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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해설
층대
ajnabaqmov"
층계, 계단.||#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나바드모스(Hdt. 이래)는 아나바이노($305: 올라가다)에서 유래했으며,||(a) '상승' an ascent.|(b) '올라가는 수단, 계단의 층계, 계단'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나바드모스는 신약성경에서 2회, 행 21:35; 행 21:40에 나온다.||(a) 행 21:35에서 바울은 막사로 올라가는 층계에서 백성의 폭력적인 위험이 있어 군사들이 그를 들고 갔다.||(b) 행 21:40에서 바울은 층대에서 연설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나다
ajnabaivnw
올라가다, 오르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바이노(Homer 이래)는 아나($303)와 바이노(%227: 걷다, 가다)에서 유래했다.||(a) 이 단어는 '올라가다, 오르다'를 의미하며, 주로 공간적 의미로, '산에 올라 가다, 단에 오르다, 이층으로 올라가다'를 의미한다.|만일 목표 지점이 거룩한 곳일 경우에 '올라간다'는 것은 제사 의식의 행위까지 포함한다.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간다. 신비가는 신들의 세계, 하늘 또는 올림푸스로 올라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는다(Mithraic Liturgy 10, 22).||(b) 이 단어는 '자라나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나바이노는 70인역본에서 약 600회 이상 나오며, 거의 대부분 알라(올라가다, 오르다, 다가오다, ~에 도달하다)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하나님의 산, 성소,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출 34:4; 삼상 1:3; 왕하 19:13), 창 28:12에서 사닥다리에 '오르는 것'을 나타낸다. 창 41:7에서 이삭이 '나오는 것'을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나바이노는 신약성경에서 82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때때로 아나바이노는 독립 구문에(즉 움직임의 방향에 대한 지적 없이) 주로 식물, 동물, 무생물에 대해 사용되었다.|① 식물이 '자라'는 것에 대해(막 4:7 이하; 마 13:7).|② 고기가 '오르는 것'에 대해,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 17:27).|③ 연기 같은 것이 '올라가는 것'에 대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계 14:11),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계 19:3).||(b) 아나바이노는 움직임의 방향에 대한 지적에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사용되었으며, 주로 에이스($1519), 그리고 에피($1909)로 표현되었다.|① 에이스와 함께(마 5:1; 막 3:18; 눅 9:28 등 총 39회).|② 에피와 함께(눅 5:19; 행 10:9; 계 20:9 등 총 5회).||(c) 장소의 부사는 방향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① 요 6: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②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③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④ 계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d) 아나바이노 에피 카르디안은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다'를 의미한다.|① 행 7:23,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② 고전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e) 롬 10:16에서 바울은 신 30:12의 사상을 취한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된 원리가 믿음에 바탕을 둔 의(righteousness)에 적용된다.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땅으로 내려오기 위해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다시 모시고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이러한 표현에 대해서는 잠 24:27=30:4 70인역본; Bar 3:29; "음부에"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는 시 106[107]:26; 138[139]:8; 암 9:2; 암 9:4; 사 14:13; 사 14:15을 보라).||(f) 행 2:34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높이심"을 "하늘에 올라가는 것"으로 설명하여 메시야 왕의 취임을 그의 직책으로(시 110:1), 공간적인 도해로 바꾸어 표현한다(Lohfink 229에 따르면, 누가는 여기에서 높이심을 초대 교회의 전도로 구체화시키는데, 그 높이심을 사실에 근거를 두고 부활과 구별되는 올라가심과 관련시킴으로 그렇게 한다).||(g) 행 10:4에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억하신다"고 할 때에 구약성경과 유대적 표현을 인식할 수 있다(참조: 욥 20:6; [70인역본]; 마카베오삼서 5:9).||(h) 엡 4:8에서 기자는 시 67[68]:19을 그리스도론적으로 자유로이 사용한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위로 올라가시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이 되었다. 엡 4:9 이하의 삽입 구절에서의 요점은 "모든 하늘들의 위에" 그래서 모든 중간의 존재 위에 예수님께서 "오르심"은 당연히 먼저 그의 "땅 아랫 곳"으로 내려오심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i) 요 3:13의 전통적인 진술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인자" 외에 누군가가 하늘에 올라간 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참조: 잠 30:4, 70인역본; 지혜에 대한 언급과 함께 Bar 3:29).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 이 땅의 인자만이 하늘의 지식을 가지고 올 수 있다. 