 자신과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세계에 속하며, 그의 오른 손으로 인하여 보좌와 통치권이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그 용어는 우라노스(하늘)처럼 공간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는 구약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관념뿐만 아니라 하늘의 세계 위로 올리우신 그리스도께서 그 세계의 정복자요 통치자로서 다스리시는 하늘 나라(엡 4:10)와 일치하는 것을 보게된다.|이 세계 자체는 이 영역을 지배하고 구성하는 "불명확하고 무수하게 많은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불명의 영적인 세력들"로 가득찬 것으로 생각된다(엡 3:10; 엡 6:12).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대한 이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참여하며(엡 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복으로 복 받는다(엡 1:3). 그들이 하늘에 있는 세력들에 대항하는 싸움을 견디어내는 위치에 앉게 된다는 것은 하늘에서 그들의 그리스도가 승리의 행진을 할 때에 그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엡 4:9 이하). 여기에 그 세계(코스모스)에서의 그리스도의 신비가 나타난다(엡 3:10).|이들 마지막 두 절 속에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는 최전면에서 계시의 사건의 우주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똑같은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 복수 우라노이에도 적용된다.||(b) 히브리서에서 에푸라니오스는 하늘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들어가시는 완전한 하늘의 지성소에 대한 사상에 의해 그 특징이 주어진다.|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이 구절들에서 특이한 점은 하늘의 실체들(또는 그릇들 vessels)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전히 그것들은 참된 하늘에서 그것들이 그 안에 흡수된 것 같아 보이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관련된다. 그것들은 알레디나('참된 것', 히 8:2; 히 9:24)와 멜론타('오시는 것', 히 9:11; 히 10:1; 히 11:20; 히 13:14)로 정의된다. 에푸라니아(하늘에 속한)은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종말론적 미래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완성이나 종말을 뜻하므로, 예를 들면 고전 15:48과 요 3:12의 "땅의 일"처럼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유사한 것이 있을 뿐이다(히 8:5; 히 9:23; 히 11:16; 참조: 히 7:19; 히 7:22; 히 10:34; 히 11:35). 따라서 구약성경의 모든 것은 단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히 8:5; 히 9:23). 히 9:24의 아우토스 호 우라노스(바로 그 하늘, "참 하늘")와 일치하는 에푸라니아(하늘에 있는 것)의 본질은 미래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이며, 그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향하여서만 실체가 존재한다(히 9:24; 참조: 계 12:10).|히브리서에서 타 에푸라니아는 이 정도로 엄격한 종말론적 개념이다. 히 3:1에서 '글레시스'(부름)가 에푸라니오스로 묘사될 때(참조: 빌 3:14), 이것은 그것의 근원과 목표를 나타낸다. 그것은 '타 에푸라니아'를 다스리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대제사장에게로 향하고 통한다. 히 6:4에서도 유사하게 우리가 맛본 은사(토레아)는 '하늘의 것'(헤 에푸라니오스)라고 불리운다. 히 9:23에서 차 에푸라니아와 실질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히 9:28).|히 11:14의 "본향"(파트리스)와 히 12:22의 예루살렘도 역시 에푸라니오스이다. 이것은 그것들을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묘사한다.|히 12:22은 광범위한 광경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하늘의 세계에는 천만 천사와 장자들의 공동체와 하늘에 기록된 자들과 심판자이신 만민의 하나님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속한다.||(c) 딤후 4:18에서 그리스도의 왕국(바실레이아)는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강조와 함께 헤 에푸라니오스로 묘사된다. 통치권의 개념은 여기에서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이 왕국은 그리스도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그와 함께 있다.||빌 2:6이하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된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에서 사 45:23에서 취한 "모든 무릎"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추가되어 예배로 확장된다. 이것은 단지 지형상의 기록(하늘과 땅과 지옥에)이 아니다. 세 요소들 모두는 영적인 세력들을 지배하는 것에 관련된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명사로 사용된다; 그것이 남성으로 사용되든지 중성으로 사용되든지 간에 차이는 없다. 땅과 땅 아래의 세력들과 함께 하늘(복수, 빌 3:20)에 있는 자들도 모두를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속으로 정복되고 통합된다(참조: 골 1:20; 엡 1:10).|유대교에서 이들은 천사류의 피조물들이며 반면 그노시스적 헬라적 세계에서 그들은 운명의 세력들이다. 비슷하게, 비록 신학적인 강조는 없다 할지라도, 에푸라니아(복수)는 고전 15:40에서 에피게이아("땅에 속한")와 대조되어 소마타("형체")와 그들의 독사(영광)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에푸라니아에 대한 구체적인 관계에서 바울은 "해, 달, 별"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 언급은 우리가 감각하는 몸(형체)에 대함 것이 아니라 하늘의 사물들, 천사의 힘과 동일시되는 별들의 형체에 대한 것이다. 별이든 천사적 권능들이든-하늘 존재의 유형적인 형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선재해 계시며 부활하시어 다시 오실 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의 사람이시며, 그의 형상 즉 그의 유형적 형태인 기독교인들은 재림 때에 그를 영접할 것이다(고전 15:48 이하).||(d) 요한복음에서 요 3:12의 에푸라니아(복수)는 요 3:13-요 3:16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 말씀은 이 땅에의 여행과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위해 땅에 내려오시고 예수님의 순종에 의해 성취된 인자의 재회를 포함한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세상에 의해 하늘의 일이 숨기워진다는 특성을 가진다. 문맥상 요한복음의 '우라노스'(하늘)의 용법과 일치하는 내용에서 그 구절들은 아들에 의해 계시되는 하나님의 비밀을 표현한다.|(참조: H. Bietenhard; H. Traub).
