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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헤르메뉴오
eJrmhneuvw
설명하다 explain, 해석하다 interpret, 번역하다 translate.||#1.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헤르메뉴오(Plat.)는 헤르메스($2060)에서 유래했으며,||(a) '설명하다, 해석하다, 상술하다'(Soph., Plat.).|(b) '지적(지시)하다, 표현하다'(Thu. Plat.)|(c) '번역하다'(Xenoph. Plato.)||#2. 70인역본의 용법||헤르메뉴오는 70인역본에서 4회 나오며, 히브리어 탈겜(해석하다, 번역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헤르메뉴오는 에 10:3에서 '번역하다', 욥 42:18에서 '묘사되다'라는 의미로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헤르메뉴오는 신약성경에서 4회, 요한복음과 히브리서에만 나타난다. 헤르메뉴오는 '번역하다, 의미하다'를 뜻한다.||(a) 요 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b) 요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c)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d)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참조: Walter Bauer; J.H.Thayer; A.C.Thiselton).
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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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메 Hermes||헤르메스는 고유 명사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허메'라고 번역되었다. 허메는 신약성경에 신의 이름과 어떤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나타난다.||#1. 어떤 신의 이름.||행 14: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헤르메스는 원래 헤르마(%372)의 영(spirit), 또는 이정표나 경계선으로 세운 돌무덤의 신령이었던 헬라 신이다. 따라서 그는 여행자들의 안내자이며, 행운, 다산 및 재주를 부여해 주는 신이 되었다. 헤르메스는 도둑들과 상인들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허메는 제우스와 마이아의 아들이었으며, 신들의 사자와 웅변의 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행 14:12에서의 허메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다(KJV와 ASV의 머큐리아스는 쥬피터가 제우스에 해당하는 것처럼 허메에 해당하는 로마 신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이 신들로 생각되었을 때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였기 때문에 허메로 불리워졌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오비드(Ovid)가 부지 중에 쥬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한 어느 한 부부에 관하여 썼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2. 어떤 그리스도인.||롬 16: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헤르메스는 바울이 문안한 한 그리스도인이다. 이 이름은 특히 노예들 가운데 이름으로 간직했던 흔한 이름이었는데, 아마도 허메가 행운의 신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참조: F. Foulkes).
허모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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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모게네 Hermogenes(인)||헤르모게네스는 '헤르메스(허메) 태생의'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허모게네'라고 음역했다.|허모게네는 신약성경에서 딤후 1:15에 한번 나온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허모게네는 바울이 마땅히 지원을 기대했을 때 그를 "외면한" 아시아 지방의 제자들 중 부겔로와 함께 언급된 사람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교리상의 변절로 본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서 두 번째 투옥되었을 때 바울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두려워 바울을 위하여 증언하기를 거절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허모게네와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브로와 대조적이었다(딤후 1:16).|"바울과 데클라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 Ⅱ. i)에서 데마와 허모게네는 그가 이고니온으로 도피했을 때 "위선으로 가득찬" 바울의 동료들로 지적되어 있다.|(참조: B. S. Easton; W. Hendriksen; D. E. Hiebert).
