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져 가다
luvw
풀다,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 취소하다, 폐지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뤼오(Homer 이래로)는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를 의미한다. 뤼오는 감옥으로부터 석방, 닫힌 것을 여는 것, 기초의 파괴, 차고를 푸는 것' 등에 대해 사용되었다. 호머 작품에서(Od. 5, 397; 13, 321) 이미 뤼오는 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구원'에 대해 사용되었다. 곧 곤경과 궁핍으로부터의 구원이란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죄와 연결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수많은 복합어형들이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발견되었다.||#2. 70인역본의 용법.||뤼오는 70인역본에서 32여회 나오며, 7개의 히브리어형들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뤼오는 파타(열다)의 칼, 나팔, 피엘형의 역어로(창 42:27; 욥 39:5; 시 102[101]:20; 사 5:27; 사 14:17; 사 58:6; 렘 40[47]:4), 나타르(자유롭게 하다, 노예들을 자유케 하다)의 히필형의 역어로(시 105[104]:20; 시 146[145]:7), 나샬(신을 벗다)의 역어로 사용된다(출 3:5; 수 5:15).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에서 뤼오는 셰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즉 '풀린'이란 의미를 지닌 과거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단 3:92[25], 70인역본과 Theod.). 그리고 비유적으로 셰라(매듭을 풀다, 즉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다)의 역어로 사용된다(단 5:12). 사 40:2, 즉 예루살렘이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메시지에서 그 단어는 라차(기뻐하다,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다)의 나팔형을 뜻하기도 한다. 뤼오는 또한 나사(들어 올리다, 제하다, 욥 때문에 죄를 제하시는 주님께 사용된 말이다, 욥 42:9), 그리고 세타르(하나님전의 파괴에 사용된 말이다, 스 5:12)의 역어로 한 번 나타난다.||#3. 신약성경의 용법.||뤼오는 신약성경에서 42회 나타난다.||(a) 뤼오는 묶인 또는 매인 어떤 인격체나 사물을 '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뤼오는 '신들메를 푸는 것'(막 1:7; 눅 3:16; 요 1:27; 행 13:15; 행 7:33; 참조: 출 3:5), '나귀새끼를 푸는 것'(마 21:2; 막 11:2, 막 11:4, 막 11:5; 눅 19:30이하; 눅 19:33), 그리고 '바울의 결박을 푸는 것'(행 22:30)에 대해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 11:44에서 이 단어는 나사로의 수의를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b) 뤼오는 '석방하다, 풀어주다, 자유롭게 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눅 13:16에서 뤼오는 십팔년 동안 사단에서 매인바 된 여인을 매임에서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불평하는 자들의 위선을 강조하는 말유희를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눅 13:15에 동일한 단어가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풀어내는 자들에 대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질문하셨다.|막 7:35에서 동일한 동사 뤼오가 말씀으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사용되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테일러(V. Taylor)는 마가의 이 말에는 치유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다이스만(A. Deissmann)은 호 데스모스 테스 글로세스(혀의 맺힌 것)는 이러한 언어 장애가 마귀의 영향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개념을 예증해 주는 전문적인 표현이었다고 주장한다.|뤼오는 행 2:24에서 "사망"으로부터 풀어지거나 자유로와진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여기서 뤼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사용되었다.|뤼오는 마 16:19에서 맨 것을 푸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매는 것과 푸는 권한이 베드로에게 부여되었고 마 18:18에서는 제자들과 교회 전반에 부여되었는데, 이 말들은 랍비식 용법과 대조된다(참조: 데오 = 아람어 야살[매다 bind]; 뤼오 = 아람어 셰라[풀다 loose]). 가르치는 자로서의 랍비들의 권위는 특정한 일들을 그들이 금하거나 허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나타내어 진다. 그들은 파문을 시킬 수 있었다. 즉 어떤 사람을 회당에서 제적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랍비 기록들에 비교적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결정들은 하늘에서, 즉 하나님과 함께 효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었다(SB I 738이하; 702이하). 분명히 이 권세는 어떤 유대적 제도들과도 아주 무관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그 자체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계 9:14-15에서 뤼오는 천사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이 일로 인해 무시무시한 대군이 놓임을 받게 되었다. 이 강은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경계, 곧 약속의 땅의 이상적인 한계를 나타낸다(창 15:18). 이 지역으로부터 구약성경 시대에 대 침략이 있었다.