이레
eJptav
일곱, 칠||#1. 고대 문헌||고대에 모든 종교사를 통하여 일곱($2033)이라는 수가 가진 성질로 본 의미는 원래는 달의 네가지 변화와 일치하는 7일이라는 기간을 단위로 때(시기) 가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설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정말 놀라운 정확성이다. 왜냐하면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직선적인 시간의 연속이 없었고 시간을 단지 하나의 기간으로만 이해 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일곱은 성취된 기간, 또한 완전히 완성된 기간의 상징이 되었다.|바빌로니아인들에게 칠(킷사투 kissatu)이라는 수는‘충만, 완전, 전체’와 같은 뜻이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상당어 셰바(칠, 일곱)도‘충만’을 나타낸다(잠 3:10, 이곳에서 RSV는 '일곱'을 나타내는 이 히브리어를‘가득히 with plenty’로 번역한다). 일곱은 완전, 전체의 상징이다.||#2. 구약성경의 용법||구약성경은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이미지의 내용을 셀 수 없이 많은 방법들로 받아들였다. 곧 칠일 간의 창조는 창조의 완성이며(창 1:1 이하), 칠일간의 절기는 완전한 기간이다(레 23:6; 34).|일곱번 반복되는 피뿌림은 완전한 정화을 의미하며(레 I6:l4,I9), 여호와께서 가인을 해하는 자에 대해 칠배의 벌을 약속하신 것은 그에 상당하는 충분한 신적 응보를 약속하신 것이다(창 4:I5).|왕하 4:35 이하에서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그 아이는 일곱번 재채기를 했다. 이것은 그가 실제로 다시 살아난 것을 나타낸다. 일곱번 재채기는 생명이 전과 같이 완전히 소생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슥 4:10에서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개의 눈은 모든 것을 완전히 감찰하시고 돌보시는 것을 나타낸다.|사 30:26에 햇빛의 칠배는 구원의 시대의 성취를 나타내는 표적들 중의 하나이며, 비유적으로 진리의 빛의 충분한 조명과 그 결과인 진리를 아는 지식의 충만(참조:사 11:9)을 의미한다.|10x7년은 인생 수명의 만수(full life span)를 가리키며(시 90:10; 사 23:15), 일곱의 배수는 주로 전체를 의미하는 대략적인 수를 나타낸다(창 46:27; 삿 20:16; 참조, 마카베오사서 8 이하에 나오는 일곱 유대 형제들의 어머니는 15:29에서 '민족의 어머니'로 칭해진다). 잠언 20:16에서 일곱은 사실상 '모든 것'을 의미한다.|유대 사상들에 의하면 총 70 민족들이 지상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디오피아어 에녹서 89:59 이하). 이 사상은 창세기 10장에 열거되어 있는 70 민족 일람표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이 사상은 세상의 70 민족을 위한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본의 명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참조, Aristeas; 70인역본의 기원에 대한 전설).||#3. 신약성경의 용법||헵타는 신약성경에서 88회 나오며, 대부분 계시록(56회)에 나온다. 그리고 공관복음에 28회, 사도행전에 8회, 히브리서에 1회 나온다.||(a)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 일곱이라는 수는 구약성경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배경으로 하여서만 나온다. 롬 11:4(참조: 왕상 I9:I8), 히 4:4(참조: 창 2:20; 히 11:30[참조: 수 6:1이하]) 등에서 그러하다.|롬 11:4에서 바울은 왕상 19:18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배교의 시대에 자신의 충실한 신앙인 7000명을 보호하고 있다고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에서,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의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시대에 이미 이스라엘의 기독교인인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을 예증하는데(롬 11:6) 그들은 낮을 전달하는 새벽으로서 진실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b) 복음서의 몇몇 구절에서 고전 또는 구약성경의 용법에 영향을 받는다.|막 I2:18에서 사두개인들은 죽은 사람의 형제들과 일곱번이나 결혼한 여인의 경우를 상상해 낸다(신 26:5 이하). 이들은 일곱번 반복된 결혼에 대한 이 예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제정되었지만 이런 결혼의 모든 경우가 부활은 불합리함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했다.|마 12:43 이하에 헵타 프뉴마(일곱 영; 병행구, 눅 11:26) 들린 자는 완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이다.|눅 8:2에 다이모니아 헵타(일곱 귀신; 참조: 막 16:9)가 나간 경우,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한 축귀로 더 나쁜 상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마 I8:2I에서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에 대한 질문을 하고,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이곳에서 "일곱 번"은 숫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일흔 번씩 일곱 번" 은 '전적으로' 나 '무제한적으로'를 의미한다(참조: 눅 17:4).