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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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는 것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르페톤(Homer 이래)은 헤르포(기다, 기어가다)에서 유래했으며, '기어다니는 것, 파충류'를 의미하며, 주로 뱀에 대해 사용되었다(Hom. Od., Eur., Andr.).||#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헤르페톤은 신약성경에서 4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헤르페톤은 네발 가진 짐승과 새들의 상대어로 사용되었다: 행 10:12; 행 11:6; 롬 1:23.||(b) 헤르페톤은 바다 동물의 상대어로 사용되었다: 약 3:7.|(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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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Red sea||에뤼드로스(Homer 이래)는 기본어이며, '붉은'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헤 에뤼드라 달랏사(홍해)라는 문구로 나타난다(Aeschyl., Hdt., Diod., Dit.).|70인역본에서 에뤼드로스는 약 30회 나오며, 히브리어 수프(갈대)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달랏사와 함께 '홍해'(히브리어 수프-얌)라는 의미로 나온다. 홍해는 인도양(Indian Ocean)으로서, 아라비아 및 페르샤 해안과 함께 그 두 개의 만에 걸쳐 있는 바다이다. 이 두 개의 만 중 동쪽에 놓인 것을 페르시아만(Persian Gulf)이라 부르며 그 맞은 편에 있는 것을 아라비아만(Arabian Gulf)이라 부른다.||신약성경에서 에뤼드로스는 2회 나오며, 헤 에뤼드라 달랏사("홍해")라는 문구로 나타난다. 이 홍해는 아라비아만의 윗 부분 수에즈만을 의미하며, 이 부분을 통해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으로부터 아라비아 해안으로 건너갔다(행 7:26; 히 11:29).|(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가져오다
e[rcomai
오다 come, 나타나다 appea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엘코마이(Homer 이래)는 '오다, 가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인격과 무생물에 다같이 사용되며, 전치사나 문맥에 따라 특별한 관계나 여러가지 어감을 지니며, 자연적 사건, 마음의 상태, 편지를 받는 것, 소유물의 이전, 혹은 계약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언급을 한다.|엘코마이의 제의적 용법은 특별히 중요하다. 헬라인의 헬라적 경건은 신이 인간에게로 오는 것 또는 인간이 신에게로 가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엘데(오다)라고 부르는 기도의 권고(참조: 시 80:2[79:3])는 고대의 여러 기도문이나 여러 마술 파피루스에서 발견된다(참조: S. Schnoider). 그러나 형식적인 유사성을 제의하면 이교도 예배와 성경의 예배 사이에는 연관성이 전혀 없다.||#2. 70인역본의 용법.||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1,000회 이상 나오며, 35개의 히브리어 단어 및 어군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보(가다, 도착하다, 들어가다)를 번역한다.|엘코마이는 70인역본에서 주로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제의적 기사에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성소에, 예루살렘에 오는 것,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 그의 말씀, 천사, 메시야, 시대, 구원의 날, 성령의 도래, 혹은 열방들이 하나님의 기업에로 옴에 대해 사용되었다. 시편, 욥기 등에서는 선한 것과 악한 것 모두, 특히 악한 것이 온다.||#3. 신약성경의 용법.||엘코마이는 신약성경에서 631회 나오며, 대부분 '오다, 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엘코마이는 인격체와 사물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때때로 오는 것은 나타나는 것, 공개적으로 나아오는 것, 현장에 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때때로 결정적 사건들, 자연적 현상, 조건 등에 사용된다. 눅 14:31에서 '적대적 접근', 행 19:27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 막 5:26에서 '더 악화되는 것'을 나타낸다. 눅 15:17에서 '자기 자신에로 오는 것', 고후 12:1에서 '새로운 주제로 옮겨 가는 것'을 나타낸다.||(a) 공관복음의 용법.|① 엘코마이는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이 어군은 신현현의 핵심을 묘사해 준다. 예수님께서 1인칭으로 엘돈을 사용하신 말씀은 그의 메시야 의식에서 나온 것이며 그의 메시야 임무를 진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러(막 1:38),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막 2:17), 새로운 생활 질서를 세우러(마 5:17), 땅에 불을 붙이러(눅 12:49), 그리고 불화를 조장하러(마 10:34 이하) 오셨다.|메시야로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왔으며(눅 19:10; 눅 9:56; 마 18:11), 그의 책무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막 10:45; 마 20:28). 예수님이 그의 생의 사역을 수행하는 방법은 마 11:18 이하; 눅 7:33 이하에 묘사되어 있으며, 세례(침례) 요한의 금욕주의와는 다른 이 세상의 좋은 것에 개방적이었다. 막 1:24; 눅 4:34에서 보면 귀신들은 예수님의 오심이 자신들의 파멸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오심을 비슷하게 묘사하였다.|② 엘코마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보면 종종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온다. 하지만 참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마 8:2; 마 9:18; 마 14:33; 마 15:25; 막 5:33; 참조: 마 2:2), 제의적인 행동을 수반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함으로,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기꺼이 내어 맡기는 것을 수반한다(눅 6:47; 눅 9:23; 눅 14:27). 만찬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오는 것, 혹은 오지 않는 것을 묘사한다(눅 14:17 이하). 탕자의 비유에서 오는 것은 또한 잃음과 멀어짐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눅 15:20; 눅 15:30).|③ 엘코마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0; 눅 11: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백성들은 오시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하여 찬양을 돌렸다(막 11:10). 이 나라는 권능으로 임한다(막 9:1). 미래의 이 나라는 영생을 의미하는 장차 올 세대와 동일하다(막 10:30; 눅 18:30). 미래의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 안에 그리고 그의 나라와 함께 오신다(마 16:28; 눅 23:42).