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북 왕국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 유다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계속 나타나는 악한 세상을 대표한다(참조: 계 17장 이하). '넷'이라는 숫자는 아마 '완전'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천사들은 특정한 무리로서 여기 외에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천사들은 자연력을 억제하는 계 7:1의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로 보기도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이곳에 나타난 천사들의 속성이 악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부적당한 것 같다. 이 천사들이 결박된 것을 보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자원해서 수행하는 그런 선한 천사로 볼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이 천사들이 놓임을 받은 것처럼 파괴력을 지닌 악한 세력들도 놓임을 받았다. 이 환상의 정확한 의미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해석하는 방법에 달려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환상들을 연속적인 것으로 다룬다. 이 경우에 이 환상은 어떤 특별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 병행되는 요한계시록 해석에 따르면 수많은 연속적인 환상들은 진행하는 역사의 다른 국면들과 관련된다. 이런 경우에 이 환상은 인류가 전쟁을 벌여 대파괴와 생명의 상실의 시기로 떨어지는 고난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이 때는 회개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계 9:20 이하). (참조: L. Morris; R. Earle; C. Brown).|한편 이 형벌에 대해 보다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이 형벌의 목적은 사람들로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계 9:21). 그러므로 전체 심판은, 이 세상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가하여지며, 또한 말하자면 내세에서 갖게 될 그들의 운명을 그들로 미리 맛보게 하는, 영적 재난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짓는다. 죄는 흔히 바로 뒤에 불안과 고난을 초래한다. 평안과 만족이 혹시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독침이 유력한 것은 아마도 그 효능이 흔히 일반 대중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자의 공포, 도둑의 수치, 부정한 자의 굴욕과 신체적 고난, 주정뱅이의 섬망증은 아주 실제적인 고통들이다. 그러한 고통들의 수는 "이만만"(이억)으로 묘사될 만큼 실로 매우 많다(계 9:16). 그것들은 인간들의 더 많은 부분이 아닌 일부분을 멸망시킨다(계 9:15, "삼분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들 대다수는 회개에 이르지 아니한다! 그러한 형벌은, 계 9:17과 계 9:18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예시된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지옥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이것은 다른 심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역사하는 기간은 세상의 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에 미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왔다. 그들은 "유브라데"로부터 일어난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강을 그들의 원수들이 생겨나는 자연적인 근원으로 간주했다고 많은 저술가들이 지적한다(사 7:20, 사 8:7, 렘 46:10을 보라). 실로, 유브라데는 유대 나라의 국경으로 간주되었다(창 15:18; 신 1:7; 신 11:24; 수 1:4; 삼하 8:3; 대상 5:9). 따라서, 유브라데로부터 나온 자들은 흔히 원수들이었다. 이 표현은 전체적인 묘사를 채우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뒤 따르는 형벌들은 그것들의 자연적인 근원, 즉 인간들의 죄들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 수도 있다(참조: 계 16:12, 거기에서 유브라데는 확실히 악의를 가진 군대들이 나오는 근원으로 언급되고 있다). (A. Plummer).|계 20:3, 계 20:7에서 뤼오는 천년왕국과 관련하여 사단의 결박과 풀어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3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c) 뤼오는 수많은 구절들에서 '깨뜨리다, 해체(해산)하다, 파괴(멸망)시키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계 5:2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의해 개막된 역사의 두루마리는 아무도 펴거나 뗄만한 자가 없는 일곱인으로 봉하여져 있다. 그러나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5).|행 27:41에서 뤼오는 바울이 로마로 결박되어 타고 가는 배의 고물이 깨어지는 것, 행 13:43에서 뤼오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의 집회가 파하는 것, 요 2:19와 엡 2:14에서 뤼오는 허물거나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요 2:19에서 뤼오는 → 성전과 관련되어 두 번 사용된다. 성전 정화에 대한 요한의 기록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나타내는 표적을 구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걸렸다는 유대인들의 말을 주석함에 있어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성전인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지적한다(요 2:21). 