||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대략 모두 일곱이라는 수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었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14 세대의 세 무리를 이룬다. 곧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 그리고 그후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이다(3×14=3×2×7). 눅 3:23이하는 예수님의 77인의 조상들을 열거한다. 곧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3×7), 이삭에서 다윗까지(2×7), 나단에서 스알디엘까지 즉 포로기의 마지막까지(3×7), 스룹바벨에서 예수님까지(3×7)이다. 이 두 복음서 기자는 모두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의 역사의 성취, 곧 구원의 역사(마태)와 세계 역사(누가)의 성취에 관심을 갖고 있음이 명백하다.|누가복음 10장에 70인 제자의 파송은 세상의 70 민족에 대한 사상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70인의 선택은 예수님과 그의 목표의 세계성을 나타내며, 세계의 민족들을 겨냥한 것이다.||(c) 요한계시록은 모든 신약성경의 기록들 중에저 일곱이란 수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계 1:4; 계 1:11; 계 2장), 일곱 금 촛대(계 1:13 이하), 일곱 별(계 1:16 이하), 일곱 영(계 1:4; 계 4:5), 일곱 인(계 5:1),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 양(계 5:6),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계 8:6 - 계 11:15), 일곱 우뢰(계 10:4 이하), 일곱 재앙(계 15:1 이하) 등이 나온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수의 실제적 의미를 고려해야 하지만, 확실히 그것은 완전(성)이란 의미를 가지며, 본질적으로 그 안에 흐르는 의미는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이다. 이곳의 7이라는 숫자는 자기의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관할하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시며, 이루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현현을 나타낸다.|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권능에 적대적인 용이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다(계 12:3 이하; 참조: 계 13:1; 계 17:3 이하). 여기에 일곱 이라는 수도 하나님의 권능에 적대하는 세력의 충분한 발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묘사가 이 적대적인 세력이 적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묘사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방법을 모방한다는 것을 읽는다(참조: 살후 2:4; 고후 11:14).|일곱이라는 수는 요한계시록의 구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가지의 연속된 환상들로 이루어지며, 각 환상은 차례로 일곱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일곱 가지 환상들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칠일과 일치하는 것같다. 창세기 기사는 물질적인 창조를 다루는 반면에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적 입장에서 새 창조에 비추어 물질 세계를 다룬다. 이것의 광범위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제1일, 빛이라는 주제: 어두운 세상의 촛대인 일곱 교회 가운데 계신 빛되신 그리스도(계1-3장).|제 2일, 궁창이라는 주제: 하늘의 관점에서 본 세계 역사, 장차 일어날 일을 계시하는 일곱 인(계 4:1 - 계 8:2).|제 3일, 땅, 바다, 그리고 식물이라는 주제: 일곱 나팔의 환상을 통해 계시된 물질 세계의 미래(계 8:3 - 계 11:I8).|제 4일, 해, 달, 그리고 별들이라는 주제: 나타난 일곱 가지 사항들(계11:I9 - 계 l6:1).|제 5일, 물로부터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 일곱 대접(계 I5:2 - 계 l8:24).|제 6일, 인간이라는 주제: 큰 음녀에 의한 인간의 타락이라는 표현으로 아담과 하와라는 주제를 채택하여 나타내는 일곱 가지의 마지막 사건들과 사단의 심판과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한 것을 다시 회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으로 인도하는 죽음(계 I9:1 - 계 21:8).|제 7일, 영원한 안식일이라는 주제: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으로 묘사(계 21:9 - 계 22:21)된다. 계속 이어져 있는 일곱 개의 환상은 한 사건이 끝나면 하나가 시작되는 연속적인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보아 역사의 종말과 새 창조를 점차적으로 진행시키는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완성까지의 세계 역사에 대한 일련의 환상들로 나타난다.||(d) 일곱은 행 20:6; 계 2l:4; 계 28:14, 그리고 아마 마 15:34; 마 15:36; 마 15: 37; 마 16:10; 막 8:5; 막 8:8; 막 8:20에서 대략적 수로 나온다.|(참조: E. D. Schmitz, DNTT; Rengstorf, TDNT)