|④ 엘코마이는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공관복음에서는 구원 시대를 열 메시야는 엘리야가 되돌아 온 뒤에 오실 자로 언급한다(마 11:14; 마 17:10; 마 17:12; 마 27:49; 막 9:12 이하).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실 그 분인지를 묻는다(마 11:3; 눅 7:19; 눅 7:20).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에 그를 메시야로 환영하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으로 환호하였다(마 21:9; 눅 19:38; 참조: 시 117:25 이하).|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 중에(마 16:27; 마 25:31), 하늘의 구름을 타고(마 24:30; 마 26:64와 병행구) 오실 약속된 메시야이시다. 이를 위한 때는 언제인지 예정되어 있지 않으며(마 24:42 이하와 병행구) 돌연히 임할 것이다(막 13:36). 메시야라고 사칭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먼저 올 것이다(마 24:5).|⑤ 엘코마이는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마 21:40의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아들을 박해한 농부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러 오시는 포도원의 주인이시다.|눅 13:6-눅 13:7의 무화과 비유에서 하나님은 과원에 와서 그 열매를 구하나 얻지 못했을 때 무화과 나무를 없애버릴 것을 명령하시는 주인이시다.|마 25:19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그의 종들과 회계하러 오사 상벌하시는 주인이시다.|⑥ 엘코마이는 결단의 날이 오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해서 엘류손타이 헤메라이("날이 이르다")라는 공식 문구에 의해 소개되는 일련의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눅 17:22; 눅 21:6; 눅 23:29; 마 9:15).|눅 22:7의 "무교절일이 이른지라"에서 이 날은 결정적인 어떤 일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일어날 날이나 절기이다.|막 14:41의 "때가 왔도다"에서 이 때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하는 시간이다.|눅 2:27에서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간" 시간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임을 암시한다.||(b) 요한의 기록들의 용법.|①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요한 문서들에서 광범위한 비유적 용법으로 사용되며 아울러 보다 강한 신학적인 내용을 지닌다. 1인칭으로 된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말씀들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논쟁적인 측면을 지닌다.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요 7:28; 요 8:42). 사람은 예수님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요 8:14).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있다(요 8:42).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요 5:43) 빛을 주고(요 10:10) 세상을 구원하려고(요 12:47) 오신다. 비록 그가 심판하려고 오신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요 12:47), 그의 오심은 심판을 의미한다(요 9:39). 왜냐하면 빛이 올 때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빛을 거부하기 때문이다(요 3:19). 그는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으며(요 18:37),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귀기울일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그의 출신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7:27)과 메시야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요 4:25)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야적 주장은 빛, 곧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러 왔고(요 1:7) 예수님을 장차 오실 분으로 인정하고(요 1:15), 세례(침례)-예수님의 현시(manifestation)로서 종말적 의미를 지니는 세례(침례)로써 그의 길을 예비하는(요 1:31) 세례(침례) 요한에 의하여 지지받는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다른 사람들은 도적들이요 강도들이다(요 10:8).|②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도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본다(요 3:26; 요 6:5; 요 10:41).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라고 초청한다(요 7:37). 이 초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은 제자가 됨으로써(요 1:47) 특별한 의미에서 오는 것이다(요 6:35). 제자들도 초대를 할 수 있다(요 1:46). 예수님은 오는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요 6:37) 그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요 6:35).|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에 대한 결정적 권위는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 오는 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다(요 6:45). 다음 그 대답은 아버지께서 그를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올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 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을 받아 오는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자유 결정은 하나님이 정한 결정이다. 요한의 기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택 사상이 놓여있는 것이다(요 6:65).|따라서 예수님께 오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신자들로서 그들은 이미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요 5:24). 그들은 "주(당신)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고백에 이른다(요 11:27).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며, 그의 기원은 신비로운 것이다(요 3:8).|예수님께 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계속 고집하는 결심에 근거하여 있다.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거나(요 5:40), 빛으로 오기를 거부하는 것은(요 3:20) 결국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이다.|③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오시는 것을 나타낸다. 요한에게 있어서 엘코마이는 부활 현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세 가지 신비를 기록한다:|·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없는 제자들에게 오셨다(요 20:19). 