그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생명의 떡처럼 그의 "하늘에서 내려 오심"보다 더 크게 거슬리는 것이다(요 6:62).||(j) 요 1:51에 따르면 천사들이 "그의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볼 때에, 그가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심이 증명된다(참조: 창 28:12; 창 28:17,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참조: Fritsch]).||(k)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라 하신대".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는 것"은 그의 선물을 주시는 길을 준비하시는 것이다(평강, 기쁨, 성령, 용서, 요 20:19-23; 참조, 엡 4:8 이하).||(l) 계 4:1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명령은 보는 자로 하여금 하늘의 환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계 11:3의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라면(참조: E. Lohse, Offenbarung [NTD] ad loc.), 계 11:12절에서 하늘로 올리워지는 그들의 존재는 엘리야의 경우에는 구약으로(왕하 2:11; 집회서 48:9), 모세의 경우에는 유대의 전통으로(참조: The Assumption of Moses) 거슬러 올라간다.|(참조: J. Beuler)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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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하다.||#1.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발로(Homer 이래)는 아나($303)와 발로($906: 던지다)에서 유래했으며,||(a) 던지다, 던지기를 하다,|(b) 뒤로 돌리다, 연기하다, 미루다,|(c) 법정적 의미에서 '어떤 자를 지체시키다', 즉 어떤 자의 소송을 듣고 판결하는 것을 연기하는 것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나발로는 신약성경에서 행 24:22에 한번 나온다: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가로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나비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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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 올리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비바조(Hdt. 이래)는 '올라가게 하다, 끌어 올리다'를 의미하며, 아나바이노($305: 올라가다)의 어원이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나비바조는 신약성경에서 마 13:48에 한번 나오며 '끌어 올리다'를 의미한다: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들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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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다 look up, 보다 look at, 다시보다 see again.||#1.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블레포(Hdt. 이래)는 아나($303: ∼위를 향햐여, 위로, 다시)와 블레포($991: 보다)에서 유래했으며,|(a) '위로 보다, 쳐다보다',|(b) (잃었던) '시력을 회복하다, 다시보다'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아나블레포는 70인역본에서 약 35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나사(∼들어올리다, 들다, 바라보다)를 번역했고,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나블레포는 25회 나오며,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a) 아나블레포는 '위로 쳐다보다'를 의미한다(예: 막 16:4; 눅 19:5; 눅 21:1).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줄 떡을 늘리기 위해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하늘을 올려 쳐다 보셨다(마 14:19; 막 6:41; 눅 9:16). 또한 예수님께서 귀먹은 자를 치유하실 때, 하늘을 올려다 보셨다(막 7:34). 예수께로부터 두 번에 걸친 안수를 받고 시력을 회복한 자가 첫 번째 안수를 받고 난 후에 그를 우러러 보았다(막 8:24).||(b) 아나블레포는 '다시 시력을 회복하다'를 의미한다. 이 의미는 예수님께서 그의 메시야적 활동들에 대하여 요한에게 준 메시지에 나타난다(마 11:5; 눅 7:22; 막 10:51, 막 10:52; 눅 18:41). 행 9:12, 행 9:17, 행 9:18에서 이 단어는 다소(Tarsus) 사람 사울(Saul)의 시력의 회복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요 9:11, 요 9:15, 요 9:18은 아나블레포를 사용하여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의 치유를 묘사하고 있다.|(참조: J.H.Thayer; W.L.Liefeld).
다시 보게 함
ajnavbleyi"
시력 회복.||#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나블렙시스(Aristot. 등)는 아나블레포($308: 쳐다보다, 시력을 되찾다)에서 유래했으며, '시력의 회복'을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나블렙시스는 신약성경에서 눅 4:18에 한번 나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나보아오
ajnaboavw
크게 소리지르다, 외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보아오(Aeschyl., Hdt. 이래)는 아나($303: 위로, 다시)와 보아오($994)에서 유래했으며, '크게 소리지르다, 외치다'를 의미한다.||#2. 신약성경의 용법||아나보아오는 신약성경에서 한 번 마 27:46에서 예수님의 고뇌의 외침을 표현한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이 단어는 막 15:8; 눅 9:38의 다른 읽기에 나타난다.|(참조: J.H.Thayer).