헵타키스
eJptakiv"
일곱번 eventimes.||#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헵타키스(Pind., Arstph.)는 헵타($2033: 일곱)에서 유래했으며, '일곱번'을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헵타키스는 70인역본에서 약 26회 나오며, 히브리어 쉐바(7651: 일곱, 레 26:18; 레 26:24; 레 26:28; 시 119:164; 잠 24:16), 쉬브아타임(일곱배, 일곱번, 창 4:24), 세마 페아임(일곱번, 창 33:3; 레 4:6; 레 4:17; 레 8:11; 레 14:7; 레 14:16; 레 14:27; 레 14:51; 왕하 4:35; 왕하 5:10; 왕하 5:14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헵타키스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사용되었다.|마 18:21; 마 18:22(병행구 눅 17:4)에서 헵타키스는 '일곱번'을 의미한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이 일곱번 죄 짓고 일곱번 용서하는 것에 대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용서할 각오가 범죄의 정도에 상응하든지 초월하든지 좌우간 용서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흔번 씩 일곱번 죄 짓는 것이나 일곱번 용서를 구하는 것을 언급하는 참회의 시편들에서처럼, 바벨론에서 이미 7이란 숫자는 죄 및 죄 용서의 준비와 관련된다.|구약성경에서 피는 속죄일에 7회 뿌려진다(레 16:11 이하; 레 16:15 이하). 그런 모든 언급들의 요지는 죄나 속죄의 완전함이다(참조: 삼하 12:6의 70인역본). 우리는 창 4:24을 마 18:22의 일흔번 씩 일곱번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올바른 번역이 490번이든지 77이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되는 바는 분명코 용서의 무한정한 본질이기 때문이다.|(참조: K. H. Rengstorf; E. D. Schmitz).
칠천
eJptakiscivlioi
칠천 eventhousand.||#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헵타키스킬리오이(Hdt. 이래)는 헵타키스($2034: 일곱번)와 킬리오이($5507: 천)에서 유래했으며, '칠천'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헵타키스킬리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롬 11:4에 한번 나온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바울과 같이 "남은 자"들도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엘리야 시대 못지 않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었다.|바울의 주장처럼 엘리야 시대와 바울 당시의 사태는 매우 비슷했다. 영적인 상태가 동일했던 것이다. 엘리야 시대에 그랬듯이 바울 당시에도 그 민족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저버렸다. 그러나 그때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신실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W. M. Greathouse).|(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에포
e[pw
말하다, 대답하다, 명령하다||기본 동사 에포는 '말하다, 대답하다, 명령하다'를 의미하며, 한정된 과거 시제로만 사용되며, 단어에서 에이폰(%5000)이 유래되었으며, 이 항목에 포함한다. 에이폰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나온다.
에라스도
#Erasto"
에라스도 Eratus(인)||에라스토스는 '사랑하는'을 뜻하며, 흔한 헬라어 이름이다. 한글 개역에는 '에라스도'라고 음역되었다.|신약성경에서 '에라스도'는 3회 나오며, 바울의 동역자로 세개의 별개의 경우에 그 이름이 나타난다.||#1. 바울의 동역자.||행 19:22에 보면 에라스도는 바울의 심부름으로 디모데와 함께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보내어진 동역자이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2. 고린도 성의 재무.||롬 16:23에 의하면 에라스도는 로마에 있는 크리스챤에게 문안한 고린도의 "성의 재무"이다: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에라스도는 그 성의 재산이나 재정 일을 보는 청지기 혹은 감독자였다. 이런 공무원은 종종 부자이긴 했으나 주로 노예였거나 자유민이었다. 1929년에 고고학자들이 고린도에서 라틴어로 쓰인 비문을 시추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공무 감독관(조영관) 에라스도가 자신의 비용으로 이 도로를 포장했다." 그 사람이 로마인 에라스도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가 행 19:22의 바울의 동료 에라스도와 동일인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3. 고린도에 남았던 바울의 동역자.||딤후 4:20에 보면,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남았던 바울의 전도 여행의 동역자로 신원에 대한 언급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바울과 친밀한 조력자였다.|이들 둘, 혹은 세 사람 모두가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참조: H. J. Cadbury; W. Miller; C. H. Lenski; D. E. Hiebert).