못과 창에 찔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주님의 정체를 확인하고 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함께 한 제자들에게 오셨다. 도마의 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영적 실체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요 20:26).|·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 때 음식은 주님의 임재로 신성하게 되었다(요 21:13).|④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낸다. 요 14:3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증거하신다. 요 21:22 이하에서도 이에 관해 언급한다.|그렇지만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요 15:26; 요 14:28).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지상에 오신 것과 같이 보혜사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공동체에 오신다. 보혜사의 오심은 예수님의 오심의 계속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혜사 성령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올 수 있게 한다(요 7:34; 요 8:21-요 8:22; 요 13:33).|⑤ 엘코마이는 요한복음에서 '시간의 도래'를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이 단어는 그의 오심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정한 시점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들은 요한의 공식 문구 엘 케타이 호라('때가 온다')에 의해 소개된다. 요 4:21에서 호라(때)는 미래의 구원의 때이다. 그러나 메시야의 구원의 때는 이미 동텄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요 4:21; 요 4:23). 이런 사실은 요 5:25의 부활의 때에도 적용된다.|이 점에 관해서 가장 의미심장한 진술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에 대한 언급이다. 그것은 요한에게 있어서 영화와 동시에 일어난다. 호라(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상 인간 역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간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종류에 대한 두 기사가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요 7:30; 요 8:20), 둘째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요 12:23; 요 13:1; 요 17:1).|요 16:2; 요 16:4에서는 제자들의 때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박해와 죽임이 있는 순교의 때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시대는 이미 주님 자신의 체포의 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요 16:32).|⑥ 요한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4:2에서 "육으로" 오신 자이고, 요일 5:6에서 "물과 피로" 오신 자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오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징조이다(요 2:18).|⑦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 언급한다. 영원한 하나님은 이미 오셨으며, 지금 오시고 계시며, 장차 오실 분이다(계 1:4; 계 1:8; 계 4:8). 그리스도는 빨리 오실 것이다(계 2:5). 교회는 그의 오심을 위해 살아가며(계 22:17), 그것을 대망하는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계 22:20). 그리스도는 도적같이(계 16:15) 구름을 타고(계 1:7) 오실 것이다. 그의 오심은 심판을 가져 올 것이나(계 6:17 등), 메시야적인 환난 후에(계 3:10) 그의 오심은 또한 기쁨도 초래할 것이다(요 19:7).||(c) 바울 서신의 용법.|①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언급보다 그의 종말론적 오심에 관한 언급이 더 많다. 그의 초림에 관한 언급은 엡 2:17; 딤전 1:15에만 나온다.|②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종말론적 기사들은 초대교회 전통의 골격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며 살았다(고전 4:5). 바울의 아람어 간구는 독특하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주의 만찬에 대한 바울의 기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다(고전 11:26).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갑자기 밤에 도적과 같이 오실 것이다(살전 5:2). 그러나 그는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살후 1:10). 구원의 때는 온전하는 것이 오는 때이며, 부분적인 것은 폐해지는 것이다(고전 13:10).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임할 것이다(골 3:6; 엡 5:6). 그리스도께서 나타나기 전에 배교가 있고 죄의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살후 2:3).|③ 바울은 또한 계명(롬 7:9)과 믿음(갈 3:23)이 오는 것과 같은 의미심장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온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도로서 바울 자신은 복음의 축복을 가지고 온다(롬 15:29). 그리고 그는 고상한 말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고전 2:1), 복음을 전파하러 온다(고후 2:12). 그는 온유함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며(고전 4:21), 근심으로 나아가거나 징벌하려고 나아가기를 원치 않는다(참조: 고후 2:1; 고후 2:3). 그리고 그는 비록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만, 그가 나아갈 때에 낮춤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후 12:20-고후 12:21).||(d) 신약성경의 다른 기록들의 용법.|여기에서는 이 단어의 종말론적 용법이 지배적이다.|① 행 1:11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한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구원 시대의 옴(히 8:8), 기롱하는 자들이 옴(벧후 3:3), 성령의 도래는(행 19:6), 구원 시대가 이미 동텄음을 보여준다(참조: 행 2:17-행 2:18).|② 행 2:20에서 큰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을 언급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③ 히 8:8에서 구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언급한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10:37에서도 마찬가지다.|④ 행 19:6에서 구원의 시대가 이미 동텄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⑤ 벧후 3:3에서 마지막 날에 기롱하는 자들이 올 것을 말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J. Schneider; W. Mundle).