제자들은 이 사실을 부활 후에 이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제자들은 차례로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 2:22).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앞에서 예수님이 재판 받으실 때에 거짓 증인들은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에고 카탈뤼소 톤 나온 투톤 톤 케이로포이에톤 카이 디아 트리온 헤메론 알론 아케이로포이에톤 오이코도메소라고 주장했다(막 14:58; 참조: 단축된 병행구 마 26:61 여기에도 카탈뤼소가 나온다). 성전 그 자체의 무너짐은 막 13:2 병행구 마 24:2; 눅 21:6에 예언되어 있다. 도드(Dodd)는 요한이 사용한 조건적인 의미를 지닌 명령형 동사(즉 "만일 너희가 헌다면… ")와 비문어적인 엔 트리신 헤메라이스라는 구절은 원시 셈인들의 강화 형태를 시사한다고 제안한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3, 302). 불트만(Bultmann)은 에게이로가 '건물을 세움'에 대해 사용되는 것처럼 뤼오와 카탈뤼오는 '건물의 파괴'에 대해 자주 사용되었다(마 27:40; 막 13:2; 막 14:58; 막 15:29; 거짓 증인들과 십자가 사건 때의 방관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행 6:14)고 지적하였다(The Gospel of John, 1971, 125). 그는 이곳에는 단순한 조건절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문체인 반어적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참조: 암 4:4; 사 8:9이하). 곧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성전을 대신하였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강화는 첫 번째 성전의 멸망과 마찬가지로(왕하 25:9, 왕하 25:13-17) 이 성전의 멸망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유대인들의 불순종에 있음을 암시해 준다. 성전을 헐겠다고 위협했다고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이 바로 거짓 증인들이었음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오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의 주요 골자이다(참조: 요 2:20; 요 3:3 이하; 요 4:10 이하, 요 4:32 이하; 요 6:32 이하; 요 7:34 이하; 요 14:4 이하, 요 14:7 이하, 요 14:22 이하; 요 16:17 이하).|엡 2:14에서는 약간 다른 점을 나타내기 위해 뤼오가 사용되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메소토이콘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단지 이 구절에만 나오며 일반 헬라어에서도 드물게 사용되었고 70인역본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단어의 뜻은 '칸막이 또는 장벽'으로 분명히 성전의 '돌벽'을 지칭한다. 이 돌벽에는 푯말들이 붙어 있는데 그 푯말들 중, "어떤 것에는 헬라어로 또한 어떤 것에는 로마어로 "이 성소 안에 이방인이 들어와서는 안되고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함"이라는 정결법이 선포되어 있었다(Josephus, War, 5,5[194]). 바울이 에베소인 드로비모를 이 벽을 넘어 들어오게 하였다는 거짓 죄목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고소를 받아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행 21:29-30). 엡 2장의 문장은 분명히 소 아시아의 이방인들 중에서 유대인들의 습관에 대한 어떤 지식을 전제로 삼고 있으며 이 장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이제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는(엡 2:21) 단언에서 절정을 이룬다. 엡 2:14은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 신자나 이방인 신자 간에 더 이상 장벽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절들에 나온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이하). 이방인에 대해 보호하는 벽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사상은 아리스테아스(Aristeas) 139에 나타나 있다; "이제 현명한 율법 부여자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하나하나를 잘 관찰하여 견고한 방책과 철벽으로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들이 다른 이방인과 결코 섞이지 않고 심신을 정결하게 유지하며 모든 헛된 생각에서 해방되어온 피조물을 지배하는 유일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자신이 성전을 헐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는 복음서들과는 달리, 엡 2:14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이 동사의 주어이시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의 장벽 훼파는 예수님의 화해적 죽으심의 결과이다.|벧후 3:10-11에 뤼오는 마지막 대화재를 묘사하고 있다. 켈리(Kelly)는 벧후 3:11의 현재 수동태 분사(이것을 그는 "허물어지고 있다"로 번역한다; 한글개역 "풀어지고")가 "문맥에서 암시되는 미래적 세력을 갖고 있거나 또는 성경 기자가 의도적으로 이 용해의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암시함으로써 자신의 소환의 긴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이라(더욱 개연성이 있음)"고 제안하였다(Op. cit., 366).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d) 뤼오는 '취소(무효로)하다, 권위를 박탈하다, 없애다, 폐(지)하다, 타파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가르침이나 행동에 관하여 사용되었다.