일을 하다
ejrgavzomai
일하다, 창조하다, 생산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르가조마이(Homer 이래)는 에르곤($2041: 일, 행위)에서 유래했으며,||(a) '일하다, 어떤 일에 종사하다, 노력하다, 노동하다',|(b) 타동사로 '창조하다, 생산하다, 실행하다, 가공처리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르가조마이는 70인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아바드(5647: 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 창 3:23; 민 8:11; 신 5:13; 삼하 5:13 등), 파알(6466: 행하다, 만들다, 욥 33:29; 시 6:9; 시 119:3; 합 1:5 등), 가말(1580: 행하다, 잠 3:30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르가조마이는 신약성경에서 총 41회 나오며, 그중 17회는 바울 문서에서 나온다. 에르가시아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5회, 에베소서에서 1회 나온다. 에르가테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일차적으로 제한되어 있다(총 16회 중 마태복음에 6회, 누가복음에 4회 나옴).|에르가조마이는 호머 시대로부터 '일하다' work, '활동하다' be active(자동사), '생산하다' produce, '일으키다, 해내다' bring about, '수행하다' carry out(타동사)를 의미힌다.||(a) '일하다'라는 일반적인 의미는 신약성경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난다(눅 13:14; 요 9:46; 행 18:3; 고전 9:6; 살후 3:10; 살후 3:12).|바울은 생계를 위해 밤낮으로 '일하며'(살전 2:9; 살후 3:8; 고전 4:12의 그의 일로 인한 수고)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행실의 일부로서 손으로 일하기를 고무한다(살전 4:11).|마 25:16은 '일하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b) 요한복음에서 에르가조마이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신다(요 5:17; 참조 요 9:4). 왜냐하면 예수님은 계시자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대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보냄받은 계시자를 믿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행한다(요 6:28 이하). 에르가 에르가조마이라는 표현도 이미 70인역본에서 흔히 나타나며(출 31:5; 민 8:15 등) 신약성경에서 빈번히 발견된다(마 26:10 병행구 요 3:21; 요 9:4; 합 1:5을 인용한 행 13:41; 고전 16:10).||(c) 바울은 에르가조마이를 '일을 수행하다' perform works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따라서 주제는 일(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나 일(행위)에 따른 심판의 범위 내에 들어오게 된다.|로마서 3장에서 일(행위)은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것 만큼이나 밀접하게 율법과 결합되어 있다. 롬 2:10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을 언급한다(마 7:23; "불법을 행하는 자들"; 요이 1:8); "선을 행하는 것"은 선한 일이라는 개념을 암시하며, 이 선한 일은 마지막 심판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은택을 받는 기준이 된다.||(d) 약 1:20에서 에르가조마이는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참조: K. Berger). 약 1:20에서는 단순히 '행하다'로 번역한다 할지라도, 고후 7:10에서는 카테르가조마이, 즉 '일으키다, 낳다, 생산하다'의 의미를 취하며, 한 계열 내에서 파생과 기원을 나타내게 된다(Horodotus ⅶ 102; T. Tos. 101; 롬 4:15; 약 1:3).|(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Heiligenthal).