구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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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ask, 요청하다 reques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로타오는 호머(Homer) 이래로 나타나며,||(a) '묻다' ask, '문의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seek information.|(b) '요청하다' request, '요구하다' demand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에로타오는 70인역본에서 약 70회 나오며, 거의 샤알(7592: 묻다, 문의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기도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묻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요청이나 간구하다'는 의미도 나타낸다(창 24:47, 57; 출 3:13; 수 4:6; 삿 4:20; 삼하 5:19; 대상 14:10; 느 1:2; 욥 12:7; 욥 42:4; 렘 6:16 등).||#3. 신약성경의 용법.||에로타오는 신약성경에서 63회 나오며, 사복음서에서 51회, 사도행전에 6회, 바울 서신에 4회, 요한 서신에 2회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전 헬라어 용법에서처럼 사용되었다.||(a) 에로타오는 첫째로 '묻다 to ask', '질문하다 enquire', '정보를 구하다 to seek information'를 의미한다.|① 눅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②마 19:17에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관원에게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고 말씀하신다.|③ 예수님 자신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용할 수 있는 떡의 개수(막 8:5)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마 16:13)에 대해 물으신다.|·막 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하느냐".|④ 예수님은 그의 엑수시아($1849: 행할 힘, 권세)에 대해 그의 적대자들이 교활하게 질문했을 때, 그들에게 세례(침례) 요한의 엑수시아($1849)에 대해 역으로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라고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마 21:24; 병행구 눅 20:3). 마치 그들이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납득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를 파괴시킬 길과 방법을 찾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설명을 요구한다.|그러나 그가 역으로 하신 질문은 그들에게 애매한 대답을 피할 수 없도록 하여 그의 주장이 세례(침례) 요한의 그것이 했던 것보다도 더 그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⑤ 막 4:10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의 비유들의 의미를 묻는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⑥ 행 1:6에서 제자들은 또한 그에게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인지 묻는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⑦ 눅 9:45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관한 언급에 대해 [묻기도] 두려워 했다: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그러나 이 모든 절수들에서 에페로타오($1905)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 같은 뜻의 병행절들과 본문의 변형들은 그 단순형과 복합형이 마찬가지로 많이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요한복음에 중요한 신학적 용법이 나오는데 그 용법의 거의 반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한는 문제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요 16:23에 의하면 미래의 구원의 일부는 제자들이 그에게 어떤 것도 더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지각이 매우 특히 중심을 이루는 신학에서 질문은 단지 불완전을 함축할 수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근본적인 친교에 의해서이다.|따라서 요 16:30은 마음을 아시는 자이시며, 그래서 그 마음을 말하기 전에라도 그의 백성의 질문을 아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말한 것이다(참조: 요 2:25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는 깊어진 그들의 주님과의 지식과 이해의 친교 속에서 제자들에게 새로이 주어지는 주님의 수난의 길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설명한 것이다.|여기에 요한복음에 종종 나오는 바와 같이(요 16:23) 미래의 바로 가까이에 서있는 현재의 구원의 또 하나의 단계가 있다. 묻는 것은 물론 아들과 아버지와의 완전한 친교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필요성이 강조된다(요 16:5). 그러나 그것은 그것 자체 너머에 있는 목적지로 인도해야 한다.|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에로타오가 떠나심의 설교 외에는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요 9:2은 예외이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빈번하게 유대인 적대자들의 탐사하고 의심하는 논쟁적인 질문들에 대해 사용된다.||성구 참조|①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②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③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b) 어떤 종류의 요청에 대하여 '간청하다' to request, '요구하다' to demand를 의미한다.|행 1:6의 유일한 예외를 제외하면 복음서 밖에서는 이것이 이 단어의 주된 의미이다.