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고 내려가다
katavgw
이끌다, 인도하다, 데리고 가다, 데리고 돌아오다, 회복시키다.||동사 카타고(Homer 이래)는 카타($2596: 아래로)와 아고($71: 가져오다, 끌어오다, 데리고 오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카타고는 문자적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가지고 오다, 내리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산으로부터 도시로 목재를 운송하다"(Plato, Critias 118d), 어린 나무의 가지를 땅으로 구부리다(Euripides, Bacch. 1065),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애 2:10);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내리우매"(삼상 19:12), 그리고 매우 자주 가다 또는 누군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다를 뜻한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삿 16:21; 왕상 1:33), '가비니우스(Gabinius)는 애굽으로 내려갔다'(Josephus, War 1.175); 가이사랴로 내려가다(Ant.16.62; 참조: P. Tebt. 338, 14). 행 9:30의 예루살렘 형제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에서는 정확히 이런 의미이다.||(b) 카타고는 매우 자주 '데리고 돌아오다, 회복시키다'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추방된 자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다시 데리고 오거나 어떤 이의 권력을 회복시키다, 즉 '복직시키다, 도로 보내다, 돌아가다'(Xenophon, An. 3.4.36; Philo, Cherub. 3)와 '데리고 오다, 데리고 돌아오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호머 때로부터 해운상의 의미가 가장 일반적이다: '율리시스는 트로이를 향해 항해하였다'(Od. 19.186). '우리는 Geraestus에 도착했다'(3.178; 10.140); '그들이 (배를 타고) 곧장 나아갔다'. '출발한 준비가 되어있는 알렉산드리아의 배들'(Philo, Flace. 27); '상륙하는 유대인들'(Philo, To Gaius 129); '그가 가이사랴의 아우구스투스의 항구에 상륙하였다'(Josephus, War 1.613); '그는 Dicaearchia에 도착했다'(2.104; Ant. 14.378).|이것들은 행 27:3-"이튿날 시돈에 대니"; 행 28:12-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와 같은 의미이다(참조: 눅 5:11).||(c) 파피루스에서 그 의미는 거의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일반적으로 물에 의해 '운반하다, 수송하다'를 의미하며, 화물은 목재(SB 8242, 3), 포도주(6798, 28; P. Mich. 30 e, 2; PS 1123, 6, 21), 콩 등이지만 어떤 애굽인이 경찰장 앞에 출두할 때, 판사 앞에 출두 명령을 받은 남자나 여자도 그 대상이다(P. Ryl. 681; 2세기). 이것은 우리가 판사 앞에 오게 하기 위한 영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러므로 여기에서 카타고는 '출두하다' 즉 명령에 의해 판사나 법정 앞에 '출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보통 '바울을 공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다'로 번역되는 행 22:30; 행 23:15; 행 23:20; 행 23:28은 첫 번째 성구에서 정확히 호민관이 바울을 공회원들이 모이는 곳으로 호송하기 위해 안토니아 탑으로 '데리고 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세 경우에서 이 동사는 사법적인 출두를 의미한다.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행 23:15).||(d) 롬 10:6은 해석하기 어렵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첫 번째 말씀, "네 마음에 말하지 말라"는 신 8:17; 신 9:4에서 따온 말씀이고,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와 "누가 음부(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내려가겠느냐?"는 신 30:12-13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이 이중의 여행은 히브리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에도 알려진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얻기 어려운 것을 전달하실 수 있다해도,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나타내는 속담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구세주를 찾으려고 하늘로 올라가려고 생각하거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려고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내리려고 생각하는 불신자들이다. 사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들을 위해서는 구원이 이미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 그는 이미 부활하셨다. 구원은 바로 가까이에 있으며 긴 여행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고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바울은 어떻게 그렇게도 단순한 진리를 신 30:12-13의 그렇게 신비적인 해석에 의해 명확히 말할 수 있었는가? 그는 Neofiti 사본의 교정본에 따라 탈굼에 있는 이 성구를 해석함으로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Tg. Neof. fol. 432 b): '율법은 하늘에 있지 아니하므로 너희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올 선지자 모세와 같은 이가 있을까'하고 말해서도 안되며 ... 율법은 넓은 바다 아래에 있지도 아니하므로 너희는 '바다 깊은 곳에 내려가 그것을 우리에게 가지고 돌아와서 우리가 그것들을 행할 수 있게 그 계율을 이해하도록 도와 줄 선지자 요나와 같은 이가 있을까'하고 말해서도 안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의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가져다 놓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표상인 모세와 요나에 대해 탈굼이 이야기한 것을 예수님께 적용한다(마 12:40; 행 7:35-39).|(참조: Ceslas Spic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