벌이
ejrgasiva
일, 사업 business, 이익, 노력.||#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르가시아는 에르가조마이($2038: 일하다, 행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행함, 실행함',|(b) '일, 사업'(Xen.),|(c) '일로써 얻은 이득, 이익'(Xen.),|(d) '노력, 노고'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르가시아는 70인역본에서 45회 나오며, 믈라카(4399: 직업, 재산, 일, 솜씨, 완성품; 레 13:15; 대상 6:34; 대하 4:11), 아보다(5656: 노동, 봉사, 일, 노역, 종살이, 섬김; 창 29:27; 대상 6:33; 대상 26:30; 시 104:23)의 역어로 '일, 제품, 봉사, 섬김, 수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르가시아는 신약성경에서 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엡 4:19에서 '행함'을 나타낸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b) 행 19:25에서 '사업'을 의미한다: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c) 행 16:19에서 '이익'을 나타낸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행 19:24에서도 일로서 얻는 '이득'을 나타낸다.||(d) 눅 12:58에서 '노력'을 의미한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역군
ejrgavth"
일군, 노동자, 행위자.||#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르가테스(trag., Hdt. 이래)는 에르가조마이($2038: 일하다, 노력하다, 노동하다)에서 유래했으며,||(a) '일군, 노동자'(Soph.),|(b) '행하는 자, 행위자'(Xen., Mem.)를 의미한다. 일반 헬라어에서 에르가테스는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는 자를 지칭하고(Euripides El 75), 그 다음으로 특별히 직업적인 무리의 일원으로서 임금을 받기 위해 일하는 자를 가리키며(농부: Philo Agr. 5; Josephus B. J ⅳ 557), 또 노예(종들)를 가리킨다(Josephus Anto ⅹⅱ. 194).||#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르가테스는 70인역본에서 외경에만 3회 나오며, '노동자, 일하는 사람'(지혜서 17:17; 집회서 19:1; 40:18; 마카베오일서 3:6)을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르가테스는 신약성경에서 16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마 10:10(병행구 눅 10:7)에서 에르가테스는 양식이나 대가를 받기에 마땅한 일반적인 의미의 '일군' worker을 의미한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b) 마 9:37 이하(병행구 눅 10:2)은 '농부' farm worker를 의미한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c) 마 20:1 이하; 마 20:8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군'을 가리킨다.||(d) 약 5:4에서 나누기를 싫어하는 부자를 향한 심판의 설교에서 재물을 소유한 주인들의 죄과는 그들의 '일군'의 급료를 착취한 사실에서 구체화된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e) 사도들과 교사들은 비유적 의미에서 '일군들'로 묘사된다. 한 뜨거운 논쟁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거짓 사도들을 에르가타이 돌리오이라고 부른다(고후 11:3). 카코이 에르가타이(빌 3:2, "행악하는 자")는 바울의 반대자들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선교적 활동을 가리킨다. 바울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에르가테스를 사용하는 주목할 만한 사실이 목회서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딤후 2:15에서 거짓 교사들과 대조적으로 디모데는 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이 되라는 격려를 받는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R. Heiligenthal).
공력
e[rgon
일, 행위 work.||#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르곤(Homer 이래)은 폐어 에르고(%760: 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일, 행위' work를 의미한다. 호머로부터 자주 나오는 이 단어들은 행동이나 적극적인 열심을 나타낸다. 이 단어들은 여러가지 재료들을 가지고 일하는 온갖 종류의 일들, 건축, 그리고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활동과 관련하여 나온다. 이 단어들은 또한 사회적인 임무나 도덕적인 임무로서의 일도 나타낸다. 헤시오드(Hesiod)는 일을 인간 생활을 위한 신의 계획으로 묘사하고, 견유학파의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나의 이상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일을 자연이 아닌 문화와 관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피조물이 자기의 에르곤을 완성할 때, 그 피조물은 선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이 개념을 자연의 모든 것에게까지 확대시킨다. 수동형은 행해진 일, 즉 일의 결과나 심지어 품삯이나 소득으로서의 일의 보상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약한 의미에서 이 용어는 또한 '문제' matter나 '일' thing을 의미하기도 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르곤은 70인역본에서 약 570회 나오며, 히브리어 물라카(4399: 일, 직업, 창 2:2; 출 31:5; 출 36:4; 레 16:29 등), 마아세(4639: 행위, 일, 창 5:29; 출 23:24; 시 145:4 등), 포알(6467: 행위, 일, 등, 욥 36:9; 신 9:17; 시 77:13; 잠 24:12 등)의 역어로 사용되었다.