|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요청(마 15:23; 눅 4:38)과 빌라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요청(요 19:31)을 다 나타낸다.|② 누가복음에서는 특히 식사 초대에 대해 사용된다(눅 7:36; 눅 11:37; 행 10:48; 행 18:20).|③ 많은 점에서 비슷한 데오마이($1189)처럼 에로토 세는 "제발 청컨대" please(눅 14:18 이하)의 약화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종종 주장이나 열정(프로슈코마이, $4336)을 암시하는 아이테오($154;Ⅰ, 191 이하)와 달리 에로타오는 겸손한 또는 예의 바른 참된 간청을 나타낸다.|④ 요한은 이 용어를 특히 하나님께 하는 '기도하다' to pray라는 의미를 지닌 청구에 대해 사용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뉘앙스의 차이에 주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요일 5:16의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홀로 아버지와 그러한 내적인 친교를 가지므로, 그 단어는 그에 대한 제자들의 간청(예를 들면, 요 4:31)과 그 분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청원이나 중보기도 모두에 대해 사용될 수 있다(요 16:23 상반절과 요 16:30에도 불구하고 요 16:26에도 역시).|(참조: H. Green; G. T. D. Angel).
에스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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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의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스데스(Homer 이래)는 헨뉘미(%418: 입히다)에서 유래했으며, '의복, 의류'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스데스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오며, '의복'을 의미한다.||(a) 에스데스는 눅 23:11에서 예수님의 수난 때 그에게 입힌 '옷'을 묘사한다: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b) 에스데스는 행 12:21에서 헤롯이 입은 왕'복'을 묘사한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c) 에스데스는 천적 존재들이 입은 '옷'을 묘사한다: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 24:4; 행 1:10; 행 10:30).||(d) 에스데스는 부한 자들의 아름다운 '옷'을 묘사한다(약 2:2; 약 2:3).||(e) 에스데스는 가난한 자들이 입는 더러운 '옷'을 묘사한다(약 2:2).|(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에스데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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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복, 의류.||#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스데시스(Hippocr. 이래)는 헨뉘미(%418: 입히다)에서 유래했으며, '의복, 의류'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스데시스는 70인역본 외경 마카베오서에만 2회 나온다(마카베오이서 3:33; 마카베오삼서 1:16).||#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스데시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24:4에 한번 나온다: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소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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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eat.||#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에스디오(호머 이래로)는 '먹고 마시다'를 의미한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육체적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Homer, Od, 2. 305등). 먹을 빵이 없는 것은 고통이다(BGV,Ⅲ, 949). 의인과 특별히 서기관들은 먹고 마시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M.EX.,16. 4). 먹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탐욕은 악이다(Xen., Mem.). 먹고 마시는 일에서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은 성례전적 식사 및 음식을 통하여 신과 교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력 혹은 심지어 신성 그 자체에 참여하려고 애써왔다. 초대 기독교의 문필가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불멸의 약이요 해독제인 하나의 빵을 뗌으로써 우리는 사망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라고 말하였다(Eph.20). 순전히 물리적인 차원에서, 음식에 관한 극단적인 두 입장은 식도락(참조: Homer, Od, 21, 69)과 금욕주의(참조: Apuleius, Metamorphoses.)이다.(J.Behm; G.Braumann)||#2. 70인역본의 용법||에스디오는 70인역본에서 80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아칼 어형과 그 파생어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히브리어들은 종합하면, '먹다, 소비하다, 삼켜버리다, 양식, 먹을 것, 연료, 고기, 열매'를 의미한다.||#3. 신약성경의 용법||에스디오는 신약성경에서 158회 나온다.||(a) 에스디오, 곧 먹고 마시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 그러나 신자는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마 6:31).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후에, 먹고 마시는 것은 생명의 표시이다(막 5:43; 참조: 눅 24:41이하).||(b) 에스디오는 유대인의 유전에 관한 언급에 나온다(마 15:20; 막 7:2; 막 7:3; 막 7:4; 막 7:5).