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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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dela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나볼레(Hdt. 이래)는 아나발로($306: 지체하다, 연기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연기' delay(Hdt., Dit., Thu. 등), 법적 용어로 '연기, 유예' postponement(PAmh.)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명사 아나볼레는 70인역본에서 3회 나오며, 대상 19:4에서 미프사아(4667: 궁둥이)의 역어로, 느 5:13에서 호첸(2684: 가슴)의 역어로, 겔 5:3에서 카나프(3671: 날개, 말단)의 역어로 사용되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나볼레는 신약성경에서 행 25:17에 한번 나오며, '연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 왔으나".|(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아나가이온
ajnavgaion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명사 아나가이온(varro, De Lingua Lat.; PPar. 등)은 아나($303: 위로)와 가이아(%248: 땅)에서 유래했으며, 본래는 '땅위의 어떤 것'을 의미하며, 그 다음에 '집 위 윗부분에 있는 방', 즉 '다락방'을 의미하게 되었다.||#2. 신약성경의 용법.||명사 아나가이온은 신약성경에서 2회 나오며, 막 14:15(병행구 눅 22:12)에만 사용되었다: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고하다
ajnaggevllw
보고하다 report, 선포하다 proclaim.||#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낭겔로(Aeschyl., Thy. 이래)는 아나($303)와 앙겔로(%42: 알리다)에서 유래했으며, '말을 상기시키다, 알리다, 고지하다'를 의미한다. 코이네 헬라어에서 아낭겔로와 아팡겔로($518)가 고전 헬라어 앙겔로(%42)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의미의 어조는 물론 다양한 복합어들 속에서 구별될 수 있다. 따라서 아팡겔로는 아낭겔로보다 더욱 공무적인 성격을 지닌 단어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 두 단어는 단순히 '말하다' simply relate, '이야기(말)하다' speak란 뜻을 지닌 것으로 언급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신의 축제와 영예로운 신의 통치자들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 성례적인 의미를 지닌다.||#2. 70인역본의 용법||아낭겔로는 70인역본에서 약 280회 나오며, 주로 나가드의 역어로 사용되었으며, '보고(도)하다, 알리다'(창 3:11; 창 9:22), '선포하다'(시 19:2; 사 42:9), '지시하다, 가르치다'(신 24:8)라는 의미를 나타낸다.||#3. 신약성경의 용법||아낭겔로는 신약성경에서 14회 나오며, 요한복음에 6회, 사도행전에 5회 사용되었다.||(a) 아낭겔로는 단순히 '말하다, 이야기하다'을 의미한다.|요 5:15에서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행 16:38에서도 마찬가지다.|막 5:14에서는 이적 기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b) 아낭겔로는 '선포하다'를 의미한다. 이 선포란 하나님의 행위 곧 그의 구원하시려는 의지를 알리는 것이다. 이 선포는 의미상 신약성경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복음을) '선포하다'라는 뜻의 유앙겔리조마이($2097)와 거의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예는 요일 1:5에 나온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여기에서 아낭겔로는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앙겔리아에 대한 동사이다. 요한은 4:25에서 "그(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16:13에서 "그가(성령)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리라", 요 16:14에서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요한이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에 자주 사용된 용어 유앙겔리조마이와 케륏소를 사용하지 않는(요한문서에는 전혀 언급하지 않음) 것은 신학적으로 주목할만 하다. 이는 그러한 단어들은 아낭겔로(나 아팡겔로)와 달리, 구원시대의 극적이며 동적인 선포, 곧 다가올 사건에 대한 예고를 상당히 강조하고 있어서, 이 사상은 요한의 실현된 종말론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기꺼이 마르튀레오(증거하다)를 사용한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과 목격했거나 경험한 사실이 증거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요한은 이 증거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선포나 알린다'를 뜻하는 용어 아낭겔로를 사용한 것이다.||(c) 아낭겔로는 행 19:18에서 죄의 '고백'을 뜻하는 아주 드문 의미로 사용되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d) 아낭겔로는 행 14:27; 행 15:4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고하거나 자세히 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후 7:7에서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롬 15:21; 벧전 1:12; 행 20:20; 행 20:27에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참조: Walter Bauer; J.Schniewind; U.Becker; D.Muller).