|70인역본에서 이 단어는 도덕적, 종교적 영역에서 특히 중요하며, 이 영역에서 '행위, 행실'을 예로 들 수 있다(욥 34:21; 잠 16:5; 집회서 10:6 등).||#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르곤은 신약성경에서 169회 나오며, 성경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공관복음에 단 10회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9회만이 하나님, 그리스도, 주님과 함께 속격 어구가 나타난다.|한편 '선한 일'에 대해 사용된 전체 30회의 용례 가운데 15회가 목회 서신에서 발견된다. 에르곤과 노모스의 관계는 바울에게 전형적인 것이다(로마서에 3회, 갈라디아서에 6회 나온다). 에르곤과 로고스의 결합은 모두 7회 나온다.||(a) ① 신약성경에서 에르곤은 일반 헬라어에서처럼 '일' work, '임무' task를 의미한다. 에르곤 투 퀴리우(고전 15:58; 고전 16:10; 빌 2:30; "주의 일") 어구에서 그러하며, 속격이 일을 위임하는 자를 지칭해 준다.|전치사구 에이스 에르곤은 행 13:2; 행 14:26; 행 15:38에서 선교적 임무를 가리킨다(참조: 빌 1:22; 살전 5:13; 딤후 4:5).|에르곤과 로고스의 병치는(Xenophon; Epictetus; 집회서 3:8; 참조: 35:22; 마카베오사서 5:38; Josephus Ant)는 인간의 행실의 통일성을 포함하고(고후 10:11; 골 3:17; 요일 3:18 등) "말과 일에 능하고"라는 관용 문구에서는 선지자적 능력을 확증한다.|② 에르곤은 자주 행한 일이나 행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일'로서(히 1:10; 히 4:3; 히 4:4 등), 예수님의 일로서(마 11:2; 행 13:41; 계 15:3; 요한에 대해, 특히 기적에 대해), 인간의 일로서, 그들 행위의 전체성을 지적한다. 인간의 일에 대해서 집합적 토 에르곤이 복수 에르가 대신 사용된다(갈 6:4; 히 6:10; 계 22:12).|속격 어구에서 에르곤은 어떤 능력이나 무리에 대한 관계 양식을 표현한다(롬 13:12; 갈 5:19; 엡 5:11; 요일 3:8; 참조: 계 2:6; 또 롬 2:15; 롬 3:20; 갈 2:16; 갈 3:2; 갈 3:5; 갈 3:10).|카타 타 에르가는 심판에서 평가 기준이다. 인간의 일은 아가론이나 칼론으로 묘사되거나(마 5:16; 행 9:36; 롬 2:7 등, 특히 목회서신에서) 포테론, 네크론, 아칼폰 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골 1:21; 히 6:1; 히 9:14; 엡 5:11).||(b) 요한은 예수님의 일(work, 요 4:34; 요 17:4)과 예수님의 일들(works, 요 5:20; 요 5:36; 요 9:3 이하; 요 10:25; 요 10:32; 요 10:37 이하; 요 14:10-12) 양자 모두에 대해 말한다. 단수는 일의 일치성(통일성)을 강조한다.|예수님의 일은 그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한다(요 5:36; 요 10:25; 참조: 요 7:7).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어떤 일과 같이 이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계시적인 일을 나타낸다(R. Bultmann). 계시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work)의 실현이(요 4:34; 요 5:36; 요 17:4; 참조: 요 9:4) 제자들의 메이조나 에르가(더 큰일)의 활동에서 계속된다(요 14:12; 카리스마적인 자의 죽음 이후에 그의 일들은 제자들에게서 증대하고 증가할 것이다: 참조: T. Job 47ff; 행 2:22; 행 2:43). 에르가 투 크리스투(그리스도의 일)도 마 11:2-6에서 합리적인 증거로서 역할한다.||(c) "일에 따른 심판"이라는 셈어적 배경은 신약성경과 외경에서 일반적인 것이다(집회서 16:12 이하; 에스라사서 7:34 이하; 에녹1서 63:8 이하 등). 행위(일)의 인격화(딤전 5:24 이하; 계 14:13)와 "선행의 보고"(딤전 6:18; 참조: 마 6:20; 눅 12:33) 같은 사상과 나란히 전치사구 카타 타 에르가(롬 2:6; 고후 11:15; 벧전 1:17; 계 2:23 등)는 특히 일(행위)에 따른 심판과 관련된다.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이런 주제를 취하는 형식의 특징은 도입이다. 따라서 현재적 종말론적 어구로 형식화 되어 있는 요 3:19-21은 예수님의 설교의 결론으로 나온다. 일에 따른 심판이라는 주제는 개인적 삽입을 도입하거나(벧전 1:17) 결론짓는데(딤전 5:24 이하) 모두 사용될 수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자유는 행위에 기초한 심판의 거부를 배경으로하여 전개된다.|롬 9:11 이하와 딤후 1:9에서 하나님의 자유는 개인이 어떤 이전의 행위를 갖지 않는 곳에서 깨달아 진다. 롬 2:6-11은 회개에 대한 종말론적 설교의 골격 안에서 행위에 근거한 심판에 관해 말한다(참조: Pr Man 7ff; T. Zeb. 9:6ff; Wis 11:23; Jub. 5:17ff); 이 말씀은 심판 앞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동등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말하며 인간의 행위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고전 3:13 이하에서는 마지막 심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에 대한 시험을 가리킨다('세움'이라는 의미에서 에르곤의 의미로 나옴, 참조: Peterson). 여기서 일(행위)의 실체화는 사람과 행위("공력")의 구분에 이용되며, 따라서 바울은 심판에서 개인의 멸망으로 그의 적대자들은 위협하지 않는다(고전 3:15). 현재의 행위와 공로에 따른 미래의 심판의 상호의존은 특히 심판하시는(자신의 공로에 대한 시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개인적 예기(기대)에서 특별히 표현된다.