||(c) 에스디오는 안식일 문제와 관련하여 나온다(눅 6:1; 눅 6:4).||(d) 에스디오는 예수님의 제자들 및 다른 사람들과의 회식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 제자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였는지를 전하고 있다(막 14:18). 이것은 친교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으며(눅 13:26), 누가의 신학에서는 진짜 목격자의 증언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행 10:41). 예수님은 바리새인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고(눅 7:36) 죄인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다(막 2:16). 하지만 원시 기독교회의 생활 양식은 결코 금욕적인 것이 아니었다(막 2:19). 그들의 생활상의 특색은 오히려 즐거운 공동 식사였다(행 2:46; 참조: 눅 15:23; 그러나 참조: 또 고전 11:20이하). 제의적인 금기 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갈 2:12; 막 7:1이하). 예수님과 회식(친교를 겸한)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잘못된 결론은 눅 13:26이하에서 반박된다(참조: 마 7:21이하; 마 25:41; 눅 6:46).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한다는 공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 2:16이하에서 자기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대답으로 맞섰다(참조: pino, 3⒜ 아래). 식탁에서의 친교는 친교 일반을 상징한다. 파루시아를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누가조차도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식사를 함께 하는 친교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눅 14:15; 눅 22:30). 막 6:34이하와 막 8:1이하의 음식 기사는 예수님의 능력과 위대성을 나타내는 → 이적 Miracle 기사의 일부이다(병행구 마 14:13-막 14:21; 눅 9:10-눅 9:17; 요 6:1-요 6:13; 그리고 마 15:32-마 15:39).||(e) 에스디오는 선교와 관련된 논의에 나온다. 선교사가 자기 생계의 지원을 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전 9:14; 눅 10:7; 눅 10:8). 일하라는 명령은 교회에 행한 권면 중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살후 3:10).||(f) 에스디오는 우상의 제물과 관련하여 나온다. 먹고 마시는 것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당파에서는 우상 앞에 놓았던 재물을 고의적으로 먹음으로써 자기들의 "힘"과 "자유"를 과시하려고 하였다(고전 10:14이하). 바울은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거나 아니면 우상이나 마귀에 속할 수 있을 뿐이지, 양편 모두에 속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둘은 서로 용납하지 않는다(고전 10:20이하). 또 그밖에 우상에게 바쳤다가 이제는 시장에 팔려고 내어 놓은 고기를 사서 먹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래도 좋다고 대답하지만(고전 19:25), 단 "약한"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다(고전 8:9이하; 고전 10:32; 참조: 롬 14장 이하).||(g) 에스디오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나온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심지어 → 주의 만찬 Lord's Supper조차도 위기에 처하였다. 사도가 교회에 없는 틈에, 이제는 더이상 그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는 어떤 불법 행위가 공동식사를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쉬미달스(W.Schmithals)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 내용으로 하는 식사는 충격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또 그것이 새롭게 발견된 그들의 힘에 비추어 볼 때에 무의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승되어온 성례전적 식사를 세속적인 식사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한다(Gnosticism in Corinth, 1971). 이 때문에 바울은 주님의 죽음을 이 의식의 핵심으로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전 11:26). 보른캄(G.Bornkamm)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폐기해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너무나도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식사를 먼저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좋은 것이 되었다고 시사한다(Early Christian Experience, 1969, 146ff.).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남용은 교회가 주의 만찬 바로 그것을 그리스도 → 몸 Body으로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참조: 고전 6:15; 고전 10:16; 고전 11:29; 고전 12:27). 그 이유는 고전 11:21(참조: 고전 5:11)에 묘사된 바와 같이 그 식사가 세속화(혹은 모독)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의 만찬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의미없는 식사로 대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토 이디온 데이프논(자기 자신의 식사)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와는 완전히 분리된 식사를 의미한다(참조: 토 이디온 소마: 그 자신의 몸[고전 6:18; 고전 7:43]). 아마 이디온(자기 자신의 own, 개인에게 속한 belonging to the individual, 자기를 위한 for oneself)이라는 용어는 고린도인들의 용어로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힘과 자유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참조: 고전 7:7). 