거듭나게 하다
ajnagennavw
다시(거듭)나게 하다, 다시(거듭)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나겐나오(Philod., Herm. 등)는 아나($303: 위로[향하여], 다시)와 겐나오($1080: 낳다)에서 유래했으며, '다시 생산하다, 다시 낳다, 다시 나다'를 의미한다.|이 동사는 대개 신비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신약성경보다 후기에 단 한 구절에서만 살루스티우스(Sallut. De Deis, 주후 4세기)가 입문자들을 호스페르 아나겐노메논(거듭나다)이라고 말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헬라 시대에서 레나투스(renatus: 라틴어, 거듭난 자)에 대한 개념은 미드라스(Mithras)와 이시스(Isis)의 제사 의식에 나온다(참조: F. Buchsel, TDNT).|필로는 금욕주의자의 회춘을 가리켜 아나겐네시스를 사용하는 것 외에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이 동사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와그너(G. Wagner)는 '바울의 중생에 대한 개념이 신비 종교들과 같으므로 바울이 신비 종교들에 의존한다는 주장은 오해이다. 이 개념은 신비 종교들에서 거의 사용되지 아니하며, B.C. 1세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 술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 말한다.|형용사 아나겐나오는 70인역본에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나겐나오는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전서에 두번 분사형으로 나온다.||(a) 벧전 1:3에서 아나겐나오는 '거듭나다'를 의미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아나겐나오는 벧전 1:23에도 나타난다. 그 의미는 주님께서 요 3:3에서 암시한 바와 같으며, 거기에 게네데나이 아노덴(다시 [위로] 나다)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오로지 우리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사역으로 인해 지위와 전망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것을 나타낸다(참조: 벧전 2:24; 벧전 3:18).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성되었다(참조: 벧전 3:21).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A. M. Stibbs).||(b) 벧전 1:23에서도 아나겐나오 '거듭나다'를 의미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신자들은 전도되고 있었던 복음,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거듭나게 되었다.|(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A. Ringwald; F. Buchsel).
외우다
ajnaginwvskw
알다, 인식하다, 읽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아나기노스코(Homer 이래)는 아나($303: 위로, …사이에, 반복해서, 다시 한번)와 기그노스코($1097: 인식하다, 알다)에서 파생된 합성어이다.||(a) 이 단어는 본래 '…사이를 구별하다, 인식하다, 정확하게 알다, 다시 알다 know again, 인정하다 acknowledge'를 의미했으나,||(b) 그 후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읽다 read, 소리내어 읽다 read aloud'라는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이 양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세계에서는 오직 자기 힘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게 큰 소리로 읽었기 때문이다. 법적 연설들에서 아나기노스코는 종종 법정의 서기의 칭호로 사용되었다. 그의 의무는 재판에서 기록들을 읽는 것이었다.||#2. 구약 및 70인역본의 용법.||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계명들과 법적인 요구들을 제의 중에 낭독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의 대절기들에 행해진 초기의 관례였다(출 24:7; 참조: 수 24:25). 아마도 이 때에 이스라엘 역사 중의 주요한 사건들이 열거되었거나(출 15:1-18; 삿 5장) 또는 심지어 극적으로 재현되기까지 하였던것 같다(참조: 시 68:24-27[=25-28]). 예레미야는 신탁을 낭독하는 것으로 그가 허락받지 못한 예언적 설교를 대신하였다(렘 36:5 이하). 에스라의 율법 낭독은 레위인의 설명으로 보충되어야 했다(느 8:8).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이렇게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신 17:18 이하; 참조: 사 30:8; 시 1:2).|후기 유대교에서 율법 낭독은 모든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참조,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회당 비문: 회당은 율법의 낭독을 위한 것이다). 성경을 낭독하는 것은 모든 회중들의 권리였으나(눅 4:16) 처음부터 적어도 토라의 경우에 성구집과 관련된 것이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과 모든 절기들. 월삭, 금식 기간,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오경을 읽었고, 안식일, 절기, 금식기간에는 예언서들을 읽었다.||#3. 신약성경의 용법.||신약성경에서 아나기노스코는 '읽다 read, 큰 소리로 읽다 read aloud'라는 뜻으로만 발견되며, 32회 나오는데 그 중 공관복음서에 14회, 사도행전에 7회, 바울 서신들에 9회, 그리고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1회씩 나온다.|아나그노시스(낭독 reading)는 3회 발견된다. 이 단어는 대체로 구약성경의 낭독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와 행 8:28과 갈 4:21 다른 읽기에서도 항상 그러하다. 눅 4:16; 행 13:15; 행 13:27; 행 15:21; 고후 3:14- 이하에서 이 단어는 회당 예배에서의 낭독을 언급한다.|이 단어는 편지를 읽는 것 (행 15:31; 고후 1:13; 고후 3:2)에 대해서도 사용되는데 특히 예배에서 편지를 읽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살전 5:27; 골 4:16). 예수님은 성서를 열심으로 읽는 것이 신학적 토의, 곧 실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위한 필요 조건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너희가 읽지 않았느냐"(막 2:25; 막 12:10)라고 비난하신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유대교의 입장에 동의하셨다. 그러나 바울이 고후 3:14 이하에서 구약성경을 설명하면서 주장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의 마음은 가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예수께로 개종하지 않고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16절) 따라서 성령이 없이는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7절). 성령의 조명이 없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전 2:14). 성서연구는 반드시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된다 (참조: 요5:39).|신약의 편지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예배에서 읽도록 의도된 것이었다(살전 5:27이 편지들은 이것을 받은 지역교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골 4:16). 예레미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편지의 낭독은 후기의 모든 설교의 기초가 되는 사도의 설교를 대신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서신 낭독은 예배시 구약성경 낭독과 똑같은 위치에 섰다.|(참조: R. Bultmann; J. Blunck).