|마 5:19에서 예수님은 이 계명들 중의 가장 작은 것이라도 뤼세(뤼오의 과거 가정 능동태)하는 모든 자에게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뤼오를 KJV, NRSV, NIV, 공동, 새 번역은 '부수거나 어긴다(breaks)는 의미로, NASB는 '취소나 폐지한다'(annuls)는 의미로 번역했다. 어느 의미를 취해도 좋은 것이다.|마 5:20에서는 이것이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 결부되며 산상수훈은 이 계명들이 어떻게 버려졌는가 하는 실례들을 나타내는 데로 이어진다. 곧 살인과 분노요(마 5:21이하; 참조: 출 20:13; 신 5:17; 신 16:8); 간음과 음행이요(마 5:27이하; 참조: 출 20:14; 신 5:18); 맹세요(마 5:33-37; 참조: 레 19:12; 민 30:3; 신 23:21; 마 23:16-22; 약 5:12); 정의와 복수요(마 5:38-42; 참조: 출 21:24; 레 24:20; 신 19:21; 잠 24:29; 눅 6:29 이하; 롬 12:17; 벧전 2:19; 벧전 3:9); 이웃 사랑인 것이다(마 5:43이하; 참조: 레 19:18; 잠 25:21이하; 눅 6:27이하; 32-32-구약성경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타르굼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유대교적 종파주의자들의 표적일 것이다. M. Smith; W. D. Davies).|이 모든 점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버리기는커녕 율법을 인정하시며 또한 율법을 사람의 외적 행동에 적용하실 뿐만 아니라 내적 마음가짐에까지 적용하신다. 마태복음의 다른 곳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또한 마 7:12; 마 11:13; 마 22:40을 참조하라. 위선으로 율법을 우롱하는 자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서는 마 15:1-11; 마 23:1-39을 참조하라.|요 5:18에서 뤼오는→안식일 Sabbath을 범하는 것 및 타파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 옆에서 삼십 팔년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것이 그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론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답변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한 아담의 죄악 된 시도 같이 들렸다(창 3:5이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특별하게는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행하는 이 치유의 사건 속에서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대답을 하셨다.|요 7:23에서 뤼오는 율법을 폐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 하느냐." 어느 정도의 아픔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남성의 성기에 행해지는 할례 의식과 고통을 제거하는 전신의 치료 사이에는 풍자적인 점이 있다. 예수님의 태도에는 치유하시는데 있어서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똑같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요 10:35 이하에서는 이 문제가 성경으로까지 확대된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신들"에 대한 말씀은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라는 시 82(81):6을 인용문으로 채택한 앞 절에 대한 언급이다. 이 구절은 마소라 본문과 70인역본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주제로 하여 상당히 논의해 왔다(참조: L. Morris).|고전 7:27에서 뤼오와 단 하나의 명사 뤼시스가 이혼과 관련되어 나온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다우베(D. Daub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대적인 용법에 따라, 남편과 "헤어진" 아내에 대해 코리제스다이를 사용하고 또한 아내를 "버린"남편에 대해 아피에나이(aphienai)를 사용하는 바울의 용법과 비교해 볼 때(참조: 고전 7:10이하), 뤼시스(석방)는 이혼을 나타내는 다소 비전문적인 단어이다(New Testament and Rabbinic Judaism, 1956, 363). 아마 바울은 정식 이혼 뿐만 아니라 별거와 또한 배우자의 죽음까지도 포괄하는 보다 더 일반적인 술어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폴뤼오는 이혼에 대해 사용되었다(마 5:31이하 병행구; 눅 16:18; 마 19:3-9 병행구 막 10:2-12). 바렛(C. K. Barret)은 '고전 7:27에는 기존 상황 속에서 인간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해야 하는 엄격한 규정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충고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The First Epistle to Corinthians, BNTC, 1968, 175). 한편 이 규정은 헤어지지 말고 결혼 안에서 화해를 구하라는 주님의 훈령과, 또한 구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고전 7:10이하). 그리고 고전 7장에 나오는 결혼 문제 전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분명히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조건지워진 것인데 반해(참조: 고전 7:29이하) 바울이 재림을 제외하고는 수시로 병경되는 상황들을 상상하였는가 하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내에게서 놓인(렐뤼사이 아포 귀나이코스)"(고전 7:27) 자들이 결혼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고전 7:28). 또한 이것은 고전 7:2-7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고려해 볼 때 정말로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C. Brown; F. Buchsel; J. H. Th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