좌우간 바울이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교회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참예해야 하는 주의 만찬이라는 공동의식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개인들의 사적인 식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h) 요한복음에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참된 → 떡 Bread(요 6:32)은 예수님 자신이다(요 6:35, 요 6:48). 그에게 나아오는 자, 즉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요 6:27), 보통의 음식은 영속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요 6:49이하). 요 6:51이하의 구절은 먹는 것에 대한 정의를 종래의 정의 이상으로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이전에 언급된 정의를 넘어서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먹는 것이 엄격히 말해서 예수님의 사륵스(살 flesh, 주의 만찬 the Lord's Supper)를 먹는 것으로서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i) 요한계시록에서 먹는 것(계 10:9; 참조: 겔 3:1이하)은 계시의 진정한 소유를 의미하며, 계시의 내용(참조: 계 12장 이하)은 "달콤하고"(승리를 가리킨다) 또 "씁쓸한"(고투를 암시한다)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j) 히 13:10에서 "제단"이 주의 만찬을 가리키는 것인지, 혹은 주의 만찬에 관한 비실재적인 교리를 가리키는 것인지(참조: O. Michel, Der Brief an die Hebraer, KEK 13, 196613), 아니면 단순히 비 기독교인의 제의적 식사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브루스(F.F.Bruce)는, 여기에서의 "제단"이 "제물"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이 "좋은 상"을 받았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좋은 음식"을 먹었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이것도 일종의 환유법(metanymy)이다(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399이하).|(참조: J.Behm; G.Braumann)
에슬리
!Esliv
에슬리 Esli.||에슬리는 눅 3:25의 족보에 한번 나오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조상이다: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에스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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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있다, 우리는 ~이다.||동사 에스멘은 기본 동사 에이미($1510: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하다, 나는 ~이다)의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이며, 신약성경에서 53회 사용되었다.
에소마이
e[somai
~하리라, 있으리라, 되리라 등.||동사 에소마이는 기본 동사 에이미($1510: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 나는 ~이다)의 미래형이며, 신약성경에서 193회 사용되었다.
에솝트론
e[soptron
거울 mirror.||#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에솝트론은 에이스($1519: ~에로, ~을 향하는, ~안으로)와 옵타노($3700: 나타나다)에서 유래했으며, '거울'을 의미한다.|고대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강철로 만들어졌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에솝트론은 70인역본에서 2회 나오며, '거울'(지혜서 7:26; 집회서 12:11)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에솝트론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거울'을 의미한다.||(a)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 당시의 거울은 반사하는 것이 희미하고 몽롱했을 것이다. 헬라나 로마의 거울은 둥글고 넓적한 엷은 금속판인데 일면은 마광을 냈고 다른 면은 그냥 두던가 혹은 약간의 장식이 있었다(D. S. Metz).||(b) 약 1: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이 묘사에서 분명한 요지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고 신속히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거울로 제 모습을 보고서도 자기가 보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자와 같은 것이다. 로스(Ross)는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은 인간 자신을 밝혀 준다. 즉 이는 그에게 그와 함께 세상에 있게 된 본성에 어떤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A. F. Harper).|(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저묾
eJspevra
저녁, 저녁 때.||#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헤스페라(Pind., Hdt. 이래)는 헤스페로스(%441: 저녁의, 저녁에)의 여성형이며, '저녁, 저녁 때'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헤스페라는 신약성경에서 누가의 기록에만 3회 나온다.||(a) 눅 24:29에서 헤스페라는 엠마오 도상에서 이상한 사람(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의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b) 행 28:23에서 바울의 강론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c) 행 4:3에서 사도들을 잡은 종교 지도자들고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