강권하다
ajnagkavzw
억지로나 강제로 시키다, 강제(요)하다.||#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동사 아낭카조(Soph. 이래)는 아낭케($318: 강요, 강제, 압박)에서 유래했으며,||(a) '억지로나 강제로 ~하게 하다, 강제(요)하다'|(b) '간곡하게 청하다, 권하다, 재촉하다, 몰아내다'(POxy.)를 의미한다.||#2. 70인역본의 용법.||동사 아낭카조는 70인역본에서 21회 나오며, 잠 6:7에서 한번 쇼테르(관리, 관원)의 역어로 사용되어 '간역자'를 나타낸다. 그밖에는 해당 히브리어 없이 마카베오서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강요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마카베오일서 2:25; 마카베오이서 6:1이하).||#3. 신약성경의 용법.||동사 아낭카조는 신약성경에서 9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a) 아낭카조는 '강제로 ~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행 26: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② 갈 2: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③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④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⑤ 행 28: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⑥ 고후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b) 아낭카조는 '간곡하게 청하다, 권하다, 재촉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① 마 14:22(병행구 막 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가게 하시고".|② 눅 14: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
마땅히
ajnagkai'o"
필요한 necessary.||#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형용사 아낭카이오스(Homer 이래)는 아낭케($318: 강요, 강제, 압박)에서 유래했으며, '필요한' necessary, '강제적인, 강요하는 것,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W. Grundmann, TDNT).||#2. 70인역본의 용법.||형용사 아낭카이오스는 70인역본에서 6회 나오며, 지혜서 16:3에서 식욕에 대해 사용되었으며, 마카베오서에서 '필요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마카베오이서 4:23; 9:21; 마카베오사서 1:2).||#3. 신약성경의 용법.||형용사 아낭카이오스는 신약성경에서 8회 나오며, 주로 '필요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a) 행 10:24에서 아낭카이오스는 태생이나 우정의 끈에 의해 관계되어 있는 의미에서 '가까운' 친구를 나타낸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b) 고전 12:22에서 아낭카이오스는 몸의 '필요불가결한' 지체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딛 3:14에서도 마찬가지다.||(c) 의무의 법에 따라 마땅히 행해져야만 하는 것, 일의 조건에 의해 요구되는 것을 의미한다: 빌 1:24; 행 13:46; 히 8:3; 빌 2:25; 고후 9:5.|(참조: J. H. Thayer).
부득이 함으로
ajnagkastw'"
강제로, 억지로 by compulsion.||#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부사 아낭카스토스(Hdt. 이래; Ps-Pla. 등)는 아낭카조($315: 강요하다, 억지로...시키다)에서 유래했으며, '강제로, 억지로'를 의미한다.|아낭카스토스는 70인역본에 나오지 않는다.||#2. 신약성경의 용법.||부사 아낭카스토스는 신약성경에서 벧전 5:2에 한번 나오며, '억지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교회의 지도권은 그 당시에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지도자의 생활을 고귀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교회의 지도자는 그의 일을 마치, 짐이나 또는 강요에 못이겨 떠 맡은 의무로 여기는 것과 같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임명하였고 기꺼이 순종하도록 불러낸 사역이었다(R. S. Nicholson).|(참조: Walter Bauer; J. H. Thayer).