|행위(일)는 바울의 parenesis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다; 구시대나 새시대와의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행위에서 나타난다(롬 13:12; 갈 5:19 이하; 여기서 개개인의 행위들은 악덕의 목록에 낱낱이 열거되어 있다. 행위에 따른 인지[recognizability]의 주제에 대해, 계 2:19; 계 3:1; 계 3:8; 계 3:15 참조).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에서 구체화 된다(갈 5:19; 갈 5:22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병행됨을 참조하라; 참조: 롬 13:3; 고전 9:1; 고전 15:58; 고후 9:8).|목회서신에서 종말론적 관련은 배경 속으로 퇴각한다. 선행의 주제는 공동체 윤리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러므로 공동체 상황과 관련된 parenesis의 일부분으로 매우 중요하다(딤전 2:10; 딤후 2:21 등).||(d) 바울은 엑스 에르곤 노무와 코리스 에르곤 노무(롬 3:20 등)를 율법에 의한 구원의 옛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새로운 구원의 방식으로 대체되었음에 대해 사용한다. 에크 에르곤 노무라는 표현은 한편으로는 엑스 에르곤(롬 4:2; 참조: 롬 9:32)로, 다른 한편으로는 에크 노무(롬 4:16; 참조: 롬 4:13)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문맥에서 에르가는 율법과의 관계 양식을 나타내고,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대조되는 것을 나타낸다(롬 2:15에서 에르곤 노무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길을 택한 유사한 태도를 지칭한다. 단수는 진술의 기본적인 성격에 의해 설명된다).|바울은 은혜와 행위(일)의 대조를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창조 신학에서 끌어오고(Philo; 참조: 딤후 1:9; 딛 3:5) '일'과 은혜를 각기 다른 "세대"(ages)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롬 3:20; 롬 3:21; 롬 3:24). 칭의와 관련한 "믿음과 행위(일)"의 이와 같은 분리는 혁신적이다(참조: 에스라4서 7:34이하; 바룩2서 51:7; 마카베오일서 2:51이하 등에서 "믿음과 행위(일)"의 유사한 용법). 구원의 새로운 길에 대한 인간의 수용은 초기 기독교의 관용문구에 따른 피스티스와 크리스토스로 지적되고 은혜와 행위는 전통적인 대조를 이루므로(에스라4서 8:32, 36), 바울은 에크 피스테오스 크리스투(롬 3:26)를 새로이 형성된 어구 엑스 에르곤 노무와 대조할 수 있다. 이 때 요지는 믿음과 행위 그 자체 사이의 대조에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의 길에 의해 예전의 것이 대체되는 것에 있다.|롬 3:20-26은 갈 2:11-21에서 예시된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도와의 논쟁에서 나오는 갈라디아서의 사상을 채택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시간적 연속(율법의 시대=하나님의 참으심의 시대; 새로운 구원의 길의 계시의 시대)을 공식화한다.|약 2:14-26에서 논제는 피스티스와 디카이오오의 병렬을 아브라함의 전통으로부터 이어받으며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 함께 속하는 것으로 이해한다(약 2:26). 믿음에 대한 이해는 일차적으로 한분 하나님에 대한 지식 및 인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헬라적인 선교적 유대주의에서; Philo Op. 170-72; Virt. 216; 참조: 약 2:19). 고백과 윤리의 관계를 정의하는 문제는 여기서 믿음과 행위의 내적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해결된다(유대교에서 믿음과 행위는 함께 속한다; 위를 보라). 야고보서의 요지는 말과 행위 사이의 모순(불일치)를 피하라는 것이다. 믿음은 그것이, 즉 믿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행위를 통해서만이 증명된다(약 2:17; 약 2:26).|(참조: R.Heiligenthal).
격동 시키다
ejreqivzw
분발하다, 노엽게 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레디조(Homer 이래)는 에레도(화나게 하다, 흥분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자극하다, 격동시키다, 분발시키다, 노엽게 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레디조는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고후 9:2에서 에레디조는 좋은 의미에서 '분발시키다'를 나타낸다: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년 전부터 예비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b) 골 3:21에서 에레디조는 나쁜 의미에서 '화나게 하거나 노엽게 하다'를 나타낸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부딪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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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히 고정(착)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레이도(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받치다, 단단히 고정(착)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에레이도는 신약성경에서 행 27:41에 한번 나온다: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가니".|여기서 이 단어는 '부딪쳐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